서울강의20231116a 요한일서 2장 15절(정욕의 세상)-이 근호 목사
나와 너의 관계가 되어버리면 이 나와 너의 관계를 세상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너와 나의 관계라는 게 없어요. 없어서 ‘나-너’라고 하지 않고 이걸 합쳐서 ‘세상’이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성경에서.
성경에서는 너와 나의 관계를 세상이라 해서 이 세상을 제거합니다. 제거하게 되면 너도 제거되고 뭐도 제거돼요? 나도 제거되고. 세 가지 제거돼요. 첫째는 너가 제거되죠. 두 번째는 나가 제거되죠. 세 번째는 이 관계도 같이 제거되는 거예요.
그러면 아버지를 만났다. 아버지를 만나는 건, 그리스도 안에서 아버지를 만나는 게 아니고 세상을 만나는 거예요. 세상을. 그게 오늘 할 요한일서 2장 15절이잖아요.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사랑치 말라는 뜻은 뭐냐 하면, 이것은 전혀 소중하지 않다는 거예요. 이 세상의 것은 전혀 소중하지 않다. 나와 너의 관계를 그대로 이 말씀에 대입하는 거예요. 사랑하지 말라는 뜻은 사랑할 가치가 없다는 뜻이거든요. 전혀 소중하지 않은 거예요.
그러면 이걸 그대로 대입하는 거예요. 수학에서 대입하듯이 하면, 너? 소중하지 않다. 나? 소중하지 않다. 나와 너의 관계도 전혀 소중하지 않다. 그럼 남은 건 뭐에요? 세상 자체가 소중하지 않다면 뭐가 소중하겠습니까? 예수님이 진정한 우리의 ‘너’가 되고, 그 예수님 안에서 있는 우리가 ‘나’가 되는 거죠.
개울가의 돌멩이를 만질 때 그렇게 막 두렵고 떨리고 무서워요? 시냇가 개울에 돌멩이 하나 주울 때 벌벌 떨면서 합니까? 저 돌멩이한테 무슨 말을 해야 되지? 아, 돌멩이가 나한테 무슨 소리하면 안 되는데… 무서워요? 그렇지 않죠. 그럼 돌멩이하고 ‘너’하고 차이점이 뭔데요? 돌멩이 만나는데 왜 떨리지 않을까요? 전혀 소중하지 않기 때문에. 전혀 소중하지 않아요, 돌멩이는.
그래서 성경은 나보다 더 소중한 게 있다는 게 성경이에요. 나보다 더 소중한 것. 오늘 참석을 좀 늦게 하신 분들은 전부다 자기가 소중해서 그런 거 아닌가 몰라. 다시 이야기해서 세상은 뭐로 구성되었다 했습니까? 나와 너의 관계, 이게 세상이죠. 아버지하고 아들, 그걸 바로 가족이라 하죠. 성경에서는 가족이라 하지 않습니다. 그걸 세상이라 해요. 세상.
세상 사람들은 얼마나 이 세상이 소중한지. 세상이 소중하다는 말은 내가 의도를 가지고 맺은 관계가 나만큼이나 소중한 거예요. 내가 맺었던 관계가. 그래서 사람들이 뭔가 일이 잘 안되면 뭐라고 이야기해요? “세상에!” 이렇게 하죠. 세상에 이런 일이. 여전히 세상에 대한 미련과 집착을 계속 유지하고 있는 거예요.
세상에서 평가하는 나는 어떤 존재인가, 자기의 소중함을 세상의 평가로 종결지으려고 애를 쓰고 있는 겁니다. 나의 소중함이, 내가 맺은 관계에 의해서 나를 어떻게 점수매기고 평가하느냐에 따라서 나는 이 세상에 더 살 의미와 가치를 내가 얻겠다는 거예요. 아직도 나는 살만하다는 것을 스스로 확인하고 싶은 거예요. 나 안 죽었어, 이런 거 있잖아요.
이 나와 너 전체를 합쳐서 세상이라 했는데 세상이 소중하지 않다면, 그럼 여기 예수 안에 있는 나는? 세상이 소중하지 않다면 예수 안에 있는 나는 어디서 나온 겁니까? 출생의 문제. 바로 요한복음은 또 요한일서는 이 출생의 문제를 다룹니다.
여러분 잘 아시다시피 요한복음 3장 3절에 보면, 사람이 다시 출생하지 아니하면 하늘나라를 볼 수 없다 했죠.(“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그러면 굳이 다시 출생해야 된다는 말은, 기존에 한번 출생한 것은 천국에 못 간다는 뜻이고요. 그럼 기존에 한번 출생한 것은 어디서 출생한 거예요? 딱 한번 출생한 것은 어디서 출생한 겁니까? 세상에서 출생한 거예요. 세상은 뭐로 되어있다? 나와 너의 관계로 되어 있는 거예요. 아버지 날 낳으시고 어머니 날 기르시니. 그래서 출생한 게 나거든요. 그래서 세상에서 벗어날 수가 있어요, 없어요? 못 벗어나요. 세상 출생이기 때문에.
그래서 복음 전하면 사람들이 흔한 말로 뭐라고 하느냐 하면 “그냥 내버려 둬. 나 이대로 살래.” 하잖아요. 이대로 살면 문제가 되는 것은 거듭나지 못했다는 거예요. 다시 태어나지 못한 상태에서 그냥 사는 거예요. 그냥. 다시 태어나지 않아도 나름 보람도 있고 긍지가 있고 나름 삶의 행복과 재미가 있는 이유는, 나로 하여금 의미를 제공하는 세상이라는 공간이 있기 때문에 세상이 나를 버리지 않는 한 나는 세상을 버릴 마음이 전혀 없는 거예요.
그래서 요한일서도 마찬가지고 성경 전체가 이야기하는 것은 이겁니다. 바닥부터 다시. 아까 출생 이야기했죠. 이걸 다른 말로 하면, 바닥부터 다시. 우리의 바닥이 뭐냐? 바닥으로 성경은 우리를 이끌어줘요. 너 어디 출신이야? 해병대 출신이야, 방위 출신이야? 보통 남자한테 묻죠. 어느 출신이야.
세상 출신 같으면 하늘나라에서는 없고요, 하늘나라 출신이라면 세상에는 소속이 없습니다. 양다리 걸치는 건 없어요. 그래서 아까 안양강의에서 잠깐 언급했습니다만 세례 요한이 예수님의 예언자로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서 먼저 오셨거든요. 세례 요한이. 그런데 세례 요한이 몰랐던 게 있었어요. 그것은 이 출생문제에 있어서 자기 출생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거기다가 예수님과 결합을 시도한 거예요. 자기 생각을 갖고 있는데다가 예수님이 하실 일을 자꾸 연결시키려고 했던 겁니다.
그러다 보니까 마태복음 11장에서 나중에 결국 어디에 빠졌느냐 하면 “오실 분이 당신 맞습니까?”라는 말을 한 거예요(11:3). 오실 분이 당신 맞습니까. 거기에 대한 답변은 이거였습니다.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11:5)
세례 요한이 속해있는 구약적 관점에서 보면 사람이 뭔가 잘못했을 때는 귀머거리가 되고 소경이 된다. 다시 말해서 인간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사랑하시는데 자기 백성이 아쉬운 게 있고 몸도 안 좋고 사는 형편이 어렵고 불편할 때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 자비 많으신 하나님이 나를 지켜준다.’라는 식의 구약, 그동안 말씀을 지키면 지켜주고 안 지키면 벌 내리신다 하는 그런 의식이 구약에 있었거든요. 율법의 복과 저주가 그거잖아요.
그런데 신약에 와서 예수님께선 우리의 출생문제를, 기존에 있는 나를 어떻게 해주는 게 아니라 기존의 나를 제거하는 쪽으로 새로운 출생문제를 가지고 신약에서는 새로운 바닥을 준비하신 거예요.
그래서 세례 요한은 뭐를 생각해야 되느냐 하면, ‘내가 생각한 내가 어떤 식으로 구원을 받느냐? 지금 있는 내가 어떻게 구원받느냐?’고 시도하면 안 되고, ‘어떤 지점에서 나의 구원이 이미 완료되었습니까?’를 찾아야 돼요. 어떤 지점에서. 그 지점을 찾아가는 거예요. 내가 생각한 바닥 말고, 내가 알고 있는 바닥 말고, 내가 알고 있는 출생지 말고. 내가 모르고 있는 출생 공간, 그걸 찾아가는 거예요.
찾아가면서 어떤 현상이 일어나느냐 하면 이 세상을 보존하는 게 아니고 세상을 파쇄해버리고 부숴버리죠. 지워버리죠. 왜냐하면 세상 안에는 나의 story가 들어있으니까. 여러분들이 몰래 애들이나 누구 가족의 일기장을 보신 적이 있습니까? 가족들의 일기장을, 몰래. 뭐 자물쇠 채워놓고 해도 열쇠 뻔한 데다 놔두는 거 열어보면 그 일기장이 뭐냐? 자기 이야기에요.
그런데 일기장에 나오는 모든, 첫마디부터 끝마디까지 모든 이야기가 무슨 이야기냐 하면 세상 이야기에요. ‘오늘은 날씨가 맑다. 바람이 좀 부는데 옷을 한 겹 더 입고 갈까? 오늘 학교 가서 친구 만나면 어제 다툰 거 사과부터 해야지. 오늘 어머니께서 맛있는 계란말이를 해주셨다. 동생이 더 먹겠다는 걸 내가 먼저 빨리 먹고 일어서서 동생은 울고 있었다. 다음에는 그런 나쁜 짓 안해야지.’부터 해가지고 모조리 다 자기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예요.
무엇과 교류하면서? 주변에 있는 상황, 세상과 교류하면서 자기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 자기 이야기를 남기는 거예요. 일기장으로 남기는 거예요, 자기 이야기를. 그러니까 이미 자기 이야기를 하루하루 남긴다는 말은 내 이야기를 삭제하기가 그만큼 더욱더 힘들고 어렵다는 뜻이에요. 애쓰고 공들여서 살아왔는데 이걸 일거에 개무시할 수가 없는 거예요.
겨울철 되면 사람들이 춥다고 옷을 잘 입잖아요. 그러니까 옷차림이 어수선해요. 전혀 정돈이 안 되어 있어요. 우리 주님께서의 구원은 어수선한 나의 이야기를 일체 인정하지 않습니다. 깔끔하게 정돈해줍니다. 깔끔하게. 세상 없을 때 너도 없고 너가 너라고 하는 그 가족관계도 세상에 속하기 때문에 이것은 전혀 소중하지 않다. 그러니까 오늘 요한일서 2장 15절의 말씀처럼, 사랑하지 말라.
어떻습니까? 깔끔하지 않습니까? 깔끔하죠. 너와 너 아는 사람과 그리고 너와 맺었던 모든 일기장에 있는 이야기, 그거 전혀 소중하지 않다. 사랑하지 마라. 너의 이야기를, 너의 과거사를 네가 사랑하지 말라는 뜻이에요. 인생을 어수선하게 살 필요 없어요.
그러면 성도가 ‘내가 어디서 다시 태어났는가’ 그 지점을 찾아가면서 우리가 시간을 통과하죠. 세상을 통과하죠. 통과하면서 오늘 요한일서 2장 15절의 말씀을 그대로 거기다가 적용해보는 거예요. 적용해보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있잖아요. 그럼 “사랑치 말라” 이 말씀은 일종의 지우개 같은 거예요.
중학교 때 일기장을 꺼내 지우면서 에이 이거 뭐, 지금 별 중요하지도 않은 거. 고등학교? 아이고,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 거예요. 별 중요하지 않은 거예요. 대학교 때 미팅에서 만났던 처음 아가씨나 첫 남자. 아이고, 이것도 중요하지 않은 거예요. 다 지워버리는 거예요.
여러분들이 점집에 가는 일은 거의 없죠. 제가 거의란 말을 했습니다. 거의 없습니다. 있을 수도 있단 말이죠. 그럼 여러분들이 점집에 갔다 칩시다. 그러면 들어갔을 때 점쟁이가 딱 세 가지 묻죠. 이름? 나이? 뭐해? 이거 딱 세 가지 물어요. 이걸 어떻게 아는가? 서장훈 보고 알죠, 뭐. 물어보살 보면 그렇게 이야기하죠. 나 나이 오십 밑으로는 말 놓는 거 이해해주시고, 이런 식으로 시작하는 거예요. 뭐가 고민이야? 이렇게 하잖아요.
세상 살면서 점집을 가야되고 누구로부터 상담을 받아야 되고 누구의 조언을 받아야 된다는 그것, 그 목적이 뭐죠? 뭐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런 현상이 일어나죠? 주님 사랑하고 싶어서 상담을 하러 점집에 갑니까? 주님 사랑하고 싶어서? 나이? 얼마. 하는 일? 목사. 뭐 땜에 왔는데? 주님을 어떻게 사랑하면 됩니까, 물어보살님? 주님을 어떻게 사랑하면 됩니까? 어떻게 해야 주님을 기쁘게 하나님을 기쁘게 합니까? 그거 하러 점집에 굳이 갈 이유가 있습니까? 없죠.
이미 정답은 나와 있어요. 네가 ‘주님을 어떻게 기쁘게 합니까? 어떻게 사랑합니까?’ 묻는 그 자체가 그 물음 자체가 너를 지우지 않고 나한테 왔다는 거예요. 그거 알아서 뭐할 건데? 그거 알아봤자 구원받기 위해서 용쓰는 것 밖에 더 됩니까? 이미 구원이 확정되었는데 왜 우리가 용을 쓰죠? 이거 이상한 거 아닙니까?
성경에서 우리의 출생과 바닥은 예수님의 십자가 안에서 이미 완성이 되었어요. 완성이 되었기 때문에 그곳을 우리가 접근하고 찾아가고… 그곳을 뭐 접근할 것도 없어요. 성경에 있으니까. 성경말씀에 대해서 ‘아, 여기서 내가 출생했구나.’ 그러면 될 문제지, ‘하나님께 어떻게 하면 좀더 영광 돌립니까?’ 하는 그 질문 자체가 성립이 안 됩니다.
그래도 자꾸 ‘주님을 어떻게 기쁘게 합니까? 어떻게 섬깁니까?’ 묻는 이유는 이게 딴 꿍꿍이 속이 있어서 그래요. 그게 뭐냐 하면 ‘내 인생 버려먹은 것이 하나님을 섭섭하게 해서 버려먹은 게 아니냐. 그렇다면 하나님 보시기에 귀엽고 예쁜 자녀라면 하나님께서 나에게 평온한 여생을 보장해주시겠지.’라는 그런 노림수 같은 게 있을 수가 있어요. 그것도 이 세상과 이 세상에 속한 나를 사랑하는 거죠.
제가 아까 시간되기 전에 시작한 것이 미안해서 초반에 했던 걸 다시 이야기해보겠습니다. 나-너 합쳐서 이걸 세상이라 했죠. 그런데 요한일서 2장 15절에 뭐라고 되어 있습니까? “세상이나” 그다음에 “세상 (안)에 (들어)있는 것들을” 뭐하지 말라? “사랑하지 말라” 왜? 전혀 소중하지 않기 때문에. 전혀 소중하지 않기 때문에 사랑하지 말라.
이 말은 세상에는 소중할 게 없다는 거예요. 소중할 것은 세상 말고 딴 데 있다는 겁니다.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은 분.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은 분이 소중하다는 이야기입니다. 성경에서는.
그러면 세상을 다시 분석하면, 세상은 첫 번째 뭐라 했습니까? 너. 나-너의 관계니까 너라는 것도 소중하지 않고 그다음에 너를 너라고 부르는 나도 소중하지 않고. 소중하지 않기 때문에 지워버립시다. 그다음에 나와 네가 관계했던 모든 우정, 그리고 사랑, 관심사, 부대끼면서 정 나는 정 같은 거, 싸우면서 나는 정 같은 거, 알고 지내는 거, 그것도 소중하지 않은 거예요. 모든 게.
그러니까 나와 너와의 관계에서 가장 최소단위가 가정이죠. 나는 아들이라면 너는 아버지, 어머니죠. 부모죠. 아버지, 어머니도 소중하지 않고 나도 소중하지 않고 아버지, 어머니와의 관계도 소중하지 않다는 거예요. 이거 그냥 들으면 완전히 후레자식이에요.
아버지를 만나기로 했어요? 아버지를 만나고 안 만나고 문제가 아니고, 아버지 보기를 돌같이 볼 수 있느냐 이 말입니다. 타인을 돌같이 본다는 말은, 우선 ‘나부터 나를 돌같이 본다’가 될 때 비로소 타인을 돌같이 볼 수 있어요. 내가 아무것도 아닐 때 남들도 아무것도 아닌 거예요.
어린아이 앞에서는 모든 게 아무것도 아니에요. 자기한테 맛있는 과자 줄 때 그 순간 어린애는 그거 준 사람을 잠시 좋게 생각합니다만 그러나 과자는 먹을 때 순간과 과자 다 먹고 끝난 순간이 달라져요. 과자 먹으니까 배부르잖아요. “또 과자 줄까?” “아니요.” “그럼 내 과자 필요 없나?” “필요 없습니다.” “왜?” “난 소중하지 않기 때문에. 지금 이 순간 그 과자는 소중하지 않기 때문에.”
어린아이 특징은 자아가 없다는 거죠. 자아가 없으니까 상대방 입장을 생각할 이유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어요. 그리고 애가 자아가 없으니까 더욱 중요한 것은 내가 내 입장을 생각하지 않아요. 내가 내 입장을 생각한다는 것은 미래에 대한 장래에 대한 어떤 스케줄이나 계획이 전혀 없다는 거예요, 어린아이의 특징이. 그래서 주께서 친히 기르시는 겁니다.
성도를 가지고 마태복음 6장에서 뭐에 비유하느냐 하면 참새에 비유했어요. 참새를 주께서 친히 기르시잖아요. 그런데 거기다가 무슨 말을 추가하느냐 하면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6:30) 참새 길러준 것처럼 너희를 귀하게 봐서 길러주겠다고 이야기해요(마 6:26, 10:31). 그러면 여기서 뭐가 빠져요? 참새는 창고도 들이지 않고 농사도 안 짓죠. 왜? 주께서 기르시니까. 내가 나를 기르면 창고가 필요한데 그런 게 필요 없어요. 주께서 길러주시니까.
그럼 주께서 성도를 어느 수준으로 길러주신다는 말이에요? 뭐 펀드 한 열댓 개하고 그렇게 길러주는 거예요? 뭡니까? 참새처럼 그날 먹는 걸로 족한 줄 알라. 그 수준으로 길러주시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인자, 나? 나는 머리 둘 곳도 없다.”(마 8:20) 따라서 내 앞에서 전세 사기 당했다고 나한테 하소연하지 마라. 나는 머리 둘 곳도 없다 했어요.
그러니까 예수님 말씀에 대해서 제자들이 못 알아듣고 무슨 감은 잡는데 거부감이 생길 수밖에 없는 이유는 출생문제를 다시 이야기하기 위해서 하는 거예요, 출생문제를. 그럼 출생문제를 우리도 한번 생각해봅시다. 우리가 세상에서 출생하지 않았다면 그럼 어디서 출생한 건데요? 사실 이 이야기는 성경 전체, 특히 신약성경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 전체를 다 훑어야 될 그런 문제입니다.
우리가 어디서 출생했는데? 제가 이야기할 테니까 여러분들이 둘 중 하나를 맞춰보세요. 어느 것이 정답인지. 어디서 출생했는가? ①죽음에서 출생했다. 문제 어려워요. 이거 킬러문항입니다. 그다음 ②무덤에서 출생했다. 어느 게 정답입니까? 출제위원 누구냐고 따지지 마시고. 우리가 어디서 출생했습니까? 죽음에서 출생한 거예요, 무덤에서 출생한 거예요? 딱 둘 중 하나에요. 세 개도 아니에요.
죽음에서 다시 나오신 분은 누구냐 하면 한 알의 밀알이 돼서 썩어 죽으신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을 부활의 첫 열매라 했어요. 고린도전서 15장 23절, “먼저는 첫 열매인 그리스도요” 되어 있죠. 예수님은 죽음에서 첫 번째 부활된 거예요.
그러면 우리는 어디서 나왔는가? 무덤에서 출생했다, 이게 정답인데 무덤이 뭐냐 하면 이 세상 전부를 주님께서 무덤화시킨 거예요. 이 세상 전부를. 태어나서 10살을 살아도 20살을 살아도 인간은 무덤을 놀이터삼아서 또는 무덤을 자기 삶의 터전으로 잡고 살아가는 거예요. 무덤에서 시작해서 무덤으로 끝나는 거예요. 이걸 요한복음에서는 육에서 나와서 육으로 가는 거라 해요(3:6). 육에서 나와서 육으로 가는 것, 뭐가 빠졌습니까? 거듭남이 없죠. 거듭남이 없는 거예요.
이 무덤 안에 놀이터도 있고요, 워터파크도 있어요. 무덤 안에. 대통령 집도 있고. 무덤 안에서 자기끼리 싸운다고 하마스하고 이스라엘하고 자기끼리 무덤에서 살고 있습니다. 왜 이 세상을 무덤으로 봐야 되느냐 하면, 주님께서 어디를 경유하셨는가, 세상에서 버림받은 주님과 주님을 버린 세상의 차이가 뭐냐? 한쪽은 빈 무덤이었다는 사실이에요.
그리고 이 세상 모든 인간은 종착점이 어디로 갑니까? 아무리 호화롭게 산다 할지라도 결국 인간의 눈으로 파악하는 마지막 모습은 어디냐? 무덤입니다. 각자 자기 무덤으로 가요. 그러니까 이 세상은 전체가 공동묘지에요. 무덤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전부다 우리는 무덤의 동기생들이에요. 유명한 노래 있잖아요. 무덤에서 태어나 무덤에 누워~ 저 무덤에 누워~ 하는 노래. 저 무덤에 누워서.
그럼 예수님이 부활의 첫 열매라면 우리도 부활되잖아요, 하는데 그때는 조건이 있어요. 성령이 와야 돼요. 성령이 와야 부활된다고요. 왜냐하면 로마서 8장에 나와요.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에게 거하시면(임하면)”(8:11)
이 말은 무슨 뜻이에요?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에게 임하지 않는다면 너희들은 맛 갔다. 너희들은 끝났어. 너희는 끝난 거예요. 교회 다니면서 열심히 신앙생활 해봐야 아무 소용없습니다. 그것은 우리 스토리고 우리 일기장이에요, 이 세상에서. 이 세상에서 하늘나라 있다는데 한번 가봐야지, 이건 자기 이야기에요.
아까 얘기한 나의 이야기는, 한번 적어야겠어요, 중요해서. 중요한 건 적으면 좋겠다만. [나의 이야기는 세상에서 버림받지 않는 상태의 ‘나’의 이야기]에요. 세상에서 버림받은 적이 없는 나의 이야기에요. 좀 힘들죠. 몸 아프고 돈 없고 그러니까 힘들지만 그래도 버림받지는 않았잖아요. 버림받은 분은 예수님밖에 없어요. 다른 사람들은 버림받지 않았어요. 남들처럼 여유 있지 못해서 아쉬워서 교회 나와서 비는 것, 그것은 역시 세상이에요. 그냥.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 돌아가시고 난 뒤에 예수님을 찾아갔는데 그때 막달라 마리아가 기대했던 예수님은 뭡니까? 본인이 알고 있는 이 세상 지식의 끝자락에 예수님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무덤에 예수님의 시신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거예요. 마치 화장터에 어디 납골당에 누구 만나러 가는 거, 무슨 뜻입니까? 우리 돌아가신 아버님, 할아버님, 납골당 뚜껑 열면 그 안에 아버지 뼈 있고, 할아버지 뼈 있다. 이게 우리가 알고 있는 세상 이야기이고 우리도 그렇게 될 것이고 그게 우리에게 전부거든요.
그러니까 성경에서 예수님이 오셨다는 이야기는 여러분 들으신 적 있죠? 예수님 오셨죠. 그러면 우리가 물어야 될 건 예수님이 오심으로써 우리에게 어떤 변화가 있는가 한번 이걸 joint(결합)해보세요. 예수님 오셨다. 그래서 뭐? 나에게 어떤 변화가 있다. 무슨 변화? 무슨 변화요?
예수님 오셔서 어떤 변화가 ①있다. ②없다. 오늘 전부다 킬러문항이다. 예수님이 오심으로써 우리에게 변화 있다, 변화 없다 몇 번입니까? 용기 있는 자만이 답변해요. 변화가 없죠! 변화가 없는 거예요. 우리 인간의 대표자가 바리새인인데 무슨 변화가 있어요. 우리는 그들과 한통속인데.
그런데 우리는 교회 다니면서 무슨 변화를 기대하고 있어요. 변화 없어요. 자꾸 목사가 변화를 이야기한다는 것은 마귀의 조작이에요. 마귀가 주는 환상이고 조작입니다. 교회 안와도 죽어가고 있고 교회 와도 죽어가고 있는 거예요. 거기에 무슨 변화가 있어요. 교회 안 올 때는 ‘나중에 늙어서 할 일 없을 때 교회 가야지.’ 이런 마음이 있다면, 교회 올 때는 ‘아이고, 죽기 전에 빨리 가야지.’ 이 변화인데 그 변화나 이 변화나 무덤에 있기는 마찬가지인데 그게 무슨 달라진 거예요? 그 나물에 그 밥인데. 똑같은 인간이 왔는데요.
변화를 추구한다는 그 자체가 벌써 인식이 잘못된 거예요. 크게 쓰겠습니다. [나는 나에게 소용없다]. 이걸 아셔야 돼요. 나는 나에게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더 나아가서 [나는 나에게 아무런 중요한 존재가 아니다]. 우리가 정신 차려야 돼요. 그동안 마귀가 준 환상에 너무 빠져있었습니다. 거짓에 빠져있었던 거예요.
요한복음 같은 데 보면서 여러분들이 뭘 발견해야 되느냐 하면 인간 세상의 모든 철학과 세상의 모든 신학과 세상 지혜의 그 가짜성을 그대로 들추어내는 게 요한복음, 요한일서 성경말씀이에요.
얼마나 우리는 마귀한테 농락당하고 조작된 삶을 살아왔습니까? 그쪽에서 하는 이야기는 뭐에요? 너는 너에게 어떤 존재다? 소중한 존재라고 그렇게 부추김을 당했잖아요.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말로 하지 말고 돈이나 몇 푼 던져주지. 말로만 사랑하지 말고 차라리.
나는 나에게 소중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가야 돼요. [너는 나에게 소용없다]. 너는 나에게 소용없습니다. 나는 나에게 소용없고 너는 나에게 소용없어요. 그것은 세상 자체가 주님하고 격리상태이기 때문에 그래요. 세상은 주님을 버렸기 때문에 세상 전체, 온 우주를 준다 할지라도 세상 전체가 주님보다 소중하지 않습니다. 주님보다 소중하지 않아요.
그것도 모르고 베드로는 예수님 변화할 때에, 초막 셋을 지어드리겠습니다. 아, 이게 무슨 성의. 왜 갑자기 거기서 성의를 표해요? 초막 셋을 지어드리겠다. 주께서 좋다고 초막에 사시겠습니까? 주님이 해같이 빛나다가 초막 홀라당 다 태울 일 있나. 도대체 감을 못 잡아. 해같이 빛나는 분을 초막에 모셔서 뭐 어떻게 감당할 수 있겠어요, 초막이?
베드로가 예수님보고 초막 지어드리겠다는 제안을 왜 했습니까? 예수님이 소중한 게 아니에요. 예수님께 잘 보이려는 나를 내가 소중하게 관리하기 위해서 그런 제안을 한 겁니다. 예수님보다 누가 더 소중하다? 내가 더 소중하다는 거예요. 바로 그러니까 베드로조차도 열 두 제자조차도 무엇의 일부에요? 이 세상의 일부인 겁니다.
그래서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예수님 나타나고 난 뒤에 우리에게 어떤 변화도 기대해서는 안 되고 또 기대해봐야 소용없고요. 우리에게 주어지는 변화는 없습니다. 그럼 변화는 뭐냐? 주님 자체에서 쏟아져 나온 변화죠. 이걸 구분해야 돼요.
주님 오심으로써 나한테 이익이었다는 그런 변화는 없어요. 오히려 나는 주님을 버린 세상의 일부가 되어서 주님보다 나 자신을 더 소중히 여기는 한통속이 되었다는 그런 입장이었기 때문에.
이건 뭐 킬러문항 아니에요. 너무 쉬워요. ①주여, 내게 뭘 해주시겠습니까? 이거 땡인 거 여러분 다 아시죠. ②내가 나의 세계를 새롭게 펼쳐나가겠다, 이게 주님의 뜻입니다. 이게 변화에요. 주님 자체의 변화. 이 땅에 초라하게 오셔서 영광스럽게 부활하시고 더 영광스럽게 하늘로 승천하시고 더 영광스럽게 재림하시는 주님 자체의 변화가 변화지, 나에게는 어떤 변화도 없습니다.
그러면 예수님 재림하실 때 죽은 성도들 몸이 다시 살아나서 영광스럽게 해같이 빛나는 변화는 무슨 변화냐? 그것은 그 출생이 나에게 영광스러운 게 아니고, 예수님이 변화하는 일 안에서 천국 백성이 새롭게 출생했던 그 자에게만 해당되는 사항이에요. 주님에 의해서 새로 태어난 사람에게 해당되는 이야기에요, 예수님의 재림도.
그러니까 나를 구원해달라는 나의 구원이라는 건 예수님께 없어요. 네가 뭔데? 너는 버릴 대상이지, 왜 내가 너를 구원해? 나를 구원하는 게 아니고 주님의 백성은 주님이 알아서 새로 만들어내는 거예요. 새롭게.
주님께서 새롭게 만드는 방법은, 그 인간을 이미 일단은 죽이십니다. 죽이고, 죽고 난 뒤에 로마서 8장 11절에 나온 말씀처럼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다음에 뭐라고 되어 있어요? 그다음에 뭐라고 되어 있습니까? “너희 죽을 몸”이죠. 그러니까 주께서 일하시는 대상인 우리가 죽은 몸이에요. 죽은 몸. 죽은 몸에게 주의 영이 임하면 우리도 주와 함께 영광스러운 부활의 몸으로 다시 살려진다, 이 이야기에요.
어떻게 나한테 감사해야 돼요, 안 그러면 주님한테 감사해야 됩니까? 여러분 자신에게 감사해야 돼요, 주님께 감사해야 돼요? 주님께 감사하죠. 주님께 감사할 땐 조건이 있어요. 나를 어떻게 본다? 그동안 나의 이야기, 나의 스토리, 나에게 집착하던 것은 이것이 바로 주님을 이 땅에서 버림받게 한 하나의 이유로서 가담되었던 사실을 발견하는 거예요.
다시 이야기하겠습니다. 성도라 하는 것은 늘 찾아야 될 게 뭐냐 하면 내가 이미 알던 내 출생 말고 우리 가정의 출생 말고, [내가 모르고 있는 새로운 출생지에 의하여 주께서는 어떤 일을 행하셨는가] 그것을 찾아보고 그것을 되새기면 돼요. 성도가 할 일이 의외로 간단하죠.
그걸 되새기는데 주께서 이 세상을 허용한 거예요. 허용하니까 오늘 요한일서 2장 15절처럼 아, 이 세상과 이 세상의 것을 우리가 그냥 사랑하지 않으면 돼요. 쉬워요. 왜? 그게 나의 출생을 보장해 준 게 아니기 때문에 그래요. 우리 삼촌이 뭐 국정원이고 우리 고모가 재벌 어떻고 그게 소중한 게 아니고, 재벌이 나를 구원한 건 아니잖아요. 아니, 구원을 확정시켜주는 건 아니잖아요. 돈은 주지만. 취직은 시켜주겠지만. 사는 데에 편하게 해주겠지만.
“어이, 조카.” “예, 고모님.” “보니까 차 좀 오래됐더라. 너 한 5년 썼더라. 5년 쓰면 차 못 쓰는 거 아니야? 내가 신차 뽑아줄게.” “아이고, 고모님 감사합니다.” 물론 그런 고모도 참 드문 고모지만… 고맙죠. 이건 아주 쉬운 문제에요. ①받는다 ②안 받는다, 몇 번입니까? ③널름 받는다, 몇 번입니까? 널름 받아야죠. 널름 받는 거예요.
왜 그 차를 받아야 됩니까? 내가 어디까지 사랑하지 않아야 될 것인가를 경험하기 위해서. 핑계 하나는 참 멋지다. 핑계 하난 좋~다. 내가 왜 돈을 벌어야 되는가? 내가 사랑할 액수의 한도가 뭔지 알기 위해서. 참 핑계 하난 좋~습니다. 왜 보험을 5개 들어야 되는가? 내가 10개의 보험도 사랑할 수 있는가를 알기 위해서.
이 세상이 왜 필요하냐 하면 delete, 삭제하기 위해서에요. 세상의 어떤 복도 나의 무덤에서의 출생을 대체할 수 없다는 걸 알고 기뻐하는 거예요.
흔히 혼자되신 여자 분들을 주위에서 가만 놔두지를 못해요. 좋은 남자 있는데 한번 소개시켜줄까요? 철도공사 다니는데 소개시켜드릴까요? 아직 나이도 젊은데 남은 여생을 쓸쓸하게 혼자서 살 수 없지 않습니까? 그쪽은 아예 상처하고 자식들 전부다 결혼 보냈는데 외로운 비둘기끼리 한번 여생을 같이해보시죠. ①일단 본다, ②아예 안 본다. 그런 추천 들어온 것도 튕길만한 입장들인지… 그것도 돌아보면, 아이 씨, 그거 붙잡을 걸. 잘난 것도 없는데 괜히 튕기다가 좋은 기회 다 놓쳤네, 이렇게 하죠.
주께서 무덤에서 부활했다고 한다면 그 무덤에 대해서 우리가 지독하게 철저하게 남은 생애를 체험해야 돼요. 무덤 체험. 도대체 어떤 점에서 세상은 예수님을 버릴 수밖에 없었는가? 아, 이런 것들을 사랑하고 이런 것들을 좋아하고 세상이 이런 것들에 대해서 굉장히 호의적이기 때문에 주님의 부활이 복음이 눈에 들어오지도 않고 마음에 차지도 않았던 겁니다.
그러니까 그 점을 아는 사람은 이미 그 사람의 출생이 세상이 아니고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출생했기 때문에 주와 동일한 안목과 인식을 가지고 세상에 대해서 자유스럽게 대할 수 있는 겁니다. 누구를 만나고 누구를 안 만나고 그걸 갈라내지 마세요. 당신도 아무것도 아니고 나도 아무것도 아니고 당신도 돌멩이고 나도 돌멩이에요. 제가 주일 낮에 예를 든 대로 하면 당신도 연탄재고 나도 연탄재인데 뜨거운 거 벌써 다 식어버린 연탄재끼리 모여서 무슨 연탄재가 위신 차릴 거 있어요?
여기서 성경 고린도후서 4장 또는 5장에 나오는 난해한 용어 하나가 우리를 다시금 생각케 합니다. 그것은 뭐냐? 옷입니다. 이걸 우리의 육신이라고 보는 거예요. 옷=육신. 그러니 세례 요한 자체가 예수님의 문신이죠. 육신이란 말이죠. 문제는 인간이 옷을 입는다는 게 문제가 돼요. 인간 자체가 옷인데 옷을 입어버리면 옷은 낡아도 자기는 멀쩡하다고 생각하기 마련이에요.
그러나 주님께서는 낡아지는 것이 옷의 운명이라면 그 옷을 입은 우리도 옷과 같이 낡아지리라. 시편에 나오는 이야기잖아요. 옷과 같이 다 해어질 것이다(시 102:26 “천지는 없어지려니와 주는 영존하시겠고 그것들은 다 옷 같이 낡으리니 의복 같이 바꾸시면 바뀌려니와”). 파쇄될 것이다.
우리가 세상에 살면서 세상을 부순다 했는데 세상을 부수면서 동시에 우리의 몸도 세월 따라 시간 따라 같이 부서지는 겁니다. 미련 둘 이유가 없어요. 또 일부러 부순다고 등산하고 그런 객기는 부리지 마세요.
등산하나 안 하나 시간이 주어진다는 것은 어수선한 내 마음을 깔끔하게 소실되는 것으로 정리해준다는 뜻이에요. 정리되고 소실되는 그 과정 속에서 주님을 버릴 수밖에 없었던 이 세상의 요소를 우리가 주님과 더불어서 평생 경험하게 만듭니다. 그것을 전 통과한다 하는 거예요. 경험하는 것. 죽을 때까지 세상의 구석구석을 하나님께서는 관통하게 만들어요. 아, 내가 주님보다 더 사랑하게 한 요소가 이런 것들이었구나. 이런 것들을 쭉 체감하게 만드는 거예요.
그래서 교회 갔더니만 사람들이 칭찬하고 “아이고, 믿음 좋다. 기도도 왜 이렇게 잘해요. 은혜 받았어요.” 하는 것들, 그게 뭡니까?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들에 해당되는 거예요. 교회에서 칭찬받는 것도. 그리고 더 나아가서 교우와 교우들끼리 서로 친하게 지내고 우정 나누고 사랑하고 서로 아껴주는 것, 그거 뭐에요? 세상 것일까요, 세상 것이 아닐까요? 끝까지 킬러문항 나온다. 세상 것입니까, 세상 것이 아닙니까? 우리 교제는 성령에 의해서 된 것이다, 뭐 이런 소리해가면서. 세상 것이에요, 아니에요?
우리의 타인은 오직 주님밖에 없습니다. 주님이에요. 그래서 그 사람 속에서 주님의 복음이 나오지 않는다면 그냥 그것은 교우관계죠. 친하게 지내는 거예요. 뭐 싸움하고 멱살 쥘 필요는 없어요. 그러나 그 사람을 통해서 내 죄가, 나의 세상 사랑이 들추어지고 발굴되어서 ‘너 이거 사랑하고 있잖아!’ 라는 지적이 그 사람과의 관계를 통해서 알아진다면 그 사람은 주님이 보내신 천사 같은 존재입니다. 물론 그 사람이 훌륭하다는 뜻은 아니고요. 천사는 아니고 천사 같은 존재죠. 무슨 천사가 있어요.
나의 죄를 지적하기 위해서 무수한 사람을 앞으로 여러분 만나셔야 되고요. 그런 사태를 겪으셔야 되고요. 그렇게 해서 이 세상 출신이 아니라는 것을 여러분들은 계속 살아가면서 그 점에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10분 쉽시다.
서울강의20231116b 요한일서 2장 15절(정욕의 세상)-이 근호 목사
두 번째 시작하겠습니다. 두 번째 시작하면서는 우리가 무슨 이야기를 해야 되느냐 하면 ‘예수님의 몸에서 출생을 한다는데 그러면 예수님의 몸과 우리 몸이 어떻게 같은 세계를 이룰 수 있는가? 그 방식이 뭐냐? 방법이 뭐냐?’ 그것을 한번 생각해봐야 돼요.
예수님 안에서 출생하면 참 좋죠. 어떻게? 어떻게 그게 가능하냐는 말이에요. 아까 성령께서 오셔서 한다는데 성령께서 어떤 원리를 가지고 우리를 하나님의 그리스도의 백성으로서 삼을 수 있느냐? 성령께 어떤 원리가 있기에 그것이 성립이 되느냐? ‘넌 하나님의 백성이야’라는 성립 근거가 뭐냐 하는 거예요. 그냥 성령 받으면 구원받는다, 지금 이렇게 억지 부릴 문제가 아니에요.
그것에 대한 힌트가 요한일서 2장 16절에 나옵니다.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되어 있죠. 이게 무슨 이야기냐 하면 인간의 내부에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는 것을 방해하는 것이 먼저 선점해있는 거예요. 선점. 먼저 점령해 있어요, 우리 마음을.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을 죽음으로 몰아세웠고 예수님의 말씀을 거부했고 우리는 그걸 귀히 여기지 아니했다 했거든요. 예수님의 그 모습과 태도를 보면서 목숨까지 바칠 정도로 그만한 가치는 없다는 데에 그들은 의견을 통일했습니다. 그게 그들 자신의 마음입니까, 아니면 그들 속에 어떤 다른 수상한 마음이 있어서 그래요? 어떻게 마음이 하나같이 예수님 앞에서는 통일되어버렸어요. 하나같이.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 서로 원수지간이었는데 예수님 죽이는 데에서는 어떤 이견(異見)이 있을 수 없었습니다. 왜 그럴까요? 도대체 인간 속에 뭐가 들어있어서 그러느냐 이 말이죠.
여기 표현에 의하면 모든 것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에요, everything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으로 가득 차 있다고 되어있어요. 이점을 한번 보자는 거예요. 그걸 논리로 따지면 이 저녁에 피곤한데 또 잠이 오기 때문에 결론부터 먼저 말씀드리겠습니다. 결론부터.
이 점을 한번 생각해보세요. 베드로전서 3장 6절에 나온 말씀인데요.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는 아브라함을 주라고 칭했다.] 이렇게 되어있어요. 칭하고 칭하기만 한 게 아니고 복종했다고 되어 있어요. (“사라가 아브라함을 주라 칭하여 복종한 것 같이”)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냐 이 말이죠.
자, 이걸 한번 따져봅시다. 아까 바닥 이야기했죠. 처음부터 새로 시작하는 거예요. 그럼 창세기 2장에 봅시다. 창세기 2장에서 하나님께서 남자를 만들고 여자를 만들었잖아요. 여기서 질문, 왜 여자는 그때 남자로부터 독립하지 않았는가? 왜 남자는 여자로부터 너는 너고 나는 나라는 생각을 왜 하지 않았는가? 오히려 반대로 이야기했죠.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2:23)고 이야기했어요.
두 사람이잖아요. 두 사람인데 어떻게 한 몸이 될 수 있느냐 하는 겁니다. 이것을 성경에서는 ‘신비’라고 이야기해요. 어디에 나오느냐 하면 에베소서 5장에 교회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예수님의 신부로서 교회를 보면서 부부는 따로 떨어진 게 아니고 한 몸이다. 내가 가정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게 아니고 교회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교회는 그리스도와 떨어질 수 없는 관계를 교회라고 이야기한다 한 거예요.
그럼 어떻게 그게 가능하냐 이 말이죠. 내 몸 따로 있고 네 몸 따로 있어서 두 사람 몸인데 생각도 다르고 살아온 과거도 다르고 다 다른데 어떻게 그걸 한 몸이라고 규정할 수가 있느냐 하는 거예요.
두 사람이 한 몸 될 수는 없습니다. 여기 서열이 매겨지면서 한 몸 돼요. 한쪽은 주(主)가 되고 한쪽은 복종하는 관계가 되면서 한 몸 관계가 형성되게 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이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복종하는 자가 없으면 주가 없다는 이야기가 되고 주가 없으면 복종할 대상도 없다는 뜻이에요.
이 말은 내가 존재하는 이유는 누구에게 복종하기 위해서 존재하는 거고, 내가 존재하는 이유는 주님을 발견하기 위해서 우리가 살아가는 거예요. 주님에게 복종하기 위해서 우리는 살아있는 겁니다. 그럴 때 우리는 내 몸만 내 몸이 아니고 다른 몸과 한 몸이 될 수 있는 조건을 갖추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방금 이야기한 것을 누가 방해하느냐? 바로 세상에 있는 모든 것,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 이걸 방해하는 거예요. 뭐라고 하느냐 하면, 너는 너에게 독보적인 존재가 되라고 방해하죠. ‘너의 최종적인 가치와 의미는 너 자신뿐이야. 아무도 너를 대신할 수가 없어. 네가 최고야.’라고 매일같이 우리 마음이 우리에게 하소연하고 격려하고 호소하고 있는 거예요.
TV에 솔로라고 연애하는 프로그램인데 16기 상철이하고 영숙이하고 17기, 18기도 쭉 나오는데 그 젊은이들이, 나이 젊다 해도 30대 다 넘었죠, 40 가까이 된 사람도 있고, 그 젊은이들이 자기가 연애하고 싶고 결혼하고 싶은 사람을 찾을 때에 그 행동과 태도를 한번 보세요. 보게 되면 주에게 복종하기 위해서 찾지를 않아요. 내가 복종할 사람을 찾지 않습니다. 어림도 없어요.
다시 말해서 독보적인 내 몸을 이미 확정지어놓고, 내 몸을 내 몸이라고 존중해줄 수 있는 그런 배우자를 찾아요. 내가 나를 존중하잖아요. 이 존중만큼 같이 합세해서 나를 존중할 사람을 찾아요. 남자든 여자든 상관없이. 속으로 그랬어요. 너희들 백날 해봐야 결혼 못한다. 연예인 되려면 나와. 따로 유튜버 되려면 나오고. 결혼은 못한다.
왜 인간은 자기가 주의 자리를 포기 못할까요? 이렇게 자기를 독보적인 존재로 간주하고 난 뒤에 그 다음에 솔로 보면 내가 상철이하고 결정할까, 아니면 종수하고 할까. 자기가 선택을 하는 거예요. 본인이, 내가 부처를 믿을까, 예수를 믿을까 이러고 있단 말이죠. 안 그러면 무종교로 나갈까. 종교 없이 자유롭게.
다시 말해서 ‘어느 쪽이 내가 독보적인 존재임을 강화시켜주고 그걸 확실하게 굳혀줄까?’ 이걸 생각하고 있는 거예요. 이근호 목사라는 사람이 설교하는데 뭐 복음으로는 막 살아도 되고 자유를 줬다 하더라. 그거 괜찮네. 그거. 이근호 목사 설교 그거 괜찮네. 내가 신이니까 이제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신학적 근거까지 제공해주니 말씀의 근거까지 제공해주니 이거 뭐 신바람 났죠.
내가 누구한테 복종하고 싶은 그런 마음이 1도 없는 거예요. 그래놓고도 신자이고 싶어 하는 거예요. 무슨 그런 소리를 합니까? 사라는 주님께 주라 한 게 아니에요. 아브라함에게 주라 했어요. 아브라함에게. 이게 무슨 뜻일까요? 당신과 나를 한 몸으로 형성시켜주는 이 신비를 제공하신 분이 바로 주님이라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내가 나의 주됨을 포기시킨 주님을 찬양하는 거예요. 내가 최종 의미가 아니고 내가 최종 가치가 아니라는 것을, 나를 그렇게 만드신 분, 그것은 아브라함 당신 안에 있는 우리 주님의 약속이라는 겁니다. 그 주님의 약속이 당신 안에 있어서 나는 기꺼이 당신을 주라고 부를 수가 있다는 거예요. 그리고 당신 하는 일인 언약적 일에 대해서 나는 기꺼이 복종할 마음이 되어 있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나는 단독으로 한 몸이 아니올시다] 이 말이에요. 내가 주라고 복종할 수 있는 분을 만나야 비로소 나는 그분과 한 몸이 된다는 겁니다. 한 몸이. 이렇게 되면 이제 구약/신약, 신약/구약 쪽에서 할 이야기가 굉장히 풍성해지고 많아지게 되는 거예요. 이스라엘 역사의 모든 오류와 실패가 결국은 무엇에 실패한 거예요? 주님 앞에서 본인, 자기 자신의 단독으로 내 몸 하나로 내가 최종적이라는 것이 파괴되지 않는 상태이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망해버린 겁니다. 나를 위해서 주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그 사고방식이 자기를 망친 거예요.
내 목숨을 기꺼이 바칠 분을 찾는 것, 그것보다 더 큰 복은 없습니다. 신약에 와서는 제가 아까 이야기했습니다. 나는 소중하지 않습니다. ‘나도 소중하지 않고, 내가 너라고 부르는 너도 소중하지 않고, 너와 나의 그동안 우정과 관계도 소중하지 않고, 이 세상 전부가 이건 소중하지 않습니다.’ 라는 고백은 그리스도를 주라 부르면서 한 몸이 되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그러한 현상이 일어난다는 것이 사도 요한이 요한일서에서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리고 이미 그렇게 주와 한 몸이 되었기에 세상을 평가할 수 있어요. 세상은 뭐냐?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으로 꽉꽉 채워져 있다고 보는 거예요. 꽉 채워져 있다고. 이생의 자랑이니까 단독자로서의 내 자랑이에요.
내가 비록 죄를 지어서 교도소에 있지만 난 그래도 완전하게 나쁜 자는 아니다, 이런 거. 내가 실수로 사람을 죽이고 10년 복역하고 있지만 내 친구들한테 물어봐라. 내가 얼마나 인심이 좋고 인간성 괜찮은지. 어려운 사람 막 제일 먼저 달려가서 도와주는 사람이지. 다 물어봐. 나 그런 존재야. 비록 내가 전과자가 되었지만 그렇게 막 되어먹은 존재는 아니야, 라고 하면서 그런 인간들끼리 조폭을 이루는 거예요. 그 조직폭력배 안에 전부다 나름대로의… 내가 양아치 생활하지만 이 돈 모아서 나 혼자 사치스럽게 쓰지 않고 나보다 더 못난 조카 학비 대준다고 열심히 마약 팔았다, 이런 거. 자기 조카, 자기 아는 사람 어려운데 도와준다고 내가 마약을 좀 팔았다, 왜? 다 나 혼자 잘 먹고 잘 살겠단 이야기야? 그래, 이선균한테 좀 팔았다, 왜? 이런 거.
전부다 변명이에요, 변명. 그런 사람들한테 물어보세요. 그래서 당신이 누구한테 복종하는데? 자기 잘남에 자기가 복종하는 거예요. 자기 잘남에. 나는 끝까지 여전히 내 안에는 아무리 망가져도 끝까지 선하고 의롭고 거룩한 요소는 내 안에 남아있다. 나는 거기에 복종할거야. 나는 내 자신에게 복종할거야.
어떻습니까? 여러분의 아내, 여러분의 남편은 어떻습니까? 어떤 사람들이에요? 남보다 빨리 서둘러 퇴근해서 집에 후딱 남편이 와가지고 “오늘 당신 왜 일찍 왔나?” “당신한테 복종하는 기쁨을 누리기 위해서 왔어요. 뭘 시키실래요?” 그런 남편 봤어요? 남편이 아내한테 묻습니다. “당신은 무슨 낙으로 사노?” “무슨 낙으로 살긴. 당신을 주님이라 부르는, 당신이 시키는 대로 움직이는 그 재미로 살지.” 이런 거. 그런 아내, 솔로에 없습니다. 그런 사람 없어요. 아이고, 그때 상철이 만나는 건데 종수 만나가지고 이게 뭐야, 이게 내 인생이, 이런 식으로.
그래서 여기서 나오는 “세상의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라는 것은 이미 모든 악마로부터, 악마라는 것은 주님의 복음을 방해하는 자죠, 대적하는 자죠, 대적하는 자가 뭐를 장악했다? 서울, 대전, 부산? 그것은 물론이고 우리의 마음부터 이미 장악했다는 거예요. 그러니 우리의 출생은 태어날 때부터 무덤에서 출생해서 무덤으로 가는 겁니다. 부활이고 뭐고 없습니다. 자기 잘난 맛에 살다가 자기 잘난 맛에 죽는 거예요.
제가 어제 수요일에 설교를 했습니다. 회사에 월급 주는 사람은 회사가 어려운 것을 전부다 직원들 탓으로 돌리는 경향이 있고, 직원들은 하여튼 틈만 나면 놀 생각으로 가득 차서 오늘 또 회사 가서 뭐하고 놀꼬, 뺀질이처럼 시간 때울 그것만 생각하는 거예요. 그러니 양쪽 다 복종하기 위해서 온 게 아니에요.
다시 말해서 직원은 주인에게 복종하라는 말이 아니에요. 성경에 보면 직원은 주인에게 복종하면 안돼요. 주님에게 복종해야 돼요. 주님에게. 그러면 복종이 안 되죠. 복종이 안 된다는 말은… 예수님한테도 주라고 이야기하고 ‘아이고, 랍비여.’하고 예수님께 뽀뽀한 사람 누구죠? 가룟 유다죠. 무슨 행패에요, 그게. 친근을 가장한 마지막 배려? 당신 내 손에 죽었어. 복수? 보복? 3년 간 당신 따라다닌 내 나름대로의 보상책인가요? 내 것 아니면 팔아먹는다는 심보 아닙니까. 내 것 아니면. 네가 뭔데 왜 내 세계에 네가 협조하지 않느냐? 이제 남은 것은 당신에 대한 나의 복수다.
그래서 어떤 의미에서의 부부라 하는 것은 상호 복수하기 위해서 사는 게 아닐까요? 전쟁? 내 탓을 저쪽 탓으로 넘기기 위해서 배우자와 결혼해서 사는 게 아니겠어요? 그러니까 배우자가 병으로 일찍 죽으면 이 야속한 인간아, 나 두고 왜 일찍 죽느냐고 탄식하는 이유는 더 이상 탓할 사람이 날라가버렸기 때문이에요. 당신이 있어줘야 탓할 사람이 생기는데 누구 탓을 해요 그럼.
자,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될 것은 구약에서 율법을 가진 사람이 뭐를 잘라냈는가를 보세요. 무슨 이야기냐 하면 내 속에 있는 육신의 정욕이 하나님의 율법 또는 하나님의 계명 또는 하나님의 언약이 오게 되면 내 속에 있는 이 정욕이 내 손에서 이게 잘려나가는 현상을 보인다는 겁니다.
이렇게 말로 했으니까 이제 예를 한번 들어봐야 되겠죠. 다 같이 한번 봅시다. 사무엘상 15장에 보면 거기에 사무엘이 사울 왕에게 이야기했어요. 아말렉이 당신에게 쳐들어옵니다. 그래서 당신은 아말렉을 마주해서 전쟁을 벌여야 되는데 전쟁을 할 때 그 아말렉에 대해서 3절에 보면 “지금 가서 아말렉을 쳐서 그들의 모든 소유를 남기지 말고 진멸하되 남녀와 소아와 젖 먹는 아이와 우양과 약대와 나귀를 죽이라 하셨나이다” 이렇게 되어 있어요.
이것은 전쟁하기 전에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통해서 지시한 거죠. 그러니까 이 이야기를 들을 때 사울이 여기에 대해서 거부감이 있었겠어요, 없었겠어요? 신났죠. 무슨 거부감입니까? 한쪽의 적이 완전히 우리 손에 섬멸 당한다는 이것보다 더 기쁜 소식이 어디 있겠어요? 이런 사람은 합천의장 돼도 괜찮아요. 청문회할 것도 없어요.
그런데 전쟁을 통해서 전쟁이 끝나고 난 뒤에 사울 왕은 자기도 미처 몰랐던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이 자기 속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몰랐던 거예요. 9절에 보면 “사울과 백성이 아각과 그 양과 소의 가장 좋은 것 또는 기름진 것과 어린 양과 모든 좋은 것을 남기고 진멸키를 즐겨 아니하고 가치 없고 낮은 것은 진멸하니라” 되어 있죠.
다시 3절 봅시다. 지시한 것은 뭐냐 하면 “모든 소유를 남기지 말고 진멸하되 남녀와 소아와 젖 먹는 아이와 우양과 약대와 나귀를 죽이라” 했거든요. 여기에는 좋은 것 따로 고르라는 말이 없어요. 그냥 다 죽이라 한 거예요. 거기에 대해서 사울도 기분 좋아서 오케이하고 들어간 거예요. 하고난 뒤에 보니까 아, 아까운 거예요.
그러면 이 전쟁은 무슨 전쟁이냐 하면 이스라엘 사람들 속에 하나님께서 아말렉과 이스라엘을 붙이는 가운데서 세상 모든 인간이 갖고 있던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거리가 어떻게 이게 현실 그 자체인가를 알려주는 계기가 되는 거예요. 이게 현실 그 자체에요. 현실 그 자체.
인간은 현실을 안다고 우깁니다. 아니에요. 현실은 우리가 모르는 그 이상의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거리에 우리가 놀아나고 있어요. 어떤 어려운 사람이 배고파서 힘들고 잘 데도 없어가지고 교회 와서 “집사님, 내가 곧 취직되는데 한 몇 일간만 잠자리하고 하루 세끼만 주면 고맙겠습니다.” 그래서 그 집사님이 너무 불쌍해서 갑자기 어떤 성경구절이 막 수십 개 떠오르죠. 나그네와 고아와 과부를 도우면 내가 보상하겠다든지 이웃을 사랑하라든지 선한 사마리아인이 어떻고 뭐 온갖 구절이 다 나오잖아요. 오른 손이 한 걸 왼손이 모르게 하라. 그들에게 한 것이 곧 나에게 한 것이라. 그런 구절도 뭐 하여튼 들은 게 문제라. 쭉 들어가지고 도와줬다 이 말이죠.
도와줬을 때에 자기는 뿌듯했겠죠. 하나님의 성령이 있는 내가 드디어 성령 값을 한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찬스다. 어려운 사람을 도와준다 할 때 하늘나라에서 얼마나 천사들이 기뻐하고 그게 성도야, 짱이야, 그게 간증거리지, 하고 했겠죠. 설마 자기에서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거리가 나올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죠.
그렇게 건사해줬더니만 그 사람이 나중에 일주일 뒤에 있다가 소리 소문 없이 장롱 속에 있는 폐물 다 들고 나갔을 때 그 많이 알던 주의 말씀은 다 제켜두고 세상에서 통하는 한 문장만 그 머릿속에 마지막 남는 겁니다. 그게 뭐냐 하면 ‘머리 검은 짐승은 거두어주는 게 아니다’ 이건 성경에 나오는 게 아니고 세상에서 나오는 거예요. 세상 것이 후차적으로 알았던 성경지식을 이기고, 마지막까지 남아있는 것은 세상 것입니다. 다음에 만나면 죽여버린다. 돈이 아까운 것이 아니고 너는 나에게 모욕감을 주었어. 사랑을 은혜를 욕으로 돌리는 이거는 반칙이지, 우리 게임에서! 돈을 요구할 게 아니고 나가면서 고맙다는 소리를 하고 나가야지, 이게 뭐고? 그게 어떤 폐물인데. 갑자기 정 문제에서 돈 문제로 바뀌어버렸어요. 돈 문제로 바뀌었어요.
그렇게 가고 난 뒤에 신고를 하죠. 드디어 체포했어요. 체포하니까 또 생각나는 거예요. 몇 번 용서합니까? 일곱 번 용서에다가, 장발장 이야기 있잖아요. 어떤 신부가 장발장이 훔친 금촛대를, 그거는 내 것 아닙니다. 내가 준 겁니다. 해가지고 또 소설에 나오는 장발장 이야기까지. 그래, 아무리 악한 자라 할지라도 기본적으로 주께서 주신 신의 공유적 속성, 착한 양심은 있으니까 감동받을 거야. 형제여, 오세요. 우리 노래 하나 부릅시다. 사랑은 언제나 오래 참고~ 노래 부르고. 참내. 그래서 인사하고 그날 밤에 가면서 그 사람은 초등학교 자식들 저금통을 다 털어가지고 나갔을 때, 또다시 생각나는 것은 ‘머리 검은 짐승은 거두어 주는 것이 아니다’ 또다시 되풀이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소위 신자라고 우기는 교인은 주님을 믿어본 적이 없고 자기의 착함을 믿은 거예요. 예수님 때문에 변화된 자기 자신을 우상화시킨 거예요. 혹시 길에서 그런 어려운 사람 있거든, 도움 달란 사람 있거든 오늘 재수 되게 없네, 생각하고 그냥 도와주고 잊어버려야 돼요. 오늘 또 잘못 걸렸다. 의미를 두면 안돼요. 의미를. 지난 번에 헌금 10만원 그거 안했더니만 강제로 뺏어갔구나, 저 사람 통해서. 주께서 내 돈을 뺏기 위해서 그 사람을 보낸 거예요.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은 이 세상 자체가 게임판이고 경쟁장입니다. 경쟁에 있어서 힘이 있느냐 없느냐의 판인데 힘은 돈으로 측정하는 거예요. 저 사람이 나에게 돈을 소비시키느냐, 돈을 벌어주느냐로 이 세상 모든 가치는 결정되는 겁니다. 그 정도로 우리는 단독적인 내 자랑에서 내가 발을 뺄 수 없습니다.
그런 인간이 어떻게 천국 백성이 되느냐에요. 그걸 지금 두 번째 시간에 해보자는 이야기에요. 어떻게 하는가? 사무엘은 폼으로 있는 게 아니죠. 여기 15장에 보게 되면 14절에 사무엘이 이야기합니다. “이거 무슨 소리야? 내 귀에 들리는 소리가 이게 환청인가? 아니면 이게 무슨 소리야?” 소리가 들렸어요. 이게 뭐냐 하면 양 소리, 소 소리가 들린 거예요. 이게 뭐야, 이게? 저 양이 왜 살아있고 저 소가 왜 살아있는데? 음메에~ 그러고 난리도 아니었어요. 어수선한 거예요. 깔끔하게 정리하라 했는데 어수선해버렸어요.
그러니까 사울이 여기서 또 종교를 빌미로 한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을 또 끄집어냅니다. 15절에 “사울이 가로되 그것은 무리가 아말렉 사람에게서 끌어온 것인데 백성이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하려하여 양과 소의 가장 좋은 것을 남김이요”
참… 하나님은 아무것도 안 받습니다. 벼룩의 간을 빼먹지, 왜 하나님이 인간의 것을 탐을 내요? 하나님은 주시는 분이지, 받는 분이 아니에요. 아무것도 안 받아요. 우리의 죽음도 우리 몸도 안 받아요. 오직 주께서 받으시는 것은 예수님 몸만 받아요. 우리는 아예 배제해버리고 받지도 않아요.
“주여, 이 몸을 바치겠습니다.”라고 베드로가 이야기했을 때, “아유, 귀한 몸이구나. 같이 가자.” 이랬습니까? “오지 마! 저리가! 오지 마. 나 가는 곳에 네가 올 곳이 못돼. 네가 거길 어디라고 와? 너 지금 착각하고 있는 거 아니야? 너 환상, 꿈꾸고 있는 거 아니야? 너 같이 붙어있다고 해서 내가 가는 곳에 네가 올 수 있을 것 같아? 누가 너를 그렇게 가르쳤어? 내가 그렇게 가르쳤어? 넌 오지 못해. 못가. 갈 수 없어.” “그럼 어떻게 해요?” “내가 다시 올게.” “안 오면 어떻게 해요?” “안 오면 할 수 없지 뭐.”
철저하게 주님께서는 우리의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이미 정욕 안에 지배받고 있는 상태이기 때문에 종속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 힘으로 우리의 정욕을 없애거나 탈출할 수가 없습니다. 내 자랑에서 내가 탈출하고 싶지를 않아요.
자기 애가 공부를 못할 때는요. “야, 네가 진짜 효자다. 뭐 맨날 50점, 20점. 너 성적 보니까 엄마로서 교회 가서 네 자랑할 수 있는 여지를 안 주니 네가 참 효자다. 네가 너 때문에 많이 겸손하다.” 그러니까 아들이 하는 말이, “이번에 모의고사 1등 했는데요.” “아, 그래? 그럼 생각 다시 해볼게.” 그러고 교회 가서 “이건 우리 자랑은 아니고, 애가 미쳤지. 모의고사 1등 했대. 나중에 서울 의대까지 내다볼 수 있겠나.” 이런 식으로. 자랑은 아니고, 뭐 이런 식으로.
사람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못하는 것은 그런 기회가 안 와서 그래요. 그런 찬스가 안 와서 그래요. 개뿔도 자랑할 게 있어야 자랑하지. 개코도 자랑할 게 있어야지. 몸이 튼튼합니까, 돈이 있습니까, 뭐 자랑할 게 없어서 말이죠. 그럴 때는 자기 자신이 나는 자랑 안한다고 정리해버려요. 이게 큰 실수에요. 자랑 안 하는 게 아니고 할 찬스를 안줬다니까요, 할 찬스를! 자랑은 아무나 하나. 자랑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니에요. 주제파악을 해야죠.
방법은 뭐냐? 방법은 여기 32절에 나옵니다. “사무엘이 가로되 너희는 아말렉 사람의 왕 아각을 내게로 이끌어오라 하였더니 아각이 즐거이 오며 가로되 진실로 사망의 괴로움이 지났도다 하니라” 아말렉 왕이 착각한 거 보세요.
사울 왕이 자기를 살려줬잖아요. 살려주고 난 뒤에 아주 좋은 유대관계를 맺겠다고 했거든요. 다시 말해서 이스라엘이 하마스 수장을 살려준 거예요. 그러니까 하마스 수장은 신난 겁니다. “우리 휴전합시다. 인질 교환합시다.” 이러고 있다고요. 그런데 이스라엘 선지자 사무엘이 와가지고, “하마스 대장 이리 와.” 그러니까 우쭐대면서 에이, 임금님도 용서해줬는데 용서해주겠지. “이제부터 내가 여호와 믿고 잘 하겠습니다.” “그래?”
그 다음에 33절, “사무엘이 가로되 네 칼이 여인들로 무자케 한 것같이 여인 중 네 어미가 무자하리라 하고 그가 길갈에서 여호와 앞에서 아각을” 어떻게 했습니까? “찍어 쪼개니라” 그러니까 아각을 사람으로 보지 않고 대나무 조각으로 보고 찍어 쪼개버렸어요. 아각을 찍어 쪼갰다는 말은 뭐냐? 이스라엘 전체가 하나님 앞에 찍어 쪼개져야 마땅하다는 겁니다. 이스라엘 전체가.
결국은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에 대해서 하나님의 방법은 뭐냐? 너를 대체할 자가 찍어 쪼개지는 것이, 우리 속에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거리가 있다는 것을 표하는 방법이죠.
그러면 우리 대신 누가 저주받았습니다. 누가 저주받았죠? 우리 주님이 저주받았죠. 그 분이 왜 저주받죠, 아버지한테? 죄 때문에 저주받죠. 그 죄는 누구 죄 때문입니까? 누구하고 관련되어 있어요? 우리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거리와 관련되어 있지 않습니까.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거리를 우리 손으로 해결합니까? 해결할 수 있어요? 내 자랑을 내가 벗어날 수 있습니까?
십자가를 졌다는 말은 내 정욕과 내 육신과 내 자랑이 내 손에서 해결 안 됨을 확정짓는 거예요. 너는 백날해도 사람 된다, 안 된다? 사람이 안 된다는 거예요. 지금이라도 당장 찍어 쪼개져도 지금 네 수명을 여기서 중지시켜도 너는 그동안 살아온 것만 해도 고마운 줄 알아라, 이 말이에요. 하루하루 살아가는 게 이상해. 아각인데. 이름 바꾸세요, 김 아각, 최 아각, 전부 다.
우리의 정욕이 안 빠지면 어떻게 합니까, 라고 물을 텐데 정욕이 있어야,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 이 더러운 게 있어야 이게 뭐로 이어지느냐 하면 감사로 이어지는 거예요. 감사! 십자가에 대한 감사로 이어지는 거예요. 이게 바로 성도에요. 정욕을 없애는 게 성도가 아니고 감사가 성도라니까요.
잠재되어 있는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은 여러분들이 살아가면서 계속해서 마주치면서 그런 기회를 가지게 될 거예요. 여기 계신 분이 한 달 수입이 한 이천만원 늘어난다든지, 부동산 한 서너 개 갖게 되든지, 애가 뭐 수석으로 합격한다든지, 스스로 ‘나는 당신의 종이 되겠습니다’ 하는 16기 영숙이가 오든지 뭐.
평소에 사람이 그럴 기회가 없으니까 자기가 굉장히 건전하게 사는 걸로 착각하고 있는데 인간은 건전함이 없습니다. 이 세상에는 사기 치는 자와 사기 당하는 자 두 종류밖에 없고 사기 치는 자의 특징은 다 한때 사기 당했던 자에요. 사기 당한 자만이 너만 치나, 나도 칠 줄 안다 해가지고 자기보다 더 어리숙한 사람에게 사기 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말은 결국 우리는 이 세상을 사랑하지 마. 세상에서 살지 말라, 가 아니라 이 세상 것을 사랑하지 않는 방식으로 주께서 계속 머물게 하고 살게 하는 겁니다. 무엇이 우러나게 하도록? 감사가 우러나게 하는 거예요. 곰탕이라 하는 것은 우려내는 맛이에요. 곰탕 집 아가씨 트로트 하는 사람 있죠. 맨날 나올 때마다 우리 집 곰탕집인데 내 트로트도 곰탕 우러나오듯이 그렇게 맛있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 사는 맛이 감사하는 맛으로 살아가는 거예요. 계속 우러나는 거예요.
아, 이게 내 욕심이었고 이게 정욕이었구나. 이게 탐욕이었고 이게 자랑 아닌 척 하지만 이게 내가 자랑 못해서 환장해서 만나는 사람마다 자랑하는 거구나. 내 나이 팔십에 봐라. 거뜬하게 일어섰잖아. 목숨을 쥐고 있는 분은 주님인데, 그 목숨 쥐고 계신 분께 복종을 하는 자세 같으면 ‘지금 죽어도 괜찮습니다.’ 이렇게 되어야 될 건데 ‘아, 그래도 뭐 흑염소 좀 먹어놨더니만 효과가 있긴 있네.’ 그 흑염소를 죽이든지 해야지.
이스라엘을 하나님이 운영하고 관리하는 방법은 이스라엘을 파괴시키는 거예요. 시간이 흘러가면서 하나님이 함께 있는 이스라엘을 지옥에서 없애버리는 방식, 이스라엘 속에서 구원을 끄집어내는 방식이 그거에요. 이스라엘 속에서. 이스라엘을 파괴해주신 분께 감사할 때, 그것은 주께 복종하는 마음자세일 경우입니다.
그들이 누굴까요? 그들이 바로 선지자였어요. 선지자가 이스라엘 망한다 소리 들어가지고 예레미야, 미가 선지자들 있죠, 후선지자, 이사야부터 해서 욕 되게 많이 얻어먹었어요. 진짜 고난 많이 받았어요. 예레미야 같은 경우는 죽인다가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미가야도 마찬가지고요.
그런데 그 선지자들이 양보를 할 수 없었어요. 왜 양보를 못하느냐 하면 그게 세상이기 때문에. 세상은 망하라고 있는데 만약에 세상에 대해서 격려해버리면 세상이 자꾸 착각을 하게 돼요. 우리가 안 망할 자들인가? 우리가 왕이 될 상인가? 뭐 이런 식으로. 우리가 안 망해도 되는가? 뭔가 착각을 할 수 있어요. 망하라고 만든 게 세상인데.
이 세상은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거리와 함께 폭삭 망하게 되어 있어요. 자랑도 포기 못하고 육신도 포기 못하고 정욕도 포기 못하면서 망하기는 계속 망하면서 그 속에서 감사하는 사람은, 이미 그 바닥이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출생된 사람만 감사하지, 다른 사람은 감사할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코로나, 태풍, 지금 아이슬란드는 지진 900번 일어났죠. 곧 대화산 터진다고 5000명 피신해 있습니다. 미얀마 내전. 세상 곳곳이 경쟁이고 투쟁이고 생존 경쟁이에요. 그래서 소위 신학자라는 사람들은 이런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이여, 선하신 하나님이 계신데 어찌하여 이런 불상사가 일어납니까? 하나님은 혀가 있어도 말 못하는 혀 잘린 하나님이십니까? 이런 식으로 또 민중항쟁하고 광주에 가서 데모하고 전두환 죽이라고 협박하고….
제가 부산강의에서 알라 믿는 사람들이 뭐라고 한다 했어요? ‘알라는 위대하다’ 했잖아요. 제가 그걸 바꿨잖아요. 신은 위대한 게 아니고, 신은 초라해요. 누구보다 초라하고? 우리보다 더 초라하죠. 누가 그렇게 만들었는데? 세상이 그렇게 만들었어요. 우리도 똑같은 세상에 살면서 우리는 초라하기를 왜 거부합니까? 벌써 낌새가 다르죠? 분위기 다르잖아요. 주님은 낮아졌는데 우리는 높아지려고 하잖아요. 버티려 하고 나름 선방하려고 애쓰잖아요. 도대체 그 마음이 뭐였겠어요? 나는 망해지면 안 된다는 거예요. 왜? 근거가 뭔데?
주님의 뜻은 그게 아니에요. 네가 이미 거듭났으면 충분히 망해져도 상관없다는 거예요. 세상에 살게 하고 안 살게 하고는 주님의 소관입니다. 우리가 애쓴다고 더 사는 게 아니에요. 우리는 이 땅에 감사하기 위해서 살아가는 그 임무와 사명이 있습니다. 범사에 감사하기 위해서.
끝으로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건 그거에요. 우리가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과 육신의 정욕을 제거하지 못한다고 단정 지었었는데, 나름대로의 노력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하는 그런 주관이 있을 수 있어요. 노력하면 되지 않느냐. 이 정욕이라는 게, 욕심이라는 게 노력한다고 되는 게 아니에요. 그 이유가 뭐냐 하면, 이것은 원리니까요, 여러분 다 알고 있지만 다시 한번 이야기합니다. 갈라디아서에서도 했고 에베소서에서도 할 수가 있어요, 앞으로.
인간이 있는데 인간의 욕심, 정욕은 인간이 만들어 낸 게 아닙니다. 만들어 낸 게 아니고 주위에서 덮어진 거예요. 내가 속한 세상에서 덮어온 거예요. 그러니까 나라는 존재는 세상의 생산물이에요. 세상 따로 나 따로 이것은 바보가 아닌 이상 지금 그거는 말도 안 되는 소리에요. 내가 세상의 일부에요.
내가 세상에 영향을 주고 세상은 나에게 영향을 주면서 우리는 그렇게 나의 이야기, 일생의 이야기를 지금도 일기책에 적고 있는 거예요. 내가 쓰는 단어, 내가 쓰는 개념, 다 어디서 온 겁니까? 이건 좋고 이건 나쁘고 그 구분은 어디서 온 거예요? 그것은 교육에서 온 거예요. 누가 교육시켜줍니까? 세상에서 세상사람 되라고 철저하게 교육시킨 거예요. 그 교육에 대해서 우리가 거부반응을 나타냅니까? 거부반응은커녕 스펀지가 빨아들이듯이 쏙쏙 빨아 당겼습니다. 이미 우리 속에 있는 악마와 세상을 장악하는 악마가 서로 잘 통하도록 되어 있어요.
거부는 어디서 오는 거부냐 하면 십자가의 자기 부인, 그거는 거부대상이에요. 우리가 이유도 없이 무조건 거부해요. 십자가의 자기를 부인하라는 그 이야기는. 그리고 십자가만이 현실이고 이 세상이 무덤이고 무덤이 현실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거부합니다. 이 찬란한 문명은 어쩌라고? 수많은 사람이 오늘도 교회에서 기도하고 있는 이건 무의미하단 말인가? 이런 식으로.
어떤 사람은 노골적으로, 너만 구원받았나. 구원이란 개념도 몰라요. 구원은 개인이 받는 게 아니고 어느 소속된 환경이 구원이에요. 예수님의 세계가 구원이지, 내가 구원받는 게 아닙니다. 그 출신이죠. 예수님의 성령의 작품이죠. 우리는 성령의 작품으로서 이 세상에 살고 세상 사람은 악마의 생산물로 이 세상에 살고.
따라서 세상 사람은 이 세상에 대해서 어떠한 거부감도 없고, 성령 받은 사람은 이 세상에 푹 젖어있으면서도 그것보다 더 센 힘으로 ‘이게 바로 이 세상을 사랑치 말라는 요한일서 2장 15절, 16절이 이런 상황, 이런 경우를 두고 이야기하는 거구나.’ 하는 것을 감잡죠. 감을 잡는다고요. 성령 안 받은 사람은 그것이 굉장히 신기해가지고 ‘너는 어디서 무슨 공부, 누구한테 그런 설교 들었는데 그런 감이 오느냐?’ 이건 설교 듣고 온 게 아니에요. 이건 성령이 없으면 거부감을 나타내게 되어 있다니까요. 내가 그토록 죄인입니까? 그토록 난 어떤 희망도 없단 말입니까?
왜 여러분한테 희망이 없습니까? 희망 있죠. 골라먹는 재미가 있잖아요. 죄, 골라짓는 죄. 31가지의 베스킨라빈스 아이스크림, 골라먹는 재미가 있잖아요. 주께서 살려주는 한 이것저것 집적대면서 ‘아, 이것도 육신의 정욕이고 내 자랑이구나. 아, 주께서 이것 때문에 수난 당했구나. 이것 때문에 짓밟혔구나.’ 그것을 경험케 하는 그 즐거움이 있어요, 이 세상에서. 예수 믿고 산에 가서 자살하고 그런 거 없어요.
우리에게 있는 그 거부성, 육신의 정욕은 복음을 거부하죠, 그 거부성이 있는데 거부되지 않는다는 것은 누가 작용하기 때문입니까? 세상의 정욕과 육신의 자랑보다 더 센 힘으로 오히려 정욕과 육신과 자랑을 다루고 계시는 분의 힘 있는 권세, 여기에 대해서 항상 회고적으로 감사하고 돌이켜서 고맙다 아니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고린도후서 1장에서 세상의 모든 것이 하나님 앞에 하등 오류도 없고 실수 한 적도 없다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모든 것이 아멘이고 모든 것이 오케이고 모든 것이 수월하게 방해받음 없이 일이 제대로 잘 추진되고 있다는 겁니다. 이 세상의 모든 일이. 세상을 한꺼번에 보시기 바랍니다.
끝으로 이 이야기하고 마치겠습니다.
우리는 변화를 기대하죠. 지금보다 더 나은 내 삶을.
그러나 변화는 없습니다. 오직 ‘변했음’만 있죠. 이미. 과거완료에요. 우리는 이미 그리스도와 우리가 한 몸이 되고, 나는 복종해야 될 주님이 계시고, 우리의 재미는 주어진 상황이 주께서 주신 상황인 줄 알고 그 상황을 거부하지 않고 그냥 술술 받는 거예요. 그 상황을. 그게 세상이 되었든 뭐가 되었든 평가하지 마시고. 이것도 주께서 주신 선물인데 말씀이 말씀대로 증명하기 위한 선물.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것을 바로 내 자랑거리로 여겼던 내 죄입니다, 라는 것을 들추어내는 하나님의 선물로 남은 인생을 즐겁게 보내시기 바랍니다. 이 밤도 즐겁게 보내시고.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말씀이 말씀대로 살게 하옵소서. 우리 안에서 우리의 욕심만 살아나지 말고 세상을 사랑치 말라는 말씀도 같이 겸하여 살아나서 결국 찬양과 감사는 우리가 복종해야 될 주님께 돌리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