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모데전후서 제5강
교재7페이지를 봅시다. 3번에서〔디모데 전서 1:15에서 죄인이라는 말이 등장한다. 그리고 디모데후서 1:9에서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라는 말이 나온다.〕그런데 디모데전서를 보면 좀 이상한 것이, 편지를 보낼 때는 교회한테 보내지 사람한테 보내지 않거든요. 그런데 편지를 디모데에게 보낸다고 하는데 디모데가 교회 대표자도 아니고 교회 목회하는 것도 아닌데 왜 편지를 개인에게 보냅니까?
개인에게 보내면 사적인 편지밖에 안되거든요. 그런데 사도의 이 편지가 계시라면 계시는 모든 사람에게 다 해당되는 것으로 우리가 알고 있는데 디모데 개인에게 편지를 하면 디모데 혼자 천당 가라는 말인가, 그러면 다른 교인들은 뭐냐, 이렇게 되겠지요. 거기에 대한 해답, 고린도전서 4장 17절에 보면 방금 제가 거론한 문제점의 해답이 나와 있습니다.
그 해답이 뭐냐, 4장 17절에 보면 “이를 인하여 내가 주 안에서 내 사랑하고 신실한 아들 디모데를 너희에게 보내었노니 저가 너희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행사 곧 내가 각처 각 교회에서 가르치는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디모데가 사도바울에게 속한 인물이냐, 아니면 그가 예수님께 속한 인물이냐를 우리가 판정을 해야 돼요.
여기 보면 “내가 주 안에서 내 사랑하고 신실한 아들 디모데를 너희에게 보내노니.”라고 하고 또 “저가 너희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행사”라고 되어 있어요. 이 말은 쉽게 풀이하면 ‘그리스도 안에 있는 나 사도바울은 역시 그리스도 안에 있는 디모데에게 편지하는데 같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아, 같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디모데에게 편지를 받거든 같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도바울이 이야기한 것으로 여기고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살자.’ 그렇게 되는 겁니다.
사도바울, 디모데, 교회, 이것은 역사에 속한 눈에 보이는 존재들이죠. 그러면 ‘그리스도 안에’ 할 때 그리스도는 역사에 속합니까, 묵시에 속합니까? 묵시에 속하지요. 그러면 역사는 어디의 지배를 받는다? 여전히 묵시안의 지배를 받게 되어 있어요. 묵시안의 지배를 받아야 비로소 인간들은 자기가 죽은 것을 알고 인간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경우에만 살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는 거예요.
아까 산책을 하는데 최 종훈 장로님이 저에게 요청을 했어요. ‘성령의 삶, 예수 믿고 성령 받은 사람들의 역할, 이런 것에 대해서 상세하게 이야기 해 달라.’고 했는데 성령 받고 난 뒤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부탁한 것은 ‘인간으로 불가능한 일을 시키신다.’ 이겁니다. 인간으로 해 낼 수 없는 불가능이 계속 나오는 역할이 성령 받은 사람의 역할이에요.
사람으로 할 수 없는 것, 사람으로는 할 수 없기 때문에 성도가 성령 받게 되면 뭐라고 외치느냐하면, ‘나는 못했습니다. 나는 못합니다.’가 계속 반복해서 나오는 거예요. 이것이 반복해서 나온다는 것은 역사적 존재에 불과한, 역사적 존재에 속한 디모데나 사도바울이나 또는 교회, 역사적 존재에 속한 ‘나는 못합니다.’를 가지고서 이미 이루어진 모든 공로가 묵시적 존재인 예수 그리스도에게 돌아가도록 하기 위한 방식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기 위해서 이렇게 성령께서 역사하는 거예요.
문장이 참 길죠. 문장이 긴데요, 이것을 끊어서 이야기하면 하나님께서 우리가 못하는 일, 우리가 할 수 없는 일을 맡깁니다. 못하는 일을 맡김으로 말미암아 인간으로서는 흉내도 안 되는, 인간으로서는 할 수도 없는 일이 감히 부족한 종을 통해서 터져 나오는 식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게 되어 있어요. 쉽게 말해서 이 땅에 나만 살아 있는 게 아닙니다.
주님도 함께 살아 있는데 나는 주님의 사람 살리는 일 절대로 못하는데……, 사도바울이 앞치마나 손수건 가지고 뭔가 해 내는 일이 에베소 교회에서 있었던 일인데 이렇게 뭔가 해내거든 ‘이것은 보이지 않는 주님이 하신 것으로서 주께서 날 가지고 사용했습니다.’라는 말을 하고 있는 거예요. 사도행전 3장에서 성전 미문의 앉은뱅이를 낫게 할 때 그 앉은뱅이가 낫는 것을 보고 사람들은 당황스러워한 겁니다.
사람들은 ‘이것은 베드로와 요한이 했다.’ 베드로와 요한은 ‘내가 한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그 사람을 일으켰다. 우리는 그냥 증인이고 목격자에 불과하다.’라는 말을 계속 하는 겁니다. 마태복음 10장에서 ‘하나님께서 너희를 이리가운데 보낼 때는 너희 속에 말하는 이는 네가 아니고 네 속의 성령께서 말하는 것이다.’라고 이야기해요.
이것은 뭐냐 하면, 다른 말로 하면 ‘나는 그 말을 했는데 이것은 제가 한 것이 아닙니다.’라는 고백이 터져 나오고 그러면 거기에 대해서 ‘왜 네가 해놓고 네가 한 것이 아니라고 하느냐.’라고 물으면 ‘나는 묵시적 존재 앞에서 죄인이다.’라는 고백과 더불어서 예수님을 증거 하게 되어 있어요. 그렇지 않고 성령의 흉내를 내버리면 노래방에서 ‘어찌 합니까~’라고 노래를 불러놓고서는 ‘누가했습니까?’하면 ‘성령께서 불렀습니다.’ 하면 성령이 임 재범입니까?
반드시 ‘내가 할 수 없는 것’이 들어가요. 내가 할 수 없는 것, 평생 동안 설거지 한 번도 안하면서 아내가 해주는 밥만 얻어먹고 산 사람이 갑자기 어느 날 남편이 설거지를 했을 때 ‘여보, 당신 돌았어요? 육십 평생 안하던 설거지를 왜 하는지.’ ‘이건 내가 한 것이 아니야. 주께서 하신거야.’라는 고백을 진지하게 하는 거예요. 물론 잘못되면 눈에서 레이저가 나오는 상황, 파마도 하는 희한한 일이 다 벌어질 수도 있겠지요.
성령의 열매는 인간이 할 수 없는 것이 나오는 것, 그 열매를 자신의 열매가 아니고 성령께서 하셨기에 성령의 열매라고 하는 겁니다. 만약에 인간의 것으로 가능하게 되어버리면 그것은 뭘 했든지 육의 열매가 되고 그것은 성령 없다는 티를 팍팍 내게 되어 있지요. 7페이지에 보면 이렇게 되어 있어요.
〔만약에 어떤 사람이 본인보고 ‘죄인’이라고 말을 하면, 이는 곧 자신을 죄인으로 알고 있는 훌륭한 ‘의인’이 되어버린다. ‘나는 죄인입니다.’ 할 때 그것은 곧 자기가 죄인인 것을 알고 있는 나는 훌륭한 사람이 되어버리는 거예요. 그래서 인간이 자기가 죄인이라고 이야기한다고 해서 그것을 두고 구원받은 사람이라고 단정할 수가 없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보고 죄인이라고 단정 짓는 차원이 인간적 입장에서 하는 차원이 아니고 주께서 말씀으로 우리에게 찾아올 때 다음과 같은 말이 수반되어야 되는데 그것이 7페이지 위에서 두 번째 줄에 〔디모데 전서 1:15에서 죄인이라는 말이 등장한다. 그리고 디모데후서 1:9에서〕그 다음에 뭐라고 되어 있습니까? 다 같이 시작,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사도바울이 구태여 이 말을 왜 자꾸 집어넣습니까? 돌아다니면서 선교나 하고 전도나 해서 사람이 꾀이지 왜 이 말을 합니까? 이 말을 해서 사람 꾀이는데 무슨 도움이 되겠어요? 지금 디모데한테 편지하는 것이요……, 사도바울의 선교경로를 다시 보면 여기가 아시아인데 여기가 다소에서 안디옥, 여기는 에게해이고 바다건너 마케도니아…, 지금도 마케도니아라는 나라가 있지요, 그 다음에 이 밑에 아가야인데 그 아가야에 속한 유명한 도시가 아테네, 고린도, 그 다음 마케도니아에서는 빌립보, 데살로니가, 베뢰아, 이런 도시들이 있지요.
여기에서 바울이 실라하고 2차전도 할 때 환상 받아서 바다건너 마케도니아로 풀쩍 건너가서 유대인들에게 쫓겨 다니면서 전도하게 되었어요. 아까도 이야기했다시피 아테네 전도한 것이 계획 잡아서 간 것이 아니고 여기서 하려고 했는데 하나님께서 유대인들 통해서 막 공격해 들어오니 도망가다 보니까 아테네까지 가게 되었어요.
아테네에 가서 보니 신상이 많으니까 놀래서 ‘아이고, 우상을 이렇게도 섬기는가.’ 하고 ‘지금 살아계신 하나님은 우상 이런 것들로서가 아니라 십자가로서 구원받을만한 것을 확정했습니다.’라고 하니까 아테네사람들이 마구 놀리면서 비웃었던 거예요. 아테네에서 고린도에 갔다가 여기서 아굴라 브리스길라를 만났다고 했지 않습니까?
그리고는 다시 귀환하는데 2차전도할 때 루스드라에서 디모데를 데리고 갑니다. 디모데를 데리고 실라와 더불어 가면서 여기에 의원 누가도 데려가서 같이 활동하고 여기에 디도라는 사람도 있어요. 디도라는 사람은 디모데보다 선배입니다. 디도라는 사람은 율법문제 때문에 예루살렘에 다녀온 소위 베테랑이지요. 그에 비해 디모데는 초짜라고 할 수 있지요.
여기에 디모데나 실라 이런 사람들을 남겨둬요. 바울은 쫓겨서 도망을 다니면서 이들을 남겨서 남겨진 교인들을 돌보게 하는데 돌본다는 말이 뭐냐 하면 사도바울이 전했던 그 계시를 그 기준에 맞추어서 복음인지 아닌지를 확인하는 그 절차를 계속해서 검토하고 관찰하는 일을 합니다. 디모데에게 편지한다는 것은 사도바울이 몸은 여기 있으나 마음은 벌써 만케도니아나 이런 지역에 가 있는 거예요.
이것은 2차 전도뿐만 아니라 3차 전도도 마찬가지에요. 3차전도할 때는 굉장히 바빠요. 한 바퀴 더 도는데 돌면서 에베소 갔다가 마케도니아 갔다가 고린도 갔다가 여기서 여러 번 돌아요. 여기를 돌면서 주고받는 편지, 그리고 디모데를 여기 보냈다 또 여기도 보냈다 다시 고린도로 오너라, 합치했다가 자기는 에베소로 빠지고 거기서 ‘고린도는 이상 없나?’ ‘지금 문제가 일어났습니다.’ ‘무슨 문제인가?’
3차전도할 때 아볼로라는 사람이 있었어요. 이 사람은 좋게 이야기하면 말씀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고 약간 다르게 이야기하면 좀 나댄다고나 할까 그런 성질이 있는 사람이었어요. 이 사람이 자꾸 고린도 아가야 도시에 가서 자기가 전한 복음을 전하고 싶다는 거예요. 아볼로라는 사람은 누구한테 배웠느냐하면 아굴라 브리스길라 부부한테 복음을 배웠어요. 당시 사도바울은 안디옥에 있을 때였는데 가라고 했거든요. 고린도지역에 갔는데 이 사람이 좀 나대는 기질이 있었는지 여기서 이 사람이 인기가 있었어요.
그래서 고린도교회에 파벌이 생겼습니다. 제일먼저 나온 파가 놀랍게도 ‘아볼로파’에요. 그 다음에 누가 나왔느냐, ‘바울파’ 그 다음에 베드로가 수제자니까 ‘게바파’ 더 놀라운 것은 이것을 다 통합하는 ‘그리스도파’가 나와서 이 네 분파가 등장했는데 이 네 분파를 잠재우는 방법으로 사도바울이 하는 말이 뭐냐, 아까 제가 고린도전서 4장 읽었잖아요.
사람들이 항상 역사적인 흔적을 통해서 복음을 받으면서 성령을 받아서 묵시로 나아가야 되는데 묵시로 나아가지 못하고 항상 역사에 머물고 마는 거예요. 아볼로가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를 만나기전까지는 요한의 세례만 이야기했어요. 요한의 세례가 뭐냐, 역사적인 흔적을 이야기하잖아요. 요한의 세례를 이야기할 때 여기서 성령세례를 이야기해버렸어요(행 18:24-28).
성령세례를 이야기하니까 ‘아, 우리가 지금 전도하는 이것이 영역의 확장이 아니구나.’라는 것, 왜 영역확장이 아닐까요? 묵시적 입장에서 영토라 하는 것은 확장되어봐야 소용이 없습니다. 어떤 영역을 많이 차지한다는 것은 나폴레옹이나 좋아할 문제입니다. 땅 자체가 이미 죽음으로 부정당한 상태에서 쓰레기장 많이 확보한다고 해서 그것으로 부잣집 되는 것이 아니잖아요. 쓰레기하치장이나 만들어놓은 거지요.
역사적 인식에서 묵시적 인식으로 전환을 해야 되지요. 제가 첫 번째 강의한 것이 기억납니까? 불과 만 하루도 안 되었는데, 제가 뭐라고 했던가요? 여기 십자가와 부활 사이의 갭이 있는데 건너뛰는 것이 뭐밖에 안된다고 했습니까? 성령밖에 안 되는 거예요. 육은 이 십자가에서 ‘그만!’ 여기까지밖에 못 오는 거예요.
모든 육이 여기까지라는 것은 모든 인간은 죽어 마땅하다는 것이 정리되고 그 다음에 죽어 마땅한 인간 중에 누가 여기서 건너는가 하는 것은 성령의 몫인데 성령은 창세전에 아버지와 아들사이에 의논된 바를 그대로 여기에 적용시킵니다. 그러면 다 건너올 수가 없고 오직 누구에게만? 아버지에게 택함 받은 자만, 창세전에 예정된 자만 건너올 수 있다는 말입니다.
성령께서는 이 묵시적 사실을 그대로 전도하는 판에 내 구원, 내 영역이라는 것이 의미가 없는 거지요. 아무리 땅이 넓어도 성령 받은 사람이 한 사람도 없으면 그것은 소용이 없는 것이고 아무리 땅이 좁아서 성령 받은 사람이 열 명이 있으면 그것은 북적북적 대면서 바빠요. 특정교회가 그렇다는 말은 하지 않겠습니다. 그렇게 말하면 또 시기가 나기 때문에.
이렇게 보면 돼요. 항상 사도바울은 사도바울 밑에 디모데와 디도와 실라를 달고 다닌다고 보면 됩니다. 항상 보고를 받는데 그 보고의 내용이 뭐냐, 묵시가 어떻게 역사를 이겼느냐 하는 그 문제에 대해서 보고를 받습니다. 묵시가 역사를 이기면 ‘아, 믿음 좋구나.’ 하고 역사가 묵시를 밀쳐내면 ‘아이고, 그것은 망했구나.’ 이렇게 보는 거예요.
‘묵시가 역사를 이겼다.’ 하는 말은 뭐냐 하면, 사람은 사람인데 사람에게서 나올 수 없는 것이 나오는 것, 다시 말하면 역사적 존재에서 묵시가 뿜어져 나오는 그것, 항상 그 묵시가 뿜어져 나오는가의 그 보고를 항상 듣는 겁니다. 누가? 사도바울이. 왜냐, 사도바울은 예수 안을 고집하기에 그래요. 예수 안에 있을 때는 예수 안 자체가 역사적으로 확인이 안 되는 거예요. 왜냐, 묵시기 때문에.
하지만 묵시와 역사가 만날 때 거기서 나오는 것은, 역사 속이지만 역사에서는 나올 수 없는 묵시가 파급되고 발산되는 그 소식을 듣고 싶은 겁니다. 괜히 선교지역 많이 넓힌다고 될 문제가 아니에요. 그런데 여기에 성령께서 도와주셔서 여러 가지 사건을 일으킨다고요. 무슨 말이냐, 역사와 묵시가 만났을 때, 성령과 육이 만났을 때 육은 육대로 자기의 본색을 아주 여과없이 드러냅니다.
그게 뭐냐, 아까 이야기한 파당이 있는 것이고, 교재에도 나와 있습니다만 많은 사람들이 사도바울을 포기하고 돌아갔어요. 많은 사람들이 사도바울의 복음을 거부하고 다시 세상으로 돌아갔을 때 사도바울은 그들을 사단으로 돌아갔다고 지적해 버려요. 여기서 생각할 것은 뭐냐, 그 사도바울을 버리고 간 사람들을 다시 한 자리로 주워 모으자는 말이지요.
모아서 하나 하나 인터뷰를 해 보는 거예요. ‘뭣 땜시로, 무엇 때문에, 어떤 소리가 장애가 되어서, 어떤 것이 거부감을 느끼게 했기에 제가 전한 복음에서 나가셔야만 했습니까?’라고 다 한 사람씩 물어보는 거예요. 그 물어보는 것이 의미가 있다고 보는 겁니다. 왜냐, 역사 속에서 사단에게 돌아간 사례들을 모을 필요가 있기 때문에 그래요. 복음을 듣고도 사단에게 돌아간 사례1, 사례2, 사례3, 이런 것들이 쓸데없는 것이 아니고 다 필요한 거예요.
왜, 그것들을 모아놔야 다른 지역에 복음 전할 때 ‘이러한 사람들이 그러한 속성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러니 돌아가실 분들은 일찌감치 돌아들 가시기 바랍니다.’라고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거예요. 이것은 이사야가 복음 전할 때의 원칙과 똑같습니다. ‘보기는 보아도 깨닫지 못하고 듣기는 들어도 알지 못한다.’ 이것은 사도행전 마지막에 또 나와요.
예수님도 요한복음 12장에서 하신 이야기고 사도행전 28장 마지막에 또 나오는 대목입니다. ‘보기는 보아도 깨닫지 못하고 듣기는 들어도 알지 못한다.’는 그 원칙을 준수해 줘야 계속해서 묵시와 역사가 혼합이 안 되고 묵시는 묵시대로 역사 속에서 또렷하게 빛을 발하는 거예요. 그럴 때 그것은 바로 ‘예수 안’이라는 위력이 결국은 마지막 심판 이전에 이미 심판이 개시되었다는 이 종말론적 현상을 충분히 반영해 줄 수가 있는 겁니다.
그렇다면 그 사람들에게 다 물어봤을 때 그 사람들의 공통점이 무엇이었는가, 궁금하지요? 그것은 로마서나 갈라디아서나 모든 성경구절에 다 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을 배반하고 도망갈 때 그 현상들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편지 속에 다 심어놓은 거예요. 그들이 사단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설명하겠습니다. 그 이유가 뭐냐 하면, 바로 ‘행함’이었습니다. 놀랍게도 ‘행함’이었어요.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될 것은 사도바울의 권면과 명령과 지시가 굉장히 많았잖아요. 다 십자가, 십자가, 십자가 그러지 않잖아요. ~하라, 하는 것이 많잖아요. 그 많은 명령과 지시를 했을 때 그들이 행함으로 반응할 수밖에 없는 그런 사람들이 결국은 사단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는 거예요. 어떤 명령이 왔을 때 행함으로 마중 나올 수밖에 없는 사람들, 왜냐하면 이것은 인간이 해 낼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주께서 명령하고 지시를 내릴 때 인간이 해낼 수 있는 것을 내세운다면 결국 그 사람은 사단에게 돌아갈 수밖에 없어요. 그런데 지시와 명령이 왔을 때 인간이 해내지 못하는 고백이 터져 나올 때, 그것은 하나님께서 이런 지시와 명령을 내린 본래의 묵시의 효과를 지금 보고 있는 거예요. 행함이 나오는 것이 아니고 ‘성령께서 하셨습니다. 성령께서 하셔서 그 결과로 우리는 의인이 되었습니다.’ 하는 엉뚱한 고백이 튀어나와야 돼요.
행하라, 하면 행하면 되는데, 행함이 나오는 것이 아니고 ‘성령께서 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십자가로 말미암아 의인이 되었습니다.’ 하는 십자가의고백으로 튀어나올 때 이 사람은 지금 이 사도바울의 명령과 지시를 그냥 역사적 존재로 받는 것이 아니고 예수 안이라는 묵시 안에서 지시와 명령을 받고 있으니 사도바울도 예수 안에서, 그것을 중간에 전하는 디모데도 예수 안에서, 그리고 그것을 받는 진짜 교인들도 예수 안에서, 이래서 우리는 모두 다 예수 안에서 한 몸이 되고 한 영이 되는 겁니다.
이렇게 하니 또 갑자기 박 ○○씨가 그리워지네요. 이번에 참석한다 했는데 사정이 있어서 못 온 모양입니다. 이런 예수안의 묵시적 모습들이 사단으로 돌아가는 그러한 현상들을 유발시키면서 묵시적 현상이 오는 거예요. 들판 산길에서 오토바이 난폭하게 몰아보세요. ‘빠라바빠라밤’ 하면서 몰아보세요. 먼지가 자욱하게 일어나지요. 묵시가 지나간 곳에 역사의 먼지가 온통 일어나지요.
그 먼지 하나하나를 버리지 말고 다 주워 모으면 그 먼지가 뭡니까? ‘우리는 행할 수 있습니다.’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을 하는 거예요. 그러니 성령의 열매는 뭡니까? ‘이것은 도저히 나에게서 나올 수가 없습니다. 이것은 제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안경이 여기 있다 합시다. 다른데 신경 쓰다가 안경을 떨어뜨렸어요. 떨어뜨리니까 ‘아이고, 목사님! 안경을 떨어뜨렸습니다.’ ‘아이쿠, 내가 왜 그랬지?’ 이것은 자기도 모르게 다른 생각을 하다가 떨어뜨린 거예요. 이것은 자기의지가 없어요. 주께서 하신 겁니다.
그 다음에 아까 그 사람이 왔어요. 관심을 끌기 위해서 살짝 안경을 떨어뜨렸어요. 이것은 누가 한 겁니까? 내가 한 거지요. 한 번 했다 그거거든요. 그러니까 성경을 자주 보면 볼수록 점점 묵시는 날라 가 버리고 뭐만 남아요? 성경말씀이 역사적으로 해 낼 수 있는 문장들로 이해가 되는 거예요. 이것은 해 낼 수 있다는 거예요.
그 앞에 무슨 말을 붙이느냐하면, ‘성령의 힘으로, 은혜로.’ 이런 말들을 갖다 붙이면서 해 낼 수 있다는 거예요. 갑자기 행할 수 없는 사람이 뭐로 바뀌었습니까? 행할 수 있는 사람으로 바뀌니까 그 다음부터는 사도바울이 복음 전하면 뭐라고 합니까? ‘안다.’ 그렇게 해요. 다 안다는 것은 더 이상 사도바울에게 머물 수 없고 나는 어디로 가겠다? 본래의 내 자리로 돌아가겠다, 그 말 아닙니까?
그러면 사도바울의 자리는 계속해서 무슨 자리입니까? 예수 안이라는 자리지요. 어떤 자리라고 했습니까? 날마다 나를 죽이고 내 안에 누가 사는 자리? 예수 그리스도가 살아 있는 자리가 예수 안의 자리인데 사도바울보고 ‘나는 다 안다. 나는 많이 들었다. 나는 내 자리로 돌아간다.’ 하면 자기가 돌아간 자리는 무슨 자리입니까?
사도바울이 경험하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 안이 아닌 다른 자리로 가지요. 예수 안 말고 다른 자리를 무슨 자리라고 합니까? ‘예수 밖’이죠. 참으로 간단한 것, 이것은 놀라운 사실입니다. 예수 안이 아니고 예수 밖이죠. 예수 밖은 누가 지배해요? 사단 지배하는 거예요. 그러니 사단으로 그렇게 돌아간 거예요.
내가 할 수 없는 것을 계속해서 하나님께서 요구하듯이 말씀을 준다는 것이 그것이 부담이 되신다면 처음에 했던 그것도 사실은 주의 뜻이라고 생각하고 했는데 가만 보면 사실ㅇ은 본인이 엉겁결에 한 거예요. 본인이 했기 때문에 그 다음에 또 하라고 하면 자기가 한 것을 꾸며서 되풀이 하는 겁니다.
하나의 예를 들면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다.’ 할 때 어떤 경우에는 그것이 은혜스러워서 눈물을 팍 흘리면서 ‘맞아, 내가 돈을 사랑했구나.’ 했다 이 말이지요.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다, 그 말에 너무 감격해서 ‘이제는 돈을 사랑하지 않겠습니다.’가 아니라 그 묵시적 해답은 ‘주여, 저는 죄인입니다. 주여, 나를 떠나소서.’ 그렇게 돼야 돼요.
예수님께서 ‘배 오른 편에 그물을 던지라.’라고 베드로보고 이야기하니까 베드로가 뭐라고 했습니까? ‘야, 오른 편에 던지니 대~박!’ 이랬습니까? 아니지요. 뭐라고 했습니까? ‘주여, 저는 죄인입니다. 저 같은 인간은 상대할 필요 없습니다.’ 이렇게 나올 때 제대로 이해 된 거잖아요. 그런데 그 ‘배 오른편에 던지라.’하는 그 문장을 가지고 오른편에 던졌다, 오른편에 또 던지고, 참 재미있네, 또 던지고.
로또를 샀는데 생각지도 않게 5등짜리가 되었다. 진짜 묵시적으로 느낀다면 그 다음에 뭡니까? ‘주여, 로또 사는 것 괜히 샀습니다. 괜히 이런 것 사서 주님을 시험하는 기회가 되어버렸으니까 이런 것 사서 한몫 보겠다는 이 자체가 죄인 줄 이제 알았습니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악의 뿌리인 것을 이제 알았습니다.’라고 한다 그 말이지요.
그런데 다른 사람이 뭐라고 하느냐, 로또 샀는데 대박 났다, ‘주의 은혜입니다. 한 번 더 사소서. 형제여!’ 이렇게 나온다는 말이지요. 한 번 더 사서 기도를 빡세게 하게 되면 전에는 5등 했는데 이번에는 2등으로 올라갈 수 있지 않겠냐고 나올 수 있는 것이 뭐냐, 그 사람은 첫 번, 두 번, 세 번도 다 뭔가 신비로운 것을 내 손으로 해 낼 수 있다, 가 돼 버려요.
내가 해 낼 수 있으면 그 다음부터 나는 내 안에 살지 그리스도 안이라는 것은 따로 떨어져 나가버리는 거예요. 주님이 아니라도 내가 할 수 있는데 내가 뭐 때문에 귀찮게 시어머니하고 같이 사느냐 그 말이지요. 그럴 필요가 없겠지요. 제가 그 설교를 오전에 했는가, 잡채 이야기를 언제 했습니까? 시어머니 잡채 이야기, 오전입니까? 기억 안 나세요? 그것도 세월 지났다고.
시어머니가 시골서 와서 며느리보고 살림 못한다고 했는데 한 5년 지나서 자기도 잡채를 할 수 있다고 잡채를 하니까 시어머니가 ‘이것도 잡채라고, 이게 내가 원하는 그 맛이야?’ 하고 며느리 면상에다 잡채를 던져버렸답니다. 교회 한 십년 다녔다고 ‘주여, 나도 내가 알아서 기도할 수 있습니다.’ 하면 ‘이것도 기도야, 지금 네 기도하고 예수님 기도하고 같다고 보나?’ 하고 던져버려요.
그러면 그것이 뭐냐, 어느새 우리는 묵시의 그것을 나를 긍정하기 위한, 내 역사적 존재를 인정하기 위해서 이미 변질된 채 우리 안에 와 버리죠. 그러면 성령의 열매는 끝이 나고 그 다음은 육의 열매가 시작되는 겁니다. 그래서 ‘나는 죄인입니다.’라는 말도 여러 번 해버리면 그것이 묵시가 아니고 역사의 되풀이가 되버려요.
하나의 종교적인 기술이 된다니까요. 사랑한다는 말을 너무 자주해도 이것은 실없어. 가끔 타이밍 맞춰서 해야 되는데 시도 때도 없이 해버리면 이것은 장난도 아니고, 그렇게 돼버리는 거예요. 선물도 너무 줘버리면 나중에 그것은 일상이 돼버립니다. 주의해야 됩니다, 남편들. 십년씩 아무것도 안하던 사람이 줘야 감격이 되지요. 그게 욕망 체감의 법칙이라는 겁니다.
디모데전서 1장 9절에 봅시다. “알 것은 이것이니 법은 옳은 사람을 위하여 세운 것이 아니요 오직 불법한 자와 복종치 아니하는 자며 경건치 아니한 자와 죄인이며 거룩하지 아니한 자와 망령된 자며 아비를 치는 자와 어미를 치는 자며 살인하는 자며 음행하는 자며 남색하는 자며 사람을 탈취하는 자며 거짓말 하는 자며 거짓 맹세하는 자와 기타 바른 교훈을 거스리는 자를 위함이니.” 이렇게 죽 항목들이 나와 있습니다.
에베소에서 변론이 생깁니다. 왜 변론이 생겼는지 이야기해 드렸지요? 항상 묵시가 역사를 만나게 되면 역사는 가만있는 것이 아니라 그동안 역사는 자기위주로 자기를 지키기 위해서 수고롭게 했던 법적조항들을 가지고 맞서 싸우게 되는 겁니다. 맞서 싸우게 되면 묵시는 행함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로 의롭게 된다는 그것하고 맞딱뜨리게 되지요.
그러면 이쪽에서는 ‘왜 행함으로 의인이 될 수 없는가? 왜 우리의 행함을 무시하고 모독하는가?’하고 싸움이 붙지요. 이 시합은 이미 예수님 당시에도 바리새인들하고 붙었던 그 시합을 성령께서 그대로 가져다가 이제는 누구에게 주어지게 한다? 사도바울에게 주어지고,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 주어지는 거예요.
예수 안에 있다는 말은 예수님이 여전히 부활해서 살아계시기 때문에 예수님이 지상에서 했던 일이 계속해서 반복적으로 계속해서 주어지고, 주어지고, 주어지는 거예요.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복사판이에요. 우리 인생자체가 예수님의 복사판입니다. 똑같이 물위를 다 걷는다는 뜻이 아니고 똑같이 우리는 믿음 아니면,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 아니면 구원 못 받는다는 점에서 우리는 예수 안에서 복사판이 될 수밖에 없어요.
국화빵 찍어내듯이 계속해서 찍어내는 거예요. 오직 믿음으로 구원, 피로 구원, 계속 찍어내고, 사단은 행함으로 구원받자는 식으로 계속해서 갈 수밖에 없고, 그것을 계속 반복하는데 상황 따라서 형편 따라서 갖가지 현상들이 일어나는데 축약을 해보면 그것으로 매듭이 지어져요. 그렇다면 율법의 행함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선물로 받아들임으로 구원받는다는 여기에 대해서 율법무용론, 율법이 필요 없지 아니 하냐, 라고 나오는 거예요.
율법이 필요 없다는 말은 무슨 뜻이냐, 역사적 존재에서 인간들은 천국이라든지 하나님 계신 곳에 가기 위해서 어딜 가도 항상 유대인들이 설친다는 것을 알아야 돼요. 하나 짚고 가고 싶은 것은 유대인들 가운데 간 사람도 많지만 헬라인들 가운데도 간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두가지 다를 알아야 돼요. 사단에게 돌아가도 종류가 달라요.
유대인으로 간사람, 헬라인으로 간사람, 종류가 다 달라요. 여기서 인간이 율법 행함을 통해서 하나님께 간다고 할 때 율법의 지배를 받는 것이 아니고 누가 율법을 쥐고자 합니까? 내가 율법을 쥐고자 할 때 여기서 뭐가 발생되느냐, 율법에 대한 행함이 나오지요. 이럴 때 율법은 죽어 있는 무생물이 되지요. 죽어 있는 무생물을 가지고 고린도후서 3장에서 ‘문자’라고 합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은 뭐라고 합니까? 율법을 무생물로 보지 않고 뭐로 봅니까? 마치 꿈틀거리는 생명체로 보지요. 생명체로 보게 되면 율법이 누구를 지배해요. 우리가 율법을 지배하려고 손 내미는 그 이전에 먼저 율법이 뭘 지배합니까? 율법이 우리를 지배하게 돼요. 율법의 지배를 받게 되면 그 다음부터는 어떤 현상이 벌어집니까?
율법이 우리의 주체에 압력을 행사하게 됩니다. 그러면 여기서 주체의 수축현상, 다른 말로 하면 응축현상이 벌어집니다. 주체가 응축되면 어떤 효과가 있느냐, 도망치기 쉬운 거예요. 법의 화살이 퓽, 퓽 날아오면 이것이 작기 때문에 싹, 하고 피할 수가 있다는 말이지요. 형하고 동생하고, 여기서 형과 동생의 차이점이 뭡니까?
같이 부모에게 잔소리를 들어도 형은 경험상 응축되어 있기 때문에 매끄럽게 피할 수가 있는데 어리한 동생은 부모 잔소리를 혼자 다 맞아요. 당나라 장수도 아닌 것이 오는 화살을 혼자 다 맞아요. 다 맞고 엉엉 울고 있고 형은 ‘어머니, 잘못했어요. 어깨 주물러 드릴까요?’ 하면서 뺀질이로 자기 주체를 살리면서 화살은 다 피하는 겁니다.
동생은 그것도 모르고 ‘내가 뭘 잘못했다고, 엉엉!’ 울고 있지요. 그러면 ‘어이구, 미련 곰탱이 같은 것…….’ 주체가 뺀질뺀질 하지를 않아요. 수축이 되면 간편하게 갖고 도망을 치는 겁니다. 주체가 수축이 되면서 그 안에 뭐가 들어가느냐 하면, 시원적인 휴식이 여기서 가능해요. 하나님이 주신 휴식, 하나님이 주신 휴식이라는 것은 뭐냐, ‘나는 나다.’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방치한 상태, 하나님에게 관심 없고 하나님에게 영광 돌리지 않더라도 내가 현재 갖고 있는 내 것으로만 편안하게 ‘세상 참 살기 좋다’ 하고 편히 쉴 수 있는 휴식을 주체가 있을 경우에만 보장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서 뭐가 접근하느냐, 강력한 혜성 같은 것이 접근해 버려요. 강력하게 접근해 버리면 주체는 도망치기 바쁩니다. 어디로 도망치느냐, 이 주체가 깨어지지 않는 방법으로 여러 가지 손쉬운 법들을 가지고 그것을 지키면서 큰 덩어리로 오는 법들에 대해서는 낯을 피해버립니다. 오늘 강의를 왜들 이렇게 잘 듣는지 모르겠습니다. 다들 자기들 이야기로 듣는 것처럼 느껴지는데 제가 지금 오해를 했는지…….
성경말씀가운데서 큰 덩어리로 다가오는 것은 피하면서 내가 쉽게 할 수 있는 것, 온유와 화평과 자비와 양선, 그런 것들을 지키면서 큰 덩치의 말씀에 대해서는 쉭, 쉭, 하면서 피하는 겁니다. 그렇게 하면서 계속해서 응축된 주체, 콤팩트한 주체를 계속 유지할 수 있는 거예요. 나중에는 이 주체가 이것이 변비, 꽉 막힌 똥, 너무 딱딱해서 자기도 감당을 못해요.
미치겠지요. 이놈의 주체가 내가 나에게 우상이 되어버렸어요. 여기에 하나님께서 준비한 게 있어요. 뭐냐 하면, 율법이 올 때 율법이 문자로서만 오는 것이 아니고 율법의 문자, 무생물을 생물로 전환하는 방법이, 하나님께서는 우리 주체에게 주어진 환경을 이용합니다. 여기에 새로운 사태가 벌어지게 하지요. 사태가 벌이지면 좋게, 좋게 지내다가 도저히 못 참으면 이 응축된 본성으로 가는데, 이 응축된 본성이 뭘 갖고 있느냐, 태고적 혹은 시원적 휴식, 안식 또는 평화, 이런 것들입니다.
말이 어려우니 쉬운 말로 합시다. 아우슈비츠에서 유태인 500만을 학살한 나치전범인데 전쟁이 끝나고서 남미에 숨어서 한적하게 낚시를 즐기고 있다가 붙잡힌 사람이 있어요. 유태인 학살의 주범을 잡으러 다니는 유태인들의 조직이 생겨났어요. 낚시의 표상이 뭡니까? 휴식이지요. 다른 말로 하면 평화지요.
안식 같은 것, 내면의 청정, 낚시를 하는 이유가 고기를 낚기 위함이 아니라 시간을 낚기 위함이라고 낚시꾼들이 그런 소리들 많이 합니다만 보통 낚시 갈 때는 집구석에 문제 있을 때 모든 문제를 마누라에게 다 맡기고 자기혼자 도망칠 때 낚시를 하러 가는 것인데 그것도 모르고. 평화, 안식, 휴식, 이것이 뭐냐, 태고 적인, 시원적인 휴식을 안 빼앗기기 위해서 최후의 마지노선을 형성하는 거예요.
이것 깨지면 왜 안 되는가, 이것이 깨지게 되면 그동안 이것을 응축하기 위해서 수고한 모든 것이 헛짓이 되기 때문에 다른데서 나를 찾을 수가 없어요. 이미 그리스도밖에는 나와 버렸고 그리스도밖에 나왔으니까 이제 시원적 휴식, 안식은 내 것으로만 응축될 때 그 안에서만 육신은 즐기는데 만약 그것마저 공격받아버리면 나는 ‘누가 나를 위로해 주지? 누가! 누가 나를 위로해주나? 여러분? 윤 복희?’ 누가 나를 위로해 줘요?
여기서 나오는 것이 자기에 대한 지독한 동정이고 자기가 자기를 불쌍히 여기는 거예요. ‘주여, 나같이 불쌍한 놈이 어디 있다고 저를 건드리십니까?’ 이렇게 나오는 거예요. 하여튼 적반하장도 이런 것이 없어요. 자기가 그렇게 불쌍하대요. 주님께서 물으십니다.
‘네가 누구하고 비교했는데 네가 불쌍해?’ ‘과거에 생각했던 나의 야심에 비해서 지금은 너무 초라한 결과입니다.’ ‘과거의 환상이라, 누가 너보고 그런 환상을 가지라고 했지? 제가 가져습니다.’ ‘네가 그랬다고? 그러면 네가 잘못되었네. 네가 처음부터 죄인이라 여겼으면 아무 문제없는 것을 가지고 네가 잘난 척을 하려하니 네 지금의 꼬라지와 과거를 비교하면 안 되지.’
젊을 때 공주 아닌 여자가 누가 있고 왕자가 아닌 남자가 누가 있겠습니까? 괜히 동화책을 많이 봐서 어디서 괜찮은 왕자가 와서 자기한테 뽀뽀해주고 결혼해주기를 원하는 공주, 그런 공주를 원하거든 독 사과를 먹든지 아니면 계모를 만나든지, 일곱 난장이와 사귀든지, 그런 것이 있어야 될 것이 아닙니까?
신데렐라, 일부러 신발 한 짝 벗어놓고 도망치고, 미팅 가서 그런 짓 하지 말라는 말이지요. 너무 많이 봤어, 동화를! 동화 보여주는 그것도 죄악이라, 행함이에요. 애들이 그런 것을 보여주면 괜히 꿈을 꾼다니까요. 갑자기 엄마한테 와서 ‘엄마, 내 출생의 비밀을 알려줘.’ 이따위 소리나 하고 있어요. 뭘 본 것은 있어가지고 만약 친 엄마 같으면 이런 구박은 있을 수 없다고 오해를 해서 신뢰성이 깨져서 미국으로 가서 양부모한테 가고……, 이런 이야기들이 방송에 나오는데 보니까 돌았어요.
그 돌았다는 말이 뭐냐, 사실은 주체가 응축되어 있다, 자기가 자기를 깰 수 없는 정도로 응축되었어요. 그 주체가 완전히 응축되어서 그 응축된 자기 안에 자기를 집어넣으려하니 자기가 얼마나 왜소해집니까? 왜소해지고 폐쇄되고 자폐증처럼 자꾸 기어들어가는 거예요. 기어들어가니까 주께서는 사태를 일으킵니다. 어떤 사태? 말씀의 본뜻이 응축된 주체인 네가 이해하는 그 말씀이 그 말씀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것이 아니고 이 모든 율법의 말씀 앞에서는 율법의 완성이 죽음이에요, 피입니다. 응축된 주체는 뭐냐 하면, 말씀을 지키면 복 받아서 떼 부자 된다, 이렇게 생각하는데, 육신으로 오신 예수님의 말씀의 성취는 뭐냐 하면, 대신 죽음이에요. 십자가죽음이라니까, 그것이 율법의 완성이에요. 십자가 말씀을 가지고 십자가사태를 일으켜버립니다.
그러면 여기서 본색이 드러나지요. ‘주여, 누구십니까?’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다.’ 이러면 사울 같은 사람은 깨진 겁니다. 그러면 자기가 죄인인 것을 아는 거예요. 죄인인줄 안다고 할 때 응축된 주체가 아는 죄인은 시원의 휴식을 깨지 않기 위해서, 무슨 말이냐 하면……, 이왕 어려운 것이니 어렵게 합시다.
응축된 주체에서는 뭐가 나오느냐하면, 가능성이 나와요. 가능성이란 자유입니다. 그런데 자유를 자기가 다뤄보니까 이 자유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자유가 아니고 그 자유는 유한한 자유에요. 이것을 가지고 ‘현기증 나는 자유’라고 합니다. 꿈은 너무 많고 하고 싶은 것이 많은데 다 하지 못하는데서 오는 현기증, 또는 저 높은 곳에 올라가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현기증이 나지요, 그 현기증이 나는 이유는 그 높이만큼 자기가 채울 수 있는 능력이 못되는 거예요.
새 같으면 현기증이 납니까? 독수리가 날다가 ‘아, 어지러워.’ 합니까? 높이, 높이 날아도 그 높이를 다 감당할 수 있잖아요. 그런데 인간이 절망하면서 현기증이 나는 이유는 그 높이만큼 떨어져도 응축된 주체가 안 깨진다는 보장이 안 되는 거예요. 문제는 응축된 주체를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에 자기가 뛰어내릴 자유는 있지만 ‘나중에 낙하산 타고……’ 이렇게 미뤄버리는 겁니다.
자유는 하되 그 자유의 목적이 뭐냐 하면, 내가 나를 유지하고 보존하는데 사용되는 자유라는 말이지요.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에 보니까 도저히 내가 감당이 안 되는 거예요. ‘처나 자식이나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않다.’ 그것보다 더 심한 자유는 뭐냐 하면, ‘겨자씨만한 믿음이 있으면 나무를 뽑아라.’ 할 때 나무를 뽑는 것은 자유지요.
나무를 뽑아놓으면 뭐합니까? 바다에 심어야 되는데. 산을 들었다 치더라도 이것을 바다까지 옮기는데 너무 힘이 들어요. 산을 옮기지를 못해요. 더욱더 나의 왜소함을 자극하니까 그런 것은 치워버리는 겁니다. 그런 것은 치워버리고 온유와 화평을 해가지고 겨자씨만한 믿음도 없는 것을 대체하려고 시도하면서 응축된 주체를 갖고 있는 시원적 휴식과 평화와 안식은 그대로 유지하려고 하는 심보를 발휘하게 되는 거예요.
골라잡아서 지키고 골라잡아서 믿는다, 그 말입니다. 지하철에 엎드려 있는 노숙자한테 천 원 줄 수는 있어요. 하지만 요한1서 3장 16절에 나오는 ‘형제를 위해서 내 목숨을 바치라’는 것은……, 간은 떼 줄 수 있어요. 자기 아는 친척이라든지 누군가에게 떼 줄 수 있지만 목숨을 바치는 것은 못하는 거예요. 요한일서 3장 16절에 ‘사랑을 알면 형제를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것이’ 그 다음에 뭐라고 되어 있습니까? ‘당연하다’ 또는 ‘마땅하다.’고 하지요.
그런 커다란 덩어리 같은 율법은 우리는 피하고 싶은 겁니다. 왜? 현기증 나니까. 내가 갖고 있는 이 평화, 내가 내 안에서 만족하는 이 평화를 더 이상 다치기 싫은 거예요. 다치면 아파~! 트라우마지요, 정신적인 상처가 아파요. 아프면 사는 것이 힘들어요. 따라서 욕심내지 않기로 작정하고 현재 내가 할 수 있는 것만 하면서도 내 안에서 평화는 유지되어야 되겠고, 그런 것들이 어떤 새로운 사태를 발견하면 이것을 지키기 위해서 적극적으로 밀치는 작업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거기서 나오는 항목들이 디모데전서 1장 9절에 나오는 항목들이에요. 도둑질하는 것이 하고 싶어서 합니까? 남들처럼 살고 싶어서 하는 거예요. 사기도 마찬가지죠. 사기 치는 것이 재미가 아닙니다.
남들이 타고 다니는 차를 자기도 타고 싶은데 고물차라도 사려면 사기를 쳐서라도 돈이 있어야 되고, 젊은 애들이 남들 나이트클럽 가서 술 먹고 놀면서 남녀 간에 미팅을 하는데 남들은 있어 보이니 미팅도 잘되는데 자기는 돈 없으니 허름하게 보여서 그것도 안 되니까 거기에 열 받아서 ‘나도 언젠가 한 번 사기라도 쳐서 돈 좀 뿌려봤으면 좋겠다.’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런 환경들을 조성해서 사기나 탐욕이 나올 수밖에 없게 하는 거예요.
제발 네 분수와 주제를 좀 알아라, 그 말이지요. 그 아는 기간을 십분 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