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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 13-12-15 15:3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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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강-슥8장7-8(내 백성)131215-이 근호목사 하나님의 말씀 스가랴 8장 7절에서 8절까지입니다. 구약성경 1319페이지입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내 백성을 동방에서부터, 서방에서부터 구원하여 내고 인도하여다가 예루살렘 가운데 거하게 하리니 그들은 내 백성이 되고 나는 성실과 정의로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예루살렘에 거하지 아니하면 백성 될 수 없다. 하나님의 백성이냐? 그럼 예루살렘에 주민등록이 돼 있어야 된다. 이 말씀을 할 때, 이 말씀을 봤던 유대인들은 상당히 반가웠을 거예요. 왜냐 하면 지구상에 한 지점만 장악하면 구원은 절로 주어지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루살렘을 장악하고 거기에 주민등록 돼 있으면 구원이 되는 거예요. 아! 이거 멋지지 않습니까? 인간에게 갑자기 목표가 생기고 목표가 생기면 살맛이 나지 않습니까? 울산에서 사시면 구원됩니다. 이게 얼마나 기쁜 소식 이예요? 어떻게 하든 돈 벌어서 울산에 있는 아파트 하나 마련해서 이사 가면 구원되니까. 그런데 제가 여러 번 이야기했지만 천국이라 하는 것은 어느 거주지를 어디로 정하느냐가 아니라 천국에서 영원히 살만한 인간자체로 바뀌어졌느냐가 중요하다고 했죠. 인간은 안 바뀌었는데 울산에 가서 살고 예루살렘에 가서 살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인간자체가 바뀌어야 되는데. 그런데 인간자체가 바뀌어 진다는 말이 이것이 불가능해요. 왜냐 하면 바뀌어 지고 난 뒤에 상태를 바뀌기 전에 미리 짐작을 한다는 그 자체가 이게 앞뒤가 안 맞는 이야깁니다. ‘나는 현재 이런데 바뀌고 난 뒤에는 이렇게 되고 싶다.’라고 되고 싶다. 하는 것이 어디서 나온 발상이냐 하면 바뀌어 지지 않은 터전에서 나온 발상이기 때문에 그것도 똑같은 한 통속입니다. 그저 미흡함? 보충돼야 될 그 무엇? 아쉬운 것? 지금 이것밖에 안 되는데 내가 천국 가게 되면 이런 인간이 돼야 된다고 하는 하나의 기대 여망이지만 그런 것조차 현재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해서 나왔기 때문에 가짜죠. 현재 있는 것 요거하고 뭔가 다른 거, 그 둘 다 가짜입니다. 내가 누구를 반대한다 해서 자동적으로 진리가 되는 건 아닙니다. 진리는 어떤 사람의 의견을 반대했다고 해서 이쪽에 있는 사람의 의견이나 반대하는 의견이다 둘 다 진리가 아닐 경우가 사실은 굉장히 허다해요. 예를 들면 이런 경우입니다. ‘당신 라면 좋아하나?’ ‘그래, 라면 좋아해.’ 둘이 라면 좋다고 결혼을 했다 이 말이죠. 나중에 결혼하고 보니까 여자 쪽에서 야구 보는 걸 그렇게 싫어하는 걸 몰랐어요. 라면 좋아하는 것은 맞는데 일부는 맞는데 스포츠에 있어서 한쪽은 축구 좋아하고 한쪽은 야구 좋아하고 이게 안 맞는 거예요. 그래서 다 맞출 수는 없는 겁니다. 이것은 한쪽을 반대한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같은 편이라고 생각하시면 그건 오산이 되는 겁니다. 현재 인간 세상이 ‘힘들다. 어렵다. 살기 괴롭다. 어디 좋은 나라 없나? 편히 쉬게.‘ 라고 생각하신다면 그것도 가짜 천국입니다. 가짜입니다. 그것도 안 돼요. 그래서 오늘 이 본문을 통해서 예루살렘과 백성, 백성과 예루살렘, 그 예루살렘 백성이 어떤 예루살렘이기에 그렇게 그게 천국이 될 수밖에 없는가를 생각해야 되고, 그전에 먼저 우리가 점령하려는 예루살렘은 아무리 점령하고 아무리 찾아가도 그건 결코 천국이 아닙니다. 하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 되겠죠. 시편 84편에 보면 굉장히 유명한 구절 이예요. 시편 84편이 왜 좋으냐 하면 하나님의 장막에 대해서 어찌 그리 좋은지요. 부터 시작되는 이 노래, 노래도 많이 나왔어요. “참새도 제 집을 얻고 제비도 새끼 둘 보금자리를 얻었나이다 주의 집에 거하는 자가 복이 있나이다. 저희가 항상 주를 찬송하리이다” 이렇게 시작되는 대목입니다. 특히 유명한 대목이 뭐냐 하면 “주의 궁정에서 한 날이 세상의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거함보다 내 하나님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 “악인의 장막에 있는 것보다 하나님의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요 대목에서 아주 특히 젊은 사람들이 ‘나이트에 가는 것보다 교회 가는 게 좋다.’ 이런 뜻이거든요. 나이트에 가는 것보다 교회 가는 것이 나아요? 젊은 애들이 나이트에 가지 않고 교회 붙들기 위해서 교회가 취한 정책은 교회 자체를 나이트로 만들어 버리는 겁니다. 밴드 시키고 조명시설하고 풀 것 있으면 나이트 가서 풀지 말고 여기서 풀어라, 이렇게 되는 거죠. 그래서 여기 “악인의 장막에 있는 것보다 하나님의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 그리고 “참새도 제 집을 얻고 세상보다 이곳이 좋습니다.”라는 요소들이 다 뭉쳐질 때 그게 예루살렘 이예요. 아이쿠, 만만치 않죠. 예루살렘이 그냥 비행기 타고 간다고 예루살렘이 아니죠. 성경 말씀이 듬뿍 담겨야 돼요. 보통 아이스크림을 뿔 같이 생긴 과자에 담을 때는 어떻게 줍니까? 듬뿍 담아주잖아요. 흘러넘치도록. 천국이나 성전 예루살렘이라는 곳은 어느 성, 캐슬, 성으로 벽돌로 지었다고 예루살렘이 아니라 거기는 무엇이 작용하고 무엇이 작렬하느냐 하면 주의 말씀이 마음껏 작렬하는 거예요. 그러면 제가 이런 말 하면 ‘아이구, 뭐 주님 말씀 작력하면 좋죠. 나이트 가야 설교도 안 하고 교회 가면 복음도 들을 수 있어서 좋죠.’라고 여러분들이 쉽게 생각하는데 방금 제가 주의 말씀대로 듬뿍 이루어진다 했습니다. 그럼 여러분들이 ‘그래요. 주의 말씀 듣고 이러면 좋잖아요.’ 하잖아요. 다니엘 한번 가볼까요? 진짜 좋은지? 어디 사자 굴에 한번 가 보시렵니까? 여기 사자 몇 마리 풀어 놓을까요? 서울 대공원에 있는 사자 몇 마리 풀어 놓아서 거기서 살아남으면 예루살렘이고 죽으면 지옥 가고 테스트 한번 해볼까요? 그래도 사자 있는 이곳에 오시겠습니까? 주의 말씀! 그게 듬뿍하다는 그게 우리로서는 감당 못합니다. 그래서 이렇게 생각하시면 좋아요. 시편 84편에 나오는 “주의 말씀이 어찌 그리 좋은지요”라는 고백을 한 사람은 이미 그전에 세상한테 데었다 하죠. 경상도 말로. 제대로 세상에서 큰 실망을 한 사람들, ‘내가 세상 좋아하면 개다.’라는 인생에서 큰 상처와 아픔과 트라우마, 그런 괴로움을 이미 주님의 복음과 더불어서, 그냥 하면 안 되고, 사기 당한 사람은 안 되고, 복음과 더불어서, 복음 때문에 아주 진짜로 ‘세상의 정체를 이제 알았어, 세상이라 하는 것은 이렇게 복음을 이토록 저주하고 싫어하는 곳이 세상이구나.’라고 혼난 사람들. 그렇다면 복음 좋아하는 사람들을 배척하지 않고 영접해 주는 곳이 어딜까? 그럴 때만 나오는 것이 바로 예루살렘입니다. 로마서 5장에 보면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룬다.” 했죠 반드시 그전에 복음 때문에 환난 당하는 경우에 이미 들어간 사람들은 천국으로 통하는 파이프에, 진공청소기에 쑤욱 빨려 들어간 사람들 이예요. 뒤로 되돌아 갈 수가 없어요. 후진이 안 돼요. 이미 주님의 말씀에 환난 당한다는 것은 그 소용돌이 속에, 그 토네이도 속에 빨려 들어간 사람이 돼 버려요. 이젠 천국으로 튕겨 들어가고 나올 거만 남아있어요. 그래서 천국에 대해서, 구원에 대해서 아주 간단한 예는 이렇습니다. 물에 빠진 사람들이 살려달라고 허우적댈 때는 구조원들이 힘들어요. 어떻게 하느냐? 물을 더 먹여서 ‘살려주세요.’란 마지막 말을 포기했을 때 푹 물에 잠겼을 때, 맥을 못 출 때, 병원에 가면 의사들이 하잖아요. ‘어깨 힘 빼시고’ 맨날 주사 맞을 때도 힘 빼라고 하죠. 힘을 다 뺏을 때 이제 자기 자랑할 게 하나도 남아있지 않을 때, 내 의가 없을 때, 질질 해변으로 끌어당겨서 구원해요. 그래서 우리는 그렇게 구원받았으면 우리는 화를 내야 돼요. ‘나 같은 인간을 누가 구원했습니까? 나 같은 쓸모없는 인간을.’ 이렇게 화를 내듯이 감사해야 됩니다. ‘나 같은 인간 죽도록 내버려두지, 뭣 때문에 절 구원했습니까?’라고 하는 식으로. 완전히 밑바닥까지 다 내려가게 하십니다. 그럴 때 세상의 첫 날보다 잘 나가던 첫 날보다 그냥 문지기니까 제일 하바리잖아요. ‘문지기로 그냥 보초서는 것만으로 세상에 이런 호사가 없습니다. 이런 감사가 어디 있습니까?‘라고 고백하는 것. 자, 이것이 바로 예루살렘이라면 갑자기 우리는 예루살렘 가는 게 겁이 나기 시작하는 겁니다. 그럼 이스라엘의 예루살렘이 그런 예루살렘이라면 아무도 그렇게 세상에 혼나면서까지 갈 의지, 마음이 싹 가십니다. 그렇게 가서 구원받고 싶지 않습니다. 그런 생각이 들 거예요. 시편 83편에 보면 바로 그런 사람을 위해서 다음과 같은 구절이 준비돼 있습니다. 상당히 중요한 구절인데 사실 오늘 설교 핵심이 지금부터 시작되는 겁니다. 83편 4절에 보면 “말하기를 가서 저희를 끊어 다시 나라가 되지 못하게 하여 이스라엘의 이름으로 다시는 기억되지 못하게 하자 하나이다.”라고 주변에 있는 이방민족들이, 다른 신을 섬기는 자들이 그렇게 예루살렘을 그런 식으로 노리고 있습니다. 제가 말씀드리는 취지는 이렇습니다. 아무도 자진해서 예루살렘에 들어오고 싶지 않아요. 사도행전 5장에 보면 아나니아와 삽비라 이야기가 나오는데 굉장히 재미나고 흥미가 나요. 왜냐 하면 헌금 드리려고 들어갔다가 그날 아침에 사이좋게 부부가 한 날 한 시에 제삿날이 돼 버린 죽어버린 사건이거든요. 사도행전에서 교회가 뭐냐 하면 사람을 살리는 곳이라고 생각하잖아요. 사람을 살리는 곳이라고 알려면 왜 사람은 죽을 수밖에 없는가를 제대로 아는 그 장소가 내가 아는 식의 삶이 아니라 진짜 하나님 쪽에서 살려주는 생명이 뭐라 하는 것을 드러나게 하는 겁니다. 설교 다시 해봅시다. 현재 내가 여기 있는데 천국은 어떠냐? 현재 있는 것이 미흡한 거, 모자란 거 채우는 게 천국이다. 이렇게 알게 되면 그 천국은 가짜가 됩니다. 왜냐 하면 내가 여기 있기 때문에. 그런데 사도행전 5장에 나오는 교회는 ‘나는 교인이니까 헌금은 이렇게 해야 돼.‘라고 그런 발상을 갖고 있는 그 인간을 죽여 버립니다. ’살아있는 내가 어떻게 착한 일을 하면 구원받을까요?‘라는 그 인간을 죽여주는 그 교회관이 진정한 교회에요. ‘내 인간이 어떻게 하나님께 경건하게 살고 바르게 살까요?’라고 그렇게 하면 주께서 ‘그 입 다물라.’ 이렇게 하시는 거예요. ‘그 입 다물라. 어느 안전에서 그런 되도 않는 소리를 하느냐?’ ‘나는 지금 부족하지만 주께서 키워주시면 잘 되겠습니다.’라고 여전히 자기 가치를 쥐고 있는 자들을 죽어서 나가는 만드는 그게 바로 교회다 말이죠. 그래서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지옥 갔다고 하지 마세요. 그런 소리하면 그 사람들에게 실례가 됩니다. 나중에 만나 보면 얼마나 미안하겠어요? 벌 받았지. 하나님이 교회가 뭔가를 시범조로 당한 것이지, 지옥 갔다고는 단정하지 마세요. 고린도전서에도 그런 게 나와 있어요. 아버지의 첩과 간음했다고 해서 지옥 가는 게 아니에요. 아버지의 첩과 간음해서 그 아들이 죽였지만, ‘몸은 죽이고 영은 살게 하려 하심이라.’ 이렇게 돼 있어요. 그것 보면 하나님이 또 후하죠. 너무 무섭다고 생각이 안 들고 어떤 경우는 우리 생각에는 너무 풀어준다고 생각을 하고 그런 겁니다. 하나님의 관심사가 개인 구원에 있는 것이 아니고 네가 구원받게 된 그 터전, 터, 자리가 너를 구원시켜주는 그 자리에서 뭐가 솔솔 나오는가를 보란 말이죠. ‘나는 이렇다.’ 하고 우긴다면 그 인간을 다시 죽여서라도 ‘나는 이렇다.’가 안 나오게 만드는 그 터전, 그런 성령의 역사, 일, 그게 바로 예루살렘이고 교회입니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살기 힘드니까 어떤 종교를 가지고 이 종교 덕분으로 죽어서는 편히 쉬겠다는 그런 시도자체는 예루살렘은 받아들이지는 않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느냐, 주변 나라들이 뭐라고 하느냐 하면 시편 83편 4절에서 “이스라엘 저희들을 끊어버리자, 가서 이스라엘 이름을 다시는 기억되지 못하도록 하자.” 그리고 5절에 “일심으로” 마음을 하나로 뭉쳐 “주를 대적하여 서로 언약하니” 그들이 에돔이고 이스마엘이고 모압이고 하갈인이고 그발이고 암몬이고 아말렉이며 블레셋이고 두로며 앗수르고, 이렇습니다. 나중에는 바벨론까지 나오죠. 여러분들이 구약을 보시면서, 구약을 언제 보고 계시는지 모르겠습니다마는 일단 본다고 치고 여러분들이 구약을 보시면서 이스라엘 주변에 있는 그 보조 배우들, 보조 민족들은 왜 그렇게 갖다 붙어서 왜 자꾸 이스라엘을 유혹거리로 하느냐, 그 쓸데없는 가지면 하나님께서 잘라버리시지, 왜 놔두느냐, 그런 생각이 들죠. 여러분, 그들이 없으면 이스라엘은 구원 못 받습니다. 고린도전서에 보면 이렇게 상당히 위험스러운 발언을 사도바울이 했어요. 뭐냐 하면 ‘사도님, 세상 친구 사귀지 말까요?’라는 소리 하지 말라는 거예요. 지금 제가 말해도 굉장히 위험스럽죠? 세상 친구 다 만나지 말고 동창회 가지 말고 그냥 교인들만, 복음 아는 사람들만 만날까요? 그러지 말라는 거예요. 그럴 것 같으면 네가 이 세상에서 아주 산 속으로 나가야 된다는 겁니다. 제가 지난 주일날 했잖아요. 세상에 사시라고 했죠. 염색되지 말라, 물들지 말라 했죠. 하루는 제 아내가 실수로 양말하고 같이 내의를 세탁했던 모양이죠. 러닝셔츠가 시커멓게 됐어요. 속옷 입었지만 안 들키니까 알 수가 없죠. 그런데 그게 그만 들키고 말았어요. 병원에 오십 견 때문에 주사 맞는데 어깨 내라 해서 다 들켜버렸죠. 세상에 나가 살수는 없는 겁니다. 물들지 말라 말이죠. 무슨 뜻이냐 하면 세상을 만날 때 얼씨구나, 하고 짝짜꿍하고 같이 붙으란 말이죠. 붙어놓고 ‘역시 나는 교회보다 나이트가 좋아.’ 나는 교회보다 나이트하고 동창생, 이런 게 좋아, 역시 낚시나 등산이 좋아, 하고 충분히 하시면서 그 현장에서, 그 현장에서! 교회 오지 말고, 그 현장에서 ‘내가 이래도 되나?’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란 말이죠. 뭔가 현장에서, 분명히 내가 좋아해요. 분명히 이거 좋아하는데 마냥 좋아해도 내가 될 입장이냐 말이죠. 내 자리가, 과연 술 먹고 구원받는다. 피로 구원받지, 술로서 구원받는 건 아니거든요. 그런데 술은 들어간다 말이죠. ‘내가 피가 들어갈 이 몸에 술이 계속 들어가도 되나?’ 할 때 이 피의 의미가 뭐냐 말이죠. 다시 한 번 내가 피를 믿어서 구원받는 게 아니라는 사실, 피가 나를 구원하지, 피를 홀짝홀짝 마신다고 ‘내가 마셨습니다.’라고 고백한다고 구원받는 건 아니다 이 말이죠.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해야 됩니다. 나와 나의 차이를 두세요. 남과의 차이는 물론이고 나와 나의 차이, 세상 좋아하는 나와 그런 나를 더 좋아하는, 나보다 더 나를 사랑하는, 유명한 노래 가사 같습니다마는 나보다 나를 더 사랑하는 분이 나로 하여금 그 넓은 길로 가지 않고 좁은 길로 가도록 매일같이 새롭게 조립해 주신다는 그 조립 기계 소리를 날마다 들으시기 바랍니다. 그게 예루살렘에 장치된 기계입니다. 예루살렘은 예루살렘만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주변에 배치돼 있는 배정돼 있는 안 믿는 사람들이 우굴 거림, 그 우굴 거리는 소리를 늘 우리 속에 듣게 하는 겁니다. 그리고 그 소리는 우리 몸이 좋아하는 소리에요. 옛날에 잘 나갔어요. 다 그 바닥에서 나도 한 가닥 했어요. 그런데 그 가는 것에 대해서 뭔가 성령께서 구분을 짓는 겁니다. ‘너는 같이 춤춰도 저들과 네가 다르다.’ 라는 것을 깨우치게 하는 겁니다. 그때로부터 어떤 현상이 벌어지는가? 세상이 보여요. 세상이 보이기 시작하는 겁니다. ‘그래, 저 인간이 이런 소리 하는 것은 나를 이용해서 등쳐먹으려고 하는 소리가 다 보여.’ 이제는 세상이 보여요. 그리고 그 인간이 그렇게 등쳐먹으려고 하는 것은 그는 주의 이름도 모르고 자기 이름만을 위해서 온갖 아양과 온갖 아부를 알아요. 왜, 나도 그런 식으로 살고 있기 때문에. 나도 내 이익이라면 수단과 방법을 안 가린다는 것을 내가 그런 식으로 알기 때문에. 나는 내 이름밖에 모르고 내가 아는 천국은 내가 싫어하는 놈은 오지 마라, 나 혼자 누리련다. 할 정도로 천국을 내 세상처럼 여기는 그런 식의 천국, 그 천국과 차이나는 천국을 주께서는 안 믿는 사람들을 통해서 우리로 하여금 구분 짓도록 하는 겁니다. 그것을 언약의 구분, 그것을 언약이라 합니다. 하나님의 언약이라 하는 것은 외운다고 언약이 아니라 실제 생활에서 차이 나게 만드는 그러한 실제로 작용되는 거예요. ‘그래, 이 세상이 돈이 전부가 아니야, 건강, 행복이 전부가 아니고 내 행복을 위해서 하나님이 있다는 것은 이것은 터무니없는 이것은 독하게 악한 마귀 적이야.’라는 것이 어느 날 압니다. 물론 우리 몸은 거기로 딸려 가지만 그러면서도 ‘주여, 차라리 이 몸을 지금 없애도 저는 고맙습니다.’ 하겠습니다. 그 말을 다른 말로 하면 “세상의 천 날보다 주의 장막의 문지기로 있는 게 좋사오니” 그 문장의 다른 표현이 ‘차라리 저를 죽여주옵소서.’ 하는 그 문장 이예요. 제가 어느 모임에서 그런 이야기했습니다마는 법을 만들어서 안락사 좀 시행해 달라. 쓸데없이 자꾸 나이 많이 먹지 말고 알아서 이렇게 법으로 주사 한 대씩 맞아서 그대로 곱게 가도록 법으로 했으면 좋겠어요. 노인네들 맨날 65세 이상 공짜로 차태우지 말고 차 탈 때마다 ‘주사 맞으세요.’ 해서 그 차가 바로 장례식장으로 가는 차, 화장터로 바로 가는 버스가 됐으면 좋겠어요. 그게 뭐냐, 다 갈 때가 있기 때문에. 편히 쉴 때가 있기 때문에. 그건 내가 가고 싶은 게 아니고 나의 추악스러운 것은 다 드러내면서 주께서 친히 마련해 주신, 내가 악함은 악한대로 다 도려내시는 그 주님이 마련하신 곳 이예요. 악하다고 노출시키면서 데려가는 그 자리. 그래서 제 글에 이런 게 있어요. 우리는 이 세상에서 이 세상 한 복판에 얌전하게 주차하고 싶지만 주께서는 이 주차된 차를 견인해서 폐차장에 집어넣고 폐차장에서 자신의 본모습을 다시 한 번 발견하게 하시는 겁니다. 우리는 자식한테 뭘 해줬다. 가족들에게 봉사와 희생을 다 했다. 하지만 사실은 폐차입니다. 나 없어도 다른 사람, 우리 남편 나 죽으면 다른 여자 만나서 잘 삽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가만히 보면 쓸데없는 인간을 쓸데없다고 알려주는 그런 쓸데 있음으로 주님을 증거 하는 차원에서 우리를 예루살렘 백성에 들어가게 합니다. 그러면 그 천국은 내 자랑 안 하고 오직 주님만 자랑하는 이 말씀이 완성되는 말씀만이 넘치는 그런 천국이 될 거예요.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 사는 것이 살려주어서 참새 키우듯이 백합 키우듯이 살려주어서 산다는 것을 왜 자꾸 잊어버리는지, 우리의 못난 우리 때문에 주의 은혜를 잊어버리고 주의 은혜에 감사하지 않더라도 때마다 사건 일으켜서 그 틈새 사이에서 주께서 늘 우리를 사랑함을 저희들이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
첨부파일 : 17강-슥8장7-8(내 백성)131215-이 근호목사.hwp (48.0K), Down: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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