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청일

변종 마귀

아빠와 함께 2023. 2. 8. 07:30

이번 수련회는 내게는 특별한 수련회다. 남의 글만 항상 부정적으로 판단하고 못마땅해 하던 내가 글을 쓰게 된 점이 무엇보다 특별하다고 생각된다. 말이 많을수록 자신의 허점만 드러내게 되므로 필요한 말만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생각은 글쓰는 것 자체를 가로막았었다. 어려서부터 남자이면서도 수줍음을 타는 소극적인 성격은 항상 불만이었다. 왜 적극적이지 못하고 소극적이고 부정적일까. 왜 남들처럼 내 자신을 PR하지 못하는가.. 그것이 단순한 성격탓이 아니라 올바르지 못한 부분을 감추고자하는 죄된 성품인 것을 알게 된 요즈음에 와서야 불만없이 받아드릴 수 있게 되었다. 그렇구나 오히려 내 자신을 좀 더 빨리 보게되는 은혜로구나.. 사마리아 여인이 남편이 몇인가 탄로나는 것이 자신을 알게되는 시점이로구나.. 글을 쓰게 된게 그 증거라고 주장하고싶다. 나에게 이익이냐가 주안점이 아니라 주님께서 어떻게 일하시는가에 관심을 갖게된 것이 소득이었다. 수련회에 참여한 많은 사람들을 이해하는 시각도 많이 바뀌었음이 스스로 놀랍다.


“할머니 이번 수련회 내가 0% 이해했다” 민준이의 고백이 바로 나의 고백이었다. 듣는 그 순간에는 의미가 이해되면서도 전체적인 맥락이 연결이 되질않아 졸지않고 잘 들었다고 생각하는데도 무얼 들었는지 도무지 요약이 되질 않는다. 너무 기다려지는 수련회이면서도 항상 채워지지않는 아쉬움은 좀 더 잘 이해한 분(예컨대 목사님들?)이 전체적으로 이런 내용입니다. 요약을 해주고 간단한 질의응답이 있었으면 하는 바램이었다. 허지만 그랬으면 좋겠다는 희망사항을 내비치면 돌아오는 답은 나도 잘 모르죠 하는 답 그래도 그건 좀 나은 편이다 말씀을 이해하려고 하는 시도 자체가 인긴의 노력이라는 답변을 받게되면 날벼락같은 느낌을 받는다 결국 혼자서 내리는 결론은 왜 사람들은 진리에 대해 그렇게 관심들이 없나 하는 자기위안으로 끝내지만 수련회 끝난후에 녹취록에 매달리는게 항상 같은 루틴이었다.

이번 수련회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나이가 들면서 점점 수련회 환경에 적응하는 것이 힘들다 강의에 집중하는데 실패하는 몸도 그렇지만 젊은 사람들은 당연히 나이든 사람과 함께있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특히 이번 수련회는 두달 전쯤 위벽의 종양을 걷어내느라 내시경 시술을 받고 복약중이었기에 몸자체도 정상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방이 너무 더워서 전혀 잠을 잘 잘수가 없었다. 집중에 도움이 될까 해서 난시교정안경도 써봤다. 기뻤던 강의 시간들이었지만 결과적으로 수련회 음성파일을 들으면서 답답한 마음을 달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지금살고있는 아파트 길건너편으로 조성된 산책길이 있다. 왕복 약 3㎞되는 짧은 길이지만 제법 잘 조성된 길이다 군데군데 운동기구도 있고 산책하며 설교 듣기에 너무 좋은 환경이다. 책상에 앉아서는 곧 피곤하다는 생각이 들곤 했는데 걸으면서 가끔씩 벤치에 앉아 쉬면서 듣는 설교는 집중이 너무 잘 된다. 수련회 강의를 반복해서 들으면서 점차로 전체윤곽이 잡히고 그러다보니 산책 자체도 익숙해지고 하나의 일과처럼 되었다. 막상 수련회에서 보다 더 큰 기쁨들이 몰려들어 나도 모르게 아멘을 외치게 된다.

“말씀의 진척 과정에서 반드시 노선이 두 개로 갈라지기 때문에 그래요. 사람들은 자기가 어떤 존재인 것을 생각하지 못하고 말씀만 지키면 말씀에서 언급하는 그 결과가 자기와 일치된다고 여겼던 겁니다. 말씀대로 지키면 내가 그대로 된다고 여긴 거예요.

​예를 들어서 예수님의 살과 피를 마시면 생명을 얻는다고 되어 있잖아요. 그러니까 천주교 또는 기독교에서 예수님의 살과 피를 마시면 영생을 얻는다 했으니까 이 노선에 본인을 집어넣는 거예요, 본인을. 본인을 집어넣으니까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어야 되잖아요. 그러니까 어떤 수단을 찾느냐 하면 포도주스를 피라 하고 비스켓을 떡이라고 여겨서 그걸 우리 교회가 보증해 줄게, 이렇게 나오는 거예요. 그들은 말씀 자체가 나를 우상화시키고 이런 나를 비켜나간다는 것, 나는 이미 우상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나는 이 말씀에 대해서 곧 예수님에 대해서 거역하는 본성으로 작동하고 있으므로, 말씀이 내게 왔다는 말은 진짜 예수님을 핍박하는 것이 내 쪽에서 발휘되고 있다는 사실을 인간은 몰라요.
예수님 자신이 말씀이에요. 그걸 구체화시킨 것이 예수님의 육신이에요. 그러면 예수님의 육신 안에 말씀은 완료 상태입니다. 이 완료를 다른 사람에게 빼앗기지 않아요. 그런데 어쭙잖게 부정성도 모르고 자기가 메시아도 아니고 약속한 독생자도 아닌 주제에 자기가 말씀을 지키겠다고 나서는 거예요. 나서니까 결국 나오는 것은 핍박밖에 없는 거예요.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는 방법은 우리에게는 없습니다. 따라서 영생도 없습니다.
말씀이 본래 주인을 찾아가야 돼요. 그게 요한복음 5장 39절에 있는데 한번 찾아보겠습니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이걸 패러디해볼까요? ‘너희가 교회에서 성만찬을 통해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와 똑같은 거예요.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예수님이 다 이루었다는 것을 증거하는 거예요. 우리를 비켜가는 겁니다. “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는 방법은 우리에게는 없습니다.” 왜 이 말이 이토록 새롭게 들릴까. 알고 있다고 생각되는 말씀인데 너무 기뻐서 가슴이 시리다는 표현이 적당하다는 생각이 왜 드는걸까. 일 예로 든 구절이지만 1강부터 9강까지 정말 수련회가 귀하다는 생각이 떠나지를 않는다.

내린 결론은 “마귀 맞다 그러나 마귀는 복음을 기뻐하지 않는다. 그런데 나는 기뻐한다. 따라서 나는 그냥 마귀가 아니라 변종마귀다. 코로나 예방접종으로도 해결할 수 없는..” 이렇게 겉으로는 담담한 척 하지만 속으로는 무척 기쁘다. “이 사실이 기쁘다면 성도입니다” .라는 목사님의 말씀을 내 바구니에 담아넣고있는 나를 보면서..

생각해보면 최근에는 만나는 사람들과 갈등을 자주 빚었다. 광주모임만 해도 목포에서 광주까지 오가는 차속에서 매번 싸우다싶이 오용익목사 구자근사모와 토론(?)을 한다. 물론 같은 결론에 도달되어 즐거운 토론이긴 하지만 과정이 미심쩍다(?). 김을수 집사와도 합치되지 않는 견해 때문에 거의 싸음같이 되서 소리도 커지고 내가봐도 내가 마치 싸울려고 작정한 사람같다. 왜 그런지 나도 모르겠다. 속 편하게 주님이 이끄시는대로라고 결론짓지만 이것 역시 수싱한(?) 결론임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런데 산책하면서 말씀을 곱씹으면서 뭔가 서광이 보이는 듯 싶어 너무 기쁘다. 이거다 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해결될 기미같은게 보이는 듯 싶다.



이 기회에 한윤범님 이하림님께 감사하다는 인사를 드리고싶다. 마치 ”성도들이 최대한 빨리 녹취록을 볼 수 있게 해드리자“라는 마음으로 올려주시는 듯해서 항상 감동이고 감사한 마음이다. 오용익님 송민선님의 정말 빠른 설교녹취는 마치 당연한 걸로 되어버려 미안하지만 그건 광주모임 한 식구라는 핑계로 대신한다. 지역강의가 있고나서 영상이 올라오면 집중하려 노력하지만 확인해 보고 싶은 사항이 한두가지가 아니다 그래서 너무 빨리(?!) 올라오는 녹취를 사랑한다. 의문점을 즉시 확인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녹취는 나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수없이 되뇌어 보면서도 일주일쯤 지나면 듣긴 들었나 싶게 강의 내용이 가물가물해지고 올라오는 녹취록도 일단 관심에서 멀어지는게 너무 아쉽다. 이왕 수고하시는 김에 좀 더 빨리 해 주실 수는 없는지.. 그리고 덧붙여서 강의말씀 그대로 해주셨으면 한다. 토씨하나가 문맥을 바꾸는 걸 수없이 경험하면서 가능한 한 말씀하신 그대로 그리고 의역없이 곧이곧대로 올려주셨으면 좋겠다. 있을 수 없는, 해선 안되는 요구인걸 알면서도 어차리 죄인임을 핑계삼아 무리한 주문을 해본다.

수련회 운영방식에 대해서도 할 말이 많다. 이름표까지 만들어 주시는 수고는 감사하지만 거의 써먹을 데가 없다. 인간의 수고, 아니 인간 자체가 의미없어서 그러는가 싶긴하지만 방장 시스템 같은게 있어서 한 방에 기거하는 사람들을 잘 알게되는 시간이라도 있었으면 한다. 특히 마지막 날! 왜 마치 기차 시간 늦지않게 가려는 사람들처럼 해어져야하나 아침 일찍 끝났으면 점심때까지 커피타임이라도 가지면서 옹기종기 모여서 이야기하다가 점심까지 먹고 천천히 해어지면 안되나 하는 생각.. 에프터없는 이별이 아쉽다.



1월 마지막 날이다. 본격적으로 죄인된 삶을 누리고자 한다. “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잠8:17) 옛적부터 갖고있던 생각 “열심히 하나님을 찾으면 만나게 해주신다“ 이 생각이 옳지않음은 잘 안다. 그런데도 간절히 찾고싶다. 어차피 나밖에 모르는 놈이 바로 나라면 주께서 하게하셨다고 우기면서(?)... ”그게 죄인 아닌가. 그리고 죄인을 부르려오신 주님 아니신가.”

거울을 보면 런닝셔츠가 티샤츠 안쪽으로 왼쪽 목부근에 거슬리게 나와있는지 꽤 오래 됐다. 요즈음 와서야 내 몸이 왼편으로 기울어져 가는구나를 알게됐다. 그야말로 허물어져가는 몸의 자율성(?)이다. 도무지 내 몸의 기능저하를 인정하기 싫었는데 복음을 들어가며 점차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된 것도 참 고마운 일이다. 정말로 말씀 홀로 그리고 말씀 대로 되어가는구나...! 수련회 참가자 최고령을 따져볼 나이가 된게 아쉽기는 하지만.. 그러면서 다음 수련회를 기다리는 즐거움을 마음속에 간직한다.

“혹시 살아 있다면 올여름에는 ‘갈라디아서’ 할 생각입니다. 거기에 보면 율법 이전으로 돌아가요. 아브라함 때로 돌아가서 ‘아브라함이 의롭다’부터 시작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법이라는 것이 오히려 인자(仁慈),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자비, 그 사랑을 훼방, 훼손하기 위해서 법이 주어진 겁니다.” 이근호목사님은 우리 모두의 우상이다. 부인할 수 없다. 기대가 된다. 갈라디아서는 6장까지의 짧고 만만한(?) 성경이다. 요한복음 에스겔 같은 길어서 준비해야지 하면서 제대로 읽어보는것도 어려웠던 책들보다는 준비가 쉽지않을까. 잘 준비해야지. 하면서도 나를 내세우는 모습이 보인다는게 즐거운 요즈음이다.

 

댓글;

 

이근호 230201

 

글을 쓴다는 것은, 버티다 버티다 더는 남을 속일 기력이 없을 때 나오는 행동입니다. “에라이 모르겠다. 날 씹으라! 나는 이래도 마귀요 저래도 마귀다.” 성도에게 있어 마귀가 배설물로 나오는 현상은 그 분에서 ‘십자가 흔적’이 발생되었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성령님의 작업입니다.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갈 6:17)

이제 인생에 있어 욕 얻어 먹을 시간이 별로 많이 남지 않았음을 간파하시고 원없이 모든 욕과 오해를 받겠다는 것은 아직 자기를 아끼고 싶어하는 젊은 분에게는 근접할 수 없는 자유입니다. 

주님 부르실 때까지 건강해주시고, 특히 직접 특정인의 이름을 하나 둘 거론하신 용기에 경의를 표합니다. 더는 자신을 지키지 마시고, 버티지 마시고, 복음에 자신을 산화해 주시기 바랍니다. 끝으로 장로님보다 더 연세많은 서울 권사님 한 분 계십니다.

 

공은주 230201

 

차려놓은 밥상에 떠먹여 주시니 이런 환대에 과분하기만 합니다.
말씀이 넘쳐 흘러서, 도저히 만나지 못할 분을
만나서,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무조건 용서하시겠다는 사랑에, 주님의 체인에 숨이 막힐 지경입니다.
이런 사랑이 오기까지 주님의 시작이었고 끝이었습니다.  십자가였습니다.
사건 속을 지나고 다시 보게 되니 주님의 십자가 사건의 반복이었고, 십자가 과정속이었습니다.
정확한 진리를 알고, 확실한 증거가 있으니 무엇인들 못하리요, 누가 너희를 정죄하리요.
내 일이 아니고 주님의 일이어서 가볍습니다. 다 이루어주심에 평안합니다.
모든 일에 협력하여 선을 이루심에 감사합니다.

 

임청일 230208

 

오목사와 구사모의 초청으로 '압해도 뻘낙지'에서 즐거운 점심을 나눴다.무척 즐겁고 기쁘고 낙지초무침도 맛이있었다.식사시간은 불과 몇십분이었던것 같은데 스타벅스에서 커피 마시는데는 서너시간은 걸린것 같다. 거짓없이 마음을 나눴다고 생각했는데 잠이 깨어 생각해보니 내 입에서 나간 것들은 한마디도 예외없이 전부 내 자랑뿐 이었다.갑자기 수치심이 몰려온다.예수의 흔적이 아니라 정말 마귀 맞구나!   갑자기 비참해진다.오목사의 괴로움의 고백이 실감되는 것 같다.은근히 성도임을 암시하며 모든 것에 초연한체 했던 내 모습이 얼마나 가식이었던지 눈에 보인다...     괴로움을 이렇게 글로 남기니 숨이 쉬어진다. 감사한 마음이 든다. 주님 감사합니다.이렇게나마 버릴 수 없는 나를 보게해주시니 감사합니다. 주님만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시옵소서.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