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구제에 담긴 뜻

아빠와 함께 2022. 8. 27. 20:19

마태복음 6:1-4
6:1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치 않도록 주의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얻지 못하느니라
6:2 그러므로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 영광을 얻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 같이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6:3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의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6:4 네 구제함이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가 갚으시리라

 


모든 사람은 본성 따라 살게 마련입니다. 아무리 본성을 감추기 위해 노력해도 어쩔 수 없이 자기 본성이 시키는대로 움직이는 것이 자연적인 본성입니다. 인간의 본성은 무엇이겠습니까? 죄입니다. 아무리 철저하게 해도 화산재가 분출하듯이 죄의 본성은 터져나와 주위에 흘러 넘치게 됩니다. 구제에 관해서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은 구제를 통해서 어떤 죄악된 본성이 터져나오는 지를 우리에게 알려 주고 계십니다. 구제라는 선한 일을 통해서도 인간의 죄성이 주체할 수 없이 터져나온단 말입니까? 인간들이란 마치 화투장의 뒷면 같이 똑같습니다. 화투장의 앞면은 각가지 색깔로 채색되어 있고 저마다 고운 자태를 드러내지만 뒷면은 다같이 칙칙합니다.

 

이처럼 우리네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서로 잘났다고 치장하고 실력을 쌓기 위해 노력하지만 실상은 동일합니다. 왜냐하면 본질적인 뒷면은 모두 다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원하실 때, 그 어떠한 요건이나 조건을 묻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 성에 유황불이 떨어지려고 할 때, 구원받은 롯이 과연 다른 사람들보다 인간적인 요건상 차이났습니까? 아닙니다. 롯의 사위는 유황불 소식은 단지 농담으로 간주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인간의 구원할 때는 일체 인간 쪽의 조건을 불문에 붙이고 단지 하나님의 약속에 대해서 고분구분 인정하느냐를 따지십니다. 롯이 개인적인 다른 사람보다 재산이 많다든지, 인격이 훌륭하다든지, 대인 관계에서 착실했다는 이런 내신 성적인 전혀 반영되지도 않고 반영될 필요로 없습니다. 롯은 그냥 그 하나님의 약속은 순순히 받아드린 것 뿐입니다. 그만큼 하나님께서 아예 구원의 조건으로 우리 인간 것을 첨가하도록 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자신이 남보다 더 죄인이라고 자책할 필요는 없습니다. 사실 그 부모에서 그 자식이 태어난 탓이요 그 부모는 또한 인류의 시조인 아담의 죄의 지배 하에 있고 그 죄를 물러받아서 그러합니다. 이러한 동일성이 오히려 우리들을 홀가분하게 합니다. 왜냐하면 스스로를 자책하거나 심문할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한 순간의 실수로 우연히 죄를 지은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죄만을 짓도록 운명지어진 존재로 태어났기 때문에 죄를 지은 겁니다.

 

따라서 중요시되는 것은 화투장의 앞면입니다. 하나님은 앞면을 보십니다. 그 앞에서는 인간의 자신의 의가 그려져 있어서는 아니됩니다. 오로지 예수님의 의만이 드러나있어야 합니다. 문제는 구제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이 인간에게 도달될 때는, 자기 의를 따로 챙길 수 있는 기회처럼 활용된다는 겁니다. 즉 구제를 안할 때보다 구제했을 때는 구제한만큼 보다 의로운 쪽으로 기울어지게 된다고 여기기 십상입니다. 사람은 죄인이기 때문에 사실상 하나님 보시기에 영광성이란 아예 출현될 수 없습니다. 로마서 3:23에 보면,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신이 시키는대로 임무를 달성하면 그만큼 자신의 화투장의 앞면은 남들보다 더 화려하다고 여기게 됩니다.

 

오늘 본문 2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그러므로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 영광을 얻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 같이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영광스러운 사람이란 다른 사람보다 자신이 한층 더 가치에 사는 사람이라는 나타내는 표현법입니다. 모든 인간이 동일하게 같은 아담의 죄를 같이 물러 받았는데 과연 구제함으로서 타인보다 더 영광스러운 대우를 받아도 마땅할까요? 구제하는 자가 더 훌륭하고 영광스러운 존재라고 생각하는 것은 진짜 하나님의 뜻을 몰라서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미래의 등장될 하나님의 참된 나라의 원칙을 미리 적용시키기 위함입니다. 인류의 전체 역사를 열차에 비유한다면, 예수님은 열차 맨 앞인 기관실에서 거꾸로 이 현재 세계에 미리 오신 것이 됩니다.

 

요한복음 1:15에서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다음과 같이 소개합니다. "내 뒤에 오시는 이가 나보다 앞선 것은 나보다 먼저 계심이니라" 참 기이한 소식입니다. 나중에 태어날 분이 자기보다 먼저 계신 분이라는 겁니다. 즉 미래의 나라의 주인공 되시는 분이, 앞당겨 현재에 나타나셨으므로 비록 먼 미래의 세상은 되지 않았지만 현재에서도 미리 미래의 그 나라를 원칙에 참여할 수 있게 됩니다. 따라서 구제에 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미래에서 오신 분의 이야기를 듣지 않고서는 진정한 구제의 뜻을 우리가 알지 못합니다. 우리들이 아는 것은 기껏 과거의 구제에 대한 우리 인간들의 일방적인 견해 뿐입니다. 예를 들면, 잠언 19:17에,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이는 것이니 그 선행을 갚아 주시리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가난한 자에게 구제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도로 갚아주신다는 겁니다. 따라서 이 말씀을 인간이 실행에 옮길려면 먼저 '구제 행위'가 분명히 성립되어야 하고, 둘째로 그 구제한 본인이 자신이 구제했음을 분명히 알아채고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복이 그 당사자에게 도로 돌아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처럼 구제를 하라고 하시는 이유가 무엇일까? 단순히 인간의 선행 솜씨가 얼마나 대단할 것인가 감상하기 위해서입니까? 아닙니다. 출애굽기 22:21-24에 보면, "너는 이방 나그네를 압제하지 말며 그들을 학대하지 말라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이었었음이니라 너는 과부나 고아를 해롭게 하지 말라 네가 만일 그들을 해롭게 하므로 그들이 내게 부르짖으면 내가 반드시 그 부르짖음을 들을찌라 나의 노가 맹렬하므로 내가 칼로 너희를 죽이리니 너희 아내는 과부가 되고 너희 자녀는 고아가 되리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중요합니다. 그들이 애굽에 있을 때, 하나님 이외에 그 누구도 그들을 구원해 줄 자가 없었습니다. 본인의 힘이나 노력으로도 불가능했습니다. 마치 고아나 과부나 나그네 같은 처지에 있었습니다. 이럴 때 하나님의 자비가 임해서 그들만이 하나님이 함께 사시는 거룩한 나라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형편 따라 이스라엘 백성 중에서 어떤 이는 과부로, 어떤 이는 고아로, 어떤 이방인은 나그네로 이스라엘 속에 등장시키는 것은, 과연 아직도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를 망각하지 않았는지를 늘 확인하기 위해서입니다. 이스라엘 나라에서 모두 부자되게 하시어 아예 고아나, 과부나, 나그네가 없게 하면 더 편하지 않느냐 생각하시겠지만 하나님에게 중요한 것은 경제 형편이 아니라 마음 형편입니다. 비록 재산을 가지고 안정적으로 보이는 권세가 있다할지라도 이것으로 내가 살아가고 있이 아니라 오직 여호와의 은혜로 살아감을 아직도 잊지 않는가를 되묻고 계시는 겁니다. 이런 차원에서 잠언 17:5은 쉽게 이해됩니다. "가난한 자를 조롱하는 자는 이를 지으신 주를 멸시하는 자요 사람의 재앙을 기뻐하는 자는 형벌을 면치 못할 자니라" 따라서 예수님 당시의 성직자들은 이 구제를 대단히 중요한 행사로 여겼습니다 왜냐하면 미래의 천국 원칙이 예수님의 입을 통해 그 현장에서 공개됩니다.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라는 원칙입니다. 세상에, 자기 오른손이 하는 것을 타인의 왼손이 모르는 것은 가능하지만 어떻게 본인의 왼손이 모르게 구제할 수 있단 말입니까? 이것은 인간의 모든 구제 능력을 초월하는 말씀입니다. 인간의 오른 구제는 그의 왼손에도 금방 탄로날 행동입니다. 그리고 행위는 곧 그 자신의 의로 축적이 되고 누적이 되고 그것이 곧 사람들에게 영광스로운 것으로 선전되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인간의 실상은 화투장 뒷면처럼 모두다 한결같이 죄인입니다. 이 죄에 대해서 미래의 나라의 원칙을 적용시키면 그냥 그 자리에서 사형입니다. 즉 왼손이고 오른손이고 이미 죽은 자의 손입니다. 구제를 해서 하나님으로부터 되돌려 받는 식으로 축복을 받을 그런 처지가 아닙니다. 십자가를 통해서 예수님과 같이 이미 죽어버려야 될 신분들입니다. 그런데 대가를 요구할 왼손이 어디에 남아있단 말입니까! 죽을 자에게는 천벌만 주어질 뿐입니다. 따라서 잠언 19:17에 나오는 구제의 대가는 모두 영생입니다. 세상적인 출세를 노리면 안됩니다. 평소에 늘 구제를 강조했던 야고보나 베드로나 사도 바울이 재벌 업체를 인수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들의 모든 행위는 하나님께서 친히 하늘 나라 그 자체로 갚아주시는 겁니다. 자신은 그저 죄인될 뿐임을 구제 행위를 통해서 또 다시 절감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조금이라도 선한 일을 했다고 여겨지면, 자기 의와 세상 영광을 대가로 기대하기 때문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은혜를 안다고 자부하지만 각가지 행위를 통해서 아담의 죄가 그대로 살아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저 롯처럼 하나님의 약속만을 쳐다보며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마태복음' 카테고리의 다른 글

그 나라와 의  (0) 2022.08.27
금식  (0) 2022.08.27
일점 일획이라도  (0) 2022.08.27
소금과 빛  (0) 2022.08.27
세례를 통해 새로운 세계를 만남  (0) 2022.08.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