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강의

지옥하나님23-구원보다 선택

아빠와 함께 2023. 4. 17. 10:30

[23 대구강의] 지옥의 하나님 23 - 구원보다 선택

23,03,20 강의 : 이근호, 정리 : 구득영

* 구원, 그 이전의 선택 !!

오늘은 교재 98페이지부터 하겠습니다. 여기에 '선택'이 나오는데, 성경에서 제일 어려운 대목이 바로 선택이지 싶은데 말이죠. 이게 왜 어려운고 하니, 구원 이전에 선택을 했다는 겁니다. 즉 선택을 하고 나서 구원을 했다는 것인데, 그것은 하나님 아버지가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시면서 "나는 너를 선택했다" 라고 했기 때문이라는 말이죠.

이게 무슨 말인고 하니, 하나님의 뜻이 인간에게 도달하기 이전에 예수님에게 먼저 도달하면서, 그때 '선택' 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낼 때 그냥 보낸 것이 아니고, "너를 택했다" 라고 하는 조건아래에서 보내었다는 것인데, 그래서 구원 이전의 선택이라는 겁니다.

여러분도 알다시피 구원이라는 것은 곧 구출인데, 이 세상에서 끄집어낸다는 말이죠. 어디에서의 구출인지, 그것은 선택을 통해서만 알 수가 있다는 겁니다. 어디에서 구출해서 어디로 가느냐는 것인데, 그게 곧 엑소더스, 즉 출애굽인데, 그것은 선택된 분만이 안다는 말이죠. 우리는 모르는데, 예수님이 오셔야만 우리는 어디에서 어디로 가는지를 알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오시기 이전에 인간들은 구원을 어떻게 생각했는고 하니, 지상에서 천국으로 가는 것으로 여겼다는 말이죠. 이게 전혀 엉터리인데, 이것은 어디까지나 인간들끼리의 생각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나온 것이 종교인데, 다들 환난과 번뇌가 많은 이 세상에서 벗어나서 고생하지 않고 편안하게 살고 싶어한다는 것이죠.

그래서 기독교나 천주교나 이슬람이나 불교나, 모두가 어디에서 어디로 갈 것인지, 그것은 다 자기가 알아서 결정한다는 겁니다. 이것이 종교인데, 종교는 하나님이 만든 것이 아니고 인간이 만들었는데, 그 인간 배후에는 악마가 있다는 말이죠. 그래서 종교는 악마가 만들었다고 할 수 있다는 겁니다.

다시 말씀을 드리지만, 구출이란 것은 선택된 분이 오셔야 알 수 있는데, 그러면 왜 구원보다 선택이 앞서는 겁니까? 그것은 인간의 모든 자율성과 자유의지는 악마의 선택이기 때문이란 것이죠. 그 구조가 동일한데, 즉 악마가 인간을 선택했고, 그렇게 선택된 인간은 악마의 속성을 그대로 본받아서 자율성과 자립성, 자기만의 자유의지를 고집하는데, 그것을 놓치지 않으려고 한다는 겁니다.

* 인간의 자기 선택 !!

여기에서 나온 것이 바로 자기 선택인데, 즉 "선택을 하기는 하되, 나의 미래는 내가 알아서 선택을 하겠다" 라는 말이죠. 즉 자기 운명은 자기가 결정을 하겠다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을 것인지 부처님을 믿을 것인지, 그것을 자기가 선택을 하겠다고 나온다는 것이죠.

그것이 침례교이고 감리교이고, 그게 소위 '알미니안주의' 라는 것인데, 즉 "하나님께선 십자가를 지는 것까지만 하고, 그 다음에 골라잡기를 하는 것은 자기 손에 달려있다" 라는 겁니다. 즉 인간이 시작점이라는 것인데, 물론 그게 예수님이 오기 이전이라고 하면 통할지 모르겠지만, 그러나 예수님마저도 아버지에게 선택이 되었다는 말이죠.

* 선택의 원형, 그리고 복제 !!

그러면 예수님이 하시는 모든 일은 예수님의 고유의 것이 아니고, 아버지의 선택 안에서만 이루어진다는 겁니다. 그래서 인간과 하나님의 관계라는 것이, 이렇게 하나님이 있고 또한 인간이 있어서 서로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아니고, 먼저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정립이 되어야 하는데, 그게 원형이라는 말이죠.

우리 인간이 "하나님, 잘 계시죠? 그리고 제가 보이시죠? 그러면 우리 정상적인 관계를 잘 맺읍시다" 라고 하면, 그러면 하나님은 뭐라고 하시겠습니까? "그래, 알았다" 라고 하시는 것이 아니고, "그것은 니 생각이고?" 라고 나오신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인간배후에는 악마가 있기 때문인데, 그런데 인간은 그것을 삭제하고 나온다는 말이죠.

그러므로 진짜 하나님과의 관계는 우리 인간이 판단하고 결정할 문제가 전혀 아니고, 먼저 아버지와 아들 사이가 결정이 되고 난 뒤에, 그것을 원형으로 해서 복제를 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제 그 관계의 복제물이 되는데, 그것을 '열매' 라고 한다는 말이죠.

제가 아무리 이렇게 설명을 해도, 그 출발점을 인간으로 하게 되면, 즉 "나는 의지가 있고 또한 판단능력이 있다" 라고 하게 되면, 성경을 아무리 많이 읽고 읽어도 마귀가 만든 종교라는 굴레에서 벗어나지를 못한다는 겁니다. 종교라는 것 자체가 마귀의 작품이라는 말이죠.

그러니 종교가 무엇인지, 그러한 것을 묻고 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되면 결국은 소유가 되어버리는데, 즉 "나는 종교를 가졌다" 라고 하게 된다는 말이죠. 그렇게 종교를 가지게 되면 하나님의 선택이 아니고 자기 선택이 되고 마는데, 자기가 괜찮은 종교를 골라잡은 것밖에 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 하나님의 선택 VS 자기 선택 !!

그러면 거기에는 자기의 자율성이 항상 담겨있게 되는데, 하지만 우리가 이순신 장군의 조선시대에 태어나지 않고, 지금의 이 시대에 태어난 것이 과연 우리의 선택입니까? 전혀 그렇지 않은데, 그런데 그것을 왜 도외시고 무시하느냐는 말이죠. 남자로 태어날지 여자로 태어날지, 그것을 우리가 알아서 선택할 수가 있습니까? 그렇지가 않다는 것이죠.

우리 인간은 자기가 챙길 것만을 골라서 챙긴 것인데, 그런데 그것을 왜 그것을 진리라고 우기느냐는 겁니다. 지금의 이 시대, 즉 지금 우리의 환경은 우리가 선택한 것이 전혀 아니라는 말이죠. 그것은 주어진 것인데, 그리고 우리는 그 속에 던져진 존재라는 겁니다.

다시 말씀을 드리지만, 아버지가 아들을 선택했는데, 그래서 예수님께서 요단강에서 세례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을 때 하늘에서 무슨 소리가 들렸습니까?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라고 했는데, 그렇게 이미 확정이 되었다는 말이죠.

(마 3:16)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마 3:17) 하늘로서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

이 선택은 두 가지인데, 먼저 선택을 하시는 분이 있고, 그 다음에는 선택을 당하시는 분이 있다는 겁니다. 선택의 원형을 아버지와 아들로 규정해서 그 아들을 이 땅에 보내는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까, 이미 악마가 인간을 선택했기 때문인데, 그러니 인간이 제 아무리 자유를 주장하더라도 이미 악마에게 선택을 당한 입장이라는 말이죠.

* 죄의 왕 노릇 !!

이것을 '죄의 노예' 라고 하는데, 그래서 로마서 5장에서 "죄가 왕 노릇을 한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아담에게 죄가 왕 노릇을 했는데, 그런데 그게 아담으로 끝나는 게 아니고, 그 이후의 세대에도 계속해서 죄가 왕 노릇을 해서 주어진 현상이 무엇인고 하니, 그래서 죽음이 왕 노릇을 한다는 말이죠.

(롬 5:14) 그러나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 위에도 사망이 왕 노릇 하였나니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이라

그렇게 해서 죽음이 왕이 되니까, 이 왕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너무 힘이 강해서 백성들은 그 힘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겁니다. 그 현상이 바로 우리 얼굴에 나타나는 주름살인데, 그래서 우리가 이렇게 늙어가고 있다는 말이죠. 그 늙음의 마지막은 죽음이고, 그래서 흙이 된다는 겁니다. 잠시 인간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진흙이라는 것이죠.

결국 이것은 무엇인고 하니,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했던 그 창조의 테두리에서 악마든 인간이든 모두 피조물이기 때문에, 어느 누구라도 그 창조의 테두리에서 벗어나지를 못한다는 겁니다. 그게 하나님의 주되심이고, 그 주되심이 나중에 하나님 아버지에서 아들로 바뀐다는 말이죠.

그렇게 하나님의 주되심에서 아들의 주되심으로 바뀌는 것, 그게 사도행전에서 베드로와 사도바울이 했던 설교내용이라는 겁니다. 전에는 하나님이 주가 되셨는데, 이제는 하나님이 선택한 아들을 주님의 자리로 바꾼다는 말이죠. 하나님을 신봉했었지만, 이제는 아들을 주로 모셔야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아들을 주님으로 인정하지 않는 자는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배척을 받게 된다는 말이죠.

이게 참으로 어려운 내용이지만 하지 않을 수가 없는데, 그렇게 아버지가 아들을 선택함으로 말미암아서, 이 선택에는 두 가지의 영역이 생기게 된다는 겁니다. 먼저 하나는 구원되기 위한 선택이 있고, 다른 하나는 버려지기 위한 선택이 있다는 말이죠. 선택의 양산이 이렇게 두 가지의 결과로 이어지게 된다는 겁니다.

* 선택의 양산, 그리고 12제자의 선택 !!

그게 교재 99페이지에 나오는데, 예수님이 12제자를 선택한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아버지가 아들을 선택한 행위를 그대로 확장시키는 것이란 말이죠. 예수님이 그 원형인데, 창조의 원형은 예수님이라는 겁니다. 그게 골로새서 1장 16절에 나오는데, 이 세상은 모든 것은 누구를 위함인고 하니, 예수님을 위해서 창조가 되었다는 말이죠.

(골 1:16)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그런데 성령을 받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아무리 설명을 해도 이게 먹혀들지 않는데, 그들은 이 세상이 하나님을 위해서 창조가 되었다고 한다는 겁니다. 유대인들도 그러하고, 아무리 성경을 읽어도 이것의 의미를 받아들일 수가 없다는 말이죠. 왜 예수님을 위해서 창조되었는고 하니, 그것은 예수님이 창조하셨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신 말씀 !!

그것을 요한복음 1장에서는 뭐라고 합니까? 태초에 하나님이 두 분이셨는데, 하나님이 계시고 말씀이 계셨다는 말이죠. 그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창조를 했는데, 그러면 왜 같이 합니까? 한 분은 선택을 하고 한 분은 선택을 당하는데, 그러한 선택의 당함이 모든 피조물의 완성으로서 구현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선택을 하시고, 또한 선택을 당하셨다는 말이죠.

(요 1: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요 1:2)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요 1: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그러면 이게 왜 인간들에게 먹히지 않는고 하니, 인간 배후에는 악마가 있는데, 이 악마는 하나님이 자기를 선택하지 않았다는 것에 대해서 불만을 품고 있었다는 겁니다. 물론 그 당시는 악마가 아니고 천사였는데, 즉 "하나님은 왜 나를 선택하지 않았는가?" 라고 나왔다는 것이죠.

* 하늘의 미카엘 전쟁 !!

그러니 악마는 하나님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왜 모든 일을 자기 아들에게만 집중을 해서 하느냐는 겁니다. 거기에 반발해서 일어난 전쟁이 미카엘과의 전쟁, 즉 하늘의 전쟁이었다는 말이죠. 인간은 그런 전쟁이 있었는지도 몰랐는데, 왜 뱀이 낙원에 있었는지를 몰랐다는 겁니다. 요한계시록 12장에 그게 나오는데, 악마는 전쟁에서 져서 있을 곳이 없어서 낙원까지 쫓겨왔다는 말이죠.

(계 12:7) 하늘에 전쟁이 있으니 미가엘과 그의 사자들이 용으로 더불어 싸울새 용과 그의 사자들도 싸우나
(계 12:8) 이기지 못하여 다시 하늘에서 저희의 있을 곳을 얻지 못한지라

악마의 목적은 단 하나밖에 없는데, 먼저 "하나님을 인정해주고 믿자" 라고 나온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악마 자신이 하나님을 인정하니 말이죠. 그렇게 함으로서 피조물인 인간이 하나님과 연결될 수가 있다는 것인데, 그게 악마의 주장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인간은 하나님을 인정하는데, 불교의 경우에도 신을 인정한다는 말이죠.

그런데 악마는 무엇을 거부하는고 하니,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다 예수님에게 일임했다" 라는 것에 대해서, 이 악마는 예수님과 라이벌 의식을 느낀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예수님을 선택하는 순간 하나님은 악마를 버리기로 작정했다는 말이죠. 즉 "예수님을 선택했다" 라는 것은, "악마는 버리기로 했다" 라는 것과, 이게 같은 의미라는 겁니다.

* 영원한 천국, 영원한 지옥 !!

그래서 지옥이란 어떤 곳인고 하니, 영원히 예수님만이 주가 된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누가 버림을 받아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곳이라는 말이죠. 그런 짝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죠. 즉 누가 주인지를 증명하기 위해서 어느 누구는 버림을 당해야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악마를 영원토록 가두어놓고, 그것을 뚜렷하게 보게 함으로서, 자기 아들인 예수님이 주라는 것을 천국에서 높이기 위해서 반대장소를 마련했는데, 그것이 곧 지옥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이 지옥, 즉 게헨나는 예수님이 주라는 것에 대해서 반기를 든 것에 대한 영원한 형벌을 받게 되는 장소라는 말이죠. 이것을 악마는 알고 있는데, 자기는 버림을 받았음을 말이죠.

그러므로 선택의 양상이라는 것은, 구원되기 위한 선택과 버려지기 위한 선택이 있게 되는데, 그러면 그 두 개의 양상을 어디에 집어넣습니까? 예수님은 12제자들 속에 그것을 집어넣는다는 겁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6장 70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뭐라고 하십니까?

(요 6:70)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희 열둘을 택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러나 너희 중에 한 사람은 마귀니라 하시니

* 마귀를 선택하신 예수님 !!

여기에 보면, 예수님께서 "내가 너희 열둘을 택하지 아니하였느냐" 라고 하신 다음에, "너희 중에 한 사람은 가롯유다다" 라고 하신 것이 아니고, "너희 중에 한 사람은 마귀니라" 라고 하셨다는 말이죠. 이것이 무슨 의미인고 하니, 예수님은 최종적인 것을 말씀하셨는데, 예수님은 놀랍게도 마귀를 선택하셨다는 겁니다.

그렇게 함으로서 예수님은 아버지의 선택에 함께 참여를 하셨는데, 아버지의 아들로서 말이죠. 그렇게 해서 심판권을 가지게 되면, 예수님은 주다운 면모를 가지게 된다는 겁니다. 이것이 요한복음 5장에 나오는데, 즉 아버지의 모든 권한을 예수님께서 위임을 받게 된다는 말이죠.

(요 5:22)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으니

이것은 인간들의 지혜가 거들 문제가 전혀 아닌데, "나는 몸이 아파요. 경제가 힘들어요" 라고 하면서 끼들면 안 된다는 겁니다. 그런 문제가 아니고, 거기에서의 구출이라는 말이죠. 그런데 그 구출 앞에 무엇이 있다고 했습니까? 선택이 있는데, 지금 그 선택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겁니다.

우리가 이렇게 힘들고 질곡이 많은 인생에서 벗어나는 것, 그것이 문제가 아니고, 그런 것은 마귀가 만든 종교에서 주장한다는 말이죠. 즉 "고객 여러분, 과연 무엇을 원하십니까? 행복해지고 싶습니까? 그러면 도와드리겠습니다. 하나님을 믿으시면 됩니다" 라고, 그렇게 나온다는 겁니다.

그런 것은 종교 쪽에서 하는 일이고, 그런데 지금은 그런 종교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죠. 우리가 있기 이전에, 즉 우리가 선택하기 이전에, 다른 선택이 먼저 있었다는 겁니다. 그게 누가 누구를 선택한다는 겁니까? 하나님 아버지가 아들을 선택하셨다는 말이죠.

그래서 "우리가 성경을 보고 잘 선택하면 되는데, 우리보다도 먼저 하나님이 아들을 선택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라고, 즉 "우리도 지혜가 있고 판단할 수 있기에, 우리가 성경을 보고 선택하면 되는데, 왜 아버지가 아들을 먼저 선택했습니까?" 라고 한다면, 거기에 대한 대답은 무엇이겠냐는 겁니다.

* 나는 믿는다, 나의 선택을 !!

하나님께서 왜 그렇게 하셨습니까? 우리 인간이 알아서 선택을 하게 되면, 악마가 인간을 선택했다는 사실을 놓치게 된다는 말이죠. 우리 인간의 선택은 곧 마귀의 선택이라는 겁니다. 사람들에게 이러한 이야기를 하면 기분이 나빠서 듣지 않으려고 하는데, 그래서 "나를 출발점으로 놓는 것, 하나님은 왜 그것을 거부합니까?" 라고 나온다는 말이죠.

자기 자존심을 챙기기 위해서, 그것을 '자기 의' 라고 하는데, 시작점을 자기가 알아서 결정하겠다는 겁니다. 인간은 자존심의 힘으로 살아가는데, "건드리지 마라. 나도 알만큼 안다" 라는 것이죠. 그게 '나'를 시작점으로 하는 것인데, 자기 선택만은 신뢰하고 싶다는 겁니다, 그래서 "나는 믿는다, 나의 선택을!" 라고 하는데, 누가 뭐라고 해도 '나'로부터 출발하고 싶다는 말이죠.

* 타인의 선택 !!

여기서 더 깊이 들어가면, "하나님의 선택은 나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고 타인을 선택한다" 라고 할 수 있는데, 즉 타인의 선택이라는 겁니다. 그러면 모든 인간의 타인은 누구입니까? 악마인데, 그렇다면 구원을 받은 자의 새로운 타인은 누구입니까? 그 타인이 바로 예수님이라는 말이죠.

그러니 타인과 타인의 선택인데, 하나님은 우리 인간이 먼저 선택할 수 있는 타인에 앞서서 새로운 타인을 보내주신다는 겁니다. 우리 인간은 "하나님이 나를 선택했다" 라고 나오는데, 그런데 성경은 그게 아니고, 반드시 그 앞에 붙는 것이 있는데, "예수 안에서 너를 선택했다" 라고 한다는 말이죠.

(엡 1:4)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하지만 악마는 어떻다는 겁니까? 하나님과 인간을 다이렉트로 연결을 하려고 한다는 겁니다. 악마는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는데, 하나님에 대해서 부정하지 않는다는 말이죠. 그런데 인간과 하나님 사이에 다른 것이 끼어 드는 것, 그것에 대해서는 악마가 그만 발작을 일으킨다는 겁니다. 그것만은 거부하고 싶어한다는 말이죠.

* 천주교의 발작증세 !!

역사적으로 보면 가장 발작을 많이 일으킨 종교단체가 바로 천주교인데, 이 천주교에서는 하나님을 '천부(天父)' 라고 하는데, 그 천부의 하나님과 무엇이 다이렉트로 만납니까? 여기에 교회가 들어간다는 겁니다. 교회는 인간들의 구성원인데, 그 교회를 집어넣는다는 말이죠. 천부와 교회를 직접 연결을 시키겠다는 것이죠.

그러면 그들이 왜 여기에 예수님을 집어넣지 못하는고 하니, 천주교는 하나님과 인간을 연결시킴에 있어서 예수님을 교회 안에다가 집어 넣어버린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들은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를 믿는데, 그 아버지가 괜찮은 분을 우리에게 보내주셨다" 라고 나온다는 말이죠.

다시 말해서, "우리는 죄가 많아서 우리의 힘으로는 죄를 도저히 씻을 수 없는데, 그런데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 죄를 씻어주기 위해서 우리에게 예수님을 보내주셨다" 라는 것인데, 그게 바로 천주교의 주장이라는 겁니다. 그게 전통적인 기독교 역사의 생각이라는 말이죠.

그러면 무엇이 남게 됩니까? 하나님 아버지와 우리 인간이 다이렉트로 만난다고 하는 관계에는 전혀 변함이 없는데, 거기에 추가적으로 정보가 하나 더 들어왔다는 겁니다. 즉 "우리는 아무리 죄 용서를 받으려고 애를 써도 안 되는데,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셔서 예수님을 보내주셨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 악마는 놀고 있지 않기에 !!

그러면 여기서 무엇이 제외가 되어있습니까? 악마가 놀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오히려 악마가 이렇게 만들었는데, 그렇게 하나님과 인간이 바로 만나게 되면 예수님은 어떻게 되어버립니까? 그만 예수님은 우리 인간을 도와주는, 그런 보조적인 역할로서 이 땅에 오신 것이 되어버린다는 말이죠.

하지만 이렇게 되면, 예수님이 우리 인간을 거부한다는 느낌이 그만 사라지고 없다는 겁니다. 베드로가 자기 목숨을 바쳐서 예수님을 따르고자 했는데, 그때 예수님께서 "베드로야, 참으로 기특하구나. 우리 서로 같이 일하자" 라고 했습니까? 아니면 그런 베드로를 거부했습니까? 예수님은 거부했는데, 그러면 그 이유가 무엇이냐는 말이죠.

교회가 예수님의 일에 동참하겠다고 하는데,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거부를 하신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언약은 예수님의 단독 행위이어야 하는데, 왜냐하면 인간들 배후에는 마귀가 있기 때문에 그렇다는 말이죠. 즉 "내 속에 마귀가 들어있다" 라는 것인데, 인간은 단독으로 있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 한국교회의 회복신학 !!

그러니 인간은 누구로부터 선택이 된 것인데,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예수님이 아버지로부터 선택이 되어서 인간세계에 들어오시면, 그러면 비로소 그것이 밝혀진다는 말이죠. 그러니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지 않았다고 하면 하나님과 인간은, 즉 신과 인간은 서로 좋게 회복될 수 있는데, 그것이 이방종교이고, 그 회복신학이 바로 통일교의 신학이라는 말이죠.

문선명의 통일교 신학이 무엇인고 하니, "아담이 범죄를 했는데, 그런데 하나님은 인간을 너무나 사랑하셔서 다시 회복시키기 위해서, 그래서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주셨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교인들은 통일교나 여호와증인이나 천주교 신학을 분간하지 못하는데, 왜냐하면 자기 교회의 목사가 하는 설교가 맨날 그 소리이니 말이죠. 기존 교회와 전혀 다른 것이 없다는 겁니다.

그것은 바로 자기가 자기를 몰라서 그런 것인데, 즉 자기 자신도 이 힘든 세상을 얼른 떠나서 영원한 행복을 누리고자 하는 종교적 욕망이 가득하다는 말이죠. 그래서 자기에게 좋은 소리를 하면 그 어떤 단체이든 상관이 없다는 겁니다. 요즘 정명석의 JMS가 새삼스럽게 난리인데 말이죠.

우리 인간은 예수님이 없으면 자기가 주인공인데, 그래서 자기 미래도 자기의 괜찮은 선택에 의해서 괜찮은 미래가 기다리고 있다고 여긴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그게 우리 인간이 살아가는 보람이라는 말이죠. 하지만 성경은 그것을 '자기 의' 라고 한다는 것이죠.

(롬 10:3)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

이 '타인 선택' 이라는 게 너무나 어려운 말이라서 일단 교재를 먼저 보겠는데, 교재 99페이지입니다. 여기에 마태복음 11장 말씀이 나오는데, 25절에서 27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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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수님께서 계시 받을 자를 자신의 소원에 근거해서 정해졌다고 하는 것은, 모든 권세가 사탄으로부터 자기에게 넘어 왔다는 것을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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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11:25) 그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마 11:26)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마 11:27)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

여기 27절에 보면,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 라고 되어있는데, 여기에 대해서 우리 인간은 어떻게 반응을 합니까? "그 아들의 생각까지 우리가 꼭 알아야 하는가?" 라고 나오는데, 그것이 바로 마귀의 생각이라는 겁니다.

* 마귀는 하나님의 최측근 !!

악마는 하나님을 알고 인정도 하지만, 그런데 그 악마는 그 아들 자리에 자기가 들어가고자 했다는 말이죠. 즉 악마는 하나님으로부터 모든 전권을 다 위임받고 싶어했다는 겁니다. 그는 천상회의에서 발언권도 가지고 있는데, 하나님과 대화를 할 수가 있었다는 말이죠. 그게 욥기에도 나오고, 스가랴서에도 나온다는 겁니다.

이렇게 악마는 하나님이 대화상대로 삼을 정도로 하나님의 최측근이라는 말이죠. 천사장이라고 할 수 있는 미카엘과 같은 동급이라고 보면 되는데, 그래서 전쟁을 할 때도 미카엘과 대결을 한다는 겁니다. 그리고 악마는 선악과가 무엇이고 생명나무가 무엇인지 아는데, 또한 악마는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끊는 방법도 안다는 것이죠.

그래서 하나님은 그것을 아시고 어떻게 하셨습니까? 모든 나무가 아니라 선악과나무를 콕 지목해서, 그렇게 의도적으로 그 선악과나무를 에덴동산의 중앙에 심어놓았다는 겁니다. 이것은 아담과 하와가 아니라, 악마를 겨냥해서 그렇게 심어놓았다는 말이죠.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하면, "당신의 말대로라면, 예수님이 오신 이유가 우리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서가 아니고, 마귀와 상대하기 위해서 오셨다는 말인가?" 라고 나올 수가 있는데, 하지만 그게 요한일서에 그대로 나온다는 겁니다. 3장 8절에 보면,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니라" 라고 한다는 말이죠.

(요일 3:8)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니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니라

* 마귀에게 속한 자, 아들에게 속한 자 !!

여기에 보면 예수님이라고 표현하지 않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데, 그 하나님의 아들이 마귀의 일을 멸하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다는 겁니다. 그래서 요한일서에서는 이 세상을 두 종류로 나누는데, 즉 "마귀에게 속한 자, 아들에게 속한 자", 그렇게 분류를 시켜버린다는 말이죠.

그래서 요한일서 5장 19절에 보면 뭐라고 합니까?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고 온 세상은 악한 자 안에 처한 것이며" 라고 하는데, 요한일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이렇게 밀어 부친다는 겁니다. 이 요한일서는 사도요한이 썼는데, 자기 마음대로 쓴 것이 아니고 예수님에게 계시를 받아서 썼다는 말이죠.

(요일 5:19) 또 아는 것은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고 온 세상은 악한 자 안에 처한 것이며

그런데 교인들은 자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성경말씀을 보기 때문에, 이런 구절이 다가오지 않는다는 겁니다. 이런 말씀을 아무리 설명을 해주어도, 다 듣고 나서는 "그러면 우리의 가정 문제는요?" 라고 한다는 말이죠. 성경해석이 다 끝났는데, 그런데 거기에서 자기 문제가 또 튀어나온다는 겁니다. "우리 아이가 아픈데, 그것은 어떻게 됩니까?" 라고 말이죠.

아무리 성경말씀을 보고 성경공부를 하고 설교를 듣고 해도, '나' 라는 것을 출발점에서 치울 생각을 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런 출발점은 없는데, 왜냐하면 우리는 마귀에게 선택된 자들이라는 말이죠. 우리의 성격과 성질은 악마가 선택했기 때문에, 악마의 것을 그대로 물려받았다는 겁니다.

그러면 여기에 대해서 "주님이 우리를 선택하지 않았습니까?" 라고 할 수가 있는데, 주님께서 우리를 선택하면 주님은 우리를 '죽은 자'로 간주하신다는 말이죠. 이것은 주님께서 우리의 목을 졸라서 숨을 쉬지 못하게 한다는 것이 아닌데, 그런 의미에서 죽었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 너의 선택은 잊어라 !!

이 선택과 관련해서 '죽은 자' 라는 것은 무슨 의미인고 하니, 어제 설교시간에 낯선 찬송가가 등장했는데, '잊어라' 라고 말이죠(ㅋㅋ). 즉 "자기 선택은 잊어라" 라는 겁니다. 어디까지나 일은 주님께서 벌리시는데, 우리가 선택해서 일을 벌린 것이 아니라는 말이죠. 그래서 주님은 우리보고 뭐라고 하십니까? "잊어라. 그 대신에 너희에게 그 어떤 책임도 묻지 않겠다" 라고 하신다는 겁니다.

그런데 천주교에서는 매일같이 "내 탓이요" 라고 하는데, "부모가 잘못해서 자식이 큰 어려움을 당했구나. 나의 기도가 부족했구나. 내가 십일조 생활을 제대로 하지 않아서 그렇구나. 그래서 주님께서 나에게 그런 저주를 내리셨구나" 라고 하는, 그런 식이라는 말이죠.

'가계에 흐르는 저주를 끊어라' 라는 어떤 목사의 책도 있는데, 부부간의 갈등, 사업실패, 자식의 사고 등등, 그런 일들이 왜 생기는고 하니, 그것은 하나님에게 저주받을 짓을 너무 많이 해서 그렇다는 겁니다. 특히 20대 아가씨들을 보고 뭐라고 합니까? "좋은 직장에 취직을 하고, 좋은 신랑감을 만나려고 하면, 그러면 당산에게 흐르는 저주를 끊어야 한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우리는 그러한 사람들을 보고 쉽게 사이비라고 하는데, 그런데 그런 이야기를 은근히 듣고 싶어하는 자기 자신은 무엇이냐는 겁니다. 저주를 끊어서 모든 일이 잘 되기를 바라는, 자기에게 들어있는 그 심보는 도대체 무엇이냐는 말이죠. 이것이 남들을 보고 욕할 문제가 아닌데, 우리도 역시 출발점을 '나'로 한다는 것이죠.

계속해서 교재 99페이지를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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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런데 예수님께서 사탄의 허락도 받지 않고 임의대로 구원받을 자를 자기 제자로 뽑을 수 있다는 사실은, 실세가 이미 예수님께 주어졌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위임받은 사항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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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 "예수님께서 사탄의 허락도 받지 않고, 임의대로 임의대로 구원받을 자를 자기 제자로 뽑을 수 있다는 사실은" 라고 되어있는데, 이렇게 예수님이 악마의 허락도 없이 행동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예수님을 제외한 모든 인간들은 이 악마의 바깥으로 벗어난 적이 없다는 겁니다.

* 예수님은 악마의 허락도 받지 않고 !!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하십니까? 악마의 허락을 받지 않고 자기 뜻대로 구원받을 자를 자기의 제자로 뽑는데, 그런데 심지어는 그렇게 선택이 된 자들 중에는 누구도 포함이 되어있다는 겁니까? 가롯유다, 즉 악마도 선택이 되어있었다는 말이죠.

그러면 인간은 그 어떤 것도 선택할 권한이 없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고 하니, 예수님이 악마의 허락도 없이 선택을 함으로, 이미 인간은 악마의 선택, 그 권력 안에 들어있다는 사실이 비로소 밝혀지게 되었다는 겁니다. 그게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심으로서 드러나게 된 사항이라는 말이죠.

* 타인 VS 새로운 타인 !!

지금까지 선택에 대해서 강의를 했는데, 이렇게 보면 "내가 나를 선택한다" 라고 하는 것이 거짓임을 알 수가 있다는 겁니다. 그렇지요? 그것은 말이 안 된다는 것이죠. 그렇다면 그 다음부터는 무엇인고 하니, 그것은 바로 '타인 대 타인'의 대결구조라는 말이죠.

우리 인간이 "나를 선택해주세요" 라고 요청할 수 없는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까, 이 '나' 라는 것은 '나'의 범위에서 벗어날 수가 없으니, "내가 선택한다" 라는 것은 있을 수가 없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그동안 '나'를 지배했던 '타인', 그리고 그것보다 더 센 '타인', 그렇게 타인과 타인의 경쟁관계에 돌입하게 된다는 말이죠.

그래서 "하나님은 나를 선택한 것이 아니고, 나에게 필요한 타인을 선택하신다" 라고 할 수 있는데, 즉 "하나님은 나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안에서 나를 선택하신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타인입니까? 아닙니까? '나' 라는 것이 따로 있으니, 예수님은 타인이라는 말이죠.

이렇게 되면 지금까지 기독교 신학에서 말한 '나의 선택' 이라는 것은 모두 다 거짓말이 되고 만다는 겁니다. 그것을 가장 강조한 민족이 바로 유대인이고, 그것을 유대신학이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리고 이슬람교도 역시 선택을 강조하고 있는데, '나'를 선택하고 그 '나'가 모인 집단, 즉 민족을 선택한다는 것이 그들의 신학이라는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무엇을 선택하셨습니까? 하나님의 선택은 예수님으로 끝이 난다는 말이죠. 그 다음부터는 예수님이 선택을 하시는데, 예수님이 아버지의 선택을 그대로 이어받는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이제는 예수님이 주가 되시기 때문에 그렇다는 겁니다.

* 주께서 내 주에게 !!

이제는 주가 되신 하나님이 하신 역할을 아들이 하시는데, 그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 그 주의 관계를, 장차 예수님이 주가 되시기 때문에, 그게 시편 110편인데 말이죠. 여기에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라고 하는데, 즉 주가 두 분이라는 겁니다. 그것을 사도행전 2장에서는 베드로가 "주께서 내 주에게" 라고 한다는 말이죠.

(시 110:1) [다윗의 시]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으라 하셨도다

(행 2:34) 다윗은 하늘에 올라가지 못하였으나 친히 말하여 가로되 주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그러면 주께서 내 주에게 어떻게 하십니까? 원수를 발등상이 되게까지 하시는데, 즉 발 밑에서 꼼짝달싹도 못하게 만든다는 겁니다. 여기서 '하기까지' 라는 것은 그때부터가 시작이라는 말이죠. 그렇게 짓누르는 상태로부터 해서, 그것이 계속해서 유지가 된다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예수님이 주가 되신다는 말이죠.

이전에는 유대인들이 여호와 이름을 불렀는데, 그런데 오순절날 성령이 오시고 난 다음에 베드로가 유대인들에게 뭐라고 합니까? "하나님의 계획을 너희가 방해했다. 너희가 주님을 죽였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 유대인들이 성령을 받고 난 뒤에, 그 죽인 주님을 자기의 주님으로 받아들이게 된다는 말이죠. 여호와를 믿던 자들이 이제 예수님을 믿게 되는데, 즉 베드로에게 세례를 받았다는 것이죠.

* 하나님과 새로운 타인의 관계, 그 효과의 적용 !!

그러니 이것은 "주여, 지금 제가 무엇을 행해야 합니까?" 라고 하는, 그 자기 행함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무엇을 행해도, 그것은 자기 선택이고 자기 결정의 문제라는 말이죠. 이것은 지금 자기가 주님과 어떤 관계인지, 그런 문제가 아니고 타인과 하나님과의 관계, 그것의 적용이라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과 새로운 타인의 관계, 그 효과의 적용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것이 복음이라는 말이죠. 왜냐하면 마지막 언약의 상태자가 자기가 아니고 예수님이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책에 기록된 그분이 누구인고 하니, 히브리서 10장에 보면 그것이 바로 예수님이라는 말이죠. 자기 자신이 거기에 들어가면 안 된다는 겁니다. 예수님을 보내셨다는 것이죠.

(히 10:7) 이에 내가 말하기를 하나님이여 보시옵소서 두루마리 책에 나를 가리켜 기록한 것과 같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시니라

* 선택의 끝, '혼인' !!

그렇다면 선택의 끝이 무엇인고 하니, 성경에서는 그 끝 모습을 '혼인' 이라고 한다는 겁니다. 누구와 결혼을 한다는 겁니까? 자기가 선택하지 않은 자와의 결혼인데, 이렇게 보면 이 세상의 모든 결혼은 문제가 있다는 말이죠. 이 세상에서는 남자와 여자가 결혼을 하는데 있어서 누가 선택을 합니까?

일단은 서로 만나서 사귀어보는데, 그리고 백일을 기념한다는 겁니다. 그리고 일주년도 기념하는데, 그러면서 각자가 비용을 다 계산한다는 말이죠. 처음 만나면 세로토닌인 도파민인지가 나와서 가슴이 뛰고 하는데,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 그게 시들해진다는 겁니다. 그러면 주로 먼저 여자 쪽에서는 다른 남자를 살펴보게 되는데, 그것을 전문용어로 '어장관리' 라고 한다는 말이죠(ㅋㅋ).

그러다가 그만 들켜서 난리가 나고 마는데, 그러면 서장훈의 물어보살에게 가서 상담을 받고 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서장훈의 답변은 명확한데, '바꿔라' 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러면 그동안 들어간 비용이 아까워서 머뭇거리게 되는데, 세로토닌이 더 이상 나오지 않아서 그만 식상해진다는 말이죠.

그러니 제 아무리 연애라고 하더라도 시간이 지나면 처음과는 달리 지루해지고 마는데, 짜릿한 맛이 감소가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만나서도 어떻게 합니까? 그냥 코를 마구 후비고 하품을 하고 다리를 벌리고 하는데, 그러면 서로가 서로에게 그만 질리고 만다는 것이죠(ㅋㅋ).

이 모든 것이 무엇인고 하니, 자기가 타인에 의해서 강제결혼이 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타인의 선택이 오게 되면, 자기 선택은 그 타인의 선택에 의해서 완전히 매몰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죠. 그러니 결국 복음에 있어서 싸움은 무엇인고 하니, "주님의 선택이 강한가? 나의 선택이 강한가?" 라고 하는, 바로 그 투쟁이라는 겁니다.

* 육체의 소욕과 성령의 소욕 !!

그것을 사도바울은 갈라디아서 5장에서 뭐라고 합니까? 육체의 소욕과 성령의 소욕과의 싸움인데, 즉 "주여,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라고 하는 것과, "백날 해봐야 소용이 없다" 라는 것과의 싸움이라는 말이죠. 왜냐하면 선택을 받은 자는 혼자 사는 게 아니라, 주님의 신부가 되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갈 5:16)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갈 5:17)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신부의 운명은 신랑이 결정하는데, 그것이 창세기 2장에 나온다는 말이죠. 누가 먼저 있었는고 하니, 아담이 먼저 창조가 되었고, 여자는 나중이라는 겁니다. 여자의 입장에서 보면, 남자라고 해서 자기와 관계가 없는 것이 아니고, 물론 진정한 남자는 예수님밖에 없는데, 인간은 후차적 존재라는 겁니다.

(창 2:18)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사람의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 선택의 결정체, '이혼 없는 혼인' !!

진정한 남자는 여자의 후손으로 태어나신 분밖에 없는데, 그분이 바로 아들이고 사람이고 남편이라는 말이죠. 우리가 구원을 받는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예수님의 신부가 되는 것, 그게 마지막 모습이라는 겁니다. 선택의 끝이라고 하는 것보다 선택의 결정체라는 표현이 더 좋은 것 같은데, 선택의 결정체는 이혼이 없는 혼인이라는 말이죠.

그러면 이혼은 어떤 경우에 발생합니까? 자기가 상대방을 선택했을 경우에만 이혼이라는 것이 성립하게 된다는 겁니다. 그렇지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주가 되시기 때문에, 영원히 헤어지지 않는 신부를 하나님께서는 제작하시고 생산을 하신다는 말이죠.

그러면 여자 쪽에서 선택한 결정권은 어떻게 해야합니까? 그것은 철저하게 무시해야 한다는 겁니다. 즉 육체의 소욕을 성령의 소욕이 언제나 항상 무시하고 들어간다는 말이죠. 왜냐하면 우리가 하는 선택은 우리의 결정에서 나오기 때문에, 주님은 그것을 일체 인정해주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러니 12제자들의 경우에, 그 제자들이 예수님을 선택했습니까? 아니면 예수님이 제자들을 선택했습니까? 누가 누구를 선택했습니까? 그것이 교재 100페이지에 나오는데, 거기에 요한복음 15장 16절의 말씀이 있는데, 누가 한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요 15:16)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과실을 맺게 하고 또 너희 과실이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니라

*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

여기에 보면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라고 하는데, 여기에서 '나'와 '너'의 자리에 '신랑'과 '신부'를 집어넣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신부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신랑이 신부를 택하여 세웠나니"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 신랑 입장에서는 신부가 있는데, 그러면 신부의 입장에서는 신랑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다는 말이죠. 왜냐하면 택하지 않았음을 현실화하기 위해서는 일체 자기가 원하는 자기의 신랑은 존재하지 말아야하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설령 존재하더라도 주님은 그것을 말살시켜버린다는 것이죠.

창세기 2장에서, 자기가 남자라고 해도 여자라고 하면, 그렇게 남자의 갈비뼈로 만들어졌을 때, 옆에 보니 누가 누워있습니까? 자기와 비슷하게 생긴 무엇인가가 누워있다는 겁니다. 그게 아담인데, 그런데 성경에서는 신랑이라고 한다는 말이죠. 여자는 자기가 최초의 창조물인 줄 알았는데, 모든 인간이 다 그러하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고 자기보다 먼저 있는 것이 있다는 말이죠. 그래서 "너는 너고 나는 나다" 라고 하면, 숫자가 하나가 됩니까? 둘이 됩니까? 그렇게 카운터를 하면 둘이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창세기 2장에서는 하나인데, 그러면 누가 양보를 해야합니까? 여자 쪽에서 양보를 해야한다는 것이죠.

(창 2:24)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그러면 여자는 자기 선택과 자기 결정을 남편의 결정에 매몰을 시켜야 한다는 겁니다. 그것을 두고 '죽는다' 라고 하는데, 즉 "너는 죽었고, 네 안에 내가 산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그러니 이것은 종교의 선택문제가 아닌데, 즉 "내가 살기 위해서 무엇을 선택할까?" 라는, 그런 차원이 아니라는 겁니다. "좋은 종교를 선택해서 천국에 가자" 라고 하는 문제가 아니라는 말이죠.

(갈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그러니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다" 라고 하는 요한복음 15장 16절의 말씀이 우리 안에 들어와야 한다는 겁니다. 어제 낮 시간에도 그런 설교를 했는데, 우리가 말씀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죠. 그게 아니고, 말씀이 우리 안에 들어와야 한다는 겁니다.

징그러운 예를 하나 들어보면, 여러분 속에 뱀이 한 마리 들어있다고 하면, 그러면 속이 꿀렁꿀렁한다는 말이죠. 그렇지요? 너무 심했나요? (ㅋㅋ) 그렇게 요한복음 5장 16절 말씀이 여러분 속에 들어있다고 하면, 여러분 속이 꿀렁꿀렁해야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내가 나를 선택하지 않았다. 나는 나로서 끝이 나고, 나를 결정한 것은 타인이었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다시 말해서, 출발점을 '나'로 시작하는 게 아니고, '타인'으로부터 시작을 하게 된다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그것이 교재 100페이지에 보면 나오는데, 즉 "성도는 선택 외의 모든 요소는 버리는 생활을 하게 된다" 라고 되어있는데, 즉 신랑이 자기를 선택한 것 외에는 모두 다 버리게 된다는 겁니다.

* 혼인에 대해서 !!

지금부터는 '혼인'에 관한 이야기를 일단 해보겠는데, 먼저 마태복음 25장을 보겠습니다. 여기 1절에 보면 "그때에 천국은" 라고 하면서 한다는 말이죠. 그렇게 해놓고, 성경을 거기를 표시해놓고, 그 다음에는 요한계시록 21장을 보겠는데, 1절과 2절입니다.

(마 25:1) 그 때에 천국은 마치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와 같다 하리니

(계 21:1)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계 21:2)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예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여기 2절을 보면, "그 예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라고 되어있는데, 이것은 분명히 혼인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렇지요? 그러니 선택에서의 결정이라는 것은 예수님을 혼자 두는 것이 아니고, 자기 아들인 예수님에게 신부를 허락하신 것으로서,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셨다는 말이죠.

* 천국은 결혼한 상태 !!

그러면 하나님이 아들을 선택할 때 그 내용 속에는 무엇이 들어있는고 하니, 아들에게 신붓감을 마련해주는 것까지 이미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서는 이야기가 끝이 났다는 겁니다. 그러니 천국은 혼인상태인데, 즉 결혼한 상태라는 말이죠. 그게 요한계시록이라는 겁니다.

그러면 이제 다시 마태복음 25장으로 돌아와서, 요한계시록에서의 천국은 신랑과 신부를 혼인잔치를 여는 것이었는데, 그렇지요? 그리고 여기 마태복음 25장에서는 "천국은 마치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와 같다 하리니" 라고 한다는 말이죠.

지금까지 강의한 것을 여기에 적용을 시켜보면, 창세기 2장에서, 여자가 만들어졌을 때 눈을 떠보니 옆에 자기보다 먼저 만들어진 인간이 있었다는 겁니다. 그러면 여자가 "뭐야, 당신?" 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여기서는 먼저 만들어진 쪽에서 말을 건네는데, 아담이 "내 뼈 중의 뼈고, 내 살 중의 살이다" 라고 한다는 말이죠.

(창 2:22)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창 2:23) 아담이 가로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칭하리라 하니라
(창 2:24)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나 하나, 너 둘", 그렇게 '나'로부터 시작해서 카운트를 하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둘이 하나가 되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에베소서 1장 4절에 보면,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라고 한다는 말이죠.

(엡 1:4)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런데 그 시작을 '나'로부터 하면 어떻게 됩니까? 1이 1로서 끝나는 것이 아니고, "나 1, 너 2, 너 3, 너 4 …",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 이 세상은 천국이 아닌데, 숫자가 1만 있는 것이 아니고, 2가 있고 3이 있고 4가 있고, 그렇게 계속해서 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이 세상은 마지막 최종상태인 천국은 아니라는 것인데, 그렇지요? 즉 마지막의 그 혼인잔치 상태가 아님을 보여준다는 말이죠. 그러므로 우리는 어서 2에서 벗어나고, 또 어서 3에서 벗어나서, 신랑과 하나가 되는 영원한 날, 그 날을 사모해야 한다는 겁니다.

* 나이는 주님과 만날 날의 삭제표시 !!

어제 그런 설교를 했는데, 나이가 70이 넘고 80이 넘으면 오히려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말이죠. 왜냐하면 나이가 점점 더 삭제되어 간다는 겁니다. 나이는 태어나서부터 계산하는 게 아니고, 주님을 만날 날이 며칠이나 남았는지, 그것으로 계산하기 때문이란 말이죠. 그래서 나이가 들면 들수록 그 숫자가 점점 더 줄어든다는 것이죠.

전에는 멀리 보이던 주님의 얼굴이 나이가 들면 들수록 가까이 보이게 되는데, 그러니 나이가 든다는 것은 주님의 해와 같은 영광에 가까이 가는 것이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 오히려 더욱 더 젊어진다는 말이죠. 이게 여러분에게 너무 무리한 위로인지 모르겠는데(ㅋㅋ), 아무튼 그렇다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어제 설교를 하면서 "시간은 과거에서 미래로 가는 것이 아니고, 미래에서 과거로 마중을 나온 것이다" 라고 했는데, 도대체 인간의 사고방식이 틀린 게 한 두 개가 아니라는 말이죠. 마귀에서 속아서 벌벌 떨고 있는 그 사고방식, 그것을 모두 다 고쳐야 한다는 겁니다.

* 남편은 하나밖에 없어 !!

그래서 사도바울은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라고 했는데, 이게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른다는 말이죠. 진짜 남편은 만나게 되면 가짜 남편은 신경을 쓸 이유가 없다는 겁니다. 물론 이 땅에 있을 때는 가짜에게 밥을 해주고 해야하겠지만 말이죠. 남편은 하나밖에 없다는 것이죠.

(고전 13:12)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그러니 자기가 선택한 결혼이라고 하면 결혼한 순간부터 이미 이혼한 상태가 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7장에 보면, 사도바울이 "믿지 않는 남자가 헤어지자고 하면 그냥 헤어져라" 라고 하는데, 그것은 헤어질 찬스라는 말이죠(ㅋㅋ). 그게 웃으면서 할 이야기는 아닌 것 같은데, 아무튼 그렇다는 겁니다.

(고전 7:15) 혹 믿지 아니하는 자가 갈리거든 갈리게 하라 형제나 자매나 이런 일에 구속 받을 것이 없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은 화평 중에서 너희를 부르셨느니라

아무튼 여기 마태복음 25장에서, 신부가 기름을 준비해야하는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그 조건을 누가 거는고 하니, 그것은 오로지 신랑 때문이라는 겁니다. 즉 "나는 나 혼자 살 운명이 아닙니다" 라는 것인데, 신부는 그것을 안다는 말이죠. "나는 나를 출발점으로 삼아서는 안 되는 존재구나" 라는 것인데, 그렇게 자기 자신을 제대로 알게 된다는 겁니다. '나'를 시작점으로 간주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죠.

그러니 우리의 살아가는 인생에 있어서 그 모든 것은 주님이 허락하신 것인데, 그것은 자기 자신을 위함이 아니고, 누구를 위함이라는 겁니까? "우리가 맞이해야 하는 신랑을 위함이고, 그것이 바로 최종적인 마지막 순간인데, 그것을 미리 앞당겨서 지금 생활화를 하자" 라는 겁니다.

* 성령의 소욕 !!

마태복음 25장에는 이렇게 나오는데, 그런데 나중에 사도바울의 서신서에 보면 무엇이라고 합니까? 성령께서 마태복음의 말씀을 우리에게 현실화를 시키는 작업을 하신다는 말이죠. 그게 '성령의 소욕' 이라는 겁니다. 우리는 현재로부터 미래에 주님을 만나려고 하는데, 그것을 성령이 막는다는 것이죠.

다시 말해서, "네가 생각하는 미래는 지금의 현재가 그 미래다" 라는 것인데, 그러니 신랑을 나중에 만나는 것이 아니고, 신랑의 영이 미리 마중을 나와서 지금 신부답게 우리를 만들어나간다는 겁니다. 그러면 여기서 '신부답다' 라는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그것은 주님이 우리를 어떻게 하시는고 하니까, "나의 선택을 부정하는 방법으로서, 나를 이미 죽은 자로 간주하는 것이다" 라고 할 수 있는데, 그렇다면 그 교훈의 결과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잊어라' 라는 것인데, 즉 "나는 나의 선택과 나의 결정의 결과로 산다는 것, 그 자체를 잊어라"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 잊어라 !!

그래서 제가 어제 "잊어라 했는데, 잊어달라 했는데" 라고 하는 새로운 찬송가를 하나 소개해드렸다는 말이죠. 가사를 조금 바꾸어보면, "나는 나를 잊지 못한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어떻게 하면 잊을까? 도저히 잊지를 못하겠다는 겁니다. 그 뒤의 가사는 생각이 나지 않는데, 나훈아에게 물어보면 된다는 말이죠(ㅋㅋ). 노래의 제목이 좋은데, '영영', 즉 '영원히' 라는 의미라는 겁니다.

실제로 구자욱이라는 목사가 그 노래의 가사를 바꾸어서 가스펠송으로 만들었는데, "믿으라 했는데, 믿어달라 했는데, 어찌하여 나는 주님을 믿지 못할까" 라고 말이죠. 그야말로 파격적이라고 할 수가 있는데, 지금도 그 노래가 유행이 되고 있다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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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영 ] 나훈아

잊으라 했는데 잊어 달라 했는데
그런데도 아직 난 너를 잊지 못하네
어떻게 잊을까 어찌 하면 좋을까
세월 가도 아직 난 너를 못 잊어 하네
아직 나는 너를 사랑하고 있나봐
아마 나는 너를 잊을 수가 없나봐
영원히 영원히 네가 사는 날까지
아니 내가 죽어도 영영 못 잊을 거야
잊으라 했는데 잊어 달라 했는데
그런데도 아직 난 너를 잊지 못하네
아직 나는 너를 사랑하고 있나봐
아마 나는 너를 잊을 수가 없나봐
영원히 영원히 네가 사는 날까지
아니 내가 죽어도 영영 못 잊을 거야
아니 내가 죽어도 영영 못 잊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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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말씀을 해드리겠는데, "내가 선택이 되었습니까?" 라고 묻지 말고, "내가 원하는 타인이 아니라 아버지가 원한 타인을 나에게 붙여주었구나" 라고, 그렇게 여기시면 된다는 말이죠. 왜 그렇습니까?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내가 원하지 않는 타인인 악마와 나는 결탁이 되어있었기 때문이다" 라고 할 수 있다는 말이죠.

그러니 기존의 결탁된 악마라는 타인 대신에 주님이라는 타인이 찾아오셨는데, 그 타인을 하나님께서 선택하셨다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자기 미래에 대한 모든 결정권은 일체 무효화가 된다는 것이죠.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평소에 선택을 하지 않는다는 게 아니고, 선택을 하는데, 왜냐하면 육신은 그대로 있으니 말이죠.

그래서 육신의 소욕과 성령의 소욕이 우리 내부에서 충돌하고 있는데, 과연 누가 이길까요? 마귀가 이깁니까? 주님이 이깁니까? 성령은 주님의 영인데, 그 영이 마귀에게 속한 육신을 능히 이기신다는 겁니다. 그래서 매사가 우리의 뜻대로 되지 않게 하는 기쁨을 주신다는 말이죠.

(갈 5:17)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마태복음 25장을 다시 해보면, 기름을 준비하는 것은 누가 결정을 합니까? 그것은 오시는 신랑을 위함이지, 신부 자신을 위함이 결코 아니라는 겁니다. 그래서 10명의 신부들 가운에서, 자기를 위해서 기름을 준비한 5명은 그만 탈락을 했다는 겁니다. 그렇지요?

주님을 위한다고 백날을 해도, 결국 최종적인 선택은 어떻게 되는고 하니, 신부 5명이 기름을 준비한 그 타이밍을 노려서 급습을 하듯이 신랑이 찾아와 버렸다는 말이죠. 왜냐하면 그냥 놔두면 10명이 다 기름을 준비할 것이 뻔하기 때문인데, 즉 택한 백성만 건지신다는 겁니다.

* 선택의 두 가지 양상 !!

칠판에 크게 써보겠는데, 선택에는 두 가지의 양상이 있는데, 먼저 하나는 구원이 되기 위한 선택이 있는 동시에, 버림을 받기 위한 선택이 있다는 말이죠. 가롯유다가 거기에 해당된다는 겁니다. 이런 선택을 하시는 분을 주님이라고 하는데, 그래서 주님에게 누구를 선택하고 누구를 버릴 것인지, 거기에 대해서 따지면 안 된다는 것이죠.

우리는 선택권이 없는데, 그렇게 선택권이 없는 자가 선택권을 가지신 분에게 "왜 나를 지옥에 보냅니까?" 라고 따지지 말라는 겁니다. 그것은 자기 주제의 범위를 벗어난 것이란 말이죠. 다만 자기 이전에 이러한 주님이 있다는 것에 대해서 감격스러워해야 한다는 말이죠.

자기 선택을 개무시하고, 자기보다 먼저 새로운 타인이 자기를 선택하신다는 사실, 그것 자체를 고마워하고 감사한다고 하면, 그러면 자기 인생의 미래에 대해서 자기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겁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이것보다 더 감격스러운 일이 있을 수 있느냐는 말이죠.

* 그놈의 책임감 때문에 !!

인생이 두고두고 혼란스럽고 걱정이 늘어지는 것은, 그렇게 무거운 짐을 지고 가는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내 인생은 끝까지 내가 책임져야 한다" 라고 하는, 그 책임감 때문이라는 겁니다. 물론 그것은 마귀가 시킨 것인데, 그렇게 마귀가 우리에게 시킬 때, 즉 "네 인생은 네 것이지, 믿을 만한지 그렇지 않은지 네가 잘 알아서 결정해라" 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러면서 뭐라고 합니까? "너는 의롭기 때문이다, 그것이 너의 자존심이야" 라고 하는데, 그놈의 자존심 때문에 인생이 얼마나 꼬이는지 모른다는 겁니다. "교회를 가도 잘 골라서 가라. 전통이 있는 교회를 가야지, 엉뚱한 곳에 가면 안 된다" 라고 나온다는 말이죠.

마태복음 22장을 살펴보기 이전에 교재를 보겠는데, 지금 시간은 없고 할 것은 많아서 왔다갔다하고 있는데, 힘이 들어도 좀 따라와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이게 십자가가 마을 사이트에 다 올라가니까 나중에 다시 살펴보면 된다는 겁니다. 물론 여러분은 그럴 필요가 없지 싶은데 말이죠(ㅋㅋ).

앞선 교재 100페이지에서는 "우리의 삶 속에서 주님의 선택 외에 다른 요소는 버리도록 했다" 라고 했는데, 아직은 기억이 나지요? 그러면 교재 101페이지를 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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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탄은 이러한 하나님의 선택 행위를 가지고 시비를 거는 것이다. 인간 세계를 선악 체제로 물들여 놓고 인간들과 합세해서 하나님의 일방적 선택 행위에 반기를 들게 한다. 하나님의 선택 행위를 무효화시켜 달라고 요청한다. 하나님의 선택 행위가 불합리하고 공평치 못한 처사라고 항변을 하게 한다. 그리고 선악에 대해서 인간에게도 가능성과 여지를 남겨 달라는 것이다. 인간에게 들어 있는 신적인 요소의 가치를 인정해 달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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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망하는 자들 !!

인간은 자율성을 앞장세워서, "우리 인간에게도 신적인 요소가 있으니, 그것을 인정해달라" 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리고 여기에 고린도후서 4장 3절과 4절의 말씀이 나오는데, 3절에서 "만일 우리 복음이 가리웠으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운 것이라" 라고 한다는 겁니다.

(고후 4:3) 만일 우리 복음이 가리웠으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운 것이라
(고후 4:4) 그 중에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이게 무슨 의미입니까? 복음을 전하면 필히 망하는 자들이 나타난다는 말이죠. 그러니 주님의 선택행위는 필히 짝을 이룬다는 것인데, 구원이 되기 위해서 선택이 되는 자들도 있지만, 버려짐을 당하기 위해서 선택이 되는 자들도 있다는 겁니다. 그것이 복음을 전하는 현장에서 나타나게 되는데, 이것을 가지고 고린도후서 4장에서는 '망하는 자' 라고 한다는 것이죠.

그리고 여기 4장 4절에서 "그 중에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 라고 하는데, 그렇게 하는 자들이 있도록 하는 분이 누구라는 겁니까? 그분이 바로 우리 주님이라는 겁니다. 즉 "너는 마귀의 말이나 들어라" 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 예시된 가롯유다 !!

다시 말해서, "너는 마귀의 권세에서 벗어나지마" 라고, 누가 그렇게 한다는 겁니까? 우리 주님이 그렇게 하신다는 겁니다. "망하는 자는 복음을 알아들으면 안 돼. 너는 알아듣지마" 라고, 그것은 이미 주님께서는 가롯유다를 통해서 예시를 했다는 말이죠. 즉 예를 들어서 보여주셨다는 것이죠.

그러니 우리는 여기에 대해서 기분 나쁘게 여기지 말고, 즉 "내 결정을 대신해서 다른 분이 결정했다" 라는 것에 대해서, 그런 분이 따로 있다는 것 자체가 우리가 일평생을 살아가면서 두고두고 감격해야하는 놀라운 일인데, 그런 순간에 우리가 돌입되어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 우리는 "내가 왜 진작에 이것을 몰랐을까?" 라고 감격하면서 가슴을 쳐야하는데, 통탄해하면서 가슴을 치는 것이 아니고 말이죠. 그러면 자기가 할 것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내가 할 것이 없다" 라고 하는, 이 자유 만만함을 그동안 누가 빼앗아갔다는 겁니까? 마귀가 빼앗아 갔다는 겁니다.

* 그래, 나는 무책임해 !!

그러면 주변에서 뭐라고 합니까? "당신은 무책임하게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는가?" 라고 하는데, 그러면 "나는 그렇게 무책임해" 라고 하면 된다는 말이죠. "부모로서 그렇게 무책임할 수가 있는가?" 라고 하면, "그래, 나는 원래 그래" 라고 하면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게 아니고, "그래도 나는 내가 할 도리는 다 하고 있어" 라고 한다면, 그것은 또 다시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는 것이 된다는 말이죠. 그것은 주님이 벗겨주신 것인데, 그것을 자기가 다시 짊어지지 말라는 겁니다. 왜 그렇게 또 다시 짐을 짊어지려고 하느냐는 말이죠.

그래서 우리는 "그래, 나는 무책임해" 라고 하면 되는데, 하지만 우리가 그렇게 살아가도록 하는 것은 예수님의 창세 전 선택 때문이라는 겁니다. 우리는 혼자 있는 게 아닌데, 신랑이 그렇게 만들었다는 말이죠. 나중에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고, 이미 벌써 그렇게 되었다는 것이죠.

다시 마태복음 22장을 보겠는데, 1절과 2절입니다.

(마 22:1) 예수께서 다시 비유로 대답하여 가라사대
(마 22:2) 천국은 마치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과 같으니

* 최종상태인 혼인이 곧 천국 !!

여기서 천국이란 것은 마지막 최종적인 상태라고 보면 되는데, 그것을 말씀 속에 미리 담아놓았다는 겁니다. 그 천국이 어떠한고 하니, 2절에서 "천국은 마치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과 같으니" 라고 한다는 말이죠. 아까 선택의 결정체는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혼인잔치, 즉 결혼이라는 겁니다. 이것은 창세기 2장의 완성인데, 즉 한 몸을 이룬다는 겁니다.

(창 2:24)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그런데 통일교의 경우에는, '나'를 주인공으로 해서 회복시켜주겠다고 하면서 사람들을 꼬드겼다는 말이죠. 그 통일교가 어디서 나왔는고 하니, 개혁주의 신학에서, 즉 기존의 교회에서 나왔다는 겁니다. 그래서 회복신학을 이야기하면, "우리교회에서 가르치는 것과 똑같네" 라고 한다는 것이죠. 자기 자신을 버리지 못하니, 그런 통일교에 빠질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게 아니고, 눈을 떠보니 자기보다 먼저 계시는 타인이 있더라는 말이죠. 그분이 바로 예수님인데, 바로 그 예수님을 위한 혼인 잔치라는 겁니다. 그런데 그 예수님, 즉 아들의 혼인 잔치에 대해서 누가 반발을 하면서 나옵니까?

임금님이 사람들을 초청했는데, 어떤 사람은 밭에 일하러 가고, 또 어떤 사람은 장사를 하러 가버리고 만다는 겁니다. 그리고 남은 자들은 그 임금의 종들을 잡아서 죽여버렸다는 말이죠. 그러자 임금님이 어떻게 나옵니까? 그만 화가 나서 군대를 보내서 사람들을 죽이고, 또 그 마을을 불사르고 말았다는 겁니다.

(마 22:3) 그 종들을 보내어 그 청한 사람들을 혼인 잔치에 오라 하였더니 오기를 싫어하거늘
(마 22:4) 다시 다른 종들을 보내며 가로되 청한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내가 오찬을 준비하되 나의 소와 살진 짐승을 잡고 모든 것을 갖추었으니 혼인 잔치에 오소서 하라 하였더니
(마 22:5) 저희가 돌아보지도 않고 하나는 자기 밭으로, 하나는 자기 상업차로 가고
(마 22:6) 그 남은 자들은 종들을 잡아 능욕하고 죽이니
(마 22:7) 임금이 노하여 군대를 보내어 그 살인한 자들을 진멸하고 그 동네를 불사르고

* 임금님은 왜 대노했는가?

그러면 여기서 제가 질문을 던지겠는데, 임금님이 왜 노했느냐는 말이죠. 이게 쉽지 않은 문제인데, 자기 아들의 혼인잔치에 사람들이 오지 않는다고 해서 왜 화를 내셨느냐는 겁니다. 오늘 열심히 공부를 했으니 누가 적절한 답변을 좀 해주었으면 고맙겠는데 말이죠.

다들 저에게 미루는 눈치들인데(ㅋㅋ), 그러면 제가 답변을 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임금님의 요구가 사람들에게는 무리하게 들리는데, 그들은 임금님이 무리한 요구를 했다고 여겼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들은 임금님의 소식을 전한 자들을 죽였는데, 그것은 임금님이 자기들의 그 무엇을 모독했기 때문이라는 말이죠.

그것이 바로 인간의 선택권인데, 즉 임금님이 인간의 선택권을 모독했다는 겁니다. 이렇게 여러분이 오늘의 강의전체와 연계를 시켜보라는 말이죠. 우리 인간은 모든 출발점을 '나'로부터 하는데, 그래서 예수를 믿던 부처를 믿던 누가 알아서 선택을 하는고 하니, 미래는 자기가 알아서 자기가 선택을 한다는 겁니다.

그렇게 자기를 출발점으로 삼아서 살아가고 있는데, 그런데 예수님께서 아버지로부터 선택을 받아서 이 땅에 오시니, 예수님이 아닌 자기가 알아서 선택을 하도록 하는 마음을 준 자가 따로 있었는데, 즉 인간의 배후에는 악마가 있었다는 겁니다. 그런 악마가 인간을 사로잡았기 때문에, 인간은 그 악마의 선택에서 벗어나지를 못했다는 것이죠.

악마는 하늘에서 천사와 맞대결을 펼쳤는데, 그 정도 수준이라면 인간은 그냥 자기 노예로 삼을 수가 있다는 겁니다. 물론 그것을 몰랐는데,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기 이전까지는 말이죠. 인간들은 그동안 예수님을, 즉 메시야를 빼놓고 누구를 섬겼는고 하니, 하나님을 섬겼다는 겁니다.

하나님과 다이렉트로 만나기를 원했는데, "절대적이고, 대자대비하시고, 무한하시고, 무소부재하시고" 라고 하면서 말이죠. 그런 용어를 남발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그렇게 믿는 자기 자신을 잊을 수가 없다는 겁니다. '잊어라' 라고 했는데, 그러나 인간은 자기 선택을 잊을 수가 없다는 것이죠.

바로 그 점을 자극하는데, 누가 말인가요? 임금님이 그렇게 하신다는 말이죠. 그래서 아무런 협의도 없이 무조건 자기 아들의 혼인잔치에 참석하라고 한다는 겁니다. 예수님의 아버지가 말이죠. 그것을 거부하니 임금님을 화를 낼 수밖에 없는데, 왜냐하면 그게 바로 최종상태인 천국이라는 겁니다.

선택의 끝은 아들과의 혼인인데, 이것이 누구의 뜻이라는 겁니까? 아버지의 뜻이라는 말이죠. 자기가 선택한 혼인은 무효인데, 그래서 우리는 아버지가 선택한 타인을 용납할 수가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나는 저 사람의 마음을 받지 않겠다. 저 사람을 거부하겠다" 라고 할 수가 없는데, 이미 아버지가 선택한 자이기 때문에 받을 수밖에 없다는 말이죠. 인간에게 있어서 자기 선택권은 없다는 겁니다.

*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느냐?

계속해서 마태복음 22장을 보면, 그렇게 해서 아무나 혼인잔치에 오게 되는데, 그런데 어떤 일이 생기는고 하니, 예복을 입지 않는 자가 있었다는 말이죠. 그래서 임금님이 그 사람을 보고 뭐라고 합니까? 12절에 보면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느냐?"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냥 아무나 오라고 해놓고, 그런데 예복을 입지 않았다고 시비를 건다는 말이죠.

(마 22:8) 이에 종들에게 이르되 혼인 잔치는 예비되었으나 청한 사람들은 합당치 아니하니
(마 22:9) 사거리 길에 가서 사람을 만나는 대로 혼인 잔치에 청하여 오너라 한대
(마 22:10) 종들이 길에 나가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만나는 대로 모두 데려오니 혼인 자리에 손이 가득한지라
(마 22:11) 임금이 손을 보러 들어올새 거기서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을 보고
(마 22:12) 가로되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느냐 하니 저가 유구무언이어늘
(마 22:13) 임금이 사환들에게 말하되 그 수족을 결박하여 바깥 어두움에 내어 던지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하니라
(마 22:14)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

여기에서 예복이라는 것은 일종의 유니폼인데, 즉 하나로 통일된 옷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한 사람인 신랑을 위한 예복이라는 말이죠. 그런데 그 신랑을 위한 예복을 입지 않았다고 하는 것은, 자기의 자율성을 버리지 아니하고는 최종적인 혼인잔치에 참석할 수가 없다는 겁니다.

* 주님은 누구인가?

그러면 성령께서 하시는 일은 무엇인가요? 인간의 자율성, 그게 육신의 소욕인데, 그것을 성령께서는 계속 공격해서 무너뜨린다는 말이죠. "나는 너보다 낫다" 라고 개인과 개인을 비교하는 것이 아니라, "나와 혼인을 한 그 타인은 누구인가?" 라고, 그분이 바로 주님인데, 그러니 "주님은 누구인가?" 라고, 그렇게 같은 목소리가 나와야 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최종상태인 천국에서 한 분의 신랑을 모시는 여러 명의 신부가 되는 것인데, 12명의 제자가 있지만 나중에 11명의 제자가 되는데, 그들이 누구만 섬기게 됩니까? 오직 주님만 섬기게 된다는 겁니다. 주님은 그렇게 해서 구원을 받기로 작정된 자들만 뽑아낸다는 것이죠.

* 청함보다 창세 전의 택함이 우선 !!

이제 마지막으로 여기 13절을 보면, 임금님이 "그 수족을 결박하여 바깥 어두움에 내어 던지라" 라고 하는데, 그 바깥 어둠을 무엇이라고 합니까? 그것을 지옥이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지옥의 특징 중의 하나가 조명시설이 별로 좋지 않다는 점인데, 그런 어둠이 지옥이라는 말이죠.

그리고 14절에 보면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 라고 하는데, 즉 청함보다는 창세 전의 택함이 우선이라는 것인데, 그런데 그 택함을 적용시키는 것은 우리가 아니고 오직 신랑밖에는 없다는 겁니다. 그게 바로 선택의 의미라는 말이죠.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마귀에게 속음으로서 어떤 점이 문제가 있는지를 살펴보았습니다. 우리의 구원보다도, 우리가 살고자 하는 것보다도 하나님 아버지께서 예수님을 선택했다는 것이 앞섰음을 잊지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2023,4,1 오후 8시에 마침.

이런 강의를 접할 수 있다는 것이 신기할 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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