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강의

지옥하나님17-목숨바칠 명분

아빠와 함께 2023. 4. 17. 10:26

[22 대구강의] 지옥의 하나님 17 - 목숨 바칠 명분

22,11,21 강의 : 이근호, 정리 : 구득영

* 최후의 전쟁 !!

이제 시작을 하겠는데, 교재 79페이지입니다. 여기에 보면 '다니엘이 본 최후의 전쟁' 이라고 되었는데, 전쟁이 그냥 전쟁이 아니고 최후의 전쟁이라는 겁니다. '최후' 라고 하면 사람들이 긴장을 하는데, 기분이 별로 좋지 않다는 말이죠. 누구 마음대로 최후라고 하느냐는 것이죠.

다시 말해서, "이 세상에 종말이 온다고 누가 그런 이야기를 해? 도대체 누구야? 나는 그것을 도저히 용납하지 못해. 왜 그렇게 극단적이야? 아직 손자 장가도 보내지 못했는데, 왜 그렇게 최후라는 말을 함부로 해? 당신이 장래에 대해서 알기는 무엇을 알아? 어디 교주라도 되고 싶어?" 라고, 그런 식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다니엘서에서 최후라고 하는 것은, '이스라엘' 이란 나라의 최후라는 말이죠. 이스라엘 나라가 망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여기에 대해서 "인류전체의 최후는 아니네. 나는 또 우리가 망한다는 줄로 알았잖아" 라고 나온다는 말이죠. 하지만 "이스라엘이 망했다" 라고 하는 것은 무슨 의미인고 하니, "그 다음 차례는 바로 너희다" 라는 겁니다.

왜 그런고 하니, 이스라엘이 무엇을 품고 있는고 하니, 이스라엘을 망하게 한 원칙이 그 안에 들어있다는 말이죠. 이스라엘 안에는 하나님이 주입하신 원칙이 들어있는데, 그 원칙에 이스라엘이 따르지 않았기 때문에 이스라엘에게 최후가 주어진다는 겁니다.

그러면 이스라엘이 망함으로서 이 원칙도 같이 날아가 버렸을까요? 어떤 사람이 코로나 바이러스에 감염이 되었는데, 그만 나이가 많아서 그런지 몰라도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해서 죽었다는 말이죠. 그러면 그 사람이 죽었다고 해서 코로나 바이러스도 같이 죽습니까? 죽지를 않는데, 그것을 전염이라고 한다는 겁니다.

* 어서 오세요 !!

새로 오신 분이 있어서 처음부터 다시 시작을 하도록 하겠는데, 여기 교재 79페이지에 보면 '최후의 전쟁' 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아니 자기가 하나님도 아니면서 왜 함부로 '최후' 라는 표현을 쓰냐는 겁니다. 우리는 최후라는 것이 싫다는 말이죠.

그래서 우리나라의 애국가를 보면 최후가 아니고, "마르고 닳도록 하나님이 보우하사" 라고, 그렇게 되어있다는 겁니다. 그렇지요? 하나님이 아니고 하느님인가요? 아무튼 그렇게 해서 영원토록 가겠다고 한다는 말이죠. 그런데 그런 인간의 연속적인 의지에 대해서 최후가 가로막는다고 하면, 여기에 대해서 기분이 나쁘지 않을 인간은 없다는 겁니다.

* 이스라엘의 최후 !!

어떤 사람이 삿갓을 쓰고 자기 집 앞을 지나가면서 "여기에 최후가 왔구나" 라고 한다면, 그것은 용서가 되지 않느냐는 말이죠. 자기가 뭐라고 그런 말을 함부로 하느냐는 겁니다. 그런데 그 최후가 이스라엘의 최후라고 했는데, 왜냐하면 이스라엘 안에는 하나님이 주입하신 원칙이 있었기 때문에, 그래서 이스라엘은 최후를 맞이하게 된다는 것이죠.

그러면 코로나 바이러스에 걸리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특히 나이가 많은 사람은 죽게 되는 경우가 많은데, 그렇게 죽으면 코로나 바이러스도 같이 죽는 겁니까? 그것이 아니고, 한 사람을 죽이면 옮겨 타게 되는데, 그러면 옮겨 탄 사람을 또 죽이고, 그렇게 전염을 시킨다는 겁니다.

그러면 인간이 죽는다고 하는 것은, 그 사람에게는 그것이 최후인데, 그럴 때는 무엇이 살아서 작동한다는 겁니까? 죽음이라는 것을 통해서 바이러스는 오히려 더 활동적이고 활성화가 된다는 것인데, 그것을 보여주는 증거가 된다는 말이죠. 그렇게 인간들은 죽는데, 그런데 바이러스는 더 생생하게 설친다는 겁니다.

* 이스라엘을 품은 바벨론 !!

제가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고 하니, 이스라엘이 망함으로서 무엇이 더 생생해지는고 하니, 이스라엘 속에 있는 하나님의 원칙은 도리어 더 생생해진다는 겁니다. 그 원칙으로 인해서 이스라엘은 망하게 되는데, 그 망하는 장소가 어디인고 하니, 그게 이스라엘 나라가 아니고 이방 나라라는 말이죠.

그렇게 이방 나라에서 이스라엘이 망하게 되면, 그러면 이스라엘 자체가 코로나 바이러스로 사용이 되어진다는 겁니다. 그렇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병원균을 옮기는 바이러스로 사용을 하시는데, 그러면 이스라엘을 이겼다고 하는 그 나라는 과연 어떻게 될까요?

그렇게 이스라엘을 이겼다고 하는, 즉 이스라엘을 품었은 나라가 바로 바벨론인데, 그런데 바벨론은 이스라엘을 그야말로 잘못 품었다는 말이죠. 그게 그만 바벨론이 망하는 계기가 되고 만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원칙을 본의 아니게 품은 것이 되고 말았다는 것이죠.

* 마르둑 신 !!

그 당시에 바벨론은 마르둑 신을 믿고 있었는데, 이 마르둑 신은 무엇인고 하니까, B.C 3,000년경에 수메르라는 나라가 있었는데, 지금의 이라크인데 말이죠. 티그리스 강과 유프라테스 강 사이, 그것을 '강 사이의 지역' 이라고 해서, 그게 메소포타미아 지역인데, 창세기에 나오는 에덴동산이 그곳에 만들어졌다는 겁니다.

여기에 최초의 왕국이 등장하는데, 그것이 수메르 왕국이라는 말이죠. 그 나라가 섬겼던 신이 마르둑 신인데, 이 신은 여성 신이 아니고 남성 신이라는 겁니다. 물론 자기들이 상상해서 만들어낸 것인데, 그 당시 인간사회를 바탕으로 해서 신을 만들었다는 말이죠.

그러면 인간사회에는 무엇이 있습니까? 남성이 있고 여성이 있는데, 그러면 신을 만들 때 남성 신을 만들고 여성 신을 만드는데, 먼저 여성 신을 만든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여성에게는 계속해서 생식을 해서 없는 것에서 자식을 낳는, 그게 남성에게는 없고 여성에게 있다고 보았다는 말이죠.

그렇다면 신이 신을 낳는다고 하면 필이 여성 신이 되는 것이지, 남성 신이 되면 안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여성 신을 먼저 만들었는데, 그것을 혼돈에서 만들었다는 것이죠. 즉 혼돈에서 여성 신이 나온다는 겁니다. 그렇게 여성 신을 만들어주어야, 여성에게는 임신할 수가 있는 능력이 있으니, 여기에서 남성 신이 나온다는 말이죠.

* 왕의 등장 !!

그러면 그 다음에 이 남성 신이, 그게 자식인데, 그 자식이 무엇을 공격하는고 하니, 여성을 공격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신과 신이 있던 시대에서 무엇이 나오는고 하니, 왕이 나온다는 말이죠. 그렇다면 신 같은 왕이 왜 필요한고 하니, 그런 왕이 있어주어야 왕국의 체면과 권위를 역사적으로 보장받을 수 있다는 겁니다. 즉 "까불지마, 나는 신의 아들이야" 라는 것이죠.

그래서 남성의 아들이 왕이 되는데, 남성은 통치하는 재주가 있고, 그리고 여성은 아이를 낳는 재주가 있다는 겁니다. 그 재주의 기운을 물려받아서 지금의 왕이 되었다는 말이죠. 그러면 백성들을 다스릴 수 있는 정당한 권위가 확보되면서 국가는 질서를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이죠.

다시 말해서, "나를 건드리는 것은 인간을 건드리는 것이 아니고, 신을 건드리는 것이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모든 백성들은 신의 질서에 무조건 굴복하게 되어있다는 말이죠. 그렇게 신에게 굴복하면 각자 개인적인 주장은 스톱이 되는데, 즉 궁지렁 궁지렁은 허용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 왕은 목숨을 바칠 명분을 !!

그렇게 되면 무엇을 바칠 수 있는고 하니, 이게 매우 중요한데, 자기 자신의 목숨을 바친다는 말이죠. 즉 목숨을 바칠 명분을 국가, 혹은 국가의 대리자인 왕이 제공하게 된다는 겁니다. 왕이 줄 수 있는 최고의 것은, 그 사람으로 하여금 목숨을 바칠 수 있는 명분을 제공하는 것인데, 그것이 왕이 백성들에게 줄 수 있는 배려이고 혜택이라는 말이죠.

물론 요즘과 같은 민주주의 사회에서 보면 참으로 이상해 보이는데, "왕에게 목숨을 바치면 그것이 사랑이다" 라고 하면, "이게 어디서 개수작이야" 라고 나온다는 겁니다. "신천지 교주인 이만희를 위해서 목숨을 바친다" 라고 하면, 다른 사람들이 뭐라고 하겠습니까? 대구 스타디움에 모인 10만명을 빼고 말이죠.

그들을 보면 "미쳐도 어떻게 저렇게 미칠 수 있는가?" 라고 하게 되는데, 도대체 인간을 어떻게 조져놓았으면 그런 것으로 인생의 의미를 찾고자 하느냐는 겁니다. 돈을 바치고, 시간을 바치고, 도대체 그게 무슨 짓이냐는 말이죠. 개인을 우상화하는 것이 성경에는 분명히 없는데, 그런데도 그들은 거기에 빠진다는 겁니다. 마치 북한의 김정은에게 북한 인민들이 빠지듯이 말이죠.

* 통일교, 신천지, 그리고 북한 !!

북한은 국가가 아닌 종교단체인데, 신천지보다도 더 체계화가 되어있고 더 살벌하다는 겁니다. 북한은 통일교 이전의 통일교이고 신천지 이전의 신천지라는 것이죠. 그들과 대화가 되지를 않는데, 우리가 여호와증인과 대화가 되지 않듯이 말이죠. 북한과 대화를 시도한다는 것은 그들을 전혀 잘못 파악하고 있는 것인데, 그들은 종교단체라는 겁니다.

그런데 이것이 왜 이상하지 않는고 하니까, 사람들이 이 땅에 사는 이유, 즉 존재의 이유를 어디서 찾는고 하니, 자기에게 무겁게 느껴지는 이 목숨과도 바꿀 수가 있는 것, 즉 자기 목숨보다도 더욱 더 가치가 있는 것을 제공해줄 때, 인간은 비로소 거기에서 안정감을 얻게 된다는 말이죠.

* 자기 목숨을 걸 수 있는 노름판을 찾아서 !!

인간들이 인생을 살아가면서 언제 불안한고 하니, 인간은 각자 자기 목숨이라는 패를 가지고 있는데, 왜 고스톱을 칠 때 패를 가지고 있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 판돈이 50만원이라고 하면, 그것을 가지고 100만원을 벌고 싶다는 겁니다. 그래서 인간은 100만원을 딸 수 있는 노름판을 찾게 된다는 것이죠. 그게 주식이고 비트코인이고 부동산인데, 그리고 자식에게 그런 투자를 할 수도 있다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남편이 돈을 잘 벌인다고 하면, 그러면 아내는 그냥 주부로서 조용하게 살지를 않는데, 남편이 잘 버는 돈을 가지고 투자를 한다는 말이죠. 그런 유명 연예인들의 배우자가 한 둘이 아닌데, 반대로 여자가 잘 벌면 남자가 다 가지고 가서는 사업을 한답시고 왕창 다 말아먹고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가정이 박살나고 한다는 말이죠.

* 모든 것이 단순했던 고대사회 !!

그러니 인간은 밑천을 가지고 투자처를 찾고 있는데, 자기 목숨이란 판돈을 걸만한 노름판을 말이죠. 물론 현대의 경우에는 "부활을 믿습니다" 라고 하는데, 하지만 옛날 사람들에게는 그런 것이 전혀 먹혀들지를 않는데, 그들은 직접적으로 눈으로 보고 싶어한다는 겁니다.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것은 인간의 정신이 발달했을 때 해당하는 것이고, 고대사회처럼 모든 것이 단순화가 된 시대에서는, 즉 구석기 시대는 때려서 만든 타제석기, 그리고 신석기 시대는 갈아서 만든 마제석기가 있었다는 말이죠. 석기시대도 그렇게 구분이 된다는 겁니다.

그냥 우연히 어떻게 하다가보니 그 끝이 뾰족하게 되어서, "우리 이것으로 하자" 라고 하는, 이것은 구석기 시대이고, 그것이 아니고 아주 정교하게 다듬어서, "이것을 칼로 사용할까? 막대기에 달아서 쏘면 물고기를 잡겠다" 라고 하는, 이것은 신석기 시대의 이야기라는 말이죠.

그렇게 시간이 흐르면서 정보가 모아지게 되면, 그 정보가 축적이 되어서 이전보다 더 새로운 기술이 발달하게 된다는 겁니다. 오늘날에서 보면 그 당시는 아주 낙후된 시대인데, 그런 시대에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것은, 즉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라고 하는 것은 다 필요가 없다는 겁니다.

* 왕과의 합일(合一) !!

만약에 영생이 있다고 하면, 그것은 자기 눈에 보이게 바로 앞에 놓아두어야 한다는 말이죠. 그렇게 자기 눈 앞에 보여주면 어떻게 나옵니까? "나에게 불멸의 생명을 준다고 하면, 그러면 나의 목숨을 바치겠다" 라고 하는데, 왜냐하면 자기 목숨을 가지고 있으려고 하니 점점 더 불안해진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들이 하는 이야기가 무엇인고 하니, 아마 이런 이야기는 여러분도 잘 들어보지 못했지 싶은데 말이죠. 고대사회의 질서는 무엇인고 하니, 왕에게 합일(合一)하는 것인데, 즉 왕의 운명에 합쳐진는 것, 그것이 그 당시의 질서를 유지해주었다는 겁니다.

이것을 가지고 수천년 동안을 우려먹은 나라가 있는데, 그게 바로 나일강 유역의 이집트 제국이라는 말이죠. 그래서 여기서 미라가 발달하고 한다는 겁니다. 재산을 많이 바치면 귀족이 될 수가 있는데, 그것이 자식에게 세습이 된다는 말이죠. 왜 귀족이 되려고 하는고 하니, 귀족은 왕의 운명에 접근이 가능해진다는 겁니다.

* 중세의 봉건제도 !!

그게 서양의 중세시대에도 나오는데, 그것을 '봉건제도' 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것이 피라미드 방식에 되어서, 제일 꼭대기의 왕에게 점점 더 접근하게 되면, 그만큼 자기 존재의 이유가 발생하게 된다는 겁니다. 이 체제는 고정된 체제인데, 여기서 자기의 공간만 확보되면, 자식들에게 물려줄 수가 있다는 말이죠.

이게 중세의 역사가 진행이 되면서 새로운 전쟁을 벌이게 되면, 여기에서 새로운 영웅이 된 자에게 직급을 정해주는데, 왕이 제일 높고, 그 다음으로는 공작, 그 다음은 백작, 남작, 자작,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그게 귀족인데, 국가나 왕에게 공헌할 때 작위를 준다는 말이죠.

그것이 자기로 끝나는 게 아니고 세습이 되는데, 그러면 그 사람에게 "당신은 귀족입니다" 라고 말로만 하는 게 아니고, 그것은 관념적이고, 그에게 땅을 준다는 겁니다. 옛날에는 개간이 다 되지 않아서 주인이 없는 땅들이 많았는데, 그것은 국가의 땅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왕에게 잘 보이면, "저기 북쪽의 땅은 니가 알아서 해라. 다만 세금은 나에게 바쳐라" 라고 하는데, 그게 봉건제도라는 말이죠.

그러면 일군들은 어디에 있습니까? 그때는 농노들이 많았다는 겁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글자를 몰랐는데, 그래서 서류를 볼 줄 아는 사람이 최고였다는 말이죠. 어떤 서류가 있다면, 자기들은 글자를 모르니 글자는 아는 사람에게 무조건 물어봐야 한다는 겁니다. 그렇지 않으면 돈이고 재산이고 모두 빼앗기게 된다는 말이죠.

"이게 무슨 뜻입니까? - 이것은 이런 뜻인데, 내가 시키는 대로 하지 않으면 벌금을 내야하고, 죽을 수도 있습니다. - 그렇습니까? 시키는 대로 하겠습니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문자를 모르니 당연히 그 내용도 모른다는 겁니다. 구텐베르크의 인쇄술이 만들어지기 이전까지는 문자가 보편화가 되지 않았기에, 누군가가 지시를 해주어야 했다는 말이죠.

* 안정감을 주지 못하는 민주주의 !!

그 당시에 땅을 가진 자들이 두 부류가 있었는데, 하나는 성직자고 다른 하나는 귀족이었다는 겁니다. 그 밑에는 전쟁을 하는 기사계급이 있었다는 말이죠. 이것이 남의 나라 이야기가 아닌데, 우리나라의 고려시대나 조선시대도 역시 그러했다는 겁니다.

이런 토대 위에서 오늘날의 민주주의 생겨났는데, 이 민주주의 문제점이 무엇인고 하니, 자기 목숨을 바칠 명분에 대해서 인간은 거부한다는 말이죠. 민주주의가 인간의 행복을 추구한다고 하는데, 하지만 아무리 그렇게 해도 자기 목숨을 바칠 곳이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항상 불안해서 벌벌 떨고 있는데, 안정감을 누릴 수가 없다는 것이죠.

* 극단적인 자기 위주의 삶, 동성애 !!

그 대표적인 것이 동성애의 문제인데, 이것이 병이 아니고 일종의 취미고 취향이라는 겁니다. 남자와 여자가 관계를 맺으니 식상해서 그 대상을 바꾸어보자는 말이죠. 이것이 로마시대에는 아주 유행을 했는데, 물론 그 이전부터 있었다는 겁니다. "내가 나의 취향대로 살아가겠다고 하는데 왜 난리야?" 라는 것인데, 그래서 이 동성애는 극단적인 자기 위주의 삶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는 말이죠.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고 하니, 자기 목숨을 맡기고 살아가는 삶이 그만 민주주의 사회가 되면서, 그 모든 것이 다 사라지고 말았다는 겁니다. 러시아의 푸틴이 우크라이나와 전쟁을 한다고 동원령을 내렸는데, 그러자 20만명 이상이 폴란드를 비롯한 주위 나라로 모두가 도망을 치고 말았다는 것이죠.

하지만 이것은 옛날에는 있을 수가 없는데, 그 당시에는 감격해서 눈물을 흘리면서 "제가 가겠습니다" 라고 했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전쟁을 하다가 죽으면, 그것은 왕과 합일할 수 있는 지름길이었다는 말이죠. 국가가 자기를 부른다는 것인데, 그래서 1차 대전 때 미국에서 군인을 모집하는 포스터를 보면, 커다란 모자를 쓰고 엄지 척을 하는 장면이 있었다는 겁니다.

지금도 이슬람의 경우에는, "전쟁을 하다가 죽으면 남들보다 더 빨리 천국에 갈 수가 있습니다" 라는 것을 홍보하는데, 하지만 민주주의 국가에서 보면 "저놈들이 미쳤나?" 라고 할 수밖에 없다는 말이죠. 그것을 네 글자로 '총알받이' 라고 하는데, 왜 그런 짓을 하느냐는 겁니다.

* 희박해진 국가개념 !!

요즘 민주주의 사회에서 국가개념은 희박한데, 왜냐하면 국가가 자기 일터를 제공해주는 것이 아니고, 자기의 일터는 전 세계를 살펴봐서 자기가 알아서 찾아가야 한다는 말이죠. 그래서 인도네시아에서 한국에 오고, 그리고 한국에서 미국으로 가고 한다는 겁니다.

지금 월드컵이 열리는 카타르에 경기장과 그 인프라를 건설하기 위래서, 아프리카 등지에서 그곳으로 일하러 가서 노동자가 무려 3,000명이나 죽었다고 하는데 말이죠. 낮 기온이 무료 50도가 넘는 곳에서 하루 종일 노동을 하면 그런 일이 발생하게 된다는 겁니다.

하지만 그렇게 죽어도 그것이 자기의 세계인데, 국가가 자기에게 필요한 돈을 제공해주지 않는다는 말이죠.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자기가 노동해서 먹고 살아야 하는데, 즉 자기 가족은 자기가 책임져야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자기가 살던 나라에서 전쟁이 터지면 보트를 타고 난민이 되어서 다른 나라로 도망을 쳐야한다는 말이죠.

* 민주주의는, 결국 '짐승의 확대' !!

이게 성경과 상관이 없어보지만, 전혀 그게 아니라는 겁니다. 오늘 본문과 확실하게 연결이 되는데, 이러한 민주주의에 대해서, 이게 결국은 짐승의 확산이고 확대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는 말이죠. 이게 무슨 말인고 하니, 고대사회에서는 나라를 짐승으로 보았는데, 그래서 "그 짐승의 힘에서 개인이 벗어날 수 있는가? 없는가?" 라는 것을 묻고 있다는 겁니다. 물론 벗어날 수 없다는 말이죠.

오늘 강의의 주제가 '다니엘이 본 최후의 전쟁' 인데, 이 전쟁은 이쪽 짐승과 저쪽 짐승의 싸움이라는 겁니다. 그러면 개인의 가치와 품위와 같은 것은 없는데, 즉 개인은 없다는 말이죠. 여기에 대해서 "요즘과 같은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개인의 가치가 있지 않습니까?" 라고 할 수 있는데, 하지만 그것은 이 세상을 잘못 읽고 있다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우리가 소독약을 분무기로 뿌릴 때, 그러면 그 소독약을 하나 둘, 그렇게 떼어낼 수가 있습니까? 없다는 말이죠. 왜냐하면 기체이기 때문에 그게 안 된다는 겁니다. 이렇게 짐승의 기운은 고체도 액체도 아니고, 그야말로 기체처럼 스며든다는 말이죠.

민주주의 사회는 짐승의 사회인데, 옛날 같으면 떼어내면 된다는 겁니다. 왕이 눈에 보이니 말이죠. 하지만 지금은 왕이 없는데, 그래서 각자가 왕이라는 겁니다. 그것을 우리가 자식을 키워보면 아는데, 옛날에는 가정이라는 것에 복종을 했는데, 그 가정의 명분과 체면과 위신을 자식들이 대대로 지켜주어야 했다는 말이죠. 그 집안의 명예는 처가식구들도 다 동원해서 지켜주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요즘의 결혼식은 부모에게도 자식이 통보를 하는데, "아빠 엄마는 언제까지 여기로 오시면 됩니다" 라고 말이죠. 물론 주례사도 없는데, 어른이라고 하면서 자기 인생에 관여하지 말라는 겁니다. 그래서 일방적으로 통보를 한다는 말이죠. 집안이라는 것은 없는데, 자기들끼리 사랑하면 그것으로 끝이라는 겁니다. 이게 짐승의 새로운 통치방식인데, 눈에 보이지 않는데 이미 점령을 당했다는 말이죠.

* 내 인생을 간섭하지 마세요 !!

다시 말씀을 드리겠는데, 민주주의 사회의 문제점은 무엇인고 하니, 자기 목숨을 장렬하게 바칠 것이 다 날아가 버렸다는 것인데, 국가도 간섭하지 말라는 겁니다. 자기가 남자와 연애를 하든 여자와 연애를 하든 간섭하지 말라는 것이죠.

자기 인생은 자기가 알아서 살아가겠다는 것인데, 그러니 집안의 뼈대가 어떻고 하는 이야기는 일절 하지 말라는 겁니다. 그러니 자기가 살아가는 이유는 없는데, 그냥 즐긴다는 말이죠. 자기의 취미를 다양하게 즐기겠다는 겁니다. 돈이 좀 모이면 해외여행을 하고 말이죠.

아는 것은 오직 그것뿐인데, 이것 이외에 다른 것은 전혀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요즘 젊은 아이들은 교회에도 가지 않는데, 목사의 잠이 마구 쏟아지는 설교를 왜 듣고 앉아있느냐는 말이죠. 엄마와 아빠는 믿을지 몰라도, 자기는 믿지 않겠다는 겁니다.

그러면 엄마는 "저놈이 주일학교 때는 참 착실했는데, 고등학교에 들어가면서 완전히 자기 마음대로 하네. 내가 수능을 칠 때까지만 좀 쉬라고 했는데, 완전히 쉬네" 라고 한다는 말이죠. 하지만 교회에 빠지는 맛을 들이게 되면, 거기서 빠져나오지 못한다는 겁니다. 기체와도 같은 악마가 운영하는 것에 맛을 들였다는 것이죠. 물론 교회에 다니는 것도 악마의 맛이지만 말이죠.

그래서 무엇이 힘든고 하니, 지옥에서 떨어지지를 않는다는 겁니다. 그런 자기 위주의 세계를 성경에서는 지옥이라고 하는데, 얼마나 아프고 고통스러운지가 문제가 아니고 말이죠. 자기가 주인이 되는, 자기가 최고가 되는데, 선악과를 따먹고 난 뒤에 자기가 신이 되는, 자기가 절대자로 행세하는 세계를 두고 지옥이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게 마태복음 22장에 나오는데, 1절에서 14절입니다.

(마 22:1) 예수께서 다시 비유로 대답하여 이르시되
(마 22:2) 천국은 마치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과 같으니
(마 22:3) 그 종들을 보내어 그 청한 사람들을 혼인 잔치에 오라 하였더니 오기를 싫어하거늘
(마 22:4) 다시 다른 종들을 보내며 이르되 청한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내가 오찬을 준비하되 나의 소와 살진 짐승을 잡고 모든 것을 갖추었으니 혼인 잔치에 오소서 하라 하였더니
(마 22:5) 그들이 돌아 보지도 않고 한 사람은 자기 밭으로, 한 사람은 자기 사업하러 가고
(마 22:6) 그 남은 자들은 종들을 잡아 모욕하고 죽이니
(마 22:7) 임금이 노하여 군대를 보내어 그 살인한 자들을 진멸하고 그 동네를 불사르고
(마 22:8) 이에 종들에게 이르되 혼인 잔치는 준비되었으나 청한 사람들은 합당하지 아니하니
(마 22:9) 네거리 길에 가서 사람을 만나는 대로 혼인 잔치에 청하여 오라 한대
(마 22:10) 종들이 길에 나가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만나는 대로 모두 데려오니 혼인 잔치에 손님들이 가득한지라
(마 22:11) 임금이 손님들을 보러 들어올새 거기서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을 보고
(마 22:12) 이르되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느냐 하니 그가 아무 말도 못하거늘
(마 22:13) 임금이 사환들에게 말하되 그 손발을 묶어 바깥 어두운 데에 내던지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 하니라
(마 22:14)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

* 먼저 지옥은 이러 이러하다 !!

이게 혼인잔치 비유인데, 그런데 그 내용이 이상하다는 말이죠. 예수님께서 "천국은 이와 같다" 라고 하시면서, 그런데 천국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즉 "천국에는 푸른 잔디가 있고, 멋진 분수가 있다" 라고 하시는 것이 아니고, 먼저 지옥을 언급하시면서 천국과의 차별화를 말씀하신다는 것이죠.

이 세상에서 지옥을 말하지 않으면 천국이 설명되지가 않는다는 것인데, 그러니 천국을 알고 싶다고 하면 지옥부터 먼저 알고 오라는 겁니다. 그러면 지옥 이야기가 어디에 나오는고 하니, 그것이 6절과 7절인데, 즉 "그 남은 자들은 종들을 잡아 모욕하고 죽이니, 임금이 노하여 군대를 보내어 그 살인한 자들을 진멸하고 그 동네를 불사르고" 라고 한다는 말이죠.

* 무조건 무조건 !!

임금이 군사를 보내서 아주 작살을 내버리는데, 왜 그렇게 하십니까? "내가 주최한 결혼식에 너희가 무엇인데 참석하지 않아?"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이것은 일종의 횡포인데, 그러니 오늘날의 민주주의식 사고를 가지고 있는 자들에게는 이런 것이 너무 어렵다는 말이죠.

아무리 임금님이라고 해도, "혹시 12월 12일에 시간이 좀 됩니까? 내 아들이 결혼을 하는데, 참석을 좀 해주세요"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시간이 허락되면 참석을 한다는 말이죠. 이게 임금과 신하의 일대일의 동등한 관계라는 겁니다. 그런데 임금이 일방적으로 통보를 해서, "무조건 시간을 빼라" 라고 한다면, 그야말로 무조건이라는 말이죠. 그렇게 해서 참석하지 않으면 지옥이라는 것이죠.

* 지옥은, 천국의 테두리 바깥 !!

그렇게 임금님이 초청을 하는데, 한 사람은 밭에 일하러 간다고 오지 않고, 또 다른 사람은 사업상의 비즈니스로 인해서 오지 않는다는 겁니다. 이것이 개인적으로 정당한 이유가 되는데, 하지만 그것이 곧 지옥이라는 말이죠. 즉 천국의 테두리 바깥이 지옥이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게 무슨 말인고 하니, "나는 바빠서 안 됩니다" 라고 하면서, '나' 라는 의미를 들먹이게 되면 무조건 지옥이라는 말이죠. 즉 "아니, 네 생각을 왜 하지?" 라는 것인데, 천국은 임금님의 생각이 일방적으로 퍼져야하는 한다는 겁니다. 그게 천국이라는 말이죠.

* 무가치한 아무나 !!

그런데 이것보다도 더 큰 횡포는 10절에 나오는데, "종들이 길에 나가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만나는 대로 모두 데려오니" 라고 한다는 겁니다. 즉 '아무나' 라는 것인데, 그게 천국이라는 말이죠. 이 '아무나'를 조금 더 풀어보면, '무가치한 아무나' 라는 겁니다. 전혀 바쁘지 않은 자들이라는 것이죠.

그래서 아무나 왔는데, 그런데 그들 중에서 예복을 입지 않은 자가 있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임금이 어떻게 나옵니까? 신하를 시켜서 "그 손발을 묶어 바깥 어두운 데에 내던지라" 라고 한다는 말이죠. 바깥 어두움인데, 즉 지옥이라는 겁니다. 천국이 오지 않으면 지옥인 줄을 모르는데, 예수님이 오셔서 "이 세상은 지옥이다" 라고 통보해줄 때, 비로소 확인이 된다는 말이죠.

그러면 우리는 "아하, 내가 지옥에 익숙해져서 살아가고 있구나" 라고 하게 되는데, 즉 주님이 오셔서 "여기는 지옥이야" 라고 하사면서 빼내주셔야 한다는 겁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여기서 지옥인 줄 전혀 감도 잡지 못하면서, 전혀 이상이 없는 일상을 보내게 된다는 겁니다.

* 청함과 택함 !!

그리고 14절에 보면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 라고 하는데, 참 어렵다는 말이죠. 청함과 택함을 구분하고 있다는 겁니다. 청함, 즉 초청은 그때부터 시작되는 것이고, 택함은 초청의의 그 이전부터 이미 하나님께서 찍었다는 것이죠. "너는 내 백성이야" 라고 말이죠.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제가 주님의 백성입니까?" 라고 하는데, 그러면 주님은 "너에게서 떠나는 저들을 봐라. 저들은 청함은 받았지만 택함을 받은 것은 아니야" 라고 하신다는 겁니다. 택했기 때문에, 즉 청함을 받은 자들과 택함을 받은 자들을 구분한다는 것이죠.

* Why Me?

청함은 자기들이 알아서 온 자들이지만, 그런데 택함은 "왜 저를 부르십니까? Why Me?"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자기는 아무 것도 아닌데, 그야말로 백수이고 건달인데, 자기밖에 모르는 인간이라는 말이죠. 그런데 왜 그런 자기를 불렀느냐는 겁니다.

자기를 주장하는 사람을 잘라내고, 청함을 잘라내고, 그리고 자기도 당연히 잘려야 하는데, 그런데 잘리지 않은 것은 오직 택함만이 그 사람에게 남게 하기 위함이라는 말이죠. 그것이 바로 강의초반에 이야기한, 즉 선택한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원칙이라는 겁니다.

그리고 그런 원칙을 뽑아내는 방식이 곧 주님의 구원방식이라는 말이죠. 우리 인간의 행함이 아니고, 주님이 넣어준 원칙을 다시 찾겠다는 것인데, 그렇게 하나님이 집어넣은 것을 하나님이 되찾는 방식, 그게 바로 마르둑 신이 아닌 여호와 신이라는 겁니다.

* 마르둑 신과 여호와 신 !!

그렇다면 여기서 마르둑 신과 여호와 신의 차이점을 살펴보면, 마르둑 신은 현재 인간의 왕국질서의 합리화라는 말이죠. 이 마르둑 신은 남성 신인데, 이 남성 신이 주로 하는 일은 강력하게 통치를 하는 것인데, 즉 질서를 잡는다는 겁니다. 반면에 여성 신은 자식을 낳는 것인데, 즉 없는 것을 생산한다는 말이죠.

고대인들은 이 자연세계가 없는 것에서 생겼다는 것을 인정하는데, 그러면 자기가 만든 것이 아니니 신이 만들었다는 것인데, 그 신은 남성이 아닌 여성 신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여성 신은 원초적이고 본래적이라는 말이죠. 그리고 이런 자연질서를 그대로 받으면 안 되는데, 질서가 혼돈에 빠진다는 겁니다. 그래서 질서를 잡아주는 남성 신이 필요하다는 것이죠.

그렇다면 그것을 왜 인간이 아닌 신이 합니까? 고대인들이 보니, 해가 뜨고 지고, 그리고 달이 뜨고 지고 하는 것이 너무나 규칙적이라는 겁니다. 그렇게 질서가 있는데, 그것을 인간들이 회의를 통해서 만든 것이 아니라는 말이죠. 해와 달이 인간의 말을 듣는 것이 아닌데, 그래서 인간이 해와 달에게 적응을 해야한다는 겁니다. 그것을 해 신과 달 신, 그렇게 바꾼다는 말이죠.

* 일자(一者) 신 !!

그렇게 해 신과 달 신으로 구분이 되어있으니, 그것을 통합하고 질서를 잡아주는 신은 여성 신이 아니고 남성 신인데, 그게 마르둑 신이고, 그것이 그리스 로마로 오면 제우스 신이 된다는 겁니다. 또한 그게 그리스 신에서 로마 신으로 바뀐다는 말이죠. 로마신화에서는 유피테르인데, 영어로는 쥬피터라고 한다는 겁니다.

이 제우스를 일자(一者) 신이라고 할 수 있는데, 하나밖에 없는 하나의 신, 즉 유일신이라는 말이죠. 다신(多神)에서 하나의 신으로 바뀐다는 겁니다. 이게 종교의 발달인데, 기원전 500년경부터 시작이 된다는 것이죠. 인도도 마찬가지인데, 그게 일자(一者) 신이라는 말이죠.

* 모든 인간은 신이 될 수가 있다 !!

물론 불교도 그러한데, 부처라는 화신(化身)이 된, 이것을 '삼신불(三身佛)사상' 이라고 하는데, 그게 "법신, 보신, 응신(화신)" 이라는 겁니다. 부처라고 하는 육신에서 그게 관념으로 바뀌게 되면, 그래서 불교에서는 부처를 만나면 그 부처를 믿지 말라고 했다는 말이죠.

여기서 화신이라는 것은 신이 인간이 되었다는 것인데, 그게 곧 부처라는 겁니다. 그러한 부처를 모든 인간에게 보편적으로 적용을 시키게 되면, 이게 법신이 된다는 말이죠. 즉 "모든 인간 속에는 부처의 법칙이 들어있다" 라는 것인데, 그러면 모든 인간은 신이 될 수가 있다는 겁니다. 그것을 미륵이라고 하고, 또는 보살이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래서 저기 팔공산의 갓바위에 갈 때는 사람들이 회색 유니폼으로 다들 갈아입는데, 그게 보살이라는 겁니다. 교회에서의 집사와도 같다는 말이죠. 이 보살들이 버스를 타고 얼마나 떠들어대는지 모르는데, 그래서 목사인 제가 조용히 시키곤 한다는 겁니다(ㅋㅋ).

모든 인간은 자기 목숨을 바칠 곳을 찾는데, 그게 부처가 되던 알라가 되던 말이죠. 왜냐하면 그렇게 하면 자기가 정서적으로 안정이 된다는 겁니다. 그런 정서적 안정이 이루지지 않으니, 매일 같이 술을 마시고 골프를 치고 일요일만 되면 다리가 부러지도록 등산을 한다는 말이죠.

* 외로워 외로워 못살겠어요 !!

하지만 그런 것도 어떻게 됩니까? 그만 식상해지고 마는데, 그래서 나중에는 자연인 생활을 한다고 하면서, 산 속에다가 맨션을 지어서 산다는 겁니다. 하지만 그것도 나중에는 마음이 바뀌게 되는데, 그러면 맨션을 팔지도 못하고 그만 돈만 날리고 만다는 것이죠.

자기가 자기 자신을 감당하지 못하는데, 특히 퇴직을 하고 나면 외로워서 어쩔 줄을 모른다는 말이죠. 지금의 이 인생을 자기 인생이라고 여기고, 그 자기 인생을 자기가 도저히 어떻게 감당할 수가 없다는 겁니다. 퇴직을 했으니 시간은 남아돌고 말이죠. 그것은 자기 목숨을 바칠 만한 곳을 찾지 못해서 그렇다는 것이죠.

오늘 강의내용이 상당히 어려운데, 어려울 때는 결론부터 먼저 하는 게 좋은데 말이죠. 먼저 요한복음 11장을 보겠는데, 이것을 하고 다니엘서로 돌아오겠는데, 요한복음 11장 17절에서 44절입니다.

(요 11:17) 예수께서 와서 보시니 나사로가 무덤에 있은 지 이미 나흘이라
(요 11:18) 베다니는 예루살렘에서 가깝기가 한 오 리쯤 되매 …
(요 11:38) 이에 예수께서 다시 속으로 비통히 여기시며 무덤에 가시니 무덤이 굴이라 돌로 막았거늘
(요 11:39) 예수께서 이르시되 돌을 옮겨 놓으라 하시니 그 죽은 자의 누이 마르다가 이르되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
(요 11:43) 이 말씀을 하시고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시니
(요 11:44) 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 나오는데 그 얼굴은 수건에 싸였더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 하시니라

* 나사로를 지옥에서 떼어내시는 예수님 !!

여기 나사로는 예수님의 비유에 나오는 거지 나사로가 아닌 이 땅에 살았던 나사로인데, 그가 죽었다는 겁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무덤에 가서 돌을 옮겨놓으라고 하시는데, 그러자 누이 동생인 마르다가 뻔한 이야기를 한다는 것이죠. 오빠가 이미 죽어서 냄새까지 난다고 말이죠.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뭐라고 하십니까? 43절과 44절에 보면,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시니, 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 나오는데" 라고 되어있다는 겁니다. 이 말씀을 우리가 오늘 강의의 결론으로 삼을 수 있는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지옥에서 떼어내어 주어야 한다는 말이죠.

우리 인간은 스스로 지옥에서 떨어질 수가 없는데, 이 지옥이 기체처럼 우리 몸에 스며들어와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자기 목숨을 던질만한 곳을 찾을 수가 없는데, 마귀는 철저하게 "네 목숨이 중요해" 라고 한다는 말이죠. 하나님보다 우리의 목숨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죠.

지금 나사로는 무덤 안에 있는데, 즉 죽음 안에 있다는 겁니다. 나사로가 살아있을 때 예수님을 만나는 것은, 그것은 예수님에 대한 오해라는 말이죠. 진짜 예수님은 나사로가 죽었을 때, 즉 지옥에 있을 때 직접 찾아가서 때어내는 것, 그게 제대로 된 만남이라는 겁니다.

그 누구도 그 돌문을 열고 들어가지 않는데, 왜냐하면 이미 죽어서 냄새까지 난다는 말이죠. 그런데 예수님의 음성이 무덤을 향하고 있는데, 여기에서 주님의 시선처리를 보자는 겁니다. 지금 예수님은 나사로를 바라보고 있는데, 그런데 그 나사로는 산 나사로가 아닌 죽은 나사로라는 말이죠. 즉 죽은 나사로에게 주님의 말씀을 효과를 발휘하신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주님이 우리를 볼 때는, 우리가 무덤 속에 있다고 간주하시고 말씀을 하신다는 말이죠. 그런데 우리는 교회에 앉아서 성경말씀을 보면서 "주님, 저는 살았어요" 라고 하는데, 즉 자기가 살았다고 우기면서 말씀을 대한다는 겁니다. 주님은 그런 방식으로 우리를 떼어내지 않는데, 우리가 말씀을 보던 기도를 하던 헌금을 하던, 우리는 이 죽음의 테두리에서 빠져나올 수가 없다는 말이죠.

* 아픈 나사로는 만나지 않는 예수님 !!

예수님이 부활이고 생명이라는 것을 마리아와 마르다도 알고 있는데, 그런데 막상 예수님이 오시니 멱살을 잡으려고 한다는 겁니다. "예수님을 그렇게 섬겼는데, 오빠도 죽어버리고 도대체 이게 무슨 꼴입니까? 아플 때 오시라고 그렇게 미리 연락을 드리고 했는데, 이게 뭡니까?" 라고 나온다는 말이죠.

예수님은 나사로가 아플 때 연락을 받고도 가지를 않았는데, 주님은 아픈 나사로는 만나지 않는다는 겁니다. 죽어가는 나사로는 아니라는 것이죠. 왜냐하면 그렇게 해서 나사로가 살아나게 되면, 그러면 살아있는 인간이 예수님을 찾고 부르는 것, 그것을 자기의 능력이고 자기 믿음이라고 오해를 하게 된다는 겁니다.

하지만 믿음은 주님이 일방적으로 맺어주시는 관계인데, 자기가 알아서 주님을 찾아가는 것이 믿음이 아니라는 말이죠. 주님이 쏘아주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자기가 쏘게 되면, 그것은 자기 결단이고 오기라는 말이죠. 믿음이 아닌데, 그러니 "믿으실 분은 손들고 앞으로 나오세요" 라고 하는 것이 연출이고 사기라는 말이죠.

* 우리는 이미 돌로 된 무덤 속에 !!

여러분도 그런 사기에 다들 속아넘어갔지요? "저에게 믿을 만한 이야기를 해주시면 저는 믿겠습니다" 라고 하는데, 그런 것은 전혀 소용이 없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도저히 어떻게 할 수 없는 상태인데, 그렇게 돌로 된 무덤 속에 우리는 이미 갇혀있다는 말이죠.

죽음의 세계는 곧 지옥인데, 거기에서 아무리 몸부림을 쳐도 빠져나올 수가 없는데, 그런 상태에 놓여있는 자기 자신을 발견해야 한다는 겁니다. "아하, 내가 이 정도이구나. 구원이고 천국이고, 그런 것을 논할 잽이 되지 못하는구나" 라는 것인데, 우리가 그런 입장에 놓여있음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죠.

그러니 예수님이 먼저 문을 열라고 말씀해주셔야 하는데, 다른 사람은 여기에 들어올 수가 없다는 겁니다. 부부라도 안 되는데, 부부는 꿈을 꿔도 다른 꿈이라는 말이죠. 아무리 부부사이라도 감히 자기 세계에 함부로 들어올 수가 없다는 겁니다. 60년을 같이 살아도 잔소리를 하게 되면, "가시나, 머시마" 라는 소리가 마구 나온다는 것이죠(ㅋㅋ).

같이 살아준 것만 해도 얼마나 고마운지 모르는데, 그런데 잔소리가 길어지면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싸워도 자기와 싸워야 하는데, 왜 마누라와 싸우려고 하느냐는 겁니다. 그러니 아무리 자기를 부인한다고 해도, 너무나 펄펄 살아있다는 말이죠. 자기는 하늘같은 남자라는 것인데, 아무리 밥을 해주어도 소용이 없다는 겁니다. 그런 성질은 죽을 때까지 사라지지를 않는다는 말이죠.

그러니 결론은 문도 주님이 열어주어야 한다는 것인데, 그게 택함이라는 겁니다. 그리고 "나사로야!" 라고 이름을 부르는 것도, 그 나사로라는 이름도 주의 이름에 속한 이름으로 불러야 한다는 말이죠. 나사로라는 개인적인 이름이 자기를 증거하기 위한 이름이라고 하면, 주님이 불러주시는 나사로라는 이름은 예수님을 증거하기 위한 이름이 된다는 겁니다.

* 이제 같이 떠나자 !!

나사로의 의미는 "하나님을 믿는다" 라는 것인데, 그런데 그 믿음을 나사로는 자기가 믿는 믿음으로 오해를 하고 있었다는 말이죠. 그런데 무덤 속에 들어가 있는 상태에서 주님이 불러주실 때, 그때의 믿음, 부활, 생명, 그 단어 하나 하나가 평소에 자기가 알던 내용이 아니었다는 겁니다. 주님이 집어 넣어준 단어인데, 직접 찾아오셔서 말이죠.

그래서 주님께서는 우리가 하지 못한 것을 다 이루어놓으시고, "그동안 지옥에서 수고를 많이 했다. 이제 그만 가자. 같이 떠나자" 라고 하신다는 겁니다. 예수님과 같이 있으면 지옥에서 빠져나올 수가 있지만, 자기 혼자서는 아무리 몸부림을 쳐도 도저히 안 된다는 말이죠.

그래서 시편 23편에서 무엇이라고 합니까?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라고 하는데,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주님이 손을 잡아주시면 다닐 수 있다는 겁니다. 그것이 신앙생활인데, 즉 '함께' 라는 말이죠. 주님께서는 우리가 계속해서 신앙생활을 하도록 그 상황들을 만들어 가신다는 것이죠.

(시 23:1) [다윗의 시]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시 23:2)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도다
(시 23:3)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시 23:4)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 십자가는 걸림돌 !!

그게 결론인데, 그런데 이스라엘은 그것이 안 되었다는 겁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을 가지고, 자기들이 지키려고 했다는 말이죠. 자기들의 성과, 즉 행함으로 구원을 받겠다고 나왔다는 겁니다. 그것이 로마서 9장에 나오는데, 유대인들은 자기 행함으로 인해서 십자가 앞에서 그만 자빠진다는 말이죠.

(롬 9:31) 의의 법을 따라간 이스라엘은 율법에 이르지 못하였으니
(롬 9:32) 어찌 그러하냐 이는 그들이 믿음을 의지하지 않고 행위를 의지함이라 부딪칠 돌에 부딪쳤느니라
(롬 9:33) 기록된 바 보라 내가 걸림돌과 거치는 바위를 시온에 두노니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함과 같으니라

교회에서 십자가를 이야기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십자가를 이야기하면 교인들이 뭐라고 합니까? "그러면 헌금을 하지 않아도 되겠네요" 라고 나온다는 겁니다. 중요한 것은 돈이라는 말이죠. 그러면서 "예배에 참석하지 않아도 되겠네요. 봉사를 하지 않아도 되겠네요" 라고 한다는 겁니다.

여기에 대해서 목사가 반박을 할 수 없는데, 왜냐하면 그렇게 되면 교회의 모든 시스템이 그만 무너지고 만다는 것이죠. 그래서 십자가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고, "십자가로 구원을 받았지요? 그 혜택을 입었지요? 그러면 당연히 그 값을 해야지요" 라고 한다는 겁니다.

* 신천지와 한국교회는 공범 !!

계속해서 말하기를, "그렇게 교회가 돌아가야, 그래야 자식들도 혜택을 받아서 교회에 잘 다닐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 돈을 엉뚱한 곳에 쓰지 말고 교회에 바칠 정당한 이유가 있습니다. 여러분의 생명은 귀한 것인데, 그러니 그 생명과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것을 바꾸시기 바랍니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눈에 보이는 교회와 돈을 교환하자는 것인데, 그래서 신천지 모임에 무려 10만명이 모인다는 말이죠. 그것은 신천지나 이만희를 위함이 아니고, 바로 자기 자신을 위함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자기 자신의 행함으로서 구원을 받겠다고 하는 악마적 심보를 이만희가 철저히 이용했다는 것이죠.

그러면 그런 짓을 이만희만 했습니까? 오늘날 교회의 목사들도 똑같다는 겁니다. 그러니 누가 누구를 욕할 수가 있습니까? 수법이 완전히 동일하다는 말이죠. 그리고 이런 이스라엘의 망함이 오늘날에도 계속해서 반복이 된다고 할 수 있다는 겁니다.

여기에서 신명기를 보도록 하겠는데, 조금 어려울 수도 있지만 이제는 감을 잡았으니, 진도를 나가면 이해가 되어지지 싶은데 말이죠. 먼저 신명기 9장 5절을 보겠습니다.

(신 9:5) 네가 가서 그 땅을 차지함은 네 공의로 말미암음도 아니며 네 마음이 정직함으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이 민족들이 악함으로 말미암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심이라 여호와께서 이같이 하심은 네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하신 맹세를 이루려 하심이니라

* 이스라엘이 땅을 차지하는 이유는?

여기에 보면 "네가 가서 그 땅을 차지함은, 네 공의로 말미암음도 아니며, 네 마음이 정직함으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라고 하는데, 그러면 왜 그들이 땅을 차지하게 되는 겁니까? 그들은 전혀 공의롭지도 않고 정직하지도 않았다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믿음이 없었다는 것인데, 그런데 왜 땅을 차지하게 되는지, 그 이유가 무엇이냐는 말이죠.

그것이 그 뒤에 나오는데, 즉 "여호와께서 이같이 하심은, 네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하신 맹세를 이루려 하심이니라" 라고 하는데, 여기에 나오는 이 맹세를 아까 원칙이라고 했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너희 이스라엘은 정직하지도 않고 착하지도 않다" 라고 하시는데, 그게 하나님이 주신 원칙 속에 포함이 되어있다는 말이죠.

마찬가지로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찾아가신 것은, 결코 나사로가 믿음이 좋아서 찾아가신 게 아니라는 겁니다. 그러면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이 세상이 지옥임을 보여주기 위함이라는 말이죠. 그래서 일방적으로 나사로를 지옥에서 떼어내셨다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인데, 그러니 거기서 "나는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 내 것은 어떻게 됩니까?" 라고 하지 말라는 겁니다. 주님이 일방적으로 사용하신 것인데, 그러니 자기 것을 따로 챙길 이유가 전혀 없다는 것이죠. 물론 그럴 자격도 되지 않고 말이죠.

그 다음에는 신명기 29장 25절과 26절을 보겠습니다.

(신 29:25) 그 때에 사람들이 대답하기를 그 무리가 자기 조상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의 조상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실 때에 더불어 세우신 언약을 버리고
(신 29:26) 가서 자기들이 알지도 못하고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주시지도 아니한 다른 신들을 따라가서 그들을 섬기고 절한 까닭이라

* 너희들은 망했다 !!

여기에 나오는 이 신명기 29장은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전에 미리 예언을 한 것인데, 그 주된 내용은 "이스라엘이 하나님께서 주신 언약을 버리고, 그만 다른 신들을 섬겨서 망했다" 라는 겁니다. 그렇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운명을 모세에게 미리 알려주셨다는 말이죠.

그들이 특별히 무슨 나쁜 짓을 해서 벌을 받는 것이 아니고, 필히 하나님의 언약을 위반하는 민족으로서, 그 결과로 인해서 남의 나라 속으로 흩어져서 멸망을 당하게 되어있다는 겁니다. 그러면 이스라엘은 이 예언대로 됩니까? 안 됩니까? 반드시 예언대로 된다는 말이죠.

* 나사로는 죽어야 !!

나사로의 누이동생인 마르다의 경우에는, 그렇게 자기와 자기 식구들이 예수님을 잘 섬기면, 그러한 자기들의 섬김, 즉 그런 착함으로 인해서 자기 가정이 무슨 일이 생기면, 몸이 아프든지 하면 예수님께서 낫게 해줄 것이라고 여겼는데, 하지만 예수님은 냉철하게 자기 집안의 기둥인 나사로가 죽게 되었는데도 오시지를 않았다는 겁니다.

왜 그럿습니까? 그것은 나사로는 죽어야 한다는 말이죠. 그래서 실제로 나사로는 죽었는데, 그러면 그 뒤에 예수님이 곧 바로 오셨습니까? 그게 아닌데, 나흘이나 지난 다음에 오셨다는 겁니다. 하루, 이틀, 사흘, 그렇게 예수님은 인간이 가지고 있던 모든 희망이 다 바닥에 날 때까지 기다렸다는 말이죠.

"이제 모든 것이 다 끝났어. 예수님이 우리를 완전히 버렸어" 라고 할, 바로 그때 예수님께서 비로소 움직이신다는 겁니다. 그러니 나사로가 죽은 것만 죽음이 아니라, 그런 생각조차도 일체 다 사라지는, 즉 그동안 예수님을 믿었던 믿음이고 잘 해주었던 봉사고 간에, 그런 것들이 모조리 다 바닥을 칠 때, 그때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제 가자" 라고 하신다는 말이죠.

그렇게 해서 나사로에게로 가니, 예상한 대로 예수님에게 달려들고 그야말로 난리가 났다는 겁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일방적으로 아픈 나사로가 아닌 죽은 나사로를 나흘만에 살려내신다는 것은, 그렇게 살려내면 나중에 나사로가 살아나서 과연 누구를 자랑을 하겠느냐는 말이죠.

나사로가 살아나서, "나는 나흘만에 예수님이 오실 줄 알았어" 라고 하겠습니까? 그것이 아니지요? 다만 나사로가 할 수 있는 말은, "이것은 예수님 자체를 드러내기 위함이지, 결단코 나의 구원을 위한 예수님은 아니었다" 라는 것, 바로 그것이라는 겁니다.

* 자기 구원으로부터의 이별 !!

그러니 이것은 자기 구원으로부터의 이별인데, 그것이 바로 핵심이라는 말이죠. 즉 자기의 구원욕구와 작별을 고하는 것, 바로 그것이라는 겁니다. "예수님을 믿을 때나 믿지 않을 때나, 언제나 나는 주의 것이었구나. 내가 언제 어디서나 주의 것이 아니었을 때가 없구나" 라고 하게 된다는 말이죠.

그리고 그것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멸망시켰다는 겁니다. 그렇게 당해봐야 우리 인간은 하나님이 찾아온 원칙을 알 수가 있는데, 그게 아니라면 자기가 잘나서 잘먹고 잘살고 있는 줄로 안다는 말이죠. 그게 인간이라는 겁니다.

여기서 신명기 32장을 보겠는데, 29절입니다.

(신 32:29) 만일 그들이 지혜가 있어 이것을 깨달았으면 자기들의 종말을 분별하였으리라

이것도 역시 예언인데, 하나님이 뜻이 아니라면 이런 이야기를 이렇게 할 수가 없다는 말이죠. 전혀 모세의 개인적인 의견이 아니라는 겁니다. 미래에 되어질 일이 모세의 입을 통해서 마구 흘러나온다는 것이죠. 쉽게 말해서, 모세 안에 하나님이 넣어놓은 녹음테이프가 있다고 보면, 그래서 스위치를 눌리면 모세의 입을 통해서 미래의 일들이 마구 튀어나온다는 겁니다.

* '종말'을 분별하였으리라 !!

여기에 "만일 그들이 지혜가 있어 이것을 깨달았으면" 라고 하고, 그 다음에 "자기들의 종말을 분별하였으리라" 라고 하는데, 여기에 '종말' 이라는 단어가 나온다는 말이죠. 제가 강의초반에 '최후' 라고 했는데, 바로 그 의미라는 겁니다. 이스라엘이 '종말' 이라는 단어를 품고 있다는 말이죠.

다시 말해서, 이스라엘 안에 인류의 종말이 미리 장착이 되어있다는 겁니다. 그게 이스라엘의 기능이라는 말이죠. 단군을 비롯해서 모든 민족은 종말을 거부하는데, 영국국가를 보면 "하나님이여, 여왕을 지켜주소서" 라고 하는데, 이제는 여왕이 죽고 없으니 왕을 지켜달라는 것으로 바뀌었지만 말이죠.

* 영원히 영원히 !!

그러니 어느 민족 어느 국가이든 간에 영원하기를 원한다는 말이죠. 링컨도 그런 연설을 했는데,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국가는 이 땅에서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다는 겁니다. 우리 인간은 '영원히' 라는 이 단어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모르는데, 그래서 "나는 죽어도 내 자식은 영원하게 하소서" 라고, 그렇게 나온다는 말이죠.

요즘은 60이 청춘이지만 옛날에는 환갑잔치를 했는데, 그래서 그때 자식들이 6명이 있으면, "참으로 복도 많네. 어쩌면 이 자식들을 이렇게 잘 키웠을까?" 라고 한다는 겁니다. 부모는 죽어도 자식들은 그 유업을 영원히 이어나간다는 말이죠. 6명이니 대가 끊어질 확률이 적다는 겁니다. 자식이 하나라고 하면 아슬아슬한데, 그래서 자식이 많으면 복을 받았다고 한다는 것이죠.

그렇게 인간은 '영원히' 라는 것을 좋아하는데, 그런데 이스라엘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너희들이 지혜가 있어서 이 종말을 깨달았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라고 하신다는 겁니다. 인간은 왜 자기 종말을 모릅니까? 마귀가 그렇게 유도를 하는데, 마귀는 매일같이 우리 인간으로 하여금 좋은 쪽으로 생각하게 한다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교회는 영원히 갑니다. 당신이 그런 우리교회에 등록을 했으니, 당신의 가문은 이제 10대, 20대, 계속해서 영원토록 빛이 날 겁니다" 라고 한다는 말이죠. 얼마나 우리를 기쁘게 하고 긍정적인 기운을 주는지 모른다는 겁니다. 마귀는 종말의 그 낌새도 알아차리지를 못하게 하는데, 그래서 우리 인간은 "잘난 내가 왜 죽어?" 라는 식으로 나온다는 말이죠.

* 죽어도 내 품안에서 !!

그러면 신약성경은 이 죽음을 뭐라고 하는고 하니, 아주 간단하게 말하면 "죽어도 내 품안에서!" 라는 겁니다. 이게 빌립보서 1장에 나오는 사도바울의 고백인데, 즉 "내가 자기가 살든지 죽든지 그 모든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유익하다" 라고 한다는 말이죠.

(빌 1:21)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그러니 성도에게 죽음은 그렇게 큰 공포와 위협이 되지 않는데, 살아있는 모습으로 주 안에 있으나, 화장터에 가서 항아리에 담겨있으나, 전혀 달라질 것이 없다는 겁니다. 그 어디이든지 주님 품안이니 말이죠. 죽어서 경험할 수도 있지만, 살아있는 동안 경험케 하는 것이 곧 성령의 삶이라는 겁니다.

이렇게 "죽어도 주님의 품 안이다" 라고 하는 원칙이 있다고 하면, 그러면 오늘 아침에 밥을 태웠다고 하면, 그러면 지옥에 갑니까? 전혀 아닌데, 누룽지를 먹으면 되는데, 문제가 될 것이 없다는 말이죠. 보이스 피싱에 걸려서 15만원이 날아갔다고 하면 지옥에 갑니까? 어떤 집사님하고 이야기를 하다가 그만 코로나 바이스러에 걸렸다고 하면, 그러면 지옥에 갑니까? 전혀 아니라는 겁니다.

주님의 품 안에서 태운 밥을 먹고 코로나 바이러스에 걸린 것인데, "죽어도 주님의 품 안이다" 라고 하는 것은, 평소에 살아있으면서 아무리 사소한 것들이라도, 그것이 주님의 품을 떠나지 않고 있음을 증명해주는 것이란 말이죠. 그래서 주님께서는 그런 사소한 문젯거리들을 만들어내신다는 겁니다.

* 엄마, 휴대폰 액정이 깨어졌어요 !!

물론 인간적으로 기분이 좋지 않은데, 15만원을 노숙자에게 주었으면 주었지, 그렇게 보이스 피싱으로 날리는 것은 아깝다는 말이죠. 딸이 휴대폰 액정이 깨어져서 돈을 달라고 보내었다고 하는 문자 메시지에 왜 넘어가느냐는 겁니다. 15만원이 아니고 50만원인가요? (ㅋㅋ)

물론 돈도 아깝지만, 바보 취급을 당해서 자존감에 상처가 났다는 말이죠. 그래서 얼마나 기분이 나쁜지 모르는데, 그래서 "이렇게 살면 뭐하노? 팍 죽어버릴까?"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그 짧은 순간에는 주님은 생각은 전혀 나지 않는다는 말이죠.

"내 몸이 어떤 몸이고 어떤 인생인데, 내가 이런 꼴을 당하나?" 라고 하게 되는데, 그게 바로 지옥을 경험하는 순간이란 말이죠. 즉 자기 생각에 빠지는 것이 곧 지옥이라는 겁니다. 자기에 이별을 고해야 하는데, 그런데 보이스 피싱을 당하는 순간 이별이 되지 않는다는 말이죠.

* 다시 정리하면 !!

다시 정리하면, 이스라엘은 무엇을 운반하는고 하니, 이스라엘을 통해서 인류의 종말을 모세가 예언하게 되는데, 그래서 모세언약대로 이스라엘이 움직여서 자폭하면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 이스라엘을 어디에 집어넣는고 하니, 다니엘을 통해서 느부갓네살의 바벨론 제국 속으로 집어넣는다는 말이죠. 그러니 느부갓네살은 건들지 말아야할 자를 건드렸다는 겁니다.

그러면 이제 남은 시간은 이 바벨론 제국에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살펴보겠는데, 그렇게 어렵게 하지 않을 테니까, 조금만 참으시기 바랍니다. 다니엘서 4장 16절입니다.

(단 4:16) 또 그 마음은 변하여 사람의 마음 같지 아니하고 짐승의 마음을 받아 일곱 때를 지내리라

* 신의 아들, 느부갓네살 왕 !!

느부갓네살은 바벨론 제국의 왕인데, 강의처음에 고대사회에서 왕은 신의 아들이라고 했다는 말이죠. 아직은 기억이 나지요? 왕은 통치자인데, 누구나 부러워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런 왕의 운명에 합세하는 것, 그게 백성으로서의 존재이유이고 명분이 된다는 말이죠. 왜냐하면 왕은 눈에 보이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옛날 고대사회에서 사람들이 신을 믿었지만, 추상적인 것은 싫어했다는 겁니다. 그래서 영웅은 신의 아들로서 눈에 보여야하고, 그래서 그 아들과 합세한다는 것이 마음에 확 와서 닿는다는 것이죠. 왜냐하면 그것은 눈에 보이는데, 즉 실제로 존재한다는 말이죠.

전에도 그런 이야기를 했는데, 이순신 장군이 누구 때문에 죽었지요? 자기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고 왕의 명분으로 인해서 죽었다는 겁니다. 요즘 사람들이 보면 그야말로 바보짓인데, 요즘과 같은 민주주의 사회에는 그런 사람들이 없다는 말이죠. 하지만 그때는 그것이 아니었는데, 그게 장군으로서의 존재이유였다는 겁니다.

지금도 북한에서는 김정은이 지나가면 아줌마들이 눈물을 흘리는데, 눈에 보이고 살아있는 신의 아들이라는 말이죠. 자기 목숨과 바꿀 대상에 있다는 것에 대해서, 그들은 행복하다고 여긴다는 겁니다. 함부로 어리석다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이죠.

마치 방탄소년단에 지나가면 전 세계의 팬들인 아미들이 보이는 반응과도 비슷한데, 그냥 느긋하게 바라보지 않는다는 겁니다. 너무 너무 좋아서 발발 떤다는 말이죠. 그들은 부모의 말을 듣지 않는다는 겁니다. 특히 아랍과 같은 경우에는 얼마나 폐쇄적입니까? 그러니 그런 것이 아니면 그 아이들은 탈출구가 없다는 말이죠.

* 영웅에로의 예속 !!

아무튼 느부갓네살은 최고인데, 눈에 보이는 신의 아들이라는 겁니다. 사람들은 눈에 보이지 않으면 믿지 않는데, 굳이 신의 아들이라는 것을 증명할 필요도 없다는 말이죠. 왜냐하면 자기가 신의 아들이라고 여기면 신의 아들이라는 겁니다. 자기가 믿으니까 말이죠. 자기의 목숨을 마칠 만한 대상이라는 겁니다.

이것을 영웅에로의 예속, 혹은 합일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것을 어렵게 이야기하면, 사람은 자기가 영웅시하는 것과 합일할 때, 비로소 숨통이 트인다는 말이죠. 눈에 보이지 않는 고상한 신이 아니라, 그러니 예수님은 아니고, 자기 눈에 보여야 한다는 겁니다.

* 짐승이 되어버린 느부갓네살 왕 !!

그런데 그 느부갓네살이 무엇이 되었습니까? 짐승이 되었다는 말이죠. 여기서 다니엘서에서 최초로 짐승이 등장하는데, 다니엘이 짐승을 만났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 다니엘 속에는 이스라엘에게 주신 하나님의 언약이 들어있다는 말이죠. 이 언약이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모든 인류는 지옥 속에 있고, 그들은 반드시 종말을, 즉 최후를 맞이하게 되어있다" 라는 겁니다.

그런 내용을 하나님께서는 다니엘에게 심어주었다는 말이죠. 그러면 다니엘 앞에서 눈에 보이는 느부갓네살이라는 대제국은 무엇인고 하니, 짐승의 나라라는 겁니다. 이제 소위 민주주의를 부르짖는 오늘날의 국가들이 짐승의 국가인지 알겠지요? 월드컵에 열광하는 모든 나라들이 그러하다는 말이죠.

그것이 누구의 눈에만 그렇다는 겁니까? 예수님의 품 안에 있는 자들의 눈으로 보면, 이 세상의 모든 나라는 짐승의 나라라는 겁니다. 여기에 관한 성경본문은 너무나 많다는 것이죠. 요한복음 18장에서 예수님께서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 라고 하셨는데, 요한일서에도 나오고 말이죠.

(요 18:36)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라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겨지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여기서 다니엘서 7장을 보겠는데, 1절에서 3절입니다.

(단 7:1) 바벨론 벨사살 왕 원년에 다니엘이 그의 침상에서 꿈을 꾸며 머리 속으로 환상을 받고 그 꿈을 기록하며 그 일의 대략을 진술하니라
(단 7:2) 다니엘이 진술하여 이르되 내가 밤에 환상을 보았는데 하늘의 네 바람이 큰 바다로 몰려 불더니
(단 7:3) 큰 짐승 넷이 바다에서 나왔는데 그 모양이 각각 다르더라

여기 3절에 큰 짐승이 넷인데, 왜 넷인고 하니, 다니엘이 살던 나라가 바벨론인데, 이 바벨론 제국은 이 세상이 보여주는 최후의 기능을 하게 된다는 겁니다. 이 바벨론이 다른 나라로 바뀌고, 또 다른 나라로 바뀌고, 그렇게 다른 나라로 바뀌는, 그 최후의 나라가 다니엘이 받은 계시의 전부라는 말이죠.

* 최후의 짐승, 로마 !!

그렇게 해서 바통을 이어받는 마지막 나라가 로마인데, 왜 로마인고 하니까,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어느 제국에서 일어났지요? 바로 로마인데, 유대나라가 로마의 통치를 받았을 때 일어났다는 겁니다. B.C 168년에 로마의 지배아래에 들어가게 되는데, 하나님의 언약나라인 이스라엘이 점령을 당하면서, 이제 이스라엘은 최후를 맞이하게 된다는 것이죠.

그 다음의 이스라엘은 이스라엘이라고 할 수가 없는데, 현재의 이스라엘은 70퍼센트가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는 겁니다.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나라, 즉 행정 공동체로서의 국가를 믿는 자들이지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죠. 그냥 자기들이 살아보려고 모였다는 겁니다.

그 중에서 군에도 가지 않고 재림을 기다리는 자들은 16퍼센트라고 하는데, 시커먼 모자와 옷을 입고 길거리를 돌아다닌다는 말이죠. 그런 길거리는 미국의 뉴욕을 비롯해서 여러 곳에 있는데, 명절도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는 겁니다. 물론 안식일이 되면 장사도 하지 않고 말이죠.

* 멸망과 구원의 기준은, 오직 '십자가' !!

마지막 메시야, 즉 심판할 주님이 오신 그때가 바로 로마시대이었다는 겁니다. 그 예수님께서 오셔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 라고 하셨는데, 즉 이 세상은 끝났다는 말이죠. 이 세상의 종말을 제시하는 최종기준은 이제 예수님에 의해서 완성이 되었다는 겁니다.

사도바울은 고린도전서 2장 2절에서 뭐라고 합니까?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라고 하는데, 즉 기준이라는 말이죠. 멸망의 기준과 구원의 기준, 그 기준이 무엇인고 하니, 그게 바로 '십자가' 라는 겁니다.

(고전 2:2)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기존 이스라엘이 하지 못했던 것을 누가 이루었다는 겁니까? 예수님이 홀로 다 이루셨다는 말이죠. 다른 이름으로는 구원받을 이름을 준 적이 없다는 것이죠. 그렇게 다 이루신 분이 주님이고, 그분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게 된다는 겁니다. 그게 로마서 10장에 나온다는 말이죠.

(행 4:12)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

(롬 10:13)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그러면 성경말씀이 이제 다 풀렸는데, 그렇지요? 모든 것을 예수님을 중심으로, 즉 예수님이 행하신 것만을 보게 되면 막히는 곳이 전혀 없다는 겁니다. 그런데 거기에 그만 자기의 행한 것을 집어넣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성경해석이 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은 것은 주님의 기대이고 희망인 것이지, 우리 자신의 기대와 희망이 전혀 아니라는 말이죠. 서로 만나면 충돌이 일어난다는 겁니다. 그러니 주님이 불러주실 때, 그것은 주님은 소원인데, 그러니 천국에 가는 것이 우리의 소원이 아니라는 말이죠. 그러니 우리는 감사 외에는 할 것이 전혀 없다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지옥의 나라, 짐승의 나라에 살고 있으면서도, 그들과 함께 재미있게 살아갈 생각만 했습니다. 그들로부터 "성공했구나. 출세했구나. 자식을 잘 키웠구나" 라는 소리를 듣기 원했고, 그것으로 살아가는 이유를 찾았는데, 하지만 그런 것으로 우리의 욕망이 채워지지 않는다는 것을 이제 깨닫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바치기 이전에 주님이 먼저 불러내어 주셨으니, 이제는 우리 안에 주님만이 가득하게 해주시고, 주님의 피와 사랑만 넘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22,11,29 오후 8시에 마침.

주님의 품 안에서 잠들게 하소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