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5:13-16
5:13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 없어 다만 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5:14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5:15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비취느니라
5:16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는 항상 동등성이 전제됩니다. 다같이 자존심이 있고 다같이 자신의 존귀함을 추구하기 때문에 어느 정도 타협과 양보로서 대충 절충되기 마련입니다. 아무리 궁지에 몰려도 사람은 자신의 가치를 포기하고 싶지는 않는 법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인간 사이의 관계를 가지고 그대로 하나님을 상대하려고 하니 여기서 문제가 생기는 겁니다.
사람이란 하나님에게는 엎드려 경배해야 될 입장에 있습니다. 엎드려 경배한다는 것은 자기 주장, 자기 자존심을 도저히 찾을 생각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겁니다. 엎드려 경배하는 그 어깨와 등 위에서 그저 무심히 하나님의 말씀만 떨어질 뿐입니다. 그 말씀에 토를 달 처지가 아닙니다. 엎드려 경배할 수 있는 인간이 된 것만해도 행복이요 축복입니다. 그것 뿐입니다. 달리 더 탐심을 낼 이유가 없습니다. 엎드려 경배하고 있기도 행복한데 어떻게 더 큰 행복과 기쁨을 추구하겠습니까! 따라서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새로운 피조물이란, 사고방식이 이와같이 바뀌는 것을 말합니다. 세상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당당하게 자기 주장을 고집하던 그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는 엎드려 경배하기에 급급하는 사람으로 달라져야 참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사실 하나님 말씀은 그 어느 한 말씀이라도 우리 인간이 지켜낼 수가 없는 겁니다. 그저 죄인으로서 하나님 앞에 엎드려 경배할 따름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서 보면, 그냥 소금이요, 그냥 빛으로 규정해 버리십니다. 엎드려 경배한 댓가로 그렇게 해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냥 소금이라고 선언해 버리고 빛이라고 선언해 놓으신 상태입니다. "열심히 노력해서 빛의 노력을 할 경우에만 계속 빛이라고 해줄께"가 아닙니다. "착실히 노력하여 소금 노릇을 잘 하고 있을 경우에만 소금이라고 봐 줄께"가 아닙니다. 모든 사태를 미리 아시는 하나님께서 성도의 행함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그렇게 확고히 규정해 버렸습니다. 따라서 실수나, 실패나 잘못이 있다하더라도 소금이 아닌 것이 아니요 빛이 아닌 것이 아닙니다. 성도의 잘못이나 실수를 가지고서도 하나님은 여전히 소금과 빛으로 사용하시려는 겁니다.
왜 예수님은 성도가 이 세상에서 위치한 모습을 소금과 빛으로 표현하시는 겁니까? 그것은 둘 다 확고한 영원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에스겔 43:24에 보면, "나 여호와 앞에 받들어다가 제사장은 그 위에 소금을 쳐서 나 여호와께 번제로 드릴 것이며"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호와께 드리는 제물에 소금을 치는 것은그래야 제물의 맛이 나기 때문입니다. 제물에도 맛이 나야 한다는 말은, 제물을 하나님께서 잡수시는 음식이라는 차원에서 표현하면 그렇게 됩니다. 이것을 '응식'이라고 합니다. 레위기 2:12-13에 보면, "네 모든 소제물에 소금을 치라 네 하나님의 언약의 소금을 네 소제에 빼지 못할찌니 네 모든 예물에 소금을 드릴찌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제물의 소금은 그냥 소금이 아니라 '언약의 소금', 즉 '언약된 소금'이라는 겁니다. 소금이 빠져버리면 하나님의 약속과 상관없는 제물이 되는 겁니다. 꼭 소금이 들어가야 한다는 겁니다. 왜 그럴까요? 민수기 18:19에 보면,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거제로 드리는 모든 성물은 내가 영영한 응식으로 너와 네 자녀에게 주노니 이는 여호와 앞에 너와 네 후손에게 변하지 않는 소금 언약이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약속이 도저히 변할 수 없음을 알려주기 위해서 제물에 소금을 뿌렸다는 겁니다. 즉 소금이란, 하나님께서 한 번 확고하게 다져진 것은 인간에 의해서 변개되거나 수정되지 않는다는 표시입니다. 이러한 소금의 기능은 예수님께서 지옥을 표현할 때도 등장됩니다. 마가복음 9:47-50에 보면, "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빼어버리라 한 눈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두눈을 가지고 지옥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 거기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 사람마다 불로서 소금 치듯함을 받으리라 소금은 좋은 것이로되 만일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이를 짜게 하리요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 하시니라" 즉 지옥에서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징벌을 줄 때에는 마치 맛을 잃은 소금을 다루듯이 불로서 징벌한다는 겁니다. 이것은 곧 동시에 그 지옥 징벌의 영원함을 소금을 앞세워서 표현하는 방식이기도 합니다.
바로 이렇듯 인간이란 하나님으로부터 변하지 않은 소금 언약의 원칙 하에 놓여 있는 겁니다. 성도란 하나님의 이런 변하지 않는 원칙 하에서 일하신다는 사실을 세상에 알려주는 사명을 띠고 있습니다.
■빛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두움이란, 빛이 나타나기까지는 자신이 어둡든지 아니면 안 어둡든지 조차 분간이 안되는 세계입니다. 이런 판국에 빛이 되는 성도들이 세상에 등장하므로서 비로소 세상은 참으로 어둡다는 것이 폭로되게 됩니다.
그러면 성도가 빛이 되고 소금이 된다는 것은 어떻게 처신해야 된다는 말일까요? 고차원적인 윤리나 도덕을 총동원해야 된다는 말일까요? 이 세상에서 진정한 소금과 빛으로 먼저 오신 이가 계십니다. 그 분은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그 분의 행실과 행동이 이 세상을 향하여 유일하게 보여주는 하나님의 영광스러움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이 땅에서 어떻게 처신했고 어떻게 활동했는가를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나타나자 세상의 모든 세력은 전력을 다하여 그 분을 세상에서 몰아내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세상이 주는 그 어떤 압력이나 회유에도 넘어갈 분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 분은 하나님 아버지께 경배하기에 분주했던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진정한 소금의 역할과 빛의 역할을 아시는 분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에서 기쁨을 얻고자 하신 분이 아닙니다. 그 분의 양식은 곧 하나님 아버지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고 그 뜻을 이루는 것이었습니다. 세상이 두렵지 않았고 세상 문제 때문에 고민에 빠지신 분도 아닙니다. 그저 소금과 빛의 역할만 충실할 뿐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뜻만으로 족한 분이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소금과 빛의 원조이십니다. 그렇다면 우리 성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적으로 환영을 받고, 인정을 받고 인기를 모아서 이 세상에서 큰 선교 사업이나 벌리는 것이 소금과 빛의 역할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초청하거나 호응하지 않더라도 그저 담담하게 빛이 이미 되었음을 보여주고 이미 소금되었음을 보여줄 따름입니다. 이러한 태도는 모두 하나님 앞에 앞드려 경배하는 그 행복으로 야기된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세상에서 행하던 행세를 그대로 하나님 앞에서까지 이어가지 않도록 해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