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모데.디도.빌레몬

2011여름 6강

아빠와 함께 2021. 5. 24. 18:22

디모데전후서 제6강

율법에서 율법이 필요치 않은 그런 의인은 없습니다. 의인 따로 있고 죄인 따로 있어서 죄인들만 율법이 있는 것이 아니고 항상 사태가 일어나면 자기가 율법이 필요 없고 자기가 의인이라고 우겨도 여기 이 항목들에 해당되는 것들이 툭툭 튀어나오지요. 원래 예수님 자체가 묵시적 존재이기 때문에 우리에게 가까이 접근하면 우리 주체는 감당이 안돼요.

감당이 안 되고 그냥 사도바울이 한 것처럼 놀라서 ‘주여, 제가 죄인입니다.’라는 말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을 말씀을 통해서, 십자가복음을 통해서 우리에게 할 때 고마운 줄 알면 돼요. ‘주여 제가 주제넘게 환상과 꿈을 꾸었습니다. 제가 잘못되었습니다. 제가 죄인 맞군요. 다시 한 번 확인합니다.’ 이러면 된다 그 말이지요.

그런데 ‘나는 잘못한 것 없습니다.’ 이렇게 되어버리면 주께서 뭐라고 합니까? ‘네가 잘못한 것도 없는데 내가 피를 왜 흘려야 되지?’ 그러면 하는 말이 ‘누가 주님보고 피 흘리라고 했습니까? 왜 본인이 피 흘려놓고 나한테 책임을 묻습니까?’하지요. 그렇게 되어버리면 ‘오, 그래 너 잘났다.’ 사도바울에게 복음을 듣고 난 뒤에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떠난 사람들은 자기 것을 포기 못 하겠다 하는 거예요.

자기 자존심이나 가치나 의를 포기 못하겠다는 거예요. 여기서 하나 주의해야 될 것은 이겁니다. 사도바울은 움직이는 계시가 되기 때문에 자기를 떠난 사람은 사단에 속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저를 떠난 사람은 사단에 속했습니까, 안 속했습니까? 그것은 제가 계시의 중심에 서 있느냐, 아니냐의 그 문제 아닙니까? 저는 아니지요.


우리 자신을 떠났다고 사단에게 돌아갔다고 단정 지을 수 없습니다. 왜냐, 우리 자신이 그리스도밖에 있을 수 있기 때문에. 사도바울당시에는 성경이 형성과정에 있어요. 방언이라는 것은 불신자를 위해서 있는 것이고 예언과 통역은 신자를 위해서 있는 겁니다. 이것이 두 개가 합쳐지면 말씀의 완성이 돼요. 지금은 말씀이 완성되었기에 방언이고 예언통역이고 따로 분류가 안 됩니다만 그 당시는 말씀의 형성과정에 있었기 때문에 방언을 하는 것은 불신자들에게 신비적 묵시적 존재를 알리기 위해서 방언을 했던 겁니다.


다시 말해서 ‘너희들 이해 못하지 롱?’라고 하고 예언과 통역은 이것을 수용하는 사람 ‘야, 주님의 계시인데 그 뜻을 모르겠다.’ 이렇게 주님의 계시의 뜻을 모를 때 통역의 은사가 제공되는 겁니다. 이게 전부 다 능력자에요. 하지만 방언과 예언과 통역을 주도하는 분이 있습니다. 제일 첫 번째가 사도가 되고 그 다음에 예언자요 그 다음에 교사가 되고 그 다음에 능력행하는 자, 그렇게 되어 있지요.


사도나 예언자 교사 능력행하는 자, 할 때 여전히 사도가 뭘 갖고 있습니까? 계시의 범위를 고정시키는 중심축으로서 사도가 살아있던 그 때 그 시절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도가 죽었잖아요. 사도가 죽어버리면 그 계시가 지금 어디 있느냐가 문제지요. 그럼 우리가 알다시피 사도가 죽은 것은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사도를 사용해서 성경의 완료성으로서 그렇게 했고 사도가 죽고 난 뒤에는 사도가 죽어도 성령께서 살아계십니다.


성령께서 완료된 성경책을 가지고 사람들에게 말씀이 무생물이 아니고 생명체임을 알려주는 방식으로 한 거예요. 그렇게 되면 디모데전후서 모든 강의가 ……, 어떤 분은 말하기를 아직도 1장도 안 들어갔다는 거예요. 강의 몇 시간 남지도 않았는데. 디모데전후서 빠르면 한 시간, 더 걸리면 한 시간 반 만에 다 끝납니다. 다 끝나는데 왜 그렇게 할 수 있느냐하면, 디모데 전 후서를 따로 따로 설명해버리면 나중에 응축된 주체에 반창고가 덕지덕지 붙어 있는 셈이 돼요.


‘성경에 이런 것이 있다.’ ‘그것 안다.’ ‘2장에 이런 것이 있다.’ ‘그것도 안다.’ 그렇게 되어버리면 그것은 성경 본래의 사도중심축으로 전환되지 못한 상태에 머물러 있고 마는 겁니다. 만약에 그 당시 사도에게 이 말씀을 들은 사람은 그들로 하여금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만 구원되는구나.’ 하고 그리스도 안, 십자가중심으로 모아졌는데 성경읽기 식으로 해 버리면 사도를 통해서 그리스도에게 가는 것이 아니고, 또는 성경을 통해서 그리스도에게로 가는 것이 아니고 그냥 ‘내가 이것을 안다.’는 지식으로 머물러서 나를 응축하는데 보탬이 되는 성경지식정도로 머물 수밖에 없는 겁니다.


따라서 이런 지식들이 있더라도 그것이 지식이 아니고 어떻게 지금 현재 살아있는 현실인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그 뒷배경의 모든 사실들을 길게 설명한다는 것을 양해를 해주시기 바랍니다. 디모데전서 1장 12절, 13절을 봅시다.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 내가 전에는 훼방자요 핍박자요 포행 자이었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했다.’ 이렇게 되어 있지요. 그러면 사도바울이 자기가 예수를 안 믿은 것은 자기 책임이다, 책임이 아니다? 자기책임 아니지요. 왜 본인이 알고 안 믿은 것이 아니고 몰랐기 때문에 안 믿은 거지요. 그러면 자기책임이 아닌 거예요. 우리도 이것을 이야기해야 됩니다. ‘전에 내가 예수 안 믿은 것은 내가 몰랐기 때문입니다.’라고 이야기해야 돼요.


그것만 이야기하지 말고 그 앞에 것도 해야 돼요. ‘내가 전에는 예수님을 핍박했습니다.’ 여기까지 이야기해야 돼요. 그런데 ‘나는 예수님을 핍박했습니다. 죄인 중에 괴수입니다.’ 이것은 빼놓고 ‘내가 뭐 알아야 믿지 몰랐는데 뭐.’ 이것만 달랑 이야기해버리면 자기가 잘난 사람이 돼버려요. 자기가 마땅히 지옥 갈 자인데 주님 때문에 구원받았다는 생각이 안 들고 ‘나는 몰랐기 때문에 지옥에 간다는 것은 나에게는 너무나 어불성설이고 잘못된 조치입니다.’ 이렇게 나올 가능성이 있다는 말이지요.


지식에서 지식으로 머물면 안 되지요. 무슨 뜻이냐 하면 예수님을 몰랐는데 예수님을 알고부터는 소급해서 몰랐던 시절까지의 내 상태를 마치 파도가 덮치듯이 한꺼번에 다 덮친 거예요. 수해 났어요. 원래 물은 하수구로만 빠지게 되어 있는데 수해가 나서 부엌 안방까지 다 차버렸어요. 이 넘치는 수해, 물의 넘침 그것이 바로 우리가 당하고 있는 은혜, 용서라는 거예요. 그리고 앞으로 남아 인생까지 은혜라는 물이, 긍휼이라는 물이 가득차 있습니다.


이 상태를 아니까 우리는 즐겨 ‘죄인 중에 괴수입니다.’라는 말을 하는데 그 말을 하면서 입가에 웃음이 늘어졌어요. 웃음이 늘어지면서 ‘내가 죄인 중에 괴수입니다.’ 이야기할 수 있다 이 말이지요. 그것을 좋다고 이야기하면 성도고 그것을 찡그리면서 이야기하면 성도가 아닌 거예요. 틱틱거리면서, 또는 씩씩거리면서 ‘그래, 죄인 중에 괴수 맞다.’ 하면 아주 수상하고 사단으로 돌아갈 사람이에요.


사단으로 돌아가는 것은 아주 쉽게 돌아가요. 사단은 항상 옆에 붙어 다니니까. 14절을 봅시다. “우리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 여기에 그냥 믿음이 아니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이지요. 무슨 뜻입니까? 반드시 예수 안에 있는 믿음의 특징이 뭐냐, 그 안에서 나온 믿음과 사랑은 용수철 같이 되어서 우리를 어디로 끌고 갑니까?


우리로 하여금 우리 안의 응축된 주체를 묵사발 시키고 어디 안으로 끌어당긴다? 그 사랑이 나왔던 예수 안으로 우리를 잡아당기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내가 믿는 것 자체, 사랑하는 것 자체, 그리고 믿음과 사랑을 유지하는 것 자체도 우리의 능력 밖의 문제지요. 만약에 나 혼자 존재한다면 우리의 능력밖에 있다 하면 우리에게 아무 일도 안 일어나는데 우리가 예수 안에 있기 때문에 내 밖의 능력이 있다 하면 그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누구에게 돌립니까? 주님에게서 나온 거예요.


내가 나오지 말라고 이야기해도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 계속 나와요. 그것이 계속 나오면 우리는 그 계속 나오는 믿음과 소망과 사랑에 대해서 한해서는 내가 보탠 것도 없고 내가 행한 것도 없이 그냥 주신 믿음과 주신 소망과 주신 사랑으로 살면서 즐기고 있으니까 ‘나는 죄인 중에 괴수입니다.’ 하고 너무 좋아서 이렇게 눈동자도 안보이고 입은 좋아서 이렇게 있지요.


‘나는 죄인 중에 괴수입니다.’ 좋아서 입이 벌어졌어요. 이걸 유지시키는 것은 주님의 몫입니다. 왜, 나는 우리 안에 있는 것이 아니고 주님 안에서 죽은 자로 다루어지기 때문에 계속해서 이런 은혜가 나오는데 어떻게 나온다고 했습니까? 넘치도록, 서울 수해당하는 것 같아요. ‘넘치도록’ 그 다음에 뭐라고 되어 있습니까? ‘풍성하다.’ 이걸 쉽게 말하면 ‘잠겼다.’


머리카락까지 ‘들어가!’ 해서 그 머리카락 이상으로 물에 푹 잠겨버렸어요. 뭐 안에? 하나님의 긍휼 안에 푹 잠겨버린 거예요. 두 번 다시 네 행함 내세우지 말라고 푹 잠겨버린 거예요. 15절을 봅시다. ‘미쁘다’는 말은 믿음직스럽다는 말이에요.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만한 이 말이여.” 야, 여기서 이것을 설명해야 됩니다.


디모데전서 2장 4절을 봅시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라고 되어 있지요. 방금 읽은 15절에도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래서 15절을 안보고 2장 4절을 바로 본 사람들, 전도하는 사람들을 보게 되면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원한다.’라고 굉장히 강조를 합니다.


그들이 주장하는 뜻은 무슨 뜻이냐, ‘하나님의 마음으로는 한명도 지옥 안보내고 다 천국 가게하고 싶은데 인간들 종내기가 그렇게도 성질 더러워서 내가 그렇게도 그렇게 건지려고 애를 써도 싫다고 싫다고들 그렇게 하니 할 수가 없어서 나 싫다는 너 같은 인간들 놔두고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만 데려간다.’ 해서 천국 가는 사람은 천국으로 가고 지옥 가는 사람은 결국 자처해서 지옥을 가는 것이기에 영원한 형벌을 받아도 마땅하다고 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천국과 지옥 가는 사람의 리스트는 어디서 결정 나는 거예요? 이미 창세전에 결정 난 것이 아니고 창세후에 한 번 해 보는 거예요. 그리고 한 번 쑤셔보는 겁니다. ‘갈래 안 갈래?’ 갈래요, 하면 데려가고 ‘갈래 안 갈래?’ ‘안 갈래요.’ ‘지옥가거라’ 이렇게 하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강원도에서 감자만 캐면서 한 번도 예수 이야기 들어본 적도 없는 사람은 뭡니까? 어떻게 해야 되겠어요?


한번도 ‘갈래, 안 갈래?’라는 말조차 못 들어봤어요. 평생토록 주위에 교회 다니는 사람도 한 사람도 없어서 그랬는데 그러면 어떻게 합니까? 그런 사람을 위해서 패자부활전을 준비해놓았어요. 그것이 연옥입니다. 천주교에서 그렇게 했는데 멋지지 않습니까? 어떤 강원도 할머니가 평생토록 생전에 예수에 대해서 들어본 적도 없었는데 막상 죽고 보니까 연옥이라는 거지요.


연옥이라는 것이 중간기착지에요. 지옥이 이중구조로 되어 있는데 한번 떨어지고 다시 거기서 또 떨어지는데 그 중간 기착지가 연옥이에요. 평생토록 한 번도 예수에 대해서 들어보지도 못한 사람들, 태어나자마자 죽은 애들, 유아실에서 까불다가 죽은 애들, 아리스토텔레스나 플라톤, 단군할아버지라든지 부처 등 예수님 태어나기 전에 태어난 사람들, 그 다음에 태어났더라도 복음을 미처 듣지 못하고 죽은 강감찬이나 낙랑공주, 광개토대왕과 을지문덕과 성춘향이나 심청과 홍 길동 같은 사람들에게 한 번 더 기회를 주는 계절학기나 보충수업인 셈입니다.


여기서는 환경을 아주 더 빡세게 해서 일종의 고문실역할을 하는 겁니다. ‘이래도 예수 안 믿을래?’ 해서 ‘믿을게요.’ 한 사람은 천국으로 보내주고 그래도 고집부리는 것은 마귀와 함께 지옥 보내는 거예요. 이런 아이디어가 개신교에도 있습니다. 이런 아이디어를 ‘전천년주의’라고 합니다. 또는 세대주의인데 천년왕국동안 먼저 믿은 사람은 휴거해서 올라가고 나머지 사람들은 아직까지 주님 무서움의 본때를 못 봐서 마귀에게 황충의 침 같은 쏘임을 받게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들로 하여금 ‘못살겠습니다. 왜 이렇게 세상이 힘듭니까?’ ‘힘들지? 네가 요한계시록이 이런 내용인줄을 몰랐지?’ ‘몰랐습니다. 진즉이 요한계시록을 문자 그대로 믿지 왜 안 믿었어?’ 갑자기 요한계시록이 나오니까 신천지같은 느낌이 드는데요, 그래서 이런 식으로 혼을 내면서 ‘아직 마지막 7년 대 환란이 남았어. 믿을래, 안 믿을래?’ ‘믿을래요.’ 하면 거기서 빼주는데 대신 상급은 없어요. 상급이 없으니 팬티바람으로 부끄러운 구원을 받는대요.


아예 소설을 써라, 소설. 이러한 말도 안 되는, 창세전에 이미 결정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새삼스럽게 탐색을 하는 거예요. ‘잠시 검문 있겠습니다.’ 이래서 예수 믿었는가를 탐색합니까? 사도바울이 이렇게 이야기했으면 사도바울이 그렇게 핍박을 안 받아요. 왜, 이방종교와 똑같기 때문에. 사도바울이 전하는 모든 복음은 비웃음을 당하는 겁니다.


왜냐하면 창세후의 인간들에게 나올 수 없는 이야기가 나와 버리거든요. 성령 받지 않고서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이야기가 나온다고요. ‘당신의 운명은 창세전에 이미 결정 났습니다.’라는 소식을 성령 받지 않고서는 도저히 믿기지가 않는 거예요. ‘내가 어떤 인간인지 당신이 나에 대해 아는 것이 뭐가 있다고 나의 운명을 미리 결정하는가?’


그것이 디모데전서의 이야기에요. ‘당신은 죄인이에요.’ ‘죄인인줄 뻔히 알면서도 저를 구원합니까?’ ‘구원은 당신의 행함으로 구원하는 것이 아니고 주께서 은혜 줄자에게만 은혜를 주시고 긍휼 입을 자에게 긍휼을 주시는 방법으로만 해서 천국은 그 사람들만 모이는 곳이 바로 천국입니다. 죽어서 좋은데 가는 것이 천국이 아니고 예수님의 공로와 혜택을 입은 사람만 천국입니다.’


그러면 그쪽에서 뭐라고 합니까? ‘그러면 천국은 예수 자기 맘 대로네?’ 한다고요. 딩동! 천국이 예수님의 나라, 아들의 나라에요. 천국이 우리가 가고 싶은 나라가 아니고 예수님 본인의 나라에요. 하나님이 인정하는 천국은 예수님, 아들의 나라밖에 없어요. 우리는 양자니까. 예수님을 위해서 만든 놀이동산, 예수님의 공로로 된 그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는 우리가 예수님 공로로 들어가게 된 겁니다.


그게 바로 십자가 복음으로서만 비로소 등장한 하늘나라, 천국의 개념이에요. 유대인들은 그것도 모르고 율법 지키면 들어가는 줄 알았습니다. 예수님 하신 말씀이 ‘본 자손은 다 쫓겨나고 예수님이 가라고 하면 가고 오라고 하면 오는 백부장 같은 이방인이 그 자리를 차지할 것이다.’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왜, 그들은 행한 것이 없지만 오직 하나님의 긍휼을 입었기 때문에 차지할 수 있는 거예요.


그러니 말도 안 되는 이야기, 예수님이 아니고 그 이름을 철수라고 합시다. ‘천국은 박 철수의 나라’라고 해 봅시다. 이것을 누가 믿겠어요. 내 이름이 따로 있는데 왜 내가 박철수의 이름을 불러야 되지요? 그런데 박철수의 영이 임하면 눈에서 레이저 나오지요. 예수의 영이 씌워버리면, 예수의 영으로 귀신 씌워 버리면 그 다음부터는 ‘주는 나의 구주십니다.’라는 희한하고 불가능한 고백들이 나온다는 말이지요.


여러분, 그 초심을 잊지 마세요. 그 첫사랑을. 주께서 여러분이 나쁘다고 해서 구원한 것이 아니고 아무 의미도 없는 것을 의미를 줘가면서 구원한 거예요. 다만 예수님을 주라고 인정한다는 그 의미를, 그 없는 의미까지 집어넣어서 끄집어내면서 ‘이렇게 된 것은 네 뜻이 아니고 아버지하고 다 의논된 바다. 그러니 걱정할 것이 없다. 앞에서 내가 극장표 값 다 치렀으니까 그냥 너는 따라오기만 하면 된다.’라는 식으로 우리를 질질 끌고 가는 거예요.


가면서도 우리는 곱게 안가지요. 두리번거리고 뭐가 어쩌고저쩌고 하는 옛 행세가 그대로 나오지요. 그 때마다 많이 맞습니다. 그 때리는 회초리는 오직 하나밖에 없어요. 이미 다 이루었는데 왜 자꾸 미완성을 생각하느냐, 그래서 성도의 삶이라는 것은 이 십자가의 다 이루심이 날마다 되풀이 되는 그것이 바로 성령이 아니고서는 나올 수 없는 불가능한 현상입니다.


날마다 ‘다 이루었는데, 다 이루었는데 왜 자꾸 내가 그런 걱정을 할까!’ 계속 되풀이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런 일은 누가 감당하겠어요? 감당 못하지요. 어느 정도로, 감당을 하는지 못하는지 주께서는 사도바울을 통해서 극한 환난가운데 계속 집어넣어요. 가는 곳마다 핍박받고 쫓기고 어려움을 당하고 돌로 침을 당하고 세 번이나 태형으로 맞고 도적의 위협, 강도의 위협, 엄청난 수모와 환난을 당하고서 어지간하면 포기할 만도 한데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해 가면서 계속 반복적으로 십자가복음을 외치면서 끝까지 역사와 묵시의 만남의 사건을 전달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그 일을 누가 감당하리오. 이 복음을 성령 받은 사람에게 감당케 하는 거예요. 제가 여러분에게 했다는 말을 함부로 못하는 것이, 성령 받은 사람에게 감당케 했다는 말을 할 수 밖에 없는 것이 성령 받고 안 받고는 제 소관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악인은 이렇다, 이렇다, 할 때 그 악인은 정해놓은 사람이 아니잖아요.


‘모든 사람’이라는 것은 역사적으로 인간들이 사람들을 차별하는 그 차별을 하나님께서는 인정하지 않는다는 뜻에서 ‘모든’이라고 한 겁니다. 그러면 이 ‘모든’이라는 구체적인 의미가 확실하게 나타나는 것이 요한복음 12장 32절에 나옵니다.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 하시니.”


여기서 ‘모든’에 해당되는 사람이 누군가 하는 것은 요한복음 11장 52절에 나옵니다. “또 그 민족만 위할 뿐 아니라 흩어진 하나님의 자녀를 모아 하나가 되게 하기 위하여 죽으실 것을 미리 말함이러라.” 12장에서 ‘모든’이라는 것은 예수님이 택하신 모든 사람이지요. 그것이 흩어져 있는 자녀를 모으는데 그 모든, 흩어진 자녀를 끌어 모아서 만든 하나일 수밖에 없는 그 ‘모든’이죠.


하나 될 수밖에 없는 그 ‘모든’이니까 결국 그것은 뭡니까? 그 ‘모든’은 하나에서 나온 ‘모든’이기 때문에 그 ‘모든’의 특징이 뭐냐, 오직 구원받은 자기를 겨냥하지 않고 오직 구원해주신 한분의 행함만 생각하는 그러한 모임이 되는 거예요. 한분의 행함, 그 한 분이 누구지요? ‘예수님이 들려서 그 들린 예수님이 뽑아줘서 오라고 해서 왔다.’고 예수님의 행함만 이야기하다 보니까 누구 행함을 이야기할 수 없습니까?


주님의 행함이 가득 차 있는데 알아서 눈치보고 낄 데 껴야지 자기 행함이 거기 왜 낍니까? ‘미리 아시고 아신 자를 부르시고 부르신 자를 의롭다’ 하신 그 모든 행함은 누구 행함이에요? 주님에게서 나온 행함인데 거기에 왜 자기가 끼지요? 로마서 8장 한 번 봅시다. 32절입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시지 아니하시겠느뇨.”


여기에 ‘모든’앞에 뭐가 붙습니까? ‘우리’에 해당되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여기서 ‘모든’에 해당되는 사람은 주님의 은사를 받은 사람의 전부지요. 은사 안 받은 사람도 ‘모든’에 집어넣지 말라는 말이지요.


아들을 보낼 때는 아들이 필요한 사람에게만 아들을 믿을 수 있는 은사, 성령의 은사를 주는데 그 성령의 은사를 받은 사람들의 특징이 뭐냐, ‘주께서 그냥 줬잖아요. 제가 행한 것이 아니잖아요. 줘서 왔잖아요.’라는 고백을 하는 사람은 너, 나를 비교하지 않고 전부 다 시선이 어디에 모인다? 오직 한분에게만 모이는 그 ‘모든’이 바로 ‘모든’(all)이라는 말이지요.


그래서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니다, 그 말이지요. 데살로니가전서에 나와요.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원한다.’ 하는 것은 자기 택한 백성인 모두를 이야기하는 겁니다. 이 말은 요한복음 6장에 나와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자를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다른 말로 하면 ‘아버지가 주신 모든 사람은 모두 내가 책임지고 예수의 이름으로 찾아가서 그 잃어버린 양을 필히 천국에 도달되도록 만든다.’ 그 말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뭐가 무가치하게 되어버려요? 내가 내 행함을 동원해서 천국가려고 아등바등 애쓰는 그 모든 애씀이 한 방에 다 무용지물이 되지요. 성령의 은사를 받아야 그것을 믿을 수 있습니다. 성령을 안 받으면 여전히 자기 행함의 가치를 포기할 수가 없어요. 응축된 자기주체를 놓쳐버리면 그동안의 자기휴식과 안정을 어디서 찾겠습니까?


그런데 은사를 받아버리면 이것은 자기 때문에 안정을 원하는 것이 아니고 누구 때문에 안정과 평화를 원한다? 예수 안에서 영원히 평안과 안정과 그리고 행복과 휴식을 그 안에서 즐기는 거지요. 예수 안에서의 기쁨을 느끼는 겁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성령 안에서 의와 희락과 평안이다.’ 안정되어 있잖아요. 누구자리에서? 자기자리에서가 아니라 주님 안에서 안정되어 있습니다.


이 안정된 효과가 어느 정도인지를 시험하기위해서 주께서는 그 안정성을 흩을만한 시험들, 사태를 계속 일으킵니다. 우리 집사님도 뺑소니 사건 같은 것에 휘말렸다고 하는데계속 이런 사태를 일으켜서 이 안정성이 주님 안에서 안정성인지 아니면 예수 믿는다고 우기는 내 안에서의 안정성인지를 계속 흔들기를 하는 거예요.


흔들리면 흔들릴 수밖에 없지요. 흔들면 흔들리다가 이상스럽게 인간의 힘으로는 나올 수 없는 안정성, ‘이것도 주님의 뜻인데 뭐’ 하고 다시 오뚜기 처럼 다시 설 때 ‘아, 이게 바로 되풀이 되고 있는 안정성이고 묵시적인 성령께서 함께하고 있기 때문에 다시 한 번 그리스도의 다 이루심의 효과에 대해서 만끽하게 만드는구나.’ 이것을 알게 하시는 거지요.


그리 되면 일사천리로 디모데전서 이해 안 될 것이 없어요. 디모데전서 1장 18절에 “아들 디모데야 내가 네게 이 경계로서 명하노니 전에 너를 지도한 예언을 따라 그것으로 선한 싸움을 싸우며.” 얼마든지 싸우지요. 왜, 어차피 나한테는 무기가 있다, 없다? 무기가 없는 것이 아니고 아예 필요치 않지요. 무기가 아무것도 필요가 없습니다.


무기 없는 그 자체가 무기라. 아무것도 내 세울 것이 없는, 창녀는 창녀가 무기고, 세리는 세리자체가 무기에요. 창녀에서 포주로 발전한다고 해서 그것이 무기가 되는 것이 아니고 그냥 그 자체, ‘나 같은 인간도 구원되었습니다.’라는 그 자체로 악마를 이기는 무기가 되지요. 평신도가 성령을 받았다, 그 자체가 내세울 것은 주님만 내세우는 거지요.


그럼 그 사람이 후에 집사가 된다, 권사 되고 장로 되고 목사가 된다, 그러면 항상 초심을 잊지 말아야 되지요. 장로가 무기되고 목사가 무기되면 안 되지요. 그것은 이미 사단으로 돌아간 셈이 됩니다. 19절에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 어떤 이들이 이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하였느니라.” 그 다음에 여기에 명단이 나오네요.


“그 가운데 후메네오 알렉산더…….” 여기 후메네오 손들어 보세요. 알렉산더 손들어보시기 바랍니다. “그 가운데 후메네오와 알렉산더가 있으니 내가 사단에게 내어준 것은 저희로 징계를 받아 훼방하지 말게 하려 함이니라.” 사실 오늘날 법으로 보면 이것은 명예훼손감이지요. 그런데 이것이 나오는 것은 이 사람들이 믿음에 파선하는 것은 무엇에 포함되어 있습니까? 이것이 하나님의 계시로 꼭꼭 포함이 되어 있어야 합니다.


왜 이것이 포함이 되어 있어야 하느냐하면, 사람들은 누구나 이성이 있으면 납득이 될 만한 이야기를 사도바울은 한 적이 없고 사도바울은 뭐만 확인하느냐, ‘은혜 받으셨습니까?’ 그것만 확인하는 거예요. ‘십자가복음을 아십니까?’ 그것만 확인하기 때문에 그것 없이 행함으로 버티려고 하는 사람은 결국은 자기 본색을 드러낼 수밖에 없는 겁니다.


이렇게 명단을 놔두는 것은 결국 선한 싸움의 결말이 분류작업에 있다 하는 것을 보여주는 거지요. 그 다음 2장으로 넘어가봅시다. 사도행전 26장 29절 먼저 봅시다. “바울이 가로되 말이 적으나 많으나 당신뿐 아니라 오늘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도 다 이렇게 결박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노이다 하니라.”


아그립바 총독 앞에서 사도바울이 말대꾸 하는 대목입니다. 그렇게 아시고 디모데전서 2장 1절과 2절을 봅시다. “그러므로 내가 높은 첫째로 권하노니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와 도고와 감사를 하되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하라 이는 우리가 모든 경건과 단정한 중에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려 함이니라.”


여기서 ‘높은 사람을 위해서 기도하고 간구하라.’는 이 말이 있는데 제가 아까 의도적으로 사도행전 26장 29절을 봤는데 만약에 오늘날 학자들이 설명하는 것처럼 ‘권력 있거든 좀 그 앞에 고개도 숙이고 빌어라. 왜냐, 복음 전파하는데 평안하게 하기 위해서 고개 숙이고 대들지 말라.’ 그런 쪽이라면 사도바울이 자기가 한 말을 사도행전에서 본인이 위반하고 있어요.


‘봐주세요. 복음을 본인은 안 믿겠지만 참 좋은 겁니다.’ 이렇게 나와야 하는데 아그립바 총독 앞에서 무슨 말을 합니까? ‘당신은 예수 안 믿으면 지옥 갑니다.’ 그 소리를 한 거예요. 복음전파만큼 그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이 없어요. 역사적 존재고 이미 죽어 있는 상태 아닙니까? 죽어 있는 상태에서 ‘잘 지내세요.’ 이것은 그냥 방치하는 것이고 정말 그 높은 사람을 사랑한다면 그냥 ‘도와주세요.’ 정도가 아니라 ‘예수그리스도가 당신보다 더 높은 자리에서 당신을 내려다보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이야기해야 됩니다.


이것이 마태복음 10장에 나오는 예수님의 뜻이기도 하고요. ‘네가 높은 사람 앞에 있을 때 기죽지 말고 단호하게 복음을 전하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이것은 어떤 ‘선교의 정책상 잘 해서 도움 받아라.’ 하는 정도가 아니고 적극적으로 ‘대통령 당신도 은혜만 받으면 지옥 안 갈수 있습니다.’라는 조, 그런 시선으로 그 사람들을 대하라는 말이지요.


‘당신이 예수도 모르면서 권력을 가졌다고 그것으로 인생 성공인줄 아는데 주께서는 모든 사람을 구원하기를 원하기 때문에 당신 같은 인간도 네 말 들으면 구원될 수 있습니다.’ 그런 조로 하라는 말이지요. 왜, 성도는 모든 권세보다 더 높은 권세로서 성도가 되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자기가 손들고 되고 싶다고 해서 된 것이 아니고 세상 권세보다 더 큰 권세가 덮쳤기 때문에 성도가 되었기에 이 성도의 자긍심과 고귀함은 세상 권력 앞에서 조금도 기죽을 이유가 없는 거예요. 과감하게 그렇게 한 겁니다. 사도바울의 행적을 보면 그것이 죽 나와요. 그 다음에 2장 5절, 6절을 봅시다. “하나님은 한분이시오 또 하나님과 사람사이에 중보도 한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그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자기를 속전으로 주셨으니 기약이 이르면 증거 할 것이라.”


‘그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속전으로 주셨다.’고 하니까 어떤 교단에서는 이것을 무엇으로 보느냐하면, ‘속전으로 이미 죄용서가 다 되었는데 죄용서가 되었지만 실제로 효과를 내는 것은 우리가 자유의지를 발휘해서 이것을 믿지 아니하면 다 되었다 할지라도 이것이 접촉이 안 되어서 지옥 간다.’는 거예요. 어떤 교단에서, 이것을 강조하는 이유는 모르겠다만 하여튼 어떤 교단에서 그렇게 합니다.


그렇게 되면 어디에 어긋나느냐, 새 언약의 효과가 십자가에서 멈추느냐, 아니면 십자가에서 다 이룬 그것을 구원받는 사람의 그 심령에 집어넣는 것까지 새 언약에 포함되느냐, 그 문제로 결정 나겠지요. 어느 쪽입니까? 히브리서 10장에 보면 어떻게 되겠어요? 새 언약의 효과가 뭡니까? 옛 언약은 마음밖에 있는 말씀이지만 이제 새 언약이 오게 되면 이제는 마음속까지 주께서 다 이룬 것을 본인도 손 못 대는, 본인도 철거 못하는 깊숙한 곳에까지 그것을 집어넣는 것까지 다 해버리는 거예요.


포장이사도 이런 포장이사가 또 없습니다. ‘그냥 놀다 오세요. 들어오시면 깨끗하게 다 이사해서 정리되어 있습니다. 요새는 말만 그렇고 제대로 그렇게 하는 집도 잘 없어요. 진짜 포장이사는 ‘그냥 몸만 오세요. 우리가 다 합니다.’ 하지요. 그래서 우리가 믿는다는 것은 하늘을 보고 믿는 것이 아니고 내 안에 들어온 것을 보고 믿어야지요.


‘웬 낯선 것이 왜 들어왔지? 이것은 내가 만든 것이 아닌데? 이것은 내가 구상한 것이 아닌데 이것이 왜 들어왔지? 아, 주께서 집어넣었구나. 믿습니다.’ 뭘? ‘주께서 주신 선물임을 믿습니다.’ 뭔데? ‘십자가의 피와 부활이 하나의 선물로서 저에게 장착되어 있습니다.’ 그 성령이 임하면 이런 어처구니없는, 내가 손댄 일도 없는 어처구니없는 이것을 고백한다는 것은 진짜 안에 뭐가 있다는 뜻이에요.


없으면 그런 소리 안하는데 진짜 있어요. 있기 때문에 ‘절대로 내가 행해서 유지하거나 보관하는 것이 아닙니다.’라고 할 수밖에 없어요. 내가 예수 믿고 난 뒤에 착하게 살면 유지되고 나쁘게 살면 왔다가 휙 가버리고 이런 것은 없어요. 들어올 때 타협했습니까? 오징어구멍내서 얼굴에 쓰고 돈 봉투 하나 내면 한발자국씩 떼면서 ‘함 사세요.’ 그렇게 했습니까?


그렇지 않잖아요. 그냥 쑥 들어왔잖아요. 도둑놈처럼 쑥 들어와서 안 나갑니다. 우리의 주인이 되고 우리는 주의 종이 되었어요. 그 다음부터는 그분이 의인이니 우리는 의의 종이 된 겁니다. 우리는 주의 의를 소개할 수밖에 없어요. 우리는 죄인이지만 주께서 다 이루었다, 그 소리밖에 할 수가 없어요. 이것은 완전히 들이박혀서 나가지도 않습니다.


‘어떻게 예수 믿었습니까?’ ‘주의 선물입니다.’ ‘나는 왜 그런 선물을 안줍니까?’ ‘선물 주는 분한테 이야기를 해야지 왜 나보고 이야기합니까? 나는 받았을 뿐이고 당신은 안 받았을 뿐이고.’ 그러니까 사단으로 돌아가는 거예요. 뭔가 있는가 싶어서 왔다가 가버린 거예요. 받은 것이 있다면 ‘주께서 그냥 주셨습니다.’하고 주 만 이야기하면 아무 문제없는 거예요.


예수도 끄집어내고 자기 행함도 끄집어내고, 자기 행함이 왜 나오고, 그게 왜 나옵니까? 거기서 행함이 왜 튀어나옵니까? 이상해요. 그것은 자기 힘으로 자기 행함으로 예수 믿어서 집어넣고 자기 행함으로 행함을 집어넣었기 때문에 내놔보라고 하면 자기 행함만 내놓는 거예요. 받은 선물이 하나도 없는 거예요. 이런 구색을 갖추면 신자 되는 줄 알고 그렇게 생각한 겁니다.


이해하지요. 오죽하면 그런 식으로라도 집어넣고 싶겠어요. 한구석에 피도 집어넣고 행함도 집어넣어서 균형 맞춘 신학을 한다고 다 집어넣으니 이거 치면 이리로 피하고 이거 치면 이리로 피하고, 막사나, 행함 내놓고, 행함으로 구원받나? 아니 피로! 얼마나 편리한지, 참 편리해서 좋겠습니다. 그런 것이 인간들 쪽에서 가능한 거예요.


인간들이 가능한 것은 성령의 열매가 아닙니다. 육의 열매지요. 지식으로 그렇게 포장하는 겁니다. 십자가를 믿었으면 십자가정신이 나오고 십자가삶이 나와야 된다는 거예요. 그게 뭐냐, 피로 왔다가 행함 내놓으라는 그 소리하고 똑같은 소리 아닙니까? 십자가의 삶, 성령의 삶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나는 죄인중의 괴수입니다. 앞으로도 그럴 거예요.’


하이카처럼 입이 째져서 그러지요. 너무 좋아가지고. 내가 죄인 에 이기에 사는 일 부담이 없어요. 나는 피보험자이기에 부담이 없어요. 아버지 돌아가셔도 상조회사에서 다 와주고 전혀 장례식에 부담이 없어요. 파출부도 세 명 와주고, 아무 부담이 없어요. 일오사사 공사사육, 일오사사 공사사육, 아무 부담이 없어요. 2년 만기, 보험료 인상도 없고 한번 내면 그것으로 끝이에요.


그 이야기를 디모데 전서는 계속해서 꾸준히 이야기합니다. ‘한분 때문에 되었다. 제발 그 한분의 자리에 네가 좀 끼지 말라.’ 그 말입니다. ‘우리가 바라보는 그 중보자 한 분이면 된다.’ 그 다음에 2장 7절에 보면 ‘참말이고 거짓말이 아니다. 이것을 위해 내가 사도로 세움을 입었다.’ 라고 하지요. 그래도 가버리는데 어떻게 합니까?


알렉산더, 후메네오, 이런 인간들은 이런 말을 해줘도, 이런 말을 그 사람들이 분명히 들었어도 그 사람들이 떠나 버렸어요. 뭐냐 하면 소통, 대화가 안 된다는 거예요. 네 속에 들어 있는 것과 내 속에 들어있는 것과 차이가 나니까 네가 하는 말이 무슨 말인지를 못 알아 들어요. 이 사람들이 이럴 때 믿음이 없다고 하지 않고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듣겠다고 합니다.


8절, 9절을 보면 “그러므로 각처에서 남자들이 분노와 다툼이 없이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하기를 원하노라 또 이와 같이 여자들도 아담한 옷을 입고 염치와 정절로 자기를 단장하고 땋은 머리와 금이나 진주나 값진 옷으로 하지 말고.” 여기서 아담한 옷이 얼마짜리입니까? 얼마짜리 옷을 아담하다고 합니까? 무슨 메이커가 아담한 옷 이지요?


옷가게 하는 집사님 어디 가셨지요? 아담한 옷이라는 것이 몇 만원 이하짜리를 말하는 겁니까? 이것은 뭐냐, 죄인 중에 괴수인 나에게 주신 은혜가 유지되는 상태를 말합니다. ‘이것은 나한테 너무나 넘칩니다. 감사함으로 입습니다.’ 분을 일으킨다는 것은 ‘이것은 내 주제에 해당이 안 돼.’ 하고 화를 내잖아요.


‘이것은 나에게는 어처구니없어. 감히 나를 어찌 보고.’ 이것이 바로 남자들의 혈기인데 그것은 은혜에서 벗어난 것이 아니고 은혜를 잊어버린 거예요. 은혜를 잊어버리게 되면 다시 혈기가 나오고 그렇게 되는 거예요. 그것 때문에 이 말씀이 율법적 기능을 하면서 계속해서 나무라는 겁니다. 왜 같은 동창생인데 머리부터 발끝까지 다 명품으로 감아놓았다는 말이지요. 모자, 스카프, 신발까지 다 ~똥, ~똥, 다 똥으로 쳐 발라 놓았어요. ‘나도 그동안 아담하게 많이 살았다.’ 할 때 다시 한 번 ‘우리가 죄인 중에 괴수라는 사실을 담지 하라.’는 말이지요.


그래서 전도서의 말씀이 맞아요. 너무 선하지도 말고 악하지도 말고. 너무 선하려는 그것도 경쟁이 돼요. 아까 명품으로 도배를 한 불신자 동창생을 만나는가 하면 이번에는 또 누구를 만나느냐, 수녀동창생을 만납니다. 유기농법으로 한 간장이나 된장 만들어서 공동체 생활하는 수녀들 있잖아요. ‘아, 저렇게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는데 대체 나는 뭔지.’ 거기서 우울해서 또 ‘나는 죄만 짓는구나.’ 이러지도 말라는 말이지요.


그저 그야말로 아담하게, 아담하게 그냥 사세요. 형편대로, 너무 오버하지 마시고, 너무 악하지도 너무 선하지도 마시고. 그쪽은 그쪽 스케줄이 있고 나는 내 쪽의 스케줄이 있어요. 애가 서너 명씩 달렸는데 그런 내가 뭘 어쩐다는 말입니까? 언제 그런 것을 해요. 애 다섯 명 놔두고 무슨 사회봉사를 해요. 자기애나 키우는 그것이 봉사에요. 부녀회가서 봉사한다고 나대지 말고 사대 강 사업 반대한다고 피켓 들지 말고 자기애나 잘 키우면 돼요.


그런 것 할 형편이 되면 그때는 하면 되고. 그러니까 항상 복음의 기준이라는 것은 첫사랑의 은혜를 잊지 않고 살아가는 그겁니다. 요즘같이 힘든 세상에 둘 키우는 사람 보면 존경스러워요. 세상에나, 모든 것을 포기하고 둘을 키우겠습니까? 셋은 초월? 묵시? 그것은 너무한 거고 둘만 키워도 얼마나 힘이 드는지. 그렇게 키우면서 또 자기 죄가 펄펄 나오고.


응축된 주체가 솜씨를 발휘해서 나름대로 낮추고 낮추시는 환경이 되는 겁니다. 저녁 먹고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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