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르는 미래
2007년 1월 14일 본문 설교: 전도서 9:1-4
(전 9:1) 『내가 마음을 다하여 이 모든 일을 궁구하며 살펴본즉 의인과 지혜자나 그들의 행하는 일이나 다 하나님의 손에 있으니 사랑을 받을는지 미움을 받을는지 사람이 알지 못하는 것은 모두 그 미래임이니라』
(전 9:2) 『모든 사람에게 임하는 모든 것이 일반이라 의인과 악인이며 선하고 깨끗한 자와 깨끗지 않은 자며 제사를 드리는 자와 제사를 드리지 아니하는 자의 결국이 일반이니 선인과 죄인이며 맹세하는 자와 맹세하기를 무서워하는 자가 일반이로다』
(전 9:3) 『모든 사람의 결국이 일반인 그것은 해 아래서 모든 일 중에 악한 것이니 곧 인생의 마음에 악이 가득하여 평생에 미친 마음을 품다가 후에는 죽은 자에게로 돌아가는 것이라』
(전 9:4) 『모든 산 자 중에 참예한 자가 소망이 있음은 산 개가 죽은 사자보다 나음이니라』
사람의 기다림이 다 헛것입니다. 전도서가 그렇게 단언하는 이유는, 미래라는 것이 단순한 미래가 아니라 하나님의 손에 놓여져 있는 미래이기 때문입니다. 즉 인간의 손에 놓여져 있는 미래는 아니라는 말입니다. 인간들은 자신의 행함이 삽입되지 아니하고서는 도무지 매사를 해석하지 못하는 자들입니다.
어떤 사태를 이해하려고 해도 반드시 자신의 행함을 집어넣어서 그것을 매개로하여 해석해내고자 합니다. 예를 들어 ‘미래’라고 한다면, ‘그 미래를 대비하는 나의 대처 방법’ 같은 것을 고려해서 미래를 생각하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이루시는 미래에는 인간의 그 모든 대처방법을 끼어넣어주지 않는 식으로 움직입니다.
즉 인간들이 미리 미래를 알아채는 것을 허용을 하지를 않습니다. 그것은 미래라는 것이 인간들을 철저하게 배제한 방식으로만 제공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인간에게 미래에 개입할 방식이 허락된다면 여기서부터 ‘괜찮은 인간’과 ‘쓸모없는 인간’과의 구분이 형성됩니다.
그렇게 되면 ‘괜찮은 인간의 계획이나 맹세나 제사’는 ‘쓸모없는 인간의 계획이나 맹세나 제사’보다 월등하게 더 구원에 효력이 있는 것으로 간주됩니다. 바로 이점을 오늘 본문에서는 거부하는 겁니다. 그 어떤 인간도 다른 인간보다 더 우월하다든지 더 가치있는 인간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결코 인류의 미래는 가치있는 인간의 가치있는 활동력과 계획에 의해서 생겨나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우리가 우리의 미래에 대해서 모르고 있지는 않습니다. 이미 알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요한일서 2:23의 경우 같은 것입니다. “아들을 부인하는 자에게는 또한 아버지가 없으되 아들을 시인하는 자에게는 아버지도 있느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은 그 어떤 인간의 가치도 포함되어 있지 않습니다. 오로지 예수님으로만 하나님과 하나가 될 수 있을 뿐입니다. 아들을 부인하는 자는 그 사람이 이 땅에서 무슨 직업을 가지고 열중했든지 상관없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즉 그 사람이 이 지상에서 무슨 계획을 갖고 있으며, 어떤 실행을 행해왔으며, 어떤 실질적이고 도덕적인 성과를 거두었느냐와 전혀 상관없이 그 사람은 지옥에 가게 됩니다.
인간이 아무리 애써도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재간이 없습니다. 동시에 인간이 아무리 애써도 하나님께서 사랑을 취소시키고 미움의 대상으로 달라질 능력도 없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대로 ‘누가 사랑받을지 미움 받을지’는 그 대상이 되는 인간의 그 어떤 행위로서 결정 나는 법이 없습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신의 사랑을 따내기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방도는 다 시도합니다. 이 시점에서 제가 여러분에게 묻습니다. “자신이 속죄되기 위한 방안을 만들어 어떤 식으로 만들 수 있습니까?” 즉 ‘내가 속죄받기 위해 내 쪽에서 실시할 수 있는 방안들이 어떤 것이 있느냐“말입니다.
어떤 사람은 주일성수를 경건하게 지키는 방식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아침에 성경 묵상하고 또한 연이어 기도의 시간을 갖는 것으로 속죄의 방도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을 것입니다. 또한 어떤 이들은, 그냥 믿음으로만 부족하고 경건스러운 행함을 위한 최선의 노력과 성의를 다해야 한다는 이 사실 자체를 믿음으로서 속죄되리가 여기는 사람도 있을 수 있습니다.
또 어떤 이들은, 믿음으로만 구원되기 위한 사전 정지 작업으로서 인간이 해 낼 수 있는 징검다리에 해당되는 행위들을 몇 가지 자기 쪽에서 실시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이 바로 나만의 제사, 나만의 맹세, 나만의 경건, 더나아가서, 나만의 구원의 하나님로 전락합니다.
이런 식이라면 100명이면 100명 모두 자기만의 속죄 방식이 다 다르게 나타날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하루에 기도 30분 동안 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고, 어떤 사람은 1시간 정도는 해야 성에 차는 사람이 있을 수 있고, 어떤 사람은 아예 그것마저 하지 않는 것이 속죄의 방식이라고 우기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과연 신약 성경에서 이런 것들을 옹호하고 있는지를 봐야 합니다. 사도행전 17:30-31에 보니,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허물치 아니하셨거니와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을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저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 하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마지막 날의 속죄 방식은 인간의 모든 행위를 초월해서 오직 하나님께서 예수님에게만 임무로 남기신 일, 즉 십자가 죽으심과 부활로 확정지어져 버렸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 쪽에서 제시하신 미래입니다. 인간들이 나름대로 그 어떤 속죄 방식을 사용했던지 상관없이 속죄의 방식은 이미 확정지어졌습니다. 그런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이 시대 안에 우리는 묶여있고 여기서 빠져나갈 방도는 없습니다. 자신의 속죄방식을 죄인 것으로 부인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순신 장군이 살던 시절에는 이 한반도에 교회도 없었고, 교리도 없었습니다. 그러면 이 순신 장군은 과연 구원받을까요? 이 질문 자체는 옳지 않습니다. ‘이순신 장군이 어떻게 하면 구원받을까요’가 미래에 합당한 질문이 아니라 ‘이순신 장군은 예수님에게 있어 무슨 의미냐’라는 것이 이 미래에 합당한 질문입니다.
시편 79:6에 보면 그 해답이 나와 있습니다. “주를 알지 아니하는 열방과 주의 이름을 부르지 아니하는 열국에 주의 노를 쏟으소서”. 예수님은 이 시편의 말씀을 몸소 수행하시고 이루셔서, 본격적으로 온 세상에 그분의 분노를 퍼부어시는 분이십니다. 즉 이순신 장군은 단지 그 분의 행적이 문제가 아니라 그 분이 예수님을 모른다는 이유만으로 저주받는 사람이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그를 이 세상에 지어 내신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의 미래상입니다.
즉 주님의 미래 속에는 인간의 그 어떤 자기만의 구원을 위한 미래가 따로 설정될 수가 없습니다. 참된 성도는 다음과 같이 고백할 뿐입니다. “주님의 사랑에 의해서 우리가 구원되었습니다.”라고 말입니다.
사람이 계획이 있고 맹세가 있으면 그 때부터 조마조마해 집니다. 행여 그 계획대로 안되면 또 다른 계획을 힘들게 작성한다는 것이 얼마나 괴로운 일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사서 고생하는 경우일 뿐입니다. 자기 속죄 방식을 스스로 지어내지 마세요.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주님의 미래가 우리의 미래를 지배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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