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르는 일
2006년 12월 24일 본문 말씀: 전도서 8:7-8
(전 8:7) 사람이 장래 일을 알지 못하나니 장래 일을 가르칠 자가 누구이랴』
(전 8:8) 『생기를 주장하여 생기로 머무르게 할 사람도 없고 죽는 날을 주장할 자도 없고 전쟁할 때에 모면할 자도 없으며 악이 행악자를 건져낼 수도 없느니라』
사람이 장래 일을 모르게 되면 불안하게 됩니다. 그래서 장래에 일이 어떻게 진척될 지 궁금해 합니다. 하지만 실은, 장래에 대해서 관심이 있어 궁긍해 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자신이 어떤 행위를 취해야 자신의 장래가 실패작이 되지 않을 수 있을까 종 잡을 수 없어 불안해 하는 겁니다.
즉 짐짓 장래 일을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장래’에만 걱정하는 겁니다. 이 걱정을 인간이 기껏 대처하는 방식이라면 현재 자신의 ‘바른 행위’로 ‘바른 장래’를 확정지으려는 시도 뿐입니다.
염려와 걱정, 이런 느낌이 왜 생길까요? 그것은 인간들이 자기 행위의 가치에 의미를 두기 때문입니다. 즉 내가 똑바로 살지 아니하면 자신의 장래도 망치고 실패한다는 강박관념에 젖어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그 어떤 인간이 장래 일을 알 것이며, 그 어떤 인간이 장래에 대해서 장담하면서 알려줄 수가 있는가 하고 말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장래에 대해서 인간이 개입하지 못하게 하십니다. 그것은 인간이 장래에 대해서 몰라야 된다는 말이 아니라 아예 인간의 행위가 장래와 무관함을 말씀하시기 위함입니다.
즉 인간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은 하나님께서 우발적으로 발생시킨 일입니다. 설사 인간이 예측한대로 일어난다 할지라도 인간의 예측력이 작용을 해서 비로소 일어난 일은 아닌 것입니다. 인간의 예측과 무관하게 일어나는 일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일을 이런 식으로 하시는가 하면, 철저하게 인간의 행위가 이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에 개입되지 못하도록 단절시키기 위함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어떻게 일을 하십니까? 마태복음 10:29-31에 보면,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라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바 되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시장에서 사람들의 틈바구니에서 무심코 거래되는 참새의 신체도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아니하시면 사람들의 손에 놀아나지 않는다는 겁니다. 이 말씀은 곧 인간들의 행위가 절대적으로 독립적으로 움직일 수 없다는 겁니다. 인간들의 행위에 세상이 움직이는 경우를 하나님께서 방치하신 적이 없다는 말도 됩니다.
하물며 사람이나 성도의 경우에는 더욱더 확실하고 확고하게 하나님의 수중에 놓여 있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우발적으로 하나님께서 일하신다는 증거입니다. 인간의 눈치를 보면서 일하시지 않는다는 점에서 우발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곧 인간의 행위에 대한 배제를 뜻합니다.
사람들은 자기 행위의 무게를 두고 가치를 삼고자 하기 때문에 자진해서 자기 행위에 책임을 뒤집어쓰는 꼴로 살아가게 됩니다. 즉 자기 행위에 대해서 스스로 책임을 져야만 한다는 무거운 의식에서 벗어나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쉬운 예로, 지난 여름 장맛비에 떠내려간 시골의 부모집도 서울서 살고 있는 자식이 큰 잘못을 저질러서 떠내려 간 것이라고 자식들이 생각할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바로 이런 식으로 생각하다보면, 세상에 일어나는 숱한 일들을 모두 자기 책임과 결부시키게 됩니다. 자진해서 짐을 떠안는 식이 됩니다. 왜 이런 느낌을 갖게 되느냐 하면, 자기 행위로 인하여 자기 장래가 자신의 욕망대로 제 위치를 갖추었으면 하는 기대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이 제공하는 대로의 장래를 감사히 받기 보다는 자신이 원하는 바대로 자기 인생이 이루어지기를 은근히 고대하기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참새 비유에도 나와있듯이 성도의 몸이나 장래는 결코 성도 본인의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성도가 다른 사람의 인생이 탐이 나고 부럽다고해서 그 인생을 하나님에게 요청할 자격이 있는 게 아닙니다. 그 인생은 그 사람의 것이고 자기 인생은 하나님이 주신 바 따로 있습니다. 결코 일치 되는 인생이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제공하는 우리의 미래는, 현재 우리의 행위를 배제하고 일방적으로, 우발적으로 제공하시는 인생입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필요에 따라서 주어진 인생을 우리가 지금 누리고 있을 따름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모르고서, 현재 자신의 행동 여하에 따라 자신의 인생이 다른 인생으로 달라질 것이라고 여기는 것은 큰 착각입니다.
사람이 죄를 짓었다고해서 남들보다 더 불행한 삶을 제공받는 것이 아닌 것처럼, 부유한 사람들이 남들보다 더 착한 일을 했기에 거기에 비례해서 부유함이 차등 제공되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책해도 참으로 저질 같은 인생을 산 사람보다 훨씬 빈곤한 삶으로 전락되는 경우가 빈번합니다.
이런 것을 볼 때에 하나님은 인간의 행위에 대해서 아예 책임추궁을 따로 하시는 것도 아니요 인간의 행위에 가치나 의미를 두지를 않습니다. 그렇다면 성도에게 있어 행위란 무슨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까? 골로새서 2:6-7에 보면,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입어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성도도 시체가 아닌 이상 끊임없이 뭔가 행위를 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행위는 이미 주님 안에 뿌리를 내리고 그 안에서 발휘되는 행위이기에 그 행위의 끝은 계속되는 감사로 이어집니다. 즉 자신이 주님 안에서 행하는 행위와 자신이 처해 있는 ‘주님의 안’과의 관련성으로 인해 감사 이외에는 아무 것도 나올 수가 없는 겁니다.
달리 말씀드리자면, 주님에 대한 반발, 반항, 대듬, 시위, 저항 같은 것들은 여전히 자기 행위로 말미암아 자기 운명을 자신이 평소에 원하는 인생이 되고자 시도하고 있다는 증거로서 그런 특징들이 나옵니다. 이것은 곧 불신자이기에 나올 수 있는 징후들입니다. 비록 사람인 이상 순간적으로 이런 저런 하나님에 대해서 불평스러움을 가질 수는 있지만 주님 안에 잇는 성령께서 그 사람을 감사하는 자로 만들어내시고야 맙니다.
즉 현재 네가 불만을 품고 있는 인생이 결코 너의 인생도 아니요 너를 위한 인생도 아니요, 네가 만들어가거나 책임질 인생이 아님을 깨닫게 하는 겁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참새가 누리는 그 안정감과 평안감이 우리 입에서는 감사와 찬양과 영광과 더불어 나오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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