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강의20230914a 요한일서 2장 13절(유일한 해석자)-이 근호 목사
요한일서 2장 11절부터 해보겠습니다. “그의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어두운 가운데 있고 또 어두운 가운데 행하며 갈 곳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어두움이 그의 눈을 멀게 하였음이니라”
여기 등장하는 언어는 무엇과 관련되어 있느냐 하면 개체와 관련되어 있어요. 개인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개인 하나에 언어가 하나씩 달라붙어있다. 인간세계에서 언어라 하는 것은 그 개체를 지목하게 되어 있어요.
지우개, 개체죠. 휴지, 개체죠. 매직, 다 개체잖아요. 사람도 마찬가지고. 남자, 여자 전부다 하나의 개체 따라서 언어가 하나씩 달라붙어있죠. 아담이 이름 지을 때 그 이름의 실(實)대상이 있었잖아요. 코끼리도 있을 것이고 다람쥐도 있을 것이고, 폴짝폴짝 뛰어다니니까 이름을 붙이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 요한일서 2장 11절에 보면 이런 말이 있어요. ‘어두움’. 인간세계에서의 어두움이라는 것은, 언어는 개체와 연결되어있다는 이 원리에 따라서 어두움은 밤에 해당됩니다. 밤은 어둡다. 어두운 것은 밤이다. 밝은 것은 낮이고 낮은 밝다. 그렇게 되죠.
그런데 여기 11절에 ‘어두움이 그의 눈을 멀게 했다’라고 하는데 인간세계에서의 어두움은 어두움이 눈을 멀게 하면 안 되죠. 밤에 눈이 멀어야 되죠. 어두움은 밤이라는 실체에 해당되는, 실체를 지목하는 부사죠. 어두운 밤, 이렇게 되거든요. ‘어두운 밤’일 때 어두움이 강조됩니까, 밤이라는 게 강조됩니까? 밤이 강조되는 거예요. 밤이 있는데 밤은 환하게 밝지 않고 어둡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런데 어두움이 밤을 제거해버린다면 어떻게 합니까? 어두움이 밤을 제거한다면? 여기에 사람도 있고 책상도 있고 수박도 있다. 수박도 있고 차도 있고 건물도 있다면, 이런 모든 개체를 한꺼번에 다 제거하는 방법은 뭘까요? 어두움이 와버리면 이것은 전부다 제거대상이 되는 겁니다.
요한일서에서 사도 요한이 쓰는 것은 인간세계에서 통용되는 언어의 세계가 아니라 낯선 언어에요. 이 낯선 언어는 어디서 나왔느냐? 예수님에 의해서만 예수님의 입장에서만 쓸 수 있는 언어를 지금 사도 요한이 요한일서에서 사용하고 있습니다. 예수님만 쓸 수 있어요.
한번 적어볼게요. [낯선 언어라 하는 것은 예수님만 쓸 수 있다.] 그렇다면 이 낯선 언어가 어디서 나오느냐 하는 겁니다. 예수님이 여기 계시고 주변에 제자들이 있었잖아요. 주변에 많은 사람들이 있었잖아요. 주변에 있는 이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을 해석했습니까, 안했습니까? 해석했어요, 못했어요? 해석 못했죠. 여기 유대인들도 있겠죠.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말을 해석했습니까, 해석 못했습니까? 해석 못했죠. 인간들이 예수님의 말을 해석 못한 것은, 인간은 인간의 개체와 관련되어 있는 언어를 사용하기 때문에 예수님의 말씀을 해석 못하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와 같은 결론을 임시적으로 내릴 수 있어요. [예수님의 해석자는 예수님뿐이다.] 예수님이 하신 일을 해석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예수님뿐이에요. 그 이유가 뭐냐 하면 모든 사람이 예수님을 버렸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모든 사람이.
자, ‘십자가가 뭐냐?’라고 할 때 이 십자가에 대해서 해석을 두 가지로 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1.인간 언어에서 십자가를 해석할 수 있겠죠. 그다음에 2.인간에게서 쫓겨난, 인간과 결별한 낯선 언어에서 십자가 해석이 있을 수 있다 이 말이죠. 사도 요한은 이 두 가지 다를 대비시킵니다, 이 요한일서에서. 두 가지 다를 대비시키죠.
십자가가 뭐냐? ‘십자가는 그 당시 정치인들이 주동하고 유대인 백성들이 거기에 합세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살해시킨, 사형시킨 사건 형틀’ 이게 십자가라고 이야기하죠. 진도 나간다고 좋은 게 아니고 하나하나 설명해보겠습니다. 십자가라는 것은 예수님 그 당시에 유대인들과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싫어해서 사형시키기로 작정하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서 사형시킨 사건이 바로 십자가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이건 누가 이야기하는 거예요? 인간세계에서 통용되는 인간의 언어로 이야기하는 거예요. 인간 언어로.
그런데 예수님의 언어로 이야기해봅시다. 예수님의 언어로 십자가는 뭐냐? 그냥 피에요. 또는 화목제물입니다. 피라는 것이 요한일서 1장에 나오죠. 1장 7절,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예수님의 피를 이야기한다. 피를 이야기함으로써 피가 흘려진 곳에는 대립이 성립되었다. 대립성. 대립이 성립되어야 피가 흐르죠.
그러면 예수님의 십자가가 피가 생산된, 피가 양산된 그 사건이라면 십자가는 뭐냐? 모든 인간을 하나님의 적으로 간주한 사건이에요. 모든 인간을 하나님의 적으로 간주한 사건이 십자가에요.
다윗과 솔로몬의 차이점이 많이 있습니다만 어떤 차이가 있느냐 하면 다윗은 피를 흘렸어요. 자기 피 흘린 게 아니고 상대방 피를 많이 흘렸죠. 이것은 전쟁 중이라는 겁니다. 자, 전쟁이 되려면 우호적인 관계에요, 안 그러면 적대적인 관계입니까? 적이 있어야 전쟁이 일어나죠.
그럼 솔로몬과 다윗의 차이점은, 솔로몬은 그 전쟁에서 모든 적들은 이미 굴복되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왕이 솔로몬이에요. 어제 수요일에 했죠. 솔로몬 때에 모든 사람이 무화과와 포도나무 아래서 안정을 취했다고 되어 있어요. (“솔로몬의 사는 동안에 유다와 이스라엘이 단에서부터 브엘세바에 이르기까지 각기 포도나무 아래와 무화과나무 아래서 안연(安然)히 살았더라” 왕상 4:25)
그러면 솔로몬 때에 안정을 취했다는 말은 솔로몬 이전에 아주 결사적인, 서로의 정체를 노출시킬 수밖에 없는 전쟁이 있었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거예요. 그게 다윗이 피를 많이 흘린 거예요. 그리고 그 승리는 다윗에게 주어져서 다윗의 자손인 솔로몬이 안정적으로 그 백성들이 평화로운 시대를 보낼 수 있었다,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럼 언약은 솔로몬 언약입니까, 다윗 언약입니까? 다윗 언약이죠. 솔로몬 언약은 없습니다. 에스겔에 보면 다시 내가 메시야를 보낸다 할 때 솔로몬을 보내겠다는 겁니까, 다윗을 보내겠다는 겁니까? 다윗을 보낸 거예요. 솔로몬을 보낸 게 아니고 다윗을 보낸 거예요. (겔 34:23-24, 37:24-28) 왜냐하면 다윗을 보내줘야 적의 개념이 거기서 뚜렷하게 등장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정리하면 [예수님께서는 적이 있는 곳에 오셨다.] 그런데 이 적들은 자체적으로 서로 통용하는 언어가 있었다. 그 언어를 가지고 그들이 예수님을 해석한 결과로 예수님은 죽게 된 거예요. 예수님이 죽었다는 말은, 그들이 예수님에 대해 평가하는 언어들이 있잖아요. 언어에는 평소에 그들이 사는 세상관, 인생관, 개념들이 거기에 달라붙어있는 거예요. 언어라 하는 것은.
무슨 말이냐 하면, ‘남자/여자’ 이 개념을 지금 한 살짜리 아이가 압니까, 모릅니까? 몰라요. 엄마/아빠는 알지만, 아빠는 남자에 속하고 엄마는 여자에 속한다는, 아빠엄마보다 더 넓은 개념을 애들은 몰라요. 나중에 크면 아버지는 남자에 속하고 어머니는 여자에 속하는구나, 이걸 아는 겁니다. 좀더 커봐야 아는 거예요.
인간은 뭘 모르느냐 하면… 어두움은 밤에 속하고 밝은 것은 낮에 속한다고 보는 거예요. 왜 그러느냐 하면 밤과 낮은 실제로 있기 때문에, 인간세계에서. 해 떨어지면 밤이고 해가 떠오르면 낮이 되잖아요. 그게 인간의 생각이죠.
그런데 인간은 어두움을 몰라요. 어두움을 모르니까 빛을 몰라요.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에 어두움과 빛을 섞어버리니까 무슨 말인지 모르는 거예요. “내가 빛으로 왔나니” 이게 무슨 말인지를 몰라요. 내가 빛으로 왔다는 말은, 예수님이 적이 있는 곳에 오신 이 취지에 의하면 너희들은 다 어두움이라는 거예요.
너희들은 어두움이라는 것을 인간세계는 받아들일 수가 없어요. 인간들에게 통용되는 개념에 의하면 어두움이라는 게 없습니다. 그냥 밤이 있고. 빛의 개념도 없어요. 빛이란 그냥 낮을 빛이라 하는 거예요. 낮을 빛이라 하는 개념을 21세기까지 파급해서 더 연구한 결과가 양자물리학이라는 거예요. 입자냐 파동이냐. 파동이냐 입자냐. 양자물리학의 부산물로, 상대성 원리와 양자물리학에 의해서 나온 것이 바로 오펜하우어가 발명하고 추진한 원자폭탄이에요. 수소폭탄 이런 거.
그러니까 인간의 언어라 하는 것은 기존에 인간 개체를 부정하는 언어가 아니고 개체를 긍정해버리는 언어를 그들은 사용하고 있었던 겁니다. 누가? 인간들이. 인간들이 사용하고 있었던 거예요. 그래서 어떤 인간이든 예수님을 해석할 사람은 없고 오직 해석자는 예수님 본인이 예수님의 해석자가 되는 겁니다. 아무도 해석할 수가 없어요.
결국 예수님이 오셨다는 것은, 너희들은 나를 이해 못하고 해석하지 못하는 그러한 세계에 놓여있다는 거예요. 그걸 어두움이라 표현하거든요. 어두움의 세계에 놓여있다는 것을 들추어내기 위해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거예요.
잘 아시겠죠? 잘 아시겠냐고 묻는 의미가 다 있어요. 그렇다면 우리에게 성경 줬습니다. 우리가 성경해석 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해석 못하죠. ‘성경이 뭐지?’를 해석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모든 언어는 반드시 거기에 대응하는 실체가 있어야 언어가 유효해요. 매직이 발명되지도 않았는데 매직이라 하는 것은 말도 안 되죠.
인간은 실체가 없는 것을 UFO(Unidentified Flying Object)라 합니다. 미확인 물체. 언뜻 보기는 봤는데 뭔지는 모르겠다. UFO같은 경우에. 귀신, 유령? 인간이 끄집어낼 수는 있지만 그것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귀신, 유령을 본 사람은 없죠. 인간이 본다는 것은 개체, 실체가 있어야 돼요. 한번 유령 봤다고 유령을 본 게 아니에요. 유령은 박물관에 표본으로 있어줘야 비로소 유령이 있는 겁니다.
[박물관: 실체들의 집합소], 과거 실체들의 집합소가 박물관입니다. 실체들의 집합소에요. 이들에게는 전부 언어가 붙어있어요. 그리고 지금 현재 삶이 내일이 되면 오늘 살았던 것은 박물관에 하나의 리스트로 들어갈 대상으로 후보감이 되죠. 왜? 실체들이 있으니까. 실제로 있으니까요.
여기서 인간의 언어체계가 확립되고 이것이 하나님, 예수님의 적이 되는 거예요. 인간은 십자가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본인이 하나님의 적이라는 것을 간주할 수가 없기 때문이에요. 하나님은 실체가 없기 때문에. 하나님은 실체가 없어요. 예수님이 죽었을 때 예수는 ‘사형수’라는 단어로 실체를 이야기할 수 있어요. 까불다가 정치범으로 죽었다, 그게 되는데 예수님이 부활하고 난 뒤에는 어떻게 됩니까? 예수님이 실체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어요. 만지지 말라 했거든요.
실체 없는 그것을 사도 바울부터 해서 사도 요한이 그걸 실체로 만들어버린 거예요. 그러면 인간의 해석의 한도가 드러나 버린 거죠. 인간은 모든 것을 해석하되 예수님한테 걸리면 그 모든 것은 거짓말이 돼요. 인간세계에서 ‘이거는 컵이고 이거는 조명이고 이거는 에어컨이고’라고 인간이 했던 이것이 인간세계에서는 서로 인정을 하는데 예수님한테 걸려버리면 이게 전부다 거짓말되는 거예요.
이건 MP3 보자기인데 “이게 뭐지?” 인간한테 물어보면 “이건 MP3 보자기입니다.” 주님한테 물으면 “어두움이니라.” 이게 어둡다는 거예요. 예수님이 말씀하실 때 그렇게 말씀을 해버린 거예요. 빛과 어두움에 대해서 이야기해버렸다고요, 예수님께서. 빛과 어두움을 경유하지 않으면 예수님 해석은 나오질 않았어요.
이걸 달리 이야기하면, 예수님 자신이 인간세계에서 죽임당하는 것을 전제로 해서 예수님께서는 발언해 오신 겁니다. 언어를 사용한 거예요. 성경이 뭐냐? 인간은 성경이 뭔지를 몰라요. 그냥 옛날 선지자가 썼던 글, 이렇게 돼요. 그게 어두움의 해석이에요. 하여튼 인간 자체가 어두움에 속하기 때문에 어두움에서 나온 것은 전부다 어두움의 해석이라서 하나님과의 적대적 관계를 형성할 뿐입니다.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을 간단한 그림으로 설명해드리겠습니다. 너무나 간단해요. 너무 간단해서 웃긴다 할 정도로 간단해요. 전체 동그라미가 이 세상입니다. 여기서 예수님이 나타났어요. 예수님이 ‘나는 빛으로 왔다’고 이야기했어요. 그러면 이제부터 예수님은 빛, 이외에 바깥은 전부다 뭡니까? 졸지에 어두움이 되는 거예요.
그럼 이 바깥에서 인간과 인간끼리 통용되는 모든 언어체계는 전부다 거짓이 되는 겁니다. 어두움에서 예수님을 해석해내질 못한 겁니다. 해석해내지 못한 결과가 뭐냐? 예수님을 십자가 못 박아 죽게 한 겁니다.
그래서 십자가가 뭐냐? 인간들은, ‘사형수가 사형당한 것이다. 우리에게 대들다가 성전 헐라 하다가 정치범으로 맞아죽은 게 십자가다.’ 이것이 인간들의 십자가 해석이에요.
그러나 주님의 해석으로 십자가가 뭐냐? ‘너희들은 어두움이라는 것을 드러내는 사건이다. 너희는 나를 이해하지 못했다는 점을 드러내는 사건’이 십자가 사건이에요. 그리고 더 추가해서 너희들은 죽어 마땅하다. 너희들이 하나님인 나를 죽였기 때문에. 피를 내서 죽였기 때문에 너희가 죽어 마땅하다. 너희들이 저주받더라도 군소리하지 마라. 어두움은 어두움이어야 하기 때문에. 예수님만 빛이어야 하기 때문에.
사도는 말하기를 예수님의 빛이 기름 부음, 성령이 오심으로써 빛의 영역이 드디어 뚜렷하게 돼요. 예수님 이후에 사도들에게 뚜렷하게 되게 되면 이것과 비교해서 뭐가 뚜렷하게 등장합니까? 어두움이 더욱더 어두움으로 찐~하게 더욱더 깊이를 더하겠죠.
요한일서 2장 12절 봅시다. “자녀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 죄가 그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사함을 얻음이요” 이렇게 되어 있죠. 여기 뭐가 나오느냐 하면 ‘너희 죄’. ‘너희는 죄 있으니까 열심히 살아라’ 이렇게 했어요, 안 그러면 너희 자체를 죄로 봤습니까? 너희=죄죠.
지금까지 여러분들이 강의를 잘 들었으면 죄에 대해서, 인간의 언어체계에서 죄는 뭐냐 하면 인간들이 실수한다든지 해코지한다든지 잘못 행동하는 것을 죄라고 하죠. 그러나 빛의 세계에서는, 이것을 인간 언어 말고 제가 뭐라 했습니까, 반대로? 낯선 언어에서 죄라 하는 것은 인간+세상, 인간의 세상, 이게 죄가 되는 겁니다. 간단하죠? 굉장히 간단해요. 굉장히 간단합니다.
인간 언어에서의 죄라 하는 것은 실수하고 남한테 해코지하고 남한테 피해보상 안하는 게 죄가 돼요. 그렇다면 인간 언어에서는 죄만 있는 게 아니고, 나쁜 짓하지 않을 경우에 의로울 여지가 있죠. 인간 언어에서는. 그러나 낯선 언어에서는, 주님의 언어에서는 인간 자체가 죄이기 때문에 인간이 죄 아닌 경우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습니다. 이 전쟁, 이 싸움이 일어나는 거예요. 이게 12절이죠.
13절 봅시다. “아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앎이요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니라” 여기에 뭐가 나오느냐 하면 ‘악한 자’ 나오죠. 악한 자.
악한 자. 1.인간 언어에서 악한 자는 뭐냐? 악하다 하는 것은 바로 인간의 윤리, 도덕 체계와 사회의 연합, 단합을 훼손하는 행위. 인간 공동체의 발전과 유지에 방해되는 행위. 악한 행위입니다. 그런 것은 영원히 사회로부터 격리시킬 필요가 있어요. 사형시키든지 무기징역하든지. 그걸 사람들은 악한 죄라 해요. 그래서 여기 인간 언어에서의 악한 자라 하는 것은 개체가 있습니다. 교도소 가는 사람은 개체가 있어요.
그런데 낯선 언어에서의 악한 자는 뭡니까? 이 어두움의 세계 그 자체에요. 어두움의 세계 그 자체입니다. 더 구체적으로 낯선 언어에서의 악한 자가 뭐냐? 인간 언어를 사용하는 자가 악한 자에요. 인간 언어를 사용하면서 인간 언어로 자기를 이해하고 세상을 파악하려고 하는 것이 악한 자입니다.
너희가 악한 자를 이겼다 할 때 여기 ‘너희’ 나오죠. 결국 요한일서에서 두 그룹이 생겨요. 빛에 속한 자, 너희. 어두움에 속한 자, 저희. 저희와 너희의 구분, 그 구분은 바로 낯선 언어에 의해서 구분되는 거예요. 인간의 언어로 해서는 구분되지 않습니다.
지금까지 이야기 들어오면서 여러분들이 이런 생각을 가져야 돼요. 그러면 낯선 언어에서 나를 지칭하는 게 있느냐? 나를 지칭하는, 실질적으로 나라는 개체를 지적하는 그런 언어가 낯선 언어에서는 있느냐? 없습니다. 없어요. 그럼 낯선 언어에서는 뭐가 있느냐? 아들이 있어요. 아들이 있고 자녀가 있어요. 아비가 있어요. 나는 없어요. 인간세계의 언어에서 나는 있습니까? 있죠. 나라고 하는 여러분들이 나가 되는 거예요. 그럼 너는요? 나 아닌 다른 사람들을 너라고 하는 거예요. 늦게 온 너. 여기 앉아있는 나.
아주 쉬운 예로 하면 인간 언어에서의 남자와 여자는 개체가 있어요. 여자는 상대적으로 약간 키가 작고 남자는 상대적으로 골격이 있고 키가 크고 근육이 발달하고. 여자는 아기 낳는 데에 적합한 신체구조, 이렇게 대응하는 개체가 있어요. 대응하는 개체가. 그런데 낯선 언어, 주님의 언어에서의 여자라 하는 것은 신부 전체를 여자라 하고 남자는 누구밖에 없는가? 예수님밖에 없어요. 완전히 다르죠.
그래서 내가 남자인데 낯선 언어, 성경에서는 예수님의 신부라고 이야기할 때 우리는 나라는 남자에서 예수님의 신부가 되려면 어떤 경로를 거쳐야 되는가? 내가 이 땅의 낯선 언어에서 남자라는 것은 예수님에 의해서 이게 제거대상이 된다고요.
그러니까 낯선 언어가 해석하려면 어떤 작업이 진행되느냐 하면 인간의 언어 개념들이 전부다 delete, 삭제되고 삭제되고 연이어 삭제되는 그런 과정을 거쳐야 되는 거예요. 나도 삭제되고 너도 삭제되고. 우리와 그리고 어두움의 세계에서 저희로 구분되는 겁니다.
어쨌든 그 기본은 뭐냐? 인간은 끝까지 해석할 수 없다는 겁니다. 예수님을 해석할 수 없다는 거예요. 해석할 수 없으니까 예수 믿는 것도 거짓말이죠. 결국 예수 믿는다, 누구를 믿는다는 그 인간 언어의 끄트머리에는 반드시 누가 있느냐 하면 어떤 것을 믿음으로써 이익은 내가 챙긴다, 믿는 나한테 이익이 온다는 그 개념이 달라붙어 있어요.
요한복음 11장 50절에 보면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 너희에게” 그다음에 뭡니까? “너희에게 유익한 줄을 생각지 아니하는도다 하였으니”. 이 말은 그 당시 대제사장 중에 한 사람인 가야바가 이야기한 거예요. 한 사람 죽여서 우리 모두가 이익을 얻자, 이 이야기한 거거든요.
그 이야기했는데 요한복음은 51절, “이 말은 스스로 함이 아니요 그 해에 대제사장이므로 예수께서 그 민족을 위하시고 또 그 민족만 위할 뿐 아니라 흩어진 하나님의 자녀를 모아 하나가 되게 하기 위하여 죽으실 것을 미리 말함이러라” 되어있어요. 미리 말씀하시는 것이라.
인간의 언어에서 그것은 반드시 언어를 사용하는 자에게 이익이 돌아오는 식으로 그 입에서 인간의 언어는 출발하게 되어있다는 겁니다. 가게 손님이 온다. “어서 오세요” 했다. 말 나갔죠. 그 이익은 누구한테 돌아옵니까? 손님한테 옵니까, 나한테 와요? 나한테 오잖아요.
교회에서 “성도 여러분, 저를 위해서 축복해주세요. 제가 목사로 잘 되기 위해서 기도해주세요.”라고 했을 때, 그걸 분석하게 되면 이익은 누구한테 옵니까? 목사 본인한테 오죠. 목사 본인한테 와야 됩니까, 안됩니까? 안돼요. 왜냐하면 목사라는 개체가 자기로 고정되어 있기 때문에 안돼요. 목사, 장로 이거는요. 그때 그때 달라요. 고정된 자리가 아니에요.
그런데 그 목사가 갑자기 자기를 고정화시켰어요. “여러분들이 나를 도와줘야 됩니다.” 낯선 언어에 의하면 이래요. “네가 뭔데?” 이게 낯선 언어에요. “그럼 안도와주면 어쩔 건데?” “안 도와주면 복음이 전파되지 못하고 안 도와주면 이 동네에 성역화가 안 되고.” 이런 소리를 또 한단 말이죠.
주님은, 안 도와줘도 이미 어두움이야. 그리고 빛의 세계는 안 도와줘도 빛이야. 네가 왜 뭔데 끼어들어, 네가! 그 유명한 말 있잖아요. 네가 왜 거기서 나와? 영탁이가 한 말이죠. 네가 왜 거기서 나와, 네가? 자꾸 십자가 앞에 얼쩡거리지 마. 너! 낯선 언어만 이야기 해! 인간의 언어로 남들을 설득시키고 납득시켜서 구원시킬 생각하지 말고 낯선 언어만 내뱉으라고요.
왜? 예수님이 그렇게 했기 때문에 그래요. 예수님은 한 사람이라도 건지기 위해서 인간 언어를 사용하지 않았어요. 낯선 언어를 이야기하는 거예요. 모든 사람이 본인들이 열심히 살려고 애쓰고 애 키우고 바르게 하는 그것을 예수님 말씀에 의해서 낯선 언어는 하나씩 하나씩 전부다 delete, 제거해나가는 거예요. 존 윅이다. 존 윅 모르죠? 킬러. 오늘은 저기 죽여 버리고 내일은 저기 쏘아 죽이고.
주께서 말씀을 주시는 것은 우리를 죽이기 위함이에요. 우리를 죽이기 위함이에요. 살리기 위함이 아닙니다. 우리는 끝까지 악착같이 우리의 이익을 생각하기 때문에 그래요. 우리의 유익을 생각하기 때문에.
뒤에 오신 분을 위해서 다시 이야기한다면 예수님이 오신 곳은 적이 있는 곳이라 했어요. 예수님은 적이 있는 곳에 왔어요. 적이 있는 곳에 와야 인간이 상상도 못한 전쟁이 일어나거든요. 영적 전쟁. 적이 있는 곳에. 인간의 적은 자기한테 손해를 입힌 대상을 적이라 보는데 하나님의 적은 모든 인간들이 하나님의 적이에요. 그걸 인간들이 몰랐던 거예요. 손 들고 ‘구원받겠습니다.’ 하면, 손 내려! 어디 적이 구원을 받아? 내가 어디에 속했는가를 알아야 돼요.
지금 이런 이야기가 전부다 요한일서에 다 나오는 이야기에요. 19절 같은 경우에, “저희가 우리에게서 나갔으나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하였나니 만일 우리에게 속하였더면 우리와 함께 거하였으려니와 저희가 나간 것은 다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함을 나타내려 함이니라” 19절에 나오죠.
이 말을 한번 들어보세요. 이 말이 인간의 언어로 말이 안돼요. 말이 안 된다고요. 우체국 어디 있습니까? 미장원 옆에. 미장원 어디 있습니까? 우체국 옆에. 이거하고 똑같은 말이에요. 그들이 나간 것은 우리에게 속하지 않음이라. 왜 나갔느냐? 우리에게 속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게 무슨 말이에요, 이게? 이게 무슨 말입니까? 이.게. 참…. 그들이 왜 나갔습니까? 우리에게 속하지 않은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 나갔다. 그러면 그들이 우리에게 속하지 않은 이유가 뭡니까? 나갔으니까. 이게 무슨 말이에요, 이게?
이 그림을 다시 보세요. 이 그림이 빛이 오기 전까지는 어두움도 없었어요. 어두움도 없어요. 그냥 인간세계에요. 인간세계는 인간의 언어가 통용되는 거예요. 인간의 언어로 통용되었기 때문에 그 당시 구약 시대에 그들은, 구약이 아니라 성경이죠, 성경을 뭐로 이해했습니까? 인간의 말로 이해를 한 거예요, 구약을. 이걸 지켜서 우리에게 유익이 주어지잖아요. 유익은 이 세상 삶뿐 아니고 죽어서 천국 가는 것도 포함되겠죠. 성경을 주는 것은 우리의 유익을 위함이라. 우리가 얼마나 거룩할 수 있고 얼마나 선할 수 있는가를 보여주기 위해 성경을 줬다는 거예요.
이렇게 성경을 해석했던 그들 손에 누가 죽었어요? 예수님이 돌아가셨잖아요. 예수님 돌아가셨죠. 예수님 돌아가시고 난 뒤에 역시 인간의 세계는 그냥 인간의 세계에요. 예수님 까불다가 잘 죽었다, 이래요. 인간의 세계에요. 인간의 언어 세계입니다.
그런데 예수님 죽고 난 뒤에 여기서 부활되었어요. 부활되고 나니까 여기서 갑자기 뭐가 생겼어요? 평소에 예수님이 하신 그 말씀이 일리가 있는 게 아니고, 인간에 의해서 배척받은 그 분이 그 말씀이 유일하게 실질적 현실을 영글어내는 거예요. 진짜 현실, 진짜 세계는 예수님의 언어에 준해서 퍼지게 되어 있어요, 이게. 아, 이거 진짜… 소름 돋지 않습니까.
내가 인간이 서로가 알고 있는 언어를 사용했다는 그 자체만으로 우리는 어두움이며 하나님의 원수였다는 것이 들통 나는 겁니다. 내가 뭐 한 것도 없어요. 그냥 사람이 납득되고 이해되는 말을 사용했다는 단지 그 이유 때문에 우리는 주님을 해석하지도 못하고 해석 못했기 때문에 믿지도 못한다는 대상으로 규정받게 되는 거예요.
뭘 알아야 믿지요. 알아야. 해석이 돼야 분석이 되죠. 해석도 안 되는데 뭘 믿어요. 가짜 예수만 만들어놓고 믿을 뿐이죠. 가짜 예수만. 인간끼리 통용되는. 예수님 참 좋은 분이다. 뭐에요, 그거? 좋은 분이면 십자가 죽었어요, 그래? 좋은 분이면?
4대 성인(聖人)이 있는데 소크라테스, 소크라테스가 거기 왜 들어갔는지 몰라, 공자, 뭐 부처, 4대 성인 중에 예수. 무슨 이런 말이 다 있어요? 4대 성인을 손에 꼽을 때 사람들이 속이고 있어요. 5대 성인을 배후로 깔고 있는데 5대 성인이 누구냐 하면 본인들이에요. 이유가 뭐냐? 4대 성인을 존경한다는 그 자체가 내가 얼마나 존경스러운 대상이냐, 이런 뜻이에요.
주일 낮엔가 그런 이야기했죠. ‘나는 아버지, 어머니 존경합니다.’ 이리 와. 너 아버지, 어머니 존경하는 거야 아니면 아버지, 어머니 존경한다는 자신을 존경하는 거야? 분명히 해. 인간의 모든 언어는 자기의 유익을 위하여 언어를 타인에게 말하게 되어 있어요. 발설하게 되어 있어요. 자기의 유익을 위해서. 그 유익 때문에 돌아가신 분이 누구냐? 예수님이십니다.
그러니까 여기 나오는 13절의 ‘악한 자’. 그 악한 자가 누구냐? 예수님을 모르는 사람들이 악한 자죠. 그럼 누가 예수님을 모르는가? 기존의 인간 언어의 개념을 굳게 쥐고 있는 인간들은 예수님에 대한 해석이 불가능하죠. 악한 자가 될 수밖에 없어요. 다 악한 자에요.
14절, “아이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아버지를 알았음이요 아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알았음이요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강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 속에 거하시고 너희가 흉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라” 여기 흉악한 자가 등장하잖아요. 흉악한 자.
그런데 흉악한 자가 흉악한 자로 알 수 있는 것은 뭐냐 하면 하나님의 말씀이 어디에 거해야 돼요? 너희 속에 거해야 돼요. 너희 속에. 그럼 예수님 돌아가실 때까지 너희는 없어요. 없는데 빛이 등장하면서 여기서 성령의 기름 부음, 뒤에 계속 나옵니다, 성령의 기름 부음이 오게 되면 이 빛의 세계에서 너희가 등장해요, 너희가.
이 너희는 나를 말하는 게 아니고 어떤 position, 위치, 아버지를 부를 수 있는 자녀, 아비, 형제 이런 식으로 등장하는 거예요. 이런 식으로. '나 구원받았다'가 아니라 '우리가 구원받았다'가 되는 그런 새로운 집단이 등장합니다. 이 집단의 특징은 뭐냐? 낯선 언어를 이해한다는 거예요.
낯선 언어를 이해한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느냐? 이 세상의 모든 것은 그리스도 빼놓고 모든 것은 악한 자라는 사실을 이해했을 경우에, 비로소 그 사람은 낯선 언어의 암호를 해독했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해석했다 이 말입니다. 예수님을 해석한 거예요. 해석하니까 예수님을 믿을 수 있죠. 비로소.
15절 봅시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여러분들이 이제는 인간의 언어 말고 낯선 언어로 보시면 비로소 여러분들이 이게 해석이 됐죠? 지금 강의한지 몇 분 됐는데 아직도 해석 안 되면 곤란한데…. 해석됐죠? 여기서 이 세상이 뭡니까? 인간들의 언어체계에 의해서 현실이라고 규정된 모든 것, 이 세상입니다. 수요 설교에 따르면 이 세상이 뭐냐? 과거의 나를 다시 소환하는 모든 것들이 이 세상이에요.
‘나’가 없는데 내가 있어버리면 나의 유익을 챙기게 되어 있어요. 나라는 것이 하나님의 전쟁에서 예수님과 이 세상의 전쟁에서 나는 이미 악한 자에 속하고 이 어두움에 속했거든요. 어두움에 속한 자가 굳이 어두움에 속한 중에 하나인 나를 굳이 내가 부각하겠다는 그 저의가 뭐에요? 그거 잘못된 거잖아요. 어두움에 속했으면 군소리 하지 말고 어두움에 속하면 되는데. 어두움에 속했지만 나는 좀 특별나야 돼, 이렇게 나오면 그거는 어두움이 아니죠. 그거는 회색이고 옅은 거죠. 어두운데 약간 어둡든지 이런 거죠.
그래서 우리 성도는 두 가지 해석의 대상이 되는 자가 성도에요. 낯선 언어에 대해서도 대상이 되고, 인간 언어에 대해서도 대상이 되고. 그 둘 사이의 차이에 대해서 다 알고 있는 자가 성도입니다. 왜냐하면 기름 부음이 있기 때문에.
기름 부음은 성령을 말하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실 때 성령으로 일했고 그리고 부활하고 난 뒤에 성령을 친히 주시는 분이기 때문에 성령을 받았다는 말은 예수님이 오실 때의 과정과 가실 때의 과정, 그 모든 것이 성령 안에 다 담겨 있습니다. 성령 안에.
성령은 이 빛의 세계에 대해서 이야기하죠. 자, 빛의 세계인데 인간의 언어로 보면 이게 빛이 아니고 한 남자의 죽음이에요. 한 사나이의 죽음. 그냥 죽음이에요. 이게 뭐처럼 생겼죠? 피라미드에요. (피라미드 안에) 왕의 묘실이 있고 길을 내려가면 또 하나 방이 있고 위로 난 미로 따라 또 방이 있고. 피라미드 밖과 통하는 길이 난 쪽엔 북극성이 있습니다. 피라미드는 죽음을 관리하는 거예요.
어떻게 관리하느냐 하면 가운데 묘실에 왕의 미라가 있거든요. 우리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왕의 묘실에 가서… 북극성, 우주의 고정점. 북극성은 항상 한 지점 북쪽을 가리키게 되어 있어요. 이걸 옛날 고대인들이 알았던 거예요. 중심, 변하지 않는 고정점으로 왕의 죽음은 그쪽으로 빠져나가야 된다는 거예요.
왜 이런 아이디어가 있느냐 하면 인간의 탄생과 죽음이라는 이 인생 경로를, 우주가 동그랗다면 다른 것은 변화하지만 고정점만은 그 자리를 유지하고 있죠. 안 변하죠. 그래서 진리라 하는 것은 고정되어 있으니까 그 진리를 찾아서 그 왕의 죽음과 진리를 연결시키려 한 것이 피라미드의 건축 목적입니다. 죽음을 다루는 겁니다. 죽음 처리죠.
이게 인간의 어디서 나온다고요? 인간 언어체계에서 나온 거죠. 언어에는 개념들이 있고 사상들이 있고 전통이 있고 과거의 지식들이 거기에 담겨있기 때문에. 그러면 여기서 주인공이 누구에요? 이 죽음의 주인공이 누구입니까? 이때는 왕이죠. 임금이 그렇다는 말은 임금에 소속되어 있는 모든 백성들도 이 코스를 따라서 영원한 우주의 중심, 영원히 변하지 않고 영생을 얻는 그 지점에 우리도 갈 희망을 얻겠죠. 왕이 먼저 가면 뒤따라가면 되니까요.
이게 인간의 언어에요. 인간의 죽음에 대한 자세 또는 태도를 나타내주는 겁니다. 주인공이 누구입니까? 인간이죠. 그런데 이 주인공이 인간세계, 언어세계에서의 주인공이 누구를 죽였어요? 이 땅에서 하나님을 죽였죠. 그러면 이런 식으로 인간을 주인공으로 여기는 그 자체가 하나님 앞에 뭐가 됩니까? 적이 되는 거죠. 왜? 죽였으니까. 피 흘려 죽였으니까. 그동안 인간의 과학, 철학 수고 많이 했다. 수고 많이 한 거예요. 자신의 한계를 드러내는 데에 아주 열심히 노력을 다했어요.
지금은 피라미드 안하고 화성, 달로 가죠. 냉동해서. 나중에 과학이 발달해서 다시 해동시키면 영원히 살 수 있다고. 모든 내장은 전부 로봇 기계로 바꾸고, 머리는 AI 인공지능으로 바꾸고 나머지는 기계로 바꾸든지 아니면 기계를 통해서 새로운 줄기세포 DNA로 교체해서 두 번 살고 세 번 살고. 삼천갑자 동방삭이처럼 계속 계속 살고. 지구가 환경 오염되면 화성 가면 되고, 화성 다 되면 달 가면 되고, 안 그러면 또 목성 가면 되고.
주인공이 누굽니까? 본인의 유익이죠. 본인의 유익인 거예요. 그래서 성경 해석 할 때 자기가 구원받기 위해서 해석하는 그것이 바로 이단이고 그게 다른 복음이죠. 끝까지 자기 챙기려고 하는 거예요, 끝까지. 이거 뭐 말릴 수가 없어요.
그래서 주님께서 성도를 어떻게 하느냐? 적이 있는 곳에 보냅니다. 아버지가 아들예수님을 적이 있는 곳, 적이 우글거리는, 뱀이 우글거리는 한복판에 보낸 것처럼 오늘날 성도들로 하여금 그곳에 보내야 비로소 12절 ‘죄’가 뭔 줄 알고 13절 ‘악한 자’가 뭔 줄 알고 14절 ‘흉악한 자’가 뭔 줄 알고 15절 ‘이 세상’ 자체가 이것은 하나님의 적이라는 것을 성도를 통해서 증거 되게 하시는 겁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아주 치밀해요. 그래서 성도는 인간의 언어도 알고. 열심히 학교에서 배웠으니까 뭐 다 알죠. 우리 손녀도 알아요. 수시로 만나면 물어요. 칠 일은? 7. 칠 이? 14. 칠 삼은? 21. 계속 물어요. 기초를 못 따라가서 빨리 따라 붙여야 되니까. 왜? 인간 언어를 알아야 될 게 아닙니까, 인간 언어를. 그래서 열심히 공부해야 돼요.
그다음에 낯선 언어도 알아야 돼요. 그 틈바구니에 뭐가 있다? 피가 있는 거예요. 예수님의 피. 인간 해석은 결코 낯선 언어의 해석을 못한다. 그래서 비로소 이 세상은 어둡고 이 세상의 악한 자가 누구며 흉악한 자가 누구며 죄가 누구인가를 예수님의 관점에서 성도를 통해서 드러내겠다는 것이 요한일서 초반의 흐름입니다. 10분 쉽시다.
서울강의20230914b 요한일서 2장 13절(유일한 해석자)-이 근호 목사
요한일서에 대해서 보고 또는 강의를 다 들어도… 이 동그라미에 대해서 이 세상이라는 것이 뭔가를 우리가 규정해야 되는데, ‘이 세상은 뭐 이 세상이지. 이 세상 자체가 현실이지.’ 이 세상은 이 세상이다. 이 세상=이 세상이다.
그럼 ‘이 세상이 뭐냐?’ 물으면 ‘그건 아직 우리가 공부를 못해서 다 모르지. 지금 내가 이 세상의 한 구석에 있는데 다른 부분을 모르니까 앞으로 조금씩 공부하다보면 알아가겠지.’ 철학과 문학, 과학 지금 이거 하고 있는 거예요. 화성은 얼추 아는데 명왕성은 모르겠다든지 안드로메다는 잘 모르겠다, 이렇게 되죠.
그런데 성경은 어떻게 됩니까? 이 세상? 간단하죠. 이 세상은 하나님의 적입니다. 이 세상은 마귀에 속한 세계. 마귀가 지배하는 세계. 이 낯선 언어로서는 결론이 아주 단출해요. 간단해요.
그 이유가 뭐냐? 그 이유는 아까 강의했지만 돌아서면 또 다 잊어버리니까. 이 동그라미(세상) 안에 뭐가 왔기 때문에 그렇습니까? 빛이 왔기 때문에 졸지에 이 세상은 어두움이 되는 거예요. 어두움. 빛에 대해 대적하는, 빛을 공격하는 어두움이 되는 거예요. 그리고 여기에 대해서는 예수님만 빛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은 다 어두움에 같이 합세해서 있습니다.
이 사실을 성도도 알고 있어요. 내가 어두움이라는 것을 아는 자가 성도에요. 빛의 자녀에요. 내가 어두움인 것을 알아야 그다음에 우리 속에 들어온 말씀이 나를 가지고 어떤 기능으로 발휘하고 있느냐를 우리가 느끼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게 14절에 나와요.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강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 속에 거하시고”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 속에 거한다고 해서 여기서 하나님의 말씀이 주체가 되는 겁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과 연결되느냐 하면 바로 예수님의 말씀이거든요. 낯선 언어에요. 예수님 또는 예수님의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이란 말이죠.
인간의 언어라 하는 것은 항상 나와 결부되어 있어요. 내가 소경이면 책상도 안 보이잖아요. 내가 보는 책상을 책상이라 하자, 라고 한 거예요. 어떤 언어를 만들 때 나한테 재가를 받고 나한테 허락을 받는 거예요. 저기 시계 있죠? “저걸 시계라 하자.” “난 저걸 시계라 하지 않고 햄버거라고 하고 싶은데.” “그건 너나 해라. 대부분 사람이 시계라 하는데 햄버거랑 무슨 관계있느냐? 햄버거는 따로 있어.” “오 그래? 그럼 나도 저 시계를 햄버거라 하는 건 철회할게. 나도 시계라 할게.” 이렇게 동의하는 거예요. 이 언어 세계가.
그 동의하는 장소가 어딥니까? 바로 학교잖아요. 그 이전에는 어딥니까? 학교 이전의 학교는 가정이죠. 가정, 학교, 그리고 사회 전부다 통일된 언어의 개념들을 우리에게 집어넣는 환경이에요. 회사 취직해서 부장, 과장, 사장이 지시하는 걸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들으면 그건 뭐 인턴 하다가 쫓겨나죠. 쫓겨나도 실업수당은 받을 수 있어요.
아니, 말이 안 통하는데 어떻게 할 거예요? 바벨탑을 지어도 말이 통해야 돼요. 바벨탑의 언어는 뭡니까? 우리가 힘을 합해 탑을 쌓아서 우리 이름을 하늘에 닿게 하자는 통일된 의지 같은 게 있어요. 그걸 일종의 합세된 권력이라 할 수 있는데 어떤 권력, 통일된 의지 여기에 동조하지 않으면 그건 잘리죠.
한국 팀하고 일본 팀하고 축구하는데 일본 응원단이 한국 팀에 끼어있으면 그건 안 되죠. 저쪽에 가라. 응? ‘손흥민 퇴장하라’ 뭐 이렇게 나오면 안 되죠. 군집이라는 것은 끼리끼리 서로 친하고 친근감, 친밀성 있는 집단끼리 모여 있는 게 군집입니다. 군집은 인간의 언어를 통해서 결속을 다지죠.
그게 바로 교회잖아요. 그러니까 교회는 빛의 세계가 아니에요. 그냥 인간의 친목모임이라 보시면 돼요, 교회라는 게. 친목모임이니까 거기에 인간의 유익이 그대로 살아있는 거예요. 교회 와서 이익을 봐야지, 교회 오는데 이익을 안 본다면 이건 안 되죠.
그런데 진짜 성령의 교회는 말씀 하나하나가 이익 보러 온 나를 delete, 제거해버리죠. 가위표 쳐버린다고요. 이 말씀은 우리가 어디에 소속되어 있는가를 보여주는 거예요. ‘나 어때요?’가 아니라 ‘우리가 속해있는 곳이 어디입니까?’를 보는 거예요.
여기 24절 봅시다. “너희는 처음부터 들은 것을 너희 안에 거하게 하라 처음부터 들은 것이 너희 안에 거하면 너희가” 그다음에 뭡니까? “너희가 아들의 안과 아버지의 안에 거하리라” 어디 안에 있다는 그 공간이 내 겁니까? 아니죠. 내 것이 아니죠. 내 것이 아닌 안에 우리가 들어있는 거예요. 내 것이라고 할 수 없는 공간에 내가 들어있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그 안에서는 내가 아들의 것이고 아버지의 것이지 내 건 아니잖아요.
주님이 주신 빵이라 이 말이죠. 아까 권사님이 주셨다마는 주님이 주신 빵이죠. 내가 갖고 있는 것이 내 것이 아닌 거예요. 그러면 목사가 설교시간에 “여러분 가진 재산이나 모든 것은, 차도 여러분의 자녀도 여러분 것이 아닙니다.”라고 이야기했을 때, 그 말을 우리 성도는 두 가지 다를 알고 있잖아요.
인간 언어도 알고 있다고요. 그 이야기 들으면 상당히 기분 나쁘죠. ‘내가 이만큼이라도 모으기 위해 얼마나 굴욕적으로 죽도록 고생했는데 이걸 네가 한방에 부정해? 너 오늘 헌금 없어. 오늘 나 점심값 안낸다.’ 이러더라도 가만히 생각해보니 그 말이 그럼 틀린 말이냐? 틀린 말이 아니고, 하아, 내가 교회 오기 전에 내 것을 챙기면서 교회 왔었구나. 그런데 교회 오고 난 뒤에 내 것이 아니고 주의 것이라 할 때 주님의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내 것이라고 여겼던 것이 주님의 것에 의해서 제거되는 즐거움을 말씀을 통해서 맛보게 된 거예요.
아, 이거 이미 알고 있었던 건데 또 세상에 나가면 우리는 다 까먹고 이거는 내 거, 저거는 너 거, 딱딱 구분했는데 다시 말씀 앞에 서니까 이것이 다시 한번 상기가 되는 거예요. 아, 내 주제파악… 다시 알게 되었다. 그때 이제 감사해가지고 오천 원 내고.
두 가지를 다 알고 있으니까 되풀이해서 계속 순환시키는 거예요. 그러니까 요한일서 나 뭔 줄 압니다. 이제 안 볼랍니다. 안 보려하면 안돼요. 매일 우리는 보든 안 보든 요한일서가 우리 속에 들어와요. 이건 글자로 되어 있지만 글자로 되어 있는 이걸 읽으라 하는 게 아니고 이 말씀이 이미 우리 속에 있는 것을 글자로 보면서 그냥 확인할 뿐이에요. 아, 내 속에 말씀이 이렇게 들어있구나.
그래서 우리가 기뻐할 것은 뭐냐? “아비들아 너희가 악한 자를 이겼다. 아이들아 흉악한 자를 이겼다.” 아, 내 속에 있는 말씀이 주님이 내가 이기지 못한 이 세상을 이겼구나 하는 것을 확인시켜 주시는 겁니다.
8절 보겠습니다. 요한일서는 왔다갔다 해도 괜찮아요. “다시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쓰노니 저에게와 너희에게도 참된 것이라 이는 어두움이 지나가고 참빛이 벌써 비췸이니라” 벌써 비췄다고 되어 있어요. 참빛, 어두움. 오늘 여러 번 이야기합니다. 인간의 이 세상에서 참빛에 대응하는 실체는 없습니다. 이 세상은 어두움이기 때문에.
이 세상에는 빛이란 게 없어요. 양자물리학, 물리학에서 얘기하는 빛은 그 빛이 아니에요. 물리학을 양산시키고 생물학, 철학을 양산시키는 과학을 양산시키는 이 세상 자체가 어둡기 때문에 그걸 이 어두움의 세계가 자기 어둡다는 것을 해석 못해요. 자기도 자기 해석을 못하는 주제에 무슨 예수님을 해석합니까? 해석을 해야 뭘 믿든지 말든지 하죠. 인간은 자기 자신이 어둡다는 것을 해석하지 못하는 입장에서 예수님을 해석 못하죠.
그러나 여기 나중에 나옵니다만, 27절, 주의 기름 부음이 너희에게 임하게 되면 비로소 낯선 언어로 나뿐만 아니고 세상뿐만 아니고 주님까지 해석이 가능합니다. 그래서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다. (“너희는 주께 받은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
자, 가르친다는 것은 이 인간 언어의 세계에서 있었던 일이에요. 인간 언어에서 가르침은 왜 가르쳐야 되죠? 인간에게 왜 가르쳐야 됩니까? 인간세계에서 교육과 양육을 하고 자녀에게 강요하는 것은 죽음의 관리에요. 아까 피라미드 얘기했잖아요. 관리하는 거예요. 죽음 관리. 살아있을 때 죽음 관리해야 죽음에 대처할 수 있다는 겁니다.
물론 학교 아동들이 그러진 않아요. 그러나 하나의 국가를 대표하는 왕이 피라미드를 통해서 우리와 관련 있어요. 왕은 인간의 눈으로 보이는 세계 바깥으로 보이지 않는 세계까지 제일 선봉장으로서 나서야 될 책무를 갖고 있는 게 왕이에요. 고대 왕이에요. 그러니 왕 주위에 누가 있겠어요? 바로 제사장들이 있겠죠. 사이비 제사장들, 우상의 제사장들. 어떻게 하면 인간은 영생불멸할 수 있느냐? 그 아이디어를 끄집어내는 거예요. 그게 지금은 천문학이라는 이름이지만 옛날에는 유사 천문학과 그 당시 나름대로의 물리 과학이 동원되었어요.
왜냐하면 인간은 그 시대를 앞설 수가 없기 때문에. 인간은 그 시대의 존재에요. 시대의 사람입니다. 그 시대에 오기 전까지 과거의 누적된 지식과 지혜가 오늘날 우리로 하여금 그 시대를 붙들려고 시도하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그들은 죽음을 관리해야 되는데 그 죽음의 주인공이 누구냐? 하나님? 아니죠. 누가 주인공입니까? 죽어가는 자가 누구에요? 본인이니까 본인의 능력과 지혜로 본인을 살려보겠다는 이 시도, 이런 노력의 제일 밑바닥에는 칠 일은 7, 칠 이 14, 칠 삼은 21이 있는 겁니다.
그래서 젊은 사람들은 잘 모르지만 나이 많은 사람들은 주로 케이블에 건강식품이라든지 해독주스, 관절에 좋은 거, 소팔메토, 콸콸콸 남성을 살리자 뭐 이런 거 있잖아요. 여자의 피부미용, 이런 거. 전부다 회춘, 청춘유지, 건강에 관한 문제에요. 모든 돈은 벌어서 거기다 다 쏟아 넣는 거예요. 안 아파도 보다 건강하기 위해서 추가적인 보약을 또 달여 먹는 거예요. 안 아프지만 아플 것을 대비해서 먹는 겁니다.
모든 것은 어떤 걸 해도 결국 인간의 목표는 죽음을 어떻게 처리하고 이겨내는가 하는 거예요. 여기에 한 몫하는 것이 적그리스도죠. 적그리스도 나와요, 여기. 2장에도 나오고 4장에도 나오죠. (요일 2:18, 2:22, 4:3) 이 적그리스도가 노리고 있는 것은 인간들이 원하고 있는 바를 적그리스도가 채워주는 겁니다. 적그리스도는 유사 영생, 유사 천국, 이런 것을 자꾸 만들어내는 거예요.
그래서 요한일서에서 사도 요한이 화가 나서 하는 말이 영생은 피에서 오는 거예요. 여기 요한일서 1장 7절,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피가 우리의 모든 죄를 깨끗케 한다.
자, 아까 이야기했습니다. 12절, 죄가 뭐냐? 죄는 어두움 자체가 죄가 돼요. 모든 하나하나는 어두움을 표현하는 하나의 표현체로서 그 자체가 죄란 말이죠. 그러면 생명, 영생은 그 죄 있는 죄를 피로서 사함 받으면 영생입니다. 사도는 너무나 단출하고 확실한 것을 제시했어요.
문제는 사람들이 그걸 못 받아들이는 거예요. 왜? 그게 인간 언어에 그대로 머물러 있을 경우에는 예수님의 피를 어떤 남자의 불행사, 불상사, 또는 정치범의 죽음으로 간주해버리고 내가 할 게 뭐냐, 예수님의 피 말고 내가 할 게 뭐냐를 달라는 거예요. 그걸 두 자로 크게 쓰겠습니다. 이것도 참 어려운 이야기인데 그게 뭐냐 하면 이거에요. ‘역사’에요, 역사.
인간사회에만 역사가 있어요. 참새 역사 이런 거 없어요. 참새가 쓰는 참새 역사 없습니다. 인간들만 역사가 있어요. 역사를 따져서 뭐할 건데요? 역사는 인간 언어의 유지와 그 발전을 도모하는 거예요. 그걸 진화라고 하고 진화의 체계를 잡는 것을 진화론이라 하죠. 요새 진화론 아닌 게 어디 있어요. 경영학, 문학, 언어학, 생물학은 물론이고 물리학, 어느 것 하나, 신학까지 마찬가지고요. 어느 것 하나 진화론 아닌 게 없어요. 진화는 인간의 본성에 속해요. 인간은 갈수록 퇴보한다? 아, 딱 듣기 싫어요. 인간은 갈수록 진보해야 살맛이 나요. 살맛이 난다니까요.
코로나? 퍼졌지만 인간의 지혜는 그걸 극복했다. 이게 뭡니까? 진보했다는 거 아닙니까. 진보. 지금 지구의 온난화, 1.5°C만 넘으면 지구는 이제 10년 내에 전부다 끝난다. 그러나 여기서 인간이 그냥 있을 수 없다. 그럼 대책이 뭐냐? 공중에 있는 탄소를 포집해서 그걸 암석에다 묶어놓고 땅에 묻으면 된다는 거예요. 안 그러면 식물의 100배나 많이 탄산가스를 흡수하는 어떤 식물 조류나 박테리아 종류를 개발하게 되면 탄소를 지금보다 줄일 수 있다는 겁니다. 탄소 때문에 온난화가 가중되니까 어떻게든 줄여보든지 해서 줄일 수 있다는 거예요.
그러면 그거 개발하는 데에 에너지 더 안 들어요? 개발하는데 에너지 들고 그다음에 그 기술발전보다 탄소를 늘이는 속도가 훨씬 빨라요. 하여튼 10년 뒤에는 시마이(끝)입니다. UN이 결정했어요. 10년 뒤에는 끝났다. 손도 못 써요. 하지만 인간 마음은 누구나, 그렇게 이야기하면서도 누구나, 그동안 우리는 극복해왔다. 우리는 극복해왔다 이 말이죠. 난관이 있을 때 우리는 그걸 기회로 삼자, 말이야 뭐 유명한 말들이 있죠.
그러나 성경은 뭡니까? 성경은 이렇게 이야기해요. 끝났잖아. 왜 그래? 왜? 아직도 미련 두고 있어, 이 땅에? 그냥 대충 살다가 빨리 제대해! 죽어버려, 인간아. 끝났잖아. 끝났어. 예수 그리스도가 죽었다가 부활했잖아요. 그럼 됐잖아요. 탄산가스 포집, 그건 필요 없다고요. 탄산가스 포집 그걸 믿을래요, 예수님 피를 믿을래요?
문제는 예수님 피를 믿을 수가 없다는 거예요. 그러니 어떻게 합니까? 탄산가스 비율 낮추는 방법도 믿고 예수도 믿고. 도대체…. 믿음의 주체가 누구에요? 본인이에요, 본인. 말씀이 아니고 본인이라니까요. 그러니까 이건 뭐냐? 나는 나한테 속했다는 겁니다.
지금 강의 처음으로 다시 돌아가 보겠습니다. 이 동그라미가 이 세상이에요. 제가 동그라미로 그렸지만 보통 동그라미로 그리지 않습니다. 빛, 해놓고 빛과 대비해서 어두움. ‘빛/어두움’. 죽음, 대비해서 영생. ‘죽음/영생’. 이렇게 대비하는 방법은 인간 언어적 방법이거든요. 왜냐하면 인간이 이걸 보면서 천국/지옥, 나쁜 고기/좋은 고기, 양/염소, 이렇게 성경을 요약해놓으면 쭉 써놓고 밖에서 인간이 볼 때, 나 골라잡을래. 나는 지옥 싫어. 천국 갈래. 나는 죽음보다 영생이 좋아. 나는 어두움보다 빛이 좋아. 골라잡는 거예요. 이게 바로 인간 언어에요. 인간 언어로 성경을 이해하는 거예요.
그런데 이렇게 하지 말고, 그냥 동그라미 해놓고 예수님만 빛으로 왔을 때는 예수님 빼놓고 나머지 이 전체가 뭡니까? 어두움이죠. Indian reservation. 어두움 보호구역이에요. 빰빰빰빰 이렇게 나오는 노래 있어요, 옛날 팝송에. 어두움의 세계에요. 그러니까 구원받겠다, 예수 믿겠다는 게 다 어디에 속합니까? 다 어두움에 속하죠.
기름 부음이 없으면 주의 말씀이 오지 않으면 이 사람은 아까같이 이런 낯선 언어 말고 인간 언어, ‘천국 갈랍니까, 지옥 갈랍니까?’ ‘나 천국 갈래.’ 이런 거. 바보도 아니고 누가 고생하러 가겠어요? 천국 가죠. ‘믿으십니까?’ 믿죠! 그것도 믿고 탄산가스 줄이는 방법도 믿고.
그리고 마지막에 10년 뒤에 지구 종말이 온다면 그걸 대비해서, 지금 한국에도 있어요, 건설회사에서 벙커를 만들었어요. 현재 서울에도 있어요. 내가 알기로는 몇 군데 있어요. 이게 안 유명해서 그런데 소위 돈 가진 사람들은 은밀히 3년 간 자기 식구끼리 버틸 수 있도록, 김정은이 서울에 핵폭탄 터트려도 끄떡없이 안 죽는 벙커가 옵션으로 포함된 주택을 판매하고 있습니다. 벌써 몇십 년 전부터 판매하고 있어요. 돈 있는 사람이나 그걸 사죠. 그래놓고 그들은 주여, 믿습니다. 뭘 믿어요, 뭘? 본인을 믿지, 무슨 주를 믿어요?
자연에는 역사가 없고요. 오직 인간사회에만 역사가 있습니다. 그 인간의 역사가 있기 때문에 그 역사 앞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기괴한 존재가 되어버렸어요. 인간의 역사 앞에서. 왜냐하면 예수님은 인간이 역사를 붙든다는 것을 알고 역사를 완전히 바꿔버렸거든요. 꼭지점으로 바꿔버렸어요. “아브라함? 아브라함 때 내가 있었다.” 역사를 꼭지점으로 돌리든지 안 그러면 유대인들의 꼭지가 돌아갔는지 모르겠습니다만.
그 비슷한 이야기를 수요 설교 때 했어요. ‘인간은 살다 죽는다.’ 이렇게 보통 알고 있잖아요, 인간 언어에서. 그러나 제가 어제 뭐라고 했습니까? ‘인간은 이미 죽어 사라졌는데 주님에 의해서 소환된다.’ 이미 죽었는데 주님에 의해서 소환되어서 지금 나타난다.
이것이 성립되려면 사도 바울처럼 생각해야 돼요. 사도 바울은 단선적으로 역사가 흐른다, 가 아니라 동그라미를 쳐요. 한쪽 동그라미는 아담 안, 다른 한쪽 동그라미는 예수 그리스도 안. 동그라미가 두 개지만 더 정확히 말해서 이렇습니다. ‘아담 안’을 크게 그리고 그 안에 동그라미로 ‘그리스도 안’.
그리스도 안은 이미 죽었고 그리스도가 사는 세계. 이 바깥에는 아담의 세계. 아담 안. 로마서 5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한 사람이 죄 지음으로 죄가 왕 노릇했다. 또 한 사람이 의인됨으로서 그 안의 용서가 은혜가 왕 노릇하는 세계, 그리스도 안. 두 개의 영역이 같이 겹쳐서 중첩되어서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바깥쪽도 알고 안쪽도 알지만 아담 안에 있는 사람은, 성령을 받지 못한 사람은 아담 안 밖에 몰라요. 아담 안에서 만들어진 게 교회입니다. 이 교회는 진짜 교회가 아니죠. 가짜 교회인데 이 교회는 나를 살리기 위한 교회에요. 나를 부정하고 싶지 않은 데서 나온 교회에요. 그러니까 이 교회에서 외치는 예수는 다른 예수이고 성령도 다른 예수고 복음도 다른 예수에요. ‘나는 어떻게 하면 구원받을 수 있습니까’를 모토로 해서 그걸 핵심주제로 설교하는 동네가 이 교회에요.
그런데 그리스도 안의 교회는 뭡니까? 어제부로 돌아가셔야 되는데 왜 오늘도 기어 나왔습니까? 오늘도 주께서 또 소환하셨나 보죠? 둘 다를 알아요. 단선적으로 과거가 있으면 현재가 있다는 것도 알고, 그리고 주님께서는 내가 아는 과거를 delete, 항상 매일같이 지워버렸다는 사실도 알아요. 그걸 ‘새롭게 발생된다’고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 크게 쓸게요. 여러분들이 이 문장만 아셔도 이제 죽어도 더 이상 여한이 없습니다. [나의 모든 일은 없다. 오직 모든 것은 주님의 일이다.] 나의 일은 없습니다. 주님의 일만 있습니다. 화장실에 가든지 목욕을 하든지 전부다 주의 일. 빵을 먹든지 연세두유를 먹든지 다 주의 일이에요. 내 일이 없어요. 나의 일은 없고 주의 일밖에 없으니까 죽은 내가 굳이 나한테 책임을 질 필요가 없습니다. 과거를 기억할 이유도 없어요. 내 일이 아닌데 남의 일을 왜 기억합니까?
그런데 성도는 둘 다를 알고 있거든요. 나의 일과 주의 일을 알잖아요. 그러니까 성령께서 세상을 탓하는 게 아니고 우리 자신을 매일같이 반복해서 탓해요. 나의 일은 주의 일의 적이었었어. 그게 십자가 사건이었어. 그 사이에 예수님의 피가 있는 거야. 피가 있다는 말은 한쪽은 살해했고 한쪽은 살해당했다는 뜻이거든요. 그게 우리 안에 계속 살아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늘 육신 때문에 나의 일이라고 고집을 부리다가 성령이 찾아오게 되면, ‘이게 미쳤지. 바보도 아니고… 왜 남의 일인데 걱정을 내가 하느냐.’ 회사에 다니는데 과장이 “오늘부로 너 잘렸어. 나가.” 하면 ‘내가 뭐가 잘못됐는데?!’ 하다가 성령이 오게 되면, ‘맞아. 취직을 누가 시켜줬는데 내가 왜 화를 내지?’ 모든 게 그래요, 모든 게.
다시 이야기합니다. 나의 일이 아니기 때문에 내가 양심의 가책이라든지 내가 고민한다든지 반성한다는 자체가 이게 성립이 안 됩니다. 여러분, 반성해서 새 사람 될래요, 아예 주님이 기억치 아니한다, 어느 쪽이 낫습니까? 기억치 않는 게 낫지, 반성해봐야 얼마 가지도 않아요. 또 반성했다고 자랑질하게 되어 있어요, 인간은.
그래서 기존 교회에서 설교하기 참 쉽죠. 여러분 가정에 우환이 있는 것은 여러분이 회개를 덜 해서 그렇습니다, 이러는 거예요. 전에 제가 강의할 때 그 예를 들었죠. 절에 가면 밥 먹을 때 그 사발. 발우공양 하잖아요. 김치 쪼가리가지고 마지막에 닦아내죠.
그런 짓 왜 하느냐? 그것은 내 마음에 마지막 한줌의 찌꺼기까지 다 떨어낼 때 더 이상 나에게 불상사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자기의 기대감 때문에 그런 거예요.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을 때, 비로소 나는 자유를 얻는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세상에 뭐 그런 마귀가 다 있어요, 그래. 자기가 왜 자기를 닦아내요?
보혜사는 요양사입니다. 우리는 환자에요. 환자가 닦아내면 요양사가 왜 필요합니까? 성령이 예수님의 피로 닦아냅니다. 거즈로 닦아내고 똥 묻은 기저귀 같은 걸로 하는 게 아니고 주님의 피를 반복시켜서 우리가 이미 닦였었음을, 그리고 닦인 자리가 네 자리가 아니고 주님의 말씀이 들어올 자리라는 것을 날마다 우리에게 확인시켜 주는 거예요. 사라진 인간을 다시 소환해서.
하나의 예를 들겠습니다. 자, 누가복음 23장. 여러분 이거 안 봐도 알아요. 두 종류의 강도가 나옵니다. 강도. 참 이게 쉬운 이야기지만 이 강도 이야기가 굉장히 어려운 이야기에요. 왜 어렵냐 하면 이게 구원받은 강도만 나와서는 이야기가 안돼요. 구원받지 못한 강도가 있음으로써 이야기가 되는 겁니다. 구원받지 못한 강도.
그러면 구원받은 강도를 생각할 때 이걸 동그라미로 안 보고 그냥 구원받은 강도할래/ 지옥 간 강도할래? 우리보고 묻는 게 아니거든요. 우리한테 물으면 구원받은 강도 하겠죠. 그런데 동그라미를 쳐버리면 우리는 이미 어두움이에요. 우리는 구원받지 못한 강도에 속합니다. 그러면 구원받지 못한 강도를 통해서 구원받은 강도를 파악해야 되죠. 이렇게 해석해야 되는 거예요.
구원받지 못한 강도는 인간의 언어를 사용한 거예요. 인간의 개념으로 예수님을 파악한 거예요. 그러면 우리도 그 field, 그 영역을 통과해야 되는 거예요. 내가 구원받은 강도라 생각하지 말고, 내가 구원받지 못한 강도라면 우리는 할 말이 그렇게 많아요. 뭐 대표적인 할 말이 뭐냐 하면, 당신이 구원자라면 먼저 이 수갑부터 풀어달라는 거예요. ‘믿지 말래도 내가 믿어줄게.’ 이렇게 되는 거예요. 실제로 나오죠? 실제로 마태복음에 나옵니다. (마 27:42-44, 막 15:32)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이거 풀어주면 당신 잘 믿을게’하는 이야기가 오늘날 교회 와서 40년, 50년 다녀도 그 마음이 그대로 우리 내부의 바닥에 지금 남아있다는 거예요, 이게. 그러니까 누가복음 23장이죠. 누가복음 23장이 늘 우리 안에 남아있어요. 우리는 정답을 안다 해서 자꾸 구원받은 강도 쪽으로 가는데 주님께서는 그걸 말리고 반복을 시키는데 구원받지 않은 강도 쪽으로 우리를 돌려버려요. 우리 내부에 말씀이 있으니까.
그렇게 되면 우리는 고개를 끄덕이게 됩니다. 역시 구원받지 않은 강도의 말이 맞다. 맞죠. 논리적으로 맞는 이야기죠. 구원받지 않은 강도의 말 가운데서 틀린 말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죠. 마귀 말 중에서 틀린 말 있어요, 없어요? 없어요. 왜? 우리는 마귀와 한 통속이기 때문에. 같은 어두움의 동기생이기 때문에 서로 통해요. 내가 하는 일, 우리가 납득이 되고 이해하는 이야기는 전부다 마귀 일이거든요. 낯선 언어가 아니에요.
결국 인간 언어의 최종 목표는 뭐냐? 너한테 이익 있다, 이거거든요. 그러면 구원받지 못한 강도가 뭐를 노려서 구원 못 받았습니까? 구원을 노렸기 때문에 구원 못 받은 거예요. 구원을 노렸기 때문에. 누굴 이용해서? 예수님을 이용해서.
당신 소문났대. 죽은 자를 살리고 뭐 물 위를 걷고. 그럼 그 솜씨 다 어디다 써? 나 살려봐. 믿지 말래도 내가 믿을 테니까. 그러니까 교회에서 간증집회 하잖아요. 간증집회 하는 이유가 뭡니까? 나도 안 믿었는데 이런 기적을 보고 믿었다, 이 이야기하는 거예요. 하여튼 구원받지 못한 사람만 초빙 다 해. 교회에서. 헌신예배. 차비주면서 구원받지 못한 사람만 다 불러 모아요. 납득이 되니까. 내 노력에 보람을 느낄 수 있도록 해주니까.
그런데 구원받은 강도는 구원받지 못한 강도와 같지 아니했다. 그럼 구원받은 강도의 마음은? 모르죠. 왜? 우리는 구원받지 못한 강도에 머물러 있기 때문에 구원받은 강도에 대해서는 모르죠. 어떻게 구원받았습니까? 몰라요.
그러면 다른 사람이, “목사님은 어떻게 구원받았습니까?” 나의 대답은, “나도 몰라요.” 그걸 은혜라고 합니다. 주께서 하셨는데. 주께서 하셨거든요. 나도 몰라요. “당신 오늘 뭐했습니까?” “빵을 먹었습니다.” “빵 먹은 것이 주의 일인 것을 증명해보세요.” 정답은, “몰라요.”
분명히 내 손이 움직여서 빵을 집었고 입을 벌려서 씹은 것, 이거 무슨 언어죠? 인간의 언어죠. 논리라는 것은 원인과 결과를 이어가는 거거든요. 인간의 언어죠. 인간의 언어로는 할 말이 많죠. 그런데 낯선 언어로 이야기하면 이게 백날 해봐야 손가락 움직인 것도 나이고 그걸 내가 의식하고 있고 ‘먹는다. 지금 들어간다. 지금 빵 이분의 일이 들어갔다.’ 다 의식하고 있잖아요. 그 의식에서 내가 벗어날 수 있습니까, 못 벗어납니까? 못 벗어나죠. 그럼 본인 일이네. 주의 일이 아니고 본인 일이잖아요.
성도는 이상하게 둘 다를 알고 있다는 거예요. 무엇을 확실하게 알고 있다? 내가 하는 일은 모조리 나의 일이라는 것을 너무나 확실하게 잘 알고 있으면서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비로소 주의 일이 뭐라는 것이 느껴지는 거예요.
바로 나의 일을 부정해주시는 그 능력이 십자가의 피에서 나오는 거예요. 피가 내 죄를 사한다는 것은 피가 나를 제거했다는 뜻이에요. 내가 존재하면 죄를 지으니까. 날마다 피가, 네 일 없다. 다 내 일이었어. 그 다음날 와서 피가, 네 일 없다. 다 내 일이었어. 이렇게 네 인생에 책임지려고 하지 마. 네가 네 자식한테 자꾸 신경 쓰지 마. 자식도 네 자식 아니야. 예수님 내 자식이야. 그걸 계속 언급하죠.
우리는 감사의 눈물을 흘리면서 감사의 기도를 올리죠. 2분 30초 갑니다. 2분 30초 이후에는 소용없어요. 다시, 숙제 안하나, 인간아! 드디어 나의 일로 또 돌아와 버려요. 그렇게 자꾸 돌려야 돌릴 때마다 주의 은혜가, 범사에 감사가 나와요. 계속 죄인이 되어 있어야 감사가 나오는 거예요.
개에다 물 부어 보세요. 가만있으면 물이 안 튀기죠. 막 몸을 흔들면 그 주위에 물이 다 튀죠. 우리는 죄인인데 튀는 것은 주의 의가 튀어나올 때, 그게 바로 주의 증인이잖아요. 이 이야기를 내가 한두 번 한 게 아닌데, 이상하게 만나면 좋은 친구가 아니고 만나면 다 잊어버리죠.
자, 나의 일이란 뭐냐? 주님께서 이 세상을 계속해서 압박 해와요. 모두다 나의 일을 갖고 있기 때문에. 성도도 알죠, 나의 일을. 나의 일인 이 세상의 특징은 [남을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는다.] 이게 이 세상의 대원칙입니다. 그냥 자연인 되어서 지리산에 있다고 일이 되는 게 아니에요. 반드시 남을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어요.
예를 들어봅시다. 전원주택 하나 경매 나왔습니다. 그런데 제1순위를 새마을금고가 갖고 있어요. 2억 갖고 있습니다. 그럼 이 전원주택 경매를 2억 5천짜리로 받았다면 이 사람은 사실 몇 억을 지불해야 됩니까? 2억을 추가하면 4억 5천짜리를 받은 거예요. 그걸 감안하고 해야 돼요. 그런데 나는 내 돈 2억 5천 주고 내 집이다, 하면 새마을금고에서 가만있지 않겠죠. 1순위니까. 뭡니까? 남을 죽이지 아니하면 내가 죽는다.
모든 인간의 만남은 이래요. 모든 인간은. 양보하면 죽어요. 양보하면 죽는다고요. 어쨌든 간에 버텨야 돼요. 버텨야 내가 살아요. 자, 이게 바로 인간의 세계, 인간 언어입니다. 인간 언어는 이런 구조로 되어 있어요. ‘정답이 뭐냐’가 말 내용이 아니라 이 말을 함으로써 ‘네가 죽을 거냐, 내가 죽을 거냐,를 우리가 이 자리에서 분명히 하자.’ 이게 인간 언어의 사용법입니다. 인간 언어의 사용법.
이것이 가장 적나라하게 잘 드러나는 경우가 바로 상견례에요. 사돈 만나고 집에 오면 완전히 피곤에 지쳐 쓰러집니다. 개코도 없는 게 잘난척한다고 너무 긴장해가지고. 고상하지도 않으면서 고상한 척한다고… 둘 다 ‘어험’으로부터 시작하니 둘 다 양반이라. 아… 상견례, 피곤 피곤. 말할 것도 없어요. 너무도 피곤한 거예요. 밀리면 안 돼. 밀리면 안 돼, 밀리면. 우리 딸이 고생해, 밀리면 안 돼. 저쪽은, 우리 아들 밀리면 안 돼. 나중에 잡혀 사는 거야. 강하게 밀어붙여야 돼. 이거 뭐 기마전도 아니고요.
세상 모든 만남이 그래요. 그래서 제일 인간이 힘든 것은 뭐냐? 개나 물건을 다루는 것은 힘들지 않아요. 제일 힘든 게 사람 다루는 거예요. 사람 만나는 겁니다. 하도 죽이려고 덤벼드니까. 자, 이게 인간 세계에요. 인간 언어입니다.
그러면 낯선 언어에서는 뭐라고 이야기합니까, 이런 세상을 향하여? 지금까지 잘 했으면 여러분 알 거예요. 뭐가 없어요? 남을 죽이지 않으면 내가 없죠. 낯선 언어에서는, 그 ‘내’ 내가 죽여줄게. 내가 delete, 내가 없어버리면 나를 죽이는 남을 사랑하게 된다는 것이 요한일서 3장 16절입니다. 죽은 인간이 더 이익 챙길 게 뭐가 있냐는 식이에요.
요한일서 3장 16절 한번 보겠습니다.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마땅하다고 되어 있지만 당연하다 이 말입니다. 그게 자연스럽다 이 말이에요. 당연한 일을 새삼스럽게 유난떨지 말라 이 말입니다.
그러니까 인간 언어를 알고 있는 이 사람들이 요한일서를 보고 지킨다는 것은 말이 안 되죠. 근본적으로 나한테 이익이 오지 않는 짓은 내가 하지 않는 그런 본성으로 무장되어 있기 때문에 그래요, 내가. 내가 그냥 일시적으로 손해 보는 게 문제가 아니고 손해 보는 게 반복이 되면 밀리게 되어 있고 밀리게 되면 가장 중요한 내가 남한테 죽어요. 내가 남한테 죽는다고요.
그럼 주님이 뭐라고 합니까? “죽어라. 왜?” 이거거든요. 그러니 인간이 인간 언어를 고집하는 것은, ‘이러다가 죽습니다. 죽습니다.’에서 진짜 죽음으로 넘어가질 못하는 거예요. 구원받지 못한 강도가 ‘나를 구원해주면 주님을 믿겠습니다.’ 할 때 그 강도가 못한 게 있어요. 뭐냐? 그냥 곱게 죽지를 못해요.
그런데 구원받은 강도는 이참에 곱게 죽자는 거예요. 이 순간을 내가 기다렸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내가 죽는 순간이기 때문에. 세상에, 이건 내 힘이 아니라는 겁니다. 내가 강도짓해서 잡힌 게 아니고, 이건 인간 언어고, 주님을 믿기 위해서 주께서 강도라는 생활을 하게 했다는 거예요. 형사나 경찰이 들으면 기가 찰 노릇이에요. “이거 뭐 또 끝자락에 와서 자기 자랑이고? 잘했다, 그래. 네가 강도짓 한 게 잘했다 이 말이야?” 이렇게 따질 거예요.
그러나 강도는, 이것이 주께서 일으킨 일이라는 거예요, 이것이. 그러니까 주님이 왜 죽는지를 알죠. 주님의 죽으심은 나 같은 죄인을 죄 사하기 위해 죽으신다는 사실을 강도는 아는 겁니다. 그러니까 구원받은 강도는 구원받지 못한 강도가 이해하는 것까지 이해가 되죠. 내가 바로 그 사람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래서 아까 말한 적이 있는 곳으로 여러분 가세요. 그런데 사실은 적이 있는 곳에 가는 게 아니고 여러분이 있는 곳에 적이 모입니다. 꼬여요. 적이 있어줘야 비로소 우리가 주님에 의해서 이미 구원받은 강도라는 사실을 깨달아요.
재밌잖아요. 구원받은 훌륭한 자가 아니라 구원받은 도둑놈이에요. 확실한 도둑놈인데 어떤 도둑놈? 구원받은 도둑놈이에요. 그러니까 구원받은 것이 내 일이 아니고 주님의 일이기 때문에 구원받았다는 그 일은 주께서 하신 일인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 도둑놈된 것도 주의 일에 편입이 되어야, 연결되어야 이게 맞다 이 말입니다.
남을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어야 되는 이 사태를, 이미 죽은 자의 입장에서 느긋하게 이 세상을 살아가주시기 바랍니다. 그게 바로 자유입니다. 어떤 것도 구애받지 않고. “너는 뭐 복음 안다면서 어떻게 그렇게 돈을 챙기느냐?” “내 돈인가? 주님 돈인데.” “치, 핑계는 좋다.” “그 돈 가지고 해외여행가지.” “내가 가나? 주께서 보내주시면 얼른 가야지.” 이런 거. “아이고, 뭐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 다 되네?” “다 되지. 너는 그런 자유 없지?”
방금 이야기한 것이 너무나 터무니없는 자기 정당화처럼 보이지만 실은 이거에요. [내가 어떻게 되어도 상관없다.] 입니다. 여기 ‘내가’가 들어가는 자리는 ‘어떻게 되어도 상관없다’에 비로소 내가 붙어있어야 돼요. ‘꼭 이렇게 해주셔야 됩니다. 저 천국 보내주셔야 돼요.’ 여기에 나를 붙이면 안돼요. 그건 우리 소관이 아닙니다.
이미 구원받았기 때문에 이 땅에서 어떻게 되도 나는 주님의 일에 내가 소환되어서 붙어있는 겁니다. 그래서 십자가 일은 나의 일이 아니고 주의 일이며 십자가 믿는 것도 나의 일이 아니고 주님 일의 연속이고 연장이었던 거예요.
그럼 끝으로, “목사님 언제까지 이런 상태를 유지할 수가 있습니까? 아까 2분 30초라 했죠? 좀 욕심내서 5분까지 끌 수는 없습니까?” 이게 끌어버리면 역사가 돼요. 역사가 되면 나의 역사가 돼요. 주님께서는 인간 역사에 맞아 돌아가셨잖아요. 그러면 주님의 말씀이 오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역사 자체가 무의미하다는 것을 알려주는 거예요. 나만의 귀한 역사, 아닙니다.
우리는 그냥 어제도 죄인이었고 오늘도 죄인이고 내일도 죄인일 거예요. 그럼 죄인의 역사냐? 죄인은 죽어 마땅하기 때문에 역사 자체가 성립이 안 됩니다. 그저 죄인인데 주님을 드러내기 위한 죄인. 주님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왔다는 주님의 말씀 자체의 작용, 그 작용 때문에 우리는 아직도 숨 쉬고 살아가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이제 결론을 맺겠습니다. 죄, 악한 자, 흉악한 자, 그리고 마지막 15절에 세상 것, 이 모든 것은 여기에 존재하고 있는 것이 아니고 주님에 의해서 발생하고 있는 겁니다. 발생된 거예요. 발생된 것. 그래서 오늘 낮에 했던 안양강의에서 제가 그걸 이 세상의 기포라 했어요. 뽀글뽀글 물방울. 기포.
깊은 수조 안에 있는 기포처럼 그 안에 주님의 은혜가 들어있는 기포로서 뽀글뽀글. 탁 터지는 게 죽는 순간이죠. 기포처럼 있는 장소에서 주의 은혜라 하면 되죠. 우리 교인 몇 명이고 숫자 따질 필요 없어요. 큰 기포는 잘 터져요.
집구석에 있더라도 작은 기포 속에서 죄가 발생되고 죄가 발생되면서 낯선 언어와 인간 언어 사이에 예수님의 피의 효과를 매 순간마다 우리가 그것을 접하고 또 느낄 수가 있는 겁니다. 두 개를 다 알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너는 강도다. 어느 강도냐? 강도 두 명이 다 우리 안에 포함될 때 누가복음 23장 말씀이 우리 안에 함께 있어서 말씀이 말씀 자체적으로 작동해서 우리로 하여금 말씀이 다 이루었다, 십자가로 다 이루었다는 것을 우리 몸을 통해서 증거 하게 되어 있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선택할 문제가 아니고 이미 선택당한 문제인 것을 왜 자꾸 우리가 잊어버리는지. 그 선택 당함이 매일 매일 삶으로서 주님이 함께 살아있음을 드러내는 그런 용도로서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