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6장 30-34
6:30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6:31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6:32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6:33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6:34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날에 족하니라
예수님께서 돈과 하나님을 직접 대비시키신 것은 인간 세계에서 하나님만큼이나 크게 힘을 행사하는 것이 돈임을 밝혀주기 위함입니다. 성도는 돈이 주는 힘과 맞대결을 하고 있는 셈입니다. 세상에서는 돈으로 환산될 수 있는 것만 가치있다고 우깁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그 나라와 의는 돈으로 따질 수는 없지만 돈이 못해내는 것을 해 냅니다. 그것은 바로 소망이 소망답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사람들마도 나름대로 자기 소망들을 갖습니다만 상황이나 환경에 따라 부서져버리는 소망이라면 애초부터 소망이라고 부를 수도 없는 것입니다. 소망이라면 그 어떤 환경 속에서도 영향받지 않아야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돈이 되는 것에 소망을 두면 안됩니다. 그런 것은 중도에 없어져 버리는 겁니다. 그 나라와 의만이 우리를 천국으로 인도합니다. 예수님은 이 말씀을 하시는 것은 인간들을 단지 위로나 하려고 이 땅에 오신 것이 아니라 세상이 하도 돈으로 무장되어 있으니 그저 하나라도 건져보겠다는 심정으로 이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세상이 전부 돈을 추종하더라도 덩달아 추종하는 제발 어리석은 사람이 되지말라는 겁니다.
누가복음 12:13부터 보면, 어떤 사람이 형에게 유산 빼앗긴 것이 너무 화가 나서 하소연하려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어떻게하면 형에게 빼앗긴 자기 몫의 유산을 되돌려 받을 수 있는가해서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대답은 뜻밖이었습니다.
15절에 보면, "저희에게 이르시되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데 있지 아니하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연이어 한 예를 들어서 설명하십니다. "심중에 생각하여 가로되 내가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꼬 하고 또 가로되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곡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치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의 끝을 다시 봅시다.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치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 여기서 '자기를 위하여'라는 말에 무슨 정신이 담겨 있을까요? 그것은 "내가 살기 위해서는 전적으로 재물에 의존할 수 밖에 없다"라는 마음입니다. 그런데 그 마음이 하나님에 의해서 어떻게 되었다고요? 그날 밤에 하나님께서 그의 영혼을 데려가면 그동안 자신이 모아놓은 재물로서 자기 영혼을 되찾아오게 할까요? 다 헛수고가 되는 것입니다. 즉 이 어리석은 자는 그동안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사는 겁니까?"를 진지하게 하나님에게 물어보지도 않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가르치십니다. '생명은 소유의 넉넉함에 있지 않다'고 말입니다. 이 예수님의 충고가 단순히 충고로서 끝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말씀에 준해서 제대로 사는 자가 누구이며 그렇지 못하고 죽음에서 저주로 인생이 끝나는 자가 누구인지를 분명히 드러내시고자 합니다. 즉 생명이 없는 자는 아무리 재물이 많다해도 여전히 생명이 없는 자로 분류될 뿐입니다. 그리고 생명이 있는 자는 비록 재산이 적다해도 생명 있는 자로 분류됩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생명이 없는 자들의 모델로서 이방인들을 거론하십니다. "거 봐, 생명없는 이방인들은 저렇게들 살잖아"하시면서 말입니다. 자, 그렇다면 이방인들은 어떻게 삽니까? 오늘 본문 31과 32절에 보니,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왜 하필이면 예수님께서 이방인들 들먹이면서 지옥가는 자들의 전형적인 종족으로 삼으신 것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천국과 지옥이 인간들의 자질이나 능력을 고려해서 생겨난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천국은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을 입은 자들만이 갈 수 있는 것이고 지옥이란,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를 입지 못한 자들이 가는 곳입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그 어느 종족이나 인간에게도 자비와 긍휼을 베풀지 않았다고 한다면 모두 다 마땅히 지옥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는 천국이란 것이 있으나 마나 하는 나라가 될 뿐입니다. 그런데 이 많은 사람들 중에서 특별히 일부에게만 하나님께서 자비와 긍휼을 베푸심으로 말이암아 이 땅에서 천국 가는 사람도 생겨나고 지옥 가는 사람도 생겨나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느 종족에게만 하나님께서 자비와 긍휼을 베푸신 것입니까?
바로 아브라함의 자손들 히브리 종족에게만 그렇게 하셨습니다. 어떤 식으로 자비와 긍휼을 베푸셨는가하면 언약의 피를 뿌려서 그렇게 하셨습니다. 출애굽기 24:5-8에 보면 다음과 같이 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의 청년들을 보내어 번제와 소로 화목제를 여호와께 드리게 하고 모세가 피를 취하여 반은 여러 양푼에 담고 반은 단에 뿌리고 언약서를 가져 백성에게 낭독하여 들리매 그들이 가로되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우리가 준행하리이다 모세가 그 피를 취하여 백성에게 뿌려 가로되 이는 여호와께서 이 모든 말씀에 대하여 너희와 세우신 언약의 피니라" 이 언약의 피로 인하여 그들은 죄 용서함에 관한 자비를 받은 것입니다. 이런 종족을 가지고 출애굽기 19:5-6에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따라서 이 언약의 피 밖에 있는 이방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죄에 대한 자비와 긍휼을 입지 못했기에 그들에게는 자신들의 죄가 그대로 있을 것이 분명하고 그 죄에 대해서는 가차없이 냉혹한 저주가 임하게 됩니다. 왜 이렇게 나오시는가 하면, 그래야지만 하나님 자신이 세우신 맹세와 언약이 제 모습대로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자비가 자비다울려면 자비없음이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지 확실히 해 줄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약속의 땅을 점령하는 과정에서 이방 민족에 대해서 어떤 식으로 처리했는가는 여호수아에 잘 나와 있습니다. 그 중에 한 대목을 찾아보면. 여호수아 11:19-20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기브온 거민 히위 사람 외에는 이스라엘 자손과 화친한 성읍이 하나도 없고 다 이스라엘 자손에게 쳐서 취한바 되었으니 그들의 마음이 강퍅하여 이스라엘을 대적하여 싸우러 온 것은 여호와께서 그리하게 하신 것이라 그들로 저주 받은 자 되게 하여 은혜를 입지 못하게 하시고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대로 진멸하려 하심이었더라"
즉 하나님께서 일부로 이방민족들로 하여금 완악하고 강퍅하게 만드셨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로 하여금 하나님과 함께 있는 그 사랑과 자비와 긍휼의 위력이 얼마나 소중하고 귀한 것인가를 깨우쳐 주기 위해서 자비와 긍휼의 대상이 못되는 이방인들을 미끼로 삼은 것입니다. 그래서 위의 구절에서 '여호와께서 그리하게 하신 것이라 그들로 저주 받은 자 되게 하여 은혜를 입지 못하게 하시고'라는 말씀이 들어있는 것입니다. 이방인들이 지옥하게 된 것도 자신들이 이스라엘보다 더 죄를 지어서도 아니요 이스라엘이 그들보다 더 깨끗하게 살아서가 아니라 순전히 하나님의 용서하심이 저쪽 이방인들에게 주어지지 않았고 오로지 이스라엘 사람에게만 주어졌다는 단지 이 이유 하나만으로 운명이 영원히 결정되어 버린 것입니다. 신명기 9:5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네가 가서 그 땅을 얻음은 너의 의로움을 인함도 아니며 네 마음이 정직함을 인함도 아니요 이 민족들의 악함을 인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심이라 여호와께서 이 같이 하심은 네 열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하신 맹세를 이루려 하심이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이스라엘 나라의 개만도 못한 것이 이방인의 입장입니다. 제가 지어낸 말이 아니라, 믿음에 대해서 예수님으로부터 칭친받고 구원받은 한 여인의 고백입니다. 마태복음 15:25-27에 보면, "여자가 와서 예수께 절하며 가로되 주여 저를 도우소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여자가 가로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하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왜 우리는 구원받았노라고 자처하면서 이런 고백을 못하는 겁니까? 그것은 아직 예수님의 자비와 긍휼이 시큰둥하게 여겨져서 그런 것이 아닐까요? 자신을 개만도 못하는 자라는 인식을 가지고 성경을 보시기 바랍니다. 무언들 이해 안되는 대목이 있겠습니까? 다 됩니다. 성경이 어려워서 아니라 우리의 마음이 교만과 죄로 혼란스러워서 진실을 진실답게 보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을 개에 비유한 이 구원받은 여인이 추구하는 것이 무엇이겠으며 진정 사모하고 있는 희망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그 나라와 의 뿐입니다.
그렇다면 그토록 개 취급하던 이방인들 중에서 구원받은 자가 생긴다는 것은 무슨 근거로 인한 것입니까? 사도행전에 보면 이방인들에게 하나님의 영이 임해서 유대인들을 깜짝 놀라게 한 경우가 있습니다. 이방인들에게 자비와 긍휼이 넘어온 것은, 원래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의 대상이었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완악해서 그 자비와 긍휼을 거부했기 때문입니다. 이들이 하나님의 용서를 거부한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로마서 10:2-4에 보면,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그 나라와 의는 오직 예수님에게만 있다는 것을 의지하고 믿을 때만 생겨나는 법인데 이들이 그것을 모르고 자기 코 앞에 율법이 있으니 그 율법을 지켜서 하나님께서도 인정하시는 의를 만들어보겠다고 나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의 행함의 의지하다가 예수님의 십자가가 걸림돌이 되어 그만 그 돌 앞에서 자빠지게 된 것입니다.
따라서 그로 인해 천국 정원의 T.O, 즉 빈 자리가 생겨난 것입니다. 그 빈자리를 메우는 형식으로 차고 들어온 자들이 바로 이방인들 중에서 구원받은 우리들입니다. 즉 우리는 보궐로 들어온 셈입니다. 이것을 로마서 11장에서는 접붙임을 받았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11:25에 보면, 이로써 온 이스라엘이 구원받는다고 했습니다. 즉 우리들도 당당하게 자비의 공동체 일원이 된 것입니다. 에베소서 2:12에 보면,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라는 말씀이 지금 우리는 실감나야 합니다.십자가의 놀라운 능력으로 구원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신을 개같다고 한 그 여인의 진실한 고백이 얼마나 자기 자신의 모습을 제대로 안 위대한 고백인가를 아시겠지요.
여러분, 그 나라와 의라는 것이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선행을 쌓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진정 생명이 오직 예수님을 통해 자비와 죄용서에 있음을 아는 것을 뜻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자신이 개같다는 고백이 진정 자신을 제대로 안 상태에서 고백하게 하옵소서. 그리고 늘 그 상태로 유지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