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강의

충돌과 일치

아빠와 함께 2022. 9. 19. 19:17

강남-누가복음 12장 29절 (충돌과 일치) 220719a-이근호 목사



누가복음 12장 18절부터 보겠습니다. “또 이르되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곳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 이 말씀부터 시작하겠습니다.


성경 말씀은 그 말씀 자체가 이루어지기 위해서 인간이 성경 말씀을 지키기 위해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어요. 성경 말씀은 어떤 내용이냐 하면은 ‘성경은 나로 인하여 더 얻을게 없다. 나로 인하여 더 얻을게 없다’를 확정 짓는다. 그 이유가 뭐냐 하면은 말씀을 하신 분이 말씀만 던져놓고 그냥 계시는 것이 아니고 말씀 하신 분이 자기가 그 말씀을 하시면서 이 땅에 우리에게 찾아오기 때문에 그래요.


그 애들 어릴 때 바닥에다가 오징어 게임 비슷한 거 1,2,3,4 이렇게 해놓고 돌을 던진 아이가 그 돌을 찾아서 한발로 서서 돌을 찾잖아요. 돌을 던진 아이가 돌을 회수하기 위해서 다시 그 자리에 한쪽발로 뛰지요.


말씀이라고 하는 것은 말씀 자체를 그대로 드러내기 위해서 주님께서 말씀과 더불어 함께 오신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말씀 지켜서 더 얻을 것은 없어요. 그럼 우리의 일상은 뭐냐 하면은 내 것이 얻을게 없으면 우리는 평소에 나서지 않는 존재거든요. 그러니까 주님의 취지만 알아버리면 세상 편한 삶을 사는 거에요. 나로 인하여 얻을 것 없고 주님에 의해서 얻을 것밖에 없으니 얼마나 편한 삶입니까.


그러면 주님께서 이 말씀 찾을 때 그 말씀의 내용이 두 진영으로 되어있어요. 말씀의 내용이. 이래서는 안 된다와 이래야 된다. 두 개에요. 이래서는 안 된다, 이러해야 된다. 딱 이 두 진영. 그렇다면 인간들의 몫은 뭐냐 하면은 인간들의 역할은 이래서는 안 된다 역할이 인간들의 역할입니다. 인간들의 역할, 이래서는 안 된다. 그게 오늘 아까 읽었던 그 말씀이잖아요.


어때서는 안 된다고요? “네가 농사가 잘 되서 곡식 크게 짓고 네가 말하기를 내 영혼아 걱정하지 마라. 여러 해 동안 편히 배불리 먹고 살 수 있도록 돼있다”라는 역할은 누가 한다고요? 이래서는 안 된다 쪽에 속한 인간들이 그걸 이 역할을 해야 돼요.


이래야 된다는 역할은 우리 인간은 못해요. 우리 인간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이래서는 안 된다는 역할만 해요. 우리가 하는 것이 왜 이래서는 안 된다는 것은 우리 자신은 모르고 주의 말씀이 오게 되면 너는 이래서는 안 된다의 역할이야 라고 이렇게 알려주는 것. 그게 말씀의 기능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는 것을 네가 지금 하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역할이 이 말씀의 역할이지요.


그러면 이래서는 안 된다 하는데 왜 인간은 왜 하느냐? 이것은 인간들의 요구 또는 요청이 있어요. 이게 운명이든지 신이든지 누굴 대상하던지 간에 인간은 자꾸 뭔가 요구하고 요청해요. 그렇게 되었으면 참 좋겠네 라고 계속해서 그 생각하거든요. 그러니까 인간들의 요구와 요청과 이래야 된다는 주님 쪽이죠. 주님의 역할이죠. 주님의 요구와 요청이 서로 충돌합니다.


이 충돌하는 이 경계선에서 뭐가 생기느냐 하면은 말씀의 의미가 규정이 돼요. 의미가 규정이 된다. 이 말씀의 의미는 인간들은 이래서는 안 된다 이런 식으로 모든 인간의 표현이 해서는 안 될 것을 표현했고, 해야 될 것은 예수님께서 하셨다 라고 말씀의 경계선을 통해서 두 개의 판이 서로 충돌한 겁니다.


그렇다면 인간들이 이래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아요? 몰라요? 모르지요. 그래서 인간들 입장에서 인간들 요구사항 요청에 맞는 어떤 신을 원하는데 메시야를 원하니까 인간들 눈에는 인간들 이런 입장에서 볼 때 예수님은 이렇게 돼요. 예수님은 아무도 찾아오지 않았다가 됩니다. 예수님은 아무에게도 찾아오지 않았어요. 왜? 찾아가도 못 알아보니까. 알아보지를 못해요.


그것은 인간들이 그들의 요구와 요청에 부합되는 신과 메시야를 따로 생각한 바가 있기 때문에. 따로 생각해둔 것이 있기 때문에. 그래서 성도란 우상을 돌파해야 돼요. 우상을. 제가 서울강의할 때 그린 그림이 있는데 그 그림을 강의 녹취하시는 분이 그림을 그렸지요. 어떻게 했는지 모르겠지만 사진으로 실어놨는데.


십자가로 뚫어서 사진 뒤에는 십자가 튀어나오도록 골로새서 2장에 나오는 말씀. 이게 뭘 뚫었다 했습니까? 율법, 문서화된 율법. 율법을 십자가로 뚫은 거에요. 찢어버린 거에요. 빵꾸 낸 겁니다. 율법 빵구 났으니까 율법은 쓸 데가 없어요.


인간들의 요구와 요청은 이 율법에 대해서 오해하고 있었습니다. 이 율법대로 되는 그러한 신과 메시야, 하나님과 메시야를 원했던 자, 그게 바리새인과 서기관들과 사두개인들이었어요. 그들은 아담의 후손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도 아담의 후손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신학을 연구하고 날고 기고 연구하고 분석하고 백날 해도 바리새인과 사두개인과 서기관들의 안목 바깥으로 못 넘어갑니다. 똑같은 성품을 지녔기 때문에. 속성을 지녔기 때문에. 아담의 속성을 지녔기 때문에.


그들이 바리새인과 서기관과 사두개인들이 연구한 그 연구의 범위 내에서 우리는 노력할 뿐입니다. 누구든지 바리새인보다 더 의가 낫지 아니하면 누구든지 천국에 못 들어간다는 말은 인간이 할 수 있는 모든 역량, 지혜의 최종 정점에는 바리새인 사두개인들이 구축해놓은 그 지혜 밖으로 못 나갑니다. 왜 그런가? 그들에 의해서 예수님이 살해되야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들에 의해서.


아마 그들보다 더 똑똑한 사람 있다면 그 똑똑한 사람에 의해서 예수님 살해 됐을 거에요. 그들보다 더 IQ 높은 사람 있으면 그 사람한테 십자가에 죽었을 거에요. 철두철미하게 바리새인과 서기관들과 사두개인들은 바로 율법을 인간들의 요구와 요청에 부응하는 하나님으로 그들을 그렇게 생각을 했습니다.


자, 그렇다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과 사두개인들이 원했던 것은 그들이 진짜 하나님입니까 아니면 그들이 원하는 하나님이었겠어요? 그들이 원하는 하나님이죠. 그들이 믿고 싶어 하는 하나님이죠. 그들이 믿고 싶어 하는 하나님이라면 하나님이 주도권을 갖고 있어요? 믿겠다는 본인에게 주도권을 갖고 있어요? 믿겠다는 본인이 주도권을 갖고 있는 거에요.


여기 물이 있거든요. 자, 물이 있다. 목이 마르다. 내가 원하는 물이 아니다. 그러면 물 바꿔야 되겠지요. 여러분들이 잘 아는 춘향전에 변사또가 변사또의 생일 때 그 고을의 기생들이 왔을 때 한 명 왔습니까? 여러 명 왔습니까? 여러 명 왔지요. 거기에 사또 밑에 이방이 여자 하나하나를 소개합니다. “사월이~~” 소개하거든요. 그때 사또가 “엥!엥!” 하고 고개 돌렸잖아요. “춘월이~~~” “엥!” 하고 고개 돌린다고요.


주도권은 선택을 하는 사또가 본인이 요청하고 요구하고 싶은 바가 있어요. 거기에 부합되는 수발 드는 기생이고 싶다 이 말이죠. 더는 없느냐? 더는 없느냐 하니까 성경적이네. 이새의 아들 7명 외에 더는 없느냐? 뭐 꼬마가 하나 있는데 양 치러 갔습니다. 그 놈 대령하라 이거랑 똑같은 거죠.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은 자기들이 무시하는 게 아니고 아니까 자기가 확보한 그 정보와 부합되는 메시야가 아니면 메시야가 아니라고 여기는 거에요. 예수님께서는 결국은 그 바리새인에게 살해당했다는 말은 인간들이 아무리 아이디어를 짜내고 머리를 짜내도 십자가 사건을 부정할 수 있는 그런 심성을 갖고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십자가 사건은 필연적으로 모든 인간이라면 예수님과 마주쳐서 일어날 수밖에 없는 사건이에요. 이 충돌판. 그게 십자가가 모든 의미의 최종적인 겁니다. 모든 말씀은 십자가에서 나올 이유가 인간에서 나올 것은 다 가져와. 그리고 주님께서 하나님의 마음의 깊은 곳 이쪽에 가져와. 그게 예수님이에요.


저쪽에서 포카 할 때 콜 해서 저쪽에서 한꺼번에 다하고 이쪽에서 다해서 마지막에 까게 하는 거에요. 자, 까자 까. 누가 이겼는지 한번 까자. 에이스하고 텐 갖고 있으면 보니까 9 갖고 있으면 깔 때 손목에 뭐 하나 기어 나오지요. 슥 바꿔치기 해서 이겼다 하고 몽땅 다 가져가잖아요.


인간은 자기 지혜를 부정하기 싫어요. 하나님하고 겨누고 싶어요. 자기 우수함에다가 하나님의 은혜를 주시면 그거 보태서 역시 우리가 하는 것이 헛되지 않았다는 것을 스스로 자기에게 증명하고 싶은 겁니다. 그래서 내가 이만큼 아니까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을 믿을 것인가를 내가 선택하고 싶은 거에요.


그러면 내가 선택한다는 것은 무슨 뜻이냐 하면은 굳이 하나님 안 믿어도 하나님마저 선택할 수 있는 권한이 있는 나는 내 스스로 자족스럽단 뜻이에요. 아쉬운 게 있더라도 견딜만하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성경을 볼 때는 항상 이쪽, 인간들의 심보를 가장 솔직하게 그 마음을 가지고 성경을 봐야 돼요.


어떤 마음이냐 하면은 내가 교회 가서 하나님을 믿지만 이건 뭐 어디까지나 이거는 취미고 나중에 한 20년 50년 믿어도 그거 뭐 이거 믿은 거 무효가 된다고 할지라도 그래도 챙길 건 챙겼다라는 자기 단도리가 돼있는 상태에서 교회 나오고 예수 믿습니다. 자기가 알지요. 아무리 하나님 믿고 예수 믿어도 내 목숨을 다 걸만큼 그 만큼 가치는 안 된다는 걸 본인이 알고 그걸 남들에게 속이고 신앙생활합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안 와도 별 아쉬운 게 없는 거에요. 내가 그럴 줄 알았다. 내가 그럴 줄 알았어 뭐. 온다는 소문만 무성했지 뭐. 와야 오는 거지. 안 와도 상관없는 자기의 대책은 다 세워놓고 그냥 한번 믿어볼까 이런 거에요. 생명보험회사 망했다고 자살하지는 않잖아요. 그냥 혹시 돈 주면 고맙고 안줘도 남의 돈 가지고 돈 떼인 것은 아깝지만. 그만큼 인간들은 극단적이고 싶지 않아요. 극단적이고 싶지 않습니다. 철저하게 자기 대비책, 방어책은 다 챙겨놓고 가는 거에요.


그런데 예수님의 오심은 바로 이 십자가 사건은 서로 상호 대립돼있다는 거에요. 대립된다는 말은 이미 인간들이 나름대로의 신과 메시아를 아는 이상 절대로 예수님 쪽으로 건너올 재주는 전혀 없는 거에요. 전혀 없습니다. 주께서 인간을 구원함이 아니라 예수님은 자기 예수님 자신을 구원하기 위해서 이 땅에 오신 거에요.


예수님 자신을 구원할 때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그 언약이 자기 구원 안에 그 모든 말씀이 다 이루어져버린 거에요. 다 이루어진 거에요. 다 이루어졌다는 말은 예수님 자신이 구원되잖아요. 그럼 예수님 자신 안에 뭐가 들어 있습니까? 이러해야 된다, 이러해서는 안 된다 둘 다 다 들어있지요. 왜? 그래야 예수님 십자가의 공로가 드러나니까요.


내가 누구한테 당했는지 당했다는 그 공로가 아버지 앞에 유일하게 의로 인정받는다면 누구한테 당했는지 같이 있어야 되겠지요. 따라서 예수님의 말씀 속에는 이래서는 안 된다 라는 역할도 예수님 안에 들어와야 되는 거에요. 그래서 이걸 예수님은 아주 간단하게 이야기했어요.


“나는 죄인을 부르러 왔다” 아주 너무 간단하죠. 이 같은 말이 뭐냐 하면은 나는 의사로서 환자를 부르러 왔다. 같은 말이에요. 달리 말하면 내가 의사로 의사되기 위해서는 멀쩡하다고 여기는 자를 뭐로 만들겠다? 기어이 환자로 만들어서 나의 의사됨을 보여주는 증거물로 사용하겠다는 이런 뜻이에요. 참 쉽죠 잉?! 굉장히 쉽잖아요.


그런 의미에서 이 22절부터 보겠습니다. 결론은 굉장히 쉬운데 이 말씀은 굉장히 22절부터 34절까지 길지만 굉장히 어려운 말씀이에요.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고 몸이 의복보다 중하니라. 까마귀를 생각하라 심지도 아니하고 거두지도 아니하며 골방도 없고 창고도 없으되 하나님이 기르시나니 너희는 새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이 말씀이 너무너무 어려운 말씀인거에요. 이 말씀이. 이 말씀이 왜 어려운 말씀되느냐 하면은 사람들이 이 바리새인 같은 사고방식 가지고 내가 어떻게 하면 구원 받습니까를 내가 괜찮은 하나님을, 하나님 쪽에서 괜찮은 말씀 하게 되면 우리가 지킬 수 있는 괜찮은 말씀하게 되면 넙죽 그 말씀을 내가 지켜서 기어이 내가 나를 구원받는 나로 만드는데 이런 말씀보다 더 쉬운 말이 어디 있냐? 이런 식으로 해석을 하는 거에요.


“그래 참새 키우시고 까마귀 키우시는구나. 주여 저 한번 키워주소! 저 믿습니다! 키워주소! 됐다 됐어! 드디어 구원받았어!” 얼마나 쉬워요. “저 까마귀 될래요. 김 까마귀.”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고 몸이 의복보다 중하니라. 아멘! 대번 준비됐던 아멘 튀어나오지요.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고 몸이 의복보다 중하니라. 저 믿습니다! 됐지요?


내가 원하는 구원을 너무나 쉽게 들어주셔서 정말 상투적인 말로 하나님의 말씀은 배웠다고 신학교 갔다고 아는 게 아니고 어린 아이 같은 마음으로 받아들이면 누구나 구원받는다는 이 말, 그 말이 더 어려운데. 너무너무 쉬운 거에요. 자신의 노림수가 들통나버린 거에요. 충돌판이 하나도 없어 버렸어요.


이것은 뭐냐 하면은 마지막 의미가 주님이 이러해야 한다는 것은 생각 못하고 내가 이러하고 싶은 것이 드디어 달성했다는 나의 의미로 종결되면서 구원받았다고 우기게 되는 겁니다. 구원 받았다고. 그러니까 뭐가 날라갔어요? 충돌판, 걸림돌. 다른 세 자로 하면 십자가가 날라가 버린 거에요. 십자가가. 십자가가 모든 걸 관통하잖아요. 이것 보세요. 율법이고 뭐고 모든 걸 관통하잖아요. 찢어버립니다.


그런데 인간은 자기 예수 믿는 마음은 안 찢길려고 하는 거에요. 자기는 빵꾸 안날라고 하는 겁니다. 십자가로 찢을려고 들이대니까 어어어~~~저 부활 믿을래요. 십자가 믿습니다. 빨리 부활주세요. 부활의 새 생명 주세요. 그 부활의 새 생명 안고 있다고요 거기서.


마치 그 솔로몬 시대의 요압인가 죽인다고 하니까 그 성전의 언약궤 붙들고 있다가 살라고 언약궤가 모든 죄를 용서하는 솔로몬이 가차 없이 끄집어내서 죽여버렸어요. 한번 봅시다. 요압이고 아비나단이고 그 구세력들. 요새말로 하면 좌파들. 요압을 죽이잖아요. 그렇죠? 그 2장 28절에 나옵니다.


왜 죽어야 되는가? 주께서 주신 새로운 추가된 계시가 없기 때문에 죽인 거에요. 추가되는 새로운 계시. 옛날의 계시를 붙드는데 그 계시는 뭐냐? 그 하나님의 뜻이 아니고 나를 살리기 위해서 주의 뜻을 활용하고 이용하고 적용하는 그 인간을 그 다음에 나오는 새로운 계시가 죽여버리는 겁니다.


마지막 계시가 여러분 뭔지 아시죠? 십자가죠. 내 살과 내 피. 내 살과 내 피라고 하는 것은 어떤 인간도 살거나 구원받을 자격자는 단 한 사람도 없다. 왜? 구원은 예수님이 자신을 구원하기 때문에. 예수님이 자신을 구원하기 때문에. 곧 예수님이 남기신 그 말씀을 구원한다는 말은 말씀을 다 이루시려고 오시기 때문에.


아버지의 뜻을 예수님 홀로 다 이루셨어요. 홀로. 다른 이름 말고 예수님 본인 이름으로 했기 때문에 예수님 본인으로만 이루어졌기 때문에 홀로 이루신 그 이름만이 구원의 이름이에요. 다른 데는 구원의 능력이 안 나옵니다. 오직 예수님 홀로에서만 구원이 나오기 때문에 구원 받은 자는 예수님 홀로하셨다는 고백만 나올 뿐이죠.


그럼 너는 뭐했는데? 나는 뭐 이래서는 안 된다 그것만 했지 뭐. 그래서 내가 한 그것이 나에게 돌아오지 않는 것에 대해서 감사하는 거에요. 내 자신에게 더는 얻을 것이 없다는 아까 그 말이 그 뜻이에요. 내 자신에게 더는 얻을 것이 없는, 내가 기도했다고 헌금했다고 더 얻을게 안 나와요.


세상 사람들은 이야기합니다. 무엇이 현실인가? 무엇이 실제인가? 옛날 신학자들은 그걸 연구했는데 무엇이 현실이고 무엇이 실체고 무엇이 실제냐 무엇이 현실이냐 뭐 여러 가지 단어를 용어를 써가면서 이렇게 하는데 성경에서 인간들이 할 수 있는 무엇이 진짜냐 하면 이건 진짜에요. ‘죽음’. 죽음 앞에서 모든 인간이 공평해요.


아무리 내가 진짜다 진짜다 우겨도 모든 인간은 차이 없이 똑같이 적용되는 것은 모든 인간은 죽는다는 겁니다. 성경에서는 이 죽음이 진짜죠. 그 죽음을 확대시켰습니다. 뭘로 바꿨느냐 하면은 불심판으로 바꿨어요. 뭐가 진짜냐? 불심판이 진짜죠. 불심판 앞에 차이를 논한다는 것은 이건 웃기는 이야기에요. 불심판 앞에서 한 달 수입을 논하고 불심판 앞에서 자기 아파트 평수를 이야기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어차피 다 탈 건데요.


그래서 내가 죽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요 우리 질문은 예수님과 함께 같이 결합이 된 사람 같으면 내가 죽는다, 나는 죽는다고 생각하지 말고 주어를 ‘내가’로 두지 말고 ‘죽음’을 주어로 죽음이 어디서 오는가를 봐야 돼요. 어디서 오는가. 이것부터 해야 성경해석이 돼요. 죽음이 어디서 오는가? 너, 나 차이 없이 똑같이 오는 죽음은 도대체 어디서 오는가?


예수님의 죽음에서 오지요. 네가 날 죽였잖아. 거기서부터 오는 거에요. 예수님 죽은 것은 언약이죠. 언약에서 오는 거에요. 언약이 뭐냐? 십자가. 십자가에 언약이 왔기 때문에. 도대체 이렇게 잘 나가고 이렇게 착하고 이렇게 훌륭한 내가 왜 죽어야 되지? 그 죽음은 어디서 오는가? 이 십자가를 인간의 능력으로 건너올 수 없기 때문에 죽어야 되지요. 죽어야 되는 거에요.


아까 이야기했잖아요. 대구강의 요약하면서 우리아 장군의 죽음은 어디서 오는가? 예수님에게서 오는 거죠. 그래서 죽어도 살고 살아서 죽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 한다. 내가 살아있는 게 아니라 언약이 살아있으면 되는 거죠. 언약 안에서 우리가 호명당하고 호출 당했잖아요. 너는 내 백성이라고.


그럼 언약 살아있으면 우리는 그 안에 주와 함께 같이 살고 있는 겁니다. 지금 우리아 장군은 주님과 함께 살고 있는 거에요. 다윗도 마찬가지고. 그래서 아까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취미고 내 단도리 다 했고 밉다가도 하나님 없어도 뭐 사는데 지장 없다고 하는 것은 전부 다 뭐냐 하면 죽음부터 시작하는 게 아니고 내가 죽는다 이 정도로 생각하는데 죽음이 왜 오느냐는 생각 안하고 죽을 때 죽더라도 지금 살아있잖아요. 자기 살아있다고 이야기하는 거에요.


그런 현실을 단기적 현실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냥 장기적 현실은 죽음까지 계산해보면 인간은 인간이 아무리 길게 살아도 죽는 순간은 죽는 순간이에요. 나는 96세 살았다 라고 하지만 송해가 죽는 그 순간은 그동안 죽음이 살아왔다. 주어가 바뀌죠. 송해가 산 것이 아니고 죽음이 네 안에서 살아왔다. 너는 껍데기야 껍데기 그렇게 되는 겁니다. 제가 지금 이야기하는 것은 어떤 누구도 이 말씀을 지킬 수 없다는 이야기를 계속하고 있습니다.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고 몸이 의복보다 중하다”의 제대로 의미를 아시는 분은 예수님밖에 없어요. “너희는 새보다 더 귀하다” 의미를 아시는 것도 예수님밖에 없어요. 우리는 너희에다가 건방지게 우리 자신을 집어넣을려고 합니다. 아 구원받기 쉽네. 십자가 안 믿어도 까마귀로 여기면 김 까마귀면 구원 받네 이렇게 된다고요.


24절에 까마귀를 생각하라 하니까 저 까마귀에요. 까마귀도 하나 해야 되고 1교시 까마귀 생각 2교시 십자가 생각 3교시 부활 생각. 이수할 과목이 한 두 학점이 아니에요. 많아요 지금. 자기도 나중에 헷갈릴 거에요. 인간은 십자가를 모릅니다. 몰라도 돼요. 왜냐하면 십자가는 예수님만 알면 돼요. 굳이 나까지 십자가 알 필요 없습니다. 주님만 십자가 알아서 그 십자가 집어넣으면 되는 거에요 우리를. 그만한 능력 주님한테 있습니다. 그만한 능력. 우리가 워낙 무식하니까.


우리의 죽음은 뭐냐? 십자가에서 오는 거죠. 사도 바울의 고백입니다. 십자가에서 오는 거에요. 그래서 죽는 날까지 전부 다 십자가 그 복음을 위해서 자기가 살아도 십자가를 위해 죽어도 십자가를 위해 죽는다. 주의 행하신 일을 위해서 죽는다. 그것이 계속해서 이어지는 겁니다.


25절 “또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느냐. 그런즉 가장 작은 일도 하지 못하면서 어찌 다른 일들을 염려하느냐. 백합화를 생각하여 보라 실도 만들지 않고 짜지도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큼 훌륭하지 못하였느니라” 이 이야기 듣고 성질 급하면 저도 동의해요! 이런다고요.


그럼 동의하면 구원받습니까? 이 이야기는 너희들이 이 말씀을 못 지키기 때문에 주신 말씀이에요. 이 말씀을 네가 모른다는 거에요. 왜 모르는가? 의미라고 하는 것은 두 개의 대립된 충돌, 마주칠 때 의미가 되는 것이지. 이거 쉽네! 백합 되면 되잖아. 이 의미는 무슨 의미를 놓치느냐 하면은 주님이 죽어야 될 의미를 빼버리는 의미이기 때문에 그것은 주께서 인정하지 않는 의미에요. 의미하지 않는 진리입니다.


이 말씀대로 안 지키면 된다는데 얼마나 쉽습니까. 이 말씀대로 지적받으면 돼요. 지키지 말고 지적받으면 돼요 이 말씀을. 어제도 지적받고 오늘도 지적받고 내일도 지적받겠지요 뭐 이런 식으로. 말씀으로 지적받으면 돼요. 이걸 지킬 생각하지 말고. 왜? 우리 본심은 뭐냐? 내가 요청한, 나 잘해주는 내가 원하는 기준을 충족해주는 그런 메시야, 그런 하나님, 그런 하나님을 내가 꾸준히 원하고 있으니까요.


십자가가 없는 나로 죄인 만드는 그런 하나님 말고. 내가 열심히 살았다는 것을 이렇게 칭찬해주고 우쭐대게 만들고 장려하게 하는 하나님을 내가 원하고 있잖아요. 내 가치를 살려주는 하나님. 그 하나님. 그 하나님을 원하고 있는 입장에서 어디 건방지게 이 말씀을 지키겠다고 할 수가 있겠어요.


여기 31절에 봅시다. “다만 너희는 그의 나라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런 것들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하늘 나라를 구한다고 해서 기도한다고 해서 구원받는 게 아니에요. 이 말씀은 지킬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대립관계이기 때문에. 그래서 그의 나라 구하는 게 뭐냐? 우리가 하나님 믿고 거기에다가 31절 말씀 그의 나라까지 또 구하고 더 보태가지고 보태면 완벽의 완벽을 기했으니까 이렇게 어지간히 해도 하자가 없겠지.


그렇게 하게 되면 하나님의 나라는요 우리의 생각에 달라붙는 게 아닙니다. 안 달라붙어져요. 십자가라는 것은 내침을 당할 때 생겨나는 사건인데 어떻게 달라붙어요. 그래서 제가 일부러 준비했습니다. 그 나라와 의를 구하는 그 반대되는 마음이 어떤 마음인지. 여러분들의 예상은 빗나가지 않지요. 노래 가사 적어왔습니다. 좀 긴데요.


‘넌 모르겠지만 사랑했다 비정한척 했던 것 사과한다 남자란 이유로 널 떠나보내며 행복해지기를 바보처럼 기도했었다 흔들리는 날 잡던 두 손 이젠 독한 소주잔만이 날 위로해 두 눈 꼭감고 입맞추던 내 입술엔 해로운 담배 한 개피로 널 추억해본다 바람아 불어라 못 다한 얘기들 그녈 만난다면 대신 전해주겠니 이 세상 누구보다 잘 살아달라고 나의 사랑 이젠 good-bye’


김장훈이 불렀던 ‘난 남자다’ 라는 노래입니다. 이 가사에 보게 되면 자기가 남자이기 때문에 쿨하기 때문에 이제 떠나보냈던 그 여자에게 이 세상 누구보다 더 잘 살아달라고. 이건 노래를 들어야 돼요. 나의 사랑 이젠 이게 발음 잘해야 돼요. “긋~바이~” 너를 보내고 나는 괴로웠어. 독한 소주와 해로운 담배 한 개피로 널 추억해본다. 그 정도로 비록 지금은 헤어졌지만 내가 너를 사랑했던 남자로서 너의 미래에 대해서 다 기도하고 내가 후원하고 행복을 빌께. 왜? 나는 남자이니까.


그 뒤에 가사 보면 절절해요. 좋은 음식 예쁜 옷 볼 때마다 가난한 우리 지난날 떠올라 아무것도 못해준 너의 생일 올 때면 해주고 싶어도 이제 너 내 곁에 없구나 바람아 불어라 못 다한 얘기들 그녈 만난다면 대신 전해주겠니. 이 노래 알아요? 이 세상 누구보다 잘 살아달라고 나의 사랑 이젠 good-bye 너 하나만 행복하다면 미련한 여자였던 너는 지금쯤 어디에 있을까 못 견디게 그리워 바람아 불어라 못 다한 얘기들 그녈 만난다면 대신 전해주겠니 이 세상 누구보다 잘 살아달라고 나의 사랑 이젠 good-bye La La La La La.


철저하게 자기 자신의 정당성을 확보하는 것 이게 바로 그 나라 의와 정반대되는 심보입니다. 나는 비록 너한테 못해줘서 미안한데 그 미안한 감정을 나는 남자니까 내가 갖고 있다고 이만하면 괜찮은 남자잖아? 이런 거. 이 정도하면 괜찮잖아. 멋있지 않아? 성의를 표한 거 맞잖아. 그 나라와 의, 나 하늘 나라 압니다 이러지 말고 그 나라와 의에 반대가 뭐냐를 생각해야 돼요. 반대가 김장훈의 난 남자다 가사 그대로가 반대에요.


나로서는 최선을 다하고 성의를 다 표해줬다. 더 뭐 어쩌란 말인가. 이거는 쉬는 시간에 한번 들어보세요. 발차기 하면서 불렀던 노래. 바로 남자의 객기, 허세와 허풍 그 안에는 자기 정당성, 이걸 가지고 로마서 10장에서는 ‘자기 의’라고.


자, 하나님의 의 맞은편에는 뭐가 있다고요? 자기 의가 있어요. 자기 의. 더는 못해. 뭐 내가 할 수 있는 건 다 했는데 뭐 어떻게 더 할 수 있단 말인가. 사과할게. 내가 미안해. 진정으로 미안하다고. 비록 떠나갔지만 너는 행복하기를 내가 빌어줄게. 됐냐 이정도 하면. 계속 누구 생각하고 있어요? 자기 방어하는 거에요. 자기 방어.


이미 자기 의가 장착되어 있고 자기 의를 계속해서 고이고이 유지하는 그런 하나님을 원하고 그런 예수를 원하는 거에요. 누가? 오늘날 교인들이요. 어떤 신학이든 좋은데 그 신학이 나의 최선을 향하여 내가 이렇게 열심을 다하여 섬기는 이것을 옹호해주는 그런 신학이라면 오케이 내가 흔쾌히 받을게. 그러나 나를 개무시하는 그런 것은 나는 거부하겠다.


그렇다면 마가복음 7장 28절 어떻게 생각합니까? “그 여자는 헬라인이요 수로보니게 족속이라 자기 딸에게서 귀신 쫓아내 주시기를 간구하거늘 예수께서 이르시되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지니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예수님께서 이 떡은 자녀한테 줘야지 개한테 줄 게 아니다. 어디 개가 넘보냐 할 때 이게 수로보니게 여인이 말합니다. 넘봤어요.


다시 보겠습니다. 이래서는 안 된다 하고 이래야 한다는 예수님 역할이고 이래서는 안 된다 이거는 인간의 역할이죠. 이 여인은 이래서는 안 된다에서는 뭡니까? 이렇게 했어요. “옳소이다” 했어요. 주님의 부정에 대해서 옳다고 이야기했어요. 내가 주님의 개라고 이야기한 것에 대해서 합당하다고 이야기했어요.


그러니까 그 여인에게는 뭐가 생겼느냐 하면은 예수님의 인간 보는 그 마음가짐이 여인에게 발생된 겁니다. 발생되지 아니하면 딸에게 있었던 이 악한 귀신이 떠나지 않아요. 귀신은 주님만 무서워해요. 주님만 무서워하기 때문에 주님과 동일한 어떤 마음이 발생되게 되면 귀신은 꼼짝도 못해요.


주님의 마음이 뭡니까? 너 죄인이야. 어딜 넘봐! 어디 구원을 넘봐? 영생을 넘봐! 이 개 같은 존재가! 라는 그 안목이잖아요. 그 안목에 대해서 옳소이다 하면 끝날 문제에요. 그래도 혹시 자녀가 먹다가 안 먹고 갖다버린 부스러기는 있지 않습니까? 이 부스러기라는 말이요 뭐를 경유한 떡이에요? 이미 자녀가 먹고 여분의 것. 여분의 것이죠. 여분의 것이잖아요.


그 여분의 것은 어떤 자만 먹어요? 다른 사람이 그 더러운 것 먹겠어요? 누가 먹어요? ‘개’라고 자기가 개인 것을 너무나 기쁘게 받아들이는 사람. 주워 먹는 것을 주특기로 여기는 사람. 남 흘린 것을 자기 주식으로 여기는 사람. 그 자녀에게 준 떡이라도 주님이 준 떡이라면 영생의 쪼가리라는 것을 아는 사람.


그 사람은 자기가 개라는 것은 관심 없고 저 떡이 어디서 나온 떡이냐가 저게 영생의 떡이다 하고 자기하고 바꿔치기가 가능해요. 자기 어차피 죽을 인간이니까. 지옥불에 갈 인간이니까. 바꿔치기가 가능한 거에요. 그러니까 이 여인의 행동은 예수님으로 하여금 예수님의 계획의 일부가 이게 노출된 겁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은 미국의 대법원에서 낙태죄가 일부 발표하기 전에 이게 뉴스가 되가지고 미리 빼돌려가지고 알려졌지요. 주님의 계획이 십자가 이후의 계획이 이 수로보니게 여인에게는 미리 빼돌린 셈이 되어버렸어요. 그래서 예수님이 그 여인의 믿음이 이스라엘의 믿음보다 더 낫다고 이야기한 거에요. 바꿔치기가 가능한 겁니다.


왜? 개이기 때문에. 더 이상 아쉬울 것이 없기 때문에. 개라도 뭐 점잖은 개? 개가 개지 뭐 점잖은 개, 훌륭한 개 뭐 그런 거 어딨어요. 개는 인간 아니라는 점에서는 똑같잖아요. 내가 주님 보시기에 인간 아닙니다 그 안목이 주님이 주신 안목에 의하여 비로소 이게 그런 고백이 나온다 이 말이죠.


“여자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상 아래 개들도 아이들이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 말을 하였으니 돌아가라 귀신이 네 딸에게서 나갔느니라 하시매” 이 이야기는 예수님하고 여자하고 이야기했는데 딸에게 있는 귀신이 나가버렸어요. 이 말은 여인이 훌륭하다가 아니라 예수님의 하시고자 하는 그 일에 있어서 그 영적인 일에 귀신 쫓아내는 그 영적인 일에 있어서 여자를 파트너가 되도록 주께서 의도적으로 삼아버린 거에요.


그러니까 주님께서 귀신이 이 여인의 딸에게 들어가도록 주께서 사전에 허락해놓고 들어갔던 귀신이 어떻게 빠져나온 그 경로를 통해서 주님의 안목에서 진정으로 원하는 믿음은 이런 믿음이라는 것을 수로보니게 여인을 통해서 미리 흘린 거에요. 십자가 이전에. 십자가 이전에 그 흘린 사건들이 굉장히 많습니다. 48년 병자도 그렇고요. 그 베드로가 “떠나소서 나는 죄인입니다” 하는 것도 마찬가지고요. 군데군데 흘렸는데 기적, 표적이라고 이렇게 표현합니다. 기적과 표적. 떡을 주고 오천 명 나눠주고 이런 것도 마찬가지고.


다시 본문으로 누가복음 12장 봅시다. 26절 그런즉 가장 작은 일도 하지 못하면서 어찌 다른 일들을 염려하느냐. 이렇게 되어있지요. 주께서 여기서 언급한 게 염려 언급합니다. 인간은 돌을 옮길 수가 있어요. 인간은 산을 옮길 수도 있습니다. 공사 건설사 와가지고 포크레인 파가지고 옳겨지지요. 아파트 지을 수 있어요. 인간은 홈런도 치고 높이뛰기도 하고 다 할 수 있어요.


하지만 높이뛰기 하면서도 염려하는 것은 인간은 염려하는 것을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그래도 흑인선수 아니면 1등 하는데 2등 했다고 메달. 우리나라 선수가 높이뛰기. 그 흑인선수만 아니면 금메달. 그 우리나라 선수가 충성! 하는 군인이 얼마나 염려했겠어요. 몇 년을 기다린 건데. 뭐 이 염려는 결국 염려하지 말라는 말은 뭐냐? 너희들 지금 염려하고 있다는 거에요.


10분 쉽시다.

 

 

강남-누가복음 12장 29절 (충돌과 일치) 220719b-이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하겠습니다. 하나의 그 남자의 자부심으로 다른 사람에게 잘해주는 것은 염려하고 무섭기 때문에 그래요. 인간의 모든 행동은 안에 염려가 출렁이고 걱정 근심이 출렁이기 때문에 그걸 나름대로 해소를 할려고 선악체제가 가동이 돼요. 착하게 살면 바르게 살면 뭐 복이라도 오겠지 그렇게 되는 겁니다.


이 말은 자기는 때려 죽여도 개가 안 될려는 거에요. 무의미한 존재, 다시는 인간이 될 수 없는 개는 개거든요. 사람 취급 못 받잖아요. 내가 어떤데 왜 내가 사람 취급을 못 받아. 여기 내부적으로 강한 반발이 일어납니다. 그러면 그 강한 반발이 일어난다는 말은 주의 말씀에 강한 반발이 일어난다는 말은 이미 강한 반발이 그동안 숨어있었다는 뜻이거든요. 숨어있었는데 예수님의 그 말씀과 복음이 딱 오니까 그게 참지 못하고 튀어나온 거에요. 튀어나오죠.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실 때부터 내가 내뱉은 어떤 말씀도 그걸 충족시킬 위인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고 그것은 구원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은 이 땅에 아무도 없음을 주께서 스스로 증명해나가시는 거에요. 구원은 예수님 자신만 구원하지요. 다른 사람은 구원 할 수가 없습니다. 여기 또 염려하느냐 되어 있지만 29절에서는 근심이라는 말 나와요.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하여 구하지 말며 근심하지도 말라”


30절에 “이 모든 것은 세상 백성들이 구하는 것이라” 그 점을 한번 설명해보겠습니다. 이 설명은 어렵지 않습니다. 망나니처럼 자기 멋대로 사는 사람을 술 먹고 돈도 안내고 식당에서 행패부리면 어떻게 하지요? 경찰이 와서 잡아가지요. 잡아가서 어디로 갑니까? 유치장에 집어넣지요. 이걸 가지고 사회로부터 격리라고 합니다. 사회로부터 격리시킨다.


자, 이게 유치장입니다. 여기 여러 범죄를 저지른 사람 있습니다. 이 사람들 그냥 놔둡니까 아니면 새로운 주체를 주입시킵니까? 어떻습니까? 주입시키죠. 새로운 주체를 주입시키는 거에요. 이 사람들은 제멋대로 사는 사람들. 그 방법은 이 유치장 안에서 술과 담배를 금해버려요. 술, 담배는 이 사람들 제멋대로 사는 사람들의 이게 보람이고 희망이에요. 돈 버는 이유가 술, 담배할려고 돈을 벌어요. 술, 담배할려고.


술은 현재의 자신을 잊어버리고 내가 원하는 이상적인 나로 만드는 물리적 방식이거든요. 담배도 마찬가지고요. 술, 담배 이거 전부 다 안 좋은 것을 모방한 거에요. 아리스토텔레스라는 사람 들어본 적 있습니까? 그 사람이 ‘니코마코스’라는 윤리학을 지었습니다. 뜻은 ‘내 아들에게 교훈한다’ 잠언 비슷하게 내 아들에게 교훈한다 그런 뜻인데요 니코마코스라는 윤리학을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사람은 어떻게 하면 행복해질 수 있는가? 거기에 대해서 써놓은 거에요.


자, 아리스토텔레스 이 사람의 주장은 이렇습니다. 인간의 이성에 기능을 탁월하게 개발하게 되면 인간은 행복해질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인간의 이성 가운데서 두 가지가 있는데 한 가지는 지적 탁월성이 있고 또 하나는 뭐냐. 성격적 탁월성이 있는데 지적은 누구한테 가르침을 받으면 된다. 교육을 받으면 된다.


자, 인간이 어떻게 행복하게 되는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은 인간의 판단력, 인간의 이성의 기능을 개발하면 된다는 거에요. 자기의 숨어있는 인간의 이성의 기능을 개발하면 돼요. 개발하는 방법은 지적 교육을 받는 거에요. 두 번째는 성격적 탁월은 뭐냐 하면은 교육을 받아서는 그것 가지고는 모자라고 이거는 뭐냐 하면은 좋은 성격을 뭘로 바꾸느냐? 습관으로 바꾸는 거에요. 습관으로 바꾸면 되는데 성격을 습관으로 받으려면 이거는 개처럼 훈련받으면 된다는 거에요. 훈련받으면 된다.


그러니까 인간에게는 누구든지 뭐가 있다? 이성이 있고 이성이 지금 개발 안 되서 그런데 이성만 개발한다면 여기 유치장에 있는 개망나니 같은 이런 사람들도 어떻게 됐다? 인간이 훌륭한 시민으로 행복한 사람이 될 수 있다 라고 니코마코스라는 윤리학을 쓴 아리스토텔레스는 인류에게 뭘 주느냐 하면은 희망과 정당한 목표를 제시, 제공한 거에요. 이 방법밖에 없다. 인간은 행복이 최고 목적이고 행복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이성을 개발해야 된다. 그리고 이성 없는 인간은 아무도 없다. 지금 그들이 개발 안 해서 술, 담배를 찾았다.


그런데 이들이 술, 담배를 찾는 것은 그들이 교육을 받았지만 술과 담배를 먹는 그 가정환경과 분위기에 의해서 잘못된 습관들인 거에요. 그러면 유치장에서 뭐부터 끊어버립니까? 술과 담배를 끊어버리는 거에요. 끊어버리고 시민사회에서 너의 행동으로 말미암아 남들에게 피해가 어떤 피해가 주어지는가 이걸 이성적으로 호소하면서 그걸 교육을 하게 되면 이 사람은 전부 다 하나같은 동일한 주체를 확보할 수 있다 이렇게 되겠지요.


이걸 어떻게 한다? 사회로부터 격리시켜서 이렇게 훈련시키면 된다는 거에요. 그러면 이 이성은 인간은 동물이 아니라는 거에요. 개가 아니라는 겁니다. 인간은 들풀도 아니고 까마귀도 아니고 인간은 인간이라는 겁니다. 그러면 이성은 뭐냐? 인간의 품위죠. 인간의 품위를 가질 때 비로소 인간은 인간으로서의 자부심을 갖는다. 이게 바로 교육의 모토가 되어야 된다. 모든 인간 교육의 모토가 되어야 된다고 생각하는 거에요.


아리스토텔레스 이 지옥 갈 사람, 복음을 모르는 사람. 복음을 모르는 사람들이 복음만 모르는 게 아니에요. 복음을 모르면 어디가 틀린 게 아니라 다 틀렸어요. 뭐가 틀렸을까요? 지금 이 사람, 아리스토텔레스는 무슨 요소를 빼먹었느냐 하면은 악마 요소를 빼먹었습니다. 악마가 인간을 지배하고 있다는 그 사실을 알 길이 없었어요. 왜냐하면 악마는 평소에는 안 나타나요.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에만 악마가 나타나요.


어제 대구강의 때 이야기했지요. 사울의 악신은 다윗이 등장할 때만 등장했다고요. 다윗 보고 창으로 찍을려고 했잖아요. 평소에 창 던지는 게 취미라서 잘못된 이성 가지고 그런 게 아니에요. 이성이 아닙니다. 사울이 다윗을 죽일려고 했던 건 이성이 아니에요. 가장 이성적인 사람은 누구냐 하면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과 서기관들이에요.


그 사람들은 귀신 들린 자를 귀신들린 자로 규정할 정도로 자기는 판단력, 명쾌한 아주 훈련 잘된 냉철한 이성적 판단력을 가지고 산 사람이고 그리고 예수님을 재판한 본디오 빌라도는 개 같은 사람이었어요? 침 질질 흘리고 이랬습니까? 아니지요. 본디오 빌라도 그 총독 엘리트잖아요. 본인이 귀신들렸단 생각을 했겠어요? 안했겠어요? 상상도 못하지요. 이렇게 명석한 이성을 이야기하는 사람이 귀신들 리가 없잖아요.


세이건, 코스모스란 책을 지었던 유명한 천문학자 세이건. 다윗 이후에 가장 칭송받는 사람들. 상 받은 이런 사람들 수학박사, 자기가 귀신 들렸다 하겠어요? 윤석열 귀신 들렸다 이야기하겠습니까? 한동훈이 귀신들렸다 생각 하겠어요? 못하잖아요. 귀신이 인간의 이성한테 벌벌 떠는 그런 귀신은 없습니다. 왜냐 하면은 인간의 이성은 이미 악마의 손에 의해서 놀아나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인간의 이성은 방향성을 갖고 있어요. 뭐냐 하면은 철저하게 인간의 행복, 더 나아가서 자기의 행복이죠. 사적인 개인의 행복을 위해서 그 모든 것을 원수로 적으로 간주하는 그러한 성향을 띠고 있어요. 인간의 이성이라고 하는 것은 판단력이라고 하는 것은. 김정은이 바보입니까? 김일성이 바보 아니잖아요. 히틀러가 바보에요? 스탈린이 바보입니까? 무려 오천만 명이나 죽이는 스탈린이 바보에요? 신학교 나온 사람이에요 그 사람이. 히틀러가 훌륭한 책을 지은 사람이에요. 얼마나 또 믿음으로 산다고요. 분위기가 기독교 분위기잖아요. 독일 분위기가.


인간이 아무리 그렇게 이성적으로 살아도 예수님 보시기에는 근원적인 근본적인 염려와 근심에서는 인간이 벗어날 수가 없는 거에요. 근심과 염려에서. 그래서 저는 이 시간에 이주 이성적이고 명석한 판단력을 갖고 있는 사람, 그 사람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어떤 평가를 했는지 사무엘하 12장 9절을 한번 보겠습니다. 다윗에 대해서 나단 선지자가 한 이야기에요.


12장 9절에 “그러한데 어찌하여 네가 여호와의 말씀을 업신여기고 나 보기에 악을 행하였느냐 네가 칼로 헷 사람 우리아를 치되 암몬 자손의 칼로 죽이고 그의 아내를 빼앗아 네 아내로 삼았도다” 여기 9절에 보면 그 나단 선지자가 와서 다윗에게 지적하면서 “네가 여호와의 말씀을” 그 다음에 뭐라고 했어요? “업신여겼지요” 인간의 이성적이고 판단을 갖고 있는 그 다윗이 결국 뭐를 건드렸다는 말입니까? 촘촘한 하나님의 말씀의 망에 거기에 고압선 흐르는 말씀을 턱 건드린 거에요.


창세기 2장에 그 에덴동산에 그 고압선이 있었지요. 건드리면 안 되는 것, 따 먹으면 안 되는 것이 있었어요. 그게 뭐냐 하면은 선악과 나무였습니다. “선과 악을 아는 과실을 따먹지 말아라”, “왜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왜 따먹지 말 나무를 줬느냐?” 라고 인간이 하나님께 질문하면 하나님이 이렇게 답변합니다. 그것 외에 다 먹으라고 했잖아 이렇게 나와요.


그러니까 여기서 인간의 염려와 근심이 생기는 이유가 나 중심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하나님 중심으로 생각하지 못하고 나 중심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뭘 해도 염려와 근심이 되는 이유가 이 세상은 내 중심을 위해서 만든 나라가 아니고 하나님 중심으로 만들어진 짜여진 이 세상에 내 중심으로 살려고 하니까 이게 안 건드릴래야 안 건드릴수가 없는 거에요.


술 먹고 와가지고 문을 두드리고 들어가고 보니까 남의 집이라. 너무 술에 취해가지고. 이상하다 옷이 내 옷이 아니네. 슬리퍼가 내 슬리퍼가 아니네. 그건 자기 집이 아니거든요. 귀신들려서 그렇지. 술 귀신들려서 그런 거에요. 이 세상은 우리 인간을 위한 세상이 아닙니다. 질문 한 꼬라지 보면 잘못한 거에요. 질문을 잘못하고 있는 거에요.


“왜 이거 못 따먹게 합니까?” 그거는 귀싸대기 맞아야 돼요. 남의 집에 와서 행패부립니까? 왜 못 따먹게 합니까? “따먹으라고 했잖아 다른 거.” “그거 말고요. 그건 기본이고요.” “누구 맘대로 기본이야 누구 맘대로.” 주의 말씀을 다윗은 건드릴 수밖에 없어요. 그래야 이스라엘 왕이에요. 죄인의 왕이 되는 거에요. 죄인의 대표자가 되는 겁니다.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고요.


그 미국에 만화영화에 보게 되면 톰과 제리도 그렇고 또 여러가지 만화영화에 보면 나오는 동물들이 망나니처럼 거칠 것이 없어요. 산에서 스키를 타고 와서 스톱을 해야 되는데 스키를 너무 타가지고 남의 집 안까지 해가지고 하얀 눈 몰고 와가지고 온 식탁에 눈으로 하는 거 있지요. 그 광경을 하면서 나무 부러트리고 창문 깨고 촛대 다 망가지고 치고 치고 하지요.


그 모습이 우리 평소의 사는 모습이 그거에요. 주의 말씀 다 건드리면서 아주 발광하듯이 나만 살면 된다는 식으로 살아가고 있는 거에요. 왜? 다들 그렇게 살고 있기 때문에. 모방하고 있기 때문에. 아까 재소자들, 구치소에 있는 사람들 동일한 주체를 부여받는다 했는데 이 비슷한 경우가 남자들 군대에 갈 때입니다. 군에 가기 전에 어머님 보고 싶어요. 어머님 편지 할께요. 이렇게 하잖아요. 여자들은 잘 몰라요. 남자도 모르고 군대에 갔다 온 남자만 알아요.


어머님 훈련 마치고 어머님 앞에 멋진 남자로 보이겠습니다 이렇게 해가지고 군대에 갔다. 군대에 가니까 사회와 격리되면서 군에는 네 과거에 있던 주체를 다 바꿔요. 새로운 통합된 하나의 주체로 로봇처럼 지시에 무조건 맹목적으로 무조건 따라야 될 기계로 인간들을 바꿉니다. 그게 조교들의 역할이고 그거 못하면 조교가 혼나지요.


그 방법은 뭐냐? 사람을 사람 대우 안 해줘요. 개보다 더 못하게 만들지요. 사회에서 어떻게 잘 나갔던 인물이 좋던 머리를 똑같이 홀라당 다 깎아버리고요. 그 트라우마가 얼마나 강렬한지 군대 제대하고 40년 지나도 마찬가지입니다. 꿈에 막 나와요. 똑같아요. 사회에 있을 때는 어머니 제가 씩씩한 남자가 되어서 어머니 앞에 아들이 되겠습니다 했잖아요. 그것도 사회적 주체에요.


그래가지고 이걸 완전히 기계가 되가지고 이제는 훈련소 마치고 가는 곳을 자대, 본격적으로 근무해야 될 자대에다가 할당을 해요. 배치를 하는데 자대배치라고 합니다. 유명한 게 101보, 103보, 102보 이렇게, 보충지라는 뜻입니다. 파주 저쪽에 이렇게 가요. 가면서 기차를 타고 가거든요. 기차타고 가게 되면 간다고 알리면 가족들이 용산역에 여기 와가지고 닭 튀긴 것하고 고구마하고 사이다하고 기다리고 있단 말이죠.


그러면 옛날 주체 같으면 반가운 어머니 얼굴 봐야 되잖아요. 기차가 가는데 높은 사람한테 해가지고 내 아이 이름이 누구누구인데 좀 이렇게 기차에서는 못 내리지만 창가에서 보게 해 달라고 하면 그 아들이 의도적으로 창가에 오지 않고 더 깊숙한 보이지 않는 어둠속으로 빠져 버려요. 기계이기 때문에. 내가 알던 아들 모습이 아니었다는 것에 대해서 스스로 부끄럽게 여기고 엄마하고 안 만날라고 숨어버려요. 친구들이 어떻게 하느냐? 너희 엄마 왔다고 창가에 강제로 창가에 엄마하고 만나게 해요.


그게 이 심보가 뭐냐? 인간의 심보는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는요 점점 더 어두운 곳으로 피해버려요. 통합된 주체, 악마한테 교육받은 이성적인 방향이 예수님에게 가는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자기 옳다는 것, 자기 의롭다는 것, 나는 정당하다는 쪽으로 점점 더 숨어버린다니까요. 그래서 말씀가지고 쫓아가잖아요. 도망치기 바빠요. 말씀도 듣지도 않고 점점 더 말씀 없는 곳으로 가게 되면 뭐냐?


나는 남자다. 굿바이. 나는 남자다 술 한잔 먹고 나는 남자다 노래 부르면서 헤어진 여자한테 자기 정당성 이야기하는 것. 대중가요 다 그런 노래잖아요. 아니에요? 자기 정당성이에요. 나는 최선을 다했다 그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나 숨어있을 테니까 나를 찾아서 건드리지 말란 말이죠. 내가 나서기 전에 내가 내 쪽에서 나서기 전에는 네 쪽에서 찾아오지 말라는 거에요. 꼬깃꼬깃 숨는 거에요 이게.


누가 그렇게 그 동일한 주체를 그렇게 만들었습니까? 악마가 그렇게 만든 거에요. 주님께서는 그걸 어떻게 하느냐? 말씀을 가지고 파고들어갑니다. 땅굴 팔 때 기계가 있잖아요. 터널 팔 때 기계. 또는 석유채굴 할 때 위에서부터 스크류 해가지고 박아 넣지요. 이게 주의 말씀입니다. 주의 말씀은 우리가 천리만리 도망간다고요. 나의 제일 깊숙한 자리에 들어가면 이 스크류가 파고들어가요.


이게 주의 백성에게만 주어지는 혜택이고 축복입니다. 아무리 도망가도 말씀 끝까지 따라옵니다. 따라와가지고 우리로 뭘 만드느냐. 우리를 죄인, 개 같은 죄인으로 만들어버려요. 환자로 만들어버려요. 의사가 환자를 만나야 의사가 되기 때문에. 이게 새 술은 새 부대에 담는다고 그렇게 해서 새로운 주체를 만들어버려요. 여기 재소자들처럼. 이제는 더는 자기의 의로움과 자기의 행위를 내세우지 않고 주님의 용서하심만 내세우는 그러한 집단으로 만들어버려요. 그게 주의 백성입니다.


그렇기 위해서는 주께서는 전부 다 찾아가지요. 찾아갈 때 인간은 주의 말씀이 와 닿으면 인간은 뭘 포기해야 되느냐? 자기의 자부심을 포기해야 돼요. 헤어질 결심이라는 영화에 보면 이런 장면이 나와요. 주인공이 여자보고 이런 이야기합니다. “내가 품위 있게 보이는 것은 자부심 때문입니다. 형사로서의 자부심 때문입니다. 내가 품위 있게 보이는 것은”


그런데 그 자부심이 여인을 향한 사랑으로 나중에 다 흔들릴 수밖에 없지요. 내가 품위 있게 보이는 것은 자부심 때문입니다. 형사로서의 자부심. 적어도 남자든 여자든 이거 하나 없으면 안 되지요. 문제는 자부심 때문에 불면증 걸린다는 거에요. 잠이 오지 않는다는 거에요. 완벽한 나를 보다 완벽한 그 방법을 연구한다고 잠이 오지를 않아요. 하도 올곧게 항상 꼿꼿하게 형사가 형사답게 살아야 이 형사의 일에 부합된다고 자부하는 겁니다. 그런데 그걸 여인이 그걸 노리지요.


지금 아까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그 윤리학 봤지요. 보니까 어떻습니까? 오늘날 흔히 상식적으로 말하는 가정교육 학교교육이 다 어디서 나왔어요? 아리스토텔레스에서 나왔지요. 그것보다 한국교육은 존 듀이의 교육법에서 나온 거에요. 존 듀이는 약간은 상대적이에요. 아리스토텔레스는 누구 하나 어른이 있어가지고 어른의 주장을 일방적으로 부여하는 거라면 존 듀이는 뭐냐 하면은 교사의 정신을 제자에게 가르치는 것이 아니고 제자가 갖고 있는 자질을 교사가 개발해야 된다는 약간의 상대주의적 그런 교육법을 미국식 상대주의적, 진리는 없어요.


진리는 모든 인간은 각자가 진리답다고 주장하는 겁니다. 이것도 이미 만물의 척도라는 그 철학에서 나온 거에요. 그리고 어릴 때부터 이런 교육을 유치원 때부터 시키는데 유치원 때부터 하는 그 교육을 몬테소리라고 하는 거에요. 몬테소리. 이탈리아 아줌마에요. 아줌마가 낸 교육은 놀이기구를 가지고 그 애가 갖고 있는 재능과 기능을 흔히 말하는 교회에서 말하는 달란트, 재능을 개발해서 그것으로 사회에 이바지하는 식으로 일률적인 교육이 아니고 각자의 재주를 발견하자 이런 식으로 하는 거에요.


그러니까 우리들이 말하는 이 세상이라는 것이 얼마나 복음과는 전혀 관계없고 자기를 미워하고 자기를 포장하고 자기의 주특기를 마음껏 자랑질하는 그런 자랑의 장기 자랑하는 무대 같은 것이 이 세상이라고 보시면 돼요. 그런데 그런 마음을 그대로 가지고 교회에 와서 누가복음 12장을 이렇게 보니까 이걸 하나의 숙제로 여기고 ‘야 이것 괜찮네 이거 내가 지킬게’ 하나의 도전 대상이 되어버린 거에요. 예수님의 말씀이.


기도 열심히 해서 은혜 받아가지고 이 말씀을 성령 받아가지고 이 말씀 지키면 되잖아. 그것도 성령까지 동원해가지고 이 말씀 지키면 되잖아. 이렇게 하는 거에요. 그래서 염려하지 않고 근심하지 않으면 되잖아 이렇게 하는 거에요. 복음은 스크류처럼 이렇게 땅 속에 뾰족한 두더지처럼 파는 그런 것처럼 말씀은 먼저 우리에게 와가지고 우리를 파버려요 이걸. 찢어버린다고요 말씀이.


근심하지 않겠다고 생각한다면 그 사람은 잠 못 잡니다. 왜냐하면 근심할 게 한 두 가지 아니니까. 그런데 제가 아까 했던 내 자신으로 인하여 더는 얻을게 없다 이러면 푹 자지요. 나한테 기대할 게 아예 없는데요. 푹 자지요. 그러니까 예수님이 면회 왔을 때 자꾸 친구 사이로 인간들 똑같은 인간 사이로 기어들어가지 말고 예수님 십자가로 나오면 돼요. “죄인 여기 있습니다” 하고 나오면 돼요. “개 여기 있습니다” 하고 나오면 된다 이 말이죠.


불심판 앞에서 옳고 그름은 의미 없습니다. 불심판 앞에 누가 옳고 누가 그름이 있어요. 불심판인데. 그래서 제가 주님께서 이 말씀을 우리에게 적용하는 아이디어를 하나 제시하겠습니다. 자, 제가 질문을 하나 할 테니까 어떤 아이가 엄마한테 한 질문인데 여러분이 한번 답변을 해보세요. 초등학교 아이인데요. “엄마 어떻게 하면 내가 엄마에게 효도할 수 있어요?” 이거 자기가 생각한 방학 숙제에요. 여러분 답변해보세요.


아이가 먼저 제안했어요. “내가 어떻게 하면 엄마에게 효도할 수 있습니까?” 아이가 엄마한테 선빵 날린 거에요. 보통 효도라면 엄마가 요구하는 건데 애가 먼저 엄마한테 들이밀었습니다. 엄마는 대략난감이죠. 이렇게 선빵 날릴지 몰랐지요. 여러분 이 정답이 뭐냐? 막연하지요. 막상 할라니까. 공부도 해야 되고 엄마 말도 잘 듣고 여러 가지 아는 상식이 있잖아요. 엄마 그렇게 하면 어떻게 되는데? 그럼 네가 행복한거야. 그건 아리스토텔레스 돼버렸잖아.


정답은 이겁니다. 정답은 내가 아들의 자리를 마련할테니 너는 너의 자리를 버리고 나의 자리에 오면 그것이 효도다. 그게 효도지요. 자리를 따로 만들어요. 이게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신 겁니다. 따로 만들어요 따로. 아버지에게 있어서의 아들은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은 먼저 예수님이 아버지에게 아버지께서 예수님을 따로 자리를 만들었어요. 의도적으로 예수님을 버림받는 세상에 보내셔서 이 땅에서 버림을 당하게 되어있어요.


여기서 아셔야 될 것은 여러분 예수님이 벌을 받은 게 아니에요. 버림을 당했지요. 관계 자체가 끊어진 거에요. 버려진 거에요. 이 말은 사람이 매를 맞게 되게 되면 여전히 징계를 받게 되게 되면 아버지 아들 관계가 유지가 되는데 버림을 받게 되게 되면 이 세상에서 아들 관계가 날라가버려요. 없어져요. 버림받은 것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죽음이라고 하고 그 죽은 자는 자력으로 그 죽음에서 자기가 살아나올 수가 없는 절대적 절망입니다. ‘절대적 절망’. 그러니까 인간들은 구원을 못 받지요. 그 절대적 절망을 넘어설 수가 없기 때문에.


인간의 자리는 버림받은 자리라는 것을 예수님을 통해서 그들은 성령을 통해서 우리는 발견을 해야되요. 내 자리 있잖아요 내 자리. 나 훌륭하다는 자리, 나는 남자다 있잖아요 김장훈처럼. 이 자리가 버림받은 자리에요. 마치 악마가 하나님께 영원히 버림받은 것처럼. 버림받은 자리에요. 인간은 자기 자리가 뭐 어떤 상태인지 몰라요. 몰랐지요. 예수님이 오셔서 버림받기 전까지는 자기는 뭐 이렇게 살다가 율법 지켰으니까 얼추 지켰으니까 천당 갈 줄 알았지. 내가 나쁜 짓해서 버림받은 게 아니고 처음부터 그 자리 자체가 버림받은 자리 자체라는 것을 몰랐지요 인간은.


31절에 “오직 너희는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 이 나라 잘되면 되지 왜 그의 나라를 구하라고 하는지 모르는 겁니다. 프랑스의 잔 다르크라는 그 소녀가 계시를 받았는데요 그 계시가 뭐냐 하면은 ‘네가 프랑스를 영국에서 구하라’ 이렇게 되는 거에요. 그 계시가 복음적일 수가 없지요. 파티마 알아요? 대구에 파티마 병원. 파티마가 뭐냐 하면은 포르투갈의 어린 아이가 성모 마리아에게 계시 받은 그 장소가 파티마에요.


파티마는 뭐냐 하면은 성모 마리아 식의 이런 묵주 기도를 하게 되면 네 나라가 잘된다는 그 계시 내용입니다. 그 나라와 의가 아니라니까요. 여러분 간증 들어보세요. 그 간증에서 예수님의 십자가가 나오는지 아니면 덕을 보자는 이야기인데 한번 여러분들이 기도원에서 간증하는 것 한 번 들어보세요. 요새는 유투브로 스트리밍 해서 생중계해요. 시끄러워서 못 봐요 시끄러워서. 산속에서 자기들끼리만 하지 이걸 스트리밍 해가지고 간만에 봤어요. 오랜만에 봤어요.


그 울부짖는 거요 왜 울부짖는 줄 알아요? 무서워서 울부짖고 두려워서 울부짖고 근심이 많아서 염려스러워서 자기 신상이 염려스럽고 자기 미래가 염려스러워서 울부짖는 거에요. 절망스러워서. 지옥의 울부짖음이에요. 왜? 버림받은 자들이니까. 아이가 엄마 나 어떡하면 나 엄마한테 효도할 수 있어? 엄마로부터 사랑을 더 빼내기 위해서 뽑아내기 위해서. 받은 사랑도 모자라는 거에요. 더 많은 사랑을 위해서.


다시 말해서 엄마가 사랑 안 주고는 못 배길 정도로 지금도 정당하지만 더욱 더 완벽의 완벽의 정당성을 효도까지 해버리는 정당성까지 본인이 소유하고 확보할려고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그 자리는 누구 자리입니까? 자기가 만든 자리에요. 자기가 만든 자리에 엄마를 초대하는 겁니다. 엄마 요구대로 해줄테니까 나 더 이뻐하고 사랑해줘. 내 요구사항 들어줘 이렇게 되는 겁니다.


성경에서 죄가 뭐냐? 성경에서 죄란 일치하지 않는 것. 쉽지요? 일치하지 않는 것. 아까 사무엘하 12장 9절에서 나단 선지자가 다윗 지적할 때 뭡니까? 네가 하나님의 말씀 여호와의 말씀을 업신여겼지요. 일치하지 않는 거에요. 네 마음, 생각 모든 게 일치하지 않는 거에요. 죄란 일치하지 않는 것, 삔트가 어긋난 것, 일치하지 않는 것, 방향이 같은 방향이 아닌 것.


나단 선지자가 다윗을 지적할 때는 다윗의 일부만 지적한 게 아니고 다윗의 근본 자체가 일치하지 않다는 다윗의 근본 자체가, 존재 자체가 일치하지 않는 거에요. 우리가 마련한 내가 마련한 자리가 주의 뜻에 일치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십자가로서 내어버려뒀다. 성경에 로마서에 8장에서 내어버려둠. 또는 갈라디아서 3장에서는 저주받았다. 그냥 버린 거에요. 에덴동산에서 추방당한 것같이. 그냥 버린 거에요. 우리의 현실이 추방당한 자에요. 버림받은 거에요. 그것도 그냥 버림받은 게 아니고 악마와 더불어 버림받은 거에요.


그래서 지난 수요일인가 토지의 몸. 토지 자체가 살아있어요. 저주가 살아있어요. 저주받은 자는 여기 여기 모여라. 다 모였어. 땅 위에 저주받은 자는 다 모였어요. 그래서 나중에 땅을 불로 다 태워버리는 겁니다 그 저주와. 그래서 땅 밑을 지옥이라고 하잖아요. 땅으로부터 시작해서 땅 밑에 지옥이 돼요. 저주받은 버림받은 자의 공간이 지옥이 되고. 천국은 위로 올라가요. 예루살렘이 위에서 내려와요. 아래쪽과 위쪽 둘로 나눠져버려요.


그래서 아까 우리가 생각했던 아리스토텔레스 윤리학, 도덕 우리는 하자 없어 보이지요. 아리스토텔레스의 그 이성의 기능에 의하면 현대에 와서 의심을 하는 자들이 등장합니다. 그게 뭐냐 하면 프로이드의 무의식이에요. 이성? 이성 같은 소리하고 있네. 감정은 어떻게 이겨. 다윗이 이성? 아니에요? 밧세바를 범할 때는 이성이 아니고 감정. 이성보다 감정이 우월하다.


이렇게 나오니까 또 어떤 학자는 감정 같은 소리하고 있네. 인간은 의지야. 인간은 의지가 감정과 이성을 이겨. 이게 누구냐 하면은 니체, 쇼펜하우어 이런 철학자들이 인간의 의지를 주장합니다. 그래서 ‘하면 된다’ 이게 누구 말이냐 하면은 이게 니체 말이에요. 니체. 신은 죽었다. 남은 것은 뭐냐? 우리가 내 인생은 누가 끌고 간다? 내가 하면 된다. 이게 불교의. 무쇠의 뿔로 나 홀로 간다. 악마의 본색을 드러내는 거에요.


제가 주일날 설교 이야기했습니다. 악마는 우리 속에 있는 괴물은 얼마나 악마적인지 하나님을 내가 대단함을 누구하고 견주어서 어느 정도로 견주어서 되느냐. 하나님을 라이벌로 여겨서 견주어서 하나님의 손길도 내가 떨칠 정도로 내가 대단한 존재일 때 우리는 가장 쾌감을 느끼는 그런 본성을 누구나 다 내부에 지니고 있는 거에요.


그러면 교회 왜 나오고 하나님 왜 믿는가? 갖고 놀라고. 하나님을 갖고 놀기 위해서 교회 다니고 예수 믿는 거에요. 예수님을 갖고 놀라고. 예수님하고 장난칠라고. 뭐만 빠지면 되겠어요? 장난치는 예수님 뭐만 빠지면 되겠습니까? 십자가만 빼고 나머지 다 주님과 장난칠 수 있는 거에요. 농담할 수 있고. 십자가만 빼면. 주님도 살아있고 나도 살아있으니까 대화하자는 거에요. 교인들은 기도 외에는 할 것이 없다고요. 왜? 둘 다 살아있으니까.


그러나 십자가는 살아있는 이야기가 아니고 뭡니까? 네가 죽었나 내가 죽었나 보자는 거에요. 진정으로 누가 죽었느냐 죽음 이야기가 십자가 이야기에요. 죽음이 기본이지 살아있는 게 기본이 아닙니다. 오히려 놀래야 돼요. 왜 우리가 죽어야 되는데 왜 또 살아있지? 그건 아까 제가 이야기했지요. 죽어있는 그 자체를 죽음 자체가 살아있기 위해서 평생을 96년 동안 살아있다고 했지요.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것은 그 아들의 자리를 따로 마련해요. 따로 마련하는데 우리 보고 하라고 하면 일치가 안 되기 때문에 안돼요. 죄가 일치되지 않잖아. 따라서 일치되는 그분의 마음이 우리한테 와야 돼요. 그게 바로 성령이 오는 겁니다. 성령이 오게 되면 예수님 마음이 오게 되면 우리가 십자가를 통해서 십자가 앞에서 어떤 누구도 의인이라고 할 자가 없다는 그 마음이 동일한 마음이 돼요. 예수님의 마음과 우리 마음이 하나가 되는 겁니다. 그러면 일치가 되니까 그게 하나님의 의가 되는 거에요.


로마서 4장 한번 봅시다. 4장 7절 “불법이 사함을 받고 죄가 가리어짐을 받는 사람들은 복이 있고” 8절 “주께서 그 죄를 인정하지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 그 불법이 사함을 받고 죄가 가리어짐을 받는 사람들은 복이 있다 했지요. 자, 우리가 복으로부터 출발해봅시다. 복이 뭐냐? 복이 뭐냐 할 때는 반드시 불법하는 사람이 있어야 되고요 복 받은 사람은 반드시 불법한 자가 돼야 되고요 그 가운데 불법한 자가 불법을 자기 힘으로 받을 수가 없는 그 지경이 있어야 돼요.


내 스스로 선한 행동해서 내가 죄가 사라지는 그런 짓거리 하면 그건 복 받은 자가 아니에요. 복 받은 자는 뭘 하느냐? 나는 불법에 있었는데 중간에 뭐가 주어졌다? 뭔가 사심이 있는 자, 죄가 가리어짐을 받았고 주께서 그걸 인정하지 않을 때 비로소 그거는 복이 됨을 아는 이 안다는 것이 주님의 생각과 복 받은 자의 생각이 일치가 되는 거에요. 이게 복된 자에요.


아까 아리스토텔레스는 뭐라고 했습니까? 행복이란 내가 이성을 개발하는 게 행복이죠. 정당한 내가 그것도 완벽의 완벽을 기하는 것이 그게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그게 복된 사람이라 하지요. 오늘날 성화론 있잖아요. ‘성화론’. 교회에서 가르치는. 예수 믿고 점점 더 죄를 줄여나가는 그런 식으로 완벽에 완벽을 기하자. 그게 아리스토텔레스 생각이에요. 이게 중세철학, 중세신학이고.


그런데 성경은 뭐라고 합니까? 주께서 그 죄를 인정하지 아니한 사람은 뭐가 있다? 주께서 그 죄를 인정하지 아니하실 사람에게는? 그 사람이 있는 게 아니고 그 사람에게 추가적으로 뭐가 지금 보인다? 내가 준 하나님 쪽에서 준 복이 보이는 거에요. 주님의 마음가짐이 그 사람에게 덮친 거에요. 부먹이에요. 탕수육 부먹. 소스를 부어버린 거에요. 볼 때 탕수육 돼지고기 튀긴 거 안 보이고 소스만 보이는 거에요. 들춰내야 안에 죄가 나오지요. 그냥 죄 사함만 보일 뿐이지 안에 죄는 안 보인단 말이죠.


거기서 예를 들면서 그 조상이 누구냐? 아브라함인데. 아브라함은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본인이 한 것이 본인에게 아무것도 제공되지 않았어요. 아브라함은 자기 자신에게 한 것이 더는 얻을 게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자기 아내 보고 누이동생이라고 속여가지고 살 궁리를 찾던 그런 사람이에요. 그런 사람인데 그런 사람이 복 있는 사람의 하나의 모델이 되어버린 겁니다. 왜? 아무것도 한 게 없기 때문에.


그거 누가 다 했어요? 주께서 다 하셨죠. 그럼 아브라함은 뭐했습니까? 죄 짓는 일만 했죠. 죄 짓는 일만 했지요. 하나님의 약속을 위반하고 하갈하고 하갈의 자식을 낳았잖아요. 주께서는 아브라함을 마음껏 활용하시지요. 지금도 저와 여러분들을 복을 위해서 죄 사함을 위해서 활용하고 있음을 감사합시다. 잠 좀 주무시고요. 내가 하는 어떤 특정한 종교적 행위가 나에게 보탤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주께서 하신 것만 남아있기를 주께서 원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저지르기만 할 뿐이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세네카라는 비기독교인인데 윤리학자가 이런 이야기했습니다. 화가 날 때 자기의 모습을 거울로 보라. 그 모습이 얼마나 끔찍한지. 이런 이야기했거든요. 화 날 때마다 아 내가 악마의 얼굴이 되는구나. 화를 줄여야겠다. 이런 계산으로 이렇게 한 거에요. 그런데 우리가 볼 것은 십자가입니다. 자기 거울 말고 우리 때문에 밀침 당했던 죽임을 당했던 그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우리 자신이 이 멀쩡한 허우대 멀쩡한 우리가 개 같은 존재인지를 얼마나 환자이고 얼마나 병든 자인 것을 도리어 감사하는 것, 이게 새 술은 새 부대의 존재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용서받을 수 없다는 사실을 몰랐고 열심히 했으니까 용서받을 수 있다고 여겼던 우리가 그게 바로 일치하지 않는 주의 뜻과 십자가 뜻과 합치하지 않는 죄라는 것을 발견하는 복을 누리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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