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여름수련회 7강
디모데전서와 후서의 기록 연대가 좀 달라요(전서는 63년, 후서는 66년). AD 61년에 사도바울이 로마 감옥에서 2년 동안 갇혔다가 잠시 풀려납니다. 풀려나서 장화같이 생긴 이탈리아, 그리고 아드리아 반도가 나오고, 그 옆에 마케도니아, 아가야가 있고, 바다가 있고, 여기에 키프러스 섬이 있고, 또 크레타 섬이 있어요.
잠시 풀려나서 사도바울은 디모데, 디도를 대동하고 빌립보를 방문합니다. 방문하면서 크레타 섬에 들러서 복음을 전하고 디도를 그 섬에 목회자라 남겨두고, 빌립보를 거쳐서 에베소에서 복음을 전하고 그곳에 디모데를 목회자로 남겨두고 바울은 마케도니아로 갑니다.
그리고 난 뒤 65년 7월 19일 로마에 큰 화재가 발생했고, 그 책임을 그리스도인에게 뒤집어씌웠는데, 바울은 그 때 고린도와 밀레토스 지역을 여행하다가 체포되어서 다시 투옥되고 죽기 전 마지막 디모데 후서를 디모데에게 편지로 보내고 66년쯤 참수당하면서 사도바울의 사역은 끝납니다.
그래서 디모데후서의 경우에 이것을 어떤 관점으로 해석해야 하는가 하면, 종말론적 관점에서 해석합니다. 종말론적 관점이란 개인의 마지막도 종말이 될 수 있지만 그보다는 시대 자체가 종말 분위기로 흘러가는데, 그렇게 되면 종말에만 일어나는 현상이 일어납니다. 어떤 현상인가 하면, 한마디로 개판입니다.
그렇다면 모든 사람이 흔들릴 수밖에 없고 모든 사람이 시대에 대해서 신뢰성을 잃었기에 내 팔 내가 흔드는 그런 시대에서 과현 하나에 속한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생활해야 되는가 하는 것이 디모데전,후서에 가득 차 있습니다.
성도의 생활을 종말론적으로 바라볼 때 그 생활이 어떻게 나타나는가 하면, 제가 지난 시간에 응축된 주체에 대해서 이야기했지요. 응축된 주체에 어떤 법이 들어오게 되면 도피를 해요. 왜 도피하는가 하면, 자기에게 자유가 있고, 이 자유는 내가 할 수 있는 가능성 있는 자유를 발휘하려고 합니다. 가능성 있는 자유가 발휘되면 그 안에서 자기는 안식과 평화를 누리면서 ‘역시 나는 가치가 있어.’ 라고 단정할 수 있는 근거가 마련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자기가 감당 못하는 불가능한 법이 계속 오면, 자기의 소박한 자유를 지키기 위해서 예수님의 말씀을 피해서 도망갑니다. 전혀 성경 말씀이 들리지 않는 곳으로 숨어 들어가게 됩니다. 교회 안 나오는 이유도 바로 이것입니다. 내가 지금 밥 먹고 사는 일도 힘들어 죽겠는데 제발 간섭 좀 하지 말라는 거지요.
종말에는 사람들이 ‘자기만 사랑(딤후3:1)’하는데 이것이 종말의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소박한 나의 즐거움을 방해하지 마라. 이 정도 누리기 위해서 내가 그동안 얼마나 애섰는데 이것마저도 죄냐 의냐 따지면 나는 도대체 내 마음에 안식을 얻을 여지가 전혀 없게 된다. 그렇게 된다면 나도 가만히 있지 않고 반발하겠다.’ 라는 식으로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의 행복은 자유를 발휘할 때 자기 자유의 가치가 고스란히 남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자그마한 선행을 했는데, 이것마저 죄로 규정해 버리면 도대체 어디로 피하란 말인가?’ 그러면 복음 전도자는 말하지요. ‘피하긴 왜 피해? 주님 앞에 나와야지.’ 이 말이 듣기 싫은 거예요.
주님 없는 곳에서 내 착함이 스스로 나의 기념물이 되는 그런 소박한 나만의 공간을 꾸리는 것이 예수 믿는 것보다 훨씬 행복한데 어떻게 합니까? 이 자기만의 소박한 공간에는 무엇이 포함되는가 하면, 고난 받고 고생하는 것도 포함됩니다. 이것이 하나의 업적 혹은 훈장처럼 갖기를 원합니다.
험난한 인생살이 고추보다 더 맵다고들 합니다. 이런 소리를 하면서 고추보다 더 매운 인생살이를 견디는 놀라운 자신의 의지와 결단. 이 가치를 어디서 찾습니까? 십자가 앞에서? 아니죠. 나 홀로의 세계에서 찾습니다. 그 가치는 극도의 환희와 더불어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이게 소박한 나만의 행복이죠. 이 행복을 제발 탓하지 말라는 거지요.
그래서 원룸, 투룸 이런 자기만의 공간에서 타인의 간섭을 배재한 채 패쇄적인 시간을 갖고 싶은 겁니다. 결혼을 했어도 자기만의 공간을 갖고 싶어요. 그런데 이것이 과연 성도가 본 받을 많은 풍조인가 하는 것입니다.
마지막 때에 이러한 풍조, ‘이 악한 세대에서 너희를 건진다.’고 갈라디아서 1장 4절에 나와 있습니다. 그러면 응축된 주체(나만의 소박한 즐거움을 가지고 살아가는 나)를 십자가로 구원했다는 것을 빌미로 엄청난 율법이라는 말씀을 쏟아 부으면 예수 믿는 재미도 전혀 못 느끼고, 본성이 세상 사람과 똑같은데 구원을 받으니까 이것이 감당이 안 되는 거예요. 그렇다고 교회에서 만날 살 수도 없고.
그래서 여기에 대한 종말론적 관점을 하기 전에, 먼저 이러한 종말론적 관점, 묵시적인 것이 찾아오지 않은 인간들 사이에서 개인주의 이런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려고 노력했던가 하는 것부터 알아야 됩니다. 왜 그런가 하면, 이것을 알아야 교회에서 소위 윤리, 도덕이라고 성경 말씀을 근거로 삼는 것이 사실은 종말론적 관점에서의 성도의 삶이 아니라 하나의 인간에게서 나올 수 있는 보편적인 윤리, 도덕이라는 것을 언급하기 위해서 이 말을 하는 겁니다.
동양철학에 보면 공자가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네가 하기 싫은 것을 남에게 시키지 마라. 너도 하기 싫어하면서 그것을 남에게 하라고 시킬 수 있는가?” 이것을 ‘인(仁)’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여기에 대해서 장자라는 사람이 반박하고 나섭니다. ‘네가 하기 싫은 것을 남에게 시키지 말라.’고 하면 결국은 네가 보기에 남을 평가할 때 너와 똑같아야 만족한다는 독단적인 평가가 개입 된다는 겁니다. “사람들은 다 개성이 있는데 내 마음에 안 든다고 적을 만들면 되는가? 내가 나를 보는 그 기준으로 남에게 그대로 적용하는 것이 어떻게 ‘인’이 될 수 있는가? 이것은 폭력이다.” 라는 주장입니다.
그러면 장자는 ‘공자는 잘못 생각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사랑이 아니고 남이 원하는 것을 내가 해주면 된다.’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이것은 양보의 미덕, 희생의 자세죠. 내가 원하는 것을 남한테 해주는 것이 아니고. 자기는 개고기 좋아하지만 남은 싫어해요. 그런데 ‘맛있으니까 먹으라.’ 이것은 공자의 논리고, ‘네가 먹고 싶은 것을 나에게 먹으라고 강요하지 마라.’ 이것은 장자의 논리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자신이 개고기를 좋아해도 상대가 싫어한다면 자기 좋아하는 것을 과감하게 포기하고 상대가 좋아하는 것을 해주는 것이 진정한 사랑이라고 보는 겁니다. 이건 마치 십자가 정신처럼 보이지 않습니까? 이것은 십자가 정신이 아니라 동양철학입니다.
이런 것은 성령을 받지 않아도 인간들에게서 나올 수 있는 그런 종류 중 하나란 말이지요. 이런 것들을 교회에서 성령의 삶이라고 말하면 그것은 종말론적 삶, 뭔가 빠져나온 근거가 없어요. ‘아, 남이 원하는 것을 내가 제공해 주면 우리는 이 땅에서 구원 받을 필요 없이 그냥 여기서 그리스도께 영광 돌리는 삶이 된다.’ 이렇게 오해를 할 수밖에 없는 겁니다.
이런 장자의 주장에 반론을 제기한 사람이 묵자입니다. 묵자는 ‘남이 원하는 것을 한다면 가난한 사람들은 지금 당장 필요한 것,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원하는데 이런 것들을 제공할 수 있는 풍부한 여건이 사람들에게는 없어요. 그렇다면 이것을 누가 해야 하는가 하면 국가가 이것을 담당해야 된다.
이렇게 주장하니까 또 어떤 사람이 반박을 합니다. 개인이 남이 필요한 것을 해주지 말고 복지정책을 펼쳐서 국가에서 도와주는 것이 훨씬 효과적이다. 그냥 내가 가진 것으로 좀 나눠주면 폼은 나고 기분은 좋지만 실제로 큰 도움이 안 됩니다. 교회에서 노인들 예배 참석한다고 봉투에 2만원 넣어 주는 것과 동사무소에서 노인 최저 생계비로 매달 30만원 주는 것 중 어느 것이 낫습니까? 국가에서 하는 것이 훨씬 낫지요.
어떤 사람은 묵자의 주장에 대한 이렇게 말했습니다. “묵자야, 만약 군주가 욕심을 부려서 가난한 사람을 보고도 안 도와주면 어떻게 하냐?” 라고 물으니까, 묵자는 “그 때는 신이 벌을 내린다.”고 했어요. 이게 말이 됩니까? 신이 벌을 안 내리면 그 때는 어떻게 합니까? 결국 동양철학은 신비주의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신인감응설’이 있어요. 군주가 잘 하면 곡식이 잘 익고, 군주가 악하면 신이 벌을 내린다는 말이에요. 신인감응설이 동양에서 존재했다는 말은, 신을 아무리 부정하고 싶어도 마지막 최후에 응어리진 복수심, 한풀이는 누구 몫입니까? “신이시여, 조물주여, 자연이여!” 어떤 명칭을 붙여도 ‘제발 이 억울한 것을 좀 풀어주소서.’ 라는 쪽으로 미지의 신에게 호수할 수밖에 없는 겁니다. 구약적으로 말하면 언약이 없는 이방 신이 되겠지요.
귀신한테 비니까 자기들도 너무 한심하다 싶었는지, 그러면 어떻게 하는가? ‘군주에게 맡기되 군주가 제대로 통치하도록 백성들이 간섭하면 된다.’는 주장이 나와요. 점점 민주주의 쪽으로 나가고 있지요? 그러면 백성들이 군주를 견제할 수 있고 간섭할 수 있다면, 군주는 백성들 편에 서게 되면 군주의 결단성을 백성에게 양보한 셈이 되니까 그러면 나라꼴이 되겠는가 하는 문제가 또 생깁니다. 점점 더 교회 조직문제로 나가지요? ‘목사가 교인들을 어떻게 이끌 것인가?’ 라는 동양철학의 고민과 연결 되지요.
손자는 이런 주장을 했습니다. ‘군주가 백성을 다룰 때는 마치 지휘관이 부하를 다룰 때처럼 하면 된다.’ 어떻게 하는가 하면, ‘항상 돌멩이를 위태로운 곳에 두어야 한다. 사람이 위기가 없으면 성심, 성의껏 일하지 않는다. 늘 위기를 조성해서 한 시스템으로 몰아붙여야 그들이 정신을 차리고 일한다. 군인이 전쟁터에 나갔을 때 적보다 자기 지휘관을 더 무서워해야 용감하게 나가 싸울 수 있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지휘관을 무서워하도록 하기 위해서는 실전보다도 연습 때 더 혹독하게 훈련을 시켜야 되는 겁니다. 이것의 좋은 예로, 임금 앞에 궁녀가 있는데 궁녀가 말을 잘 안 들으니까 궁녀 중 우두머리를 죽여 버렸어요. 왜 궁녀가 말을 안 듣는가 하면, 궁녀는 임금 지시만 따릅니다. 그런데 지금 지휘관은 본인이단 말이죠. 그러면 본인 말 안 들으면 과감하게 목을 침으로 말미암아 예전 지휘관은 목을 치지 않았는데 새로운 지휘관을 목을 칠 때는 과거에 매였던 군주에 대한 미련과 습관들은 일소에 사라지고 새로운 체제로 바뀔 때 일사분란하게 백성들은 지휘관의 말을 듣고 움직이게 된다고 주장합니다.
어떻습니까? 카리스마가 넘치지 않습니까? 이 카리스마를 교회에서 활용하면 어떻게 되겠어요? 위대한 목사님이 되겠지요. 날마다 교인들을 위기에 몰아넣고, 순종하지 않으면 치리하고, 그리고 한 시스템에 몰아넣을 때 능률이 오른다는 이 아이디어가 바로 육에 속한, 성령 받지 못한 인간에게서 나올 수 있는 그런 면면들이죠. 이것이 바로 국가의 행정과 조직을 운영하는 방식입니다.
그렇다면 구원은 뭡니까? 어디서 구원 받는다는 말입니까? 바로 이러한 악한 세대에서 구원 받는다면 악한 세대에서 통하는 윤리, 도덕에서도 구원을 받아야 됩니다. 세상의 좋은 것들을 교회에 심어서 멋있는 이상적인 교회를 만들 생각을 하지 말고 세상 자체에서 구원 받는다면, 세상 자체에서 통용되는 윤리, 도덕, 질서, 종말론이 없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안 믿는 그런 세상에서의 모든 원리와 정신으로부터도 우리는 해방되어야 합니다.
이런 세상의 모든 것으로부터 벗어난 분이 누구입니까? 예수님이죠. 성령께서 예수님을 다루어서 그 당시 질서와 윤리와 도덕으로부터 과감하게 벗어났잖아요. 그것 때문에 마귀 들렸다고 욕을 듣긴 했지만 결국은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세상의 모든 것으로부터 벗어났잖아요.
똑같은 예수님의 영이 우리 마음에 왔다면 우리는 세상을 유지하려는 윤리, 도덕과 이 세상을 벗어나려는 윤리, 도덕이 어떤 차이가 나는지를 알고 있어야 되는 겁니다. 제가 이런 소리를 많이 하는 이유가 디모데전서를 읽다보면 바로 그런 식으로 주석과 해석이 되어 있습니다. 종말론적으로 해석하지 않고 ‘있는 교회 잘 꾸려보자.’는 식으로, ‘이런 식으로 하시면 교회 참 잘 됩니다. 이렇게 하면 교회에 카리스마가 있어서 교회 질서가 잡힙니다.’ 라는 식으로 해석을 한 거예요.
여기에 동원된 윤리, 도덕이란 것은 결국 예수님이 하신 방법이 아니라 동양철학, 인간의 내면에서 나올 수 있는 그런 요소들입니다. 노자는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텅 빈곳이 오히려 움직일 수 있는 에너지가 나온다는 겁니다. 바퀴가 있다면 바퀴 안이 텅 비어있기에 바퀴가 돌아가고, 잔은 안이 비어있을 때 물을 담을 여지가 있다는 이유 때문에 잔으로 있는 것처럼.
없는 것으로 인하여 있는 것이 없는 것을 뒷받침함으로 있는 것은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진리는 보이지 않지만 진리를 담을 수 있는 경계는, 존재하는 우리가 없는 것을 받들 때 진정한 이 세상 자연을 바꾸어 나가는 참된 삶이라고 보는 겁니다. 굉장히 멋있지요? 그래서 김용옥 교수가 뿅 갔지요.
그런데 장자는 이렇게 말했어요. 현재 없음이 있는 것을 뒷받침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하는 그것이 곧 도(道)가 된다는 겁니다. 눈밭에 길이 있는 것이 아니고 내가 눈 위를 걸으면 그것이 눈밭에 나는 최초의 나의 길이 되는 거예요. 물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면 그것이 곧 내가 개척하는 나만의 인생이 된다는 겁니다. 이것도 멋있지요? ‘왜 자꾸 의지하느냐? 왜 연약하게 믿고자 하느냐? 스스로 가라. 그러면 간만큼 너의 길이 되고, 그것이 너의 인생이 될 것이다.’
‘누구한테 의탁하지 마라. 이 세상은 도(道)도 없고, 법도 없고, 진리도 없다. 단지 네가 하는 그것이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이런 이론을 들으면 예수 믿을 필요가 없겠지요? 꼭 예수 믿어서 진리를 알 필요는 없잖아요. 이런 장자의 이론이 성경 말씀보다 더 확 다가오지 않습니까?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우리가 성경을 해석하면서 이런 동양철학들이 불쑥불쑥 튀어나온다는 겁니다. 이런 것에서 벗어나라고 십자가 피를 주셨는데 우리는 예수님 피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우리에게서 나오는 것은 동양철학이라면 그것이 묵시적 존재인지 역사적 존재인지 분간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령 받은 묵시적 존재로써 이 디모데전,후서에 나오는 이러한 마지막 때의 풍속에서 어떻게 우리가 성도의 제 모습을 갖춰나갈 수 있는가? 그것은 바로 도피의 방치에요. 법이 오게 되면 우리는 도망치기 바쁩니다. 지킬 것은 지키지만 보통의 경우 못 지키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는 도망쳐야 그나마 있는 나의 평화를 유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법을 만나면 이 법은 거룩한 것이고, 나는 왜소해요. 그래서 법 앞에서 기가 죽어요. 살아도 살맛이 안 나는 거예요. 나는 나의 존재 가치로 인하여 살고, 그 가치를 높일 수 있다는 소망 때문에 사는데, 여기다 법을 주어서 모든 것이 헛되다고 하면 ‘헛된 것 왜 사는데?’ 이렇게 나와요.
그래서 우리는 법을 피하기 바쁜데, 피하게 되면 응축된 주체의 자기 즐거움 밖에 안 되고 하나님께 영광이 안 되니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해요. 그래서 오는 불안감. 나는 유한한 것에 대해 자유로운데 무한한 법이 주어지면 감당할 수 없어서 오는 그 괴리. 뭘 해도 벌 받을 것 같고, 뭘 해도 제대로 못했다는 책임을 물어서 큰 벌이 내릴 것 같은 불안감. 이것 극복하려고 오늘도 새벽기도 가서 약간 안심을 얻었는데, 돌아서면 또 불안하고.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습니까? 아예 모든 것 다 잊고 살고 싶은데, 그러면 또 후메내오, 알렉산더(딤전1:20) 생각이 나고. 그래서 딜레마에 빠지지요. 이런 딜레마가 있으니까 신학자들은 기껏 한다는 소리가 ‘이미와 아직의 긴장 상태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해요.
우리 자아 속에서는 사랑이 나옵니다. 법이 오게 되면 법으로 보이는데 사랑이 방출되면 그 멀리서 오는 법이 법이 아니고 바로 나에게 이미 주어진 사랑과 같은 질의 사랑이 등장합니다. 그러면 사랑 앞에서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법의 최종 상태가 사랑이잖아요. 모든 것이 용납되지요.
그러면 그 법은 사랑 안에서 방출되기 때문에 이 사랑이 저 뒤에서 오기 전에 먼저 주님께서 나를 사랑하는 거예요. 어떻게? 모든 것을 용납하면서, 모든 것을 긍휼히 여기면서. 그렇다면 우리는 사랑을 받을 수밖에 없는 입장이기 때문에 마음껏 누리는 입장이죠. 디모데후서 2장에서는 이것을 ‘하나님께 사로잡힌 자’라고 합니다.
디모데전서 3장을 이야기하기 위해서 이렇게 뜸을 드리고 있는데, 3, 4, 5, 6장은 쏜살같이 지나갑니다. 여러분 속에 있는 사랑만 방출하면 이 모든 말씀들이 굉장히 반가워요. 어떻게 반가운가 하면, 성경 말씀 한 구절 한 구절 뒤에다 추임새를 붙이세요. ‘사랑으로’를. 뭐든지 ‘사랑으로’
그리고 여기서는 사랑으로 마중 나오고. 사랑으로 마중 나간다는 것은 나는 빠지고 내 속에 있는 사랑이 날 대신해서 이 성경 말씀에 마중을 나가는 거예요. 그러면 ‘나에게 사랑이 없으면 어떻게 하는가?’ 사랑이 없으면 애초부터 이야기가 안 되지요. 받은 사랑이 없으면 이 이야기의 대상이 안 됩니다.
그러면 사랑이 뭡니까? 처음 사랑이죠. 첫사랑이 뭡니까?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불쌍히 여긴 거죠. ‘불쌍히 여겨 주셔서 고맙습니다.’ 라는 마음으로 다가가면 됩니다.
3장 1절을 봅시다. “미쁘다 이 말이여. 사람이 감독의 직분을 얻으려하면 선한 일을 사모한다 함이로다.” 이렇게 되어 있지요.
감독된 사람은 첫사랑을 유지하면서 내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내가 보여줄 주님의 사랑이 중요하기 때문에 절대로 자기의 고난이나 목사직 소유가 끼어들면 안 되지요. 왜? 보여줄 것이 사랑밖에 없기 때문에. 심수봉이 [사랑밖에 난 몰라.] 라는 노래가 있는데, 그 노래에서 말하는 사랑은 ‘나는 받는 사랑 외에는 몰라.’ 이런 뜻입니다. 그런데 성경에서의 사랑은 방출하는 사랑이에요.
주께서 내게 준 사랑을 다른 사람에게도 주셨다는 것. 그 사랑 밖에 난 몰라. ‘나는 목사로써 내 사랑 끄집어낼 테니까 너는 집사로써 네 사랑 끄집어내라.’ 이렇게 되는 거예요. 만약 김 집사가 ‘나는 사랑 없는데요.’ 이러면 이야기가 안 되지요. 교회는 사랑으로 하나인데, 사랑으로 뭉칠 수가 없지요.
‘사랑을 내 놓으라.’ 이 말은 ‘나의 사랑을 내 놓으라.’는 말이 아니고, 나로 하여금 나를 죄인 되게 만드는 그 위대한 사랑을 내 놓으란 말이지요. 그게 바로 목사입니다. 그게 바로 집사고. 3장 끝났어요. “일구이언을 하지 아니하고, 술에 인박이지 아니하고 --” 이런 말씀들을 일일이 해석해서, ‘지켰는가, 안 지켰는가?’를 따지면 어떤 문제가 생기는가 하면, ‘다섯 개는 지키겠는데 하나를 못 지키면 목사입니까, 아닙니까?’ 이런 문제가 생겨요.
3장 2절에 “감독은?” 하고 나열되어 있는데, 1) 책망할 것이 없으며, 2) 한 아내의 남편이 되며, 3)절제하며, 4) 근실하며, 5) 아담하며, 6) 나그네를 접대하며, 7) 가르치기를 잘하며, 8) 술을 즐기지 아니하며, 9) 구타하지 아니하며, 10) 관용하며, 11) 다투지 아니하며, 12) 돈을 사랑치 아니하며, 12) 자기 집을 잘 다스려 자녀들로 모든 단정함으로 복종케 하는 자, 13) 새로 입교한 자는 안 되고, 14) 외인에게 선한 증거를 얻은 자.
14개가 나오지요.
집사를 봅시다.
1) 단정하고, 2) 일구이언을 하지 아니하고, 3) 술에 인박이지 아니하고, 4) 더러운 이를 탐하지 아니하고, 5) 깨끗한 양심에 믿음의 비밀을 가진 자. 5개 나오네요.
그러면 감독(14개)보다 집사(5개)가 훨씬 쉽네요? 그렇습니까? 그런데 어떤 감독(목사)이 13개를 지키고 1개를 못 지켰다면 13개가 무효 됩니까?
이것은 14개, 5개의 배후에 뭐가 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주님의 긍휼하심이 교인들에게 ‘목사는 이렇다.’고 하기 전에 먼저 목사부터 지적하고 들어가요. 그러면 여기에서 견딜 수 있는 목사는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는가? ‘나는 14개 항목 중에 어느 것도 항상 지킬 수 없는, 자격 없는 자가 바로 저입니다.’ 라고 할 때, 목사는 물러가고 ‘목사 됨’이라는 디모데전서 3장의 말씀만 전면에 나타나겠지요.
그러면 교인들이 뭘 생각합니까? ‘주님께서 목사 되게 하시는구나.’ 어떻게? 그 목사가 날마다 이 말씀 보고 ‘나는 목사 값도 못합니다.’ 라고 그렇게 활용하는 그 모습이 진정한 목사다운 거지요.
그래서 어느 누구도 다 ‘부족합니다.’ 라는 소리가 나오지요. 목사가 나그네를 잘 대접한다고요? 온 동네 거지 다 모일 겁니다. ‘나그네 대접’을 지키려고 하지 말란 말이지요. 나그네 대접하다가 말 안 들으면 구타할 수가 있어요.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나그네 대접하다가 구타한 것은 사랑이냐, 사랑 아니냐?’ 이런 문제가 또 생깁니다. 그러면 또 새로운 항목을 추가해야 되고.
기본은 이겁니다. 주의 말씀은 살아있고 목사 된 사람은 늘 말씀 앞에서 죽을 수밖에 없는 거예요. 왜 그렇게 하는가? 목사를 훌륭하게 만들기 위해서가 아니라 말씀(계시)만 성도들에게 전하기 위해서 목사 값도 못하는 한 사람 뽑아서 말씀 앞에 대면해서 ‘이 말씀 앞에 어느 인간도 못합니다.’라는 말을 함으로 목사 하게 만드는 거예요.
그러면 교인들은 목사를 보는 것이 아니고 디모데전서 3장을 보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원하는 ‘감독(목사)은 저런 모습이구나.’ 그래서 목사라는 자리가 중요하지 목사라는 인간은 전혀 중요하지 않습니다. 이 말은 ‘한 번 목사는 영원한 목사다.’가 성립이 안 돼요. 목사가 그 자리를 소유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목사가 언제 목사 값을 못하는가? ‘난 이것 지켰다.’고 나설 때, 그것은 목사로서의 자격이 없는 겁니다. ‘한시도 못 지킨다.’ 이렇게 나와야 말씀이 나오는데, ‘나는 오늘 2개 지켰다.’ 이렇게 나오면 그것은 주의 증인이 아니고 목사 본인의 목사 됨의 증인입니다. 이렇게 되면 노자, 묵자처럼 하나의 권력으로 그 교회를 질서 잡으려 하는 동양철학적 사고방식이 그대로 성령이라는 왜곡된 이름으로 튀어나오게 됩니다.
그러면 권사는 없는가? 권사는 없습니다. 권사는 인간들이 만든 것이기 때문에 없어요.
그 다음에 집사를 봅시다.
“이와 같이 집사들도 단정하고” 옷을 어떻게 입어야 단정한 겁니까? 단정의 기준이 뭡니까? 단정한 것의 기준이 없다는 말은 우리는 늘 단정할 수 없는 인간이란 말이죠. 만약 내가 ‘나는 단정하다.’고 하는 그 순간 그 사람에게는 더 이상 ‘단정하라’는 말씀은 불필요한 것이 되지요. 왜? 이미 단정했기에 더 이상 이 법이 필요 없지요.
다시 이야기합니다. 법이 올 때 사랑이 없는 사람은 법에서 도망치고 싶지만 사랑이 있는 사람, 다시 말해서 “나는 죄인입니다.” 라는 사람은 어떤 법이 와도 ‘이 죄인을 용서한 주님의 말씀’으로 받게 되고, 이 사랑으로의 마주침이 성도가 보여줄 수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이란 겁니다.
11절에 여자 집사에 대해 나옵니다. “단정하고, 참소하지 말며, 절제하며, 모든 일에 충성된 자라야 할지니”
12절에 “집사들은 한 아내의 남편이 되어 여자와 자기 집을 잘 다스리는 자일지니”
그러면 결혼 안 한 사람은 집사 못합니까?
13절에 “집사의 직분을 잘한 자들은 아름다운 지위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에 큰 담력을 얻느니라.”
사랑이 있기 때문에 꿀리지 않지요. 왜? 못난 인간을 사랑해 주신 그리스도를 바라보면 얼마든지 즐겁게 어떤 일도 감당할 수가 있는 겁니다. 이것이 ‘믿음에 큰 담력’입니다.
15절에 “하나님의 집에서 어떻게 행하여야 할 것을 알게 하려 함이니 이 집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이니라.”
살아 있다는 말은, 말씀이 살아 있다는 겁니다.
4장에 보면,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케 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좇으리라 하셨으니 자기 양심이 화인 맞아서 외식함으로 거짓말 하는 자들이라. 혼인을 금하고 식물을 폐하라 할 터이나 식물은 하나님이 지으신 바니 믿는 자들과 진리를 아는 자들이 감사함으로 받을 것이니라.”
여기서 뭐가 나오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이러이러한 음식은 먹으면 안 됩니다.” 라고 했을 때, 그 고기를 안 먹으면 하나님께 영광이 됩니까? 뭐든지 ‘하지 말라’고 할 때, 그 말대로 하면 영광이 될까요? ‘동으로 가라.’고 할 때, 동으로 안 가는 경우가 어떤 경우입니까? 많지요. 서로 갈 수도 있고, 남으로, 북으로 갈 수도 있고, 안 갈 수도 있고.
하나님 뜻은 이겁니다. 뭘 하지 말라고 할 때 ‘감사했느냐, 감사치 않았느냐?’ 이걸 보는 거예요. ‘딴 사람은 했지만 나는 그것 안 했거든.’ 이건 의미 없다는 겁니다. 왜? 자기 주체의 응축이 나오기 때문에.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라는 식으로 하는 것이 어떤 법이 오더라도 “이런 법도 못 지키고 그 법을 통해서 내가 다시 한 번 마음 낮추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것이 말씀이 살아 있는 교회가 된다 이 말입니다. 이것이 로마의 개인주의 이방 풍속과 차이 나는 모습입니다. 주 예수님께 감사하고, 용서하심에 감사하는 그 모습이.
그 다음 5절에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니라.” 이 말은, 기도 행위와 말씀 읽는 행위로 거룩하게 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과 통하는 기도로 거룩해 진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거룩의 실체가 누구에게 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온다는 겁니다. 내 기도 행위로 내가 거룩해 지는 것은 아니에요. 하나님은 살아 계시니까 기도를 받고,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으니까 말씀으로 우리가 거룩해 진다는 뜻입니다. 하여튼 모든 것을 내 쪽으로 끌어당기면 안 됩니다.
4장 7절에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오직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라. 육체의 연습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육체로 인하여 경건한 것과 하나님의 말씀이 원하는 경건의 차이점을 알라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그 당시에 이미 폼 나는 경건, 형식화 된 경건이 많이 유행을 했어요. 이런 경건과 성도의 종말론적 모습의 경건이 달라요.
종말은 어떤 힘으로 옵니다. 성령의 힘이 아니면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이 결코 종말이란 의식이 생기지 않습니다. 종말이 언제입니까? 2050년 입니까, 아니면 2030년 입니까? 시간을 보지 말고 질을 봐야지요. 세상 돌아가는 것을 보면 전부 개인주의고 하나 됨은 없고, 모두가 자기중심으로 살아가는 이 풍습이 종말의 모습입니다. 그렇다면 종말론적 삶에서 경건이란 것은, 이 세상이 종말이라고 느끼면서 사는 거지요.
제가 예전에 책을 서평 한 것이 있습니다. 참 인간이 되는 여러 가지 방법들을 제시하는 단체들을 순회하면서 그것을 기록한 책입니다. 하도 오래 전 일이어서 책 제목을 잘 기억 못하겠는데(나를 찾아 떠나는 17일간의 여행?), 이 책에 여러 방법들이 나와요. 그게 뭐냐 하면, 연습하면 되는 경건의 방법들입니다. 그러나 이들 단체의 공통점이 있어요. 지금이 종말이라고 말하는 단체는 하나도 없습니다.
왜냐? 성령 받지 않은 자들이 마지막(종말)이라고 하면 그야 말고 개판으로 막살게 됩니다. 이제 죽을 날이 6개월 밖에 안 남았는데, 죽기 전에 해야 할 일 20가지를 기록합니다. 그 가운데 나를 괴롭히고 미워한 자를 위한 복수도 있고, 그 마지막에는 ‘사랑하는 자의 품에 안겨 죽는 것’이라고 적어놓았어요. 이게 불신자의 종말론적 삶이잖아요.
그런데 이것은 사적인 것이기 때문에 복수할 것은 복수 하고 죽겠다는 생각을 하는데, 종말에는 그 복수를 누가 합니까? 예수님께서 우리한테 복수를 할 수 있는 분인데, 그것이 우리한테는 감해졌고 우리는 용서를 받은 상태 아닙니까. 복수를 당해야 마땅한데 용서를 받았으니까 그 감사하는 모습이 주님과 함께 살아가는 종말론적 삶이고, 이것이 유일한 경건이 되는 겁니다.
따라서 주의 말씀과 주님과의 교제를 우리는 늘 고맙게 여기죠. 자기 존재의 무게를 가볍게 가져요. 육신의 무게는 70Kg이라도 내 영혼의 무게는 0이 되어야 합니다. 텅텅 비어있어야 해요. 그런데 왜 텅 비지 못하느냐? 그것은 바로 이웃(타인) 때문에 그래요. 타인의 목소리, 타인의 욕망 때문에 그렇습니다. “너는 적어도 이런 수준은 되어야 해.”라는 기대가 있으면, ‘네가 그렇게 기죽어 살 필요 없이 당당해라.’ 라고 하면서, ‘당당하려면 적어도 이 정도의 위치는 올라야 돼.’ 이런 생각이 들고, 그 때부터는 갈등이 일어나지요.
그런데 고맙게도 성령께서 개입하셔서 내 욕망과 성경 말씀의 차이를 깨닫게 해서 새롭게 내 자리를 확인토록 하시지요. 이것이 바로 경건이 됩니다.
그 다음 14절을 봅시다.
“네 속에 있는 은사 곧 장로의 회에서 안수 받을 때에 예언으로 말미암아 받은 것을 조심 없이 말며”
장로의 회에서 디모데가 안수를 받았는데, 그러면 그 장로 회의 그 권리는 누가 준 것입니까? 여기서 은사라는 것은 장로 회가 주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거예요. 그러면 장로 회라는 것은 지나가는 하나의 매개체지요. 단 조건이 있어요. 그 때 장로 회의 모임은 모두 그리스도 안에 있어야 되는 겁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안수를 받게 되는데, 그러면 그 안수 준 사람이 사적으로 아까 14가지의 감독에 대한 이야기 중 1가지가 미흡했을 경우에 그 사람이 주는 안수는 유효한 것인가, 아닌가? 이런 생각을 하지요.
성령의 은사가 인간을 거쳤다고 그게 무효로 끝나는 성령의 은사가 있겠습니까? 없지요. 왜? 어차피 인간은(어떤 장로도) 죄인이기 때문에. 죄인을 통과해서 은사가 주어지기 때문에 반드시 장로 회는, ‘우리 장로 회가 은사를 줍니다.’ 라고 하면 안 되고, ‘은사는 우리가 주는 것이 아니고 주님께서 주십니다. 우리는 그냥 도구에 불과합니다.’ 라는 멘트를 장로 회에서 날려야지요.
목사를 안수할 때 오른 손으로 하느냐, 왼 손으로 하느냐? 그것은 문제가 안 돼요. 비빔밥 만들 때 왼손으로 하든 오른손으로 하든 잘 비비면 맛있게 먹을 수 있어요. 성경 말씀에 죄인들이 동원되어서, 죄인은 어디까지나 죄인일 뿐이고 ‘너도 똑같이 사랑 없으면 못 살아.’ 그런 것을 서로 고백하면서 주의 은사가 드러나는 그것이 바로 이 마지막 때에 하나님이 보시는 교회의 모습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