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국 같은 생활
2007년 1월 21일 본문 말씀: 전도서 9:7-10
(전 9:7) 『너는 가서 기쁨으로 네 식물을 먹고 즐거운 마음으로 네 포도주를 마실지어다 이는 하나님이 너의 하는 일을 벌써 기쁘게 받으셨음이니라』
(전 9:8) 『네 의복을 항상 희게 하며 네 머리에 향 기름을 그치지 않게 할지니라』
(전 9:9) 『네 헛된 평생의 모든 날 곧 하나님이 해 아래서 네게 주신 모든 헛된 날에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즐겁게 살지어다 이는 네가 일평생에 해 아래서 수고하고 얻은 분복이니라』
(전 9:10) 『무릇 네 손이 일을 당하는 대로 힘을 다하여 할지어다 네가 장차 들어갈 음부에는 일도 없고 계획도 없고 지식도 없고 지혜도 없음이니라』
성경 말씀에 이렇게 좋은(?) 말씀이 있을 줄 사람들은 잘 모르고 있을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봐서는 세상 사람들도 같이 좋아라 할 말씀처럼 보입니다. 흔한 상식으로는 성경 말씀 전체는 예수님의 칙칙한(?) 고난의 길과 연관되어 있어서 즐거운 세상 생활과는 거리가 먼 것처럼 느껴질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도 분명히 하나님 말씀이요 명령이요 지시입니다. 세상적인 즐거움으로 마음껏 살고 인생을 누리라는 적극적 지시가 담긴 말씀입니다. 결과적인 면만을 고려해 볼 때, 이 말씀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필히 막대한 돈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즉 “하나님이시여. 이 말씀대로 살 터이니 제발 돈이나 듬뿍 주시옵소서”라는 흥정도 가능할 것이 보일 것입니다.
그런데 모든 성경 말씀은 예수님의 이 땅에 사신 일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갑부라서 이 말씀대로 사신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십자가 지시기 위해서 오신 분입니다. 십자가라는 최후의 고난을 앞두고서도 그 십자가 지심과 관련지어도 평소에 이 말씀대로 즐겁게 사셨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즉 인간들이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과 같이 ‘많은 돈= 행복’이라는 공식으로는 이 말씀 적용이 적절치 못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십자가=행복’이라는 공식만이 통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에서 어떻게 오늘 본문과 같은 생활을 결과적으로 얻어질 수 있을까요? 그것은 십자가 능력이 우리 성도에게 어떤 변화를 가져다 주었는지를 알면 될 것입니다.
사람들이 오해하는 것처럼, 돈이 많이 있어야 풍족한 천국 같은 생활이 보장되는 것이 아닙니다. 작은 돈과 없는 살림에서도 얼마든지 방실방실 웃음이 넘쳐나는 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타인과의 대결의식을 갖지 않는 것입니다. 즉 비교할 대상을 외부로부터 도입하지 않으면 되는 겁니다.
인간의 욕망이 외부로부터 들어온 것에 의해 자극받게 되어 있습니다. 내가 갖지 않고 남이 나에게 없는 것을 가졌다는 것이 나로 하여금 허전하게 만들고 허무하게 만듭니다. 타인에게 패배했다는 것, 타인보다 못난 인간이라는 것, 이런 것들이 자신이 받은 모든 것을 무가치한 것으로 취급하게 만듭니다.
여러분, 십자가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저 주는 것입니다. 그저 받게 되는 고마움이 발생하는 것이 정상입니다. 그런데 그저 주는 쪽을 자신의 경쟁 상대로 삼아, 반드시 상대를 꺾어보려고 하는 심보가 바로 대결 의식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내가 타인보다 우월하고 타인을 꺾었다는 그 대가로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참으로 그저 주시는 용서입니다.
그런데 인간에게는 외부에 의해 생겨나는 대결 의식보다 천국 생활을 더 방해하는 것은 나 자체 내부에서 일어나 올라오는 대결 의식입니다. 즉 나 안에서 ‘착한 나’와 ‘ 나쁜 나’를 구별하고 그 구별된 자아끼리 시합을 붙이고 싸움이 붙이는 의식입니다. 그래서 항상 ‘착한 나를’ 이긴 것으로 삼아서 자신은 근사한 자아로 정립하려는 일방적인 판정을 내리곤 합니다.
이러한 내부적 대결 구조는 사실상 우리 인간에게 타고난 것입니다. 로마서 7:16-20에 보면,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내가 이로 율법의 선한 것을 시인하노니 이제는 이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우리 속에는 강력한 자아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죄입니다. 죄를 원하는 자아는 언제 포착이 되느냐 하면 강력한 선(착함)이 우리 안에 투입되면 느껴지는 겁니다. 즉 착함을 모르기 전에는 무엇이 악함인지 인식조차 할 수가 없는 입장입니다. 그런데 무엇이 선이며 의이며 바른 것인가를 알게 된 순간부터 우리 안에 있는 죄는 그 착함을 의도적으로 모독하는 행동을 하도록 하므로서 우리로 하여금 죄의 굴레 안에 놓여 있음을 확인시켜 줍니다.
만약에 우리가 외부 사람들에게 뭔가 착한 일을 했다는 생색이라도 내려면 반드시 자연스럽지 못하고 억지가 될 수 밖에 없는 이유는, 이처럼 내부의 죄가 그 착함보다 더 강렬하기에 위장된 선과 착함과 의로움으로만 외부터 노출시키게 합니다. 예를 들면, 성경에서 ‘항상 기도하라’라는 선함을 접하고 난 뒤에, 도대체 하루에 몇 시간을 기도해야 ‘기도했음’에 해당되는지 자기의 내부의 죄과 정치적 타협과 흥정을 할 수 밖에 없는 일입니다.
또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이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 할 만 하며 무엇에든지 칭찬 할 만 하라’는 빌립보서 4장의 말씀을 대하고 나면, 도대체 어떤 경지에 이르러야 하는지를 본인이 알아서 조정작업을 해야 하는 겁니다. 그리고 이렇게 조정하는 것 자체가 아주 대견스러운 훌륭한 사람이라고 자위하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는 아예 이런 대결의식 자체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십자가는, 예수님 본인의 십자가 행위 안에서 성도는 다시 보는 안목을 가지고 보시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더 이상 정죄함이 없다’는 안목입니다. 즉 우리가 우리를 보는 안목을 일체 인정 못하겠다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자유입니다. 우리 자신의 양심적 판단으로부터의 자유입니다. 그 양심이 율법적 기능을 계속 우리에게 퍼붓기 때문이지요. 따라서 진정 십자가 안목을 안에 살아있는 자는 더 이상 자신이 자신을 선악적으로 판단 지을 필요가 없게 된 것입니다.
우리 양심에 새삼스럽게 묻지 말라는 겁니다. 즉 양심적 판단이 여전히 우리 안에서 작용해도 그것에 기준해서 주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고 복주시거나 저주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자신이 자신을 모질게 심판하는 경우는 성도에게는 없어야 마땅합니다. 행여 교회 내에서 소송 사건이 벌어져도 참된 성도는 구태여 그 소송을 걸고 이길 필요가 없는 겁니다. 차라리 사기 당하는 것이 낫다는 겁니다.
참으로 돈이 많아야 천국 생활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비추는 빛의 능력 안에서 용서를 알고, 생명을 받게 되면 모든 것은 주님께서 그저 주시는 은혜일 뿐입니다. 이 감사와 은혜를 방해할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우리 자체를 완벽하게 만들 방안을 따로 가질 필요가 없을 정도로 자유하시기 바랍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십자가의 강렬한 용서 앞에 우리 자신을 늘 내세워놓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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