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강의20240215a 요한일서 2장 18절(적그리스도들)-이 근호 목사
요한일서 2장 18절, “아이들아 이것이 마지막 때라 적그리스도가 이르겠다 함을 너희가 들은 것과 같이 지금도 많은 적그리스도가 일어났으니” 이렇게 되어 있죠. 적그리스도가 하나입니까, 여럿입니까? 여럿이죠. 하나가 아니고 여럿이에요. 왜 적그리스도가 하나가 되지 않고 여럿이냐 하는 것, 이거부터 한번 생각해봅시다.
적그리스도가 뭐냐 하면… 우리 관점에서 우리는 적그리스도를 별로 안 좋아하죠. 적그리스도라 하면 안 좋아하잖아요. 뭐 벌건 거 안 좋아한단 말이죠. 공산당 싫어요, 나는. 적그리스도를 좋아하지 않아요. 그러니까 적그리스도에 미혹 받을 수밖에 없는 겁니다. 왜냐하면 ‘적그리스도는 그리스도의 활동에 의해서 필히 등장한다.’ 반드시 등장되는 것이 적그리스도에요.
적그리스도가 없는 곳에는 그리스도도 없어요. 그리스도가 있으면 그 맞은편에 적그리스도가 반드시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 이유를 말씀드릴게요. 예수님이 하신 게 십자가이고 이 십자가가 마지막 언약이에요. 하나님이 언약, 언약으로 주시면서 했던 마지막 언약이 십자가 언약입니다. 내 살과 내 피로서 모든 것을 완료, 끝내버렸어요. 그 십자가 사건이 일어나려면 예수님이 그냥 자살하면 안돼요. 혼자 번개탄 피워놓고 죽으면 십자가 사건이 아니에요. 십자가 사건은 적그리스도를 같이 그 현장에 불러일으켜야 십자가 사건이 살아요.
십자가 사건이 늘 나타나기 위해서는 이렇게 보이지 않는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사건을 들이대시고, 그런 반면에 그럼 적그리스도는 뭐냐? 십자가 사건에 대해서 원칙과 반대되는 식인데 특징이 눈에 보인다는 거예요. 눈에 보인다. 적그리스도와 같이 눈에 보이는 게 또 누가 있을까요? 이 질문은 너무 막연한 질문인데 해놓고 보니 좀 미안하네요. 제가 후딱 정답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적그리스도가 눈에 보이잖아요. 또 눈에 보이는 게 누구냐 하면 이거에요. ‘나’. 나입니다, 나. 나가 보여요.
그러면 보이는 것은 보이는 것들을 찾게 되어 있고 끌리게 되어 있어요. 선악과 나무가 아담 눈에 보였습니까, 안 보였습니까? 보였죠.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하고 탐스럽기도 하죠. 선악과 나무가 추상적으로 그냥 있다면 아무것도 안 보인다면, 안 보이는 것은 유혹거리가 될 수 있다, 없다? 될 수 없는 거예요.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고 하신 분은 눈에 보였습니까, 안 보였습니까? 안 보였죠. 그러나 뱀은 눈에 보입니까, 안 보입니까? 뱀은 눈에 보였죠. 눈에 보이는 것은 눈에 보이는 것과 친밀하고 친근해요. 왜냐하면 대화가 되니까요. 그러나 눈에 보이지 않는 분의 이야기는 눈에 보이지 않는 분이 이야기를 해줄 때 관련이 있지, 내 쪽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쪽으로 건너갈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거예요.
그래서 이 말씀이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하셔도 인간은 말씀 자체가 눈에 안 보이잖아요. 말씀보다도 눈에 보이는 것에 우선 끌리는 식으로 인생을 살아갑니다. 그래서 하나님 쪽에서도 눈에 보이는 것을 제시하죠. 하나님 쪽에서 제시하는 눈에 보이는 것은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는 방식으로 제시하는 겁니다. 그게 뭐냐 하면 바로 여자의 후손.
뱀의 후손은 눈에 보이죠. 뱀 자체가 보이니까. 그런데 여자의 후손은 안 보여요. 없어요. 모든 후손은 남자의 후손이니까요. 어떤 자식이 있다면 그 자식의 엄마만 있다,가 되지 않죠. 엄마도 있지만 아빠도 있죠. 둘이잖아요. 그러면 엄마, 아빠 중에서 이 자식은 누구 이름의 자식이냐? 그거는 남자의 자식이 되는 거예요. 남자의 자식.
특이한 것은 디나 같은 경우에는 레아의 딸로 되어 있어요. 야곱의 딸이 아니고 레아의 딸(창 46:15). 또 있죠. 솔로몬은 다윗의 아들이 아니고 우리아의 아내에게서 나온 아들(마 1:6). 의도적으로 남자 없이 태어난 존재로부터 예수님이 태어난다는 것. 남자 없는 여성으로부터 예수님이 태어난다는 것을 구약에서 넌지시 힌트를 주면서 구약이 이어져 왔던 거예요.
무슨 말이냐 하면, ‘여자 없이 어떻게 자식을 낳느냐?’ 그런 질문을 하지 않아요. ‘남자 없는데 어떻게 자식을 낳느냐?’ 인간세계에서 그게 질문거리가 된다는 말은 남자가 있어야 자식이 되는 거예요. 아내가 바람피워서 남편을 속이고 마치 남편 자식인 것처럼 둘째를 낳았다 이 말이죠. 그러니 아내가 자꾸 남편보고 다른 동네로 이사 가자 하는 거예요. 남편이 ‘이상하다. 아내가 왜 자꾸 저쪽 동네로 이사 가자고 하지? 별 연고도 없는데.’ 이사를 가자고 강권해서 이사를 갔어요. 가고 나중에 알고 보니까 둘째 자식의 아빠가 그 동네에 살았던 거예요. 그래서 남편 몰래 만나면서 둘째 공부 어떻게 하고 있는지… 실제로 그런 이야기 있어요. 이혼 상담 변호사가 자기한테 그런 의뢰가 있었다고. 그러니까 어떤 집에서는 ‘네 아버지 누구야?’ 이러잖아요. 조사해보자. 유전자 조사해보자. 너희 아버지 누구야? 아버지 누구야?
이처럼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이라 할 때, 이미 보이는 것들은 전부다 뱀의 후손 쪽입니다. 보이는 선악과를 따먹어서 보이는 생명나무로부터 추방된 입장이기 때문에 인간은 그때부터 보이는 것이 전부가 되는 그런 한계를 지니고 추방된 상태에서 살게 되는 겁니다.
에덴동산에는 보이는 두 개 나무도 있지만,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이 부부에게 주신 말씀이 있어요. 그러나 이제 인간들이 근본 된 토지를 갈기 위해서 추방되고 난 뒤에는 이젠 주의 말씀을 듣는 삶이 아니라 보이는 대로 닥치는 대로 그냥 무엇을 하든지 간에 이 땅에서 살아남아야 된다는 것이 그들의 삶의 목표, 이유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보이는 것의 한계를 못 벗어나죠.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을 보이는 식의 메시아로 보내죠. 그러면 그 전에 유대인들은 ‘메시아가 오신다. 오신다. 오신다.’ 하는데 오신다는 것은 지금 왔다는 말이에요, 오신다는 거예요? 곧 오신다는 거예요. 오시는데 지금은 안 보이잖아요. 안 보이는 것을 그들은 희망으로 삼고 있는 거예요. ‘보이는 것+안 보이는 메시아’, 그들은 자기들의 신앙을 그렇게 구성해왔던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도발적인 말씀을 하신 거예요. 내가 메시아라고 해버렸어요.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그래. 유대인의 왕이다.” “네가 메시아냐?” “내가 메시아다. 인자가 구름타고 올 것이다.” 있는 그대로 메시아라서 메시아라고 했고 자신이 유대인의 왕이기 때문에 왕이라 했는데 이게 어디서 거짓말을 하냐고 죽여 버리죠.
자, 그렇게 되면 예수님을 죽인 그 인간들은 어떤 한계에서 못 벗어나느냐 하면 자기의 죄를 지적하는 예수님을 죽임으로써 그 인간들은 다시는 자기의 죄의 극한을 발견하는 기회를 놓치고 만 거예요. ‘내가 어리석고 나는 눈에 보이는 게 다다. 그래서 나는 망할 수밖에 없어.’라고 단정 지을 수 있는 근거 자체를 그들은 안 갖고 있었던 겁니다.
그걸 유일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분이 보이는 식으로 왔는데 못 믿도록 하는 방식이기 때문에, 보기 때문에 보지 못하는 방식을 예수님만 쓰신 거예요. ‘본다고 하니까 소경이다.’ 이걸 예수님만 하신 거예요. 이 말은 뭡니까? 모든 인간은 예수님 빼놓고 뭐다? 다 소경이다.
소경이니까 소경이 만들어낸 메시아는 어떤 메시아? 적그리스도가 되는 거예요. 사태파악도 안 된 상태에서 눈에 보이는 식이 편리하니까 보고 믿겠다는 거예요. 보고 믿겠다 하니까 적그리스도가 ‘보고 믿겠어? 보여줄게.’ 보여줄게.
데살로니가후서에서 보여줍니다. 뭘 보여주는지를 한번 볼게요. 우선 성전에 앉아서, 성전 눈에 보이죠, 성전에 앉아서 자기를 보여주죠. “성전에 앉아 자기를 보여 하나님이라 하”고(2:4) 그다음 9절에, “악한 자의 임함은 사단의 역사를 따라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과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멸망하는 자들에게 임하리니 이는 저희가 진리의 사랑” 진리죠, 진리를 받지 못한 사람들은 본인이 구원받지 못한다는 그런 식으로 하나님께서 사건화시키는 겁니다.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여 구원함을 얻지 못함이니라”)
너희들 이 사람을 메시아라고 간주했잖아. 가서 같이 붙고 놀아라. 그러니까 너희들은 구원이 없는 거야. 가짜 메시아를 원하기 때문에. 그렇지 않아도 그들에게 구원이 없는데, 구원이 없다는 것을 확정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확정한 게 있으니 그게 뭐냐? 적그리스도란 말이죠. 그러니까 그리스도도 필요하지만 뭐도 필요해요? 적그리스도가 꼭 필요하죠. 그들로 하여금 핑계치 못하게 하잖아요.
자, 적그리스도는 보이는 것이다. 그러면 성경을 연구하는 사람들은 적그리스도를 알아서 ‘적그리스도다~’하고 피해버리면 자기는 구원된다는 그런 생각이 떠오르겠죠. 그러면 그들이 연구하는 것은 뭐냐? ‘눈에 보이는 적그리스도는 누구냐’에 초점을 맞추고 성경을 이제 파고들어가는 거예요. 갑자기 성경 보는 희열과 보람을 느끼는 겁니다. 보람찬~ 하루 오늘도 또 열심히 성경 봐서 적그리스도에 대해서 나는 기어이 알아챌 거야, 이런 식으로.
그러니까 이런 자세 자체가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보고 저게 나라고 아는 것처럼 적그리스도가 눈에 보여야 저거는 적그리스도다 아니다,를 구분할 수 있다는 거예요.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의 가장 큰 단점은 뭐냐? 바로 그 생각이 적그리스도가 심어준 생각이라는 사실을 상상도 못하죠. 꿈도 못 꾸는 거예요.
적그리스도 만나서 적그리스도 피하면 나는 구원받는다는 그 생각 자체를 이미 적그리스도가 집어넣은 거예요. 열심히 해봐. 열심히 노력하라고. 헬라어, 히브리어 해서 한번 파고들어봐. 성경연구하면 하나님께서 적그리스도가 누구며 진짜 그리스도는 누구인지 구분할 수 있는 지혜를 주실 거야, 뭐 이런 거요. 그 지혜 받으면 뭐합니까. 본인이 적그리스도인데.
본인 자체의 속성, 그것들이 모여서 옹립된 게 적그리스도에요. 적그리스도는 민중들이 옹립하지 않으면 적그리스도 될 수 없습니다. 사람들에게 인기가 있어야 돼요. 사탄이 벌써 그런 짓을 했는데 마태복음 4장 광야에서의 두 번째 시험에서 예수님을 적그리스도화 시키려고 했습니다. 말씀대로 네가 성전에 올라가서 점프, 뛰어봐. 뛰어봐. 왜? 뛰면 말씀대로 밑에서 천사가 와서 발이 안 다치게 받쳐줄 거니까 뛰어보라는 거예요.
만약에 예수님께서 뛰어내렸는데 안 다쳤다면 예수님이 뭐가 되겠어요? 적그리스도가 되는 거예요. 왜? 예수님! 예수님! 하고 전부다 사람들 본인이 원하는 것을 실현(實現), 실제로 눈에서 재현시켜준 것에 대해서 굉장히 고맙게 여기는 겁니다. 내가 원한 메시아를 맞춤 메시아로 예수님이 그걸 딱 주니까 더는 내가 내 구원에 대해서 염려할 필요가 없는 거예요.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찾는 것이 자기 구원 때문입니까, 그리스도를 생각해서 그리스도를 믿어요? 자기 구원 때문에 믿잖아요. 자기 구원 때문에 믿는 사람에게는 반드시 적그리스도가 달라붙게 되어 있어요. 반드시.
자식을 늘 걱정하고 내 몸보다 자식 걱정하는 사람에게 자식 신상에 무슨 일이 벌어지면 안 되고 아프면 안 되고 자식이 잘 살아야 되고 하는 그런 어미한테 꼭 날라드는 게 있어요. 보이스 피싱. 보이스 피싱이에요. 보이스 피싱들이 연구할 때 모자의 정, 부모의 정을 충분하게 이용하지 않습니까. 충분히 이용한다고요.
“귀하 자식 이름이 경철이 맞죠? 경철이가 지금 서울 검찰에 잡혀왔는데 목소리 한번 들어볼래요?” AI로 경철이 목소리, ‘엄마, 합의금 오천만원 필요해!’ “들으셨죠? 그냥 검찰 오시면 안 되고 지정한 어느 은행 앞에 전봇대 있을 테니까 하시면… 이건 엄마의 정을 생각해서 미리 연락한 거고 몰래 오천만원 하시면 됩니다.” 이렇게 하면 목소리도 들었겠다, 오천만원 빚내서 갖다 주죠.
그러면 문제 나갑니다. 1번-보이스 피싱이 나쁘다, 2번-내가 나쁘다, 몇 번입니까? 자기가 우상이죠. 남의 자식한테 오천만원 안 주잖아요. 내 자식이기 때문에 주잖아요. 나라는 게 나한테 우상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적그리스도는 평소에 내가 나 사랑하는데 보탬이 된다는 식으로 적그리스도가 나의 자기사랑을 충분하게 이용하는 겁니다. ‘기적 보고 싶지? 놀라운 능력 보고 싶지 않아?’ 이런 식으로. ‘메시아가 성전 온다는데 성전 오는 거 한번 보여줘?’ 이런 식으로.
그러니까 마귀가 그런 식으로 평소에 인간들을 정신적으로 통제했던 방식을 광야의 시험을 통해서 예수님께도 써먹은 거예요. “뛰어내려라. 너 지금 하나님의 메시아 노릇하러 왔잖아. 이만한 기회 없어. 뛰어내려서 안 다치면 ‘와, 진짜 우리가 원하는 메시아입니다.’ 대환영할 테니까 뛰어내려라.” 이렇게 합니다.
그때 예수님이 뭐라고 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인간들 손에 시험거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냐? 아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의 시험거리가 아니에요. 인간과 거래하지 않는다는 뜻이에요. ‘자, 믿을 거리 줬으니까 믿어라.’ 이런 하나님이 아니고 하나님이 제시하는 것은, 이미 너는 가짜 메시아를 따르고자 이미 네 안에 너의 신앙이 따로 장착되어 있다는 것을 지적하는 식으로 오시죠.
사랑? 네 사랑뿐이잖아. 소망? 너 잘되는 것뿐이지. 믿음? 너는 너를 믿고 있잖아. 모든 인간이 다 그래요. 조상이 아담이기 때문에 그래요. 따라서 성령이 오게 되면 다른 게 아니고 뭐 주님을 사랑합니다,가 아니라 내 믿음, 소망, 사랑 이것이 몽땅 다 십자가 앞에서 원래부터 죄였다는 사실을 아는 게 복이고 성령의 열매고 은사입니다.
나는 나만 챙겼다는 것. 교회를 몇 년 다녀도 소용없다는 것. 성령이 오게 되면 비로소 그걸 알아요. 성령은 나 위주가 아니고 내 구원 위주가 아니라 이미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서 이렇게 구원받았다, 주님의 구원을 우리 앞에 들이대는 겁니다. 십자가를 들이댑니다. 다 이루었다고.
그럼 회개라는 게 뭐냐? 회개라는 것은 구원받는 데에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겁니다. 회개란, 나의 세계, 인간세계의 한계와 그리고 천국은 인간세계 바깥에 다른 세계라는 것, 다른 원칙이 통한다는 것, 그 양쪽을 다 알게 된 것을 회개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회개란 것은 마음을 돌린단 뜻이에요. 원뜻은. 이쪽 세계에서 이쪽 세계 쳐다보다가 이제는 내 마음을 돌려서 이쪽 세계에 없는 다른 세계로 돌릴 마음이 있는 세계가 따로 있다는 것을 발견하는 게 바로 회개입니다.
자, 그럼 여기 그리스도와 적그리스도 두 가지가 있는데 창세기 3장 15절의 약속에 의하면 누가 누구의 머리를 깹니까? 그리스도께서 적그리스도, 사탄의 머리를 깨잖아요. 머리를 깨버린다고요. 그러니까 예수님과 적그리스도는 항상 같이 등장해서 한쪽은 물고 한쪽은 깨고 난리도 아니죠.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것을 아무도 몰랐는데 유일하게 아는 자들이 누구입니까? 귀신이죠. 귀신 들린 자는 모르는데 귀신은 알아요. 그래서 성경 같은 데 보면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죠? 우리를 멸하러 온 거 맞죠?” 예수님께서 “조용히 안 하나? 조용히 해!”
그 대목을 보면서 여러분 어떻게 생각합니까? ‘이미 귀신들이 예수님인 것을,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하나님인 것을 안다면 안다는 자체가 믿는다는 뜻이고 믿는다는 것은 귀신들도 천국 가겠네. 왜? 믿으니까. 예수님이 어떤 분인가를 아니까 천국 가겠네.’ 이런 생각이 들지 않던가요? 뭐 성경을 봐야 그런 생각이 들든지 말든지 하겠지만…. 사람은 모르는데 귀신은 귀신같이 알아내잖아요. 그럼 귀신은 구원받습니까? 오히려 책망을 듣죠.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귀신을 구원함이 아니고 사람을 구원함도 아니고 귀신에게 매였다가 빠져나간 그런 절차를 가진 자를 구원하는 거예요. 나머지 지옥 가는 사람들은 빠져나온 절차가 없어요. 빠져나온 절차. 일단은 태어날 때부터 내 인생은 내가 알아서 챙긴다는 생각이잖아요. 그럼 그 인간 속에 뭐가 없어요? 귀신 없죠. 귀신 자체가 없어요. 그리고 어떤 일이 일어나도 누가 수습합니까? 내 인생이니까 누가 수습해요? 내가 수습하는 거예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엉뚱한 소리하니까 예수님을 거부하거나 밀어내거나 죽이거나 뭐 그렇게 나가는 겁니다.
그런데 구원받은 사람은 똑같아요. 태어날 때부터 누구만 챙긴다고요? 자기만 챙겨요. 그런데 예수님이 내 안에 있는 귀신을 쫓아내면서 성령을 줘버리니까 그다음부터는 뭡니까? 나는 그동안 소경이었다는 사실, 나는 그동안 죄만 지었다는 사실, 나는 그동안 나만 챙겼다는 사실을 고치는 게 아니고 그 사실을 인정해버리는 거예요. 그래서 주님께서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게 아니고 나는 죄인을 부르러 왔다.”가 성립되는 겁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가 그렇게 이야기할 때, 그리스도는 천국 갈 자기 백성을 데려갈 때 그럼 나머지 사람은 누구 관할 하에 있는가? 그리스도가 등장했다는 말은 뭐도 등장한다? 잠재적 적그리스도, 악마, 사탄이죠, 잠재적 적그리스도가 이미 이 세상에서 활동하고 있었습니다. 눈에 보이는 식으로.
눈에 보인다, 눈에 보인다, 눈에 보인다 중에서 최고의 영웅이고 최고 사람들에게 우러름을 받고 사람들에게 인기 있고 자진해서 권력을 그 사람에게 양도할 수 있는 최고의 사람, 그걸 이 지상에서 ‘왕’이라 합니다. 왕(王). 이 세상에 왕이 몇 명쯤 된다고 생각합니까? 우리나라에 왕이 몇 명쯤 있다고 생각합니까? 제가 보기엔 한 23,000~25,000명 정도 된다고 봐요. 23,000~25,000 이게 우리나라에 있는, 지금은 32,000까지 갔지만, 이게 직업 숫자에요.
그러니까 왕이란 말은 어디에 붙습니까? 그 분야의 최고에 왕을 붙이잖아요. 예를 들면, 판매 왕, 보험 왕, 목회 왕, 설교의 왕, 낚시의 왕, 개 대통령 이런 거. 바둑의 왕. 바둑에 왕위전(王位戰) 있어요. 바둑 둘 때 최고 타이틀인 왕위전, 왕의 자리를 준다. 그 분야에 있어서 내가 종사하는 분야에서 내가 감히 따를 수 없는 최고 경지에 이른 자에게 자진해서 아낌없이 왕이라는 칭호를 붙여주죠. 우리 재원씨 왕은 뭐에요? 임영웅? 방탄 소년단?
이런 왕 중의 왕, king of king, 종합한 게 뭐냐 하면 바로 대통령입니다. 대통령. ‘자발적으로 당신은 우리나라의 최고가 되어 달라. 왕 근처에 어쭙잖은 인간들이 까불지 말도록 밟아버려. 왕이 왕답게 하라.’ 그럼 그 자체가 하나의 적그리스도가 되겠죠. 그럼 적그리스도 된다는 자체가 종교 시스템이 되죠. 종교 시스템.
국가를 가지고 종교 시스템으로 극단화하는 데에 치중한 나라가 바로 서울보다 약간 위에 있는 나라, 북한입니다. 위대한 김정은 지도자 동지. 죽은 김일성 이름을 팔아먹고 귀신 정치가 되는 곳. 북한의 인민들은 자발적으로 자신의 몸과 영과 혼을 자발적으로 김일성 백두혈통에다 다 갖다 바쳐버리죠. 자발적으로.
사람들은 그걸 이해 못합니다. 그럼 그건 이해 못하고 신천지는 이해합니까? 신천지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자칭 보혜사. 당신만 믿습니다. 십사만 사천. 신천지가 이만희를 믿어요, 안 믿어요? 안 믿죠. 신천지 교인들은 누굴 믿습니까? 지금까지 계속 강의했는데… 누굴 믿어요? 자기 자신을 믿는 거예요. 나 믿는 것에 격려해달라는 식으로 ‘당신은 왕이십니다.’라고 하는 거예요. 어떤 교회든 자기 자신 믿는 걸 더욱더 공고히 하기 위해서 목사나 교주가 필요한 거예요. 나를 신으로 만들어달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적그리스도는 하나가 아니고 각 시대별로 계속 적그리스도의 류(類)들이 등장하고 등장하고 또 등장하고 또 등장하는 거예요. 적그리스도들이. 그럴 때마다 그만큼 그리스도가 어느 시대든 활동하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짝이 되는 적그리스도가 그리스도의 원칙과 인간들의 원칙이 어떻게 차이 나는가 알려주기 위해서 인간들이 추종하는 적그리스도 생산을 주님께서 계속해서 허용시켜주는 거예요.
그래서 이렇게 물어야 돼요. ‘나의 메시아는 누구십니까?’ 이렇게 물어도 되지만 거기에 하나 더, ‘내가 신봉하는 적그리스도는 무엇입니까?’ 물어야 돼요. 내가 신봉하는.
그럼 방금 ‘나’가 몇 개에요? 나1, 나2죠. 그리스도는 성경대로 찾아오죠. 이 나가 진짜 성령 받은 나라면 그리스도께서 나를 뭐라고 하느냐 하면 골로새서 3장 3절 말씀, 나는 죽었고. 나를 죽은 자로 간주하는 분이 진짜 그리스도고, 가짜 그리스도, 적그리스도는 ‘네가 살아야 천국 간 네가 유지되지.’라고 가르치죠. 이게 바로 적그리스도가 되는 겁니다.
자, 그다음 문제, 둘 중에 어느 것이 땡깁니까? ‘너 죽었어. 죽은 자가 뭘 해도 그건 죽은 거야.’라고 하는 그 그리스도가 땡깁니까, 아니면 ‘노력해서 힘들게 기도하고 헌금하고 전도하고 선교하고 하면 네 노력이 너무나 가상해서 천국에 넣어줄게.’ 하는 쪽 중에 어느 것이 마음에 끌리느냐 이 말입니다. 답변이 있어야 뭐 질문을 하는데… 각자 숙제로 넘기겠습니다.
아까 제가 언급했죠. 성경공부를 하면서 구약, 신약을 넘나들면서 뭐 연구한다고 했습니까? 적그리스도가 누군지를 성경을 통해서 알려고 하고 예수님 재림날짜 알려고 하고 언제쯤 타이밍에 기름 준비하면 됩니까, 그런 거 하고 싶어 하고, ‘마지막 때 징조가 뭡니까?’ 제자들이 예수님께 물었던 것처럼 그런 질문들을 하는 이유가 뭐를 포기 못한 거예요? 내가 죽었다는 사실을 아직도 자기는 못 받아들이겠다는 거예요.
죽은 자는 죽어있으면 돼요. 얼마나 편해요. 죽으면서 눈뜨지 마시고 죽었으면 모든 하는 행동들이 죽을 수밖에 없는 행동들이라면 죄로 인하여 죽을 수밖에 없는 행동을 그냥 하면 돼요. 그게 우리의 본성에 맞습니다. 본성에 맞지도 않는 걸 가지고 연출한다고 믿는 척하니깐 사는 게 힘들죠.
그런데 인간은요. 마귀의 지배를 받기 때문에 뱀의 지배를 받아가지고 역할을 하라고 하면 잘하는데 네 역할 하라하면 못해요. 본인을 잊어버렸어요. 하도 허위와 허세로 가면을 너무 많이 착복하고 살기 때문에 벗겨도 가면 나오고 가면 벗겨도 또 가면 나오고 양파껍질처럼 도대체 어디까지 가면이 있는지 본인도 지금 정리가 안 되어 있어요. 죽을 때까지 가면 덩어리가 인간이에요. 자아 이미지입니다. 가면 덩어리.
자, 그렇다면 성경에서 적그리스도의 시기에 대해서 언급을 했습니다. 언급을 한 대목이 다니엘에도 나오는데요. 다니엘 7장 25절. 다니엘 7장 25절 하기 전에 다니엘 7장 7절부터 먼저 봅시다. 네 번째 짐승에 대해서 “무섭고 놀라우며 또 극히 강하며 또 큰 철 이가 있어서 먹고 부숴뜨리고 그 나머지를 발로 밟았으며 이 짐승은 전의 모든 짐승과 다르고 또 열 뿔이 있으므로” 되어 있죠.
7장 7절에서 전의 모든 짐승과 다르다고 되어 있죠. 이 말은 뭐냐 하면 이 네 번째 짐승을 꺾을 짐승이 있다는 말이에요, 없다는 말이에요? 없다는 말이에요. 네 번째 짐승. 네 번째 짐승 다음에 영원한 하나님 나라가 나타납니다. 인자의 나라가 나타납니다.
그러니까 네 번째 짐승은 마지막 바통을 이어받았죠. 첫째 짐승, 둘째 짐승, 셋째 짐승, 넷째 짐승까지 바통을 이어받습니다. 마지막 바통을 이어받은 짐승이 네 번째 짐승이거든요. 이거는 뭐 죽기 살기로 역사의 골인지점, 결승지점까지 달려가는 겁니다. 무엇과 짝을 이루면서? 인자의 나라, 예수님의 나라와 함께 짝을 이루면서 골인하는 지점이죠.
그 때가 언제냐? 7장 25절, “그가 장차 말로 지극히 높으신 자를 대적하며 또 지극히 높으신 자의 성도를 괴롭게 할 것이며 그가 또 때와 법을 변개코자 할 것이며 성도는 그의 손에 붙인바 되어 한 때와 두 때와” 그다음 뭡니까? 한 때, 두 때, 반 때. ‘때’란 사건이 일어나는 지점을 시간적 표시하는 게 때에요. 그래서 여러분, 사건이 일어나면 사건이 일어난 것이지, 사건 반만 일어나는 사건 봤습니까? 없어요. 짧게 일어나도 사건이고 길게 일어나도 사건이에요. 모든 사건은 그냥 하나하나가 그 일어난 때, 사건이 주어진 때, 때, 때에요. 아무리 그 기간이 길다 할지라도 한꺼번에 때가 되는 거예요. 반 때라는 것은, 인간의 시간 의식에는 반 때가 성립되지 않습니다.
옛날에 돌턴(John Dalton, 1766~1844. 잉글랜드의 화학자, 물리학자, 기상학자)이라는 사람이 있는데 18세기 과학자죠. 돌턴이 원자론을 주장했는데 물리학에 나오는 거예요. 원자론이 뭐냐 하면 ‘최후로 남아있는 궁극적인 단일체’ 이것을 원자라 했어요. 원자. 마지막 알갱이. 돌턴이라는 물리학자가 정의를 그렇게 내렸습니다. 마지막 남은 알갱이가 원자에요.
그러면 이 사람에게 ½원자라는 개념이 있을까요, 없을까요? 없죠. 없어요. NO(Nitric Oxide), 산화질소입니다. 산화질소는 인체 내에서 혈관을 확장시키고 청소하고 혈관을 생성시키는 데에 꼭 필요한 요소에요. 아르기닌 단백질로 해서 몸에 넣을 수 있다고 그렇게 지금 알려졌는데 여기 N이 하나 더 붙으면 아산화질소, 웃음가스라 해서 이것은 N₂O가 돼요. 이건 상당히 위험한 거고, 산화질소 자체도 위험한 건데 산화질소에서 질소 원자 1개에 ½산소 원자가 들어가요. 그런데 그 시대에는 ½원자, 산소 반 개라는 게 성립이 안 되죠. 그런 건 있을 수가 없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개념 규정을 그렇게 했기 때문에요.
인간들의 때라 하는 것은 사건이 일어날 때, 그것이 때입니다. 길든 짧든 간에. 한 때, 두 때, 세 때 그럼 뭡니까? 한 때, 두 때, 세 때라는 것은 사건1, 사건2, 사건3 이렇게 되는 겁니다. 남자가 보통 울 ‘때’, 남자가 남자로서 울 때가 있죠. 첫 번째는 뭐냐? 태어날 때 울고. 두 번째는? 남자가 아니라서 모릅니까? 남자한테 울 때가 뭡니까? 태어날 때 울고, 부모 돌아가실 때 울고, 세 번째는 남자기 때문에 나라를 잃어버릴 때 울잖아요. 이게 사나이 중에 사나이라는 거예요. 그런데 아시안 게임에 준결승에서 떨어지면 이거 울어야 돼요, 안 울어야 돼요? 손흥민하고 이강인 싸워가지고 떨어지면 울어야 됩니까, 말아야 됩니까? 이 사건이.
한 때, 두 때, 반 때는… 인간의 역사라 하는 것은 사건과 사건의 조합으로 맺어진다는 그런 전제를 깔고 있습니다. 인간은. 그래서 인간은 사건을 파악하는 거예요. 사건을 파악하면서 사건과 사건 사이에 다리를 놓아버리면 그것이 인간의 역사가 되어버리는 거예요. 역사가.
1592년 임진왜란 사건, 1919년 3.1 독립운동 이런 거 있잖아요. 역사라는 것이 때와 때를 구분하고 그 사이를 연결시켜놓는 이유가 그다음 때는 그 전에 있었던 여러 가지 일들이 숙성되어서 융기되고 그게 만개가 되면 필연적으로 그다음 사건이 일어날 수밖에 없게 하는 거예요.
원인과 결과를 인간 역사 속에서 과학적으로 분석하게 되면 이 사건이 일어난 이유가 뭐냐. 종이회사 영풍제지 주식이 왜 그렇게 폭락했느냐? 800억짜리 작전이 들어갔다 뭐 이렇게 되잖아요. 그렇죠? 그러니까 보세요. 모든 일에는 어떤 사건이 일어나면 사건은 우연히 터진다고 생각하지 않고 반드시 그 이유가 있다고 생각해요. 그 이유까지 합해서 그 때를 기록하면 역사가 되는 겁니다.
내가 왜 이 나이 때까지 이렇게 힘들게 사느냐? 그거 추적해보니까 남편 잘못 만나서 그래요. 모든 게. 이게 흐르는 시간 속에 갇혀있는 인간입니다. 이 의도가 뭐냐 하면 앞으로 미래에 일어날 내가 원하는 사건은 지금 내가 어떤 결정을 내리고 어떤 선택을 하고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미래는 고정되고 확정되게 되어 있다는 그런 믿음, 그런 교리, 그런 신앙을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갖고 있다 이 말이죠. 내가 보이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서 보이지 않는 세계로, 보이는 내가 어떻게 하는지 여하에 따라서 보이지 않는 천국도 정복할 수 있다는 생각. 이게 뭐냐? 종교라는 거죠, 종교.
그런데 다니엘 7장 25절에 그 네 번째 나라의 짐승에 대한 심판이 될 때에 그 때가 뭐냐? 한 때, 두 때, 반 때가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걸 합치면 세 때 반입니까, 이게? 1+2+½=3½때 뭐 이렇게 되는 거예요? 아니에요.
때라 하는 것은 시간 이전에 사건이 먼저 있다 했죠. 사건 터지고 사건 터지고 그다음부터는 분명히 사건은 터지는데 그 사건 터지는 것이 하늘과 땅에 걸쳐있는 사건이죠. 땅에서 일어난 사건 같은데 하늘에 속한 사건. 그 반 때에 일어난 사건이 바로 무슨 사건입니까? 십자가 사건이에요.
본디오 빌라도가 공격했는데 예수님 하신 말씀이 네가 나를 공격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허락지 않으면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했어요. 그러면 그 십자가 사건의 주도권이 땅에 있는 인간들의 권력에 주도권이 있는 것이 아니고 그거는 하나의 시다바리고, 하나님에 의해서 그들이 놀아나는 농락당하는 사건이 십자가 사건이에요.
이 십자가 사건을 확대시켜봅시다. 그러면 어떤 인간이 태어나서 산다, 그것은 자기 인생을 합쳐서 하나의 때가 되겠죠. 내가 태어나서 언제 죽었다, 그걸 전부다 동그라미 치면 이건 하나의 사건묶음이 될 수 있거든요. 시작과 끝을 임의로 정하면 사건묶음이에요. 사건묶음이 되면 그건 뭐냐? 그때 참 내가 잘나갈 때였지. 그 때. 내가 인생 살았던 그 때가 돼요. 그럼 이건 한 때가 되죠. 한 때. 한 때가 되는 거예요. 모든 인간은 두 때가 없죠. 두 때가 없어요. 한 때, 한 때, 그냥 한 때뿐이에요.
그런데 여기에 방향성을 줘버립니다. 같은 때인데 한 때, 두 때 이렇게 되니까 그 때가 어떤 그다음 순서를 기다려야 되는 듯한 느낌을 주죠. 한 때, 두 때 그러니까 이건 끌려가는 거죠. 인간에게 일어난 사건이… 강남 강의에서 한 것처럼 수평적으로 편평한데 ‘여기 사나 저기 사나 어딜 사나 마찬가지다’ 이럴 수도 있고 1820년도에 태어난 사람이 기껏 살아봐야 1880년, 90년에 죽잖아요. 그 사람은 그 시대 역사에 한 때를 장식한 거예요.
하지만 이때가 다른 어떤 때와 연관성이 있다면 이것도 때인데 이때는 두 번째 때를 위해서 이때가 미리 필요하다고 이렇게 되어 버리면 이건 어떤 방향성을 갖는 거예요. 이때는 다음에 나온 때를 위해서 예비적인 것이다.
한 때, 두 때, 그다음에 뭡니까? 반 때죠. 반 때라는 것은… 인간세계에서 반 토막 난 사건은 없어요. 일어나면 무조건 한 때에요. 하나님께서 결국 모든 인간의 역사를 이 십자가 반 때라는, 인간들은 도저히 납득 안 되고 이해 안 되는 반 때를 위해서 전부다 스스로 방향성을 띄면서 한 때, 두 때, 이렇게 방향성을 띄면서 방향이 반 때 쪽으로 쏠리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표현이 한 때, 두 때, 반 때에요.
왜 이 설명이 타당한 설명이냐? 모든 역사의 중심은 십자가가 시작이고 끝이에요. 하다보니까 십자가가 아니고 십자가를 위해서 그동안 세상이 미리 깔아놓은 거예요. 그냥 건물 잡아당기듯이 모든 것들을 십자가 쪽으로 잡아당기는 겁니다. 골로새서 1장 16절. 세상에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모든 것들은 누굴 위해서? 예수님이 주가 되기 위함이에요. 예수님이 주가 되려면 뭐가 필요합니까? 어떤 사건이 필요해요? 십자가가 필요해요.
십자가가 있어줘야 심판할 수 있는 권한이 있습니다.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는 말은 율법을 가지고 세상을 심판할 때 그 율법을 다 이룸으로써 이제 죄는 충분히 숙성된 거예요. 마지막 심판은 ‘네가 얼마나 말씀을 지켰느냐, 못 지켰느냐’ 이걸 묻는 게 아니에요. 마지막 심판은 뭐냐?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이거에요.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는다. 그걸로 끝장나는 거예요. 그걸로.
인간의 행함으로는 심판을 못 받아요. 더 나간 개념을 사용한다면 인간이 자살해도 안 죽어요. 인간이 늙어 숨 끊어져도 안 죽어요. 죽음은 십자가의 죽음만이 죽음이고 나머지는 그 십자가 죽음과 어떻게 다른 죽음으로 죽을 수밖에 없는지, 다른 의미의 죽음이라는 것, 십자가 의미를 드러내기 위한 다른 죽음이에요. 사람들은 늙어서 죽는다 하잖아요. 그런데 십자가 죽음을 통해서 재해석해버리면 인간이 죽는 것은 죄의 값이 되는 겁니다. 죄의 값으로 죽는 거예요.
그러니까 모든 인간,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은 예수님이 십자가 사건에 종속되어 있는 겁니다. 매일의 삶, 매일의 삶도 십자가에 종속되어 있는 거예요. 진짜 이렇게 하고 시험지 내서 시험치고 싶어요. ‘집에 개가 치매 걸려 죽었다. 십자가와의 관련성을 서술하라.’ 집에 개가 치매로 죽어서 안락사 시켰는데 그것과 십자가가 어떤 관계가 있느냐, 종이 한 장 내주고 쓰고 싶은 대로 한 시간 동안 써보세요.
그러면 뭐 정답은 뻔하죠. 뭐로 끝나야 돼요? ‘집에 개가 죽는 것은 나의 때, 나의 역사 속에 있는 나의 때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주 비극적인 때라고 생각했는데 십자가 반 때를 대비해보니까 그게 바로 나 위주의 나만 사랑하는 내 위주로 살아가는 죄였습니다.’ 이렇게 시험문제에 답하면 돼요.
너무 길어요? 그러면 ‘나는 그냥 죄인입니다.’ 하고 써서 내면 되죠. ‘죄인 중의 괴수입니다.’ 하고 내면 되는 거예요. 적그리스도는 이미 우리 모든 마음속에 잠복되어 있었던 겁니다. 코로나처럼. 감기 조심하세요~ 10분 쉬시고.
서울강의20240215b 요한일서 2장 18절(적그리스도들)-이 근호 목사
인간세상에서 반 때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존재하지 않는데 반 때가 마지막 때가 된다는 말은 인간한테는 사건 같지도 않은 거예요. 그냥 지나가는 것이지, 사건으로 쳐주지를 않는 거예요. 인간세계에서는. 불도저가 밀어 붙여버려요. 중요한 것은 불도저가 중요하지, 그 뭐 조그만 집 같은 건 아무것도 아니잖아요.
예수님이 자칭 하나님이라고 우기고 그런 사람이 있어서 우리가 결정하여 불도저로 밀듯이 그 인간을 십자가에 달아서 ‘너는 정치범이야. 잡범이야.’해서 죽여 버렸다. 그렇게 해서 손 터는 거예요. 이거 아무 사건거리가 안 되는 거예요, 그 당시 유대에서는. 아이, 그동안 좀 시끄러웠네. 그런데 우리가 적절하게 처리했지, 그렇지? 우리 잘했어. 응. 그러나 혹시 모르니까 제자들이 시체 훔쳐놓고 부활했다고 우길 수가 있기 때문에 안 해도 되는데 찝찝한 것은 피하고 가는 게 좋지 않겠는가. 군사 두 명해서 지켜라.
그래서 그것까지 지켰는데 군사 두 명은 어떻게 했습니까? 자고 있었죠. 순찰 안돌았다는 말이죠. 아니, 생각해보세요. 죽은 시체를 왜 지킵니까. 죽은 시체를 가져갈까 싶어 지키겠지만 무거운 돌이 있어요. 무덤에 무거운 돌은 여러 명이 들어도 잘 못 들어요. 그 정도로 무거운 돌입니다. 그러니까 지키는 병사들도 참 할 짓 아니다. 이 쓸데없는 짓을 왜 하노? 지키라고 명령하는 상관도 위에서 시키니까 하는 것이지, 이거 뭐 말도 안 되는 짓을 하고 있어.
그리고 예수님이 십자가 달리고 나서 예수님이 그리웠던 세 명의 여자들, 특히 그 중에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 시신 잘 있는가 우리가 한번 가보기는 하자. 그래서 갔죠. 그러니까 인간세계에서는 반 때란 존재하지 않는 거예요. 모든 것이 인간의 역사 속에 포함되지, 인간이 이해 못하는 사건은 없다고 본 겁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마지막 종말을 반 때라는 표현으로 딱 설정을 해버렸죠. 그러면 어떻게 되느냐 하면 역사가 쭉 가다가 역사의 끝에 메시아가 온다고 하잖아요. 메시아가 온다. 이게 인간들의 상식에 맞는 거예요. 역사가 끝날 때 온다. 역사가 한 때, 한 때, 한 때,… 사건, 사건, 사건의 마지막 사건. 메시아가 온다. 이게 유대인들의 신앙이었는데, 중간에 왔어요. 중간에 종말이 와버렸어요. 중간에.
중간에 종말이 왔다는 것은 인간이 역사를 끌어도 주님께서는 역사 값으로 쳐주질 않는다는 거예요. 주님께서 건질 자를 건져버린 거예요. 하나님의 아들을 건짐으로써 나머지 모든 인간들은 그다음부터 의미 없는 세월이 되는 거죠. 유대인들은 계속 ‘메시아가 와야 될 텐데. 메시아가 와서 우릴 구원하는 일이 잘 돼야 될 텐데.’ 뭐 이러고 있단 말이죠.
메시아 와서 그 누구도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이미 이 세상을 떠났잖아요. 요한복음 5장, 6장, 8장 여러 군데 나옵니다. 3장. 나는 하늘에 속했다. 땅의 사람들은 내 말을 모른다. 요한복음 12장에, 나는 아버지께로 간다. 그때 다른 사람은 우뢰가 울리는데? 우뢰 울리는 소리지만 주님은 직접 아버지로부터 받았으니까 ‘내가 너를 영화롭게 할 것이다.’ 이런 음성이 이미 예수님한테 도달했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구원이라는 것은 아버지와 아들의 짜고 치는 고스톱이 되어버렸어요. 다른 사람은 아무도 쥐도 새도 모르게 일어나버렸어요. 그리고 역사는 쥐도 새도 모르게 끝나버렸습니다. 중간에 와서 튀었기 때문에 이 완성된 것은 뒤로 갈 수가 없어요, 역사는. 반대쪽으로 갈 수가 없습니다. 반 때는 다시 옛날로 돌아갈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과거도 못 돌아가죠. 미래도 안 돌아가요. 왜? 다 이루었기 때문에. 이미 다른 세계에 있기 때문에.
시간의 역사 속에서는 계속 인간들은 기다림, 기다림, 고도를 기다리며, 신을 기다리며 사는 거예요. 기다림뿐이지. 유대인도 마찬가지고. 교회는 재림을 기다리고 하죠. 그냥 기다리는 거예요. 기다리자. 인내를 가지고 기다리자, 뭐 이러고 있단 말이죠.
자, 그러면 한 때는 있는데 반 때란 뭐냐? 반 때는 역사의 때와 이 하늘나라 사이에 빠져나간 구멍이니까 이걸 구멍이라 하지 말고 이걸 ‘틈’이라 합시다. 틈. 이 틈을 통해서 주님이 하나님 우편에 앉아있기 때문에 그건 시작점이고 끝점입니다. 이 말은 뭐냐? 생명과 창조가 보이는 틈이 이 반 때에 일어나는 겁니다.
반 때와 반 때가 합쳐지면 한 때가 되겠죠. 십자가 사건은 지상에 남겨진 반 때와 하나님이 이루신 반 때가 합쳐지면 한 때가 되는 겁니다. 그럼 지상은 뭐냐? 온전한 때를 위한, 그냥 틈이 벌어진 거예요, 틈이.
말로 하는 것보다도 성경 보는 게 더 낫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사도행전 7장 55절, 56절, 57절,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대 저희가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심으로 그에게 달려들어” 이게 반 때에요.
스데반 집사는 지금 뭘 보고 있습니까? 스데반 집사의 몸은 이미 그리스도와 같은 공간에 있어요.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있다.’ 그런 말을 하니까 그 소리를 듣고 듣는 사람이 귀를 막아버리고 일심(一心)으로 한 마음으로 그에게 달려든 거예요. 죽으라고 달려들었단 말이죠.
왜 이게 틈이 되느냐 하면 인간에게는 사건 같지도 않은데 하나님한테는 중요한 사건. 인간한테는 때가 안 되는데 주님한테는 그 때에요. 무슨 때? 각 시대마다 이런 일이 계속 일어납니다. 각 시대마다 십자가 사건이 반복해서 계속 일어나는 현상을 보이는 겁니다.
내가 이미 하나님 우편에 계시는 주님과 함께 앉아있고 그리고 내 몸은 늙어가고 있고. 나의 눈에 보이는 몸은 늙어가고 있고 또 다른 나는 하나님 우편에 있고 그런 거예요. 합치면 한 때인데 땅에서 보면 동강 난 때 같아요. 아래, 위로 동강 난 때 같아요.
사람들이 스데반 집사한테 물을 거잖아요. 만약 그 당시에 어떤 MBC 기자가 있다면 “당신은 지금 하늘나라에 있어요, 땅에 있어요?” 그렇게 묻고 싶은 충동이 일어날 거예요, 그걸 보면서. “당신 지금 하늘 공간에 있어요, 지상에 있어요?” 그럼 스데반 집사가 “반반 있어요.” 반반. 짬짜면. 짬뽕과 짜장. 양쪽 다 걸쳐 있는 거예요. 양쪽 다.
이것은 신기한 축에도 안 듭니다. 신기한 것은 예수님께서 지상에서 일하실 때 그분은 하나님 맞죠.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는데 이 땅에 하나님이잖아요. 그런데 구약 성경에 보면 사람들이 하나님 만나면 죽어요, 안 죽어요? 분명히 죽는다고 되어 있죠. 죽는다고. 그런데 그 당시 사람들이 예수님 만날 때 왜 안 죽었습니까?
예수님 자체가 영광을 가리는 수건 역할을 했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예수님 자신이 성령을 받아서 그 불결한 죄인과 만나도 예수님하고 눈 맞춰도 안 죽도록 예수님이 낮아져서 그래요. 낮아져서. 피조물의 모습으로 오셨기 때문에 낮아져서 그래요. 지금은 누가 낮은가? 성도 자체가 하늘의 천사와 같지만 주님께서 성도의 육신을 예수님의 낮은 몸과 동일한 몸으로 성령을 통해서 활용해주고 있기 때문에 지금 사람들이 스데반 집사를 쥐어 패는 거예요. 패도 안 죽는 거예요.
패고 때리고 하는 그 현장에 누가 있었습니까? 사울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지금 생생하게 살아있어요. 사도행전 8장에 보면 2절, “경건한 사람들이 스데반을 장사하고 위하여 크게 울더라” 3절에 “사울이 교회를 잔멸할쌔 각 집에 들어가 남녀를 끌어다가 옥에 넘기니라” 이 일을 사울이 했었어요. 사울이 이 이야기할 때, ‘아, 지금 하나님 우편이 보인다.’ 뭐 이랬습니까? 안 보였죠.
그런데 그 사울이 사도행전 9장에 보면 기세등등하여 “다메섹 여러 회당에 갈 공문을 청하니 이는 만일 그 도를 좇는 사람을 만나면 무론 남녀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 오려 함이라” 그런데 갑자기 다메섹에서 홀연히 하늘에서 뭐가 자기를 겨냥해 둘러쳤습니까? 빛이 와서 둘러쳤죠.
여기서 바로 사울은 자기가 소경으로 살아왔음을 드디어 알게 됩니다. 내가 그동안 반만 보고 온 거예요. 눈에 보이는 세계가 전부라고 여기면서 살아온 겁니다. 반만 봤기 때문에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그냥 해프닝이고 에피소드에 불과하다고 생각했죠. 역사 중의 하나라고 생각했지, 역사를 잘라버리고 끝내버리는 사건이라고는 도저히 생각을 못한 겁니다.
사울은 예수님을 만날 때 그 길로 자기 인생은 쫑난 겁니다. 그래서 말하기를 나는 이미 십자가에서 예수님 만난 순간 죽었던 거예요. 이것은 출애굽기 33장 누구든지 하나님 만나면 죽는다는 것(33:20), 그리고 창세기 32장 얍복강에서 야곱이 느낀 것, 하나님 만나면 죽는다는 사실(32:30), 그 죽는다는 사실이 하나님 쪽의 겸손으로 인하여 안 죽으면서도 이미 죽은 것이 되는, 안 죽었는데 죽은 것이 되는, 합치면 죽고 안 죽고가 같이 있는 온전한 것이 되지만 지상에서는 죽었지만 살아있는 것처럼 살아가고 있는 겁니다. 사울이나 야곱이나.
아까 창세기 3장 15절에 여자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치죠. 예수님의 성령 오심과 부활의 영이 온다는 것은 우리 머리를, 대가리를 쳐버리는 거예요. 죽으라고. 그러면 더 이상 살아야 될 나가 없는 거예요. 그리고 나를 쳤던 그 분 안에서 이미 우리는 완전히 생명을 얻고 살아버린 거예요. 백성의 자격으로.
그것을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나는 생명을 보았다.’, ‘나는 창조를 보았다.’, ‘나는 나의 시작을 보았다.’ 다 같은 말입니다. 나는 생명을 보았다는 말을 풀이하면, 지금의 목숨은 이미 죽었다는 뜻이에요. 나는 창조를 보았다는 말은, 부모님이 주신 태어남은 창조가 아니다.
내가 그동안 나에게 올무가 된 거예요. 진실은 나는 창조되지 않았고, 진실은 나는 죽어있는데 누가 나를 속여서 나로 하여금 살아있고 나로 하여금 내가 만들어졌다, 창조되었다, 폐기물 아니고 창조되었다고 누가 계속해서 나를 속여 온 거예요. 그리고 우리는 그 속이는 자의 볼모가 되었고. 나 말고 다른 나가 있으면 우리는 여기서 볼모 안 되는데 지금 좋든 싫든 내가 붙들 수 있는 것은 이 몸뚱아리 하나밖에 없으니까 뭐 우쨌든 간에, 이건 나훈아 멘트입니다, 그저 우쨌든 간에 청춘을 돌려다오! 하는 식으로 우쨌든 간에 뭐 먹고 살아야 안 되겠습니까! 이런 거.
자리 싸움이에요. 자리 싸움. 주님의 자리가 내 자리인지, 내가 태어난 이 세상이 내 자리인지 우리 안에서 전쟁이 일어나는 겁니다. 일부러 전쟁을 일으키죠, 주님께서. 그게 바로 반 때 사건이에요. 틈이에요. 역사에서 주님께서 자기 백성을 건질 때마다 뭐가 발생되겠어요? 계속해서 틈이 생기는 거예요. 틈이 생기면서 자기 백성을 위로 위로 계속 끌어당겨 올리는 거예요. 올려붙이는 겁니다.
반 때가 모든 걸 지배합니다. 모든 때를 지배하는 게 반 때에요. 그러니까 마지막 때에 적그리스도가 오는데 마지막 때 하나의 적그리스도가 오는 게 아니고 마지막 때에 적그리스도들, 여러 적그리스도가 나온다는 말은 시대마다 계속해서 적그리스도가 등장한다는 말이고 그것은 시대마다 종말이라는 거예요. 누구한테? 그 시대의 사람들에게. 그 시대의 사람들에게 그 시대는 종말의 시대가 돼요. 그 시대에 필요한 택한 백성을 주께서 하늘로 소환시키기 때문에.
이미 구원받은 사람, 소환된 사람에게만 재림이 의미 있어요. 재림을 기다리는 사람한테는 재림이란 게 아무 의미가 없어요. 이미 구원되었기 때문에 그다음에 재림이라는 것, 그것이 바로 주께서 자기 자신을 영광스럽게, 이 저주받는 세상에 내가 옛날에 살았던 세상에 짠~하고 영광 중에 나타나는 거예요. 누가? 진짜 주님 되신 주다운 예수님이.
그래서 요한계시록을 한번 봅시다. 요한계시록 보고 열왕기상 보겠습니다. 요한계시록 1장 12절에 보면 “몸을 돌이켜 나더러 말한 음성을 알아보려고 하여 돌이킬 때에 일곱 금 촛대를 보았는데” 했죠. 자, 묻습니다. 위치라 했는데 금 촛대 위치가 구약 때 어디 있습니까, 촛대가? 성전에 있죠.
열왕기상 8장에 보면 솔로몬이 성전 완공하고 난 뒤에 성소, 성전의 지성소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났습니다. 그 앞에서 기도하는 제사장이 겁이 나가지고 놀라 자빠졌어요(8:10-11). 건축 구조물, 사람의 손으로서 다듬은 거예요. 누가 봐도 드론 띄워서 봐도 그냥 앞을 봐도 뒤를 봐도 동쪽 서쪽을 봐도 사람의 손때가 묻어있는 건물입니다. 지을 때 아무리 봐도 거기에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났습니까, 안 나타났습니까? 안 나타났어요.
오피스텔 건설업자가 오피스텔 짓고 난 뒤에 그다음에 가니까 뭐 우리 오피스텔에 하늘의 영광이 자욱하더라, 이런 거 봤어요? 담배 연기겠지. 담배 피운다고 연기가 자욱하겠지. 그런 거겠죠. 없어요. 왜냐하면 인간은 인간이 할 수 있는 게 다거든요. 집짓는 게 인간이 할 수 있는 거예요. 성전 짓는 것. 그 성전을 성전답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쉐키나(shekinah) 영광,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줘야 되는 겁니다.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다. 가인도 제사 드리죠. 아벨도 제사 드리죠. 그런데 창세기 4장에 있는 그 대목을 보면서 여러분 좀 이상하다는 생각 들지 않습니까?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제사를 드리는 것, 그게 끝이에요. 인간이 할 수 있는 것. 그러나 제사를 받고 안 받고는 인간이 이걸 요구해서는 안 되는 겁니다. 그거는 인간 몫이 아니고 그 담당은 누구 몫입니까? 하나님 몫이에요.
드리는 것은 인간이 할 수 있어요. 제물 바쳐서. 곡식 바쳐서. 그러나 놀라운 사실은 아벨의 고기를 주께서 받아들인 것이 이게 놀라운 사실이지, 내 곡식을 안 받아주는 게 놀라운 게 아니에요. 아마 받아주면 기절할 걸요? 우리가 원하지도 않는 일을 왜 하십니까, 이래가지고 달려든단 말이죠.
새벽기도 한 한 시간하고 집에 가는 거. 이거 우리가 원해요. 그런데 새벽기도하고 이제 갈라 하는데 ‘게 섰거라.’ 하고 만약에 주님이 나타났다. 다음에 그 교회 가겠습니까, 안 가겠습니까? 못 가요, 무서워서. 내가 요청하지도 않는 일이 왜 벌어졌냐 이 말이죠. 우리가 계획하는 건 뭐에요? 새벽기도하고 ‘하나님이여, 가정에 돈이 궁합니다.’ 집에 갔더니만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 뭐 계시 받았다고 와가지고 ‘몇 푼 되지도 않지만 한 15억 갔다 쓰세요.’ 하고 집안에 500원 짜리 다발로 있는 거 이런 걸 원하는 거예요.
잘 들어보세요. 우리가 원하는 것은 그 한계가 우리 아이디어에서 짜낸 것, 그게 우리 원하는 것의 마감이에요. 그게 한계라니까요. 그래야 내 때가 때답게 마감이 되기 때문에. 내 때가 한 때로 의미 있게 되기 때문에. 그러나 반 때는 우리가 원한 게 아니에요. 마감을 우리는 내가 한 기도에 대해서 내가 원인이 되었으면 결과를 내가 수확하고 싶은 거예요. 내가. 그래야 내가 신자인 것 같고 곧 죽어도 천당 가고 있는 느낌이 든단 말이죠.
그런데 아벨의 제사를 하나님이 받아버렸어요. 그렇다면 진짜 아벨이 믿음 있다면, 믿음 있었겠죠, 믿음이 있다면 뒤에서 형이 와서 때려도 괜찮아요. 왜냐하면 나를 때린다는 것은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의 극한이잖아요. 그러나 내가 받은 것은 인간이 따라올 수 없는 거예요. 하나님이 나를 인수인계했다는 이것, 인간이 할 수 없는 것에 우리가 이미 포집되어 있다면 기껏 인간이 하는 것이 내 인생에 흠집을 낼 이유가 없죠. 흠집 낼 이유가 없어요.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간에 너는 주의 영광을 위해 하라.”(고전 10:31) 무슨 뜻입니까? 이미 내가 너를 값 주고 샀으니, 이런 뜻이에요. 고린도전서 6장에 보면(“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6:20). 내가 너를 값 주고 샀기 때문에 너는 네 것이 아니고 내 것이기 때문에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나의 영광을 위해 하라 이 말이거든요.
그게 무슨 뜻이냐 하면 내가 하는 일에 내 한계를 뚜렷이 안다는 뜻이에요. 뭘 해봐야 이미 그것은 하나님께서 안 받는다는 것을 알고 기뻐하는 것을 말합니다. 인생을 가볍게 사는 거예요. 내가 뭘 해도 아무것도 아니고 뭘 안 해도 아무것도 아니고요. 바르게 살아도 아무것도 아니고 개판같이 살아도 아무것도 아닌 거예요.
개판같이 살아도 아무것도 아닌 것은 개판을 쳐도 재미가 없어. 이게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에. 재미가 없으면 그다음부터는 자진해서 그 일을 안 하게 되어 있어요. 재미가 없어서. 그래서 어떤 분이 말하잖아요, 저보고. ‘목사님, 복음 알고 보니까 사는 재미가 없네요.’ 그런데 그로 인하여 저 사람은 과연 복음을 아는지가 의심이 되는 거예요.
왜냐하면 복음을 아는 사람은 날마다 우리 몸을 반 때에 일어나는 사건화시키기 때문에 그게 재미가 있어요. 무슨 일을 만나든지 주께서 사람들을 당황시키는 일이 그렇게 재미있는 거예요. 나도 당황스럽고 세상 사람도 당황스럽고 주님은 안 당황스럽고.
그래서 무슨 일을 할 때에 그 현장성이 중요한데 그 현장에서 예상 못한 주의 손길을 감지하는 즐거움으로 사세요. 똑같은 일을 하더라도 예상 못한 일을 만날 때 비로소 그 순간 내가 아무것도 아니고 쪼다라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발굴하는 즐거움이 있어야 돼요. 내가 죄인이고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 아무것도 아닌 나를 위해서 왜 그렇게 나를 지키려고 쓰잘데기 없이 살아왔는가. 아무것도 아닌데.
그래서 여기 솔로몬 성전에는 영광이 임했잖아요. 그런데 요한계시록 1장 12절, 13절에 보면 촛대에요. 아예 촛대가 이미 완성된 완공된 성전 안에 촛대로 있어요. 그 촛대가 몇 개입니까? 일곱 촛대. 교회를 말하는 겁니다. 교회는 반 때를 현실화로 보여주는 거예요. 다른 사람이 봤을 때는 ‘어? 저기 교회 가네.’ 이렇게 되잖아요. 그러나 주님 보시기에는 이미 천국에 네가 와 있는 걸 확인해주는 겁니다.
성도가 성도답게 삶으로써 성도 본인은 나는 이미 죽었고 새삼 죽을 게 없고, 목숨 끊어지는 건 쉬는 거니까요, 그건 죽는 게 아니고 쉬는 거니까, 성도는 주 안에서 쉰다 했어요, 이미 죽어있으니 죽을 일은 없고 살아있는 내 모습을 사건을 통해서 그때 그때 만남을 보여주는 겁니다. 그 사건이 바로 아까 이야기한 십자가 사건이에요. 그러니까 요한계시록의 교회 역할은 십자가 사건을 항상 되풀이하는 겁니다.
그 십자가 사건을 되풀이하면서 누가 잘렸게요? 사탄의 아들들이 잘리겠지요. 또 누가 잘리겠습니까? 교회 자체가 잘려요. 일곱 교회가. 촛대를 옮겨버리니까. 그러니까 소유화된 교회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교인에게 소유된 교회는 교회가 아닙니다. 모든 교회는 소유권이 이미 주님한테 있어요. 그 시대에 필요한 교회들이에요. 그 시대에 필요한 메시아이고 그 시대에 필요한 종말이 요한계시록을 통해서 반복해서 계속해서 오는 시대마다 반복해서 똑같이 이렇게 스캔되고 스캔되고 스캔되는 거예요.
요한계시록에 초대 교회 쓰여 있다. 그러니까 초대 교회 지나고 AD 200년, 300년에는 요한계시록 필요 없습니까? 아닙니다. 그 200년, 300년이 요한계시록의 시작과 끝이에요. 계속 그게 반복되고 택한 백성 건지고 그 자체가 이미 그들 영혼은 목 베였고 그들은 하늘나라에 천년 동안 살아있고. 이걸 매 시대마다 계속 반복하는 거예요. 매 시대마다.
그래서 제가 이제 계속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그 성전 속 촛대 사이에 인자(人子) 같은 이가 있는데, 인자라 하는 것은 이 땅에 온 초라한 예수님을 표현하면서 인자라 했어요. ‘내가 사람의 모습으로 왔다’ 이거거든요. ‘내가 사람의 아들로 왔다.’ 이거란 말이죠. 그게 무슨 뜻입니까? ‘실은 내가 하나님이다.’ 그런 뜻이에요. ‘겉모습은 사람으로 보이지? 그러나 내가 하나님이거든.’ 이런 뜻이에요. 하나님이 변신도 잘 하지, 그렇지? 이런 식으로.
제자들에게는 그냥 하나님이 아니고 스승이었습니다. 베드로가 말했죠.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말은 했지만 주님은 알아요. 베드로의 지식에서 나온 게 아니고 혈육도 아니고 이건 하나님 아버지께서 성령을 통해 그런 고백을 하게 했다는 걸 알아요.
거기서 거리가 생긴 거예요. 베드로가 알고 있는 것과 베드로가 고백케 된 그 사이에 간격이 있었고 주님께서는 그 간격을 기어이 베드로에게 메워줍니다. 성령을 통해서 메워줘요. ‘그래, 네가 한 말대로 내가 하나님이다. 맞아.’ 하고 메워주죠. 성령이 와야 이제 하나님 말씀과 우리 생각이 일치되도록 그렇게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렇게 하는데 그 초라한 인자가 더 이상 초라하지 않아요. “가슴에 금띠를 띠고 그 머리와 털의 희기가 흰 양털 같고 눈 같으며 그의 눈은 불꽃 같고 그의 발은 풀무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고 그의 음성은 많은 물소리와 같으며”(계 1:13-15)라고 되어 있어요.
이 예수님의 장엄한 모습은 어떤 기능을 나타내는데 그 기능은 뭐냐? 바로 하나님의 성전에 오지 못한 자들에게 심판주의 매정한 모습을 이렇게 표현한 거예요. 매정하고 무서운 모습. 일체 봐주기 없는 모습. 그래서 “그 얼굴은 해가 힘 있게 비취는 것 같더라”(1:16)
여러분, 대낮에 힘 있게 비취는 태양 앞에서 ‘빛 좀 낮춰줄래?’ 이렇게 할 수 있습니까? 안되죠. 힘차게 빛난다는 것은 아무도 해의 힘차게 빛남을 말릴 수 없잖아요. 예수님의 심판에 대해서, 제가 언제 이렇게 했잖아요, 저 좀 봐주소, 이런 거, 우리 삼촌은 교회 안 다니고 복음 모르지만 착해요, 이런 거 없어요. 그냥 힘차게 빛나요.
융통성 없는 일관성 있는 심판을 행사하기 때문에 그 기능 자체가 몸에 부착되면 이런 영광스런 해보다 더 빛나는 그러한 존재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요한이 17절에 그 발 앞에 엎드려요. 엎드릴 때 어떻게 엎드립니까? 죽은 자같이 엎드리죠.
자, 오늘 요한일서에 적그리스도를 한번 생각해봅시다. 적그리스도는 우리 인간이 흠모하고 당기는 요소들로 가득 차있어요. 우리가 예상한 대로 ‘내가 그렇게 되었으면 좋겠다’ 하는 게 있어요. 그런데 요한계시록 1장에 나오는 진짜 그리스도는 뭡니까? 그 앞에서 무슨 말을 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에요. 완전히 어떻게 됩니까? 납작 엎드리고 죽은 자 같이 될 뿐이에요.
‘네가 뭘 원하느냐?’ ‘제가 뭘 안 해도 괜찮아요. 이대로가 좋아요.’ 할 정도로 납작 엎드리는 거예요. ‘내가 보니까 네 인생이 많이 힘든데 내가 어떻게 좀 편하게 해줘?’ ‘그럴 필요 없습니다. 그냥 이 자체가 좋아요.’
사울이 바울 돼서 주님께 요구하던 게 있던가요, 없던가요? 은이나 금을 탐냈던가요, 아닌가요? 사도 바울이 주께 한 기도 내용이 뭡니까? 뭐 달라고 했어요? 어떤 기도했습니까? 주님사랑의 높이와 깊이와 넓이가 더 퍼지게 해달라는 거예요. 쉽게 말해서 ‘주님의 활동하심이 이 못난 종을 통해서도 활동하심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게 해 달라.’ 오직 그 기도 하나뿐이에요.
그래서 그 활동에 속한 사람들은 ‘범사에 감사하고 모든 것에 기뻐하고 항상 주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리는 그 일만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하는 거예요. 이 말은 뭐냐? 이미 완료되어 있다는 거예요. 우리가 더 나서서 추가적으로 노가다 할 일이 없다는 겁니다. 주께서 노가다처럼 일하고 있으니까 새삼스럽게 내가 거기 거들 이유가 하나도 없다는 거예요. 그냥 주님 능력 안에서 내가 노가다다.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자, 적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차이점은 자리가 달라요. 자리가. 적그리스도는 인간이 원하는 인간의 역사 속에서 등장하는 게 적그리스도입니다. 진짜 그리스도는 역사를 째고 틈을 째버리고 완성한 채로 역사를 심판하기 위해서 출현되는 것이 그리스도의 자리에요.
그러면 성도는 적그리스도 자리에 존재하는 사람입니까, 그리스도의 자리에 있습니까? 예수 안에 있으니까 그리스도 자리에 있죠. 그리스도 자리에 있기 때문에 성도가 여기 이 세상에 있다는 것은 마치 옛날에 예수님께서 이 땅에 와서 활동한 것과 같이 똑같은 활동을 하게 되는 겁니다.
예수님도 활동할 때 성령을 통해서 활동했잖아요. 그러면 성도라는 것은 누가 왔다는 뜻이에요? 성령이 왔죠. 그 성령은 예수님의 영입니다. 예수님의 활동이 초라한 우리의 행세를 통해서 주님의 십자가 활동이 계속해서 반복되는 거죠.
아주 더 쉽게 이야기해서 가인이 아벨을 죽였잖아요. 아벨을 죽였는데 아벨 귀신이 사람이 되가지고 가인의 세계에 불쑥 불쑥 불현듯 등장하는 겁니다. 반 때의 사건으로 계속 등장하는 겁니다. 가인 역사 속에 천국으로 데려갈 같은 예수님의 형제가 있기에 주님께서 파견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사도행전 1장 8절에 나오는 말씀처럼 성령이 우리에게 임하면 우리가 땅끝까지 예수님의 증인이 된다. 예수님의 앞잡이가 된다. 예수님의 소개꾼이 된다. 거기서 성도하고 예수님 관계는 어떤 관계냐? 고린도후서 5장에 보면 사도 바울이 고백하기를 나는 예수님께 미쳤다. 마음 다 뺏겼다. 미흡한 것도 없어요. 다 뺏겨버렸어요. 주님이 부리는 종으로 사용하는 거예요.
그래서 요한계시록 1장 18절에 엎드려 딱 죽은 자같이 되니까 “두려워 말라 나는 처음이고 나중이다.” 나는 첫 번째 문제고 마지막 문제 다 풀었다 이 말이에요. 다 풀었다. ‘다 푼 문제, 그 가운데 있는 문제를 이제 너에게 줘서 이 땅을 살게 할게.’ 이런 뜻이에요.
해답은 이미 다 나왔어요. 다 해답이 있는 문제를 이 세상에 주께서 우리에게 문제를 던집니다. 문제를 던지면 그 문제의 해답은 이미 결론이 나와 있는 문제에요. 제가 그 해답을 벌써 말했어요. 수학 정석 보면 제일 뒤에 뭐 나옵니까? 해답만 소복이 나와 있죠. 가정에 여러분 인생에 어떤 일이 있더라도 십자가 사건을 증거하기 위해서 그 일이 일어난 게 해답이에요.
십자가 사건, 다 이루었다를 증거하기 위해서 아버지가 치매 걸리고 이런 거예요. 이게 전부다 십자가와 관련되어서 일어난 거예요. 내가 교도소 갇혔다. 십자가와 관련되어서 가는 거예요. 전창조라는 그 여자분이 진짜 성령을 받았다고 칩시다. 그러면 그 사람이 징역 15년 정도 받은 것 같은데 그럼 그걸 보고 범사에 뭐하겠어요? 감사하고 기뻐하겠죠. 이 말은 뭐냐? 절대로 내 인생에 대해서 남 탓을 할 필요가 없게 됐다는 겁니다. 주께서 성도로 하여금 15년간 교도소 가라고 했던 일이기에 모든 일이 주님에 의해서 하나 하자 없이 착착착착 제대로 잘 굴러가고 있기 때문에 탓을 할 이유가 전혀 없죠. 탓을 할 이유가.
진짜 평양냉면이라 해가지고 만원이나 주고 먹었는데 도저히 못 먹겠어. 어떻게 오천 원짜리 홈쇼핑보다 더 못할 때, 그 냉면 먹을 때 어떤 마음가짐이어야 됩니까? 범사에 감사하는 마음. 어떤 감사냐? 네 주제에 냉면 오천 원짜리도 과분하다. 빨리 국물까지 마셔. 네가 지금 우크라이나 전쟁 가운데면 냉면 먹겠나? 우간다 내전 한번 일어나봐? 오천 원짜리가 얼마나 그리운 냉면인지. 네가 배부르구나. 네 마음이 높았구나. 봐. 내가 낮춰주잖아. 맛없는 오천 원짜리밖에 안되는데 만원이나 받는 거. 너 나오면서 뭐라고 했어? 탓했지? 이거는 사기다! 이렇게 했지? 사기 아니야. 내가 했어. 내가.
우리의 인생살이가 내 인생은 완전 거덜 났어요. 내 인생은 죽은 인생이고 죽은 인생에 예수님이 오셔서 우리가 산 인생으로 살아가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사나 죽으나 우리는 주의 것이 되는 거예요. 그런데 적그리스도를 찾는 사람은 어떤 경우라도 자기를 흠집 내면 안돼. 잃어버리면 안돼요. 나한테 해로운 것은 복수할거야. 장지연, 내가 복수할거야. 맨날 복수한대요. 너는 쓰레기 같은 내 남편하고 살아라. 나는 부동산 600억 있다, 이런 거. 물론 드라마 이야기죠.
그게 홀로 찬란해지고 싶은 충동이에요. 적그리스도를 흠모하고 사랑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내가 저렇게 되었으면 하고 요구하는 거예요. 기다려봐. 내가 그렇게 될 테니까. 누가 누굴 영웅시한다는 것은 자기 취향에 딱 맞는 자기 모델이기 때문에 영웅시하는 거예요.
임영웅, 그것도 가수냐? 이런 거. 우리 엄마는 왜 그리 좋아하는지 몰라. 엄마 그 쇼 보는 게 효도라 해가지고 오백만 원주고 앞자리 표 사서 모셨는데 아, 나는 잠만 오고 중간에 튀어나오고 싶더라, 이런 이야기 있잖아요. 그거는 엄마의 영웅을 몰라서 그래요. 본인 영웅은 따로 있어요. 방탄소년단이라 해서 따로 있기 때문에. 따로 있어서 그런 거예요. 따로 있어서.
인간은 홀로 찬란하고 싶은 거예요. 홀로 자기 자신을 영광스럽게 만들고 싶은 거예요. 스스로 색종이 잘라서 스스로 가면서 자기 머리 위에 막 뿌리는 거예요. 수시로. 거기다 노골적으로 미친 인간은 아예 머리에 관을 만들어요. 문선명 같은 사람들, 신천지 이만희 같은 사람들은 관을 만들어서 떡 나타나니까 아니나 다를까 눈에 보이는 적그리스도를 찾는 개혁주의에서는, 거봐. 이만희 이단이잖아. 자기는 이단 아닌가? 자기 교회 당회장은 이단 아닌가요? 모조리 이단이면서. 홀로 찬란하고 싶은 이단이면서. 어디 적당한 핑계거리 또 하나 찾는다고 부지런을 떨어요. 자기 이단 아닌 걸 증명하기 위해서 어디 이단 좀 등장하지 않는가.
‘우리 교회는 신천지 방문하지 마세요.’ 그 말은 뭐냐 하면 ‘우리 교회 예수님 오지 마세요.’하고 똑같은 거예요. 우리 인간들끼리 홀로 찬란하게 될 테니까 초라한 예수님 오지 마세요, 하고 똑같은 거예요.
요한계시록 1장 18절에 “곧 산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찌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 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 열왕기상에서 솔로몬의 성전에서는 눈에 보이는 성전이었는데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니까 성전 담당자가 놀라버렸죠. 그런데 데살로니가후서 2장 4절에 보면 “저는 대적하는 자라 범사에 일컫는 하나님이나 숭배함을 받는 자 위에 뛰어나 자존하여 하나님 성전에 앉아 자기를 보여 하나님이라 하느니라”
그럼 하나님의 성전은 누가 지었겠어요? 인간이 지었겠죠. 자기는 그 성전에 앉아있으면 돼요. 스스로 앉아있는 것도 되지만 사실은 더 정확히 해서 그 성전 지었던 사람들 취향대로 성전에 합당한 대단한 위대한 목회자, 설교자, 교주를 그들이 옹립해서 거기에 앉혀버립니다. 우리의 대단한 교주가 되게 해주세요. 자기보다 더 성경 많이 알고 자기보다 기도 더 열심히 하고 자기보다 암 더 깊이 들렸는데 갑자기 자기가 스스로 안수해서 병이 나았다든지 이런 놀라운 기적이 있는 사람을 교회에서 당회장으로 모셔가지고 교인들이 자진해서 그 사람을 적그리스도로 만들어요.
노리는 게 뭡니까? 내가 다닌 교회, 교회답게 한번 키워보겠다는 거예요. 촛대는 벌써 예전에 다 옮겨졌어요. 그런 교회는 촛대 확 옮겨버립니다. 주님 앞에 엎드려야 될 자들이 눈에 보이는 사람 앞에 엎드리는 거예요. 사람 앞에.
그래서 요한계시록 22장 마지막에 보면 사도 요한이 천사 앞에 엎드리니까 천사가 오히려 일으켜 세우잖아요. ‘내가 당신의 종입니다. 여기서 이러시면 안 됩니다. 오히려 제가 섬겨야 되지, 왜 이러십니까? 이러시면 안 됩니다.’하고 일으켜 세우잖아요(22:8-9). 사도행전에 봐도 앉은뱅이를 걷게 하니까 사람들이 ‘야, 신의 아들이 왔다.’ 해가지고 막 섬기니까 사도 바울과 일행들이 거북스러워가지고 어떻게 합니까? ‘이러시면 안 됩니다. 우리는 증인일뿐이지, 일은 제가 한 게 아닙니다.’
크게 한번 써봐야겠어요. 이거 쓰고 문제 하나 나갑니다. ‘일은 제가 한 게 아닙니다.’ 성령 받은 사도들이 고백했죠. 자, 문제 나갑니다. 이 일은 제가 한 게 아닙니다,를 가지고 이 사람을 교주로 옹립하면 적그리스도입니까, 아닙니까? 이게 문제에요. 이다, 아니다. 또 문항이 두 개밖에 안되는데.
옹립할 거예요. 그래서 고린도전서에 파(波)가 생겼어요. 게바파, 사울파 생겼죠. 거기에 대해서 이런 짓을 못하게 하는 방법이 사도 바울의 입에서 나왔어요. “나는 당신들을 위해서 십자가를 지지 않았습니다.(고전 1:13)” 이게 정답이에요. 따라서 당신들에게 영광 받을 이유도 없습니다.
그럼 영광은 누구한테만? 홀로 십자가 지신 분만이 영광을 받아야 됩니다. 왜? 그 피가 우리의 죄를 사해주지, 건전하게 사는 자의 피가 우리 죄를 사해주는 게 아니에요. 바르게 사는 사람, 열심히 사는 사람의 피가 우리 죄를 사하는 게 아닙니다.
그 정도로 우리는 우리가 죄라는 걸 몰라요. 그 정도로. 적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이 자신의 죄를 몰라요. 자기가 죄 지었고 나쁜 죄를 지었다는 이 고백이 그들은 죄인 줄을 몰라요. 인간은 죄인으로 태어났지, 죄 지어서 죄인 되는 건 없어요.
그러나 인간의 죄악성은 죄 지을 때만 죄인이라는 자기 원칙을 갖고 있습니다. 왜 그런 원칙을 갖고 있느냐 하면 ‘그래도 마냥 죄만 짓지 않고 착한 일도 했잖아. 기도하고 전도했잖아. 고생 많이 했잖아.’ 이건 누가 봐도 죄 아닌 걸로 그렇게 삼고 싶은 거예요.
선악구조가 사람을 그렇게 버려놓은 겁니다. 선과 악의 양쪽 다를 아는 나, 양쪽 다를 아는 그 나가 바로 죄에요. 그거 왜 알아야 돼요? 알 필요 없는 걸 왜 알아야 돼요? 결국 양쪽 다를 알았기 때문에 인간은 내가 한 선이 아까워서라도 자기 포기가 안 되는 거예요. 자기 포기가 안 되니까 자기 포기가 되는 듯한 겸손한 자를 적그리스도로 옹립해버리는 거예요.
‘이번에 올 목사님은 얼마나 겸손한지.’ 겸손 같은 소리하고 있네. 이 세상에 겸손한 인간이 어디 있어요. 그만큼 연기가 뛰어나다는 뜻이지. 겸손 연기의 달인이라는 뜻이지. 아까 우리나라의 왕이 몇 명이라 했습니까? 이만 삼천 명. 그중에 겸손 왕도 있어요. 겸손 왕, 목회 왕, 인자함 왕이 있어요. 적그리스도들이죠.
그래서 이제 끝으로 이것만 한번 봅시다. 마태복음 11장, 이런 말씀 참 어려워요. 마태복음 11장 17절과 마태복음 10장 20절보고 끝내겠습니다. 마태복음 11장 16절, “이 세대를 무엇으로 비유할꼬 비유컨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제 동무를 불러” 17절, “가로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애곡하여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
이거 누가 누구보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예수님 자신의 심정을 이야기한 것이고 예수님의 심정을 닮은 예수님의 종들이 너희들의 시대, 네가 태어난 시대에 내가 당했던 이러한 똑같은 비난과 미움과 배척을 받을 것이라는 겁니다.
그렇다면 마지막으로 우리가 물을 것은, 그럼 우리가 어떻게 삽니까? 천 번을 답해도 천 번을 들어오는 질문. 그 천 번 중에 하나 더 보탭시다. 그게 마태복음 10장 20절,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누구입니까? “곧 너희 아버지(하나님)의 성령이시니라”
그럼 여기 나오는 질문 또 있어요. 성령 못 받은 사람은 어떻게 됩니까? 성령 못 받은 사람은 성령 받기를 노력하겠죠. 노력하면서 지옥 가죠. 인간은 자기를 위해서는 뭐든지 해요. 심지어 성령 안 오면 성령 받기까지 노력해요. 누굴 위해서? 자기를 위해서. 그게 바로 지옥 갈 죄라는 겁니다. 성령 받은 사람은 자기가 더 이상 산 자가 아니라 죽은 자라는 것을 압니다. 기도나 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주께서 천국 가는 사람을 어떤 식으로 만들어내는가 넘치게 성경에 나와 있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어떻게 하면 됩니까,를 묻는 그 자세. 그 자세가 바로 우리가 이 땅에서 죽어 마땅한 죄인의 모습인 것을 새삼스럽게 발견하는 기쁨을 허락해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