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누가복음 12장 14절 (구원의 진실) 220705a-이근호 목사
처음도 구원이고 나중도 구원이고. 모든 생각하는 것은 ‘나 어떻게 하면 구원받아요?’ 라는 생각뿐이에요. 그러니까 하나님을 어떤 하나님으로 봅니까? 구원의 하나님으로 보는 거에요. 구원의 하나님. 하나님을 구원의 하나님.
구원의 하나님이니까 그들에게 근거가 있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사랑이시니까 이 사랑을 앞에 땡겨버리면 무슨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 이게 바로 악마가 제시한 하나님이에요. 악마가 제시한 하나님. 여기 구원, 사랑 이걸 딱 기초로 놓습니다.
그러면 이들이 주장하는 구원의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 할 때 누굴 건진단 말이냐. 그들의 주장에 의하면 누구를 건지느냐? 여기 나를 건진다는 거에요. 그러니까 보세요. 뭐가 필요합니까? 나 있고 구원의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 이걸로 이 사람들은 성경에 기본 바탕은 다 갖췄다고 생각하는 거에요.
그런데 성경에 나 없거든요. 성경에 구원의 하나님이라는 게 이게 없습니다. 왜냐하면 구원의 하나님은 끝났어요. 이스라엘이 끝났으면 구원의 하나님도 끝났습니다. 이스라엘에 나타난 구원의 하나님은 결국 이스라엘의 실패로서 구원의 하나님이 아니었어요. 뭐로 변했습니까? 구원의 하나님이 심판의 하나님으로 변했지요.
처음부터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의 이방 나라의 자신의 계시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이스라엘에게 계시했어요. 이스라엘에게 계시할 때에 이스라엘에 구원의 하나님이 나타났잖아요. 그런데 구원의 하나님의 그 실적이 뭡니까? 구원의 하나님인데 구원받은 이스라엘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어요.
구원의 하나님이라고 이사야 뒷부분에 나오거든요. “야곱아 너는 택한 민족이다” 나오잖아요. 구원의 하나님 맞아요. 나오는데 그 구원 누가 누굴 구원했어요? 누굴 구원했습니까? 예수님만 구원했지요. 그게 성공이에요. 그것뿐이에요. 예수님 외에는 구원하지 않는다가 확실하고 그럼 예수님 외에는 구원하지 않는다는 말은 예수님 외에는 어떤 하나님이냐 하면 ‘심판의 하나님’이에요.
그러니까 하나님 얼마나 정직하고, 제대로 일하십니까. 예수님 외에는 심판을 해버려야 선과 악을 아는 지식을 따먹는 자는 정녕 죽으리라는 그 취지와 이게 일치가 되고 부합이 되는 게 맞지요. 원칙이 일관성이 있어요. 하나님의 원칙에. 심판의 하나님이죠.
구원의 하나님께서 이 땅에 오셔가지고 예수님만 구원하잖아요. 아버지가. 예수님만 구원하지요. 예수님만 구원하니까 이 말은 뭐냐 하면은 이 세상에 예수님이 왔다가 떠나버리면 예수님이 떠나버린 이 세계는 구원이 되고요. 구원의 세계가 되고 이 세계는 무슨 세계 됩니까? 이거는 지옥이 되는 거에요.
주님이 왔다 떠나니까 지옥 되는 거에요. 주님이 왔다가 떠나시니까 여기에 주인공이 있는데 이 세상에 주인이 있는데 이 세상의 신, 주인이 누구냐 하면은 이게 악마였습니다. 악마. 이 악마가 이스라엘까지 멸망시켰어요. 이 세상에 속한 것 중에서 악마에게 예속되지 않은 게 아무것도 없어요.
구원을 얻기 위해서 교회 나오면 안 됩니다. 교회는 진실이 뭐냐? 진실이 뭐냐를 알아야 돼요. 진실이. 진리가 무엇인지 알기 위해서 교회에 나와야 돼요. 나를 미워해도 좋으니까 내가 누군지를 알려 달라 이것을 하나님 앞에 호소해야지요. 제가 누굽니까?
여기 다녀갔기 때문에 예수님 따라간 예수님이 바로 천국이거든요. 그렇다면 예수님 천국 빼놓고 나머지는 뭐냐 하면은 지옥이에요. 지옥. 그러면 지옥을 지옥답게 하시는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십니까? 구원의 하나님도 아니고 사랑의 하나님도 아니고 뭐냐 하면은 심판하시는 하나님. 심판의 하나님이에요.
그러니까 지금까지 이 교회가 하나님이 달라요. 하나님이. 하나님 자체가 다르다니까요. 아까 처음에 뭡니까? 구원의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 이런 하나님은 없어요. 왜? 이 구원의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을 아시는 그분은 이 세상을 빠이빠이 하고 떠났기 때문에, 떠났기 때문에 여기 남아있는 하나님은 이방 나라의 하나님이고 이스라엘이 멸망될 수밖에 없던 이스라엘 속에 우상을 섬기라고 독촉했던 그 하나님이거든요.
그게 누구냐 하면은 남아있는 그 찌끄러기의 하나님은 뭐냐? 그게 악마였던 거에요. 그게 악마였다 이 말이죠. 그래서 악마를 악마로 드러내는 이 진실, 이 진실을 알게 된 게 기쁘지 않습니까? 정말 기쁜 일이잖아요.
예수님이 홀로 떠남으로써 제자들도 못 따라갔어요. 홀로 떠남으로써 남아있는 것들은 뭐냐 하면은 뭐만 남아있느냐 하면은 자아들만 남아있는 거에요. 자아들만. 그러면 우리는 나에 대한 질문할려면 어떻게 질문합니까? “내가 누굽니까?” 라고 물으면 하나님의 답변은 “너는 심판의 하나님에 의해서 심판 받아야 될 너다. 그게 진실이다.” “아이고 이제 제가 알게 돼서 감사합니다.” 지금 이래야 이 전체를 다 아는 사람이 되는 거에요. 이래야. ‘아 이제야 나를 아는구나.’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비로소 내가 심판 받아야 될 사람이라는 것을 아는 것은 이것은 바로 있다가 떠나신 예수님의 안목과 동일한 안목을 바라보기 때문에 비로소 밝혀지는 거에요. 예수님의 시선에서.
내가 어떻게 구원되는가에 관계없이 예수님의 안목에서 나는 어떻게 보일까를 비로소 알게 된 거에요. ‘아 내 구원은 애초부터 내 구원이 있다고 뒤에서 배후에서 조종하는 것은 마귀가 그런 조종했구나’ ‘네가 예수를 믿고 피를 믿고.. 이러면 구원됩니다. 천년왕국을 믿고..뭐..’
하여튼 내 귀에 캔디, 자꾸 속삭이고 있어요. 속삭이고 있는 이렇게 하면 구원받습니다. 이 속삭이는 모든 속삭임이 마귀가 와서 속삭였던 거에요. 마귀가 와서. 애초부터 구원 대상도 아닌데 구원 대상도 아닌데 자꾸 이렇게 하면 구원받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 구원의 하나님입니다. 이렇게 사기들을 쳐 먹은 거에요. 사기를 친 거에요.
사랑하는 사이는요 멜로드라마하고 에로드라마하고 차이점이 뭐냐? 멜로드라마는 주인공이 눈을 마주칩니다. 눈을 바라봐요. 그래서 부부라도 잠자리에서 눈을 안 마주치면 그게 멜로가 아니라 에로가 되버려요. 눈을 마주치면 우리가 다같이 공통적으로 이야기할 게 있다는 거에요. 당신이 보는 시선과 내 시선이 하나가 될 때 이거는 어떤 영화의 묘사라도 그게 아름다운 멜로가 돼요. 그런데 에로는 엉뚱한데 시선이 가고 있어요. 시선이 하나가 되지를 못하는 겁니다.
오늘 누가복음 12장 13절에 “무리 중에 한 사람이 이르되 선생님 내 형을 명하여 유산을 나와 나누게 하소서” 했어요. 자, 지금 이 사람은 예수님의 시선과 동일합니까? 전혀 동일하지 않지요. 자, 이 이야기부터 시작해야 돼요. 오늘 13절부터 시작하니까.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실 때 창세기 2장에 보면 “선악과를 따먹으면 정녕 죽으리라” 했잖아요. “정녕 죽으리라” 했지요. 그러면 이 죽음 경험, 죽을 때까지 그냥 아무 생각 없이 그냥 살다 죽어 버리는 이 죽음 체험 있잖아요. 죽음 경험. 이런 것이 보통 자기 안목, 주님의 안목이 아니고 인간들의 자기 안목에 그냥 머물러 있어요.
그런데 주님께서 오셔서 주님만이 아는 죽음의 의미가 확장이 됩니다. 확장이 되어버리면 죽음체험을 하지 말고 무슨 체험을 하느냐 하면은 지옥체험을 해야 돼요. 지옥체험. 지옥체험과 죽음체험과 다른 점은 죽음을 체험해보면 죽기 전에 이런걸 대비해야 되는구나. 왜? 죽기 전에는 내가 살아 있으니까.
죽음 체험은 죽기 전에는 나는 살아있다고 확신하고 그거는 분명하게 우리가 인정할 수 있다. 죽음체험이 되기 전까지는 살아있다 가 되지만, 살아있다 가 용납이 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지옥체험이 되어버리면 지옥체험은 큰 공간을 주고 이야기하는 거에요. 지옥에서 죽으나 사나 이건 지옥밖에 못 벗어난다는 체험이 지옥체험이에요.
그래서 주님께서 오신 것은 구원의 하나님이 아니고 사랑의 하나님이 아니고 너희는 지금 지옥에서 태어나서 그냥 죽는 게 아니고 지옥 사람으로 살다가 지옥 간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예수님이 오신 거에요.
그런데 지금 여기에 예수님 찾아왔던 어떤 사람인데 형에 대해서 재산 다 빼 돌려서 유산 없다고 하는 것은 이 사람은 지금 뭐냐? 자기가 죽기 전까지는 아직 살아있다고 자기가 자부하고 있는 거에요. 이거는 지옥 체험이 아니고 죽을 때는 죽더라도 살 때는 살아야지 이런 체험이에요. 이런 안목은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의 안목과 불일치해요. 일치되지 않습니다.
살다 죽는 것은 애들도 다 아는 이야기에요. 단순한 죽음이 아니라 지옥이라는 이 사실을 알려주는 사건이 창세기 22장에 보면 거기 이삭이 나오지요. 이삭. 이삭이 아버지와 같이 모리아 산에 갈 때에 아버지가 이삭에게 뭘 짊어지어 주느냐? 불쏘시개 장작을 지웁니다.
장작을 지우는데 이삭이 가면서 아버지한테 물어요. “아버지여 불쏘시개는 있는데 그리고 불도 있는데 제물이 없네요. 아버지 제물은 어디 있습니까?” 라고 물어요. 지금 어린 이삭은 지금 뭐냐 하면은 어린 이삭이 생각하는 것과 오늘날 우리 일반인이 생각하는 것과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거에요.
이삭은 본인들이 무슨 일을 한다고 생각해요. 하나님이 지시한 일. 하나님이 지시한 일을 하는 주체, 주인공이라고 여기는 겁니다. 본인들이 하는 거에요. 하나님의 일이 성사될려면 본인들은 죽어야 됩니까? 아니면 멀쩡해야 됩니까? 멀쩡해야 주의 일을 하잖아요. 이삭이 그 점에 대해서 의아해한 거에요.
주의 일을 하기 위해서 여러가지 준비를 하는데 아버지 뭐 빠트렸습니다 하는 식으로 이야기하는 거에요. 제물은 어디 갔습니까? 아버지가 이야기합니다. 제물이 제일 중요한 거에요. 거기서 캠핑할 것도 아니고. 제물이 제일 중요하거든요. 제물은 하나님께서 친히 준비하신다고 이렇게 말을 얼렁뚱땅 넘어갑니다. 차마 “너야 너. 네가 제물이야.” 그렇게 할 수 없어요. 어린 이삭이기 때문에.
나중에 이삭은 알아요. 나의 삶이라는 것은 애초부터 나에게 삶이라는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다. 왜냐 하면은 나는 죽음을 이 땅에서 드러내야 되고 이동시키는 거기 때문에 삶이라고 할 수 없어요. 내가 죽음 자체를 이 세상에 기입시키는, 집어넣는 그 역할이 이삭이었다는 사실을 이삭이 압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방식, 예수님의 시선은요 죽음이 찾아드는 방식. 죽음이 이 땅에 찾아드는 방식이 예수님의 일이에요. 아무리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도 이 땅에 들어오면 그 다음부터는 뭐냐 하면은 지옥체험을 해야 돼요. 본인이. 지옥이 뭐냐 하면은 하나님이 안 계신 곳이 지옥, 하나님 아버지가 안 계신 곳이 지옥이에요.
아버지한테 버림받은 구역을 지옥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은 구역. 인간세상 이 자체, 이 아름다운 세상 자체를 고스란히 그대로 하나님께서는 지옥으로 만들어버리는 거에요. 천국은 없어요. 천국이 없는데 교회가 천국이 있다고 이야기하잖아요. 그 자체가 마귀가 거짓말하고 있는 거에요. 이 땅에 천국은 없습니다.
인간으로 태어났으면 그냥 저주의 바다에 누워서 해 저문 노을을 바라다본다. 그냥 인간으로 태어났으면 그냥 저주에요. 예수님도 예외가 없어요. 예수님도 예외가 없어요. 예수님이 아는 아버지가 진짜 하나님이거든요. 진짜 아버지 입장에 의하면 예수님 너도 가서 지옥체험 하라고 보낸 거에요.
죽음체험은 살아있을 때는 체험을 못해요. 그러니까 주님께서는 살아있을 때 지옥체험을 그냥 죽는 체험이 아니고 살다가 늙어 죽는 그 체험 말고 죽음, 하나님이 정해놓은 이 죽음의 의미가 확장되니까 영원한 저주에요. 영원한 저주를 이 땅에 찾아드는 집어넣는 방식이 이삭을 통해서 하게 하신 거에요.
그럼 이삭의 목숨은 뭡니까? 세상 죄를 지고 가시는 자기 십자가를 지시는 누구의 모습이에요? 예수님의 모습을 언약이라는 이름으로 앞당겨서 보여준 겁니다. 그러니까 이삭은 아버지 제물이 어디 있습니까? 라고 말을 했지요. 극히 인간적인 발언이에요. 인간적인 발언을 하고 그 인간적인 발언의 의도와 이삭의 요구하는 그걸 완전히 인간적인 것은 그대로 드러내면서 그걸 묵살하면서 일방적으로 하나님의 계획된 대로 이삭을 몰아넣어 가버려요.
이게 오늘날 예수님의 운명도 마찬가지지만 이게 오늘날 성도의 삶이 이런 삶입니다. 내 원과 뜻이 있지만 주께서는 지옥체험을 우리 등짝에다가 짊어지게 하셨어요. 그럼 우리는 고생이고 슬픕니다 할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우리는 내가 이익이 되기 위해서 사는 게 아니고 진실이 뭐냐를 알려주기 위해서 그 역할하라고 이 땅에 태어났기 때문에. 진실이 뭐냐?
그런데 이삭이 말을 하던 말던 이삭의 말은 완전히 무시하고 제물을 이렇게 이삭 자체를 제물로 만들었지요. 만들었는데 여기서 뭐가 있느냐 하면은 숲속에 준비된 하나님의 양이 있었습니다. 이거는 아브라함도 몰랐어요. 아브라함은 막장이었습니다. 아이 모르겠다 양이 한 마리 있는데 내가 시늉이나 하자. 이거는 아브라함의 믿음이 아니에요. 그냥 몰랐지요.
아시는 분은 누구만 아셨어요? 하나님만 아셨어요. 왜? 아브라함도 마찬가지로 지옥 갈 사람이기 때문에. 갇혀 있는 입장에서는 아무것도 아는 게 없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양을 준비했다. 그래서 양 대신 잡아라. 양 대신 잡으면 거기 피를 내지 않겠습니까. 피를 내지요.
이 대신 잡힌 본인 아니고 너 말고 다른 나 말고 다른, 지금 무슨 이야기를 하느냐 하면은 나 말고 다른 분이 구원되기 때문에 우리가 구원되는 거에요. 내가 구원되는 게 아니고 나 말고 다른 분이 구원되는 거에요. 예수님 이름이 구원되는 거에요.
그리고 예수님 이름 안에 내 이름이 짤리고 예수님의 이름이 덮쳐서 구원되는 거에요. 쉽지요? 쉬운데 기분은 뭐 별로. 나 말고 다른 분이 언약의 피, 유월절의 피로 구원된다면 피가 피 되기 위해서 필히 여기 피를 만나는 것은 죄인이 될 경우에만 피를 마주할 수가 있어요. 죄인 경우에만. 죄가 있는 곳에 은혜가 비로소 보이는 거에요. 죄가 있는 곳에.
이미 선악과를 따먹었지요. 선악과 따먹고 난 뒤에 악마가 선악과를 조장하고 부추깁니다. 선과 악 중에서 네가 선하면 구원될 수 있다고 자꾸 “율법 있잖아 율법에서 선하면 너 구원되는 거야. 성경은 구원의 하나님께서 너 구원하려고 성경 줬으니까 성경대로 지키면 이게 하나님의 사랑이야.” 이런 식으로 구라를 거짓말을 치고 있었던 거에요. 이게.
내 안에 선악체계 있다는 것은 이건 아예 고려를 안 해요 지금. 이게 고장난 게 들어있다는 것, 저주받을 요소가 내 안에 있다는 것은 생각 안하고 바깥에 이런 것 준비해놨으니까 이거 믿으시면 구원받습니다. 행함 말고 믿으시면 구원받습니다 이런 식으로 한다고요.
내 자체가 구원의 대상이 안 되는데 이걸 이야기를 안 해요 사람들이. 이야기를 해버리면 교회 안 나오기 때문에. 구원받으려고 교회 나오지 진실이 뭐냐를 알기 위해서 교회 나온 사람 없거든요. 교회 나왔으면 헌금 좀 했으면 어떤 돌아오는 이익이 있어야 될게 아닙니까. 이익이 어디를 중점으로 한 이익이에요? 다른 사람 이익이에요? 누구 이익이에요? 나 이익. 나의 이익을 생각하는 자체가 이게 저주받을 짓이거든요. 이게.
그런데 모든 인간 치고 자기 이익을 생각하지 않고서는 행위에 나서지 않습니다. 모든 행위의 동기는 이익이에요. 내 이익. 그러니까 우리는 우리 시선과 주님의 시선과 합치될 수가 없지요. 피가 죄인을 요구하기 때문에 주님이 이야기하는 건 그거에요. 오늘 제목으로 삼고 싶어요. 오늘 제목을 간단하게 할 수도 있고 세 자로 하면 이겁니다. 제목이 ‘죽을래?’ 다섯 자로 한다면 ‘나랑 죽을래?’
피를 흘린 자존심이 있어서 너는 우리보고 죽으라고 초청하면 그게 구원이 돼요. “나랑 죽을래?” 그냥 ‘죽지마’란 뜻이에요. “홀로 죽지 말고 나랑 죽을래?” 그걸 또 줄이면 ‘죽을래?’ “죽을래? 너하고 나하고 붙어볼까?” 그런 뜻이 아니고. 죽어야 될 자를 우리는 자꾸 살라고 하니까 우리가 진실을 기피하잖아요.
“아버지 제물은 어디 있습니까?” 이거는 몰라서 그렇지만 진실을 왜곡하는 거에요. 본인이 제물이에요. 양은 대타고요. 본인이 죄인으로서 죽어야 돼요. 죄인으로서. 그래야 죄인으로 죽어야 될 걸 죄인으로 죽으면 구원되는 게 아니고 죄인으로 죽는 이유가 이게 지옥가기 때문에 지옥 보내기 위해서 죄인으로 죽이는 것이 주님의 일관된 취지입니다.
선악과 따먹었으니까 죄인이니까 죽이겠다는데 주님의 결정이 잘못 있습니까? 잘못 없지요? 문제는 우리는 죽는 건 당연한 거에요. 한 거고 주께서 대신 뭘 준비했다는 것. 철딱서니 없는 제물이 어디 있습니까? 왜? 제물 있어야 내가 살지요. 이게 얼마나 철딱서니 없는 거에요. 네가 왜 살아야 하는데? 죽어야 될 것은 너야. 제물 찾지 마! 예수님 찾지 마. 네가 지옥가야 돼. 그게 예수님의 안목이에요.
그렇다면 예수님이 우리 대신했으면 그 다음부터 우리의 삶은 우리가 예수님을 대신하는 삶만 남아있어요. 그러니까 죽어가는 즐거움이 남아있다 이 말입니다. 또는 죽어가는 자유가 남아있다는 거에요. 그 죽이는 방법이 직장생활이에요. 직장생활하면 그 다음부터 직장이 나를 죽입니다. 이 세상 삶이 죽이는 거죠.
사람들이 복음을 전하면 사람들의 상식은 이렇습니다. “저는 직장생활도 하지만 복음을 믿겠습니다.” 이렇게 나와요. 그러면 저는 묻지요. 복음이 밥 먹여주던가요? 묻고 싶어요. 복음이 밥 안 먹여줘요. 복음 믿는다고 알아서 아침에는 짜장면 배달해주고 저녁에는 짬뽕 배달해주고 그런 거 없어요. 그러면 복음은 밥을 안 먹여줍니다. 복음은 복음대로 제쳐두고 일상생활은 밥 먹여주는 일을 해야 돼요. 이게 직장생활이거든요.
밥 먹여주는 직장생활을 하면 뭐가 살아 있어야 되느냐 자아가 주동해야 돼요. 나를 놓쳐버리면 정신 바짝 안 차리면요, 쫓겨나요. 정신 바짝 차려야 돼요. “미스 김 커피!” “예예!” 정신 바짝 차려야 돼요. 정신 바짝 차려야 돼요. 엉뚱한 직장에서 복음 생활하다가 다른 짓하게 되면 큰일 나는 겁니다. 절대로 복음, 밥 안 먹여줍니다. 정신 바짝 차려야 됩니다.
바짝 차리면 자아가 철저해야 되고 완벽해야 되고 남한테 밑지지 않는 재능과 기술을 연마해야 됩니다. 연마. 갈고 닦아야 돼요. 숙련돼야 되고 누가 봐도 일 잘한다 소리 들어야 돼요. 그래야 이 땅에서 오래 살 수 있고 그래야 이 지옥에서 오래 살 수 있습니다. 이 지옥에서.
그러니까 복음은 자아를 인정하지 않고 밥 먹고 살려고 하니까 자아가 돈독해져야 되고 양쪽에서 지금 치일 판이라. 이게. 자아가 돈독한다는 것, 자아가 더욱 단단해 진다는 것. 이것은 무슨 뜻이냐 하면은 선악 지식을 작동시켜야 된다는 말.
선악이 무엇임을 분명히 해야 되고 선이 무엇임을 분명히 해서 내가 악에서부터 악한 사람으로부터 선한 쪽으로 악한 쪽에서 선한 쪽으로 점점 더 자기를 개조해야 되고 개선해나갈 때 이게 돈으로 이어져요. 착하고 훌륭하고 뛰어나고. 이건 뭐 사람들이 이런 사람 쓸려고 하지요. 게으르고 악하고 말썽꾸러기 이건 퇴출 1순위죠. 이건 안돼요.
악에서 선으로 사회가 통용화된 선, 저 사람 너무나 착실하고 착하고 맡은 일에 충실한다 이건 돈이 안 들어올 수가 없지요. 돈이 들어오지요. 이렇게 선악체제를 지탱해야 되고 이걸 붙잡고 있어야 돼요. 그런데 복음은 생명체제가 이 선악체계를 제거해요. 파괴시켜버립니다.
오늘 본문에 13절 한번 봅시다. “무리 중에 한 사람이 이르되 선생님 내 형을 명하여 유산을 나와 나누게 하소서 하니 이르시되 이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장이나 물건 나누는 자로 세웠느냐” 지금 13절에서 선생님 하고 예수님을 찾는 이 사람은 선악체제 가운데서 형은 악한 쪽에 속하고 나는 상대적으로 선한 쪽, 다른 말로 하면 악 때문에 피해를 입은 피해자 입장에서 지금 상담하러 온 거에요. 호소하러 온 겁니다.
‘이 사회의 정의가 죽었어!’ 이 사회의 악이 활개 치는 것을 개탄하는 사람이에요. 아주 정의로운 사람입니다. 그 선하다고 소문난 그 예수님에게 나의 억울함을 호소하는 이 자체는 이거는 전혀 비난받을 일이 아닌 것을 확신하고 찾아온 거에요. 주님의 선한 것과 내가 선을 행하는 나의 마음과 같은 방향이라고 자부했던 겁니다.
예수님한테 욕을 들을 짓은 아니라고 이렇게 확신했건만 14절에서 지금 주님은 누굴 나무래고 있습니까? 자기에게 상담하러 온 그 사람을 가족 때문에 문제 있어서 해결하러 온 그 피해 입은 자, 피해자를 호되게 지금 꾸중하고 있지요. 억울함을 품고 온 사람을 되려 나무래고 있단 말이죠. 나무래는 이유가 어디 나오느냐 하면은 15절에 나옵니다.
“그들에게 이르시되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ㅁㅁ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 하시고” 그 네모가 뭡니까? 인간의 ‘소유’의 넉넉함에 있지 않다. 자, 이 찾아온 동생의 문제점은 무엇인가. 그걸 한번 생각해봅시다. 동생의 문제점은 무엇인가. 이제부터 좀 난해합니다. 난해해도 할 수 없어요. 여러분들이 수준이 되니까 감당해야 돼요.
동생의 문제점은 사람하고 상대했다. 사람하고 상대한 거에요. 자아의 특징은 사람하고 상대한다는 것. 사람하고 상대합니다. 자, 그러면 제가 어렵게 한다 했으니까 어렵게 하겠습니다. 자아가 이것이 ‘나’가 최종적인 겁니까? 어떻습니까? 자아가 최종적인 거에요? 내가 처음이었습니까? 아니지요. 좀 어렵더라도 그냥 들어놓으세요.
원자 구조에서 여기 핵이 있고 주변에 전자가 있습니다. 있는데 핵과 전자 사이에 여기 원자가 축구장 면적이라면 핵은 모래 알갱이 하나에요. 그럼 그 중간에는 텅텅 비어있습니다. 그러면 세상은 원자로 되어있잖아요. 원자로 되어있는데 세상에는 왜 꽉 차있는 걸로 보입니까? 텅텅 비어있는데 꽉 차있는 걸로 보이는 이유는 뭐냐?
무슨 말이냐 하면은요 제가 어렵다고 분명히 언급을 했어요. 내가 여기 있고 만약 어떤 상가 집이 여기 있는데 여기가 한 20km떨어져 있다. 상가집이 여기 있다. 그런데 내 꿈속에 여기 20km 떨어진 상가집 무시하고 같이 있다. 이건 꿈이니까 그럴 수 있지요. 실제로는 안되지요. 한참 가야 되잖아요. 상가집 아닌 곳. 상가집 아닌 곳, 상가 집 아닌곳.
중간에는 관계없는 게 있어야 되는데 실제로 원자에서는 전자하고 핵 사이에 이만큼 떨어져 있는데 20km 정도가 아니에요. 더 떨어져 있는데도 이 세상은 왜 가득 차 보이느냐? 이걸 이제부터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전자는 마이너스고 핵은 플러스 양전자로 되어 있어요. 플러스로 되어있어요. 이것 가지고는 설명이 안돼요.
여기서 뭐냐 하면은 빛이라는 게 있어요. 빛이 1870년에 맥스웰이라는 사람으로 빛이 파동으로 되어있다. 파동으로. 파동으로 되어있다는 말은 아주 쉽게 생각해서 빛이 가는 곳에 전기와 파동이 이렇게 수직으로 또는 수평으로 이런 식으로 같이 이렇게 흐르고 있습니다. 파동이 있으니까 어떤 물질은 원자로 되어있거든요. 촘촘한 원자의 배열로 되어있다.
여기에 뭐가 오느냐 하면은 빛이 비취게 되게 되면 이 빛의 파동이 플러스 마이너스 되어있는 이 전자구조 속에 들어와 버려요. 들어와 버리면 전자와 빛이 만나면서 가만있겠습니까? 작용을 하겠어요? 작용을 하겠지요. 그러면 이 빈자리가 뭐냐 하면은 에너지 파동으로 가득 차게 되는 거에요.
빛의 에너지 파동이 뭐냐? 색깔입니다. 색깔. 전부 다 색깔이에요. 나뭇잎을 떼 가지고 보게 되면 핵하고 전자하고 멀어도 우리 보기에는 그 빈공간이 파란색으로 보이는 이유는 그게 빛이 산란되어서 가득 차 있는 거에요. 빛은 빛으로 하지 않고 마주침으로 말미암아 증폭되고 상쇄되고 파동이니까. 증폭되고 상쇄돼가지고 이것이 이런 눈에 보이는 것, 우리 눈에도 빛이 들어오고 눈에도 그 파동을 받아서 그런 모습으로 되는 거에요.
그러면 이 말은 뭐냐 하면은 이 세상에는 뭐가 없는 거에요? 물질이라는 건 없고 에너지의 파동의 장, 전체는 핵과 전자 또는 플러스, 마이너스의 에너지의 필드, 에너지의 장이 이 세상이 되는 거죠. 이걸 힘의 장, 힘의 영역이 이 세상입니다. 그러면 이것을 자아에 적용시켜 봅시다. 자아에게.
우선 성경을 모르는 사람 두 사람을 제시하겠습니다. 실존 인물이에요. 네비나스, 라캉. 두 사람의 의견이 둘 다 공통점이 뭐냐? ‘자아가 어디서 나오느냐’ 자아가 어디서 비롯되는가를 연구한 사람이에요. 보통 옛날에는 ‘내가 있고’ 시작하잖아요. 이 사람은 더 깊이 들어간 거에요.
‘내가 있고’ 라고 하지 말고 나는 육신 아닙니다. 육신은 DNA에서 나왔기 때문에 육신 말고 나, ‘나’라는 의식은 어디서 나왔느냐. 이거 따지는 사람이에요. ‘나’라는 의식. 이걸 따져야 육신 죽고 난 뒤에 나는 살아 있는가 그 문제도 해결되기 때문에 나에 관한 거에요. 나. 자아에 대해서. 육신 말고 자아가 어디서 나왔느냐 하는 거에요. 자아가. 옛날에는 이걸 생각 안했어요. 내가 있다고 생각했지 내가 어디서 나왔느냐를 몰라요.
우선 라캉이라는 사람. 라캉은 ‘타인이 있어서 내가 있다’ 타인이 있어서 내가 있다 하는 거에요. ‘타인’. 타인은 누구냐 하면은 엄마부터 해서 가까운 가족. 가족이 있는데 처음에는 나는 없고 가족에 포함이 되어있어요. 신생아들. 신생아는 ‘나’가 없어요. 엄마 몸과 자기 몸과 지금 분리가 안 된 상태에요. 분리가 안 된 상태입니다.
안되다가 라캉이라는 사람이 뭐냐 하면은 거울을 보면서 어느날 유모차에 앉아있던 아이가 좀 커가면서 거울을 보면서 거울에 있는 내가 ‘나’라고 안다는 거에요. 이걸 어떻게 자아가 아느냐 하면은 동물에게 실험해보면 동물은 이걸 몰라요. 동물에게는 자아가 없어요. 그냥 육신이 있을 뿐이지 자아는 없어요.
그런데 인간은 이걸 여기 비치는 것을 ‘나’라고 생각하는 거에요. ‘나’라고 생각하니까 육신이 뭐로 변하느냐 하면은 나로 변해요. 육신이 있는 건 맞는데 나는 일방적입니다. 내가 나를 대상으로 보는 순간 이미 자아가 생긴 거에요. 나를. 거울 앞에 비친 것이 저것이 내 모습이다 하는 순간 여기에 ‘나’가 같이 동반해서 같이 생겨버린 거에요.
그래서 그 전까지는 엄마가 시장에 간다 그럼 엄마가 시장에 가면 내가 없어져요. 이런 시기부터는 엄마가 시장 가도 나는 여기 있다는 생각을 하는 거에요. 내가 나를 있다고 보는 거에요. 내가 나를 대상화하는 시기가 왔다는, 내가 나를 대상하는 거에요. 그게 뭐냐 하면은 독립되는 거에요. 엄마로부터의 독립이에요. 엄마로부터 독립.
여기에 대해서 반박하거나 이의 걸 사람 있습니까? 철학자들은 논리적으로 철저함을 기해서 반박이나 논리가 되지 않기 위해서 그 쪽에서는 치열하게 그 논리싸움을 하고 있는 거에요. 치열하게. 지금 육신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지금 살덩어리 말하는 게 아니고 ‘나’가 어디서 나왔는가? 나는 인간의 어릴 때부터 ‘나’가 없을 때 있었고 없었다가 크면 있게 되는데 그 있다가 없었다가 있게 된 그 계기가 뭐냐?
그거는 거울이 왜 등장하느냐 하면은 거울 없이는 내가 안 비취니까. 거울 기능이 없으면 나를 나 자신을 대상화할 수가 없어요. 거울 속에 나는 내가 아니거든요. 내 육신이 아니잖아요. 비친 이미지잖아요. 이미지. 이미지는 거기 거울 속에 내가 있습니까? 비췰 뿐이지 내가 있는 건 아니잖아요. 그러니까 나는 뭐다? 나는 허상이다 이 말입니다. 의식에 불과하다 이 말입니다. 육신은 여기 있는데 따로 놀고 있는 거에요.
어렵기도 하지만 당연하지요. 우리는 왜 그걸 생각 못했을까? 너무나 당연하게 했기 때문에 생각을 못한 거에요. 이 생각 하나 안 하나 사는데 지장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걸 왜 따지느냐 하면은 이 정신병 때문에 그런 거에요. 정신병. 정신병이 뭐냐 하면은 그 나는 내가 대상화되지요. 그 대상화 되면서 나는 대상 없이는 나는 규정이 안 됩니다.
그 다음부터 나를 내가 생각하는 거 말고 내가 생각하는 나 말고 다른 타인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서 내가 그때 그때 다른 거에요. 그때 그때 달라지는 겁니다. 아버지가 되가지고 비트코인 그거 돈 하나도 못 벌고 돈 이천만원 날려가지고 우리 가정 어떻게 사는데! 이렇게 나오니까 아버지가 뭐랬습니까? 가자! 너 한 달간 학교 못 간다 하잖아요. 아우디 타고 물론 아우디 그것도 빌린 거지만. 완도 가자. 내 인생 조져놨다고 같이 죽자. 아버지 죽으면 저 죽겠습니다. 당신 죽으면 같이 죽을께. 이게 도대체 이게 무슨 이야기에요 지금.
육신이 다르잖아요. 육신이. 지금 육신이 다르다고요. 꿈도 다 달라요. 다 다른데 그 식구는 한꺼번에 차 타가지고 자살하고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납니까? 남편 없는 나는 없고요 자식 없는 나는 없고 아빠 없는 나는 없기 때문에 그런 거에요. 타인이 나를 규정할 때 그게 나라고 내가 이미 그렇게 젖어버린 거에요. 혜은이가 한 말 있잖아요. ‘그대 없이는 못 살아.’ 그대 없이는 못 산다는 거에요. 그대 없이는.
이게 왜 중요하느냐 하면은 저는 예수님 없이는 못 살아 그게 진짜 복음이냐. 우리가 주님을 대신 할 텐데 아직도 주님이 우리를 대신 한다고 우기고 있단 말이죠. 이제는 주님은 우리의 심판받을 자로 저주받을 자로 다 까발렸으면 더 이상 나한테 기대를 걸지 않아야 되는데 제대로 된 타자가 주님 아닙니까. 주님이 말하기를 진실을 이야기했어요.
너는 이 땅에 태어난 그 자체가 선악체계 자체가 너는 저주야. 이건 하나님의 일관된 거야. 변동이 없어. 죽어 인간아. 같이 죽을래? 그런 이야기가 그런 시선이 왔다는 것은 이미 주님께서 성경에 보니까 대신 치뤘다는 거에요. 네 자아 대신 내가 네 자아 되서 아버지 앞에 나섰다는 겁니다. 그게 주님의 이름이잖아요.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그 다음에 뭡니까? “구원을 얻으리라.” 그게 진실입니다.
구원받고자 하는 것은 악마가 작동하고 있는 거에요. 계속 작동하고 있는 거에요. 타인이여 이제부터 남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이게 체면이라고 이걸 명예라고 생각합니다. 이걸 우사스럽다 부끄러워서 못 살겠다 빚지고는 못 살겠다. 누가 그랬는데? 남들이 나를 잘해주면 나는 살고 남들이 나를 우습게 보면 내 안에 있는 타인의 욕망으로 인하여 나는 더 이상 그 타인의 욕망에 부합되지 않으면 난 자살할거야.
그래서 하루에 38명이 자살한답니다. 한국에. 1등 했어요. OECD에서. 선진국에서 1등 했습니다 자살율. 옛날에는 40등 했는데. 교회? 교회는 뭐가 있어요? 타인들의 눈이 있지요. ‘나’가 있으니까 피 앞에서 죄인으로 부름 받는 것이 성령의 역사인데 성령을 안 받았으니까 ‘나’가 어디 갑니까? 공동체에 가요.
공동체에 가 가지고 내 신앙이 맞지요? 그래서 사람들 교회 생활해야 구원받는다는 거에요. 자기 자아성으로 맞지요. 그거 맞는 이야기죠. 악마가 가르치는 대로 맞는 이야기에요. 이게 라캉의 주장입니다. 누가 반박하겠어요. 맞는데. 그런데 네비나스가 다른 이야기를 합니다. 네비나스는 뭐냐 하면은 자아는 불면증부터 시작해요. ‘불면증’. 잠을 못 자는 자아.
네비나스가 불면증부터 시작해서 자아 넘어 에는 불면증이 있다. 불면증의 특징이 뭐냐? 자고 싶은데 잠을 못 자는 것. 내 육신을 내가 통제 못해요. 자고 싶은데 잠을 못 자요. 자야 되는 데 잠이 안와요. 자야 되는데. 내 육신은 내가 자야 된다고 하는 게 아니고 그냥 육신 자체에서 균열이 생겼어요. 육신은 자라고 명령하는데 육신은 잠이 안와요. 어떡하면 좋겠어요?
육신은 두 개가 아니고 하나인데. 내부적으로 균열되어 버렸어요. 내부적으로. 이 말은 뭐냐 하면은 육신을 감당할 수 있는 다른 어떤 통제되는 어떤 게 없다는 게 밝혀졌지요. 여기서 불면증에서 뭐냐 하면은 몸을 눕힙니다. 네비나스는 유대인 철학자에요. 몸을 땅에 눕혀서 숙면 취합니다. 숙면 취할 때 잠을 잤잖아요. 이게 바로 자아입니다.
육신의 혼란을 그걸 우뚝 세우는 하나의 스스로 내 육신의 통제를 벗어난 따로이 성립된 통제수단. 이게 자아에요. 네비나스. 이게 자아입니다. 따라서 자아는 타자에 휘둘리는 게 아니고 내 육신적인 생물학적인 본심에서 자아가 나왔다고 하는 거에요. 둘 중에 어느 말이 맞습니까?
10분 쉬고 이야기합시다.
강남-누가복음 12장 14절 (구원의 진실) 220705b-이근호 목사
첫째 시간에 제가 그런 이야기했지요.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다가 떠났다는 게 그렇게 중요해요. 예수님이 오셨다가 떠남으로 말미암아 구원시켜주시는 분은 이 세상을 빠이빠이 떠나버리고 이 세상에 남아있는 여호와 뭐 어떤 신은 구원이 안 되는 신만 남아있어요.
그 구원이 안 되는 신이 인간에게 뭘 줬는가? 그것은 뭐 대표적으로 라캉과 네비나스를 통해서 언급했지만 그들도 구원이 안 되는 자들이거든요. 그들도 구원이 안 되는 자들이에요. 구원이 안 되는 자들에게 그들은 무엇까지 자기 지혜를 총동원해가지고 인간이 그동안 공부했던 것 다 해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바로 아까 라캉 같은 경우에는 거울 단계를 이야기한 겁니다.
어른 되서 거울을 본다는 뜻이 아니고 처음 자아가 시작되는 시점에 있었던 그 계기가 죽을 때까지 그게 표준으로 하나의 범주로서 계속 유지한다는 뜻이에요 그게. ‘왜 인간은 남을 의식하며 살아가는가?’ 그것은 라캉이 이야기한 거에요. ‘타인이 없으면 내가 없다’ 에요.
네비나스는 무가 없으면, 없음이 없으면 아무것도 없으면 나도 없다. ‘나’가 없는 상태에서 ‘나’가 어디서 나오는가? 그냥 통제되지 않는 육신. 통제되지 않는 육신의 흔적, 그것은 어른이 되도 불면증으로 계속 살아있는 거에요. 불면증으로. 불면증이 하나의 예거든요. 육신이 내 마음대로 안 되는 예 중에 하나가 불면증이에요.
잠 안자면 그만이지 이건 불면증 아니에요. 그게 아니고 자야 되는데 자야 되는데 하면서 새벽 4시반까지 5시까지 자야 되는데 하다가 벌써 날 다 새버렸어요. 자야 되는데 하다가. 그래서 제가 어떤 분에게 몸이 아프시다는데 혹시 잠 잘 주무십니까? 이렇게 물으면 몸은 아파도 잠은 잘 자요. 그러면 됐어요. 그러면.
그냥 누우면 잡니다. 그러면 됐어요 그러면 됐어요. 아무 이상 없는데 잠이 안와요. 이거 심각한 거에요. 자기 육신을 통제할게 없다는 뜻이거든요. 이 육신이 어디로 튈지를 알지를 못해요. 어디로 튈지를. 꽉 잡아줘야 되는데. 육신이라는 이 생물학적 이 살덩어리를 잡아줘야 되는데 잡아주는 게 없으니까 잠 오는 것도 자기 마음대로 못하는 거죠.
그래서 네비나스 같은 경우에는 어릴 때 생각하지 말고 어릴 때뿐만 아니고 모든 인간은 육신에 통제되기 위해서 자아가 생겼다 그런 이야기하지요. 그런데 이 인간들 철학자 배후에 누가 있습니까? 마귀가 있지요. 마귀의 특징은 자아를 긍정한다는 거에요. 나를 긍정하는 겁니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심판의 하나님이에요. 아까 이야기했지요. 이스라엘 구원의 하나님 나타나가지고 이스라엘 뭐로 만들었다? 구원의 하나님으로 시작해서 이스라엘 심판하는 심판의 하나님으로 전환시켜버렸지요.
이 구원의 하나님에 있어서는 이 자아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주님은 자아를 심판하는 게 아니고 육신을 심판해요. 육신을 심판한다고요. 그게 왜 그러느냐 하면은 이 자아라는 게 이미지거든요. 육신이 있지 자아는 없잖아요. 자아는 육신에서 나왔으니까. 이 육신을 누가 장난치고 있어요. 누가 다루고 있단 말이죠.
그거 설명할려고 아까 원자 구조를 이야기한 거에요. 이 세상에 보이지 않는 이 세상의 어떤 에너지 장이 있는데 그게 에너지 장이 아니고 뭐냐 하면은 악마의 장, 선악체계 악마의 권세가 이 세상을 꽉 잡고 있습니다. 이 권세에서 나오는 게 뭐냐? 이게 바로 자아라는 거에요. ‘자아’. 이게 주의 뜻이에요. “귀신아 나오너라” 할 때 그게 그 뜻입니다.
자아라고 하는 것은 육신이 통제 못하고 육신이 함부로 통제 못하는 이유는 배후에 시키는 대로 움직여요. 시키는 대로. 자아라는 게. 라캉처럼 남이 있어서 내가 의식해서 하는 게 아니고 남도 마찬가지고 나도 마찬가지고 악마가 제시하는 대로 악마가 움직이라는 대로 움직이게 되어 있는데 그게 뭐냐 하면은 죄의 종이 된다는 거에요. 죄의 종대로 하는데 그게 인간의 선악체제에 따라서 인간은 움직이게 되어 있습니다. 선악체제.
그 부자 청년이 예수님에게 뭐라고 했습니까?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어떻게 하면 영생을 얻겠습니까?” 지금 이 부자 청년이 그런 이야기할 때 그렇게 이야기하는 자아가 자기를 부정하고 있습니까? 아니지요. 희망을 갖고 있지요. 기대를 갖고 있지요. 긍정하고 있지요. 이것은 나한테 문제가 없다는 거에요.
지난 낮 설교에도 제목을 악마의 고통이라고 제목을 처음에 그렇게 생각했는데 악마가 어떤 분통을 터트리고 신에게 대드는 이유는 왜 내가 독자적인 내 의사 결정을 왜 못하게 하느냐고 대드는 거에요. 피조물이 됐다는 이 운명, 서글픈 운명에 대해서 신에게 대드는 겁니다.
저 예수라는 하나님의 아들은 심판주가 됐는데 왜 나는 나를 심판할 권한이 없습니까? 이렇게 되는 거에요. 그럼 선악체계를 알아버리면 내가 나를 평가할 수 있고 심판할 수 있고 어떤 진리냐 진리 아니냐를 단정하고 판단할 수 있는 권한을 우리에게도 달라는 거에요.
이게 악마가 이걸 달라고 해도 안 주지요. 안 주는 것에 대해서 반항끼로 인간을 볼모잡은 겁니다 악마가. 인간은 그냥 악마의 볼모잡힌 거기 때문에 인간에게 기대하지 마세요. 그거는 뒤에 대장이 시키는 대로 하기 때문에 그래요.
집주인이 자기 가구 배치를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잖아요. 집 주인은 악마고 그 집안에 갇혀있는 가재도구에요. 가재도구가 해방되는 길은 누가 담 타서 와가지고 그 악마를 묶어버리고 가재도구를 탈취해갈 때나 가재도구가 그때 해방을 얻고 자유를 얻는 겁니다. 지금 이 상태에서는 악마의 그 에너지 장을 벗어날 수가 없어요. 이 세상 자체가 선악체계로 가득 차있기 때문에. 선악체계가 안개로 자욱하거든요.
그래서 예수님에 대해서 이구동성으로 달려들어서 누구든지 예수님에 대해서 비난했습니다. 예수님은 어떻게 했는가? 마태복음 3장 2절에 보면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되어있어요. 이게 얼마나 중요한 말인지를 아셔야 돼요.
자, 인간은 뭐를 못 이긴다 했습니까? 자연을 못 이긴다 했지요. 그 예가 갈릴리 풍랑 있는 예를 들었지요. 인간은 자연을 못 이겨요. 인간은 자연을 못 이기니까 자연에다가 자연을 힘들게 해버리니까 고통을 줘버리니까 덩달아 인간도 자연이기 때문에 이 대자연의 고통가운데 같이 신음하는 중입니다. 신음하는 중이니까 이게 고통스럽잖아요.
고통스러우니까 고통을 해소하는 아이디어를 내는 거에요. 아이디어가 뭐냐? 이 자아를 나를 이 고통의 세계 속에서 면해서 고통이 없는 세계, 유토피아, 천국으로 데려가기를 위해서 이 자아들이 모여서 뭘 만드느냐 하면은 종교를 만들어요. 종교를 만들고 거기에다가 종교의 율법을 만들고 그 종교에다가 내세, 구원론, 종말론 다 만들어요. 조직신학적으로 모든 걸 다 갖춰 놨다 이 말이죠.
구원의 서정이라는 게 있거든요. ‘구원의 서정’. 미리 아시고 부르시고 소명 ,중생, 그 다음에 믿음, 믿음 되면 거룩한 성화, 마지막에 영광스러운 뭐 이렇게 있는 거에요. 이 구원의 서정을 이야기할 때 누구나 이거는 뭐냐 하면은 인간의 자아가 어떤 희망을 품을 수 있는 조건이 되는 겁니다. 주께서 나를 구원하셔서 미리 아신 자를 부르시고 믿음 주시고 어떻게 어떻게 하게 되면 나중에 영광스러움이 있다.
이 스케줄을 내가 꼬깃꼬깃 간직하는데 이걸 어디다 간직합니까? 나에게 간직하지요. 나에게. 나에게 간직하지요. 이거는 신음하는 이 고통에서 천국에 가기 위해서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 하는 거에요. 그런데 이 천국이라는 게 누가 만들었느냐 하면은 이게 에너지 장, 악마의 장에서 악마가 만든 아이디어에요. 천국이라는 게 종교라는데. 기독교, 불교 전부 다 마귀가 만든 거에요. 조직신학 모두 다. 철학부터 해서 모두 다.
그러면 하나님은 뭐하시노? 하나님은 심판하시죠. 심판. 마태복음 3장 1절에 “하나님 나라 곧 심판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가까이 왔다. 마태복음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 그러면 천국이 가까이 왔을 때에 인간들의 지금 선악체계에서 자기들이 만든 종교에서 자기들 생각하기에 누가 천국에서 탈락하고 누가 천국에 합격하겠어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과 서기관들은 천국에 내신하고 수능 점수가 좋아서 넉넉하게 되고 세리와 창기 도둑놈 강도 이것들은 땡 탈락되겠지요. 돈 좋아하는 세리와 남 죽인 살인강도 그리고 창기 이런 것들은 더러운 거니까 이런 자는 탈락하겠지요. 이 구조 자체를 주님께서 심판 하신다면 심판을 어떻게 하겠습니까? 뒤집기. 여기 이만기가 나와야 돼. 이만기가.
뒤집기를 하는 거에요. 뒤집기를 하면서 세리 창기가 구원받는다는 뜻이 아니고 뒤집기를 한다는 자체가 이거는 구조 자체가 이미 거꾸로 된 구조라는 것을 그들을 통해서 보여주는 거에요. 옛날 유대인들은요 율법에 준해서 소경되고 절뚝발이 병든 자, 귀머거리, 고아와 과부 이런 것은 조상의 죄가 저주가 누적이 되어서 그게 후손까지 미쳐져가지고 그렇게 됐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요한복음 9장에서 제자들도 그렇게 생각했잖아요.
저 사람이 소경된 것은 본인의 죄 때문에 소경되었습니까? 아니면 조상의 죄 때문에 소경 되었습니까? 사람들이 그렇게 주장하는 것은 출애굽기 20장에서 내 십계명을 어기면 3,4대까지 저주받는다 했으니까 그 말씀 그대로 저 윗대에서 잘못된 저주가 아래까지 내려오니까 이것이 태어날 때부터 소경되었다. 이것이 출애굽기 십계명 해석과 일치되는 딱 아구가 맞는 해석이라고 자부하고 있었던 거에요.
그런 연구를 누가 합니까? 바리새인과 사두개인과 서기관들이 하는 거죠. 소위 요새 신학자들이 하는 거에요. 지도자들이 하는 겁니다. 인간의 아이디어는 그것뿐이니까. 그런데 주님께서는 일에 두 번씩 기도하고 금식하고 간음한 적도 없고 십일조하는 그 바리새인을 뭐라고 했습니까? 짤라버리죠.
오히려 죄인이라고 하는 세리를 뭐라고 합니까? 의인이라고 하는 거에요. ‘네가 의롭다’고 해버리죠. 의롭다고. 뒤집어진 시각. 이 세상을 뒤집어진 시각을 가지고 이게 회개. 회개. 이게 지금 구원의 날이 아니고 제대로 세상을 평가한다면 구원은 없고 오직 제대로 된 하나님이라면 오직 심판만 주어지는 것이 제대로 된 하나님이라는 안목을 가진 자가 이게 기존 세상과는 다른 악마의 세상이 뒤집어진 거에요.
그러면 세례 요한은 뒤집어질려면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할까요? 죽어야지요. 어디 가서 죽을까요? 물속에 들어가라. 물속에 들어가는 것은 모형입니다. 물속에 들어간다고 죽는 시늉은 맞지만 아예 숨 끊어지는 것은 아니거든요. 물속에 집어넣어서 10초 20초 30초 이렇게 죽이는 건 아니거든요.
물속에 들어가라 이 말은 우리가 이 땅에 사는 자체가 오는 세계의 입장에서 보면 모조리 다 죽을 세상에 잠기는 것이 합당하다는 뜻으로 보여주는 겁니다. 그 물세례가 또 모형이 되가지고 실체는 뒤에 나옵니다. 성령세례와 불세례. 불 받아 마땅하다는 뜻의 불세례. 그리고 성령은 이거는 하나님 나라의 회개하라는 그 말씀의 자체의 작용 때문에 그래요.
자아의 작용이 아니고 그 말씀자체의 작용. 물세례 받는 것은 본인의 작용이지만 성령세례는요 아무도 예수님을 알 수 없는 상태에서 예수님의 마음, 예수님의 영이 임할 때 마치 물이 임해서 덮치는 것처럼 성령이 예수님의 마음이 덮쳐버리면 내가 이 세상에 살아오면서 경험했던 타인을 의식하는 시선이 주님의 시선으로 회까닥 이게 완전히 뒤집어져버리는 거에요.
그러면 어느 정도 뒤집느냐 하면은 기가 찰 정도로 뒤집어져버려요. 나는 이미 죽었다 그리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산다 이 정도 나올 정도로 뒤집어버려요. 너희 눈에 내가 산 걸로 보이냐? 뭐 이렇게. 나는 주님이 살아있지 내가 살아있는 게 아니야. 이거는 대화가 통할 수도 없는 완전히 거꾸로 뒤집어진 그러한 고백들이 튀어나오게 만들어버려요. 성령이 임하면.
왜냐하면 성령은 선악체계를 제거해버립니다. 선악체계는 이미 선악체계 지식을 알고 있는 악마의 마음이거든요. 악마의 마음이 우리에게 왔잖아요. 그게 우리 자아 속에 들어왔잖아요. 그러니까 우리 속에는 우리는 바보 등신 같고 배후에 악마가 선악체계를 가지고 계속해서 우리를 고소하고 정죄하고 있었던 겁니다.
율법에 이렇게 되어있잖아. 성경에 이렇게 되어있잖아. 왜 안 지켜! 막 밀어붙이는 거에요. 이거 안 지키면 네가 예수 믿어도 너 지옥 가는 거야. 자꾸 흠을 끄집어내고 틈을 만들어내가지고 더더더 완전히 음주운전 측정기를 갖다 대면서 계속해서 더더더더 더 개선하고 발전하고 성화하기를 기다리고 있는 거에요. 성화하기를 독촉하고 있는 거에요. 오늘날 교회 목사들이 교인들 그렇게 들볶듯이.
바보 등신 같은 인간은 모르지요. 길들여졌으니까. 가스라이팅 당했으니까 길들여졌으니까 모르는 거에요. 가만 있어봐. 어떤 게 이익이지? 맨날 이익만 생각해. 선악체계 자체가 날라가버리면 우리는 죽어 마땅함이 되기 때문에 피만 보여요. ‘피’. 피는 죄인이 돼야 피가 보이거든요. 잘난 내가 있으면 피가 안보입니다. 나를 인정해주는 공동체가 보여요. 공동체가. 교회가 보인다고요. 교회가. 날 이뻐해주는 교회가 보여요.
지금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 동생은 자기는 자기를 못 봐요 동생은. 자기 가정 이야기하고 있다고요. 옛날 참 우리 가정이 이만큼 좋았는데 이 유산 문제 때문에 이 사단 났습니다. 빨리 해결해가지고 다시 형하고 잘 살기 바랍니다. 지금 이런 자세로 왔다고요. 살아서 뭐하는데? 그게 사는 게 아닌데. 이 찾아온 동생은 자기가 죽어있다는 것을 몰라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뭐냐? 생명은 그 소유에 넉넉함에 있지 아니하다. 이런 말씀을 듣고 동생이 취할 태도는 1. 유산을 포기했다. 2. 아 주님도 안 되네 하고 그냥 갔다. 내 뜻은 안 되는구나. 주님도 안 되네. 억지로 참고 견뎌야지 어떻게 하겠어. 무슨 짓을 해도 그 사람한테는 생명이 없습니다. 어떤 짓을 해도. 옛날 살던 그 삶 그대로 이어져갈 뿐이에요. 생명 없습니다.
오늘 강의에 제일 어려운 부분이 도착했습니다. 도착하기 전에 쉽게 먼저 말씀드리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지요.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 할 때 오신 것은 천국이 아니고 누가 왔어요? 예수님이 오셨지요. 이 땅의 인간의 천국은 가짜입니다. 천국은 없어요. 그런데 예수님이 와버렸어요. 예수님 오면서 세례 요한이 천국이 가까이 왔다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가까이 왔다는 말은 뭐냐? 손에 있다는 뜻이에요. 손에 잡혔다는 뜻이에요. 그럼 이 팔, 손은 뭡니까? 육신과 거리가 있어 보이지만 사실은 한 통이에요. 같은 몸에 있습니다. 같은 몸에 삐죽 삐져나온 거죠. 그럼 같이 있는 거죠. 누가 누가복음 17장 21절 한번 읽어보세요.
17장 21절. 제일 중요한 부분이고 제일 어려운 부분이에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하나님 나라가 너희 안에 있다고 했지요. 너희 안에. 지금 이 세상에 천국 어디 있습니까? 힘들고 어려운 이 세상 떠나서 있다고 보지요. 내가 죽어서 좋은 처소 간다고 하는 거에요. 장례식 때.
그러나 천국은 떠나 있는 것이 아니고 이미 여기 같이 있는 거에요. 같이 있으면서 천국이 천국 값을 못 받고 밉상 받고 미움 받지요. 교회 내에서도 마찬가지고요. 사람들은 자기가 죄인인 걸 인정을 안 해요.
자아 자체가 나 자체가 악마이기 때문에 악마는 반성을 할지라도 잘못했습니다 할지라도 잘못했습니다 그 자체는 잘못되지 않았다고 우기는 게 악마에요. 왜? 선악체계에서 반성하는 것은 선에 해당되기 때문에. 악에 해당되다가 선에 해당되다가 어느 쪽을 해당 되도 그건 선악체계 안에 있기 때문에 하나님 보시기에 저주 받아 마땅하게 되는 겁니다.
아침 드라마에 나올 이야기인데 그냥 제가 지어보았습니다. 어떤 가정에 애가 없어가지고 고민하다가 조금 어질게 보이는 어떤 이쁜 딸이 있어가지고 어린 갓난 딸을 입양했다 합시다. 입양하고 난 뒤에 그 부모가 본전을 뽑아야 될게 아닙니까. 계속해서 이야기합니다. 공부 똑바로 해 공부 잘해 이번에 전교 1등해. 전교 10등이 뭐야?! 1등으로 끌어올려.
그러면 1등으로 끌어올리면 그 애가 그 부모의 친자식 됩니까? 안되지요. 계속 닦달하는 거에요. 네가 의사가 되든지 네가 사법고시 합격을 하든지 그렇게 해야 지지리 궁상 우리 집안 너 때문에 덕 좀 보자. 이런 심보를 가지고 애를 앵벌이 시키듯이 공부를 시키는 거에요.
나 너 때문에 고생 많이 했다. 이제 너 덕 좀 보자! 그런 식으로 나올 때 그 아이가 공부 잘 한다고 해가지고 그게 친자식 아니지요. 이미 이 세상 자체가 선악과를 심어놨을 때는 악마의 마음으로 계속 조종하기 때문에 주님은 그 자체를 인정하지 않아요. 그 자체를.
열심히 해라. 율법 줬잖아. 숙제 줬잖아. 똑바로 해. 이게 아니에요. 너희들이 아무리 율법을 지켜봤자 율법이 너의 진짜 본질, 악마의 자식이라는 것 이 공중권세 잡은 너희 아비는 악마라는 사실을 그걸 들추어내는데 율법이 주어질 뿐이에요. 아니야 내 자식 아니야. 내 자식 따로 있어. 그걸 증거하는 데 주님께서 율법을 주신 거에요.
천국이 너희 안에 있다는 말은 그 말에 대해서 그들은 아이고 반갑습니다 이러지를 않아요. 인간들은 함께 있으면 우리가 천국은 죽어서 갈 필요 없고 함께 있으면 들어가면 되겠네 라는 생각을 하고 싶어도 못해요. 왜냐? 자아가 자아를 부정 못해서 그래요. 자아가 근본적으로 이건 가짜고 없어져야 되는 죄인이라는 생각을 도저히 할 수 없기 때문에 인간들이 생각하는 천국은 내가 잘 되는 천국이에요. 내가 가고 싶어서 만든 이미지가 천국이라니까 내가.
그래서 나한테 돈 떼어 먹은 놈은 천국 오면 안돼요. “짜증나 이씨.” 내 마음에 맞는 친구들 있잖아요. 내 자식들. 이런 사람들만 천국가야 돼요. 내 아들 왕따 시키는 그 집안 천국 가면 안돼요. 그 집안이 대표기도하면 놀고 있네. 저것도 신자라고. 너 천국가면 내 손에 장을 지진다. 선악체계는 인간이 판단하고 결정합니다.
라캉 말대로 남들 들었던 윤리체계를 다 동원해요. 얼추 이 세상에서 대부분이 인정해주면 그걸 진리라고 여기는 거에요. 왜? 타인의 욕망이니까. 타인의 욕망에 우리는 놀아나면서 맹목적으로 왜 사는 줄도 모르고 남 따라가듯이 그냥 따라가게 되면 얼추 맞는 인생 괜찮은 인생이라고 인정해주겠지 그게 넓은 길이에요. 그게 좁은 길이 아니고 넓은 길입니다.
넓은 길 가게 되면 벨기에 만화 스머프처럼 딴따단딴딴따 하면서 가잖아요. 전부 다 절벽에 다 떨어져. 앞에 떨어지는데 바로 뒤에는 몰라요. 절벽인줄 몰라요. 쭉 가다가 다 떨어져요. 차례차례. 뒤에서 떠밀고 난리에요. 다 지옥으로 떨어지는 거에요. 넓은 길.
좁은 길은 찾는 사람은 없어요. 좁은 길은요 이 자아 자체가 잘못된 길로 가는 정도가 아니고요 내 자체가 잘못되었어요. 내 자체가. 내가 태어난 자체가 이게 문제 있다고 여기는 사람, 그것은 주님의 마음이 뒷덜미를 딱 잡아요. 딱 와서 이걸 일방적으로 채가듯이 가버려요. 채가듯이. 채가듯이 가버리니까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와 세리와 창기 강도 그냥 채가듯이 가버리니까 처녀임에도 임신한 사람 누구에요? 마리아.
도대체 성령이 올 기미가 없었는데 성령이 와버린 거에요. 임신할 기미가 없었는데 임신을 해버린 거에요. 38년 된 병자가 병 날 기미가 안보였는데 나았고 소경된 자가 기미도 없이 눈 떴고 마르다 마리아 오빠는 죽은 지 나흘 되서 이미 게임오버 끝났어요. 끝났는데 다시 살아났어요. 그걸 제가 어느 설교에서 참 주님 우리를 당황하게 만들고 난처하게 만들고 우리로 하여금 할 말을 잃어버리게 만들어요. 뭐에요 이거 주여. 주여 뭡니까 이게. 왜 구원받아야 돼요?!
자기가 구원받았다는 데에 대해서 본인이 생소하고 본인이 의아해하는 겁니다. 그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그걸 가지고 성령께서는 날마다 자아를 제거해버립니다. 자아를 키우는 게 아니고요. 격려하고 독려하는 것이 아니고 자아를 제거해버립니다. 왜 저는 아직도 오늘도 살아 있으니까. 오늘 몇 일이야. 왜 아직도 살았지? 이런 거.
자아를 제거해버리지요. 자아를 제거해버리고 전에 악마의 에너지 장이 있던 자리에 성령의 에너지 주님의 십자가의 에너지 장으로 이걸 교체했음을 날마다 확인케 하는 일이 벌어집니다. 먹던지 마시던지 너는 선물이다. 먹던지 마시던지 선물이다. 하루를 살더라도 그 나라와 의의 힘으로 살아가고 있다. 네가 한 달을 살아도 너 가는 길은 넓은 길이 아니고 좁은 길이다. 네가 좁은 길을 선택한 적은 없다.
그런데 주님의 좁은 길이 영생의 길이기 때문에 그 영생 가는 그 에너지가 덮쳐버리니까 덮쳐진 상황을 확인하다 보니까 마태복음 7장 눈에 뜨였고 그게 바로 사람들 가는 전혀 다른 길을 가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지요. 그 사람들 그 큰 길 가는 사람들 다 자아들이 있는 사람들이에요. 자아들이 있다는 것은 자아들이 판단을 하고 있다는 뜻이에요.
평소에 우리는 직장생활 모두 판단해요. 판단하지만 결정적인 것은 내 판단에서는 도저히 나올 수 없는 결과가 이 몸을 통해서 이게 나온다는 거에요. 내 판단을 완전히 개무시하고 다른 결과들이 그런 고백들이 나와버린다는 거에요. 당신은 그걸 어떻게 판단합니까?
고맙게도 마귀가 이 땅에 교회를 만들어놨어요. 공동체를 만들어가지고 그 공동체가 뭐냐 하면은 자아를 긍정해주고 잘했다 칭찬하는 단체들이 있는데 그런 그 교회에서 목사가 여러분들은 구원받았습니다 여러분들은 희망 있습니다 설교하는 그것이 얼마나 그게 역겨운 우웩! 토하고 싶은지 그게. 라면 먹고 그 교회 가지 마세요. 갑자기 실례하는 수가 있습니다.
막 생전 안하던 욕이 막 나오고요. 그것도 모르고 옆에 있는 사람은 우리 목사님 설교 잘 하지요? 우리 목사님 설교에 뭐 문제 있습니까? 하면 죽여버리고 싶어!! 설교에 문제 있는 정도가 아니고 죽여버리고 싶은 거에요. 왜 진리는 이야기 안 하고 왜 사람을 좋게 하느냐 왜! 너는 백날 해도 네가 지옥가야 될 인간이야. 왜 그런 자아라고 왜 제대로 이야기를 안 해주냐 이 말이죠.
물론 죽이는 것은 우리가 죽일 필요 없어요. 주님이 알아서, 안 죽입니다. 왜? 다 쓸모가 있어요. 그런 게 있어줘야 가짜가 범람할 게 아닙니까. 선악체계에 근거해서 설교를 해버려요. 율법을 해석해버린다고요. 모든 성경을 해석해버려요. 그런데 그걸 보면 아 저게 역겨워지고 구토 나올 때 주여 왜 저것이 구토가 나게 하는 그런 사람이 되게 하셨습니까?
주님 말씀이 내가 저들에게 당했거든. 내가 저런 가짜한테 당했거든. 악마의 논리에 당했거든요. 똑같은 마음이 들어왔기 때문에 같은 구토증을 느끼는 거에요. 잘 되야 되고 번창해야 되고 건강해야 되고 오래 살아야 되고 행복해야 되고 구원받아야 되고 이 전부 다 가짜거든요.
이미 내 속에 뭐가 박혔습니까? 하나님 나라가 박혀버렸어요. 생명이 선악체계 섞이지 않은 생명이 그냥 너와 함께 있느니라 박아버렸다 이 말이죠. 박아버렸으니까 내가 먹고 마시는 것은 전부 다 이거는 공짜로 얻은 거에요. 내가 안 아프고 건강해서 직장생활하고 뭐 이렇게 여러 가지 일하고 성경보고 나중에 눈이 좀 보여야 성경을 보지.
나중에 눈이 어두우면 성경 안 보고 그냥 듣기나 할랍니다. 아직 그것까지는 아니지요. 그것 까지는 아니지요. 아들 딸 구분 못하고 아직 그것까지는 아니란 말이죠. 아직까지 주님의 생명을 증거하라고 하는 거에요. 생명을 증거하라고.
그래서 이게 뭐냐 하면은 불가능함입니다. 오늘 본문 다시 봅시다. 12장. 불가능함을 이야기하는 거에요. 예수님은 모든 걸 가능해요. 예수님은 모든 게 가능한데 이것은 인간들이 일체 가능하다고 여기는 하나님이 아닌 조건하에 하나님은 모든 게 가능해요. 우리 하나님은 전능하시기 때문에 모든 게 가능할거야 라는 것에 대해서 전혀 그것은 주께서 거부합니다.
그래서 “이르시되 이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장이나 물건 나누는 자로 세웠느냐 하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했어요. 탐심은요 물리칠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우리의 육신은 악마가 갖고 있기 때문에 악마 자체가 탐심이고 악마 자체가 우상이거든요. 우리는 그걸 섬기는 우상숭배고요. 탐심은 우상숭배니까. 우리는 할 수 없어요. 할 수 없는 이야기를 하는 거에요.
사람의 생명은 소유의 넉넉함에 있지 않다. 직장생활하지 말라가 아니라 이미 생명을 얻은 이상 직장을 다니든 백수든 그 모든 것이 무엇이냐? 생명의 에너지장이에요. 아 나로 하여금 죄인 되지 아니하면 피가 안 보이니까 죄인 되라고 더 하루하루 살게 하시고 이왕 사는 게 그냥 살지 말고 고생 좀 하고 너 육신이 얼마나 평소에 육신이 더러운 것을 알리기 위해서 직장생활하게 만드는 겁니다. 할 줄도 모르는 거짓말 안 할 수밖에 없지요. 아이고 이거 남는 거 없습니다. 남는 거 없지요. 20% 빼놓고 남는 거 없지요. 20% 기본으로 가져가고 남는 거 없지요 뭐.
에너지 장, 왜 제가 자꾸 물리적 용어를 제가 사용하는 이유는 어느 집 마당에 빈 집이라고 다 소문났어요. 그런데 어느 날 보니까 마당에 보니까 빨래가 널려있어요. 무슨 뜻입니까? 빨래만 봤지만 지금 안에 누가 살고 있다? 어떤 사람이 살고 있다가 드러나지요. 빨랫감으로 성도를 주께서는 성도로 하여금 이 세상을 살게 하는 겁니다.
멀쩡하게 잘 먹고 잘 살면서도 맨날 죄인이래요. 전부 다 죄인인데 주께서 생명으로 다 은혜를 주신거야. 이런 식으로 하니까 도대체 남하고 의사소통이 될 수가 없지요. “너 앞으로 얼마나 발전하는데?” “발전해야지. 죄 더 짓는데 발전할거야. 아 이런 죄도 있었네. 발전할거야.” 그게 무슨 말이 돼요 이게.
16-21절까지 이것만 이야기하면 딱 정리됩니다. ‘악마성’. 악마성은 육신성이죠. 다시 이야기합니다. 악마는 본인을 부정을 못해요. ‘내가 왜 피조물이야’ 대들기 바빠요. 자기를 항상 긍정해요. 그게 육신으로 그대로 전달되었습니다. 심지어 반성해도 반성하는 내가 그렇게 대견하고 이뻐 보이죠. 그러니까 불가능성이에요. 인간은 개과천선해서 예수님 믿는 게 아니에요. 불가능해요.
육신성의 특징은 뭐냐? 발전입니다. 악에서부터 더 좋은 쪽으로 더 발전하는 것. 악에서 발전하는 것. 이게 뭐냐? 시간성. 시간성에 관한 문제에요. 악마는 시간을 가지고 인간을 장난칩니다. 지금은 이래도 나중에 잘 될거야. 자꾸 시간을 끌어보는 거에요. 뭔가 일이 될 거야 한방에 언젠가 한방이 될 거야. 뭐 터질 거야. 계속 끄는 거에요. 계속 시간을.
그 끄는 것이 어디 나오지요. 악마가 인간에게 희망을 주면서 너 지금은 이래도 나중에는 너같이 괜찮은 사람은 나중에 틀림없이 성공하게 되어 있어. 푸쉬킨이라는 시인이 있어요. 러시아 시인. 시인인데 이 사람 시에 ‘인생이 삶이 너를 속일지라도 네가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말라. 지금은 슬프지만 나중에 기쁨의 날이 오리니. 우리의 마음은 미래에 있고 지금은 괴로운 것. 하지만 모든 것은 사라지더라도 언젠가는 사라진 것을 그리워하는 날이 올 것이다.’ 이런 내용의 시에요.
그러니까 조금만 참으면 좋은날 온다 그 이야기입니다. 그게 시간성이에요. 그 시를 사람들은 굉장히 좋아합니다. 청소년 때 그런걸 전부 벽에다가 붙이지요. 그걸 보면서 스스로 용기를 하면서 1년만 고생하면 좋은 대학 간다는 그 일념으로 열심히 다들 공부 다 했지요? 좀 참고 열심히 공부하면 뭐 되겠지. 전부 다 이런 식으로 살아가는 거에요.
그 시간성. 그 시간성인데 좀 어려운 이야기는 여기 15절 다시 봅시다. “그들에게 이르시되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 이렇게 되어 있거든요. 이 탐심이 시간성을 내포하고 있고 소유가 인간의 시간성을 내포하고 있는 거에요.
아예 거지대로 살란 말이 아니고 주께서 주목하는 것은 소유가 아니고 탐심이 아니고 그 안에 있는 시간성에다가 하나님께서는 주목을 하고 예수님 주목을 하면서 그걸 거부해 버리는 거에요. 왜 거부하느냐? 너의 인생의 끝은 나로 인하여 이미 확정됐다. 이미 결정 났다는 거에요.
죽기 위해서 태어났는데 무슨 되지도 않는 희망을 갖느냐 이 인간아. 지금 소유가 넉넉하니까 앞으로 몇 년은 더 살 것같이 생각하잖아요. 그러나 주님은 뭐냐? 반대에요. 죽게 되어 있고 지금은 뭐냐? 예수님을 통해서 지옥체험을 보여주는 거에요.
지옥이라는 것은 아버지로부터 버림받는 것, 저주받은 체험. 그래서 예수님께서 부자 비유 이야기하는 것은 이 부자가 아무리 노력해도 스스로 자기가 이미 농사 잘 됐고 창고에 곡식이 가득한 이상 그걸 놔두고 자기가 부정할 이유가 없습니다. 인간이 그래 나 오늘 부자 됐으니까 죽어야겠다 이런 인간은 없습니다.
사람이 아직 못 죽고 있는 것은 부자 안 돼 봐서 못 죽는 거에요. 부자 되고 난 뒤에는 죽을려고 하지 않고 부자를 계속해서 시간성을 끌어서 계속해서 더더더 더 부자 유지하던지 더 부자 되고 싶은 거에요. 어떤 사람이 자살을 했는데 아내 죽이고 애도 둘 다 다 죽였어요. 몇 년 전에 있던 사건인데.
그런데 자기도 죽을려고 했지요. 죽을려고 했는데 자살미수 되서 체포됐어요. 그래서 물었어요. 왜 죽을려고 하느냐? 그 많던 재산 다 날리고 5억이 남아있다는 거에요. 5억 밖에 남지 않았다는 겁니다. 얼마나 잘 살았는데 5억, 에게 이게 뭐야. 그래서 죽고 싶다는 거에요. 5억 남느니 차라리 우리 다 같이 죽자 이렇게 나오는 거에요. 이거 미친 거 아니에요?!
그 자체가 지옥입니다. 주님이 떠나버린 남는 세계에서 악마가 인간을 어떤 식으로 악마의 자기의 심보를 얼마나 그대로 복사, ctrl v 아예 복제를 해가지고 오는 인간마다 전부 다 악마의 마음으로 변해가지고 그들로 하여금 신에게 보이지 않는 신에게 내 인생 이렇게 조져놨다고 항의조로 나서든지 전부 다 한 통속 한 패로 다 만들어놨어요. 그중에 교회가 같이 거들고 있어요. 교회가.
그 다음에 20절에 봅시다. 탐심이나 소유성이란 반드시 거기에 뭐가 들어갈 때? 시간성이 들어가면 안돼요. 시간성이 빠져버리면 뭡니까? 범사에 감사하고 주신 것도 감사하고 내일 염려는 내일 염려 오늘에 감사하는 거죠. 시간성이 빠지니까. 그 나라와 의가 주어지니까. 이거는 소유를 감사하는 게 아니고 그 나라 의만 바라보니까 그 나라 의를 바라볼 수 있도록 주께서 필요한 소유만 허락한 거에요. 필요한 소유.
한 달에 2천만원 정도 필요한 소유만 허락하신 거에요. 2천만원 있던 2억이 있던 그거는 상관없지요. 그냥 그 나라 의로. 왜 자꾸 주시는지 모르겠어 이런 식으로. 손님 오지 말라는데 왜 자꾸 오는지 모르겠어. 귀찮아 죽겠어 정말.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고객님. 왜 자꾸 오는지 모르겠다.
20절에 보겠습니다.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 여기 “자기를 위하여” 라는 말이 나오지요. ‘어리석은 자, 자기를 위하여’. 이 말씀 드리고 마치겠습니다. 오늘 공부한 것 복습한다고 봅시다.
예수님, 수풀 속에 양이죠. 수풀 속에 양이 누굴 대신했습니까? 이삭을 대신했지요. 그러면 이삭은 누굴 대신하는 인생이냐 하면은 어린 양을 대신하는 삶을 사는 겁니다. 대신한다. 누굴 위하여? 그러니까 예수님도 우리를 위해 죽으시니까 이삭도 예수님을 대신하니까 여기서 이삭이 자기를 위해서가 성립이 됩니까? 안됩니까? 안되지요.
악마의 마음은 악마가 최종적인 거에요. 악마는 악마가 여기 있음 자체를 스스로 긍정하는 게 최후입니다. 마지막 의미에요. 인간의 마지막 욕망도 탐심도 내가 나답게 되는 게 마지막 욕망의 종착점이에요. 아무도 없어요. 하늘에 태양이 두 개가 될 수 없어요. 마지막은 내가 되야 돼요. 내가. 그 ‘나’라는 것은 육신이 있는 그 장에 악마의 정신으로 완전히 에너지 장을 덮어놨다 이 말이에요.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니까 육신은 누구 것입니까?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 네 영혼을 도로 찾는다” 그동안 얼마나 악마가 얼마나 거짓말했습니까. 주께서 그동안 살려주신 거에요. 비유지만 실제로 생각하고 그동안 우리를 살려주신 겁니다. 그래서 대구강의 때 내 목숨은 나의 것이 아니다. 내 목숨은 나의 것이 아니에요.
나의 것이 아닌데 예수님을 증거하는 용도에서 굉장히 귀한 목숨이기 때문에 함부로 관리하면 안돼요. 내 것이 아니기 때문에 내가 내 처분을 하면 안돼요. 자살 물론 하면 안되지요. 그런데 하면 안 되는데 할 수밖에 없는 것은 이것은 생명의 장이 아니고 자살하고자 하는 것은 자기가 자살하는 이유가 인간은 이익이 아니면 행동하지 않습니다.
자살하는 것이 이 우사스러움과 이 부끄러움에서 유일하게 해방될 수 있는 길이라고 나한테 이익이 된다고 자살해버려요. 예를 들어서 만약에 저한테 빚이 1억이 있다. 그 빚을 누가 주셨습니까? 주님이 주신 거죠. 그러면 빚쟁이가 돈 달라고 하면 간단하게 있는 그대로 이야기해요. 줄 돈이 없다 이러면 되는 거에요. 문제해결 쉽지요?
그걸 보통 내 배 째라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내 배 째라 나올 거 같으면 돈이 한 이천억 있더라도 우리 평소의 삶은 내 배 째라 식으로 살아야 돼요. 이천억이 하루아침에 다 날라갈 수 있기 때문에 내 배 째라로 살면 돼요. 항상 주님께 영혼을 맡기면 돼요. 이게 이사야 2장 22절 너희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 이렇게 나오지요. 너희는 너희를 의지하지 말라 그런 뜻이에요. 너는 너 자아를 의지하지 말라. 의지한다고 네 것 되지 않는다 뜻이에요.
내가 나 붙든다고 나 붙드는 거 아니에요. 호흡이 코에 있다 이 말은 호흡이 정기적으로 숨 내쉬잖아요. 이거 나의 힘이 아니에요. 주께서 그렇게 하셔서 숨을 쉬는 거에요. 호흡은 코에 있다는 말은 코는 내 소관에 있는 게 아니다 이 말이죠.
따라서 호흡도 내 소관이 아니고 따라서 우리는 우리가 생각하는 자아는 뭐냐? 가치도 없다. 가치도 없다는 말은 제로로 생각하고 아예 없다고 생각하고 살아라. 그러면 주님이 보이고 신약에서는 예수님의 피가 보이고 그런 것이죠. 그 피를 증거하라고 우리가 대신 살라고 지금까지 우리가 있습니다.
그래서 21절에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둔다는 것 이게 어리석은 자의 표본이고 탐심 있는 자의 표본이죠. 이걸 보면서 또 교회에서 그러니까 집에 있는 재산을 교회에 다 바치고 하늘에 보물을 쌓는다 그렇게 하는데 이제는 우웩! 그것은 집에 수천억이 그냥 있더라도 호흡은 내 목숨은 주님 것이다 이렇게 하면 그거는 돈 보기를 돈 보듯이 하면 되지요.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이 우리 마음대로 안 된다는 것을 이제는 지식으로 하지 말고 살아가면서 체험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