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강의

15.발꿈치

아빠와 함께 2022. 11. 1. 08:33

광주강의20221028a 창세기3장 15절(발꿈치)-이 근호 목사

p.227 밑에서 6번째 줄,【동일한 살-신체, 말, 텍스트-속에서, 안이 바깥으로 되고, 바깥은 안이 되는 의사소통적인 순환의 장으로 본 것이다. 여기서 기호학적 지시작용이 일어나면서 문화적 세계가 객관적으로 존재하게 한다.】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이건 뭐냐 하면, 어떻게 인간이 인간끼리 의사소통을 하느냐? 아니면 의사소통을 하는 것처럼 하느냐?

인간세계는 의사소통으로 인한 의미의 세계죠. 인간세계가 의사소통이 됨으로써 그들은 하나님 나라와 무관하게 따로 살림을 차릴 수가 있었습니다. 의사소통하는 이 원인은 인간의 육에서 나온 것들이에요. 육에서 나왔기 때문에 같은 육이기 때문에 의사소통이 가능하다 이 말입니다. 육에서 나왔기 때문에.

그래서 의사소통에서 의미라 하는 것은 육에서 나오는 의미가 되겠죠. 따라서 육에서 나온 의미이기 때문에 어떤 특징이 있느냐 하면 육은 절대로 영의 세계 의미에 당도할 수 없다. 인간이 어떤 생각을 하든지 간에 영의 세계의 의미에는 당도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육의 세계 안에 그들이 놓여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럼 성경에 보면 엄연히 주의 백성이 있고 구원받은 사람이 있잖아요. 그들은 그러면 육 아니냐. 육에서 어떻게 영의 세계로 그 의미를 알 수가 있는가. 오늘 교재에 의하면 에스겔, 다니엘 이런 사람들을 말하죠. 그들을 인자(人子)라 하는데 오늘 본문에 나온 에스겔과 다니엘 둘 다 인자라고 불러요. 인자라고 부르는데 최초로 인자라 불리운 사람이 다윗이었습니다.

여러분 알다시피 모세는 죽어도 모세언약은 살아있죠. 여호수아가 자기 마음대로 하지를 못해요. 모세언약대로 움직이는 사람이 여호수아입니다. 모세는 죽어도 모세언약은 남아 있잖아요. 다윗은 죽어도 다윗언약은 살아있어요. 다윗언약에 의해서 이들(에스겔과 다니엘)이 인자라고 불리우는 겁니다. 왜냐하면 다윗보고 인자라 했으니까. “인자가 무엇이관대” 시편 8편에 나오죠. 인자가 무엇이관대 (시 8:4) 이렇게 되어있거든요.

공통적으로 그들은 어떻게 육에서 영의 의미를 알 수 있는가. 그것은 바로 죽음이에요. 무슨 죽음? 육의 죽음이에요. 그들도 육을 갖고 있는데 그 육은 어떤 육이냐? 죽음을 품은 육이 되는 거예요.

‘내가 살다가 죽는다.’가 아니고요. 이러면 살든 죽든 주인공은 누가 되느냐 하면 ‘내가’가 되겠죠. 한번 적어볼게요. 내가 살다 죽는다. 이것은 이제 육의 세계에서 서로 의미가 소통될 때 의미소통할 때 장례식에서 통하는 거예요. 장례식장 가면 다 이래요. 내가 살다 죽는다. 저 사람은 살다 죽었다 하죠.

그런데 영의 세계는 ‘죽음이 죽어있는 내 안에 살아있다.’ 자, 1번- 내가 살다가 죽는다, 2번- 죽음이 죽어있는 내 안에 살아있다, 라면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차이가 있죠. 1번은 주인이 누구입니까? 내가 살다 죽는다. 그러니까 살다 죽는다는 것을 확인하는 확인방법이 내가 숨 끊어졌느냐하는 나의 존재로 죽음을 설명하잖아요.

그런데 2번의 죽음은 내가 살아있는 걸로 죽음을 증명하는 거예요, 내가 살아있는 걸로. 내가 살아있는 걸로 나의 살아있음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고, 너희들 눈에는 내가 살아있는 걸로 보이지? 사실은 죽음이 살아있어.

죽음이 살아있다는 이 말, 육의 세계에서는 알 수가 없죠. 죽음이 살아있다. 왜 죽음이 살아있어야 되죠? 너도 살아있고 너도 살아있고 해서 우리가 하나의 의미의 장(場)을 형성하는데 왜 죽음이 살아있어야 되는가? 그것은 인간의 육과 육은 육1, 육2라면 육1이 한 행동이 육2로 넘어오지를 않아요.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육1에서 한 것은 육1로 돌아가고 육2가 한 것은 육2로 돌아가버려요. 내가 한 것은 나한테로 돌아오지, 남한테 넘겨줄 수가 없습니다. 이게 인간의 한계에요.

‘어떤 사람이 어떤 사람에게 혜택을 입었다’ 그게 인간세계에서는 성립이 안 됩니다. 혜택을 준 자가 살아있어버리면 살아있는 그걸로 혜택이 되돌아오게 되어있어요. 육1이 육2에게 줬는데 주어도 가까이 가지 못하고 온전히 가지 못하고 도로 나한테 온다고요.

예를 들어서 내가 너한테 돈 100만원 주었다. 그러면 사람, 육1이 육2한테 100만원 줬다면, 그냥 줘 그냥 너 해, 하고 줬지만 이 사람은 결코 그 100만원이 온전히 자기 것이 될 수 없습니다. 그리고 100만원 받은 이 사람은 육1의 소유가 돼요. 너 나한테 100만원 가져갔잖아. 네가 100만원 가져가놓고 나한테 이렇게 나오면 돼? 이렇게 돼요, 인간은. 받았으면 이미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나느냐 하면 여기에 ‘살아있다’를 내가 살아있잖아요. 내가 살아있는 이상은 남들이 내가 살아있다는 뜻으로 남들이 ‘살아있다’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내가 살아있으면 내 스타일대로 살아있는 그것과 동일한 스타일로 남들이 살아있다고 이해한다든지 그 사람을 해명할 수 있는 능력은 인간에겐 없습니다.

내가 알고 있는 생각은 나한테로 국한돼요. 남한테 전달이 안돼요. 전수가 안돼요. 그러니까 부부가 같이 살아도 이건 따로입니다. 똑같은 영화를 보고 똑같은 감동의 눈물을 흘려도 따로따로에요. 너 눈물 흘린 이유가 뭐냐? 물으면 생각이 다 달라요. 같을 수가 없어요.

제가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느냐 하면 성경에서 인간세계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 자꾸 일어나요. ‘예수님의 의가 나의 의가 된다’ 이게 인간세계에서는 있을 수가 없어요. 예수님이라 하는 것은 다른 육을 갖고 있잖아요. 다른 육체잖아요. 나는 내 육체가 있죠. 예수님이 의롭다 해서 내가 의로울 수 있는 논리적 근거는 인간세계에서는 없습니다.

예수님에게 돈 100만원 있는데 예수님이 이야기해요. 내 100만원 가져가라. 그래서 100만원 가져왔어요. 돈은 100만원 가져왔는데 예수님이 100만원 가져가라는 그 뜻은 결코 나한테 도달하지 않습니다. ‘고맙다. 참 좋으신 분이야. 어떻게 이렇게 희생적이야.’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건 본인이 본인보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참 희생적이야. 그 뒤에 나오는 내용은 뭐겠어요? 그 예수님의 희생을 아는 나는 참 훌륭해. 그렇게 되겠죠. 예수님이 사랑을 베푸는데 그 사랑을 알아채는 나는 얼마나 착할까. 그게 반드시 따라 나와요.

그러니까 인간은 예수님한테 돈 100만원 받아도 이거는 자기로부터 자기 생각으로 그냥 되돌아가요. 예수님이 하신 것을 전혀 이해 못하죠. 왜? 영적 의미이기 때문에. 육의 세계는 영적 의미를 눈치 채지 못하고 그걸 일체 이해하지 못합니다.

또 예를 들면, ‘예수님께서 희생했다. 죄를 대신하여 희생하셨다.’ 인간이 그 이야기를 듣고 ‘그 희생의 혜택을 내 것으로 만들고 싶습니다.’라는 시도는 할 수 있어도 불가능해요. 가능하지 않습니다. 그것 역시 마찬가지에요. 주님의 희생하시는 희생을 알아차리는 나는 얼마나 의로우냐, 그런 식으로 마지막은 내가 참 잘했다는 쪽으로 이미 정리가 돼요.

이것을 가지고 뭐라 하느냐 하면 비(非)-본래적이라 합니다. 또는 같은 말로 비(非)-진리입니다. 인간의 육이라 하는 것은 비-본래적이고 비-진리에요. 본래적이 아니에요. 그러면 본래적이 아니란 말은, 진짜 원초적이고 본래적인 것은 인간들 속에는 없는 거죠.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다시 한번 볼까요. 인간이 알고 있는 가장 바탕은 뭐냐? ‘내가 살아있으면 아직 나는 안 죽었다.’ 이렇게 돼요. 내가 살아있으면 나는 안 죽었다. 이 죽음이라는 것을 내가 설정하고 나로 확인되는 죽음만 인간은 죽음을 의미하는 거예요. 내가 살아있는 한 나는 안 죽었다.

그러나 주님은 네가 살아있는 것은 네가 살아있는 것이 아니고 네 죽음이 살아있는 거예요, 네 죽음이. 너의 비-본래성이 살아있다. 본래에 들어가지 못하고 본래에 접근하지 못한 채로 너는 살아있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자, 이렇게 여러분들이 강의를 들어보게 되면 우리는 지금 문제의 핵심에, 하나님이 생각하는 진짜 중요한 문제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겉돌고 있죠. 그 변두리에서 빙빙 돌고 있는 거예요. 이 동그라미 안이 본래적이라면 우리는 이 바깥에서 놀고 있어요. 바깥에서 놀고 있다고요.

본래적에 들어가지 못하고 바깥에서 아는 사람 만나서 아이고 이모님 아닙니까? 이러고 있다고요. 아이고, 친구야. 전부다 어떤 누구를 만나도...... 아이고 목사님. 집사님. 본래적 속에는 전혀 들어가지 못하고 자기들끼리 똑같이 하면서 바깥에서 공통적인 의미체계를 형성하는 거예요, 의미체계를. 그게 육의 의미체계가 되는 거예요. 육적인 것.

그래서 이 사람들이 자기는 사람이다, 인간이다. 이렇게 하죠. 그러나 하나님께서 제시한 것은 사람도 아니고 인간도 아니고 뭐냐 하면 인자(人子)가 되는 거예요. 인자라고 호칭하는 거예요. 인자는 어디서 나왔다고 했습니까? 다윗언약에서 인자가 나오죠. 다윗언약에서. 나는 죽고 나를 죽이는 그 죽음이 나로 하여금 발현되게 하는 것. 그걸 현상이라 하는데 내가 살아있는 족족 죽음이 나를 통해서 분출되게 하는 거예요.

육이 육을 낳고 육이 육을 낳잖아요. 육→육→육→..., 창세기 5장에 아담이 자식을 낳고 하잖아요. 그런데 반드시 이 사이에 뭐가 들어가던가요? 애를 낳고 뭐했더라? 사망이죠. 그러니까 사망과 육을 합쳐버리면 죄가 죄를 낳고 죄가 죄를 낳는 거예요. 죄→죄→죄→..., 어디로 가느냐? 죄의 본래성. 죄의 본래성으로 찾아 가즈아~!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찾아가지 못하는 본래성을 잡아내요. 죄의 본래성, 죽음의 본래성, 존재의 본래성. 비-본래성에서 본래성으로 찾아가도록 하나님의 언약이 추동적인 에너지, 힘을 가동시키는 거예요. 하나님의 언약으로. 비-본래적에서 본래적으로 찾아가도록 하나님의 약속이 찾아와서 작동하는 겁니다.

이럴 경우에 이렇게 구분하면 쉽죠. 인간은 죄에서 죄로의 전달매체거든요. 전달하면 되는데...... 인간의 육이 육으로서 죄에서 죄를 낳고 죄에서 죄를 낳고, 아버지가 아들 낳고 손자 낳고 할 때 죄에서 죄를 낳는 거거든요. 죄로서 육에서 육을 낳으면 되는데 인간은 이렇기 때문에 그 죄가 뭔지 규명할 필요가 있겠죠. 무엇이 죄인지.

죄가 뭐냐 하면, 인간은 자기를 옳게 보이고자 합니다. 이때 인간은 사람이라 합니다. 인간은 자기를 옳게 보이고자 합니다. 항상 어떤 순간이든 어떤 자리든 인간이 가장 근본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내가 이런 행동하는 게 남들 보기에 옳다고 인정받겠나? 아니면 옳지 않겠다는 평가를 받겠어? 옳지 않다는 평가를 받겠다, 하는 것도 근본적으로 옳게 보이고자 하는 것이 먼저 전제되고 있는 거예요. 옳게 보임을 전제하기 때문에 인간은 항상 자기를 옳게 보이고자 하는 데에 집중합니다.

그게 아버지가 이렇고 자식이 이렇고 손자가 이렇고 그걸 계속해서 전수하는 거예요. 말이나 행동과 태도, 표정 이런 걸 통해서 정서적인 감정 이런 걸 통해서 계속해서 옳게 보이고자 하는 것을 유지하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인간을 어떻게 보느냐 하면, 인간은 옳게 보이고자 하잖아요. 성경에서는 뭐냐? 그냥 하는 거예요. 인간은 인간 육의 그 어떤 의미도 영의 세계로 들어올 수 없는 의미이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그런 의미를 부여하는 게 아니고 그냥 하는 거예요. 그냥 움직이는 거예요. 아무 의미가 없이 그냥 움직이는 거예요.

길거리에 쓰레기 청소한다. 그걸 가지고 저 사람은 그냥 청소한다는 뉘앙스로 이야기하지 않아요. 저 사람은 남이 하지 않는 희생적이고 참 착한 일을 한다. 옳은 일을 한다는 뉘앙스를 집어넣어서, 저 사람은 청소하네. 화내면서, 저 사람은 청소하네! 이러진 않잖아요. 갑자기 순해져서는, 당신은 청소하고 있군요. 이러잖아요.

그러나 주님께서는 뭐냐? 그 사람이 휴지를 담배꽁초를 버리는 거나 줍는 거나 주님께서는 똑같이 봐요. 그냥 꽁초 버리네. 또는 그냥 남의 꽁초 줍네. 끝. 저 사람은 애기를 낳았네. 저 사람은 애기를 못 낳네. 끝. 아무 의미 없어요.

의미를 부여하는 쪽은 영, 언약에서 의미를 부여해야 의미가 되지, 내 쪽에서 하게 되면 인간의 의미는 항상 자기를 옳게 보이려 하기 때문에 여기서 변명들이 굉장히 나와요. 자기 커버죠. 자기가 옳다는 것을 변명하는 조가 굉장히 많이 나옵니다.

그래서 죽음이 하나님의 언약적인 일을 이루는 거예요, 죽음이. 인자는 뭐냐? 인자는 안에 죽음의 내부성으로서 죽음이 내부적으로 담겨있는 거예요. 예수님이 인자잖아요.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는 것은 돈 100만원이 아니에요. 자신의 죽음을 우리에게 제공하는 겁니다. 어찌 기쁘지 아니한가.

우리보고 죽으라는 말이 아니고 살아있으면서도 너도 나처럼 네가 살아있지 말고 나의 죽음이 언약적 죽음, 약속된 죽음, 인자의 죽음이 네 안에 펄펄 살아있도록 펄떡펄떡 살아있도록 그렇게 주님께서는 조치를 하는 겁니다. 죽음을 전달하는 거예요. 죽음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혜택으로 주는 겁니다. 너도 나처럼 죽을 수 있다는 것. 의미있는 죽음이죠. 언약적 죽음을 죽을 수 있다는 것을 주님께서는 제시합니다.

그 방법은 죄가 죄를 전수한 여기에다가 언약을 집어넣어요. 언약의 개입입니다. 죄의 흐름에 언약을 개입합니다. 죄→죄→죄→..., 이렇게 하면 이게 어디로 간다고 했던가요? 죄의 원천, 본래의 죄로 가겠죠. 본래의 죄가 뭐냐 하면 선악지식으로 가득 찬 상태. 선악지식의 상한가. 최고치. 선악지식의 최고치로 찾아가요.

선악지식이 가득 찬 그 상태가 되어야 생명나무의 과실을 먹을 수 있습니다. 선악과 따먹지 말라 했는데 선악과 따먹었잖아요. 그러면 선악과 따먹은 게 죄가 되죠. 죄의 극한치를 찾아가는 거예요. 무엇을 통해서?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서.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서 찾아가는 거예요.

게이지 수치를 극도로 올려버리는 거예요. 어떤 공장의 기계를 가동할 때 뭔가 위험이 되면 소리가 위이잉~~~ 막 올라가죠? 이스라엘 역사를 가지고 경고음이 제일 극도로 발현되는 그 순간이 되도록 우리 예수님께서 이스라엘 유대민족과 만난 거예요. 극한치, 죄, 선악체제의 극한치, 자기를 옳게 보이는 것의 극한치까지 극한상황을 의도적으로 하나님께서는 유도하는 거예요. 그래야 생명나무 과실을 먹을 수 있습니다. 나는 죄인을 부르러왔다. 나는 죄인을 부르러왔다는 말은 어떤 이질적인 것 전혀 없이 오직 선악체계로만 가득 차 있는 그 죄인을 주께서는 부르러 오신 거예요.

그렇다면 여기서 이제 좀 어렵게 얘기해보겠어요. 인간들은 전부다 죄인이죠. 죄인. 죄인 되죠. 그러면 죄의 원천을 보여주는 분은 누구입니까? 인자되시는 예수님과 마주칠 때까지, 죄→죄→죄→..., 이것들이 예수님의 벽에 부딪칠 때까지. 이 파동이 벽에 딱 부딪칠 때 사건 터지는 겁니다. 더는 갈 필요 없어요. 죄의 극한치가 여기 있으니까요. 예수님을 더 넘어설 수는 없어요. 예수님이 본래성이니까요. 예수님 그 뒤편에 본래성이 없어요. 그냥 예수님으로 본래성은 완결이 되는 겁니다.

그 전까지는 비-본래성이에요. 내가 누구인지를 몰라요. 내가 죄인이라 해도 뭐가 죄인지를 몰라요. 그러니까 사람이 고생한다고 인간되지 않아요. 아무리 고생고생하고 힘들어도 심지어 고생한 것조차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하기 때문에. 항상 변명이거든요. 어떤 경우라도 빨리 그 일을 수습하면서 나는 정당했다. 나는 옳았다. 나쁜 사람은 저쪽이 나쁘지 나는 나쁘지 않다. 그걸로 수습을 빨리 해요, 수습을. 그때그때마다 수습을 하거든요. 하나님께서 언약을 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수습 불가하게 만들어버리는 거예요.

이렇게 보면 돼요. ‘인간이 믿고자 하는 것은 모든 가능성이다.’ 인간이 믿는 것은 항상 가능성을 믿어요. 불가능성을 믿지 않아요. 왜냐? 불가능성을 믿어버리면 자기에게서 희망이 끊어지기 때문에. 좌절되거든요. 절망적이에요. 아무리 어려워도 또 뭐 다른 문을 열어주시겠지, 이러고 있다고요.

그러면 이 가능성의 내용은 어떤 가능성이냐? 내가 계속 살아있을 가능성이다. 내가 계속 살아있을 가능성이죠. 그러니까 인간이 믿고자 하는 것은 점점 무엇과 멀어집니까? ‘죽음이 너를 통해서 살아있다’ 하는 그 진리, 이것이 본래성인데 죽음이 너를 통해서 살아있다는 이것이 인자거든요, 다니엘, 에스겔인데 인간이라는 작자는 이런 선지자로부터 또는 주님으로부터 점점 엉뚱한 쪽으로 계속 땀 뻘뻘 흘리면서 그쪽으로 달려가는 거예요.

아직도 배가 열두 척 남아있다. 그 배 열두 척 중에 열한 척 (불에) 타면 뭐라고 하겠어요? 아직도 한 척은 남아있다. 그럼 한 척 타면 뭐라고 하는가? 다음에 또 만들어야지. 끊임없이 인간이 게워내고 하는 것은 자기 자신에게 희망이 있다는 이점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이건 무조건 옳은 판단이라는 것을 유지하고 싶은 겁니다.

인간 생각이 이래요. ‘내가 살아있다는 것은 아직 죽지 않았다는 말이다.’ 이 말 맞습니까? 이게 바로 육이 살아있는 거예요. 이게 육적이에요, 영이 아니고. 이게 인간이거든요. 그래서 주님(人子)에 대해서 인간들은 존재하지 않는 분과 상대해야만 했다. 같이 존재하는 인간 같으면 같은 육이기 때문에 같은 의미체제에서 이야기가 되는데 예수님은 인간에게서 존재하지 않는 분이에요.

비-본래적 세계에서 본래적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비-본래적인 것만 존재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진짜 본래적인 분은 존재하지 않는 거예요. 그래서 이스라엘이 결국은 망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나중에 이스라엘은 결국 같은 존재하는 자들, 같은 이스라엘 또는 같은 인간인 이방민족과의 교류에서 그들은 한통속이 되면서 망해버리는 겁니다.

그래서 비-본래적인 것은 공속(共屬) 한다. 공통적으로 서로 속해있다는 이야기에요. 끼리끼리 그들은 대화가 되고 잘 만나는 거예요. 존재하는 것, 일단 육이죠. 이들이 보기에 존재하지 않는 것, 영이죠. 신약에서는 영이고 구약에서는 이게 언약이 되죠. 이 두 개가 같이 있는 것을 가지고 인자(人子)라고 합니다.

이게 다니엘과 에스겔이에요. 존재하는 것은 육이죠. 여기에 뭐가 옵니까? 하나님의 약속이 주어지는 거예요. 약속이 주어지면서 선지자 내부에서 새로운 조짐이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선지자 내부에서. 이 존재하지 않는 걸로 인하여 이 존재가 문제의 대상이 되는 겁니다. 육이 문제의 대상이 된다.

아까 다시 해볼게요. 1번-인간은 자기를 옳게 보이고자 한다. 2번-그냥 한다. 뭐가 빠졌어요? 옳다는 것이 빠져있는 상태에서 그냥 한다. 그냥 하니까 이건 수동적이죠. 그래서 지난 번에 p.227에서 【수동적 자율성】이라는 말을 했죠. 그냥 하는 거예요. 그냥 하는 것. 뭐가 빠졌어요? 자기를 옳게 보이고자 하는 것을 주께서는 의도적으로 인자 내부에서는 이걸 육에서 이어받은 죄로 보는 거예요. 자기를 옳게 보는 것을 죄로 보는 겁니다. 그래서 죄+언약을 통해서 인자가 되게 하는 거예요.

오늘날 우리 성도에게도 마찬가지에요. 어떤 일이 터지면 뭐가 마중 나오느냐? 자기를 옳게 보이는 것이 마중을 나와요. 내가 이거 잘했을까? 나 때문에 남이 피해를 보는 일은 없었을까? 피해 입었으면 내가 보상을 얼마나 해줘야 돼? 미안하다고 이야기해야 돼? 안 그러면 돈 얼마를 들고 내가 찾아가야 되나? 안 그러면 선물 보따리, 감이라도 사들고 올까? 이런 거 하는 거예요.

자꾸 왜 그런 행동합니까? 내가 나를 그냥 둘 수가 없어요. 내가 나를 지저분한 존재로 방치할 수가 없어요. 왜 방치하면 안 되죠? 나는 죽어야 될 이유를 내 안에 품었기 때문에 죽어야 될 이유를 배제하고 행동하면 안돼요. 내가 죽어야 될 이유는, 자기를 옳게 보이기 위해서 옳게 보이는 것 때문에 내가 마땅히 저주받아야 되고 죽어 마땅하거든요.

그러니까 벌어지는 일은 선악체계의 상한가를 쳐버리는 거예요. 빨리 수습해서 나로 인하여 피해자가 없게 만들고 나로 인하여 상처받는 자가 없게 만들고, 참 그 사람은 우리 곁에 있는 것 자체가 복이야, 라는 이야기를 듣고 싶은 거예요. 이게 자기 잘남의 상한가입니다. 2700 막 올라가서 주가가 3000 돌파해. 코스피 막 올라가.

죄를 죄 되게 했을 때, 그렇게 할 때 자기 의의 상한가가 equal(=), 죽음의 이유의 상한가로 되는 거예요. 내가 죽어야 될, 더 살 이유가 없는, 내가 저주받아야 될 이유의 상한가를 치는 겁니다. 내가 옳게 보이도록 시도하는 그 자체가.

공속(함께 속해있음)이라는 말을 했는데 이 공속이 커지면 이걸 공동체라 합니다. 공동체의 기본은 가정이에요, 가정. 자기 가정의 가오, 자기 가정의 위신, 체면. 이거는 뭐 이유도 없이 온가족은 여기에 무조건 복종해야 돼요.

그러나 여기에 2번-그냥 한다는 것은, 내 사명은 내가 죽어 마땅한 죽음을 지켜내는 거예요. 내가 죽어 마땅함을 지켜내는 거예요. 내가 죽어 마땅함을 위해서 내가 기필코 살아야 돼요. 왜냐하면 예수님은 죽음으로써 일을 본격적으로 시작했기 때문이에요.

인간들이 예수님을 죽였잖아요. 죽고 난 뒤에 예수님의 일은 팔레스타인 지역이 아니고 시간 공간이 아니라 시간 공간을 넘어서서 전 기간에 걸쳐서 전 지역에 걸쳐서 주께서는 본격적으로 일할 수 있는 근거가 마련되어 있었던 겁니다.

이후에 이야기는요.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방금 이야기한 것이 어떻게 출현되고 그게 사건화 될 수 있는가 그 이야기를 할 거예요. 그러나 그전에 몇 가지 더 이야기할 것이 아직 많이 있어요.

인자, 인간이 아닌 인자, 이 말이 중요합니다, 인자의 내부 전쟁, 인자의 내부적인 투쟁, 인자 이전에는 이스라엘이죠, 내부전쟁이 하나님과의 전쟁으로 이어져서 죽음이 상한가를 친다. 인간의 내부 전쟁이라 하는 것은, 육은 누구를 상대하는가? 육은 육하고 상대하죠. 육하고 상대하면 남는 것은 ‘나는 옳았나?’ 라는 의식입니다. ‘내가 남들 보기에 옳게 행동했어?’ 라고 이렇게 의식이 되는 거예요. 육하고, 사람이 사람하고 상대하는 거예요. 이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일상(사) 또는 일상생활이라 하는 거예요.

그래서 아무리 복음을 알고 해도 우리가 만나는 것은 일상과 만나요. 잡담과 애매함과 이런 것. 일상과 더불어서 일상과 만나요. 자, 일상과 만나게 될 때 사람들은 자기가 긴장할까요, 안 그러면 긴장을 풀까요? 항상 일상 속에서는 자기 긴장을 풉니다.

자기 의 체크하기. 일상에 반응하는 인간의 기본자세는 자기 의로움, 자기 의를 체크하기에요. 어떤 사람이 자기 의를 체크하는 방법 세 가지를 이야기했어요. 사르트르(Jean-Paul Sartre, 1905~1980)라는 사람이 자기가 자기를 체크하는 방법으로 세 가지를 제시했어요. 첫 번째는 책, 두 번째는 거울, 세 번째는 깨어있기. 이 세 가지를 이야기했는데 사르트르는 <닫힌 방>이라는 책에서 지옥을 묘사합니다. 지옥을 묘사할 때 지옥에는 세 가지가 없는데 첫 번째는 책이 없고 두 번째는 거울이 없고 세 번째는 깨어있음. 그러니까 지옥에는 잠이 없다는 거예요.

이 사람의 이야기를 왜 끄집어내는가? 인간들은 일상을 어떻게 살아가는가, 그것을 이런 소설로서 잘 보여줬기 때문에 제가 끄집어내는 거예요. 지옥에는 책이 없다는 건 자기표현, 자기 구상이 먹히지 않는 곳, 이게 지옥이죠. 한 열 명이 같이 모여서 이야기하는데, 특히 예능프로에서 패널들 나와서 이야기하잖아요, 다른 사람들은 다 방송분량 가지고 자기 말 했는데 한 사람은 자기 말이 편집돼서 잘리기도 하고 나오지도 않을 때, 그 사람은 뭘 느낍니까? 비참함을 느끼죠. 내가 거기 왜 있는데? 말도 못하고......

책이란 자기표현, 자기 글쓰기에요. 자기 글을 썼다는 말은 의미체계 속에서 내가 여기 존재한다는 것. 그러니까 죽음이 살아있는 게 아니고 내가 살아있다고 저쪽에서 인정해줘야 나는 의롭다는 것이 증명이 돼요. 자기표현.

거울은 뭐냐? 뻔하죠. 지옥에는 거울이 없어요. 거울이 없으면 우리는 누구만 있어요? 타인들만 있죠. 그래서 사르트르는 지옥은 타인이라는 말을 했어요. 이 사람의 유명한 주장인데 지옥은 타인이다. 지옥은 타인이라는 말은 내 뜻은 없고 남 뜻만 있는 곳이 지옥이다 이 말입니다. 그럼 나는 왜 있는데? 내 주장도 좀 하자.

사람들이 나에게 요구하는 욕망 또는 시선, 나에게 하는 잔소리 그런 것만 있다면 그거 뭐 100억대 재산가, 남들 보기에 단란한 가정, 사이좋은 그런 부부라 할지라도 부부사이에 잔소리가 심해져버리면 그건 사는 게 아니고 지옥이죠. 그렇죠? 자기 주장을 못 펼 때는 지옥입니다. 그때 숨 돌릴 곳이 뭐냐 하면 거울 들여다보는 거예요. 립스틱 짙게 바르고 화장을 고치고. 왁스에다가 임주리인가 뭐 립스틱 짙게 바르고. 이걸 왜 하느냐 하면 나도 나만의 소박한 내 세계 안에서 나의 욕망, 내가 보는 나의 시선을 좀 살려보겠다는 거예요. 그게 허용되지 않으면 그게 바로 지옥이라는 거예요.

세 번째, 깨어있는 것. 이게 뭐냐 하면 사람이 잠을 못 자는 게 지옥입니다. 늘 초롱초롱하게 깨어있으면요. 안되죠. 그래도 이렇게 자기가 사라지는 그런 게 있어야 다음 날 개운하게 일어날 수가 있잖아요, 다시 원기회복해서.

늘 깨어있으면 기억이 깨어있어요, 기억이. 기억이 깨어있으면 기억이라 하는 것은 남들이 보기에 내가 옳다는 것을 자꾸 증명해야 될 그런 부담을 계속 지고 있는 거예요. 내가 스스로 그것을 짊어지고 있는 거예요. 차라리 모든 걸 놔둬버리고 그냥 던져주고 나를 잊어버렸으면 좋겠다. 그런데 지옥 불에서는 잠을 재우지 않습니다. 계속 불침번이에요.

그래서 사르트르의 이러한 주장은 눈에 보이는 것, 살아있는 우리끼리 죽이 되든 밥이 되든 간에 어쨌거나 우리끼리 그냥 살자. 그래서 그걸 실존주의 철학이라 하는 거예요. 그래서 사르트르는 이렇게 주장합니다. 이렇게 되면 우리끼리니까 자기밖에 모르니까 어떻게 되겠어요? 나에게는 타인의 속죄가 필요치 않다.

나에게는 누가 나를 용서하는 게 필요치 않다. 나는 내 식대로 그냥 살래. 내 식대로 살래. 만약에 누가 나에게 속죄를 해버리면 나는 내가 없어지잖아요. 내 가치, 가오, 내 희망 이게 없잖아요. 그게 지옥이라는 거예요, 사르트르에 의하면. 내가 사라지는 게 지옥이라는 겁니다.

그럼 오늘날 교회 교인들 보게 되면 이건 사르트르도 아니고 양다리 걸쳐있어요. 속죄도 원하면서 자기 주장은 또 펼치고 싶고. 그러니까 어중이 떠중이죠. 자, 나에게 타인의 속죄가 필요치 않다는 것이 주장인데 이게 진짜 지옥이죠. 항상 자기한테 깨어있으면 지옥이죠.

이제 두 번째 시간에 하겠는데 영의 세계라는 것은 한 사람의 희생이 혜택으로 돌아가는 세계, 이게 영의 세계입니다. 한 사람의 희생이 혜택으로 돌아갈 수 있는 세계. 그러면 영의 세계에서 지옥은 뭐냐? 어떤 인간도 하나님이 만족스러운 희생을 제공할 사람이 없어요. 인간은 자기밖에 모르는 이상은 자기 안에 자기만 있는 사람은, 인자 말고 인간들, 인자 말고 사람들에게는 자기를 위한 것밖에 없어요. 그러니까 남에게 돌아갈, 하나님이 받지 않을 그것밖에 내놓을 게 없어요. 안 받습니다. 그게 바로 육의 세계이고 그게 바로 지옥이 되는 거예요.

그럼 천국은 뭡니까? 예수님의 희생이 나한테 실제적으로 혜택이 돌아오는 그런 세계. 그 세계는 어떤 세계냐? 예수님의 인자의 죽음이 우리 속까지 파고들어오면 비로소 우리는 내가 주인공이 아니라 주님의 죽음이 나의 주인공이 되면서 우리는 그 혜택을 받는 영의 백성이 되는 겁니다. 10분 쉽시다.

 

 

광주강의20221028b 창세기3장 15절(발꿈치)-이 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 하겠습니다. 이미 죽으신 분이 우리에게 무슨 혜택을 줄 수 있는가? 예수님은 죽었지만 약속은 남아 있잖아요. 약속 따로 예수님 따로가 아니라 약속 안에 예수님이 들어가 계시죠. 그걸 인자라고 하는 겁니다.

첫째 시간부터 인자 계속 이야기했지만 인자란 죄의 상한치, 죄가 끝까지 있을 때 죽어 마땅하죠. 정녕 죽으리라 했으니까 그 안에 비로소 생명나무 과실이 담겨있는 겁니다. 죽음을 끝까지 몰아세우시는 분, 이분이 바로 생명 되시는 분이에요. 선악과와 생명나무가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이게 가능한 거예요. 그러면 주님은 우리의 행함과는 상종을 안 하죠. 상대를 안 합니다.

인자는 다니엘, 에스겔입니다. p.229에 보면 제일 위에 나오죠. 【다니엘은 인간이다.】그다음에 무슨 말했어요? 육이다. 【인간이다. 육이다.】육이니까 죄의 상한가를 치는 거죠. 인간이란 다른 말로 육이니까요. 같은 인간들이 보면 인간이 되고 언약적으로 보면 육이 되는 거예요. 다니엘을 육으로 보시는 겁니다.

그러면 다니엘이 있다면 다니엘 안에 이스라엘 역사가 들어가 있는 거예요. 이스라엘 역사는 언약의 역사죠. 언약의 역사. 다니엘이 등장하기 전까지 이스라엘 역사가 다니엘 나올 때까지 계속 줄곧 그 안에서 유지하고 진행해왔던 겁니다. 다니엘의 입에서 터져나온 그 계시와 그 예언은 과거로부터 밀어붙인 그 뜻, 취지가 유지되면서 견지되면서 그냥 그 시대에 합당한 언약이 노출되는 거예요. 다니엘 인자 자체가 이스라엘 역사의 구현이라 보면 되는 겁니다. 물론 다니엘에서 멈추지 않죠. 마지막에 어디서 멈춘다 했어요? 인자되시는 예수님에서 멈추게 되는 겁니다.

그럼 이스라엘 역사에서 이스라엘은 첫 번째 누구와 싸우느냐 하면 같은 인간하고 싸우죠. 이방민족. 이방민족하고 싸우고 두 번째는 하나님과 싸워요. 언약은 이런 식으로 이스라엘을 인도해요. 이걸 제가 말로 하는 것보다도 성경 한번 찾아봅시다. 사사기 1장 1절에서 2절 보게 되면 “여호수아가 죽은 후에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묻자와 가로되”

여호수아가 죽은 후에. 누가 죽죠? 첫째 강의를 잘 생각해야 돼요. 사람은 죽어요. 사람은 죽지만 언약은 살아있어요. 언약이 살아있는 게 중요하지, 내가 사는 게 중요하지 않아요. 언약이 살아있을 때 나는 곧 죽음이 나를 주도하면서 죽음을 살려내기 위해서 내가 살아있는 거죠. 내가 살기위해서 온 게 아니고 죽음 자체가 살아있기 위해서 언약 안에 들어있는 분의 고귀한 죽음이 살아있기 위해서 이스라엘을 이용했다고 보시면 됩니다.

여호수아가 없습니다. 여호수아는 끝났고 없습니다. “여호와께 묻자와 가로되 우리 중 누가 먼저 올라가서 가나안 사람과 싸우리이까” 싸우죠. 지금 누구하고 싸우는 겁니까? 이스라엘이라는 사람과 이방나라 사람 가운데 싸우는 거예요. 싸우니까 그 뒤에 8절 유다 자손, 13절 옷니엘도 그렇고, 21절 베냐민 족속도 싸우고, 22절 요셉 족속도 싸우고, 그 뒤에 27절 므낫세도 싸우고, 그다음 29절 에브라임도 싸우고, 30절에 스불론도 싸우고, 33절에 납달리도 싸우고 이렇게 싸우잖아요.

싸우는데 제대로 싸웠습니까, 아니면 적들이 남았습니까? 보니까 여기 30절에 “스불론은 기드론 거민과 나할롤 거민을 쫓아내지 못하였으나 가나안 사람이 그들 중에 거하여 사역을 하였더라” 이렇게 되어있어요. 이스라엘이라는 그 육이 이방나라의 육과 제대로 싸우지를 못한 거예요. 제대로 다 물리치지를 못했어요. 31절에 아셀도 나오죠. “아셀이 악고 거민과 시돈 거민과 알랍과 악십과 헬바와 아빅과 르홉 거민을 쫓아내지 못하고” 쫓아내지 못했죠. 32절에 “그 땅 거민 가나안 사람 가운데 거하였으니 이는 쫓아내지 못함이었더라” 쫓아내지 못했죠.

왜 쫓아내지 못했는가? 그게 사사기 2장에 나옵니다. 사사기 2장 22절, “이는 이스라엘이 그 열조의 지킨 것 같이 나 여호와의 도를 지켜 행하나 아니하나 그들로 시험하려 함이라 하시니라” 21절, “나도 여호수아가 죽을 때에 남겨둔 열국을 다시는 그들의 앞에서 하나도 쫓아내지 아니하리니 이는 이스라엘이 그 열조의 지킨 것 같이” 하나님의 도를 지키나 안 지키나 시험하기 위해서 그들로 머물게 했다는 거예요.

제대로 된 싸움은 아직 시작도 안했어요. 인간과 인간의 싸움이에요. 육과 육의 싸움이에요. 싸우는 이유가 뭡니까? 자기가 존재할 만큼 살만한 가치 있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서 싸우잖아요. 그러면 이스라엘이 지금 다는 쫓아내지 않았지만 일단 가나안 땅을 접수해서 살고 있죠. 살고 있다는 말은 자기 자신에게 문제가 있다는 말입니까, 안 그러면 이 땅에서 살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까? 살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죠.

그러고 난 뒤에 사사기 2장 20절 봅시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여 이르시되 이 백성이 내가 그 열조와 세운 언약을 어기고 나의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하였은즉” 이렇게 나오죠. 참... 이스라엘 역사가 뭐냐? 2장 3절 한번 봅시다. “그러므로 내가 또 말하기를 내가 그들을 너희 앞에서 쫓아내지 아니하리니 그들이 너희 옆구리에” 뭐가 되고? “가시가 될 것이며 그들의 신들이 너희에게 올무가 되리라 하였노라” 이렇게 할 때 “이스라엘 모든 자손에게 이 말씀을 이르매 백성이 소리를 높여 운지라 그러므로 그 곳을 이름하여 보김이라 하니라 무리가 거기서 여호와께 제사를 드렸더라”

자기 뜻대로 안되죠. 그런데 인간이 자기 뜻대로 되지 않을 때 죄가 상한가를 치는 거예요. 내 뜻대로 안 된다는 말은 지금 내 뜻이 뭔가 문제가 있다는 뜻이거든요. 내 뜻이 안 된다. 적어볼게요. 내 뜻이 안 된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보세요.

‘내 뜻대로 안되게 하신다.’할 때 뜻, 내 뜻 이게 문제잖아요. 내 뜻이 굳이 있을 이유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인간이란 존재는 나의 뜻이 있을 수가 없고 나의 뜻이 있으면 안돼요. 비-본래적이니까. 본래적이 아니라니까요. 원천적이 아니에요. 본래적이라는 것은 선악과 따먹지 않아야 본래적이에요. 이미 따먹었잖아요. 따먹었으면 본래적이 아니고 비-본래적이에요.

지금 주님께서는 주님 희생의 대가를 주기 위해서 혜택을 주기 위해서 비-본래적인 것을 어디로 끄집어 당긴다? 본래적인 것으로 끄집어 당기는 거죠. 당길 때 뭐가 날라가야 돼요? 내 뜻이 날라가줘야 돼요, 내 뜻이.

내 뜻이 날라간다고 할 때 그 뜻을 어떻게 아는가? 첫째 시간에 했습니다. 첫째 시간 할 때는 이게 무슨 소리인가, 왜 이야기하나 했을 텐데, 일상 속에서 내 뜻은 뭐냐? 자기 의의 고수(固守)입니다. 자기 의를 갖고 있어야 돼요. 의로움이 나한테 있다는 거예요, 의로움이. 그러니까 의로움이 있는 이상은 날 함부로 대하거나 하나님이 날 죽이면 안 된다는 거예요. 내 안에 의가 있으니까. 자기 의를 고수하는 것이 내 뜻이에요.

그런데 나의 의가 아슬아슬해요. 이스라엘 사람들이 지중해와 요단강 사이의 땅을 다 차지해야 되는데 다 차지 못하고 중간에 적들의 공격의 표적이 될 정도로 일부만 차지하게 된 거예요. 좀 어설픈 거예요, 이것은.

그러면 여러분께 한번 물어봅시다. 지금 이스라엘은 계속 같은 인간인 육들과 싸워야 됩니까, 아니면 그 싸움 말고 다른 데로 눈을 돌려야 되겠어요? 어떻게 되겠어요? 눈을 돌릴 찬스, 기회가 온 거예요. 아, 이거는 나의 의를 위해서 상대방을 공격하고 나의 의를 챙기는 이 목적 자체가 이게 주께서 용납하지 않는 거구나,를 알아야 돼요.

제가 문제 하나 낼 테니까 알아 맞춰보세요. 상당히 어려운 문제인데...... 초등학교 선생님은 문제를 안일하게 냈는데 아이가 이 문제를 어렵게 만들었어요. 초코사탕 36개 중에서 초코사탕 29개를 먹었습니다. 문제가 뭐냐? ‘남은 것은 무엇입니까?’라는 문제였어요. 초코사탕 36개 중에서 초코사탕 29개를 먹었을 때 남은 것은 무엇입니까? 이거 굉장히 쉬운 문제잖아요.

36-29= 초코사탕 7개, 이게 선생님이 안일하게 본 답인데 그 답변을 한 초등학교 학생이 문제를 아주 심오한 문제로 만들었어요. 답변은 뭐냐 하면 ‘당뇨’라고 했죠. 이 말이 정답이 되는 거예요. 이게 뭐냐 하면, 질문하는 자, 내가 아쉬운 자, 애달파서 열심히 기도하는 자를 주께서는 인정하지 않습니다. 이미 정답은 따로 있어요. 우리 자체가 육에서 영이 되어야 될 필요가 있는 거예요. 그러면 영의 세계, 언약의 세계를 이해해야 돼요.

그러나 인간들은 좀 이기니까 여전히 자기가 쥐고 있는 것은, 내가 의롭기 때문에 적들은 나보다 죄가 많고 난 의롭기 때문에 내가 이 땅에 살만한 가치를 지니고 살아간다. 난 살만한 정당성을 확보해서 살아간다. 이걸 자기는 정답으로 보는 거예요. 36-29=7, 남은 초코 7개 이거는 하늘나라 언약공식에서 이건 땡이에요. 틀린 거예요. 당뇨가 돼야 되요.

당뇨 걸리면 어떻게 됩니까? 죽죠. 인간의 모든 행함은 뭐로 이어져야 됩니까? 죽음으로 이어져야 돼요. 그래야 내가 살아있는 것이 아니고 죽음이 내 안에 합류해서 살아있기 때문에 그래요. 죽음으로 이끄는 삶이죠. 목적으로 이끄는 삶이 아니고. 죽음으로 이끄는 삶.

왜 너는 꼭 죽어야 돼? 그 이유를 이스라엘은 언약을 통해서 알아야 되는 겁니다. 그런데 그 이유를 아는 방법은 적들이 내 뜻대로 안되게 적들로 남아 있어줘야 돼요. 내 원대로 뜻대로 세상이 돌아가지 않아야 되는 겁니다, 내 원대로 뜻대로. 나의 일에 대해서 시비 걸고 나의 의를 비참하게 만드는 요소들이 일어나줘야 돼요. 예를 들면 당뇨 같은 거. 먹을 땐 맛있게 먹는데 당뇨 걸려서 얼굴색이 안 좋아져요.

그래서 아까 첫째 시간에 이야기한 것 다시 적어볼게요. 인간과의 전쟁에서 하나님과의 전쟁으로 주께서는 이끌어 가시는 거예요. 전쟁입니다, 전쟁. 그게 어디 안에서 이루어진다? 이스라엘 내부에서. 이스라엘 내부에서 이방민족과 싸우면서 하나님의 전쟁에 참여케 하는 거예요. 이것은 이방민족과의 문제가 아니고 내가 주인공이라는 나와 주님과의 문제가 되는 거예요.

보통 시험 칠 때나 뭔가 콘테스트하거나 경쟁, 오디션보고 할 때 흔히 어른들이 조언을 많이 해줘요. 수능 칠 때도. 누구하고 경쟁할 생각하지 말고 남한테 이길 생각하지 말고 너 자신과 싸우라는 말을 하죠. 너 자신과 싸워라. 네가 무엇을 알고 있고 무엇을 모르는가, 네 자신과 싸워라. 이렇게 하는 겁니다.

마찬가지에요.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전쟁을 할 때는 주위에 얼마나 강대국이 있느냐, 얼마나 발달된 무기를 갖고 있는가, 숫자가 얼만가, 일체 그런 것은 전부다 차단되어야 돼요. 그게 바로 사사기입니다. 사사기에 유명한 기드온 나오죠. 13만 5천명인가 나오잖아요. 그런데 기드온은 몇 명으로 이겼습니까? 301명, 기드온 빼고 300명. 300명이 이겼습니다. 이게 무엇을 뜻하는 거예요? 지금 네가 인간들과 인간들이 싸우는 그런 쪽수싸움이 아니라는 거예요.

이것은 뭐냐 하면 인간이 믿는 것은 풍부한 가능성. 여기에 대한 미련. 풍부한 가능성에 대한 미련, 이걸 인간이 못 버립니다. 세리와 강도, 창기는 버렸어요. 하지만 공부 잘하고 점잖고 인격적이고 훌륭하고, 보이스피싱 당하고 사기 당해도 아직 집에 배가 열두 척 남아있는 사람은 아직도 뭘 내다봅니까? 가능성 내다보는 거예요.

첫째 시간에 한 것 한번 연결해봅시다. 가능성 내다본다는 것은 나에게는 더는 속죄가 필요치 않습니다. 나는 속죄보다도 내가 할 수 있는 가능성, 풍부한 가능성을 난 믿고 싶습니다. 풍부한 가능성에서 필요한 것은 용기와 투지, 결단력, 희생적인 각오. 이게 전부다 행함이거든요, 행함. 낮은 마음 이런 거. 겸손하기, 범사에 감사하기 전부 다 행함이에요. 속죄 아닙니다.

수요일에 제목에도 나왔지만 주님께서 준비한 것은 뭐였던가요? 이거였죠, 이거. 사면이죠, 사면. 사면이지, 마음 낮추기가 아닙니다. 마음을 낮춘다는 것은 아직도 배가 열두 척 남아있다는 뜻이에요. 겸손하게 다시 일어서는 거야. 다시 하는 거야.

이스라엘 백성이 결국은 망한다는 이야기를 했잖아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로 하여금 이방나라를 남겨놓고 전쟁케 하면서 결국은 이방나라는 떨어지고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전쟁이죠. 그때 이스라엘이 해야 될 일은 뭐냐? 창세기 3장 15절을 해야 됩니다. 창세기 3장 15절.

육의 세계에서 악마는 보이지 않습니다. 보이는 것은 육의 세계이지, 영의 세계는 안 보여요. 악마는 나의 무엇을 물었다 했습니까? 나의 발꿈치를 물었다. 이 일을 이스라엘이 해줘야 됩니다. 이스라엘이 이 일을 해야 돼요. 주님의 발꿈치를 물어야 돼요. 그게 인자입니다. 인자라 했던 에스겔과 다니엘은 그 시대 이스라엘한테 환영을 받겠습니까, 모욕을 당했겠어요? 모욕을 당했죠. 나의 발꿈치를 물었다. 이 발꿈치 주변에 모인 자들이 인자들입니다.

예수님이 악마한테 당했던 그 흔적, 갈라디아서 6장에 사도 바울이 나한테 예수님의 흔적이 있다했죠 (갈 6:17). 그 흔적을 지닌, 세상 사람들에게 당했던 발꿈치를 물린 흔적을 지닌 그 주변으로 모여드는 거예요. 모여들 때 인자로 모여드는 겁니다. 그런데 제가 첫째 시간에 뭐라고 했느냐? p.229에 보면 인자는 인간이다. 인자는 그다음에 뭡니까? 육이죠. 인자는 인간이다, 육이다. 다시 말해서 인자가 육이라는 말은 바로 죄의 상한가를 친 거죠.

여기 발꿈치를 물 때 머리를 치는 것은 누구 몫입니까? 주님의 폭력이죠. 주님이 쳐버리는 거예요. 수요일에 설교한 것처럼 주께서 폭력으로 쳐버리는 거예요. 이스라엘을, 바벨론을 통해서 아주 원천적으로 쳐버리는 거예요. 쳐버릴 때 그들은 비-본래적인 인간에서 본래적인 뭐로 돌아옵니까? 인자의 기능자로서 드러나면서 주도권이 나에게서 주님으로 주도권이 넘어가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내가 하나님의 속죄의 혜택을 입겠다는 그 자체도 작살나는 거죠. 내가 예수 믿어서 천국 가겠다는 그 가능성도 박살나는 겁니다. 어디까지나 예수 믿는 그것이 나의 의가 될 여지가 있기 때문에. 내가 예수님을 사랑하고 믿고 소망하는 그것이 도로 나의 의로 돌아오잖아요.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죽일 때 누구의 이름으로 죽였습니까? 그 죄목이 뭐였어요? 바리새인, 사두개인, 서기관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판결을 내리면서 그 죄목이 고소하는 죄목이 뭐였습니까? 여호와의 이름을 모독한 거죠. 그렇죠? 그 사울이라는 사람이 예수 믿는 사람을 잡아서 죽이고 체포하고 할 때 그 명분이 뭐였던가요? 여호와의 이름을 모독하기 때문에 그렇게 한 거예요. 이게 뭐냐 하면 선악체제의 상한가를 친 거예요. 상한가를. 주님의 발꿈치를 딱 물게 된 그 순간이 온 겁니다.

그럴 때 위에서 기다린 것은 오함마가지고 내리칠 때 그동안 내가 의롭다고 여긴 것은 사실은 누가 시킨 거였습니까? 내가 구경도 못한 악마가 나를 이런 식으로 이런 나로 만든 거예요. 구상한 거예요. 나를 이렇게 양육해온 거예요, 악마님께서. 자애로운 어머니처럼 아버지처럼 나로 하여금 너는 속죄 필요 없는 그런 자유로운 사람이 되어라.

속죄 필요 없다고 하면 기존 교회 다니는 사람은 막 극렬하게 반대할 거예요. 우리는 속죄 필요해요. 우리는 속죄 믿습니다. 우리는 십자가의 피를 인정합니다. 이렇게 되죠. 그 사람들이 왜 거짓말인가 하면 속죄 받고 난 뒤에 뭐합니까? 속죄 받고 난 뒤에 뭐하죠, 보통 교회에서? 좀 다녀봤잖아요. 뭐하죠? 속죄 받고 난 뒤에 뭐합니까? 더는 속죄가 필요치 않는 행동을 그대로 보여주잖아요. 벌써 구원받았는데 뭐. 속죄함을 받았는데 뭐.

이제는 그다음부터 본격적으로 무엇에 나섭니까? 자기 의로움에 나서죠. 그 의로움 가지고 육과 육의 전쟁을 하죠. 네가 의로우냐, 내가 의로우냐? 네가 기도 오래 했어, 내가 기도 오래 했어? 네가 헌금 많이 했어, 내가 헌금 많이 했어? 네가 봉사 많이 했어, 내가 봉사 많이 했어? 그다음부터는 육적인 싸움에 나서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 악마가 마귀가 어떻게 인간을 유도하느냐 하면 마치 마귀가 이제 떠난 양 떠난 것처럼 그렇게 하면서 계속 악마가 인간에게 붙어있는 거예요. 마귀가 떠난 것처럼. 그래서 교인이 “예수 이름으로 명하노니 마귀야, 떠나라!” 하면 마귀가 뭐라 하는 줄 알아요? “‘으윽~ 너 예수 이름 고만해. 나 무셔워. 떠날 거야. 떠날 거야. 떠날게. 바이바이. 안녕. 잘 있어.’ 이러면 좋겠지?” 도대체 마귀가 떠나라고 왜 내가 그렇게 합니까? 그래야 내가 의로워지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내가.

다시 이야기할게요. 이스라엘이 여호와를 모르는 적들과 싸울 때 마음가짐이 어떤 마음가짐이에요? 여호와를 모르는 것들은 진멸되어야 마땅해, 이렇게 되겠죠. 그런데 그때가 언제라고요? 여호수아가 죽고 난 뒤에죠? 여호수아가 죽고 난 뒤에 그들이 싸움을 했는데 적들이 다 물러갔습니까? 안 물러가죠.

그들은 아직 진짜 시작할 싸움은 하지도 않았어요, 그들은. 그냥 자기 오기이고 복수심이고 분풀이고 자기 자존감의 싸움이었습니다. 내 의가 돈독하냐, 네 의로움이 돈독하냐, 우리 한번 배틀 한번 해보자 이 말이죠. 옥상에 올라와. 우리 고등학교에서 누가 싸움의 대빵인지 한번 결단내자. 지금 이런 정신이에요, 이런 정신. 그게 이스라엘 역사였다. 그게 언약이 주어진 그 현장에서 일어나는 악의 본래성이죠.

그러니까 다른 나라는 죽어서 내가 악이라는 것을 알지만 이스라엘만큼은 특혜를 입어서 혜택을 입어가지고 언약이 주어지면서, 나중에 죽어서 알아야 될 악을 미리 살아있으면서 경험케 되는 그런 혜택을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그들은 겪게 된 겁니다. 이스라엘 역사 들어보니 이게 남의 이야기가 아니죠. 우리가 매일 겪는 우리의 일상입니다.

사사기 3장 1절을 누가 한번 읽어보세요. “여호와께서 가나안 전쟁을 알지 못한 이스라엘을 시험하려 하시며” 2절, “이스라엘 자손의 세대 중에 아직 전쟁을 알지 못하는 자에게 그것을 가르쳐 알게 하려 하사 남겨두신 열국은” 이렇게 되어 있죠.

하나님이 이 말씀을 하신 취지는 뭐냐 하면 전쟁을 모르면 너는 살아있는 이유를 모른다는 거예요. 전쟁을 모르면. 그 전쟁은 창세기 3장 15절입니다. 메시아가 악마로부터 발꿈치를 물리고 그리고 물릴 그 타이밍에 (악마의) 머리를 치는 거죠. 악마가 나타난다고 해서 되는 문제가 아니고 악마가 꽉! 하고 물어줘야 되죠. 누구를? 메시아를 물어줘야 돼요.

가인이 그냥 마음으로 ‘저 동생 미워.’ 이러면 안돼요. 가인의 역할은 어떤 경우라도 동생 아벨을 죽여야 돼요. 죽여야 가인은 내가 주인공이 아니었고 그동안 죄가, 죽음이, 죽어 마땅함이 진정한 나의 주인이었다. 주인님이었다는 사실을......

그걸 다른 말로 하면 죄가 죄를 낳는 거예요. 그러니까 악마의 자식이 육이잖아요. 육이 육을 낳은 거예요. 악마의 지배권이 후손을 통해서 연속적으로 계속 흘러내려오는 겁니다. 전수되는 거예요, 악마의 세력이 계속. 자식을 백 명 낳아봐야 계속 죽으리라, 죽으리라가 전수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은 전쟁을 통해서 언약 실현의 흔적으로서 이스라엘을 구현하고 싶은 겁니다. 이 이스라엘 자리에다가 성도 집어넣으면 되죠. 주님께서 우리를 성도되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전쟁을 통한 언약실현의 흔적이에요. 우리는 주님의 언약이 실현된 흔적. 이 흔적이 실현된 사람을 인자라고 하는 거예요, 인자. 이걸 인자라 하는 겁니다.

그래서 인간의 전쟁에서 하나님의 전쟁으로 계속해서 이어지는 겁니다. 그다음부터 사사기는 제가 계속 보지 않겠습니다. 여러분 아는 이야기가 많이 나오기 때문에. 사사기를 정리하게 되면 바로 이렇게 전쟁을 통해서, 나중에 나오지만 인자 같은 기능을 하는 이스라엘 되기 위해서 하는 거예요.

그럼 하나님의 전쟁에서 이스라엘 내부에서 반드시 뭐가 등장해야 됩니까? 하나님의 발꿈치를 무는, 대들만한 악의 화신들이 이스라엘 내부에 계속 끓어올라야 되겠죠. 그 적들의 공통점이 뭐냐 하면, 나는 이스라엘이다. 이걸 사사기 찾아보면 다 나오지만 그걸 일일이 찾아볼 수는 없고요.

나는 이스라엘이라는 의로움으로 장착된 자, 이게 바로 하나님의 발꿈치를 무는 악의 이스라엘입니다. 이로 인하여 사사기 마지막에 열두 지파가 몇 지파가 되죠? 열한 지파가 됩니다. 어느 지파가 날라가버렸습니까? 베냐민 지파가 날라갔죠. 연합군들은 자기를 의롭게 본 거예요.

자기의 의, 자기 속에 있는 의롭다는 것을 유발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하신 일은 뭐냐 하면 자기 첩이 죽임당한 레위인의 처벌, 시체를 죽일 때 그냥 죽이지 않고 살인 사건 난 자기의 첩을 열두 토막을 내서 전부 택배로 다 보냈죠. 나일강 살인사건과 좀 비슷한가 모르겠습니다만.

그럴 때 그걸 받았던 열두 지파가 잠자고 있던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충성심과 의로움이 불같이 일어나는 거예요. 그래서 마땅히 베냐민은 악한 쪽이 되고 베냐민을 치는 우리는 지금 정의로운 일을 구현하는 하나님의 편에 선 진짜 이스라엘로 착각했죠. 이로 인하여 이스라엘 내부가 완전히 분열돼버렸죠. 내란이 벌어지는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생각은 열한 지파가 들고 일어났으면 베냐민 지파가 “그래. 우리 다가 아니고 우리 청년들 가운데서 철딱서니 없는 짓을 했네요. 사람을 여자를 죽이기까지 강간했으니 잘못되었습니다. 아이고, 우리 빼놓고 열한 지파가 다 일어났네. 그럼 여기서 우리가 계산해보고 반성할 거 반성하고 범죄한 자를 우리가 체포해서 갖다 바칠테니까 처분대로 하소서. 그리고 그 정의로움을 좀 누그러뜨려주소서.” 이럴 줄 알았지? 천만의 말씀.

왜 베냐민 지파는 그런 일이 일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열한 지파 연합군을 상대로 해서 그들은 싸움을 했습니까? 이유가 뭡니까? 그 이유가 뭐에요? 첫째 시간, 둘째 시간 여기까지 해도...... 악은 멈출 줄을 모른다. 멈출 줄을 몰라요. 진실은 헤어지면서 나타납니다. 진실은 헤어지면서 나타나요.

서로 남녀가 좋아할 때는 좋다고 뭐 껴안고 사랑한다고 할 때 그것은 진실이 아니었더랬습니다. 헤어질 때, 실은 너 그렇게 좋아하지 않았거든. 헤어지면서 각자의 본심이 나타납니다. 그 본심이 자기 의로움이에요, 자기 의로움. 네가 감히 내 인생에 개입해서 흠집을 남겨? 그럼 나는 후시딘 연고를 준비해서 너보다 더 빨리 나아서 다시 온전한 나로 되돌아올 거야. 후시딘 연고 발라가지고 이 상처가 낫고 돌아올 거야.

그 베냐민 지파가 잘리죠. 몰살당하잖아요. 다 죽잖아요. 그게 이스라엘의 본래성이에요. 이스라엘은 없어도 되는 나라에요. 이 땅에서, 언약에 의하면 사라져야 될 나라에요. 이스라엘 역사가 열한 지파가 그걸 몰라요. 모르기 때문에 역사는 흐른다~ 역사는 사사기 넘어서 계속 가야돼요. 사사기 그다음에 메시아가 오면 안돼요. 제대로 발꿈치 무는 역할을 유대인을 통해서 해야 되거든요. 아직까지 죄가 숙성되지 않았어요. 하나님 물 정도까지는 숙성되지 않았어요.

이스라엘에서 베냐민 지파가 나쁘다. 이것을 그 후 이스라엘 역사는 모두 알잖아요. 한번 적어볼게요. ‘베냐민 지파가 나빴다’ 이것이 ‘모두가 나빴다’로, 이런 결론이 나타나기까지 역사는 흐른다~ 계속 흘러가야 돼요.

거의 다는 나빴다. 하지만 나는 빼주세요. 나는 빼주세요, 이렇게 되면 예수님 좀 이따 재림해야 돼요. 아직 재림하면 안돼요. 강림하시면 안 됩니다. 아직 남아있어요. 우리가 세리와 창기와 강도가 아직 덜 됐어요. 문둥병자가 덜 됐고 절름발이가 덜 됐어요. 소경이 못 됐어요, 아직까지. 아직까지 배가 열두 척 남아있어요.

장로님, 바둑은 잘 두잖아요. 바둑 두다가 재산 한 일억 팔천 날려봐야 아, 진짜 내가 주인공이 아니고 나에게 죽음이 주인공이라는 사실을 우리가 언제쯤 시건나서 언제쯤 알까요, 이걸. 어제부로 내 인생 끝내도 아무 문제없었어요. 그런데 오늘까지 또 인생을 끌어주는 이유는 아직 물 이빨이 덜 자라서 그래요. 주님 발꿈치를 물 이빨이 덜 자라서 그렇죠. 아직 나의 의가 그만큼 상한가를 치지 않았던 거예요. 의가 많기는 많은데 아직 상한가만큼은 치지를 않았어요.

사울이라는 사람이 예수 믿는 사람 잡아죽일 때 주님 나타났잖아요. 그때 디모데전서에서 뭐라고 했습니까? 나는 죄인 중의 괴수라 (딤전 1:15). 이게 수사적 표현이 아닙니다. 그냥 겸손의 말을 하는 게 아니에요. 오히려 그 말로도 모자라요. 지금 그 이야기하면서 사울은 막 기뻐 날뛰어요, 좋아서.

나의 의가 그동안 악마가 시키는 대로 주인노릇 했다는 것이 들통났다는 것은 이제 뭐가 들어왔다는 말입니까? 주님의 속죄의 혜택을 입었기 때문에 가능한 거예요. 주님 사면의 혜택의 대상이 되었기 때문에 인자 자체의 원칙에 의하면 죄가 있는 곳에 하나님의 속죄가 더해져서 이게 언약을 이루잖아요.

그럼 언약만 욕심내지 말고 속죄만 욕심내지 말고 먼저 전제가 뭡니까? 내가 죄의 상한가를 쳐야 돼요. 그래야 속죄가 속죄답고 사면이 사면답고 그럴 때 내가 주인공이 아니고 내 구원이 목적이 아니라, 언약이 언약대로 그냥 지금도 주께서 살아계셔서 언약을 이루고 계시는 주님의 삶의 현장이에요.

주님이 부지런하기 때문에 내가 굳이 부지런할 이유가 없습니다. 내가 부지런하다면 많이 수상해요. 왜 부지런합니까? 자기 의를 도모하기 위해서 바쁘죠. 그러면 주님이 나를 죄인 만드는 데에 부지런하다면 매사가 죄인 됨을 드러내게 하기 위해 우리가 분주하다면 굳이 내가 바쁘게 해서 ‘착한 일 했지?’ 이럴 수가 없다는 말이죠.

제가 수요일에 그런 이야기했잖아요. 주님의 폭력은 우리의 모든 자랑거리를 부수기 위해서. 자랑거리를 부수기 위해서. 자랑거리가 부서질 때 ‘속죄가 힘이 세다’가 아니라 ‘속죄가, 사면이 나의 주인입니다’가 돼요. 사면 받음을 드러내기 위해서 우리는 아직도 살아가고 있는 겁니다.

자, 그다음에 좀 더 남아있는 이야기를 해봅시다. 사사기에 있는 사사 이야기해보겠습니다. 사사들의 특징은 뭐냐 하면 시간과 공간 개념이 소용없다는 거예요. 사사들에게는 성신이 오거든요. 인자되는 에스겔, 다니엘의 공통점이 있어요. 그들을 인자라 할 때 그냥 인자라 부릅니까? 누가 왔어요? 반드시 활동할 때 성신이 오죠. 요새로 말하면 성령이 오죠. 성령의 특징은 시간과 공간에 구애됨이 없어요.

시간과 공간에 구애됨이 없다는 말은 목적 달성을 용납 안한다, 가 됩니다. 인간의 모든 근심과 걱정은 목적이 생기기 때문에 생긴 거예요. 어떤 기대치에 못 미쳤다는 미흡함을 건너서 내가 원하는 어떤 목적을 자꾸 구상하게 되면 덩달아 이런 근심과 걱정, 초조감이라는 구더기들이 다, 그때 집 나간 일곱 귀신이... 일곱 귀신만 오면 다행이죠, 일곱의 일곱 귀신 다 데리고 들어와요. 네가 행동을 어떻게 하면 네 목적을 이룰 수 있는지 내가 알려줄게, 이런 식이에요.

그렇게 되게 되면 무엇의 가치가 죽어버립니까? 사면, 속죄의 가치는 날아가버리고 누가 주인공이에요? 그 목적을 달성하기까지 임시적으로 내가 내 인생을 관리하고 이끌고 주도하는 주인공인 양 내가 생각을 해야 되는 겁니다.

여러분 생활 가운데서 내가 주인공이라는 생각이 언제 들던가요? 1번-오후 2시 반, 2번-아침 10시, 3번-밤 11시, 4번-잠 깨자마자. 의식이 들자마자. 잠에는 의식이 없거든요. 무의식 속이에요. 의식이 있는 순간 그다음부터는 또 인자 만드는 작업에 우리가 돌입하게 됩니다. 눈을 뜨는 순간 나의 의가 또 시작돼요. 나의 의의 생활이 시작됩니다. 사사기의 반복이죠.

그래서 사사기에 나오는 기드온 같은 경우 예를 들어서 기드온도 하나님의 성신 받고 천사가 와서 지시내릴 때 고분고분했습니까? 안했죠. 인자 속에 있는 죄를, 자기가 주인공 역할했던 그 역할을 주께서 자극시켜가지고 그걸 다 분출하게 만들었어요. 그래서 바알 상(像)을 없애라 하니까 낮에는 겁이 나서 벌벌 떨고 못해가지고 밤중에 했죠.

자, 한번 적어볼게요. 오늘 공부한 것 복습이니까 적어봅시다. 기드온이 낮에 말고 밤에 우상을 부쉈다. 누구의 일인가? 1번-기드온 일이다. 2번-주님의 일이다. 몇 번입니까? 밤에 우상을 부쉈죠. 그럼 주님 뜻은 뭡니까? 낮에 부수라 했죠. 낮에 부수라 했는데 밤에 부쉈으니까 이건 기드온의 일입니까, 주님의 일입니까? 이게 주님의 일이에요. 주님의 적이 누구입니까? 기드온이에요.

왜 낮에는 안 합니까? 옆에 철이하고는 친구지간이고 뒷집의 아저씨한테는 어제도 떡 얻어먹었는데 안면 받치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라니까요. 종교는 달라도 어떻게 취미는 그리 똑같은지. 종교는 달라도 취미는 똑같아요. 둘다 바둑 두면 밤새면서 바둑 두고. 그렇게 정답게 바둑을 잘 둘 수가 없고요. 음악도 취향이 같은 음악이고. 종교는 달라도 우리는 돈보다 귀한 친구다 노래 불러가면서 친구사이에요.

그런데 갑자기 돌발적인 행동으로 그 친구가 믿는 마리아상, 불상을 그걸 그것도 대낮에 깬다는 것은 친구에 대한 도발이죠. 친구에 대한 배신입니다. 친구를 배신하면 돌아오는 것은 뭡니까? 그쪽이 내 발꿈치를 물죠.

발꿈치를 문다는 것은 인간세계에서 아무리 무슨 일을 해도 악마한테 걸리고 뭘 해도 나쁜 짓을 해도 주의 일에 치명적인 것은 인간이 해낼 수가 없다는 뜻이에요. 인간이 극악무도한 짓을 한다 할지라도...... 보험금 8억 기대하면서 자기 남편 건져줄게 건져줄게, 하고는 보험금 8억 타내려고 새 남자하고 같이 계곡 물에 빠뜨린 극악무도한 자. 판사가 이렇게 했어요. 너무 죄가 악랄해서 이건 사회와 오랫동안 격리할 필요가 있어서 무기징역에 처합니다, 이렇게 했다고요. 이은해. 똑바로 잘 알아야 돼요. 은혜 이거 아니에요. 이 은해입니다. grace아니에요, 은해에요.

죄가 너무 악랄해서 오랫동안 무기한으로 사람들과 격리할 필요가 있다. 그게 판결문이었습니다. 예수님 판결문은 뭡니까? 이보다 더 올라갔죠. 하나님을 모독한 자, 사형에 해당된다. 그렇죠? 하나님을 모독했으니까. 하나님을 모독한 죄로 하나님을 죽였잖아요.

이게 기이합니까, 우리의 일상입니까, 방금 이야기한 게? 하나님을 위해서 하나님을 죽이는 이것이 우리의 일상이었던 사실을 우리가 잊고 있었던 거예요. 그런데 왜 하나님을 죽입니까? 속죄를 모독하기 때문이죠. 희생을 모독하기 때문에.

그럼 희생을 모독한 게 뭡니까? 나의 의죠. 나의 정당성. 이거 잘 안 빠져요. 잘 빠지지 않습니다. 끝날 때 되어서 지금 속닥속닥 이야기하고 있어요. 너무 중요하기 때문에. 행동, 태도 뭘 했다하면 나의 의로움이 계속 순간순간... 라면 끓일 때 물 끓이잖아요. 물이 100도쯤 되면 물결이 가만 있습니까, 뽀글뽀글 올라옵니까? 계속 뽀글뽀글 올라와요.

물 한잔 먹어볼까, 할 때 내가 지금 의로와? 이거 먹는 폼이 카메라 찍는데 자세가 지금 괜찮아? 돼지 먹듯이 먹지는 않았어? 이게 어떤 행동 하나하나도 전부 다 자기 의에 흠이 되지 않도록 남한테 흠 잡히지 않기 위해서 행동하는 거예요.

이것을 미리 눈치 챌 때 인자입니다. 인자로움 할 때 그 인자 아니에요. 그냥 인자 같은 성도입니다. 주께서 그렇게 하신 거예요. 네가 나를 물었고 네가 칠 수 없는 너의 주인, 악마의 대가리를 내가 쳤다. 그 사태, 그 속죄의 흔적이 작용하는 그 세계 속에 너는 나의 대상이 될 때 네가 바로 인자고 이스라엘이 되는 거예요.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시간과 공간을 가리지 않고 끊임없이 들끓어 오르는 나의 정당성과 나의 의로움을 우리 힘으로 처리할 수 없음을 날마다 기쁘게 느끼고 반기면서 이미 처리되었기에 이러한 작용이 주님에 의해서 우리 안에서 이루어짐을 이제는 반갑게 맞이할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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