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강의

세상이란

아빠와 함께 2023. 12. 15. 19:20

서울강의20231019a 요한일서 2장 15절(세상이란)-이 근호 목사


나는 나에게 손을 뗐음에도 불구하고 주께서 이끌어주심이 성립하는 그것은 바로 환경 때문에 그런 겁니다. 환경. 우리가 속해있는 환경. 그 환경이 오늘 해야 될 요한일서에서는 ‘세상’이라고 되어 있는 겁니다.

요한일서 한번 봅시다. 요한일서 2장 15절에 보면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 이렇게 되어 있죠. 거기 ‘세상’이 나오죠. 여러분들이 잘 아시다시피 이걸 한번 총정리 할 필요가 있습니다. 뭔가 정리하게 되면 세상이 달리 보이니까 깔끔하게 보이니까 좋아요. 제가 정리해드리겠습니다.

처음에 하나님과 아들(아드님)이 계시죠. 여기에 성령님이 또 함께 계시고요. 언제? 세상이 만들어지기 전에. 이 세상이 만들어지기 전에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이럴 때 여기서 그냥 세상이 나오는 게 아니에요. 하나님과 아들, 이 두 분 사이에 계약 또는 언약이 있었어요. 창세 전 언약. 이 언약을 품고 만들어진 것이 바로 천지에요. 이 세상, 하늘과 땅입니다. 하늘과 땅이 만들어진 거예요.

그러면 언약이 뭐보다 먼저냐 하면 하늘이나 땅, 바다 이것보다도 하나님의 언약이 먼저에요. 언약이 먼저입니다. 그래서 해와 달과 별이 있다. 여기 인간이 있다. 그러면 인간은 어디까지 아느냐 하면 ‘어? 해가 있네. 달이 있네. 별이 있네.’ 여기까지는 알아요. 여기까지는 아는데 여기까지 알아봤자 결국 이것은 ‘나는 어떤 인간인가?’ ‘나는 이 정도 아는 인간이다. 해와 달과 별, 동물, 식물이 있다, 이 정도 아는 인간’으로 내가 되돌아온다고요.

그럼 여기서 뭐가 빠졌습니까? 뭐가 빠졌죠? 언약이 빠진 거예요. 언약이. 언약이 빠졌으니까 이 인간은 인간이 아니에요. 이건 흙이 되는 겁니다. 그럼 공식 하나 나온다면, [흙+언약=인간] 이렇게 되겠죠. 흙에다 언약이 있어야 인간이다. 그런데 자연은 사람 말 안 듣거든요.

그러니까 흙+언약인데 언약은 하나님께서 줘야 들어오는 거예요. 언약은 줘야 들어온다고요. 그래서 공식을 더 정확하게 하면 흙+미지의 것이 들어왔을 때 인간이 되는 거예요. [흙+(?)=인간] 이 미지에 들어온 사람 중 한 사람을 대라면, 흙+노아언약이 들어왔더니만 인간이 되는 겁니다.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창 6:8) 이 언약이 들어왔기 때문에 노아는 심판에 이르지 않죠. 왜냐하면 노아 안에 언약요소가 있기 때문에 노아는 심판을 받지 않습니다. 그러면 언약이 없는 사람은 완전히 물에 다 빠져죽었죠. 물에 다 빠져죽은 거예요.

전혀 어려운 게 없습니다. 창세기 3장도 마찬가지에요. 창세기 3장은 약간 좀 난해합니다. 창세기 3장에서 남자는 흙이 되죠. 남자는 흙인데 남자+여자가 한 가족을 이루잖아요. 그런데 여자는 약속에 의하면 여자의 후손이니까, 여자의 후손에 의해서 언약이 주어지니까 여자는 흙이 아니고, 남자는 흙인데 여자는 생명이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흙+생명이 부부가 되는 겁니다. [흙+생명=부부] 생명이 흙과 결합해서 드디어 부부가 되는데 여기서 뭐가 나오느냐 하면, 부부라는 말 대신에 여기에 언약의 자식과 비-언약의 자식, 이게 나옵니다.

흙(남자)+생명(여자 이름 하와는 생명이에요), 흙에 생명을 더했는데 이제 언약의 자식이 나오게 되면 자식이 나왔으니까 흙과 생명은 제거가 됩니다. 늙어 죽어야 돼요. 취소가 되는 겁니다. 취소가 되면서 거기서 언약이 드디어 나오는 데에 성공한 겁니다, 하나님께서.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인간을 이용해서 계속 언약, 언약, 언약,… 언약의 노선을 유포하고 퍼트리는 데에 주님께서는 실수가 없이 계속 성공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생각에는 이 공식이 뭔가 마음에 안 들 수가 있어요. 흙+생명=언약의 자식, 이렇게 나오면 마음에 들겠는데 여기서 뭐가 나옵니까? 비-언약의 자식이 나오는 이게 마음에 안 들 겁니다. 왜 비-언약의 자식이 여기 나와야 되느냐 하면, 그래야 흙과 결합한 이 생명은 항상 생명이 될 수 없고 저주받아야 될 요소를 함께 부여함으로써 ‘생명을 포함하는 쪽이나 흙 쪽이나 둘 다 온전한 완성체는 계속 아니다’라는 사실을 나타내고 있기 때문이에요.

여자의 후손으로 메시아가 온다고 해서 여자가 구원받은 사람입니까? 아니잖아요. 그냥 여자의 후손 메시아가 오기 위해서 동원된 사람이죠. 그래서 그 자체로서는 온전함도 아니고 완전함도 아니고 그냥 소모용이 되는 겁니다. 역사 속에서 언약의 자식과 비-언약의 자식이 나오니까.

그런데 이 공식에서 계속 나가봅니다. 이 공식에서 보면 비-언약의 자식, 이들의 세계를 ‘세상’이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세상. 언약의 자식은 순수하게 세상이 될 수 없어요. 왜냐하면 여기는 하늘의 요소가 있기 때문에. 하늘의 요소를 품고 있기 때문에 온전하게 세상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그런데 비-언약은 온전한 세상이에요. 상당히 부정적이죠. 세상이라는 자체가 굉장히 부정적입니다.

하나의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아담+하와가 결혼해서 한쪽은 아벨 나왔죠. 한쪽은 가인 나왔죠. 하나님께서는 아벨을 죽이도록 하고 가인은 살리도록 하죠. 가인이 아벨을 죽였는데, 죽은 자는 그냥 죽고 죽인 자는 이 세상을 이루게 하는 거예요.

그래서 가인의 후손이 창세기 4장에 보면 세상을 본격화하면서 점포 차렸죠. 점포 차리면서 그들의 특징인 언약 없이 꾸려나가는 세상이 가인의 후손으로서 이제 개시가 됩니다. 언약 없이 꾸려나가죠.

그런데 언약 없이 꾸려나가는 이것을 하나님께서 부정했다, 라고 하는 증거가 뭐냐 하면 언약 자식의 계열에서 노아가 나오죠. 노아는 하나님께 은혜를 입었잖아요. 언약을 받았잖아요. 그러면 ‘언약을 받았다’는 말은, 둘 중 하나입니다, 물어볼게요. 1번-지식 받았다, 2번-현실을 받았다, 몇 번입니까? 어느 쪽입니까? 지식 아니고 새로운 현실을 받은 거예요. 새로운 현실.

우리가 이것을 자꾸 놓쳐버리면 안돼요. 언약 공부해서 지식으로 끝나버리면 아닙니다. 이건 새로운 현실을 받은 거예요. 노아 때 뭐 물로서 작살났죠. 노아 식구 빼놓고 다 죽었습니다. 물 덮여서. 제가 이런 이야기하면, 노아 때는 참 신났겠는데… 노아만 신났죠. 사실 노아도 신난 게 아니에요. 무서웠죠. 그럼 요즘은? 요즘은 왜 이렇게 신나는 이벤트를 하나님께서 준비 안 하셨는가? 신앙생활하기 힘든데 뭔가 멋있는 거, 획기적인 것을 보여주면 좋겠는데 왜 안하셨는가, 하겠죠.

요즘도 보여줬습니다. 어떻게 보여주느냐 하면 시간차로 보여줘요, 시간차로. 이 세상과 실제 현실을 어떻게 하는가? 이 세상은 뭡니까? 가인의 후손 쪽이에요. 부정적인 거예요. 이 세상 쪽으로 미래가 밀려와요. 이게 어려워요, 미래가.

세상 쪽으로 미래가 밀려오는 이유가, 이 세상은 인간의 지식이기 때문에 역사이기 때문에 미래 쪽으로 나아가려고 해요. 희망, 포부, 기대, 계획하는 것 이런 거 가지고 자꾸 내 쪽에서 다음 달엔 잘할게, 한 달 뒤 계획은…, 10년 뒤에 이런 구상을 하고 있다, 미래 쪽으로 뭔가 자기가 계속 일을 벌여나가려고 하는 거예요.

그런데 언약은 미래에서 밀려오는 거예요. 미래에서 밀려오게 되면, 미래에서 밀려오는 쪽이 세상 속으로 들어 와버리면, 여기서 세상 속에 언약 백성이 생깁니다. 이걸 저는, 샤니 케이크 위에 건포도 혹은 노인 얼굴 피부에 버짐. 그건 약간 흉측하다만. 미래 자체가 밀려온 거예요. 미래소년 코난.

미래 자체가 밀려오니까 좋은 점은 뭐냐? 현실에서 통하는 어떠한 규칙과 제도와 법과 헌법이라든지 이런 사회적 상식에 대해서 전혀 구애받을 필요가 없는 겁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이 세상을 꾸려 나가는 데에 필요한 제도들이거든요.

우회전할 때는 잠시 멈췄다 가라, 이런 거. 운전할 때. 그거 누구 위함입니까? 하늘나라 위함입니까? 거기에 대해 전혀 구애받을 필요가 없어요. 그런데 멈추지 않고 그냥 갔는데 마침 경찰이 봤다. 벌점 20점에다가 벌금 15만원 냈다 합시다. 전혀 구애받을 필요 없어요. 왜? 내 돈이 아니고 주의 돈이기 때문에. 그런데 판사 앞에서 그 소리했다고 판사가 화가 나서, “너는 10년 언도. 너 같은 사고방식은 도저히 용납 안 된다. 너는 미친 인간이니까 10년 동안 사회 격리하자.” 해서 10년 언도받고 교도소 갔습니다. 전혀 구애받을 필요가 없어요. 왜? 이 세상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그래도 너는 개과천선 못하고 정신 못 차렸지, 해서 사형을 시켰다. 죽어도 상관없어요. 구애받을 필요 없습니다.

어떤 어린 오빠에게 자기보다 어린 여동생 둘을 엄마가 부탁합니다. “내가 어디 갔다 올 테니까 동생들 잘 돌봐라.” 그래서 그 오빠가 어린 여동생 둘을 잘 돌보고 있는데 그걸 창문가에서 누가 엿듣고 있어요. 창문가에서 엿듣는 누군가를 보고 “거기 누구십니까?” 문 열어주니까 그 사람이, 아, 이야기를 너무 재미있게 한다고. “당신은 누구십니까?” “난 피터팬. 내 옆에 있는 사람은 팅커벨.” 그랬거든요.

그래서 “왜 왔습니까?” 이야기가 너무 재미있는데 그 이야기를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알려주면 안 되느냐고 이야기했어요, <피터팬> 동화책에서. “당신 나라가 어떤 나라인데요?” “우리는 아무리 세월 흘러도 어른이 되지 않는 나라입니다. 꿈의 세계입니다.”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어른이 될 필요가 없는 세계. 어린아이만 있는 세계. 그러니까 그 오빠가 “어떻게 갑니까? 날지를 못하는데 우리가 어떻게 갑니까?”라고 이야기하죠.

지금 미래의 세계는 이 세상하고 전혀 달라요. 왜냐하면 언약의 세계이기 때문에. 그럼 미래가 우리한테 밀려와서 우리가 언약의 사람으로 산다면 이야기가 통하겠습니까, 안 통하겠습니까? 전혀 이야기가 통하지 않죠. 그게 성경에 보면 신약에 세 군데, 구약에 한 군데 나오는데 구약 이사야 6장에 보면 “네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한다”(6:9). 마태복음 13장에도 나와 있고(13:14), 사도행전에도 마지막에 나와 있고(28:26), 요한복음 12장에도 나와 있어요(12:39-40).

예수님께서 어떤 일을 하시면서 사람들이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못 알아듣고 하신 일을 못 알아보잖아요. 그러니까 그 말씀이 딱딱 그 자리에 투입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너희는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한다.”라고 하는 겁니다.

이걸 정리하게 되면, 이 세상에 어떤 특이한 존재가 출몰하는데 그들의 특징은, 미래에서 밀고 들어온 거예요. 제가 여기서 미래라고 한 말은, 노아 홍수 언약에 의해서 이 세상은 멸망당하게 되어 있어요, 멸망 그 이후에 원리원칙이 미리 멸망당할 세상 속으로 미리 들어온 거예요. 믿거나 말거나요. 여러분도 깨닫지 못하면 곤란한데.

이건 어떻게 아느냐 하면 우리가 생각하는 것은, 흙에 속한 모든 인간은 미래를 향하여 계획을 잡아요. 미래를 향하여. 미래를 향하여 계획을 잡으면 언약이라는 게 필요 없어요. 언약에 대해서 알죠. 지식으로. 그런데 중요한 것은 언약이 지식이 아니고 뭐라고 했습니까? 이게 현실성을 띄고 있어야 된다는 거예요. 현실성.

“언약 압니다. 언약 이런 겁니다. 예수님의 살과 피가 언약이고 뭐 어떻고 저떻고…” 그럼 하나님은 말합니다. “그런 거 설명하지 말고 네가 지금 존재한다는 자체가 언약 그 자체인 것을 네가 받아들이느냐?” 할 때 인간들은 “그거는 못 받아들이죠. 나도 지금 살기 바쁜데 그것까지…. 내가 피터팬도 아니고요. 그건 곤란하죠.” 이렇게 이야기할 거잖아요.

그럴 때 주께서 하시는 말씀이, “내가 말씀으로, 네가 안 되는 것을 내가 되게끔 한다.” 그게 요한일서에요. 한번 볼까요, 요한일서. 요한일서 2장 13절, “아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앎이요” 지식이 아니죠.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니라” 이게 지식입니까, 이겼다는 게?

“제가 언제 악한 자를 이겼습니까?” 하면, “네 존재 자체가 악한 자를 이긴 거다.” “저는 그것을 못 받아들이겠습니다.” “내가 이 말씀으로, 요한일서 2장 13절 말씀으로 네가 받아들이도록 내가 가만두지 않겠다.” 왜? 나의 언약은 현실화되어야 되기 때문에. 나의 언약은.

흙에서 태어난 인간은 내가 여기 흙에서 인간으로 있다는 이걸 유일한 현실로 붙들고 있어요. 이게 현실이에요. 이 붙들고 있는 현실에서 내 힘으로 내일까지 밥 먹고 살아야 돼요. 또 한달 뒤에도 계속해서 규모 있게 계획을 짜고 열심히 일해서 계속 살아나가야 된다고요.

<인간극장>에 보면 괴산에 있는 어떤 60대 후반의 아저씨, 아줌마가 몸 다 망가지면서 열심히 통닭 튀기며 충북 괴산에서 살아가요. 그 사람들에게 내가 가서 언약에 대해 이야기하면 알아듣습니까? “어디서 왔습니까?” “복음 전하러 왔어요.” 그럼 그 사람들이 나한테 뭐라고 하겠어요? “당신이 보다시피 우리가 지금 복음 들을 형편인지 한번 보세요. 지금 시간 쪼개서 일해도 장날에 손님 못 치러냅니다. 이렇게 힘든데 내가 한가롭게 복음 들을 시간이 어디 있습니까? 그건 낭만적이고 사치스러운 여가 활동 할 때나 하는 것이지, 저희는 상관없습니다.” 이렇게 이야기할 때, 그들에게 있어서 복음은 현실이 아니고 지식입니다. 지식으로 되겠죠.

그다음에 14절 봅시다. “아이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아버지를 알았음이요 아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알았음이요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강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 속에 거하시고 너희가 흉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라” 이렇게 되어 있죠, 14절까지.

그렇다면 이 말씀을 이렇게 해봅시다. 내가 여기 있다는 것은 내가 여기 없다는 말과 같은 말이에요. [내가 여기 있다=내가 여기 없다]. 이번 수련회 교재를 썼는데 교재에서 제가 ‘의미’와 ‘뜻’을 구분했어요.

‘의미’는 포괄적이고 다른 데서 주는 것이고, ‘뜻’은 활용하는 거예요. 이 세상을 사는 데에 적절히 유통되는, 남과 소통하기 위해서 하는 그걸 뜻이라고 이야기했고, meaning 의미라 하는 것은 이 뜻을 제공하는 다른 보이지 않는 출처를 의미라고 이렇게 구분했습니다. 뜻은 실용성, 의미는 그 실용성 있는 뜻을 줄 수 있는 출처. 출처인데 보이지 않는 출처에요.

내가 여기 있다는 것은 실은 진짜 현실성 있는 나는 따로 있고, 내가 여기 있다는 것은 내가 여기 없다는 것이다. 또는 내가 없어진다는 뜻이다. 이게 뭐냐 하면 ‘언약적 사고’에요. 언약적 사고. [예수님께서 내가 이 땅에 왔다는 것은 내가 이 세상을 떠난다는 뜻이다.] 똑같은 거예요.

아이들아 또는 청년들아, 그다음에 아비들아. 방금 우리가 봤잖아요. 요한일서 2장 봤죠. 이들이 이 세상에 있습니까, 없습니까? 이 세상에 없어요. 없고, “아이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아버지를 알았음이요” 했잖아요. 하나님 아버지를 안 사람이 이 세상에 출몰이 되면 그들이 뭐가 되느냐 하면, 없었는데 새로 생긴 아이가 되면서 언약은 현실을 구비하게 되는 겁니다. 현실을.

‘목사님, 말을 왜 그렇게 복잡하게 합니까?’ 라고 하신다면 이게 복잡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내가 있어버리면 복음이 어떤 성경이 들어와도 이게 현실로 들어오는 것이 아니고 지식으로 들어와요. 현재 내가 있으니까. 있는데다가 성경 지식까지 추가하게 되면 내 있는 게 보충이 되고 보완이 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나한테 유리하고 나한테 이익이 된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런데 세상은 이미 언약에 의해서 심판대상이에요. 왜? 비-언약이니까.

자, 다시 봅시다. 세상은 뭐가 세상입니까? 언약이 없는 자들이 구성하는 것이 세상이에요. 언약이 없는 자들. 언약이 없다는 말은 이 세상 심판 이후의 미래가 아직 안 들어왔다는 뜻이에요. 노아의 경우를 한번 생각해보세요. 노아가 있다는 것은 우리 보기에 노아가 그 당시 세상에 함께 있는 걸로 보이잖아요. 그런데 유독 노아에게만 무엇이 주어졌습니까? 하나님의 언약이 들어 와버렸죠, 하나님의 언약이. 하나님의 언약이 들어왔으니까 노아는 언약을 지식으로 알았습니까, 어떻게 알았습니까? 당연히 지식으로 알죠.

노아도 인간이니까 지식으로 아는데 들어온 언약이 노아로 하여금 지식으로 머물지 않고 방주를 만들라 하거든요. 하나님께서 무슨 일을 벌이시려고 하는가? 방주 만들어! 만들었죠. 노아 자기가 방주 만들려고 했습니까? 아니죠. 하나님께서 방주 만들라고 지시했기 때문에 노아는 그냥 따랐을 뿐이에요. 노아가 방주 만들면 뭐합니까? 비도 한 방울 안 오는데. 그건 뭐 웃기는 이야기죠.

그런데 방주 만들고 있으니까 그다음에 방주가 뭐 쓸모가 있어야 되지 않습니까. 그냥 보트 만든 게 아니잖아요. 그냥 보트 만들었으면 비가 조금 오다 말았을 거예요. 방주의 방주 값을 하는 그러한 다음 조치, 언약의 다음 조치가 주어집니다. 그것은 전면적인 심판이죠. 물로 심판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노아가 탄 방주가 뜬다, 뜬다, 뜬다 하더니 떠버린 거예요. 떠버리니까 심판 속에서 노아의 현실은 뭐냐? 심판이 있고 그 가운데 노아의 방주는 두둥실 떠있는 상황이죠.

이걸 물 없고 홍수 없는 상태에서 언약만 있는 상태에서 필름을 과거로 잠시 돌려보자 이 말이죠. 돌려봐 버리면 노아 당시의 사람들은 노아를 볼 때 유별나게 볼까요, 안 볼까요? 안 보죠. 안봅니다. “저 사람은 뭐 하나님께 언약을 입었대.” “아이고, 계시 하나 뭐 받은 모양이다. 받으니 뭐 하노. 현실 변동과 아무 상관없는데.” 하고 그냥 그들은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사고팔고 잘 살겠죠. 노아도 물론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사고팔고 다 했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 없는 요소가 노아에게 특별히 있었고 이 세상에 없는 요소가 노아로 하여금 기존의 땅 위의 노아가 아닌 진실 된 노아, 방주 속의 노아로 하나님께서는 물 심판을 통해서 확연하게 드러나게 만들었어요. 참, 언약 무섭죠. 언약 무서워요.

제가 하나 질문할게요. 질문한다고 해놓고 답변은 내가 다 해버리는데 이 질문은 진짜 여러분이 답변해보세요. 두 개의 머리를 갖고 태어난 몸통이 하나인 아이가 있습니다. 한 사람일까요, 두 사람일까요? 어떻게 확인할 수 있죠? 두 개의 머리를 갖고 몸통은 하나로 붙어있는 샴쌍둥이가 태어났습니다. 한 사람일까요, 두 사람일까요? 옛날에 소크라테스 시대 때 물었던 거예요. 그냥 한 사람이다, 두 사람이다 쉽게 할 수 있는데 그 이유를 설명해줘야 돼요. 그 이유가 중요하죠.

그래서 어떤 사람은 이렇게 이야기했어요. 뜨거운 물을 부어서 두 사람이 울거든 한 사람이고 한 사람만 울면 두 사람이다. 성도가 이 세상에 함께 있으면서 이 세상 말고 다른 세상에 포함되어 있는지, 안 그러면 한 세상인지 어떻게 알아요? 현실에서 뜨거운 불이 주어지면 알겠죠.

그러니 이 세상에 속한 사람들의 특징이 있어요. 뭐냐 하면 성경을 아주 우습게 본다는 거예요. 성경을. 이 자체가 현실 설계도이고 이대로 지금 진행되고 있다고 증명해놨고 진행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자기가 언약 없이 흙으로 속해있는 이 세상이 너무 습관화되고 거기에 너무 친근하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성경의 현실성을 거부하게 되어 있습니다. 거부하는 거예요.

그래놓고 15절 한번 봅시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이렇게 되는 거예요. 여기에 대해서 우리가 할 말이 많아요. 이건 두 시간해도 모자라요. 그런데 한번 해봅시다. 이 말이 무슨 말인지.

다시 말씀드립니다. 12절, 13절, 14절, 특히 14절 같은 경우에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 속에 있기 때문에 너희가 흉악한 자를 이겼다”고 되어 있잖아요. 이겼다고 되어 있는데 이 이야기를 지금 누구보고 이야기하느냐 하면 이 세상 속에 같이 섞여 사는 하나님의 성도보고 이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모든 사람에게 이야기하는 게 아니고.

이 이야기 내용이 인간들이 받아들일 내용이 아니에요.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 속에 있기 때문에 너희는 흉악한 자를 이겼다는 말이 이 세상 속에서 논리적으로 증명될 말입니까, 이게? 미치지 않고서는 이걸 받아들이겠어요? 우리가 이거 안다고 해서 쌀이 나옵니까, 돈이 나옵니까?

“엄마, 엄마. 하나님 말씀이 나한테 거했어. 나 흉악한 자를 이겼어.” 하고 어떤 자식이 엄마한테 이야기한다면, “가서 숙제나 해라! 어디서 쓸데없는 걸 지식으로 배워가지고는….” 회사에서 상사한테 결재 받으면서 “저 부장님” “왜?” “말씀이 내 속에서 흉악한 자를 이겼습니다.”하면 결재판가지고 내려치면서, “너 회사 앞으로 안 다니려고 그런 소리하지? 회사에서 무슨 이상한 소리하고 있네.” 물론 그렇게 할 사람도 없지만.

아까 미래 이야기했는데, 미래소년 코난 이야기했는데요. 피터팬도 마찬가지고요. 사람들은 이렇게 이야기하죠. 인생이라 하는 것은 ‘잠깐 왔다가 가는 게 인생’이라고 하죠. 흔히 사람들 그런 이야기하죠. 잠깐 왔다 간다. 어디로 가는데? 어디로 가면 안돼요. 이미 와 있어야 돼요. 왜냐하면 말씀이 이 세상 바깥에서 기다리는 게 아니고 말씀이 이 세상에 이미 도달했다면 이 세상 안에 있는 말씀의 세계로 옮겨야지, 이 세상 끝나고 다른 데로 왔다 가는 게 인생이라면 어딘데요, 거기가? 가는 게 인생이라고 이야기하는 사람이 있는데 어디로 가는지 말하는 사람은 없어요. 그게 어딘데?

불신자 가정에서 그런 거 많아요. 애가 자기 어릴 때 엄마 죽으면 “엄마, 엄마 하늘나라 잘 있어. 내가 갈게. 나도 엄마 보고 싶으니까 갈게.” 이러거든요. 어디로 가는데, 둘 다? 둘 다 어디 가는데요? 왜 그렇게 책임성 없는 소리를 막 하는지. 이 세상 바깥에 다른 세계가 있는 게 아니에요. 그건 일반 종교이고.

믿거나 말거나 상관없이 이 세상 속에 이미 미래의 세계, 세상이 끝나고 난 뒤에 생길 그 세계가 이 세상 속에 이미 와있습니다. 아니 그것도 현실적으로 와 있어요. 지식으로 와있는 게 아니라 현실적으로 와있다고요.

성경 한번 찾아보겠습니다. 고린도전서 3장 21절, 좀 길지만 19절부터 보겠습니다. “이 세상 지혜는 하나님께 미련한 것이니 기록된 바 지혜 있는 자들로 하여금 자기 궤휼에 빠지게 하시는 이라 하였고 또 주께서 지혜 있는 자들의 생각을 헛것으로 아신다 하셨느니라” 자, 헛것이라 했는데 왜 헛것인지 알아야 돼요. 왜 헛것이냐?

20절, “그런즉 누구든지 사람을 자랑하지 말라 만물이 다 너희 것임이라 바울이나 아볼로나 게바나 세계나 생명이나 사망이나 지금 것이나 장래 것이나 다 너희의 것이요 너희는” 누구 것이고? “그리스도의 것이요 그리스도는” 누구 것이고? “하나님의 것이니라”

하나님의 것으로 그리스도의 것으로 우리가 이미 이 세상 생활을 하고 있잖아요. 죽어서 어디 가는데요? 우리 하고 있잖아요, 지금. 하고 있다 이 말이죠. 제가 이런 이야기하면 “목사님, 제가 이 세상 생활하고 있는데 하루하루 사는 게 왜 이렇게 구질구질하고 힘겹고 어렵고 코피 팍 터지고, 굳이 왜 이렇게 살아야 됩니까?” 그렇게 막 이야기하고 싶죠. 지저분하고 구질구질하고 일주일에 세 번씩 음식쓰레기 내놔야 되고. 왜 이렇게 쫓기듯이 후달리듯이… 몸은 점점 더 망가지고 왜 이렇게 굳이 살아야 됩니까?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런 삶이 기적이라고 생각해본 적 없나?” 다시 말해서 이렇게 지저분하고 어렵고 힘들고 온 몸이 안 아픈 데 없이 사는, 살아도 망가지는 이 몸이 이게 천국 백성이라는 생각으로 도약하는 이것이 기적 아니고 뭡니까? 아픈 몸이 건강하게 되고 가난한데 갑자기 부자 되어서 천국 백성으로 나아가는 게 그게 기적일까요? 그거는 이 세상 사람들이 미래를 계획할 때 이미 포함시킨 내용들이에요. 나는 1년 내에 뭐 사고, 10년 뒤에 빌딩 사고. 앞으로 20년 뒤에는 보험 넣었던 거 보험금 타먹고, 이런 거 있잖아요. 그거는 기적 아니에요!

그러면 성도는? 성도는 보험료 내고 보험금 타먹는 그걸 기적으로 보는 겁니다. 동일한 현상인데 한쪽은 흔해빠진 인간들 다 하는 거고, 성도는 이게 흔해빠진 인간들이 하는 것이 아니고 주께서 성도임을 보여주기 위해서 이런 현상을 유발시킨 그런 기적적인 결과로 좀 받아들이시면 안 됩니까? 무리에요, 그게?

노아도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똑같이 했어요. 노아도. 노아가 유별나게 살았으면 대번 사람들이 눈치 챘어요. 저거 뭐 있다, 뭐 있다, 저거 뭐 있다. 저거 언약 받아서 하나님의 기적이 늘 따라다닌다. 뭔가 있을 거다. 아니에요! 똑같이 살았어요, 똑같이.

제자들이 예수님을 옆에서 3년 동안 얼마나 관찰했겠습니까? 관찰해도 돋보기로 세밀하게 관찰했을 거예요. 진짜 메시아 맞는지. 믿습니다, 해놓고는 계속 관찰하는 거예요. 나는 하늘나라에 갑니다, 라고 하면서도 계속 관찰하는 거예요. 그런데 너무나 실망스럽게도 주님께서 평범한 인간 정도가 아니고 더 후진 인간으로….

이주일이 이야기했잖아요. 뭔가 보여준다고요. 맨날 ‘뭔가 보여드리겠습니다.’ 하고 비너스 노래 맞춰서 춤추며 나와가지고는 뭘 보여주겠다고 했는데 결국 이주일이 뭔가 보여줬습니까? 술 먹고 간암 걸려 죽은 그거 보여줬잖아요.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뭘 보여줬습니까? 뭘 보여줬는데요?

언약을 보여줬어요. 언약을. 언약을 보여준 거예요. 언약을 보여줬는데, 이 세상 사람들은 보기는 봤는데 깨닫지를 못한 언약을 보여준 거예요. 보기는 보았는데 깨닫지를 못한 언약. 지금 인간들은 엉뚱한 생각을 하고 있는 거예요.

요한일서를 봐도 여기 15절에 “이 세상이나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해도, ‘아, 경건하게 살라는 모양이다.’ 말도 안 되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네요. 여러분, 경건하게 살면요. 이 세상 사람들이 알아요. 경건하게 살면 이 세상 사람들이 안다고요. 그 특이점을 발견한다고요. 몰라야 돼요.

‘여기 있는 나는 없고 나는 언약 안에, 언약 안을 쉬운 말로 하면 예수 안이죠, 예수 안에 나는 있다’ 이 말을 하는데 굳이 우리가 돈 잘 벌고 건강하고 키가 갑자기 190cm로 자라나고 강남순처럼 갑자기 힘이 완력이 세지고 이래야 이게 설득력 있는 거예요? 아니죠.

[여기 있는 나는 없고, 나는 언약 안, 예수 안에 있다]는 이것. 그 열두 제자가 성령 받고 난 뒤에 무슨 힘을, 완력을 발휘했습니까? 오히려 삼손은 반대였습니다. 삼손의 완력은 세상 여자한테 걸려가지고 그 머리카락 완전히 다 날아갔잖아요.

세상 여자 들릴라가 이런 질문했는데 한번 들어보세요. “당신은 힘이 센데 그 힘은 어디 있느냐?”고 질문했어요(삿 16:6). 진짜 세상적이에요. 힘이 어디에 있느냐? 네 몸의 어느 부분에서 힘이 나오냐고 묻는 거예요. 이 질문 자체가 얼마나 비-언약적입니까.

인간은, 이 세상은요. 언약이 없어요. 언약이 없어서 언약 대신에 내가 할 수 있는 가능성만 계속 찾고 있어요, 가능성만. 지금보다 더 나을 수 있는 가능성만 계속 찾고 있다고요. 그래서 뭐하는데? 현재에서 미래로, 더 나은 미래를 추구하는 거예요.

그러나 언약은 준비된 거예요. 주님께서 이 세상을 멸망시키기 위해서 준비된 거라고요. 준비된 건데 자기 백성에게만 알음알음 그것을 주께서 그것을 알려주고 집어넣어준 거예요. 너만 알아라, 해서 집어넣어준 거예요. 성령을 통해서. 제자들도 마찬가지에요. “우리 가운데 하늘나라에서 누가 높습니까?” 얼마나 세속적이고 세상적입니까?

주님께서 그 앞에 누굴 세웠어요? 어린 아이를 세웠죠. 어린 아이같이 되지 않으면 아무도 하늘나라에 못 간다. 그럼 어린 아이를 데려와 보자. 데려와서 요모조모 한번 뜯어보자 이 말이죠. 도대체 어린 아이에게서 하늘나라 대목이 어디 나오는지. 안 나오죠. 왜? 어린 아이를 살펴보다가 벌써 1년 지나가지고 어린 아이가 어른 되어버렸는데요. 벌써 1년 지나면 어른 됐어요. 10년 지나면 어른 되는데요. 그럼 어느 대목에서, 주께서 도대체 어느 대목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어린 아이의 머리카락? 어린 아이의 엉덩이, 발바닥에서 어디 천국 가는 요소가 들어있어요?

이렇게 제가 말씀드리면 여러분들이 이해가 될지 모르겠습니다. [세상의 중심은 성도의 자리]에요. 세상엔 중심이 있어요. 미국이 아닙니다. 러시아가 아니에요. 세상의 중심은 성도의 자리입니다. 성령 받은 성도의 자리에요. 이게 사도행전에 쭉 나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헌금을 하다가 죽었죠. 반 하다가 죽었잖아요. 그럼 아나니아, 삽비라가 헌금하다가 죽으면서 새롭게 밝혀진 것은 뭐냐 하면 인간이 죽고 사는 그 지점이 바로 어디냐? 베드로가 이야기했어요. 네가 나를 속임이 아니고 성령을 속였다는 거예요.(행 5:3)

이미 성령이 이 세상을 관장하는 중심으로 이미 활동하고 있어요. 그 성령을 받은 자가 성도에요. 왜냐하면 성령은 새 언약이니까. 새 언약이 왔고 새 언약의 결과가 성도거든요. 성령이고 성령 받은 자, 그리스도의 영을 받은 자가 그리스도의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성도가 움직인다는 것은 중심이 지금 활동을 개시했다는 거예요. 조짐이 있다는 거예요, 결국. 성도가 활동한다는 것은. 그럼 성도의 활동을 누가 방해하고 있어요? 성도 본인이 방해하죠. 왜? 세상을 사랑하니까. 그런데 사실은 성도가 방해하는 것이 아니고 누가 방해하느냐 하면 마귀가 방해합니다.

이게 마태복음 2장에 보면 나와 있어요. 예수님 출생지를 찾아온 사람들이 있었죠. 동방 박사들. 동방 박사가 예수님 찾아서 올 때, 하나님께서 별을 베들레헴에 바로 보낼 수 있거든요. 어디를 들릅니까? 예루살렘에서 별이 갑자기 사라졌어요. 그러니 묻고 갈 수밖에 없잖아요.

왜 하나님이 그 일을 하느냐 하면, 세상에 있는 두 개의 주도권이 만나는 그 지점이 세상의 중심이라는 거예요. 한쪽은 하나님의 계시 받고 베들레헴에 있는지 모르지만 하여튼 예수님 따라가고자 하는 예수님 중심이 되고요. 예수님이 중심이라는 말이 무슨 뜻이냐 하면, 예수님을 공격하고 싶은 다른 악마 세력의 중심이 나타날 때 예수님 중심의 의미가 생기는 겁니다.

의미. 뜻 말고 의미. 인간 사회 소통에 필요한 뜻 말고. ‘이거 얼마에요? 이거 양파에요?’ 이런 뜻 말고 다른 의미. 숨어있는 악마가 활동하고 있다는 것을 캐내는 자극제가 되는 그런 의미 있는 성령의 활동, 그것이 밤하늘의 불꽃놀이처럼 팍팍 터지고 있는 겁니다, 이 세상에. 푸딩에 박혀있는 건포도처럼.

따라서 예수님 쪽에서 봐서는 세상이 없다는 사실이, 언약에 의해서 말씀에 입각해서 맞다는 말을 하기 위해 세상을 없애버리죠. 세상을 없애버리려고 하는 겁니다. 왜? 세상은 없으니까. 있는데? 없어질 거야. 없어질 거야.

그럼 뭐만 남기는데? 처음에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언약만 있잖아요. 그 언약만 남기고 세상을 없애버릴 거예요. 재편합니다. 천국과 지옥으로 재편해요. 세상이라 하는 것은 인간들이 임의로 만들었기 때문에 없애버리고, 불로 태우고 지옥과 천국으로 완전히 확립하고자 성령께서는 활동을 합니다.                    

따라서 세상에 있는 나는 없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나만 있어요. 그런데 그 과정을 보여주는 것이 바로 로마서 7장에서, “오호라 나는” 어떤 사람이다? “곤고한 사람이다”를 반드시 거쳐야 돼요. 왜냐하면 나는 현실을 만들어내질 못하기 때문에. 말씀과 하나님의 언약이 우리를 현실로 만들어내지, 내가 나대면 안돼요.

그래서 첫째 시간을 마치면서 부탁하고 싶은 것은 이거에요. 나대지 마세요. 설치지 마세요. 여러분이 설친다고 주께서 더 좋아하고 일이 되는 게 아닙니다. 일 망칩니다.

지금 우리가 어느 대목을 접근해가려고 하느냐 하면, 요한일서 2장 15절에 지금 접근해가고 있습니다. [이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 그것은 세상이 없기 때문이다. 또는 다른 말로 하면, 세상이 없어지기 때문이다. 다른 말로 하면, 결국은 언약의 세계만 남기 때문이다] 이런 뜻이에요.

경건생활 하라는 그런 뜻 아닙니다. 세상은 없어지는 거예요. 우리가 그렇게 좋아하고 그렇게 출세하려고 하는 이 세상 자체가 점점 희미해지고 날라가버려요. 그런데 그런 세상 앞에서 경쟁하고 비교하면서 좌절하고, 난 저거보다 못해. 나는 망했어, 망했어. 이게 무슨 의미가 있어요. 없어지는 건데. 없어지는 허깨비하고 상대하고 자기 자신을 비교할 하등의 이유는 없습니다. 10분 쉽시다.

 

 

서울강의20231019b 요한일서 2장 15절(세상이란)-이 근호 목사


성도는 이 세상과 상관없습니다. 그 이유가 뭐냐 하면 예수님께서 일찌감치 세상으로부터 쫓겨났기 때문에 그래요. 쫓겨났기 때문이고 성도는 쫓겨난 그분의 분신으로서 이 땅에 출생한 거예요. 분신으로서. 그러니까 족보가 달라요. 성도는 족보가 다릅니다. 이 세상에 잉태치 못한 자의 족보에요. 그럼 멜기세덱의 족보죠.

세상이 예수님을 버렸잖아요, 세상이. 세상이 예수님을 버렸는데 성도가 세상의 인습과 제도를 따를 하등의 이유가 없습니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든 시진핑이 어떻게 하든 김정은이 어떻게 하든 아무 상관이 없어요. 대선을 치르든 국민의 힘이 어떻게 되든 민주당이 어떻게 되든, 그야말로 마귀가 하는 말처럼 ‘그거하고 나하고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이게 성도에요.

그런데 우리는 ‘성도됨에 대해서 감이 안 옵니다.’ 이런 이야기하거든요. 감이고 대추고 간에 안 올 수밖에 없는 이유가 성도의 관리권은 누가 주관하고 있느냐 하면 말씀이 말씀되게 하는 과정 속에서 성도가 되는 거예요. 성도가 자기를 관리하는 게 아닙니다. 성도는 자기 관리하는 게 아니에요.

성도라는 것은 율법에 속한 자가 아니에요. 율법에 속한 자 같으면 자기가 율법을 지켜야 되는데 성도는 성령 관할이에요. 성령은 이미 율법이 완성된 것을 완성된 차원에서 성도가 성도로 살도록 주께서 친히 이끄시는 거예요. 성도라는 게.

주님이 일찌감치부터 버림받았다 이 말이죠. 버림받았으니까 거기에 소속되어 있는 성도도 같이 세상에서 버림받았기 때문에 이참에 좋잖아요. 상관할 필요 없잖아요. 우릴 버렸잖아요. 버렸는데 우리가 왜 거기다 끼어들고 상관을 해야 됩니까? 상관할 필요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과 세상 관계에서, 방금 세상이 예수님을 버렸다 했잖아요.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버렸죠. 여기에 대해서 성경은 뭐라고 하느냐 하면 요한복음 3장 17, 18, 19절에 보면 예수님이 세상을 심판했다고 되어 있어요. 예수님이 세상을 심판한 거예요.

그러면 예수님이 심판했다는 말은, 성도가 왜 이 세상에 태어나야 됩니까? 이유는 뻔하죠. 성도로 하여금 세상을 심판하기 위해서 성도로서 살게 하시는 거예요. 아이고, 난 세상 싫고 저기다 기도원 지어서 예수원 같은 기도원에서 기도나 할까, 지금 이렇게 살라고 성도된 게 아닙니다. 그건 비겁한 짓이에요.

마태복음 28장 20절은 여러분들 안 봐도 다 외웁니다.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그 말씀 여러분들 아시죠? 어디서 들어본 적 있죠. 묻습니다. 예수님이 어디 계십니까? 질문입니다. 어디 계십니까? 계시다며요. 너희들과 함께. 그런데 어디 계십니까? 히말라야? 튀르키예? 소말리아? 주님 어디 계셔요? 계시다면서요.

그러니까 그 질문 자체가, 여러분들 보세요. ‘어디 계십니까?’ 육하원칙이죠. 언제, 어디서, 무엇을. 어디에 계십니까. 육하원칙이 예수님에 대해서 적용이 될까요, 안 될까요? 안되죠. 그래서 예수님에 대해서 기사를 쓸 수가 없죠. 육하원칙으로 신문기자가 기사 못 쓰죠. 왜 그러느냐 하면 세상이 버렸거든요. 세상이 예수님을 버렸다고요.

버린 상태에서 성령께서 성경을 써버렸던 거예요. 그러면 성경은 뭐냐? 버림받은 자가 쓴 책이에요. 이 세상에서 버림받은 자가 쓴 책. 버림받았는데 왜 썼느냐? 심판하기 위해서. 요한복음 3장 18절에,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마치 이와 같아요. 판사가 심판자잖아요. 범인은 피고가 되고. “너는 이렇게 못된 사기를 쳤기 때문에 징역 7년을 언도한다.” 땅땅땅! 해놓고 그 사기꾼한테 “요새 시세 얼마 하는데? 형량 감해줄테니까 나한테 얼마 줄 건데?” 판사가 그런 일을 굳이 할 필요 있습니까, 없습니까? 할 필요 없죠. 그럼 판사하질 말든지. 그건 변호사가 하는 거지, 판사가 하는 게 아니잖아요. 판사는 선고했잖아요. 이미 사기꾼으로. “교도소 가면 7년인데 내가 면회 자주 가줄게.” 그런 소리 할 필요 없고, “5년으로 감형해서 내가 빼내줄까?” 그러한 뇌물 쓸 필요가 없어요. 그렇게 하면 뭐가 부정됩니까? 자기가 판사라는 자체가 부정되잖아요.

항상, 성경은 누가 썼다? 세상에서 쫓겨난 분이 썼어요. 쫓겨남이 있었기 때문에 이제는 본격적으로 주께서 정당하게 이 세상을 불심판으로 심판할 수 있는 권한이 발생된 겁니다. 발생될 때 ‘왜 세상은 굳이 심판받아야 되는가?’ 그걸 증명하는 책이 성경책이죠. 그럼 성경해석은 어떻게 시작되는가? 세상 조지자. 세상을 하나님께서 박살내는 이유에 대한 판결문이 바로 성경이 되는 거예요. 판결문.

그런데 성도도 육신으로 되어 있잖아요. 성도도 육신으로 된 몸이거든요. 육신으로 된 몸이기 때문에 판결문에 대해서 저촉을 받습니까, 안 받습니까? 인간의 육신이니까. 육신은 가만있는 게 육신이 아니에요. 안에 아담의 속성이 끊임없이 발굴이 돼요. 그래서 사도 바울도, ‘나도 소원이 있는데 빨리 죽고 싶다’는 이것이 뭐냐 하면 육신 때문에 자기가 괴롭다는 거예요. 자기는 죄인 중의 괴수이기 때문에.

그러니까 성도는 자기가 죽는 것도 감사하죠. 말씀으로 제거해주니까. 어디 티눈 있어요? 빼드릴까요? 이런 식으로 우리의 육신을 알아서 제거해주니까 얼마나 고맙고 뭐든지 감사한 거예요.

그래서 성도의 삶은, 육하원칙으로, 어디 있든지 언제든지 누구와 함께 있든지 어떻게 있든지 왜 있든지 무엇 때문에 있든지 간에 항상 그게 고맙다는 생각을 갖고 있는 게 성도의 특징입니다. 내가 그 상황을 관여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내가 조작할 이유도 없고 내게 유리한 쪽으로 그것을 수정할 필요도 없이 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주어진 거예요.

그 말씀 중의 하나가 뭐냐? 어떤 상황이 주어질 때, 물론 그런 일은 없겠습니다만 갑자기 뭐가 잘못되어서 모르는 변호사가 와서, 당신이 모르는 양아버지가 있는데 당신 주라고 26억 남기고 어젯밤 죽었다. 그런 일이 번번이 있어요. 만약 그런 일이 있다면 우리는 그 26억을 어떻게 해야 됩니까? 누구한테 빼앗기기 전에 후딱 받아버려야죠. 왜? 26억에 대해서 감사하기 때문에. 어떻게 받는다? 고맙소~ 고맙소~ 고맙소, 하고 얼른 받아버려야 돼요.

그런데 받고 난 한 달 뒤에, 아이고 이거 주소 잘못 알아서 배달 잘못해서 가져가버리면 뭐라고 해야 됩니까? 고맙소~ 고맙소~ 이런 상황을 통해서 세상과 더불어 내 육신이 사라져야 된다는 것을 한시도 쉬지 않고 확인시켜주는 그 고마움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그렇다면 요한일서 2장 15절에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고 한 것은 뭐냐? 사랑하지 않도록 내가 완벽에 완벽의 조치를 다 해놨다는 거예요. 너를 앞장세워서.

아까 말씀 중에 나왔던 요한복음 3장을 한번 보도록 하겠습니다. 요한복음 3장보고 사도행전 8장 한번 보겠습니다. 18절,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라고 되어있죠. 저를 믿으면 더 이익이 온다,가 아니라 기껏 해주는 게 뭐냐 하면 저들과 함께 심판을 안 받도록 조치한 것을 주신다는 거예요. 누굴 믿으면? 독생자 예수를 믿으면. 뭐 다른 거 기대할 필요 없어요. 함께 안 망하도록 해준 것보다 더 귀한 복은 없다 이 말이죠.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대상이다.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심판대상이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 말씀이 성립되려면 반드시 이 세상은 뭡니까? 예수님을 버린 이 세상은 어떤 경우라도 심판에서 제외되지 않는다는 것을 전제로 깔아야 이 이야기가 돼요.

다시 이야기합니다. 성경은 이 세상을 심판하기 위한 하나님의 판결문이에요. 판결문을 들이밀어서 자기 백성에 대해서는 ‘함께 심판에 이르지 않도록 해줄게.’라는 것이 주께서 할 수 있는 전부에요.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 5:24) 그럼 됐지, 더 뭐 필요해요?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다. 이 말은, 어떻게 몸부림쳐도 이 세상은 사망 그 자체다. 저주 그 자체에요.

이 복음을 전해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걸 세상적으로 구매하려는 사람들이 있어요. 사도행전 8장 18절-20절, “시몬이 사도들의 안수함으로 성령 받는 것을 보고 돈을 드려 가로되 이 권능을 내게도 주어 누구든지 내가 안수하는 사람은 성령을 받게 하여 주소서 하니” 그 대목입니다.

자, 시몬이라는 사람. 성령 받는 걸 보니까 성령을 받고 그 사람이 새 사람으로 변화가 생기는 걸 보니까 ‘야, 사람을 저렇게 다룰 수 있구나. 저런 재주 같으면 나도 얻고 싶다. 얼마면 돼? 얼마면 되겠어?’ 이러고 돈 주고 사려고 한 거예요. 이 시몬의 잘못된 점은 뭡니까? 시몬의 잘못된 점.

사도행전 8장 18절에서 시몬 자신의 잘못은 뭐냐 하면, 돈 주고 구매하는 것이 심판받는 세상의 운영방식 중에 하나였다는 사실입니다. 이게. 나오는 태도가 세상을 떠나는 게 아니고. 예수님은 세상에서 버림받았잖아요. 시몬은 세상에서 버림받을 마음이 추호도 없어요. 이게 문제에요. 그게 문제라니까요. 세상에서 이름 얻기를 원하고, 세상에서 존경받기를 원했지, 세상에서 사람 구실하려고 하는 거예요.

제가 어느 강의에서 그랬잖아요. 악은 인간이 인간답게 사는 게 악이라 했죠. 인간이 인간답게 사는 것. 인간은 짐승이 아니고 인간이다. 자기 새끼를 챙겨야 된다, 이런 식으로 인간이 인간답게 사는 그게 악이에요. 무슨 요소가 빠졌습니까? 인간이 인간답게 살려고 하는 이 세상으로부터 누가 쫓겨났습니까? 메시아가 쫓겨났어요.

자, 메시아를 뭐라고 하느냐 하면, 여러분 아시다시피 기름 부음을 받은 자를 메시아라 하죠. 그럼 요한일서 한번 봅시다. 요한일서 2장 20절, “너희는 거룩하신 자에게서 기름 부음을 받고 모든 것을 아느니라” 참… 이거 보통 문제 아니죠. 시몬처럼 나도 성령 받았다, 하고 티내면서 세상 구석구석 자랑질 하고 싶은데…

예수님이 기름 부음을 받은 자잖아요. 메시아잖아요. 예수님이 이 세상에서 버림받았어요. 꼴 보기 싫다고 나가 죽으라고 한 거예요. 그 동일한 기름 부음이 여러분에게 왔다는 겁니다. 그럼 어떻게 처신해야 됩니까? 시몬처럼 처신해야 되겠어요? 아나니아, 삽비라처럼 반 속이고 헌금해야 되겠습니까? 어떻게 해야 되겠어요?

아나니아, 삽비라의 잘못은 헌금을 반 낸 게 아니고, 눈에 보이는 인간과 눈에 보이는 내가 결합해서 세상이 구성된다고 하는 이게 잘못이에요. 이 세상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으로 주도권이 넘어가 있다는 사실을 성령을 통해서 이미 알아야 되는데 성령은 생각 안하고, ‘사도가 뭘 알겠느냐? 자기가 사도면 사도지. 내가 반 숨기는 거, CCTV 있는 것도 아니고 자기가 어떻게 알겠어?’ 베드로가 이야기합니다. 너는 나를 속임이 아니고 성령을 속였다는 거예요.

사도 입에서 인간들이 익히 아는 이야기 있잖아요, 이 세상에서 학교에서 배우는 이야기, 그 이야기 말고 더 초과적인 이야기가 나와버리는 거예요. 그리고 ‘오, 사도 대단하네. 똑똑하네.’ 이게 아니고 사도의 말은 현실이 되어서 그에게 즉사가 주어진 거예요. 죽음이 주어진 거예요, 죽음이. 죽었어요, 그래서. 아나니아, 삽비라가. 신문에 났어요, 죽었다고. 헌금 반 내서 죽었다고. 교회에 소문이 확 났어요.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또 이렇게 생각할 거예요. ‘가만있어보자. 내가 헌금 반 속인 적 있는지 한번 계산해보자.’ 하는데 우리는 제가 아까 했잖아요. 누가 죽이든 우리는 주어진 상황 자체가 말씀에 입각해서 주어진 상황에 대해 고맙다고 알고 감사하다고 알면 누가 뭐래도 그건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좀 조절하려고 하지 마세요. 이 세상에 일어난 일과 나는 상관이 있기, 없기? 아무 상관이 없어요.

우리는 그냥 공짜로 얻어진 거예요. 그러나 여러분 이걸 알아야 돼요. 공짜하고 이것하고 분간 좀 하셔야 돼요. 공짜라고 해서 당연한 것은 아닙니다. 되게 비싸요, 이게. 공짜로 주어진 이것이 우리한테는 공짠지 모르겠지만 그 배경에는 예수님의 피로 주신 거예요. 세상에 온 천하를 주고도 그 값이 대체가 안 되는, 그 정도로 귀한 것으로 거저 주신 거예요. 거저 주신 것으로 이 세상을 이기라고 거저 주신 겁니다.

이 세상에 모든 것보다 귀하기 때문에 15절에서,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16절에,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이렇게 되어 있죠. 이 세상의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라는 근거가 어디 있습니까? 이렇다는 근거. 사도 요한이 이렇게 주장하는 근거가 어디 있느냐?

요한일서 1장 7절에 나옵니다. “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그다음에 뭡니까?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예수님의 피가 깨끗케 한다는 것은 주님의 피가 우리를 이미 심판해버렸다는 거예요. 심판을 했기 때문에 그다음에는 심판이 없기 때문에 사망에서 심판에서 생명으로 옮긴 거예요.

우리가 옮긴 게 아니고, 우리가 통밥 굴려서 ‘자, 뭘 믿으면 영생 얻겠나?’ 해서 안 게 아니라 피의 능력이 우리에게 다가온 것이 우리에게는 행운이었습니다. 그 피로 말미암아 우리를 이미 심판받은 자로 규정해서 한번 심판 받은 건 두 번 심판 없습니다. 유월절 같이. 한번 유월절 피 발라놓으면 그냥 넘어가잖아요.

천사가 올 때, ‘이 집은 피 없어도 히브리인이야.’ 하고 그냥 넘어간 게 아니에요. 히브리인이라고 그냥 넘어가주질 않습니다. 히브리인이든 애굽인이든 심판은 제외가 안돼요. 왜냐하면 창세기 3장에서 쫓겨난 것과 마찬가지로 저주의 대상이기 때문에. 이미 저주의 대상인데 어린 양의 피는 이걸 대신해서 치른 거예요. 대신해서 치렀다는 말은 어린 양의 피로 인하여 우리는 그 안에서 이미 심판이 끝나버린 거예요. 심판이 종결된 거예요.

따라서 이 세상에 어떤 법이라든지 헌법, 형사법, 민사법, 어떤 법이라도 우리는 상관없습니다. 국가의 어떤 법도. 간첩법도 상관없어요. 중국 안가면 되지 뭐. 가고 안가고 죽고 사는 문제는 이 땅에서 내가 상관할 문제가 아니고, 내가 상관 안 해도 답답한 분이 따로 계세요. 주님이 계세요. 주님이 알아서 해요. 내가 언제 죽을지, 어디에 갈지, 어디에 웃을지, 어디에 울지.

인간은 되지도 않는 것 가지고 고민하고 있다고요. 짬뽕 먹을까, 짜장 먹을까. 뭐 기도하겠죠. 주여, 짬뽕 먹을까요, 짜장 먹을까요. 주의 응답은 끝났습니다. 죽은 놈은 상관하지 말라고. 짬뽕을 줘도 공짜고 짜장 먹여도 공짜고. 주께서 그렇게 이 세상과 상관없이 살게 하신 거예요.

자, 한번 정리해봅시다. 지금까지 한 것은 이 세상에 있는 나, 육신, [나는 나와 상관없다]. 나는 나와 상관없죠. 그렇죠? 이미 심판받았으니까. 심판받은 자를 내가 왜 살리려 해요? 심판받은 자는 심판하신 분이 살리기 때문에 내가 굳이 심판받은 자를 살리려 할 필요가 없죠.

[나는 타자(남)와 상관없다] 나는 타자와 상관없죠. 남이 뭐라고 궁시렁거리고 평판해도 나는 거기에 휘둘릴 필요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죠. 그러니까 나는 나와 상관없다는 말을 달리 이야기하면, [저주받지 않으려는 자가 저주받는] 거예요.

주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저주받죠. 주를 사랑하지 않는 자가 저주받는다는 것은, 나를 사랑하는 자는 저주받는다는 뜻이에요. 나를 사랑한다는 말은 내가 나를 붙들고 산다는 겁니다. 내가 나에 대해서 포기 못하겠다는 거예요. 나는 끝까지 내가 되고 싶은 나에 대해서 집념을 못 버리겠다는 겁니다.

그런데 여러분 아까 안양강의에서도 했지만 그 나는 누가 만든 거예요? 나는 누가 만든 겁니까? 남이 만들잖아요. 남이. 내 주변에 있는 가족들, 내 일가친척들, 친구들이 나를 만들었다고요. 맨날 그 사람들한테 묻잖아요. 그 묻는 걸 뭐라고 한다고요? 대화. 전화통화. “야, 잘 있나?” 이거부터 시작하잖아요. “잘 있다.”

그걸 왜 묻느냐 하면 현재 이 순간, 이 시점에서 나를 아는 사람은 나를 어떤 존재로 파악하고 있는가를 탐색하는 거예요. 그래서 “야, 너 요새 얼굴 참 좋아 보인다.” 그 소리 듣는 순간, ‘이야, 이거 요새 좀 살맛나네.’ 이렇게 하는데, 전화해서 “그런데 요새 너 얼굴 왜 그렇게 안돼 보여? 무슨 고민거리 있어?” 이러면 그다음부터 ‘이거 보약을 또 한의원에 가서 지어먹어야 되나? 진맥 한번 받아야 되나?’ 또 이 이야기한다고요. 놀아나요. 누구한테? 타인에게. 남들한테 놀아나요.

시어머니가 “야, 며느리 행동 그렇게 하면 안돼.” 타인이죠. 타인이 나보고 그렇게 하지 말라 할 때, 아까 강의할 때 뭐라 했습니까? 우리는 이 세상에서 버림받았기 때문에 사회에 구애받을 필요가 없죠. 그런데 남들이 그렇게 하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우리는 구애받죠. “어머님, 앞으로 잘 하겠습니다.” 갑자기 정신 번쩍 차리고 이렇게 하죠. “야야, 네가 교회 가는 건 내가 안 말리겠다만 세상 살면서 사람이 사람답게는 살아야 되지 않겠는가?” 아, 이거 설득력 있네요. 아, 설득력 있어요. 네가 막 사는 건 아니야, 이런 식으로 설득력 있죠.

갑자기 뭐가 생겼습니까? 요한복음 5장에 나오는데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잖아요. 옮겼는데 도로 사망으로 들어온 거예요. 이것을 왜 반복시키느냐? 그래야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다는 이 말씀이 계속해서 유효해지기 때문에, 이를 위해서 그런 시어머니를 만나게 해서 시어머니한테 그런 통화 오게 하신 거예요.

그래서 시어머니 아플 때 봉양했다면 또 시어머니 주변에 있는 노인정에서 와가지고 “세상에, 이런 며느리 없다. 복 받겠다. 복 받겠어.” 할 때 갑자기 기분 좋아지고, 뭐 오랜만에 왔는데 “시어머니 보러 한 달 만에 오나. 시어머니가 너 얼마나 씹었다고. 죽을 때 되니까 낯짝 보이는구나.” 이러면 또 기분 확 나쁘면서 자기들이 뭐 안다고 우리 집 살림까지 간섭인가 또 기분 나쁘죠.

도대체 인간의 기분이라는 게 누구한테 좌지우지됩니까? 타인의 평가에 좌지우지되잖아요. 그걸 사랑하지 말라는 뜻이에요, 그걸. 주님은 누구한테 평가받았어요? 주님은 온 사람들이… 제자들까지 전부다 화살을 주님한테 집중시켰습니다. 슈슈슉- 온 화살을 다 맞고 돌아가셨잖아요.

그런데 주님은 뭐라고 합니까? “이것이 말씀이 응하게 하려 함이라. 목자를 치니 양떼가 흩어진다.” 이게 말씀이라는 거예요, 말씀. 이게 미래라는 거예요. 이미 이 세상에 찾아온 기름 부음이 하실 자기 업무이고 자기 일이에요. 이제 그 업무를 누가 부여받는가? 주님에 의해서 우리한테 부여되었어요. 그것도 선물로. 그것도 공짜로. 따라서 우리는 육신만 제공할 뿐이에요. 일은 누가 합니까? 다 이루심이 우리에게 일을 터트리죠.

자, 구약을 한번 봅시다. 구약을 두 군데 보겠습니다. 사사기 한번 보겠습니다. 사사기 19장 29절. 어떤 레위 사람에게 첩이 있었는데 그 첩이 질 나쁜 동네에 가다가 부랑배한테 걸려가지고 윤간 당해서 죽었죠. 밤새도록 욕을 보이다가 죽었습니다. 베냐민 사람 부랑배들이 그런 짓을 했거든요. 첩이 죽고 난 뒤에 레위 사람이 29절에, “그 집에 이르러서는 칼을 취하여 첩의 시체를 붙들어 그 마디를 찍어” 몇 개로 나눴습니까? “열두 덩이에 나누고 그것을 이스라엘 사방에” 택배로 새벽탁송으로 다 보냈어요.

그러니까 보는 사람들이 그 베냐민 지파 부랑배들이 한 짓을 보고 오늘날까지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런 짓은 상상도 못했다고 이야기하는 겁니다.(삿 19:30) 그럴 때, 여기서 그 일로 인하여 벌어진 게 뭐냐? 20장에 보면 이스라엘이 전쟁을 준비합니다. 그 전쟁하는 명분이 있어요. 정의의 하나님이여, 우리 정의의 편에 서서 승리케 하옵소서.

그러면 열한 지파 대 1, 1대 11로 붙는 거예요. 베냐민 지파가 그런 나쁜 짓을 했기 때문에 나머지 열한 지파가 나서서 이스라엘의 정의를 회복하기 위해서 한쪽을 처벌하는 그러한 전쟁을 벌이는 겁니다. 무엇이 잘못 되었을까요?

레위인이 열두 토막을 가지고 전 지파한테 다 날렸잖아요. 그렇다면 이것은 어떤 한 지파가 잘못된 게 아니고 열두 지파가 공동적으로 인정해야 될 죄가 되는 겁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이게 지금 구약이잖아요. 그럼 구약에서 신약에 오게 되면 바로 언약 세계, 언약의 완성이 되게 되면 이것이 예수님과 함께 있는 신앙 공동체, 성경에서 말하는 교회입니다, 교회라는 것, 성령이 함께 있는 성령 안에 있는 교회가 돼요.

그럼 성령 안에 교회는 이 사람들이 기름 부음을 받은 이유가 내가 착해서 기름 부음을 받았습니까? 아니죠. 일방적으로 누가 준 거예요, 기름 부음을? 누가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습니까? 예수님이 주셨잖아요. 예수님이 주셨죠.

그럼 이것과 구약 사사기 19장에 나오는 레위인의 첩이 강간당해서 죽었던 그 사건과 한번 비교해보세요. 구약에서 무엇이 잘못되었는가 한번 보란 말이죠. 구약에서 열두 지파 가운데 베냐민 지파가 죄를 지었잖아요. 그런데 언약적으로 보면 베냐민 한 지파가 죄를 지은 게 아니고 이스라엘 전체 지파가 다 죄를 지은 거예요. 제 말 잘 들어야 돼요.

그런데 그들이 뭐라고 오해를 하느냐 하면, 베냐민 지파가 잘못되었고 나머지 열한 지파는 그런 흉측한 일을 안 했으니까 이것은 베냐민 지파를 처벌할 수 있는 정의로운 권한이 있다고 생각을 한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 뜻은 뭐냐? 너희 열두 지파가 다 잘못되었다고 보는 게 하나님 뜻이에요. 이 차이가 나죠.

이 차이를 하나님이 어떻게 메꾸느냐 하면 전쟁을 일어나게 해요. 그들은 명분이 있죠. 나쁜 지파를 처단한다고. 전쟁을 했는데 누가 이깁니까? 1차 전쟁, 2차 전쟁, 3차 전쟁. 1차, 2차 누가 이겨요? 베냐민이 이겨요. 누가 많이 죽었어요? 정의의 연합군이 죽었어요.

이것은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의 뜻은 뭐에요? 장차 올 교회를 생각해볼 때, 이것은 어떤 개인이 범죄했다는 것은 이스라엘에서는 성립되지 아니한다. 다 죄를 지었지, 누구 특정 인간이 죄짓는 것은 이스라엘의 언약적 속성에 부합되지 않는다는 거예요. 언약적 속성에.

왜 그래야 되는가? 신약에, 누가 착해서 성령의 기름 부음 받았어? 이게 없어요. 오직 예수님 때문에 다 같이 의인되었고 다 같이 이 세상과 상관없고 다 같이 이 세상을 심판할 수밖에 없는, 세상을 심판해야 될 책임이 있는 바로 거룩한 성도들이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여기서 개인이 어디 있습니까? 개인 있어요, 없어요? 개인은 없죠. 개인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목사님, 그러면 사사기는 이제 째든지 지우든지 매직으로 그어서 없애야 되겠네요.’ 이렇게 나오죠. 아니에요. 구약 사사기 이 이야기가, 이 오류가, 이 인간들의 성급함과 잘못이 그들이 육신을 갖고 있기 때문에 그렇잖아요. 지금 성도인 우리도 육신을 갖고 있죠. 사사기적 요소의 오류가 우리도 일어나죠. 그러면 똑같은 상황이 벌어질 때, 갑자기 십자가 은혜 공짜로 준 건 다 잊어버리고 나는 잘났는데 너 나빴으니까 내가 너를 처벌하겠다는 권한이 막 발동되겠죠.

그럴 때 다시 한번 주께서 피 흘린 것을 생각나게 하는 하나의 동기가 돼요. 이 땅에서 주어진 상황이. 아, 우리는 다 죄인이었지. 그것도 죄인 중에 괴수였잖아. 누구는 나보다 더 나쁘고 악하다는 게 없다는 거예요. 방금 이야기한 게 로마서 5장에 나옵니다.

로마서 5장에서는 이걸 너무나 축약해서 너무나 단순화시켰어요. 아담 한 사람이 죄를 범해서 모든 사람이 죄인된 것처럼 예수님 한분의 의가 모든 사람에게 의가 되어서 죄가 있는 곳에 은혜가 넘친다. 아주 축약을 시켜버렸습니다. 사람들은 이걸 지식으로 받아들여요. 믿습니다. 고맙습니다.

하지만 그 지식이 현실이 되기 위해서는 아직도 우리의 목숨이 계속 진행되어야 돼요. 인생을 계속 살아가야 됩니다. 살아가서 ‘내가 의인된 것은 예수님 때문이고 내가 죄인된 것은 남보다 성격이 더 못돼서가 아니라 조상 아담의 죄 때문에 죄인 되었다.’ 라고 고백할 때 그 두 개가 합쳐서 언약맨이에요. 그게 노아의 방주입니다.

하나님의 창세 전 계획한 것이 우리가 주어진 삶의 상황 속에서 툭툭 일어나죠. 요한일서에서는 그걸 기름 부음 받았다고 하는 거예요. 너희가 기름 부음 받았기 때문에 말씀의 완성을 받았기 때문에 너희 몸을 언약을 드러내는 계기로 내가 사용하겠다, 그렇게 이야기하는 겁니다.

구약에서 한 군데 더 찾아보면 이렇습니다. 호세아 찾아보겠습니다. 호세아 1장에 보면 1장 2절에, “여호와께서 비로소 호세아로 말씀하시니라 여호와께서 호세아에게 이르시되 너는 가서 음란한 아내를 취하여 음란한 자식들을 낳으라 이 나라가 여호와를 떠나 크게 행음함이니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하나님 보시기에 이스라엘이 여호와를 버리고 바알을 섬기는 그런 자가 된 거예요. 이것에 대해 설명을 좀 해야겠어요. 구약에서 우상 섬기는 것을 ‘음란한, 간음한’ 이라고 표현하는 그 이유가 뭐냐? 그 이유는 여기 있어요. 남자, 여자 차이점 때문에 그래요.

남자의 기능과 여자의 기능을 창세기 2장에서부터 성경에서 나누고 있습니다. 3장에 가면 남자, 여자가 이미 선악과를 따먹고 범죄해서 에덴 동산에서 쫓겨났죠. 쫓겨 나가고 난 뒤에 남자 역할, 여자 역할은 처음에 있을 때보다 어떻게 변화되었는가를 3장에서 보여줍니다.

여자는 남자를 노립니다. 당연히 소유성이 포함되어 있어요. 남자는 다른 것을 노립니다. 다른 것을 노리면서 여자를 자기 소유로 삼아버려요. 여자는 남자를 소유해야 소유되는데, 남자는 여자를 자동적으로 소유된 것으로 간주해요, 자동적으로. 남자는 자기 세계건설을 노립니다. 여자를 예속시켜서 ‘내 하는 일에 너는 배필이 되어라’ 이런 구조가 되어버린 거예요.

여자는 세계건설, 이딴 거 관계없습니다. 여자는 그냥 솔로가 되어가지고 16기 상숙이처럼 남자만 노리면 되는 거예요. 남자만 노리고 세퍼트처럼 이빨로 물어서 안 놓으면 되는 거예요. 따라서 여자에게는 남자가 노림의 대상이 되는 겁니다. 노림의 대상이 되면서 자진해서 예속되려는 욕망을 하나님이 주신 거예요. 뭐로? 벌칙으로 주신 거예요. 이게 벌칙으로 준 거예요. 벌의 한 일종이에요. 이게 벌의 일종입니다.

그런데 우상을 설명할 때, 바알신이죠, 바알신을 설명할 때 여호와 하나님께서 어떻게 설명하느냐 하면 이미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언약을 성취하시는 데 있어서 예속되는 걸로 이미 삼아버렸다는 거예요. 무슨 말이냐 하면 이스라엘과 여호와 사이가 부부관계라는 사실을 언약관계를 통해서 맺어줬다는 겁니다. 이제 어려워요. 이게 어렵습니다.

언제 그 이야기를 하느냐 하면 이스라엘이 바알을 섬길 때 그걸 간음이라는 용어, 음란이라는 용어로서 ‘네가 왜 다른 남자를 찾았느냐? 이 여인 같은 이스라엘아!’ 이렇게 묘사를 해버리는 거예요. 왜 이스라엘을 여인으로 설명하느냐? 그게 바로 호세아에 나옵니다. 음란한 자식을 낳아야 되기 때문에. 음란한 자식을 낳아야 돼요, 하나님께서.

자식을 낳는데 이스라엘을 통해서 비-언약적이고 하나님께서 저주받을 자식, 내 백성 아닌 자식을 하나님 백성에서 낳게 만들어요. 이것은 무엇을 뜻하느냐 하면, 이미 남편이 누구냐? 남편은 여호와 남편이죠. 여호와 남편이라면 인간 이스라엘을 위한 세계는 언약적 입장에서는 없습니다. 이제는 이스라엘은 없습니다. 여호와의 관리체제 하에 흡수 통합된 자에요.

여호와께서 뭘 보여주느냐? 죄를 양산하는 그 작업에 여호와께서 돌입하신 거예요. 이미 죄 지은 이스라엘을 통해서. 그렇게 해서 하나님이 얻고자 하는 게 뭐냐? 이스라엘마저 이 세상에 속한다는 것, 그리고 나는 이 세상과 상관없는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이스라엘을 통해서 그 면면을 드러내고자 하는 겁니다.

그래서? 그래서 하나님이 얻고자 하는 게 뭐냐? 이 세상에 아무도, 하나님 백성은 단 한 사람도 없다는 것을 선포하고자 하는 거예요. 의인은 없나니, 단 한 사람도 없는 거예요. 그렇게 해서 하나님이 얻고자 하는 건 뭐냐? 오직 기름 부은 자, 기름 부은 자만이 진정 내 아들이 되는 거예요. 진정 기름 부은 자만이 내 아들이 되는 거예요.

그러면 호세아가 있음으로서, 호세아가 없는 것보다 있음으로서 장차 예수님에게 무슨 도움이 되느냐? 예수님이 자기 신부를 구해버려요. 정결한 신부를. 이 말은 뭐냐? 이스라엘은 정결한 신부되는 데에 탈락했다는 겁니다. 그 말은 곧 하나님의 기름 부은 자가 오시지 아니하면 어떤 인간도 자진해서 하나님의 정결한 신부가 될 수도 없고 천국 백성이 될 수 없다는 것을 구약 이스라엘을 통해서 그것을 미리 인간의 한계와 취약점을 알려주는 거예요. 이스라엘이 그 기능을 한 겁니다. 그 역할을 담당한 거예요. 호세아에서.

그래서 뭐? 그건 그렇고 그게 왜 오늘 이 세상과 관련되어 있는가? 세상이라는 것을 구약을 가지고, 망해버린 구약 이스라엘 역사를 세상에다가 집어넣자 이 말이죠. 아니 그걸 왜 집어넣어야 되느냐? 집어넣어야 기름 부음의 의미가 살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기름 부었기 때문에 이 세상을 사랑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기름 부었기 때문에.

그럼 세상 좀 좋아하면 어떠냐? 좋아하는 그것이 호세아에 나오는 내 백성 아님의 표시라는 거죠. 그러면 이 세상 좋아하지 말고, 열심히 하나님 사랑해야 되느냐? 아니. 그럴 능력은 우리한테 없어요. 그럼 어쩌란 말인가? 기름 부음이 너로 하여금 이 세상을 사랑하지 않도록 조치함을 네가 받아들이는 자가 하나님의 성도라는 뜻입니다.

이 긴긴 논리, 그래야 구약의 이스라엘과 이 세상의 내용이 채워져요. 이 세상의 내용은 그냥 ‘세상이다’가 아니라, ‘예수님 버렸으니까 세상’인 게 아니라, 구약 때부터 인간들이 열심히 바르게 살려고 백날 애를 써봤자 구약의 한계를 넘어설 수 없는 이것이 세상의 한계임을 이미 구약에서 실험 실습 다 끝난 이야기에요.

우리로서는 우리 힘으로 해서 세상 사랑 안하기가 어려워요. 힘들어요. 육신 자체가 그러니까요. 또 하나님께서 그걸 의도해서 그런 죄를 키웠고요. 따라서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을 다시 한번 정리하고 마치겠습니다.

세상이란, 나쁜 짓하는 인간들의 집합이 아니죠. 아닙니다. 세상이란 나쁜 짓하는 인간들의 집합, 경건치 못한 자들의 집합 아니죠. 이거 아닙니다. 이건 너무나 세상적이에요. 그럼 [세상이란 메시아를 믿지 않는 것], 이게 정답이에요. 예수님의 기름 부은 자, 메시아에 대해서 무관심한 것, 이게 바로 세상입니다.

그러면 이 세상에 착한 사람도 많지 않느냐? 주님 보시기에 메시아가 봤을 때, 이 세상에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거리가 바다처럼 흐르고 넘치는 세상으로 내가 그렇게 만들고야 말리라. 메시아가 없어도 착한 사람 있지 않느냐, 에 대해서 내가 그렇게 놔두지 않는다는 거예요.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거리가 풍성하도록 그렇게 내가 조장해나갈 거라는 거예요. 나쁜 사람, 좋은 사람이 세상 자체에서 이게 분별이 안 되고 분간되지 못하게 내가 만들겠다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인간이 생각하는 세상은 세상이 아니라는 거예요, 그거는. 그것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봐서 복음을 안 받아들이는 세상 자체가 세상이어야 되지. 그래야 기름 부음이 의미가 있어요. 더 쉽게 이야기할까요? 성령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에게만 눈에 들어오는 것이 세상입니다.

성령을 받은 자에게 분간되는 게 세상이고, 성령을 받지 아니한 세상은요, 그냥 나쁜 사람들, 교도소 갈 사람들, 돈만 아는 그런 사람들이에요. 이런 거 피하려면 방법은 간단합니다. 자연인 되면 돼요. 지리산 들어가면 돼요. 도 닦으러 가면 돼요. 세상 더럽다 욕하면서 자기는 고고하게 살면 그만입니다. 기도원 짓고 수도원 짓고 살면 돼요. 천주교처럼 수도원 있잖아요, 사진기자도 못 오는, 신문기자도 못 들어오는 그런 데 있잖아요. 도 닦는 사람들. 세상을 도피해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찬미하는, 기도하라 노동하라 이런 거 있잖아요. 오직 경건한 마음으로 드리는 거.

그게 세상이에요. 다시 말해서 그게 바로 기름 부음을 거부하는 마귀의 소굴이 되는 겁니다. 말씀 자체의 능력 말고 내 종교심으로 뭘 해보겠다는 그것이 바로 마귀가 대장질하고 있는 세상의 현장성이에요.

결국 요한일서 이 대목을 마감하면서 뭐라고 되어 있느냐 하면 16절에,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

하나님께로 온 게 아니고 아버지께로 온 거죠. 그럼 아버지에게 의미 있는 것은 뭐냐? 아버지니까 아들이죠. 예수님께 의미 있는 거죠. 예수님의 피, 예수님의 화목 제물을 모르는 것은 예수님 피가 언약이기 때문에 전부다 심판의 대상이 되는 겁니다.

성령을 받은 사람은 이것을 이미 아는데 여전히 우리의 육신은 이걸 지식으로만 떡 걸쳐있죠. 그런데 주님께서는 공짜로 우리에게 이것을 지식이 아니고 현실로 바꿔주시는 아주 친절함을 베풀어주십니다. 그 친절함 때문에 내 것 다 날아가고 세상에 내 마음대로 되는 게 없죠. 너무 친절해서.

그런데 어떤 경우든지 고맙고 감사하시고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함께 있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새롭게 새롭게 알아가는 저와 여러분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세상을 심판하기 위해서 주어진 성경책을 우리는 마치 내가 살기 위한 하나님의 도움을 받는 책으로 오해했었습니다. 다 끝난 문제인데. 다 이루었고 다 끝난 문제, 주의 다 끝났음이 무슨 뜻인지 우리 내부에서 주께서 어떤 활동을 하는지 날마다 그 활동을 감지하는 하루하루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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