헛된 일과 모르는 일
2007년 1월 7일 본문 말씀: 전도서 8: 14-17
(전 8:14) 『세상에 행하는 헛된 일이 있나니 곧 악인의 행위대로 받는 의인도 있고 의인의 행위대로 받는 악인도 있는 것이라 내가 이르노니 이것도 헛되도다』
(전 8:15) 『이에 내가 희락을 칭찬하노니 이는 사람이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는 것보다 해 아래서 나은 것이 없음이라 하나님이 사람으로 해 아래서 살게 하신 날 동안 수고하는 중에 이것이 항상 함께 있을 것이니라』
(전 8:16) 『내가 마음을 다하여 지혜를 알고자 하며 세상에서 하는 노고를 보고자 하는 동시에 (밤낮으로 자지 못하는 자도 있도다)』
(전 8:17) 『하나님의 모든 행사를 살펴보니 해 아래서 하시는 일을 사람이 능히 깨달을 수 없도다 사람이 아무리 애써 궁구할지라도 능히 깨닫지 못하나니 비록 지혜자가 아노라 할지라도 능히 깨닫지 못하리로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이 모두 하나님에 의해서 일어난 일이고 주어진 일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러한 사실을 우리가 이해한다고해서 과연 우리 마음이 기쁩니까? 흡족하게 동의하십니까? 감사하는 마음이 절로 납니까? 이 사실만으로도 즐겁습니까? 그렇지 않지요.
왜 그런고 하니 우리 인간들은 자신의 행함과 그 업적에 은근히 기대를 걸고 살아갑니다. 인간이 말하는 소망이나 기대나 소원 같은 것은 모두 자신의 열성적인 행함을 기초가 깔아놓은 뒤에 나온 모습들입니다. 그러니까 열성적인 행함을 내놓지 않는 자와 열성적인 행함을 시도하는 자기 자신과 뭔가 확연히 차이나는 업적이 나타나기를 은근히 고대하면서 행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자신의 기대가 완전히 무시 당한 채 이 세상 돌아가는 모든 것이 순전히 하나님께서 남기신 일이라면 어떻게 인간들은 여기서 자기 만의 기쁨과 즐거움과 보람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고 해서 세상 만사가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남기신 일이라는 것을 부인할 수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모든 것은 다 내다보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여기서 문제되는 바는, 신이 어떤 일을 하느냐 가 아니라 사람이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전적으로 찬동도 못하고 감사히 받지 못하는 마음이 어디서 삐뚤어졌느냐 하는 점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세상을 만드신 원리가 인간 마음까지 수용치 않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출애굽기 33:19에 보면, “하나님은 은혜 줄 자에게 은혜를 주고 긍휼이 여길 자를 긍휼이 여기신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에게 있어 성도란 ‘불쌍히 여김을 받아야 될 자’이기에 성도가 된 것입니다.
쉬운 예로, 아내가 밥상을 차려 놓을 때는 반찬 하나하나에 아내의 정성이 담겨 있습니다. 하지만 남편의 마음이 삐뚤어져 있으면 그 반찬에 담긴 아내의 정성이 안보이게 됩니다. 불평을 늘어놓게 되지요. 감사와 고마움이 안 나오는 법입니다. 하지만 정성을 알면 밥상을 받을 때마다 감사와 고마움이 배겨나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성도를 찾아올 때, 성도가 그 하나님의 정성과 불쌍히 여겨주심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게 인간으로서 참 어려운 일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날 때부터 자기 행함의 가치를 부어잡고 삽니다. 즉 남들부터 불쌍히 여김을 받고자 사는 것이 아니라 자신 행함을 유감없이 발휘해서 자신이 얼마나 대단한 존재임을 과시하기 위해서 살아갑니다.
그러니까 밖에서 다가오시는 하나님은, “너는 불쌍히 여김을 받아야 될 존재야”라는 안목으로 다가오고, 인간의 내부에서 솟구쳐 올라오는 본성은, “나는 기이어 내 노력한 만큼의 성과는 얻고야 말리라”라는 식으로 형성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충돌이 일어납니다. 그 충돌이 바로 ‘은근한’ 불만과 짜증과 억울함입니다.
오늘 본문에 봐도 그것이 나옵니다. 세상에는 악인이 당해야만 하는 화를 입은 의인이 있는 반면에, 반대로 의인만이 마음껏 누려야할 복을 누리는 악인이 있다는 겁니다. 이 말 뒷부분을 덧붙인다면, ‘그러니까 뭔가 억울한 느낌을 갖는다’라는 겁니다. 예를 들면 신학교 때 공부를 잘하던 자가 막상 개척교회 하면서 교인이 하나도 없고 망하는 경우와, 반대로 신학교 때 못된 짓은 혼자 다 하면서 막상 개척교회 하면서 큰 예배당을 증축하고 큰 교회를 담임할 때의 그 괴리감에서 과연, “모든 일은 하나님이 알아서 다 하십니다”에서 오는 일에 감사할까요? 아니면 체념 정도에서 마음 정리에 나설까요?
도대체 어디서 문제가 발생한 것일까요? 왜 하나님이 하시는 모든 일에 대해서 모두 감사가 일어나지 않는 것일까요? 로마서 9:16-18에 보면,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성경이 바로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일을 위하여 너를 세웠으니 곧 너로 말미암아 내 능력을 보이고 내 이름이 온 땅에 전파되게 하려 함이로라 하셨으니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퍅케 하시느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원한다고 해서 원하는대로 되어지는 것이 아니요, 달음박질을 열심히 했다고 해서 그 달음박질로 인하여 결과가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라는 겁니다. 그렇다면 우리 마음 속에 하나님의 불쌍히 여기심이 어떤 식으로 자리잡게 될까요? 그 예를 출애굽기 7장-8장에서 들 수 있습니다.
모세는 그 당시 최대의 제국의 통치자인 바로왕에 섭니다. 그런데 모세가 가진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자기를 후원해 줄 자도 없습니다. 그는 그냥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 앞에서 서라 하니 섰을 뿐입니다. 즉 자신의 나름대로 기대할 만한 행함을 제공할 처지에 놓여 있지 않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지팡이로 인하여, 뱀이 되게 하고, 강물의 물이 피가 되게 하고, 강에서 개구리가 육지로 가득 올라오게 하시고, 난데없이 파리 떼가 온 애굽 나라를 뒤덮게 하십니다. 문제는 바로 이런 결과들에 대해서 모세가 사전에 알지 못한 채 바로 왕에 섰다는 사실입니다.
즉 모세는 하나님을 든든한 후원자로 삼지를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모세에게 있어 하나님은 싸움이 무기가 아닙니다. 그저 모세는 아무 것도 없는 상태에서 바로 앞에 와 있어 여호와 하나님의 지시대로 움직일 뿐입니다. 모세 자신의 말에 대해서 바로가 어떤 반응을 나타낼 지도 짐작 못하고 있고, 그 반응에 대해서 모세 자신이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도 모르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10:19-20에 보면, “너희를 넘겨 줄 때에 어떻게 또는 무엇을 말할까 염려치 말라 그때에 무슨 말할 것을 주시리니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자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시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 성도들도 모세와 같은 입장에 서 있습니다. 이 자리에 설 때 비로소 ‘긍휼’과 ‘자비’와 거저 주심‘의 의미를 압니다.
결코 내 행함의 기대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오로지 하나님의 자비로움으로 가득찬 세계를 성도에게 주시는 겁니다.
성도로 하여금 늘 난감한 사태에 직면케 하시여, 그 자리에서 미리 결과를 예상치 못하게 하시어 비로소 주님의 자비와 긍휼을 느끼게 하시게 합니다. 이로서 인간은 항상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모르는 것이 지극히 당연한 겁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이 세상 돌아가는 모든 일에 대해서 감사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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