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한 담대함
2006년 12월 31일 본문 말씀: 전도서 8:11-14
(전 8:11) 『악한 일에 징벌이 속히 실행되지 않으므로 인생들이 악을 행하기에 마음이 담대하도다』
(전 8:12) 『죄인이 백번 악을 행하고도 장수하거니와 내가 정녕히 아노니 하나님을 경외하여 그 앞에서 경외하는 자가 잘 될 것이요』
(전 8:13) 『악인은 잘 되지 못하며 장수하지 못하고 그 날이 그림자와 같으리니 이는 하나님 앞에 경외하지 아니함이니라』
(전 8:14) 『세상에 행하는 헛된 일이 있나니 곧 악인의 행위대로 받는 의인도 있고 의인의 행위대로 받는 악인도 있는 것이라 내가 이르노니 이것도 헛되도다』
성경에서는 ‘심판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맡겨라’하는 식으로 나옵니다. 참으로 인간의 능력으로 준수하기가 힘든 말씀입니다. 사람은 누군가 자기에게 해악을 입하면 피해를 당한 당사자가 본인이기에 당연히 자신이 친히 나서서 복수해보는 시원한 결말을 기대하게 됩니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하나님께서 맡겨라’라는 식으로 나오십니다.
여기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점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왜 하나님께서는 친히 복수해야 하는가? 두 번째는, 왜 인간들은 자신이 나서서 복수하고자 하는가 입니다.
사람들은, 자신만큼은 남들로부터 해악을 입지 말아야 될 존재로 간주합니다. 그래서 자기 앞에서 누가 담대하게 악을 저지르면 분통을 터뜨리게 마련입니다.
그런데 이런 우리에게 성경은, ‘심판은 하나님께 맡겨라’하는 식으로 나오니 여기서 다소 불만이 튀어나오게 마련입니다. 결국 이 세상에서 악이 횅횅 하고, 또한 거기에 대한 심판도 인간 손에서 벗어나 하나님께서 일임하다고 하시는 이유는, 우리 자신들이 품고 있는 이상 징후를 그런 식으로 파악해내기 위해서입니다.
그 이상 징후라는 것이 왠지 우리 인간은 세상 돌아가는 그 와중에서 불안감을 느낀다는 겁니다. 불안감은 마치 질병처럼 평생 우리 곁에서 빠져나가지 않고 따라다닙니다. 왜 불안합니까? 왜 믿을 분을 믿지를 못하고 자기 선에서 복수를 생각하는 겁니까? 그것은 자기 쪽에서 뭔가 가치 있는 행함이 있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즉 자기 나름대로 가치 있는 그 무엇을 했기에 당연히 그 보상은 나에게 주어져야 한다고 믿고 있는 겁니다. 그리고 그 가치만큼의 보상이 제 때에 주어지는지 아니 주어지는지 하나님의 다음 조치를 초조하게 고대하겠다는 겁니다. 이것은 자신의 행함을 근거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시험하고 측정하겠다는 의식입니다.
이런 의식이 있으니 늘 왠지 불안하고 초조하고 그리고 그 보상이 충분히 않으면 신 앞에서 자신의 억울함을 토해놓습니다. 자 이런 질병을 어떻게 하면 치료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진짜 저주와 심판을 미리 호되게 맛보는 겁니다. 두 번 다시 “나는 정말 억울합니다. 제대로 된 보상이나 적에 대한 심판을 나의 원수에게 퍼부어주세요”라는 소리가 안 나오도록 말입니다.
사실 이 호된 맛은 우리가 십자가에 함께 죽게 되면 알게 됩니다. 예수님은 평소에 실컷 남들에게 착한 일하고 이웃 사랑을 충만히 해오셨습니다. 하지만 그 분에게 돌아온 것은 십자가 위에서 저주받은 일이었습니다. 이 얼마나 억울한 일이겠습니까. 나쁜 일 실컷 하고 벌 받으면 참으로 당연한 일이지만, 착한 일만 했고, 아버지의 말씀에 고분고분 순종했음에도 불구하고 저주를 받았다면 이것만큼 더 억울한 일은 없을 것입니다.
바로 주님의 이 억울함에 동참하므로 서 두 번 다시 우리 입에서 “나는 정말 억울하고 분통 나는 인생을 산다. 고 불만이 나올 수 없는 일입니다. 이것은 인간이 자기 행위의 가치와 의미에 대해서 더 이상 기대할 수 없다는 말이 됩니다. 사람이 자기 행위에 기대를 걸어야 무슨 억울함이든지, 심판을 요구할 수가 있는 겁니다.
만약 자신이 그 어떤 일을 행해도 무가치함을 분명히 알게 된다면 더 이상 억울함이든지 아니면 불안감이든지 의도적으로 생기게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한 예를 들면, 시편 50: 8-15에 보면, “내가 너의 제물을 인하여는 너를 책망치 아니하리니 네 번제가 항상 내 앞에 있음이로다 내가 네 집에서 수소나 네 우리에서 수염소를 취치 아니하리니 이는 삼림의 짐승들과 천산의 생축이 다 내 것이며
산의 새들도 나의 아는 것이며 들의 짐승도 내 것임이로다 내가 가령 주려도 네게 이르지 않을 것은 세계와 거기 충만한 것이 내 것임이로다 내가 수소의 고기를 먹으며 염소의 피를 마시겠느냐 감사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며 지극히 높으신 자에게 네 서원을 갚으며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사람들은 하나님께 뭔가를 드리고 바치고자 합니다. 그 이유는 왠지 불안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불안하다는 것은 자기 행위를 시도할 때 기대한 보상 같은 것이 자신의 욕구에 대만족스럽게 주어질 것을 은근히 기대하기 때문입니다. 즉 “혹시 실패하면, 혹시 망하면, 혹시 떨어지면, 혹시 내가 죽으면 …”하는 식으로 불안해합니다.
이 불안감을 해소하는 방법으로 신에게 바치는 겁니다. 하지만 신에게 뭔가 바쳤다고 해서 불안감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바친 바가 제대로 신에게 열납되어 그 효과를 어떻게든 나타나야 한다는 데서 오는 불안감입니다. 이럴 때는 아예 한 푼도 신에게 바치지 않는 겁니다.
어차피 신에게 바치나 안 바치니 신에게 안 바친 것이 됩니다. 왜냐하면 신의 새나 들의 짐승도 다 하나님 것인데, 하나님의 것을 자리 이동시켰다고 ‘바쳤다’라고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아무 것도 신에게 정성을 바치지 않는 상태가 되면, 인간의 자기 행함에 대해서 신께서 관심두게 하기 위한 근거는 날아가 버린 것입니다.
자기 행위가 더 이상 의미가 없고 가치가 없는 상태로 만들어버리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자기 인생에 대해서 억울할 이유가 없는 겁니다. 사람이 억울하다는 것은 뭔가 자기가 행위로 했음이 기억하고 있으니 그 미련으로 발생하는 겁니다. 그런데 아무 것도 한 게 없다면 사실 억울할 이유도 함께 없어지는 겁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이 왜 계신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왜 예수님은 우리 앞에 등장해 있습니까? 그것은 우리 인간들의 모든 드림과 바침이 하나님으로부터 거부당했음을 알려주기 위함입니다. 이는 곧, 우리 인간들은 그 어떤 행위에도 하나님 앞에서 “나만은 정말 억울합니다”라는 소리를 못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이제 남은 것은 예수님의 바치심이 유일하게 하나님께서 접수됨으로서 그 십자가의 ‘다 이루심’ 앞에서 우리는 할 말이 잃습니다. 할 말이 없다는 것은 더 이상 우리가 우리 자신에 대해 억울함을 토로할 자격이 못된다는 겁니다.
요한복음 16:33에 보면,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더 이상 초조하거나 불안해하거나 억울해 할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을 생각하면서 우리는 담대하면 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행위로 우리가 구원받기 때문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거저 주신 인생을 가지고 억울함을 주님 앞에 하소연하는 그런 인생을 청산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전도서' 카테고리의 다른 글
모르는 미래(전9;1-4)이근호070114 (0) | 2013.07.03 |
---|---|
헛된 일과 모르는 일(전8;14-17)이근호070107 (0) | 2013.07.03 |
모르는 일(전8'7-8)이근호061224 (0) | 2013.07.03 |
왕의 지혜(전8;1-6)이근호061217 (0) | 2013.07.03 |
여자와 남자(전7;23-29)이근호061210 (0) | 2013.07.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