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강의

빼앗긴 나-지옥하나님22

아빠와 함께 2023. 3. 23. 21:13

[23 대구강의] 지옥의 하나님 22 - 빼앗긴 나

23,03,06 강의 : 이근호, 정리 : 구득영

* 주의 전쟁에 동원된 제자들 !!

오늘은 교재 96페이지부터 하겠습니다. 여기 작은 제목이 '주의 전쟁에 동원된 제자들' 이라고 되어있는데, 이 제자는 신약에서만 나타나고 구약에서는 없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제자' 라고 하면, 우리는 그 말만 들어도 엄청난데, 주님께서 이렇게 친히 따로 뽑았다고 하는 것은, 같은 인간들의 무리에서 특수한 인간들로 따로 분류시키겠다는 의미라는 말이죠.

어떤 특정한 사람의 제자가 되는 것도 참 대단한데, 그런데 주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 그것은 주님의 영원성을 제자들이 그대로 물려받는다는 겁니다. 그래서 인간으로 받을 수 있는 최고의 승진, 최고의 혜택은 무엇인고 하니, 주님의 제자가 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는 말이죠.

그런데 이렇게 주님의 제자가 되면 해야할 일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전쟁' 이라는 겁니다. 주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굉장히 기분이 좋은 일임에 분명한데, 그런데 제자가 되면 전쟁에 투입이 된다는 말이죠. 그것이 누구의 전쟁이고 하니, '주님의 전쟁' 이라는 겁니다.

여러분이 알고 있지 싶어서 나가보겠는데, 이스라엘은 전쟁을 하는 민족이란 말이죠. 이스라엘은 이름 자체가 '싸운다' 라는 의미인데, 이 세상의 모든 것들과 싸운다는 겁니다. 예수님은 그런 이스라엘로 오셨고, 그래서 반드시 전쟁을 하게 된다는 말이죠. 그런데 신약성경에서는 '인간 대 인간'의 전쟁은 인정하지 않는데, 인간들끼리의 생존투쟁은 주님이 벌이시는 전쟁의 대상이 아니라는 것이죠.

* 사람들과 상대하지 마라 !!

신약에서의 전쟁은 예수님과 사단의 전쟁인데, 여기에서 인간은 빠진다는 겁니다. 이 주님의 전쟁에는 제자들을 투입하게 되는데, 그렇다면 제자들은 사람들과 전쟁을 벌이면 안 된다는 말이죠. 그렇지요? 그래서 마태복음 10장에서 뭐라고 합니까?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해서 받아들지 않으면, 그러면 그냥 웃고 돌아서서 나오면 된다는 겁니다.

(마 10:13) 그 집이 이에 합당하면 너희 빈 평안이 거기 임할 것이요 만일 합당치 아니하면 그 평안이 너희에게 돌아올 것이니라
(마 10:14) 누구든지 너희를 영접도 아니하고 너희 말을 듣지도 아니하거든 그 집이나 성에서 나가 너희 발의 먼지를 떨어 버리라

그러니 어느 교단이 진짜인지, 장로교인지 성결교인지, 그리고 기독교가 옳은지, 불교가 옳은지, 이슬람교가 옳은지, 그런 것을 가지고 싸울 이유가 없다는 말이죠. 그런데 이슬람교는 보면 인간들끼리의 전쟁을 치열하게 하고 있다는 겁니다. 특히 아프가니스탄이나 이란의 경우를 보면 말이죠.

이것을 가지고 '구약적이다' 이라고 할 수가 있는데, 구약에서는 '인간 대 인간'으로 싸운다는 겁니다. 구약에서 전쟁의 주체는 예수님이 아닌데, 이스라엘이 다른 나라들과 싸운다는 말이죠. 이것을 다음과 같은 뉘앙스로 보면 되는데, "아직 도달하지 않았다" 라는 겁니다. 이것을 두 글자로 '과정' 이라고 할 수가 있는데, 즉 어떤 절차 속에 놓여있고, 그래서 당연히 미흡하다는 말이죠.

* 구약에서의 전쟁 !!

우리가 교재 96페이지에 오기까지 구약전쟁에 대해서 해왔는데, 사울이 한 것도 구약전쟁인데, 사울은 사람과 상대를 했다는 겁니다. 그 대상이 아말렉의 아각 왕이었다는 말이죠. 그리고 여호수아도 가나안의 토착민들과 상대를 했는데, 물론 아브라함도 사람과 상대를 했다는 겁니다.

이스라엘이 남북으로 갈라졌을 때도 남쪽과 북쪽이 서로 싸웠는데, 그리고 주변의 나라들 중에서는 아람 나라와 많이 싸웠다는 것이죠. 그게 지금의 시리아인데 말이죠. 그 이전인 다윗 때는 블레셋과도 많이 싸웠는데, 그러니 전부가 다 사람과 상대를 했다는 겁니다.

* 그런데 다니엘서에 들어오면 !!

그런데 다니엘서에 들어오면, 이 다니엘은 사람과 싸우지를 않는다는 말이죠. 드디어 짐승과 싸우게 되는데,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과 싸운다는 겁니다. 그러면 다니엘은 과연 무엇을 가지고 있었습니까? 이 다니엘이 태권도를 잘 합니까? 아니면 칼을 잘 다룹니까? 다니엘이 가지고 있던 무기는 과연 무엇이었던가요?

메대의 다리오 왕이 다니엘을 보고, "네가 나에게 절하지 않던지, 혹은 나 외에 다른 것들에게 기도를 하던지 하면 사자 굴에 집어넣는다" 라고 했는데, 거기에 대한 다니엘의 대처는 무엇입니까? 다니엘이 뭐라고 하는고 하니, "그러면 넣어라" 라고 나온다는 말이죠.

(단 6:13) 그들이 왕 앞에서 대답하여 가로되 왕이여 사로잡혀 온 유다 자손 중에 그 다니엘이 왕과 왕의 어인이 찍힌 금령을 돌아보지 아니하고 하루 세 번씩 기도하나이다
(단 6:14) 왕이 이 말을 듣고 그로 인하여 심히 근심하여 다니엘을 구원하려고 마음을 쓰며 그를 건져 내려고 힘을 다하여 해가 질 때까지 이르매
(단 6:15) 그 무리들이 또 모여 왕에게로 나아와서 왕께 말씀하되 왕이여 메대와 바사의 규례를 아시거니와 왕의 세우신 금령과 법도는 변개하지 못할 것이니이다

그리고 앞선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의 경우에는, 다니엘의 세 친구가 우상에게 절을 하지 않으니까 그들을 죽이려고 했는데, 그러자 세 친구가 어떻게 나왔습니까? "하나님, 도와주세요" 라고 했습니까? 그게 아니고, "그러면 죽여라" 라고 한다는 겁니다. 뜨거운 불 속이든 어디든 들어가겠다고 나오는데, 그것은 인간과의 싸움에서 점점 빠져나오고 있음을 보여준다는 것이죠.

(단 3:16)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왕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느부갓네살이여 우리가 이 일에 대하여 왕에게 대답할 필요가 없나이다

-----------------------------
※ 다니엘은 이스라엘의 왕족으로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에 의해 포로로 잡혀갔다. 그곳에서 신바벨론 제국의 마지막 벨사살 왕, 메대의 다리오 왕, 통일된 메대 바사 제국의 고레스 왕, 그렇게 4명의 왕들 밑에서 일을 하였다.
1. 느부갓네살(느부갓네살 2세라고도 함) - 느부갓네살 왕은 주전 604년부터 주전562년까지 통치했다. 바벨론의 1대 왕은 나보폴라살이었다. 주전 605년에 애굽과 싸워 이겼고, 이 승리로 주위 나라의 주도권을 잡게 되었다. 이스라엘의 왕 여호야김왕 3년(주전 605년)에 다니엘을 비롯한 이스라엘의 왕과 귀족들을 포로로 잡아갔다. 그는 정금, 은, 놋, 철, 흙으로 되어진 큰 신상을 꿈에서 보았는데, 그 꿈을 해석해주었던 다니엘을 총리로 세웠다.
2. 벨사살 - 신바벨론 제국의 마지막 왕으로, 주전 553년에서 539년까지 아버지와 함께 나라를 다스렸다. 다니엘서 5장은 마지막날 밤의 연회에 대해서 기록하는데, 연회 도중에 한 손가락이 나타나서 벽에 '메네메네데겔 우바르신'이라고 썼다. 이것을 다니엘은 하나님의 심판이 임한다는 의미로 풀이를 했고, 결국 그날 밤 바사(페르시아)가 바벨론을 함락시켰으며, 벨사살 왕은 죽임을 당했다.
3. 다리오 - 메대(메디아) 사람으로서, 다니엘서에만 나오는 왕이다. 아버지와 함께 나라를 다스렸던 벨사살이 죽임을 당하고 바벨론이 함락된 이후에, 바벨론의 분봉왕이 되어 2년을 통치했다. 실제적인 왕은 페르시아의 고레스였다. 다니엘을 사자굴에 던져 넣도록 명령했으며(단 6:16), 거기서 살아나온 다니엘을 총리로 세웠다.
4. 고레스(키루스) - 주전 559년 아버지의 뒤를 바사의 왕이 되었다. 9년 후에 메대 왕국을 정복했고, 주전538년 칙령을 반포하고 유대인들을 고향으로 귀환시켰다. 느부갓네살에 의하여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던 다니엘은 이 고레스왕의 원년까지 왕실에서 봉사했다(단1:21, 6:28, 10:1). (엘린전원교회)
-----------------------------

* 고달픈 인생, 그 이유는?

그러면 지금 우리의 인생이 이렇게 고달픈 이유가 무엇입니까? 누구와 싸운다고 고달프냐는 겁니다. 유치원에 가지 않겠다고 하는 손자와 싸운다고 할아버지는 힘을 다 뺀다는 말이죠. 그리고 선생님은 "유치원은 이쪽이다" 라고 하는데, 그러면 아이는 유치원이 없는 쪽을 보면서, "저쪽으로 보내주세요" 라고 하면서 서로 싸운다는 겁니다.

그러니 모든 것이 나름대로의 싸움인데, 누구를 위한 싸움인가요? 각자 자기를 위한 싸움이란 말이죠. 자기의 독립을 위해서, 자기 몸의 편안함을 위해서 끊임없이 싸운다는 겁니다. 그런데 정작 남는 것은 무엇인고 하니, 망가진 자기의 몸인데, 그게 우리가 살아가는 각자의 인생이라는 말이죠.

이것을 두고 "사람에게 치였다", 혹은 "사람에게 시달렸다" 라고 하는데, 그러니 우리 인간은 평생을 주변의 자기와 가까운 자들에게 치면서, 혹은 시달리면서 살아간다는 겁니다. 비단 이태원 압사사고만 그런 것이 아니고, 우리 인간은 이렇게 주위 사람들에게 압사를 당해서 죽는다는 말이죠.

그렇다고 해서 그들과 협력하지 않을 수가 있습니까? 그럴 수가 없는데, 왜냐하면 그렇게 하면 밥을 먹고 살아갈 수가 없다는 겁니다. 그러니 계속해서 치이면서도 그쪽 세계에서 발을 빼내지 못한다는 말이죠. 그리고 그것이 바로 우리 인간의 한계라는 것이죠.

* 나의 전쟁 VS 주님의 전쟁 !!

그래서 구약의 전쟁은 무슨 전쟁이고 하니, '나의 전쟁' 이라고 할 수 있는데, 즉 자기가 살기 위해서 벌이는 전쟁이라는 겁니다. 오늘날의 현대인들이 그런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죠. 이 '나의 전쟁'을 두 가지 선으로 설명을 해보면, 먼저 하나는 구약에서 계속해서 시간이 흘러가는데, 어디로 가는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흘러간다는 겁니다.

그것을 과거에서 미래로 간다고 하는데, 그런데 인간은 그 미래가 어디인지는 모른다는 말이죠. 여기서 중요한 것은 "과거에서부터 흘러왔기 때문에 지금의 여기에 내가 있다" 라는 것인데, 이것이 바로 구약의 전쟁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이 전쟁은 '나의 전쟁' 인데, 즉 "내가 나를 지키지 않으면 아무도 나를 지켜주지 않는다" 라는 것, 그게 구약의 전쟁이라는 말이죠.

그런데 마지막 때가 되면 하나로 흘러오던 이 선이 위로 올라간다는 겁니다. 그렇게 올라가면, 거기에는 무엇이 있는고 하니, 거기에는 점선으로 되어 있다가 실선이 되는 것이 있는데, 이게 바로 천국이라는 말이죠. 즉 마지막에는 하늘나라로 올라간다는 겁니다.

제가 강의 처음에 제자를 이야기하면서, 그 제자가 누구의 제자라고 했습니까? 사람의 제자가 아니고 하나님의 제자라고 했다는 말이죠. 소크라테스나 공자나 부처의 제자 정도가 아니고, 예수님의 제자라는 겁니다. 그것을 마지막 때에 예수님이 시작을 하셨다는 말이죠. 즉 자기 제자를 뽑아서 자기 백성으로 만드는 작업, 그것을 하나님이 사람이 되셔서 실시를 하셨다는 겁니다.

* 나는 너희들이 모르는데서 왔다 !!

성경은 예수님이 하늘에서 오셨다고 하는데, 그런데 요한복음 12장(?)에서 예수님이 뭐라고 하시는고 하니, "나는 하늘에서 내려왔다" 라고 하시면서, 또한 "나는 너희들이 모르는데서 왔다" 라고 하신다는 말이죠. 그리고 "나는 너희들이 살고 있는 이 땅에 온 것이 아니다" 라고, 그렇게 말씀하신다는 겁니다. 그러면 인간의 모든 종교는 헛수고가 되고 만다는 것이죠.

(요 6:38) 내가 하늘로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 불연속성 !!

인간의 종교는 밑에서 위로 올라가는데, 즉 자기 전쟁을 시작하면서 위로 올라간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게 빨간색이 아니고 파란색이라는 말이죠. 그런데 빨간 노선이 오게 되면, 이 파란 노선은 빨간 노선에 의해서 토막이 나고 만다는 겁니다. 이것을 '불연속성' 이라고 할 수 있는데 말이죠.

제가 왜 '불연속성' 이라는 어려운 용어를 사용하는고 하니까, 시간이 오다가 예수님에 의해서 그만 조각이 나고 마는데, 마치 단단한 엿가락을 땅에 패대기를 치면 그만 박살이 나듯이 말이죠. 그러면 그 조각을 찾아서 맞출 수 없다는 겁니다. 접시도 그렇고 말이죠. 그렇게 시간이 끊어지는데, 그래서 제가 이것을 '불연속성' 이라고 했다는 겁니다.

* 주님, 저는 어떻게 살면 됩니까?

이것을 쉽게 풀이하면, 먼저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지는데, "주님, 저는 어떻게 살면 됩니까?" 라고 말이죠. 여기에 대한 신약의 답변은 무엇인고 하니, "네가 산다고? 누구 마음대로?"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주님, 저는 어떻게 살면 됩니까?" 라고 하는 것은, 자기는 당연히 산다는 것인데, 그것이 연속성이라는 말이죠. 즉 "나는 오늘도 살고 내일도 산다" 라는 겁니다.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우리 인간들은 연속적으로 생각하는데, 왜냐하면 우리는 이 파란색의 노선에 있다는 것이죠. 이 파란노선은 연속적이니 말이죠. "주님, 저는 어떻게 살면 됩니까?" 라고 묻는 것은, "어떻게 하면 바르게 살겠습니까?", 혹은 "어떻게 살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가 있습니까?" 라는 의미인데, 그게 궁금하다는 겁니다. 자기는 절이 아니라 교회에 다니니까, 그렇게 나온다는 말이죠.

* 네가 누구 마음대로 살아?

하지만 주님은 그 바탕을 보시는데, 그래서 "네가 살아? 누구 마음대로 살아?" 라고 하신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그 질문의 의도는 무엇인고 하니, 자기가 지금 산다는 것을 기정사실로 여기고, 어떻게 하면 행복하고 바르게 살 것인지를 묻고 있다는 것이죠. 그렇다면 이 속성은 어디서 나온 겁니까? 도대체 어떤 속성이 가속도를 낸 것이냐는 말이죠.

그것은 바로 자기가 평소에 가지고 있던 '나의 전쟁', 즉 자기가 살고 싶어하는 자기 전쟁의 버릇을 가지고 그대로 주님에게 들이박았다는 겁니다. 정작 주님이 누구인지도 모르면서 말이죠. 자기를 도와달라고 하는데, 주님이 왜 도와주어야 하느냐는 겁니다.

* 불연속성의 이스라엘 역사 !!

그러니 시간의 연속성에 있는 '나의 전쟁', 이것부터 주님은 뜯어고치신다는 말이죠. 그 대상이 누구인고 하니, 바로 제자들이라는 겁니다. 이것이 신약의 전쟁인데, 이것을 방금 이야기한 두 개의 선으로 그림을 그려보면, 위에 있는 천국의 노선, 즉 빨간 노선의 점선이 아래의 파란 노선의 실선인 이 세상에 떨어지는데, 그것이 바로 구약의 역사, 즉 이스라엘의 역사라는 말이죠.

이게 불연속성인데, 즉 나중에 신약에 나타나는 그 불연속성이 이스라엘에게 미리 주어진다는 겁니다. 이것을 '언약사건' 이라고 할 수 있는데, 혹은 '하나님의 도우심' 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죠. 그래서 구약의 특징이 무엇인고 하니, 하나님이 자기를 한번 도와주었다고 해서, 자기가 그 하나님을 붙들 수 없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구약은 과정이라는 말이죠.

* 야, 괜찮은 분이시다 !!

여기서 '과정' 이라는 것은 완성된 것이 아닌데, 완성을 향해서 나아가고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기 전쟁, 혹은 자기 집단 전쟁, 이스라엘을 위한 전쟁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을 자꾸만 자기들 편으로 붙들려고 한다는 것이죠. "야, 괜찮은 분이시다" 라고 하면서 말이죠.

그 예가 요한복음 6장에 나오는 오병이어 사건인데, 예수님이 떡을 나누어주니, 사람들이 그 예수님을 자기들의 임금으로 삼기 위해서 쫓아다녔다는 겁니다. 즉 붙잡는다는 말이죠. 그래서 사람들이 교회에 나온다는 것은, 자기 전쟁에 유리한 괜찮은 분을 만나기 위함인데, 그렇게 해서 그분을 자기 후원자로 삼으려고 한다는 겁니다.

(요 6:15) 그러므로 예수께서 저희가 와서 자기를 억지로 잡아 임금 삼으려는 줄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 가시니라

그냥 붙잡으려고 하면 염치가 없으니, 그래서 예배에 참석을 하고, 헌금을 하고, 전도도 하고, 봉사도 한다는 말이죠. 그렇게 해서 상대방에게 좋게 보임으로서, 자기의 행복을 추구하려고 한다는 겁니다. 거기에 보탬이 되려고 교회에 나오고 한다는 것이죠. 이게 바로 종교생활인데, 자기 가정이 잘 되는, 즉 주님의 득을 좀 보자는 겁니다.

* 지루하지 않은 간증집회 !!

이것을 두 글자로 '간증' 이라고 하고, 그러면 그런 집회를 무슨 집회라고 합니까? 간증집회라고 한다는 말이죠. 문제가 참 쉽죠? (ㅋㅋ) 간증집회의 취지는 무엇인고 하니, "나는 이렇게 해서 득을 보았는데, 그러니 여러분도 저를 따라하시면 하나님에게 득을 볼 수 있습니다" 라는 겁니다. 그래서 간증집회는 지루하지가 않다는 말이죠.

예를 들어서, "암 환자가 되어서 병원에 가면 병원비가 천만원이 더 나오는데, 그런데 기도원에 가서 3일만에 나았습니다" 라고 하면, 그러면 무엇을 계산하겠습니까? 병원에서의 병원비와 기도원에 가서 드는 비용을 따져본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기적으로 나았습니다" 라고 하면서, 자기가 신앙인이라고 자랑질을 하는 이득도 생기고 말이죠.

여기서 근본적으로 더 큰 이득은 무엇인고 하니, 비용이 저렴하게 들었다는 겁니다. 물론 암 보험에 들어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그것보다 더 싸게 친다는 말이죠. 그리고 간증집회를 하면서 돌아다니면, 그 수입도 짭짤하다는 것이죠. 그러면 이게 생계수단이 될 수도 있는데, 그게 바로 '나의 전쟁' 이라는 겁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의 기본적인 모습은 자기를 부인하는 것인데, 예수님은 "너의 전쟁은 없다" 라고 하신다는 말이죠. 자기 전쟁은 구약적인 것으로, 자기가 살려고 자기 연속성을 유지하려고 한다는 겁니다. 하지만 이것은 자기 본성의 긍정이란 말이죠. 분명히 주님은 이스라엘에게 언약을 주셨는데, 그들은 그것을 붙잡으려고 시도했다는 겁니다.

* 음란하게 섬겼다 !!

예를 들어서, 구약의 기드온의 경우에, 그가 사사로서 큰 승리를 했는데, "300 VS 135,000"으로 해서, 300명이 이겼다는 말이죠. 그것도 칼을 들고 이긴 것이 아니고, 항아리와 횃불과 나팔을 가지고 이겼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기드온을 엄청나게 우러러 보았다는 말이죠.

그래서 그들은 기드온이 입었던 에봇을 섬겼는데, 그야말로 열심히 섬겼다는 겁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것을 뭐라고 합니까? "음란하게 섬겼다" 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러니 성경에서 말하는 음란은 무엇인고 하니, 상대방을 이용해먹기 위해서 그 상대방에게 최선을 다하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이죠.

(삿 8:27) 기드온이 그 금으로 에봇 하나를 만들어서 자기의 성읍 오브라에 두었더니 온 이스라엘이 그것을 음란하게 위하므로 그것이 기드온과 그 집에 올무가 되니라

자기를 위해서 철저히 모두 뽑아내겠다는 것인데, 그것이 곧 음란이라는 겁니다. 자기는 손해를 보지 않고, 상대방을 우려먹겠다는 말이죠. 그리고 이것이 간음인데, 즉 자기가 희생할 생각은 전혀 없다는 겁니다. 상대방에게 있는 것을 자기에게로 이동시키면, 자기는 성공했다고 여긴다는 말이죠.

이 기드온의 사건을 보면, 분명히 하나님은 그들을 도와주셨는데, 그런데 그들은 그 도와주심의 연속성을 유지하려고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 하늘에서 내려오는 빨간 선들을 보게 되면, 하나님께서 이렇게 사건을 주셨는데, 이것은 불연속성이라는 말이죠. 마지막 때 불연속적으로 선택하신다는 것을 미리 앞당겨서 보여주신다는 겁니다.

분명히 이렇게 불연속적인데, 그런데 그것을 받아들이는 자기 자신의 바탕은 불연속이 아니라 연속적이라는 말이죠. 마치 간증집회의 내용처럼 "내가 잘 되기 위해서 주셨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이것은 무엇인고 하니, "내가 나에게 우상이 된다" 라고 할 수 있다는 말이죠.

* 도려냄을 당한, 선지자 !!

그렇다면 이들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서 주님의 제자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다는 겁니다. 분명히 없는데, 그런데 그런 가운데 주님의 사건에 의해서, 여기 이 파란 선에서 뽑혀져 나온 자들이 있다는 말이죠. 이것을 동그라미로 표시할 수가 있는데, 그들을 '선지자' 라고 한다는 겁니다.

이들 선지자는 혈통으로나 육으로 된 것이 아닌데, 이들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이 임해서 이 연속성을, 즉 '나의 전쟁'을 도려낸다는 겁니다. 그러니 선지자는 도려냄을 당한 자들이라는 말이죠. 그래서 그들에게는 주님의 수술자국이 있는데, 즉 아담의 혈통에 주님이 칼을 대서 도려내었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렇게 도려내어진 자들은 어디에 포섭이 되는고 하니, 말씀에 포섭이 된다는 말이죠.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자기 양심으로 살아가지만, 선지자는 말씀으로 산다는 겁니다. 말씀이 없으면 끝이라는 말이죠. 말씀에 위배된 선지자는 죽는데, 그게 열왕기상 13장에 나온다는 말이죠.

* 자기 죽음으로 말씀을 증거한, 무명 선지자 !!

거기에 이름이 없는 선지자가 있는데, 하나님께서 "말씀을 전하고 나서 절대로 물이나 떡을 얻어먹지 말라" 라고 했다는 겁니다. 그런데 다른 늙은 선지자가 나타나서 그렇지 않다고 하면서 그 선지자에게 떡을 먹을 것을 권유했고, 그래서 그 선지자는 먹었다는 겁니다. 하지만 그것으로 인해서 사자가 나타나서 그만 그를 물어 죽여버렸다는 것이죠.

(왕상 13:24) 이에 그 사람이 가더니 사자가 길에서 저를 만나 죽이매 그 시체가 길에 버린 바 되니 나귀는 그 곁에 섰고 사자도 그 시체 곁에 섰더라

이것은 "성경내용이 참으로 무섭구나" 라고 하는 차원이 아니고, 오히려 죽은 선지자는 다행이라고 여겨야 한다는 겁니다. 이것은 바로 "나에게는 내일까지 살 권한이 없었구나" 라는 것인데, 그 선지자는 죽어가면서도 끝까지 그것을 증거했다는 말이죠.

그러니 이 무명 선지자의 경우에는, 자기 목숨을 위한 자기 전쟁이 아니고, 말씀 내용에 관한 전쟁에 자기가 편입이 되었다는 겁니다. 자기 온 몸으로 그것을 증거했다는 말이죠. 그러니까 성경은 우리가 생각하는, 우리의 상상과는 완전히 다른데, 즉 '나'를 위한 전쟁은 성경에 없는 이야기라는 겁니다.

* 타인이 없는 전쟁 !!

방금 이야기한 이것을 다 지우고 하나의 문장으로 압축시켜보면, 물론 그러면 어려울 수밖에 없는데, 이것을 '타인이 없는 전쟁' 이라고 할 수 있다는 말이죠. 이것이 무슨 의미인고 하니까, "나의 전쟁이 하나님에 의해서 인정을 받지 못하면, 즉 나가 없으면 남도 없다" 라는 겁니다. 그래서 타인이 없는 전쟁이라는 말이죠.

구약에서는 인간과 인간의 전쟁인데, 그런데 신약에서는 그것을 인정해주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제자들은 사람들과 상대하면 안 된다는 말이죠. 그리고 지금 우리도 구약이 아닌 신약시대를 살고 있는데, 그러니 사람들과 상대하려고 하지 말자는 것이죠.

그것이 마태복음 10장 14절에 나오는데, 그러니까 "내가 전하는 복음을 감히 듣지 않는다는 말이야? 내 말이 맞는지 당신의 말이 맞는지, 우리 시합을 해볼까?" 라고 하지 말라는 겁니다. 그냥 "안녕히 계세요. 수고하세요" 라고 하면서 돌아서 나오면 된다는 말이죠.

(마 10:14) 누구든지 너희를 영접도 아니하고 너희 말을 듣지도 아니하거든 그 집이나 성에서 나가 너희 발의 먼지를 떨어 버리라

그러면 이 '타인이 없는 전쟁' 이란 것이 무슨 의미인고 하니, "내가 없으면 남도 없다" 라고 했는데, 그렇게 남이 없다는 것은 자기도 없다는 겁니다. 그러면 "내가 없다" 라는 것이 무슨 뜻일까요? 신약에서 예수님이 오셔서 빨간 실선이 되는 시대, 구약에서는 점선이었고 말이죠.

그것은 바로 "이제는 너와 나 모두가 예수님의 적이 되는 시대에 돌입이 되었다" 라는 겁니다. 이게 무슨 말인고 하니, "내가 나를 챙긴다" 라고 하는 것은, 주님의 적이 '나'도 되고 또한 '너'도 되는데, 그러면 주님의 적을 자기가 챙기는 것밖에는 되지 않는다는 말이죠. 그렇지요?

마지막 때의 전쟁은 주님의 전쟁인데, 이 주님의 전쟁은 아담에게 속한 모든 자들의 전쟁이기 때문에, 이 전쟁에서 주님의 적들 중의 하나가 바로 '나' 자신이라는 겁니다. 그렇다면 주님의 제자가 된 자는 이 '나'를 챙겨야 합니까? 챙기지 말아야 합니까? 당연히 챙기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죠.

* 어린아이와 같지 아니하면 !!

그러니 예수님의 제자들은 "우리 중에서 하늘나라에 가면 누가 더 높습니까?" 라고 하면서 싸우면 안 된다는 겁니다. 자기 자신을 챙기지 말아야하니 말이죠.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하십니까? 자기 자신을 생각하지 않는 존재를 제자들 앞에 내세우신다는 것이죠.

그게 누구입니까? 바로 어린아이인데, 그 어린아이를 통해서 제자들을 가르치신다는 겁니다. 예수님의 자리에, 그 순간만큼은 예수님을 대체해서 자기 자신을 돌보지 못하는 어린아이를 내세우는데,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이 어린아이와 같지 않으면 하늘나라에 갈 수 없다" 라고 하신다는 말이죠.

(눅 18:17)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지금 예수님의 제자들은 전쟁 중인데, 지금 이 제자들의 전쟁이라는 것은, 다른 사람들을 보고 어떻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보고 욕하고 책망하는 전쟁이라는 겁니다. 즉 '나' 라는 존재의 연속성에 대해서 다른 사람이 아닌 자기가 시비를 거는 전쟁이라는 말이죠.

그러니 "내가 내일 또 살아야지" 라고 한다는 것은 전혀 이 시대를 분간하지 못하는 것인데, 왜냐하면 지금은 구약시대가 아니라는 겁니다. 그러한 구약시대의 과정이 아니라 지금은 이미 완료라는 말이죠. 이미 다 되었다는 것인데, 즉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것이죠.

* 타인은 세퍼트 !!

여러분이 그동안 인생을 제법 살았는데, 아닌가요? (ㅋㅋ) 그렇게 살면서 여러 가지 걱정거리와 고민거리가 많이 생겼지 싶은데, 그러면 그렇게 생기는 이유가 과연 무엇이냐는 겁니다. 그것을 "타인에게 물렸다" 라고 할 수 있는데, 그러니 그 타인이라는 것, 그게 바로 세퍼트라는 말이죠.

우리 인간이 살면서 힘들다고 하는 것은 그 타인에게 꽉 물려있기 때문인데, '나' 라는 것이 여기에 있으면, 그 '나'를 꽉 물고 있는 타인이 누구인지, 그 리스트를 지금부터 살펴보자는 겁니다. 그것이 자식이고, 그 자식의 자식인 손자라는 말이죠. 그리고 부모에게, 남편에게, 남편에게, 또한 친구에게 꽉꽉 물려있다는 것이죠.

그렇게 되면 결국 자기를 빼고는 다 타인인데, 그렇게 우리는 엮이고 엮여있기 때문에, 자기가 편하기 위해서 타인을 발로 걷어찰 수가 없다는 겁니다. 물려있으니 귀찮다고 하면서 마구 내칠 수가 없다는 말이죠. 인간은 자기 혼자 편한 것이 최고인데, 그렇지요? 우리는 그게 편하다는 겁니다.

그런데 남편이 아프다고 하면서 끙끙거리고 있으면 어떻게 됩니까? 그것이 바로 물린 것이란 말이죠. 자기가 남편의 생각을 아는 것도 아니고, 그리고 꿈속에 들어갈 수 있는 것도 아닌데, 그러니 "남편은 남편이고 나는 나다" 라는 겁니다. 그런데 남이라고 할 수 있는 남편이 왜 자기 인생을 물고늘어지느냐는 것이죠.

그러니 '나의 전쟁', 즉 '나'를 위한 전쟁에서 타인은 그만 적이 되고 마는데, 그런데 그 타인이 없으면 어떻게 됩니까? 자기를 세퍼트처럼 마구 물고늘어지는 이 타인이 없다고 하면, 자기는 밥을 먹고 살아갈 수가 없었다는 겁니다. 그러니 타인이 없으면 안 된다는 말이죠.

* 집단적 자아 동질체 !

기원전 600년경에 앗수르라는 제국이 등장하는데, 성경에도 자주 등장하는데, 그 다음이 바벨론이라는 겁니다. 그때 앗수르가 북이스라엘을 멸망시키고, 엘리트들만 뽑아서 27,000명을 포로로 잡혀갔다는 말이죠. 그리고 나서 그 앗수르의 사르곤 2세가 무슨 짓을 했는고 하니, 그 땅에 다른 민족들을 이주시켜서, 그만 피를 섞어버렸다는 겁니다.

중국에 '티벳' 이란 나라가 붙어있는데, 히말라야산맥이 있는 쪽에 말이죠. 거기는 최고 지도자 달라이라마가 신정정치를 하는데, 그런데 그 지도자를 쫓아내고 중국이 자기 나라의 한(漢)족을 이주시켜놓았다는 겁니다. 그래서 더 이상 그들이 티벳불교를 중심으로 뭉치지 못하게 만들었다는 말이죠.

그리고 그 위쪽에는 '신장 위구르' 라는 곳이 있는데, 거기도 마찬가지라는 겁니다. 이것이 다 자치구인데, 거기에도 한족을 이주시켜서 그들이 이슬람교를 중심으로 뭉치지 못하도록 만들었다는 것이죠. 그게 중국 공산당이 하는 일인데, 왜 이런 짓을 합니까? 티벳이나 신장 위구르가 종교라는 이름으로 '집단적 자아 동질체'를 구성하고 있었다는 말이죠.

이런 것은 상식적으로 알아놓으면 좋은데, 티벳에서는 달라이라마가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해서 그들을 정신적으로 지배하고 있었다는 겁니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성직자 계급과 일반백성 계급으로 나누어지는데, 그런데 여기에 한족을 집어넣는다는 것은, 그들이 이사를 와서 같이 살면서 피가 섞이는 정도가 아니고, 그들의 자아 동질체를 무너뜨려야 하는데, 그게 바로 '시민의식' 이라는 말이죠.

* 프랑스 대혁명(1789년)과 시민의식 !!

이 시민의식의 발현은 1789년의 프랑스 대혁명이라고 볼 수 있는데, 이것은 뭐냐 하면, 쉽게 말해서 "왕, 네가 뭔데?" 라는 겁니다. 제가 여러 번 이야기했지만, 이순신 장군이 죽은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게 조선을 위한 겁니까? 임금인 선조를 위한 겁니까? 왕이 지배하는 왕정체제라는 것은, 그냥 제도로서만 있는 것이 아니고, 정신적으로 왕으로 중심으로 한 거대한 몸체와 같다는 말이죠.

1789년의 프랑스 대혁명으로 인해서 시민의식이 발현했다고 했는데, 임진왜란은 1592년에 발발했으니, 200년 이전의 일이라는 겁니다. 그러면 그때 우리나라에 과연 시민의식이 있었을까요? 그때는 왕을 위해서 자기 목숨을 바치는 것을 영광스럽게 생각했다는 말이죠.

성경에 메시야가 나오는데, 그 뜻이 무엇인고 하니, 기름부음을 받은 왕이고, 제사장이고, 선지자라는 겁니다. 그러니 메시야는 왕인데, 이렇게 왕이 있으면 시민의식은 용납되지가 않는다는 말이죠. 시민의식이 무엇인고 하니, 즉 "인간 위에 인간 없고, 인간 밑에 인간 없다" 라는 겁니다. 그래서 지도자인 대통령을 뽑을 때는 국민들이 투표를 해서 뽑는다는 말이죠.

* 왕, 당신이 뭔데?

이 시민의식이 들어가게 되면, "부처, 뭐 괜찮은 양반이네"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시민의식에 있어서 마지막 가치는 자기 자신인데, 그래서 "왕, 네가 뭔데?" 라고 나온다는 말이죠. 태국에서 어떤 아가씨 둘이 한 달 동안 금식을 하면서, "왕에게 험담을 하면 징역 15년이다" 라는 법을 바꾸었다고 하는데, 그게 시민의식이라는 것이죠.

이런 시민의식이 깊숙이 들어오게 되면, 왕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왕이라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게 사도행전에 보니, 예수님을 왕으로 섬기는 것인데, 그래서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한다는 말이죠. 즉 "나의 왕으로 섬기고 모시겠습니다" 라고 하는 의미라는 겁니다.

(행 2:36)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이 정녕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

그러니 "예수님은 나의 왕이요, 나는 그분의 백성입니다" 라는 의식이, 이미 시민의식이 버티고 있는 우리 인간에게 들어올 수 있겠느냐는 말이죠. 즉 "나는 나인데, 최종적인 의미가 나에게 있는데, '나' 라는 존재가 최고인데, 예수님이 전쟁을 벌인다고 해서 거기에 왜 내가 끼어 들어야 하는가?"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교회에 다니는 교인들이 얼마나 위선적인지 모른다는 말이죠.

* 나와 너, 그리고 피조물 !!

그런데 마지막 때 성령이 오시면 어떻게 됩니까? 성령은 바로 이것을 없애버리는데, 그러면 깔끔하게 해결이 된다는 겁니다. 지금은 '나'와 '너' 라고 하지만, 이것이 옛날에는 국가라는 단체로서 집단적인 의미로서 '나' 라는 말이죠. 그러니 인간이 있는 이상, '나'와 '너'는 없어지지가 않는다는 것이죠.

그런데 주님은 이것을 무엇으로 만드는고 하니, 그냥 '피조물'로 바꾸어버린다는 겁니다. 그러면 "나도 없고 너도 없고 피조물만 있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그러면 '나'는 누가 되는고 하니, 예수님만이 '나'가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너'는 누가 되는고 하니, 악마가 '너'가 된다는 말이죠. 왜냐하면 '나'와 '너'는 서로 대적관계이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 예수 이름 !!

악마는 예수님을 공격하고 예수님은 악마를 공격하는데, 그러니 '나' 라는 것은 예수님에게만 해당이 되는데, 이것을 '예수 이름' 이라고 한다는 말이죠. 예수 이름으로 천국에 가게 되는데, 그래서 천국은 '나의 나라'가 아니고 '그의 나라' 라는 겁니다. 천국은 예수님의 나라이고 아들의 나라는 말이죠.

그렇다면 이렇게 예수님의 이름으로 '나'가 된다고 하면, '너' 라는 것은 사단의 이름이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 '이름' 이라는 것은 존재 자체적으로 그 안에 고유한 의미를 유지하게 될 때, 그때 이름이 붙는다는 말이죠. 고유의 의미를 유지하지 못한다면 이름도 같이 날아가 버린다는 것이죠.

* 성도는 고인(故人) !!

이것은 별로 어렵지가 않은데, 예를 들어서, 사람이 죽으면 어떻게 합니까? 그 사람의 물건을 정리한다는 겁니다. 유품은 그 사람이 살아있을 때 이름을 붙여놓은 것인데, 그런데 그것을 없앤다고 하는 것은, 그 이름도 같이 사라짐을 의미한다는 말이죠. 그러니 유품을 정리하는 것은, 그 사람의 이름을 지워나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것이 저와 여러분의 미래의 모습이기도 한데, 그렇게 먼 이야기가 아니라는 말이죠(ㅋㅋ). 그래서 우리가 죽으면 후손들이 그 작업을 해주어야 한다는 겁니다. 이름을 지워나가는 작업을 말이죠. 이것은 "더 이상 나는 이름을 가질 권한이 없다" 라는 것인데, 바로 그것을 두고 죽은 자, 즉 '고인(故人)' 이라고 한다는 겁니다.

예수님 앞에서 우리가 죽은 자가 되는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더 이상 우리는 자기 이름으로 살아갈 어떤 권리도 없다는 것인데, 그것을 주의 이름으로 우리에게 알려주신다는 말이죠. 주님은 왜 그렇게 하십니까? 그것은 주님이 우리와 전쟁을 해서 이겼다는 것인데, 우리는 전쟁에서 졌고, 그래서 우리는 하나의 전리품으로 주님의 백성이 된다는 겁니다. 그게 왕의 전쟁이고, 주님의 전쟁이라는 말이죠.

여기서 요한계시록을 보겠는데, 13장 17절과 18절입니다.

(계 13:17) 누구든지 이 표를 가진 자 외에는 매매를 못하게 하니 이 표는 곧 짐승의 이름이나 그 이름의 수라
(계 13:18) 지혜가 여기 있으니 총명 있는 자는 그 짐승의 수를 세어 보라 그 수는 사람의 수니 육백육십육이니라

* 수(數)의 헤아림, '666' !!

이것이 요한계시록에서 제일 유명한 구절이라고 할 수도 있는데, 여기에 '짐승의 이름'이 나온다는 겁니다. 예수님의 적에게만 그 영원한 이름이 있는데, 왜냐하면 영원히 지옥에 가야하니 말이죠. 천국이 아들의 세계라고 하면, 천국의 악마의 이름의 세계라는 겁니다.

그 악마의 이름을 여기 18절에서는 숫자로 표기하고 있는데, "그 수는 사람의 수니 육백육십육이니라" 라고 한다는 말이죠. 이제 '666'을 설명할 시점에 왔다는 겁니다. 이 '수(數)' 라는 것은 카운터의 표시인데, 그래서 사과가 하나 있으면 '1', 두 개가 있으면 '2', 세 개가 있으면 '3',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이것은 숫자로 표시했다는 겁니다.

* Ф, ФФ, ФФФ !!

그렇다고 하면 "1, 2, 3", 이렇게 사과가 각각의 쟁반에 놓여있다고 하면, 쟁반에 놓여있는 그 사과가 동질합니까? 동질하지 않습니까? 동질한데, 즉 성질이 같다는 말이죠. 그러니 숫자라는 것은 반칙이라는 것이죠. 똑같은 것을 인간이 자기 마음대로 숫자로 구분해서 불렀다는 겁니다.

이렇게 각각의 쟁반에 사과가 "Ф, ФФ, ФФФ", 이렇게 놓여있다고 하면, 그런데 그것이 숫자가 되려고 하면 누군가가 카운터를 해주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여기에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카운터를 하는, 셈을 하는, 헤아림을 하는 어떤 존재가 있다는 말이죠. 그렇지요?

* 숫자는 인간 이성의 범위를 벗어나지 못한다 !!

그러면 그 카운터를 하는 목적과 취지와 의미는 누가 가지고 가는 겁니까? 사과가 가지고 가는 것이 아니라, 카운터를 하는 사람이 가지고 간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무엇을 뜻하는 겁니까? "숫자는 인간 이성의 범위를 벗어나지 못한다" 라고 할 수 있다는 말이죠. 숫자, 혹은 수학이라고 해도 되는데, 수학은 그것을 헤아리는 인간의 범위를 벗어나지 못한다는 겁니다.

이런 수학이 발달하면서 동반해서 생기는 것이 물리학인데, 물론 다른 학문도 해당이 되는데 말이죠. 그러면 그 물리학은 누구를 위한 물리학인고 하니, 인간을 위한 물리학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이것은 지금까지 우리가 공부한 바에 의하면 '나의 전쟁' 이라는 말이죠.

그러면 이것은 구약적인 겁니까? 신약적인 겁니까? 구약적인 것인데, 즉 자기 존재의 연속성이라는 겁니다. 그것을 위해서 열심히 물리학을 한다는 말이죠. 그런데 그 존재의 연속성, 혈통의 연속성을 잘라버리는 사건이 발생했는데, 그것이 유월절 사건이라는 겁니다. 어제 오후시간에 했는데 말이죠.

* 연속성을 잘라버리는, 유월절 사건 !!

부모가 아이를 낳으면 헤아리는데, "첫째, 둘째, 셋째", 그렇게 말이죠.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하십니까? 인간이 그렇게 카운터를 하는 의미를 가지고 있으니, 하나님은 그 혈통을 그만 잘라버리는데, 그것을 저주라고 한다는 겁니다. 즉 "너의 끝은 저주다. 아무리 대를 잇고 살아도 너의 끝은 이미 결정이 되었다" 라고 하신다는 말이죠.

그 저주를 미리 당겨서 인간이 의미를 두는데, 그래서 첫째 아들을 불러서 자기의 재산을 물려준다는 겁니다. 둘째가 아니라 첫째 장남이 영순위라는 말이죠. 그래서 첫째가 아버지의 제사를 드리게 된다는 겁니다. 이것은 가문의 연속성인데, 불연속성은 용납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죠.

이게 불연속성이 되면 '사랑과 전쟁'의 문제가 발생하게 되는데, 그래서 재벌들을 보면 후계자를 다투는데 있어서 무슨 문제가 생깁니까? "너는 혼외자식이야" 라고 하면 어떻게 됩니까? 그것은 집안의 수치가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좀 똑똑하지 못해도, 맏이에서 맏이로 연결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죠.

* 르우벤은 나의 기력의 시작이라 !!

이것은 마치 왕과도 같은 세습인데, 그렇게 맏이에서 혈통을 유지해주어야 부모는 모든 기대를 거기에 쏟게 된다는 겁니다. 그것이 성경에 나오는데, 창세기 49장에 보면 야곱이 르우벤을 보고 뭐라고 합니까? "르우벤은 나의 기력의 시작이라" 라고 한다는 말이죠. 르우벤의 야곱의 장자로서 제일 먼저 태어났는데, 그것은 "아버지를 대시할 자는 맏이밖에 없다" 라는 의미라는 겁니다.

(창 49:3) 르우벤아 너는 내 장자요 나의 능력이요 나의 기력의 시작이라 위광이 초등하고 권능이 탁월하도다마는
(창 49:4) 물의 끓음 같았은즉 너는 탁월치 못하리니 네가 아비의 침상에 올라 더럽혔음이로다 그가 내 침상에 올랐었도다

그런데 이 르우벤이 아버지의 첩인 빌하와 그만 간통을 하게 되는데,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서 르우벤의 장자권이 누구에게로 넘어갑니까? 야곱이 가장 사랑했던 여인, 즉 라헬이 첫 번째로 낳은 아들인 요셉에게로 가게 된다는 겁니다. 이게 남자의 사랑인가요? (ㅋㅋ)

물론 야곱이 레아와 라헬, 이 두 여자와 결혼을 했지만, 언니 레아와 결혼한 것은 동생 라헬을 향한 집요한 사랑 때문인데, 그래서 레아와 마음에도 없는 결혼을 해주었다는 말이죠. 그러니 야곱은 오직 라헬에게만 꽂혀있었다는 겁니다. 그 사랑으로 야곱은 요셉을 사랑했는데, 아브라함이 이삭을 사랑했듯이 말이죠. 이삭은 맏이인 에서를 사랑했고, 야곱은 요셉을 사랑했다는 겁니다.

* 요셉과 말씀의 바꿔치기 !!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 요셉을 야곱의 인생, 즉 야곱의 파란 선에서 그만 도려내고 마는데, 즉 죽여버린다는 말이죠. 그 사랑했던 요셉을 야곱의 인생에서 그만 뜯어내고 만다는 겁니다. 무엇으로 그렇게 하십니까? 말씀으로 뜯어내는데, 그러니 가장 사랑하는 것과 말씀을 바꿔치기를 하신다는 말이죠.

그렇게 함으로서 하나님이 벌이시는 전쟁에 우리가 노획물로서 들어가게 된다는 겁니다. 즉 주께서는 말씀을 주시고, 그 대신에 우리의 연속성을 뜯어 가신다는 말이죠. 그게 말씀의 세계에 들어가는 방법인데, 그렇게 해서 우리는 '나의 세계'에서 벗어나서 '말씀의 세계'로 갈 수가 있다는 겁니다.

* 맹세의 세계, 멜기세덱의 세계 !!

그러니 이 말씀은 약속된 것이 있는데, 이런 것이 어려운데 말이죠. 쉽게 해보면, 히브리서 6장과 7장에 보면, 말씀의 세계를 뭐라고 하는고 하니, '맹세의 세계' 라고 한다는 말이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을 할 때, 그 조건이 무엇인고 하니, 그게 하나님께서 하나님에게 맹세한 것으로, 그 세계가 곧 말씀이 세계라는 겁니다.

(히 6:13)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실 때에 가리켜 맹세할 자가 자기보다 더 큰 이가 없으므로 자기를 가리켜 맹세하여
(히 6:14) 가라사대 내가 반드시 너를 복주고 복주며 너를 번성케 하고 번성케 하리라 하셨더니

* 하나님이 하나님에게 맹세를 !!

여기에 우리가 어떻게 끼어들 수가 없는데, 우리는 그냥 피조물로서 있다는 말이죠. '나'도 없고 '너'도 없고, 그렇게 악마의 모든 방해를 극복하고 하나님께서 하나님에게 맹세한 것을 완성한 말씀의 세계, 히브리서에서는 이것을 '멜기세덱의 세계' 라고 한다는 겁니다.

이게 제가 말을 어렵게 한 것이 아닌데, 히브리서 5장에 보면 사도바울이 어려운 말을 한다고 하면서, 이 '멜기세덱' 이라는 개념을 끄집어낸다는 말이죠. 말씀의 초보들은 알아듣지 못한다고 하면서 사도바울이 말하기를, "하나님이 하나님에게 맹세했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히 5:11) 멜기세덱에 관하여는 우리가 할 말이 많으나 너희의 듣는 것이 둔하므로 해석하기 어려우니라
(히 5:12) 때가 오래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될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가 무엇인지 누구에게 가르침을 받아야 할 것이니 젖이나 먹고 단단한 식물을 못 먹을 자가 되었도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하나님에게 맹세를 하셨는데, 그것이 아브라함을 통해서 표현이 되었다는 말이죠. 그래서 아브라함은 그 하나님의 맹세 때문에 어떻게 해야한다는 겁니까? 자기 사랑하는 아들인 이삭을 모리아 산에 가서 없애야만 한다는 겁니다.

* 말씀의 주인공으로서의 예수님 !!

아까 강의를 하면서 "내가 있으면 타인이 있고, 타인이 있으면 내가 있다" 라고 했는데, 이것은 바로 "내가 나답게 위해서, 내가 가장 사랑하는 자 앞에서 나를 없애는 조건 아래에서, 그 타인 속에 나는 살고 싶다" 라고 하는, 그런 의미라는 겁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 사랑하는 자를 없애버리고 그 안에 무엇을 집어넣습니까? 그게 말씀의 세계라는 것이죠. 그래서 그 말씀의 세계가 오게 되면, 이 말씀의 세계의 주인공이 누구인고 하니, 그분이 바로 예수님이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모든 말씀은 예수님에 대해서 증거하기 때문에 말이죠.

(요 5:39)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그러니 우리가 귀히 여기는 그 자리에 주님께서 불쑥 나타나셔서, 우리가 사랑하던 것을 빼앗아감으로서, 자기 자신과 그 사랑하던 자와의 관계를 그만 잘라버린다는 겁니다. 그게 누구인고 하니, 바로 예수님의 제자들이라는 말이죠.

여기서 마태복음 10장을 보겠는데, 35절에서 38절입니다.

(마 10:35)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비와, 딸이 어미와, 며느리가 시어미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마 10:36)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마 10:37)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마 10:38)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

여기 37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아비와 어미를 사랑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고,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라고 하신다는 겁니다. 그러니 이것은 그야말로 '나' 중심으로 살던 제자들에게 그 '나'가 바뀌게 되는데, 즉 예수님의 '나'로 말이죠.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누가복음에도 나오는데, 예수님께서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라고 하니까, 베드로가 예수님에게 "우리가 우리의 것을 다 버리고 주를 좇았나이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눅 18:24) 예수께서 저를 보시고 가라사대 재산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떻게 어려운지
(눅 18:25)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신대
(눅 18:26) 듣는 자들이 가로되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나이까
(눅 18:27) 가라사대 무릇 사람의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은 하실 수 있느니라
(눅 18:28) 베드로가 여짜오되 보옵소서 우리가 우리의 것을 다 버리고 주를 좇았나이다

* 우리가 과연 주님을 위해서 모든 것을 바칠 수 있는가?

그러니 신약성경의 모든 내용이 '나'를 위해, 즉 "예수님을 위해서 모든 것을 다 바쳐라" 라는 것인데, 그렇다면 여기에서 "우리 인간이 과연 주님을 위해서 모든 것을 바칠 수 있는가?' 라고 하는 질문을 반드시 해주어야 한다는 겁니다. 우리 인간은 그렇게 할 수가 없는데, 그래서 주님은 우리와 전쟁을 벌이신다는 말이죠.

주님은 분명히 모든 것을 다 바치라고 지시를 하셨는데, 그런데 우리 인간이 그 주님의 지시대로 해보니 안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 인간이 과연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까? 받을 수 없다는 말이죠. 누가 구원을 받지 못한다는 겁니까? '나' 라는 것이 구원받지 못하는데, 그러면 그런 '나'를 왜 가지고 있느냐는 겁니다.

그래서 피조물로 전환이 되어야 하는 것인데, 즉 주님의 피조물이 되고 주님의 제자가 되고 주님의 종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죠. 그런데 왜 자기가 자기 관리를 하느냐는 것이죠. 그것이 관리를 한다고 해서 관리가 되는 것이 아닌데, 반드시 실패를 할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 강의 처음으로 돌아가서 !!

강의 처음으로 돌아가서, 제자라는 것은 하나님의 제자라고 했는데, 이게 보통 영광스러운 것이 아니라는 말이죠. 그런데 그렇게 되면 무엇이 문제입니까? 그 이전까지는 자기 전쟁을 했는데, 하나님의 제자가 되면 자기 전쟁이 아닌 주의 전쟁을 해야한다는 겁니다. 주님의 전쟁을 말이죠.

바로 그 주의 전쟁이 마태복음 10장에 나오는데, 20절입니다.

(마 10:20)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자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시니라

예수님께서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자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시니라" 라고 하시는데, 즉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자기 아버지를 소개하고 있다는 겁니다. "내가 아들인 것도 너희도 아들이 되는데, 다만 그 조건이 무엇인고 하니, 너희가 나의 제자가 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내가 성령으로 말한 것처럼 너희도 성령으로 말하게 된다" 라고, 이게 그런 의미라는 겁니다.

* 감당할 수 없는 환경 !!

여기까지는 참 좋은데, 그런데 16절에 보면 예수님이 뭐라고 합니까?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도다" 라고 하신다는 말이죠. 주님께서 우리를 제자가 되게 하고 백성이 되게 하면서도, 그 환경은 우리의 힘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가 없다는 겁니다. 성령이 우리 안에서 일하고 말하지 아니하면 우리는 도저히 이 세상에서 빠져나올 수 없는, 그런 환경 속으로 주님이 우리를 집어넣는다는 말이죠.

그리고 17절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저희가 너희를 공회에 넘겨 주겠고 저희 회당에서 채찍질하리라" 라고 하시는데, 그렇다면 제자들이 아니고 이 세상의 재판관들이 이겼다는 겁니다. 그렇지요? 그래서 주님의 제자는 사람들과 상대하면 안 된다는 말이죠.

(마 10:16)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
(마 10:17) 사람들을 삼가라 저희가 너희를 공회에 넘겨 주겠고 저희 회당에서 채찍질하리라

그게 예수님이 가신 코스인데, 그러니 이지고 지고 하는 것을 자기 위주로 할 이유가 없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더 이상 자기 안에는 자기가 아닌 성령이 존재하니 말이죠. 즉 "성령이 계신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 나를 패배로 만들어버린다" 라는 것인데, 주님은 이런 방식을 사용하신다는 겁니다.

만약에 주님의 성령이 오지 않으면 우리는 산다는 것이 기분이 굉장히 더러울 수밖에 없는데, "내가 너보다 못한 것이 뭔데? 왜 내가 너에게 져?" 라고 하게 된다는 말이죠. 그런데 성령이 오시게 되면, 성령께서 말씀하시는 바가, 그것이 자기 힘으로 이기지 못하는 상황에서만 발휘가 되니 신바람이 난다는 겁니다. "아하, 성령이 이야기하시는 것이 바로 이런 경우구나"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것이죠.

* 내 속에서 반복되는 예수님의 일대기 !!

이것을 정리하면 "하나님께서 무엇을 보고싶어 하시는가? 우리 속에 있는 성령을 보고 싶어하신다" 라고 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 성령은 어디서 오신 겁니까? 그것은 고난을 받으신 예수님의 일대기를 통해서 오신 것인데, 그렇다면 우리에게 성령이 오신다고 하는 것은, 우리 속에서 예수님의 일대기가 반복됨을 의미한다는 말이죠.

그러면 예수님의 일대기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나의 전쟁'을 벌리는 이 파란색의 선에 주님 자체가 하나의 빨간색 사건으로 오셨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와 똑같은 현상이 제자들에게 일어나는데, 그게 스승과 제자의 관계라는 말이죠. 그래서 그 제자들에게 예수님에게서와 똑같은 빨간색의 사건들이 터지는 것을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보고 싶어하신다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는 왜 평소에 그것을 보여주지 못합니까? 그것은 우리가 자기 전쟁을 한다고 정신이 팔려있기 때문에 그러한데, 즉 자기 자신이 주님의 일에 방해꾼이라는 말이죠. 그냥 상대하지 않고 돌아서 버리면 되는데, 그런데 꼴에 자존심은 있어 가지고는 어떻게 나온다는 겁니까?

"너, 나에게 무슨 소리를 했지?" 라고 하면서 달려드는데, "우리 집안이 어떤 집안인데, 당신이 나의 인생을 알아? 내가 얼마나 고생을 많이 했는데, 죽었다가 깨어나도 너는 나를 몰라" 라고, 그렇게 나온다는 겁니다. 물론 평소에 말은 이렇게 과격하게 하지 않아도, 그런 마음이 깔려있다는 것이죠.

남편이 "내 월급을 다 어디에 썼노?" 라고 하면, 아내는 속으로 "그러면 내 대신에 살림을 살아보지" 라고 하는데, 아닌가요? (ㅋㅋ) "네가 나를 알아? 너는 나를 몰라. 내가 살아보기 위해서 얼마나 애를 써는지 알아? 너는 몰라" 라고 하는데, 그런데 그렇게 하면 같이 살아갈 수가 없으니 서로 양보를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말을 하더라도 가려서 하고 말이죠.

결국 우리 인간은 구약의 그 파란색 노선으로 가게 되는데, 그런데 여기에서 고마운 것은 성령께서 어떻게 하신다는 겁니까? 말씀으로 그것을 매일같이 잘라내고 부수어 버린다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인데, 그러니 얼마나 고맙고 감사한지 모른다는 말이죠.

마태복음 10장 37절의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않다" 라고 하는 말씀이 갑자기 자기에게 쳐들어와서, 우리는 자기 전쟁을 하면서 자기의 정당성으로 버티고 있는데, 그런데 우리 안에서 말씀으로 그것을 모두 다 쪼개버린다는 겁니다. 븍 "정당해? 너는 너밖에 모르잖아" 라고 하는데, 그러면 우리는 "아차, 주님의 다 이루심을 내가 훼방질을 했구나" 라고 하게 된다는 것이죠.

* 사건과 존재의 만남 !!

이것을 어려운 말로 '사건과 존재의 만남' 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러한 경우를 구약에서 찾아보자는 겁니다. 첫 번째의 예로서 열왕기상 17장을 보겠는데, 8절에서 12절입니다.

(왕상 17:8) 여호와의 말씀이 엘리야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왕상 17:9) 너는 일어나 시돈에 속한 사르밧으로 가서 거기 유하라 내가 그곳 과부에게 명하여 너를 공궤하게 하였느니라
(왕상 17:10) 저가 일어나 사르밧으로 가서 성문에 이를 때에 한 과부가 그곳에서 나무가지를 줍는지라 이에 불러 가로되 청컨대 그릇에 물을 조금 가져다가 나로 마시게 하라
(왕상 17:11) 저가 가지러 갈 때에 엘리야가 저를 불러 가로되 청컨대 네 손에 떡 한 조각을 내게로 가져오라
(왕상 17:12) 저가 가로되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나는 떡이 없고 다만 통에 가루 한 움큼과 병에 기름 조금뿐이라 내가 나무가지 두엇을 주워다가 나와 내 아들을 위하여 음식을 만들어 먹고 그 후에는 죽으리라

* 떡 하나 주면 안 잡아먹지 !!

지금 아합 왕 때에 이스라엘에 비가 오지 않아서 난리가 났는데, 그런데 여기 8절에 보면 "여호와의 말씀이 엘리야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러니 선지자는 말씀의 세계에 들어온 자라는 겁니다. 여러분이 자꾸만 오해를 하는데, 선지자는 말씀을 지키는 자가 아니고, 말씀이 지배하고 있는 자라는 말이죠. 즉 "말씀이 나를 지배한다" 라고, 그게 선지자라는 겁니다.

이 이야기는 주일학교 시간에도 많이 등장하는 내용인데, 온 나라에 가뭄이 들어서 먹을 것이 전혀 없을 때, 엘리야도 까마귀의 도움으로 연명을 하고 있었는데, 그때 엘리야가 사르밧 과부에게 가는데, 그 타이밍이 기가 막힌다는 겁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남은 떡을 가지고 과부와 그 아들이 같이 죽으려고 하던 시점이라는 말이죠.

그런데 그때 선지자가 나타나서 뭐라고 합니까? 이것이 우리나라 동화에도 나오는데, "떡 하나 주면 안 잡아먹지" 라고 한다는 겁니다. 이게 떡 장사를 하는 아주머니가 고갯길을 걸어가는데 호랑이가 나타나서 한 말인데, 그렇지요? 어려서는 그것이 얼마나 무서웠는지 모른다는 말이죠(ㅋㅋ).

그렇다면 그때 그 아주머니가 배고픈 호랑이에게 떡을 줍니까? 주지 않습니까? 떡을 주는데, 그런데 성경은 그게 아니라는 겁니다. 왜 떡을 주면 안 되는고 하니까, 떡을 주면 남는 것이 있다는 말이죠. 그 다음의 떡을 먹을 때까지 자기 목숨이 연속성을 가지게 되는데, 즉 생존하게 된다는 것이죠.

* 죽음마저도 강탈을 !!

그래서 성경은 뭐라고 합니까? 사르밧 과부는 자기의 마지막을 멋있게(?) 장식할 그 떡을 선지자에게 주고 만다는 겁니다. 그러면 이제 폼 나게 죽는 것은 날아가 버리고 말았는데, 죽을 때도 자기 마음대로 죽을 수가 없다는 말이죠. 이 과부는 마지막 남은 떡마저도 그만 선지자에게 강탈을 당하고 말았다는 겁니다.

하지만 이것이 바로 성경에서 말하는 구원인데, 자기가 선택해서 폼을 잡고 죽으려고 하는 그 마지막 죽음마저도, 그것을 누가 빼앗아 간다는 겁니까? 말씀이 그만 빼앗아 가버린다는 말이죠.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그 사람은 말씀의 세계에 들어가게 된다는 겁니다.

성경이 이렇게 무서운 이야기인데, 우리나라의 전래동화보다도 백배는 더 무섭다는 말이죠. 그 마지막 남은 음식을 그만 선지자가 홀라당 먹고 말았다는 겁니다. 그렇게 선지자가 먹음으로 인해서, 그 여인의 생명은 그만 선지자 속으로 쑥 들어가고 말았다는 것이죠.

다시 말해서, 자기 목숨을 자기가 스스로 끊음으로서 끝까지 자기 연속성의 가치를 남기고자 한 계획은 완전히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는 겁니다. 그래서 마지막 남은 그 목숨이 엘리야의 손에 들어가고 말았다는 것이죠. 그리고 나서 이 엘리야가 어떻게 나옵니까? 통과 병을 준비하라고 하는데, 그래서 비가 와서 가뭄이 해결될 까지 밀가루와 기름이 떨어지지 않게 된다는 겁니다.

* 영생의 공유 !!

그러면 여기서 밀가루와 가름은 이 여인의 것입니까? 주님의 것입니까? 주님의 것인데, 그러니 주님께서 자기 것을 주는 관계, 이것이 바로 영생이고 구원이라는 겁니다. 우리는 자기가 살 이유도 없고 권한도 없는데, 그러나 오늘을 살던 내일을 살던 주님이 주시는 생명을 가지고 살 때, 그것은 몇 년을 더 사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고, 이미 주님의 가족이고 주님의 제자로서 영생을 공유하고 있다고 보면 된다는 말이죠.

영생의 공유, 그 예를 들어보면, 때는 1960년대 서울의 어느 허름한 여인숙인데, 그때는 전기사정이 좋지 않아서 방과 방 사이의 벽 위에 구멍을 내서, 거기에 30W 백열등을 하나 달아놓는다는 겁니다. 방 두 개에 전구 하나인데, 방 하나에 전구 두 개가 아니고 말이죠(ㅋㅋ). 그러면 잠을 잘 때는 양쪽 방에서 서로 합의 봐서 전등을 끄고 했는데, 그게 바로 공유라는 겁니다.

주님은 우리를 살려주지 않는데, 예수 안에서 살게 해주신다는 말이죠. 즉 예수님과 공유된 상태에서 살게 해주신다는 겁니다. 이게 하나님의 전쟁의 결과물이고, 이게 바로 영생이고 구원이라는 말이죠. 그런데 인간은 생명나무를 독점하려고 하기 때문에, 즉 자기는 살았다고 여기기 때문에 생명나무를 소유하려고 한다는 겁니다. 공유용인데, 그런데 개인용으로 여긴다는 말이죠.

왜 이렇게 개인용이 되는고 하니, 자기의 것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하면서 구원을 받으려고 하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그게 바로 악마의 속임수이고 유혹인데, 거기에 우리 인간이 빠져있다는 말이죠. 하지만 구원이라는 것은, 자기 것을 다 빼앗기고 주님과 함께 공유해서 누리는 것인데, 그게 곧 천국이고 영생이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떡 하나 주면 안 잡아먹지" 라는 것을 잊으면 안 되는데, 엘리야는 떡 하나를 받고 살려주었다는 말이죠. 즉 떡은 떡대로 강탈을 하고 살려주었다는 겁니다. 처음에 엘리야가 그 마지막 남은 떡을 달라고 했을 때, 이 여인은 그런 엘리야가 얼마나 섭섭했을까요? 여기에 대해서 할 말이 있지만, 그것은 다음에 하기로 하겠는데 말이죠(ㅋㅋ).

그 다음 두 번째로는 열왕기하 5장을 보겠는데, 1절에서 3절입니다.

(왕하 5:1) 아람 왕의 군대장관 나아만은 그 주인 앞에서 크고 존귀한 자니 이는 여호와께서 전에 저로 아람을 구원하게 하셨음이라 저는 큰 용사나 문둥병자더라
(왕하 5:2) 전에 아람 사람이 떼를 지어 나가서 이스라엘 땅에서 작은 계집아이 하나를 사로잡으매 저가 나아만의 아내에게 수종들더니
(왕하 5:3) 그 주모에게 이르되 우리 주인이 사마리아에 계신 선지자 앞에 계셨으면 좋겠나이다 저가 그 문둥병을 고치리이다

* 왕조시대의 나아만 장군 !!

여기에 보면 아람 나라의 나아만 장군이 등장하는데, 이 장군이라는 것은 왕조시대에 있어서 엘리트 계급에 속하는데, 그렇게 엘리트 계급이니 당연히 시민의식은 없다는 겁니다. 아래 사람은 모두가 다 자기의 수하라는 말이죠. 오로지 자기 존재만 중요하고, 자기 외에 다른 존재는 그야말로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이죠.

그러니 왕조시대라고 하는 것은 인간의 더러운 본성이 그대로 다 노출된 시기라고 할 수가 있는데, 즉 하나를 위해서 모든 것을 다 희생을 시킨다는 겁니다. 반면에 시민사회는 무엇입니까? 그런 것을 없애버리고, 각자가 모두 다 왕이 되는 시대라는 말이죠. 그것이 왕조시대와 시민사회시대의 차이점이라는 겁니다.

이 왕조시대에 나아만 장군이 등장하는데, 그런데 그만 그가 문둥병에 걸렸다는 겁니다, 그때 북이스라엘에서 포로로 잡혀온 여자아이가 뭐라고 합니까? 병을 고치는 방법 하나를 추천해준다는 말이죠. "우리나라에 가면 엘리사가 있는데, 하나님의 능력이 임한 자입니다. 그냥 여행을 한다고 여기고 가셔서 고쳐달라고 해보시기 바랍니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 자기 진멸의 과정을 거쳐야 사건을 만난다 !!

그때 나아만 장군의 의식은 "나는 장군이다. 다만 운이 없어서 잠시 문둥병에 걸렸을 뿐이다" 라는 것인데, 그러니 이 문둥병이 낫게 되면 자기는 다시 장군으로서의 위용을 갖추게 된다는 것이죠. 그래서 나아만 장군은 자기가 괜찮았고 좋았던 그때를 고대하면서 "그래, 네 말을 한번 들어보지" 라고 해서 엘리사에게 왔다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서 엘리사는 멀리서 찾아온 나아만 장군을 어떻게 대합니까? 그야말로 문전박대를 하는데, 만나주지를 않는다는 말이죠. 이것을 뭐라고 할 수 있는고 하니까, "자기 진멸의 과정을 거쳐야 사건을 만난다" 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겁니다. 이것이 주님이 준비하신 사건, 즉 빨간 노선이라는 말이죠.

여기서 파란 노선과 빨간 노선을 다시 그려보면, 나아만 장군은 자기 연속성이니 자아가 그대로 살아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엘리사는 말씀의 사람이란 것이죠. 그러면 파란 색의 나아만 장군과 빨간 색의 엘리사가 만나게 되는데, 이 절묘한 만남, 그것이 사건인데, 여기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고 하니, 자기 진멸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문둥병이 나아서 다시 괜찮은 나로 돌아가겠다" 라고 하는, 그런 안목 자체가 날아가 버려야 한다는 말이죠. 파란 것으로 와서 병이 낫고 난 다음에 다시 파란 것으로 돌아가 버리면, 그러면 하나님께서 나아만 장군에게 문둥병을 준 취지가 전혀 살아나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래서 엘리사 선지자는 장군을 만나주지 않는다는 말이죠.

그러면 이게 인격모독이 되고 마는데, 한 나라의 장군이 멀리서 선물 보따리를 들고 왔다는 겁니다. 그렇게 만나주지 않으면서 뭐라고 합니까? "굳이 나를 만날 필요가 없고, 요단강에 일곱 번을 들어갔다가 나왔다가, 그렇게 반복을 하세요" 라고 한다는 겁니다. 언뜻 들으면 치료방법을 제시해주는 것 같지만, 사실상 이것은 더욱 더 심한 인격모독이라는 말이죠.

(왕하 5:9) 나아만이 이에 말들과 병거들을 거느리고 이르러 엘리사의 집 문에 서니
(왕하 5:10) 엘리사가 사자를 저에게 보내어 가로되 너는 가서 요단 강에 몸을 일곱 번 씻으라 네 살이 여전하여 깨끗하리라

그러자 나아만 장군이 뭐라고 합니까? 그것이 바로 진멸되기 직전의 자기 안에 들어있던 자기의 연속성인데, 그게 여기 12절에 나오는데, 즉 "다메섹 강 아마나와 바르발은 이스라엘 모든 강물보다 낫지 아니하냐, 내가 거기서 몸을 씻으면 깨끗하게 되지 아니하랴"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어떻게 합니까? "몸을 돌이켜 분한 모양으로 떠나니" 라고, 성경은 그렇게 기록하고 있다는 말이죠.

(왕하 5:11) 나아만이 노하여 물러가며 가로되 내 생각에는 저가 내게로 나아와 서서 그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당처 위에 손을 흔들어 문둥병을 고칠까 하였도다
(왕하 5:12) 다메섹 강 아마나와 바르발은 이스라엘 모든 강물보다 낫지 아니하냐 내가 거기서 몸을 씻으면 깨끗하게 되지 아니하랴 하고 몸을 돌이켜 분한 모양으로 떠나니

* 나아만 장군의 분노 !!

나아만 장군이 왜 분노합니까? 그것은 자아가 있기 때문인데, 이 자아는 자기 연속성, 즉 기억으로 구성되어있다는 겁니다. "내가 이 물보다는 더 깨끗하다" 라는 것인데, 즉 "엘리사 너는 깨끗한 물에 더러운 몸을 담그면 낫는다는 이론을 펼치는데, 하지만 그럴 것 같으면 내가 굳이 여기까지 올 이유가 없다. 우리 고향에는 여기보다 더 깨끗한 강물도 많이 있다" 라고, 그렇게 나온다는 겁니다.

그러니 엘리야의 주장이 지금 나아만 장군을 화나게 만들었다는 것인데, 주님은 왜 그렇게 하십니까? 주님은 인간의 마지막 생각까지도 끝까지 말씀으로 관통해버린다는 말이죠. 그 당시에는 지시가 곧 말씀이었다는 겁니다. 그렇게 말씀이 관통하게 되면 인간이 느끼는 것은 무엇인고 하니, 그것은 버티기인데, 즉 "이것이 깨지면 나의 나다움이 날아가 버리는데" 라고 나온다는 말이죠.

그런데 그 마지막 순간에 종들이 뭐라고 합니까? "여기까지 왔는데, 그냥 속는 셈치고 한번 들어가 보세요"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강물에 몸을 담그니 어떻게 됩니까? 몸이 깨끗하게 되는데, 그것은 요단강의 깨끗함도 아니고, 기존의 자기가 알고 있던 지식의 문제가 아니었다는 말이죠.

* 아하, 내가 진멸의 대상이구나 !!

그러면 무엇이 문제라는 겁니까? 그것은 바로 자기가 알지 못했던 신, 그게 바로 여호와인데, 그래서 "나는 그 여호와에 의해서 진멸을 당해야하는 대상이구나" 라는 것을 드디어 파악하게 된다는 겁니다. 자기는 진멸의 대상이라는 말이죠. 그래서 나아만 장군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그 여호와가 나의 병을 낫게 해주었으니, 이제부터는 내 고향에 돌아가더라도 그 여호와만을 섬기겠습니다" 라고 하는데, 그게 18절에 나온다는 겁니다. 즉 "내가 림몬의 당에서 몸을 굽힐 때에 여호와께서 이 일에 대하여 당신의 종을 사유하시기를 원하나이다" 라고 하는데, 나아만 장군이 그렇게 바뀌었다는 겁니다.

(왕하 5:18) 오직 한가지 일이 있사오니 여호와께서 당신의 종을 사유하시기를 원하나이다 곧 내 주인께서 림몬의 당에 들어가 거기서 숭배하며 내 손을 의지하시매 내가 림몬의 당에서 몸을 굽히오니 내가 림몬의 당에서 몸을 굽힐 때에 여호와께서 이 일에 대하여 당신의 종을 사유하시기를 원하나이다

이것은 바로 나아만 장군이 자기 전쟁에서 패배했음을 너무나 기뻐하면서 수용하는 것을 의미하는데, 그게 바로 구원이고 영생이라는 말이죠. 그러니 이제 자기 몸은 문둥병에 걸리던 말던 상관이 없는데, 자기가 몰랐던 여호와 하나님을 발견하게 된 것, 그래서 그분의 제자가 되는 것, 그것이 바로 주님이 준비하신 축복이었다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의 일과 사람의 일이 얼마나 다른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자기가 깨어질 생각은 하지 않고 하나님을 이용해서 자기가 잘 되기를 바랬던 그 자체가 하나님의 원수임을 이제는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2023,3,4 오후 6시에 마침.

날마다 나의 자존심이 짓밟히는 환경, 그래서 감사하게 하옵소서 !!

'대구강의' 카테고리의 다른 글

지옥하나님23-구원보다 선택  (0) 2023.04.17
지옥하나님17-목숨바칠 명분  (0) 2023.04.17
지옥하나님21-주님경유  (0) 2023.03.06
지옥의 하나님-예수님의 앵콜곡  (0) 2023.02.22
지옥의 하나님-만나  (0) 2023.02.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