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강의20220923a 민수기6장 5절(나에게 속기)-이 근호 목사
p.226 【3. 선지자의 속성과 다니엘의 위치】선지자는 여러 가지 특징이 있는데 선지자라고 하면 이렇게 보면 돼요. 한계, 경계. 경계선, 한계선에 서 있는 사람, 선지자입니다. 선지자를 통해서 안/밖이 구분돼요. 안 또는 바깥이 선지자를 통해서 갈라집니다.
선지자의 위치에 대해서 쉬운 예를 들면 연극무대의 세트장을 생각하면 되겠죠. 앞에 연극무대가 있고 뒤에는 세트장이 있잖아요. 세트장에는 일반 사람들은 못 들어가죠. 관계자 외에는 출입금지이죠. 연극무대에서 연출되는 것은 무엇의 도움을 받아야 되느냐 하면 세트장 뒤에 있는 여러 가지 장치들이 있잖아요, 장치들의 도움을 받아서 여기 연극무대가 이루어집니다.
그러면 연출되는 연극이 현실입니까, 아니면 세트장 뒤에 있는 장치가 현실입니까? 어느 게 현실이죠? 상당히 답변하기 곤란해요. 뒤에서 도와주고 있잖아요, 뒤에서. 뒤에서 “야, 이번엔 옷 바꿔. 배경 바꿔.” 뒤에서 도와주고 있다고요. 뒤에서 도와줘서 연출되는데 사람들은 연출된 걸 보거든요. 이걸 픽션(fiction)이라 그래요, 조작된 것. 조작된 것이죠. 조작된 것을 현실이라고 아무도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그럼 이 조작된 것을 조작한, 세트장 뒤에 있는 널부러진 그러한 여러 가지 잡다한 기계들이 현실입니까? 그건 혼돈이죠. 아무 정리정돈 안되어 있으니까.
그래서 선지자는 한계와 경계선에 딱 서 있을 때에 사람들은 선지자를 보고 뭐라고 오해하느냐 하면 ‘선지자 너머에 하나님 있다.’ 이렇게 오해해요. 이게 오해입니다. 연극무대를 마저 이야기한다면 연극무대에서 이 세트장 자체가 가짜에요, 가짜. 가짜입니다. 뒤에 있는 것도 연극의 시나리오가 아니잖아요. 널부러진 잡다한 그런 기계라든지 여러 가지 옷 같은 게 무슨 연극거리, 구경거리가 되겠어요? 가짜죠.
그런데 가짜가 있어야 진짜가 생기는 거예요. 진짜가 나타나야 가짜가 규명되는 것이 아니라 가짜가 나타나야 진짜가 규명되는 겁니다. 가짜가 나타나야. 바로 선지자가 자기가 하나님의 종으로써 말씀을 할 때 사람들은 그 선지자의 말을 듣겠어요, 안 듣겠어요? 안 듣습니다.
왜냐하면 자기와 똑같이 생긴 인간이기 때문에. 하나님 모습이 아닌 똑같은 인간이기 때문에. 어디서 구라야? 어디서 가짜야? 이렇게 되죠. 네가 주장하는 것은 하나의 의견으로 듣지만 너에게 전적으로 의지하지는 않겠다,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선지자가 나타내는 기능은 뭐냐 하면 이 세상 전부가 가짜라는 사실을 규명하는 겁니다. 왜 세상이 가짜냐? 선지자가 딱 등장하면 선지자를 가짜로 보기 때문에. 그런 능력밖에 인간은 없어요.
지금 한계가 있잖아요, 한계. 그 한계를 넘어서면 진짜가 나온다고 사람들은 생각하는데, 한계 이전에 한계 앞에 있는, 한계에 도달하지 못한 것이 한계 자체와 일치됩니다. 이것은 어떤 선지자가 와도 인간은 하나님한테 막혀있다, 그걸 제가 지금 말씀드리는 거예요. 어떤 선지자가 와도 인간은 막혀있는 거예요. 그리고 그 기능을 위해서 선지자가 있는 겁니다. 보기는 보아도 깨닫지 못하기 위해서 하는 겁니다.
그럼 절대자는 언제 나타나는가? 절대자가 나타난 순간을 제가 말씀드릴게요. 절대자가 나타나는 순간은 내가 나에게 깜빡 속았다고 느껴질 그 순간입니다. 내가 나에게 깜빡 속은 거예요. 그만큼 인간들은 그 어떤 것도 판단해서 어떤 선지자, 어떤 주의 천사가 온다 할지라도 천사의 말보다 내 말을 우선적으로 절대 신뢰하기 때문에 내가 나한테 안 속아 넘어가려고 애쓰기 때문에 나에게 납득이 되는 이야기를 해줄 때만 천사나 뭐에 대해서 동의할 준비가 되어 있어요.
그렇게 함으로써 천사의 말 듣고 주의 말씀을 듣고 예수님의 말씀 듣고 성경을 보면서 계속해서 굳어지고 굳어지는 것은, 역시 나는 총명해, 나는 역시 오늘도 안 속아 넘어간 걸 다행으로 여겨, 이겁니다. 오늘도 난 속아 넘어가지 않은 것을 자기의 성공, 승리라고 여기는 겁니다.
아까 한 걸 다시 이야기해볼게요. 다른 말로, 진짜가 가짜를 낳는 것이 아니라 가짜가 진짜를 낳는다 이 말입니다. 이 말은 뭐냐 하면 사람들은 아무리 선지자가 와도 선지자의 그 존재의 비중과 선지자를 바라보는 자기의 비중, 자기의 무게 중 어느 쪽을 더 중요시여기겠어요? 나죠. 나입니다.
그래서 ‘아, 저 선지자는 진짜 같아.’ 할 때 여전히 그 사람은 자기한테 안 속고 있는 순간이에요. ‘진짜 예수님은 진짜 예수님 같아. 나 예수님 믿을래.’ 이 사람은 아직도 연극하고 있는 거예요. 이 연극하고 있는 나만이 진짜고 나만이 진짜 참된 현실인 것을 도와주기 위해서 보조하기 위해서 주께서 십자가 피 흘렸다고 보는 거예요. 내가 아는 한계 너머에 계신 분이 나한테 와서 “너는 진짜야. 너는 진짜 신앙인이야.” 라고 알려줬다고 흐뭇해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런 지식을 가지고 신앙이라고 이렇게 왜곡되게 생각하죠. 지식인데...... 자기 검정을 통과했잖아요, 자기 검정. 자기 검정을 통과해서 ‘아, 진짜 예수님은 믿을만해.’ 이럴 경우에 예수님이 믿을만합니까, 자기 점검이 믿을만한 거예요? 어느 쪽이에요? 예수님을 검정했던 자기 증거는 여전히 아직까지 실효성 있다고 보는 거예요. 아직까지 듬직하다고 지금 자부하고 있는 거예요.
수학의 노벨상이라 하는 필즈상을 받았던 허준이라는 사람이 있어요. 그 사람이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나는 수학 빼놓고 다 잘한다.”고 했어요. 나는 수학 빼놓고 다 잘한다. 이걸 선지자의 말로 패러디하면 이렇습니다. “나는 하나님 빼놓고 다 안다.”
그런데 사람들은 어떤 선지자를 선지자로 보느냐 하면 다른 건 몰라도 하나님을 잘 알면 선지자라고 해서 자기가 선지자로 받아들이는 그 검정, 테스트를 통과해서 내가 믿을만한 선지자라고 수용할만한 대상이라고 보는 겁니다.
참 이게...... 뭐냐 하면 죄의 실효성 문제에요, 죄의 실효성. 죄의 실효성은 무엇 때문에 있어야 되느냐 하면, 죄가 죄다워야 하는 이유가 뭐냐 하면 죄의 실효성이 없으면 죄 사함의 실효성도 없게 돼요. 죄가 제대로 실효적이지 않으면 죄 사함이 하나의 위로가 돼버려요. 위로가 되고 아무 비현실적인 그냥 동화이야기가 되는 겁니다.
죄 사함이 실효적이 되려면 죄가 실제로 죄이어야 해요. 실제로 죄이어야 하는 겁니다. 실제로 죄에 대해서는 이미 성경에서 분명히 하나님께서 쉽게 언급을 해줬습니다. 선과 악을 아는 지식, 이게 죄잖아요. 따먹지 말라한 것을 따먹은 것이 죄잖아요.
그러면 선과 악을 아는 지식은, 현재 상황이 ‘따먹지 마라’ 상황입니까, ‘따먹었다’ 상황입니까? 따먹었다 상황이죠. 그러면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는 주님의 안목, 주님의 시선으로 볼 때에 우리가 구원받고자하거나 뭐 어떻게 성경을 연구하는 자체가 뭐가 돼요? 그게 죄의 실제성이에요. 죄의 현실성을 말하는 겁니다. 구원받고자하는 것과 어떻게 하면 내가 구원받을 수 있는가, 하는 전부다 이게 죄에요.
죄는 종류가 문제가 아니에요. 죄는 질적인 문제입니다. 죄는 질적인 문제에요, 죄는. 그러면 본인이 죄인 것도 모르고 노력한 그것은 가상히 여겨 달라, 이렇게 나올 때 죄의 실효성에 인간이 합치가 안 되죠. 일치가 안 되잖아요. 그러니까 자기가 죄인인 것도 모르면서 난 이런 이런 종류의 죄는 안 지었다, 이건 아니에요. 죄의 질적인 문제거든요.
죄를 어떻게 짓는다는 것은 질적으로 이미 죄를 지을 수밖에 없어서 죄를 낳는 거니까, 그런 종류가 나오니까 인간은 종류 따라서 구분한다는 것이 의미가 없는 거예요. 쉬운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빨간색과 노란색과 파란색 크레파스의 공통점이 뭡니까? 상당히 어려운 문제인가요? 모두 다 파라핀이라는 거예요. 재료가 동일하다는 거예요. 색깔이 문제가 아니고 빨간색을 내든 파란색을 내든 전부 다 똑같이 파라핀으로 만든 인공물이잖아요.
경우에 따라서 이런 죄, 저런 죄 나오겠지만 똑같이 죄인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죄의 실효성에 대해서 죄인인 인간이 아무리 노력해도 죄의 실효성에 접근을 못하죠. 왜냐하면 스스로 죄라고 규정할 수 있을 것 같으면 이미 그 사람은 죄인이 아닙니다.
예수님? 내가 믿을게. 선지자? 인정해줄게. 이건 누구의 검증을 통과해야 돼요? 본인의 검증을 통과해야 자기가 수용하겠다는데 본인 자체가 죄인인데 죄인이 믿는 예수님은 가짜죠. 죄인이 인정하는, 죄인이 동의하는 그런 선지자는 선지자가 아닙니다.
그래서 한계 너머 뭐가 있는 것이 아니고 한계 너머도 한계 이전의 일부에요. 한계 그 자체입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한계 너머를 벗어날 수가 없는 것이 인간의 비극이죠. 저 선지자 너머에 하나님 나라 있고 연극무대 뒤에는 뭔가 연극을 연출하는 현실이 있을 것이라고 누가 이야기합니까. 뒤에 가면 널부러진 장치만 있죠. 앞에 있는 가짜를 만들어내기 위한 장치만 있을 뿐이죠.
그래서 죄의 실효성에 인간은 도달할 수 없습니다. 그럼 주님께서 제시한 것은 뭐냐? 죄의 실효성을 제시한 게 아니고 죄 사함의 실효성을 제시해버렸죠. 그래서 죄 사함부터 시작해야 죄가 나와요. 그 죄 사함의 실효성이 뭐죠? 십자가죠. 십자가부터 출발하는 겁니다.
역시나 십자가 딱 제시할 때 요한복음 6장에서 따르던 모든 사람들이 하나 예외 없이 다 가버리고 남은 자가 없다고 했어요. 다 가버리고 한 사람도 예수님을 따르는 자가 없었다고 되어 있어요, 요한복음 6장에.
한번 볼게요.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그래도 두세 명은 남아있을 거라고 생각하잖아요. 66절, “이러므로 제자 중에 많이 물러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요한복음 6장의 시작은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따르더라, 부터 시작했잖아요. “큰 무리가 따르니” (요6:2) 그런데 요한복음 6장 끝부분에서는, 다시는 그와 함께 있지 아니하였다.
그럼 도중에 사람들이 함께 다닌 이유와 떠난 이유가 다 나옵니다. 함께 다닌 이유는, 저분은 우리의 선지자다. 저분은 우리의 왕이다. 이런 기적은 행한 사람이 없다. 예수님 가는 곳에 바다 건너 산 건너 물 건너 막 따라왔죠. 따라올 때 그 마음가짐이 뭐냐? 인간들의 자기 검정에 의하면 예수님은 메시아 맞고 예수님은 하나님이 보내신 분 맞다, 라고 생각했던 거예요, 그들이. 이게 인간의 본성이고 안에 내재되어 있는 내부의 성질이죠.
그럼 우리는 어떻습니까? 그들과 다른 성질이라고 우길 수 있습니까? 없죠. 인간은 떠나는 것이 당연하다는 결론이 요한복음 6장에서 예수님의 결론입니다. 인간은 떠나야 되는 거예요. 그래서 이제는 남아있는 누구보고 떠나라 합니까? “가! 열두 제자. 너희도 가! 가지 왜?” 이렇게 물었잖아요.
베드로가 자기가 무슨 말하는지도 모르고 뭐 “영생의 말씀이 계신 분을 어떻게 떠나겠습니까. 우리는 주님을 점검해서 떠날 분이 아니란 것을 알았습니다.” 라고 이상한 소리하는데 예수님은 그게 아니고 아버지께서 내게 오지 아니하면 아무도 올 수 없다. “내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지 아니하시면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없다 하였노라 하시니라” (요6:65)
아버지께서 내게 올 때까지 너희들도 결국은 말끔하게 주님 곁을 떠나야 되는 거예요. 왜 떠나야 되는가? 인간은 안 속으려고 하기 때문에 그래요. 인간은 자기한테 안 속아 넘어가려고 하기 때문에. 최종 믿는 것은 하나님도 아니고 예수님도 아니에요. 자기 결정을 믿는 거예요. 자기 쌓아놓은 지식과 실력을 믿는 겁니다.
그렇게 어느 누구도 예수님을 믿을 수 없게 될 때, 그 순간이 인간에게는 하나님이 오셔도 하나님을 돌려보내는, 거부하고 배척하는 세상이죠. 그게 바로 최후의 순간이에요. 인류 최후의 순간입니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에 핵폭탄 터트리는 순간이 최후의 순간이 아니고, 인류 최후의 순간은 하나님이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서 와도 인간이 거부했다는 것이 들통나는 순간이 인류 최후의 순간입니다. 우리는 그중의 한 사람이고요.
따라서 인류 최후의 순간을 캡쳐해봅시다. 캡쳐해보면 이것이 인간세계의 한계가 되겠죠. 인간의 한계죠. 인간의 한계를 아까 처음에 뭐라 했습니까? 이게 누구라고요? 인간의 한계는 선지자에요, 선지자.
그래서 선지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혼절이 났다고 다니엘 8장에 나옵니다. 기절했어요. “이에 나 다니엘이 혼절하여 수일을 앓다가 일어나서 왕의 일을 보았느니라 내가 그 이상을 인하여 놀랐고 그 뜻을 깨닫는 사람도 없었느니라” (단8:27) 기절할 때 다니엘 선지자가 무엇 때문에 기절했는가 보니까 인간 세상의 전쟁이야기 계시 듣고 예언 듣고 기절했어요. 이 세상에 전쟁이 일어난다는 거예요. 그걸 듣고 기절한 겁니다.
그럼 다니엘이 하나님께 무슨 이야기를 듣고 싶어서 그것이 쇼킹한 충격적인 이야기였는가? 다니엘 역시 인간의 역사가 고요하고 평화롭고 그냥 안정되기를 바란 거죠. 그런데 인간이 멸망할 때 전쟁으로 멸망한다는 소식을 듣고 다니엘은 그걸 현실로 받아들인 거예요. 이게 바로 다니엘이 보여줬던 신앙인의 모델입니다.
신앙이란 말씀의 세계를 유일한 현실로 보는 게 신앙이에요. 말씀의 세계를 유일한 현실로 본다면 기존에 주님을 배척한 이 세상은 현실이 아니죠. 이 세상은 현실이 아닌 게 된다고요. 이 세상은 현실이 아니에요.
다니엘은 이 세상에 살았는데 주님의 예언된 말씀이 와버리니까 이 세상에서 신앙으로 옮겨가버린 거예요. 옮겨가면서 이 세상현실은 현실이 아닌 게 되어버렸어요. 그러니까 이 현실세계가 가짜가 되어버린 겁니다. 진짜는 말씀에 있고.
그러면 이 (세상의) 현실세계에 다니엘이 있었잖아요. 그럼 이 말은 아까 제가 한 원칙, 인간이 자기한테 속았다는 사실을 아는 순간 이게 절대자가 임한 순간이에요. 인간이 자기에게 속았다는 것, 다니엘이고 누구고 모든 인간이 현실에 속은 거예요. 자기가 현실의 일부니까 내가 나한테 속은 거예요.
그래서 신앙이라 하는 것은 현실에서 만들어질 수가 없어요. 그러면 신앙은 어디서 생기는가? 신앙은 말씀, 선지자니까 예언이라 합시다, 예언으로부터 생성되는 거예요. 신앙이라 하는 것은 자기가 못 만들고요. 말씀이 우선되고 절대적인 말씀이 들어와버리면, ‘아, 이 말씀이구나.’가 아니라 그 말씀이 들어온 순간에 ‘왜 나는 그동안 내가 나한테 속았지?’라는 생각이 우선적으로 드는 거예요, 우선적으로. 그래야 이 말씀을 받을 그릇이 돼요. 뭐 그전에 이미 그릇이 됐지만 말씀이 들어옴으로 말미암아 내가 나를 붙잡고 붙들고 살려고 했던 거예요. 내가 나를.
그러면 신앙의 세계는 말씀이 들어오게 되면 이렇게 요약해서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신앙이란 무엇인가? 신앙은 극단적인 피동성. 피동성인데 어느 정도로? 극단적인 피동성. 가라하면 가고 오라하면 오나이다. 극단적인 피동성이에요.
내가 나설 게 아무것도 없고 말씀에서는 용납을 안 해줘요. 내가 그 말씀 지키겠습니다, 를 말씀세계가 용납을 하지 않아요. 내가 말씀을 실천에 옮기겠습니다, 이 자체를 말씀세계에서 용납하지 않아요. ~하겠습니다, 는 피동성이 아니고 능동성이기 때문에. 내 쪽에서 나오는 능동성이라는 것은 내가 가치 있어줘야, 이 가치 있는 내가 설칠 때 뭐 가치 있는 것도 나온다, 이게 능동성이란 말이죠. 그래서 극단적인 피동성이 계속 피동성으로, 이 현실세계 속에 말씀이 운동하고 말씀이 작용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그 작용하는 이러한 피동성의 원천 또는 피동성이 생성되는 원천, 인간세계 속에 인간이 생각하는 현실 속에서 극단적인 피동성은 어디서 찾을 수 있습니까? 바로 혼절한 다니엘, 그리고 자기 몸을 묶어버리는 에스겔, 3년 동안 벌거벗고 애굽에 가서 예언한 이사야, 구덩이까지 들어가서 예언한 예레미야, 이 선지자들의 특징을 한번 보세요. 요나 같은 경우도 마찬가지고 한 마디로 말해서 극단적인 피동성이에요.
극단적인 피동성의 특징은 더는 내가 나를 속일 형편이 못 된다는 것을 아는 거예요. 그냥 하나님 앞에 항복하는 거예요. 더 이상 내가 나를 꾸미거나 조작할 수가 없는 겁니다. 그래서 이런 사람들은 극단적인 피동성이니까 본인이 주체입니까, 주체 아닙니까? 주체 아니죠. 주체 아니니까 자기를 이렇게 만든 그런 주님이나 하나님을 소개하겠죠.
소개하게 되면 선지자 앞에 있는 일반 사람들이 이 선지자를 선지자로 인정하겠습니까? 인정 안하죠. 왜? 인간은 한계 밖의 한계를 인정 못 하기 때문에. 그래서 이 선지자에게, 예수님한테 한 것처럼 똑같이 욕하고 공격하고 비난하는 거예요.
그 대신 그들이 양산하는 것은 거짓 선지자들이죠. 많이 깔아놓죠. 이적과 기사, 데살로니가후서에 보면 나와요. “악한 자의 임함은 사단의 역사를 따라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과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멸망하는 자들에게 임하리니 이는 저희가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여 구원함을 얻지 못함이니라” (살후2:9-10) 인간들이 원하고 있는 것들을 이야기하면서 자기를 선지자로 받아들일 것을 은근히 압박하는 자들, 그런 자들이 많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마지막 때 적그리스도가 한 명이 아닙니다. ‘적그리스도들’로 되어있죠. 요한일서에 보면 많은 적그리스도들이 등장하죠. “아이들아 이것이 마지막 때라 적그리스도가 이르겠다 함을 너희가 들은 것과 같이 지금도 많은 적그리스도가 일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마지막 때인줄 아노라” (요일2:18)
선지자와 이런 말씀의 만남 또는 주님의 만남은 나를 흔드는 만남입니다. 노사연의 그런 만남 아닙니다. 우리 만남은~ 그런 만남 아니고 나를 흔들어버리는 만남. 나를 희석시키는 나의 흔적을 제거해버리는 만남.
그래서 선지자에게 이 순간은 최후의 순간입니다. 항상 최후의 순간이에요. 최후라 하는 것은 최후를 내가 결정하는 게 아니기 때문에 최후라고 해서 ‘아이고, 안타깝다. 어쩌나.’라고 할 수 있는, 그렇게 감정을 표할 수 있는 주체 자체를 하나님은 인정 안 해요.
최후는 주의 말씀이 만나는 순간 최후가 되고 그 최후 앞에서 나는 이 가짜 중에 한 사람으로서 들통이 나는 순간이죠. 그것도 매일같이. “나는 가짜다.” 이런 식으로 매일같이 가짜로 들통 나고 나는 매일같이 나를 속이는 전문가로서 내가 살아왔음을...... 하루를 살면 또 하루 동안 나를 속이는 전문가로 살아왔다는 것을 자인하는 순간순간이 선지자에게는 바로 그 순간이 지금의 순간입니다. 그래야 극단적인 피동성이 유지가 되고 그렇게 유지가 되어져야 오직 말씀만 증거되는 거예요. 말씀만.
사람들이 선지자에 대해서 오해하고 있는 이유는, 왜 자기가 자기한테 안 속아 넘어가려고 발악을 하느냐? 그것은 이미 선악체계가 턱하니 자리 잡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인간들이 생각하기에 선악체제 자체에 하자가 없고 문제가 없다고 자부하고 있어요. 선한 걸 선하다 하고 악한 걸 악하다 하는데 이게 뭐가 잘못 됐느냐?
그래서 인간은 다른 생각을 못하는 거예요. 어떤 경우, 어떤 사건이 일어나도 선악체계로 전부다 분석이 가능하다고 자신만만하기 때문에 선악체제 자체를 문제 삼을 수 없죠. 그러니까 선악체제 말고 다른 대안이 있다고 생각합니까, 없다고 생각합니까? 없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다른 대안이 없어요. 선지자가 오든 예수님이 오든 전부다 자기 선악체계에 의해서, “보자, 내가 한번 평가해볼게. 판단해볼게.” 이렇게 나온다고요.
그래서 지금까지 한 것을 이렇게 하나로 요약하면 됩니다. 신성, 하나님이죠, 하나님에 대한 가장 큰 모독은 하나님께서 끊어놓은 것을 인간들이 이어보고자 할 때 생성됩니다. 아까 생성이라 했죠? 생성. 자, 믿음이 뭐라 했습니까? 믿음은 무엇의 생성이라 했습니까? 믿음이라 하는 것은 말씀이 주체가 되어서 생성하는 거죠. 인간도 뭘 생성하느냐? 하나님과 자기가 끊어졌다는 이 사실을 인정하기 싫은 거예요. 끊어진 것을 이어보려고 할 때 인간들은 생성하는 겁니다.
방금 한 이야기를 함축해서 보면 신앙이 끊어진 것을 신앙을 동원해서 잇고자 하는 이것이 인간세계에서 통하는 신앙이라고 우기면서 그렇게 주장들을 하고 있어요. 하나님이 끊어놓은 것을 인간이 신앙으로 이어보려고 하는 이것이 하나님에 대한 가장 큰 모독이에요. 끊은 것인데, 끊으면 끊은 건데 이어보려고 하는 거예요.
이걸 마태복음 9장에 보면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는데 (마9:17) 옛 부대, 선악체제죠, 옛 부대에 미련이 있어서 여기에다 예수님의 소식을 선악체제에 짜맞추어서 그걸 집어넣고 이걸 신앙이라고 하는 이 자체가 바로 하나님에 대한 모독인 거예요.
그걸 집어넣을 때 삼위일체 이론, 성육신 이론, 십자가 이론, 언약 이론 다 들어갑니다. 왜? 왜 그걸 집어넣습니까? 무엇이 안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까? 어떤 경우라도 나는 그동안 깜빡 내가 나한테 속았다는 그 사실, 그렇게 속았다는 것을 고백할 능력 자체가 없기 때문에 어쨌든 간에 하나님과 자기를 이어보려고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혼절하지 않고 정신이 말짱하죠. 선지자는 기절했는데, 기절할 필요 없죠. 기절 왜 하나? 성경공부하면 될 걸 가지고 기절을 왜 해. 이상한 사람들이네.
이렇게 되니까 아까 시작을 뭐라 했습니까? 죄가 무엇인가부터 하는 게 아니고 죄의 실효성부터 하는 게 아니고, 죄 사함의 실효성부터 주님께서 오셔서 성취해버려요. 완료를 해요. 업무를 종료시켜버립니다, 죄 사함에 대해서. 드디어 죄 사함에 대해서 더 추가적인 제사는 남아있지 않습니다. 그 말은, 끝냈다는 거예요.
차가 고장 나서 정비소에 맡겼는데, “사흘 뒤에 찾아오세요.” 사흘 뒤에 찾으러 가니까 주인 보기에 뭐 고친 것도 없어요. “좀 고치라 했는데 왜 안 고쳤습니까?” “종료되었습니다. 다 고쳤습니다. 고물인데, 원래 고물이에요. 원래 고물을 고물답게 하는 게 우리 정비소의 주특기입니다. 다른 정비소, 이 세상 어느 정비소도 못하는 겁니다.” 철저히 고물을 고물답게 만드는 것, 가다가 덜렁거리면서 타이어 두 개씩 빠져버리고...... 그게 고친 거예요.
고쳤다는 것은 인간에게서 나오는 건방짐이죠. 끊어졌으면 끊어진 대로 살아야지. 끊어진 것을 고치겠다는 그 의도 자체가 하나님에 대한 모독입니다. 예수님을 보낸 주님의 조치에 대한 모독이에요. 그래서 그런 노래 있잖아요. 끊어진 것은 끊어진 대로~. 뭐 그런 노래는 없습니다만. ‘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죠. 끊어진 것은 끊어진 대로 그런 의미가 있죠, 뭐 그렇게 살아가는 거예요.
선지자의 속성이라는 것은 한마디로 말해서 선지자는 언약에 의해서 그런 속성을 가진 거예요, 언약에 의해서. 그래서 진짜 선지자치고 자진해서 선지자 될 사람 아무도 없었습니다. 난입하는 거죠.
그래서 만남은 뭐라 했습니까? 만남은 어떤 만남? 나를 흔들어버리는 만남. 흔드는 만남. 나를 소실시키는 만남. 나를 흔든 만남의 결과가 뭐냐 하면 극단적인 피조성이에요. 여기에는 어떤 목적의식도 용납되지 않고 기대심리도 용납되지 않습니다. 앞길, 미래, 희망 다 인정하지 않습니다.
극단적인 피조성이에요. 어디를 가든지 어디로 몰고 가든지 그건 내 소관이 아니죠. 왜냐하면 나는 이미 흔들림에 의해서 갈기갈기 다 해리되었기 때문에 산산이 다 찢어졌기 때문에, 내 속에 침투한 그분의 말씀과 그분의 예언이 나를 주도하고 지배하고 있습니다.
날마다 우리가 느끼는 것은 이런 말씀을 판단했던 그 체계, 선악체계 그것이 악했다. 나빴다. 따라서 내가 나빴다. 판단하겠다는 것, 주의 말씀을 판단해서 내가 잘 되어보겠다, 내가 다음에는 그런 실수 두 번 다시 안 하겠다는 그 판단 자체가 그것도 목적이잖아요. 그것은 하나님께서 용납한 적 없습니다.
왜 이렇게 하십니까? 왜 하나님께서 이런 식으로 자기 백성을 다루십니까? 물으면 아까 그 해답은 제가 제시했어요. 죄 사함의 실효성 때문에 그래요. 죄 사함의 실효성. 이 죄 사함의 실효성이기 때문에 이런 식으로서는 실효성이 없어요. 내가 죄를 알고 내가 죄를 씻어줄 분을 찾아서 결합시켜서 죄 사함에 도달하는 이런 가짜는 천국에서 안 받아줍니다. 안 받아줘요.
여러분들이 한국 교회 목사들 설교할 때 바로 이것을 부정하는가를 한번 살펴보세요. 이것을 부정하는지 안 그러면 긍정하는지. 여러분은 죄인입니다. 여러분 죄를 위해서 예수님 오셨습니다. 예수 믿으면 구원받습니다. 이런 식으로 하게 되면 실효성 없거든요.
왜 실효성이 없는가? 여기에 뭐가 개입되느냐 하면 선악체계가 그대로 살아있어요, 선악체계가. 선악체계가 부정당하지 않고 그대로 살아있어요. 죄라는 것도 선악체계에 입각한 죄의 개념을 끄집어내고 있는 거예요. 이런 시도 자체가 죄라는 것, 그것을 모르죠.
인간은 이렇게 있는데 하나님 보시기에 자기가 시커먼 죄인이라는 거예요. 이게 싫다는 거예요. 내가 죄인 되는 것을 왜 싫어합니까? 아니 더 나아가서 물읍시다. 극단적인 피동성이니까. 내가 지옥 가는 것이 왜 내가 싫죠? 내가 지옥 가는 것을 왜 내가 싫어하느냐? 그 싫어하는 이유가 뭐냐? 그 해답 알고 있습니까?
그걸 이번 수요설교 식으로 해답을 내린다면 인간은 본인이 뭘 믿고 있지 않은지를 몰라서 그래요. 인간은 뭘 안 믿습니까? 나는 절대로 나를 믿어서는 안 되는 것을 안 믿고 있는 거예요. 이래 말하나 저래 말하나 안 믿기는 마찬가진데......
인간은 가장 중요한 것을 빠뜨리고 있는 겁니다. 도저히 나는 내가 믿을 대상도 아니고 믿을 내용도 아닌 것을 본인이 믿지를 못하는 거예요. 누가 그렇게 만들었어요? 마귀가 그렇게 만들었죠. 마귀가. 이건 아무 실효성 없습니다.
그럼 주님께서 어떻게 하느냐? 죄 사함의 실효성을 증명하는 용도로, 이것을 증거하기 위해서 주님께서는 죄 있다고 우기는 인간을 부른 게 아니고 그냥 죄인으로서 부른 거예요. 죄인으로서.
누가복음 한번 보겠습니다. 말을 끝까지 들어야 돼요. 중간에 들었다가는, 아 그 이야기구나, 하는데 그런 뜻 아닙니다. 누가복음 4장 25절 끝에 보면 “이스라엘에 많은 과부가 있었으되” 이스라엘에 많은 과부가 있었어요. 있었는데 26절에 봅시다. “엘리야가 그 중 한 사람에게도 보내심을 받지 않고 오직 시돈 땅에 있는 사렙다의 한 과부에게 뿐이었으며” 한 과부 뿐이었다는 거예요.
나는 과부다. 인생 팔자 더럽게 되었다. 주께서 불쌍히 여겨주겠지, 그런 사람을 부르러 온 게 아니에요. “여기 자기가 스스로 불쌍히 여기는 사람 다 와.” 이게 아니고, 반대로 “오지 마!” 오지 마. 과부라는 그 조건이 구원받는 데에 전혀 상관없어요. 오지 마.
그 오지 마라는 것. 나한테 오지 마라는 것을 그 사람들이 진실로 하나님의 뜻이, 과부라는 이유 때문에 불쌍하니까 불쌍한 것 받아주니까 “저 과부입니다. 불쌍합니다. 먹고 살기 힘들어요. 그러니까 하나님 저 찾을 거죠?”라고 할 때 “오지 마!”라는 그 증거로 선지자 기능을 하는 사렙다 한 과부가 그들에게 등장한 거예요.
그러니까 사렙다 과부가 “엘리야 나한테 왔는데?”하니까 다른 사람들은 그 사실을 믿겠어요, 안 믿겠어요? 안 믿죠. 왜냐하면 너한테 찾아갈 그러한 합리적인 기준이 모호하다는 겁니다, 합리적인 기준이 모호하다.
출애굽할 때 열 가지 재앙이 있었거든요. 열 가지 재앙이 있었는데 그 열 가지 재앙 중에 바로가 자꾸 모세하고 흥정을 해요. 딜을 합니다. “너희들이 여호와께 제사한다고 나간다는데 나가지 말고.” 많이 맞았어요. 하도 많이 맞고 난 뒤에 “좋아. 제사 드리되 나가지 말고 애굽 땅에서 제사 드려.”라고 한 대목이 출애굽기 8장 25절에서 26절에 나옵니다.
보겠습니다. 네 번째 재앙이 있은 이후에, “바로가 모세와 아론을 불러 이르되 너희는 가서 이 땅에서 너희 하나님께 희생을 드리라 모세가 가로되 그리함은 불가하니이다” 이 땅에서, 나가지 말고 이 땅에서 제사 드리라 하니까 “우리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희생을 드리는 것은 애굽 사람의 미워하는 바이온즉 우리가 만일 애굽 사람의 목전에서 희생을 드리면 그들이 그것을 미워하여 우리를 돌로 치지 아니하리이까”
이게 합리적인 생각이에요. 왜냐하면 재앙을 누가 내리느냐 하면 여호와가 내리거든요, 모세를 통해서. 재앙을 내렸다는 말은 하나님 보시기에 애굽 사람들은 인간 같지도 않다는 뜻이에요. 그리고 재앙을 내린 그 하나님에 대해서 애굽 사람들은 다 미워하고 싫어해요. 그런데 그 하나님, 애굽의 대부분 사람들이 다 싫어하는 하나님을 그들이 보는 앞에서 내가 만약에 “찬양을 드립니다. 일 조치 참 잘 하셨습니다.”하고 찬양해버리면 그들이 돌멩이 가지고 멀리 있는 여호와까지는 못 던지고, 힘이 없어서...... 누구한테 던지겠어요? 여호와께 제사하는 히브리인들을 돌 던져 죽이겠죠.
바로 그 꼴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와서 당했던 그 모습이에요. 너나 나나 다 같이 선악체계 가진 똑같은 인간인데 하나님이 그렇게 차별할 일은 없다 이 말이죠. “네가 뭐 별나고 뭐 대단한데 왜 너에게만 구원이냐? 같은 종류의 인간 같으면. 네가 우리보다 잘났어?” “안 잘났어.” “뭐 훌륭해?” “안 훌륭해.” “그런데 왜 하나님이 너만 찾아와? 에이, 죽어라. 인간아. 그러니까 너는 가짜야. 너는 죽어도 우린 벌 없어. 왜? 너는 가짜기 때문에.” 나만 하나님이 챙긴다는 가짜이기 때문에 죽여버린 거예요. 예수님이 당했던 그 모습이죠.
이걸 제가 왜 설명하느냐 하면, 이걸 왜 찾아보느냐 하면 그래서 언약이 생성되기 때문이에요. 언약은 그런 가운데 생성돼요. 언약이라는 게. 언약은 우리가 믿을 수 있는 게 아니에요. 언약은 사건입니다. 특이한 사건이에요. 인간이 갖고 있던 선악체계와 모든 지식체계를 총동원해도 설명이 안 되는 사건이에요. 설명될 수 없는 사건이에요. 그게 또 마땅하고요.
그리고 제가 아까 처음에 한 것처럼 언약 사건은 어떤 순간에 찾아왔다고 느껴지는가? 내가 나한테 깜빡, 깜빡이 아니죠, 평생 동안 내가 속아왔구나. 내가 나를 지킬 대상이 안 되는데 어떤 일이 있어도 그냥 나만 지키면 인생 선방했다고 우겼던 그 모습자체가 이게 진짜 악마한테 속임을 당했기 때문에 그렇다, 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자, 그러면 지금부터 이야기할 것은 그 생성되는 신앙. 신앙의 근거지. 신앙의 근거지는 뭐냐 하면 선지자 출현의 근거지가 되겠죠. 신앙의 근거지=선지자 출현의 근거지, 원천. 창세기 48장 15절에 나옵니다. 요셉의 이야기가 나오죠. 요셉이 형들 앞에서 이야기합니다. 거기 15절, 16절에 나와요. “그가 요셉을 위하여 축복하여 가로되 내 조부 아브라함과 아버지 이삭의 섬기던 하나님, 나의 남(태어남)으로부터 지금까지 나를 기르신 하나님”
자, 아까 우리가 들었던 용어 한번 적용해봅시다. 극단적인 피동성. 극단적인 피동성의 뜻은 시작점, start에서 ‘나’가 빠져있다는 겁니다. 내가 빠져있어요. 착한 나가 빠져있어요. 당연히 악한 나도, 선악이니까 착한 나도 빠지고 악한 나도 빠져버려요. 지금의 내가 나 된 것은 나 빠지고 다른 분에 의해서, 언약이죠, 다른 분에 의해서 지금 생성된 거예요. 생겨난 거예요. 그게 극단적인 피동성이에요.
그냥, 하나님이 주신 거니까 앞으로 잘 하겠습니다, 이게 아니고 끝까지 그 피동성을 유지하는 것. 내가 이렇게 했더니만 하나님께서 도와줬다, 이것도 아니에요. 기도했더니만 응답받았다, 이것도 아니에요. 극단적인 피동성이에요.
그 시작점과 끝점에 대해서 내가 모른다,가 아니라 내가 몰라야 된다는 피동성. 내가 몰라서 안타깝다,가 아니라 너는 빠지라는 그 지시가 함께 들어있는 것이 언약의 내용입니다.
16절에 “나를 모든 환난에서 건지신 사자께서 이 아이에게 복을 주시오며 이들로 내 이름과 내 조부 아브라함과 아버지 이삭의 이름으로 칭하게 하시오며 이들로 세상에서 번식되게 하시기를 원하나이다”
보통 문제가 아니에요. 벌써 2분 지났다. 피동성에 따르다보니 이런데...... 여기까지, 15절까지 하고 10분 쉽시다.이것도 피동성 입니다.
광주강의20220923b 민수기6장 5절(나에게 속기)-이 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 하겠습니다. 창세기 48장 15절에서 요셉이 지금 겸손해서 하는 이야기가 아니에요. 있는 사실 그대로입니다. “내 조부 아브라함과 아버지 이삭의 섬기던 하나님, 나의 남(태어남)으로부터 지금까지 나를 기르신 하나님”이라 해서 하나님을 주체로 내세워버렸죠. 그러면 자기는 주체가 아니죠. 자기는 극단적인, 그냥 피동적으로 움직이는 피조물에 해당되기 때문에.
“나를 모든 환난에서 건지신 사자께서” 그다음에 쭉 나오는데 15,16절은 뭐냐 하면 하나님께서 나에게 일어나는 일을 그대로 형들에게도 일어나게 하셨습니다, 라고 이야기합니다. 동일한 하나님이기 때문에.
더 쉽게 말해서, 형들 지금 땡잡았어요. 내가 알던 하나님이 이젠 당신들에게 사함의 실효성을 줬다, 혜택을 줬다 이 말입니다. 누굴 보내서? 나 요셉을 보내서. 이게 선지자의 모습이에요. 나한테 주어졌던 혜택이 나로 머물지 않고 형들에게 그대로 전수되었습니다.
그러면 형한테 찾아온 것이나 나한테 찾아온 것이나 우리 둘 사이에 어떤 공통점이 있느냐? 내가 극단적인 피동성을 보이는 것처럼 형들도 나 못지않게 극단적인 피동성을 보여줬어요. 왜냐하면 형들은 동생 미워하는데 열심을 다 했잖아요.
그런데 돌아온 혜택은 뭡니까? 형들은 양식 굶은 것 외에는 별 고생 안했죠? 형들이 옥에 갇히고 뭐 꿈꾸고 안했죠? 그런데 혜택은 어떻게 돌아옵니까? 혜택은 똑같이 돌아왔잖아요. 고생은 직사하게 요셉이 하고 혜택은 형들이 받고.
그럼 형들은 자기 자체적으로 갖고 있는 선악체계를 발휘할 필요가 있습니까, 아니면 없습니까? 이 둘 중에 하나에요. 굉장히 쉬워요. 있습니까, 없습니까? 자체적으로 선악체계를 발휘할 필요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죠. 없으니까 선악체계로 구성된 게 자아인데 자아의 생각과 지혜를 자기의 논리와 자기의 능력을 발휘할 필요가 없으니까 자아는 여기서 필요치 않다는 결과가 나오는 거예요. 역시 형들도 극단적인 피동성의 영향력 안에 잠식되고 말았던 겁니다.
그래도 형들은 굉장히 미안해해요. 나중에 보면 나옵니다. 미안해가지고 쟤가 아버지 죽고 우리 또 괴롭힐까봐 걱정하지만 (창50:15) 그건 아직까지 옛날 습성이 남아있어서 그런 것이고, 그것은 옛날 잔상이 남아있는 거죠. 자기를 위해서 살았던 선악체계의 잔상이 남아서 그런 것이고 실제 돌아가는 모든 형편은 내가 어떻게 생각하든 상관없이 아무것도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요셉이 했던 수고의 혜택을 형들이 다 받아버려요.
그럼 형들은 요셉을 팔아먹었잖아요. 죽으라고 웅덩이에 넣다가 르우벤 맏이가 빼내줘가지고 팔아먹었잖아요. 형들은 단체로 죄인이 되죠. 누구 앞에서? 요셉 앞에서 죄인이 되는 겁니다. 요셉 앞에서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요셉 앞에서 죄인 된 그 경우를 거쳐서 그들은 죄에서 사하심을 받는 실효성을 얻게 된 거예요.
그렇다면 이 사실이 언약 사건이거든요. 여기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언약으로만 일하신다는 것. 흔히 누구나 다 안다고 자부하는 그 이야기 있잖아요. 하나님은 언약을 앞장세워서 일하신다. 하나님은 언약가지고 일하시는 거예요.
하나님은 언약가지고 일하시는데 방금 제가 이야기한 것은 창세기입니다. 방금 창세기거든요. 요셉과 요셉 형. 창세기. 그런데 신약에 오게 되면 이 요셉과 요셉의 형들이 결합되어서 점차 율법이라는 그물을 타고 율법 안에서 이것이 계속 전달되게 되어있어요.
수요일에 제가 언급한 중에서 극히 난해한 이야기를 했었어요. 율법은 인간과 하나님이 결합되어 있다는 식의 언급을 했었어요. 율법은 인간과 하나님이 결합되어있어요. 이 세상은 이 세상 모든 일은 나의 일이 없어요. 인간과 인간들이 결합된 일들이 인간의 일이에요, 모든 일은.
예를 들면, 수요일에도 했고 강남강의에서도 했는데, 아이가 “아빠, 나 이거 하고 싶어.” 할 때 “너 왜 그거 하고 싶은데?” “누가 어떤 사람이 그거 하는 게 참 보기 좋았어.” 그게 뭡니까? 이미 기존 기성세대에 어린 아이가 탐낼만한 것이 이미 구성되어 있잖아요.
그러니까 이 세상은 어떤 일에 실패했다, 성공했다 하는 것은 이미 그 일을 미리 해본 사람들이 이미 있는 거예요. 미리 그 일을 해본 사람이 있다고요. 어떤 사람이 문방구해서 성공했다 하면 나도 문방구 할래, 하면 문방구한 사람이 먼저 있잖아요. 문방구했던 사람이 먼저 있으니까 그 사람 한 일을 나도 그렇게 하면 되겠다 싶어서 했으니까 인간세계는 단독적인 일이 아니고 전부다 개인과 개인, 인간들이 결합된 일이에요.
따라서 한쪽이 망하면 와장창 다 망하게 되어있어요. 한쪽이 망하면. 그리고 내가 실패했다는 게 성립 안돼요. 내가 실패했다는 말은 이 인간세계에 구멍이 뚫렸다는 뜻이고 인간 전체 세상에 문제성이 있다는 겁니다. 이걸 어렵게 해서 나는 타자와 같이 결합되어 있다고 해요. 떨어져 나갈 수가 없어요. 나와 남은 한통속이 되어서 움직입니다. 이것은 내가 누구 탓이라고 할 수가 없게 되어있어요, 인간은. 그 나물에 그 밥이에요. 똑같아요.
주일 낮 설교할 때 그런 이야기했잖아요. 둘이 주먹질하는데 서부영화에서 주먹질하면서 천하의 원수처럼 이렇게 싸울 때 옆에 있는 여자가 보기에 “내가 보기엔 둘 다 똑같다. 어느 반푼이가 아니고서야 둘이 사랑하는 걸 누가 모를까? 어느 바보라도 다 알아. 너희 둘이 너무 좋아한다는 거.”
왜? 다른 사람은 상대하지 않고 그 사람을 상대해서 자꾸 붙고 이야기하는 거 보니까 서로 좋아한다는 거예요. 물어뜯고 뒷담화 하고...... 그게 나는 너를 잊을 수 없다는 일종의 사랑고백 같은 거예요. 욕을 하면서도 싸우면서도 친구 되는 거예요. 싸우면서 친구 되고 그 싸우는 사람 없으면 내 인생이 구성이 안 되는. 내 구성이 심심해져버려요. 미나리도 들어가고 다시마도 들어가고 상추도 들어가고 소고기도 들어간 전주 비빔밥처럼 뭔가 자꾸 섞여서 맛있는 음식이 되듯이 인간세상은 하나입니다.
그런데 율법은 하나님과 인간이 같이 섞여있어요. 물론 인간이라 하는 것은 기존의 인간이 아니고 구원될 자에요. 장차 구원될 자. 백성과 하나님이 하나가 되어서 율법이 주어지죠. 그 율법 속에 있는 나가 세상에 있는 나를 공격합니다. 미래의 나가 현재의 나를 공격하죠. “너 속고 있어, 인간아!” 이렇게 내가 나를 질책하는 거예요. 내가 나를 꾸짖는 거예요. 어디 안에서? 율법 안에서 율법의 소리로서 예언의 소리로서.
요셉과 형들은 둘 다 인간이고 똑같아요. 똑같은데 요셉은 이미 하나님의 죄 사함의 혜택, 예언 안에 말씀 안에 있기 때문에 요셉이 형들을 희생하면서 꾸짖고 있는 거죠. 꾸짖으면서 걱정하지 말라고 하죠. 나를 보낸 것은 하나님이지, 내가 아닙니다. 당신들 복수하려고 내가 온 게 아닙니다. 고개를 드세요, 당당하게. 이런 식으로 이야기한단 말이죠. 하나님께서 당신들 구원하기 위해서 나를 형들보다 앞서 보냈습니다. (창45:5,7)
그게 선악구조에서는 도저히 나올 수 없는 내용이에요, 선악구조에서는. 선악구조는 본인이 신이기 때문에 나의 미래 운명은 내 하기 나름이에요. 내가 어떻게 행동하고 어떻게 처신하느냐에 따라서 내 운명이 결정된다, 이게 선악구조에요.
그러나 언약에서는 아까 형들이 자기 솜씨를 발휘할 수 있는 것은 전부다 차단시켜버리죠. 형들이 요셉에게 사과했기 때문에 용서받았습니까? 아니에요. 내 죄를 알고 나는 사과한다, 이전에 죄 사함이 먼저였어요. 형들이 용서를 구한 것보다.
나중에 형들이 요셉에게 미안해하죠. 하지만 그 미안해하는 것, ‘용서해줘’라는 이야기조차도 그래서 용서받는 게 아니고 죄 사함의 효과입니다. 죄 사함. 이미 구원받았기에 요셉 앞에서 자기 자신이 시시한 존재임을 알게 된 거예요.
시시한 존재라는 말은 아까 첫째 시간에 이야기했죠. 그동안 내가 대단한 존재인 줄 알았다. 다시 말해서 그동안 나는 나에게 속아왔다. 마치 대단한 존재인 것처럼. 선악체계가 다른 대안이 없는 이게 마지막 전부인 줄 알고 있었던 겁니다.
지금 요셉과 요셉 형들의 관계로 제가 창세기 이야기를 했는데 점점 더 율법을 통해서 신약에 가까이 가면서 집중을 어디에 하느냐 하면, 이게 사실은 오늘의 본내용입니다. 여기 본내용부터 봅시다. p.227 보면,【예언의 일관성은, 인간의 신체성이 뿜어내고 있는 원초적 생존의 욕망과 그 육적으로 주변을 해석하는 해석 성향으로, 바깥으로 드러내게 만드는 것과 관련 있다. 인간들에게 있어 해석불가란 없다. 그것은 신체 자체가 ‘표현해 낼 수밖에 없는’ 신체로 작동하기 때문이다.】
이게 무슨 이야기냐 하면 인간은 시작을 항상 자기 신체로부터 출발한다는 겁니다. 그 전까지 인간은 자아로부터 출발한다 했잖아요. 더 가보자는 거예요. 자아 말고. 자아가 어디서 나왔나 추적해보니까 인간의 육신 자체였다는 거예요, 몸 자체. 아담의 몸이거든요. 아담으로부터 주어진 몸이잖아요.
몸은 어디서 나왔는가? 이것은 주일 낮 설교까지 기다리셔야 돼요. 주일 낮 설교에 이보다 더 깊이 들어갑니다. 왜냐하면 여자가 해산해야 구원받는다는 그 내용이거든요. 인간의 신체로 있기 때문에 그 신체 자체가 바깥 환경과 연결되면서 자아가 발생되는 거예요.
신체를 몸이라 합시다. 몸과 신체를 어떤 사람은 구분하는데 그냥 신체라 하고 신체가 무엇과 만나느냐 하면 땅 또는 땅의 환경과 만납니다. 인간의 몸은 땅의 환경과 만나는데 창세기 3장에 보면 땅은 인간에게 무엇을 제공합니까? 저주를 제공하죠. 여기에 맞대응해서 인간의 몸은 저주를 물리치려 해요. 여기서 땀이 흐르죠. 땀이 흐르는데 결국은 땅의 저주를 버텨내지 못하고 무기력하게 무너집니다. 이게 뭐냐 하면 흙에서 와서 흙으로 돌아간다. (창3:17-19)
인간을 그렇게 만드는 이유가 하나님의 땅에 내려진 저주의 실효성 때문에 그래요. 저주가 말로만 저주가 아니라 실제로 저주다워야 그게 저주거든요. 인간이 어떻게 버티기를 해도 저주한테는 못 이기는 거예요. 이게 인간의 현모습입니다. 이게 우리 자신의 모습이에요.
그런데 인간의 몸에서 선악체계, 몸이 선악지식을 만나니까 여기서 자아가 생긴 거예요. ‘나’가 생긴 거예요, 나. 나가 생기니까 몸은 죽지만 나는 불멸성을 가지고 견디겠다는 거예요. 여기서 종교성이 나와요, 종교성. 여기서 종교성이 나온다고요.
육신아 바이바이, 나는 천당 간다, 이게 종교성이에요. 종교적이기 때문에 종교라 하는 것은 신을 인정하고요, 신. 절대자를 인정하고 절대자에게 내 자아가 성의를 표하는 거예요. 성의, 정성을 표하면 선악체계이니까, 선악체계인 걸 감안하세요, 신이 알고 있는 선과 내가 알고 있는 선이 일치되고 신이 알고 있는 악과 현재 내가 알고 있는 악이 일치되기 때문에 그런 공통선이 있기 때문에 그 공통선의 라인을 타고 같은 것은 같은 것끼리 결국은 만난다는 그 아이디어에 근거해서 내가 제사 드리고 희생하는 이런 선한 행위를 주께서 매몰차게 “저리 지옥으로 꺼져!”라고 하지 않을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고 제사 드리는 거예요.
성경에 나와서 최초로 제사 드린 사람이 누구입니까? 가인이죠. 아벨이 아닙니다. 가인이 먼저 제사 드렸어요. 가인이 제사 왜 드립니까? 구원받으려고 드리는 거예요. 구원받으려고. 왜? 땅의 저주가 너무 혹독하니까. 특히 가인은 목축하는 사람이 아니고 농사짓는 사람이잖아요. 농사지어보면 알잖아요. 복숭아 농사지어보면 알거 아닙니까. 얼마나 힘든지. 지금 KBS <인간극장>에서 복숭아 농사짓는 거 나오거든요. 효녀. 얼마나 효녀인데...... 전에는 <인간극장> 이런 거 나이 60 넘어야 본다 했는데 요새는 내가 보고 있어요.
가인이 신이 주신 추수감사제를 하는데 신이 주신 중에서 일부를 누구한테 바칩니까? 제사는? 하나님께 바친 거예요. 바쳤는데 하나님이 가인의 제사를 안 받은 겁니다. 안 받은 거예요. 아까 그 과부 이야기했죠? 이스라엘에 과부가 많지만 딱 한 사람에게만 찾아갔다고요. 그렇게 하는 이유를 여러분 잊어버렸죠? 왜 그렇게 합니까? 내가 과부이기 때문에 나를 불쌍히 여겨달라는, 인간들의 선악체계에 준한, 불쌍하게 여기는 것은 착한 것이고 착한 것은 선한 것이다, 하는 선악체계에 준해서 신이 방문해야 된다는 선악체계의 지식을 아무짝도 쓸모없게 만들었어요.
창세기 4장부터 나오잖아요. 가인의 제사를 안 받았다. 가인은 그때까지 섭섭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동생이 제사를 드렸거든요. 동생의 제사는 받네요. 여기에 돌아버린 거예요, 여기에. 왜냐하면 자기의 선악체계 자체가, 선악체계 갖고 있는 내가 나한테 속는 것을 내가 용납을 못하는 거예요. ‘내가 속았다.’ 하면 끝날 문제를 ‘이 잘난 내가 왜 나한테 속아? 지금껏 나는 나한테 문제 있다고 생각한 적 없어.’ 그럼 그 문제없음을 견지하려면 동생을 죽여버려야 나는 여전히 나의 판단과 나의 해석은 옳았다, 가 계속 유지가 되기 때문에 죽여버린 거예요.
이것을 인간세계에서나 성경에서 같이 이야기합니다. 이걸 질투라 하죠, 질투. 일방적으로 한쪽을 좋아하거나 한쪽을 미워하는 게 질투죠.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이 쓰는 질투를 누구한테 씁니까? 본인에게 합니다. 나도 일방적으로 좋아하고 나도 일방적으로 미워한다. 이유 대지마. 이유 없어. 왜 저 사람을 좋아할까? 말 걸지 마. 너희들에게 질투심을 유발하기 위해서 한다. 그게 내 사랑이니까.
질투 없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 하듯이 질투 없는 사랑, 질투를 유발하지 않는 사랑은 사랑이 아닙니다. 편애가 없는 사랑은 사랑이 아닙니다. 모든 사랑은 항상 편애를 의도적으로 만들어내요. 그래야 우리에게 숨겨져 있는 선악체제가 본색을 드러내고 발작을 일으키기 때문에.
내가 생각한 선악기준과 하나님의 선악기준이 다르군요. 다르군요. “하나님 당신의 선악기준과 내 선악기준, 하나님이 생각하는 선악기준과 인간이 생각하는 선악기준은 다르군요.”할 때 “다르군요.”하고 웃는가, 웃는 이모티콘처럼 웃으면 성도. “다르군요.” 인상 찡그리며 나오면 이건 지옥.
“달라서 너무 감사해요.” 이건 이미 구원받은 사람이에요. “다르군요.”하고 인상 찡그리면 이건 이미 지옥에 예약된 사람이에요. 양쪽 다, 화낸 쪽은 “나의 선악체계를 무시해서 나, 자아가 화내고 있는 게 지금 안 보이십니까?” 이렇게 되는데 웃는 쪽은 “나 같은 건 무시해줘서 감사합니다.” 이쪽은 감사가 나와요. 감사는 성령의 일이고 화내는 것은 악령의 일입니다.
계속 진도 나가봅시다. 신체가 있고 자아가 있어서 자아가 신을 향합니다. 이건 뭐 모든 인간이 다 그래요. 무신론자, 불교신자 관계없이 모든 인간은 신에게 나아갑니다. 나아갈 때 그 원동력은 뭐라 했습니까? 무슨 체계? 선악체계. 나도 양심은 있다 이 말이에요. 나도 선과 악, 그 정도는 안다 이 말이거든요. 기본 양심은 공자나 맹자 말대로 인간은 기본적으로 선량하다, 인(仁)은 있다, 이게 동양철학 아닙니까.
그런데 주님께서 어떻게 했습니까? 자아가 신으로 가는 이것 말고 다른 계통으로 찾아와버렸죠. 다른 계통으로 찾아올 때 여기 등장한 신체는 뭐냐? 선지자. 선지자 신체가 돼요. 왜 선지자라 하지 않고 선지자 신체라 하느냐? 이 선지자 신체가 좀 특이해요. 이게 율법화된 신체에요. 율법화된 신체는 여기 뒤에 나옵니다.
p.227 중간에 보면【내부와 외부를 소통시키는 교환원리】라 되어있고【이렇게 해서 자꾸만 자신의 몸을 구조화시키고 구성화시키는 그 구조를 해체하는 구조로서 작용한다고 보았다. 즉 그녀(장문정, 본문의 앞에 언급한 논문의 저자)는 신체를 통과하는 주름들은 안과 바깥의 이중성으로 표상되며 그래서 우리는 신체나 살의 주름들을 의식이라고 칭하기도 하며 타자나 사물이라고 칭하기도 했지만 이것들은 주름의 안과 바깥이 그러하듯이 서로 떨어질 수 없는 것이라고 보았다.】
그 뒤에 보면【이러한 바깥의 새로운 안을 구성하는 깊은 습곡을 신체에 끌어들이는 것에 불과한 것인데,】이것은 바깥쪽이 안으로 들어오고 안쪽이 바깥으로 뒤집어져서 나오는 거예요. 바깥쪽이 안쪽으로 들어왔기 때문에 안쪽에 있는 것이 바깥쪽으로 내밀어지는 계기가 되는 겁니다.
그러면 율법이 신체화 되었다는 말은, 거룩한 것이 들어오게 되면, 율법 자체가 거룩한 말씀이죠, 거룩한 말씀이 들어오게 되면 우리의 신체는 어떻게 됩니까? 거룩합니까, 더럽습니까? 더러운 것이 바깥에 나오는 그 신체화를 노리고 율법을 준 거예요.
그게 민수기 5장에 나오는데 민수기 5장에 보면 아주 신기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여기 의심법이라 하는 민수기 5장 11절에 보면 나오는데요.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그들에게 이르라 만일 어떤 사람의 아내가 실행하여 남편에게 범죄하여 타인과 정교를 하였으나 그 남편의 눈에 숨겨 드러나지 아니하였고 그 여자의 더러워진 일에 증인도 없고 그가 잡히지도 아니하였어도”
자, 이 여인이 남편에게 범죄한 사실은 아무도 모릅니다. 모르는데 15절에 보면 그 아내를 데리고 어디로 갑니까? 제사장에게로 가죠. “그 아내를 데리고 제사장에게로 가서 그를 위하여 보리 가루 에바 십분지 일을 예물로 드리되 그것에 기름도 붓지 말고 유향도 두지 말라 이는 의심의 소제요 생각하게 하는 소제니 곧 죄악을 생각하게 하는 것이니라”하고 16절부터 기니까 다 읽지는 않겠습니다.
16절부터 31절까지 쭉 나오는 이야기가 뭐냐 하면, 21절 한번 보겠어요. 그 소제물을 여자의 넓적다리에 붓습니다. 부으면 “여호와께서 네 넓적다리로 떨어지고 네 배로 부어서 너로 네 백성 중에 저줏거리, 맹셋거리가 되게 하실찌라 이 저주가 되게 하는 이 물이 네 창자에 들어가서 네 배로 붓게 하고 네 넓적다리로 떨어지게 하리라 할 것이요 여인은 아멘 아멘할찌니라”
또 24절에, “여인으로 그 저주가 되게 하는 쓴 물을 마시게 할찌니 그 저주가 되게 하는 물이” 27절에 보면 그 마신 물이 “그의 속에 들어가서 쓰게 되어 그 배가 부으며 그 넓적다리가 떨어지리니 그 여인이 그 백성 중에서 저줏거리가 될 것이니라 그러나 여인이 더럽힌 일이 없고 정결하면 해를 받지 않고 잉태하리라 이는 의심의 법이니”
이 이야기, 주일 낮 설교에 나올 수도 있어요. 30절, “또는 그 남편이 의심이 생겨서 그 아내를 의심할 때에” 의심한다는 것은 가능성이 두 개에요, 남편입장에서는. 그러니까 제사장한테 가니까 제사장이 거기다 뭘 줘요? 이상하게 마술도 아니고 신기한 어떤 율법대로 하니까 여자가 진짜 바람피우면 다리가 퉁퉁 붓고 진짜 아무 일 없으면 말끔해진다는 거예요. 그렇게 하라는 겁니다.
현대인들이 들었으면 코웃음 치면서 코가 막 튀어나올 정도에요. 이러니까 내가 성경을 안 믿는 거야, 이렇게 나올 거예요.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 간음한 여인이 퉁퉁 부은 게 아니고 주님이 퉁퉁 부은 거예요, 주님이! 주님이 십자가에서 죄 없는 주님이 퉁퉁 부은 거예요.
신체의 율법화를 시도한 겁니다. 여기에는 어떤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것은 하나도 포함되지 않았어요. 왜냐하면 신체도 주님 것이고 율법도 주님 것이니까. 율법 안에 주님과 성도 다 들어있죠. 주님 스스로 증명하기 위해서 주께서 스스로 아무런 효과 없는 데에서 실효성이 나타나게 하는 거예요. 오늘 강의의 핵심입니다.
예수님 피를 믿으면 죄 용서받는다고. 그게 실효성 있는 이야기입니까? 말 더듬거리면서 “내가 예수 피 믿는다.”하고는 천당 가고 이렇습니까? 왜 사람들이 예수님을 죽였는지 이유를 알겠죠? 전혀 실효성 없어 보이기 때문에. 내 살과 내 피를 마신 자는 영생을 얻고 그렇지 않으면 저주 받는다, 가 전혀 먹히지를 않는 거예요. 이게 선지자의 운명입니다. 말 안했으면 안 죽었어요. 그런 말하고 돌아다니니까 죽은 거예요.
아무런 효과 없는 데에서 실효성이 나타나게 한다는 이걸 누가 믿어요, 이걸? 한번 해볼까요? 퉁퉁 부으면 뭐라고 하느냐 하면 간 때문이야~ 차두리처럼 간이 안 좋아서 그렇다는 거예요. 의사들 불러서 해보세요. 간이 안 좋아서 그렇다 하죠.
율법의 이런 효과를 드러내게 된다면 이건 이스라엘의 특수성입니다. 이스라엘의 특수성이에요. 이 비슷한 이야기 있잖아요. 자식인데, 자식이 나이 들고 했는데 무심코 놔둬버리고 할례를 안 행했어요. 모세가 애굽에 가서 일하려고 하는데 어땠습니까? 하나님이 모세를 죽이려고 할 때 이 실효성, 이걸 누가 믿겠습니까? 아무도 안 믿죠.
초반부터 창세기 4장부터 가인은 이걸 안 믿었어요. 왜냐하면 자기의 선악체계에 하자있다고 생각지도 않았기 때문에. 자기는 일체 그런 하자 없다 이 말입니다. 내가 들였잖아요, 정성을. 그것도 정성을 들였다고요. 하나님과 우리 사이는 선악에 대해서 다 서로 통한다고 생각한 거예요. 그럼 내가 정성껏 들였다 이 말이에요, 성의를 다하여. 받아야죠.
안 받았다는 말은 지금 하나님체계하고 가인체계하고 안 맞는 게 아니고 인간체계하고 안 맞는 걸로 생각했어요. 왜? 자기는 인간이니까. 자기 옆에 친구들도, 친구들이 있었는지 없었는지 모르겠지만, 친구들도 다 마찬가지 인간이니까.
그런데 왜? Why? Why 왜 아벨은 받느냐 이 말입니다. 아벨은 받아버리면 나의 체계 있잖아요, 나의 선악체계뿐만 아니라 나와 같은 친구 인간체계 다 깨집니다. 다른 사람들은 전부다 이건 인정하지 못해요. 차라리 아벨 하나 없애는 게 나아요. 예수님 하나 죽여서 입 다무는 게 나아요. 다른 사람들처럼 정상이게. 이딴 거 안 믿는 정상이게.
그래서 오늘날 성도에게도 이 율법화가 되어있죠. 예수님의 피를 내가 거부할 수 없는 존재가 된 거예요. 왜냐하면 내가 예수님을 믿음으로써 죄 사함 받은 게 아니고 먼저 죄 사함에 의해서 만들어진 작품이거든요, 성도가.
죄 사함이 딱 되니까 더 이상 내가 나에게 선악체계를 일체 모든 것에 적용 안 하게 되는 이상한 사람이 되고 만 거예요. 그러니까 다른 식구들이나 일가친척이나 가족들한테 어떻게 돼요? 욕바가지, 바가지로 얻어먹어요. 너 인생 그렇게 살아도 되나? 뭐 이런 식으로. 이런 수모를 당해도 아벨인줄 알고 감사히 받으시기 바랍니다. 내 복음과 의를 위해서 핍박을 받을 때 기뻐하라. 아까 선지자 이야기 아닙니까? 선지자도 이와 같이 당했느니라.
선지자가 왜 그렇게 당했겠어요? 인간 신체 내에 율법이 들어왔죠. 그러면 하나님의 거룩이 들어왔잖아요. 거룩이 들어왔으면 안에서 뭐가 나옵니까? 거꾸로 죄가 나오는 거예요, 죄가. 죄의 종류가 나오는 게 아니고 죄의 질이 나오는 거죠.
주여, 나는 나한테 안 속아 넘어가려고 애썼습니다. 나는 그럴싸한 존재로 살고 싶었습니다. 시답잖은 죄인으로 살기 싫어했습니다. 이런 고백이 환한 보름달 같은 이모티콘처럼 웃으면서 환하게 웃으면서...... 세상에, 주께서 손을 안 대면 누가 손을 대겠습니까? 나를 내가 손댄다고 이런 결과 나오는 게 아닌 거잖아요. 주께서 손대니까 이런 결과가 나왔죠, 손대니까.
자, 그렇다면 계속 진도 나가봅시다. 계속 어려운 거지만 여러분 감당할 수 있기 때문에 밀어붙입니다. 창세기 3장 다시 해보겠습니다. 아담의 몸은 신체, 신체는 저주를 감당 못해서 저주한테 지죠. 흙에서 와서 흙으로 돌아가죠. 땅은요? 땅은 뭐가 작동한다? 저주가 작동하죠. 이 땅과 인간을 하나님께서 응축해서, 요약해서 이스라엘로 만들었어요. 율법화시켜서 이스라엘로 만들었어요.
그럴 때 하나님께서 모든 계명은 인간에게 준 게 아니에요. 땅한테 준 겁니다. 땅의 거룩을 말한 겁니다. 이 한 마디로 율법해석 끝났어요. 왜 땅을 더럽혔느냐고 인간 조지는 거예요. 왜 땅을 더럽혀서는 안 되는가? 거룩한 하나님이 임재할 땅이고 방문할 땅이고 거기서 살 자기 집이기 때문에 그래요. 이 땅이. 하나님과 인간이 임마누엘, 함께 살 땅이기 때문에 거룩을 몰고 오신 거예요, 거룩을 몰고.
내 땅에서 피 흘리지 말라는 이유가 거기 있어요. 다윗이 성전 지으려 하니까 내 땅을 더럽혔잖아, 너 피흘려가지고. 전쟁 끝나고 지어라. 그래서 솔로몬한테 성전 짓게 했습니다. 내 땅에서는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가 없게 하라. 왜? 내 땅이니까. 율법으로 다시 말해서 거룩으로 지배당할 땅이기 때문에요. 그래서 그 땅을 더럽히면 이스라엘이라도 나가! 내보내버리죠.
창세기는 땅이 저주받았다 되어있죠. 그것이 좀더 구체적으로 나가버리면 그 땅에 거룩한 하나님이 오시기에 하나님의 거룩한 언약을 지키지 아니하면, 신명기 28장에 이 말씀을 지키지 아니하면 나가도 저주받고 들어와도 저주받고. (신28:14-19) 저주의 원천, 저주의 근거지가 하나님의 율법에 있었고 율법의 근거지는 바로 주님에게 있었고 주님의 언약에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한 거예요.
그러면 요셉을 애굽 사람들이 왜 못 건드렸습니까? 건드리면 그들이 저주받는 이유가 뭡니까? 하나님의, 선악체계가 아닌 다른 체계, 생명체계가 요셉에게 있기 때문에 요셉은 그 환란에서 거뜬하게 벗어날 수 있었고 그 가뭄이라는 땅의 저주, 땅이 저주받아서 든 가뭄에서 요셉의 형들은 요셉한테 죄를 지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혜택을 입은 겁니다.
그다음에 민수기 6장 봅시다. 민수기 6장에 넘어가면 인간의 신체와 율법화가 들어오는 율법 정도가 아니라 아예 합체가 되어버려요, 6장에 보면. 그걸 나실인이라 합니다, 나실인. 나실인 외울 때 이렇게 생각하면 됩니다, 나실 제 괴로움~, 이렇게 보면 됩니다. 여기 민수기 6장 18절에 보면 “자기 몸을 구별한 나실인은 회막 문에서 그 머리털을 밀고 그것을 화목제물 밑에 있는 불에 둘찌며”
머리카락을 어떻게 합니까? 쓰레기통에 갖다버리는 게 아니고 먼지에 날려보내는 게 아니고 어디에 합류한다? 화목제물 밑에 들어가는 거예요. 화목제물은요, 인간이 더럽기 때문에 인간은 끼어들지 말고 그 대신 화목제물로 따로, 흠 없는 제물로 따로 마련해서 드리는 게 화목제물이에요.
그런데 유일하게 예외가 뭐냐 하면 인간인 나실인이 정한 기한 내에 하나님이 지시, 서원 지시한 것을 온전히 드릴 때...... 온전히 드렸다 안 드렸다를 뭐로 아는가? 체온계로 아는 게 아니고 머리카락이 째깍째깍째깍 자라요.
자라난 기간 내에 하나님이 시킨 것, 장례식 가지 말고 포도와 관련된 모든 것을 먹지 말고, 머리카락 깎지 말고 이 세 가지죠. 머리카락 깎지 말고 포도주와 독주, 술을 멀리하고 또 포도나무 열매를 먹지 말고. 건포도 같은 거 먹지 말고, 미제 건포도 이런 거 먹지 말고요, 캘리포니아산 이런 거 먹지 말고, 죽은 시체와 가까이 있지 말고. 이런 걸 지켰을 때 째깍째깍째깍 머리카락이 자라잖아요.
딱 서원이 끝났을 때 머리카락 잘라서 화목 제물 밑에 집어넣는 거예요. 이건 철저하게 율법은 그냥 우리한테 오는 게 아니고 특정하게 바쳐진 희생 제물화된 특수한 인간을 나실인이라 하는데 나실인처럼 모든 걸 바친 자에게는 율법이 하나로 결합된다 이 말이죠.
마지막 바친 사람이 누구죠? 예수님이죠. 예수님에게 모든 율법은 완성이 되면서 제가 강남강의에서 했죠,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고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다. (요일5:12) 이게 바로 선악체계가 아니고 바로 생명체계입니다. 아들에 의해서 확인된 것은 바로 죄 사함의 실효성이에요. 죄 사함의 실효성.
하나님은 율법을 어기면 저주합니다. 율법을 어기면 저주하거든요. 모든 율법을 지켜야 영생을 얻습니다. 예수님께서 율법을 다 이루었기 때문에 죽음과 더불어서 죽으신 분도 예수님이고 죽었었는데 다시 살아난 분도 예수님이죠. 부활하신 분도 예수님이죠. 죽음과 부활이 예수님 안에 다 들어있는 거예요.
그럼 성령께서는 죽음과 부활을 우리 죄인에게 줄 때, 죽음과 부활 이게 뭐냐 하면 죄 사함의 실제성, 실효성이에요. 죄 사함은 이미 예수님 안에서 종료, 완료가 되었어요. 완료가 된 것을 그냥 선물로, 선악체계가 아니고 그냥 선물로, 행함으로 받는 게 아니고 오직 선물로서...... 선물은 다른 말로 은혜라 하고 은혜를 가지고 두 자로 믿음이라 했죠. 이제 믿음이 이해됩니까? 믿음은 극단적인 피동성, 그냥 부여받는 거예요. 그걸 다른 말로 하늘에서 생성된 거예요. 땅에서 내가 만든 게 아니고 생성되는 것.
그래서 로마서 4장에서 믿음의 반대말은 뭡니까? 불신앙이라 하지 않고 믿음의 반대말을 행함이라 하잖아요. 불신앙이라 하지 않고 행함. 이걸 그대로 죄 사함의 효과를 여기서 적용시키는 거예요. 요셉에게 일어난 그것을 요셉 형들에게 그대로 넘겨주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가 뭔데 예수님한테 이런 죄 사함을 받습니까? 이걸 한꺼번에 말해서 언약체계라 합니다. 언약체계. 하나님이 하나님으로 사시면 되는데 아브라함을 왜 부릅니까? 언약을 이루기위해서 아브라함을 불렀고 이삭을 부른 이유도 언약을 이루기위해서 불렀고 야곱도 언약을 이루기위해서 부른 것처럼 하나님께서 누굴 찾아요. 그래야 언약이 이루어지거든요.
하나님께서 주님을 언약체결자로 삼아서 하나님이 주님한테 한 것을 이제는 주님이 하나님의 언약적인 일을 했던 자리가 오른쪽이에요, 오른쪽의 자리에 누가 앉는가? 하나님이 계신 게 아니고 우리 주님이 오른쪽의 자리에 앉아버리면 옛날에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했던 그 일을 주님이 행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자기 택한 자를 구원한 것처럼 주님도 자기 택한 백성을 고를 수 있어요.
골랐다 안 골랐다, 를 어떻게 아느냐? 성령이 임하면 돼요. 성령이 임했다 안 임했다, 를 어떻게 아느냐? 죄 사함의 효과를 받으면 됩니다. 죄 사함의 효과를 받았다 안 받았다, 를 어떻게 아느냐? 내가 나한테 깜빡 속았다는 것을 아는 순간이죠 뭐. 그동안 나는 내 선악체계를 고집하면서 그게 전부인 줄 알았다 이렇게 되죠.
왜 언약이냐? 그것은 함께 살고 싶어서에요. 그게 임마누엘이에요. 하나님 계신 곳에 하나님의 백성도 함께 살고 싶은 겁니다. 살고 싶기 때문에 선지서에서의 표현은 ‘나의 신부’라고 이야기해요. 나의 신부. 그리고 최종적인 만남을 ‘혼인잔치’. 아가서에서는 ‘나의 사랑하는 여인이여 오라. 내 오른팔로 내가 안아주마.’ 그럼 여자도 가만 있으면 안돼요. 호응해야 되죠. 내가 님의 품에 안겼으니 이리 보아도 님의 얼굴이고 저리 보아도 님의 오른팔이고. 나는 당신의 품 안에 있다.
그러니까 이 이야기를 하는 것은 그 땅이 하나님이 자기 백성과 함께 있을 때 이게 온전한 이스라엘의 완성이고 그 땅이 거룩한 땅이고 그 땅이 바로 천국입니다. 일관성 있는 하나님의 계획에 선지자가 또는 저와 여러분들이 말려들었습니다.
여기 p.227 밑에서 두 번째 줄에 봅시다. 【보편화된 의사소통 세계 형성을 위해 처분 가능한 의미작용의 법칙이 확립되는 데, 여기서 인간은 ‘수동적 자율성’을 발휘하게 된다.】수동적 자율성이란 표현을 했죠. 수동적 자율성, 이 상황에서 반대처럼 느껴지지 않습니까? 수동적 자율성이라는 것은 본인이 뭘 했다,가 아니라 의미의 그물망, 의미체계라 하면 어려우니까 의미 그물망이 우리로 하여금 자율성을 허용한다. 그런데 이 자율성은 무슨 자율성? 수동적 자율성.
모기장 같은 데, 아주 약한 모기장은 안 되고 탄탄한 모기장에 애들이 놀게 되면 모기장이 흔들리는데도 애들은 신나게 놀죠. 애들 키즈카페 같은 거 보면 그물망 같은 거 있잖아요. 마음껏 뛰어놀아도 괜찮은, 트램폴린 비슷하게 있는 그것처럼 그물망이 움직이면 같이 움직이는 거예요.
아인슈타인이 바로 일반 상대성원리에서 이걸 발견한 거예요. 인간의 질량이라 하는 것은 중력의 그물망에 의해서 생성된 것이다. 지구가 동그란 철공이라면 지구 밑에 휘어진(지구의 무거운 질량에 의해 움푹 들어가 휘어진) 고무판이 중력이고, 전자파는 중력에 의해서 축 내려가는 거예요. 빛도 똑바로 못가고 축 내려간 판을 따라서 간다. 따라서 아프리카에 가서 한번 조사해봐라. 진짜 빛의 경로가 바뀔 것이다. 일식, 해가 먹히는 현상을 조사해보니까 진짜 빛이 직진하지 않고 휘어졌어요. 그때부터 아인슈타인을 알아줬죠. 이야, 천재다.
세상 모든 것은 불교 화엄경 비슷하게 인드라망, 관계망 또는 인연의 망, 전부다 출렁이는 인연의 망에 의해서 이것 일어나면 이게 지고 이것 지면 이게 일어나고 서로 얽히고 설켜 있다. 그 아이디어하고 좀 비슷한 아이디어처럼 되죠.
세상은 말씀의 망입니다. 꽃은 피면 지지만 꽃이 피고 져야 될 이유가 지지 않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에요. 그것이 바로 이사야 40장에 “말씀은 영영히 서리라” 그렇게 되어 있어요.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영히 서리라” (사40:8)
그다음에 p.228 봅시다.【(인간의) 신체는 새로운 언어】 의미니까 말씀이죠. 【언어(말씀)의 힘을 구사하는 중력장으로 행세한다.】 말씀의 힘을 구사하는 중력장으로 자기 신체가 새롭게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따라서 개인적인 선악체계는 빠져버리니까 언약에 의해서 움직이거든요. 그럼 이 그물망을 형성시킨, 스파이더맨의 거미줄에 근거지, 그 출처가 어디입니까? 바로 에베소서에 나오죠. 모든 것은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 에서 나와요. 이게 창세 전부터 감추어놓은 하나님이 예정하신 비밀,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는 것, 모든 것이 주로 통일되는 것.
가운데 봉이 있으면 봉에서 사방으로 뻗어나가는 큰 그물망이 춤추고 있고 여기에 성도들이 걸려든 거예요. 성도뿐만 아니고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모든 것들이 예수님 안에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 를 위해서 그들은 태어났다가 죽었다가 까불다가 또는 미국 가서 욕도 하고 오고 하죠. 전부다 그리스도를 위해서 합니다.
푸틴이 원자폭탄가지고 우크라이나를 치겠다 할 때 우리는 기뻐하고 찬양해야 돼요. 못 먹는 감 찔러나보자는 식인지 모르겠습니다만 어차피 세상은 가짜잖아요. 그동안 진짜라고 행세한 것이 역겨웠다 이 말입니다. 가짜인데 의미도 없는 걸 의미 있다고 고집하는 그 꼬락서니가 성도 눈에는 얼마나 꼴 보기 싫었어요. 시시하기 짝이 없는데 뭐 심각한 것처럼 이야기하는 거 보면 같잖죠.
상담하는 것, 상담이 왜 필요하죠? 물어보살 보면 어떤 아가씨가 나하고 사귄지 4개월 만에 명품 다 빼먹고 도망갔는데 저 어떻게 하면 좋아요, 보살님? 지 딴에는 심각한 거예요. 율법이 심각하다는 생각은 못하고.
선지자는 이미 혼절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계시가 임했기 때문에 이제는 그런 계시가 있어서 자기가 쇼크를 받아야 주의 전쟁 이야기를 거침없이 이야기할 수 있는 거예요. 이제는 사도 바울처럼 거침없이 거리끼지 않고 이야기를 뱉어내야 됩니다. 내가 최후의 순간이었다. 내가 경계선이었다. 내가 마지막이었다.
그래서 여러분들은 여러분들에게 속고 있기 때문에 내가 보여주는 매일이 마지막이라는 사실을 여러분들은 지금 안 믿고 있습니다. 그러든지 말든지 우리는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을 그냥 두시지 아니하시고 십자가의 다 이루심을, 죄 사함의 실효성을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이제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자율성이 주님의 십자가에 의한 수동적 자율성인 것을 늘 모든 범사에서 고마워하고 감사하고 웃을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