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개와 돼지

아빠와 함께 2022. 8. 27. 22:53

 

마7:6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저희가 그것을 발로 밟고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할까 염려하라

 

창세기 12:1-3에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축복을 명하셨는데 이는 아브라함 핏줄을 따라 축복이 흐르고, 그 외의 핏줄들은 저주가 흐른다는 것을 뜻합니다. 인간은 성질대로 갑니다. 그런데 그 성질이란 핏줄에 의해 정해져 있습니다. 따라서 아브라함의 핏줄에 속하지 않는 이상 저주스러운 삶은 피할 길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런 점도 모르고 우리들은 본인들의 행복만을 위해 오늘날 열심히 노력하고 있습니다. 과연 저주에서 행복이 나올 수 있을까요? 이스라엘 민족을 하나님은 거룩한 민족이라고 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거룩한 것'이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이스라엘 사람을 가나안 땅 이방 민족 속에 집어넣는 것은, 거룩한 것과 거룩하지 못한 것이 얼마나 큰 차이가 있음을 나타내 보이기 위함입니다. 이방민족들은 나름대로 행복을 추구하고, 거룩한 이스라엘 민족들도 나름대로의 행복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과연 어느 행복이 진정한 행복일까요? 신명기 8:8:3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너를 낮추시며 너로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너로 알게하려 하심이니라" 이 말씀에 의하면 이스라엘 사람들은 거룩한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맨날 낮춤을 받고 배고픔을 당하게 하시고 또 그들이 요구하는 양식은 먹지 못하고 엉뚱한 것을 양식으로 받고 삽니다. 왜 그래야합니까? 그것은 이스라엘 사람들은 거룩한 민족이기에 거룩한 말씀을 먹고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행복이라는 것은 그 말씀이 성취되는 것을 보고 즐거워하는데 있는 것으로 고정됩니다. 그렇다면 다른 민족들은 무엇을 먹고 삽니까? 거룩한 말씀만 빼놓고 다 먹고 살지요. 그리고 그 먹는 것을 챙기는데서 행복을 찾게 됩니다. 먹을 것이 많으면 많을수록 그것으로 행복하고, 먹는 것이 적으면 적을수록 저주스러운 인생이라고 느끼며 삽니다.

 

거룩한 민족에게 있어서는 떡이나 재물보다 바른 말씀이 더 중요시 됩니다. 그런데 이러한 취지가 예수님 당시에 어떤 식으로 무너져 있었습니까? 그들은 하나님이 주신 귀하신 말씀을 가지고, 세상 권력을 얻고 세상의 부귀 명예를 찾는데 활용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미가 3:2-12에 보면 "너희가 선을 미워하고 악을 좋아하여 내 백성의 가죽을 벗기고 그 뼈에서 살을 뜯어 그들의 살을 먹으며 그 가죽을 벗기며 그 뼈를 꺾어 다지기를 남비와 솥 가운데 담을 고기처럼 하는도다 그 때에 그들이 여호와께 부르짖을찌라도 응답지 아니하시고 그들의 행위의 악하던대로 그들 앞에 얼굴을 가리우시리라 내 백성을 유혹하는 선지자는 이에 물면 평강을 외치나 그 입에 무엇을 채워 주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전쟁을 준비하는도다 이런 선지자에 대하여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그러므로 너희가 밤을 만나리니 이상을 보지 못할 것이요 흑암을 만나리니 점 치지 못하리라 하셨나니 이 선지자 위에는 해가 져서 낮이 캄캄할 것이라 선견자가 부끄러워하며 술객이 수치를 당하여 다 입술을 가리울 것은 하나님이 응답지 아니하심이어니와 오직 나는 여호와의 신으로 말미암아 권능과 공의와 재능으로 채움을 얻고 야곱의 허물과 이스라엘의 죄를 그들에게 보이리라 야곱 족속의 두령과 이스라엘 족속의 치리자 곧 공의를 미워하고 정직한 것을 굽게 하는 자들아 청컨대 이 말을 들을찌어다 시온을 피로, 예루살렘을 죄악으로 건축하는도다 그 두령은 뇌물을 위하여 재판하며 그 제사장은 삯을 위하여 교훈하며 그 선지자는 돈을 위하여 점 치면서 오히려 여호와를 의뢰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시지 아니하냐 재앙이 우리에게 임하지 아니하리라 하는도다 이러므로 너희로 인하여 시온은 밭 같이 갊을 당하고 예루살렘은 무더기가 되고 성전의 산은 수풀의 높은 곳과 같게 되리라"라고 되어있습니다.

 

여기에 보면, 하나님께서 오직 '여호와의 신'으로 채움을 입어야 참 선지자라고 할 수 있다는 겁니다. 권력과 재물은 결코 거룩한 것이 아닙니다. 그런 것은 소유할 만한 대상이 못됩니다. 그런 것으로 무장해서 선지자 노릇하려고 하면 안됩니다. 여호와의 신은 거룩한 것입니다. 성령에 충만해서, 즉 여호와 하나님이 하신 일에만 충만해서 전달해야 참 선지자입니다. 예수님 오시고 난 이후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로마서 16:18에 보면, "이같은 자들은 우리 주 그리스도를 섬기지 아니하고 다만 자기의 배만 섬기나니 공교하고 아첨하는 말로 순진한 자들의 마음을 미혹하느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돈만 들어올 수 있다면 무슨 방법을 사용해서든지 그 돈을 자기 주머니로 이전시키려고 거룩한 하나님의 말씀을 도용하는 자들이 있다는 겁니다.

 

거기에 비해서 사도 바울은 어떠합니까? 사도행전 20:33에 보면, "내가 아무의 은이나 금이나 의복을 탐하지 아니하였고"라고 했습니다. 왜 사도 바울은 상대방의 소유를 탐내지 않았습니까? 그것은 그 본인이 그 사람에게 줄게 너무 많기 때문에 거기에만 신경을 잔뜩 쓰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주려는 것은 하나님 말씀 안에 담겨 있는 영생입니다. 거룩한 것입니다. 이 거룩한 것을 외면하게 되면 오늘 본문처럼 개나 돼지에 해당되는 사람이라고 보면 됩니다. 우리들은 성급하게 행복을 달라고 부르짖기 전에 먼저 우리가 어떤 입장에 놓여 있는가 부터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보면, 여러분 집에서 키우는 돼지 생일날에 그  돼지를 금은방에 데리고 가서 보석 목걸이를 해준 적이 있습니까? 물론 그것을 해주고 바라보는 주인에게는 흐뭇하게 보이겠지만 돼지도 보석 목걸이로 인하여 즐거워할까요? "나의 돼지님 행복하십니까?"라고 물어보세요. 돼지는 그 보석 목걸이를 확 끊어버릴 것입니다. 보석 목걸이는 도리어  돼지의 성질을 건드린 것이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개나 돼지에 해당되는 사람을 어떤 것으로 분류시키느냐 하면, 바로 거룩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이대면서 시행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사람보고 개, 돼지라고 표현하시는 취지는 그만큼 거룩한 것의 독보적인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즉 천만인을 다 준다해도 보석같은 하나님의 말씀만큼은 포기못하겠다는 단호함이 담겨 있는 겁니다. 누구든지 말씀의 보석같은 고귀함을 거절하는 자는 이 예수님께서는 그 자를 사람으로보지 않고 개·돼지로 보겠다는 겁니다.
 

우리는 여기서 개나 돼지의 특성을 알아야 합니다. 개나 돼지는 노는 가락이 따로 있습니다. 개가 아무리 노력해도 사람되는 것 아닙니다. 돼지가 아무리 애써도 사람되지를 않습니다. 즉 말씀을 차버리고서도 하나님에 의해서 사람으로 대우받고 싶다는 작자는 마치 개나 돼지가 사람으로 변신하겠다는 처사와 같다는 겁니다. 시편 49편 20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존귀에 처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 즉 말씀, 그것도 거룩한 말씀을 갖고, 듣고 있으면서도 거룩에 대해서 아무런 감흥이나 감각을 갖지 못하는 자는 멸망하는 짐승과 다를 바 없다는 겁니다. 짐승도 애완용으로 집에서 키우겠다는 귀여운 짐승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멸망에 이르러야 만 하는 그런 짐승에 해당되는 자들이는 겁니다. 또 잠언 12:1에 보면, "훈계를 좋아하는 자는 지식을 좋아하나니 징계를 싫어하는 자는 짐승과 같으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시편이나 잠언에서는 거룩한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으로 삼아 짐승같은 인간이라는 판결을 내리는데 오늘 본문의 경우에는 이 말씀을 남기신 그 당사자로서 말씀하시는 것이 되기 때문에 곧 예수님을 거룩한 분으로 깨닫지 못하는 자는 짐승과 같은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사실 모든 인간은 예수님에 비해서 전혀 거룩하지 않기 때문에 정작 본인들이 하나님 보시기에 개·돼지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이점을 깨닫는 자들이 곧 성도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본문 말씀에 대해서 바로 깨닫는 사람은 성도 뿐입니다.

 

다른 사람은 깨달음이 없습니다. 물론 이런 깨달음이 없으면 그 사람은 앞으로도 영원히 개·돼지입니다. 우리 자신이 만인에게 웃음거리가 되고 수치스러운 존재로 낙인 찍히는 있는 상황을 스스로 상상하면서 겁을 내고 있다면 성도로서 아직도 자신의 위치를 부인하는 자입니다.

 

그러나 마음을 반대로 써 봅시다. "나라는 인간은 당연히 남들로부터 웃음거리가 되어야 마땅하고 수치와 조롱을 받아도 싼 인간이다"라는 여기고 살아간다면 어느 한 순간도 행복이 안되는 순간이 없이 항상 행복에 넘치는 사람이 됩니다. 이것은 윤리, 도덕면에서 그러합니다. 죄를 짓는 유혹에 빠지지 않기 위해 자신의 마음을 지키다보면 참으로 괴롭고 힘듭니다 제가 보기에는 이런 사람들이 오히려 악마가 쳐놓은 덫에 빠져 오도가도 못하는 불쌍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죄의 유혹이란 딴게 아니라, 현재 보다 내가 더 우수하고 훌륭하고 멋있는 사람이 될 수 있다고 여기는 그 마음 자체에 작용합니다. 아담이 타락하고 난 뒤, 사람의 마음이란 이상스럽게 변했습니다. 어떻게 변했는가 하면, 죄를 안짓겠다고 다짐에 다짐을 하고 스스로 자제를 하면 할수록 자꾸만 그 짓을 하고 싶은 충동이 자신의 결심을 결국은 허물어놓고 만다는 사실입니다. 즉 스스로 법과 규칙을 제정해놓고, 그것을 지켜내겠다고 결심하는 그 순간부터 인간은 그 자체로서 이미 악마의 유혹을 자기 내부에 끌어들인 것이 됩니다. 차라리 이미 죄인이기에 더 이상 죄 짓는 것이 의미가 없고 재미나 흥미가 되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평소에 술을 먹고 싶지만 기독교 신자라는 명분 때문에 6개월 동안 꾹 참고 지내면서 호시탐탐 우연을 핑계로 술먹을 기회가 주어지기를 간절히 기대하는 사람이 술을 먹을 가능성이 있습니까 아니면 이미 수십 년 동안 매일 같이 술에 푹 젓어 있어 거기에다 또 한 병의 술을 더 추가해서 먹는다는 것이 아무런 의미도, 짜릿함도 못 느끼는 자가 술을 먹을 가능성이 더 있겠습니까?

 

첫 번째 예를 든 사람은 마음 속으로 이런 심정입니다. "나는 신자다. 하나님이 지켜보시는 신자다. 나는 이 땅에서 바르게 살아야 될 임무가 있는 자야. 세상은 썩어도 나만은 최후의 보루로서 썩지 말아야 돼. 오 하나님이여 저를 이 땅의 빛과 소금으로 남은 여생을 살게 하옵소서. 자, 악마가 나보고 술 먹으라고 유혹하라. 나는 그 악마이 코를 납작하게 만들 정도로 용감하게 그 유혹을 이기리라"라는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여지없이 악마의 밥이 될 궁상입니다. 악마가 가장 좋아하는 타입입니다. 마치 손들고 기도하는 바리새인과 같지요. 왜냐하면 이 사람은 스스로 자신을 한창 미화하고 있는 중입니다. 쉽게 말해서 열심히 자신을 미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겉을 보시는데 그는 겉단장에 신경을 쓰고 있으니 그야말로 거룩한 분의 말씀을 깨닫지 못하는 짐승과 같은 사람입니다.

 

거기에 비해 두 번째 타입은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나? 나는 개. 나? 나는 돼지. 돼지가 돼지짓 한다고해서 더 돼지 되는 것도 아니요, 돼지가 경건의 흉내를 낸다고 의인으로 인정해 주는 것  아니다. 따라서 평생 지금 이대로  돼지로 살래. 내가 구원되고 말고는 오직 거룩한 분의 자비와 용서에만 달려 있을 뿐이다." 이런 타입의 사람은 악마가 유혹할 틈이 없는 사람입니다. 지금 우리가 행복하지 않고 늘 불행이 찾아올까봐 공포속에 살아가는 이유는, 이런 두 번째 타입의 마음을 아니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 산상설교를 통해 엄청나게 과격한 말씀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것은, 이 세상에서 거룩한 분은 오직 예수님 자신 밖에 없음을 분명히 하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달리 말씀드려서 이 세상의 그 어떤 인간도 개나 돼지에 불과한 자들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모두들 악마에 유혹과 꾐에 빠져서 실상은 개·돼지 이면서 자꾸만 가식적으로 고상한 의인 흉내를 내고 있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런 인간들의 실상을 말해주기 위해 그들에게 십자가 자신 모습으로 다가오시는 겁니다. 예수님은 우리들과 같이 시체 놀이하자고 찾아오셨습니다. 거룩한 체 하고 말씀을 제대로 깨달은 척 하는 우리들을 향하여 진정한 거룩한 제안은 예수님과 같이 하는 시체놀이 뿐이라고 하십니다. 예수님도 시체, 잘난체 하는 우리도 시체가 되는 놀이 말입니다. 왜 우리가 시체가 되어야 합니까? 그것은 진정한 거룩을 거룩으로 깨닫지 못하는 멸망받을 개, 돼지와 같은 존재들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시체를 가지고 우리에게 찾아오시는 취지는 구약의 다음과 같은 성경 구절들의 실현입니다. 이사야 2:22에 보면, "너희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 그의 호흡은 코에 있나니 수에 칠 가치가 어디 있느뇨" 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전도서 3:18에는, " 내가 심중에 이르기를 인생의 일에 대하여 하나님이 저희를 시험하시리니 저희로 자기가 짐승보다 다름이 없는 줄을 깨닫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노라" 되어 있습니다.

 

보석으로 된 십자가 목걸이 사주면 행복해하고 좋아들 하면서 그 십자가의 실상인 예수님의 피흘린 시체는 왜 거부하려고 합니까? 그것은 우리가 너무 짙은 환상에 의해 둘러쳐져 있기 때문입니다. 잘 되려고 하는 것이 얼마나 우리 자신을 도리어 비참하게 만든다는 사실을 똑바로 파악해주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모든 은혜를 쓰레기에다 버릴자는 스스로 발전적인 사람으로 변신되려고 애쓰는 사람입니다. 이제 우리는 십자가에 처참하게 달린 예수님 그 운명과 동일시하면서 보다 나은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그 환각의 커텐을 제거해야 합니다. 그리고 십자가 앞에서 자기 자신을 똑바로 봅시다. 우리는 뭘해도 여전히 죄인입니다. 그러니까 호기심에서, 일부로 더 죄지을 필요가 없다는 말입니다. 무얼해도 개요 돼지입니다. 이런 우리가 의인되어 구원받는 것은 그것은 거룩한 피,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는 예수님 피 뿐입니다. 우리는 평생 이 보혈의 피만을 자랑하면서 살아갑시다.  

 

『하나님, 회개를 해도 십자가보고 하게 하옵소서. 그래서 근원적으로 자신이 누군지를 아는 회개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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