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강의20220722a 열왕기상19장 12절(감사와 변명)-이 근호 목사
p.210 봅시다. 저번에 했지만 계속 강의를 해나가면서 처음에 했던 그것이 바탕이 되어야 되거든요. 그것을 놓쳐버리면 진도만 나간다고 해서 이해되는 게 아니니까요. 여기 p.210 중간쯤 보면 이런 말이 있습니다. 한번 적어볼게요. “천국에서 추방된 공동체라는 근거를 이 공동체가 자체적으로 찾아낼 수 있는가?” 이 문제를 한번 생각해봐야 돼요. (12번째 줄, “유대 공동체는 자체적으로, 자신이 ‘천국에서 추방된 공동체’라는 근거를 찾아내지 못하는 그런 역사적 안목을 중심으로 결합되어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천국에서 추방되었습니다.’라는 생각을, 천국에서 추방된 그 공동체가 자체적으로 그걸 찾아낼 수 있는가 하는 겁니다. 없죠. 그래서 이 성경해석이 이렇게 어려운 거예요. 이미 내놓은 자식이거든요. 주님한테 우리는 이미 내놓은 자식인데, 주님께서 계속 천국 이야기하니까 자기가 잘렸다는 생각을 감히 하지 못하고 잘리느냐, 안 잘리느냐 그 기로에 섰다, 이렇게 생각하는 겁니다, 성경을 보는 사람들이.
송해 뭐 96세까지 살았죠, 목욕탕에서 쓰러졌다면서요. 96년 동안 평생을 살면서 내가 하나님 앞에 이미 잘렸다는 생각을 단 한번도 하지를 못합니다. 그 96년 동안 아무리 오래 살아도 ‘내가 어떻게 산들 이건 잘린 삶이야.’ 라는 생각을 송해라는 사람이 했겠어요? 못하죠.
그래서 요한복음 3장 6절~8절, 거기에 예수님께서 인간의 전제에 대해서 바탕에 대해서 언급을 하셨습니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라고 유명한 말씀이 3장 6절에 나와 있잖아요. 그런데 3장 4절에서 니고데모가 뭐라고 하느냐 하면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삽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수 있삽나이까”라고 이야기했단 말이죠.
이 말, 우리가 3장 4절을 보면 그냥 무심코 던질 수 있는 말이거든요. 그런데 이 말에 엄청나게 중요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자식이라 하는 것은 모태, 엄마만 있으면 자식이 안돼요. 아빠가 있어야 돼요. 그런데 니고데모가 어떤 한계를 보이느냐 하면 아빠 없이 내가 엄마 몸에 들어갔다가 다시 재생산, 재출산 될 수 있습니까, 라고 이야기한 거예요. 아빠 없이.
결국은 엄마와 본인만이 관계해서 본인이 나올 수 있다는, 이런 말도 안 되는 아이디어를 니고데모가 왜 끄집어내는 겁니까? 왜 아빠 배제하고 내가 나왔던 엄마의 모태, 자궁 그것만 있다면 어떤 아이디어, ‘내가 자궁에 들어갔다 나올 수 있겠습니까’ 라는 그런 발언을 할 정도로 니고데모는 자기밖에 모르는 거예요, 자기밖에.
아빠 없이는 본인이 없다는 생각을 안 하고 이왕 내가 여기 있으니까, 그리고 내가 엄마의 자궁 속에서 나왔으니까, 그런데 주님은 다시 태어나라고 했으니까 다시 태어나는 방법은 아빠를 소환하는 게 아니고 내가 나왔던 그 자리, 자궁만 있으면 되지 않겠느냐는 그런 발상이 얼마나 이게 이기주의냐 이 말이죠. 자기 위주다 이 말입니다, 인간은.
그러니까 이건 단순히 육과 육의 문제가 아니고요. 인간은 자기로부터 이미 출발하고 있어요, 이미 태어난 인간은. 그래서 육이라는 것이 육체에 국한해서 육이 아니라 나 중심으로 생각하는 모든 것이 육이 될 수밖에 없는 겁니다. 이것이 요한복음 6장에 보면, 바로 하나님의 일이라는 것은 너를 믿지 않는 거예요. 너 자신을 믿지 않는 게 하나님의 일이다.
그 말을 이렇게 했어요, 주님께서는. 하나님의 일이란 네가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게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게 아니라 나(예수님)를 믿는 거예요. 예수님을 믿는 게 하나님의 일이다. 예수님을 믿는 것. 예수님이 하신 일을 믿는 것.
“내가 어떻게 하면 됩니까?” 그런 것은 입 밖에 내야 돼요, 안 내야 돼요? 절대로 내서는 안 되는 거예요. 왜? “아빠, 이리 오세요.” 라고 할 마음조차 인간에게는 없기 때문에. 내가 있으니까 어찌어찌해서 엄마 자궁만 있다면 내가 다시 태어날 수 있는 기회가 되지 않겠습니까. 발상 자체가...... 내가 다시 태어날 수만 있다면 자궁만 필요하다, 라는 그런 정도까지라면, 아빠 찾지도 않을 정도라면, 일상생활이야 뭐 말할 것도 없이 내가 무슨 손을 쓰면 일상생활 속에서도 구원받을 수 있습니까, 겠죠. 이게 인간입니다.
천국에서 이미 추방된 공동체 또는 나 입장에 있어서는 천국에서 추방된 이유를, 나는 찾을 수가 없는 한계를 갖고 있습니다. 이미 추방되었는데도 불구하고 추방된 이유는 모르는 채 96세까지 살다가 목욕탕에서 넘어져 죽은 거예요. 내가 왜 지옥 가는지 그 이유를 모르면서. 이게 p.210에 나오는 이야기죠.
진도를 p.220쯤 나가니까 다시 보고 싶었어요, 다 기초가 단단한지. 기초고 뭐고 돌아서면 다 잊어버리는데 뭐가 있겠어요. p.211 위에서 5번째 줄, “인간이 짐승의 지배 밖으로 따로 주체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인간의 자기 자리, 주체의 자리, 자기 자리죠. 자기 자리가 짐승의 지배력 바깥으로 따로 자리를 마련할 수가 없다 이 말입니다. 그러면 인간이 생각하고 행동하는 모든 것은 누구 생각을 반영해주는 거예요? 짐승이 인간을 장악하는 그 관계를 바깥으로 보여주는 것이 인간의 모든 행동과 태도입니다.
천국에서 추방된 방금 그런 이야기했죠. 또 아까 p.211에서 한 언급은 짐승의 지배라 했습니다. 짐승의 지배죠. 천국에서 추방된 형편이고 짐승의 지배를 받고 있는 형편이다. 자, 이 형편을 제가 지워보겠습니다. 천국에서 추방된 형편, 짐승에게 지배를 받고 있는 형편, 이 형편을 이렇게 지워버린다면, 이걸 모른다면 인간은 어떻게 살아갑니까? 이건 뭐 이 세상 전부가 그렇듯이 ‘나는 나의 즐거움으로 산다.’ 이겁니다. 나는 나의 즐거움으로 산다.
아까 뭐가 빠졌다고요? 짐승의 지배 빠졌지요. 또 천국에서 추방이 빠졌어요. 추방이란 말은 창세기 3장 24절에 나오는데 낙원에서 추방된 그것 빠져버리면 나는 그냥 나의 즐거움으로 사는 거예요. 의외로, 인간이 어떻게 살아가는가, 굉장히 간단하죠. 굉장히 간단합니다.
인간이 자기 즐거움으로 산다, 또는 인간은 내가 속해있는 공동체의 즐거움을 위해서 산다, 이게 우리 인간들에게 흔히 볼 수 있는 인간들이 사는 방법입니다. 아까 두 가지가 빠져버리면 이렇게 되죠.
여기서 나온 어떤 발언이 얼마 전에 UN사무총장이 한 발언입니다. 뭐라고 발언했는지 빨간 걸로 적어볼게요. 상당히 극단적입니다. “우리는 지금 집단자살중이다.” 이게 뉴스에 나왔거든요. 지금 유럽이나 이런 데 폭염으로 40도 이상 올라갔잖아요, 영국이나 스페인, 프랑스, 이태리. UN사무총장이 한, 탄소를 줄이지 아니하면 메탄가스를 줄이지 아니하면 우리는 집단자살 중이다, 라는 발언이 어디서 나왔겠어요? 우리는 우리 공동체 안에 즐거움으로 사는데 이걸 유지해야 되고 이걸 지켜내야 되지 않느냐, 라는 발언인 거예요. 이 발언이. 그런 뉴스를 보면서 저건 복음적으로 옳지 않다는 것을 파악해야 돼요. 아, 저건 잘못된 생각에서 나온 것이다, 라고 인정해야 돼요.
그렇게 하고 P.214 보겠습니다. 중간에 보게 되면 11번째 줄, “말씀이 옛 인간을 삼켜서 새로운 인간을 만들어 토해내면 된다.” 이렇게 되어있죠. 말씀이 옛 인간을 삼키는 방법은 말씀이 인간이 되셔야 옛 인간을 삼킬 수 있고요. 거기서 새로운 인간을 만들어 토해낼 수가 있는 겁니다. 옛 것 다오, 새 것 내놓을게. 그거거든요. 옛 것을 재료로 사용해서 새로운 걸 내놓는 거예요. 요리할 때, 시장 장보면 새로운 요리가 나오잖아요.
그걸 하려면 말씀 안에, 말씀이 만들어낸 말씀으로 오신 그분 안에, 옛 것과 새 것을 바꿔치기할 수 있는 장치가 안에 들어있어야 되겠죠. 그 장치를 이 논문에서는 인자(人子)라 했습니다. 사람의 아들로 오시는 거예요, 사람의 아들. 예수님은 사람의 아들로 오셨지만 예수님은 사람의 아들이 아니고 하나님의 아들이에요. 하나님의 아들인데 사람의 아들로 오셨거든요. 그 말은, 기존의 옛 사람을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는다는 뜻이에요. 버린다는 것이 아니고 재료로 사용하는 거예요. 그게 예수님의 하실 일이기 때문에 그래요.
그래서 구원은 나의 일이 아니라, 주님의 일이에요, 구원이. 나의 일이 아니에요. 주님의 일이에요. 그러니까 구원을 나의 일로 여기는 것과 주님의 일로 여기는 것이 성도 내부에서 경쟁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내가 구원받으려면 어떻게 하면 됩니까?” 주님께서는, “Shut the mouth! 그 입 닫아!” “내가 구원받기 위해서 성경을 몇 번 봅니까?” “그 주둥이 닫아! 가만 있어!”
우리는 가만히 있을 수가 없어요. 계속, 내가 구원받으려면 어떻게 하면 됩니까. 주님께서는 그 입을 닫게 만들죠. 이것은 내가 어떻게 구원받습니까, 를 할 수 있는 자격이 안 되기 때문이에요. 왜 입을 닫아야 되느냐 하면 지금 예수님은 아버지하고 이야기중이에요. 어른들 이야기하는데, 이미 천국에서 추방된 입장에서, 낙원에서 추방된 입장이고, 악마의 지배를 받고 있는 입장에서 어디 감히 나의 구원을 거기다가 거론합니까? 이건 자격이 안 되죠.
그다음 p.224 봅시다. 위에서 6번째 줄, “주의 이름은 포로 잡혀가는 사람과 동행하면서 포로생활을 같이 하신다.” 이게 바로 신앙생활 하는 거예요. 우리는 자꾸 나의 즐거움으로 생각하니까 내가 즐겁지 않거나 몸이 아프거나 괴로우면 하나님 앞에 주님 앞에 자꾸 짜증을 내요. 제가 뭐가 잘못되었는데 이런 고생을 주십니까.
그제 수요설교, 오 목사님이 녹취를 아주 잘해주셨을 거예요. 설교 후반부에 제가 이런 표현을 썼어요. 신앙생활에서, 사실 그건 신앙이 아니고 종교생활이라 할 수 있는데, 신앙생활이라 합시다, 흔히. ‘신앙생활에서 오는 피로감’ 피로감. 복음 많이 들어온 사람한테는 이런 현상이 사실 일어나면 안돼요. ‘고만 합시다. 많이 들었습니다. 그동안 내가 성의껏 주님한테 해드렸잖아요.’ 그만해도 나는 뭐 얼추 많이 했다 이렇게 자부하니까 슬슬 피로감이 오는 거예요. ‘그냥 내버려두면 안 됩니까? 나 혼자 그냥 내 맘대로 살면 안 되겠습니까?’ 이런 생각이 들죠.
지금 이 사람들의 문제점이 뭐냐? 신앙생활의 피로감, 그만큼 내가 많이 해드렸잖아요, 복음 많이 들어줬잖아요, 나 복음 사랑한다고 많이 했으면 그만하면 됐잖아요, 내가 자신을 스스로 볼 때 이만하면 얼추 복음생활 많이 했다 자부합니다, 이 사람의 근원적인 문제가 주님도 같이 하시는 포로생활을 생각 못 해서 그렇습니다.
자기가 이 땅에서 고생한 자기 고생만 생각했지, 주님이 같이 고생하고 있다는 이 사실을 완전히 몰랐던 거예요. 복음을 공부하는 데에 집중한 거예요, 복음을 공부하는 데. 복음이 어디 학원입니까? 주님께서는 복음의 지식을 가르쳐주는 게 아니고 너와 나는 지금 생활을 같이 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홀로가 아니고 같이.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이거 외우라면 잘 외워요. 그런데 목자가 내 곁에서 지금 같이 고생하고 있다는 생각을, 성령님이 같이 탄식하면서 고생하고 있다는 생각을 못하고 그동안 자기가 한 모든 신앙생활, 모든 생활을 지금껏 자기가 애써서 혼자 노력한 걸로 오해한 거예요. 고생을 함께 했다는 생각은 안 들고 자기만 뭐 죽어라 숙제 푼다고 자기만 고생했다고 생각한 거예요.
그러니 함께할 생각이 아예 없는 거 같아요. 주님 앞에 함께할 생각이 없고 내가 열심히, 나 혼자 열심히 해서 칭찬받는 것만 생각한 모양이죠. 그래서 주님의 상이 아니고 나의 상, 주님 좀 비키세요, 내가 상장 받을래요, 자꾸 자기 상 받으려고 하고. 주님이 이미 상을 받고 우리에게 그 상이 어떤 상인가를 알려주도록 동행한다는 생각을 못한 겁니다.
지난 수요일에 신약의 회개와 구약의 회개를 제가 나누어서 설명해드렸잖아요. 구약에서는 회개하고 난 조건 하에 사함을 받아요. (시32:5, “내가 이르기를 내 허물을 여호와께 자복하리라 하고 주께 내 죄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곧 주께서 내 죄의 악을 사하셨나이다”) 그런데 신약은 이미 용서해놓고 통보를 해줘요. 통보하는 게 회개입니다.
그러니까 회개를 하려면 ‘주여 제가 부족합니다.’ 뭐 이래야 되는데 신약에서의 회개는 ‘부족합니다. 다시는 이런 짓 안할게요. 앞으로 내가 바르게 할게요. 반듯하게 살게요.’ 이게 회개가 아니고, ‘내가 노력하는 이 모든 것에 제가 입을 다물겠습니다.’ 내가 생각하는 나의 세계 자체가 이건 버려져야 될 육의 세계인 것을 다시금 확인하는 겁니다. 확인하는 거예요.
신약의 회개는 나의 죽음을 의미하는 겁니다, 나의 죽음. 성도란 이미 죽음 이후의 삶이라서 다시는 죽을 수가 없다는 거예요. 요한복음 11장에 나오는 말씀처럼,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기 때문에 성도의 특징은 죽음이 없어요. 죽어도 그것은 쉬는 것이지, 죽은 것은 쉬는 거예요. 집사님 방학 되서 일 안 나가시면 죽은 겁니까? 쉬는 거죠.
성도가 죽기 전에는 고생을 되게 많이 했어요, 이 세상에서. 주님 가신 길을 간다고 고생 많이 했으니까 주님께서는 어깨를 탁탁 두드리면서 “자, 고생 고만 해야지. 고생 끝 행복 시작. 죽어.” 이게 죽음이에요. 기쁘지 않습니까? 그 쉬는 날이 우리에게 미리 준비되어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게 얼마나 큰 소망입니까? 우리에게 죽는 날이 있다는 것. 모든 일을 안 하고 쉬어도 되는 날이 온다는 것.
성도에게 주님 주신 기쁨 중 하나가 이거에요. 죽는 날을 고대하며 산다는 거예요, 죽는 날을 고대하면서. 아, 이제 나 몇 년 남았나. 몇 시간 남았을 수도 있어요, 몇 분 남았을 수도 있고. 몇 년 남았지? 내가 목욕탕에서 미끄러져 쉴 수도 있고, 등산가서 심정지 되서 쉴 수도 있고. 어쨌든 간에 우리에게는 모든 것에 손을 놓고 쉴 수 있는, 영원히 행복하게 복되게 쉴 수 있는 그날이 온다는 것.
그러니까 이 땅에 살면서 고생 좀 하는 것, 그거에 대해서 좀 참으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로마서에서. 이것이 로마서 5장에서 말하는 인내입니다. 우리에게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낳느니라.
화투에서는, 잘 모릅니다만, 화투 2장이 끗발을 만들어요. 그렇죠? 화투를 손에 만져봐야 뭘 알지. 만져본 적도 없는데. 2장으로 끗발을 만드는 거예요. 2장이 하나로 모아지는 거예요, 2장이. 주님께서는 아까 삼킨다고 했잖아요. “말씀이 옛 인간을 삼켜서 새로운 인간을 토해내면”, 이게 끗발이에요.
끗발인데 2장 중에서 선제되는 화투가 앞에서 다 해놓으면 뒤에 나머지 한쪽은 거기에 갖다 붙는 것으로 하나님의 의라는 끗발이 생겨집니다. 거룩이라는 게 생겨나요. 그것 때문에 인자가 되신 거예요. 말씀이 사람이 되신 이유가 기존의 사람하고 다른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은 기존의 자기 백성의 죄를 대신 삼킬 수 있는, 품을 수 있는 그러한 능력이 말씀 안에 들어있단 말이죠.
무슨 뜻인지 잘 모르시는 것 같은데 써보겠습니다. 성경에서 사랑이란 사랑 이전에 둘의 관계가 반드시 원수가 되어야 돼요. 반드시 원수가 되어야 됩니다. 원수가 없는 곳에는 사랑도 없어요. 서로 좋아하는 사람 좋아하는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원수여야 돼요, 우리 광주모임 여러분처럼. 서로 서로 원수 아닌 사람이 어디 있어요. 지금 둘 사이도 원수 아닙니까. 특히 이쪽도 원수 아닙니까.
원수가 아닌데도 불구하고 서로 사랑하게 되면 이건 사랑에 대한 오해입니다. 그건 사랑이 아니었음을.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 그건 사랑이 아니었습니다, 그건 한쪽이 한쪽을 내 권역 속에 그냥 일방적으로 잡아당기는 것이지. 성경에 나오는 사랑은 반드시 단절되어야 돼요. 사랑하지 않더라도 상관없는 관계가 되어야 됩니다. 그게 사랑이에요. 꼭 사랑해야 되는 관계는 인간세계에서 통하는 사랑개념이에요.
그래서 주님이 주님의 사랑을 알리는 방법은, 주님이 의도적으로 사람들로부터 원수취급을 당해서 인간세계로부터 떠나버려야 돼요. 떠나서 다시는 인간들이 예수님을 메시아를 하나님을 진짜 하나님을 찾지도 않을뿐더러 찾을 마음조차 없음이 이렇게 딱 다 드러나야 돼요. 우리가 하나님을 찾을 마음도 없고 메시아를 찾을 마음도 없고 나는 나로 족하다, 하는 그 본심이 다 들통나는 것, 이게 바로 성령께서 우리에게 하신 일이에요.
네 주제에 사랑을 원해? 네 꼴을 봐라. 네가 누구를 사랑한다는 마음이 애초부터 너한텐 없었잖아. 어디 남을 이용하려고 사랑이라는 거짓말을 거론해. 그렇게 되게 만들어요, 성령께서. 주의 영께서 그렇게 만들어요. 애초부터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할 마음이 없었고요, 악마의 지배하에 있으니까. 메시아가 온들 메시아를 사랑할 마음 없고요. 하나님을 사랑할 마음이 없으면 우리 속에는 이웃도 없습니다. 하나님 사랑이 안 되는데 이웃사랑이 될 수가 있습니까.
율법은 그걸 겨냥해서, 말씀은 그걸 겨냥해서 우리에게 주입된 거예요. “하나님을 네 목숨처럼 사랑하고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 이 이야기를 왜 하느냐 하면 그 말씀과 우리는 별개라는 거예요. 아무 상관이 없어요. 우리는 내 자신이 한 것을 나의 끗발로 여깁니다. 인간들끼리 이렇게 모아서 같이.
그걸 어려운 말로... 벌써 어려운 말 나오면 골치 아픈데 써야 되겠어요, 동질화 또는 동질성. 동질화, 동질성은 같은 끝 지점으로 향하는 동지입니다. 같은 끝 지점으로 향하는 동지. 가는 방향이 똑같아요, 인간들끼리. 끝 지점이 절벽이거든요, 절벽. 절벽 끝은 뭡니까? 네. 지옥, 불지옥이죠. 지옥으로 가는 데에 의견이 합치가 되는 거예요, 인간은. 인간들은 지옥 가는 데에는 의견이 합치됩니다.
뭐 대선 할 때 몇 프로 하지만, 지옥에 대해서는 똑같은 생각으로 그들은 끝 지점으로 현재 달려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아무리 원수지간이라도 같은 이익을 공유한다면 그때부터 우리는 동지가 되는 1일이에요. 아무리 동지 했다가도 그 다음날 싸워서 적이 되고 백날해도 그 가는 방향이 그 자리에서 왔다갔다 하는 거예요. 왔다갔다.
어떤 여자가 어떤 남자를 좋아해놓고 식상하다고 다른 남자 만나면서, 전에 그 남자한테 재미없어 못 만나겠다. 우리 헤어지자. 헤어지고 난 뒤에 보니까 자기가 좋아했던 여자가 다른 남자를 만나고 있었단 말이죠. 그때 이별을 무슨 이별이라 하느냐면 환승이별이라 해요. 101번 타다가 직행 바꿔 타도 요금 안내는 거 있잖아요. 환승이별이에요. 그냥 뺑뺑 돌아요, 그냥. 뺑뺑 돈다고요. 자기들끼리는 뭐 헤어졌다고 울고, 울어도 금방이고 또 다른 사람, 다른 여자, 다른 남자 만나고 이러잖아요.
그런 식으로 움직이면서 계속 한곳으로 가요. 한곳으로 간다고요. 그 끝 지점. 왜 이 환승이별이 가능하냐 하면 남이라도 영원한 타인이 아니라 공통요소를 갖고 있기 때문에 그래요, 공통요소. 모든 인간은 이야기하다보면 공통요소를 갖고 있어요. 그걸 가지고, 아주 유명한 멘트죠, 싸우다가 정든다는 말. 싸우다보면 동질이 돼요. 똑같이 돼요. 논쟁의 쟁점은 소멸하고 사라져버리고 그다음부터는 네 말을 내가 들을 성의가 있느냐, 성의가 있다면 그것은 서로 친구사이가 되는 거예요. 옳고 그름도 없어요. 나의 즐거움이 이미 옳은 걸로 진리로 확정이 되어있는 입장이기 때문에 내 이야기를 들어주면 그건 동지가 되고 친구가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아무리 뭐하더라도 서로 만나서 오래 지내버리면 서로 생각이 통하게 되어있어요.
이게 인간세계인데요. 그러면 주님께서는 여기서 자기 백성을 만들기 위해서 어떤 조치를 하는가. 드디어 오늘 것 해봅시다. p.225 위에서 3번째 줄 봅시다. “개혁과 쇄신은 실은 거짓말이요 위선이다.” 이 논문을 발표했던 그 장소가 개혁주의신학회였어요. 그걸 제가 의도해서 개혁이라는 말을 집어넣었어요. 당신들은 전부 위선자들이다. 거짓말쟁이다. 개혁이라는 것은 성립되지 않습니다.
실제로 인간이 개인적으로 항상 발전하고 발달하려고 애쓴다는 사실은 저나 여러분이나 다 아는 이야기죠. 우리가 스스로 발전하고 개혁하고 쇄신, 새롭게 하려고 애를 쓰는 것. 그런데 시간이 나를 흐릿하게 만들어요. 세월이 지나면 모든 정신이 몽롱해지고 흐릿해져요. 자아가 나에게 맥을 못 쓰는 거예요. 내 육신에 대해서 자아가 날이 갈수록 통제력을 상실해갑니다.
비닐봉지가 찢어지면 여기서 안에 뭐가 쏟아지겠어요? 내용물이 쏟아지겠죠. 괴물이 쏟아지게 되어있어요. 흐릿해지고 괴물이 쏟아지는 거예요. 그 괴물엔 악마가 지배하면서 습관화되어있는 나의 본성이 거기에 들어있어요. 나는 나로 인하여 즐겁다. 그 괴물이 쏟아져버리면, 자기가 복음이라는 비닐봉지로 둘러쌌는데 안에 있던 괴물이 쏟아지죠. 평소에는 복음으로 잘 봉쇄가 돼서 티가 안 났는데 나이가 이제 70, 더 가면 80, 여기서 멈추면 화나겠죠, 인심 썼습니다, 90 넘으면 봉지가 터져요. 봉지가 터져버리면 내가 무슨 정신으로 이 이야기했는지 몰라요. 본인이 흐릿해진다니까요, 본인 자체의 경계선이요. 내가 육체 밖에 있는지 육체 안에 있는지, 뭐 성경적은 아니지만, 하여튼 모든 것이 몽롱해져요.
비닐봉지가 날라가 찢어지듯이 우리 안에 있던 이 죄성이 그대로 막 삐져나와요. 허락도 없이 막 삐져나와가지고, 괴물이라 했지만 귀신이라니까요, 귀신이 동사무소 와가지고 행패부리고 그런 거 많이 보셨죠? 연세 많은 분들. 점점 이기성이니까 자기밖에 모르고. 이건 육신이 있는 이상 누구나 그래요. 이럴 때 어떻게 하느냐?
제가 처음에 강의할 때 그랬잖아요. 내가 어떻게 하면 구원 받습니까, 그 입 좀 다물라고. 그런데 우리가 입 다물어야 될 이유가 나이 들어서 비닐봉지 찢어지면 아, 우리보고 입 다물라 한 이유가 등장해요.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이렇게 하겠습니다, 저렇게 하겠습니다, 하는 자체를 하나님께서 아주 귀담아 듣지 않는지 그 이유를 알아요. 우리는 지금 제정신이 아니거든요. 괴물정신이지, 귀신정신이지, 제정신이 아닙니다. 여러분들이 누굴 만나거든 귀신 만났다고 생각하세요. 자기가 나나 둘다 제정신 아닙니다. 심지어 어린애도 마찬가지에요. 자기정신 아니에요. 마귀정신이죠. 악마의 정신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죄가 터져 나올 때 두 가지 반응이 있어요. 첫 번째는, 감사하다. 두 번째가, 변호한다. 감사하는 것은 성령의 일이고요. 그동안 꾸준히 자아대신 성령께서 우리를 관리했다는 증거가 감사로 나오고, 우리는 말로는 성령이라 하지만 사실은 악마가 꾸준히 나를 다루었다는 증거가 자꾸 자기에 대한 변명과 변호가 빈번해진다는 겁니다. 감사한 것은 나의 본색을 알게 해주신 것에 감사하죠.
내가 하나님 앞에 한 그럴싸한 것은 위장한 거고 연기한 거고 진짜는 내가 감당 못 할 괴물에 대해서 누가 감당해줬습니까? 성령이 이 찌질이 나를 그동안 키우신다고 고생 많으셨던 것에 대해서 갈수록 감사가 더 커지는 겁니다. ‘고맙습니다. 진짜 말도 안 되게 괴물을 그동안 주께서 키워주신다고, 더러운 괴물을 더럽지만 그걸 마다하지 아니하시고 인도해주신 것에 감사합니다. 나의 본색은 죄인이었군요.’ 이렇게 나오면 그건 성령의 일인데
‘내가 그래도 아이 네 명 다 키우고......’ 뭐 자꾸 변명들을 하는 거예요. 옛날에는 내가 소싯적에 어떻고 내가 옛날에 청와대에서 좀 놀았고... 자꾸 나오는 그런 쓸데없는... 지금은 내 꼬라지가 나이 많아서 이렇지만 과거에 나는 이 정도였어. 바둑 두면 적어도 6단 정도는 됐어, 자꾸 이렇게 자기 가치와 의미를, 구차하게 지저분하게 아주 억지스럽게 과거의 이미 흘러간 것을 붙잡아가지고 그 뒤에 자꾸 자기의 왜소한 몸을 숨기려 하는 그게 바로 성령 안 받은 모습이죠. 감사가 안 나오니까요. 억지가 나오니까요.
이것은 여러분들이 주변에 불신자들이 늙어가는 모습을, 다 같이 늙어가잖아요, 부부끼리, 한번 보세요. 그들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오는지. 갈수록 자기변명 나오죠. 그런데 그 터진 입에서 복음 나오면 이건 놀라운 기적입니다. 진짜 하나님이 예수님이 옛 사람을 삼켜서 새 사람을 뿜어내는 일이 그냥 성경 이야기가 아니고 실제구나, 하는 것에 놀랄 수밖에 없어요. 자기가 망가지면서 어떻게 망가지는 자기를 감사할 수 있습니까.
이렇게 본다면 이걸 통해서 우리 성도의 끝은 이미 확정 됐죠? 성도가 신앙적으로 반듯하게 사는 것도 욕심이라는 사실을 알려줬죠. 반듯하게 살지 마세요. 반듯하게 살아서 신앙인 된 게 아니거든요. 주께서 성령께서 지켜주신 거예요. 수시로 감사가 나와야 되죠.
그러면, “그동안 내가 아직까지 안 무너졌는데, 아무리 봐도 지금 복음적으로 살아가고 있는데 왜 무너졌다는 것을 자꾸 가정해서 이야기합니까?” 라고 저한테 반박한다면 저는 이렇게 답변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동안 나의 일이 주님의 일을 막았습니다.” 이 이야기밖에 안 나와요. 나의 일이 주의 일을 막은 거예요.
그런데 이제 나이가 드니까 내가 혼미하잖아요. 죽은지 산지 경계선에 있으니까 이건 뭐 자기 마음대로 안돼요, 자기 육신이. 이럴 때는 나의 일이 어떻게 된다고 했어요? 흐릿하게 되죠. 흐릿하게 됐어요. 흐릿하게 되니까 그동안 감추어졌던 주의 일이 뚜렷하게 되면서 감사가 나오는 거예요.
그러면 하나님의 일은 인간의 일에 막혔다는 그 근거가 어디 있느냐? 그 근거를 한번 찾아봅시다. 열왕기상 19장 11절부터 12절까지 크게 읽어보세요.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너는 나가서 여호와의 앞에서 산에 섰으라 하시더니 여호와께서 지나가시는데 여호와의 앞에 크고 강한 바람이 산을 가르고 바위를 부수나 바람 가운데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바람 후에 지진이 있으나 지진 가운데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또 지진 후에 불이 있으나 불 가운데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더니 불 후에 세미한 소리가 있는지라”
여기 보세요. 우리는 상상해요. 여호와 같으면 하나님이에요. 하나님이 얼마나 대단하고 화려하고 장엄합니까? 구약에 홍해 바다를 가르시고 해를 멈추시고 하나님의 일은 굉장히 화려하고도 놀랄만한 대단한 일이라고 생각하잖아요. 우리가 과거의 기억을 종합해볼 때 우리의 이성이 작동하면서 하나님 일은 일을 거창하게 하신다고 짐작할 수 있단 말이죠.
그런데 11절, 12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너는 나가서 여호와의 앞에서 산에 섰으라 하시더니 여호와께서 지나가시는데 여호와의 앞에 크고 강한 바람이 산을 가르고” 큰 바람이 지나가는 것을 우리가 은근히 원했고 바위를 부수는 것, 야, 이건 하나님 일이지, 라고 했고, 바람 불고 지진 일어나고, 이거 또 사람이 못하는 일, 사람이 하지 못하는데 하나님은 하셨잖아. 이게 바로 내가 믿는 대단한 믿음이야, 이게 믿음의 전부라고 생각했는데 지진, 불 전부다 이건 사람이 못하고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진짜 불가능하고 대단한 일이잖아요.
그러나 그 후에 계시지 아니하고 세미한 소리. 우리가 큰 걸 원하고 기대하다 보니까 세미한 소리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그걸 무시해온 거예요. 나의 일이 주의 일을 막아온 겁니다. 세미한 소리, 세미한 음성. 논리적으로 봐서는 당연히 큰 것도 작은 것도 다 했겠지, 이렇게 되겠지만 논리를 말하는 게 아니고, 하나님 자신의 일은 어떤 경우라도 인간에게 빼앗기지 않는다는 거예요. 인간은 “인간이 할 수 있는 이 일은 내가 했고 내가 못한 엄청난 대단한 일은 이건 하나님만이 할 수 있습니다. 이게 나의 믿음입니다. 저 믿음 좋지요?” 이런 객기를 부려온 거예요.
작은 일, 방귀 끼는 이 작은 일, 이 일조차도...... 그것도 큰 방귀 말고 세미한, 이 일조차도 이게 주의 일이었던 거예요. 그런데 우리는 얼마나 욕심이 많은지, 그나마도 내 의미와 내 존재, 내 가치, 나의 제대로 일함, 이걸 뽐내기 위해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따로 여기다 모아놓고 울타리 쳐버리는 거예요. ‘이거는 제가 한 거라고 하나님 알고 계시지요? 제가 못 한 건, 믿습니다. 기도합니다.’ 이러고 있단 말이죠.
그래서 개혁과 쇄신이라는 말은 거짓말입니다. 하나님은 개혁과 쇄신은 하지 않고 그동안 하나님 일을 가로막았던 우리의 오물 덩어리를 긁어내는 일을 했죠. 이게 무슨 개혁입니까. 긁어내는 일, 이걸 아까 말로 하면 삼키는 일을 한 거예요. 옛 사람에 대한 적절한 조치를 하는 거예요. 네 하는 일 중에서 어떤 건 새 것이고 어떤 건 옛 것이 아니라 전부다 옛 것이라는 것을 철저히 조치하시고 인간이 할 수 있는 것과 하나님이 하는 것 사이를 단절, 끊어놓은 겁니다. 단절한 거예요.
제가 두 번째 시간부터는 p.225할 건데요. p.225 요나 이야기인데 이게 읽어보면 상당히 난해해요. 난해하기 때문에 그 기초를 지금 말씀드리는 겁니다. p.225 위에서 3번째 줄, “과거를 다듬는 현재의 주체와 미래를 다듬는 현재의 주체 사이의 균열이 내부적으로 따로 시간 층을 성사시켰고 수시로 변하는 외부적 동질성을 모색하려고 시도한 것 뿐이다.” 어렵죠.
그러니까 이 논문을 들었던 신학교 교수들이 자기도 모르게 본심이 드러나 버렸어요. “나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그래서 내가 속으로 ‘모르면 배우면 될 게 아니냐.’ 그런데 뒤에 말이 뭐냐 하면 “모르겠다. 너 계룡산 도 닦아서 받았지?” 계룡산에 가서 도 닦는다고 이런 글이 나옵니까? 단어 하나도 힘든데...... 모르면 모른다 하면 될 걸 가지고 뒤에 군말은 왜 하냔 말이죠. 신학 교수나 그 사람들이,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만 그 사람들이 뭘 모르느냐 하면 인간은 같은 적이 단 한번도 없었다는 사실을 모르는 겁니다.
인간은 같은 적이 한번도 없었어요. 집사님, 어제하고 오늘하고 같습니까? 달라요. 내가 여기 존재하는데 연계되어 있는 모든 변수 자체가 다 달라진 거예요. 안드로메다가 어딘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안드로메다에서 온 그 별빛이 어제까지 온 별빛과 오늘 온 별빛으로 인하여 나에 대해서 조그마한 변화를 유발하는 거예요.
현재 물리학, 특히 양자물리학에서 입자까지 다루게 되면 인간은 1초도 동일하게 같은 적이 없어요. 심지어 플랑크 시간이라 하는 것은 1/10⁴⁴초 사이에 일어난 일을 이야기하거든요. 1/10⁴⁴초, 이게 말이 돼요? 1초를 1/10로 나누면 1/10초죠. 1/100로 나누면 1/10²초가 돼요. 1/10⁴⁴초, 여기에 대한 모든 변화, 소소한 변화는 같은 변화가 단 하나도 없어요. 다시 말해서 나를 규정할 나는 없습니다. 10분이란 시간이 얼마나 좋은 시간인지 몰라요. 10분 쉽시다.
광주강의20220722b 열왕기상19장 12절(감사와 변명)-이 근호 목사
자, 이제부터 책 내용이 좀 어렵습니다. 이것부터 먼저 전제로 하고요. 성도는 사실상 안 죽는다. 성도는 사실상 안 죽어요. 왜 안 죽느냐 하면 영생이 영생 값을 하기 때문에. 불신자들이 안 죽는 그것하고는 차원이 다르죠. 영생이 스스로 영생 있음을 증명하기 위해서 성도에게 찾아왔기 때문에 성도의 자아를 무너뜨립니다.
흐릿하죠. 제정신이 아니게 만들어요. 그런데 이상하게 놀라운 일이 벌어지는 겁니다. 감사가 나옵니다. 감사가 나온다는 것은, 그동안 내가 주의 일을 막았었는데 주께서 나를 흐릿하게 해서 나를 철거하니까 영생을 주시는 주의 일이 나와버린 거예요. 나오니까 그걸 알게 된 성도가 자기의 죄인 된 것을 도리어 감사하죠. 변명하거나 변호하는 게 아니고 내가 이 땅에서 애 넷 키우는 그것조차도 죄였습니다. 반듯하게 산 것도 사실은 이게 나의 위선이었습니다, 라고 자기 죄를 까발리는 즐거움으로 살죠. 감사가 되면서 사는 겁니다.
거기에 비해서 불신자들은 극진한 자기 위로에 갈수록 거기에 목을 맵니다. 극진하게 자기를 대우해요. 연세 많은 독거노인들이나 이런 사람들, 극진하게 자기를 위로해요. 입에서 나오는 것은 전부다 극진한 자기 섬김입니다. 자기 방어. 맞죠? 자기 사수하는 거예요. 아주 지독해요, 지독해. 감사라는 게 나올 수가 없어요. 자식보고 “내가 아무것도 아닌 너희에게 해준 것도 없는데 이렇게 해줘서 고맙다.” 이렇게 나오는 게 아니고 “이놈의 자식, 내가 키워줬더니...... 이런 서러움 받으려고 내가 키워줬냐?” 막 자식들에게 호통치고 그러죠. 그럴수록 용돈이 더 깎인다는 생각을 못하고...... 끝까지 자아를 지키려고 한다 이 말이에요.
그런데 여기에 p.225에 보면 “과거를 다듬는 현재의 주체와 미래를 다듬는 현재의 주체 사이의 균열이” 균열이라는 말이 나왔어요. 이걸 지금 설명해드리겠습니다. 이 설명은 여러분 딱 들으면 알아요. 마태복음 12장 31절, 32절에 나오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의 모든 죄와 훼방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훼방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
성령에 대해서 이 세대+오는 세대, 성령은 미래에서 온 영이에요. 인자는 현재의 메시아입니다. 미래에서 온 영과 현재 메시아의 활동 사이에 단절이 주어져요. 이 세대와 오는 세대에 단절이 있다 이 말입니다. 인간들은 아무리 살아봤자 이 세대, 내일되면 이 세대, 모레 되면 이 세대, 이 세대 안에서 바깥으로 벗어날 수가 없어요. 오는 세대라는 것은 인간에게 없습니다. 오는 세대는 예수님이 홀로 이룰 세대이기 때문에 인간에게 오는 세대는 없어요.
주님께서는 뭘 거론했느냐 하면 오는 세대를 거론했다고요, 오는 세대. 무슨 말이냐 하면 오늘이 현재잖아요. 내일 되면 내일이 현재일까요, 내일일까요? 내일되면 내일이 현재가 돼요. 모레 되면? 지금은 모레지만 실제로 이틀 후는 현재가 된다고요. 현세대, 이 세대를 못 벗어나요, 아무리 살아도. 오는 세대라 하는 것은 뭔가 낯선 세대가 덮쳐야 되고 마중을 나와야 돼요. 그게 성령의 세대입니다. 성령이 그렇게 하게 하시는 거예요.
성령이 인간에게 오려면, 다른 말로 하면 예수님이 자기 백성의 죄를 씻어주려면, 달리 이야기하면 예수님이 죄인의 몸을 삼키려면, 단절이 있어줘야 돼요. 인간이 왜 오는 세대, 천국에는 왜 들어가지 못하나, 넘어설 수 없는가를 확실하게 증거로서 보여줄 필요가 있는 거예요. 입 다물라는 그 증거가 필요한 거예요. 네가 백날 설친다고 네가 스스로 오는 세대에 들어갈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오는 세대는 예수님의 세계에요. 아들의 나라에요. 우리는 넘볼 수 없어요. 인간으로서는 인간 세계로 국한되지, 그걸로 단절된, 그걸 뛰어넘을 수 없는 다른 세계가 예수님 세계거든요. 예수님만 훌쩍 뛰어넘었단 말이죠. 아버지에 의해서 죽은 지 사흘 만에 부활했잖아요. 그건 예수님에게만 일어난 사건이에요. 다른 사람에겐 없어요. 나사로가 죽었다 살아나도 그 세계 아니에요. 예수님만 들어갈 수 있는, 또 시작할 수 있는 그 세계가 오는 세대란 말이죠.
그래서 예수님이 인간들과 함께 있는 이 세대에서 인간들이 예수님을 믿으라 하면 안 믿고 욕하고 충분히 그럴 수 있어요. 거기에 대해서 내가 너희에게 이의를 걸지 않겠다. 무슨 말이냐 하면 우리가 하루하루 살면서 내 생각하며 살잖아요. 내 생각하는 모든 것이, 나름대로 착하게 살아야지, 바르게 살아야지, 아무리 내가 바르게 살려고 해도 그 환경 자체가 이 세계 안에 있기 때문에 오는 세계와 무관한 거다 이 말이죠. 바르게 산 게 아니에요. 그냥 죄짓는 거죠. 이 땅에서 아무리 옳게 살아도 이 세대 자체가 안에서 국한되어 있기 때문에 그 안에 폐쇄적으로 가두어졌기 때문에 바르게 사는 것이 바르게 산 게 아닙니다.
바르게 살면 효과가 나야죠. 죽어도 부활해야 바르게 살죠. 무슨 인간이 어떤 일을 해서 죽어도 부활됩니까? 우리 인간에게 그런 일을 허락한 적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죠. 십일조 한다고, 구제한다고, 선교한다고? 고넬료가 구제를 얼마나 했어요. 고넬료가 그걸로 구원받았습니까? 아니죠. 왜 구원 못 받았습니까? 고넬료가 아무리 구제하고 아무리 기도해도 그것은 자기 세계, 이 세대, 인간들의 공통된 세대 그 안에 갇혀있기 때문에 오는 세대의 혜택은 입지 못하는 거예요. 오는 세대로 홀로 빠져나가신 분은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베드로 열두 제자도 못 따라 나갔어요.
그래서 인자에 대해서 거스르는 자는 죄사함을 받되 오는 세대에서 오는 성령을 거스르는 자, 거부하는 자, 성령을 받지 아니한 자는 영원히 죄사함을 받지 못한다. 그 말씀은 무슨 뜻이냐 하면 네가 사함 받고 사함 안 받고는 네가 너한테 얼마나 했느냐, 얼마나 믿었느냐, 얼마나 회개했느냐 그걸로 결정된 것이 아니고 순전히 성령을 주시느냐 안 주시느냐 하는 예수님 소관이다 이 말이죠. 예수님 소관이에요.
그런데 인간이 생각하는 미래는, “과거를 다듬는 현재의 주체와 미래를 다듬는 현재의 주체 사이의 균열이 내부적으로 따로 시간층을 성사시켰고 수시로 변하는 외부적 동질성을 모색하려고 시도한 것뿐이다.” 수시로 변하는 외부적 동질성, 외부적 동질성을 모색한다, 시도한다.
이런 이야기에요. 어제 내가 나이어야 하는 것에는, 나다운 요소를 하려면 내 속에 나의 믿음, 소망, 사랑, 내가 성경을 몇 독했고 뭘 어떻게 했고 내가 착한 일을 얼마나 했고 이런 요소들을 종합하고 규합해야 그게 나가 돼요. 나라는 게. 육체는 고정된 육체로 세월따라 삭아져가는 육체가 있지만 자아라는 것은 속에 기억이라는 게 있어가지고요. 내가 하는 기억이 있어줘야 현재의 나가 됩니다.
만약에 잘못해서 비누 밟아가지고 두 바퀴 돌아서 킬러가 갑자기 거지되는 꼴, 그런 영화 있잖아요, <럭키>라는 영화. 그처럼 기억을 상실해버리면 아무것도 몰라요. 그러면 아무거나 알기 위해서는 그 사람은 영화에 보면 자기 이름도 새로 써야 돼요. 자기 수입이 얼만지 새로 적어야 돼요. 내가 나 되기 위해서는 집나간 요소들을 자꾸 끌어 모으는 것을 모색해야 돼요, 그걸 해야 돼요.
모을 때 이것도 내 거고 이것도 내 거고 이것도 내가 한 걸로 끌어 모을 때 그걸 동질성이라 하는 거예요. 동질성에서 나를 빼면 안돼요. 그러면 내가 나 아닌 게 되어버린다고요. 만약에 댄스클럽 나가서 댄스를 잘 췄다. 차차차, 지루박을 잘 췄다. 그런데 비누 밟아서 목욕탕에서 넘어져가지고 기억이 안 난다 할 때 어떤 아는 사람이 ‘아이고, 아저씨. 차차차 잘 추는 분이잖아요.’ 하면 다시 적는 거예요. 나는 차차차를 잘 췄다, 그렇게 하나 둘씩 집나간 나의 정보를 끌어 모아야 그게 얼추 자아가 되는 겁니다.
그런데 연세가 많아져서 끌어 모은 것보다 빠져나간 게 더 많을 때는 그걸 치매라고 이야기해요. 두뇌세포 시냅스 작용에 의해서 두뇌세포가 자꾸 죽어버리니까 그 죽어버린 시냅스가 갖고 있던 기억들이 있잖아요. 그 기억이라는 것, 기억이라는 건 시냅스와 시냅스의 연결망의 활성화를 기억이라 해요. 그런데 이쪽 짝이 되는 시냅스가 죽어버리니까 이거 떨어져나가니까 관계망도 우르르 같이 없어지니까 아들보고 ‘아저씨, 누구세요?’ 이렇게 된다 이 말이죠. 인간의 육신이 허물어지니까. 그런데 이게 나이 들어서가 아니라 생생할 때도 끊임없이 인간은 모색해요. 시도를 한다고요. 어디까지 왔나, 해서 자꾸 내가 어디까지인가 시도하는 거예요.
제가 지난 강남강의하면서 강의에 몰두하다 보니까, 이게 또 구차한 변호와 변명이 되는데 그건 아니고, 진짜 까마득하게 휴대폰 충전해놓은 걸 잊어버렸어요. 전에도 몇 번 그랬어요. 그런데 전에는 오다가 기억이 나서 되돌아가 찾아온 적이 있거든요. 그때 뭐라고 생각했느냐 하면, 오늘 이렇게 했지만 다음에도 충전하다 잊어버리면 되돌아가면 되지. 그런데 지난 화요일 강남강의 때는 되돌아가는 것도 잊어버렸어요. 그래가지고 수서역에 갔는데 진짜 몰랐던 거예요. 그래서 아는 사람한테 500원 줄 테니까 전화 좀 쓰자고 했더니 그 사람이 500원 안 받았어요. 요새 전화는 다 무료로 되잖아요. 전화해서 잊어버렸다고 박 집사님한테 연락해서 찾았는데. 찾을 때 제 아내가 집사님한테 이런 이야기한 게 굉장히 기억에 남아요. ‘휴대폰을 택배로 보내실 때 전원을 다 끄고 보내세요.’
아, 이건 생각도 못했어요. 휴대폰이 사망의 기간에 들어간 거예요. 사망한 거예요. 완전히 꺼야 돼요. 그래서 휴대폰을 왜 다 꺼야 되지? 얼른 그 이유를 몰랐는데 아내가 설명하기를, 휴대폰을 안 끄면 택배 도중에 전화 올 수가 있다는 거예요. 일단은 완전히 죽여버리는 거예요, 휴대폰을. 완전히 죽여버리면서 죽는 순간에 택배는 원래 주인에게 돌아가게 되어있어요. 죽여서 돌아가는 거예요, 죽여서.
내 주인이 뭔지는 난 몰라요. 그냥 자아만 구성할 뿐이에요. 그런데 주님께서 잃어버린 자기 동전을 찾듯이, 목자가 잃어버린 자기 양을 찾듯이, 아버지가 아들을 기다리듯이, 자기 것이니까 자기 백성을 찾는 것, 이게 우리의 일입니까, 주님의 일입니까? 주님 본인의 일이에요.
그러니까 성도가 되었으면 구원이 내 일이 아니었음을 이걸 계속 느껴야 성도에요. 구원이, 천국 가는 것이 나의 일이 아니었음을,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 그걸 계속 느껴야 돼요. 그러면 내 구원이 내 일이 아니면 나는 전원이 완전히 꺼져버리는 순간일 경우에만 가장 주의 일이 주의 일답게 등장하죠, 가장.
그럼 죽었다는 말은 나와 시간은 상관없죠. 오는 세대의 모든 권한은 주님께 모두 넘어갔죠. 아니, 휴대폰이 자기가 알아서 아이고, 힘들다, 하면서 서울서 대구까지 자기가 기어오는 게 아니고, 헥헥거리면서 천안까지 와서 좀 쉬었다가 30분 쉬고 대전까지 오고 이러지 않고 그냥 본인은 마치 수면 내시경하는 것처럼 그냥 죽은 상태에요.
아까도 얘기했지만 죽었다는 말은 시간 흐름은 나를 위한 시간이 아니었다는 거예요. 나를 위한 일생이 아니었다. 운송기간이에요. 여러분의 시간들이 주님이 악마에 속한 인간을 주님 품으로 되돌려 보내는 그런 주님의 시간의 흐름에 우리들이 놓여있는 겁니다. 이 세대에서 오는 세대로 이동하는데 그 택배기사가 성령이죠, 성령.
어느 쪽으로 가야될지 유일하게 아시는 분이 성령이거든요. 왜냐하면 성령은 주님에게서 나왔기 때문에 오직 주님에게만 자기 백성을 택배로 보냅니다. 그러니까 성령은 예수님으로부터 와야 돼요. 예수님의 영이어야 돼요. 출처가 예수님이어야 예수님에게 무사히 자기 백성을 성령께서 예수님께 갖다 바칠 수가 있습니다. 내 것을 도로 찾는 그 작업, 주님의 것을 주님의 것으로 도로 찾는 작업, 주님의 휴대폰을 자기 걸로 되돌려 받는 그 작업이 구원입니다.
그래서 요한일서에 보면 너희는 이 세대에 속하지 아니했다 하죠. 너희는 이 세대에 속하지 아니했다. 그걸 어떻게 압니까? 이 세대에 속한 사람들은 자기들끼리 알아듣는 이야기를 하는 반면에, 하나님께 속한 사람들이 하는 하나님께 속한 이야기를 이 세대에 속한 사람은 알아먹지를 못하는 거예요, 알아먹지를.
제가 고등학교 때 영어선생님께서 교과서 책을 보면서 발음을 하는데 발음을 못 알아듣겠어요. 쎄미얼, 쎄미얼, 이게 무슨 말이지? 보니까 사무엘이에요. 사무엘을 영어발음하면 쎄미얼 이렇게 돼요. 아직도 잊지 않고 있어요. 사무엘이나 쎄미얼이나 맨 그 사람이죠. 세상의 발음 같은 건 글자 쓰면 Samuel 이렇게 되는데 성경 말씀은 쎄미얼보다 더 심하게, 언어로 되어있는데 못 알아봐요. 알아볼 수가 없습니다. 못 알아듣는 이유가 뭐냐? 천국에서 추방된 공동체 속에 속해있기 때문에 못 알아듣고요. 악마의 지배를 받는 상황이기 때문에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들어요.
그러면 그런 사람들이 이 세대에 속한 자기들끼리 목사를 만들고 교회를 만들고 기독교라는 종교를 만들어서 거기서 그들이 만든 예수, 그들이 만든 삼위일체, 그들이 만든 하나님을 만들어서 자기들끼리 소통하고 있겠죠. 그 소통의 방향이 뭐냐? 어떻게 하면 우리가 구원받는가, 하는 이야기를 그들 세계에서 자기들끼리 서로 통한다면서 이야기하고 있는 겁니다. 그 전제가 뭐냐 하면 바로 자기 동일성이고 더 나아가서 자기 동일성들의 뭉치가 자기 공동체의 동일성이 돼요.
어쨌든 간에 동일성인데 이 동일성이 억지가 돼요. 왜냐하면 끊임없이 변하잖아요. 수시로 변하고 늘 변하는데 변하게 되면 동일성을 포기해야지. 동일성을 포기하는 방법이 뭐냐 하면 매일같이 주께서 우리를 있게 하는 것은 주의 일에 일어나는 하나의 사건들이에요. 주님이 현재 엄연히 살아있고 주님께서 일하고 있다는 그 증거로 우리가 지금 여기에 살아있거든요. 따로이 나의 동질성을 유지할 필요가 없어요.
그러나 주님이 없는 사람은 계속 나의 나됨을, 과거 기억을 전제로 해서 어제도 이게 나였고 오늘도 같은 일을 하니까 이게 나다, 자꾸 계속해서 억지를 부리면서 그걸 끌어 모으는 거예요. 그 동질성의 끝이 정치입니다. 또는 정치구조, 정치를 다른 말로 하면 행정. 동질성의 끝을 주장하는 인간들을 규합해서 공동체로 힘을 모으는 그 일이 정치에요, 정치.
인자는 개인에게 당했습니까, 정치단체에게 당했습니까? 정치단체죠. 본디오 빌라도를 포함해서 사두개인도 그 당시에 권력자잖아요. 예수님 재판할 때 개인적으로 테러했습니까? 아니죠. 개인적으로 한 게 아니고 집단적으로 했어요, 집단적. 집단적 공동체, 집단적 동일성이에요. 그러면 개인의 동일성을 날마다 구축하면서 동일성을 구축하는 이 요소 중 하나가 뭐냐? 나는 어느 나라에 소속이다,가 이 안에 동일성으로 포함이 되는 겁니다.
어제 내가 어느 나라 소속이지? 아, 여권 보니까 대한민국이구나. 그렇다면 오늘은 어느 소속이지? 오늘은 대한민국이야, 이렇게 되는 거예요. 나중에 나이 들어서 치매 걸려가지고 “할머니, 할머니 국적이 뭡니까?” “국적이 뭐에요?” “나라, 어느 나라입니까?” “내가 어느 나라더라?” 몰라요. 자아를 형성하는 게 얼기설기 되어가지고 툭툭 다 빠져나와가지고 정신이 없어요. 전에는 대한민국 사람인데 지금은 대한민국조차 몰라요. 이게 인간의 본성입니다.
이게 남의 이야기가 아니고 우리도 결국은 그렇게 돼요. 몇 년 안 남았습니다. 장로님 한 삼십 년... 몇 년 안 남았어요. 정신없어요. 정신이 하나도 없다고요. 그동안 우리의 미래가 정신없음이잖아요. 동일성 다 깨져요. 동일성 다 깨지는 게 이게 우리에요, 이게. 현재 나는 나다, 하고 정신 바짝 차리는 게 이게 내가 아니고, 그걸 해리현상이라 하는데 점점 더 쥐포 찢어지듯이 찢어져가는 그 중간과정이 있습니다. 우리는 찢어지기 전에 아주 발악을 하죠. 등 꼿꼿하게 펴서 걷기하고 운동하고 하여튼 오메가3부터 해서 온갖 노력을 해가지고 지연시키는 것, 내가 완전히 해리되기 전에 어쨌든 간에 정신 바짝 차릴 날을 좀더 이어가려고 노력하죠. 그러나 그건 소용없습니다.
그러면 이 정치적 동일성, 정치적인 행정은 뭐냐 하면 바로 소유화하는 거예요. 자기의 구성요소를 소유화시키는 겁니다. 지금 제가 이런 이야기를 왜 하느냐 하면 인자의 반대모습이기 때문이에요. 이걸 이렇게 쓰겠습니다. ‘실제적 현상은 실체적 현상이 된다.’
실체는 실제와 같은 말이 아닙니다. 눈에 보이는 것, 하나하나 덩어리로 손에 만져지는 것, 그리고 실제로 힘을 느끼는 그게 실제고, 실체라 하는 것은 국가입니다. 국가의 부름을 받잖아요. 이게 추상입니까, 국가의 부름이? 입영통지서가 추상입니까? 퇴직한 교사들 70세 이전은 전부다 복귀해. 교사 없어. 이게 지금 추상화 관념이에요, 이게?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하니까 우크라이나 남자 60세 이하 전원 다 소집, 전원 다 군에 가게 되어 있어요. 60세 이하? 군에 가야돼요? 아, 살았네. 60세 이하 전부다 군에 가야 돼요. 이게 농담하는 거예요, 나라에서? 실체라니까요. 실체. 실체적 현상은 그러한 입영통지서라든지 세금 내는 것, 교통법규 오늘부터해서 만약에 횡단보도에서 2초 정지 안하면 전부다 벌금 15만원 받는다, 전부다 실체적 현상이거든요.
이렇게 하는 이유가 개인을 소유화하는 겁니다. 자기 딴에 똑똑해도 국가는 나보다 더 똑똑해서 국가는 나에게 명령하는 자가 되는 겁니다. 명령하는 자. 이게 질서의 권력화라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유대인의 권력화에 당했다, 우리는 보통 이렇게 알고 있죠. 우리는 한걸음 더 나아갑시다. 예수님께서 의도적으로 악마로 하여금 규합하도록 의도하셨다.
자기들끼리 다 그렇게 모이도록 한 거예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 서로 적이었으나 사도 바울을 재판하는 가운데 또 예수님을 재판하는 가운데 그때는 하나의 동지가 된 거예요. 그들의 끝은 똑같은 곳으로 가고 있었던 겁니다, 절벽으로. 불바다 되는 지옥으로 전부다 가고 있었던 거예요. 아무리 자기들 내부에서 투쟁해도 소용없어요. 예수님 방향 쪽이 아닌 반대방향으로 가고 있었던 겁니다, 줄 맞추어서. 거기서 빠져나올 수 없어요. 누구의 소유화되었기 때문에.
이걸 빠져나오려면 무슨 권력에 대해서 대들어야 돼요? 국가권력에, 국가 정치권력에 행정권력에 대들어야 됩니다. 대들 수 있는 사람은 없어요. 베드로가 왜 예수님을 배신했습니까? 국가권력이 너무 세기 때문에 배신한 거예요.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왜 팔아먹었어요? 자기의 동질성은 국가가 인정해준 동질성이기 때문에. 예수님을 팔아먹으려면 누구를 찾아가야 되는지 가룟 유다가 알고 있었어요. 그 말은 가룟 유다는 국가라는 어항 속에서 파닥거리고 있었던 겁니다. 못 빠져나오고 있었던 겁니다. 가룟 유다뿐이겠습니까. 오늘날 모든 사람이 다 그렇죠. 각자 소속되어 있는 국가, 국가의 권력 그 밖으로 빠져나갈 수가 없습니다. 국가의 소유가 되니까.
그러면 이 국가가 개인을 소유화시킬 때 뭐로 소유하느냐 하면 법률로 소유해요. 법률로 소유화시킵니다, 법률. 법률을 이렇게 보면 알기 쉬워요. 무질서, 혼돈입니다, 혼돈에서 질서를 잡고 질서에서 권력이 되고 권력이 소유화를 발휘하죠.
그러면 이 무질서는 어디서 나오는가? 자연에서 나왔죠. 자연은 누가 만들었습니까? 하나님이 만들었죠. 하나님이 만든 자연의 무질서에서 인간들은 질서→ 권력→ 소유화를 이렇게 따로 만들었죠. 자, 묻습니다. 이 자연의 질서와 인간의 질서가 일치합니까, 일치하지 않습니까? 일치하지 않죠. 하나님의 뜻과 인간의 뜻(질서, 권력, 소유화), 인간의 뜻이 국가의 뜻이죠, 인간의 뜻이 일치합니까, 일치하지 않습니까? 일치하지 않죠. 일치하지 않는 가운데서 인간들은 전부다 인간의 뜻에 함몰되었습니다. 여기에 빠져있어요.
그래서 인간이 아무리 행동해도 국가의 통제 하에 있는 이상은 하나님의 일이란 성사시킬 수가 없습니다. 국가에 대해서 청와대에서 교회에서 아무리 철야기도해도 그건 인정되지를 못합니다. 결국은 철야기도해도 겟세마네 기도해도 겟세마네 기도한 베드로, 야고보, 요한이 예수님 배신하고 도망갔잖아요.
물론 기도하면서 잠을 안 잤을 경우냐 그런 걸 따질 필요가 없어요. 잠을 안자고 기도하든 잠을 자면서 기도하든 주님께서는 의도했어요. 예수님 말고 어떤 누구도 이 세대에서 오는 세대로 빠져 나갈 수 없다는 것을 이미 주께서는 확정지었기 때문에 제자들로 하여금 인간이 만든 질서에 주께서는 그냥 넘겨버린 거예요.
여러분 이거는 쉬울 거예요. 산토끼는 이 세상에서 누구 것이냐? 사냥꾼의 소유로 인정해줍니다. 그냥 산에 돌아다니는 토끼는 사냥꾼 것이 아닌데 총 쏴서 잡으면 사냥꾼의 소유로 인정해줘요. 네 총알 박았다고 네 것 되는 근거가 어디 있냐? 이렇게 안 따집니다. 어느 누구의 것도 아닌데 총 쏜 사람의 것이 되도록, 어느 질서가? 주님이? 아니에요! 인간 질서에서 그렇게 해준다고요.
바다에 물고기는 어부 것. 바다에 물고기 많잖아요. 누구 것입니까? 하나님 것이죠. 그런데 인간세계에서는 그걸 잡은 어부의 소유로 해주는 겁니다. 어부 것으로 해주는 거예요. 인간세계에서는 이걸 정당한 걸로 봤죠. 그 대신 여기서 고기 잡은 게 다 자기 것 됩니까? 여기서 뭘 떼내죠? 세금. 세금은 일부를 받아가는 게 아니고 조세권이 조세 내는 사람을 이미 소유화시켰다는 그 증거입니다. 그다음 지상권-토지주. 땅은 토지 주인 것이 되는 거예요. 국가에서는 세금 떼면 되죠. 그다음에 저작물-작가. 보세요. 이 세상의 특징이 뭡니까? 제각기 자기 소유를 가지고 질서 잡아서 형성되는 것이 바로 이 세상인 거예요, 이 세상.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예수님보고 뭘 물었느냐 하면 “너 어느 신학교 나왔어? 너 율법 누구한테 배웠어?” 갑자기 옛날 기억이 확 올라오네요. “너 율법 누구한테 배웠어?”, “너 누구 허락 맡고 나한테 그런 질문 하냐?” 주님께서는 그 이야기하고 싶었죠. 그러나 의도적으로 주께서 그렇게 인간 쪽이 하나님 쪽을 몰아세우도록 주께서는 의도적으로 그걸 벌이신 겁니다.
이 소유권의 특징이 뭐냐, 오늘 중요한 것 나옵니다, 정말 중요한 건데 이게 안정권입니다. 이게 인간에게는 절대적인 매혹거리고 유혹거리고 인간이 원했던 겁니다. 자연은 있지만 거기서 보이지 않는 질서가 결국 돌고 돌아서 어디로 안착했어요? 이거는 내 것, 안정적인 내 것으로서 귀착이 됐어요. 다 돌아와 버린 거예요. 무슨 반칙이 있어서 이렇게 된 거예요? 결국 모든 세계는 다 주님의 것인데 어떻게 해서 여기서 내 것이 발생됐죠? 이게 바로 사도행전 5장에서 아나니아, 삽비라가 헌금해서 죽은 이유잖아요. 내 것이니까.
소유에 여러 가지 성질이 있는데요. 소유에서 시효를 묻게 되어있고 취득여부 묻고 승계, 자식들에게 주느냐 아니면 양도, 남들에게 주느냐, 이 네 가지 요소를 다 지녀야 제대로 소유라고 할 수 있거든요. 아나니아, 삽비라가 헌금을 누가 결정했습니까? 얼마를 드릴까 누가 결정했습니까? 자기가 결정했죠. 그러니까 이것은 양도 결정권이 나한테 있다는 거예요. 여기에 대해서 베드로가 뭐라고 합니까? 너한테 있어도 네 것이 아니고 내놔도 네 것이 아닌 걸 네가 왜 몰랐는가.
다시 말해서 헌금이라는 뜻은 이것은 나한테 있어도 내 것이 아니라는 표시로서 내놓는 게 헌금이에요. 그리고 돈만 그런 게 아니고 그 돈을 갖고 있는 내 자신도 나의 것이 아닌 거예요. 자, 이 시점에서 다시 묻습니다. 구원은 누구 일입니까? 주님의 일이죠. 그런데 자꾸 사적인 나의 구원으로 전환하는 이유가 뭡니까? 내 것은 내 소유라는 더러운 습관이 계속 그런 습성이 남아있어서 그런 거예요, 이게.
그래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사이에 예수님을 탁구공으로 여깁니다. 자기들끼리 재판하다가 핑퐁 핑퐁 핑퐁해서 이건 빌라도가 하라 하고 빌라도가 다시 너희가 재판하라 하고 이건 뭐 탁구공도 아니고 오고가고 오고가고. 주님께서는 의도적으로 그렇게 해서 이쪽도 치고 저쪽도 치고. 헬라인이든 이방인이든 유대인이든 모조리 전부다 예수님의 원수가 됨을 다 드러내는 일을 벌이시는 겁니다. 오늘날 예수님 오셔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똑같습니다.
지금까지 이야기에서 우리가 중요한 것 두 개를 뽑아내겠습니다. 하나는 동질성, 또 하나는 안정권 확보. 이것이 바로 가짜 질서죠. 이 가짜 질서는 외형적인 거예요, 외형적. 아까 실체적이라 했죠. 그게 뭐였습니까? 국가죠. 국가를 다니엘서에서는 짐승이라 했죠. 짐승.
이제 요나를 한번 봅시다. 요나의 그 일어난 일은... 주의 이름의 동질성과 요나의 동질성이 같이 겹쳐있는 게 선지자에요. 아까 경쟁관계에 있다 했죠. 주의 이름과 인간의 이름이 경쟁관계에 있는 것을 함축해서 포개서 같이 딱 보여주는 게 선지자에요. 그러면 인간들이 평소에 어떤 식으로 행동하고 어떤 식으로 생각하는가를 선지자가 유감없이 다 보여줘야 되는 겁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인간들이 움직이는 것을 표본적으로 샘플로 보여주기 위한 환경으로 해서 안에다가 집어넣죠.
p.225 위에서 6번째 줄을 봅시다. “아무리 쇄신해도 몽상에 불과하며, 기존의 인간의 이름이라는 독자적 주체성을 갖다 버릴, 적당한 역사 밖의 처소를 구하지 못해서 오는, 폐쇄적 성질을 그냥 자꾸만 내부 깊숙이 쑤셔 넣고 있을 뿐이다. 즉 수평적 시간선이 쌓여서 자기 내부적으로 수직적 시간층을 가중시키게 된다.”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인간이 있는데 과거는 기억이라 했죠, 미래는 희망입니다. 그런데 희망은 과거의 기억에서 결핍된 것, 모자란 것을 미래에서 보충하려고 미래를 은근히 기대해요. 그러면 이 미래는 세상 변화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나한테 꼭 필요한 일이 벌어지는, 너무나 일방적인 미래상을 상상하게 되죠. 너무나 일방적인 미래상.
지금 다음 달에 딸이 결혼할 때 결혼하는 딸 부모가 예수님의 재림을 간절히 원합니까? 아니죠. 예수님의 재림은 미래의 일 아닙니까? 미래 일 맞잖아요. 왜 미래 일중에 재림은 안 구하고 그날 날씨 좋기를 구하는 이유가 뭡니까? 자기의 기억 속에 한달 뒤 자기 딸이 사람들 앞에서 자기 인생의 보람을 줄 수 있는 아름다운, 신랑감을 얻어서 결혼하는 결혼식이 있죠. 이 결혼식이 자기 선이죠, 자기 시간선이죠, 일방적인 것. 자기 시간선이 왜 필요하냐? 그럴 때 한달 뒤의 나와 지금의 내가 동질하다고 우기고 그게 나에게 내 삶의 안정권을 보장하기 때문이에요. 이렇게 이야기하면 안 걸리는 사람 없죠. 다 걸리죠.
똑같은 일이 벌어져도 세상 참 좋다는 사람이 있고 안 좋다는 사람이 있어요. 각자 자기 고유한 시간선, 시간라인을 따로 가지고 포기 못하고 있기 때문에. 그런데 고맙게도 이제 슬슬 70, 80 넘어가면 내 시간선이 뭐였지, 자기 과거가 무너지면 과거에 알알이 소세지처럼 붙어있던 미래도 같이 날라가거든요. 내가 내일 뭐할라 했더라? 그건 50돼도 마찬가지에요. 내가 뭘 하려고 했는데 뭘 하려고 했는지 모르겠다. 내가 뭘 하려고 했는데 도대체 뭘 하려고 했는지 기억이 안 나죠. 자기 시간선이 기억이 안 되니까 내일 뭐 할 계획이 날라가버린 거예요. 점점 그것이 심해집니다. 그때는 메모하고 냉장고에 적어 갖다 붙이고 하죠.
그러니까 여기 한번 보세요. 시간선이 따로 있으니까 그게 자꾸 고착되면서 변화무쌍한 이 세상에서 나라는 것은 오뚝이처럼 로봇처럼 따로 만드는 거예요. 내가 나를 만드는 거예요. 이거 반칙 아니에요? 주님이 만드는 게 아니고 내가 나를 만든다고요. 그럴싸한 자아상을. 고집부리죠. 가룟 유다처럼, 제자들처럼.
우리가 죽어야 될 이유를 아시겠죠. 아니, 죽이는 게 얼마나 큰 복인 줄 아시겠죠. 이 자기를 만드는데 괜찮은 미래를 기다리다 보면 우리가 진이 빠져요. 진 빠지는 걸 네 자로 스트레스라 해요. 스트레스에서 위염 나오죠. 나중에 이게 암 걸립니다. 왜 스트레스 받습니까? 잘 돼야 될 텐데. 잘 될 턱이 있나. 맨날 잘 돼야 될 텐데. 아무리 잘해줘도 그건 당연한 거고 또 내일 생각하면 내일은 잘 돼야 될 텐데.
자기만의 폐쇄된 성질을 자꾸 자기 내부에다가, 움직이는 사건들을 일방적으로 내 이름으로 거기다 꾸역꾸역 집어넣는 거예요. 그게 인간입니다. 그 동질성한테 핍박받은 자가 누구냐 하면 바로 예수님이에요. 그 쓸데없는 일을, 배후에 악마가 시켜서 쓸데없는 일을 해온 거예요. 그러니까 이런 마음 가지고 제가 미래에, 또 미래에, 구원되겠습니까? 주님께서는 Shut up! 그 입 다물라 했지! 네가 과거에 어떻게 살아왔는지 너밖에 몰랐으면서 너의 구원을 거기다 또 욕심 내냐? 입 다물어! 구원은 내 일이야.
요나가 바로 그 일을 했던 거예요. 요나가 하나님의 계시 듣고 이건 내가 관여할 바가 아니고 난 그냥 쉬러 가면 되겠구나, 하고 다시스로 도망을 쳤어요. 도망을 쳤는데 주님께서는 어떤 환경을 만듭니까? 요나가 갖고 있던 인간적인 생각과 똑같은 인간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들과 배를 전세내서 거기서 합승을 하게 된 거예요.
풍랑이 일었습니다. 오늘 살아 있잖아요. 그런데 풍랑이 일게 되면 어떤 조짐이 있습니까? 지금 동질성으로 살아있는 내가 풍랑이 심하면 나는 여기서 죽을 수 있다는 그것을 요나 말고 다른 사람도 동질적으로 똑같이 생각한 거예요. 인간은 모조리 똑같이 생각한 거예요. 내가 죽으면 안 된다는 생각을 똑같이 하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요나에게 여기서 선지자다운 면모가 나오죠. 죽으면 죽으리라.
놀라운 사실은 요나 자신이 하나님 낯을 피해 도망쳤다는 사실과 또 하나는 도망쳤는데 주께서 드론 띄워서 나를 발각했다는, 나 말고 하나님의 원초적인 나보다 먼저 계신 분이 나에게 지시를 내리고 지금 일을 벌이고 있다는 이 감이 왔다는 사실, 이게 바로 선지자 아니고 뭡니까? 이게 바로 선지자잖아요. 자기가 얼마나 착하고 훌륭하냐가 아니라 지금 나만 일한 게 아니고 주께서도 일하셨고 나는 그 주의 일을 도망칠 수가 없다는 사실을 그는 죽음 속에서 죽어가는 속에서 파악된 거예요.
여러분 생각해보세요. 요나가 배타고 있을 때 풍랑이 일 때 자기가 살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까, 살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까? 자기보고 나 물속에 집어던져라 할 때 자기가 살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죽었다고 생각했어요? 죽었다고 생각했어요. 요나는 그걸 기꺼이 받아들였어요. 죽는 것이 나하고 무슨 상관이 있어요? 그건 오는 세대의 일인데요. 이건 미래의 일, 내가 건너갈 수 없는 주님의 고유한 자기만의 일을 나한테 적용시키는데 여기서는 나의 일이 발각되고 벗겨져야죠. 주의 하는 일에만 참여하면 되잖아요.
그런데 누가 벌벌 떱니까? 누가 요나를 물속에 집어넣기를 주저합니까? 같이 배타고 있던 사람들은 요나를 집어넣는 걸 두려워한 거예요. 그건 요나를 걱정해서가 아니라, 요나를 집어넣고 그 다음날을 살아가는 내가 어떤 사람을 우리 살기위해서 물속에 집어넣었다는 양심의 가책이 된 그 모습이, 내일의 모습이 내가 싫은 거예요. 나의 동질성과 위배되는 거예요. 나의 동질성은 정당해야 되는데 나 살기위해서 누구를 집어넣었다는 그것이 평생 트라우마가 될 수밖에 없다는 내일의 내 모습이 싫은 거예요.
싫거나 말거나 그건 하나님의 일이 아니죠. 그러니까 요나를 집어넣어서 인간들이 기껏 생각하는 것이 그 정도밖에 안 된다는 걸 다 까발리시는 겁니다. 그게 선지자의 기능이에요. 요나는 자기가 죽을 줄 몰랐죠. 그 다음 모든 순서는 일방적으로 요나를, 휴대폰 전원 다 끈 상태에서 요나로 하여금 죽은 상태에서 그 나머지 일을 누가 처리합니까? 우리 주님이 처리해나가시는 거예요. 그게 선지자입니다. 그게 선지자의 말씀, 계시고요.
우리가 이 계시를 받아들이면서 우리가 나이 80되기 이전부터 꼭 80되어서 정신 나갈 때... 정신 나갈 때 되면 그 말씀도 안 떠올라요. 정신 아직도 있을 때에 내 일은 나한테 없구나,라는 사실을 받아들이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속에 주님이 일한다는 사실을, 어설픈 우리의 나의 이기주의를 통해 깨닫게 해주시니 감사합니다. 그저 변호하고 변명에 허덕대지 말고 거기에 몰두하지 말고 늘 감사만 나오는 저희들 삶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