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7:1-5
7:1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7:2 너희의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7:3 어찌하여 형제의 눈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7:4 보라 네 눈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속에 있는 티를 빼게하라 하겠느냐
7:5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속에서 티를 빼리라
피조물이란 혼자서 사는 것이 아닙니다. 창조주가 던져 주시는 것으로 살아야 합니다. 일은 창조주께서 벌리시고, 피조물은 그 벌어진 일을 그저 수용하는 입장에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새로운 일을 벌렸습니다. 예수님을 이 지상에 보내셔서 그 새로운 일을 실시케 하셨습니다. 인간들이 믿든 아니믿든 상관없이 이미 새로운 일은 벌어졌습니다. 정말 자신이 피조물이라는 점을 인정하신다면 군소리말고 하나님의 새로운 일도 그대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하지만 새로움이란 늘 이 지상에서는 주목과 경계의 대상이 됩니다. 기존의 것과 틀리다는 것은 곧 죄악시 됩니다. 세례요한이라는 선지자는 기존의 것과 달라도 너무 다른 이야기를 했습니다. "다 틀렸다"는 이야기를 외치고 다녔습니다. 몇 가지를 수정한다든지 보완해야 될 문제가 아니라는 겁니다. 처음부터 새로 시작해야 된다고 했습니다. 그것이 요단강에서의 물 세례입니다. 과거의 것을 전부 죽이고 새로운 출생으로 살아나가야 한다는 겁니다. 세례 요한은 그 당시의 학문을 두루 섭렵하고, 학식을 충분히 쌓아서 그렇게 현실 비판적으로 나갔던 것입니까? 아닙니다. 그는 남이 보지 못한 분에 대해서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들었고 또 하나님께서 친히 약속 하신 분을 보았습니다. 다른 세상의 것을 이 현실 속으로 집어넣으려고 한 것입니다. 모든 것을 자신이 만났던 그 분 위주로 새롭게 생각했습니다. 요한복음 3:30절에서 그는 이렇게 외쳤습니다. "그는 흥해야 하고 나는 쇠하여야 한다." 세례 요한은 오직 '그 분'에 관해서만 이야기했습니다.
세상을 어떻게 개혁하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들의 지혜와 의견을 모아 새 나라를 건설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새로운 분의 방문을 그는 언급하고 있는 겁니다. 그 때 권세자들은 세례 요한의 등장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물었습니다. "네가 그리스도냐, 대제사장이냐 선지자냐, 네가 누가냐?"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세례 요한은 기발한 발언을 합니다. 그것은 단지 '내가 누구냐'를 알려주는 것이 아니라 자기 뒤에 오시는 분을 알리고자하는 뜻에서 그분과 연결시켜서 자신을 표현합니다. "나는 소리이다"고 했습니다. '소리'라는 것은 뒤에 오실 실체로부터 나온 그 소리이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세례 요한 자신을 보지 말고 세례 요한을 단지 소리로 여기고 그 소리와 연결된 그 분에 주목하라는 말입니다.
이렇게 세례 요한을 앞장 세우고 오신 그분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대해 지금까지의 방식과 전혀 다른 방식으로 이끌고 나가시고 그리고 끝맺음 하겠다는 의사를 우리 피조물에게 전달합니다. 이처럼 예수님이나 세례 요한이나 이 땅을 단지 '좋은 세상' 되기 위한 계획안을 가지고 온 것이 아닙니다. 도리어 새로운 나라로의 탈출이요 교체를 알려주고자 합니다.
사람들은 평생토록 집중해서 정성으로 만들어내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자기 만의 울타리'입니다. 사실 이 울타리로 해서 타인을 비판하게 됩니다. 자기는 성공했고 남은 자기보다 못하다고 측정하게 되는 것은 각자 서로 다른 울타리가 따로 있다고 믿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하시는 새로운 일이란 이런 인간들의 울타리를 모두 불도저로 깔리게 하는 것처럼 완전히 철거하기 위함입니다. 인간들이 만든 울타리는 모두 눈에 들보를 담은 채 만들어낸 울타리들입니다. 세례 요한에 있어서 이러한 울타리들은 허물어야 될 대상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하시는 새로운 일에 방해만 되기 때문입니다. "내 아들 예수를 보내주었는데 무슨 딴 소리냐"하고 하나님은 싫어하십니다. 만일 누구라도 주를 사랑하지 않으면 저주를 받습니다. 그것은 주께서 임하시기 때문입니다. 고린도전서 16:22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세례 요한 뿐만 아니라 사도 바울에게도 그가 전하는 바는 오직 "예수!"입니다. 그가 다메섹으로 내려가는 길에서 부활하신 나사렛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역시 그에게는 새로운 세계가 침입한 경우이 되었습니다. 그 전까지만해도 그는 자기의 울타리를 가지고 세상을 보니 어느 누구에게도 밑지지 않을 정도로 율법적으로 도덕적으로 월등한 사람이라고 자부했습니다. 그는 자신만만하게 소위 예수를 추종하는 자들을 마음놓고 핍박해도 될 줄로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부터 법적으로 자신이 남을 비판할 자격이 아예 안됨을 알았습니다. 사도 바울의 그 시대만해도 신을 제쳐놓고 신을 대신해서 예수라는 특정 인물을 의지해야지만 천국에 이른다는 사고 방식은 참으로 도발적이고 엽기적이기까지 했습니다.그동안 인간들이 갖고 있었던 하나님에 대한 생각은 모두 인간들이 지어낸 울타리들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11;34-36에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합니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뇨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뇨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뇨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 즉 모든 것을 '주 예수 그리스도' 위주로 파악해서 하나님의 일이란 오직 그 분이 독점하고 있는 것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모든 만물이 그 분을 통과하지 않으면 하늘에 도달될 수도 없고, 또한 예수님을 통하지 않고서 생겨난 만물이 없다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예수 인정 안하면 영원한 지옥불로 직행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이것은 기존의 모든 사고방식과 세계관을 폭파시키겠다는 하나님의 마지막 통첩과 같은 것입니다. 사람이 살고 죽는 것은 자기 자신에게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순전히 예수님에게 달려 있다는 겁니다. 어느 누구가 주께 먼저 드려서 그로 인해 되갚음을 얻을 자가 있겠는가? 하는 반문입니다. 모든 것이 예수님이 알아서 처리하는 그 경로를 통해 세상은 정리되어진다는 겁니다. 참으로 단촐하고 거침없는 선언입니다.
과연 이러한 선언에 직면하여 회개하면서 예수님을 받아드린 자들을 세상이 그냥 두고 있겠습니까? 로마서 8:36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기록된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즉 성도의 신세는 마치 도살장으로 강제로 끌려들어가 곧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 양과 같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바로 세상이 예수님의 발언에 대한 비판적 대응책입니다. 사회를 혼란시키고 정신계를 분열시키는 이 '예수 이야기'를 사회는 가만 보고만 있지 않습니다. 세상이 가할 수 있고 행사할 수 있는 모든 방식을 동원해서라도 이 예수 이야기가 다시 꿈틀거리지 못하도록 모든 조치를 다하겠다는 겁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예수님께서 예언한 바가 있습니다. 우리는 마태복음 10장을 통해 만나 볼 수가 있습니다. 16-23절에 보면,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 사람들을 삼가라 저희가 너희를 공회에 넘겨 주겠고 저희 회당에서 채찍질 하리라 또 너희가 나를 인하여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 가리니 이는 저희와 이방인들에게 증거가되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를 넘겨줄 때에 어떻게 또는 무엇을 말할까 염려치 말라 그 때에 무슨 말할 것을 주시리니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자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시니라 장차 형제가 형제를, 아비가 자식을 죽는데 내어주며 자식들이 부모를 대적하여 죽게 하리라 또 너희가 내 이름을 인하여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나중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이 동네에서 너희를 핍박하거든 저 동네로 피하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의 모든 동네를 다 다니지 못하여서 인자가 오리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자.. 여러분, 이 말씀에 대해서 인간쪽에서 무슨 학문적 성과를 가지고 이 말씀의 실현가능성을 따질 수 있단 말입니까? 즉 비판이 불가능하다는 말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비판하지 말라고 하신 것은, 진정 세상을 비판할 분이 따로 있다는 말입니다. 그야말로 전혀 눈에 들보도 없고 눈에 띠끌도 없는 청아한 관점을 가지고 제대로 세상을 보고 심판하실 분은 엄연히 따로 계시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인간이 감히 인간들을 비판하는 것은 자신의 죄로 인해 그 비판은 온전치 못하다는 겁니다. 도리어 온전한 비판자에 의해서 그 온전치 못한 비판을 하는 그 인간이 정죄를 당하고 심판을 당한다는 겁니다. 고린도후서 5:16에 이와 같은 말씀이 나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아무 사람도 육체대로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체대로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이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세상의 비판은 평소에 사람들이 이 세상 안에서 나름대로 생존을 부지하는 방식을 그대로 적용시켜 비판에 나서게 됩니다. 즉 힘있는 자에게 잘 대해주고 자기보다 못하다고 여기는 자에게는 함부로 대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죄인들과 함께 식사하시고 창녀와 함께 있으면서 그로부터 발 씻음을 허용한 적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과격한 태도는 기존 유대 사회에서의 거룩의 서열 파괴와 같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눈에서 들보 빼기'란 인간으로서는 사실상 불가능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들보를 뺀 그 마음'마저 더 큰 들보가 들어있는 마음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판정하시는 것은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이 제시한 새로운 울타리가지고 모든 것을 판정해야 합니다.
비판하지 말라고해서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살아야 된다는 말은 아닙니다. 마태복음 7:15에 보면,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성도가 되었으면 예수님이 보는 관점에서 어떤 자가 거짓 선지자인지를 알고 있어야 합니다. 비록 도살한 양같이 취급을 당하더라도 말입니다. 이처럼 인간들에게 그 어떤 의로운 진리성 비판을 허용하지 않는 예수님은, 육신 끼리의 그 어떤 비판도 거부하고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 기준에 의해서 세상을 다시 보라고 하신 말씀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기존 세상 사는 분위기에 머물다보니 예수님의 생각을 본의아니게 배척하게 된 것을 용서해 주옵소서. 앞으로 그 어떤 자리에서도 예수님의 뜻을 증거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