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누가복음 12장 10절 (미래의 영) 220621a-이근호 목사
오늘은 누가복음 12장 1절 “그 동안에 무리 수만 명이 모여 서로 밟힐 만큼 되었더니 예수께서 먼저 제자들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바리새인들의 누룩 곧 외식을 주의하라” 갑자기 예수님께서 바리새인을 언급함으로서 의도적으로 패 갈림이 되어버렸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바리새인들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말을 할 거야’ 이런 뜻이죠. 내 입에서 나오는 것은 기존의 이 세계에서 바리새인의 논리와 신학이 하나님의 관한 모든 이야기가 먼저 전제적으로 확 퍼졌다는 것을 전제로 하시는 거에요.
전제가 뭐냐 하면은 이미 아무것도 없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 보시기에 전제가 유대 사회의 전제가 뭐냐? 바리새인의 신앙관, 이게 다 퍼져있는 겁니다.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바리새인 신앙관 이것을 염두에 두지 말고 바로 예수님 하시고자 하는 말을 그냥 하시면 되지 않겠느냐. 그럼 우리가 알아들을 텐데’ 그런 아이디어가 떠오를 수도 있어요.
그런데 지난 주일학교 설교도 했지만 아담을 창조하시고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했지요. 아담을 창조하시고. 자, 아담의 창조가 하나님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 어느 정도로 좋으냐를 하나님 스스로 이 좋았다는 이 개념을 하나님 스스로 이걸 승화시킵니다. 초월시키죠.
그러면 아담으로 하여금 죄짓게 만들어요. 선악과를 따먹게 만든다고요. 선악과를 따먹었을 때 아담은 뭐가 되느냐 하면은 악마와 한통속이 되어 그 아담의 후손들은 태어나면서 이미 저주받는 자로 태어나도록 그렇게 하나님께서 허락을 하셨어요. 그 계기가 선악을 아는 나무를 과실을 먹지 말라 라고 할라고 하시면서 그 먹지 말라는 그걸 계기로 해서 아담은 죄를 짓게 됩니다.
선악과 나무 없었으면 죄라는 성립이 없지요. 나무를 안 심었으면 선악 나무를 안 심었으면 죄라는 것도 없다 이 말입니다. 그럼 선악 나무를 심었다는 말은 의도적으로 죄라는 것을 이 세상에서 하나님께서 밝히 드러내실려고 하는 거에요.
아담으로 죄를 짓게 함으로써 하나님이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는 이 사실이 인간의 죄로 인하여 이것이 손상되겠느냐를 보시는 겁니다. 아담은 망했지요. 그런데 하나님이 아담을 만드시고 “보시기에 좋았더라” 라는 것은 비록 아담이 죄를 지음에도 불구하고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는 그 자체는 완성이 되게 하십니다.
그건 뭐냐 하면은 아담의 자리를 없앰으로서 그 뒤에 준비된 아담이 전면에 나서게 하시는 겁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든 인간으로 하여금 모든 세계를 지배하고 정복하고 다스리는 그 원리 원칙에 대해서 첫 번째 아담을 죄로 없애버리고 죄가 없어져야, 죄가 발생 되서 이것이 죽어줘야 비로소 그 뒤에 준비된 아담, 마지막 아담, 두 번째 아담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원래 계획대로 전 우주를 통치할 수가 있는 겁니다.
따라서 아담의 자리가 없어지는 일과 연동하여 병행하여서 준비된 아담이 등장하거든요. 그러면 이 죄지은 아담의 자리가 연속적으로 어디까지 퍼졌는가? 바리새인의 나라, 바리새인의 공동체를 구성하는 나라, 이 나라까지 계속 가는 겁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바리새인의 외식에 대해서 언급하는 거죠.
왜냐하면 바리새인이 죄를 지적함으로서 그 배후에 진짜 하나님이 마련하신 예수님의 복음의 세계가 나오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어떤 분은 이런 이야기를 하시는 분이 있어요. 예수 믿었기 때문에 이제부터는 우리 속에 있는 죄를 없애는 생활을 해야 한다고 언급을 해요. 그분은 뭐로 모르느냐 하면은 죄가 없어지면 의도 같이 없어진다는 것을 모르는 거에요.
그럼 왜 그분은 우리가 죄 없어지면 주께서 주신 의만 나타나니까 우리 구원해 주시지 않겠느냐 그 생각을 왜 하느냐 하면은 바로 이 바리새인들의 의식이 뭐냐 하면은 개인 구원입니다. ‘개인 구원’. 하나님의 목적은 복음의 세계에 있는데 아담의 후손들의 특징은 뭐냐? ‘나만 구원 되면 되잖아’ 쪽이에요. 지금 굉장히 중요하고 심각한 문제지요. 내가 구원받으면 되잖아.
그래서 복음의 세계는 이 바리새인들이 ‘나만 구원 받으면 되잖아 내가 율법대로 지키면 되잖아’ 라는 식의 이것을 주님께서는 그걸 뭐로 봤습니까? 외식, 다른 말로 하면 기만 또는 위선 또는 속임수로 보는 거에요. 주님께서 왜 그런 식으로 개인적인 구원을 왜 그걸 하나의 위선으로 보시느냐 하면은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복음의 세계에서는 내가 구원받았다 내가 어떤 믿음의 성과를 내었다는 것을 일체 복음의 세계에서는 용납이 안 됩니다.
왜냐하면 복음의 세계의 개인은 오직 한 분으로만 국한되기 때문에 그래요. 예수님 한 분의 공로로 그 세계가 펼쳐집니다. 산 위에 저수지 댐이 터지면 그 물이 그 산 밑에 있는 여러 농가에 골고루 퍼지듯이 위에서 오는 주님의 개인의 성과가 물이 흐르듯이 은사가 흘러서 구원 받아야 될 그 사람들에게 주게 됩니다.
주게 되면 거기서 내가 구원받았다가 아니라 주님의 구원을 이루었다 라는 현상으로서 구원이 등장하는 거에요. 현상. 현상이니까 뭡니까. 내 소유가 될 수 없지요. 현상이니까. 어떤 조명을 내 얼굴을 딱 비치면 나는 빛을 가졌습니까? 아니면 그 빛에 의해서 드러난 현상입니까? 너희는 빛이요 할 때 우리가 빛을 소유하였습니까? 아니면 빛이 복음의 빛이 우리 얼굴에 비친 거에요? 비친 거죠.
다시 이야기합니다. 아담이 있어야 돼요. 바리새인이 꼭 있어야 되고 마귀가 있어야 되고 불신자가 있어야 되고 우리 인간이 있어야 될 이유는 인간이 어떤 차원에서 지적을 받아서 그들의 한계를 들추어지면서 ‘너는 아니야’ 라는 그 작업을 바로 이들이 있음으로서 이 죄인들이 있음으로서 이게 실시가 돼요.
이들 없이 따로 주께서 마련하는 게 아니고 이들을 없앰으로서 복음의 세계가 등장하는 겁니다. 그러면 복음의 세계는 이 없애야 될 인간으로부터 어떤 공격을 받겠지요. 그 공격받는 대표적인 그 사상과 철학이 뭐냐? 바리새인들입니다.
바리새인들이 대표적으로 바리새인들 그들의 자기의 기만과 자기 속임수와 자기 위선을 언급했고 바리새인들은 그걸 그들의 이러한 외식, 그러니까 예수님 평가하기에 그들의 자기 기만을 그 당시의 유대 사회에 보편적 신앙관으로서 이미 유포를 쫙 깔아놓은 거에요. 그것도 권력으로 쫙 깔아놓은 겁니다.
깔아놨기 때문에 “바리새인의 의보다 더 낫지 아니하면 천국에 못 간다”는 예수님께서 그런 발언을 하시는 것은 그 바리새인의 그 의견에 대해서 누구도 군말 못하고 그게 합리적이고 타당하다고 누구나 인정을 이미 한 상태에요.
하나의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우상을 섬깁니까 안 섬깁니까? 바리새인들은 우상을 섬겨요 안 섬겨요? 막 바알 믿고 부처 믿고 이렇습니까? 아니지요. 바리새인들은 뭘 안 섬긴다? 우상을 안 섬긴다. 바리새인들은 우상을 안 섬깁니다. 누가? 바리새인들은 우상을 안 섬겨요. 우상을 안 섬기는 대신 뭘 섬깁니까? 사도 바울 되기 전에 사울도 누굴 섬겼어요? 여호와죠. 여호와를 섬깁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자체를 뭐로 봅니까. 이걸 하나의 위선으로 보는 거에요. 위선. 바리새인은 이 우상이라는 것을 안 섬김으로 말미암아 바리새인을 대표하는 모든 인간은 신을 섬길 마음이 추호도 없습니다.
우상도 안 섬길뿐더러 우상을 안 섬긴다는 말은 신을 안 섬긴다는 말이고 신을 안 섬긴다는 말은 인간에게는 신을 섬기는 그 방식에 대해서 내가 나를 섬기는 방식을 이어서 신을 섬기는 거에요. 여호와를 섬기는 거에요. 그러니까 여호와를 섬긴다는 방식으로 자기를 섬기는 것이 인간입니다.
인간은 처음부터 자기 외에 누구를 섬길 방법도 없고 반길 마음도 없고 자기 말고 다른 대상을 섬길 줄을 몰라요. 그게 부처가 되든 예수가 되든 뭐가 되든 그거는 나를 어떻게 하면 좋은 결과로서 나를 발전시킬까 하는 그 방안으로 신을 자기 세계에 도입시킨 거에요. 그래서 여기서 나온 결론은 인간은 누구도 섬기지 않는다 아니 섬길 줄을 모른다. 왜? 개인주의니까.
개인주의의 결과가 개인 구원이에요. 개인 구원. 뭐 어쨌든 간에 나만 천당 가면 그만이잖아요. 그겁니다. 인간이 이렇게 된 것은 여러분 다 아시다시피 선악과 따먹고 ‘네가 신처럼 되리라’ 하잖아요. 신이 둘이 될 수가 없어요. 하늘의 태양이 두 개가 아니잖아요. 신은 오직 내가 신처럼 내가 이미 신으로 작정해놓고 그 다음에 어떤 부처를 섬기든 예수를 섬기든 그거는 나도 신이고 당신도 신이라고 해줄게 하는 서로 동등차원에서 하는 거에요.
왜 이게 바리새인이 외식이 되느냐? 복음의 세계에서는 주와 함께 해야 돼요. 누가 깨지겠습니까? 개인주의가 일체 용납이 안 됩니다. 주와 함께. 아까 유투브 찍을 때 언급했어요. 종속, 종속자. 아시죠? 인간은 그냥 그릇에 불과합니다. 토기장이가 만든 그릇에 불과해요.
그래서 예수님과 함께 하지 않는 것은 모조리 다 외식이고 악한 것이고 하나님의 일에 대드는 자기 일들 하고 있는 거에요. 인간이 태어나서 그냥 무심코 하는 모든 일이 무슨 일이 되느냐? 복음의 세계와 충돌을 일으키는 주와 함께 라는 새로운 복음으로 제시된 주의 일을 훼방하고 모독하고 방해하는 일이 나의 모든 평범한 일입니다.
평범한 나의 일이 주의 일을 방해한다 이 말이에요. 평범한 나의 일이. 우리가 일을 하는 것은 누구 잘되기 위해서? 죽 써서 개 주기 위해서 하지는 않잖아요. 내가 일을 한다는 것은 그 일의 혜택과 이득이 누구한테 옵니까? 내가 예수 믿고 헌금하고 모든 혜택이 누구한테 온다? 내가 구원받는데 보탬이 된다는 그 아이디어 때문에 하잖아요.
그러니까 그게 바로 외식이고 그게 위선이고 기만이고 거짓이다 이 말입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가지고 자기 기만이라고 이야기하느냐? 그 내용은 쉬운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어떤 소설인데 소설이기도 하고 영화이기도 한데 어떤 여자 분이 주인공이 목걸이를 훔쳤어요. 누구 목걸이를? 자기 목걸이를 자기가 훔칩니다.
자기 목걸이를 자기가 훔치는 게 좀 이상하잖아요. 그렇죠? 왜냐 하면은 이 목걸이가 자기 돈을 다 써서 산 귀한 목걸이가 아니고 자기 삼촌하고 같이 동업해서 산 목걸이에요. 보관은 자기가 했고 삼촌은 멀리 있고.
그런데 자기가 돈이 필요해서 이 목걸이를 비싼 목걸이를 돈 주고 팔아버렸어요. 이제 문제가 커졌습니다. 삼촌이 와서 우리 같이 산 목걸이 잘 있냐? 물으면 답변 못하잖아요. 그래서 가짜 목걸이 유리 목걸이로 딱 대체해놨어요. 대체해놨는데 삼촌이 와가지고 야 나 돈 쓸데 있다 우리 목걸이 팔아야 되겠다. 그 목걸이 다음 주까지 내놔라. 돈이 궁해서 안 되겠다. 우리 목걸이 좀 팔아가지고 돈 좀 써야겠다 이렇게 하니까 그 여자 분이 자기 집에 들어가서 몰래 자기 목걸이를 훔쳐가 버려요.
왜? 삼촌한테 우리가 산 목걸이 절도 당해서 잃어버렸다고 할려고. 그 목걸이 소설의 핵심이 뭐냐 하면은 이게 가짜라는 것이 들키지 않기 위해서 목걸이를 귀하게 외부에 알려버리는 거에요. 인간은 자기 외에는 아무도 믿지를 않습니다. 그런데 일을 들키면 안 되잖아요.
들키기 싫어서 뭐냐 하면은 오직 하나님만 충성한다는 믿음으로 바깥에 드러내는 거에요. 그래서 이게 뭐냐? 이게 자기 기만이고 외식이고 속임수가 되는 겁니다. 주님은 바리새인을 알아요. 이 바리새인의 공동체는 개개인의 구원들이 모인 공동체에요. 그 공동체가 아무리 숫자가 많더라도 전부 다 각자 자기의 이득을 위해서 그냥 모여 있는 거에요.
그들이 모였는데 생각들이 똑같아요. 그들이 주장하는 것은 뭐냐? 여호와를 믿자는 거에요. 여호와를 경배하고 숭배하고 섬기는 것이 우리 이스라엘의 본분이고 도리라는 겁니다. 거기에 누가 호응했겠습니까? 그 바리새인의 신앙관에 누가 거기서 동조했겠어요? 전체 유대민족이 다 동조했겠지요. 심지어 예수님의 제자들도 동조를 한 거에요.
왜? 예수님의 제자들이나 가룟 유다나 바리새인이나 공통점이 뭡니까? 무슨 구원? 개인 구원이기 때문에. ‘개인 구원’. 개인 구원에 왜 여호와를 왜 거론하고 하나님 섬기느냐? 인간의 우상을 섬기는 심보가 이미 구약에 나왔습니다. 우상은 출애굽기 32장에 보면 우상을 섬기는 그 마음가짐이 아주 단촐하게 잘 나와있어요.
출애굽기 32장 8절 복음을 아는 사람들끼리만 유명한 구절이에요. 모세가 산 위에 올라갔습니다. “산 밑에서 그들이 내가 그들에게 명령한 길을 속히 떠나 자기를 위하여 송아지를 부어 만들고” 자, 분명히 그때 송아지는 이구동성으로 마음을 하나로 합해가지고 여호와께 경배하기 위해서 송아지를 만들었어요.
그게 출애굽기 32장에 나옵니다. 4절에 아론이 주도적으로 선동해가지고 금가락지 빼가지고 이 신이 애굽에서 우리를 건져낸 신이다 이 말이죠. 그러면 왜 아론이 이걸 왜 선동했느냐 하면은 모세는 올라간 지 너무 오래 되서 올라갈 때 그 장비 같은 것 양식을 계산해보면 이제는 그 사람은 모세는 죽었어요.
이걸 이제 복음적으로 해석하면 이렇습니다. 죽은 자가 산 자를 지배하는 것을 산 자가 용납합니까 안합니까? 안하지요. 죽은 조상에게 제사는 드리지만 그건 조상을 위함이 아니요 제사 드리는 자기 자신을 위함이잖아요. 교회 가서 예수님을 섬길 때 죽은 예수님을 위함입니까? 살아있는 나를 위함이에요?
생각해보세요. 더 노골적으로 이야기할게요. 하나님 제가 저 살기 위해서 저 지키기 위해서 하는 어떤 조치도 제발 주님 저한테 행하지마소서 그런 간절함으로 주님을 믿습니까? 제가 제발 저를 패대기쳐주세요! 주님 섬기는데 제 존재가 가장 큰 방해물입니다. 이걸 그냥 언제까지 주께서 지켜보실렵니까! 패대기 쳐버려야지. 그저 주님 섬기는데서 방해되는 저를 제껴버리고 주님만 영광 받아달라고 그래서 교회가십니까? 그래서 예수 믿습니까?
사람이 어떤 행위를 할 때 어떤 선택을 할 때 예수를 믿는다 하나님 믿는다 하는 것은 그걸 하지 아니하면 자기한테 손해된다는 생각을 때문에 그 일을 해요. 개인 구원의 특징이 그거에요. 나한테 이익이 되면 하고 손해되면 안하겠다는 겁니다.
바리새인들이 여호와를 섬기는 것은 여호와는 눈에 보이지 않아요. 그리고 엄연히 살아있는 것은 본인들이 살아있는 거에요. 살아있는 본인과 그 집단 유대나라 그것을 존속하기 위해서 그걸 살리기 위해서 구약에 율법들을 자기한테 적용시키는 겁니다.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지만 그들도 마찬가지지만 그들은 뭐를 모르느냐 하면은 이걸 몰라서 그래요.
사는 게 욕심인 것을 몰랐던 겁니다. 사는 게. 목마를 때 물 마시는 게 욕심인 것을 몰랐던 것. 더 구체적으로 말해서 내가 살아있고 주님도 살아있고 이게 겸상이 안 되는 겁니다. 같이 되지를 않아요. 왜냐하면 제가 아까 했지요. 아담을 제낌으로서 배후에 누가 나온다? 예수님 나오지요.
그런데 이렇게 되면 이건 제끼는 게 없잖아요. 그냥 예수님에 대한 지식을 하나 소유하는 것밖에 더 됩니까? 그거밖에 안되지요. 내가 살아있고 예수님 살아 있고 이런 경우는 없어요. 이런 경우는. 나를 죽일 때만 그 현장에 주님이 우리 육체에 나타나는 겁니다. 나를 죽이고. 죽을 때 그냥 죽으면 안돼 이유가 있지요.
우리가 내가 있으면 나는 끊임없이 나는 위선과 그리고 기만과 속임수를 우리한테 할당할 수밖에 없어요. 늘 우리에게 할당해야 돼요. 왜? 세상 돌아가는 것, 세상 돌아가는 것이 개인이 중심이니까. 내 중심으로 세상이 돌아가야 되니까요. 내 중심으로.
그런데 막상 세상은 내 뜻대로 내 중심으로 안 되잖아요. 안되니까 마치 내가 내 중심으로 돌아가는 것처럼 그렇게 해서 우리가 살아있는 상태에서 주님의 살아있음을 증거할라고 그렇게 시도합니다. 바리새인의 위선에 대해서 기만에 대해서 주께서 언급을 하시는 것은 오늘날 성도에게 동일한 멘트로 매일같이 언급하는 그 내용을 바리새인에게 먼저 푹 쑤시고 들어간 거에요.
이걸 지금까지 한 것을 한마디로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아까 했습니다만 주님과 함께 하지 않는 일은 모조리 악한 일이다. 왜냐하면 개인주의적 나의 일이 되기 때문에. 아무리 주의 일을 거론해도 결국은 나의 일이 되는 겁니다. 내가 세상 모든 것이 내 뜻대로 내 마음대로 안 되지요. 한 60억만 하면 갑자기 60억 생깁니까? 안되잖아요.
그럼 세상이 내 뜻대로 안되니까 나는 세상 전체를 볼 때에 그다지 가치 있지 않지요. 가치 있지 않으니까 이게 화가 나는 거에요. 그래서 어떻게 해요? 내가 가치 있는 것처럼 속여야 되는 겁니다. 주님 보시기에.
가치 없으면 가치 없는 것으로 그만 두면 되는데 세상은 내 뜻대로 안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안 귀하다고 내가 말하지 못하니 내가 예수님을 섬기고 하나님을 섬김으로서 하나님께서 나를 그렇게 섬기는 나를 귀한 존재로 봐주기를 바라는 것 그게 바로 출애굽기 32장에서 했던 이스라엘의 그게 바로 우상이에요.
아론이 주도해서 뭘 만들었습니까? 송아지를 만들었어요. 그걸 송아지라고 한 적 없어요. 그 송아지가 아니고 뭐다? 그게 여호와에요. 왜? 모세는 죽었으니까요. 지금 죽은 자에게 지배를 받을 필요가 없지 않습니까. 그러면 현재 모세는 40일 금식. 인간이 어떻게 40일 해요. 아무것도 안 가져간 사람이 40일 동안 연락 안 되어보세요. 세상에서도 아들 40일 동안 안 오면 가출 신고해서 제사지내죠.
그러니까 죽은 자는 죽은 자고 여기 살아있는 것은 누가? 각자 각자가 갖고 있는 누가 살았으면 좋겠습니까? 여호와! OK! 금가락지 빼내. 하나님이 살아있어야 될 이유가 살아있기 때문에 살아있는 것이 아니고 누가 살아있다는 것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살아있어야 돼요? 내가 여기 살아있는 내가 가치 있고 의미 있기 위해서는 여호와와 나와 어떤 연락 체제가 있다는 것을 그걸 확인하면서 비로소 우리는 그 기만의 힘인지 모르지만 위선의 힘이지만 어쨌든 힘이잖아요.
속고 속는 이 세상, 서로 속지만 둘 다 속는데. 나만 쓰레기인가? 뭐 이런 식으로. 그 속는 그 힘으로 스스로 위로할 수 있는 바탕이 마련되지 않습니까. 그렇지요? 그래서 주님의 세계에서는 인간 대 인간의 만남을 주님의 세계에서는 인정한 적 없어요.
주님의 세계에서는 누굴 만나든 만남과 만남은 말씀을 집어넣고 만나야 돼요. 그 말씀이 뭐냐? “너 위선자지?” “그래 어떻게 알았지? 나 위선자야.” “너 기만하지?” “어떻게 알았어? 나 기만해.” 이 말씀을 가운데 두고 드디어 복음의 세계가 형성됩니다.
주께서는 우리를 제껴버립니다. 우리가 제낄 때 내가 먹고 마시고 지금까지 살아온 것이 나의 일이 아니었고 영화 촬영 누구 일이었습니까? 주의 일이죠. 모든 것이 주의 일입니다. 왜냐? 세상은 내 뜻대로 전혀 되지 않았다는 것을 소급해서 파악을 하거든요.
자, 주께서 선하게 이끄셨다. 누구를? 죄인 된 아담의 후손을. 왜? 나를 죽이는 그 작업을 통해서 그 현장에 네 일은 없고 다 예수님 나의 일인 것을 주님을 증거하기 위해서 이런 방식으로 나를 죽이고 주님이 사는 방식으로 주께서는 일을 하시는 것, 그게 복음의 세계고 말씀의 세계에요.
사는 게 욕심이거든요. 사는 게 욕심이기 때문에 안 죽을려고 하는 것도 이게 욕심이고 그 욕심이 욕심 아닌 것처럼 위장해서 하나님 섬기는 것이 바로 바리새인들의 위선이 되는 겁니다. 그거에 대해서 주님께서는 주의하라 하는 거에요.
자, 그러면 지금까지의 강의에 의하면 인간 세상에서 모두 다 개인주의기 때문에 인간들이 어떤 일을 해도 인간 사회에서 이 개인 사회에서 이 개인의 공동체에서는 전파되는 것, 전파되는 정보, 모든 지식이나 지혜 이거는 누굴 증거하기 위함입니까? 각 개인을 증거하기 위함이죠. 인간 사회에서는.
누굴 만났을 때 많이 아는 사람을 만나면 그 사람이 가진 지식을 내가 흡수하고 흡수하게 되면 누구한테 이익입니까? 나한테 이익이잖아요. 이게 개인주의잖아요. 상대도 또 다른 사람한테 배웠을 거에요. 전부 다 개인주의잖아요. 그러면 인간사회에서 전파되고 전파되고 계속 유통되고 있는 것은 뭡니까? 각 개인을 증거하는 거죠.
그렇기 때문에 참으로 신기하고 신기한 일은 이 세상에서 가장 신기한 일은 이 세상 전체가 각각 인간 잘났다 인간 훌륭하다 와 누구 대단하더라 누구 뭐 수영 200m에서 은메달 땄고 쭉 나오거든요. 한 뭐시기 누구는 18살인데 피아노 1등하고 대단한 거 나오지요. 전부 다 인간 개인을 증거하잖아요. 아이고 부럽다 대단하다.
그런데 뭐가 신기하냐 하면은 복음이 전파되는 게 신기한 거에요. 전부 다 개인주의자 밖에 없는데 전부 다 유월절 칼날로 천사가 와서 개인을 다 죽여버리고 그 배후에 주께서 일하심을 드러낸다는 이 복음이 전파되는 것은 너무나 신기한 일이에요. 이 신기한 일을 여러분들이 맛 보고 어찌 기쁘지 아니할 수 있습니까. 어찌 기쁘지 않을 수 있습니까.
만약에 복음이 안 기쁘다는 것은 그거는 복음을 받아들인 게 아니고 이 복음이 나한테 무슨 이익이 있을까. 요렇게 복음을 아주 모독하는 방식으로 이걸 가공시켜서 받아들이면 이거는 결국 이거는 나는 예수 잘 믿는다는 자기 개인주의 자기 영웅담을 전파하게 되지요.
그런데 그게 아니고 복음만을 전파한다는 것은 아 이거는 그야말로 주님이 살아계신 증거입니다. 주님이 그렇게 하지 아니하면 절대로 복음은 인간의 방해를 극복하지 못하고 제대로 전파되지를 못합니다. 그래서 이제 2절 넘어갑니다. 2절이 뭐냐?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긴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나니”
제끼는 거에요. 복음은 바리새인에게 위선을 지적했던 그 지적이 복음이 전파되는 모든 현장에서 모든 아담들을 향하여 이브들을 향하여 복음이 전파됩니다. 그러면 그 바리새인에게 지적했던 그 지적이 바로 우리 자신에게도 해당된다는 사실을 우리가 알고 있어야 돼요.
다시 한번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나의 죽음 없이는 주님의 살아있음이 나타나지 않는다. 나의 죽음 없이는. 복음이 와서 아담에 속했다는 단지 그 이유 때문에 나를 죽이게 되고 그러면 그 현장에서 누구만 살아납니까. 주님의 살아있음이 드디어 나타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의 나라, 복음의 나라의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자신이 죽었을 때 나의 믿음은 살아있을까요? 그것도 죽어질까요? 부정될까요? 어떻습니까? 나의 믿음도 같이 날라가 버리죠. 나의 믿음이 개인적 믿음이잖아요. 개인주의 믿음이잖아요. 나의 믿음 가지고 다른 사람 구원하는 거 아니지요?
그러나 예수님의 믿음은 우리를 구원하잖아요. 차이 있잖아요. 내 믿음은 나에게 이익이지만 주님의 하신 일은 자기 백성을 살리잖아요. 어느 믿음의 질을 동원시키겠습니까 주님께서. 주님의 믿음을 동원시키죠. 그러면 뭐가 방해되겠어요? 나의 믿음이 방해되겠지요. 에이 네 믿음 밟아버리죠.
그럼 내 믿음 밟아버리면 나는 뭐가 됩니까? 믿음 있는 사람 돼요? 믿음 없는 사람 돼요? 없는 사람 되지요. 믿음 없어서 구원 받는 겁니다. 믿음 없어서. 여러분들이 남한테 나 믿음 없다고 하는 것을 다른 사람이 들으면 “에이~ 그것도 자랑이냐?!” 그것보다 더 큰 자랑이 어디 있어요.
금식은 음식을 안 먹는 거잖아요. 그렇죠? 금식이라고 하는 것은 음식을 안 먹는 것을 금식이라고 하는 겁니다. 금식은 음식을 안 먹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것을 먹는 그것이 금식이에요. 모든 걸 다 먹는 거에요. 그러니까 이거는 가까운 환경과 주변 환경과 먼 환경을 구분할 수가 있는데 내가 여기 있다면 이 가까운 환경은 가까운 것들이 내 중심으로 이렇게 연결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런데 저 멀리 있는 환경, 지평선 넘어 멀리 있는 환경을 이 자체를 뭐로 규정하는가? 죽어야 될 죄로 규정하는 거에요. 바리새인들은 이 가까운 환경에서 유대인들을 자기 사람 만들어 가지고 이스라엘 나라 유대 나라를 굳건히 할려고 하는 거에요. 이게 가까운 환경이에요.
가까운 환경에 하는 행동에 대해서 지적받은 경우를 최근에 본 적이 있습니다. 우즈베키스탄과 사우디아라비아 23세 미만 아시아 축구대회가 결승전이 벌어졌어요. 축구대회. 한국은 일본에 초장에 다 깨졌고. 했는데 사우디아라비아가 2:0으로 이기고 있었어요. 그런데 여기가 우즈베키스탄 홈구장인데 주최 측인데 사우디아라비아 2:0으로 이겼습니다.
사우디아라비아 선수가 태클 거니까 선수가 그걸 이렇게 축구장 푸른 잔디에 누워있었거든요. 그러니까 우즈베키스탄 시간 간다고 엎어있는 사람을 질질 끌고 경기장 밖으로 끄집어내는 거에요. 파울 먹었어요. 심판이 시간 측정하니까 네가 나서지 말아라.
우리는 내가 하는 일에 방해되게 되면 선수고 뭐든지 간에 다 들어내요. 다 들어내서 내 중심으로 정리하고 구성할려고 시도를 하게 됩니다. 우리 인간들은. 그런데 인간 주변 환경이 있지요. 주변 환경. 이 주변 환경이 점점 더 인간들이 연구를 많이 했어요. 연구를 많이 해서 현재 20세기 들어와서 2차 대전 이후에 21세기 들어오면 이 주변 환경에서 아주 철저하게 연구들을 많이 했어요.
그 연구들을 하고 분석한 그 한 가지 예를 제가 들겠습니다. 사뮈엘 베케트라는 극작가가 있어요. 연극 극작가. 연극 각본 쓴 사람. 이 사람이 노벨문학상 받았어요. 이 사람이 한 연극이 ‘고도를 기다리며’. 고도를 기다리며 에요. 이 사람이 왜 노벨 문학상을 받았는가. 이 사람 노벨문학상 받을 때 그 현장에 가지도 않았어요. 시시하다고. 사르트르도 노벨상 주는 거 안 받는다고 했어요. 왜 이렇게 유명하게 되었는가.
그 연극을 보게 되면 나무 한 그루가 있고 두 배우가 나오고 뭐하느냐 하면은 모자 벗고 모자 쓰고 신발 벗고 신발 신고 그래가지고 쓸데없는 농담이나 잡담 한심한 짓거리를 쭉 하면서 그 1막 끝부분에 어떤 소년이 나타나가지고 “고도가 곧 오십니다” 하고 1막 끝나요.
그러면 1막 끝나고 2막할 때 관객들은 고도란 분이 오시겠지. 고도가 오시겠지 하는데 2막도 쓸데없는 잡담하고 모자 벗고 쓰고 이래가지고 2막도 끝나고. 결국 그래가지고 3막 4막을 하든 소용없어요. 고도는 결국 안와요. 연극이 그게 끝이에요.
현대인들이 살아가는 모든 짓거리는 잡답이고 한심한 짓거리 밖에 안 되는 거에요. 직장 마치고 골프를 치던 지가 해외에 놀러를 가든 빌딩을 사건 뭘 하던 간에 현대의 작가의 눈에 그리고 현대의 철학가의 눈에 보면 세상 사람들이 21세기에 사는 부조리에요. 아무 의미라는 게 없어요. 아무 의미 없어요.
내가 주식 투자에 성공했다. 그래서? 소고기 사먹겠지. 그래서? 뭔데? 현대인들은 어떤 의미를 찾을 수 있는 방법은 인간에게는 이미 박탈되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노벨문학상 받은 거에요. 막연하게 그냥 오지도 않는 고도, 신이거든요. 그냥 오지도 않는 신을 그냥 기다리는 거에요. 그러다가 죽어요. 후손은 또 신을 기다리다 죽습니다.
종교든 철학이든 희망이든 행복이든 인간은 모든 것이 아무 의미 없고 한심스러운 세월만 낭비하는 삶, 이게 인간의 주변 상황을 연구한 거에요. 오늘날까지 이렇게 연구한 겁니다. 오늘날은 이것보다 더 많이 연구했어요. 정신분석학. 이 비슷한 이야기. 상징 세계.
이 세상에 신이 있고 어떤 초월자가 있어도 반드시 말을 할 때는 언어를 통해서 말을 해야 하는데 그 언어는 절대로 의미와 불일치돼요. 어떤 언어든 사랑이 뭐냐? 좋아하는 거. 좋아하는 건 뭐냐? 이뻐하는 것. 이뻐하는 건 뭐냐? 사랑. 그럼 사랑은 뜻이 없지요. 뺑뺑이 돌잖아요.
미장원 옆에 우체국, 우체국 옆에 미장원 이거 말 하나마나. 인간의 어떤 단어도 의미 없어요. 의미를 합치할 수가 없습니다. 전자는 뭐냐? 움직이는 입자. 왜 움직이느냐. 운동을 하니까. 왜 운동하느냐. 저쪽에서 밀기 때문에. 이게 뭐에요. 이게 물리학이에요. 아무런 의미가 없다니까. 물리학이든 화학이든 아무런 의미가 없어요.
로켓트 올린다. 왜 올리는데? 올라갔어요? 올라갔다. 왜 올라가는데? 아무 의미 없어요. 너 공부 열심히 해야 된다. 부모가 이야기하죠. 왜? 그래야 네가 밥 빌어먹고 산다. 살아서 뭐하는데? 몰라. 네가 행복해야해. 행복이 언제 오는데? 이건 고도 오는 거랑 똑같아요. 행복은 언제 오는지 몰라요.
신발 벗고 신 신고 모자 벗고 모자 쓰고 이게 어떤 의미에서는 위로 삼아 행복일 수 있는데 그 행복은 식상하고 지루하고 권태로운 행복이에요. 차라리 그거 말고 다른 행복 기다리고 있는 거에요. 주변 환경, 인간은 개인주의는 자기 주변 환경에 족쇄에 묶여서 먼 환경을 볼 눈이 없습니다. 볼 눈이 없어요.
영국에 1600개의 교회가 문을 닫아요. 사람이 안 와서. 예배당 진다고 150년 걸렸는데 사람이 안와요. 200년 걸리면 뭐합니까. 사그라다 파밀리아 교회. 바르셀로나 거기에 세계적으로 제일 유명한 현대 건축물이 있지요. 교인 몇 명인데요? 성당 지어놔 봐야 소용없어요. 지금 프랑스만 해도 성당 400, 500개가 지금 매물로 다 내놨어요. 사람이 안 온다니까요. 교회도 사람이 안 오고 성당도 사람이 안와요.
왜 그러느냐 하면은 자신의 개인주의에 있는 중력이 자기한테 갈수록 압축이 되어있어요. 그때 그때 즐거움이 끝나요. 심각한 교회, 예수님 그런 건 찾지도 않습니다. 개인주의가 점점 더 개인주의화 되거든요.
그래서 한 개인의 주변에 주변 환경, 이 주변 환경에서 점점 더 여기 압박이 가해집니다. 그런데 누가 그렇게 하는가? 바깥에 있는 먼 환경에서 밀어버려요. 밀어버리면 처음에는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죽일 생각까지는 없었어요. 처음에는.
주변 환경에 바리새인들은 이 유대 나라 질서만 잡히면 예수님이 뭐 하다가 그러다 말겠지 했어요. 그런데 먼 환경 주님의 복음 환경이 점점 압축을 하니까 이들이 이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그 위선과 허위가 점점 더 압축이 되겠지요. 압축이 되니까 그들이 여호와를 믿은 게 아니에요. 뭐냐 정치, 권력을 믿은 겁니다. 이들은.
이들은 본디오 빌라도가 여호와보다 더 실감나요. 본디오 빌라도가. 이런 경우는 오늘날 신학교 나왔던 그 목사들이 설교 시간에 무슨 이야기합니까? 하나님 이야기하고 예수님 이야기하지요. 실제로 그들 주변 환경은 노회입니다. 교단이에요. 신학교 가봐야 이게 실감나는데. 신학교 안 가봐서 이게 어느 정도로 노회, 교단이 심각한 줄 모르지요.
천주교는 기도문을 일괄해서 똑같은 모든 그 시대의 성당, 그 시간에 똑같은 기도문을 해야 돼요. 추기경의 기도문을 해야 된다고요. 지금 추기경이 좌파거든요. 천주교는 다 그래요. 우리나라 천주교는. 다 그 출신들이에요 그게. 그 주변 환경에서 이들이 예를 들어서 천주교면 천주교는 뭘 추구하느냐? 권력과 균형을 맞추는 거에요. 권력이 없으면 천주교회가 없으니까요. 천주교에 오지를 않으니까.
신부가 그 동네의 유지가 못되니까. 구민 체육대회 할 때 그 본부석에 신부가 앉아있어야 돼요. 큰 교회 목사랑. 개척 교회 목사는 못 앉고 큰 교회 목사는 앉아 있어야 돼요. 권력의 맛을 본 거에요. 이게 되가지고 권력의 맛을 보게 되면 그 자리를 못 내놓습니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71명이거든요. 산헤드린. 이쪽에 바리새인 35 이쪽에 사두개인 35 그 앞에 사도 바울이나 예수님이 재판 받는 겁니다. 이렇게 화기점처럼 이렇게 되어있어요. 반원에 35명씩 해가지고 71명.
이들이 여기에서 해가지고 예수님을 어디에 인수인계합니까. 본디오 빌라도에게 현재 권력자에게 인수한 거에요. 이거는 누가 그렇게 했는가? 주님께서 먼 환경이 보이지 않는 희미한 환경이 그들로 하여금 자기의 진짜 위선자고 진짜 죄라는 누룩이 들어있음을 압축하는 방향으로 주께서 일하신 결과입니다. 10분 쉽시다.
강남-누가복음 12장 10절 (미래의 영) 220621b-이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 시작하겠습니다. 여기 12장 4절 봅시다. 2절 3절은 제가 말씀 드렸지요. 결국은 다 먼 환경의 압박에 의해서 결국은 드러나게 된다. 주변 환경, 가까운 환경이죠. 인간이 있다면 가까운 환경의 특징은 이게 탐욕의 대상이에요. 탐욕의 대상이고 바리새인들도 신을 믿고 천국을 기다리고 메시아를 기다리잖아요.
그건 먼 환경, 먼 환경은 그들에게 뭐냐 하면은 환상입니다. 환상. 종교가 되겠지요. 가까운 환경은 탐욕의 대상이 되고 먼 환경은 환상의 대상이 돼요. 그러면서도 그들은 꿈쩍도 안하지요. 자신의 위선과 외식과 기만이 이렇게 뽑혀져 나와야 되는데 자기 위선과 교만을 품고 있으면서도 탐욕의 대상과 환상의 대상 둘 다를 자기가 소지할 수 있다고 모순 없이 소지할 수 있다고 자부하는 겁니다.
돈벌이는 돈벌이대로 하고 신앙생활 잘하면 되잖아. 이게 된다고 생각하는 거에요. 이게 환상이거든요. 그럼 환상이 아닌 것은 뭐냐? 뭐가 환상이 아니냐? 이 세계가 바로 바리새인의 공동체입니다. 공동체, 유대 나라. 바리새인의 사상에 있는 공동체. 주님께서는 여기 오셨지요.
예수님께서 이 공동체에서 죽음으로 빠져나갔습니다. 나 이 공동체랑 같이 안 논다. 빠져나가 버렸어요. 예수님은 빠져나오는데 성공했고 베드로부터해서 12제자 어떤 누구도 이 공동체에서 못 빠져나갔어요. 주님만 확 빠져나갔어요.
그러면 이 공동체 말고 종교도 있으니까 환상, 종교도 있으니까 초월적인 종교도 있고 실제적인 일상의 생활도 다 구비되어 있는 이런 세계 말고 또 다른 공동체가 있을 수 있단 말이냐? 그런 세계 있어? 가까운 주변 환경에서는 탐욕의 대상인데 현재 권력을 누가 쥐고 있습니까? 권력자가 누굽니까? 본디오 빌라도죠.
빌라도가 예수님한테 뭐라고 했느냐 하면은 내가 너희를 풀어줄 권한도 있고 다시 묶어 둘 권한도 있으니까 나한테 잘 보여라. 그렇게 이야기했을 때에 주님께서는 내가 붙잡힌 것도 진리에 관한 일이다. 그러니까 빌라도가 진리가 뭐냐? 진리가 뭐꼬?
방금 내가 붙잡힌 내가 인간들에 수모당한 것이 이게 진리다. 분명히 진리 언급을 했거든요. 내가 위선자 너희들한테 못 박히고 죽임을 당하는 게 이게 진리야. 내가 죽는 게 진리야. 빌라도가 하는 말이 진리가 뭔데? 오늘날 우리들이 주님에게 질문하는 것 하고 똑같은 레벨이 거기서 거기 똑같애 우리하고. “주여! 주의 뜻을 알려주옵소서.” 주님께서 “이 본디오 빌라도야 내가 이 공동체에서 내가 죽었잖아.” “그거는 제가 믿습니다. 믿는데 주의 뜻이 뭡니까?” “내가 죽었다니까!”
나 자신을 믿는 그 공동체에서 주님이 빠져나갔어요. 이 말은 너 자신을 믿지 말라는 거에요. 너 자신을. 너 자신이 목 긋고 자살하라는 말이 아니고 그냥 냅둬. 그냥 돈 벌고 뭘 하든 살림하든지 뭘 해. 그러나 일체 믿지를 말라. 너 자신에 대해서.
그 목표를 goal 이라고 하고 목적을 aim 이라고 하는데 어려운 이야기인데 목적과 목표를 같은 이야기인데 예민하게 구분하는 사람이 있어요. 예를 들면 이런 겁니다. 밥을 먹는 것은 배고픔을 면하기 위한 목적으로 밥을 먹는다는 거에요. 그거는 목적이 되고 목표는 뭐냐? 먹는 것 그 자체가 즐겁기 때문에 그게 목표가 되는 거에요.
따라서 밥 먹는 대신 링거 맞으면 목적은 이루어졌어요. 왜? 영양제가 들어갔으니까. 뭐를 잃어 버렸습니까? 어그적 어그적 닭 뒷다리 치킨 뜯는 그 맛, 그 맛은 이룰 수 없는 거에요. 인간들에게는 이처럼 둘 다가 만족스럽지를 못해요. 목적과 목표가.
그 말은 뭐냐 하면은 인간은 내가 믿거든요. 내가 믿어야 되는데 내가 나를 믿는데 문제는 이 환경이 먼 환경이 나 믿는데 전혀 동조를 안해요. 우짜면 좋지요? 나는 나를 믿고 싶어요. 뜻을 세우고 스케줄 짜고 뭐 잘하고 싶어요. 그런데 대자연의 모든 사건이나 사태가 내 뜻에 협조가 안돼요. 이럴 때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4절에서 주님께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내가 내 친구 너희에게 말하노니 몸을 죽이고 그 후에는 능히 더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러니까 몸은 죽일 수 있으되 영혼까지 못 죽이는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라고 예수님께서 대책을 내놓았습니다.
그럼 이 대책을 줄여보면 그들이 너희를 죽이려 할 때에 아무 소리하지 말고 그냥 죽어라. 이게 왜냐하면 주님의 복음의 세계가 이 인간들의 주변 환경을 압축해 들어오고 있음을 네가 그걸 반기면 되잖아. 내가 죽는 그날이 내가 사는 날이 되기 때문에 그걸 기뻐하라 이 말이거든요.
왜냐하면 내 육신이 내 구원을 방해했기 때문에 그래요. 내 육신이. 내가 살고자 하는 육신이 끊임없이 나의 진짜 주님 섬김을 방해하고 있어요. 왜냐하면 나는 주님을 섬기고 싶지만 내 육신의 죄가 나만 섬기라고 하기 때문에 이건 내가 나를 자살한다고 해서 될 문제도 아니고요.
5절에 봅시다. “마땅히 두려워할 자를 내가 너희에게 보이리니 곧 죽인 후에 또한 지옥에 던져 넣는 권세 있는 그를 두려워하라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를 두려워하라” 예수님이 지금 대책이 그거에요. 이런 위선과 외식으로 가득 찬 이 인간 세계에서 너희들 주님의 복음의 세계에 있는 사람들이 할 수 있는 것은 그들에 의해서 죽임을 당하는 건데.
왜? 그들이 너희를 죽이려할 때는 그들이 죽이는 게 아니고 복음의 세계가 너희를 죽여야 비로소 네 몸보다 네 영혼이 더 중요한 것이라는 것을 살리는 그 방식을 벌써 먼 데서부터 서서히 해오고 있으니까 죽이려할 때 그냥 곱게 죽어라. 지금 그 이야기를 주님이 대책이라고 내놓은 거에요. 대책이라고.
그리고 이 대책이 맞는 이유가 내 몸이 죽어버리면 그 죽는 순간 나의 스케줄 나의 계획 기대, 고도를 기다리고 뭐고 행복 추구고 그런 힘든 기다림이 더는 안 해도 되잖아요. 별로 기뻐하는 얼굴들 아닌데. 지금 제 말하는 게 아닙니다 지금. 여기 성경에 누가복음 12장 4절 5절에 나오는 그 말을 하는 거에요.
그래서 얼굴색이 안 좋아서 얼굴 피시라고 예수님 말씀과 같은 뜻이지만 달리 말씀드리겠습니다. 같은 뜻인데 4절 5절 너무 살벌하고요. 미래의 영을 미리 받으면 됩니다. 이게 정답이에요. 미래의 영이 누구죠? 미래의 영? 성령입니다. 왜냐 하면은 과거와 현재 그 다음에 인간의 미래는 환상이에요.
따라서 이 미래는 예수님께서 오심으로서 현재는 현재 다음에 뭐가 되느냐 하면은 현재가 되고 현재 다음에 뭐가 되느냐? 현재가 되고 현재 다음에 현재가 되고 이래서 인간이 종말로 끝납니다. 인간에게는, 인간의 환경은. 주님께서 인간 환경에서 빠져나왔기 때문에 인간의 시간은 과거 현재 이어진 미래에 불과해요.
이것과 끊어진 다른 외부의 시간은 인간 세계에서는 없습니다. 왜냐 하면은 시간의 중심 되는 주님이 인간 공동체에서 홀로 빠져나왔기 때문에. 종말 이후에 상황에 대해서 예수님 홀로 빠져나왔단 말이죠.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빠져나와서 성령을 줘버리면 인간 세계가 어떻게 되든 상관없이 그 세계 그 이후의 되어진 원리 원칙을 성령을 통해서 우리에게 집어넣는 거에요. 그럼 이건 뭐냐 하면은 이미 살았어요. 이미 살았으니 이 땅에 와서 죽어도 상관없이 되는 겁니다. 이미 살았기 때문에. 이제 얼굴 좀 피셨습니까?
우리의 일은 우리 인간의 일이 끝나 버리면 인간의 일이 끝나버리면 더 이상 인간의 일은 없고 그 사적인 일도 없어요. 그런데 성령이 미리 와버리면 내 일이라고 내 일을 도와주는 게 아니고 주님의 자신의 일로 전환시켜버리기 때문에 내가 먹고 마시고 무엇을 하던지 다 주의 일이 되는 거에요. 주의 일이.
놀러를 가든 크루즈 여행을 가든 주의 일이 되는 겁니다. 주의 일은 완료된 거에요. 종말을 건너뛰거든요. 종말과 인간의 현재라는 것과 주님이 생각하는 시간 사이에서 주님이 일방적으로 부활하셔서 인간의 공동체에서 따로 떨어져나갔거든요. 베드로가 따라갈려고 했어요. 베드로가 따라올 수가 없어요.
왜? 베드로의 시간대는 인간의 육의 시간대이기 때문에 미래의 주님의 나라에 갈 수가 없습니다. 처소가 예비 되지 않아서 갈 수가 없어요. 갈 수 있으면 오라고 했겠지요. 갈 수가 없어요. 다른 자리가 있어요. 다른 자리. 주님께서 십자가 이루시고 다 이루시고 난 뒤에 성령이 오게 되면 성령 그 자체가 주님의 자리가 돼요. 주님의 자리. 주님의 자리 아시지요. 주님이 계신 곳.
주님이 계신 곳이 성령을 통해서 와버리면 우리 자신을 이렇게 함몰하듯이 우리를 집어넣습니다. 집어넣으면 우리는 죽어도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있고 우리의 주민등록은 하늘에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이 땅에 남아있는 것은 뭐냐 하면은 하나의 출장이죠 그냥. 본사에서 파견 근무한 거에요. 본사에서. 일 끝나고 먼저 가신 분도 있고. 사모님은 지금 남아있고. 야속하지만. 그러니까 지금 4절 5절에 의해서 지금 제자들도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들어요. 야무지게 자살할까? 순교하면 구원받는다는데. 순교하면 구원받는 게 아니에요.
순교해서 구원받겠다는 것은 인간의 시간대에서 생각하는 인간의 미래에요. 순교해도 지옥가요. 구원받는 게 아니고. 구원은 오직 주님의 자리가 덮쳐야 이게 구원이 되는 겁니다. 성령이 와야 그리스도 사람이 돼요. 그렇게 왔다고 치고 온 사람 같으면 왔다 안 왔다를 어떻게 아느냐. 4절 5절 이 말씀이 바로 지금 우리에게 주어진 이 환경이 4절 5절을 보여주기 위한 환경으로 주께서 지금 우리를 끌고가고 있는 거에요.
이걸 쉽게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터널이 있는데 주님께서 이 터널에 성령을 줘버리면 이 터널에 무슨 그림들이 있느냐 하면은 성경 전체 그림들이 다 있어요. 바리새인부터 애굽에서부터 광야에서 못 들어가서 만나 먹고 그 모든 그림을 성도들로 하여금 지나가게 하는 거에요. 이 세계는 뭐냐 하면은 말씀의 세계입니다. 복음의 세계고. 이걸 보는 거에요. 보면서 빠져나오면 되지요.
말씀에는 새로운 환경이 완성된 환경이 주어지는 거에요. 전에는 뭡니까? 주변 환경은 탐욕의 대상이고 먼 환경은 그냥 환상이에요. 그냥 허황되게 기다리는 거에요. 마치 고도를 기다리는 것처럼. 히치콕 감독의 현기증이라는 영화가 있어요. 그 영화를 제가 유투브로 본 적이 있는데.
형사가 친구한테 부탁받아가지고 친구 아내를 좀 감시해달라고 부탁 받았는데 나중에 그 여자를 사랑하면서 보니까 이게 그 여자가 이미 죽었어요. 자살해서 죽었는데 주디라는 사람이 그걸 흉내내고 있었던 거에요. 그러니까 없는 사람인데 전에 죽었던 진짜 애인을 흉내 내는 그 사람, 그 사람을 주디가 아니라 옛날에 내가 사랑했던 그 사람이라고 일부러 그렇게 스스로 자기를 조작해요.
조작하는데 결국은 그 형사가 높은데 가가지고 그 여자를 밀쳐 죽여버립니다. 그럴 때 그 형사가 뭐가 나았느냐? 고소공포증이 치료가 되었어요. 왜 그러느냐 하면은 그 형사가 옛날 자기 애인을 죽였을 때 나 때문에 죽었다는 상처가 있어가지고 높은데 올라가지 못하는데 실제로 그 일을 한 번 더 해보니까 이제는 가짜니까 가짜를 죽였으니까 자기가 진짜 죽였다는 그 죄책감에서 풀어 헤쳐 나오는 거에요.
주님께서 이것을 경험하면서 내가 예수님을 죽였다는 그 죄책감을 실제로 남은 여생을 가지고 경험을 해보시기 바랍니다. 벌써 경험한 사람, 제대한 사람도 있고 아직까지 경험할 게 남아 있으면 계속 해보는 거에요. 해보면 내가 주님 앞에 몹쓸 짓을 했다 죄책을 갖고 있다 라는 이것이 가벼워야 되고 즐거워야 돼요.
그럴 때 우리는 새로운 선을 행하고자 하는 일체의 모든 내 구원에 대한 시도가 안 해도 됩니다. 할 필요 없어요. 그러한 무거운 무게를 안 가져도 돼요. 이미 완료한 것을 아담의 후손은 반드시 죄를 지어야 되고 죄가 지어져야 그 죄책에서 벗어날 수가 있습니다. 아주 희한한 법칙이에요. 죄를 지음으로써 더욱 더 죄에서 벗어날 수 있는 그 방식을 주께서 제시한 겁니다.
베드로가 예수님 배신했습니까 배신 안 했습니까? 배신했지요. 배신해가지고 그 다음에 성령 받아서 복음 전파할 때 나는 부족해 벌벌 떨면서 얼마나 내가 몇 명을 전도해야 내가 죄책감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베드로가 그렇게 전도했습니까? 아니지요.
자기는 예수님 저주해놓고는 복음 전파하는데 아주 신바람이 났어. 신바람이. 이박사야. 인간이 죄 짓는 게 당연하다는 거에요. 그리고 뭐도 당연하냐? 인간이 죽는 것이 그건 이상한 일이 아니라는 거에요. 아나니야 삽비라 베드로 앞에 헌금 거짓으로 바쳤다가 죽었어요. 둘 다 사이좋게 한날 같이 죽었어요.
그때 베드로가 누가복음 12장 6절을 본다고 봅시다. 그때 성령 받은 베드로는 어떤 마음이겠습니까? 제가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참새 다섯 마리가 두 앗사리온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하나님 앞에는 그 하나도 잊어버리시는 바 되지 아니하는도다”
이걸 제자들이 행하라는 말이에요? 아니면 이런 말씀의 환경이 제자들을 덮친다는 말입니까? 덮친다는 말이에요 이게. 전에는 내가 살기 위해서 말씀을 지켰던 것이 나였는데 이제는 말씀이 나로 하여금 우리의 죄를 지적하면서 말씀의 완성도를 우리를 통해서 한껏 보이는 그러한 새로운 현실로 이끌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요 4절, 5절 “내가 내 친구 너희에게 말하노니 몸을 죽이고 그 후에는 능히 더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마땅히 두려워할 자를 내가 너희에게 보이리니 곧 죽인 후에 또한 지옥에 던져 넣는 권세 있는 그를 두려워하라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를 두려워하라” 4절 5절 무슨 뜻인지 아시겠지요?
그렇다면 이런 일이 공산주의 국가에서 이런 일이 있다. 그때는 여러분들은 어떤 태도를 가져야 됩니까? 강의 중에 보통 답변을 제가 빨리 하는데 오늘 약간 뜸을 들이네요. 여러분 어떤 태도를 가져야 됩니까? 1번 죽여라! 나는 이미 성령 받아서 구원 받았다. 죽여! 죽여! 2번 아이 무서워라! 몇 번입니까?
2번이죠. 어차피 장난인데 뭐. 왜냐하면 나를 죽이는 것이 4절, 5절 이루기 위해서 주께서 보낸 주의 일꾼이잖아요. 그때는 우리는 어떤 역할을 해야 돼요? 4절 5절 역할을 해야지요. 아이 무서워라. 웃으면서. 아이 겁나라. 살려주세요. 이런 거. 이런 게 자유라는 거에요.
왜 그렇게 해야 되느냐? 나를 안 믿는 가벼움, 존재의 가벼움. 여기에 해당되기 때문에. 나를 믿지 않는 존재의 가벼움. 내가 믿어도 세상 내 뜻대로 안되거든요. 그럴 거 같으면 우리는 아예 안 믿으면 돼요. 어차피 믿고 안 믿고 상관없이 주의 말씀대로 되는데 굳이 내 고집을 억지로 억지로 부릴 필요 뭐 있습니까.
나를 안 믿는데서 오는 이 가벼움, 이 자유함. 이거는 돈 주고도 못 삽니다. 억만금을 줘도 온 천하를 줘도 못 삽니다. 하루하루 사는 것이 주께서 연장해서 살려주는 거에요. 말씀을 더욱더 많이 증거하라고 복음의 세계 증거하라고 살려주시는 거에요.
복음의 세계에서 우리의 입장은 뭐냐? 어느 것 하나 나를 믿고 내가 살려고 할 경우에는 어느 말씀을 들어도 못 지킨다는 것을 증거하면 돼요. 내 개인주의 구원을 위해서는 어떤 말씀도 지켜봤자 기껏 바리새인의 위선에 합류될 수밖에 없는 이런 육신, 바리새인 육신이나 내 육신이나 똑같은 아담의 육신이라는 사실을 이제 와서 눈이 밝혀 보면서 그걸 내가 이것밖에 안 됨을 확인하는 그 즐거움이 있어야 돼요.
그거는 성령이 아니면 이런 새로운 주님의 공동체 안에 참여하지 못하면 기껏 해봐야 그런 것은 내 탐욕의 대상 또는 환상에서 못 벗어납니다. 자꾸 우리가 살려고 하지 말고 살려주셔서 복음이 전파되는 그 신기함을 친히 맛봐야 돼요.
그 다음에 7절 봅시다. 같은 이야기 계속 해요. “너희에게는 심지어 머리털까지도 다 세신 바 되었나니” 아침에 일어나면 머리카락이 벌써 허옇게 있어요. 우리는 셀 수가 없어요. 하나 둘 하나 둘 하다가 짜증나서 못 셉니다. 머리 빗으면 우르르 떨어져요. 그래도 검은머리 있을 때는 좀 나았는데 흰머리 막 떨어지면.
우리는 내 것 하나 잃어버리면 이렇게 두려워합니다. 내 머리카락 하나 잃으면. “두려워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 이 말씀에 설명이 약간 필요할거 같아요. 인간의 육은 자기를 구성합니다. 주변 환경을 통해서. 자기가 아는 정보와 지식과 학식 성경구절 이런 거 가지고 자기를 뭘 보느냐? 핵으로 구성하지요.
핵으로 구성해서 자기 육을 가지고 자기가 갖고 있는 탐욕의 대상에 탐욕을 발휘해서 자기 세계를 구성해서 먼 환경 뭐라고 했습니까? 환상, 천국에 들어갈려고 시도하게 됩니다. 이게 바리새인이고 인간의 육이에요. 그런데 여기서 주님께서는 뭐냐 하면은 참새보다 더 귀하다 했어요. 인간은.
그러면 이 말은 뭐냐? 육에서 일단은 참새 수준이라도 들어가야 돼요. 참새 수준. 참새 수준의 특징은 참새는 누가 기르신다와 결합된 것이 참새에요. 누구가 지키신다 기르신다. 그러면 일단 성도를 참새 수준까지 올립니다.
그런데 여기 보게 되면 참새보다 귀하다고 했지요. 그러면 이미 육에서 참새가 되게 되면 주께서 기르시는 대상이 되지요. 그러면 기르시는 대상은 여기서 귀한 존재가 삭제됩니다. 기르시는 분의 요소가 들어와야 돼요. 그게 뭐냐 하면은 마태복음 6장에 나오는 너희는 그 나라와 그 의가 너 보다 더 중요하기 때문에 내가 너를 지켜준다는 거에요. “그 나라와 의”.
그런데 참새는 그 나라와 의와 관계없습니다. 왜? 참새를 위해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건 아니기 때문에. 참새가 죄인입니까? 아니잖아요. 주께서는 죄인을 위해 죽어서 죄인을 구원하러 왔잖아요. 참새는 해당이 안돼요. 들풀은 해당이 안돼요.
그 나라와 의, 그 나라와 의가 어디서부터 시작됐는가 알기 위해서는 그 시작된 너희를 참새보다 더 귀하게 지켜줘야 되는 거에요. 우리를 귀한 게 아니고 우리를 재료로 사용해서 시작된 그 나라와 그 의가 귀하기 때문에 우리를 죄인인 우리를 주께서는 지켜주는 겁니다. 언제까지? 죽을 때까지. 맞아죽을 때까지. 굶어죽을 때까지.
그래서 주님의 관심사는 이미 인간들로서는 이미 바리새인의 외식과 누룩 그 죄, 거기에 대해서 어떤 누구도 벗어날 수 못한다는 것은 이미 기정사실이에요. 따라서 예수님의 관심사는 예수님, 이 이야기는 자기 자신을 두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 뒤에 8절 나옵니다. 성도가 왜 귀하냐? “내가 또한 너희에게 말하노니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그러니까 성도가 귀한 게 아니고 성도가 바라보는 그 분이 귀한 거에요. 그 나라와 의가 귀한 거에요. 그것 때문에 참새 기르듯이 주님께서는 자신의 의를 위해서 그 나라와 의를 위해서 참새 기르듯이 성도를 기르고 계시는 겁니다.
그래서 아까 제가 우리의 수명은 주님에 의해서 계속 연장되고 있다는 겁니다. 언제까지 연장될지 우리 소관이 아니지요. 주의 뜻으로 연장되고 있는 겁니다. 8절 9절 보게 되면 아까 이야기했던 그 내용이 거기서 나옵니다. 첫 번째 나 개인주의. 개인주의는 단독자죠. ‘단독자’.
그런데 주님의 복음의 세계에서는 개인주의는 없습니다. 개인 구원, 내 구원 없습니다. 주님과 함께 있다 했지요. 주님과 함께. 주님과 함께 있으면 내가 귀합니까? 주님이 귀합니까? 주님이 귀하지요. 그런데 1번의 경우에 아담의 육신의 본능은 뭡니까? 개인주의에요. 개인주의.
이 개인주의를 하나님께서는 이걸 인정하지 않고 이걸 위선자로 봐가지고 죄로 죽이고 주와 함께 우리의 육을 이렇게 함께 하게 됩니다. 그러면 우리는 참새처럼 기르시면서 누굴 증거 하는 거에요? 누구 증거하기 위해서? 함께 있는 나를 증거하는 게 아니고 함께 계신 주님을 증거하기 위해서 우리가 주님 앞에 인도함을 받습니다.
여기 8절에 보면 “내가 또한 너희에게 말하노니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인자도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는 자는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부인을 당하리라” 자, 묻습니다. 이 말을 듣고 있는 제자들은 이걸 믿었습니까? 안 믿었습니까? 지금 제자들 앞에서 하고 있는데 그 당시 제자들 믿었습니까? 안 믿었습니까?
안 믿는 게 아니고 못 믿어요. 그 고도를 기다리며 연극에서 진짜 핵심적인 키는 뭐냐? 그들이 왜 고도, 신이거든요. 왜 신을 기다려야 되는 이유를 몰라요. 그 사람들이. 그 두 사람이 등장인물로 나오는데 왜 우리가 누구를 마냥 기다려야만 해. 너 이유 알아? 몰라요. 그냥 모르는 거에요. 현대인들은 무언가를 기다리는데 왜 기다려야 되는지를 몰라요.
주식이 2400 이상 돼야 되는지 이유를 모른다니까. 2400 되면 2500 되길 기다리는 이유를 몰라요. 2500 되면 3000을 기다려야 되는 이유를 몰라요. 화물연대 경유 값 휘발유보다 더 비싸잖아요. 왜 경유 값이 해야 되는지를 이유를 몰라요. 밥 먹고 살기 위해서 했다. 왜 내가 밥 먹고 살아야 될 이유를 모른다니까요. 이게 바로 고도를 기다리는 그 연극의 핵심이에요.
너 왜 사느냐? 내가 왜 사는지를 아무도 몰라요. 아무도 모르면서 무조건 살아야 된다는 거에요. 왜? 모르지요. 마치 고도를 기다리는 것처럼. 얼마나 인간의 현대의 삶을 예리하게 봤습니까. 노벨문학상 받을 만하지요. 상 받는 사람의 특징이 있어요. 해답이 없다는 것. 문학상 치고 해답 있는 문학상 없어요. 해답을 알고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냥 답답증이에요. 답답증.
그냥 모르겠다는 거에요. 모든 철학자들의 끝은 뭔 줄 알아요? 모르겠다는 겁니다. 헤겔이고 라캉이고 쇼펜하우고 뭐 모르겠다는 겁니다. 니체도. 칸트도 마찬가지고 모르겠다는 거에요. 참 모르겠다가 주류가 되고 안다고 예수 믿으라고 하면 욕 얻어먹고 참 세상 희한한 세상이다.
정답이 뭐냐 하면은 이거에요. 내가 모르겠다는 겁니다. 모르겠다면 겸손해 보이지만 뭐를 안 지웠어요? 내가 있지요. 이게 단독자입니다. 개인주의입니다. 뭘 해도 개인주의에요. 이게 교회 오면 뭡니까? 내가 구원받아야 되겠다. 이 앞에 내가 있잖아요. 이 사람은 구원이라는 게 뭔지 몰라요.
바리새인의 잘못은 뭐냐 하면은 그들이 우상 섬기는 대신 메시아를 기다리는 것이 이게 문제가 되는 거에요. 내가 메시아를 기다린다. 이게 나와 메시아가 매치가 안 된다는 사실을 바리새인들은 몰랐습니다. 바리새인 모르면 제자들도 몰랐던 거에요.
그냥 예수님 이용할라고 제자들은 따라 다닌 거에요. 내가 저 분 예수님 믿고 나중에 하늘나라 가면 누가 높은 자리 앉겠는가 자기들끼리 싸움했다고요. 뭐가 지워지지 않았어요? 여전히 개인주의 내가 앞장서있어요. 내가. 주님을 시인하기 위해서 내가 시인되는 게 아니고 그냥 나를 시인하기 위해서 예수가 필요한 거에요.
10절에 보면 드디어 제가 아까 쉽게 말씀드린다는 미래에 오는 영. 오늘 제목을 미래에 오는 영으로 정하고 싶어요. ‘미래에서 오는 영’. 미래에서 오는 코난 말고. 여기 미래라고 하는 것은 인간의 먼 환경, 환상과 가까운 환경 우리의 육신이지요. 탐욕의 대상이라고 하는 것은 밥 먹고 산다 이 뜻이에요.
내가 밥 먹고 살아야겠다. 먼 환경은 먼 환경 천국 오게 되면 내가 구원 받아야 되겠다 이 합친 것이 뭐냐 하면은 인간의 공동체죠. 그 공동체에서 누가 빠져나갔습니까? 예수님이 빠져나갔지요. 그럼 예수님에 대해서 아는 사람은 제자들 다 통틀어서 예수님을 아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지요. 왜? 모든 인간의 기존의 공동체 환경에 적용을 받기 때문에. 죽었다 깨어나도 그 환경이에요. 깨어나도.
군대 간 남자들의 꿈에는 항상 고향집이 있어요. 그러나 잠 깨면 빰빠라빰빠빠 군대입니다. 그리고 군대 제대한 남자들의 특징은 항상 군대 꿈꿔요. 그런데 깨어나면 집이에요. 그러나 집이나 군대나 같은 지평선의 같은 거기서 거기에요. 그러나 예수님은 도통 인간의 아이디어에 포함되지 않는 진짜 베드로도 알 수 없었던 자기만의 세계로 가버렸어요.
그게 성령의 세계입니다. 성령이 오게 되면 대화가 안돼요. 성령 받은 사람과 안 받은 사람과 대화 될 리가 없습니다. 사도가 외칠 때 대화가 되지를 않았어요. 그래서 영생 주기로 작정한 자만 믿어요. 내 백성만 믿어요. 고린도교회. 내 백성만 믿고 영생 주기로 작정한 자만 믿기 때문에 사도도 그게 참 신기해요. 왜? 사람 같으면 믿을 수 없는 말을 지금 내뱉었는데 그게 믿는 겁니다.
사도행전에서 놀라운 일 중에 여러 가지 있지만 그 중에서 뭐냐 하면은 빌립 집사, 빌립 집사가 난데없이 사막에 가고 있는데 거기서 난데없이 누구를 만나는가? 에디오피아 내시를 만나요. 내시를 만나서 놀라운 사실은 내시가 뭐라고 이야기하느냐 하면은 이사야 53장을 이야기합니다. 이 사람이 누구냐? 이거 누구 작품이냐? 성령의 작품입니다.
주의 성령의 세계, 모든 인간 세계에서 종말이 되고 난 뒤에 인간의 공동체가 다 끝장났을 때 의 그 이후의 세계는 오직 주도권은 주님에게만 주도권이 있는 세계만 펼쳐질 뿐이지 인간의 개인에게 주도권을 주는 그런 세계는 천국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성령 아는 사람만 압니다. 아는 자만 알지요.
10절에 보면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받으려니와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사하심을 받지 못하리라” 이 말씀을 보충하기 위해서 요한복음 15장을 한번 보시기 바랍니다. 요한복음 15장 18절에 보면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조금 설명하게 되면 이 세상이라는 성질이 본질이 어떠냐 하는 것은 이 세상 인간들끼리 붙어서는 몰라요. 이 세상 공동체에서 떠난 분을 세상은 미워해서 떠났거든요. 그래서 예수님의 이야기를 이 세상에서 죽음을 당했던 예수님의 이야기를 하게 되면 세상은 배운 사람 안 배운 사람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딱 똘똘 단결이 돼요.
단결이 되가지고 그 예수님 이야기하는 순간 세상은 자기의 본질을 못 감추고 그대로 드러내게 되어있습니다. 그래서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것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택하였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한다”는 거에요. 이 말을 거꾸로 적용하게 되면 세상이 예수님의 복음 때문에 십자가 복음 때문에 너희를 미워한다면 그게 너희가 성령 받은 증거라는 거에요.
기뻐해야 될 것인지 싫어해야 될 것인지. 예수님이 왜 세상에서 미움을 받느냐 하면은 인간의 본성은 어떤 경우라도 아무리 죄를 지어도 남이 나를 미워하게 되면 우리는 복수심이 발동하게 되어있어요. 자기가 나쁜 건 있더라도 잘못한 것은 잘못한 것이지만 어떤 경우라도 나를 미워하게 되면 우리는 참지 못하는 그런 근성을 아담으로부터 물려받았어요.
삼장법사 제자 가운데서 돼지가 미움 받잖아요. 이름 뭐지요? 저팔계. “왜 나를 미워하나~” 하잖아요. 저팔계가 미움을 받는 이유는 사람같이 생기지 않았기 때문에 미움을 받는 거에요. 왜 주의 성령 받은 사람을 왜 미워하느냐. 세상이 우리 보고 미워하는 게 아니에요.
성령이 외부 환경을 성령이 여기 와서 이 세상 환경이 예수님을 죽인 환경이라고 고발하기 때문에 세상은 거기에 대해서 반발한다고 예수 믿는 사람을 핍박하게 되어있어요. 중간에 애꿎은 누가 끼었습니까? 우리들만 끼었어요. 우리는 뭐 별로 나쁜 일 한 적도 없는데 저팔계도 아니고 주님께서는 일부러 그런 사항을 내가 아주 야무지게 그런 사항을 유발하겠다는 거에요.
그러니까 미리 이야기하지요. 내가 간 뒤에 너희들 굉장히 미워할거야. 제자들 “싫어요~싫어요!” “싫어도 할 수 없어. 그래야 돼. 그래야 나만 증거 돼. 너는 싫다 좋다 할 그런 권한이 없어.” 그래서 요한복음 15장 19절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것이나” 철저하게 주님께서는 이 세상을 미움 받아서 세상과 결별하는 분이라는 것을 나타내면서 바로 그걸 증거하라는 거에요.
이렇게 하면 세상은 그 어떤 신앙과 종교로도 구원될 수 없음을 기쁜 소식으로 전하라. 이 세상에 어떤 신앙, 내가 하는 어떤 신앙과 내가 하는 어떤 종교도 구원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이 기쁜 소식을 아주 기쁘게 전하라. 그러면 너희들은 된통 욕을 얻어먹을 것이다. 특히 교회에서 욕을 얻어먹을 것이다. 된통으로. 그때 기뻐하라. 성령이 너희와 함께 있다. 성령이.
10절 “누구든 인자를 거역하면”. 인자는 반드시 거역 안 할 수가 없어요. 그래서 거역하면 이라는 말을 한 겁니다. 모든 인간이냐. 그러면 나를 싫어하고 미워하게 되어 있을 것이다. 왜? 아담에 속했기 때문에 주님께서 의도적으로 아담에 속한자의 미움을 받는 식으로 활동하시기 때문에 인자를 거역 안 하는 사람이 없어요. 거역하는 정도가 아니고 인자를 거역 안 할 사람이 없어요. 제자들뿐만 아니고 가룟 유다 뿐만 아니고 다 해요.
그러나 그 뒤에 보세요.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사하심을 받지 못한다.” 자, 그럼 기준이 어떻게 돼요? 기준이. 용서의 기준이 뭐가 됩니까? 인자 시대에요? 성령 시대에요? 그 사함의 기준이 예수님 죽기 전의 사함의 기준이냐? 십자가 이후가 사함의 기준이냐 이 말입니다. 십자가 죽고 난 뒤에 사함의 기준, 용서될까 안 될까가 결정되는 거에요. 예수님 십자가 죽어야.
그러니까 우리는 모든 해석을 뭐냐 하면은 결국은 모든 해석은 인간들은 어떤 인간들도 믿는 자 없고 결국 인간들이 누굴 죽였다? 하나님을 죽였다는 그 기준을 제시해줘야 그 기준에 대해서 인정하는 쪽과 인정하지 않는 쪽이 확연하게 나눠질 게 아니겠습니까.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교회에서 설교할 때 여러분 십일조 헌금해도 죄입니다. 라는 설교를 해야 돼요. 그걸 왜 해야 되느냐 하면은 그걸 해야 성령 받은 사람 외에는 이게 전부 다 화를 내게 되어있어요. 오늘 교회 청소한 사람 손 들어보세요. 죄 지었습니다. 할렐루야.
여기 사하심이라고 했지요. 성령의 사하심을 받지요. 이 말은 뭐냐 하면은 어느 인간치고 용서함을 안 받아도 되는 일을 한 인간은 없다는 뜻이에요. 모든 인간은 ‘사하심’이냐 ‘안 사하심’이냐 그걸로 결정되지 나름대로의 자기가 선한 행위 하는 것은 인간에게는 없습니다. 인자라고 하는 것은 십자가 지기까지 인자라고 합니다. 그 이후에는 성령을 주시는 분이죠. 주님이 되지요.
그러니까 지금 보세요. 1절 빼놓고 2절부터 해가지고 지금 10절까지 오게 되면서 지금 예수님은 누구하고 이야기합니까? 처음에는 바리새인하고 이야기했지요. 그 다음에 누구하고 이야기합니까? 제자들에게 사람들에게 이야기했지요. 수만 명이 왔다 하니까 엄청난 사람들에게 이야기했지요.
해놓고 마치 그들보고 행해라 행하지 않은 것처럼 그렇게 이야기하시죠. 이렇게 해라 두려워 하지 말라 참새가 허락 없이 팔리지 않는 것처럼 너희도 그렇다. 전부 다 사람보고 이야기했지요. 그런데 마지막에 누가 등장합니까? 사람 말고 예수님 말고 누가 등장합니까? 성령 등장하지요. 결정적인 것은 뭡니까? 성령이죠.
그래서 12절에 봅시다. “마땅히 할 말을” 그 다음에 뭐라고 되어 있어요? “성령이 곧 그때 너희에게 가르치시리라.” 이것은 인간 세계에서는 인간 대 인간이에요. 인간 대 인간. 자, 오늘 공부한 것 해봅시다. 인간에게는 어떤 것이 있다? 가까운 환경 주변 환경, 주변 가까운 환경. 먼 환경은 뭡니까? 먼 환경은 환상이라고 했지요. 하늘나라 초월적인 그것. 좀 배불러야 늘 찾는 것. 배고프면 돈 벌이 해야 되는 주변 환경.
이 사람들은 어떻습니까? 주변 환경 있고 환상적인 종교를 믿는다면 하나님 믿는다면 예수님 믿는다면 되겠지요. 인간 대 인간. 그래서 사람들은 뭐냐? 설교자를 믿어요. 목사를 믿습니다. 왜? 눈에 보이니까. 그러나 주님은 뭐라고 합니까? 이 인간 믿지 말고 무슨 요소를 집어넣어라? 성령이 그때 가르치시리라. 성령이 오는 거에요.
인간 같으면 뭐가 나오느냐 하면은 “하라, 하지 말라”가 되요. 인간 같으면. 그런데 성령이 오게 되면 인간이 네가 뭘 안하고 뭘 하고를 일체 묻지를 않는 겁니다. 이게 기쁜 소식 아닙니까. 내 행위에 대해서 일체 묻지를 않아요. 네가 누가복음 12장 5절 왜 안 지켰어? 네가 죽을 때 살려달라고 왜 했어? 두려워 말라고 했는데 왜 두려워했어? 이걸 묻지를 않는다고요.
자, 우리를 죽이러 온다. 사람이죠. 내가 사람이죠.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 어떤 관계든 이것에 대해서는 나를 찔르는 자나 찔림 받는 나나 일체 여기서 문제 삼지 않아요. 어차피 둘 다 똑같으니까. 어차피 둘 다 똑같은 인간이에요. 오후 2시에 은혜 받아놓고 다 까먹는데. 이거는 한 시간 전에 나와 한 시간 후의 나와 비교 대상이 안 된다니까요. 이게.
내가 누굴 만나든 어떤 목사를 만나든 복음 전하는 사람을 만나든 그 사람이 우리를 구원하지 않습니다. 성령이 주선을 하게 되면 바로 누가복음 12장이 살아나고 누가복음 12장이 살아나게 되면 우리가 구원받고 우리가 천국 가는 것은 오직 예수님께서 성령을 보내서 우리로 하여금 십자가를 알게 해서 그 십자가의 피로 죄 씻음을 받는 그 사실입니다.
그 정도로 우리는 주변 환경에 대해서 탐을 냈고 먼 환경 신앙생활 외식하는 기만하면서 자기는 자기 것 챙기면서 여기에다가 추가해서 예수까지 잘 믿어줄까 이런 식으로 위선적으로 행동하는 게 그게 바로 우리의 모습입니다 라는 것을 집사님끼리 장로 목사끼리 이야기되면 이게 바로 새로운 공동체 아닙니까. 새로운 공동체.
11절 보고 마치겠습니다. “사람이 너희를 회당이나 위정자나 권세 있는 자 앞에 끌고 가거든” 예수님이 당했던 것과 똑같이 당했지요. 예수님이 당했지요. 인간에게 무엇이 현실이라고 했습니까? 바리새인이 현실입니까? 본디오 빌라도가 더 현실입니까? 권력이 더 찐찐 현실이죠. 권력이. 돈과 권력이 찐찐 현실이죠. 그 앞에 데려가는 거에요.
그 때 어떻게 이 사태를 모면하느냐? 걱정하지마라. 그 말을 성령이 그때 너희에게 가르치리라. 실제 사도행전에서 사도들이 매 어디 가는데 마다 준비된 권력자들이 있어가지고 꼭 예수님이 당했던 것을 되풀이하는 겁니다. 그러면 오늘날 사도행전도 아닌데 우리는 어떻게 권력자에게 당합니까?
마스크 써! 이런 것. 투표 누구 찍어! 알아서 둘 중 하나를 찍어. 허경영 찍으라는 말은 안하거든 나라에서. 공중부양하는 사람 찍지 말고 찍어. 매 순간 숙제해! 너 숙제 안하면 성적 내려가. 매 순간 우리는 가까운 환경에 알아서 기고 알아서 고개 숙이고요 먼 환경 교회 권력이라든지 그런 초월적 권력에 대해서 우리는 알아서 신앙있는 척을 하고 있는 천하의 바리새인이에요. 그게 바로 우리인 것을 ㅎㅎㅎ 웃으면서 마음껏 자유롭게 고백합시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말씀의 세계가 이렇게 성령을 통해서 다시 찾아올 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습니다. 예수님 시대가 끝난 줄 알았는데 본격적으로 성령을 통해서 종말 이후의 삶으로 허락해주셔서 이제는 자유롭고 마음 놓고 구애받지 않고 살게 하옵소서. 주님의 증인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