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6:16-18
6:16 금식할 때에 너희는 외식하는 자들과 같이 슬픈 기색을 내지 말라 저희는 금식하는 것을 사람에게 보이려고 얼굴을 흉하게 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받았느니라
6:17 너는 금식할 때에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으라
6:18 이는 금식하는 자로 사람에게 보이지 않고 오직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보이게 하려함이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하나님은 사람을 둘로 구분합니다. 살아있는 자와 죽은 자를 구분짓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것을 죽음으로 봅니다. 하나님과의 연결되어 있는 자는 수시로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염두에 두게 됩니다. 그 받아들이는 것 중의 하나가 바로, 산 자와 죽은 자를 구분하는 하나님의 기준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자는, 하나님이 인간을 어떻게 보느냐 하는 것조차 알 길이 없기 때문에 이러한 하나님의 기준에 의해서 자신을 비쳐보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 보시기에 진정으로 살아 있는 사람들은 누가 있습니까? 하나님은 스스로 말씀하기를,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라"는 겁니다. 그리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죽어 있는 것이 아니라 엄연히 살아있다는 겁니다. 과연 이 말씀이 사실일까요? 마태복음 22:29-32에 보면,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고로 오해하였도다 부활 때에는 장가도 아니가고 시집도 아니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 죽은 자의 부활을 의논할찐대 하나님이 너희에게 말씀하신바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것을 읽어 보지못하였느냐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니라 하시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부활의 차원에서 인간을 다루시고 보십니다. 지금 하나님 앞에서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천사와 함께 있습니다. 어떻게 이들은 죽은 자라고 말 할 수 있단 말입니까! 그래서 하나님은 말씀하시기를, "나는 산자의 하나님이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다"라고 하셨습니다.
즉 이 세상에서는 감히 하나님이라고 부를 수 없는 그런 인간들이 있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런 자는 어디까지나 죽은 자이며 결코 하나님은 그들의 하나님이 아니라는 겁니다. 우리도 이러한 기준을 우리의 사람 봄의 기준으로 삼아야 마땅합니다.
사람이 그저 세상적인 기준에 맞추어 살게되면 이 세상적인 영광의 비해 자신이 너무나 초라하다는 것을 알고 늘 실망을 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오로지 세상 기준 밖에 모르는 자들은 남에게지지 않기 위해 행동에 나서게 되는데 이 모든 행동을 유발하는 것은 바로 두려움입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이런 두려움에서 어떻게 벗어날 수 있었을까요? 요한 일서 4:18에 보니,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 나오는 사랑이란,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그 사랑이 아닙니다. 도리어 하나님이 먼저 내민 사랑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사랑을 드러내시면서 하나 밖에 없는 자기 아들을 화목제물을 제공할 정도까지 사랑을 하셨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결코 우리보다 윤리적으로 월등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단지 그들은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을 하나님의 일의 전부라고 믿고 순순히 받아들린 것 뿐입니다. 바로 이런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들의 의롭게 되었고 천사들과 함께 살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사랑이 없는 사람은 스스로 자기 자신을 사수해야 하기 때문에 참으로 힘든 인생을 살아갑니다. 만나는 사람마다 지지 않기 위해서 남보다 더 착해야되고 교회에는 남보다 신에게 봉사해야 하고, 더 충성해야 하고, 더 선한 일을 많이 해야 하는 부담을 짊어집니다. 이런 행동은 자기가 자기를 지켜내겠다는 무리한 발상에서 비롯됩니다. 물론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져 있기 때문에 이런 발상이 계속 이어지는 겁니다. 이런 행동의 일환이 곧 오늘 본문에 나오는 금식 행위입니다.
이들은 자신이 금식하고 있다는 이 사실을 자신의 공로로 삼고자 합니다. 이런 행위로 하늘의 상이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습니다. 즉 자신의 금식 행위를 자신이 믿고자 하는 겁니다. 이것은 그만큼 모든 것이 두렵다는 표현에 지나지 않습니다.예수님은 그들에게 말합니다. 금식하려거든 차라리 머리 기름을 발르라고 말입니다. 여러분 머리에 매끈하게 기름 바르기 위해 금식하는 사람이 과연 있겠습니까? 금식이란 보다 자신을 일그러지게 연출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래야 자신이 속에 품은 의사를 주위 사람과 하나님에게 알릴 수 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스스로 음식을 끊는다는 대단한 독기를 품지 아니라면 이룰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오기가 과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진정한 금식의 뜻을 이룰 수 있을까요? 그렇지 못합니다. 그 근거는 이사야 58:6-에 나와 있습니다. "나의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 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주며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케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 또 주린 자에게 네 식물을 나눠 주며 유리하는 빈민을 네 집에 들이며 벗은 자를 보면 입히며 또 네 골육을 피하여 스스로 숨지 아니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그리하면 네 빛이 아침 같이 비췰 것이며 네 치료가 급속할 것이며 네 의가 네 앞에 행하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뒤에 호위하리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진정함 금식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대단히 만족하시고 그 금식에 따른 결과대로 능력을 부어주신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런 만족스러운 금식은 그저 굶는다고해서 성취되는 것이 아니라 실질적으로 압제 당하는 자를 풀어줄 수 있는 능력으로 작용해야만 합니다. 과연 이런 금식을 누가 할 수 있단 말입니까? 예수님께서 시키시는대로 우리들이 금식하면서 머리에 기름만 받으면 압제 당한 자를 진정 풀어낼 만한 능력이 샘솟듯 일어납니까? 아닙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금식하는 것에 대해 비아냥 거리시는 것은, 인간이 그 어떤 금식을 해도 그것이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금식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하신 말씀입니다. 은밀한 중에 계신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금식은 그 금식으로 인해 하나님께서 친히 갚아주시는 식으로 실질적인 구원의 효력을 나타나게 됩니다. 그런데 이렇듯 구원적인 효력을 가진 금식은 이 세상에서 예수님만 하셨습니다. 다른 사람은 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금식하는 본인조차 악의 압제에서 벗어나야 될 대상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4장에서 예수님이 금식하신 것은 악의 권세와의 대결 때문이었습니다. 그 어떤 자도 금식으로 인해 떡의 유혹이 물리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금식 중에서도 떡의 유혹을 물리칠 수가 있었습니다. 그 결과로서 우리 성도에게 구원의 혜택이 돌아온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성도들이 할 수 있는 진정한 금식이란 딴 게 아니라, 예수님의 고난과 금식의 효력만을 인정하는 금식이요 동시에 자신의 금식 행위에는 결코 가치를 두지 않는 금식입니다. 차라리 우리는 굶어죽어 마땅한 죄인임을 절감하는 겁니다. 금식을 한다는 이 행위에 근거해서 우리가 구원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예수님의 고난 때문에 구원받았음을 인정하는 금식이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사랑'입니다.
사랑이란 온유하고 화평하며 무례히 행치않고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고 자기 자랑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나 말고 예수님이 다 해놓으셨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누구를 만나든지 싸워 이기거나 그 사람을 굴복시키거나 꺽어 버려서 내 사람 만들려고 하지 마시고 그저 주님의 사랑을 전달할 사람으로 보시기 바랍니다. 자꾸만 상대방을 이기려고 하니 자기 자신부터 피곤해 지는 법입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처럼 하나님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구원이 되었으면 그 사랑만을 자랑하는 성도가 됩시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남과 경쟁해서 이기는 재미로 사는 것이 도리어 마귀에 시험에 빠진 일이라는 것을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