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대구강의] 지옥의 하나님 6 - 누구를 위한 전쟁인가?
22,05,09 강의 : 이근호, 정리 : 구득영
* 여호와 전쟁 !!
오늘은 교재 42페이지부터 하겠습니다. 여기 제목이 '여호와의 전쟁' 이라고 되어있는데, 하나님께서 인간을 상대로 전쟁을 벌리신다는 겁니다. 즉 전쟁이 없는 하나님은 하나님이 아니라는 말이죠. 그러니까 이 땅은 어떻다는 겁니까? 하나님의 적이 암약을 하고 있다는 겁니다.
요번에 뉴스를 보니, 우리나라 국방부의 참수부대의 대위 하나가 간첩활동을 하다가 걸렸는데, 참수부대라는 것은 말 그대로 목을 친다는 것인데, 쉽게 말해서 김정은의 목을 따는 임무를 맡은 부대라는 것이죠. 가상화폐를 대가로 받고 그 정보를 넘겼다고 하는데, 그러면 이 대위는 어떻게 됩니까? 대한민국의 적이 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전쟁을 벌인다고 하니 사람들은 매우 의아해하는데, 왜냐하면 우리 인간이 재물을 드리면 하나님은 받으시고 복을 주시면 된다고 여긴다는 말이죠. 그런데 이런 연약한 인간을 상대로 하나님께서 전쟁을 벌린다고 하니, 그것은 도저히 납득이 되지 않는 겁니다. 그렇지요? 상대도 되지 않는데 무슨 전쟁이냐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는 억울하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아니, 우리 인간이 무슨 문제가 있어요?" 라고 하는데, 당연히 문제가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전쟁이 벌어진다는 말이죠. 이 전쟁은 우리가 모르는 적을 상대로 해서 여호와 하나님이 벌리시는 전쟁인데, 그것이 바로 '여호와의 전쟁' 입니다.
이 전쟁은 우리가 도저히 감을 잡을 수 없는 적이 우리 인간과 함께 있음을 의미하는데, 그런데 이 적은 함께 있는 수준이 아니고 인간을 정신적으로 지배하고 있다는 말이죠. 즉 우리의 모든 정신과 사고는 하나님이 적이라고 규정하는 존재에 의해서 세뇌를 당하고 있었다는 겁니다.
* 이미 오염된 인간 !!
이렇게 전쟁을 함에 있어서 우리 인간은 이미 오염이 되었는데, 그것이 '나'를 포함한 모든 인간인데, 그렇게 오염이 되었으면 처리하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제거해버리면 된다는 것이죠. 그래서 여호와의 전쟁은 어떤 방식으로 진행되는고 하니, 모든 인간을 다 지워버리는 겁니다. 우리 인간은 오염이 되어서 하나님께서 받지 않는데, 더러워서 받을 수가 없다는 말이죠.
그러므로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제사' 라고 하는 것은 "더러운 것을 받지 않겠다" 라는 것인데,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더러운 인간을 대신해서 깨끗하고 정결한 짐승을 받겠다는 겁니다. 그렇게 하나님께서 따로 깨끗한 것을 챙기겠다고 하시는 것은, 우리 인간은 하나님이 받을만한 대상이 전혀 아니라는 의미라는 말이죠.
이런 점에 대해서는 성경내용이 별로 어려운 것이 없는데, 그렇다면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무엇인고 하니, "아하, 나 자신 자체가 잘못되어있구나" 라고 하는 인식이라는 겁니다. 여기에 대해서 사람들은 "내가 무슨 나쁜 짓을 했습니까?" 라고 하는데, 어떤 나쁜 짓을 했다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그런 존재라는 말이죠. 즉 나쁜 짓을 해서 버림을 받은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버림을 받았다는 것이죠.
그러니까 자기 양심에 호소할 필요가 없다는 겁니다. 조상, 조상, 조상, 그렇게 자기 조상에게 문제가 있다는 말이죠. 그것을 범주, 혹은 카테고리라고 하는데, 즉 조상이 먼저 선점이 되어있었기 때문에, 아무리 후손들이 노력해도 그런 조상의 속성에서 이탈할 수가 없다는 겁니다.
* 구원을 통해서 창조의 내막이 열린다 !!
어떤 분에 저에게 비밀글로 질문을 했는데, 조금은 특이해서 말씀을 해드리겠는데 말이죠. "십자가에 예수님이 아닌 개구리가 달려도 우리의 죄를 용서해줄 수 있지 싶은데, 그런데 왜 하필이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렸습니까?" 라고 했다는 말이죠. 자기가 생각해도 조금은 유치하다고 여겼는지 비밀글로 올렸다는 겁니다(ㅋㅋ).
그래서 제가 뭐라고 답변을 했는고 하니, "개구리에서 새로운 인간이 나오지 않습니다" 라고 했다는 말이죠. 이것을 함축해서 말하면, "구원을 통해서 창조의 내막이 열린다" 라고 할 수 있다는 겁니다. 구원문제가 구원문제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처음에 창조할 때 어떻게 했는지, 그 창조의 내막이 구원을 통해서만 밝혀진다는 것이죠. 창조의 비밀이 말이죠.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죽여서 너희를 건지겠다" 라고 하시는 것은, 그런 방식으로 자기 백성을 건져내겠다는 겁니다. 여기에서 개구리는 안 된다는 말이죠. 예수님을 죽여서 하시겠다는 것은, 이 세상의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중심으로 창조했다는 것인데, 그것이 뒤늦게 구원을 통해서 드러나게 된다는 겁니다.
*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
그래서 요한복음 1장 1절에 보면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리고 3절에 보면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라고 하는데, 그러니까 "하나님이 창조하셨다" 라고 하면 곤란하다는 겁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했다. 끝!", 그렇게 나오면 안 되고, 거기에 한 분을 더 넣어야 한다는 말이죠.
(요 1: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요 1:2)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요 1: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그것이 바로 태초에 말씀, 즉 예수님을 모델로 해서 창조하셨다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셨다는 말이죠. 즉 구원을 통해서 처음창조가 어떤 것을 재료로 해서, 혹은 어떤 것을 목적으로 삼아서 되었는지, 그 비밀이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비로소 풀리게 되었다는 겁니다.
* 예수님을 통해서, 예수님을 위하여 !!
그것을 확실하고 자세하게 말씀해주는 것이 골로새서 1장 16절인데, 거기에 보면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라고 한다는 말이죠. 만물이 예수님을 통해서 만들어졌는데, 그리고 만들어진 이유도 예수님을 위해서라는 겁니다. 그러니 복음을 이야기하려면 이 구절을 반복하지 않을 수가 없다는 말이죠.
(골 1:16)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그냥 "하나님이 나를 창조했다" 라고 해버리면, 창조한 목적이 예수님에게로 가는 것이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에게 가는 것도 아닌데, 그게 만들어진 자기 자신에게 초점이 맞추어진다는 겁니다. 그렇지요? "하나님께서 나를 만드셨다" 라는 뉘앙스가 무엇인고 하니, "그러니 나를 건드리지 마세요" 라는 것인데, 왜냐하면 자기는 하나님이 만들었으니 존엄하다는 말이죠.
*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 ??
이렇게 되면 그만 말씀이신 예수님이 빠지고 마는데,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 라는 것으로 천국에까지 밀어 부치려고 한다는 겁니다. 말도 안 되는 짓인데, 왜냐하면 그것은 세상 사람들이 모두 다 알고 있다는 말이죠. 조선시대의 사람을 붙들고 "이 세상을 누가 만들었습니까?" 라고 물으면, 당연히 "조물주가 만들었습니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서 조물주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데, 그냥 질문을 뭉쳐놓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이죠. 즉 "이 세상을 누가 만들었는가? - 세상을 만드신 어떤 분이 만들었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여기에는 추가적인 내용이 전혀 없다는 말이죠. "조물주, 즉 만든 분이 있다 - 그런데 그게 누구인가? - 그것은 몰라"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그분이 바로 십자가에 달리신 당사자인데, 개구리가 아니고 말이죠. 십자가에 달리신 그분을 중심으로 창조를 했기 때문에, 그분과 영원히 살려고 한다면, 그냥 조물주를 알면 되는 것이 아니고, 이 땅에 오신 나사렛 예수, 바로 그분을 알면 그것이 곧 구원이고 생명이고, 또한 천국백성이 된다는 겁니다.
* 예수님을 알리는 양식, '전쟁' !!
다시 말해서, 예수님을 알면 되는데, 그렇게 예수님을 알리는 양식이 무엇인고 하니, 그것이 곧 전쟁인데, 즉 오염된 것은 지워버린다는 겁니다. 우리가 특별히 무슨 나쁜 짓을 더 해서 죄인이 된 것이 아니고, 우리는 처음부터 버림을 받아야만 하는 죄인이라는 말이죠.
그런데 문제는 무엇인고 하니, 우리가 거기에 대해서 강력하고 거부하고 저항을 한다는 겁니다. 다시 반복해서 말씀을 드리지만, "하나님이 모든 것을 만들었다" 라고 한다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데, 그 강조점이 어디에 있는가를 생각해보아야 한다는 겁니다. 강조점을 말이죠.
* 논공 옆에 창녕이 있다 !!
저기 창녕 옆에 논공이란 곳이 있는데, 요즘 이 논공이 뜨는데 말이죠. 왜냐하면 박근혜 사저가 거기에 있다는 겁니다. 저의 본적이 여기 달성군 논공인데, 거기에 광산 이씨의 집성촌이 있다는 말이죠. 창영과 논공은 거리가 10키로 정도 되지 싶은데, 차로 가면 금방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창녕 옆에 논공이 있다" 라고 하는 것을, "논공 옆에 창녕이 있다" 라고 하면 맞습니까? 틀립니까? 그것은 틀렸다는 말이죠. 왜냐하면 "창녕 옆에 논공이 있다" 라고 할 때는 창녕에 강조점을 둔 것인데, 즉 창녕이 주가 되고 논공은 창녕을 꾸미기 위한 보조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했다" 라고 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데, 왜냐하면 그것은 자기 자신에게 강조점을 두고 있다는 말이죠. 그런 상태에서 아무리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했다" 라고 하더라도, 그것은 그야말로 빈말에 지나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성경은 강조점이 어디에 있습니까?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라고 하는데, 즉 "이 세상에 만들어진 모든 것은 예수님이 없이는 만들어지지 않았다" 라고 한다는 말이죠. 이것은 "내가 귀하다" 라는 겁니까? "예수님이 귀하다" 라는 겁니까? "나보다 예수님이 더 귀하다" 라는 의미라는 겁니다.
* 창조, 그리고 구원 !!
그게 바로 골로새서 1장 16절인데, 즉 만물이 만들어진 것은 어떤 지향점이 있는데, 예수님을 위하여, 예수님으로 말미암아서 만들어졌다는 겁니다. 그러니 추상적이고 관념적 신이 만들었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어떤 분의 역량이 들어가서 만들어진 것, 그것을 창조라고 하고, 이 창조의 취지가 살아있는 것을 두고 구원이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제가 이렇게 되었습니다" 라고 한다면, 그 사람은 구원을 받았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은 이제 강조점이 자기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에게 있다는 말이죠. 그렇게 구원이란 것은, 처음 창조할 때의 그 원래 취지가 고스란히 그대로 살아있다는 겁니다.
그게 곧 구원인데, 이것을 로마서 11장에서는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라고 하는데 말이죠. 그러니 여기서 '나'의 가치라는 것은 빠져주어야만 한다는 겁니다. 나쁜 짓을 더 많이 해서 그런 것이 아니고, 원래가 그렇다는 말이죠.
(롬 11:36)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
그래서 주님은 오염된 인간을 어떻게 하십니까? 계속해서 지워나가시는데, 그것이 바로 '전쟁' 형식이라는 겁니다. 즉 우리 자신을 지워나가는 것, 그것이 바로 주님이 벌이시는 주님의 전쟁이란 말이죠. 그러면 그렇게 자기 자신을 지워나가는 것에 대해서 강력하게 반대하는 것은 무엇이 됩니까? 그것은 곧 여호와 전쟁의 적이 된다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공포영화에서 어떤 사람이 침대에 누워있는데, 그야말로 완전히 혼수상태라는 말이죠. 그런데 이렇게 몸은 죽어있는데 뭔가 일어나는 것이 있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누워있는 것은 몸이고, 슬며시 일어나는 것은 영혼이라고 할 수 있다는 말이죠.
그렇다면 영화에 왜 이런 장면이 나올까요? 인간들이 왜 이런 발상을 하느냐는 겁니다. 오늘 강의에 의하면, 인간은 자기가 예수님과 교체되기가 싫어서 그렇게 나온다는 말이죠. 그러니까 자기 자신에 대한 미련과 집착이 강렬한데, 아무리 복음을 들어도 자기 것은 끝까지 포기하지 못하겠다고 나온다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내 육을 죽이더라도, 내 영혼만큼은 내가 건지겠다" 라고 하는 아이디어가 나온다는 말이죠. 그래서 '신과 함께' 라는 영화에 보면 염라대왕 이야기가 나오고 한다는 겁니다. 그렇게 "몸은 죽어도 영혼은 살아있다" 라고 하는 것이 교회의 안과 밖에서 얼마나 유포가 되고 있는지 모르는데, 소위 위로를 한답시고 말이죠.
* 지우개의 등장 !!
이런 발상이 왜 성경적이 아닌고 하니, 물론 교회에서는 이것을 가지고 장사를 해먹지만, 전혀 틀려먹었다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여기에 이렇게 그림이 있는데, 이것을 지운다는 말이죠. 그렇다면 있던 그림은 모두 다 없어졌는데, 그렇지요? 그런데 지우개는 도리어 등장하게 되었다는 것이죠. 지울 것이 없으면 지우개는 소용이 없다는 말이죠. 바로 이 지우개가 예수님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자기가 지워진다는 것에 대해서 아쉬워할 것이 아니라, 자기가 지워짐과 동반해서 숨어있던 지우개가 그 기능을 마음껏 발휘하는 것을 기뻐하면 되는데, 바로 그것이 여호와 전쟁이라는 말이죠. 이 지우개를 구약에서는 언약이라고 하고, 신약에서는 언약의 완성자라고 한다는 겁니다.
* 이스라엘의 등장 !!
이 언약을 쉽게 약속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데, 신약의 예수님께서 역사의 마지막에서 무엇을 하시는고 하니, 마치 바다에 그물을 던지듯이 그물을 친다는 말이죠. '도시어부' 라는 낚시프로가 있는데, 이덕화와 이경규가 후배 연예인들을 데리고 나와서 배를 타고 낚시를 하는데, 그리고 잡은 물고기를 직접 요리해서 먹으면서 입담을 늘어놓는다는 겁니다.
여기서 그물을 이스라엘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러면 이스라엘이 먼저입니까? 하나님의 언약이 먼저입니까? 언약이 먼저 주어지고 나서, 거기에서 이스라엘이 만들어졌느냐는 말이죠. 야곱이 먼저 있고, 거기서 나온 12명의 집합체가 이스라엘이 되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야곱의 이름이 이스라엘로 바뀌었다는 것이죠.
그러니 이 '이스라엘' 이라는 나라는, 하나님의 야곱을 통한 언약이 없이는 나타나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때 야곱은 잠을 자고 있었는데, 그런데 그 꿈속에 하늘에서 사닥다리가 내려오면서 오르락내리락 하는 자들이 있었다는 말이죠. 그들이 누구였습니까? 바로 천사들이었다는 겁니다.
* 천사를 빼고 이야기하자 !!
어제의 주일학교 설교를 잠시 해보면, 예수님이 승천을 하실 때 12제자들이 놀라서 하늘을 쳐다보고 있었는데, 거기에 등장한 자들이 누구였는고 하니, 두 명의 천사였다는 말이죠. 그들이 제자들을 꾸짖는데, 즉 "왜 위를 쳐다보는가? 다시 오실 것이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행 1:9) 이 말씀을 마치시고 저희 보는 데서 올리워 가시니 구름이 저를 가리워 보이지 않게 하더라
(행 1:10) 올라가실 때에 제자들이 자세히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데 흰 옷 입은 두 사람이 저희 곁에 서서
(행 1:11) 가로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리우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
그래서 제가 뭐라고 했는고 하니, "사람들은 이 세상을 구성하는데 있어서 천사를 빼고, 또한 주님을 빼고, 그 나머지로 진리를 추구하는데, 그것이 바로 철학이고 과학입니다" 라고 했다는 겁니다. 그게 인간의 학문인데, 어떻게 주일학교 설교답지 않습니까? (ㅋㅋ)
수능시험에 "예수님이 승천하실 때 천사가 몇 명이었습니까?" 라고 묻습니까? 묻지 않는데, 왜냐하면 천사라는 존재는 이 인간세상에서는 허용하면 안 되는 존재라는 것이죠. 설령 그런 천사를 이야기하더라도 사람들은 대부분이 선하고 착하다고 여기는데, 마치 요정과도 같다는 말이죠.
그런데 성경에 그런 천사만 나옵니까? 분명히 저주를 받은 천사도 있는데, 왜 그러한 이야기는 하지 않느냐는 겁니다. '다크 엔젤' 이라고, 악마는 배후에서 자기 정체를 숨기면서 인간을 다루고 있다는 말이죠. 좋은 것만 보고 아름다운 것만 보자는 것인데, 물론 꽃이 피어있을 때는 아름답지만, 시들게 되면 전혀 그렇지가 않다는 겁니다.
부모님을 아무리 사랑했어도 죽은 시신은 냄새도 나고 흉측한데, 그래서 얼른 치우고 싶다는 말이죠. 물론 요즘은 다 장례식장에서 하지만 과거에는 집에서 다 했는데, 겨울에 돌아가시면 추울까 싶어서 안방에 시신을 두고 군불까지 지펴주었다는 겁니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남자가 죽으면 여자는 남자의 부속품이라고 해서 같이 묻어버린 경우도 있었다는 말이죠.
* 인간들의 극렬한 저항 !!
이것이 바로 극렬한 저항인데, 그럴 정도로 인간은 잘못되어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성경은 윤리도덕의 문제가 전혀 아닌데, 썩어가는 밑바탕에 아무리 무엇인가를 뒤집어 씌어도 그것을 막을 수가 없다는 말이죠. 물론 "말씀은 선하다" 라고 하면 그것은 맞는데, 그런데 "그러니 그 선한 말씀을 지키는 나도 선하다" 라고 나온다면, 그것은 어떻게 됩니까?
로마서 7장을 생각해보면 이것이 전혀 맞지가 않는데, 왜냐하면 말씀이 선할 수록 자기는 날이 가면 갈수록 어떻게 된다는 겁니까? 말씀을 대하면 대할 수록 '나' 라는 것은 선한 게 아니라, 오히려 악하고 악하다는 것을 점점 더 깊게 느껴지게 되어있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되어야 말씀의 선함이 티가 난다는 말이죠.
(롬 7:12) 이로 보건대 율법도 거룩하며 계명도 거룩하며 의로우며 선하도다
(롬 7:13) 그런즉 선한 것이 내게 사망이 되었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오직 죄가 죄로 드러나기 위하여 선한 그것으로 말미암아 나를 죽게 만들었으니 이는 계명으로 말미암아 죄로 심히 죄되게 하려 함이니라
* 다시, '구원은 창조의 비밀을 드러내기 위함이다' !!
이것이 매우 중요한 주제이기에 다시 적어보겠는데, "구원은 창조의 비밀을 드러내기 위함이다" 라는 겁니다. 그러니 구원이란 것은, 창조할 때 도대체 누구를 위해서 창조했는지, 그 내막을 밝혀준다는 말이죠. 원래의 창조는 예수님을 위해서, 예수님을 드러내기 위해서 했는데, 그러니 우리는 아니라는 겁니다. 즉 '나'를 위해서 창조된 것은 처음부터 없었다는 것이죠.
그러니까 '나'를 위한 구원도 없는데, '나'를 위한 사랑도 없다는 말이죠. 오히려 '나' 라는 것은 제거대상이라는 겁니다. 모든 것이 주로 시작해서 주에게로 돌아간다는 말이죠. 그런데 성경에서 "하나님은 이 세상을 사랑하신다" 라고 하니, 인간들은 이것을 오해해서 자기 중심으로 여긴다는 겁니다.
* 철갑옷을 거부한 다윗 !!
사람들은 성경을, 복음을, 사랑을 무엇을 이해하는고 하니, 철갑옷으로 본다는 말이죠. 갑옷인데 철로 만들었으니 이것을 입으면 매우 힘이 든다는 겁니다. 무겁고 답답하다는 말이죠. 그런데 성경에 보면 이런 갑옷을 입지 않으려고 하는 자가 있었는데, 그가 바로 소년 다윗이라는 겁니다.
소년 다윗은 이런 철갑옷을 거부했는데, 즉 "내가 철갑옷으로 무장해서 전쟁하지 않겠다" 라고 했다는 말이죠.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창조의 비밀은 주님이 시키는 대로 하는 것인데, 즉 "내가 가지고 있는 나의 능력으로 전쟁을 하는 것이 아니다" 라는 겁니다. 즉 자기가 가지고 있는 능력으로 자기를 지키기 위한 전쟁을 하는 것이 전혀 아니라는 말이죠.
그래서 선한 말씀이 오게 되면, "내가 지켜서는 안 된다" 라는 것을 더욱 더 실감하게 된다는 겁니다. 지킬 능력도 없고 또한 지킬 필요도 없다는 사실, 그것을 사랑이라고 한다는 것이죠. 우리 장로님은 젊었을 때나 지금이나 한결같이 사랑을 하시죠? 그게 누구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말이죠(ㅋㅋ).
* 나 그대에게 모두 드리리 ♬
가수 이장희가 노래를 하나 만들었는데, '나 그대에게 모두 드리리 ♬' 라는 곡인데, 그 노래를 부르고 나서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드립니다" 라고 했다는 겁니다. 그러자 옆에 있던 사회자가 놀라면서 "아니, 그렇게 많은 사람을 사랑했습니까?" 라고 하자, "우리나라의 모든 사람들에게 드립니다" 라고 했는데, 일종의 방송사고인데 말이죠(ㅋㅋ).
사랑을 하게 되면 제일 먼저 느끼는 현상이 무엇인고 하니, 자기 자신을 시답지 않게 여기는 감정이 생긴다는 겁니다. "나는 그대만 있으면 됩니다" 라는 것인데, 그래서 "나 그대에게 모두 드리리" 라고 나온다는 것이죠. 이 노래가 영화 '별들의 고향'에 나와서 엄청난 히트를 했는데 말이죠.
그 가사 중에서 "터질 것 같은 이 내 사랑을" 라는 대목이 있는데, 터졌다고 하는 것은 자기는 이미 지워졌다는 겁니다. 즉 "그대만 있으면 나 같은 것은 어떻게 되어도 상관이 없어요" 라는 의미인데, 그게 사랑이라는 말이죠. 그리고 그런 사랑을 주님이 주셨다는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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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 그대에게 모두 드리리 ]
1974 이장희
나 그대에게 드릴 말 있네
오늘밤 문득 드릴 말 있네
나 그대에게 모두 드리리
터질 것 같은 이 내 사랑을
그댈 위해서라면 나는 못할게 없네
별을 따다가 그대 두 손에 가득 드리리
나 그대에게 드릴게 있네
오늘밤 문득 드릴게 있네
그댈 위해서라면 나는 못할게 없네
별을 따다가 그대 두 손에 가득 드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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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점점 심해지는 말썽꾸러기 !!
그러니 우리가 철갑옷을 입을 이유가 전혀 없는데, 더럽고도 오염된 것을 지키기는 왜 지키느냐는 겁니다. 우리는 그야말로 말썽꾸러기인데, 나이가 들면 점점 더 심해진다는 말이죠. 자기가 무엇을 지킨다고 하면서 "사탄아, 물러가라" 라고 하는데, 하지만 자기가 곧 사탄이라는 겁니다.
"말씀이 선하다" 라고 하는 것은, "우리는 말씀 앞에서 악하다" 라는 의미라는 말이죠. 요즘 사람들은 교회를 무슨 골프모임과 같은 친목단체나 멤버쉽 클럽정도로 여기는데, 거기에서 노는 재미로 교회를 키우고 한다는 겁니다. 물론 목사는 그것을 이용해서 자기 배를 채우고 말이죠.
* 인간은 어항 속의 금붕어 !!
예를 들어서, 어항 속을 보면 매우 활발하게 움직이는 금붕어가 있는데, 그런데 그 옆에는 잠만 자는 금붕어도 있다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가 보기에는 움직이는 놈이 좋은데, 관상용으로 키우니 말이죠. 그런데 금붕어의 입장에서 보면, 활발하게 설치나 잠을 자나 여전히 어항 속에 있는데, 바깥으로 벗어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어항 속의 금붕어는 그런 운명인데, 그것이 바로 인간이 놓인 입장이란 것이죠. 교회에 와서 활발하게 활동하든지 그냥 조용히 있든지, 주님은 그것을 문제로 여기지 않는다는 겁니다. 자기가 문제로 삼지 주님은 그렇지 않는다는 것이죠. 어떤 일을 해놓고 문제를 삼는다는 것은, 그것은 자기가 그렇게 여긴다는 겁니다.
주님은 그게 아니고, "처음부터 너는 버린 자이고 죄인이다. 그러니 네가 후회하고 반성한다고 해서 나아지는 것은 전혀 없다" 라고 나오신다는 말이죠. 그것이 주님의 그야말로 초지일관하신 태도인데, 주님은 여기에 대해서 전혀 양보하신 적이 없다는 겁니다.
* 잠시 이근호 생활건강 박사님을 모시고 !!
여러분은 이런 이야기 하나하나가 기쁘지 않습니까? 표정들이 영 아닌 것 같은데 말이죠(ㅋㅋ). 그렇다면 제가 여러분을 기쁘게 해드리겠는데, 주님의 전쟁은 모든 것을 무효화시킨다는 말이죠. 그런데 인간들은 자기가 살아있다고 여길 때는 어떠한고 하니, 자기의 실적과 업적에 대해서 굉장히 민감하게 반응을 한다는 겁니다.
암을 연구하는 의사들이 공통적으로 말하는 것이 있는데, 모든 암의 직격탄은 스트레스라고 한다는 말이죠. 스트레스로 인해서 두뇌에 압력이 증가하게 되면, 그러면 그 압력이 빠져나올 수 있는 부분이 목 근처에 있는 뇌관이라고 하는 곳인데, 그러면 그 뇌관이 심하게 압력을 받는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뇌관이 무슨 일을 하는고 하니, 심장을 정상적으로 진행이 되도록 한다는 말이죠. 그런데 그 뇌관이 압력을 받으면 심장이 정상적으로 활동을 하지 못하게 되고, 그러면 그만 심정지가 오게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55살을 먹은 여배우 강수연이 죽었다는 말이죠. 그렇게 보면 그 원인은 스트레스에 있다고 할 수 있다는 것이죠.
그러면 스트레스는 왜 받습니까? 이유는 하나밖에 없는데, "내가 나를 지키지 않으면 아무도 나를 지켜주지 않는다" 라는 겁니다. 그러면 자기의 명예, 품위, 가치, 그런 것들이 다 박살이 난다는 말이죠. 사랑이 없으니 스트레스를 받는데, 그래서 개나 고양이라도 키워야 한다는 것이죠. 왜냐하면 그런 것들은 자기에게 사랑을 준다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똑같은 밥과 반찬을 가지고 저녁을 먹는데, 그러면 자기 혼자서 먹을 때와 손자손녀와 같이 먹을 때, 이 중에서 과연 어느 경우가 밥맛이 더욱 좋을까요? 그것은 당연히 손자손녀와 같이 먹을 때인데, 물론 너무 자주 찾아오면 곤란하겠지만 말이죠(ㅋㅋ).
스트레스라는 것이 추상적인 것이 아닌데, 인간의 머리에 들어오는 모든 감각이라는 것은 그냥 수용되는 것이 아니고 서로 주고 받고 한다는 겁니다. 테니스처럼 공을 치고 받고 하듯이 한다는 말이죠. 물론 여기서 자기가 보낸 것만 받는 것이 아니고, 상대방의 반응을 캐치한다는 겁니다.
우리 인간은 그런 반응이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데, 그래서 부부가 서로 매일같이 싸우다가도 하나가 죽으면 어떻게 됩니까? 그야말로 완전히 기가 다 죽고 마는데, 그러니 싸우는 것도 역시 대화를 하는 것이고, 또한 자기를 살리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는 말이죠.
그래서 교회도 혼자서 가면 재미가 없고, 남편이 같이 가면 신이 난다는 겁니다. 남편이 늦게 일어나더라도 온갖 아양을 다 떨어서 얼른 준비를 시켜서 데리고 가야한다는 말이죠. 그렇게 사람은 주고 받으면서 인격이라는 것이 만들어지는데, 즉 "나의 나다움이 된다" 라고 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교회에 나와서 주님의 사랑을 바라는데, 특히 천주교가 그런 것이 심하다는 말이죠. 성모 마리아의 경우에, 그것은 과거에 자기가 잊어버렸던 어머니에 대한 기억인데, 그렇게 모든 것을 다 품어주는 따뜻한 기억을 성모 마리아가 대체물로 해서 제공해준다는 겁니다.
사람들이 성모 마리아에게 하는 것과 부처에게 하는 것이 똑같은데, 그래서 종교가 우상이란 말이죠. 자기가 스트레스를 받지 않고 남은 여생이라도 행복하게 해줄 수가 있다고 여긴다는 겁니다. 옛날에 자기가 살았던 방식, 즉 자기 말에 반응을 보여주고 호응을 해주고 추임새를 넣어주는, "참 잘했어요" 라고 하면서 말이죠.
그렇게 '나'의 여기 있음에 대해서 증명해줄 수 있는, 그것도 "착하게 있다. 훌륭하게 있다. 정직하게 있다" 라고, 그렇게 옆에서 호응해주는 사람과 같이 있는 즐거움을 누리고 싶어한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것을 그대로 교회에까지 가지고 와서, 교회에서 마음이 맞는 사람을 만나서 같이 수다를 떨면서 즐기고 싶어한다는 말이죠.
* 목회성공의 비결 !!
그리고 바로 그러한 장(場)을 마련해주는 것이 목회성공의 비결이라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인간들이 스트레스를 받지 않도록 놀이터를 만들어주는 것인데, 그게 바로 오늘날의 교회라는 말이죠. 그러니 모이는 장소도 비좁은 지하실과 같은 곳보다는 넓고 햇빛이 잘 드는 곳이 좋다는 겁니다.
절도 마찬가지인데, 그래서 사람들이 조그마한 암자보다는 동화사와 같은 큰 절을 선호한다는 말이죠. 왜냐하면 그런 곳이 스트레스를 풀기에 훨씬 더 좋다고 여긴다는 것이죠. 이런 모든 것이 "내가 나를 지키지 않으면 안 된다" 라는 것인데, 그렇게 자기가 옛날 방식으로 살아갈 수 없다면, 거기서 스트레스가 생긴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든 예수님이든 간에 모든 것이 자기 중심인데, 식구든 친구든 간에 모두가 자기를 위해주는 방식이 아니라고 한다면, 그것이 다 스트레스가 된다는 말이죠. 그래서 인기가 있는 사람은 그 인기를 계속해서 유지해주어야 버틸 수 있는데, 만약에 그 인기가 시들해지면, 그러면 스트레스를 받는다는 겁니다.
* 예수님은 다른 분 !!
우리가 성경공부를 한다고 아무리 이렇게 모여있어도, 우리는 자기 자신밖에 챙길 수가 없는데, 그게 우리 인간이 마지막으로 할 수 있는 것이란 말이죠. 그러면 이게 과연 예수님의 모습인가요? 그러니 우리가 예수님과 차이가 나는 정도가 아니고, 예수님은 우리와 완전히 다른 분이라는 겁니다.
우리 쪽에서 예수님에게로 건너갈 수가 없는데, 베드로가 건너가고자 했지만 예수님은 극구 말렸다는 것이죠. 왜냐하면 예수님은 완전히 다른 분인데, 그분의 세계가 천국이라면, 우리는 엉뚱한 천국을 생각하고 있다는 겁니다. 자기가 이 세상에서 자기 위주로 살던 방식이 그대로 유지되는 나라가 천국이어야 하는데, 그래야 숨이라도 쉬고 살 수 있다고 우리는 우긴다는 말이죠.
* 참으로 희한한 결혼식 !!
제가 지금 여러분에게 구라를 치는 것이 아닌데, 성경에 나온다는 겁니다. 마태복음 22장에 보면 어떤 결혼식이 나오는데, 참으로 희한한 결혼식이란 말이죠. 임금님 아들이 결혼을 하는데, 그러니 이것은 개인적인 문제라는 것이죠. 그런데 백성들에게 물어보지도 않고 초청해서 참석하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러자 그들은 당연히 거부를 하는데, 왜냐하면 각자의 중요한 일이 다 따로 있다는 말이죠. 그러면 임금님이 받아들이면 되는데, 그런데 어떻게 나옵니까? 신하들을 시켜서 마을을 불태워버리는데, 그리고는 거리에 나가서 만나는 사람들을 데리고 오라고 한다는 겁니다. 이것을 전도집회에서 많이 써먹는데, "아무나 오라" 라고 플랜카드를 붙여놓기도 하고 말이죠.
아무튼 그렇게 해서 결혼식에 사람들이 가득하다는 겁니다. 그러면 임금님은 이왕 사람들이 왔으면 좋게 좋게 하면 되는데, 그런데 예복을 입지 않은 자를 발견하고는, 손과 발을 다 묶고 어두운 바깥에 그만 던져버린다는 말이죠. 그게 지옥인데, 그러니 횡포도 무슨 이런 횡포가 다 있느냐는 겁니다.
(마 22:1) 예수께서 다시 비유로 대답하여 가라사대
(마 22:2) 천국은 마치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과 같으니
(마 22:3) 그 종들을 보내어 그 청한 사람들을 혼인 잔치에 오라 하였더니 오기를 싫어하거늘
(마 22:4) 다시 다른 종들을 보내며 가로되 청한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내가 오찬을 준비하되 나의 소와 살진 짐승을 잡고 모든 것을 갖추었으니 혼인 잔치에 오소서 하라 하였더니
(마 22:5) 저희가 돌아보지도 않고 하나는 자기 밭으로, 하나는 자기 상업차로 가고
(마 22:6) 그 남은 자들은 종들을 잡아 능욕하고 죽이니
(마 22:7) 임금이 노하여 군대를 보내어 그 살인한 자들을 진멸하고 그 동네를 불사르고
(마 22:8) 이에 종들에게 이르되 혼인 잔치는 예비되었으나 청한 사람들은 합당치 아니하니
(마 22:9) 사거리 길에 가서 사람을 만나는 대로 혼인 잔치에 청하여 오너라 한대
(마 22:10) 종들이 길에 나가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만나는 대로 모두 데려오니 혼인 자리에 손이 가득한지라
(마 22:11) 임금이 손을 보러 들어올새 거기서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을 보고
(마 22:12) 가로되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느냐 하니 저가 유구무언이어늘
(마 22:13) 임금이 사환들에게 말하되 그 수족을 결박하여 바깥 어두움에 내어 던지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하니라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고 하니, 자기가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 그런 강조점이 여기에는 전혀 없다는 겁니다. 사람들이 스트레스를 받던 말던 간에 중요한 것은 자기 아들인데, 즉 예수님이라는 것이죠. 교회에 다니면서 이런 성경구절이 보이지 않았는지 모르겠는데 말이죠.
교회에 나올 때에 그 마음가짐이 "주님이여, 저를 어떻게 해도 좋으니, 주님만 좋게 해주세요" 라고, 그렇게 되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겁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교회에 나오기 전엔 오직 자기만 챙기는데, 스트레스를 받지 않기 위해서 말이죠. 그래서 남들은 어떻게 되던지 간에, 주위 사람들에게 오직 자기에게 도움이 되는 짓거리를 하라고 요구한다는 겁니다.
이것은 "나는 너희의 덕을 좀 보겠다. 거기에 대해서 용납해라" 라는 것인데, 우리도 그런 방식으로 살아왔는데, 그렇지요? 그러니 '나' 라는 존재 자체가 죄라는 말이죠. 우리의 두뇌부터 시작해서 심장, 그 모든 것이 "나는 스트레스를 받지 않겠다" 라는 것으로 구성되어있는데, 그러니 이것을 무슨 수로 고치겠느냐는 겁니다.
* 선지자 !!
그래서 우리는 주님의 전쟁을 고맙게 여겨야만 하는데, 왜냐하면 우리가 도저히 고칠 수 없는 것을, 그만 그것을 지우개가 나타나서 지워버린다는 말이죠. 이 지우개를 구약에서는 언약이라고 한다고 했는데, 그렇게 숨겨져 있던 하나님의 비밀이 등장한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 언약과 사람이 결합된 것을 세 글자로 '선지자' 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러면 구약에서의 전쟁양식은 어떻게 되는고 하니, 선지자 안과 선지가 바깥의 전쟁이라고 말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러면 이 선지자에 아브라함을 집어넣고, 이삭을 집어넣고, 야곱을 집어넣고, 모세를 집어넣고, 그리고 예레미야와 에스겔을 집어넣으면 된다는 것이죠.
그것이 신약에 오면, 이 선지자의 자리에 사도바울을 비롯한 성령을 받은 자들을 집어넣으면 되는데, 그러니 우리도 선지자 속에 들어간다는 겁니다. 우리는 왕 같은 제사장이고 또한 말씀을 전하는 선지자라는 말이죠. 즉 왕, 제사장, 선지자 기능이 우리 안에서 작동하고 있다는 겁니다.
(벧전 2:9)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왜냐하면 모든 선지자의 완성은 예수님인데, 즉 예수님은 왕이고 제사장이고 또한 선지자라는 말이죠. 예수님은 자기가 승리해놓고 우리에게 선물로 주셨는데, 그것이 에베소서 4장 8절에 보면 나온다는 겁니다. 이 말씀을 누가 한번 큰소리로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엡 4:8) 그러므로 이르기를 그가 위로 올라가실 때에 사로잡힌 자를 사로잡고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셨다 하였도다
* 창조의 능력이 선물로 주어지게 되면 !!
예수님께서 악마를 사로잡고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셨는데, 그 선물이 바로 예수님이 이루었던 새로운 창조의 능력이라는 겁니다. 그렇게 예수님을 중심으로 창조했던 원래의 창조원칙이 우리에게 선물로 주어지게 되면,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됩니까?
우리의 오염된 것은 일단 모두 다 지워지고, 그렇게 죽은 뒤에 부활의 능력, 즉 성령의 능력이 와서 우리는 하나님의 새로운 피조물이 된다는 말이죠. 그렇게 되면 우리는 자기 중심이 되는 것이 아니고, 누구 중심이 되는고 하니까, 우리는 아들 중심, 즉 예수님 중심이 된다는 겁니다.
그렇게 우리 안에 예수님의 요소가 들어있다고 하면, 예수님이 영원한 것과 같이 함께 영원한 천국을 누리게 된다는 것이죠. 왜냐하면 우리의 요소가 아닌 예수님의 요소가 우리 안에 장착이 되어있으니 말이죠. 자기가 바르게 살아서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선물이 우리 안에 박혀있기 때문에 그렇다는 겁니다.
여러분, 남의 자식보다 자기 자식이 더 좋지요?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인데, 그러면 남의 자식과 자기 자식의 차이점이 무엇입니까? 자기 요소가 남의 자식에게는 없고, 그게 자기 자식에게는 들어있다는 겁니다. 자기의 것이 들어있기 때문에 귀하다는 말이죠. 그렇게 예수님의 것이 우리에게 들어있으니, 우리를 버리지 않는다는 겁니다. 자기 것을 집어넣었기에 말이죠.
여러분, 붕어빵을 아시죠? 저는 그것을 밀가루를 먹으려고 먹는 게 아닌데, 그 안에 들어있는 팥앙금 때문에 먹는다는 말이죠. 그렇게 우리 안에는 핵심요소가 들어있는데, 그것이 예수님의 살과 피라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내 살과 피가 들어있지 않으면 영생이 없다" 라고 하셨다는 것이죠.
(요 6:5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 성령은 누구에게 옵니까?
그렇다면 여기에서 질문을 할 수가 있는데, 첫째로 "성령이 누구에게 옵니까?" 라는 것이고, 그리고 두 번째로 "성령은 어디에서 옵니까?" 라는 겁니다. 이렇게 질문을 해주어야 문제가 하나하나 다 풀린다는 말이죠. 사람들이 여기에 대해서 몹시 궁금해하는데, 아닌가요? (ㅋㅋ)
첫 번째 질문에 대한 해답은 "아무에게도 오지 않습니다" 라는 것인데, 왜냐하면 모든 사람은 성령을 받을 자격이 없다는 겁니다. 구원을 받지 않아야 할 자들이라는 말이죠. 이것이 하나님의 원칙인데, 인간은 처음부터 하나님께 버림을 받았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 버림받음을 계속해서 유지를 해주어야하기 때문에, 아무에게도 구원이 오지 않는다는 겁니다.
* 아무에게도 오지 않습니다, 아무에게도 옵니다 !!
그리고 두 번째로는 "아무에게도 옵니다" 라는 것인데, 그 이유는 그 누구라도 구원받을 자격이 없기 때문에 그렇다는 말이죠. 똑같은 이유 때문에 성령이 오지 않아야 하고, 그리고 똑같은 이유 때문에 성령이 오게 되는데, 그러니 이것은 주님의 일방적인 자비이고 은혜라는 겁니다.
여러분, 캠핑카를 가지고 아무 곳에서나 커피장사를 할 수 있습니까? 없는데, 그래서 캠핑카는 아무런 곳에서나 장사를 할 수 있다는 말이죠.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가 구원을 얻을 수 있는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어느 누구도 구원받을 자격이 없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자기의 결정과 선택은 일체 여기에 끼어들 수가 없다는 말이죠.
(행 2:21)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하였느니라
아까 이야기한 것이 중요해서 다시 말씀을 해드리겠는데, 인간들이 교회를 자기들의 놀이터로 만들고 말았는데, 그래야 교회가 커지고 재미가 난다는 겁니다. 그렇게 하는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인간의 몸 자체가 홀로 살지 못하는데, 서로 말이 통하는 사람과 뭔가 주고 받아야 살아갈 맛이 나는 몸으로 이미 변형이 되어있다는 말이죠.
그렇게 되니 그 관심사가 "내가 얼마나 행복한가?" 라는 것에 가있는데, "나는 망가졌지. 나는 버림을 받았구나" 라고 하는 성경적인 내용은 기피하게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무조건 자기에 대해서 싫은 소리를 하면 적이 되고, 자기를 좋아해 주는 사람이 있으면 동지가 된다는 말이죠.
그러니 여호와 전쟁은 원수의 대상을 변경시키는 것인데, 즉 "나는 은혜를 받아야 하고, 천국에 가야한다" 라는 것이 하나님의 적이라는 겁니다. 그것은 "아무도 구원받을 수 없다" 라는 것에 대한 강력반발이란 말이죠. "주님께 영광을 돌리면 되잖아요? 앞으로 잘하면 되지요?" 라고 하면서, 인간들은 자기가 밥이라도 먹는다고 여기면서 말이 참 많은데, 하지만 인간의 모든 말은 엄살이라는 것이죠.
* '신장 하나' 마을 !!
저기 내전으로 나라가 엉망이 된 아프가니스탄에 가면 '신장 하나' 라는 마을이 있다고 하는데, 원래 우리 몸에는 신장, 즉 콩팥이 하나가 아니고 두 개라는 겁니다. 그런데 그 마을 사람들은 이상하게도 신장이 하나밖에 없다는 말이죠. 태어날 때부터 그런 게 아니고 돈을 받고 팔아먹었다는 겁니다.
그렇게 라도 해야 자기와 자기 식구들이 겨우 살아갈 수가 있다는 것인데, 먼저 남자 쪽에서 신장을 떼어내고, 그 다음에는 여자 쪽에서 떼어낸다는 말이죠. 신장 하나에 400만원 정도에 거래가 된다고 하는데, 그런데 그것을 사들인 브로커가 외국에 팔어먹을 때는 무려 10배를 넘게 받는다는 겁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교회가 어떻고 저떻고 아무리 이야기를 해도 아무런 소용이 없고, 밥만 먹여준다고 하면 무엇이든지 다 하겠다고 한다는 말이죠. 그런데 사람은 자기가 먹을 것이 생기면 또 다른 것에 욕심을 내게 되는데, 즉 "나를 예뻐해줘요. 사랑해줘요" 라고 나온다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광야에서 먹을 것만 주었는데, 그야말로 바닥을 치게 만들었다는 것이죠.
* 지혜 있는 자들을, 강한 자들을 부끄럽게 !!
이제 두 번째 질문을 하겠는데, 먼저 성령은 누구에게 오는고 하니, 아무에게도 오지 않는데, 하지만 주님은 주고 싶은 자에게 주신다는 겁니다. 계층이나 계급에 관계가 없다는 말이죠. 그래서 고린도전서 1장에 보면 뭐라고 합니까? "우리 가운데 문벌이 좋고 지혜가 있는 자가 누가 있는가? 하나님께서는 미련한 것을 택해서 지혜가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셨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고전 1:26)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고전 1:27)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왜냐하면 그들이 재물이 많다든지 혹은 똑똑하다든지, 그렇게 해서 성령을 받은 것이 아닌데, 성령은 그냥 오셨다는 말이죠. 그런 자들은 1번을 아는데, 즉 자기는 성령을 받을 자격이 전혀 없다는 것을 안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러한 자들이 바로 2번에 해당이 된다는 것이죠.
그래서 "왜 저를 구원하십니까?" 라고 하는 놀라움과 기쁨의 태도를 보이는데, 그것이 곧 사랑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사랑이란 자기를 지워버리는 것인데, 자기를 잊어버린다는 말이죠. 터진다는 것인데, 그게 사랑하는 자의 마음이고,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자기는 어떻게 되어도 상관이 없다는 겁니다.
여러분도 그러한 사랑을 해보셨지요? 권사님, 어떻게 아닌가요? (ㅋㅋ) 그것을 '크레이지 러브' 라고 하는데, 그야말로 미친 듯이 사랑을 한다는 말이죠. 그러니 사랑이라는 것은 그분이 따스함이 덮쳐서, 자기가 있는지 없는지 전혀 생각이 나지 않게 된다는 겁니다.
변화산에서 예수님께서 해와 같이 빛나니, 베드로가 그것을 보고 뭐라고 합니까? "여기가 좋사오니, 주님을 위해서, 모세를 위해서, 엘리야를 위해서 초막 3개를 지어드리겠습니다" 라고 하는데, 그러니 자기는 없는데, 주님만 있으면 자기는 바깥에 그냥 자도 괜찮다는 것인데, 그게 하늘나라라는 말이죠.
베드로후서 1장에서 베드로가 그 변화산 사건을 다시 한번 상기를 시키는데, 이제야 그것이 이해가 된다고 한다는 겁니다.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아서 죽어도 괜찮은데, 주님의 사랑만 있으면 자기는 어떻게 되어도 전혀 상관이 없다는 것이죠. 바로 그게 사랑이라는 말이죠.
(눅 9:33) 두 사람이 떠날 때에 베드로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사이다 하되 자기의 하는 말을 자기도 알지 못하더라
(벧후 1:16)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강림하심을 너희에게 알게 한 것이 공교히 만든 이야기를 좇은 것이 아니요 우리는 그의 크신 위엄을 친히 본 자라
(벧후 1:17) 지극히 큰 영광 중에서 이러한 소리가 그에게 나기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실 때에 저가 하나님 아버지께 존귀와 영광을 받으셨느니라
(벧후 1:18) 이 소리는 우리가 저와 함께 거룩한 산에 있을 때에 하늘로서 나옴을 들은 것이라
* 누가 그 사랑을 주시는가?
그 다음에 두 번째 질문에 대해서 해보겠는데, "누가 그 사랑을 주시는가?" 라는 겁니다. 그것은 오늘 강의내용에 나왔는데, 전쟁에서 승리하신 분이 우리에게 사랑을 주신다는 말이죠. 그러니 새삼스럽게 우리를 보고 "잘 싸워라" 라고 하는 게 아니고, 전쟁은 끝이 났다는 겁니다. 사로잡힌 자를 이미 사로잡았는데, 즉 대장을 사로잡아서 전쟁종식을 선언하시고 우리에게 선물을 주셨다는 말이죠.
물론 이것은 하나의 가상 시나리오인데, 1년 뒤에 우크라이나의 어떤 사람에게 반지가 하나 택배로 왔다는 겁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것이 러시아 대통령인 푸틴의 반지였는데, 푸틴이 사로잡혔다는 말이죠. 전쟁이 끝나고 우크라이나 백성들에게 푸틴의 재산을 전리품으로 나누어주었다는 겁니다.
그러니 그 반지를 끼는 순간 어떻게 됩니까? 우리는 우리의 모든 인생문제에 대해서 승리한 것인데, 왜냐하면 전쟁에서 승리하신 분이 주셨기에 말이죠. 그렇다면 우리가 지금 여기서 알아야 하는 것은, 그분이 어디서 어떻게 우리에게 선물을 전달하시느냐는 겁니다.
여기서 대해서는, 김동환이라는 사람이 1927년에 조선일보의 조선문단이라는 곳에 당선된 시(詩)로 제가 답변을 해드리겠습니다. 이 선물이 어디서 어떤 모습으로 전달이 되느냐는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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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 너머 남촌에는 ]
1927 김동환
산 너머 남촌에는 누가 살길래
해마다 봄바람이 남으로 오네
꽃 피는 사월이면 진달래 향기
밀 익는 오월이면 보리 내음새
어느 것 한 가진들 실어 안 오리
남촌서 남풍 불 제 나는 좋데나.
<2>
산 너머 남촌에는 누가 살길래
저 하늘 저 빛깔이 저리 고울까
금잔디 너른 벌엔 호랑나비 떼
버들밭 실개천엔 종달새 노래
어느 것 한 가진들 들려 안 오리
남촌서 남풍 불 제 나는 좋데나.
<3>
산 너머 남촌에는 배나무 있고
배나무꽃 아래엔 누가 섰다기,
그리운 생각에 영(嶺)에 오르니
구름에 가리어 아니 보이나.
끊었다 이어 오는 가는 노래
바람을 타고서 고이 들리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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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 보면 "산 너머 남촌에는 누가 살길래" 라고 하는데, 자연의 의인화라는 겁니다. 자연에 어떤 분이 있어서 해마다 봄바람이 남쪽에서 불어오게 한다는 말이죠. 물론 주인공은 나타나지를 않는데, 하지만 그 주인공이 보낸 선물은 우리가 받는데, 그게 봄바람이라는 겁니다.
"꽃 피는 사월이면 진달래 향기, 밀 익는 오월이면 보리 내음새" 라고 하는데, 진달래가 향기가 있는지는 모르겠는데, 아무튼 그 어느 것이라도 실어서 나르지 않는 것이 없다는 말이죠. 그러니 주님이 이루시는 모든 것, 즉 마귀를 이기고, 죄를 이기고, 율법을 이기고, 죽음을 이기는, 그 모든 것을 성령으로 실어서 우리에게 온다는 겁니다.
그래서 "남풍이 부니 나는 좋다" 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 선물을 받아본 사람은 아는데, 자기가 자기를 지키는 것보다 그것이 훨씬 더 낫다는 것을 안다는 겁니다. 성경전체가 이처럼 여호와의 전쟁이 되어서, 그 전리품을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다는 내용이라는 말이죠.
그러면 이 내용을 하기 이전에, 먼저 우리가 마귀에게 속아서 하나님의 적이 되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는 겁니다. 그 적이 무엇인고 하니, 악바리가 되어서 자기 인생을 자기가 지키려고 하다보니까, 스트레스가 보통이 아니라는 말이죠. 그래서 "네가 나를 욕했지? 전에는 나에게 호응을 해주더니만, 이제는 왜 하지 않아?" 라고 하면서 부부싸움을 한다는 겁니다.
왜 그러한 일들이 일어납니까? 남쪽에서 불어오는 봄바람을 받지 못해서 그러하다는 말이죠. 그러면 그 사람은 뭐라고 합니까? "내가 산 너머 남촌에 가보니 아무 것도 없었어" 라고 하는데, 그것이 바로 이 세상의 학문이라는 겁니다. 창조된 것은 있는데, 창조주가 없다는 것이죠.
그러니 평생을 살아도 헛살았는데,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겁니다. 믿을 것을 자기를 두르고 있는 철갑옷밖에 없는데, 그러니 얼마나 무거운 인생을 살아가는지 모른다는 것이죠. "이것은 내 회사이고 내 재산이다" 라고 하면서 말이죠. 그렇게 자기 것이라고 하면서 짊어지고 가는데, 그리고 그게 안 되면 한강에 뛰어내린다는 겁니다. 하지만 그렇게 한다고 해결이 됩니까? 전혀 아니라는 말이죠.
* 이삭의 전쟁 !!
이제 교재 47페이지를 보겠는데, 여기에 '이삭의 전쟁' 이라고 나온다는 겁니다. 아까 하나님의 언약과 사람이 결합되면 무엇이 된다고 했습니까? 그렇게 되면 선지자가 되는데, 그러한 선지자들 중의 한 사람이 바로 이삭이라는 말이죠. 그렇다면 그 이삭이 어떤 전쟁을 수행했습니까?
여기서 창세기 22장 16절과 17절을 보겠습니다.
(창 22:16) 가라사대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를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창 22:17)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로 크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
* 적의 등장 !!
여기 17절 마지막에 보면 "네 씨가 그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 라고 하는데, 적이 등장한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선지자가 하는 일이 전쟁을 수행하는 기능이라는 말이죠. "내가 너에게 복을 줄게. 그러니 잘 먹고 잘 살아라. 끝!", 그게 아니라는 겁니다. 적이 출현한다는 것이죠.
아브라함이 자기 아들 이삭을 모리아 산에 가서 잡으려고 했는데, 하나님이 근처 수풀에 양을 준비해주셔서 대신 잡았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삭이 그야말로 구사일생으로 살았다는 말이죠. 이것이 바로 그때 나온 이야기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삭은 죽음을 경험하고 살았다는 것이죠.
그러면 이삭의 적은 무엇인고 하니, 이삭이 존재하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악마의 눈으로 보게 되면, 모든 인간은 죽어야 마땅하다는 겁니다. 죄를 지었기에 버림을 받아야하고, 즉 저주를 받아야 한다는 말이죠. 그런데 이삭이 등장함으로서, 죽어야 마땅한데 다시 살아나는 자가 있게 된다는 겁니다. 죄를 지어서 저주를 받아야 마땅한데, 그런데 용서를 받는 자가 생겨난다는 말이죠.
* 야, 비상이다 !!
이렇게 되면 악마의 나라에 비상이 걸리게 되는데, 지금 악마의 나라가 우리 때문에 비상이 걸렸다는 겁니다. 악마가 "너희는 왜 다른 사람들과 같지 않아? 너희는 무엇을 믿고 그렇게 설쳐? 건방지게도 무엇을 믿고 이 세상을 초월하는 자유를 누려?" 라고 나온다는 것이죠.
그렇게 여러분의 주위에서 복음을 모르는 자들이 시비를 거는데, 그렇지요? "말씀을 지켜야 구원을 받는데, 그런데 말씀 앞에서 죄인이라고 하면서 그렇게 하면 되겠어? 그래도 열심히 하고, 또한 착한 구석도 있어야지" 라고 하는데, 그게 악마의 다그침이라는 겁니다.
"네 인생은 네가 지켜야지. 그렇지 않으면 스트레스를 받아" 라고 나온다는 말이죠. 정작 자기가 스트레스를 받으면서, 스트레스가 없는 자들을 보고 시비를 건다는 겁니다. 제가 지금 여러분을 보니 전혀 스트레스가 없는데, 살도 찌고 혈색도 좋다는 말이죠. 그게 아니면, "나는 이렇게 살다가 그냥 죽을 거야" 라고 하면서 자포자기를 해서 그런 겁니까? (ㅋㅋ)
* 이삭의 신붓감을 찾아서 !!
그러던 이삭이 이제 나이가 들어서 장가를 가야하는데, 그게 창세기 24장에 보면 굉장히 길게 연결이 되어있다는 겁니다. 자세하게 나오는데, 아브라함은 더 늙어서 자기가 가지 못하고, 신임을 하는 늙은 종을 고향으로 보내서 신붓감을 찾도록 하는데, 즉 특사를 파견한다는 것이죠. 이것은 바로 아브라함 자신이 가는 것과 동일하다는 겁니다.
거기에 가서 신붓감을 고르는데, 가나안 사람은 안 되고 혈육을 찾으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 혈육이 하란에 있는데, 아브라함이 이라크에서 이스라엘로 오면서 중간에 터키 쪽에 들렸다는 겁니다. 우르를 떠나서 하란을 거쳐서 이스라엘로 왔다는 말이죠. 그 하란에 친척들이 있는데, 그들 가운데서 배필을 고르라고 한다는 겁니다.
이것은 무슨 뜻인고 하니까, 아브라함이 거쳐왔던 코스에서 주의 일이 반복해서 일어난다는 말이죠. 그러니 오늘날 우리가 성도로서 구원을 받는 것은, 우리가 예수님이 가신 코스대로 간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우리의 인생 하나하나가 무엇인고 하니, 우리가 원하지 않아도 우리는 각자의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의 길을 간다는 말이죠.
우리가 가겠다고 결심을 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주님이 그렇게 이끄신다는 겁니다. 십자가를 진다고 해서 고생을 늘어지게 하는 것이 아니고, "나는 아무 것도 아니구나" 라는 것을 날이 갈수록 더욱 더 깨달으면서 살아가게 된다는 것이죠. 원망이 아닌 감사와 기쁨으로 말이죠.
* 순적히 !!
그렇게 늙은 종이 신붓감을 찾아가는데, 여기에 한 단어가 나오는데, 아직도 기억이 생생한데, 상견례를 하면서 안 사돈이 "이번 혼사가 순적히 되기를 바랍니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물론 제가 모르는 단어는 아니지만, 그게 나올 줄은 몰랐다는 것이죠(ㅋㅋ). 왜냐하면 평소에 사람들의 거의 사용하지 않는 단어라는 말이죠.
(창 24:12) 그가 가로되 우리 주인 아브라함의 하나님 여호와여 원컨대 오늘날 나로 순적히 만나게 하사 나의 주인 아브라함에게 은혜를 베푸시옵소서
아브라함이 종에게 그렇게 기도를 했는데, 모든 일이 순적히 되게 해달라고 했다는 겁니다. 주님의 뜻대로 되기를 말이죠. 이 늙은 종이 드디어 우물가의 여인의 만나게 되는데, 그 여인이 바로 리브가라는 겁니다. 영어로는 '레베카' 인데 말이죠. 들어보셨죠? 이런 제목의 유명한 노래가 있다는 겁니다.
이 리브가는 남편의 얼굴을 보지 못했는데, 물론 사진도 없었다는 말이죠. 이 리브가가 결혼을 하지 못해서 안달이 난 여자도 아닌데, 그러니 적어도 "우리는 하나님의 뜻대로 결혼했습니다" 라고 하려면, 얼굴을 보지 않고 결혼을 할 정도가 되어야 한다는 겁니다(ㅋㅋ).
일단 얼굴을 보았으면 탈락인데, 왜냐하면 거기에는 자기의 강력한 선택이 작용한다는 말이죠. 옛날에는 "아버지가 소개해서 시집을 갔지, 제가 얼굴을 보고 간 것이 아닙니다" 라고 하는 경우가 있었다고 하는데 말이죠. 그냥 장터에서 만나서 "우리 딸과 너거 아들을 결혼시키자" 라고 해서, 그렇게 결혼을 시켰다는 겁니다. 물론 믿기가 힘들지만 말이죠.
* 원수의 성문을 얻게 할지어다 !!
아무튼 리브가는 신랑의 얼굴도 보지 않고 결혼을 했는데, 그러니 리브가는 계시에 이끌린 것인데, 즉 계시와 결혼을 했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언약과, 즉 말씀과 결혼을 했다는 말이죠. 그러자 그 오빠인 라반이 뭐라고 축복을 합니까? "우리 누이여, 너는 천만인의 어미가 될지어다" 라고 하는데, 이것은 우리가 그래도 이해할 수 있다는 겁니다. 자식을 많이 낳게 해달라고 했다는 것이죠.
그런데 그 다음에 보면 "네 씨로 그 원수의 성문을 얻게 할지어다" 라고 하는데, 아니 여기서 원수의 성문이 왜 등장합니까? 시집을 갈 누이동생에게 그러한 말이 왜 필요하냐는 겁니다. 그것은 창세기 22장에서의 "네 씨가 그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 라는 것과 같은 의미라는 말이죠. 그러니 이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창 24:57) 그들이 가로되 우리가 소녀를 불러 그에게 물으리라 하고
(창 24:58) 리브가를 불러 그에게 이르되 네가 이 사람과 함께 가려느냐 그가 대답하되 가겠나이다
(창 24:59) 그들이 그 누이 리브가와 그의 유모와 아브라함의 종과 종자들을 보내며
(창 24:60) 리브가에게 축복하여 가로되 우리 누이여 너는 천만인의 어미가 될지어다 네 씨로 그 원수의 성문을 얻게 할지어다
* 이 세상으로부터의 탈출 !!
이것만 하고 마치도록 하겠는데, 이 세상의 모든 인간들은, 자기들이 알 수 없는 이유로 인해서 갇혀있는 신세에 놓여있다는 겁니다. 그러니 구원은 무엇인고 하니, 구출인데, 즉 갇혀있는 이 세상 자체에서의 구출이란 말이죠. 창조가 망가진 쓰레기더미에서, 창조의 원래취지, 즉 우리가 예수님을 위하여 만들었다고 하는 것, 그게 인간다운 것이고 새 창조라는 겁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언약이 개입해서 구멍을 내게 되는데, 그렇게 악마에게 갇혀있던 것에서부터 구멍을 내어서 바깥으로 끄집어내는 전쟁, 그게 곧 여호와의 전쟁이라는 것이죠. 그래서 이미 바깥으로 탈출을 하게 된 자들은, 이 전체를 모두 다 볼 수 있는 안목을 가지게 된다는 말이죠.
그렇게 전체를 다 보게 되면 무엇이 좋은고 하니,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다는 겁니다. 물론 스트레스를 받지 않기 위해서 끄집어내어진 것은 아니지만 말이죠. 이 세상이 더 이상 부럽지 않고, 그래서 자기 체면과 위신이 아무리 망가져도, 그런 것은 전혀 상관이 없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자기는 그 세계에서 이미 탈출했기 때문인데, 그래서 그 세계의 방식으로 더 이상 살아가지 않는다는 말이죠. 남들에게 지지 않으려고 하는, 그런 방식과는 이미 작별을 고했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저 건져주신 예수님의 살과 피, 즉 십자가만 바라보면서 감사하게 된다는 말이죠.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지만, 주님이 친히 용사가 되셔서, 도저히 바깥으로 나갈 수 없는 저희들을 끄집어내어서, 이미 구원이 되었음을 성령을 통해서 통보해주시니, 그 모든 것들이 주님의 은혜인 줄 알고 감사하면서 살아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22,5,17 오전 11시에 마침.
주님, 저도 순적히 안 사돈을 만나게 해주소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