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16장 1절.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실족하지 않게 하려 함이니 사람들이 너희를 출교할 뿐 아니라 때가 이르면 무릇 너희를 죽이는 자가 생각하기를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라 하리라.’
이제 예수님 떠나고 난 뒤에 예수님의 제자들을 죽이는 때가 온다는 겁니다. 악의 보편성이다. 이 한마디만 하면 예수님의 취지를 다 담을 수 있습니다. 악은 개인이 나쁜짓을 했을 때 발생되는 것이 아니고 그러면 보편성이 아니예요. 그것은 그 사람의 일이야 나쁜짓이. 그런데 보통 인간들의 의해서는 뭐냐 하면은 착한 일 하면 악이 아니고, 악한 일을 했을 때 개인적인 악으로 국한 되는 겁니다. 그래서 그 나쁜 사람 만나서 나쁜 짓 안하면 자기는 계속 괜찮은 사람 되요. 나쁜 사람 안 만나고 좋은 사람만 만나면 계속 착한 사람 됩니다. 사람들은 다 그렇게 생각하거든요. 그래서 바리새인 사두개인들은 진짜 악을 저지를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사람들과 멀리했습니다. 악을 저지를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이냐 하면 바로 생존하는데 매일 불안 불안하는 사람들. 생존하는데. 어쨋든간에 바리새인들은 사람은 악한 사람 따로 있고 선한 사람 따로 있다라고 하는 것이 인간들의 개별성인데, 예수님이 딱 이땅에 왔다가 떠나는 순간 너나 할 것 없이 모든 사람은 전부 다 악한 사람 되버려요. 그것을 뭐라고 했습니까? 악의 보편성이예요. 악의 보편성. 예수님이 다녀갔다 하면 그런 현상이 일어난다는 겁니다. 필히 예수님이 일어 난다면 일어나는 거예요 이것은. 그거 뭐 증거사례 따질 필요 없어요. 그렇게 일어날 수 밖에 없습니다. 자, 이렇게 되게 되면 우리는 여기서 뭘 알수 있느냐 하면은 내가 보고 있는 이 세상과 예수님이 보고 있는 이 세상과 세상보는 시대상이 다르다는 사실을 알수 있습니다. 내가 세상을 보는 것과 예수님이 보는 것이 다른 이유가 내가 세상을 볼 때는 항상 전제가 있어요. 나는 선하다가 전제가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세상을 봐버리면 예수님이 다녀간 순간 어느 인간도 선한자는 한사람도 없었다가 여기에 드러나요. 악의 보편성이니까. 이것을 더 깊이 들어가 봅시다. 더 깊이 들어가 본다면 예수님이 다녀가기 전에는 각자 각자가 보는 나름대로의 착하게 살아가요. 그런데 예수님이 다녀감으로서 전체가 예수님을 대적하는 악한 보편성이 된다면 그 다음의 질문이 뭐냐? 제자들은 악할까요? 선할까요? 라는 질문이 필히 여기서 나와야 되요. 제자들은 악할까요? 선할까요? 제자들은. 이것은 물어보나마나 답은 딱 나와야되요. 예수님만이 악을 보편성 있다고 주장할수 있는 유일한 권리자예요. 그럼 다른 사람은 뭡니까? 나는 아무리 봐도 그다지 악하지는 않고 선할려고 노력하는 중입니다에 제자들도 포함이 될까요? 안될까요? 당연히 포함되지요. 그런데 예수님이 다녀감으로 말미암아 남은 악하지만 나는 선하다라고 생각하는 그것이 집합, 그것이 합산이 되게되면 그 전체가 예수님을 욕보이는 악한 보편성의 일부로 보탬이 되고 기여하고 있는 겁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악의 보편성에 기여하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 떠나고 난 뒤에 그들이 이 세상에서 살해당한다 할지라도 그들은 손해볼게 하나도 없습니다. 왜? 악하기 때문에 죽는것에 대해서 억울할것이 있어요? 없어요? 없지요. 이게 중요한거예요. 예수님이 구주라고 편든다고 해서 세상과 자기 자신을 따로 떼면 안되요. 그렇게 되면 그 해석은 옛날 성령 육적으로 해석하던 해석 그대로 똑같이 되는 겁니다. 모든 성경 해석에서는 나는 착하고 라는 선입관 가지고 들어가잖아요. 모든 성경 해석 성경을 왜 봅니까? 나쁜 짓하기 위해서 봅니까? 성경 보는 이것은 착하다고 우기면서 보잖아요. 이것이 예수님 다녀간 상태에서는 이것조차 악이 된다 이말입니다. 그런데 그것조차 악이 된다는 말은 스스로 악이라고 파해칠수 있는 그러한 근거가 우리가 만들어 낼수 있습니까? 없지요. 인간은 스스로 자기를 착하게 보기 때문에 착한데서 악이 나올수 있다는 근거는 본인이 뽑아 낼수가 없습니다. 그것조차도 일방적으로 주님의 선언 이여야 되요. 너는 성경을 보고 해석을 하고 말씀에 순종해도 그게 악하다라고 누가 이야기 해야되요? 예수님이 그렇게 일방적으로 그렇게 해줘야 되요. 그러면 예수님과 제자들 사이에 갭은 있겠습니까? 없겠습니까? 갭은 여전이 있는 거예요. 여전이 있어요. 심지어 성령을 받아도 여전히 있는 겁니다. 만약에 해석을 이렇게 하지 않고 성령 받았기 때문에 이제는 예수님과 그들은 한통속이 되어서 주의 일을 한다 이렇게 되어 버리면 이 성경해석은 예수님 중심이 아닙니다. 예수님 중심을 빙자해서 누구 중심이냐 하면은 자기가 성령받았다고 우기는 본인의 행동은 의라고 행위가 의라고 여길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그것은 하나님의 의가 아니라 결국은 어디로 빠집니까? 자기 의를 따로 챙긴게 되요. ‘주의 말씀대로 열심히 살았습니다.’ 라는 그 이야기나 바리새인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위해서 열심히 충성 했습니다. 노력했습니다.’ 라는 그 사고 방식이나 똑같은 거예요. 똑같은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가고 난 뒤에 반드시 누가와야 되느냐? 성령이 와야되요. 이게 15장 26절에 나옵니다.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언하실 것이요. 너희도 처음부터 나와 함께 있었으므로 증언하느니라.’ 그렇게 되어 있지요? 성령이 오게되는 거예요 성령이. 그래서 예수님 말씀대로 바르게 산다고 해서 그것이 되는 것이 아니고 성령이 와야 된다고요. 그래야 악의 보편성의 우리도 같이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을 항상 우리가 인정을 해야된다 이 말이죠. ‘나는 예수님의 제자니까 저는 빼주세요.’ 라고 하면 안되요. 그러면 성령이 오실 이유가 없어요. 마음 바르게 갖고 개과천선 해가지고 늘 이렇게 회개하고 반성하면서 주의 말씀에 몰두하고 읽고 또 읽고 순종하고 또 순종하고 그러면 주의 일을 할 수 있어요? 그걸 주의 일을 빙자해서 자기 일을 하고 있는 겁니다. 마귀일을 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면 질문은 바꿔보겠습니다. 만약에 성령이 오셨다. 그러면 우리가 어떠 어떠한 일을 한다 할지라도 성령이 오신 경우라면 우리 일에 대해서 그건 잘못됐고 그렇게 해서는 안되고 이렇게 해야지라고 성령께서 이렇게 나무래 가지고 우리가 그것을 고쳐 가지고 바르게 행동할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질문이 너무 깁니다만은. 자, 성령이 오셨습니다. 오시고 난뒤에 ‘아! 이것은 잘못되었구나. 이래서는 안되겠구나. 주님 이렇게 하겠습니다.’ 라고 행동 똑바로 고쳐가지고 이제 성령이 시키는 대로 해 가지고 이렇게 하게 되면 그게 주의 일이 될까요? 안될까요? 주의 일이 안됩니다.
성령이 오게되면 우리가 어떤 짓을 해도 우리한테는 책임과 어떠한 질책, 책임도 우리한테 부담도 주지 않습니다. 이게 지난 낮 설교에 했잖아요. 신약, 성령 오게되면 법을 지키는 당사자를 없애 버린다고요. 법을 지키는 당사자를 없애요. 말씀 지키는 당사자를 없애버려요. 말씀을 줘놓고 명령은 온갖 명령을 다 해요. 무시로 기도하라. 때를 얻던지 복음을 전파하라. 니가 영에 살고 육을 죽이고 뭐 온갖 명령은 다 하면서 그 일에 대해서 이루어지는 것은 우리 몫이 아니고 성령의 몫입니다. 그게 성령이예요. 그게 성령입니다. 물론 성령은 나무라지요. 나무랜다는 것은 뭐든지 우리 인간세상에서 나무란다는 것은 ‘나 나무랬지? 한번 두고볼 거야. 앞으로 잘하는지 볼 거야.’ 이 지켜보는 것이 나무라잖아요. 나무래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고 얼마나 변화가 주어지고 개선의 여지가 있는가를 지켜보는 것이 나무람는 거예요. 이 세상에서는. 그런데 성령의 나무람은 니가 행동 똑바로해라 나무라는 것이 아니고 뭘 안 쳐다봤다고 나무라냐 하면은 왜 십자가에 다 이루심을 완전히 개무시 하느냐고 나무라는 거예요. 그 나무램이.
마지막 때에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이렇게 쭉 나온다 이 말이죠. 자, 이 말씀 우리에게 줬습니다. 주고 난뒤에 자칭 성령받았다고 우기는 우리들이 딱 보면서 이 말씀을 왜 줬겠어요? ‘그러니까 니가 성도야?’ ‘네, 성도입니다.’ 성도라면 자기를 사랑하지 말아야 되고 돈을 사랑하지 말아야 되고 교만하지 말아야 되고 부모를 거역하지 말아야 되고 범사에 감사해야 되고 거룩해야 되고 무정함을 원통함을 풀어야 되고 절제해야 되고 보통 그렇게 생각하잖아요. 이게 성령 안 받은 사람의 특징이다 이 말이죠. 이게 성령 안받은 사람의 특징이예요. 성령 안 받아놓고 받은 척 하는 사람의 특징이 이 특징이예요. 이 말씀을 주는 것은 우리는 지금 여기 지적한 대로 이것이 지금 우리가 몰랐던 본 모습인 것을 알려주는 겁니다. 그리고 이런 자기를 사랑하고 돈을 사랑하는 인간이 예수 믿는다고 이제는 돈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 됩니까? 성경에서 너는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한 인간이라고 한다면 교만하면 되요. 돈을 사랑하면 된다고. 지금 우리가 문제가 뭐냐면 돈을 덜 사랑해서 문제예요. 지독하게 진짜 지독하게 사랑을 못하는데 주께서 지독하게 사랑하도록 인도 해줘요. 교만을 덜 했어요. 지금 교만을 덜 해서 문제라고. 더 교만하게 해 주시는 겁니다. 왜? 뭘 쳐다보라고? 십자가 쳐다보라고.
자, 요한복음 봅시다. 성령이 오게 되면 내가 너한테 이야기 한 것을 증거하는거 거든요. 예수님이 하신 이야기의 그 완성은 십자가입니다. 성령이 오게되면 십자가를 바라보게 해요. 그러면 십자가 바라보게 할 때
‘나는 돈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라는 차원에서 십자가 바라볼 때 십자가가 좋습니까? ‘나는 돈 외에는 아무것도 바라보지 않습니다.’ 그런 마음으로 십자가를 바라볼 때 십자가가 기적 같겠습니까? 어느것이 기적 같습니까?
돈을 지독하게 사랑하면서 사랑하는 마음을 철회할 마음이 전혀 없는 가운데서 십자가가 왠말이냐? 나와 같은 인간에게는 십자가가 왠 행운이냐 이 말이죠. 그냥 지옥에 내쳐도 아무 지옥에 내쳐도 입이 100개 라도 할 말이 없는 우리에게 저 십자가가 왜 떳느냐 이말입니다. 정월 대보름 달 뜨듯이 떠가지고 너의 죄를 이미 사했노라. 그런 소식이 성령을 통해서 들려준다는게 이게 얼마나 놀라운 일 입니까. 그러니 성령이 하시는 일은 오직 주께서 다 이루었다는 그것에 초점이 있습니다.
그런데 성령을 안받은 사람은 이제는 받은 척을 해가지고 ‘이제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자 되기 위해서 주의 말씀을 주셨기 때문에 사도의 자기를 사랑 안해야지. 돈을 사랑 안해야지.’ 푼돈이나 사랑안하지 목돈 줘봐요. ‘어머나, 예수님 미안합니다.’ 챙겨놓고 보자는 식으로 나오는게 인간이거든요. 우리는 목돈 만질 기회도 없어서 그런거 모르지만. 그래서 제자들이 증거할때는 전에는 예수님과 한패라는 자기 자신을 증거했는데 예수님 성령 오기 전까지는. 예수님 십자가 질 때 까지는 딱 지고 난 뒤에는 자기가 예수님 십자가로 건너 갈수가 없잖아요. 못 건너 가잖아요. 전부 다 배반하고 등을 돌리고 다 돌아 섰지요. 그 구조를 그대로 유지 합니다.
그래서 지금 자유주의 신학에서는 예수의 이야기를 뭐로 보냐 하면은 해방으로 봐요. 오늘 제목은 일단 후보감으로 해방과 구원이라고 봅시다. 해방과 구원의 차이점이 뭐냐 하면은 해방은 그 구조에서 벗어남이예요. 그 구조에서. 이 구조에서 벗어남이 해방입니다. 해방이다!! 이러잖아요. 해방이다!! 36년 일제압제에서 해방이다. 그 구조에서 혼자 달랑 슈퍼맨처럼 공중으로 우주 창공으로 착~날라가는 것처럼 드디어 이 지긋지긋한데서 벗어나잖아요. 구원은 뭐냐 하면은 나를 꽉 옭매였던 그 구조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유지하는게 구원 이예요. 그대로 유지하면서. 죄 속에 있는 구조를 그대로 견지를해, 유지를 해줘요. 왜냐하면은 해방의 목적은 내가 행복한거지만 구원의 목적은 예수님의 예수님께서 어떻게 죄를 죄인을 의인되게 했느냐를 예수님의 자기 성과가 목적이기 때문에. 우리는 못난놈을 계속 견지해줘야 되요. 내 힘으로 탈출이 불가능함을 구원되었기 때문에 계속 견지해줘야 됩니다. 유지를 해줘야 되요.
그 대구 강의에서 그런거 했는데 재래시장에 가면은 베개 껍데기 베게 피라고 합니까? 이불 호청이라고 합니까? 알맹이 있고 솜있고 호청이죠? 호청이라든지 베개피라는 것은 뭐냐 하면은 그냥 그대로 있고 바깥을 둘러싸잖아요. 그러니까 구원이라고 하는 것은 뭐냐? 죄인은 죄인대로 그대로 있고 예수님의 의로 이 구원받은 죄인을 호청처럼 둘러 쳐버려요. 그러면 사도는 누구를 자랑하느냐 하면은 나 같은 죄인중에 괴수지만 오직 누구만 자랑한다? 내가 구원받은 것은 누구의 은혜다? 예수그리스도의 오직 유일한 혼자만의 작업이였다. 혼자만의 업적이였고 그 작업이 지금도 계속해서 나를 재료로 삼아서 나를 원료로 삼아서 예수그리스도의 의만 증거되게 하는 것이 바로 구원작용입니다. 그런데 해방은 뭐예요? ‘답답했는데 아이고 속이 다 풀리네.’ 자기자신의 자유를 만끽하기 위해서 예수그리스도의 하신 일을 고맙다고 여기면서 이용하는 것, 그게 바로 해방신학 또는 해방의식이예요. 사람들은 성령 안 받은 사람들은 어느것을 좋아 하겠습니까? 자기가 못난놈을 유지하는 것을 좋아하겠습니까? 아니면 자기가 멋있게 구원되는 것을 자랑하겠어요? 예? 해방을 자랑하겠죠. 그래서 해방된 사람들의 특징이 뭐냐? ‘나 구원 받았다.’ 이거고 ‘당신은 구원받았습니까?’ 묻는 것. 관심사가 자기 구원밖에 몰라요. 자기 잘되고 싶었는데 잘됬다. 그래서 주님께 감사헌금하고 십일조 한다는 거예요. 그러나 이쪽은 뭐냐하면은 전에는 나 잘되고 싶어요. 지금도 내가 잘되고 싶어요. 하지만 하나님의 관심사는 내가 잘되는 것이 아니고 주님이 잘되는 것이 주님의 관심사, 하나님의 관심사라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주일 낮에 그런 이야기 했잖아요. 인간들은 하나님을 섬긴다고. 그것이 우상이라고 했지요. 그런데 예수님은 뭡니까? 하나님을 이야기 하지 않고 아버지를 이야기 하잖아요. 하나님을 찾느냐? 아버지를 찾느냐? 그 이야기가 오늘 본문에 나옵니다. 16장 5절. 지금 내가 나를 보내신 이에게로 가는데 그런 이야기 하죠. 나를 보내신 이에게로 가는데 3절에 보니까 그들이 이런 일을 할 것은 그 다음에 누가 한번 읽어보세요. ‘그들이 이런 일을 할 것은 아버지와 나를 알지 못함이라.’
그렇지요. 예수님의 관심은 아버지와 나를 알아라가 관심이예요. 너희들의 구원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 인간들은 자기 죽어서 천당가는 것이 관심인데, 예수님의 관심은 아버지와 자기의 관계를 알리는게 관심사입니다.
그래서 12제자들이 예수님을 평소에 따라 다닐 때 왜 예수님과 헤어졌지요? 끝까지 예수님 따라 간다고 그렇게 장담해놓고 막상 일이 딱 들어닥치니까 모른다고 배신하고 왜 헤어졌습니까? 아버지를 모르기 때문에 그렇다고 되어 있어요. 아버지를 모르기 때문에. 그래서 그 제자들이 성령이 오지 않으면 여전히 뭡니까? 여전히 아버지를 몰라요. 아버지를 모르니까 그 악의 보편성 속에 일부가 본인들이 일부가 되는 겁니다. 그러면 성령이 왔다는 것은 그들이 모르는 것을 성령이 이야기 하거든요. 그러면 그들은 뭘 몰랐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몰랐잖아요. 그러면 성령 오게되면 뭐를 제공하는 겁니까? 아버지와 아들 때문에 너희는 이 땅에 태어났고 이 세상은 다 이렇게 만들어 졌다.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그것을 증거하는 거예요. 딴거 아니예요.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관심이 나한테서 관심사가 아버지와 아들에게로 관심사를 돌리는 겁니다. 그런 자리가 무슨 자리냐? 로마서 8장에 보니까 8장 15절.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그런 자리가 아들의 자리이예요. 그런 자리가 아들의 자리예요.
아들의 자리는 그림을 그리면 쉽게 이해됩니다. 아버지가 계신데 아버지를 아무도 몰라요. 그래서 이것은 악의 보편성입니다. 어느 인간도 몰라요. 제자들도 왔다가 가버렸어요. 다시 제 갈길로 갔어요. 그래서 아버지의 자리는 아들이고 아들의 자리가 이렇게 형성되어 있습니다. 아들의 자리 있는데 세상 사람들은 이런 자리 있는 줄도 몰라요. 이런 자리를. 현실 속에 이런 현실 있는지 몰라요. 그냥 자기가 사는게 현실의 전부 인줄 압니다. 그런데 아들이 갔을 때 죽었어요. 그래서 세상사람들은 아들이 가는 곳에 아버지와 아들의 자리가 있지 않고 이것을 뭐로 해석하느냐 하면은 ‘누군가 죽었데.’ 이것은 무덤의 자리죠. 무덤으로서 현실의 하나의 삽입되 있는 자리가 아들의 자리예요. 그러면 죽었으니까 이것은 별볼일 없지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아들을 부활시키고 성령을 와버리면 그 아들의 자리가 현실에 같이 있으면서 여기서 뭐가 뿜어져 나오느냐 하면은 성령이 뿜어져 나오죠. 아버지와 아들이 뭐라고 하느냐? 하나라고 했다 이말이죠. 하나. 그러면 아들이 성령으로 오게되면 성령과 아들과 아버지는 하나가 되잖아요. 그 다음에 성령이 도달되게 되면 이들이 어느 자리에 가느냐 하면은 그들이 죽었다고 여겼던 그 자리에 본인이 들어가게되요. 그러면 아들과 성령과 아버지와 성도가 전부 다 뭐가 되요? 하나가 되는 거예요 하나가. 하나가 된다는 말은 뭐냐 하면은 따로 놀 수 있는 기능이 없다는 말이예요. 따로 놀수 있는 기능이 없다. 그러면 아까 이야기 한 것 계속 해 봅시다. 성도가 돈을 사랑한다. 이 돈을 사랑하는 것이 자신의 기능입니까? 주님의 기능입니까? 답변 나오는데. 간단한데. 주님의 기능이라니까요. 이게 중요한거예요. ‘주여 내가 돈을 사랑하는 나쁜 놈입니다.’ 라고 하면 주님 뭐라고 하느냐 하면 ‘아직 멀었다. 돈 사랑 제대로 돈 사랑을 못했구나. 더 살아봐. 80까지 살아봐. 제대로 돈 사랑하는 것을 알 거야.’
주님의 말씀대로 주님의 말씀에 위반된 자리, 그 죄인의 자리는 죄인의 자리를 계속 내려가면서 어떤 사고방식의 변화가 있느냐 하면은 옛날에는 말씀을 위반하면 죄 였잖아요. 예수님의 성령 오고 난 뒤에는 십자가와 관계가 끊어지면 죄가 되요. 십자가와 관계가 끊어지게 되면. 왜냐하면 옛날에는 율법으로 죄냐 의를 규정하는 규정이 예수님이 오심으로서 그것이 철폐되고 말았어요. 이제는 아들을 믿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아요. 그리고 아들을 믿는 자는 이 땅에서 어떻게 살던 묻거나 따지지 않고, 생명의 나라의 아들의 나라에 들어가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가 뭘 할 수 있습니까? 라고 질문하게 되면 그 질문 조차 바꿔야 되요. 주께서 나에게 무슨 일을 시키실겁니까? 이렇게 질문해야 되는데, 내가 무엇을 할수 있습니까? 하는 것은 이게 어디에 위반되느냐 하면은 하나라고 있는데 아직도 나를 따로 빼내는 사고방식에 의해서 질문한 질문이 되는 겁니다. ‘주여! 예수 믿었으니까 고맙습니다. 나를 주님을 위해서 뭘 해드리면 되겠습니까?’ 라는 질문자체가 수정되어야 되요. 질문 자체가. 거기에 적당한 예가 바로 요한복음 4장에 나오는 사마리아 여인이예요.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님하고 뭐 주고 받고 주고 받고 이야기하다 끝 부분이 되니까 신봤다 하는 식으로 나는 메시아를 봤다하고 자기가 물 길러 왔다가 물동이 갖다 버려두고 동네방네 너무 놀라운 소식을 전했잖아요. 그럴 때 예수님이 그 여자를 뭐라고 칭찬하느냐 하면은 니 속에서 뭐가 나온다고 했습니까? 마르지 않는 생수가 나오죠? 그러면 그 여자는 어디서 뭘 하던지간에 움직이는 우물이예요. 예수님의 성령이 작용하는 우물이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내가 따로 뭘 하느냐는 의미 없어요. 그 여자가 애를 낳던지 또 시집을 가던지 관계 없어요. 계속해서 뭐가 나오겠습니까? 착함이 나오는게 아닙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가 나오지요. 나는 남자 5명 사귀고 6번째 사귀었다 뭐 이런게 나오는게 아니예요. 그런 것은 사소한 문제고 별 의미 없는 문제예요. 내가 어디서 뭘 하고 어떻게 살았는지 그것은 옥경이한테나 중요한 문제이지 주님나라 에서는 아무 의미가 없다니까요.
제가 여러번 예를 들어서 어떤 사람들은 식상하다고 하는데 제가 산장의 여인 이야기를 또 해야 겠어요. 산장의 여인. 그 산장의 여인 유명한 노래 아닙니까? 아무도 날 찾는 이 없는 외로운 이 산장에. 그 가사 내용이 뭐냐 하면은 좋아했는데 그만 차여가지고 세상 버리고 조용하게 산장에 와서 가사에 보면 마지막 생애를 산장에서 보내겠다 뭐 이런 생각이 들은 모양이예요. 그 가수가 얼마전에 죽었지만. 중요한 문제 아니고 사소한 문제고. 거기에 보게되면 뭐냐 하면은 사랑을 원했는데 사랑이 안 이루어짐으로서 너무 상처가 깊어서 나는 외로운 산장에 살겠다 이 말 아닙니까? 그런 사고방식이 그런 사고방식은 뭐가 없는 거예요? 주님 아들의 자리가 아니고 아들 바깥의 자리예요. 아들 바깥의 개체의 자리고 개별자의 자리예요. 입자예요 입자. 그냥 하나의 입자로와서 자리다 이말입니다. 그 불렀던 가수가 아주 독실한 불교신자예요. 그런 불교신자 이야기를 제가 하는 이유는 모든 인간이 다 그러니까. 모든인간이 선악과 따먹고 자기가 신이거든요. 개체적으로 다 신이다 말입니다. 신이니까 죽어서 천당 갈려고 하니까 뭐 뾰족한 수 없나 보니까 예수님이 피를 흘렸다 하니까 ‘어 잘됐네. 그 피 내가 믿습니다.’ 해가지고 피 믿으면 천당 간다고 우기는 겁니다. 가겠습니까? 못가지요. 천사가 피~ 웃어요. 합류해야 되요. 혼자라서 뭘 믿고 믿는것도 법 아닙니까? 믿는 것도 법 이거든요. 왜냐하면 법이라고 하는 것은 법을 지키는 주체자가 자기가 되기 때문에 법이되요. 내가 예수 믿으면 그게 법이 된다 말이예요. 이게 믿음이 아니고 법이 되요. 율법이 행함이 된다 이 말이죠.
갈라디아서에 보면 나와요. 항상 성령이 나올 때는 반드시 뭔가 경유를 해요. 뭐냐면 십자가에 우리 자신을 죽이는 그것을 경유를 해서 성령이 나와요. 나는 죽고 내 안에서 누가 산다? 나는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살잖아요. 갈라디아서 2장 20절. 그러면 내 안에 그리스도가 있다면 같이 나오는게 아니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있다면 그리스도가 무슨 일을 벌려요. 어떻게 일을 벌리냐 하면 우리 주둥이에다가 ‘너는 가만 있어라. 내가 만들어 준대로 인생 살면 되.’ 라고 자꾸 가만 있으라고 발길질 하는 거예요. 우리가 이 땅에 태어나서 어떻게 살던간에 그게 누구 인생이냐 하면 내 인생이 아니고 주님의 자기 인생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주일날 이걸 가지고 우리는 예수님의 그림자라고 한거예요.내가 실체인줄 알았는데 주님이 실체이고 보이지 않는 분이 실체고 보이는 것은 나 라는 그림자가 생기지요. 그래서 예수님의 그림자이기 때문에 성도끼리는 서로 연락을 취하라고 했어요.그게 성도끼리의 사랑이라고 했습니다. 성도끼리. 성도끼리는 자기가 실체가 주님에 의해서 규제되었기 때문에 자기 의나 자기 자랑같은 것은 내세우면 교제가 안되지요. 성도끼리 교제는 뭐냐하면 ‘주께서 어떻게 하라 했습니다. 주께서 이렇게 하라고 했어요.’
뭐 이런 이야기가 나올거예요. 아마. 강의 끝나고 난 뒤에 쉬는 시간에 집사님께서 주가 하라 하신데로 아마 이야기 하실겁니다. ‘당신이 생각했잖아. 뭐 생각했잖아.’ 개별자로 하면 안되요. 거기에 동의 하라는 말이 아니고 각자 성령 받은데로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서 아주 중대발표가 있습니다. 나의 생애는 없고 주님의 생애 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나의 세계가 없고 라고 했을 때에 그러면 나는 여기 있는데 왜 없다 하느냐? 내가 전에 육으로 있을 때 나라고 생각하는 나 가 그게 뭐냐하면 자아라는 겁니다. 다시 매번 수십번해도 또 해 봅시다. 자아라고 하는 것은 어떻게 만드는가 하면 남을 경유해서 만든다. 남이 갖고 있던 그것이 내가 욕망을 내가 욕심을 내서 남들처럼 살고 싶어서 계속해서 정보가 유입되어서 자아가 형성되는 겁니다. 인간사이에는 뉴런과 뉴런이 있는데, 뉴런과 뉴런사이는 연결이 안되요. 시냅스라는 것이 있어서 시냅스를 통해서 여기서 전기신호로서 전달되게 되면 뉴런하고 연결되어서 여기서 정보가 나오는데, 이 시냅스는 그냥 연결되는 것이 아니고 외부의 시각에 의해서 시냅스가 켜졌다가 꺼졌다 하면서 시냅스가 부풀어지고 커지고 이것이 중요하고 중요하지 않는다는 그것을 결정짓는 것이 계속 변화를 일으켜요. 그 어린아이들의 두뇌에다가 ‘이거 지지!! 그것하면 안되. 퉤퉤해!’ 하게 되면 그 부모의 요구에 따라서 어린아이의 머릿속에 있는 정보를 자기가 스스로 결정짓는 시냅스와 뉴런사이에 어느것이 구성이 되게 되어 있어요. 과학적으로. 이렇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어린아이는 누가 키워요? 부모가 그 부모 집안에 맞는 문화로 서서히 색깔을 고정시키게 되어 있습니다. 이게 자아라는 거예요. 자아. 이게 나예요.
자연은 그냥 아무것도 아니예요. 자연은 무성이예요. 어떤것도 없어요. 없는데 여기서 인간의 언어가 들어가면 이게 뭐가 되냐 하면 문화가 되요. 문화. 그런데 언어속에 뭐가 담겨 있느냐? 너는 내 자식이라는 인간의 욕구와 욕망이 실리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인간이든 선입견 없는 인간은 없어요. 각종 그 문화에 따라서 선입견 다 있습니다. 지금 북한에 있는 아줌마들은 김정은 보면 좋아서 진짜 자발적으로 눈물 막 흘리고 있습니다. 남한에서는 이 돼기 같은 인간아 잡아 죽이겠지만 북한에서는 여군들 김정은 한테 반해가지고 난리도 아니예요. 왜 그러느냐? 그 쪽에 있는 문화가 시냅스에 영향을 줘가지고 그게 자기는 옳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30년 40년 교회다닌 사람이 십일조 지키고 주일성수 지키고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라고 주신 말씀이니까 순종해야되 라는 이러한 강요가 되게 되면 그게 일종의 하나의 문화가 된다니까요. 그리고 그거 안 지키면 벌 받잖아. 봐라 십일조 떨어졌지. 기도해봐라 응답받는다. 이런 것을 계속해서 수십년 동안 누적이 되서 쌓아 보세요. 인간의 힘으로 그 복음이 먹히겠습니까? 탁탁 튕기지요. 튕기지요. 이것은 우리교회 목사가 그렇다는 말을 하는게 아니예요. 이미 자기가 있음화 되어 있어요. 외부에 누가 했던간에 자기 방식은 이미 굳어져 버렸습니다. 성경을 보면서 뭐냐? 성경은 왜 주느냐? 지키라고 준거다. 지키면 그 보상은 천국. 딱 고정되어 있어요. 이것은 일반적인 종교가 되니까. 모든 종교와 문화는 누구를 위해서? 지키는 나를 위해서 필요한게 종교고, 기독교고, 예수고, 하나님이고, 부처 잖아요. 나를 위해서. 성경에 분명히 나를 위해서가 우상이라고 그렇게 지적했지만 그거 이야기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고 무조건 여러분 이렇게 지키시면 여러분한테 실리가 있고 그만큼 보탬이 있고 보상 주어 집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은 여러분의 인생을 경상도 말로 해서 단디. 단디. 니 인생은 니가 사는 거야. 순종하면 복 받고 순종 안하면 니가 징계받고, 그러니까 니가 하나님께서 성령께서 그렇게 역사할 때 아! 주의 뜻이다 해서 이런짓을 해서는 안되겠구나 이게 성령을 빙자하는 윤리 도덕이 성령이라는 것을 빙자해가지고 교회에다가 지금 이런식으로 기독교 문화로 윤리 도덕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이죠. 사두개인들이 왜 사두개인이겠습니까? 그쪽 문화거든요. 예수님이 진작에 맞아 죽어야 될 분이예요. 진작에. 뭐 병 고치고 할 때 뭐 이익이 있는가 싶어 돌아다녔지요. 나중에 예수님께서 성전 걷어 치울 때 그 때 그들은 완전 돌아버리는 거예요. 성전을 걷어 치웠다는 말은 모든 구약 해석이 성전에 누가 오느냐 하면 메시아가 오게 되어 있어요. 성전을 걷어 치운다는 말은 이것은 메시아 아니고서는 그런 짓을 하면 안되거든요. 그리고 성전을 왜 지키느냐? 성전을 지킬 때 그들은 성전에 제물 바칠 때 그들은 죄사함을 얻어요. 마태복음 9장에서 예수님께서 중풍병자 왔을 때 뭐라고 했습니까? 니 병을 알아라 이랬습니까? 니 죄가 사해진다고 했습니까? 어느쪽이예요? 지금 병 고치러 온 사람한테 병만 고쳐주면 되지 니가 건방지게 하나님도 아닌데 어떻게 하나님만이 사할 수 있는 죄를 왜 니가 사하느냐 이 말이죠.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고, 죄인을 불러서 죄 용서 시키러 왔다 할 때에 그 취지를 자기가 의인이라고 우기는 사람들은 아무도 그 자리에 그 말을 받아 들일수가 없어요. 본인이 지금 잘하고 있는데, 잘하고 있는데 죄 씻음 받을 이유가 또 없는거예요. 본인이 하는 식대로 하게 되면 결국 죄 보다 의가 많아 지니까 빼기 플러스 이렇게 다시 정산처리 하게 되면 결국은 의가 남으니까 천당갈게 뻔한데 죄 씻음 같은 것은 누구한테 하느냐 하면은 저주 받아서 중풍병 걸린 사람. 자력으로 도저히 구원될수 없는 희망이 끊어진 사람에게나 하나님의 넘치는 긍휼로서 죄 씻음 되는 것이지 자기가 악을 버리고 선을 행할수 있는 자격자고 능력자가 있다는데 왜 그걸 지금 잘하고 있는데 거기다가 안된다는 식으로 죄 씻음 해야된다는 식으로 오게되면 지금 착한일하고 있는 사람은 기분 나쁘잖아요. 열심히 행한 사람은 기분 나쁘잖아요. 십일조하고 주일성수 하는 사람은 기분 나쁘잖아요. 이게 자아가 뭐냐? 이렇게 무서운 거예요. 자아라고 하는 것은 어릴 때 ‘어머니 저는 자아되기 싫어요!’ 이런 아이 봤습니까? 자아라 하는 것은 이미 육 속에서 강요된 것이고 어쩔수 없는 거예요. 푹 자아가 계속 쌓여서 자아가 유지될 수밖에 없는 거예요. 그래서 자아가 뭘 갖고 있느냐 하면은 결정권과 선택권을 갖고 있다고 우깁니다. 자아가. 예수를 믿어도 내가 결심해서 믿겠다는 거예요. 내가 납득이 되면 내가 결정하겠다는 거예요. 내가. 내가 결정하겠다. 아까도 이야기 했죠. 법이라고 하는 것은 어떤 것이 법이다? 반드시 그 법을 지키는 그 주체가 있을 때 법에 대해서는 책벌이 가능하니까 선과 악이 나오게 되면 반드시 법은 그 법을 행하는 자를 묶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선한자는 선하게 악한자는 악하게 되는데, 예수님 말씀하기를 법에 의해서 선할수 있는 사람은 있다 없다 했습니까? 있어요? 없어요? 없지요. 그러면 뭡니까? 법이 왔다는 것은 다 죽이겠다는 거예요. 결국은. 다 저주 시키겠다는 겁니다.
이걸 사람들은 모르는 거예요. 사도바울은 나중에 알지요. 갈라디아서에서 아는데, 사도바울도 예수님 만나기전에는 몰랐던 거예요. 우리가 어떤 형편에 있는 줄을 모르는 거예요. 이 말씀을 지키면 되는 줄 알고 있어요. 지키면 지키는 그것이 점점 더 이렇게 옥죈다 하지요. 저주가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저주가 더 강렬해지는 거예요. 지키기 때문에 지키는 것을 죄로 전환시킬수 있는 그러한 마음은 점점 더 사라니까. 점점 사라지니까. 십일조 10만원 하다가 15만원 할수 있어요. ‘에이~ 기분이다.’ 해서 연말이니까. 그런데 십일조 10만원 하다가 5만원 해보세요. ‘주께서 주신 징벌을 어떻게 감당하랴.’ 이렇게 되요. 이게 뭐냐하면은 이 말은 뭐냐? 십일조 10만원 했기 때문에 이 정도라도 복 받고 산다고 우기는 거예요. 법을 지켜서 뭐가 나온다? 복이 나온다고 생각하는 이 사고 방식이 누가 가르쳐 줬어요? 부모가. 그리고 부모 다니는 교회가 그렇게 자아를 이렇게 만드는 겁니다. 자아를. 인간은 자아 밖에 없어요. 다른건 없습니다.
그런데 성령이 뭘 소개 합니까? 이 자아를 이렇게 올리고 있어요. 자아를. 밑에 짝대기가 쭉 찔러 가지고. 자아가 이렇게 있는데 거기에다가 뭐가 쑤욱 들어와요. 주체가 들어와요. 자아나 주체나 우리말로 하면 나 이고 이것도 나인데 이 나는 어디서 나왔느냐 하면은 예수님에서 나온 예수님과 연결된 예수님과 하나라고 했죠. 하나된 주체로서 올라오게 되면 이것은 이 나는 누굴 증거한다? 나 있음을 증거하는 것이 아니고 ‘누구세요? 나를 이렇게 떠미는 사람이?’ 라고 자꾸 자기를 뒤에서 떠미는 예수님을 증거하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을 증거하게 되어 있어요. 이게 바로 예수님의 증인이예요. 성도입니다. 성령을 받은 사람은 나는 죽고 그리스도가 사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 있든지 없든지 오래 살던지 관계없이 주께서 그렇게 니 은혜가 너에게 족하다 라고 끝나버리는 거예요. 니 은혜가 족하다. 백부장이 이걸 알았잖아요. 가라 하면 가고 오라하면 오나이다. 다른 사람들은 ‘뒤에 누구 있나?’ ‘있어.’ ‘누가?’ ‘주님이.’ 주님이 있다는 거예요. 그리고 요한복음 2장에도 나오지요. 회당장에 요새는 기억력이 자꾸 없어져. 요한복음 4장에 보면 가나안 혼인잔치 가버나움에 어떤 왕의 신하가 있는데, 왕의 신하가 있어 가지고 ‘내 아이가 죽기전에 내려오소서.’ 50절에 ‘가라 네 아들이 살아 있다 하시니 그 사람이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믿고 가더라.’ 오셔서 우리 아들을 살게 해 달라고 하니까 예수님께서 안가고 말씀만 딱 하는데 그 시기가 뭐냐? 말씀했던 그 시기에 이거는 가보고 확인할 필요도 없어. 그 시기에 즉시로 예수님께서 낫게 했지요. 그러면 이런 상황은 본인이 왕의 신하가 본인이 예상한거예요? 예상한거 아니예요? 예상 안했지요. 자아가 예상한 것을 주체로 뭉개버리고 그러면서 예수님과 관련된 일을 집어 넣어요. 만약에 내가 예수님께 부탁해서 내 아들을 낫게했다 한다면 그 사람은 누구 자랑하겠습니까? ‘예수님께서 낫게 했다.’ 하면서도 그 중에 뭐가 포함되어 있어요? ‘그때 부탁을 내가 했다니까 내가. 내가 얼마나 믿음이 좋은지 내가 부탁했어.’ 반드시 자기 자아가 여기에 포함되어 있잖아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오셔서 하지 않고 그가 원하는데로 안해주면서 그가 미처 예상못한 다른 일을 해버림으로 말미암아 이번 일에서 자아가 손을 떼는 계기가 되는 거예요. 야! 이거는 주님께서 내 부탁을 들어준게 아니고 주님께서 내가 주님한테 부탁하게 하는 것 조차도 주님께서 사전에 미리 세팅 된거라는 거예요. 내가 주님앞에 부탁하는 것 조차도 주께서 익히 아시고 니가 몇날 몇시에 나한테 부탁하게 되어 있어. 그것까지 소급해서 다 알게 된다니까요.
여기 스마트 폰에 보면 뉴질랜드에서 온 목사님의 질문이 있어요. 질문이 있는데 그 목사님 복음 전할려고 나름대로의 뉴질랜드에서 애를 많이 썼는데 가끔 가다가 청년들이 하는 질문이나 이런게 말문이 막히는게 있는 모양이예요. 그게 뭐냐하면 뉴질랜드 청년이 ‘목사님 그러면 기도 안해도 되겠네요.’ 흔히 하는 질문 있잖아요. ‘그럼 기도 안해도 되겠네요.’ 할 때 답변이 궁하다는 거예요. 어떻게 답변했으면 좋겠는가? 아까운 시간 막 지나가는데 하여튼 그런 식입니다. ‘그럼 기도 필요 없네요. 가만 있어도 다 되겠네요.’ 라고 했을 때 답변을 이렇게 했어요. 기도는 본인이 하는게 아니고 주께서 시키십니다. 주께서 시키시게 함으로 말미암아 내가 기도하게 되면 예상하는게 있어요. 내가 기도하게 되면 응답이 이런식으로 될거고 예상하게 되는데 주께서 시키시는 기도를 하게 되게 되면 그 결과가 내 예상과 영 어긋나면서 동시에 뭐냐하면 내가 죄인입니다. 하는 것 같이 다시한번 내 형편에 대해서 다시한번 확인 할 수 있는 기회를 허락해요. 아! 내 인생 내가 기도해서 살아가는게 아니고 주께서 기도 할때는 기도하게 하게끔 해서 처음부터 너는 창세전부터 너는 너의 인생아니고 내 인생이였다는 것을 알려주는 겁니다. 이게 뭐냐하면 주체예요. 주체는 예수님을 증거하게 되어 있고 자아는 끝까지 자아를 증거하게 되어 있습니다.
문제는 자아에서 주체로 가는 그런 능력이 그런 수가 없다는 겁니다. 아무리 예수 믿어도 내가 천당 가고 싶은 거예요. 이 자아가 천당가고 싶지 주체가 천당가는 것은 우리 머리에는 없어요. 그래서 이렇게 생각하세요. 이 새롭게 생긴 이 주체는 자아로부터 그냥 편하게 그냥 남이다 이렇게 생각하세요. 내안에 내가 너무나 많아. 뭐 너무나 많을 것 없이 또 다른게 있어요. 내 안에 다른게 있어요. 그냥 남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되요. 남이다. 남인데 그 껍데기는 뭡니까? 고집스러움은 나예요. 나는 내 식대로 하게되면 이 주체가 나를 가만두지 않고 ‘그게 아니야. 이 바보야.’ 하면서 자꾸 내 뜻대로 안되게 해줘요. 스튜핏! 하죠. 이 바보야. 그러고 돌아서서 그뤠잇! 최고 였습니다. 아! 이거였군요. 쓰잘데기 없는 것 가지고 내가 고민했군요. 심각하지 않는 문제 가지고 오해했군요. 사소한 정말 아무것도 아닌 문제. 북한이 뭐 서울 친다? 아이고, 우짜노~ 우짜노 하는건 뭡니까? 자아죠.
주체는 주께서 허락했지 뭐. 주께서 허락했으니까 내가 이 나이에 원자폭탄 맞고 죽지. 그게 뭐 큰 문제야 주께서 그만 살아라 했으니까 그만 사는 거예요. 이게 주체예요. 그러니까 걱정하는게 쓰잘데기 없는걸로 걱정하는 거예요. 걱정 할 필요도 없는거. 허깨비 같은 허상이 없는데 실체가 없는걸 걱정하는 거예요.
가락-요한복음 16장 1절(공백)180102b-이 근호 목사
자, 다음하겠습니다. 계속하겠습니다. 요한복음 16장. 첫째시간에 한 것 중요한 것 다시 한번 하게 되면 이렇습니다.
인간들 사는 세상에 예수님이 왔습니다. 우리는 생각하기를 우리 인간 생각에 플러스 하나 더 추가한 것으로 알고 있어요. 그런데 들어갔다가 빠져 나오게 되면 그게 뭐가 있느냐 하면은 공백이 생겨요.
처음부터 없었으면 예수님 안왔으면 생기지 않을 빈자리가 생겨 버렸습니다. 빈자리. 이걸 왜 이야기 하느냐 하면은 이 그림을 그리면 아! 그런 뜻이구나 할겁니다.
자, 인간 세상이 이렇습니다. 수평이 있고 인간들이 살고 있습니다. 인간들 옆에서 보게 되면은 인간들 사는 세상 인간들만의 세상이예요. 하늘에서 이렇게 오거든요. 예수님이 오실 때 하늘에서 왔다고 생각 안하고 목수의 아들이니까, 누가 여기서 플러스 한명 인구 하나 더 추가시킨거죠.
그런데 오고 난 뒤에 딱 가니까 여기서 구멍이 생기죠. 구멍이 생기면서 인간들 밑에서 그동안 받쳐왔던 악마가 노골적으로 노출되는 구멍이 생기게 된 거예요. 나만 놀라는 건가?
구멍이 뻥 뚫어 놓으니까 예수님 가신 그 자리에서 예수님은 인간들만 상대한 것이 아니고 누구하고 상대한거예요? 그동안 인간들한테는 없는 존재. 인간들한테 없는 존재가 뭡니까? 악마죠? 인간들에게 악마는 없어요.
인간들 옆에는 인간들만 있어요. 우리나라에 문재인 대통령이 있지 대통령이 지도자이지 마귀가 지도자라고 누가 이야기 하겠어요? 문재인 잠시 나와보세요. 뒤에 마귀있는지 잠시 보자. 안보인다니까요. 없는 악마와 상대한거예요. 인간하고 상대한게 아니고요.
이게 이제 로마서에 보면 나와요. 주께서는 죄와 죄의 권력과 사탄과 싸웠단 말이죠. 악마와 싸우다 보니까 이 구멍을 통해서 악마는 예수님이 뚫은 구멍 때문에 악마는 몸둘바를 모르는 겁니다.
그동안 인간들에 의해서 철저히 커버 되었는데, 뻥 하고 구멍 뚫려 가지고 이 빈자리 만큼은 악마가 그대로 노출되니까 그럼 그 다음에 어떻게 되겠어요? 인간을 동원해서 이 자리를 뭘로 매꿔야되요? 매꿔야 되겠죠? 악마가 안나오도록. 그게 뭐냐하면 교회라는 거예요. 교회. 종교, 종교 활동이 되는 겁니다.
종교 활동에도 반드시 뭐가 동원되요? 법이 동원되겠죠. 옛날처럼 옛날 법으로 했던. 그래서 예수님께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보고 뭐라고 했습니까? 너희는 누구의 자식이다? 악마의 자식이다. 죄의 자식이나 악마의 자식이나 다 같은 이야기예요. 너희는 죄의 자식이다.
너희들이 한 짓은 너희들의 짓이 아니고 너희들 조종하고 있는 악마가 너희들을 앞잡이로 세워서 한 것이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표면에 나타난 것은 이들의 역사의 표면에 나타난 것은 뭐냐면 뭐 지키자? 율법지키자예요.
율법지키자에 의해서 누가 살해되었습니까? 예수님이 살해됬단 말이죠. 그러면 예수님이 난 구멍은 어디에 구멍내겠습니까? 율법 지키자 그 가운데에 구멍을 뚫어 버린거예요. 율법 지키자에. 율법지키자에 구멍을 이렇게 뚫는거예요. 구멍을. 구멍을 뚫겠지요?
그러면 사탄이 가만 있지않고 이 구멍을 메꿀려고 하겠지요? 법으로. 법으로라는 말은 무슨 뜻이냐? 인간의 행함으로란 뜻이예요. 인간의 행함으로. 인간의 행함으로 이 구멍을 메꿀려고 하겠지요.
그러면 메꿔버리면 헤헤 거린다 이말이죠. 예수 당신 백날 해도 당신 죽고 난 뒤에는 똑같애 똑같애 이렇게 될거 아니냐 이 말이죠. 그러면 똑같이 됐으니까 조용하겠지요.주님 혼자 죽었어. 주님 혼자 부활해서 하늘나라 가버리고 다시 조용했어요.
그런데 오순절날 누가 왔습니까? 성령이 오니까 사도들이 미쳤어. 갑자기 사도들이 미쳐버렸어요. 사도들이 뭘 뚫느냐 하면은 그동안 법으로 메꿔놨던 이것을 계속 구멍을 뚫는 거예요. 구멍을 뚫으니까 거기에 누가 반격하겠습니까?
악마의 앞잡이들이 유대인들이 반격하겠지요. 그러면 예수님을 죽이라고 달려들었던 그들이 이제는 누구를 죽이겠습니까? 성령 받은 사도를 죽이려고 기어이 달려들겠지요.
그래서 사도행전에 나오는 고난이 처음에는 베드로의 받은 고난과 그 다음에 사도바울이 받은 고난 그 뒤에는 오늘날 성도들이 받는 고난을 주욱 이야기 한겁니다. 예수님이 받은 고난의 반복성이 이어지는 겁니다. 반복성이.
그 구멍을 갈라디아서에서는 십자가가 보이거늘 구멍이 보이거늘 다시 말해서 법으로 구원되지 않는 장소가 보이거늘 누가 이 법으로 법의 행함으로 이 십자가의 공로를 누가 가리느냐. 그게 바로 예수님이 싸워왔던 악마의 얼굴입니다. 악마의 얼굴이예요. 오늘날 교회지요. 오늘날 교회입니다.
자, 교회가 악마의 압잡이가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들은 교회가 지킬만한 실체가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교인들이나 장로나 목사들이 뭘 지킵니까? 뭘 지키죠? 특히 목사들이 뭘 지키죠? 자기 교회를 지키잖아요.
그러면 모든 성경해석은 어디로 통해요? 성경같은 것은 어떻게 해도 결국은 마지막 결론은 뭡니까? 그러니까 이 교회에 돈 내고 이 교회에 충성하고 이 교회를 우리 힘으로 지키게 되면 누구한테 영광이다?
하늘님께 영광이다. 하나님과 중간에 교회 그리고 인간의 행함과 법적인 그러한 실이익들을 거기다 모아놓고 그걸 해서 사람들에게 하나님 나라에 보내주겠다고 계속해서 그 사람들을 거기에다가 모으는 거예요.
그러면 사람들이 거기에 갈 때 무슨 생각을 합니까? ‘자. 보자 이 천국가는 법은 어떤 법을 내가 지키면 되겠느냐?’ 하겠지요. 아까 배운 것을 써먹어 봅시다.
자, 교회올 때 ‘목사님 저는 뭘 하면 됩니까? 기도를 어떻게 하면 되고, 헌금은 어떻게 하면 되고, 찬양 봉사는 어떻게 하면 되고, 목사 말씀 어떻게 순종하면 됩니까?’ 할 때 그게 주체입니까? 자아입니까? 자아잖아요.
그러니까 이게 지키게 되면 천국에 누가 간다? 주체가 가는 것이 아니고 자아가 가지요. 그런데 자아에서 주체로 갈때는 아까 구멍 뚫는다 했지요? 법으로 구축되어 있는 자아를 예수님이 주체가 되셔 가지고 구멍을 뚫어버리면 천국가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 천국가느냐 하면 구멍 뚫린 사람이 천국가는 거예요. 이 자아에.
나는 지켜서 바르게 살아서 천당 갈려고 하다가 십자가 보면서 ‘내가 바로 세리고 창기고 내가 강도고 내가 도둑놈입니다. 내가 죄인중에 괴수입니다.’ 라는 구멍이 뚫리지요. 구멍이 뚫렸으니까 거기에 뭐가 불겠어요?
바람이 분다~ 하겠죠? 성령의 바람이 불지요? 어떤 가수가 의자에 앉아서 그 노래 불르는거 있습니다만. 이소라라고 하는. 그 노래 들으면 성령이 생각나요. 바람이 분다하면. 바람이 확 불지요?
바람이 불면서 주님이 내 몸을 이용하는구나. 주님이 내 몸을 이용하고 있어요. 이 고집스럽고 나밖에 모르고 복음들을때는 좋다고 하고 돌아서면 또 남한테 안질려고 아등바등 애를 쓰는 이 철저하게 나를 니가 어떠한 지저분한 인간이였기에 내가 피를 흘릴 수밖에 없는 가를 피를 드러내기 위해서 우리로 하여금 그 지저분함을 계속 더 심화시키는 겁니다.
제가 주일낮에 그런 이야기 했지요. 2018년도는 변화되는 것이 아니고 심화된다고. 더 깊이 들어가요. 그럼 죄를 더 짓는가? 아니예요. 있는 죄도 충분해요. 계속 파고 들어가면 되니까. 뭘로? 이 말씀을 가지고.
아까 디모데후서 봤잖아요. 자기를 사랑하고 돈을 사랑하고 그리고 교만하고 이게 전부 다 추상적인 겁니다. 실제로 사람 칼로 찔러 죽이고 이런거 아니거든요. 폭행 아니잖아요. 파출소 갈일 없습니다.
그런데 파출소 갈 일 없어도 그게 뭐가 되느냐 하면은 성경 말씀에 의하면 이게 죄가 되요. 술 취한 것도 죄가 되요. 에베소서에 나오잖아요. 더 이야기 해줄까요? 남을 용서하지 않는 것도 죄가 되요.
그러니까 이것은 아예 죄인 안될 생각은 아예 꿈에도 먹지 마세요. 남을 용서할 때 남을 용서할 때 우리는 몇 번 용서해야 됩니까? 한 두 번? 일곱 번? 490번도 안됩니다.
이 말은 우리가 주님이 계속해서 제공되는 주님의 레벨에 주님이 원하는 레벨에 그 말씀은 우리가 평생을 살아도 지킬수 없어요. 오히려 마귀에 시험들 뿐이예요.
마귀는 어떤 법을 지키게 되면 선악을 동원시킵니다. 법을 지키게되면 우리보고 ‘좀 더 더 힘들게 지키지 너 너무 수월하게 지켰잖아. 다음번에는 힘들게 지켜야되,’ 라고 자꾸 속삭입니다. 힘들게.
기도 한시간 하게되면 잘만하면 ‘두시간까지 끌 수 있는데.’ 헌금 십일조 하면 ‘십의 이조도 가능하잖아. 십의 이조가 눈앞에 보이는데 그 고지를 탈취해야지. 십의일조 하는 사람 이 교회에 많아. 십의 이조 하는 사람은 몇 명 안되는거야. 너 수능 등급올려야 될거 아냐.’ 자꾸 이런생각이 드는 거예요.
그건 남이 가르쳐 주는게 아니라 본인이 그렇게 생각되요. 본인이. 더 어렵게 선한일도 이왕이면 더 어렵게 하고 더 아프게 하고 그런겁니다. 그걸 정신분석학 에서는 뭐냐 하면 이렇게 이렇게 이야기 해요. 쾌락도 심해지면 고통이다.
수도사들이 천주교 수도사들이 꿇어 앉아서 굶어 가면서 기도합니다. 처음에는 즐거워요. 즐겁지만 그 즐거움이 성에 안차. 그들은 마귀와 함께 있거든요. 그들은. 마귀와 함께 있기 때문에 마귀가 계속해서 어떻게 하느냐 하면은 그냥 즐거운 쾌락보다도 아프면서 더 쾌락하는 쾌락을 그들은 이끌지요.
이것은 정말 최고의 쾌락이예요. 아파 죽을 지경이 되면서도 감사하는 쾌락이 그것보다 더 큰 쾌락이 없어요. 보통 그 술 못 끊으면 담배 피우고 담배 못 끊으면 도박하고 이런 말이 있거든요. 이런말이 있어요. 하여튼 지어낸게 아니고.
더 쎈 것을 하게 되면 뒤에 것이 없어진다는 거예요. 더 쎈 자기학대를 하게 되면 어지간하게 감사하는 것보다도 더 그것을 능가할수 있어요. 더 능가할수 있다고요.
예를 들어서 목사가 월급을 한 100원 받는데 목사가 마귀 들리면 100원 받는데 저는 선교 헌금을 20만원 냈는데 더 기도를 많이 하다보면 40만원 내고 나중이 자기는 밥도 안먹고 100원 다 내고 그러면서 까마귀가 어디서 짜장면 시켜주겠지. 이래가지고 엘리야 이야기 아니까 이렇게 나오고.
그 보다 더 심하면 꼭 다른게 가겠다는 자기 아들 기어이 신학교 보내가지고 아브라함처럼 자식까지 바치게 한다고. 이런 아이디어 있잖아요. 이런 아이디어로 시간을 다 보내요. 보다 더 아프게 보다 더 남이 못 따라 오는 것. 따라 올테면 따라와봐 이런거 있잖아요.
코스를 더 험난한 코스로 만드는 거예요. 이런 것은 안양에 계시는 전목사님이 잘해요. 암벽타기 하는 것. 암벽을 타게되면 이왕이면 더 어려운 코스 타게 되면 더 유명세를 타는 겁니다. 그러한 기대심리가 인간속에 자아 속에서 자아는 악마가 만들어요. 악마가 계속해서 더 깊은 법을 가지고 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주님께서는 그걸 어떻게 말리겠습니까? 안그러면 방치하겠어요? 어떻습니까? 예? 방치하지요. 왜? 모든 인간 다 그러니까. 모든 인간이 다 그래요. 더 짜릿한게 없는가 찾아 다니는거예요. 더 짜릿한거 없는가.
그러니까 나쁜짓을 찾아다니는 것도 나쁘지만 선한짓 찾아다니는 것도 더 심한 도박이예요. 도박하는 것보다 더 심한 쾌감을 주거든요. 그렇게 하게 하시는 이유가 성령께서 오직 누구만 바라보게 한다?
예수님의 십자가만 바라보게 하기 위해서 주께서 그쪽으로 쓰시는 사람 그쪽으로 쓰시고 이쪽으로 쓰시고 하는 겁니다. 모든 인간은 어떤 인간도 자기 자신의 공로로 구원 받은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하는 유명한 말이 있잖아요. 유명하다 생각안하는데 하도 남들이 유명하다 하니까 유명해졌는데, 막 살기. 나는 그런걸 강조한적이 없는데 나도 모방된걸 가지고 모방해요.
그 유명한 하춘화라는 가수 있잖아요. 하춘화라는 가수를 김영철 개그맨이 따라하니까 나중에 하춘화 본인이 흉내내는데 김영철이 하는 걸 자기 흉내내는걸 따라해요.
자, 공백이라는 말 했습니다. 이 공백에서 구멍을 뚫어놨다고 했지요. 구멍을 뚫어 놓게되면 이 세상에 모든 것이 인간의 책임이 아니고 인간보다 더 쎈 힘을 가진 사탄이 이렇게 조종하고 있다는 것을 알수 있습니다.
그러면 성령께서는 일을 할때는 무엇에 반대, 인간이 하는 일을 반대하겠습니까? 악마가 하는일을 반대를 하겠습니까? 악마의 하는일을 반대하겠죠? 악마의 하는일을 반대하겠죠? 마태복음 10장에 보면 그런게 나옵니다.
마태복음 10장에 보게 되면 이런 말씀보면 참 신기해요. 할 이야기도 많고. 10장 20절에 보면 ‘너희를 넘겨 줄 때에 어떻게 또는 무엇을 말할까 염려하지 말라. 그 때에 너희에게 할 말을 주시리니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이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시니라.’
이걸 사진을 한번 찍어보자 말이죠. 누가 사도가 성령받은 사도가 사진을 한번 찍어 봅시다. 사진을 찍고 동영상을 찍어놨다 봅시다. 그래서 재판받을 때 ‘자, 누가 이야기 했는냐?’ 라고 했을 때 이거는 모든 사람 이야기를 누가 했어요? 사도 본인이 이야기 했지요?
그런데 사도는 뭐라고 했느냐 하면은 ‘이것은 내가 한 것이 아니고 내 속에 성령이 한것이다.’ 이렇게 했어요. 어떤 영화에 보면요, 어떤 껄렁 껄렁한 영화에 보면 권투 이렇게 하면서 쉭쉭 하면서 ‘이것은 내 입에서 나오는 소리가 아니야.’ 하는 그 대목이 나와요.
자기가 쉭쉭 해놓고 폼잡고 쉭쉭해놓고 ‘이것은 내 주먹이 빠르다는 것을 증명하는 바람소리지, 내 입에서 나오는 소리 아니요.’ 라고 일부러 강조하지요. 그거하고 비슷한 이야기예요. 자기가 이야기 해놓고 이것은 내가 하는 말이 아니고 내 속에 성령이 하는 말이다.
이게 통합니까? 비겁한 변명아니예요? 나도 그런 소리하겠다. 이거 아무나 써먹을수 있는 이야기다 이 말이죠. 해석을 어떻게 하겠느냐? 이 해석을 어떻게 하겠어요. 그러면 그럼 구분지어야 되겠네.
이렇게 한 것은 성령이 아니고 니가 한 이야기고 요렇게 한 것은 성령이 한 이야기고 이렇게 구분을 지을 수밖에 없어요. 무슨 말이냐하면 이런 이야기입니다. 성경해석이 그렇게 한두가지가 아니예요.
성경말씀이 딱 있잖아요. 성경말씀이 있는데 여기 성경말씀에서 방금 이야기 하면 해석이 몇가지다? 딱 두가지 나와요. 두가지. 하나는 성령이 하는 해석과 또 하나는 악령이 하는 해석이 딱 두가지 밖에 안나와요.
이 말은 문자, 원어, 헬라어 그건 소용없어요. 뭐 한국어 관계 없어요. 누가봐도 해석은 두가지 나와야 됩니다. 성령에 나오는 해석은 뭐냐 하면은 복음을 위해서 주는 말씀이기 때문에 복음에 내용이 나와야 되요. 복음의 내용은 예수님의 십자가 플러서 나의 죄인됨이죠. 이게 나오잖아요.
어떤 해석이던간에 이 해석은 십자가 나오고 자기 죄인됨이 나오게 되면 이것은 성령이 하는 해석인데 악령이 하는 해석은 뭐냐 하면은 여기서 십자가만 들고 나와요. 십자가만 들고나온다는 말이 뭐냐하면은 십자가의 복음이 될려면 십자가와 한 조가 있어야되요. 뭐냐하면 십자가를 이야기한 내가 바로 죄인입니다가 나와야 되요.
이게 이야기가 어디 나오느냐 하면 갈라디아서 1장 8절에 나옵니다. 나라 할지라도 이 사도바울이라 할지라도 내가 전하는 복음에서 나라 할지라도 다른 복음을 전하면 내가 저주 받는다고 되어 있어요.
사도가 이런 이야기 할때는 뭐냐 하면은 성령으로 이야기 할때는 반드시 나를 하나님이 자기 편으로 간주해준다? 안해준다? 안해준다는 겁니다.
내가 하는 일을 예수님이 하는 일에다가 이 사도가 하는 일을 들어가게 할때만 복음이 아니고 나는 들어가기는 들어가는데 어떻게 들어가느냐 하면은 이 복음에 해방자요, 폭행자요, 죄인중에 괴수인 입장에서 들어가서 한 조가 되어서 복음만이 복음만이 드러나게 되어있다 이말입니다.
목사가 자기딴에 열심히 목회한다고 목회라 하는것은 교회 붙드는 거예요. 교회 붙드는 거예요. 하면서 나이들어 가지고 퇴직해서 나가라고 하니까 ‘내가 이 교회 처음왔을 때 10명왔는데 지금은 500명왔기 때문에 퇴직금 산정 제대로 하시오.’ 이렇게 나온단 말이죠.
그렇게 그 전에는 돈을 사랑하는 것이 일만악의 뿌리입니다. 여러분 주님을 바라봐야지 교회를 바라보지 말고 백날 이렇게 해놓고 막상 자기가 퇴직해서 나갈 생각 하니까 계산 따따닥 해가지고 가만, 십일조 양이 몇 명되고, 십일조는 아니지만 헌금 연말에 몇 명 이렇게 계산 해가지고 이정도면 2억정도 2억하면 양반이다. 10억정도 5억이상 줘야되지 않겠나? 이렇게 계산 나온다면.
그러면 이 사람 뭐가 나옵니까? 내가 십자가 복음 전한다고 내 공로를 알아달라고 하잖아요. 그런데 사도는 그게 없다 이 말입니다. 사도는 나는 누구한테 가이오의 집 외에는 세례 준적도 없고 세례를 준적도 없는 이유가 뭐냐 하면은 내가 마치 그 가이오의 집을 구원한것처럼 오해 사면 안되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그리고 나는 십자가 진적 있다? 없다? 십자가 진적이 없어요. 참 말도 어렵게 해요. 자기는 십자가 진적도 없다고 해놓고는 갈라디아서 에서는 내가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말은 맞다. 못이 박혔지 자기가 십자가 진적은 없는거 맞아요. 같이 지신 십자가에 내가 합류될 뿐이지 내가 내 십자가 져서 남 구원하지는 않으니까.
그러니 이 성경해석 전체가요 뭐 계속해서 어떤 구약이든 신약이든 항상 무엇의 다툼이예요? 무슨 해석 다툼입니까? 우리는 뭐를 믿어야되. 믿는다는게 지키는 겁니다. 뭘 지켜야되. 뭘 가져야되. 이것하고 주님이 덮치니까 이 자아가 곧 죄인이였습니다.
내가 죄를 지어서 죄인이 아니고 내가 지금 갖고 있는 육 있잖아요 육. 이 자아 자체가 계속 죄를 뿜어져 나온다는 것을 자랑스럽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정말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이것을 고백하는 거예요. 억지가 아니고 고마운 마음으로 감사하는 마음으로 나오는 겁니다.
자, 그렇게 하고 그 다음에 좀 더 진도 나가봅시다. 이제 여러분들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 관계를 알겠지요? 공백이 있어요. 공백. 사람들 사는데 여기에 구멍이 뚫렸어요. 빈자리에서 뭐가 나오느냐 하면 부르짖음이 나옴니다.
이걸 전에 설교할 때 했는데 인간의 자아는 그냥 홀로 있는 것이 아니고 악마의 요구사항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악마의 요구사항을 반영한게 이게 뭐냐하면 충동이고 이게 감정이라고 하는 겁니다.
욱하는 거죠. 본인 마음대로 안되요. 본인의 모든 감정들이 악마의 요구사항에 앞잡이가 되어서 움직이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어떤 행동을 할때는 의지와 결심, 동기, 이런걸 가지고 행동을 하거든요.
이 의지 내 결심 내 의지이지만 그것을 분석을 해보게 되면 ‘내가 왜 그런걸 의지하지?’ 그러면 인간의 측면에서는 이유없음 입니다. 이유없음. ‘내가 그 사람을 왜 좋아하지?’ 이유없음. 아무 이유가 없어요.
그런데 악마의 요구사항에 의해서 나로 하여금 이런 의가 발생 되었는데 이게 요구사항이 될려면 이렇게 들어갈수가 없어요. 왜? 자기가 전부이니까. 어딜 들어가냐 하면 십자가라는 빈자리를 통해서 이렇게 들어가야 ‘아 악마가 나를 가지고 노는구나.’ 라는 것을 알게되는 겁니다.
그 갖고 노는 곳에서 뭐가 나오느냐 이걸 통해서 이 부르짖음이 나와요. 부르짖음. 이 부르짖음이란 말을 왜 여기서 강조하느냐 하면 바로 출애굽 할때에 히브리인들이 뭘 했지요? 히브리인들이 애굽에 바로왕 때 뭘 했습니까? 압제에 대해서 어떻게 대처 했습니까? 하나님께 부르짖었잖아요.
그리고 사사기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방 민족한테 계속 공격당할 때 그들이 기껏 하도하도 안될 때 줄거 다 줘도 안될 때 뭐해야 됩니까? 그들이 부르짖었잖아요. 이번 다음주 열왕기하 수련회 하는데 거기에 열왕기하에 보면 열왕기상에 보면 아사왕이 있어요. 아사왕.
르호보암, 아비암 그 다음에 왕이 아사예요. 세 번째 왕인데 그 왕이 이디오피아 세라가 공격했을 때 부르짖음으로 이겨요. 부르짖음으로. 부르짖음으로 이기고 여호사밧은 그 찬양하고 이기고 희한해요.
어쨌든간에 우리 자아가 예상한 자아는 자아대로 자기 속 다 보입니다. 자아가 다 하다가 안되면 뭘 하느냐? 부르짖어요. 부르짖는데 그 부르짖는 목적이 뭐냐 하면 이 주체를 살려달라는게 아니고 나를 살려달라는 거예요. 그게 바로 죄입니다. 살려 달라는게 죄예요.
그래서 열왕기상,하 수련회 강의가 그런점에서 좀 이렇게 어려울거예요. 우리는 부르짖으면 되게 대견해 보이잖아요. 아이고 착하다 아주 겸손한거예요. 그게 아니고 부르짖는 것이 이 공식에 의하면 자아가 부르짖는다니까요.
그런데 선지자는 어떻게 했습니까? 참 이 강의 미리 다 하면 안되는데. 왕은 부르짖는데 선지자는 부르짖어요? 안부르짖어요? 안 부르짖어요. 선지자는 까라면 까는거예요. 거기서는 죽이면 죽이는데로 살아요.
어느쪽이 하나님쪽이겠습니까? 자기 살려고 부르짖는 쪽이 하나님 쪽이겠어요? 선지자 쪽이 하나님쪽입니까? 선지자 쪽이죠. 바로 열왕기상은 그걸 보여주는 겁니다. 구약은 구약의 왕들은 왕에 의해서 왕이 죽어야 마땅하다는 겁니다.
같은 똑같은 인간들끼리 인간을 죽이고 또 죽이고 또 죽이고, 이스라엘 같은 경우는 9번 죽여요. 9번. 아 강의할거 다 하면 안되는데. 무릇 9번 죽입니다. 죽이고 거역하면 죽여버리고 저주해버리고 죽여버리고 똑같은 죽인놈이나 죽임을 당한 인간이나 똑같은 인간이예요.
결국은 나라 라는 것은 뭐냐 하면은 망하는 인간들끼리 배우가 되어서 한바탕 연극 무대를 만드는 것, 그게 바로 나라이고 인생 인간사회입니다. 똑같은 인간들로 세팅된 같은 별볼일 없는 것들끼리 세팅되가지고 정권 교체하고 바꾸고 핵 폭탄 개발하고 해안 봉사하고 뭐 이런 전부다 똑같은 인간들이예요.
그러다 그들이 이제 어려울 때 누구를 믿습니까? 여호와를 부르짖고 예수님 부르짖고 교회 세워서 하는 그 짓거리들. 그런 짓거리에 성령받은 그 성도는 바로 선지자 같은 존재예요. 선지자는 소원이 있어요. 사도바울은 소원이 있지요.
제가 어제 이야기 했어요. 사도바울의 소원이 뭐지요? 죽는거예요. ‘주여, 어서 제대 시켜주시옵소서. 어서 어서. 영광도 싫고 다 싫고 어서 그냥 죽여 주옵소서.’ 그래서 전체적으로 말하면 이런거예요. 징징대지 마라. 세상 살면서 징징거리지 말란 말이죠. 좀 징징대지 마라.
그게 뭐냐하면은 기도하면서 살려주세요 하잖아요. 그래서 제가 주일 낮에 가위 이야기 했잖아요. 기도한다고 가위가지고 전부다 잘라버려. 주의 이름으로 주의 이름으로 기도해야지 우리 이름으로 하는 것은 이것은 안 받습니다.
‘아니 마지막 기도할 때 예수이름으로 했는데요.’ 어디서 부적을 갖다 부칩니까? 그거 부적 붙이는 거예요. 끝에다가 예수이름 붙이는거. 주문 마치 그 남묘호랑개교 주문 똑같이 갖다 붙이는 거예요. 신기하게 효과 있는줄 압니까?
지금 이 마귀와 대적하는 것은 우리 인간들 소간이 아닙니다. 인간들 소간이 아니기 때문에 주님께서 오셨고 주님께서 오실 때 그냥 오신게 아니고 주 라고 하고 그 다음에 뭐냐 주의 이름이죠.
주 하고 주의 이름이 달라요. 주의 이름은 존재지만 이름 붙이면 기능이 되어 버려요. 주는 어떤 계신분이고 그의 이름은 이 계신분이 해야 될 일을 기능화 시킬 때 기능이 일어나는 현장에서 그 이름됨이 나타납니다.
그 이유가 뭐냐하면 그 이유는 아주 간단해요. 이스라엘의 이름 원래 이름이 누구 이름입니까? 야곱이죠. 야곱이라는 존재가 이스라엘로 바뀐 것은 플러스 뭐가? 새로운 이스라엘다운 기능이 추가 된겁니다. 기능이.
아브람은 그냥 존귀하신 아버지예요. 아주 높은 아버지라는 뜻이예요. 그런데 아브람이 뭘로 바뀝니까? 아브라함으로 바뀌어요. 아브라함은 많은 자식의 아버지가 되거든요. 그런데 이름 바뀔 때 자식 한명도 없었어요. 단 한명도 없었어요.
한명도 없다는 말은 존재에서 그냥 많은 자식이 안나오거든요. 존재 플러스 뭐가 나오느냐 하면은 기능이 되면서 여기에 뭐냐? 아브라함의 하나님이 등장 하거든요. 이 아브라함의 하나님이 모세때 가면 주의 이름 여호와가 된다 이 말이죠. 주의 이름.
모세한테 이야기 하기를 여호와가 누굽니까? 물으니까 여호와는 여호와다가 아니고 여호와는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는 기능을 그대로 이어가서 완성시킬분이 바로 너한테 찾아온 그 주의 이름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여호와라는것은 이름 부른다고 되는 것이 아니고 여호와께서 하신 일이 어떤 결과를 이루었을 때, 그 결과의 현장에서 비로소 부를 수 있는 것이 주의 이름입니다. 이미 구원 받고 난 뒤에 주의 이름을 부른다 이말이예요. 이미 구원 받고 난뒤에.
주의 이름을 부른다고 구원받는게 아니고 이미 성령이 와서 주의 이름 부르게 되면 우리는 주의 이름을 제대로 알고 부르게 되는 겁니다.
주께서 나를 이 지경 만든다고 했잖아요. 안 믿겠다 안 믿겠다고 하고 예수 나와 무슨 상관있나이까 그렇게 했던 나를 주님이 이 지경 만들었다니까 주님이 나를. 신학 공부해서 하는게 아니고 주님이 이렇게 만들어 놨잖아요 주님이.
뭘 해도 주님의 십자가만 증거하라고 십자가만 복음이라고 주께서 그렇게 하라고 하셨잖아요. 라고 하는 겁니다. 성령 오게되면. 십자가라 하는 것은 주의 하신일에 집합체예요. 십자가 말고 또 다른게 있으면 안되요. 십자가예요. 전부 다. 모든게 십자가예요.
사탄을 뚫는 것은 십자가 뿐이예요. 십자가 능력이예요. 다른게 되어버리면 그것은 다른게 들어 가버리면 구멍이 안 뚫리게 되어 있습니다. 제일 싫어하는게 마귀가 제일 싫어하는게 뭐냐 하면은 인간을 배제하고 예수님이라는 분이 혼자 다 했다는 이 사실에 대해서 마귀는 제일 싫어합니다.
마귀가 싫어하는지 당신은 어떻게 아느냐?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서기관들이 싫어하잖아요. 그들이 싫어하니까 마귀가 싫어하는 거예요. 좀 더 이야기 나가 봅시다. 주라하는 것은 존재고 이름붙이면 주의 기능이죠.
그렇다면 바깥에 성부, 성자, 성령이 계신데 바깥에 일할때는 성령께서 일하게 하시는데 그 결과에는 성령의 몫으로 돌아가는게 아니고 성령의 이름으로 돌아가는게 아니예요. 누구 이름으로? 모든 것이 주의 이름으로 돌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주의 이름으로.
주께서 하신일로 인하여 지금 이런 결과를 낳았습니다 하는 쪽으로 주의 이름이 장렬하는 겁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도 마찬가지고 심지어 방언, 헌신하는 것 사랑한 것까지 전부 다 주의 이름으로 하는 겁니다.
그러면 이 주의 이름이 할 때 주의 이름인지 아닌지 어떻게 아느냐? 아까 마태복음 10장 20절에서 성령의 이름으로 하는 것과 내가 하는 것 어떻게 아느냐?
이렇게 파이프를 보면 주의 이름이 이렇게 가게 되면 주의 이름은 여기에 빈 공간에다가 하는 것이 아니고 여기 이미 있어요. 뭔가 꽉 차 있어요. 악마의 힘이죠.
악마의 힘을 주의 이름이 뚫고 들어갑니다. 뚫고 갑니다. 뚫면서 여기서 뭐냐? 계속 피, 피가 나오겠죠. 선지자의 피, 성도의 피, 아벨의 피, 스가랴의 피 계속 흘리겠죠. 계속 흘러가는 겁니다.
주의 이름이 가는 곳에는 우리 이름은 어떻게 된다? 쪼개지는 거죠. 쪼개지고 쉽게 말해서 우리는 우리 자아는 망하게 되는 겁니다. 우리 자아가 없어지는게 아니고 망하게 되요. 깨지고 조각나고 망하게 되지요.
그러면 우리 자아가 망한다는 말은 뭐냐? 나의 기대와 나의 소원이 박살난다는 뜻이예요. 나의 기대와 나의 소원이 박살나는 거예요. 그러면 이 말은 뭐냐하면 주님께서 이 세상이 예수님의 세상이냐 아니먄 너의 세상이냐를 우리한테 계속 묻는겁니다.
너의 가정이 너의 가정이냐 예수님의 가정이냐를 계속 묻는 거예요. 그래서 복음쪽으로 안 맞거든 갈라선다 이 말입니다. 왜냐면 복음쪽으로 안 맞으면 버티는 것은 바로 내것이기 때문에 버티거든요.
내것을 어떻게 한다? 부수는 거예요. 내것을 다 부수는 거예요. 자식이 복음을 안받아 들인다? 그러면 니 자식으로 생각하지 마라. 계속 부셔나가는 거예요. 부셔나가면 우리가 그냥 순순히 받아들일까요? 안그러면 반항할까요?
당연히 반항하지요. 반항하는게 뭐냐하면 나의 이름이예요. 내 이름으로 벌렸던 나의 전력, 나의 개인사, 개인 인생. 이것이 강력하게 주의 이름에 반발하고 나섭니다.
자, 성령이 없는 사람은 누가 이깁니까? 나의 이름이 이기지만 성령이 있는 사람은 누가 이겨요? 주의 이름이 늘 승리하십니다. 여기서 예상못한 새로운 감사가 나와요. 야~ 또 내 힘으로 구원받을려고 헛된 짓을 했구나를 알수가 있죠.
그래서 이렇게 하루를 살면서 살면서 가만 지켜보게 되면 나 자아의 입장에서 내 이름으로서 열심히 살았기 때문에 이만큼 살았다고 생각되는데, 성령이 있는 사람은 성령이 오고 난 뒤에 딱 보게 되면 주께서 박살내기 위해서 오늘 하루하루를 살게 하셨다 그 점에 대해서 감사합니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내 뜻대로 안되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내 원대로 안되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왜? 그래야 내 인생이라는게 없는데 자꾸 나는 과거의 버릇 때문에 내 인생 따로 챙기고 내 자식 챙기고 내 남편 내 아내 따로 챙기고 내 회사 따로 챙기고 내 교회 챙기고 계속 내 것 챙기는데 온 스트레스를 거기다 온 정신을 거기다 다 팔고 있어요.
주님께서 이 회사를 어떻게 박살내는지 박살내고 있겠지만 그건 나는 모를 일이지만, 부수면 ‘아니되옵니다.’ 붙들고 ‘이것만큼은 아니되옵니다. 이거만큼은 남겨주시기 바랍니다’. 남겨주면 또 박살, ‘아니요. 아니되옵니다.’ 계속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 모습을 통해서 복음이 전파되지요. 나는 박살나고 복음은 전파되고. 왜? 주님의 인생이고 주님이 만드는 하나의 이용물 이기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결과적으로 뭐냐면 우리는 반항해야 되고 반항해야 적점이 형성 되니까 주님의 실존이 느껴지니까.
만약에 순순히 부수어 버리면 내가 알아서 내가 부순게 되 버리기 때문에 이거는 주의 이름이 아니고 내가 알아서 내가 부숴버리면 이게 누구 공로가 되겠어요? 내가 알아서 손들고 벌서는 셈이 되잖아요. 이것은 매를 더 맞아.
그냥 막 살아야 되요. 내가 하고 싶은대로 해 줘야 실제로 살아계신 진짜 부활하신 주님께서 어떻게 조지는지를 실감나게 느낄게 아니겠습니까? 내가 소설 써가지고 이러면 벌 받는데 내가 알아서 꿇어 앉고 내가 알아서 헌금해야지 교회 갖다 바치고 이런 짓 하지 말란 말이예요.
챙길거 다 챙기고 주여 아니되옵나이다 라는 말을 이것 만큼은 손대지 마옵소서. 강렬하게 반발할 때 그것마저 손가락 확 꺽어서 요게 어디서 까불어. 니가 믿음있어도 백날 너만 살아있지 나는 없는거지? 그렇지? 여기있다 하고 없는 존재의 예수님이 실제 있는 존재로 나타날때는 내것이 박살날 때입니다.
내 모든 의도가 우상될 때 세상 사람들에게 향하세요. 너희들은 예수님이 죽은줄 알았지? 살아 있었어. 정말 살아있어.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 하는 고백을 하게되는 겁니다.
그래서 주의 이름에 대해서 우리는 내 이름 가지고 맞짱 뜬다는 것, 그리고 이 싸움이 죽을 때 까지 계속 된다는 겁니다. 그리고 주의 이름이 승리하게 되면 우리는 감사가 나오고 나와봤자 돌아서면 또 내것 챙기고 부서진 것 있잖아요. 이거 또 챙깁니다. 이게 바로 사사기고 이게바로 열왕기상이고 열왕기하고 계속해서 나의 대한 미련과 집착을 버리지 못해요.
사람은 중심이 있어야 되는데 오뚝이처럼. 그 중심을 누가 잡겠습니까? 나한테 내가 중심이예요. 이 자아가 중심이예요. 주체는 자아가 있고 자아를 부수기 위해서만 나타나는 것이 주체이지 처음부터 주체는 없어요. 처음부터는 내 이름 밖에 없어요.
깨어져도 다시 주워 모으면 내 이름되요. 이게 터미네이터3 에 나오잖아요. 액체로 만든 외계인을 칼가지고 찔러도 그때 뿐이야. 그냥 뭉개지고 불속에 녹아져도 금방 나와서 이래가지고 군복 탁 입고 와가지고 터미네이터와 싸울려고 덤벼들고 영화에 나오잖아요.
우리의 자아는 백날 부셔도 돌아서면 주여 잘못했습니다. 헤헤헤 잘못했습니다 해놓고 씨익 웃으면서 또 나와가지고 회개했으니까 두 번 다시 벌은 추가된 벌은 없겠지 해서 또 주워서 남아있는 힘들 다 끌어모아가지고 또 다시 시작해요. 반복 계속 반복.
그래서 말씀은 운동력이 있어가지고 계속 우리를 또 공격하고 이 공격하는 것이요 우리가 진작에 버려야 할 것을 안버리고 있으니까 계속 공격하는 거예요. 그러면 버리면 될텐데 버리는 방법을 몰라요. 우리는 왜냐? 우리는 그 식대로 살았기 때문에.
나는 내것만 챙기는 식 외에는 다른 식은 없어요. 우리는 할수 있는 것은 뭐냐? 내 것 챙기기 그것만 주특기지 다른 주특기는 우리는 욕심내면 안되요. 다른 주특기는 주님이 하실 일이지 내가 주님의 대행자가 되어 가지고 내가 나를 친다는 것은 이것은 건방을 떨어도 보통 떤게 아닙니다.
그래서 사도들은 말하기를 사도들에게 예수님이 말하기를 베드로 보고 이야기 했지요. 니가 원치 않는 길로 간다고. 왜 이런 이야기를 왜 했겠어요? ‘베드로야 너 정신 차렸지? 니가 하는 일이 곧 내 일이야. 걱정하지마.’ 이게 아니라 니가 원치 않는 길로 띠 띄고 그것도 단디, 단단히 띠 띄고 질질 끌고 가듯이 끌고 갑니다.
우리의 반항도 만만치 않습니다. 우리의 반항도 끝까지 보통 고집이 아니지요. 자, 그 다음에 7절 봅시다. 조금만 하고 마치겠습니다. 7절,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떠나지 아니하면 뭐가 온다?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않는다.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예수님이 떠나가게 되면 예수님이 처음에 이땅에 왔을 때 이것은 꼭 이야기 해야 되겠어요. 예수님 이 땅에 오실 때 요단강에서 뭘 받았습니까? 속에는 물 받았고 위에서는 뭐가 왔고? 물과 성령의 만남이죠.
성령은 하늘에서 오고 물속에 들어갔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죄속에 들어간거예요. 성령께서 예수님을 죄속에 집어 넣어 놓고 죄속에서 성령 받은 사람을 어떻게 사는가를 보여주는 겁니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가 육에 속한 사람이 성령왔을 때 어떻게 해서 우리가 육에 속하면서도 육이 아니고 영의 사람이 되느냐를 예수님이 앞당겨서 이미 앞당겨서 그 원형을 원판을 미리 보여준것이고 그 원판에다가 우리를 성령께서 거기에다 집어넣어버려요.
그러면 예수님이 가는 그 코스대로 우리가 그 코스를 그대로 가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성령 받았다는 말은 예수님이 알아서 했다는 것이 아니라 누가 했다? 성령께서 시킨대로 했는데 성령을 누가 보냈어요?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보내셨죠?
그러면 성령오게되면 예수님께 성령왔다는 말은 결국은 예수님은 누구 품으로 간다?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가듯이 성령이 오게 되면 우리는 결국 어디냐?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된 그 하나속에 결국 우리가 합류가 된다 이말입니다.
예수님은 그 원형이 되고 성령은 그 예수님의 원형 한것을 우리에게 전함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이 하시는 일에 이제는 완성된 입장에서 그러니까 뭐가 우리에게 이익이냐는 것은 미완성의 미완성의 연속이 아니고 이미 완결된 상태에서 성령이 왔다는 것은 완성된 상태에서 이미 구원받은 상태에서 마음놓고 인생을 살아도 좋다 이말이예요. 그게 우리한테 유익이다 이말입니다.
구원파의 구원은 자아 구원이고 우리는 주님의 일을 마음껏 할수 있다는 데서 온 것이죠. 자아만 나가 아니고 주체도 나예요. 예수님이 만든 주체가 있잖아요. 예수님과 연결된 주체. 그것이 연결이 끊어지지 않고 어떤 환란이 와도 연결되있다 이 말입니다. 그 자체가 완성이예요. 그게 성령께서 그걸 계속 고정해주는 거예요.
그 다음에 그가 와서 죄에 대해서, 의에 대해서, 심판에 대해서 세상을 책망한다. 죄에 대해서 의에 대해서 세상을 책망한다 할 때 세상은 뭐가 됩니까? 하나의 피고가 되고 죄, 의, 심판을 결정 짓는 분은 판사님이 되겠지요.
그 판사님은 누구입니까? 예수님 또는 성령께서 판사님이 되셔 가지고 세상에 대해서 피고를 세웠으니까 그러면 그 자체가 이 세상은 하나님의 법정이 되는 겁니다. 이 세상 자체가.
인간세계에서는 자기가 생존에 필요한 자연환경이 되지만 성경을 보게되면 이것은 하나의 법정이 아주 엄위하신 하늘나라의 재판소가 되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를 믿지 않는 자는 저주를, 예수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어야 되는데 그것을 누가 주도 하느냐? 바로 성령이 주도, 그 일을 바로 세상을 그렇게 하도록 성령이 그렇게 지금도 주도하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오늘 강의 듣고 저 같으면 이 강의를 들었다면 저 같으면 이렇게 생각합니다. 이 세상은 성령이 지금 분주하게 왔다 갔다 하시면서 일하는 성령의 자기 작업장이다.
작업장이다 생각하고 날씨가 많이 추웠다가 약간 풀렸다가 또 추워가지고 온통 독감걸리고 감기 걸리고 환자들이 많더라도 그것도 성령께서 그렇게 하신것이고, 감기 걸렸으니까 나 예수 안 믿는다 하는 사람 지금이라도 싫으니까 갈려면 가라.
그래서 결국은 감기 날씨가 추운것도 예수님 믿는 사람 맞냐 안 맞냐를 계속 구분, 법정에 세워서 그걸 가려내는 그 작업 때문에 북극에 그 냉기류가 내려온거예요. 북극의 냉기류가. 추우니까 예수 안 믿을래 이런거예요.
환란과 곤고와 핍박, 기근 어떤 것이라도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어지지 않는 사람이 따로 있다는 겁니다 이 세상에.
그럼 죄에 대해서 의에 대해서가 뭐냐 하면은 죄에 대해서 예수 안 믿는게 죄고요. 의라는 것은 예수 믿는게 의고요. 그 다음에 심판이라는 것은 예수 믿지 않는자, 예수 이름이 곧 심판을 행하시는 당사자다. 모든 것이 예수님의 이야기 예요.
죄, 의, 심판. 이걸 전부 다 예수님의 기능에 대해서 주의 이름의 기능에 대해서 하는 겁니다. 그렇게 할 때 여기서 의라고 하는 것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다시 나를 보지 못함이라. 예수님과 아버지 관계를 몰라서 그렇고 여기서 죄라 하는 것은 저희가 나를 믿지 않음이라.
예수님을 믿지 않고 미워해서 그게 죄가 되고,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 임금이 예수님이 세상을 세상이 지도자가 예수님을 심판함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이 곧 세상 사람은 이렇다 라는 사고 방식에 전부 다 매여있다라는 것을 이미 땅땅땅 규정을 한 규정을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알려주는 겁니다.
끝으로 이제 하나 묻고 마치겠습니다. 자, 성령께서는 이 땅에서 무슨일을 하십니까? 무슨일을 하십니까가 아니라 성령께서 일하는 기준이 뭡니까 질문을 다시 할께요. 성령께서 일하는 기준은 뭡니까?
십자가를 통해서 이미 다 이루었다 하는 그 점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느냐를 우리에게 묻고 하시는 거예요. 그러면 성령께서 안 믿는 사람만 심판 하십니까? 믿는 사람도 관여하십니까? 믿는 사람도 계속 관여 하시는 거예요.
관여해서 이미 믿는 사람은 이미 구원받았구나 라는 사실을 깨닫는 거고 안 믿는 사람들은 그런 것이 있는 줄도 모르고 그냥 계속 자기 살던 데로 살겠지요. 세상은 세상에 대해서 성령의 법정이라는 것을 모르고 그저 인간의 생존의 환경이라 여기고 뭐 나만 밥먹고 잘 살면 되지 하나님 덕분에 뭐 이런식으로 계속 버텨 나가는 겁니다.
그래서 이걸 우리가 이렇게 성경을 공부함으로서 이제는 연습을 평소에 연습을 할 필요가 있어요. 연습을 어떻게 하느냐 하면은 바로 드라마를 보든지 신문을 보든지 간에 이런 안목을 가지고 성령이냐 악령이냐 이런 안목을 가지고 세상 돌아가는 것을 자기 자신에 대해서 계속 한번 이렇게 계속 평가를 해보는 거예요.
평가를 해보게 되면 그 평가가 뭐냐? 어떤일이 나타나도 고맙고 감사함으로 이어지게 되면 그것은 성령의 일이죠. 어떤 일이 일어나도 고맙고 감사하게 되는 것. 세상돌아가는 교회를 교회를 가든지 어디를 가든지 간에 항상 무슨 일을 당하던지 간에 쭉 보시기 바랍니다.
한가지 요약하고 마치겠습니다. 예를 들어서 인천에 계시는 구목사님이 롯데팬이예요. 부산사람이니까 롯데팬인데, 롯데가 시합하는데 졌어.
자, 아까 배운거 다 해봅시다. 자아는 부산출신이거든요. 부산출신이니까 자아에 뭐가 누적되어 있습니까? 내 고향 야구팀은 무조건 이겨야 되요. 무조건. 자아는 그것이 누적되어 있으니까.
이겨야 되는데 시합해가지고 제일 꼴찌가 꼴찌 비슷한 한화 대전팀하고 졌다. 졌다고 해 봅시다. 졌는데 기분이 어떨까요? 기분? 기분 나쁘지요. 기분 나쁜게 뭐냐 하면은 이게 자아가 예수도 믿고 롯데도 이기고 이랬으면 좋겠어. 예수도 믿고 롯데도 이기고.
우리나라합시다. 축구팀이 일본하고 했는데 4:1로 졌다. 4:1로 졌다. 아니 4:1로 이겼다. 기분 좋지요? 그런데 4:1로 졌다. 이렇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아! 4:1로 졌다 기분좋지? 할수 있는건 아니지 않습니까?
어디서 나왔는가? 평소에 자아는 이 밑에 있는 사탄의 요구에 의해서 감정이 생기거든요. 그러면 보고 배웠으니까 실습을 해보는 거예요. 도대체 축구가 뭔데! 축구를 옛날 말로 등신이라고 하는 거예요. 스튜핏 영어로 하면. 옛날에 축구를 등신이라고 해요. 한자로. 할아버지가 맨날 우리보고 너 축구 좋아하면 등신이라고 했어요.
축구가 뭔데. 그거 게임이잖아요 게임. 아이들도 뭐 컴퓨터 게임하면서 뭐 돈 주고 받는게 있는 모양이예요. 그거 잃었다고 울고 불고 하는거 있잖아요. 그 게임이 뭔데?! 인터넷 게임이 뭔데 그것 때문에 울고 불고 합니까?
그게 어디서 나왔는가? 보니까 이게 악마에서 나오는걸 어떻게 아느냐? 십자가를 통해서 보는거예요. 그러면 십자가를 통해서 보게 되면 그 십자가는 결국 누구 때문에 죽었습니까? 악마한테 앞잡이 되어가지고 롯데 이겨야 세상 좋은 세상으로 여기는 그 내 자아의 기분좋음을 때문에 예수님은 희생된거죠.
그러면 그 결론은 뭡니까? 우리는 예수님 때문에 늘 즐거워 하고 감사해야 되지요? 해야되지요 라는 말을 강조하세요. 예수님 때문에 늘 기쁘고 고마워 해야되지요? 그런데 예수의 이름은 어떤 경우에만 이게 감사한다고 했습니까? 누구하고 부딪힐 때?
그래도 롯데가 이겨야지 그래도. 한화 저거 대전 저거 완전 눌러야되.‘ 그래도 라는 이것이 주님과 만났을 때 실제적으로 여기서 ’주님이여 이럴수 있습니까? 내가 롯데를 얼마나 응원했는데. 또 지면 못 올라가는데 질수가 있습니까?‘ 라고 하면서 자기가 그렇게 해 놓고 누구 입을 칩니까? ’내가 미쳤어 미쳤어 그게 뭐라고!!‘
그런데 이론은 그게 뭐라고 라고 하고 내 가슴의 심정은 ‘그래도 기도 얼마나 했는데, 그때 안타 치라고 기도 얼마나 했는데.’ 이러한 이중성, 이중성에 의해서 주님은 오늘도 고난 받고 있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내것 건드리면 누구라도 가만 두지 않겠다는 이 육의 본심을 어떻게 감출수가 있겠습니까? 하지만 그것 마저 십자가를 증거하기 위해 이용한다는 그 사실에 저희들 감사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