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강의 녹취를 마치고 이미아 171229
역겹고 더럽고 볼품없고 초라한 것은 다 떼 내어버리고
밀어내고 싶은 것은 다 밀쳐내 버리고
버리고 싶은 것은 다 갖다 버리고
하고 싶은 것은 다 하면서
갖고 싶은 것은 다 갖으면서
살기 위해서는 무슨 짓이든 다 하면서
혼자 의로운 척
혼자 잘난 척
혼자 열심 있는 척
혼자 괜찮은 척
혼자 아는 척
혼자 고상한 척
혼자 믿는 척
혼자 죄인인 척
........
사탄이 고맙게도 테두리 쳐준 이것들이 나라고 우기면서 주체의 행태를 체계적으로 구축해 나간다. 사탄이 심어준 주체는 끊임없이 이동해서 더 높이 더 높이 더 높이 하늘 끝까지 닿아보자고 내 이름을 걸었다.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찬송하리로다 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막11장9-10).
힘없고, 무식하고, 로마의 압제에 시달리면서 배고픔에 허덕였던 이 민중들의 환호는 나귀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하는 예수님을 보고서도 막무가내였다. 그들이 기대했고 고대했던 다윗의 자손으로 오시는 이라면, 자신들을 구원할 자 메시야라면 아름다운 갈기를 휘날리며 달리는 명마를 타고 오셔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타기는 탔는데, 참 이상하긴 하지만, 참 초라해 보이지만, 왜 나귀새끼를 타셔야만 했는지에 대해서는 알고 싶지 않았다. 유대나라를 구원시켜 다윗 왕이 통치했던 견고한 그 나라로 만들어주면 그만이라는 욕심만이 속에 가득했을 뿐이다. 그들의 이러한 바람은 그냥 억지가 아니었다. 왜냐하면 본 것이 있었고 먹은 것이 있었고 나은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만이 알았다. 예수님은 백성들의 꿈처럼 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모르는 척 하는 그들의 소름끼치는 악마성은 곧 한 몫 할 것이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그들의 환호를 묵살하지 않고 온전히 자기 것으로 가져오셔서 받으셨다. 왜냐하면 비록 지금은 그들이 모르지만 반드시 알 때가 올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 예수님은 그렇게 혼자서 분주히 일하고 계신다. 수많은 군중들의 호산나 찬송소리가 채 가시기도 전에 예수님은 구원주로 오신 것이 아니라 심판주로 오셨음을 미리 예고하시기 위해서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다. 이유가 무엇인가? 아직 열매가 있을 때도 아닌데, 무화과나무에게서 열매를 찾는다. 예수님의 때다. 예수님이 오심으로 말미암아 이미 마감된 시간. 더 이상 시간은 진척되지 않는다. 무화과나무의 열매 맺는 때는 중요하지 않았다. 예수님께서 찾으시는 때만 중요한 것이다. 예수님의 때에 합당한 열매가 없어서 무화과나무가 저주받았다면 하물며 너희는 어떠하겠는가. 아무런 할 말도 없이 그냥 저주받아 마땅한 자들이다. 예수님의 죽으심 때에 무색해지는 모든 것이다.
나귀새끼를 타신 것은 스가랴의 예언대로 겸손함이셨고 낮아지심이셨다. 낮아지심이 없이 어찌 죽으심이 있을까. 호산나와 무화과나무의 연관성. 나귀새끼를 타심과 낮아지심, 죽으심. 이 연관성을 풀 수 있는 분은 예수님뿐이시다. “그래! 내가 다윗의 자손으로 온 유대인의 왕이다. 그래! 메시야다. 그래! 주의 이름이 내 이름이다. 다 맞다. 그러나 난 너희들이 기대한 대로 원하는 대로 해주기 위해서 온 것이 아니다. 내가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왔을 때는 그냥 빈손으로 왔다고 생각지 말라. 뭔가를 가지고 왔다는 것을 생각하라!” 뭐였을까? 예수님 오심 자체가 심판이었고 구원이었다. 예수님의 죽으심 자체가 다시 살아나심이었다.
역겹고 더럽고 볼품없고 초라한 것은 다 떼 내어버린 그 속으로, 밀어내고 싶은 것은 다 밀쳐 내버린 그 속으로, 버리고 싶은 것은 다 버린 그 속으로, 하고 싶은 것은 다 하는 그 속으로, 갖고 싶은 것은 다 갖는 그 속으로, 살기 위해서 무슨 짓이든 다 하는 그 속으로, 예수님께서는 그 속으로 오셨다. 사탄이 쳐준 고마운 그 테두리, 의로움과 잘남과 열심과 괜찮음과 앎과 고상함과 믿음과 죄인 됨을 가지고 주체체계를 세우는 그 행태 속으로 오셨다. 미움 받아 죽기 위해서다. 제발, 예수님을 죽도록 미워하자. 제발,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하지 말고.
이젠 벌어진 일들마저도 사건이라고, 그런 말도 못하겠다. 하도 사건에 대한 감사가 나오지 않기에. 내 일이 아닌 주께서 벌이신 사건이라면 감사가 나온다는 것은 명백한 일이다. 그러나 먹고 살기 위해서 손님을 맞이해야 하는 식당아줌마의 립서비스처럼 감사합니다만 연발 나불댔지 정작 감사가 뭔지도 모른다. 마감된 한해를 보내면서 십자가마을의 이 필드에서 참 재밌게도 뛰어놀았음이 새롭게 다가온다. 화장으로 감출 것이 많았지만 감춰봤자 티도 안 나는 쌩얼로.. 손바닥으로 해를 가릴 수 없듯이 터져 나오는 죄를 막을 수는 없다. 죄인이라는 고백마저 식상하지만 죄인이다. 마음이 무거워 억지로 녹취를 끝내면서 사명감으로 했던 초심은 어디로 갔는지를 생각해본다. 그 감感은 도대체 무슨 감感이었을까. 억지조차도 끌고 가시는 주님은 진정 누구십니까? 육을 영으로 바꾸시는 주님의 소관 앞에서 모든 것을 잃어버려도 괜찮다.
의식하고 싶지 않지만 의식하면서 이것을 쓰기 위해서 시작한 글을 마친다. “서경수 목사님 그동안 녹취하시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청력도 시력도 다 주님을 위해서 주님께서 사용하신 줄 압니다. 목사님의 고마움이 새삼 느껴집니다. 감사합니다.” 이것을 읽는 이의 마음도 모르고 이것을 받아들이는 이의 마음도 모르겠지만 그냥 지나치고 싶지 않았다. 배고파서 욕먹고 싶다.
댓글
이근호 171229
자꾸 살다보면, 사는 것이 당연한 것이고 죽으면 안 당연한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욥에게 찾아오십니다. 사는 것이 마치 권리인 것처럼 여겨서는 아니된다는 겁니다. 죽음과 삶의 언저리에서 사탄이 퍼질러놓은 왜곡된 세상관이 어떤 식으로 비정상적으로 행세하고 있는지를 밝혀주시는 겁니다. 즉 '그냥 살다 죽는 게' 인생이 아니라, 하루하루 힘겹게 고통 속에 놓여 있는 그 욥의 고통 속에서 같이 고통하시는 장차 오실 주님의 십자가 아픔이 밑거름이 되어서 세상 모든 것들은 은혜로 돌아가고 있음을 '욥의 고통'을 통해서 유일하게 폭로하신 겁니다. 모든 성도가 이런 기능을 하고 있습니다. 이로서 성도는 마르지 않는 '진리의 샘물'입니다. 남들은 평안하고 즐겁게 읽지만 그동안 녹취하신다고 시력, 청력, 정력까지 말라버린 서경수 목사님과 지금도 알게 모르고 수고하는 모든 녹취자들에게 감사합니다. 하지만 억지로는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자칫하면 그것도 사탄의 시험이 되어 자기 의로 축적되고 함부로 게으른 타인(?)에 대한 일반적 불평으로 이어질 수도 있습니다. 녹취없이도 주님은 차질없이 구원해내시는 그 솜씨에 대해서 늘 감사합시다.
임청일 171229
"왜 이렇게 늦게 올라온거야" "맟춤법도 틀렸네" "의역허지않고 말씀 그대로는 녹취안되나"" "내가 하는게 더낫겠네" 이러면서 녹취록을 읽으면서 자라나는 성도! 아니에요? 하여튼 이미아성도님 녹취록 빨리 올려주셔서 너무너무 감사해요.의존교회 한 줄 수다도 더 자주 더 많이 올려주세요.목사님도 매일 보고 계시던데...
글 쓰고 읽어보니 "의역하지않고"를 "허지않고"라고 썼네요
"거봐라"라고 하는 소리가 들리는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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