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누가복음 12장 47절 (주님과의 공유) 220906a-이근호 목사
31절 “다만 너희는 그의 나라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런 것들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32절 “적은 무리여 무서워 말라 너희 아버지께서 그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시느니라”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주님의 나라는 하나님과 백성이 공유하는 것. ‘공유’. 같이 하는 것이 그의 나라입니다. 하나님이 원하는 것, 그리고 백성이 원하는 것이 일치될 때 그의 나라가 되는 겁니다.
우리가 천국에 이미 들어왔다는 것을 어떻게 아느냐? 하나님이 원하는 것을 나도 원하고 있어서 같이 원하는 것이 우리의 마음 한 가운데 동일한 것이 있을 때 이미 그 사람은 천국의 입성했습니다. 들어왔습니다. 천국에 들어오지 않으면 하나님이 원하는 것과 우리가 원하는 것이 우리가 공유할 수가 없어요.
사람들이 친구가 된다는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은 네 마음 속 한 가운데 있는 것과 내 마음 한 가운데 있는 것이 일치될 때 그걸 친구라고 이야기합니다. 요한복음에서 주님께서 나는 너희들을 이제 친구라고 한다는 것은 내게 있는 것을 너희에게 똑같이 있게 하겠다는 겁니다.
이게 인간이 하는 것을 안 받겠다는 겁니다. 너희들이 어떤 것을 해도 받지 않겠다. 그런 것들은 바리새인 사두개인 서기관들이 하나님의 율법가지고 이러면 되겠습니까? 저러면 되겠습니까? 이러면 기뻐하겠습니까? 이렇게 찬양하면 되겠습니까? 참 많이들 했어요. 대단히 많이도 했습니다. 다윗도 고백하듯이 제사도 드렸습니다. 번제 드렸지요. 속죄제 드렸지요.
그러나 주님께서 다윗을 통해 말씀하시기를 주께서는 번제도 원하지 않고 속죄도 원하지 않고 주께서 원하는 것은 상한 심령이라고 이야기하지요. 그 공유되는 게 뭐냐 하면은 마태복음 16장에 나오는 말씀처럼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라” 이렇게 해서 ‘십자가’라는 그런 똑같은 것을 갖고 있을 때에 이건 뭐 장차 천국 갑니다 가 아니라 이미 천국에 들어온 입장이지요.
하나님에게도 예수님에게도 십자가가 중요하고 성도에게도 십자가만 자랑하고. 그러니까 뭐 더 필요할 게 없지요. 더 추가될 게 없어요. 더 추가될 게 아무것도 없습니다. 나 그대에게 별을 따가가 그대에게 드리겠습니다. 그딴 거 별 따도 안 받습니다 주님께서는. 그 별을 따다가 그대 두 손에 안겨드리겠습니다. 치워라~ 별 준다고 너 천국에 들여주고 그런 거 없습니다.
똑같은 것을 가질 때 그의 나라가 되는 겁니다. 그렇게 똑같이 되는 것 이걸 기원 또는 원천, 근본, 근원 영어로 오리지널 이렇게 설명할 수 있어요. 그래서 기원, 원천은 원천이기를 멈추지 않겠다. 나는 너희들 속에 원래 하나님의 취지가 들어있는 것을 내가 멈추지 않겠다. 단호합니다. 하나님과 인간이 동일한 것을 갖는 그것이 최종 목표라는 이 사실을 성도 너희들을 통해서 성도 너희들에게 제공되는 것은 주님의 그 원천을 계속해서 주께서 유지시키겠다는 뜻을 멈추지 않겠다는 단호함을 말하는 겁니다.
그래서 원천에 대해서 제가 원천이라는 말을 쓰는데 왜 하늘나라가 원천이 되느냐. 32절에 그 내용이 나와 있습니다. 어떤 내용이 나오느냐 하면은 원천의 주도권은 무서워할 필요가 없다는 겁니다. 왜냐 하면은 원천은 처음이고 시작이기 때문에. 이게 원천, 기원인 동시에 최종 것이에요. 최종 것. 최종적인 것을 갖고 있는 사람이 중간적인 것, 일시적인 것, 한시적인 것, 과정적인 것 가지고 이렇게 뭐 협박을 해도 무서워할 필요가 없지요.
“적은 무리여 무서워 말라” 무서워 할 필요가 없는 거에요. 원래 하나님의 뜻이 우리 안에 들어온다면 하나님과 공유했다면 이게 해답이거든요. 진리거든요. 진리와 해답을 알고 있다면 나머지는 진리가 아니고 해답이 아니라는 겁니다. 해답도 아니고 진리도 아니고 처음도 아니고 끝에 도달하지도 못할 것 가지고 협박 공갈하고 자랑질하게 되면 이거는 한마디로 웃기는 이야기죠. 그게 협박감이 되지를 못하는 거에요. 왜? 가짜니까요.
진짜 명품 백이 자기 집에 있는데 자기 친구가 가짜 사 놓고 중국산 가짜 사 놓고 그걸 막 흔들고 으시댈 때에 속으로 웃지요. 참나. 저거 동대문에서 얼마 줬나? 한 2만원 줬나? 말도 못하고 친구 의리 때문에 못하지만 자기는 원천이 있거든요. 약을 올립니다. 내가 직구해서 600만원 주고 샀다는데 아닌데 아닌데. 너 내 명품 가방 보니까 무섭지! 무섭지! 이러고 있다고요. 미안한데 왜 무서워해야 되는지 이유를 모르겠다. 그거 가짜거든요.
진짜를 이미 확보했으면 가짜에 주눅들 하등의 이유가 없습니다. 그리고 적은 무리거든요. 적은 무리. 소수정예죠. 적은 무리이기 때문에 큰 교회 교인 수 많다고 해가지고 거기에 기죽고 눌리고 할 하등의 이유가 없습니다. 교인 수를 내놓으면 안돼요. 주께서 적은 무리라고 했기 때문에 적은 무리지만 적은 무리 외에 다수의 기죽지 않는 요소가 적은 무리 안에 집중되어 있다는 뜻이거든요.
적은 무리 빼놓고 나머지는 허풍. 헛바람 들은 사람들. 끝까지 인생 살아보지도 않아 놓고 인생 다 살은 냥 아는 냥 여기는 허풍쟁이들, 허세덩어리들. 그들의 협박과 공갈과 큰 소리에 하등의 기죽거나 고개 숙일 하등의 이유가 없습니다. 그리고 무서워하지 않는 정도가 아니고 기뻐해야 하는데 33절에 보면 “도둑도 가까이 하는 일이 없고 좀도 먹는 일이 없느니라” 이렇게 되어있어요.
이 말은 뭐냐 하면은 인간들이 하나님이 근원적으로 주신 것이 아니면 항상 그것은 가졌다 할지라도 도적과 좀 먹는 것 손실되는 것 때문에 굉장히 아등바등 염려하면서 초조하면서 벌벌 떨면서 짧은 인생을 살아가게 된다는 겁니다. 뭔가 가졌는데 이게 날라갈까봐. 이게 없어질까봐. 이게 다 사라질까봐 이게 두려운 거에요. 겁이 나는 겁니다.
따라서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사람의 특징들을 하나님과 동일하게 공유해야 되는데 그 공유하는 내용이 뭡니까 물으신다면 무서워할 필요 없는 것, 도적이나 사라질 염려할 필요 없는 것. 그런 것들이 마음 속에 있을 때에 그 사람이 적은 무리에 해당되는 사람이고 그 사람이 하늘나라 하나님과 동일한 것을 갖고 있는 그의 나라와 그의 백성이 되는 겁니다.
이렇게 하게 되면 그 나라와 의, 입을 것 먹을 것 마실 것 그런 것 염려하지 말고 그 나라와 의만 구하면 된다. 그 나라, 의를 우리가 주님과 동일한 것을 갖고 싶은 생각이 우리가 들 거에요. 그럼 저도 그 나라, 의를 갖고 싶어요. 갖고 싶은데 줘야 되지요. 안주면 못 받잖아요. 그럼 주시는 그 구체적 방안이 뭐냐?
그 뒤에 35절부터 그 방식이 나와 있어요. 그 나라와 의를 주시는 방안 또는 방식은 공격입니다. ‘공격’. 공격인데 무엇을 공격하느냐 하면은 인간들이 생각하는 하나님과의 계약 또는 관계, 이 자체를 주님께서 공격해버리지요. 그러니까 그 나라와 의라는 것은 없는 거에요. 공격하는 가운데 결과로 나오게 되어있습니다. 인간들은 그 나라와 의를 찾을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인간들이 생각하는 하나님과 나의 관계가 이거는 예수님 빼놓고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기 때문에. 그거는 본인이 이게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잘못됐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요. 하나님 관계가. 그래서 예수님이 와서 건드려줘야 돼요. 건드려줘서 내가 생각하는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가 여기 이게 문제가 있구나 깨달을 때 결과적으로 우리는 그 나라 의가 실패할 때, 실패 현장에서 비로소 새롭게 자기 자신의 결정을 부정하면서 그게 만나게 되어있습니다.
공격하는데 공격할 때 하나님께서 공격하게 되면 인간 쪽에서 가만 있지 않고 인간도 맞받아치지요. 그 맞받아치는 게 뭐냐 하면은 왜 하나님께서 우리와 맺은 약속을 깨십니까? 라고 반발하면서 공격하게 되어있어요. 하나님과 우리 사이 어떤 사이냐 하면은 우호적인 사이. 상호 우호적이고 친밀하고 잘 진행되고 있다고 여기는 것. 잘 진행되고 있다는 그 우호적, 인간 쪽에서 하나님하고 잘해볼라고 하거든요. 찬양 드리고 말씀 지키고 뭐든지 헌금 드리고 제사하고 예배하고 잘해볼려는 그 우호적인 관계를 왜 굳이 그걸 공격하고 깨십니까 반발하는 거에요.
이걸 달리하면 왜 막 들이대십니까? 들이대는 거에요. 우리가 하나님을 찾아가서 잘 경배하면 되는데 왜 주님께서 상당히 부정적으로 먼저 선제공격을 하십니까 이런 뜻이에요. 그건 뭐 예수님께서 돌아다니면서 기존의 성직자들부터 율법 지키는 자들에게 사정없이 공격했잖아요. 왜 하나님과 우리 관계가 정상적인데 이 우호적인 관계, 좋게 잘 사는데 왜 의도적으로 왜 문제를 일으키십니까? 라고 이제 반발을 하는 거에요.
그 반발을 할 때 모든 사람이 이 반발에 가담을 해요. 심지어 12제자도 마찬가지로 예수님이 체포될 때에 예수님이 체포되는데서 이건 아니라고 나선 사람 아무도 없었습니다. 역시 쎄기는 권력이 쎄요. 현실은 역시 현실다워. 우리가 꿈꾸는 자였었어.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 우리 정신차려 고기 잡으러 가자. 고기 안 잡았으면 어쩔 뻔했어요.
하나님께서 인간을 공격하는 것은 공격하는 이유가 뭐냐? 인간 나름대로의 나름 전체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전체성이라고 하는 것은 세상 전체에 대해서 다 알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래요. 하나님에 대해서 이 우주에 대해서 다 알고 있기 때문에 본인들이 전체성을 확보하고 있다고 보는 겁니다. 모든 신학과 철학과 모든 사상이 최종적으로 전체가 어떻다고 설명하는 내용입니다 인간은.
전체를 왜 아느냐? 여기서 중요한데요. 인간들이 전체성을 알고 있다는 말은 내 인생은 내가 책임지겠다는 거에요. 하나님 앞에서 내 인생은 내가 책임지겠습니다 라는 의도가 강해요. 왜? 우리도 알만큼 아니까. 본인이 본인 문제에 대해서 본인이 책임지겠다. 이 말은 뭐냐? 나는 끝까지 나를 믿겠다는 거에요. 그 유대신학의 정교하고 전통적이고 역사적으로 오류를 최대한으로 줄여가면서 그 순결, 순수한 진리 엑기스만 뽑아서 갖춰놓았다고 자부하는 것이 유대신학이에요. 구약 율법에 대해서. 하자를 줄이고 줄인 거에요.
그런데 그 하자를 줄이면서 남은 게 뭐냐 하면은 우리가 연구해서 하나님의 뜻을 아는데 있어서 철저를 기했기 때문에 나는 그 신학을 믿을만하다 이 말은 나는 끝까지 나를 믿는 것이 자연스럽다는 거에요. 그런데 성경 전체에서는 뭐냐 하면은 이거에요. 성경 전체 내용은 ‘나를 믿어라. 예수인 나를 믿어라.’ ‘예수 나를 믿어라’ 에요. ‘나를 믿어라’ 가지고 ‘나’를 믿겠다는 인간을 공격한 거에요. 그게 예수님의 활동이고 모든 성경에 내용 속에 다 같이 포함되어있습니다. ‘나를 믿어라’에요. ‘예수님을 믿어라’
예수님을 믿어라가 그게 결과로 종결돼야 된다는 말이에요. 예수를 믿으면 뭘 주신다는 게 없어요. 예수님 믿어라가 결론으로 마감이 돼야 돼요. 예수 믿으니까 천국 주더라 자꾸 이런걸 끄집어내면 그건 믿는 게 아니고 예수 믿는 나를 역시 최종적으로 나를 믿는 게 되니까 그건 안되잖아요. 성경에 예수님의 말씀, 오늘 누가복음 본문도 마찬가지지만 본문 내용이 뭡니까? 모든 본문 말씀은 “나를 믿느냐” 묻는 질문입니다. 이 내용 전체가.
인간들이 자기를 믿게 되면 하나님을 뭐로 보느냐 하면은 손님으로 봐요. 손님으로. 내가 마음이 정결하고 온화한 상태로 유지할 때 평정한 상태로 유지할 때 내 마음이 심리적으로 안정될 때 그 때 오시면 잘해드리겠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영접할만할 때 그때 오시면 하나님 극진히 대접해드리겠습니다. 왜 그렇게 생각합니까? 이것은 나를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서. 나를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서.
그럼 나를 왜 안 잃어버릴까? 나는 나를 믿는 것이 가장 확실하기 때문에. 다른 그 외에는 믿음의 내용이 들어오는 것을 거부해요. 최종적으로 나를 믿어야지 나 말고 다른 것이 들어오는 것은 우리는 내 믿음이 추방시켜버립니다. 예수님께서 들어오시더라도 내 허락이 있어야 돼요. 아직 방청소가 안됐다든지 빨래감이 널려 있으면 안돼요. 정리하고 들어오라고 할 때 들어와야 돼요.
우리는 그런 심보에요. 내 마음은 내가 알아서 깨끗하게 정리함으로서 그 깨끗하게 정리된 내 마음을 나의 믿음으로 내가 갖고 싶은 거에요. 그러나 주님은 그것은 천지창조의 기원이 아니고 원천도 아니고 근원도 아니라고 하는 겁니다. 하나님과 공유할 수 없는 그건 너의 일방적인 생각이지.
그 뒤에 나오는 35절부터 어디까지 나오느냐 하면은 48절까지 나오는 내용이 종입니다. 내가 내 마음을 믿었고 내 마음을 잃지 않을려고 한다면 그 사람은 본인에게 본인이 주인이 돼요. 주인이 된다는 말은 자기는 누구의 종이 되기 싫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그 뒤에 예수님의 말씀은 네가 백날 애써봐야 너는 종에 불과하다는 말씀이 35절부터 48절까지 나오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한 것 다시 한번 정리하게 되면 그 나라 의를 구하라고 주께서 이야기할 때 그 나라 의는 하나님과 인간이 공유할 수 있는 세계, 그 나라와 의입니다. 그런데 그 나라, 의 특징이 뭐냐? 무서워할 필요가 없어요. 그 나라 의는 도적이 오거나 그리고 썩거나 그런 것이 없는 곳입니다. 그게 왜 그러느냐 하면은 그게 처음이고 그게 최종적인 것이 그 나라 의에 거기 다 들어있기 때문에. 중간에 없어지는 게 아니고 영원한 것이기 때문에.
처음 시작한 하나님의 계획의 취지가 그 나라, 의고 끝도 그 나라, 의였습니다. 그 나라였습니다. 그것을 주님께서는 자기 백성에게 공유케 함으로서 그 나라 의를 완성시키고자 하는 겁니다. 그런데 제가 이야기한 것처럼 그 나라 의를 아무도 그 나라, 의를 찾을 수 있는 사람은 없어요. 그 이유가 뭐냐? 이미 자기 자신을 최종적으로 믿기 때문에. 자기가 자기에게 전부에요. 그걸 전체라고 하고 ‘전체’. 내가 나한테 전부고 전체고 almost. 나한테는 내가 전부에요.
따라서 예수님이 오시든 하나님이 오시든 믿으라고 하면 내 것 내 범위에서 다치지 않는 내에서 그 안에 손님으로서 주님을 모시려고 합니다. 손님으로 모셔버리면 한쪽이 한쪽의 종이 되는 게 아니에요. 둘 다 대등한 관계가 되고 맙니다. 나라는 주인집에 너라는 주인이 와서 잠시 찾아 인사 나누는 것밖에 안돼요.
이 말은 인간은 누구의 종이 되기 싫어요. 인간이 주인 노릇하는 여러 가지 경우를 쭉 나열해 보겠습니다. 내가 만나는 사람은 내가 정한다. 종 아니지요. 주인이지요. 이걸 ‘주체’라고 합니다. 그 다음에 불러도 내가 부른다. 불러도 내가 부른다. 내가 여전히 나의 주인임을 내 생애에 최고의 영광으로 생각한다. 나에 대한 속죄 선언을 내가 한다.
내가 완전하다는 주장을 하는 게 아니고 나는 비록 죄도 많이 지었지만 나 죄 없다 선언은 최종적으로 누가 내린다? 내가 죄 없다고 내가 내리고 싶다. 대충 이 네 가지로 나는 나에게 주인이 되는 겁니다. 종? 종이 뭐에요? 노예? 노예 나하고 상관없잖아. 난 누구의 노예 된 적 없는데. 바로 인간의 형편이 이런 형편입니다. 이런 주인들이 모여서 교회를 이루지요. 이런 주인들이. 그래서 교회에서는 어서 오십시요! 동대문 시장에 손님 오듯이 어서 옵쇼!
특히 개척교회 하는 목사한테는 뭐 고객이 왕이죠. 문간부터 나가가지고 인사하고 있지요. 가운입고 마중 나가지요. 아이고 태풍 부는 데 오셨습니까? 뭐 이런 거. 고객. 고객은 왕이니까. 종이 된 적이 없다. 이것부터 출발합니다. 그러니까 인간은 어느 인간도 누구의 종이라고 생각하는 인간은 아담 후손 치고 아무도 없습니다. 심지어 아브라함도 그랬습니다. 아브라함도 그랬어요.
그런데 아브라함에게 자식이 두 종류가 나타났습니다. 아브라함은 본인의 자식은 사라, 자기 부인으로부터 자식을 낳기를 아브라함이 원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부인으로부터 자식을 낳게 한 게 아니고 어떻게 어떻게 해서 하나님이 압박을 해서 종으로부터 자식을 낳게 했습니다. 종으로부터 자식을 낳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의도적으로 아브라함을 그런 식으로 몰아세워놓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네가 낳은 자식은 종이 나은 자식이다’ 종이라 언급을 해버려요.
그렇게 되면 아브라함의 자기의 분신, 종이 되버려요. 그리고 그 이스마엘 종 자식 외에는 자기 작품이 없습니다. 자기 자식이 없어요. 그런데 내가 낳은 자식이 정실부인의 아들이 아니고 종의 아들이에요. 그러면 종의 아들 등장하면 뭔가 괄호가 빈자리가 하나 생겨버렸어요. 참된 아들, 종이 아닌 아들 그 자리는 갑자기 새롭게 텅 빈 상태가 되어버립니다. 그 자리를 누가 채우느냐? 하나님의 약속이 하나님이 그 자리를 채워버리죠.
그러면 그 이삭이라는 자식은 아브라함 보기에 결코 내가 낳은 자식이 아니에요. 내가 낳은 자식이 아니면서 내가 원했던 자식의 그 자리, 내가 죽고 난 뒤에 있을 자식의 자리에 하나님이 그 자리를 점유해버리고 차지해버리면 나는 자동적으로 내가 낳은 자식은 종 자식 밖에 없습니다 해서 종이 되어버리는 겁니다. 하나님의 종이 돼버립니다.
그 방법이 갈라디아서 4장에 보면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갈라디아서 4장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거든요. 4장 24절 “이것은 비유니 이 여자들은 두 언약이라 하나는 시내 산으로부터 종을 낳은 자니 곧 하갈이라. 이 하갈은 아라비아에 있는 시내 산으로서 지금 있는 예루살렘과 같은 곳이니 그가 그 자녀들과 더불어 종 노릇 하고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 이렇게 되어있어요.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두 언약을 양산시키는데요. 두 언약을 양산시킴으로서 하나님은 이렇게 이야기하는 겁니다. 나는 인간을 버리고 인간을 구원한다. 이렇게 되어버리는 거에요. 단일 인간을 두고 두 개의 결과를 말해버려요. 나는 아브라함을 버리고 아브라함을 구원한다. 나는 아브람을 받지 아니하고 아브라함을 받는다가 되어버려요. 정확하게 말해서 아브람을 버리고 아브라함을 받는다 이렇게 되겠지요.
그것은 놀랍게도 아브라함의 자신의 재주나 노력과 시도하고 그런 결과를 낳는 것이 나는 아브람을 버리고 아브라함을 구원한다.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다. 나는 아브람의 하나님이 아니고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죠. 그런 결과에 대해서 아브라함이 한 게 아무것도 없어요. 한 게 아무것도 없습니다. 철저하게 아브라함은 하나님에게 이용당한 거에요.
그 이용당하는 이야기는 지난 오후예배인가 했지요? 아하수에로 왕, 에스더의 남편은 에스더라는 꽃뱀한테 걸렸다. 왜냐하면 “죽으면 죽으리라” 라는 것을 남편보고 이야기할 것을 남편보고 이야기한 적 없어요. 에스더는 자기의 미모를 팔아서 권력을 얻었던 여자에요. 미모를 미끼로 나라의 반이 되는 권력을 차지한 여인. 아주 무서운 여자지요. 무서운 여자지요. 우리는 줄게 없고. 뭐 줄게 있어야지. 나라 반? 지금 부동산도 남의 전셋집 들어가는데 무슨.
인간은 하나님한테 못 이긴다는 이야기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시작과 끝을 다 알고 있는 분이거든요. 드라마 작가 김수연 작가에요. 처음과 끝 김수연 작가가 다 시나리오를 쓰잖아요. 중간에 배우가 그것도 단역 배우가 뭘 알겠어요. 끝에 가면 알 수도 있겠다만. 잠시 역할 맡고 사라지는 그게 무슨 시작과 끝을 압니까.
그러니까 시작과 끝 모르니까 허하니까 허세라도 부려보겠다고 세상에 헛되고 헛된 것에다가 그거 가지고 돈이나 모으면서 으시대지요. 그런데 주님은 그건 가짜라고. 가짜 명품 들고 어디 까불고. 그런 소리만 듣지요. 왜 그러느냐 하면은 시작과 끝을 모르니까 나는 나를 믿고 싶은 거에요. 나 외에 어떤 자도 믿고 싶지 않아요 인간은. 그러니까 성경은 예수님 믿으면 뭐 해주겠다가 아니에요. 이거는 종교계에서 그렇게 해요. 예수 믿으면 기도 열심히 하면 너 원하는 소원 들어줄게. 이거는 종교계에서 이야기하는 것이고요.
진짜는 최종적인 목표가 뭐냐? “나를 믿어라.” “그럼 뭐 해줍니까?” “나를 믿게 될 것이다.” “뭐 없습니까?” “없다.” 없어요. 우리가 평소에 인생을 살면서 왜 불안하고 초조하고 염려하고 걱정이 됩니까? 그것은 시작과 끝이 동일해야 되는데 중간에 내 속셈을 따로 뽑아내기 때문에 그런 현상이 벌어지는 거에요. 어떻게 하나님 이용해가지고 내 속셈 한번 챙겨볼까 이렇게 생각하는 겁니다.
인간들은 아무 허세 덩어리, 권세, 권력. 돈이 권세 권력이니까 돈을 찾는 거에요. 누구의 종이 되기를 원하지 않아요. 내가 주인이 되고 싶고 내가 나의 종이라도 내가 나의 종이 되고 싶지 그 누구의 종이 되고 싶지 않습니다. 그런 맘으로 지금 교회 다니고 있어요 계속. 신앙생활하면 집사라고 하고 목사, 장로라 하면서 돌아다니는 거에요. 자기가 주인 행세하면서.
이게 어른들만 아니라 애들도 그렇거든요. 아무 실속 없는 것, 실속 없는데 힘 쎈 짐승. 그게 뭘까요? 사우르스죠. 공룡. 처녀 때 그냥 모양내고 공부 대충하고 회사 다니다가 이뻐가지고 좋은 남편 만나서 살림하는 그 새댁들. 그 사람들 딸 낳으면 상관없지만 아들 낳아가지고 한 4년째 키우면 갑자기 엄마가 공룡 박사가 됩니다.
왜? 아들이 공룡에 미쳤어요. 왜 미칩니까? 바퀴벌레에 미쳤습니까? 공룡이 크기 때문에 그래요. 작은 것만 해도 30톤이 넘어요. 스피노사우르스. 얼굴은 작은데 목이 길어. 이걸 브라키오 사우르스. 그리고 싸움을 잘해. 시속이 40km나오는 이빨이 있고 10km앞에 먹잇감도 본다는 맨날 쥬라기 공원에 나오는 티아노사우르스. 사우르스는 공룡이라는 뜻입니다. 코뿔소처럼 되어 있는 것 트리케라 톱스. 그 다음에 스테고사우르스. 엄마라는 이유 때문에. 아이가 맨날 이것 묻는 거에요. 이게 무슨 사우르스냐 묻는 거에요.
그런데 그 공룡 어디 있습니까? 없어요 지금. 공룡처럼 보이는 게 있지요. 삼성사우르스, 현대사우르스, 엘지사우르스. 허세덩어리. 왜 그렇게 합니까? 믿을 것은 나밖에 없기 때문에. 왜 나를 믿어야 됩니까? 나는 때려죽어도 누구의 종이 되기 싫기 때문에. 나는 누구의 종이 되기 싫어요. 누구의 종이 되기 싫은데 내가 필요한 사람은 예수를 믿어도 내가 예수를 부르고 싶어. 그래야 내가 주인임을 놓치지 않기 때문에. 유지될 수 있기 때문에.
그리고 내가 인생의 보람은 비록 돈 월급 적고 암 말기에 빌빌 거려도 그놈의 고집 세 가지고 죽어도 요양 병원 안 간다고 버티는 고집 센 90넘은 노인네들. 내가 왜 가는데! 내 집이 최고다 하고 자식들 죽던 말던 자기 과거, 추억만 챙기면서 자식들이 얼마나 힘든지 생각 못하고 그 나이 많은 고집으로 버티는 것.
이거는 뭐냐? 내 평생 다 하기까지 남는 것은 내가 주인으로 살았다는 그것만큼은 내가 몸이 아프고 돈이 없다 할지라도 이거 놔버리면 진짜 자살이다. 이것 때문에 나 살아왔다 버리는 그 노인네들. 그거 뭐 지옥가도 마땅해요. 왜? 저런 사람을 지옥 보내지. 그런 사람들 지옥가야 되는 거에요.
참 예수님의 말씀에 인간 자신을 주님께서 공격하는 거에요. 하나님 우호적으로 좋게 좋게 갑시다. 내가 교회 가줄게요. 예수 믿어 줄게요. 헌금 천원 씩 할게요. 자꾸 우호적인 관계를 해서 공격을 안 하기 위해서 하는데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다룰 때는 그렇게 다룬 게 아니에요. 아브라함 전체를 한꺼번에 다 폭로시켰습니다. 너의 자리는 현재 너의 옆에 없다. 하나님이 너와 너의 빈자리를 채워줘야 돼요. 그래야 나의 하나님이 돼. 그 빈자리에 하나님이 공유합니다. 그 공유의 자리에 아브라함의 하나님으로 오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에요. 예수님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입니다.
이것도 모르고 인간들은 이런 가사가 있어요. 제가 하면 아 들어본 적 있다 할 거에요. “밤늦은 항구에서 그야말로 연락선 선창가에서 돌아올 사람은 없을지라도 슬픈 뱃고동 소릴 들어보렴 이제와 새삼 이 나이에 청춘의 미련이야 있겠냐 만은 왠지 한 곳이 비어있는 내 가슴에 다시 못 올 것에 대하여 낭만에 대하여” 최백호의 ‘낭만에 대하여’ 이게 2절 가사거든요. “가버린 세월이 서글퍼지는 슬픈 뱃고동 소릴 들어보렴”
이거는 끝까지 개뿔도 없으면서 본인이 여전히 주인공이에요. 그놈의 기억 때문에. 줄 곧 내가 나를 믿어왔던 그 기억, 그 기억이 세월이 지나도 변함이 없네. 한결같애. 35절에서 48절에 나오는 이 모든 것을 세상의 모든 것을 하나님의 종으로 이미 전환시켜버렸습니다. 그러면 이 종에서 주님께서 어떻게 하느냐? 이 종에서 두 종으로 나눠버립니다. 악한 종과 선한 종으로 나눠버려요. 종 아닌 인간은 애초부터 태어난 적이 없다. 다만 악한 종으로 태어나는가? 선한 종으로 태어나는가 그것뿐이다.
그럼 어떤 것이 악한 종이냐? 남을 종 부려먹는 인간이 악한 종이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걸 저는 오늘 제목으로 삼고 싶은데 제목을 악한 종이라고 하지 않고 이렇게 하면 어떨까 해요. ‘중간 종’. 주인 밑에 전부 다 종인데 종이면서도 중간에 자기가 관리 종으로 나서서 밑에 것에게 밑에 것들에게 주인 노릇하는 중간 종. 예수님은 이것을 뭘로 보느냐? 이것을 이스라엘로 본거에요. ‘이스라엘’. 이스라엘로 봐서 하나님의 종노릇하라고 준 이스라엘이 하나님이 계시다는 그걸 빌미로 해서 다른 사람들을 자기 종으로 의식하면서 살아왔다.
따라서 이 이스라엘 전체가 뭘로 전환시키느냐? 매 맞아야 할 종으로 주께서 전환시켜 버립니다. 매 맞아야 할 종으로. 46절에 “생각하지 않은 날 알지 못하는 시각에 그 종의 주인이 이르러 엄히 때리고 신실하지 아니한 자의 받는 벌에 처하리니” 47절 “주인의 뜻을 알고도 준비하지 아니하고 그 뜻대로 행하지 아니한 종은 많이 맞을 것이요” 이렇게 되어있어요. “많이 맞을 것이요 알지 못하고 맞을 일을 행한 종은 적게 맞으리라” 이건 이방나라. 이스라엘에 “너희들이 메시아가 오기를 기다렸잖아. 내가 메시아다” 이런 뜻이에요.
자, 이렇게 설명하게 되면 매 맞는 종들은 상당히 억울해할 겁니다. 우선 이스라엘이 전체 종이라고 하는 것은 어디 나오느냐 하면은 마태복음 21장 37절에서 나옵니다. “후에 자기 아들을 보내며 이르되 그들이 내 아들은 존대하리라 하였더니 농부들이 그 아들을 보고 서로 말하되 이는 상속자니 자 죽이고 그의 유산을 차지하자 하고 이에 잡아 포도원 밖에 내쫓아 죽였느니라 그러면 포도원 주인이 올 때에 그 농부들을 어떻게 하겠느냐 그들이 말하되 그 악한 자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은 제 때에 열매를 바칠 만한 다른 농부들에게 세로 줄지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성경에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분명히 버렸는데 “이거는 쓸데없는 돌이다” 버렸는데 그 버린 돌이 안 죽었네요. 자기는 죽였는데 누가 죽였느냐? 이스라엘이 메시아를 죽였는데 메시아가 안 죽으면 이거는 누가 죽을 차례입니까? 이스라엘이 멸망될 차례지요. 이스라엘이. 43절에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너희는 빼앗기고”, 여기 너희는 이스라엘이죠. “너희는 빼앗기고 그 나라의 열매 맺는 백성이 받으리라” 이거는 값없이 이스라엘 자리를 그 포지션을 그 처지를 대체해서 들어갔던 사람들에 의해서 천국을 차지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그 천국에 들어갔던 그 이방인들의 특징은 뭐냐? 우리가 천국에 들어올 만해서 들어왔다는 생각을 하겠어요? 아니면 이게 웬 횡재냐? 횡재로 여기겠습니까? 어느 쪽이겠습니까? 횡재로 여기겠지요. 그런 자들이 바로 하나님 생각과 공유하고 있는 하나님의 진짜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입니다. 이미 하나님 나라 자기 안에 들어왔으면 그런 생각 들어왔으면 이미 하나님 나라 들어온 사람들이에요. 그러면 횡재해서 들어왔다면 횡재했잖아요.
그럼 횡재의 그 대상을 더 확대시켜야 돼요. 횡재 받은 내 자체가 횡재가 돼야 돼요. 말을 일부러 어렵게 하는 게 아니고요 내가 횡재한 것을 몇 백억 있다면 이게 내 것이 되잖아요. 그게 아니고 횡재한 몇 백억을 쥔 내 자체가 나에게 횡재라고 여길 때에 내 것이 안돼요. 내 것이 안 되면 주께서 몽땅 도로 가져간다 할지라도 내가 거기서 “오오 그거 내 껀데” 하는 말이 나올 수가 없게 되어있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착실한 종이지요. 어떤 경우라도 자기를 주인이라고 한 순간도 주인이라고 생각해보지 않을 때 이게 바로 신실한 종이다 이 말입니다. 주께서 원하는 신실한 종. 그럴 때 예수님은 계속 그들의 주인으로만 유지될 수가 있는 거에요. 신약에 오게 되면 이건 간단하게 되어있지요. 주인님의 의가 종에게 들어가서 주인님의 아들인 것처럼 종도 이제 내 아들이 되리라. “너희는 종의 영을 받지 않고 아들의 영을 받았으니” 주인님이 아들인 덕분에 너희는 하늘나라의 양자로 받아들여졌다. 이게 바로 로마서에 나올 때 성령을 주신 이유가 바로 그겁니다.
10분 쉽시다.
강남-누가복음 12장 47절 (주님과의 공유) 220906b-이근호 목사
하나님께서 종의 나라는 인정하지 않습니다. 주의 나라만 인정합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인간 나라를 공격하는 이유를 알겠지요. 인간끼리 모여 봐야 종의 나라에요. 자기들끼리 주인이라고 우기고 있습니다. 그들끼리 뭐하느냐 하면은 이 포도원을 그들이 잘 운영하겠다는 거에요. 포도원을. 하나님이 주신 약속의 땅에서 그들끼리 잘하겠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얄굽게도 그 포도원을 자기 아들에게 상속하기로 다 사전에 계획이 되어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다 계획이 있어요. 절대로 인간 나라를 허용한 적이 없어요. 현재 민주주의를 하나님이 허락한 적이 없어요. 하나님은 예수님의 나라 외에는 딴 나라를 생각해본 적이 없습니다. 그게 어디 나오느냐 하면 고린도전서 3장 21절에서 23절에 나옵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사람을 자랑하지 말라 만물이 다 너희 것임이라. 바울이나 아볼로나 게바나 세계나 생명이나 사망이나 지금 것이나 장래 것이나 다 너희의 것이요. 너희는 그리스도의 것이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니라”
그래서 인간은 인간의 선에서 멈추고 그 위로 나가는 방법에 대해서 몰라요. 그래서 일단 인간 나라는 건재하고 여기에다가 하나님을 모셔서 또는 하나님을 위해서 살게 되면 너희들이 나까지 다 챙겨주는구나. 고맙다 인간들아 해가지고 하나님이 복을 주면 우리가 생각한 인간 나라는 번영할 것이고 영원할 것이다 라고 생각하는 아이디어. 그것이 바로 유대교, 유대신학입니다.
유대신학만 그럴까요? 아니지요. 개혁주의 신학도 똑같은 겁니다. 우리가 착실하고 바르게 하면 하나님은 도와주신다. 여기 하나님의 공격이라는 것은 그들에게는 상상도 못하는 거죠. 그러면 그 나라 의가 어디 있느냐? 첫 번째 시간에 질문했지요. 그 나라 의는 어디 있느냐? 그 나라 의는 적이 없을 것 같은 곳에 적을 만들어서 공격함으로서 비로소 허물어지게 만들면서 그 나라, 의가 비로소 발생되게 만드는 겁니다.
그게 뭐냐 하면은 바로 참된 종, 바른 종을 하나님이 바른 종으로 인간의 종이 되어버린 거에요. 하나님이 사람의 종이 된 겁니다. 세상에 이런 아이디어는 어느 신에게도 없어요. 신이 인간이 종이 되든지. 신이 인간의 섬김을 받아야 되는데 예수님은 나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고 오히려 너희들을 섬기러 왔다 이렇게 할 때에 인간 쪽에서 굉장히 당황스럽지요.
인간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상식에 맞지요. 왜? 하나님은 위에 계시고 인간은 아래 있기 때문에. 아랫것이 윗분을 섬기는 것이 너무나 상식적이다 이 말이죠. 그런데 그 상식적인 것이 하나님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간들이 몰랐던 겁니다. 우리에게는 상식이고 우리에게는 진리인데 그게 하나님한테는 이게 수용될 수 없는 악한 것이 되는 거죠. 그들은 하나님의 종이라고 자부하지만 종다운 종, 제대로 된 종을 그들은 시작해본 적도 없습니다.
그래서 마가복음 10장 44절에 보면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45절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대속물로 주려 함이라” ‘대속물’, 대속물은 어디와 플러스를 하느냐? 죄인과 플러스해서 이 죄인을 의인 되게 하지요. ‘대속물’.
그래서 재밌는 것은 이 세상에 자기가 죄인이라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죄인이라고 우기는 그 자체가 의롭게 여기기 때문에. 죄인이라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나는 내가 죄인이라고 압니다. 그래서 나는 죄인입니다” 라고 하지 않고 “나는 죄인입니다 그래서 나는 다른 사람 보다 낫습니다” 이게 인간이에요. 그래서 옛날 부흥사들은 목소리까지 변조하잖아요. “부족합니다 할렐루야~~~” 자기가 뭔데 부족하대. “부족합니다 할렐루야~~~” 나중에 부흥회 봉투 보면서 “부족합니다~~~~” 부흥회 첫 시간부터 마지막까지 관심은 돈에 있어요.
왜? 왜 그렇습니까? 내가 나의 주인이니까. “내가 누구의 종이 될 상인가?!” 누구한테 종이 될 상이 아니에요. 나는 누구의 주인이 될 상이지 누구의 종이 될 상이 아닌 거에요. 내가 종이 된다면 그건 인생 실패로 간주하는 거에요. 세상 자체가 그러니까요. 주님의 방법은 뭐냐? 이 자리를 비워놓습니다. 이 자리를 비워놔요. 그냥 덜렁 대속물로 침투해버려요. 대속물로 와서 여기에 대속물로 결합될 이 자리에 새롭게 발생시킵니다. ‘발생’. 없는 데서 발생시켜요. 창조해버려요.
그러면 창조되면 없는 데서 새롭게 발생됩니다. 그러면 이 대속물로 옴으로써 기존의 인간들이 제사장들이 성전에서 드렸던 대속물은 전부 다 퇴출이에요. 퇴출. 히브리서는 이걸 모형이라고 해요. 모형은 사라져야 될거에요. 인간들이 드렸던 대속물 속에 뭐가 여기에 담기겠습니까? 여러분 다 아는 거에요. 이 대속물 만들기 위해서 그들은 헌금이 필요했고 그들은 예배가 필요했고 그들은 기도가 필요했고 대속물 하기 위해서 그들은 전도가 필요했고 그들은 성전이 필요했고 정성이 필요했고 그들이 대속물 주기 전에 일주일 전부터 그들은 정결한 양심, 선행이 필요했던 겁니다.
그런데 이 전체가 어떻게 됩니까? 주님의 대속물에 의해서 전부 다 이 전체가 다 쓸데없는 짓이 돼요. 쓸데없는 짓. 아무 짝도 소용없는 게 됐어요. 시편 50편에 나오는 말씀이 또 다시 거론됩니다. “하나님은 번제나 속죄제를 원하는 것이 아니고 주께서는 상한 심령을 원한다” 내가 바로 쓸데없는 자였습니다 라는 이 고백이 필요한 거에요. 그것도 외워서 하지 말고 실제로 체험을 하게 되는 거에요.
다윗이 복을 받은 것이 뭐냐 하면은 밧세바와 간음하고 그 남편을 살해함으로서 자신의 처음 자리를 발견한 거에요. 자신의 처음 자리는 내가 있던 자리가 아니라 죄가 있던 자리였어요. 죄가 있던 자리. 이걸 어제 대구강의에서 했는데 죄를 지은 내가 아니라 죄의 의인화가 나다. 죄가 인간 모습된 ‘나’가 돼요. 내가 죄를 지은 게 아니고 내가 죄를 지어서 죄인이 아니라 죄가 인간 형태를 지닌 게 바로 나다 이 말이죠. 나에요.
초등학교 때 입학식하면 애들 전부 다 손수건 달지요. 왜 그렇게 손수건을 다느냐? 그때는 예방주사같은 것이 별로 없어 가지고 코 찔찔 나온다 이 말이죠. 그때 흘린 콧물이 콧물이 아니고 죗물이에요. 콧물 흘리는 게 아니고 죗물 흘리는 거에요. 죄를 흘리는 겁니다. 다윗이 그걸 알고 기뻐한 거에요. 그걸 알고 성신이 알려줬다는 거에요. 성신이. 성신이 알려준 거에요. 성신이 하나님의 신이 나로 하여금 밧세바의 뒤태를 보게 했고 그리고 남편을 죽이게 한 거에요. 하나님께서.
이 말은 뭐냐? 하나님이 나서지 않으면 어느 인간도 자기가 죄인인 것은 인정하지만 죄가 내가 됐다는 사실을 인정할 위인은 없습니다. 내가 양심상 죄를 많이 지었어. 이런 건 되지만 겸손해 빠져가지고 되지만 내가 곧 죄고 죄가 곧 나라는 것을 알게 되면 추가할 죄는 더더욱 없는 거에요. 그걸 로마서 6장 6절에서는 그걸 아주 사도 바울이 너무 간단하게 이야기해요. 이 사실을. 너무 간단하게 이야기합니다.
로마서 6장 6절에 “죄의 종” 이걸 죄의 종이라고 합니다. 나의 주인은 죄가 주인이고 죄가 시키는 대로 하는 딸랑딸랑 똘마니입니다. 노예라는 뜻이에요. 본인이 죄의 종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고 이 세상에 나가서 사람을 만나면 사람들이 그렇게 친밀하고 정이 가요. 왜? 나와 똑같으니까. 말 하나 행동 하나가 죄 아닌게 하나도 없으니까 이거는 뭐 홧투 치나 마나에요. 장땡을 쥐고 있던 구땡을 쥐고 있던 남의 패 다 봤어. 벌써 다 알고 있어요.
남편이 한 마디해도 저게 무슨 뜻인데. 아들이 한 마디 해도 저게 무슨 뜻인데. 딸이 한마디 해도 저게 무슨 뜻인지 다 알아요 다. 나는 나를 믿겠다 그런 뜻이거든요. 뭐 딴 게 뭐 있어요. 나는 누구의 종이 되지 않겠다. 그게 나의 사는 보람이다. 그걸 너무 긴 것을 그렇게 행동으로 엄마 나는 딴 거 안 먹고 라면 먹으면 안돼? 이런 짧은 표현 하나하나에 다 들어있어요 그게. 이걸 가지고 어렵게 방금 한 것을 어렵게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인간은 S1을 알기 위해서 S2에게 묻는다.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S1은 나의 생각과 현실과 딱 들어맞게 일치되는 것. 이게 S1이라면 S2는 내 생각의 표현, 언어죠. 언어, 표현 이것이 현실과 항상 갭이 있어요. 딱 들어맞지가 않아요. 50억만 있으면 행복하겠다. 집에 5만원 있을 때 50억만 있으면 행복하겠다 하거든요. 그런데 50억 되고 난 뒤에는 이 행복과 갭이 생겨버려요. 50억 있어도 행복하지 않아요. 뭐 다들 없으니 마음 놓고 이야기합니다.
예를 들면 이런 거죠. 어떤 아가씨가 있는데 남자가 아가씨를 좋아해요. 좋아하는데 둘 다 총각 처녀니까 뜸들이고 있는데 아가씨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나는 남의 감정을 남에게 참 잘 전달하고 남들도 내 옆에 있으면 내가 어떤 감정인줄 알아 라고 이야기해요. 그러니까 남자가 하는 말이 그 여자보고 “나 라는 남자하고 있으면 어때?” “편안함?” 그러니까 남자가 “또?!” “안정성” “또?!” “쉽게 말을 걸 수 있는 그런 관계.” “또?!”
왜 “또” 라는 말을 자꾸 합니까? 뭐가 나올 때까지? “나 당신을 사랑해” 그거 나올 때까지 계속하는 거에요. 여자는 사랑할 마음이 없어요. 그냥 편안함. 그러니까 남자가 답답해가지고 계속 묻는 거에요. 또!또!또! 계속 묻는 거에요. S1이 S2에게 묻는 겁니다. 주여! 주여! 주시옵소서! 뭐?! 뭐를 달라는지 본인이 몰라요. 그런데 계속 뭔가 미흡해. 미흡하니까 계속 뭐 해야 될 거 같애. 무엇을 원하는지 본인이 몰라요. 그러면서도 달라고만 자꾸 하는 겁니다. 뭘?! 현실과 맞기 위해서. 그러나 현실과 맞출 수 있는 것은 인간에게는 없습니다. 인간은 자체가 가짜고 가상이기 때문에 현실과 항상 떨어지게 되어있어요.
이것은 뭐냐? 인간이 드리는 모든 대속물, 제사가 엉터리란 뜻입니다. 제사 드리고 양 드리고 소 드리고 유월절 드리고 맥추절 드리고 부활절 다 하고 추수감사절, 크리스마스 다 했어요. 교회에서 크리스마스 때 빈손으로 오지 말고 크리스마스 봉투 있지요. 돈 넣어오세요. 맥추절 돈 넣어오세요. 돈 넣어라. 부활절 돈 넣어라. 목사는 또!또!또!또! 하고 있는데 이상하게 계속 해도 자기 만족함이 없어요.
거기에 대해서 주님의 대처는 이겁니다. 이 전체를 반란꾼으로 규정해버립니다. 누가? 대속물이. 대속물이 사람의 종이 됨으로 말미암아 제대로 된 사람의 종은 나 말고 이 세상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규정하고 그 다음에 공격해요. “저리 가라 이 가짜들아 저리 가라” 치워버려요. 새롭게 발생시켜요. 새롭게. 어떤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서 대속물이 되는 것이 아니고 대속물의 가치 안에서 대속물의 가치를 인정할 사람을 주님께서 새롭게 선택하고 새롭게 창조해버립니다.
손 들고 “저요! 저 예수님 믿겠습니다!” 안 받습니다. 주께서 친히 만들어야 돼요. 만들어요. 그 만들 때 하는 방법이 예수님이 대속물로 완성이 되었으니까 이 완성을 받쳐주기 위해서 죄인이 필요하잖아요. 죄인 되기 위해서 대속물의 완성의 취지를 살리기 위해서 여기 뭐가 나오느냐 하면은 여기 성령이 임해버립니다. 성령이 임해버리면 비로소 인간은 자기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애초부터 나는 태어날 때부터 죄에서 태어났음을 인정하는 언약적인 죄인이 되어버려요. ‘언약적 죄인’.
내 살과 내 피는 무조건 더러운 거에요. 그러나 반대로 예수님의 살과 예수님의 피는 무조건 깨끗하다고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근거도 없이 그냥 무조건 받아들이는 일이 벌어져버립니다. 그 무조건 받아들일 때는 내 믿음을 걷어차잖아요. 내 믿음을 걷어찰 수 있는 것. 이게 믿음이거든요. 이게 주님 주신 선물로 주신 믿음입니다.
내 믿음과 주의 믿음을 같이 있지 못하고 걷어차는 거에요. 내가 믿는 내 믿음, 내가 나를 규정하는 것. 성령이 와서 이것을 뽑아내서 지적해서 이걸 추방시켜버립니다. 삭제시켜버립니다. 내가 나를 규정하는 것. 내가 나를 평하는 것. 내가 나를 평가하는 것. 내가 나를 심사하는 것. 이것을 없애버려요. 인간으로서 이거는 불가능합니다. 왜냐 하면은 인간은 내가 나를 규정해서 나오는 나를 또 내가 여기에 다가 되물림해서 거기에 또 집어넣거든요. 내가 나를 규정해서 내가 나를 또 집어넣어가지고 내가 그만큼 발전했다 성화했다 우기고 싶어 하는 게 인간이기 때문에. 이 순환구조를 인간은 버리지를 못해요.
누가 공격을 해줘야합니다. 공격을 할 때 어떻게 하느냐? 십자가로 공격하지요. 십자가 뾰족하잖아요. 머리 콕 찍어. 십자가로 피날 때까지 때려버리지요. “내가 규정한다니까. 점수를 줘도 내가 점수 줘. 네가 너한테 점수주지 마. 네가 그러면 한 평생 네가 힘들어져. 인생이.” 때리면서 말해요.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얻어맞고 내게 오라 빈 몸으로” 인생이 내 인생이 망쳤다 행복하다 불행하다 저주받았다 “네가 규정하지마. 내가 규정할거야 말씀으로” 멍이 퍼래가지고 온 천지 얻어맞지요.
마태복음 10장 24절 25절에 이런 말씀 있습니다. “제자가 그 선생보다, 또는 종이 그 상전보다 높지 못하나니 제자가 그 선생 같고 종이 그 상전 같으면 족하도다 집 주인을 바알세불이라 하였거든 하물며 그 집 사람들이랴” 사람들이 예수님 보고 귀신 대장이라고 했으니까 예수님께 부름을 받은 너희들이 귀신 집에 있다하면 그걸로 네가 영광인줄 알아라. 왜? 그 규정은 주님이 받았던 규정이 그것이 그대로 우리한테 공유되거든요. 아까 하늘나라는 뭐라고 했습니까? 하늘나라는 주님이 갖고 있는 것 같이 갖고 있을 때 하나님 나라라고 했죠.
그래서 우리가 우리를 규정하지 않아야 되는데 그 우리가 우리를 규정해 왔던 그것이 마태복음 10장 35절에 보면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환경이 타인의 시선이 내가 그들의 요구에 맞춰준다고 해가지고 우리는 내가 그들의 요구에 맞춰서 내가 나를 규정하면서 평생을 살아가는 거에요. 그러니까 집안 식구가 가장 가까운 식구가 하나님의 원수가 되는 겁니다.
어떤 제자는 이런 일도 있었어요. 예수님을 막 따르고자 하는데 마침 아버지가 돌아가셨어. 그래서 그 제자가 그냥 상식선에서 이야기한 거에요. “우리 아버지 장례 치르고 예수님 따라 가겠습니다” 이렇게 하니까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이 예수님이 섭섭한 말씀을 해요. “죽은 자는 죽은 자가 장사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 그 제자 아버지를 죽은 자로 간주해버려요.
생명나무가 없는 자는 죽은 자에요. 생명나무가 없는 자. 생명이 없기 때문에 죽은 자에요. 죽은 자면서 사람들이 안 죽었다고 살았다고 우기는 그 이유가 뭐냐? 그게 진짜 현실인데 현실이 뭐냐?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은 현실에 있는 모든 것은 인간이 가상인 것을 티를 내는 흔적입니다. 흔적. 흔적이에요. 있다가도 없어지는 흔적이에요. 도로에 타이어 자국 많지요. 태풍 와서 그 자국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어지지요. 결국은 없어질 거에요. 우리는 이 땅에 잠시 있다가 곧 없어질 거에요.
야고보서 4장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마치 그걸 안개와 같고 물방울과 같다고 이야기했는데 그냥 요새말로 하면 타이어 자국 같은 것이다. 내가 지나간 타이어 자국 위에 다른 차 지나가버리면 내 타이어 자국은 밑에 눌려가지고 보이지 않잖아요. 이 세상은 또또또또 내가 지나간 인생 위에 있고 또 위에 있고.
그래서 나이 좀 들어가지고 생활 좀 안정돼가지고 과거 어릴 때 고생할 때 내가 이렇게 고생했다 내 자식들아 손자들아 내가 이렇게 어려운 데서 고생했다고 자기가 고생한 거 보여줄라고 관악구 봉천동에 가보면 벌써 개발되어있어. 누구 허락도 없이 내 과거를 다 지워놔버렸어요. 내 허락도 없이. 산 넘고 물 건너 개울가에서 놀던 복사꽃 피는 복사꽃 어디 있습니까? 전부 다 개발해가지고 아파트 세워 가지고 전부 다 신혼부부들 앉아있는데. 아저씨 누구세요? 이러는데.
우리는 우리 있는데 겹치고 없습니다. 우리 자신은 없어요. 지워지는 흔적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매일 하루씩 지워져요. 점점 더 멀어져가고 있는 거에요. 진짜. 점점 더 멀어져가고 있는 거에요. 누구로부터? 내가 알던 나로부터 멀어져가고 있는 거에요. 그래서 인간은 내가 누군지를 전에는 몰라서 섭섭했는데 이제는 모르는 게 나아요. 어차피 내일 되면 또 다른 내가 되어있으니까. 내가 누군지를 알 필요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그 나라 의를 규정하기 위해서 어떤 방법을 쓰느냐? 그 종들 가운데서 문제점 있는 종들 지역을 겨냥해서 공격하지요. 누가복음 다시 한번 봅시다. 12장 39절 “너희도 아는 바니 집 주인이 만일 도둑이 어느 때에 이를 줄 알았더라면 그 집을 뚫지 못하게 하였으리라” 지금 이런 말씀도 일방적으로 공격한다는 뜻이에요. “계세요?” 이렇게 오는 게 아니고 공격합니다. 마치 “도적”같이.
그 왜 그러느냐? 왜 공격하느냐? 너희가 공격받을 대상이 되기 때문에. 그 정도밖에 안되기 때문에 하는 거에요. 왜? 그들은 반란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언제 반란했습니까? 주님께서 계속 비유로 이야기하는 거에요. 포도원, 내가 왔으되 인정하고 않고 이게 뭐냐 하면은 전체를 하나의 반란군대로 보는 겁니다. 반란군으로. 공격하는 방법은 어떻게 공격하는가?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어느 한적한 주택가에 이런 담장이 있는데 담장에 도둑이 들어왔어요. 차들이 몇 대 이렇게 주차되어 있는데 형사가 와가지고 도둑정도가 아니고 살인사건이 났다 합시다. 강도해서 사람죽고 했을 때에 형사가 와가지고 이 주변에 뭘 보느냐? CCTV를 보고 그 다음에 여기에 있던 차에 있는 블랙박스를 조사하겠지요. 그 시간에.
그런데 이상하게 차가 많이 주차된 게 아니고 한 대 정도 주차되어 있고 CCTV가 한 대 있는데 다른 건 다 살아있는데 새벽 2시에서 4시 사이의 CCTV가 꺼져있다 해 봅시다. 한결 같이 이쪽 CCTV도 꺼져있다면 우연이 아니잖아요. 누가 의도적으로 안 걸리게 했지요. 그러니까 꺼져있는 CCTV를 찾는 거에요. 찾는 방법으로 주님께서는 수사에 들어가십니다. 이 세상에 대해서. CCTV가 꺼져있는. 꼭 꺼져있는 그 사건이 십자가 사건이에요.
지금 예를 들면 사도 바울이 전에 사도되기 전에 사울이었잖아요. 사울은 열심히 그 당시에 뭐했습니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여호와의 영광을 위해서 충성하고자 충성에 열심에 열심을 더해서 예수 믿는 자를 이단으로 봐가지고 체포하고 체포해서 옥에 가두고 죽이는 일을 했잖아요. 주님께서 어디를 겨냥하느냐 하면은 바로 사울에게 찾아와버려요. 사울에게 딱 찾아 와버리면 지금 사울이 농땡이입니까? 아니죠. 하나님께 열심이죠.
하나님께 열심이라는 말이 무슨 뜻이냐 하면은 이걸 이야기하는 거에요. 내가 바리새인 중에 바리새인이다 지금 이 말은 그 당시 사람들이 유대인들은 여호와가 계시고 많은 사람들이 여호와에게 나갈 때 이미 길은 확정되어있습니다. 이 길 말고 다른 길은 없어요. 그 길을 바리새인이 가장 표준적이라고 생각한 그 길이 완전히 정착되어있는 상태에서 바리새인 중에 바리새인 일등 중에 일등이 누구냐? 사울이잖아요 사울. 그 사울에게 주님이 찾아와서 네가 나를 핍박했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사울 뿐만 아니고 다른 이 모든 계통 자체가 문제 있다고 주께서는 일거에 알려버리죠.
그래서 사도행전이나 서신에 보면 이런 게 있어요. 전에 예수를 핍박하던 자가 이제 예수를 전한다 라고 되어있어요. 갈라디아서인가 나와요. 전에 예수님을 심하게 핍박하던 자가 오히려 되려 예수님을 증거한다는 거에요. 이 말은 뭐냐 하면은 누구든지 성령 받았다고 치면 바로 이와 똑같은 현상을 보여야 된다는 거에요 이게. 그게 나타날 수밖에 없어요. 왜냐? 주님은 나를 뭐로 규정했다? 범인으로 규정했다는 이 사실이 이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이게. 뭔데 나를 이렇게 진정한 죄인으로 인정해주십니까? 세상에 이런 복이 어디 있어요. 이런 복이.
요한복음 11장에 보면 나옵니다. 11장 42절에 보면 나사로가 죽은 지 나흘 되었지요. 예수님께서 기도를 했는데 기도 내용이 이래요.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그러나 이 말씀 하옵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함이니 곧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그들로” 뭐하자? “그들로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 그 전에 그들은 뭘 믿었습니까? 자기를 믿었지요. 하나님께 나아가고자 하는 자기를 믿었잖아요.
그러니까 자기를 믿은 이 방향, 자기를 믿었다 이 말이죠. CCTV를 단절, 이걸 끊어버린 거에요. 나를 믿었는데 이게 열심이었는데 이게 하나님 쓸모 있었다가 돼요. 쓸모없는 행위가 아니고 나를 열심히 믿는 것이 너무나도 쓸모 있었던 거에요. 가장 주님과 정면으로 부딪히는데 아주 적합했던 겁니다. 천국 가는 것과 정반대로 가는 모델케이스가 되어버린 거에요.
이것을 죽었던 사람이 압니다. “나를 믿게 함이라” 해놓고 주변에 사람들이 나사로 보고 사람들이 믿었습니까? 정작 믿은 사람은 누구밖에 없느냐 하면은 믿은 사람은 나사로 본인밖에 없어요. 나사로 본인. 왜냐하면 더는 내 몸이 내 몸이 아닌 것을 이미 주인을 좋게 하기 위해서 종으로 넘어간 종과 주인의 관계가 엮여져 있음을 넘어간 그 상태에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나사로가 살아나는 것을 보고 많은 사람들이 믿었다고 되어있어요. 뒤에 보면. 믿었다고 되어 있거든요.
그러나 이 믿은 사람이 그 믿음은 파생된 믿음이에요. 나사로 죽은 자 가운데서 산 것을 보고 믿어버리면 이건 파생된 믿음이에요. 이건 오래 가지를 못해요. 나사로를 죽은 자들 가운데 살리신 그분이 죽어야 돼요. 그래야 이게 영원한 믿음이 되어버립니다. 나사로 죽었다가 살아나니까 ‘아 이제 예수 믿어야지. 예수 믿어야지’ 하는 그 사람의 마음과 같은 마음이 되면 안돼요. 예수님의 마음과 하나가 돼야 돼요. 예수님의 마음과.
나사로가 살았다는 이 말은 무엇과 비교하느냐 하면은 예수님은 영원히 인간들 눈에서 사라졌다를 흔적을 보여주는 거에요. 나사로가 살았잖아요. 나사로가 산 것을 믿으면 안 되고 나사로를 살리신 분이 영원히 인간 곁을 떠났음을 믿어줘야 돼요. 우리 곁에 예수님이 없다는 사실이 되어야 우리는 나사로와 동격이 됩니다. 나사로는 본인이 살았다는 것을 믿으면 안 되고 예수님이 나를 살려준 것을 곧 죽어야 될 두 번째 죽어야 될, 나사로도 귀찮아요 귀찮아. 군대 갔다 왔는데 제대했는데 또 가는 것 같애. 이미 죽어서 쉴랬는데 또 살려놨단 말이죠.
그러니까 살아난 나를 나사로는 믿으면 안 된다니까요. 내가 죽었다가 살았다를 믿으면 안 되고 내가 죽었다는 사실을 믿어야 돼요. 누가 살았기 때문에? 예수님이 살았기 때문에. 나는 사나 죽으나 이거는 신경 쓸 필요도 없는 거라고 믿어야죠. 살아있는 주님이 중요하지 죽었다 살아난 내가 안 중요하다 이 말입니다. 그런 믿음이 될려면 이건 성령이 오실 때까지 기다려야 돼요. 다시 말해서 인간은 더 이상 자기를 규정할 필요가 없고요 예수를 믿는 그것이 예수를 믿으면 뭘 주는 게 아니고 예수 믿음 자체가 이미 얻을 거 다 얻은 거에요. 왜? 나를 안 믿어지기 때문에. 나를 안 믿기 때문에. 세상에 나를 안 믿는 사람만큼 편한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세상에 그게 자유 아닙니까 나를 안 믿는 것. 내가 나를 규정하지 않는 것, 내가 나를 평가하지 않는 것.
그래서 진짜 예수를 믿는 사람 같으면요 사라진 예수님을 믿는 자잖아요. 본인도 같이 이 땅에서 말은 잠시 살지 모르지만 사실은 이미 죽은 자. 내가 죽은 자이기 때문에 나를 더 이상 믿을 필요 없지요. 그러면 주위에서 날파리 벌떼까지 달려듭니다. 주위에서 성도보고 이렇게 이야기해요. 남들이 이야기하는 것 그 깊은 심정을 헤아릴 줄 알아야 돼요.
너는 왜 예수를 믿어? 비난이죠. 나처럼 나를 믿어야지. 주위 사람들이 안타까워 어쩔 줄을 모르면서 동정하고 또 달래고 협박 공갈하는 게 뭐냐 하면은 “나처럼 나를 믿으란 말이야. 너는 왜 예수를 믿어!” 이렇게 핍박을 하는 거에요. 내가 믿는 예수처럼 그렇게 믿어. 이게 내용이 그 안에 포함이 되어있어요. “나는 내가 예수 잘 믿고 있다는 그 나를 믿는데 너는 왜 나처럼 예수를 그렇게 믿어야지 왜 너는 예수를 믿어?”
이걸 우리 복음 쪽에서 생각하면 어떻게 반격하느냐 하면은 이렇게 반격이 돼요. 이런 사람한테 이렇게 반격할 수 있습니다. “너는 왜 천국 간다고 하면서 왜 자꾸 지옥으로 가는데?! 말은 나처럼 예수 믿고 천국 가 라고 하면서 왜 자꾸 대들어? 왜 자꾸 지옥으로 가는데?! 답답해 미치겠네” 거기에 대해서 누가복음 12장에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이 가짜 종들은 자기가 종이라고 우기면서 자기 부하 직원들을 자꾸 두는 거에요.
내가 만만한 다룰만한 사람들을 자기 종으로 다루어 가지고 종으로 다루는데 그 종으로 다루게 되면 그 종들은 어디까지 오느냐 하면은 내 선에서 멈추어버려요. 나를 밟고 넘어가지를 않아요. 나를 밟고. 이렇게 하니까 제가 주일날 설교한 게 생각나요. 주님을 만나야 되는데 복음 전하는 목사를 만나고 있어. 그러고 됐데. 뭘 됐어요. 뭘 됐는데? 사도 바울이 말하기를 나는 십자가 지지도 않았다고 했잖아요. 사도 바울이 자기를 믿으라고 한 게 아니에요.
‘사라진 예수를 믿으라. 그래야 너희들도 사라질 수 있다’ 그겁니다. 사라진 사람은 더 이상 규정의 대상이 아니다. 곧 사라질 건데. 곧 없어질 건데. 15분 뒤에 사형당할 사형수에게 적금 넣을래요? 적금 들어보세요. 보험 하나 들으세요. 이럴 수가 없잖아요. 그때 그 사형수가 뭐라고 하겠습니까? 이 나이에 15분 뒤에 죽는데 난 더 이상 나를 믿지 않습니다.
이미 나는 없어지기로 이미 결정된 거거든요. 종이 없어져야 아들이 될게 아니겠습니까. 그렇지요? 종이 없어져야. 종의 자리 옆에 아들의 자리는 없어요. 그런데 우리가 종이 됨으로서 아들의 자리가 등장하는 거에요. 주님께서 여기에 악한 종을 공격함으로서 그 나라 의가 이 세상에는 아예 없었다라는 점을 부각시킵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들은 중간 종, 악한 종의 노예가 되어있었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은. 그 권세가 무섭고 권력이 무서워서 사람이 사람에게 종이 된 거에요.
누가복음 17장7절을 한번 보겠습니다. “너희 중 누구에게 밭을 갈거나 양을 치거나 하는 종이 있어 밭에서 돌아오면 그더러 곧 와 앉아서 먹으라 말할 자가 있느냐 도리어 그더러 내 먹을 것을 준비하고 띠를 띠고 내가 먹고 마시는 동안에 수종 들고 너는 그 후에 먹고 마시라 하지 않겠느냐 명한 대로 하였다고 종에게 감사하겠느냐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
그러니까 “네가 종이냐?” “예.” “그럼 사라져라” 이겁니다. 왜요? 내가 너희의 종이었잖아. 종노릇 다하고 주님은 사라졌지요. 너도 종노릇 다하고 사라져버려라. 얼쩡거리지 말고. 그런데 권사님도 아시다시피 사라지는데 너무 오래 걸려요. 그렇죠? 좀 이렇게 서프라이즈 해서 자는 중에 없어지면 되는데 아침에 눈 뜨면 또 살아있네. 허연 백발로. 오늘 하루 스케줄 뭐 해야 하는데? 또 살아가지고. 그거 왜 살려주겠습니까? 네가 죄를 지어야 돼. 아직 남은 죄가 있는 거에요. 아직 더 질 죄가 있는 거에요.
그러니까 우리는 하루하루 살면서 이 죄 짓는 즐거움이 보통 즐거움이 아닙니다. 이걸 억지로 죄인이면서도 말도 안 되는 착한 일 하니까 사는 게 힘들어 죽지요. 죄인이 죄 지어보세요. 이기주의에다가 자기 고집과 돈 밝히고 남한테 안 질려고 하고 남한테 지는 거 죽기보다 싫고 그거는 뭐 자동적으로 가만히 있어도 바디프렌드에요.
그냥 가만히 있으면 안마 다 해줘요. 가만 있어도 죄가 막 나와요. 가만 보면서 연예인 보면서 이혼해라. 쟤 왜 또 나오냐 꼴 보기 싫은데 빨리 안 죽고. 쟤 아들 망했데 뭐 이래가지고 고소하고 난리고. 가만 있어도 이재명 안 잡아가나? 이거 뭐 바디프렌드, 오늘 제목을 바디프렌드로 할까. 알아서 안마를 다 해줘요. 이 얼마나 즐겁습니까, 인생이.
누구한테 지기 싫어서 발악을 하는 내 모습을 보면서 이래서 내가 사라져야 되는구나. 그런데 아직 안 사라지는 것은 지을 죄가 더 남아있기 때문에 안 사라지는 거에요. 왜냐 하면은 주님께서 나를 지목했다는 것은 내 CCTV를 수상하다고 일부러 지목했다는 그 자체가 복이에요. “너 찍었어!” “뭘로요?” “죄인으로!” 네가 상한 심령으로 찍었다고요. 다윗은 말하기를 “감사합니다. 제가 나의 근원을 알았고 바닥을 알았고 내 마지막을 알았고 내 시작을 알게 되어서 감사합니다. 당신은 나의 주인입니다.” 그거면 됐지요. 당신은 나의 주인입니다.
책임은 내가 종이 지는 법이 없어요. 종은 종대로 하고 책임은 주인이 다 알아서 하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성도의 특징은 내가 예수님의 종이 된 것을 무한한 영광으로, 무한한 영광으로. 어떤 자리에서도 나는 종이 된 것을 어떤 종? 누구와 결합된 종? 대속물의 종이 된 것을. 왜냐? 그분이 먼저 나의 종이 되셔서 주님이 되셨기에 이제는 그 주님이 종이 필요하니까 그 종으로 ‘나’라는 죄인을 강도 같은 죄인을 창기 같은 죄인을 대속물로 결합시켜줘서 하나님의 의인이 되게 하셨다 이 말이죠.
이제 말씀을 정리해봅시다. 오늘 48절까지 한 셈이 됩니다. 40절에 “그러므로 너희도 준비하고 있으라 생각하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 하시니라. 도둑이 어느 때에 이를 줄 알았더라면 그 집을 뚫지 못하게 하였으리라” 여기에 대해서 예비하고 있었던 사람 단 한 명도 없었습니다. 단 한 명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왜 구원을 받나? 주께서 성령을 우리에게 주시면서 이 모든 말씀이 나를 믿으라는 너 믿지 말고 나를 믿으라는 그런 취지로 성령께서 이 말씀을 사용해서 심어줬기 때문에 주께서 이 말씀대로 그대로 주께서 다 이루었다는 사실을 우리가 공유하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 안에 뭐가 살아있는가? 이 말씀이 우리 안에 살아있어요.
그렇다면 끝으로 여기 46절 “생각하지 않은 날 알지 못하는 시각에 그 종의 주인이 이르러 엄히 때리고 신실하지 아니한 자의 받는 벌에 처하리니 주인의 뜻을 알고도 준비하지 아니하고 그 뜻대로 행하지 아니한 종은 많이 맞을 것이요” 라고 되어있지요. 바로 이런 사실까지라도 주님께서 이스라엘과 이방인을 통해서 이미 역사적으로 이렇게 다 보여줬어요. 다만 해석할 수 있는 능력이 그동안 없었었는데 성령 받고 난 뒤에는 우리가 주님과 성령에 공유했기 때문에 세상을 해석할 수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해석하게 되면 우리는 어디에 속합니까? 우리는 죄의 종에 속하지요. 이미 다 과거지사지만. 하나님의 원리와 원칙을 하나님께서는 유지하고 끝까지 그걸 멈추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이 악한 일에 대해서 그 역할을 우리가 즐겁게 해나가는 겁니다. 죄의 종으로서 비로소 죄의 종이 뭔지를 유일하게 알게 되는 자가 천국에 의의 종이에요. 천국 백성입니다.
말씀이 예수님과 경유해서 해석된다는 사실을 유일하게 아는 사람은 바로 천국 백성 밖에 없어요. 왜? 하늘나라와 공유되어있기 때문에. 따라서 우리는 여기 나오는 이 바리새인, 사두개인 전부 다 누구한테 해당됩니까? 우리한테 해당되지요. 아주 즐겁게 이 역할을 하는 겁니다. 뭐 역할해도 괜찮아요. 악한 역할해도 개런티 나옵니다. 나쁜 역할해도 욕 얻어먹어도 결국은 우리는 그 나라, 의 받게 되어있어요. 왜? 역할이 그 역할이니까요.
순한 역할은 누가 한다? 주님 홀로 하지요. 그래서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내가 죄인 중에 괴수다.” 내가 죄인 중에 괴수라는 말을 서슴없이 하게 됩니다. 여러분들이 성령을 받았으면 이 말씀이 그대로 오늘날 우리에게 이 세상에 적용된 것을 흔쾌히 그리고 감사한 마음으로 받아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이 말씀만이 있는 이 세계에 우리가 지금 그냥 나그네로서 여행하듯이 관통하고 지나가고 있는 중이에요. 폭풍 속으로 말씀의 폭풍 속으로 지나가면서 여유를 가지시기 바랍니다. 우리 자신을 절대로 평가하지 마시고요 책임지지 마시고요 모든 것은 말씀대로 그냥 이루어질 뿐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에게 주인이 따로 있으니 감사합니다. 그동안 우리가 우리 자신의 주인노릇 행세한 것에 대해서 이게 얼마나 엄청난 잘못인 것을 깨달았사오니 이제부터 어설픈 주인행세가 그냥 어설프게 나타날 수밖에 없음을 받아들이면서 이 육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주께서 시키는 대로 행할 수 있는 저희들 그런 자유를 허락해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