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강의

율법의 공격성

아빠와 함께 2022. 6. 21. 08:25

강남-누가복음 11장 42절 (율법의 공격성) 220607a-이근호 목사



누가복음 11장 37절 “예수께서 말씀하실 때에 한 바리새인이 자기와 함께 점심 잡수시기를 청하므로 들어가 앉으셨더니 잡수시기 전에 손 씻지 아니하심을 그 바리새인이 보고 이상히 여기는지라. 주께서 이르시되 너희 바리새인은 지금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나 너희 속에는 탐욕과 악독이 가득하도다”


초청 받아 놓고 초청한 자가 실컷 욕 얻어먹는 그 장면입니다. 그렇다면 인간이 과연 주님을 초청했는가. 아니면 주님이 그 인간을 만나줬는가. 분명히 해야 돼요. 바리새인은 예수님을 초청했다고 주장하는데 예수님은 의도적으로 그 초청에 응하면서 그들의 속내를 완전히 뒤집어 버리지요.


주님의 그 말씀에 오늘 본문 11장 끝까지 나오는 그 내용 바탕에 들어 있는 그 뜻은 이겁니다. ‘네가 거기 있는 것이 불가능하다.’ 바리새인들은 지금 율법을 마주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율법의 완성자와 마주하고 있어요.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율법의 완성자와 마주하고 있는 게 아니고 나는 여기 있고 예수 당신은 저기 있다. 둘 다 있다고 이야기하는 거에요. 그런데 예수님은 율법의 완성자입니다. 율법을 주시는 분이고 또 완성자거든요. 율법 완성 앞에서 인간은 거기 존재할 수가 없어요.


뭘 존재를 해야 나쁘다 좋다가 이게 되는데 아예 존재할 수 없는 자들이 인간입니다. 그런데 아직까지는 지금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시기 전까지이기 때문에 예수님의 십자가로서 완성을 다 보이시기 전이기 때문에 그들은 일시적으로 한시적으로 율법도 있고 그들도 있는 그런 형편에 있어요.


그러나 나중에는 율법만 있고 인간은 그 앞에서 사라져야 됩니다. 법만 있고. 법만 있고 인간은 사라져야 한다. 이 법, 법은 언어로 되어 있습니다. 이유가 뭐냐? 언어가 있어야 존재 있음은 집을 갖는다. 언어는 존재의 house, 집이기 때문에. 말씀 안에, 말씀이 있어야 거기서 새로운 피조물, 새로운 인간을 거기서 새로 만들어집니다.


그래서 말씀이 없는 것은 말씀 밖에 있는 것은 주님께서는 있음으로 간주하지 않고 사라져야 돼요. 누구 면전에서? 진정한 있음, 예수님 앞에서 사라져야 되요. 면전 앞에서 사라져야 돼요. 그곳을 지옥이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지옥은 예수님이 없는 곳이 지옥이에요. 요즘 세상은 예수 안 믿어도 잘 살고 코로나 풀렸다고 난리도 아니지요. 지옥입니다.


예수님 없어도 사는데 전혀 지장 없고 오히려 반대죠. 예수님 있음으로 사는데 지장 있다고 느껴지는 그것이 오늘날 사람들의 의식입니다. 그런 사람에게 하나님의 말씀 예수님의 말씀 율법의 완성인 복음을 전해버리면 그들은 복음이 들려지는 곳을 피해서 천리만리 다 도망치고 없어요. 다 도망가 버립니다.


심지어 복음이 없어도 교회 성당 나오지도 않지요. 현재 천주교 신자들의 성당 미사 참여율은 8.6%입니다. 8.6%. 10%도 안 된다는 거에요. 10명 중에 한 명만 미사에 참석한다는 거에요. 완전히 유럽식이에요. 유럽 스타일. 앞으로 교회도 그렇게 되지요. 유럽 스타일.


토트넘 축구를 언제 하느냐? 일요일 날 하거든요. 일요일 날 하는데 아침부터 와가지고 표 사고 앉아있는데 교회는 언제 가는데. 영국 사람들은 교회 갈 수 없어요. 왜? 토트넘 손흥민 축구하는 거 봐야 하기 때문에. 교회 갈 수가 없습니다. 독일도 마찬가지고. 분데스리가. 미국도 마찬가지고. 야구.


그래서 인간이 생각하는 그 스케줄이라고 하는 것은 내가 여기 있다고 여기기 때문에 스케줄이 나오는 거에요. 인간은 한 번도 내가 있을 이유가 없다는 생각을 인간은 해보지를 않습니다. 내가 왜 있지? 이거 여러분 물어본 적 있습니까? 내가 왜 있지? 내가 왜 여기서 나와?


그것은 사람은 살만큼 살다가 수명 다 되면 죽는다고 생각하는데 오늘 본문 11장 50절에 보면 “창세 이후로 흘린 모든 선지자의 피를 이 세대가 담당하되 곧 아벨의 피로부터 제단과 성전 사이에서 죽임을 당한 사가랴의 피까지 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과연 이 세대가 담당하리라” 이렇게 되어있지요.


여기에 두 사람 등장합니다. 51절 아벨 나오지요? 또 한 사람 나옵니다. 사가랴. 이 두 사람은 사라진 사람입니다. 사라진 사람이에요. 무엇 때문에 사라진 사람이냐 하면은 하나님이 받으시는 제사 때문에 사라진 사람이에요.


그럼 이 사람들 이 땅에서 사라지게 한 이유가 뭐냐? 율법 때문에 사라진 거에요. 율법 때문에 사라지면 이들은 사라지고 그 현장에 율법의 완성만 덩그러니 남고. 그러면 덩그러니 남은 율법의 완성은 하나님의 제사로서 받으시고. 예배로 받으시고. 끝.


그러면 여기서 아벨과 사가랴는 소모품. 무슨 소모품? 율법을 완성시키는데 필요한 불쏘시개, 원료. 소모되는 원료와 같은 존재. 이럴 때 인간은 율법과 관련 있다 이렇게 이해되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율법이라는 은혜가 있으면 그 사람도 율법의 세계에 완성의 세계에 그 사람도 함께 있을 것입니다. ‘임마누엘’.


다시 말씀 드리겠습니다. 인간은 ‘있다’고 한다는 것은 아직 율법의 완성이 되지 않기 때문에 한시적으로 있는 것이고요 나중에 율법의 완성이 되면 인간은 진정한 ‘있음’, 예수님이죠. 율법의 완성자부터 ‘있다’가 성립돼요.


그 있음의 세계에 영원히 합류하는 것을 천국생활이라고 하고 예수님의 면전에서 사라지는 것을 지옥이라고 이야기하는 거에요. 기준은 인간이 아니에요. 인간존재가 아니고 그 귀한 그 거룩한 율법 완성은 누가 이루었느냐? 율법 완성은 어떻게 이루어졌느냐? 다 완성됐느냐? 그게 핵심에요. 그게 핵심. ‘나’라는 존재 이전에 언어, 주의 말씀이 우선 되는 거에요.


그래서 우리는 나의 있음을 이상하게 봐야 됩니다. 저 여기 있습니다 하지 말고 왜 제가 여기 있는 겁니까? 물으신다면 아벨과 사가랴의 운명처럼 너는 율법의 완성 복음을 위해서 너는 아직은 이 땅에서 살아야 돼. 그런 응답을 마땅히 받아야 되겠지요.


하나의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마태복음 19장 24절. 두 개의 사물이 나와요. 하나는 뭐냐 하면은 하나는 바늘구멍 나오고 하나는 낙타가 나와요. 약대, 낙타. 바늘구멍이 낙타의 통과를 허락하지 않습니다. 차단합니다. 바늘구멍이 낙타의 통과를 차단함으로서 거기에 천국이 수립됩니다.


그러면 낙타가 바늘구멍 들어가는 방법은 위주가 천국을 수립하는 위주이기 때문에 낙타가 바늘구멍 들어가는 방법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천국은 이걸 그 가는 방법이 없어야 성립하는 것이 천국이기 때문에. 그래서 천국 입장에서는 당연한 거에요. 낙타가 바늘구멍 안에 통과 못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고 또 그래야만 되는 거죠.


질문 자체가 “어떻게 낙타가 바늘구멍 들어갑니까” 라는 질문을 하면 안돼요. 천국을 그러면 어떻게 들어갑니까 이건 되는데 자꾸 낙타 입장에서 천국 갈려고 하면 안되죠. 그러면 천국 어떻게 들어가면 됩니까? 입장을 낙타 입장에서 바늘구멍 입장으로 바꾸면 되죠. 참 쉽죠? 역할을 바늘구멍 하면 되는 거에요. 뭐냐 하면은 ‘너는 이제부터 바늘구멍 역할 해.’


다시 말해서 어떤 인간도 천국에 못 간다는 사실을 이제부터 발견하는 사람으로서 자기 역할을 다하는 겁니다. 어떤 사람도 천국에 가지를 못한다. 심지어 죽어서도 가지를 못하죠. 그렇다면 천국은 바늘구멍과 낙타를 통해서 천국이 만들어져요. 그러면 천국에 바늘구멍 못가는 낙타 없이는 천국은 수립되지 않는 겁니다.


왜 주님께서 이 말씀을 하셨느냐 하면은 천국이 될려면 율법이 있어야 되고 율법이 율법답게 될려면 지옥이 있어야 돼요. 저주 받는 집단이 있어야 돼요. 집단체. 저주받는 군집체. 저주 받을 군집체. 집단이죠. 그런 집단이 있어줘야 돼요. 왜냐하면 율법은 저주받는 쪽이 없으면 율법이 주어지지 않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율법이 주어진 것은 저주 받게 하기 위해서 주어진 거죠.


그렇다면 하나님 왜 천지를 창조했는가. 창조했다는 말은 말씀으로 왜 사람을 존재케 하는가. 천지를 창조해 놓고 생긴 게 있잖아요. 해와 달, 별, 낙타 있잖아요. 그걸 전부 다 지워버리기 위해서. delete. 지워버리기 위해서 만드신 거에요. 없애기 위해서.


이렇게 지우개는 왜 있습니까? 지워버리기 위해서. 이 지워버림으로서 뭐가 등장하느냐. 지우는 주체가 등장하지요. 지우개를 갖고 있는 주체가 등장합니다. 누가 지우느냐? 지우는 분이 누구냐? 율법을 가진 분이 지우지요. 완성한 분이 지웁니다. 그 분만이 ‘있음’이 돼요. 그분만이 언어가 되고. 주님의 그 완성된 언어의 혜택을 입는 자가 바로 주님과 영원히 사는 천국 백성이 되는 겁니다.


그것을 오늘 유투브 동영상 첫 번째 시간에. 다시 말씀드리면 우리가 언약맨이다. ‘언약맨’. 노아만 노아 언약을 받는 게 아니에요. 성도가 오늘날 언약맨입니다. 십자가 언약을 받았기 때문에 그걸 증거하면 돼요. “나 성도인데 할 일이 없어” 이러지 마세요. 할 일 있어요.


언약을 받은 사람은 아브라함은 언약을 전해야 돼요. 야곱도 그렇고. 오늘날 우리는 마지막 언약 새 언약을 받았기 때문에 새 언약을 증거하면 되는 겁니다. “뭐 할 일 없습니다.” 이러지 마세요. 언약이 뭐냐 하면은 하늘나라의 언어에요. 말씀이 되겠습니다.


사람이 있고 말씀이 있는 게 아니고 말씀이 먼저 있고 그 말씀의 효과, 말씀의 진리, 그 진리를 위해서 진리를 증거하기 위해서 진리 아닌 것을 삭제해나가는 그 작업을 주님께서 하셨죠. 그래서 여기 누가복음 11장에 오늘 본문에 바리새인이 예수님을 초청했지만 초청 받은 예수님 입에서 나오는 것은 그들의 존재를 제거할만한 정당성, 이유 그것이 바로 예수님 쪽에서 나오는 겁니다.


39절에 “주께서 이르시되 너희 바리새인은 지금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나 너희 속에는 탐욕과 악독이 가득하도다” 뭐 개과천선하라는 이야기입니까? 그런 거 아니에요. 사람 정신 차리면 새 인간 된다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닙니다.


왜냐 하면은 42절에 보면 “화 있을진저” 라고 단언해버리죠. 단언한 거에요. 화라는 것은 저주고요. 너희들은 저주를 위해서 이 땅에 태어났다. 저주를 위해서. 우리는 이 땅에 역사적 사명을 가지고 이 땅에 태어났습니다. 국민교육헌장 외우듯이 이 바리새인들은 저주 받기 위해서 이 땅에 태어난 거에요. 그리고 그들 역할을 저주 받을 이유를 펑펑 쏟아내야 될게 아니겠습니까.


그중에 하나가 뭐냐 하면은 십일조 드린다고 박하와 운향과 채소의 십일조를 드린 거에요. 십일조를. 자, 십일조는 율법에 속합니다. 그들은 건들지 말아야 될 것을 건드려 버렸어요. 율법을 주신 이유가 뭐라고 했습니까? 저주 받게 하기 위해서. 저주 받는 자는 주님이 계신 나라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지워져야 돼요. 없어져야 돼요.


낙타는 바늘구멍으로 통과할 수가 없습니다. 그들은 바리새인들은 지금 뭘 건드렸느냐? 감히 십일조를 건드렸어요. 십일조의 율법을 십일조라는 율법이 자기 안에 들어오도록 한 겁니다. 욕망은 대상이 아니라 주체 안으로 들어옵니다. 주체 안으로. 그러니까 이 욕망을 자극하는 게 뭐냐 하면은 율법이라는 거죠.


지금 바리새인들은 십일조를 대상으로 본거에요. 내가 여기 있고 십일조를 지키면 하나님의 약속대로 율법을 지키면 그 복이 나의 일부로서 내 안에 합류한다 이렇게 생각하는 겁니다. 바리새인들이 한 거에요. 그러나 율법은 욕망을 자극해서 일으키고요.


아시는 분은 다 아시죠. 로마서 7장, 선한 것이 율법은 선해도 너무 선해요. 너무. 그냥 너무 선하기 때문에 율법 앞에서 모든 것은 너무 악해요. 왜냐하면 율법이 너무 선하기 때문에. 그 선을 따라 붙일 속도를 낼 수 있는 대상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너무 선해서.


아무도 율법을 따라서 계속 “율법대로 지켰습니다 율법대로 지켰습니다 헥헥” 나중에 숨 차가지고 “아이고 너무 지쳤습니다 더는 못하겠습니다” 하고 나자빠지게 되지요. 율법이 뭐해 “빨리 율법대로 해야지!” 하면 “아휴 그만 그만 그만.” 따라 붙일 역량은 없습니다. 율법은 그 정도로 너무 선해요. 율법을 지킨 사람은 이 세상에 단 한사람도 없습니다. 너무 선해서.


그리고 뿐만 아니고 율법이 계속해서 추가가 돼요. 과거 율법 말고, 계속 추가가 되가지고 지켰다고 했는데 그럼 이거는?! 하고 새로운 율법이 들어오는 거에요. 어떤 사람이 너무나 음식을 잘 먹기 때문에 주는 족족 음식을 다 먹지요. 사람들이 계속 줬습니다. 이제 그만 더는 들어갈 데 없습니다. 그것처럼 뒤로 나자빠지는 것처럼 율법의 완성은 모든 사람을 피해갑니다. 한 사람만 겨냥해서 율법의 완성을 줍니다.


율법이 너무 선하기 때문에 너무 선한 그 분에게 응집이 돼요. 마치 빛이 볼록렌즈에 빛이 한 초점에 모이는 것처럼. 율법은 줄기차게 한분을 겨냥하여 쏜살같이 질주해서 그 분에게 다 집합이 돼요. 모이게 되어있다고요. 그 모이는 과정에서 모든 인간을 제쳐버립니다. 너 아니야 너 아니야 너 아니야 제껴버리죠. 그냥 아닙니까? 너는 저주 받아 저주 받아 저주받아. 이렇게 모이는 거에요.


그러면 그들은 왜 율법을 못 지키느냐? 율법이 욕망을 하게 되면 그 인간이 지켰다는 그 인간이 율법한테 자극된 인간 속에 있는 숨어있는 욕망이 있고 욕망이 뭐냐 욕심이죠. 욕심이 있고 욕심은 율법이 와서 욕심을 건드려버리면 그 욕심은 주체 안으로 들어가서 주체의 본질을 구성하게 돼요. 욕심으로 가득 찬 뭐가 되느냐 하면은 바리새인이 되는 겁니다. 욕심으로 점점 더 풍선에 바람 넣으면 나중에 뽈록해져서 터지는 것처럼. 평생 욕심으로 가득 차있습니다.


제가 어느 강의에서 그런 이야기했는지 기억이 안 납니다만 어린 아이의 특징은 자기 옆에 같은 애가 죽어도 죽음의 의미를 모른다고요. 그걸 자연스럽게 본다고. 자연스럽게. 애가 죽었더라도 나는 장난감 가지고 놀면 그만이에요. 죽음이 그렇게 심각하지 않고 자연스러워요. 죽음이라는 것을 몰라요. 어린 아이는 언어를 모르기 때문에. 죽음이라는 그 단어를 몰라요.


그런데 욕심으로 가득 찬 인간은 누구냐? 나이 많은 사람들이에요. 꼴통들. 꼰대들. 고집불통. 넉넉하게 잡읍시다. 90이상. 이건 뭐 말릴 수도 없어요. 말릴 수도 없어. 어떤 말도 통하지를 않습니다. 그때까지 사시는 게 저주 같애. 그냥 곱게 사는 게 아니고 욕심이 본인을 그 나이만큼 올리도록 만드는 거에요. 욕심이. 삶에 대한 욕심. 집착.


이만큼 살았으니 그만 살겠다가 아니라 말은 그렇게 하지요. 이만큼 살았는데 더 살아야지. 그렇게 되는 거에요. 어느 누구도 자기의 죽음 앞에서 여유를 가질 인간은 아무도 없습니다. 죽음 앞에서. 그래서 돈 앞에서 바들바들 떠는 거에요.


그렇다면 인간의 욕망의 주체가 들어오거든요. 그럼 뭘 하느냐 하면은 인간이라는 것은 없고 욕망이 욕심이 죄가 인간을 갖고 논다는 사실을 율법을 통해서 드디어 이게 밝혀지기 시작합니다. 그렇다면 이런 결론이에요. 율법은 세상을 영적 문제로 전환시킨다. 율법이 주어짐으로 말미암아 윤리 도덕의 문제가 아니라 근원적인 인간의 근원적인 본질 자체가 이게 악마냐 아니면 주님 쪽이냐.


이게 주님과 반대되는 성향을 갖고 있느냐? 주님과 동일한 안목과 성향을 갖고 있는가. 그 구분을 가늠하는 그러한 전쟁터로 전환시킵니다. 율법은. 만약에 율법을 기피해버리면 그 사람은 사람 사는 것처럼 살아요. 윤리고 도덕이고. 윤리 도덕이라고 하는 것은 내가 내 욕심과 욕망을 조정할 능력이 있다고 여기는 거에요.


죄와 욕망과 욕심은 내가 알아서 조절이 가능하다고 보는 거에요. 그러면 욕심과 욕망과 죄가 나를 지배하는 것이 아니고 내가 죄를 지배하기 때문에 나는 절대로 죽으면 안돼요. 내가 죽으면 내 죄는 누가 다스립니까? 따라서 내가 기어이 살아있어야 과거에 지은 죄를 지금 선한 것으로 만회해서 괜찮은 인간으로 생애를 끝낼 수 있다고 이렇게 생각하는 거에요.


그래서 90 넘어도 송해도 안 죽을려고 그렇게 애 쓰는 이유가 생애 거의 끝까지 갈 때까지 내신 성적을 올리고 죽겠다는 거에요. 내신 성적을. 휴전 앞두고 전쟁이 치열한 이유는 휴전되면 그걸로 영토가 결정되기 때문에 치열한 백마고지 전투가 치열하게 이루어지는 것처럼 지금도 우크라이나 전쟁 있잖아요. 협상을 앞두고 지금 치열하게 하잖아요.


지금 이 순간 stop! 그때가 내 본 모습인 것을. 선함의 발전을 도모하는 거에요. 선함의 발전. 그런데 여기 누가복음 11장에 보니까 네 속에 더러운 그것이 있기 때문에 바로 손을 씻느냐 안 씻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손을 씻음으로 말미암아 무엇을 가리는 셈이 돼요? 속에 더러운 것이 있음을 가리는 그런 욕망의 현상을 드러낸다고 예수님은 보시는 거에요.


이 점이 상당히 어렵습니다만은 알기 쉽도록 노력해서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마태복음 27장 24절에 보면 빌라도가 손을 씻습니다. 왜 빌라도가 손을 씻지요? 이거 미신 아닙니까? 왜 빌라도가 손을 씻지요? 빌라도한테 손 씻으라고 로마황제가 빌라도한테 명령했습니까? 아니면 유대인들이 요구했습니까? 이거는 자발적이죠.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내가 손 씻고 싶어. 왜? 복음 몰라. 안 씻으면 안 될 거 같애. 왜? 몰라. 모르는 게 아니에요. 빌라도 마음속에 있는 그것이 빌라도의 주인이기 때문에 그래요. 빌라도는 자기 속의 욕망의 지배를 받아서 자기 욕망이 만들어 낸 그 갈라진 그 균열을 어디 다른 대책이 없어서 손 씻는 걸로 그 간격을 없앨려고 시도한 거에요. 저주와 복의 간격을.


왜 빌라도가 손을 씻느냐. 왜 빌라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자기가 제일 높은 사람인데 누구한테 명령 받아요. 본인이 한 거에요. 시키지도 않는데 왜 손을 씻는가? 이상하지 않습니까? 왜 손 씻어요? 자기 내부 틈바구니에서 저주가 올라왔어요. 저주가 올라와서 손 씻는 거에요. 그 저주에서 내가 낼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은 그래도 저는 깨끗하게 했습니다 라는 누구한테 변명? 본인 내부한테 본인이 변명하라고 하는 거에요.


그럼 누가 대장이에요? 본인 빌라도 자아가 대장이에요. 자아보다 더 쎈 게 본디오 빌라도를 작동하고 있습니다. 작용하고 있습니다. 이거는 마치 느부갓네살이 자기가 제국의 총수고 왕인데도 불구하고 어젯밤에 내가 무슨 꿈 꿨는지 알아내라고 애꿎은 부하들한테 닦달 내는 것하고 똑같은 거에요. 본인이 견딜 수가 없어요. 본인이.


내가 내 내부와 협상이 안돼요. 내 내부와 타협이 안돼요. 내 내부의 어떤 힘이 나를 괴롭히는데 대책이 없는 거에요. 나의 꿈이 나를 지배하고 있어요. 나는 거기 휘둘리고 있고. 인생이 뭐 이런 게 다 있어. 지금 느부갓네살은 그렇게 최고 높은 직위에 있는 자가 세상에 무서울 거 없는 그 사람이 사람보다 더 무서운 게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 겁니다.


그 말은 사람은 그 무서움 앞에서 약한 존재라는 사실을 발견하지요. 약한 존재. 이게 미신이라도 좋고 이게 사주팔자라도 좋으니 뭔가 손 씻듯이 궁합이라도 봐야 되고 타로 점이라도 뭐 해야 되겠어. 인간은. 교회 새벽 제단을 가서 엎드리던지 뭘 해결을 해야지 도대체 내가 견딜 수가 없어. 내가 미치겠어.


미친다는 말은 무슨 말이냐 하면은 현실에 내가 일치감이 없어 붕 뜬 상태를 미쳤다고 합니다. 현실의 다가가지 못하는 현실에 튕겨져 나오는 자아상이 미친 거에요. 성도는 그런 의미에서 좋게 미친 거에요. 왜 성도가 천국의 백성이 왜 즐겁게 미쳤는가? 고맙게 미쳤는가?


그 이유는 이렇습니다. 내가 행하던 내가 아니 행하던 은혜를 주시니까, 이게 얼마나 놀라운 일이에요. 내가 행하던 행하지 않던, 내가 실수를 하던 뭘 하던 상관없이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의 뭉치다. 은혜의 뭉치. 솜뭉치. 솜사탕 알지요? 그게 전부 다 솜이에요. 솜뭉치에요. 은혜의 뭉치. 이것은 말씀의 완성 주님의 자기 은혜의 확산, 확대에요. 오늘 한 첫 번째 동영상 부분과 전체 참고하시면 됩니다.


그래서 성도는 뭐냐 하면은 주님의 피부 조직이라서 주님 계신 곳에 성도는 자동적으로 주님의 피부 조직으로 피부 세포로 같이 거기에 현장에 있게 되는 거에요. 그게 바로 ‘있음’이에요. ‘있음’이라는 것은 혼자 있는걸 있음으로 쳐주지 않습니다. 주님과 함께 있을 때만 있음이 되고 그 있음은 주님이 다 이루신 거룩과 의를 증거하는 용도로 성도는 현장에 그 시간과 공간에 존재하는 거에요.


그래서 성도는 뭐냐? 불신자는 뭐냐? 불신자는 생각한다 ‘나는 생각한다’ 이렇게 되잖아요. 성도는 생각한다 ‘주님이 생각한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주인공이 주님. 내 생각은 주님의 생각에 의해서 발생된 생각이고 불신자는 내가 생각하니까 내가 생각한다는 거에요.


그래서 생각만 하면 되는데 건방지게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이렇게 되지요. ‘내가 여기 있다’는 거에요. 얼마나 불안했으면 ‘내가 있다’를 이런 식으로 폐쇄적으로 증명하겠어요. 그러니까 데카르트라는 철학자가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말은 내가 존재하는 이유에 대해서 자기가 마땅한 이유가 없는 거에요.


내가 왜 있는지 이 세상에 왜 태어났는지 이유를 모르는 거에요. 이유는 모르고 그냥 존재하는 방법만 제시하면서 그걸 이유로 억지로 붙이는 거에요. 나는 생각하잖아. 생각하니까 여기 있잖아. 내가 다른 건 다 부정해도 생각하는 나는 있으니까 나는 있는 거 맞다.


여러분 내가 여기 있어버리면 뭐가 문제냐 하면은요 내가 여기 있다 이렇게 되어버리면 너만 거기 있냐? 이게 또 나온다고요. 너만 거기 있는 게 아니야. 민코프스키 좌표라는 게 있습니다. 수학자인데 민코프스키 좌표라는 게 이게 물리학에 나오는데 이게 무슨 이야기냐 하면은 아주 극단적인 불신의 세계를 과학적으로 잘 설명한 사람이에요. ‘극단적인 불신의 세계’.


점은 0차원이에요. 점은 차원적으로 봤을 때 점은 0차원이거든요. 여러분들 굳이 우리가 알아야 됩니까 이렇게 생각하는데 한번 들어보세요. 아 불신의 세계가 이렇구나. 이래서 사람들이 자기 주장하는구나 알게 될 거에요. 점은 차원이 없어 0차원이에요. 선은 1차원입니다.


그러면 선이 쌓이면 여기 면적이 되거든요. 면적은 2차원이에요. 이 면적이 이렇게 쌓이면 이건 뭐냐? 공간이 생기죠. 공간이 이게 3차원입니다. 3차원에서는 뭐가 되느냐 하면은 3차원 세계에서는 ‘나 여기 있다’ 나 여기 있다는 것은 X,Y,Z 세가지 좌표로 표시를 하는 거에요. 나 여기 있고 너는 여기 있다. 따로 있다.


문제는 뭐냐? 우리는 같은 공간에 있기 때문에 같은 시간에 속해 있다. 지금 여태껏 인간의 과학은 이렇게 생각했던 거에요. 공간은 달랐어도 네 시간과 내 시간은 동일하게 있다 이렇게 보는 거에요. 프랑스의 에펠탑 그 시간이나 뉴욕에 있는 시간이나 동일한 같은 시간에 있다 이렇게 보는 겁니다.


그런데 민코프스키 좌표에 의하면 이게 시간이 1차원 3차원 차원에 들어가요. 시간 차원에 들어간다고요. X,Y,Z 전부 다 길이거든요. 시간을 길이로 바꿀라 하면은 빛의 절대 속도, 절대 속도니까 변함이 없는 절대 속도 1초에 30만km를 곱해버리면 시간이 뭐로 바뀌냐 하면은 길이로 바뀌어가지고 같이 묶을 수가 있어요.


3차원에서는 시간이 없으니까 앞에 ict해서 X,Y,Z,해서 이게 하나의 집합이 돼서 4차원 되는데 이거는 뭘 의미하느냐 하면은 시간이 이렇게 같이 돌아버리면 지금 내가 쓸데없는 이야기를 하는 이유가 여기 있어요. 이게 뭐냐 하면은 좌표, 이 공간 시간 3차원 이렇게 좌표로 해 놓으면 이 사람이 어디 있든지 간에 나는 내 임의의 시간일 뿐이다.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은 나한테는 과거가 되지만 남한테는 미래가 되고 남한테는 현재가 된다 이 말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죽는다 할지라도 다른 ‘나’가 다른 시간대에 살아있을 수가 있다는 거에요. 인간마다 동일한 시간이 아니고 인간마다 느끼는 미래, 과거, 현재가 각각 따로 있다는 거에요.


그러니까 이건 뭐냐 하면은 10명 있으면 10명 다 신이에요. 전부 다. 제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현대 생성 원리의 세계에서는 하나 하나가 신이에요. 하나 하나가. 네 시간하고 내 시간은 달라요. 나는 특별한 나만의 절대 시간을 내가 갖고 있어요. 그러니 개인주의가 활기를 치치요. 과학적으로 개인주의가 정당화되고 만 거에요. 나는 죽어도 영원히 산다 이런 게 막 활기 치는 과학적으로 증명이 된 겁니다.


그런데 성경은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성경은 인간에게는 시간이라는 게 인간 시간이라는 게 아예 없어요. 다 무슨 시간이냐? 주님이 자기 일을 하는 자기 시간이에요. 왜? 시간이 어디로 합류를 하느냐 하면은 주님 쪽으로 쪼르르 달려가서 시간과 공간을 전부 다 주님께서 훅! 진공청소기로 다 빨아 땡기기 때문에 그래요. 공간, 이 세상, 피조세계.


피조세계 시간과 공간을 다 빨아 당기기 때문에 주님이 완성이 되어버리면 그때는 시간도 없고 공간도 없고 아무것도 없지요 뭐. 주님의 세계만 있고 나머지 우리가 알고 있는 이 땅과 이 하늘 그 모든 것도 전부 다 소멸하고 없습니다. 다 삭제됩니다.


아까 처음에 했지요. 주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네가 존재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네가 알아라. 너는 있을 이유가 없어. 네가 왜 있느냐? 내게서 나오는 그 율법이 어떤 것인지를 알기 위해서 한시적으로 우리가 존재하는 거에요. 이 바리새인들아. 율법이 죄를 향하여 저주하기 위해서 있단 말이죠.


그래서 저주하는 용도로 바리새인들이 있는 것도 모르고 오늘 본문에 11장 37절에 바리새인이 누굴 초청했습니까? 예수님을 초청한 거에요. 있는 내가 있는 당신을 초청하겠다는 거에요. 초청해서 욕 바가지 바가지 얻어먹었어요.


예수님이 있는 것은 있음이 되지만 네가 있는 것은 있다는 것이 안 되도록 제거해줄게. 뭘로? 율법으로. 우리가 율법을 지키면 되잖아요. 율법은 네 속에 들어갔어. 네 속에 들어가서 네가 주인공이 아니고 예수님을 대적하는 그 죄가 너의 본성이라는 사실을 까발려주는 것이 율법의 기능입니다. 그래서 42절에 “화 있을진저” 라고 이야기한 거에요.


그러면 십일조 이야기, 한국 교회가 제일 좋아하는 구절. 십일조 이야기 한번 봅시다. 42절. “화 있을진저 너희 바리새인이여 너희가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의 십일조는 드리되 공의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버리는도다” 그 다음에 제일 좋아하는 구절이 한국 교회가 제일 좋아하는 구절이에요.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한다 여기에 완전히 빠져버렸어요. 저것도. 십자가 복음도 좋지만 십일조는 반드시 이것도 해야 돼. 왜? 주의 명령이니까. 참 바보도 아니고 명령은 우리를 저주케 하는 것이 명령이에요.


저 십일조 하니까 살려주세요 그런 거 없어요. 십일조 했냐? 죽여버려라 이 인간. 이건 건들지 말아야 될 것을 건드려버렸어요. 네가 왜 율법을 지켜 왜 네가. 웃기는 인간 네가 뭔데 율법을 지켜. 율법은 저주 대상 만들기 위해서 하는 건데. 네가 왜 율법 가지고 스스로 자기를 긍정해서 변호할려고 나서느냐 이 말이죠.


여기서 주님께서는 십일조의 완성을 미리 이야기했어요. 그게 뭐냐 하면은 공의와 하나님의 대한 사랑을 버리는도다. 이것을 세 가지로 되어있는 게 마태복음 23장입니다. 마태복음 23장 23절에 보면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 의와 긍휼과 믿음. 세 가지 되어 있지요.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여기서 버리지 말아야 한다는 이 원어 단어가 헬라어 단어가 누가복음하고 마태복음하고 달라요. 희한해. 같은 단어를 사용한 게 아닙니다. 그걸 좀 설명드리면 이렇습니다. 골치 안 아프게 설명해드릴게요. 쉽게. 여기 누가복음 11장 42절 “이것도 행하고”. 이것이라고 하는 것은 공의와 의를 말합니다. 이 공의와 의라고 하는 것은 율법의 완성 곧 예수님을 이야기해요.


예수님만 행합니다. 다른 사람은 행할 수가 없어요. 행한다는 말은 본인이 팔 다리가 움직인다고 행한다고 말하는 게 아니고 율법이 춤을 춰야 행함이 돼요. 말씀이 말씀대로 이렇게 활동해야 행함이 돼요. 왜냐 하면은 있음은 존재는 언어는 존재의 집이기 때문에.


말씀의 집이 존재거든요. 말씀이 먼저 있고 존재는 나중에 생겼어요. 빛이 있으라 라는 말씀이 있음에 뭐가 생겼습니까? 빛이 생겼잖아요. 탁 다가오지요. 사람은 태어나서 이름 짓지만 주님은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고 먼저 없는데 불러요.


야곱아 너는 사랑을 받아야 된다. 야곱이 있었습니까? 없었습니까? 야곱이 아직 태어나기 전에 야곱은 사랑하기로 이미 선언을 해버렸어요. 그 말씀을 이루기 위해서 야곱은 불임의 엄마로부터 쌍둥이의 하나로서 이 땅에 태어나야 됩니다.


태어날 때 짝을 통해서 태어나요. 저주가 없으면 사랑의 의미가 없으니까요. 짝이 있어야 되니까. 저주받을 쌍둥이가 나와야 되는데 이름이 누구냐? 에서죠. 에서는 아무리 애써 봐도 저주입니다. 그 이야기 10분 뒤에 하겠습니다.

 

강남-누가복음 11장 42절 (율법의 공격성) 220607b-이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 하겠습니다. 행한다는 것은 말씀이 증거 될 때만 하나님이 행함으로 인정해주는 겁니다. 말씀이 증거 되는 방법은 말씀을 지키는 것도 말씀의 행함이고요 말씀을 안 지켰다고 지적하는 것도 행함에 속하는 거에요. 왜냐하면 율법의 기능은 축복과 저주 두 개 다 있어요. 행하면 복이고 안 행하면 저주죠.


그 율법을 행함이 율법을 아는 쪽을 저주하는 바탕이 되고 이유가 되고 근거가 되는 겁니다. “율법을 행하라고 줬는데 왜 안 행했어” 할 때 저주를 발생시키기 위해서 그렇게 필히 율법이 다가오게 되어있어요. 인간의 주체는 율법에 다 놀아나는 겁니다. 추궁당하고 궁지에 몰리는 거에요.


그걸 로마서에서는 인간의 율법 없는 인간에게는 양심이 율법 기능을 한다 이렇게 되어있어요. 그 율법의 마지막은 로마서 2장에 보면 “진노의 날”이에요. 인간은 자기 나름대로 선택한다 하지만 항상 인간의 모든 선택은 극단적 선택입니다. ‘극단적 선택’.


주님께서 어떻게 몰아넣느냐 하면은 포카 할 때 카드가 몇 장입니까? 장 수가. 여러분 잘 모르는 카드 말고 화투로 합시다. 화투는 48장이잖아요. 48장 가지고 너 카드 어느 것 할래 이러는 게 아니고 주님께서 몰아넣는 것은 마지막 카드를 한 장만 남기고 너 어느 것 선택할래 이렇게 이야기해요. 선택할 다른 대안이 만들어 놓고 결국 그걸 선택하게 만드는 것이 주께서 궁지에 몰아넣는 방법이에요. 인생을 그렇게 몰아넣습니다. 율법이 그렇게 몰아넣어요. 율법이.


그래서 인간은 어쨌든 간에 나에게 양심이라는 것, 이방인에게는 양심이고 유대인들에게는 율법이죠. 율법이 나를 궁지로 몰아넣는 것을 어떻게 기피하기 위해서 자기는 많은 선택 중에 자기가 하나 택했다는 쪽으로 자기를 그런 식으로 증명하려고 애씁니다.


예를 들어서 만약에 어떤 카페가 있는데 남자가 앉아있다. 다른 사람이 말하기를 저 사람 저래 보여도 대단한 사람이야. 세상에 있는 팔천고지 십사자봉을 다 정복한 사람이다. 만약에 그렇게 이야기하면 그래서? 거기 왜 기어 올라가는데? 왜 기어 올라가요? 본인의 선택이야. 본인의 선택이 아니고 복을 피하는 방식이에요 그게. 율법을 피하는 방식이 산에 기어 올라가는 거에요.


어떤 직업을 가져도 율법과 십자가 들이대면 도망 다 가버려요. 나는 율법과 복음은 모르지만 나는 성공했노라고 자랑스럽다. 그거는 율법을 피하는 행위입니다. 곧 율법의 행위에요. 율법을 피해서 천리만길 도망치는 자기의 양심의 책망을 피해서 그걸 덮기 위해서 다른 걸로 성공하는 것을 아까 이야기한 본디오 빌라도가 세숫대야에 손 씻는 행위에요.


나 일류에 기여했잖아! 이런 거에요. 일류에 기여했잖아요. 크게 봉사했잖아. 내가 삼성 재벌이여서 수십만 명을 가족들을 먹여 살렸잖아. 내 밑에 취직해서 월급 받고 다 먹여 살렸잖아. 이 정도 했으면 하늘에 있는 옥황상제든 하나님이든 아이고 훌륭하다 대단하다 네가 먹여 살렸구나 해가지고 설마 지옥에 보내겠어 이러고 있다 이 말이죠. 자기 이건희 아버지 죽을 때 신부 불러가지고 하나님 있나.


십일조는 어떻게 되느냐 하면은 41절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한다” 이 말은 의와 신과 인이 있으면 반드시 저것을 손 봐야 한다는 겁니다. 방치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왜? 화 있을진저 화. 저주가 왜 그들에게 주어져야 되는가? 율법이 손 보기 때문에 그래요.


십일조 하는 자는 자진해서 기름 짊어지고 불 속에 들어가는 겁니다. 타 죽어라. 저주의 불이 타 죽을려면 십일조 해. 의와 신이 있는데 뭐 때문에 십일조를 해요. 심보가 아주 더러운 심보에요. 더러운 심보. 화가 나요.


오빠가 서울에 가가지고 오빠 올 때 뭐 사옵니까? 오빠 생각 왜 하는 거에요? 오빠 올 때 뭐 사옵니까? 비단구두 사오지요. 비단구두 사왔으면 자기는 허름한 짚신 갖다버려야 될게 아닙니까. 이 비단구두를 갖다버려 버리는 거에요. 비단구두를. 그럼 비단구두가 가만히 있습니까? 오늘 손 보자. 오늘 좀 맞자, 이렇게 나오는 거에요.


그 뜻이 뭐냐? 행하는데 저들을 방치하지 말라. 용서하지 말라 하는 것이 마태복음에 나오는 원 뜻이에요. 이것 저것이라는 뜻은 원래 원어에 보면 이것 저것이 아니고 이것들과 저것들이라고 했어요. 이것들은 뭐냐? 의와 신과 인이고 저것들은 뭐냐? 박하와 근채 십일조 행위 그 마음을 저것들로 한 거에요.


그래서 이것들 했으면 완료가 완료다우면 미완료에 대해서 시비 걸어라 이 말입니다. 누가 누구한테 시비 건다? 정말 주님의 완료된 주님의 의가 들어왔으면 시비 대상이 누구에요? 본인이 시비 대상인거에요. 너 좀 맞자. 십자가로 의가 됐는데 너는 왜 십일조 해서 새삼스럽게 있는 의에 추가해서 의 하나 더 보탤려고 이러한 비 복음적인 행동을 하느냐? 너 저주 받아도 마땅하다 됐냐 이런 식인 거에요.


그래서 작은 권력이라는 p126부터 p130까지 십일조에 대해서 제가 지금 하는 이야기를 작은 권력이라는 제가 쓴 책에 보면 그렇게 나와 있습니다. 작은 권력, 집에서 한 권 씩은 다 있지요? 여기 보게 되게 되면 이렇게 되어있어요. 이것들을 행하고 저것들을 그냥 방치해서는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행하고가 아니라 이것들을 행했다면 필히 저것들이 저렇게 행하는 것이 마땅하냐고 물음을 던지는 거에요. 의와 신과 인이 완성됐는데. 십일조가 완성 됐거든요. 됐다면 어떻게 완성의 그 가치를 모독할 수 있는 행동을 할 수 있느냐 이 말입니다.


이것들 자체만으로 완성되었기에 그래서 저것들은 용납하지 말아야 된다는 거에요. 하지 말라가 아니라 우리는 육신이 있어가지고 육신은 자기 안에 그 법을 들어오게 되어 있어요. 왜? 우리에게는 선한 존재가 되려는 욕망이 있기 때문에 율법이 가만 있어도 율법이 들어오게 되어있어요. 뭐든지 행하게 되어있다고요. 행하라 해서 행하는 게 아니고 자동적으로 행하게 되어있어요. 그 행함을 네가 주시해봐라 이 말이죠.


129p 보면 의와 신과 인을 마음으로 표현하지 않고 행함으로 표현하는 이유는 이미 바리새인들이 자기들 십일조 행함으로 온전한 십일조를 구현했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이 말이죠. 바리새인들이 회향과 박하와 채소의 십일조를 행함으로서 그걸로 그들은 율법의 십일조가 더 이상 남김 없이 완성됐다고 여기는 거에요. 완성됐다고 여기는 거에요.


완성됨으로 여겼다면 주님의 말씀하신 의와 인과 신은 필요치 않아요. 그러니까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떠미는 겁니다. 가슴팍을 떠미는 거에요. “저리 가” 라고 떠미는 거에요. 그게 십일조 행함이에요. 내가 십일조 행한 나에게 나를 찬미하고 흐뭇해하고 장하다 여기면서 이 정도 하면 됐지요 하나님 앞에 자기 율법의 지킴으로서 그 십일조 지킴으로 나가고자 하는 그 길을 주님이 “여기 잠깐, 검문이 있겠습니다” 하고 막아서는 거에요.


“십일조 율법 어떻게 한다고요?” 하고 시비조로 나오는 거에요.. 시비조가 아니죠. 아예 “화 있을진저.” “저주 받아라 인간들아.” “의와 신과 인 그게 십일조의 완성이야.” 십일조의 완성이란 예수님의 행하심. 예수님의 일하심 이게 십일조입니다. 예수님의 일하심.


예수님의 일하심이 성도 안에 들어오게 되면 의와 신과 인이 춤을 추지요. 성도 안에서요. 춤을 춥니다. 제가 주일학교 설교하면서 이런 이야기했거든요. 술 먹는 인간은 자기가 술 먹는다고 생각하지만 나중에 술이 인간을 먹어버립니다. 그걸 술꾼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성도는 예수님 꾼이 되는데 자기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생각하는데 그게 아니고 주님이 안에 차지해버렸어요. 차 주인이 바뀌었어요. 차지해버리니까. 성도는 뭐냐? 예수님을 운반하는 술잔처럼 주님의 잔이 되는 거에요. 그래서 제가 노래 안부를 수가 없었어요. ‘찰랑 찰랑~~~찰랑대는’


성도는 주님의 의가 찰랑되는 자리에요. 좀 더 찰랑되면 막 넘치겠지요. 넘쳐도 괜찮아요. 또 죄가 있는 곳에 은혜가 넘치기 때문에 괜찮아요. 술 잔 특징이 유리로 되어있기 때문에 투명합니다. 자기 안에 그리스도의 용서하심이 있어야 돼요. 용서하심이 될려면 반드시 내가 무엇을 행해도 죄가 돼야 돼요. 죄 더 지으라는 말이 아니고 뭘 해도 이게 바리새인이 돼야 돼요.


율법을 내가 양심껏 행했던 것에 대해서 자신이 흐뭇해하는 것, 그 모습이 주님의 의와 신과 인이 들어와버리면 십자가 들어와버리면 이게 바로 죄구나. 나는 나로 인하여 내 행함으로 인하여 주의 행함을 모독하는 식으로 평생을 살아간다는 사실을 드러내야 되는 겁니다.


그래서 여기 “화 있을진저” 이렇게 이야기하지만 사실은 바리새인만 욕 얻어먹을게 아니고 모든 인간이 다 욕 얻어먹는 거지요. 그런데 이 바리새인들이 왜 욕을 얻어먹는가? 이걸 가지고 뭐냐 하면은 표상적 대표자라고 합니다. ‘표상적 대표자’.


어떤 모집단이 있는데 거기서 하나를 발췌해버릴 때 그 집단의 주체가 됩니다. S1 되고 나머지는 뭐가 되느냐. S1 바라보면서 자기는 뒤로 빠지잖아요. 자기가 대표자가 아니니까. 이거를 S2라고 해요. S2에는 뭐가 있는냐. 반드시 여기에 결여가 있고요.


결여, 모자람이 있고 이 모자람을 인간들은 견딜 수 없어서 내 흠집이 뭔가 텅 빈 것을 견딜 수 없어서 이걸 뭘로 채우느냐 하면은 나의 이상향으로 이상적 인물로 채웁니다. 그 인물의 후보감에 부처, 예수, 하나님, 여호와 다 들어있어요. 나의 결여, 모자람을 채우기 위해서 예수 이름을 도입해서 그걸 마저 채우는 거에요.


그래서 S1, 표상적 대표자와 일치시킬려 합니다. 이게 인간의 한계인데 이게 인간의 한계거든요. 한계인데 주님께서 인간의 한계로 누구를 뽑느냐? 바리새인을 뽑아서 누구하고 이야기하느냐? 바리새인하고 이야기해요. 그리고 누가 예수님을 죽이는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과 서기관들이 죽여요. 왜? 그들은 언어가 있으니까. 무슨 언어? 율법이라는 언어로 그들은 자기의 결여, 모자람을 율법으로 채우는 겁니다.


모세가 직접 하나님과 독대해서 말씀을 받았던 그 율법을 자신의 완전의 완전성, 온전함. 자신의 온전함을 율법을 가지고 온전함에 턱걸이하는 거에요. 주님은 온전함을 위해서 얼마나 고통을 많이 겪었던가. 그 가사가 생각나네. 이미 의와 신과 인은 완료에요. 완료. 완료가 완료 될려면 미완료를 살펴야 돼요. 미완료.


내속에 미완료가 어떤 어떤 것이 있었기에 주님의 행하심만이 율법의 십일조, 율법의 완성이 되는지를. 그것을 드러내는 겁니다. 그래서 십자가 지기 전에 항상 하라, 뭘 하라고 하는 것이 필수적으로 있어야 돼요. 왜냐하면 율법은 우리의 욕망을 자극해줘야 내 식대로 내 결여, 내 모자람을 채울려는 육신적인 그러한 노력이 들통 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인간의 그 자기 주체는 자기 주인공은 자기 모자람을 늘 알고 모자람을 늘 채울려고 하지요. 그래서 교회가 꼭 주유소 같아요. 오늘도 기름 넣으러 가자. 기름 넣어서 뭐할 건데? 돌아서면 다 빵꾸나서 다 샐 건데. 오늘도 복음으로 에너지 한번 채워보자. 전부 채워가지고 누구 좋아라고 채우는 겁니까?


우리가 결여를 느끼는 것은 우리 연료통이 아직 빵꾸가 난 걸 몰라서 그래요. 아예 고장난 거에요. 아예. 그래서 세리와 창기가 먼저 천국 가는 거에요. 세리와 창기는 압니다. 내가 어떤 행위를 해도 내 빵꾸난 것을 때울 수 없다는 사실을.


그래서 어떻게 하느냐. 고장난 빵꾸난 차를 조기에 주에게 주님께 반납하면 되지요. 폐차 다 됐는데 반납하면 되는 거에요. 고물차 시동도 안 걸리는 거. 그냥 밀어서라도 주께 반납하면 되는 거에요. 그래서 교회는 뭐냐? 진짜 교회는 늘 폐차, 또는 폐차 반납하는 곳이에요. 주님이 그 폐차를 온전케 함으로 또 시동 걸리게 만들어요. 부릉부릉. 주님이 타고 계속 늘 가게 하시죠.


그래서 이 성도는 이 말씀이 사람은 떡으로 못 살고 말씀으로 산다는 것처럼 이 말씀이 기쁩니다. 말씀이 늘 기뻐요. 비록 바리새인이 욕 얻어먹는 것에 대해서는 그 현장에 자기가 알아서 그 욕 얻어먹는 현장에 자기도 끼어들어요. 제가 바로 그 사람이라고 인정해버려요.


그래야 주의 말씀이 우리의 죄를 지적하는 주의 말씀으로 우리 안에서 완성의 티가 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게 로마서 7장에 나와요. 거룩한 율법의 완성 내가 지적할 때 나중에 로마서 7장 끝나고 보면 “오호라 찬양하리로다.” 찬양으로 끝나버려요. 내 몸이 더 이상 나의 것이 아님을 다시 상기시켜주셔서 감사합니다. 주님의 활동 현장인 것을 다시 한번 깨닫게 하고 확인시켜 주셔서 감사합니다.


자, 계속해서 아까 그 헬라어, 마태복음에서는 ‘아피에미’라고 되어 있고 누가복음 ‘파리에미’ 뭐 그런 거는 알 필요 없는데. 그 뜻은 방금 제가 충분히 설명해드렸습니다. 예수께서 의와 신과 인을 추가적으로 언급하신 이유는 그들의 위선적인 마음을 지적하기 위함이다. 따라서 추가적인 의와 신과 인을 의도적으로 이후에 도입했다는 것은 바리새인 짝을 이룰 때만 의와 신과 인이 진가가 드러나죠. 어떤 진가냐? 십일조 지킨 자가 십일조 지적한 주님을 죽여버립니다.


그러니까 그들의 십일조는 무슨 용도로 사용됩니까? 메시아를 죽이는 아주 극단적 선택이 되게 만들어버리죠. 인간의 모든 극단적 선택은 메시아를 죽이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표상적 대표자인 우리를 대표해서 바리새인이 우리 마음을 대표해서 그 마음을 예수님 앞에 완전히 폭로했습니다.


그럼 오늘날 십일조 있습니까 라고 물어보면 문제는 십일조 하고 안 하고가 문제가 아니라 십일조 받는 자가 없어요. 십일조 받아야 될 그 받는 분이 없어요. 왜냐하면 율법을 받으시는 분은 아버지인데 아버지는 누구 것만 받습니까? 예수님의 피만 받아요. 우리 십일조를 안 받습니다. 십일조 받고 피 받고 이런 거 없어요.


그게 어디 나오느냐 하면은 11장 50절에 나옵니다. “창세 이후로 흘린 모든 선지자의 피를 이 세대가 담당하되 곧 아벨의 피로부터 제단과” 이렇게 나와 있거든요. 자, 한번 봅시다. 제가 물어봅니다. 아벨이 죽은 것이 아벨의 제사를 받기 전에 죽었습니까? 받고 난 뒤에 죽었습니까? 아 쉽다. 이 문제는 정말 쉽다.


아벨의 제사를 아벨이 죽기 전에 받았습니까? 죽은 후에 받았습니까? 아벨이 살아 있을 때 제사를 받았지요. 제사 받았잖아요. 제사 받았습니다. 제사 받았으면 아벨의 죽음은 어디의 연장입니까? 이 제사 받음의 효과에요. 완성의 효과가 아벨을 죽이는 거에요.


가인의 제사 받았습니까? 안 받았습니까? 안 받았지요. 가인의 제사를 안 받음의 효과는 뭐냐? 가인을 안 죽이는 거에요. 살리는 거에요. 왜 살리느냐? 이 살인자가 여기 살아있어야 돼요. 살인자가 살아있어야 제사의 핵심이 하나님의 죽음을 본질로 해서 제사가 된다는 사실을 이 주변에 가인 같은 후손들이 있어줘야 계속해서 제사에 합당한 죽음이 반복될게 아니겠어요. 이해되시죠?


그게 어디 나오느냐 하면은 51절에 보면 “성전 사이에서 죽임을 당한 사가랴의 피까지”, 역대하 24장에서 22절에 나오는 말씀인데요 요아스 왕이거든요. 요시아 왕 아닙니다. 요시아 왕은 괜찮은 왕이었고 요아스 왕은 그 사람은 처음에 괜찮았어요. 역대하 24장 20절에 거기 여호야다라는 제사장이 있거든요.


그 제사장이 시키는 대로 잘 해가지고 요아스 왕이 어리니까 제사장 시키는 대로 해가지고 산당도 이렇게 제사도 드리고 제대로 말씀도 전하고 이렇게 성전도 수리하고 여러 가지 해가지고 다시 여호와 종교로 되돌렸다 이 말이죠. 그런데 여호야다가 늙어 죽었어요. 살만큼 살았어요. 죽을 때 나이가 130세에요. 송해보다 더 오래. 130세에 죽었습니다.


죽고 난 뒤에 사람의 심보가 희한하죠. 사람은 이게 진리냐 이게 안 진리냐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고 결정을 최종 결정을 내가 내리느냐 아니면 누구 시켜서 내리느냐 그게 자기한테 더 큰 문제에요. 그래서 사람은 선악과 따먹고 난 뒤에 혼자 있고 싶어요. 모든 결정을 혼자 하고 싶으니까. 같이 있다는 것을 굉장히 짜증스럽게 느낍니다.


그런데 오늘날 주님이 부활했잖아요. 부활했으니까 주님이 함께 있다는 그 자체로서 더 이상 우리의 걱정 근심이라고 하는 것은 이거는 말도 안 되는 일이에요. 나 혼자 있으면 내 걱정 내 근심이 되는데 같이 계신 분의 그 존재성을 걱정 근심을 해버리면 이거는 무시하는 게 돼버려요. 그렇잖아요.


초등학교 애가 자기 학교 문제 때문에 고민을 한다면 같이 있는 엄마 아빠는 뭐가 되버립니까. “얘 오늘 학교에서 무슨 일 있었어? 왜 그리 인상이 안 좋아?” “어머님은 제 일 관여하지 마세요.” 도대체 엄마 아빠 존재 가치가 있다는 의미가 없잖아요. 그 아이는 밥은 엄마한테 얻어먹고 지금 혼자 살고 있는 거에요.


우리가 햇빛과 공기는 주님한테 받아 놓고 모든 결정은 나 혼자 하게 되면 나 혼자 끙끙 앓고 있어, 어떡하지 어떡하지 맨날 이러고 있다 이 말이죠. 본색이 드러난 겁니다. 그 본색이 어디까지 이어졌는가. 이제는 내가 혼자 하고 싶은 거에요.


그래서 전에 버렸던 아세라 목상의 우상을 섬기고 다시 여호야다의 그걸 치우고 이제는 김일성도 필요 없어 김정일도 필요없어 내가 김정은이야 내가! 내가 알아서 할 일이야. 할아버지고 아버지도 다 치워! 현재 내가 지도자야. 자기가 자기 마음대로 하는 거에요.


해가지고 그때 하나님의 신이 임한 여호야다의 아들 제사장 스가랴가 이러시면 안 됩니다. 이 나라 왕이 혼자 있는 게 아니고 여호와 계십니다. 그러니까 요아스가 화가 나가지고 네가 감히 푸틴을 공격해! 이래가지고 네가 그렇게 나오면 이 백성들이 나를 얼마나 우습게 보겠느냐. 맨날 지도자들이 독재하는 이유가 맨날 국민들이 날 우습게 본대요. 그럼 안 우스울 정도로 착각하게 만들어야 돼요. 원래 우스운 거에요 인간은.


그래서 어떻게 하느냐? 죽이는데 돌로 쳐 죽여버립니다. 무리가 함께 꾀하고. 무리는 또 뭐에요. 왕의 명령을 뭐 공무원이라고 시키는 대로 했다 이 말이거든요. 아히만처럼. 당신은 수백만 육백만 죽였습니다. 나는 공무원인데요. 나는 위에서 까라고 하면 까야 돼요. 그냥 공무원이에요. 월급 받는 공무원이에요. 가정적으로 얼마나 인자하고 주위에 착한 사람인지. 자기 주위에 착한 사람이 육백만 죽였습니다.


인간을 보세요. 인간은 어떤 일이라도 자기의 의로움을 포기 못 하잖아요. 그게 욕망입니다. 욕망은 그야말로 신이에요. 내 안에 욕망 들었다 내 안에 신이 들은 거에요. 나도 그 신한테 꼼짝 못해요. 그래서 죽여 버렸어요. 죽였는데 자, 여기에 오늘 본문에 죽었지요. 죽었잖아요. 그러면 이것은 제사입니까? 제사 아닙니까?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시는 제사가 된 거에요.


그 제사가 됐다는 증거가 요아스가 몇 명 되지도 않는 아람 군대가 쳐들어와서 지금 시리아죠. 아람군 쳐들어와서 요아스가 크게 상처를 입었고 부하가 쿠데타를 일으켜서 왕을 죽여버렸어요. 요아스를. 그런데 그 이유가 뭐냐? 그 이유가 역대하 24장 24절에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이는 유다 사람들이 그들의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버렸음이라 이와 같이 아람 사람들이 요아스를 징벌하였더라” ‘징벌하였다.’


저주한 거에요. 율법이 작동한 거에요. 어떤 율법? 스가랴 선지자가 죽음으로서 율법이 그 시대에 완성이 되었고 그 시대에 해당 되서 완성이 되었고 율법의 완성은 반드시 두 가지. 하나는 복이고 하나는 뭡니까? 저주가 이루어지잖아요. 그래서 요아스는 저주 편에 서서 저주 받은 겁니다. 스가랴는 어디 속했느냐. 예수님과 같은 노선에 들어간 겁니다.


왜냐 하면은 아벨과 스가랴 그 다음에 누굽니까? 그 다음 차례는 예수님 차례거든요. 예수님과 같은 차원의 같은 노선이다. 차원을 1차로 본다면 아벨, 스가랴(사가랴), 그 다음에 예수님. 같은 선상. 이 노선, 노선에 들어가지요. 아벨하고 스가랴 만났다면 아이고 반갑습니다 인사했을 거에요. 예수님도 이 노선.


그리고 요한계시록 12장에 나오는 12장 11절 누가 한번 읽어보세요. “또 우리 형제들이 어린 양의 피와 자기들이 증언하는 말씀으로써 그를 이겼으니 그들은 죽기까지 자기들의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였도다”


그들이 어린 양의 피로 증언하는 말씀으로 그를 이겼으니 악마를 이겼으니 그들은 죽기까지 자기들의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였도다. 이런 방법 이상한 방법이죠. 사람이 멀쩡해야 이기는 건데 우리 알기에는 그게 아니고 어린 양의 피 증거하는데 성공한 게 승리한 것이다 이 말입니다.


내가 어떻다가 아니라 내게 속한 노선이 어린 양의 피로 만든 노선임을 증거했다면 이건 살아도 죽어도 이거는 이긴 것이 되는 거에요. 이긴 것이 되는 겁니다. 증거하다 죽을 수도 있고 증거하다가 한 100살까지 살수도 있고. 중요한 것은 증거 하는 것에 대해서는 이미 승리한 것으로 되어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노선에서는 아벨이나 스가랴나 예수님께서는 예수님의 이 노선에서는 이거는 이렇게 하면 구원 받는다가 아니라 이미 내가 너를 예수님 노선에서 받아들였기 때문에 이제는 네가 어떻게 죽던지 살던지는 이거는 네가 그렇게 신경 쓸 문제는 아니다 그런 뜻이 돼요. 자기 죽음에서부터 free, 자유를 얻는 것이에요. 내 죽음에서부터. 오후 설교 제목처럼 슬슬 주변 정리하시면 됩니다.


자, 다시 본문 돌아와봅시다. 같이 욕 얻어먹어봅시다. 43절에요. “화 있을진저 너희 바리새인이여 너희가 회당의 높은 자리와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을 기뻐하는도다” 네가 사회적으로 존경받는 것을 굉장히 좋아하는구나. 여러분 이거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목사들이. 왜냐하면 이 본문을 알고 자기를 낮추기 때문에 그래요. 수를 써. 수를 써.


‘상석에 앉는 것들은 화 있을진저’ 하니까 목사들은 어디 가는 줄 압니까? 말석에 가요. 그 말석이 상석 되어버립니다. 도대체 주의 말씀이 우리의 숨겨진 우리의 욕망을 건드려서 죄인 되게 한다는 사실을 모르고 타인의 시선을 의식해서 내가 인사 받으면 바리새인 될까 싶어서 먼저 인사하는 것. 어디 선거 나옵니까. 먼저 인사하는 거에요. 1번입니다 한번 찍어주세요. 2번입니다 한번 찍어주세요 이런 식으로요. 굽신 거리면서 자기를 막 낮추고 그거 그런 짓 하지 마세요.


제가 언제 설교에서 그런 이야기했어요. 꼭 이단 목사가 교회에서 월급 주니까 나는 가난한 사람 생각하면 이런 월급이 너무 많습니다. 반 깎아서 주세요. 꼭 이단들이 이런 짓하고 있어요. 그냥 주는 대로 그냥 뭐 이천만원 주면 그냥 이천만원 먹으라 이 말이죠. 먹고 죄인 돼. 골프 치다가 죄인 걸려라 이 말이에요. 뭐 겸손한다고 반 깎아서 어떻고 가난한 사람을 같이 생각합시다. 어려운 사람 생각합시다. 무슨 되지도 않는 수작을 부립니까. 진짜 천불나서 안 되겠다.


나의 현 존재는 나로서는 불가능함을 견지하세요. 나의 나 된 것은 나의 솜씨가 아니에요. 내가 의도해서 된 게 아니에요. 이건 불가능한 거에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왜 자기가 자기를 조작해요. 그게 위선이에요. 인사 받는 것이 바리새인 같아서 먼저 나와서 인사하고 또 상석에 앉으면 안 된다 해가지고 말석에 앉아가지고 식당에 가서 신발 벗는 말석에 앉아 가지고 이게 뭐냐 하면은 자꾸 이건 말씀을 의식하는 게 아니고 자신의 가치와 의를 손상되지 않는 그걸 의식하는 거에요.


그저 교인들이 목사님 여기 앉으세요 상석으로 안내하거든 고맙다 하고 감사합니다 하고 거기 앉으면 돼요. 뭐든지 고맙고 감사하는 게 최고입니다. 당연하게 여기지 말고 고맙습니다 감사하게 여기고 앉으면 돼요. 왜냐 하면은 겸손은 인간들이 해내기 때문에 그래요. 인간들이. 인간들이 아는 겸손은 인간이 불가능이 아닙니다. 가능하기 때문에 그래요.


이런 인간들이 이걸 불가능함을 자꾸 조작을 해서 자기는 성령 받은 성령의 능력이라고 이걸 가능함으로 자꾸 바꾸는 거에요. 가능함. 왜냐하면 자기가 모범을 보여야 한다는 거에요. 목사로서. 무슨 죄인이 모범을 보입니까. 죄인은 죄인다우면 되지. 죄인이 모범을 보이는 거에요? 죄인의 모범을 보이겠다는 겁니까? 의인의 모범을 보이겠다는 겁니까? 의인의 모범을 보이겠다는 거에요.


이 대표자가 누구인줄 압니까. 이게 누구냐 하면은 주기철이에요. 손양원. 왜 이런 짓을 하는지 모르겠어요. 그래서 제가 전기를 찾아 봤어요. 정말 이 사람이 진짜 복음을 아느냐? 내린 결론은 복음을 모르기 때문에 이런 짓하고. 또 있어요 영락교회 누굽니까. 한경직. 복음을 모르기 때문에 그런 짓하는 거에요. 복음을 모르기 때문에.


이 사람들 보고 은혜 받아서 기독교 입문 한 사람이 한 두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이런 이야기하는 거에요. 기독교에 입문했겠지요. 복음에 입문 안 했어요. 기독교에 입문했어요. 이 가능함이 뭐냐 하면은 이겁니다. 인사가 이거에요. “부족합니다 목이 좀 쉬어줘야 돼. 기도를 많이 했기 때문에. 부족합니다. 할렐루야.”


45절 “한 율법교사가 예수께 대답하여 이르되 선생님 이렇게 말씀하시니 우리까지 모욕하심이니이다” 드디어 본색이 나왔어요. 본색이. 결국 율법을 지키는 이유가 본인이 그만 폭로해버렸어요. 율법을 지키는 이유가 내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율법 지키는 거에요.


그러니까 주님께서 주님이 초청받은 사람이라는 것을 잊지 마세요. 초대해놓고 욕 바가지 바가지 얻어먹고 있어요 지금. 46절 “이르시되 화 있을진저” 하여튼 주님도 저주를 있는 대로 퍼붓습니다. “또 너희 율법교사여 지기 어려운 짐을 사람에게 지우고 너희는 한 손가락도 이 짐에 대지 않는도다”


이 말은 어떤 인간도 율법 지키는 것은 애초부터 인간은 가능하지 않습니다. 가능하지 않는데 그걸 누가 아느냐? 율법사 그들이 알아요. 그런데 율법사를 존경한다는 사람에게는 뭔가 모범을 보이기 때문에 본인은 안하면서 남들에게는 이렇게 해야 영광이 된다고 가르치는 거에요.


그거 왜 그러느냐 하면은 언어를 갖고 있는 사람이 정신적인 지배자가 되기 때문에 그래요. 멘토가 되기 때문에 그래요. 이것도 가스라이팅. 그들이 지키지 못한 것을 해줘야 그래서 그들이 “헥헥 아이고 선생님 저는 못 지키겠습니다” 이렇게 해야 자기가 지위가 계속 우위에 유지가 가능해요.


“그렇지 도사 함부로 되는 거 아니지! 까불지 마.” 그렇게 되는 겁니다. ‘내가 너하고 같이 놀 군번이 아니야’ 이런 뜻이에요. 왜 주님께서 이 바리새인을 이렇게 하느냐. 표상적 대표자라는 것은 모든 인간은 결국 바리새인이 하나의 모델이 돼요. 나도 저 사람처럼 되면 하늘나라가 곧 손에 닿을 것 같애. 그들은 그러한 위기 체제를 그런 식으로 구성해서 질서를 잡았던 겁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그들을 보고 너희들은 마귀 자식이라고 하죠. 너 바로 위에 손에 잡힐 듯이 주님이 계신 게 아니고 마귀가 손에 잡힐 듯 있는 거에요. 마귀가 그 사다리를 만든 거에요. 47절 보겠습니다. “화 있을진저” 화 있을진저 몇 번 나오는지 모르겠어. “너희는 선지자들의 무덤을 만드는도다 그들을 죽인 자도 너희 조상들이로다 이와 같이 그들은 죽이고 너희는 무덤을 만드니 너희가 너희 조상의 행한 일에 증인이 되어 옳게 여기는도다”


이 말은 뭐냐 하면은 옛날에 구약 때 선지자들을 죽였던 그 세력 그 권력을 너희들이 지금 그대로 반복 되풀이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은 절대로 그런 생각 해 본 적 없어요. 왜냐 하면은 우리는 과거에 이스라엘이 까불다가 포로 잡힌 것을 너무나 알아요. 역사는 우리에게 교훈을 주었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역사를 통해서 다시 과거 같은 잘못은 두 번 다시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그것을 역사를 교훈을 배움으로서 우리 조상들과는 정반대로 나가겠다고 다짐을 한자들이 이들이에요. 그래서 율법을 그런 차원에서 지키는 겁니다. 그들이 금식을 안했다면 우리는 금식을 하는 거에요. 이것이 바리새인들의 취지입니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이 뭡니까? 불가능함이 아니고 뭐로 만들어요? 전부 다 그 기초가 인간은 가능하다부터 출발하는 거에요. 가능하다. 십일조도 마찬가지고요. 행함보다도 우리 속을 들여다보는 겁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49, 50, 51절에서는 완전히 과거 역사까지 다 끄집어내서 나와 다른 노선을 두 개를 만들었어요. 이게 갈라디아서에서는 두 언약이라고 하는데 그건 너무 어려워서 지금 설명 못하고요.


하나는 인간이 육신이 있으니까 자기 육신이 있음으로서 자연스럽게 나올 수밖에 없는 행함의 노선, 그거는 저주입니다. 그리고 육신으로서는 불가능한 노선. 그거는 하늘에 있는 예루살렘이에요. 갈라디아서 4장 25절 우리의 내가 나를 만든 것은 하늘에 있는 어머니가 만들었다는 거에요. 하늘의 어머니가 뭐냐 하면은 율법이 아니고 약속이라고 되어있어요.


율법은 뭐고 약속은 뭐냐? 율법의 완성이 약속이에요. 율법의 원천이 약속이에요. 율법은 중간다리에요. 두 계곡 사이에 다리가 축 늘어져 있는 거에요. 이게 율법이에요. 율법. 약속에서 시작해서 여자의 후손부터 시작해서 남자의 후손이 아니고 여자의 후손,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예수님으로 끝나는 것, 그 사이에 뭐가 걸쳐 있습니까? 율법이 걸쳐있는 겁니다.


율법을 함으로서 이거는 예수님의 면전에 존재하지 않아야 될 세계. 지옥을 만들고 예수님과 함께 곳은 천국입니다. 그래서 천지창조는 하나였지만 나중에 결과는 천국과 지옥 두 구역으로 나누어집니다. 목사님 그 말이 맞습니까?


십자가 죽었다가 사흘 만에 부활한 것이 유일한 증거입니다. 부활 안됐으면 이거는 다 헛방이에요. 부활이 없으면 내가 말한 것이 진리가 아니요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 15장에서 그런 이야기했다고요. 죽은 자와 산 자가 없으면 지금 우리 이 말은 소망도 없고 쓸데없는 하나의 신화에 지나지 않고 거짓말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부활이 거짓이 아니라면 무엇이 거짓인가. 우리 인간들이 거짓이지요. 이 세상 자체는 거짓되어 있습니다. 이 세상은 부활이 없다고 하거든요. 결국 싸움은 부활이 있느냐 없느냐 싸움이에요. 그냥 부활이 아니에요.


십자가 죽으신 분을 세상의 모든 의견을 다 집대성해서 죽여라! 했던 그 분을 세상이 모든 세상이 다 싫어하고 부정했던 그 분을 하나님께서 이건 부정이 아니라 이분을 심판자로 세웠다는 이 사실은 우리는 거기에 가담된 또는 가담되어 있는 모든 사람, 연류된 모든 사람은 마땅히 저주 받아야 마땅하지요. 무슨 사적인 고민 걱정이 그건 있을 수가 없어요.


8000미터 산을 다 정복했다. 그 사람 누구에요? 엄홍길. 그래서 뭐? 왜 올라가는데? 집 놔두고 왜 올라가는데요? 내 남편 대통령 됐다. 김건희. 그래서 뭐? 그래서 뭔데 그게. 그거 인간이 가능하잖아요. 대통령 된 게 부활된 겁니까? 우리는 부활한 주를 믿는다 하지요. 사도행전에. 너는 대통령 믿어라 나는 부활한 대통령 믿겠다. 여러분 할 일이 있습니다. 그 부활한 주님을 증거하는 할 일. 팽팽 논다고 하지 마세요. 여러분 바빠요.


52절에 보겠습니다. “화 있을진저 너희 율법교사여 너희가 지식의 열쇠를 가져가서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또 들어가고자 하는 자도 막았느니라 하시니라” 열쇠만 있으면 뭐합니까. 자물쇠를 맞춰놨는데. 52절이 무슨 뜻이냐 하면은 자기도 못 들어가요. 안 들어갈 뿐더러 더 나쁜 것은 들어가고자 하는 자를 막아섭니다.


그들의 막힌 자는 누구냐? 일단은 예수님 밖에 없어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나중에 성령을 주게 되면 제자들도 세상으로부터 밉상을 받는 사람이 되겠지요. 오늘날 성도들이 바로 세상으로부터 막히고 있습니다.


자, 끝으로 어떤 식으로 이 복음의 자유, 자유로운 영, 은혜의 뭉치로 살아가는 것을 악마는 어떤 식으로 우리를 방해하느냐. 그것만 말씀드리고 마치겠습니다. 대구 강의에서 했는데 일곱 귀신이 마귀가 내 문제로 따로 유발시켜버려요. 주님 바라보고 사는 성도에게 마귀가 수시로 찾아 와가지고 내 문제가 중요하다는 사실을 우리한테 각인시켜 버려요.


그럼 여기서 갑자기 복음으로 기뻐하다가 우리는 슬픔에 잠깁니다. 절망과 낙담에 잠깁니다. 주여 어떤 죄도 용서하셔서 감사합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저에게 이렇게 복음전파 임무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렇게 하는데 “엄마 나 또 떨어졌어” 이러면.


주님 감사합니다 하다가 복음 문제는 나중에 하고요. 애를 공부를 시켜야 합니다. 재수를 시킬지 아니면 다른데 원서를 내서 가야되는지 갑자기 내 문제로 와버려요. 고민 고민이 되는 겁니다. 그 귀신 누가 보냈게요? 주님이 보냈지요. 주님이.


왜? 자칫하면 구원받은 내가 나의 우상이 되기 때문에. 얻을 것 얻었고 내 결여를 채웠다는 것. 구원 받는 나를 신봉하는 것 그거 안 되게 하기 위해서는 아직 마귀가 활동할 필요가 있었던 겁니다. 계속 마귀한테 뜯겨서 다시 한번 어제의 나는 내가 아닙니다.


마지막 이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복음은 매일 나의 주체를 새롭게 정립한다. 매일. 매일 나의 주체를 새롭게 정립합니다. 그날의 환경에 따라서. 지나간 것은 지나간 것이고 오늘 주님의 새로운 주체를 계속 활동하는 거에요. 찰랑 찰랑 주님의 주님 꾼으로 새롭게 활동하시기 위해서. 또 내일 되면 내일 치 따로. 항상 매일 주님과 죽고 매일 같이 살게 하시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바리새인이 들은 욕은 바가지 바가지 들은 욕은 사실은 우리가 들을 욕인 것을 이제는 기쁘게 받아들입니다.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치는 것처럼 주께서 의인을 구하러 오신 것처럼 그 죄인의 자리에서 주님을 바라볼 수 있는 자유함을 허락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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