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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가랴16강-진리의 성읍(슥8;1-6)이근호131208

아빠와 함께 2013. 12. 8. 21:21

진리의 성읍(스가랴 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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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근호 13-12-08 15:44 
진리의 성읍
  
2013년 12월 8일                             본문 말씀: 스가랴 8:1-6

(8:1)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이 임하여 이르시되

(8:2)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내가 시온을 위하여 크게 질투하며 그를 위하여 크게 분노함으로 질투하노라

(8:3)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내가 시온에 돌아와 예루살렘 가운데에 거하리니 예루살렘은 진리의 성읍이라 일컫겠고 만군의 여호와의 산은 성산이라 일컫게 되리라

(8:4)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예루살렘 길거리에 늙은 남자들과 늙은 여자들이 다시 앉을 것이라 다 나이가 많으므로 저마다 손에 지팡이를 잡을 것이요

(8:5) 그 성읍 거리에 소년과 소녀들이 가득하여 거기에서 뛰놀리라

(8:6)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이 일이 그 날에 남은 백성의 눈에는 기이하려니와 내 눈에야 어찌 기이하겠느냐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나님께서 사람 사는 곳을 방문하겠다는 획기적인 약속은 평소에 하나님을 보고 싶어하고 고대한 자들의 마음을 들뜨게 하실 내용입니다. 사람들이 단순히 형체를 만들어서 신의 모형을 만들어서 섬길 필요가 없는 겁니다. 오실 분을 영접하면 그만인 것입니다. 친히 방문하심으로 일어나는 좋은 결과들도 오늘 본문에 나와 있습니다.

그것은 곧 여유와 풍요과 만족과 안정감입니다. 이러한 마을 이름도 벌써 지어졌습니다. ‘진리의 성읍’이라고 말입니다. 즉 진리만으로 그 어떤 경우에도 이런 안정감과 여유로움이 없어지지 않는다는 겁니다. 5절에 보면, “그 성읍 거리에 소년과 소녀들이 가득하여 거기에서 뛰놀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자유롭고 여유 있게 말입니다. 이 모두 다 하나님께서 친히 이 마을에 방문하시기에 일어날 상황입니다. 유대인들은 아직도 오늘 본문처럼 예루살렘이라는 이 장소에 하나님께서 방문하시기를 학수고대합니다. 그 어떤 수모를 당해도 이 약속이 실현되는 그 날을 위해 감내합니다.

하지만 기독교 신자들은 이런 유대인들의 기다림을 어리석게 봅니다. 왜냐하면 이미 여호와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을 다녀갔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바로 여호와 하나님 당사자이시고 그분이 예루살렘을 한 차례 오셔서 거기서 살해당하하시고 하늘로 승천하셨습니다. 따라서 기독교만이 진정 오늘 본문 말씀의 성취라고 자부합니다.

그렇다면 이 예루살렘 성읍에 소년과 소녀들이 가득해서 거기서 뛰논다는 것은 어떤 사실로 확인될 수 있는 겁니까? 예루살렘에 거주하는 모든 초등학생들의 총집합을 의미하는 겁니까? 아닙니다. 진리의 성읍은 이와 있는 성읍을 개선시켜서 말씀에 맞추시는 방식을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것이 아니라 새롭게 창조해내십니다.

즉 땅과 말씀의 만남입니다. 말씀에 입각해서 땅의 재편성이 이루어집니다. 마태복음 1:25-27에 보면, “그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나오는 ‘어린 아이’란 초등학교 학생을 두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땅과 말씀의 만남에서 새롭게 발생된 개념입니다. 즉 아버지와 아들의 소원대로 구원받아야 될 자들을 지칭해서 ‘어린 아이’라고 하시는 겁니다. 이들이 말씀 성취의 혜택을 입어 안정감과 여유로움을 살게 됩니다.

자 이 정도로 말씀드리면 우리 스스로에 대해 안심을 할 것입니다. 실제로 ‘진리의 성읍’이라고 자부할 수 있는 신약 교회 내에서 하나님께서 어디까지 요구하시느냐를 이제부터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즉 이래도 여유롭고 이래도 안정감을 유지할 수 있느냐를 봅시다. 고린도전서 6:6-8에 보면, “ 형제가 형제와 더불어 고발할 뿐더러 믿지 아니하는 자들 앞에서 하느냐 너희가 피차 고발함으로 너희 가운데 이미 뚜렷한 허물이 있나니 차라리 불의를 당하는 것이 낫지 아니하며 차라리 속는 것이 낫지 아니하냐 너희는 불의를 행하고 속이는구나 그는 너희 형제로다”고 되어 있습니다.

참으로 견디거나 참을 수 없는 상황을 가지고 하나님께서 다가오십니다. 사기를 당하고 고소를 하고 고소를 당하는 경우라도 과연 진리의 성읍에서 여유롭게 어린아이들처럼 뛰놀고 장난칠 수 있느냐 하는 겁니다. 우리 신상에 아무 일이 없을 때는 천하의 어려움이 와서 복음으로 여유를 가질 수 있는 것처럼 보이겠지면 그것은 그저 관념이요 가상적인 조작된 상황일 뿐입니다. 비현실적이지요.

실제로는 복음이나 말씀이니 신자나 거룩한 교회라는 생각보다 “내 돈, 내 돈, 피 같은 내 돈!”라는 의식 때문에 정신이 혼미해지게 될 것입니다. 상대를 죽이고 싶을 것입니다. 이것은 여유가 아니라 불안과 초조가 밀려오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실제로 진리의 성읍을 이루기 위해 오신 그 예수님의 말씀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마태복음 5:42에 보면,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쉽게 말해서 돈 빌려달라고 하는 형제가 있거든 그냥 줘버리고 이자나 원금이 받을 생각 말라는 겁니다. 뿐만 아니라 마태복음 6:19-20에 보면,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고 도둑질하느니라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둑질도 못하느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돈을 땅에 쌓아두지 말라는 것은 돈을 하늘에 쌓아두라는 이야기인데, 문제는 돈을 하늘에 쌓아두는 방법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즉 아무리 해도 말씀을 인간이 지키므로서 여유와 안정감을 찾을 수 있는 방도가 없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이런 계명을 가지고 찾아오신 이유가 이미 인간들이 계명에 의지해서 자신들이 기대하는 완전과 완성을 누리고 싶은 생각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계명은 자유케 하는 겁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이 계명을 동원해서 스스로 이 계명에 속박되는 현상을 보이는 겁니다. 자칭해서 말씀대로 사는 사람이 자부하지만 막상 교인 중 누가 와서 돈을 빌려달라고 할 경우에, 스스로 복음으로 여유와 안정감을 갖고 있다고 자부하는 그 모든 것이 일순간에 와르르 무너지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13:8-10에 보면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한 것과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율법에서의 자유란 이미 인간들이 법적으로 자신을 의인으로 확인하고 싶은 그 노선을 붙들고 있다는 점을 예수님은 지적하고 계시는 겁니다. 바로 거기서 손을 놓게 하시는 겁니다. 즉 “네가 구원받고. 네가 마음의 평화를 누리는 것은 누구로부터 사랑받기 때문이지 결코 너 자신이 말씀을 지켜내기 때문이 아니다‘는 겁니다.

우리는 돈 빌려달라는 식으로 우리 자신의 신앙을 시험하는 자들에게 “우리 둘은 돈과 계명의 관계에서 떠나 주님 때문에 서로 사랑하는 노선에서 사귑시다”고 말씀해야 합니다. 그러면 상대방이 “비록 돈을 저에게 안 빌려주셔도 저는 당신을 사랑합니다”고 나온다면 둘 다 진리의 성읍의 시민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법으로의 자유를 마음껏 누리며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16강-슥8장1-6(진리의 성읍)131208-이 근호목사

하나님의 말씀 스가랴 8장 1절에서 6절까지입니다. 구약성경 1318페이지입니다.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이 임하여 이르시되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내가 시온을 위하여 크게 질투하며 그를 위하여 크게 분노함으로 질투하노라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내가 시온에 돌아와 예루살렘 가운데에 거하리니 예루살렘은 진리의 성읍이라 일컫겠고 만군의 여호와의 산은 성산이라 일컫게 되리라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예루살렘 길거리에 늙은 지아비와 늙은 지어미가 다시 앉을 것이라 다 나이가 많으므로 저마다 손에 지팡이를 잡을 것이요 그 성읍 거리에 동남과 동녀가 가득하여 거기서 장난하리라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이 일이 그 날에 남은 백성의 눈에는 기이하려니와 내 눈에야 어찌 기이하겠느냐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글자 그대로 보게 되면 하나님이 특정 장소에 방문하신다는 겁니다. 그 방문하는 자리가 뭐냐, 예루살렘이라는 곳이죠. 그러면 예루살렘을 대청소 한번 할까요? 하나님께서 방문 하신다는데….

유대인들은 바로 이 사실을 문자 그대로 믿습니다. 유대인뿐만 아니고 오늘날 많은 교파에서도 이걸 문자 그대로 믿고 있습니다. 여기서 문자 그대로 믿는다는 말은 틀린 게 아니에요. 문자 그대로 믿어야죠.

그런데 자기 생각으로 이걸 자기 육신으로 해석을 하는 게 이것이 문제가 되는 겁니다. 성경 해석은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를 경과해서 해석돼야 되는데 예수님 빼놓고 해석하니까 예수님도 자기 눈에는 완전히 이단으로 보이는 겁니다.

이 본문 말씀은 예수님 본인이 오신 거예요. 그런데 아니라는 겁니다. 왜, 당신은 여호와가 아니니까. 여기 여호와가 예루살렘을 방문한다. 예수님께서 “내가 왔잖아.” 그 사람들은 ‘당신은 일단 아니야.’ “왜?” ‘당신은 여호와가 아니니까.’ “왜 아닌데?‘ 하면 ‘우리는 여호와에 대해서 잘 아는데 우리 눈에 보기에 아니니까 아닌 거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는 그들과 대화 소통이 될 수가 없죠. 보기는 보아도 깨닫지 못한다는 말씀을 왜 하셨겠습니까? 그래도 이 말씀을 하나님의 약속을 던져도 인간들은 이 말씀조차도 제대로 이해 못하고 있는 겁니다.

그렇다면 그건 남의 이야기라 치고요. 그러면 오늘날 우리는? 이 말씀을 이해하느냐?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우리가 이해하느냐?’ 하게 되면 우리는 남들이 못하는 것을 보고서 남들이, 저 사람들이 잘못됐으니까 우리는 옳을 것이라고 ‘우리는 이해하죠.’ 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면 우리보고 이걸 설명을 해보라 하죠. 우리는 설명하죠. ‘그때 예루살렘에 오신 예수님이 바로 이 본문 말씀처럼 여호와 하나님이 예수님으로서 이 땅에 오신 겁니다. 맞죠?’ 라고 나오죠.

그렇게 되면 그 다음이 문제에요. 5절에 보면 “그 성읍 거리에 동남과 동녀가 가득하여 거기서 장난하리라” 이건 또 무슨 이야깁니까? 앞에 여호와께서 예루살렘에 오신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을 방문했다, 그걸로 일단은 통과한 것처럼 느껴지는데 그렇게 여호와께서 성읍에 계셔서 진리의 성읍이 된다면 그 뒤에 나오는 동남, 동녀, 남자 어린애들, 여자 어린애들이 거기서 장난치고서 재미나게 노는 거, 그러면 이것은 어디서 찾아야 됩니까? 어디 이 앞에 유치원 놀이터에서 찾을까요? 이게 무슨 의미 있습니까? 말씀대로.

그렇다면 이걸 모르잖아요. 모르면 ‘너도 마찬가지야.’ 너도 마찬가지라는 평가를 받을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 문제에 대해서 오늘 신약 성경을 통해서 그 동남과 동녀가 예수님이 임하신 예루살렘에서 같이 뛰논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를 이제 같이 풀어나가겠습니다.

여기 “동남과 동녀가 같이 거기서 장난친다.“ 여유 있게 논다는 이것은 결국은 안정성을 말합니다. 그걸 좀 어렵게 이야기하면 말씀이 완성단계에 들어가게 되면 모든 게 여유가 있고 안정감이 생겨요. 부들부들 떠는 것이 아니고 겁내는 것이 아니고 뭔가 안정감이 있고 그야말로 깜짝 놀랄만한 일이 없고 큰일 날 일이 없는 안정성이 있을 때, 아이들은 그 성읍에서 맘껏 뛰놀게 되죠. 아이들이 맘껏 뛰논다는 것은 그 성읍, 예수님이 임했던 그 성읍, 예루살렘 전체가 대단한 완성단계에 돌입했다. 이렇게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여기서 말하는 어린애라 하는 것은 이건 그냥 나이 적어서 어린애가 아니라 마태복음 11장에 있는 것처럼 “이것을 지혜롭고 똑똑한 사람에게는 숨기시고 어린애에게 나타났습니다.” 할 때 애들 3살, 4살 애들에게 계시 줬다는 말이 아니고, 이미 예수님의 사랑과 용서가 임하니까 마음속에 안정감을 얻게 된 거예요.

평소에 예수님이 갈릴리 지방에 어떤 여인이 있는데 직업이 별로 좋지 않아서 남들에게 욕 얻어먹는 어떤 아줌마가 있었는데 그 아줌마가 예수님 보니까 눈물로서 향수 뿌려가면서 울더란 말이죠. 그럴 때 바리새인들은 ‘저 여자가 나쁜 여자인데 나쁜 여자한테 대접을 받으니 예수님 당신 좋으냐?’ 라고 이런 식으로 빈정댈 때에 예수님은 “이 여인이 하는 것을 금하지 말라. 이 여인은 지금 용서를 받았기 때문에 주체할 수 없는 그 사랑을 그런 식으로 표현한 것이다.” 이거는 뭐냐 하면 바로 오늘 말씀에 비하면 안정감 속에서 신앙생활 하는 거예요. 편안한 가운데 여유 있는 가운데서 하는 겁니다.

아까 점심시간에 이상규 집사님한테 얼른 이야기를 들었는데 불안한 가운데 신앙생활 하는 예를 하나 들었어요. 전에 이야기했던 것처럼 어떤 아줌마 둘이 부동산과 건물과 땅이 있는데 그걸 팔수가 없어서 애타고 있을 때 어느 기도 응답 잘 된다는 교회에 가서 기도응답대로 성령 충만 받고 부동산이 팔렸거든요. 그게 제1탄이고, 2탄을 이야기해요. 그렇게 팔리고 난 뒤에 장로가 찾아와서 5천만 원 내라는 거예요. 그리고 목사가 와서 4천만 원 내라고 했습니까? 그럼 9천만 원 내는 거예요? 아니면 타협 봐서 천만 원 깎아준 거예요? 뭔 뜻인지 모르겠는데, 그래서 화가 나서 이상규 집사님한테 이야기하니까 멋진 말을 했어요. 사업자 등록증 보여 달라고.

기도해서 돈 받을 자격을 하늘나라에서 받았다는 사업자 등록증을 내라 이 말이죠. 등록을 내야 세금도 떼고 하니까. 이거는 무당들이 굿해주고 돈 뜯어 먹는 거와 똑같은 거예요. 그러니까 그 아줌마들은 화를 내는데 그 화내는 아줌마들도 문제가 있어요. 뭐냐 하면 안정되지 못해. 신앙생활이 자기 재산에 벌벌 떨고 있어요. 저도 여러분도 마찬가지로 돈 있어 본지가 없기 때문에 떠는 게 뭔지 모르겠지만, 여유가 없고 진리의 성읍이 아니고 부동산 동네에요. 안정감이 전혀 없어요.

그런데 임했다는데 예수님이 임해도 자기한테 임하지 않은 거예요. 그럼 이 말씀이 되려면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읍에 임했다는 말은 예수님께서 이 말씀조차도 예루살렘을 우리 가운데, 우리 영혼 속에 예루살렘을 지금 말씀대로 만드는 겁니다. 이걸 쉽게 말해서 땅과 말씀의 결합 이예요. 땅에 속한 모든 자기 백성에게 말씀이 임하게 해서 그 땅이 그냥 땅이 아니고 인간이 그냥 인간이 아니고 말씀으로 사건화 시키는 겁니다. 말씀으로 사건화 시키면 우리는 사건화 된 하나의 육체, 물체가 돼요. 물체가 되면 우리의 인생을 살아가면서 주름이 하나, 하나 펴지게 되면 거기에 잠재돼 있던 사건들이 펼쳐지는 겁니다. 우리 인생을 가지고 우리 속에 우리를 이미 구원되게 하신 그 구원의 정보들이 우리 인생을 가지고 다루시게 되면 펄럭일 때마다 ‘네가 이래서 구원받은 거야.’라는 그 사건들이 펼쳐지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는 진리의 성읍이 되는 겁니다. 그리고 우리는 거기서 안정감 있게 뛰놀고 즐겁게 놀고 있는 동남과 동녀, 소년 소녀 어린애들이 되는 거예요. 그 순수함, 천국의 모습, 이걸 주께서 그리고 있는 겁니다.

듣고 보면 기분 좋은데, 그러면 어느 사태, 어느 상황이 왔을 때도 안정과 여유성이 있는지를 이제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진리의 성읍이라는 것이 어떤 원칙이 통하기에 그런 원칙 속에서도 우리가 웃을 수 있고 감사하고 편안할 수 있느냐, 제가 예수님의 산상 설교와 고린도전서에 나오는 교회 모습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우선 고린도전서 6장 7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어요. “너희가 피차 송사함으로 너희 가운데 이미 완연한 허물이 있나니 차라리 불의를 당하는 것이 낫지 아니하며 차라리 속는 것이 낫지 아니하냐” 그 편안하고 안정되고 여유 있는 진리의 성읍이라면 차라리 사기당한 것도 괜찮다는 말입니다. ‘사기 당했어요? 그러면 사기 당해도 즐겁게 뛰노세요. 동남이나 동녀처럼.’ 이걸 요구하는 거예요.

부동산 아줌마 이야기할 때는 기분 좋았는데 이 이야기 들으니까 갑자기 얼굴이 싸늘해지죠. 그건 유도 아닙니다. 마태복음 5장 42절에 산상설교 한번 보겠습니다.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야~ 이 소리 듣고 계속 교회 나온다는 것은 보통 안정감이 많은 사람이 아니에요. 대단한 사람입니다. 교회를 왔는데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교회에 평소에 어떤 장로님이 계신데 장로님이 말씀하기를 ‘복음 아는 사람은 복음대로 살아야 되고 예수 믿는 사람은 믿기만 하면 안 되고 말씀대로 순종하고 지켜야 그게 진짜 천국 가는 성도다.‘라고 평소에 우겨가면서 장로로서 존경을 받는 사람이 우리교회는 없는데 그런 사람이 있다고 칩시다.

있을 때 평소에 말씀대로 살려고 그렇게 외치는 장로님이 기도할 때도 말씀대로 살기를 기도했는데 그 소리를 듣고 어떤 사업에 실패한 집사님이 장로님한테 찾아와서 여기 마태복음 5장 42절을 딱 들이대면서 ‘장로님, 돈을 한 5억만 빌려주시기 바랍니다.’라고 할 때 이게 그냥 빌려주는 게 아니고 거저 주라는 이야기거든요. 이자 안 받고 나중에 ‘안 갚아도 돼요.’ 하는 그런 식이다 말이죠. 앞의 말이 뭐냐 하면 오른 뺨을 치거든 왼 뺨도 내놔라. 5리를 가자하거든 10리를 가줘라. 이 말은 뭐냐 하면 5리를 가라 할 때는 그걸 잊어버려라, 오른뺨을 치는 것을 사실 잊어버려야 왼 뺨을 내놓을 수 있거든요. 5리를 가라고 할 때 10리 가게 하면 ‘네가 전에 5리가라 했잖아. 두 번 안속아.’ 이러지 마시고 ‘당신은 나보고 언제 5리가라 했어요? 나 잊어버렸는데.’ 이렇게 잊어버릴 때 10리를 가줄 수 있는 거예요. 보통 여유가 아니죠. 보통 안정감이 아닌 거예요. 대단한 거예요. 진리의 성읍입니다. 뭔가 진리 안에서 맘껏 뛰놀고 장난치고 놀고 있어요.

만약에 그런 교회라면 집사님이 ‘장로님, 돈 3억만 빌려주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내가 말한 빌려달라는 것은 빌려달라는 것이 아니고 거저 달라는 그 이야기로 알아먹죠? 빌려주세요. 이자 없습니다. 돌려받기 없습니다. 차용증 그런 거 없습니다. 장로님 평소에 기도나 주관이 뭐냐, 말씀대로 살아야 된다. 내가 과연 장로님이 말씀대로 사는지 한번 테스트 해볼 테니까 저한테 돈 3억 빌려주세요.’라고 나올 때 약간 도가 심한 장로는 3억 그냥 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거기서 끝나지 않아요. 3억 빌려갔잖아요. 그 다음에 최 집사가 와서 5억 달라할 때 줄 수 있느냐 하는 겁니다. 그 소리 듣고 김 집사가 와사 17억 달라할 때 줄 수 있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이거 듣고 더욱 더 오기난 사람이 있어요. 누구냐? 톨스토이입니다. 다 줘버렸어요. 다 주고 이런 이야기합니다. ‘천국은 산상설교처럼 살아야 구원받는다는 이야기를 했어요. 죄와 벌이라는 소설을 지은 유명한 그리스의 문학가 톨스토이는 그 많은 재산을 다른 사람에게 다 나눠주면서  ‘신이시여, 하나님이시여, 나 산상설교 무시하지 않았습니다. 어때요? 저 어때요? 진짜 신자 여기 있어요.’라고 했습니다. 바보입니다. 내가 보기는 바보에요.

우리가 진리의 성읍 안에 평안과 안정과 여유를 누린다는 것은 이런 테스트 자체가 여기서 해당이 안 돼요. 또 한 가지 여기 산상설교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아까 여러분들이 제가 이야기한 거 “누가 사기당하는 게 낫지 아니하냐.” 그것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마태복음 6장에 보면 역시 산상설교입니다.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두지 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고 도적질하느니라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땅에 보물을 쌓지 말라.”라는 산상설교를 지켜야 구원되는 겁니까? 그리고 땅에 쌓지 않고 하늘에 쌓아둘 때 비로소 이 말씀을 지켜야 그야말로 톨스토이 주장처럼 이 땅에서 구원받는 겁니까? 여기 이점을 한번 생각해봐야 돼요.

제 말이 어렵지만 쉽게 생각하면 이렇습니다. 진리의 성읍이라는 것이 우리에게 안정감과 여유 감을 주는 거예요. 그 말은 맞아요. 그러니까 재미나게 노는 거예요. 어떤 일이 있더라도, 환란과 핍박이 오더라도 재미나게 노는데 이 말씀이, 진리의 성읍이 예수님께 찾아올 때에 주께서 그냥 ‘얘야, 너 평안해라.’ 하면 ‘감사합니다.’ ‘여유 있어라.’ ‘고맙습니다.’ 이렇게 오시면 좀 좋아요? 그런데 그렇게 오시지 않고 “네 보물을 땅에 쌓아두지 말고 하늘에 쌓아두라. 그리고 사기 당하는 게 차라리 낫다.” 그보다 더 무서운 말씀은 “누가 너한테 돈 빌리러 오거든 그냥 줘버려라.”라는 이런 말씀을 가지고 우리에게 ‘평안하냐? 너 여유 있지? 너 어떤 상황에도 상관  없지? 라고 약 올리는 것도 아니고 그런 식으로 찾아오더라 이 말이죠. 그럴 때 우리의 속마음은 어떻습니까? ‘주님, 좀 그런 말씀 안 했으면 좋겠습니다.’하는 생각이 들겠죠.

자, 보물을 땅에 쌓아두지 말고 하늘에 쌓아두라고 할 때 문제는 땅에 쌓아두는 것이 뭔가를 알려면 하늘에 쌓아두는 것이 뭔가를 같이 알아야 돼요. 그런데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는 방법은, 어떻게 하늘에 쌓아둡니까? 은행가서 돈을 동전으로 바꿔서 하늘로 집어던져 버리면 이거는 중력의 법칙에 의해서 도로 내려와요. 하늘에 쌓아둘 방법이 없다니까요.

저는 이 대목을 보면서 “땅에 쌓아두지 말라.”하는 그것보다도 “하늘에 쌓아두라.” 할 때 하늘에 쌓아둘 방법을 알 수가 없어요. 알 길이 없어요. 하늘에 쌓는 방법! 너도 모르고 나도 모르니까 목사들이 뭐라고 하느냐 하면 그러니까 교회 내라 이 말이거든요. 교회 내는 것이 어떻게 하늘에 쌓아두는 겁니까? 구제하라는 겁니다. 구제하게 되면 수평적 이동이지, 어떻게 하늘에 쌓아두는 거예요?

“편안해라. 여유 있게 살아라. 걱정하지 말고 살아라.” 얼마나 좋은 말이 있는데 왜 이렇게 난처한 말씀을 들이대면서 결과적으로 ‘너 여유 있지? 걱정 없지, 그렇지? 너 나와 진리와 함께 사니까 재미나지? 그렇지?’ 하고 있다고요. “네가 오른 뺨을 치거든 왼 뺨 내놔라” 하는 그 말씀 들으니까 갑자기 어떤 마음이 생겨? ‘갑자기 제가 여유가 생깁니다.’ ‘그래, 그거야. 그게 진리의 성읍, 이 여호와께서 진리의 성읍 예루살렘에 오신 이유가 그거야.’가 된다 이 말입니다.

이런 어려운 산상설교를 사도바울은 한 마디로 이야기했습니다. 그게 뭐냐, 사랑입니다. 그게 바로 사랑 이예요. 그 사랑이 뭐냐 하면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지 마라, 하지 마라, 하는 그 명령은 이게 뭐냐 하면 계명입니다. 이 계명이 우리에게 자유케 하기 위한 계명입니다. 어떻게 자유를 주느냐 하면 계명을 들이대므로 말미암아 우리는 그동안 이 계명에 얽매여서 억압되어서 핍박받으면서 이 계명을 의식하면서 살아온 속박된 존재라는 것을 깨닫게 하는 그것이 우리가 우리를 어디서부터 자유로워야 하는 것을 알려주는 하나의 전제고 준비 바탕이 되는 거예요.

우리가 남에게 돈 빌려줘서 자유로울 것 같으면 우리는 여전히 계명에 얽매인 사람이 돼요. ‘3억 빌려주세요. 장로님, 그러면 내가 당신 신앙을 인정하겠습니다.’ 가만히 들어보면 약 오르잖아요. ‘내 신앙을 무시하나?’ 안 주면 ‘에이그, 장로 한 말 거짓말이다.’ 하고 주면 ‘아이고, 장로님 존경합니다.’ 하고 다음날 또 찾아올 것이고.

그러면 그런 집사에 대해서 어떻게 대처합니까? 이렇게 대처하면 돼요. 이 대처 방법은 지금 필기해서 적어놓으세요. ‘사랑합니다. 사랑합니다. 사랑합니다.’ 이러면 돼요. ‘사랑 그건 아는데 돈 빌려달라니까. 장로 돈 빌려줘요.’ ‘사랑합니다. 사랑합니다. 집사님 모든 걸 사랑합니다.’ ‘미쳤나?’

두 사람 사이에 계명을 주고받으면 안 돼요. 사랑을 주고받아야 돼요. 그 집사가 와서 ‘장로님, 사랑합니다.’ 장로가 ‘에이, 또 뒤에 무슨 소리 하려고 사랑합니다, 를 처음부터 이야기하지?’ ‘장로님 사랑합니다.’ ‘나도 집사님 사랑합니다.’ ‘장로님, 3억만 빌려주세요.’ ‘집사님, 3억 있어도 안 빌려줍니다. 하지만 집사님을 사랑합니다. 당신한테 돈 안 빌려주는 이 장로를 사랑하십니까?’ 집사님이 ‘사랑하죠.’ 이야기 끝났죠.

돈 관계에서 유지되는 그 관계가 갑자기 돈 관계로서 계명 단계, 돈이 있으니까 계명이 달려든 거예요. 돈을 하늘에 쌓아둘까, 은행에 쌓아둘까, 부동산 투기할까, 이걸 생각하니까 계명이 달려드는 겁니다. 땅에 쌓아두지 말고 하늘에 쌓아두라.

그런데 사도바울 말씀대로 ‘사랑합니다.’ 하니까 이 노선에서 둘 다가 떠나버린 거예요. 이 계명 노선에서. 계명으로부터, 율법으로부터, 자유로워진 거예요. 그러니까 돈 빌려달라던 집사가 ‘장로님, 사랑합니다. 장로님 내가 돈 빌려 달라 했는데 돈 안 빌려주니 너무너무 사랑합니다.’ 이렇게 끝나고 ‘내가 돈 안 빌려줘도 나를 사랑한다는 집사님이 너무너무 사랑스럽습니다.’ 이게 바로 진리의 성읍입니다. 우리교회도 한번 실험을 해보시기 바랍니다.

아무 문제없는 걸, 우리는 내가 계명에 의해서, 산상설교에 의해서 어떤 성경구절에 의해서 나는 그걸 지켜냄으로서 천국 백성이라고 자부하고 싶은 이 속성 자체가 이게 바로 마귀한테 걸려든 겁니다. 또 그러니까 목사가 4천만 원, 장로가 5천만 원 내라 하는 거예요. 왜냐 하면 그 아줌마들이 돈에 매여 있다는 것을 알고 마귀가, 귀신이 끓는 겁니다.

그러면 사랑이 왜 그렇게 되는가? 사랑은 모든 율법의 완성입니다. 이 이야기 오랜만에 듣죠? 사랑은 모든 산상설교와 모든 사도바울의 모든 말씀의 완성입니다. 로마서 13장에 나오는 이야기에요. 사랑은 모든 것의 완성입니다. 간음하지 마라, 살인하지 마라, 무엇이 있더라도 사랑은 모든 것을 완성한 거예요. 완성이 돼 버리면 그 다음의 일이 뭐냐 하면 나 같은 인간을 사랑해 주신 주님이 보고 싶어지는 겁니다. ‘주여, 이러한 안정감과 여유를 나한테 이렇게 베풀어주신 그분이 사랑스러워지는 거예요. 사랑의 출처를 찾아가게 돼 있어요. 사랑은 받았다, 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그 출처를 찾아갑니다. 주님 아니었으면 지금도 나는 계명에 매어 있습니다. 계명에!

누가 오른 뺨을 치거든 왼 뺨을 내놓으라, 하는 그걸 두고 누가 나를 때려주라, 하고 갑자기 왼 뺨을 마저 때려줘, 해서 ‘나는 드디어 예수 믿는다.’ 이런 걸 증명하고 확인하고 싶어 하는 것, 지금 제가 약간 오버 있게 이야기했지만 사실은 오버해서 과하게 이야기했지만 평소에 우리의 모든 발걸음과 우리의 생각 속에는 항상 테스트, 테스트, 테스트, 내가 신자 맞는가, 테스트, 말씀 가지고 테스트 하는 그런 가운데 우리가 항상 시달리면서 지금 살아가고 있어요. 늘 시달리면서! 이상하게 여유가 없어요. 안정감도 없어요. 늘 시달려요. 이제는 그만~^^

이제는 그런 계명에 시달리는 일은 그만하세요. 그게 만약 계속해서 계명에서부터 자유가 없고 사랑으로서의 이전이 없으면 계속해서 주변한테 주변 목사나 주변에 시달리게 됩니다. 성경 말씀에 이런 게 있는데 너는 왜 이렇게 하느냐, 고 계속 시달리게 돼 있어요.

그럴 때 방법은 ‘사랑합니다. 사랑합니다. 사랑합니다.…’ ‘왜 딴 소리를 하고 있어?’ ‘딴 소리 하는 것처럼 했는데 그래도 사랑합니다.’ 개그 콘서트 보면 내가 좋아하는 남자를 만났는데 첫 번째 남자가 인물 좋은 남자를 만났는데 맨날 자기만 사랑하지 않고 다른 여자와 관계를 하니까 짜증나서 뭐 물으면 남자가 할 말 없으면 ‘사랑한다. 사랑한다. 사랑한다.’ 이렇게 하잖아요. 무조건.

그처럼 여유와 이런 것은 기존의 진리의 성읍이 아닌, 주님이 안 계시고 예수님이 없는 세상에서는 모든 것이 자기 정당함과 자기 옳음을 주장하기 위해서 자꾸 법을 제시하고 말씀 들이대고 논리를 들이대는데, 정말 우리 가운데 예수님이 함께 있으면 주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했기 때문에 우리는 그 사랑이 있는 한 고린도전서 7장 말씀처럼 “차라리 사기 당하는 것이 낫지 아니하냐” 그 말씀이 지켜서가 아니라 자연스럽게 그게 느껴지게 돼 있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님과 함께 있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용서와 사랑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살아가면서 더욱 더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