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모데.디도.빌레몬

2011여름 9강

아빠와 함께 2021. 5. 24. 18:28

제 9 강

디모데 전서나 후서 뒤편에 가게 되면 여러 가지 교훈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디모데 후서 3장1절을 보면 “말세에 고통 할 때가 이르리니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이것이 고통입니까? 자기 사랑이 고통이겠어요? 원했던 바가 아니에요?

이것이 어떻게 고통이 됩니까?


숫자 세어보겠습니다.

1)말세에 자기를 사랑하며, 2)돈을 사랑하며 ,3)자긍하며, 4)교만하며, 5)훼방하며, 6)부모를 거역하며, 7)감사치 아니하며 ,8)거룩치 아니하며, 9)무정하며, 10)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11)참소하며, 12)절제하지 못하며, 13)사나우며, 14)선한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15)배반하여 팔며, 16)조급하며, 17)자고하며, 18) 쾌락을 사랑하는 것을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19)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라.


19가지 항목들 중에 두 세 가지 빠뜨리면 지옥 갑니까?

실컷 십자가 믿음 이야기 쭉 해 놓았다가 끝부분에 와 가지고 이것 한두 개 위반하면 본인들이 구원 못 받고 지옥 가는 것처럼 그렇게 느껴지는 이유와 원인이 어디 있는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것은 너 여기 있고 나 여기 있다는 식으로, 무엇을 상정하는고 하면, 항상 무엇을 규정하는고 하면,

나 여기 있고 그 다음 말씀 책이 있어 가지고, 여기서 저 말씀을 지키는 것으로 구원을 이루려고 시도하는 그 시도가 수련회를 마치고 난 뒤까지 계속해서 그대로 남아 있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이것이 아니라면 말씀을 지키라는 말씀이 무슨 뜻이냐? 새삼스럽게 물으시면,

말씀이 여러분 속에 박히는 것이 새 언약의 혜택이고 묵시의 혜택이고 , 성령의 충만한 역사하심입니다.

예레미아31장31-34

“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맺으리라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조상들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맺은 것과 같지 아니할 것은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이 내 언약을 깨뜨렸음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과 맺을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들이 다시는 각기 이웃과 형제를 가르쳐 이르기를 너는 여호와를 알라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알기 때문이라 내가 그들의 악행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



어디서 잡을 것이 없어요. 지킬 것이 없어요. 여러분 속에 말씀이 박혀서

말씀이 뿜어 져 나오면 여러분들은 그 말씀에 따라 저촉을 받게 되어 있어요. 구원을 시작하신이가 하나님이시지 우리가 새삼스럽게 말씀을 지키고, 조금 전에 말한 열아홉까지를 지키고 이것은 지키고 이것은 덜 지켰다 이렇게 할 수 있는 것이라면 구원이라는 것은 영원히 우리한테 존재하지 않습니다. 없는 것입니다. 있을 수가 없습니다.


경건의 연습한다고 이것 지키고 저것 지키고 아 이것 빠뜨렸구나 이것은 다음에 미루고 다음에 지키고 이런 식으로 경건의 연습한다고 경건의 모양새를 갖추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이 이미 박혀 있기 때문에, 말씀이 와서 우리에게 박혀 있어 버리면 우리는 그 말씀의 효력을 날마다 받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편 119편, 유명한 말씀입니다.

“주의 말씀의 맛이 내게 어찌 그리 단지요 내 입에 꿀보다 더 다니이다 ”시119:103



말씀이 꿀 송이 보다 달다. 말씀에 대해서 거부반응이 나타나지 않고, 아무리 열 아홉 가지가 아니라 서른 가지라도 오십 가지라도 말씀이 오는 것이 반갑다 말씀아 이렇게 되어야 돼요. 그런데 사람이 지키려고 하며 말씀 오는 것이 겁이 나요. 또 뭐 지켜야 되는데. 또 또 또, 잔소리도. 또 뭘 지켜야 되는데 겁을 내고 있어요. 겁을 집어 먹고 있어요.


제가 아는 분이 서울에 계시는데 딸이 결혼했는데, 사위와 딸이 바빠요. 자녀가 둘인데 키울 수가 없어요.

그 때 친정어머니가 시골서 오셔서 전적으로 살림을 해 줍니다. 이것을 생계형 살림이라고 합니다.

이때 친정어머니가 그렇게 반가운 거예요. 그리고 그 친정어머니의 잔소리,

얘야, 빨래는 빨래 통에 넣어야지.부인은 11시, 남편은 12시 넘어서 퇴근해요. 서울은 다 그런가?

자녀는 낳았는데 얼굴 맞댈 시간이 없어요. 아침 일찍 출근해야 하니 속옷 아무 곳에 던져놓고, 양말 아무 곳에서 던져놓아도 친정어머니가 다 세탁해 주시고 정리해 주시죠. 그리고 친정어머니의 잔소리.

이 때 친정어머니는 반갑다 친정어머니 잔소리꾼이 아니고, 아니 잔소리마다 반가워요.


이게 꿀 송이보다 단 말씀이라는 말입니다.


이미 구원받았기에 이런 잔소리 저런 잔소리 하시면서 우리로 하여금 이렇게 허접스럽고 이렇게 부족하지만 십자가 피가 고맙다는 것을 느끼게 하는 것입니다.


나 여기 있고 말씀 저기 있고 얼마나 지키면 내가 훌륭해 질까 이런 식은 불안과 초조를 유발하는 것입니다.


조금 전에 식사할 때 옆에서 어떤 분이 이야기 했습니다. 밤사이에 비가 왔는데 자기는 몰랐데요. 그런데 왜 알아야 됩니까? 밤사이 비오는 것을.

이 이야기, 밤사이에 비가 오는 이야기가 어디에 나오는고 하면 디모데 후서 2장9절에 나옵니다.


“복음으로 말미암아 내가 죄인과 같이 매이는 데까지 고난을 받았으나 하나님의 말씀은 매이지 아니하니라 ”

가야산 비오는 것을 나에게 허락받을 이유가 없잖아요.

이게 믿어지는 것이 믿음 아닙니까.


주님께서 , 성령께서 일방적으로 찾아오셔서 내 속에 십자가의 피 박아 놓고 십자가의 피를 왜 흘려야 되는 것을 여러 가지 잔소리, 열아홉까지 잔소리, 수백 가지 잔소리를 하시면서 용서의 단비는 우리 속에서 계속해서 작열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믿는 것이 믿음 아닙니까? 이게 믿음 아닙니까?


비는 왔는데 내가 비온 것을 모른다면 비가 오다가 그칠까요?

나는 알아주지 않으니 가야산에 비 안 내릴 거야라고 합니까?

이게 하나님의 말씀입니까?

말씀은 사람에게 매인다 매이지 않는다?

매이지 않고 지금도 활동하는 한 가지가 나는 너를 창세전에 택해서 피로 너를 건지시리라는 말씀이 촉촉하게 우리 심령을 적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말씀이 겁나서 도피하거나 도망칠 것이 아니라 반갑다 말씀아 해서 늘 말씀에 대해서 거부반응이 일어나지 않아야 이 사람이 묵시적인 성령을 받은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반대로 육적인 경건의 훈련은 어떤 것인가?

어제 누가 동양철학을 너무 길게 하지 않았느냐고 최측근이 말했어요.


왜 동양철학을 귀한 성경말씀 이야기하기도 바쁜 시간에 이야기 했는가?

이것이 육적으로 나올 수 있는 경건의 모든 훈련, 성령 안 받은 상태에서 인간에게서 나올 수 있는 착함과 선행이 동양철학을 보면 놀라 자빠질 만하게 고상하기 짝이 없는 우아한, 너무나 완벽하게

이웃을 사랑하고 자기 자신을 정갈하게 다듬는 모든 훈련들이 거기에 나와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이 구원을 받습니까? 택도 없는 소리입니다. 그들과 성도의 차이점이 무엇입니까?


다 이루심이 그들에게 없고 그냥 애쓰는 것입니다. 행함 주의자와 똑같은 것입니다. 그냥 구원받으려고 애쓰는 것입니다. 착한 것 다 듣고, 거룩한 것을 다 알아서 내 행함을 동원시켜 하나하나 나의 주체의 것으로 모으는 작업, 나 여기 있고 말씀 저기 있으니 저 귀한 말씀을 내가 지켜서 가져와서 내 것으로 삼으면, 이런 꽃다발을 만들면 하나님께 영광되지 않겠느냐 이런 아이디어 , 이것은 동양철학입니다. 성령 없는 육적 경건훈련입니다. 그래서 더 센 말씀 오면 도망쳐버리고 나중에 지켜야지 하고, 지킨 것을 남하고 비교 경쟁에 나서고.


수련회를 끝내면서 남는 것이 무엇이냐? 말씀이냐 아니면 나냐 이것입니다.

말씀 포기할레 나를 포기할레 이것입니다.

나 포기하면 말씀이 달게 보이고

나를 포기 못하면 말씀은 귀찮고 부담되고.


사도바울이 말씀을 전했는데 사도바울일행을 떠난 사람은 결국 무엇을 찾아 떠났습니까?

때려 죽어도 뭘 포기 못하겠다? 나의 행함은 때려 죽여도 포기 못하겠다. 나는 십자가에서 죄인 되기 싫다 이 말입니다.



디모데후서4장10절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 그레스게는 갈라디아로, 디도는 달마디아로 갔고 ”

여기 나오잖아요. 이것은 사도 바울을 버린 것이 아니라 사도바울을 통해 주어진 하나님의 살아 있는 말씀을 버린 것입니다. 말씀을 버린다는 것은 무엇을 포기 못하겠다? 이것 중요합니다. 나의 착함과 나의 선행과 나의 행함을 포기 못하겠다는 것입니다.

십자가 앞에서 나는 죄인 아니고 싶다는 말입니다. 나는 내 나름대로 잘남을 보람으로 삼고 인생을 버티겠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어떻게 예수의 나라에 갑니까? 지(자기)나라에 가지요.

지옥이지요.


데마는 데살로니가로 갔고 그레스게는 갈라디라오 , 디도는 달마디아로 갔고.

종범이도 가고 동렬이도 가고. 해태 타이거즈 감독 했던 김응용 감독이 팀을 꾸려야 하는데 차 빼고 포 빼고. 남는 것이 없다 말입니다.

사도 바울이 성령으로 전해도, 우성령이라도 택함 받지 못한 자들은 말씀을 전하면 분노 내게 되어 있어요.

행함을 이야기 하지 말라고 그렇게 이야기해도 자기 행함을 포기 못하겠다는 것을 누가 말리겠어요.


그러면 왜 행함을 포기 못합니까?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습니다. 십자가에서 다 이룬 것이 인간의 관점에서 과거에 완료된 한번 있었던 , 한번으로 끝나버린 사건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과거의 십자가에서 옆에 있는 강도 같으면 다 이루었다 오늘밤에 낙원에 있으리라 하면 오늘밤에 낙원에 가는구나! 실제로 낙원에 갔으니 이것은 혜택을 입어 좋은데 ,그런데 우리는 현장에 있던 강도가 아닙니다. 선악과 따먹은 아담이 아니니 우리는 아무리 예수님이 완성해도 역사가 지나버리니 우리입장에서는 항상 미완료로 남는 것입니다.

여기서 다 이루었다 해도 그것은 옛날에 다 이루었기에 지금 나에게 안 이루어졌다고 우겨 버리면 이것은 시간적 겝이 성립되는 것입니다.

방금 이야기 한 것이 무엇인고 하면 성령 받지 않는 상태에서의 논리적인 메커니즘의 과정입니다.


그러니 성령이 오셔서 다 이루셨다는 것을, 우리가 갈수 없는 겝을 십자가를 현재 2011년8월로 옮겨 버리면, 미완료가 없어지고 다 이루었다의 남아 있는 정지 작업 중의 하나가 창세전 예정된 자를 건지는 작업이 되는 작업입니다. 그러면 나의 미완료를 믿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다 이루심이 성령을 통해 지금도 성령을 통해 적용된다는 것을 믿어지면, 열 아홉 가지가 아니라 오천 가지라도 다 이루심의 일환으로 말씀이 이 속에 박혀서 발휘되고 사랑이 방출되는 것입니다. 이럴 때 이 사람은 자기 행함을 따로 챙길 필요가 없지요. 이런 선물을 가지고 믿음이라고 합니다.


그래놓고, 이렇게 다 이루어졌으니 분명히 나는 성경말씀 다 못 지키고, 디모데 후서 열아홉 가지 중 하나도 못 지키고, 자기를 사랑하며, 자기 사랑하지 않는 사람 어디 있습니까? 돈을 사랑하며, 돈 사랑하지 않는 사람 어디 있습니까? 돈 없어서 환장해서 로또 사는데 돈 있어서 환장한 사람 어디 있습니까? 자긍하며 자기 자긍심 없으면 사람이 무슨 재미로 살겠어요?


교만하며 기준 따라 달라요 , 겸손 티 낸다고 교만 아닙니까?

레위기 안의 그리스도라는 책이 있어요?


여기 보면 눈시울이 붉어지도록 울어도 돌아서면 자만인 것을!

그때는 뭐 회개하는 것처럼 보이고 이제는 주를 위해서 목이라도 내어 놓을 것 같지요. 돌아서면 그것도 과거에 아주 경건해 보였던 것을 챙겼던 것을 하나의 자만으로 남는 것이에요.


이런 인간이 언제 완벽해서 구원받겠어요. 돌아서면 자만인데. 눈시울이 뜨겁게 울었던 것을 왜 믿습니까? 눈시울이 뜨겁도록 울었던 그 사건을 믿을 것입니까? 십자가 사건을 믿을 것입니까? 어느 쪽이에요?

눈시울이 뜨겁도록 울었던 것은 내 사건이지만 내 행위이지만 십자가 사건 근처에 나는 없었어요. 내가 그 자리 없었던 것이 오히려 다행이에요. 있었다고 하면 또 그것 자랑했어요. 주여 오늘밤에 저를 생각해 달라고 할 때, 아 주님께서 아주 거룩한 음성으로, 너 그 음성 못 들어 보았지 아주 매끄러운 음성으로 네가 오늘밤 낙원에 있으리라 이것 자랑한다고 돌아다니면서 간증집회하고 있을 거예요. 차라리 그곳에 없었던 것이 천만 다행이에요. 그곳에 있었으면 난리 났을 것이에요. 그날 밤 낙원 갔다는 것을 자랑할 것이에요. 낙원 멋지데!


디모데 후서2장26절에 보면 저희로 깨어 마귀의 올무에서 벗어나 하나님께서 사로잡힌바 되어 그 뜻을 쫓아가게 하려 함이라“

진리가 오게 되면, 진리가 우리에게 자극되면, 그냥 나 있고, 하나님 저곳에 계시고, 삼 미터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에요. 그냥 하나님께서 쳐들어 와 버리면 그때부터 우리는 사로잡힌바 되어 버립니다. 사로잡힌바 되어 버리면 비로소 그때부터 우리는 무엇이 잘못이고 무엇이 문제가 있고 우리의 믿음과 행함에 어떤 오류가 있는 지를 그때부터 새롭게 알아가는 즐거운 시간 기쁜 시간이 우리에게 계속 남아 있는 것이에요.


이미 하나님께서 십자가로 이야기하신다는 것은 너 구원 받아라가 아니라 이미 너 구원되었어라는 과거에 되었음을 지금의 되었음으로 이야기할 때 그것을 과거지사로 생각하지 않고 지금 나에게 주어진 것으로 믿어지는 , 인간의 능력으로 불가능한 그런 놀라운 것을 우리에게 찾게 되죠. 이것은 우리에게 있어서 찾게 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성령이 함께 계신 여부를 찾는 것이에요. 과거에 일어난 일이 미래의 우리의 운명을 결정했습니다라는 그것이 시간을 뛰어넘어서 믿어진다는 것, 이것은 절대 우리 솜씨, 우리 능력, 우리 경건의 훈련결과가 아닙니다. 주님이 우리를 사로잡고 지배했다는 증거가 되겠죠?


이 이야기를 지금 디모데 전후서에서 계속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보고


디모데전서 6장 어제 못한 것을 봅시다.

미리 이렇게 제가 말씀드리는 것은 하도 수련회 끝나고 어떻고 어떻게 해놓고 돌아서면 말씀을 언제 또 이렇게 나오는 사람이 있어요. 말씀이 그 사람 속에 있는데 말씀이 그 사람 속에서 튀어 나오고 있는데 말씀이 그 밖에 있다고 생각해서 아 바빠서 성경 못 보았어요 해요. 못 보기는 말씀이 네 속에 들어 있는데.

성령과 더불어 새언약이 들어오고 새언약이 들어오면 모든 말씀이 택배로 그 안에 들어 있는 것이에요. 들어 있어서 어떤 사건이 일어나면 차후에 성경을 보면 아 그때 일이 이런 일이구나 하는 것을 새삼스럽게 확인하는 가운데 모든 공로를 주님께 돌릴 수 있는 그런 구조 속에, 영역 속에 포함되는 것입니다.


여기에 부하려하는 자는 시험과 올무에 빠지게 되나니.

10절에 보면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라

이 소리를 듣는 소리가 즐겁습니까? 즐거워야 되요. 즐거워라 요구하는 것도 행함입니다마는

이것이 즐겁고 기뻐요.


주여 돈을 사랑하는 것이 일만 악의 뿌리라는 것을 내가 평생 동안 느낍니다. 이렇게 알게 해 주시는 감사합니다. 이렇게 살면 되잖아요. 편하게. 주님 요번에, 조금 있다가 어느 수익되고 난 뒤에 지키겠습니다. 이렇게 미루지 말고 도망치지 말고 즐겁게 살아야 받아야 되요 즐겁게.


그래서 누가 불의한 돈을 주게 되면 이거 받고 당신 눈 감아 주소 들어오면, 그 사람에게 이렇게 하세요.

아저씨 디모데 전서6장10절에 보면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립니다.

그 돈 사랑하는 사람이 저에요. 주세요.나 괜히 안 받는다고 해서 그냥가면 한 2년 동안 잠 못 잘 것같에.

그러면 그 쪽에서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라 했는데 왜 줍니까 가져 가버리면 아하 그것도 주의 간섭이구나 감사하고, 주면 눈치 봐 가지고 검찰에서 조사 들어오면 기한 전에 돌려주면 되고 외상이었다. 사람 사는 것이 그래요.


그래서 우리 행함을 믿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행함을 주장하는 사람은 이렇게 주장합니다.

하나의 에피소드를 구상하면 어떤 사람이 이것 받고 눈감아 주소라고 하면 나는 그리스도인입니다. 나는 십자가 마을에 속한 사람입니다. 절대로 안 됩니다. 당신은 디모데전서 6장10절도 모릅니까? 가져가소, 이렇게 해 놓고 동네방네 자랑합니다. 큰 돈을 거부했다고.

그 사람은 지금 누구를 믿는 것이에요. 십자가를 안 믿어요. 자기가 참하게 행동했던 자기 행동을 믿으면서 붙는 것이 있어요. 성령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거부했다고.


성령의 능력은 죄에 대해 책망하는 것이 성령의 능력이에요. 그것도 자만이야. 돌아서면 자만이야라고 .

우리의 행함을 자랑할 때가 씨를 말렸어요. 완전히 말렸어요. 왜냐하면 그 다 이루었다 함이 우리 속에 있어야 하기 때문에. 그것만이 우리가 빠져 나올 수 없는 역사적 환경 속에서 거뜬하게 천국으로 우리를 인도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디모데전서6장15,16절입니다.

“ 기약이 이르면 하나님이 그의 나타나심을 보이시리니 하나님은 복되시고 유일하신 주권자이시며 만왕의 왕이시며 만주의 주시요 오직 그에게만 죽지 아니함이 있고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시고 어떤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 없는 이시니 그에게 존귀와 영원한 권능을 돌릴지어다 아멘 “


이 말씀은 눈초리와 관심사가 마치 이사야가 성전에서 하나님을 본 것과 같아요. 이것이 무엇인고 하면 내가 이 땅에서 어떤 행동하느냐에 대해서 그것은 전혀 그 빛 앞에서 그것조차 없어지고, 다만 그 빛 되신 분이 우리에게 늘 잔소리하시는 그 말씀은 이미 그 말씀이 우리 속에 이런 말씀이 너를 키워 나갈 것이다.

이런 말씀,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라는 말씀을 통해 너를 계속해서 만왕의 왕이신 주를 바라보게 하는 요인으로 작용하게 할 것이다고 해서 이것도 달콤한 꿀처럼 반갑게 그냥 받아들이시면 됩니다.

받아들이면 속에 들어오는 것이 아니고 이미 우리 속에 있는 것이, 이미 성경책이 우리 속에 있어요. 성령이 오실 때 이미 이 모든 말씀과 더불어 성도 속에 박아 놓으신 것이에요.


이런 사태에 이런 말씀이 생각나거든 디모데전서 6장에 있는 말씀인줄 알아라고 우리에게 내 비추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으로 해석하라는 말은 성령이 있는 사람에게만 해당되지 성령 없는 사람에게 성령으로 해석하라는 말은 성립이 안 됩니다.


이번강의에서 여러 가지 중요한 것을 많이 했습니다.

많이 했는데 특히 여러분들이 꼭 기억했으면 하는 것은 성경말씀을 항상 십자가에서 역사적 해석을 이야기하시고 그 다음에 맞은편에 보이지 않는 묵시적 해석을 같이 이야기를 해 주어야 이 말씀이 나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존재 자체가 묵시적 성령을 받았기에 두 가지 모두를 볼 수 있는 그러한 능력이 우리 속에서 나와요. 그렇다면 역사적이라는 것은 우리의 행함이죠. 무엇을 행해도 십자가에서 스톱이 된다는 것을,

건너갈 수 없는 것을 성령이 와서 건너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행함의 끝은 십자가요 그리고 구원의 시작은 십자가에요.


끝과 시작 중간에 십자가가 있어서 성령께서 십자가로 해서 어떤 일이 있더라도 피로서 다 이루었다는 것을 계속해서 우리에게 알려주는 식으로 주님께 영광만 돌리게 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 6장19절에 “이것이 장래에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아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이니라 ” 이 깥쪽에 참 생명이 있지 이 세상에 생명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조금 전에 본 디모데 후서 4장9절에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 그레스게는 갈라디아로, 디도는 달마디아로 갔고”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재미있는 이야기 아닙니까? 세상을 사랑하는데 사도바울을 왜 버립니까?

사도바울 입에서 나오는 것은 어디에 효과가 없었다. 이 세상 자기가 원하고 있는 , 이 세상에서 출세, 성공하는데는 사도바울의 말이 전혀 도움이 된다 안 된다? 전혀 도움이 안 된다는 사실을 데마는, 똑똑한 데마는 눈치 챈 것입니다. 아 세상 출세를 위해서는 사도바울과 함께 해야 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사도바울 저 놈은 세상에 기대하는 것을 충족시켜주는 그만한 위인이 못 된다는 것을 아주 똑똑하게 감 잡은 것입니다. 사도바울이야기는 하나님께 사로잡혀 죽어도 좋다는 말이 아닙니까 그리고 우리가 있는 것은 말씀 때문에 있는 것이지. 나를 위해 말씀이 있는 것이 아니고 말씀을 위해서 우리가 있다고 하니까 말씀이 달지도 않고 말씀이 고맙지도 않은 사람에게는 사도바울의 말에 동의할 하등의 이유가 없는 것이에요.


그러면 이 사람은 무얼 가져야 됩니까? 나만의 것, 내가 성공한 사람이라는 것 내가 존재 가치가 있다는 것을 보장해 줄 수 있는 나만의 것을 세상에서 찾을 수밖에 없지요. 그러면 사도바울과 동행하면 안 됩니다 이 말입니다.


디모데후서1장에 들어가 봅시다.

1장9절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소명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의 뜻과 영원 전부터(창세전이지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 ”


창세전부터 뭐가 있었다. 예수 안에 있었다는 말입니다. 창세전에 예수 안이 성령을 통해서 우리로 그 예수 안에 집어넣어서 창세전에 마련된 모든 것에 우리가 참여하도록 성령께서 그렇게 조치하셨습니다.

귀신 씨나락(볍씨) 까먹는 소리죠. 한마디로 말해서.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 이것은 창세후에 산이 있고 창세후에 물이 있으니까 창세후에 이 세상에 있는 것부터 거기서부터 해야지 그 밖에 나가지 말자 이 말이 불교 쪽에서 이야기하는 것이에요. 세상 사람이 다 하는 이야기에요.


그런데 디모데후서1장9절을 보면 창세후를 넘어서서 창세전에 있었던 예수 안이 그대로 이동해 와서 지금 성령을 통해서 너희 안에, 창세전에 그 상황에 너희를 집어넣었다 이렇게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무슨 행함으로 이것을 할 수 있겠어요?

그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니라. 은혜로 해서 나타나는 거죠.

그래서 12절을 보면

“이를 인하여 내가 이 고난 받기를 부끄러워하지 아니함은 ”

고난이 왜 부끄럽지요. 고난이 부끄러운 것은 이 세대에서 실패자나 수치스러운 자로 분류됩니다. 이 땅에서 분명하게 내세울 것이 없는 사람은 너는 수치스러운 저주받은 모양새로 사람에게 평가를 받아요.


그런데 그 수치 중에 가장 수치가 무엇인고 하면 십자가 죽으심입니다.

주님께서는 의도적으로 세상에서 가장 수치스러운 그것을 가지고.

빌립보서에 보면 제일 낮은 자리, 제일 낮은 자리, 높은 곳에 계신 분이 제일 낮은 자리까지 일부러 오셔가지고 사람의 종이 되어. 자기를 치는 사람까지의 종이 되어서 그들이 하라는 대로 다 해버려요.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 빌2장5-11




고린도후서13장4절에 보면 주님께서 연약하사 십자가에 못 박아 죽으셨다고 하십니다.

“ 그리스도께서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나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아 계시니 우리도 그 안에서 약하나 너희에게 대하여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와 함께 살리라 어떤 사본에, 그와 함께 약하나”

강자가 아니고 권력자가 아니고 연약한 ,

연약의 종결자. 터미네티터.


연약 중에서 그렇게 연약할 수 없는, 없는 것을 만든 능력자가 가장 가난하게 되심은 우리로 하여금 그 가난하게 되심을 그것마저 믿을 수 있는 믿음을 은혜로 주시기 위해서 가장 낮은 자로 오신 것이에요.

무슨 말인고 하면 세상 사람들은 누구나 강한 것을 원하고 돈 많은 것을 원하는데 , 만약에 가난한 것, 처참한 것을 취한다면 그것은 자기 능력이 아니고 다른 능력에서 온 거에요.

그 다른 능력과 매치되기 위해서 주님께서는 가장 낮으신 분으로 와 가지고 그 낮으신 분이 도리어 우리를 섬기고 구원한다는 사실을 알도록 성령께서 다리를 놓고 주선을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못 박히신 예수님, 죽임을 당하신 예수님, 승리의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세상 사람들이 원하는 승리의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죽임을 당하신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성춘향이의 위대함은 바로 성춘향 엄마, 장모와 성춘향의 차이점이 무엇입니까?

성춘향의 엄마, 기생 월매가 보는 거지꼴 자기 사위보고 얼마나 구박을 주었습니다.

감옥 가서 면회하면서 구박을 많이 했거든요. 이도령이가 말씀이이에요.

월매는 자기 것만 생각해요.왜 내가 원하는 사윗감이 못되느냐 얼마나 구박했습니까?


그런데 사랑의 위대성은 그것을 뚫잖아요.

당신의 어떤 모습이라도 나는 당신을 영원히 사랑하겠습니다.

그 사랑이 가난보다 더 강한 사랑이죠. 우리가 가난한 가정이라 할지라도 말씀이 더 중요합니다.

여기서 성춘향 이야기가 끝났다면 성춘향이 고전에 안 들어가고 흐지부지한 전설에 고향에 들어갈 것입니다.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드디어 둘 다 거짓꼴이 되어 성춘향은 죽었고 이 도령은 낙제해서 거지처럼 돌아다닌다라고 끝나면 사람들이 안 볼거에요. 그런데 구회말 역전 투아웃에 투 쓰리에 역전홈런 치는 거예요

나중에 잘 되니까 아하 그 마지막 하이라이트를 보고 좋아하는 거예요. 사람들의 생각이 얼마나 음흉합니까?


십자가 다 통과하지도 둘러가면서 부활에 들어갔다. 이것은 자기의 종교적 욕심에 불과하지 전혀 이런 것이 아닙니다. 무슨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갑니까? 안 들어가고 비켜가야지 . 아 승리했네 이렇게 해주어야지.

이런 반칙이 어디 있습니까? 이것은 표 안내고 극장 들어가는 것과 똑같아요.

부활을 믿는다고 구원을 시키는 것이 아니고 십자가 믿느냐 죽으심을 믿느냐 의미를 믿느냐가 표가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피가.

그것은 결국은 말씀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말씀이 나를 얼마나 위대하게 만들 것이냐 거기에 탐을 내고 거기에 올인을 했기 때문에 성경해석을 전부다 교회는 전부다 그런 식으로 왜곡해서 한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끝까지 암행어사가 되지 못하고 끝까지 거짓꼴로 살았어요.


디모데후서 2장봅시다.

4절에 보면 “병사로 복무하는 자는 자기 생활에 얽매이는 자가 하나도 없나니 이는 병사로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하려 함이라” 되어 있는데요. 이것은 자기 자신보다 말씀의 역사 활동이 더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8절에 보면

“ 내가 전한 복음대로 다윗의 씨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라 ”

예수님의 죽음을 무엇과 연관시키는고 하면 다윗의 씨와 연관시킵니다.

여러분 잘 아시겠지만 막상 정리하면 정리가 안 되는 것이 다윗의 씨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세상에 책도 안 나와 있고 아는 사람이 없어요. 다윗의 씨라는 것을 간편하게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다윗의 씨라는 것은 이것은 과거에서 내려오는 씨가 아니고 미래에서 먼저 주어진 씨라는 것이 다윗의 씨라는 특징이 되어요. 시간세계를 무시해서 태어난 분이 다윗의 씨가 됩니다.


대대로 부모가 자식을 낳고 부모가 자식을 낳는 것이 과거에서 흘러 지금에 이르는 역사적인 그러한 사슬이라면, 그 사슬 역으로서 부정하면서 미래에서 거꾸로 흘러 들어와서 태어난 씨가 이 다윗의 씨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미래의 씨와 다윗의 씨 사이에 어떤 연결점이 있느냐?

연결점이 없어요. 연결점이 없는 이유가 실제로 육적인 다윗의 자손 솔로몬에서 미래로 가는 씨에서는 끊어진 다리에요. 중국의 고속철도 같아요.


가보았자 끊어지게 되어 있어요. 끊어진 다리. 끊어져 버려요. 마리아에게서 끊어져 버려요.

그러니 다윗의 씨에 대해서 두 가지 견해가 있을 수밖에 없어요.

하나는 다윗의 씨니까 다윗의 자손을 통해서 메시아가 온다는 생각이 있을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이것이 바로 끊어진 사고방식, 이런 역사적 흐름, 역사성으로서는 절대로 너희들이 구원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이렇게 해서는 아니 되느니라, 이런 역사성을 이야기해서는 구원하고 상관없느니라. 이것이 죄니라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다윗의 씨가 예수님까지 이어지는 것입니다.


망하고 망하고 결국은 끊어져 버립니다. 산길 등산할 때 실컷 갔는데 절벽이 있습니다. 이런 경험 가끔 하지요. 차 몰고 갔는데 구도로가 되어서 낭떠러지에요. 그러면 최측근에게 잔소리 듣지요.

다시 돌아가야지요. 당신 운전 할때 알아보았어. 지도보고 가라니까, 그렇게 안다고 해놓고 알기는 개뿔 알아. 운전할 때 가만있어. 운전 더 못한다. 잔소리 하지 않을 때 알아보았어. 잔소리 해야지.


끊어져 버렸어요. 결국은 인간에서 나오는 메시아는 끊어진, 악마가 기다리고 있는 메시아입니다.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가 다윗의 자손이라는 것을 증명하라. 증명할 길이 없습니다.

증명할 길이 없으면 사람들이 증명해야 하는데 그러면 무엇을 보고 믿으라고 하는가?

믿지 마세요. 그러면 어떻게 하느냐? 성령이 오시게 되면 믿어집니다. 왜.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예수그리스도가 다윗의 씨입니다.


이것이 증명이라는 것입니다. 이게 문제입니다. 증명이 안 돼. 그러니 신학자들이 자기의 신학자체가 끊어질 판이야. 증명을 해 주어야 하는데 증명이 안 됩니다. 그래서 그것은 역사적으로 증명이 안 된다고 하니까 계룡산에서 내려 왔다고 해요. 그러면 계룡산에서 내려오면 다 도사인가?

다윗의 씨는 왜 그런가 하면 소급해서 설명해요.

왜 예수님이 다윗의 씨인가 하는 것을 소급해서 설명하면 솔로몬은 다윗의 씨가 이다 아니다? 아니다. 이유는 한 가지. 바로 밧세바가 육으로 낳은 자식이기 때문에 솔로몬은 메시아가 되지 못합니다. 다윗의 씨가 되지 못합니다. 솔로몬은 다윗의 씨가 아니에요. 이것을 알게 된 사람들이 선지자에요.

선지자들은 이런 혈통, 역사 말고 정말 오실 분을 기다리는 것이에요. 장차오실 분을.

다윗의 후손으로 오실 분을. 에스겔 37장에 다윗의 씨가 누군가 하면 바로 여호와에요. 여호와 하나님께서 직접 다윗의 씨를 통해서 오신다는 것입니다.


에스겔37장24-28 “내 종 다윗이 그들의 왕이 되리니 그들 모두에게 한 목자가 있을 것이라 그들이 내 규례를 준수하고 내 율례를 지켜 행하며 내가 내 종 야곱에게 준 땅 곧 그의 조상들이 거주하던 땅에 그들이 거주하되 그들과 그들의 자자손손이 영원히 거기에 거주할 것이요 내 종 다윗이 영원히 그들의 왕이 되리라 내가 그들과 화평의 언약을 세워서 영원한 언약이 되게 하고 또 그들을 견고하고 번성하게 하며 내 성소를 그 가운데에 세워서 영원히 이르게 하리니 내 처소가 그들 가운데에 있을 것이며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되리라 내 성소가 영원토록 그들 가운데에 있으리니 내가 이스라엘을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인 줄을 열국이 알리라 하셨다 하라”


그렇다면 그때부터 어떤 현상이 벌어지는가 하면 사람들이 그동안 역사적으로 해석하고 이해했던 이 모든 것은 완전히 묵사발 되어 버리고 그냥 주면 구원이 되는 , 그냥 그분의 의가 우리 속에 마음속에 박혀버리는 그것으로 구원을 다 이루었다가 우리 안에서 다 이루었다가 생성되는 방식으로 구원하는 것입니다.

제가 오버하는 것이 아니에요.


변화산에서 엘리아도 그렇고 모세도 그렇습니다.

엘리아 모세 수고한 것 다 압니다. 아브라함도 수고했지만, 하지만 엘리아 모세가 자기 수고한 것 자랑했습니까? 변화산에서. 엘리아가 모세 형님 저 몰라요, 엘리아에요. 모세 형님 불 수레 타보았어요. 뜨거워서 혼났어요. 신났지만 얼마나 뜨거웠는지 그것 자랑했습니다. 그러면 모세가 네가 지팡이로 홍해 물 갈라 보았어? 갈라 보았어. 아이 형님 물 부어가지고 불내려 봤습니까? 지금 그런 간증하고 있었습니까?


두 사람 다 예수님만 바라보아요. 예수님 피 언제 흘립니까? 피 언제 흘립니까?

피 흘려야 우리가 사는데, 불수레를 타든 홍해를 가르든 피를 흘려야 우리가 사는데 불수레를 타든 홍해를 가르든 예수님께서 피를 흘려주셔야 구원을 받아요.

왜. 그것은 두 선지자의 삶은 장차 피 흘림을 보여 주는 시범 조교, 역할에 불과하지 자기 구원에 전혀 도움이 안 되어요.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친다고 구원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면서 이삭 바치는 행위가 전혀 구원이 되지 못하고 이처럼 장차 어떤 분이 오셔서 제물이 되어야 되요. 제물이 되어야 될 그분이 오셔야 되요.

내가 제물을 바친다고 구원되는 것이 아니에요.

내 말고 예수님께서 그 제물의 자리에 가서야 그 효과를 보는 것입니다.


어떤 구원도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예정되어 있었지 우리의 몸이나 우리의 전체나 우리의 행위나 우리의 헌금이 끼어들면 안 돼요.

성령의 은혜로 뭐가 어떻고 어떻고 이게 끼어들면 안돼요.

성령을 받게 되면 주의 십자가만 구원되고 이 헌금하는 행위가 절대 영광이 되지 못하고 십자가만 영광 된다는 것을 고백하면서 헌금하는 것이에요.


다른 사람들은 아이고 은혜 받았다고 헌금한다고 하는데 그것은 오해입니다. 잘못 생각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일러주고 가르쳐야지. 그것이 은혜가 아니고 진짜 성령 받으면

이 헌금하는 행위도 십자가 앞에서 구원에 보탬이 안 되는 죄일 뿐이다는 것을 깨닫게 합니다. 사람이 성령이 없으면 자기 행위를 주어 담아야 되요. 나 여기 있고 말씀 저기 있고 내가 은혜로 저 말씀을 지키면

꽃다발처럼 모이면 그것이 나로 하여금 구원 되었다는 것을 확인해 줄 수 있는 증거물이 될 수 있는 아이디어. 절대 무엇을 포기 못합니까? 자기 자신을 죽을 때까지 결코 포기 못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려되는 것은 그러면 성령 받은 사람도 마찬가지입니까?

마찬가지지요. 감사한 것은 그렇게 생각하더라도 뭔가 돌발적으로 또 다시 되풀이 되는 것이 있어요.

그것이 무엇입니까? 십자가 앞에서 그것도 죄입니다. 눈시울이 뜨겁도록 우는 것도 십자가 앞에서 가증스러운 것이다. 어디서 울긴 울어. 신랑이 함께 있을 때 울라하더냐? 웃으라 했지. 그때 울고 난 뒤에 한번 웃는 것이에요. 하하하 울은 것 미안. 이렇게 기쁜 것을 감사할 줄 모르고 또 자기에게 너무 동정하다 보니 내가 의인인데 왜 그런 짓을 했을까? 주께서, 네가 언제부터 의인인데? 네가 무엇 때문에 의인이 되었는데 네가 그렇게 했다고 새삼스럽게 그렇게 했다가 죄인이냐?원래 네가 태어 날 때부터 죄인이었어.

십자가 앞에서 몰랐어? 알았는데 까먹었어요. 그게 바로 십자가 증거되는 그런 삶이 성도의 삶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육적으로 불가능 한 것이에요. 계속해서 그런 불가능함이 십자가의 은혜를 감사하며 불가능함이 계속해서 나오는 것이에요.


그 다음에 3장16절

성경에서3장16절이 중요한 구절이 많아요. 우연의 일치입니까?

요한복음3장16절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고 독생자를 주셨으니 ”할 때 여기에서 세상은 모든 세상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런데 왜 그것을 세상이라 했는가? 앞에 범위를 넓힐 때는 세상이고 그것을 넓히면서 점차점차 예수님께서 행해 나가시면 세상이라고 해놓고 세상 다를 사랑한 것이 아니고 그중에 있는 하나님께서 예수님께 보내준 자만 사랑한다고 요한복음 17장에서 구체적으로 말씀하시는 거예요.“세상 중에서 내게 주신 사람들에게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었나이다 그들은 아버지의 내게 주셨으며 그들은 아버지의 말씀을 지키었나이다 ”요17:6


처음에서 지도를 넓게 보고 가며 갈수로 초점을 향하여 좁게 가는 거예요.

그런데 요한복음3장16절 이것만 들고 가서 하나님께서 세상을 사랑하잖아 이렇게 하는 것을 잘못된 거예요.

이런 것이 또 있어요. 무엇이든지 네가 뜻대로 구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다 이루시리라.

요한1서3장16절에 가면 주의 뜻대로 하는 것만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의 뜻이 무엇인지 우린 모르잖아요. 합쳐버리면 주님께서 주님마음대로 하신다는 것이에요. 마음대로 하시고 마음대로 주시고. 주시는 것이 주의 뜻대로 주신, 협력하여 선을 이루는 환경이 되는 것이에요.

우리의 지금 환경이 마음에 드는 사람이 한사람도 없어요. 전부다 자기의 과거의 기억에 의해서 , 꿈꾸든 것에 비해 아쉽다고 생각하는데 지난 시간에도 이야기 했지만 동화책을 너무 많이 봤어요. 드라마를 너무 많이 보았어요. 재벌 3세 나올 때까지 결혼 안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되는 이야기에요. 우연히 제주도 가고 오키나와 가서 만나고 그런 일은 없어요.


이름은 삼순이지 삼순이가 한둘입니까 이 세상에 못생긴 삼순이가 더 많습니다.

성경은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사람들은 이 구절을 해석하고 주석할 때 중요한 것을 빠뜨려요 예수 안에 있는, 스테이크 시키면 앞서 스프부터 먼저주고 주고주고 하는데 그것이 예수 안에서 오기 그리스도 십자가를 증거하기 위해서, 그 의를 주시기 위해서 쟁반에 담아오는데 그 쟁반이 뭐라고요. 성령이라는 것이에요.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천국 갈수 있는 사람은 어떤 기준에 의해서, 기존 기준과 완전히 다른 새로운 기준에 의해서 가르치는 것이 성경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쓰였고 성령으로 해석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감동으로 쓰인 것입니다.

그것이 십자가 안에 예수 안에 라는 것을 알면 이 해석은 어렵지 않습니다.


4장을 봅시다.

“하나님 앞과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가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 ” 딤후4:1

여기에서 산자와 죽은 자를 심판한다는 말은 우리의 상식과 어긋나지요. 우리의 상식은 죽은 뒤에 심판하잖아요. 그런데 산자와 죽은 자, 즉 살아 있을 때부터 이미 심판이 실시가 된 것입니다.

그 심판이 뮙니까? 갈라지게 하는 것입니다. 좋은 고기 나쁜 고기, 가라지와 알곡, 오른편에 외편에 있는 것.

오른편 외편 이것은 마지막에 천당 갈래 지옥갈래 결정하는 것이 아니에요.


어린 아이 속에 같이 있는 예수그리스도를 네가 어떻게 대우 했느냐로 이미 심판이 그렇게 갈라지는 것이에요. 그때 천국 갈 사람들이 네 안에 예수 있구나 그래서 목마를 때 물주고 그렇게 하지 않았어요.

그냥 그냥 예수님을 믿고 했는데 그것이 누구에게 한 것이다? 주님께 한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사도되기 전에 누구를 핍박했습니까?

그리스도인을 핍박했는데 막상 예수님 만나니까 예수님께서 뭐라고 하셨습니까?

사울아 사울아 네가 누굴 핍박하느냐? 네가 왜 내 사람 핍박하느냐 하지 않으시고 왜 나를 핍박하느냐 이게 무슨 말씀입니까? 그리스도인이 하는 모든 행적들이 누가 한 것이다. 예수님께서 그 사람을 가지고 움직이신 것인데, 본인은 사람만 보이고 그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을 모르니 사울은 예수님이 이미 과거에 죽은 사람이라 오해했지요. 지금 살아계신데. 그래서 역사적 해석이라는 것이 문제가 됩니다.


3,4절에 보면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따를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따르리라 ”

사욕이라는 것은 내 것이 있다. 내 것이 얼마나 잘 될 것이냐를 요구하면서 말씀을 듣게 되는 그것이 사욕이 됩니다. 그리스도께 관심 없고 자기에게 관심있는 것.



6절에 보면 유명한 말씀, 부흥사들이 자주 써먹지요. 목요일 날 마지막 테마에 이것이 들어가요. 필수지요. “내가 관제와 같이 벌써 내가 부음이 되고 나의 떠날 기약이 가까웠도다 ”

이분이 어디로 갑니까?

하늘나라 가지요.


7,8절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


받아 봤자 도로 돌려 드리지요. 요한계시록에 나오지요. 받은 면류관 어떻게 합니까?

써 보아야 내게 합당치 않은 것을 알아요.

“이십 사 장로들이 보좌에 앉으신 이 앞에 엎드려 세세토록 사시는 이에게 경배하고 자기의 면류관을 보좌 앞에 던지며 가로되”계4:10



목사 되고 싶은 사람이 여럿 있는 모양인데요.

목사 되어 보아야 아 이게 내어 놓아야 될 것이구나.

목사 항목 몇 가지입니까? 14가지. 어느 누구도 지킬 수 없다.

그래서 목사 벗어놓고 해야지요.


14절입니다.

“구리 장색 알렉산더가 내게 해를 많이 보였으매 주께서 그 행한 대로 저에게 갚으시리니 ”

이대목하고 마치겠습니다.

사도바울이 앞치마로 죽은 자 살리고 손수건으로 죽은 자 살리고 죽은 유두고를 살렸습니다.

그만한 파워와 능력이 있으면 구리장색 알렉산더가 해를 입힐 때 한 펀치에 애라 이놈아 내가 누군데 죽은 자도 살렸는데 네 펀치 어떤지 맛한볼레 한방 쳤으면 지옥 보낼 수 있습니다.


구리 장색 알렉산더가 그렇게 해를 입히는데 왜 하나님께서 한 펀치에 그놈 안치십니까?

이게 어디 복음을 방해해 왜 안치십니까?

그런 것이 무엇인고 하면 사도바울이 계시를 전하지만 사도바울 중심이 아니다는 말입니다.

살릴 사람은 살리되 남을 살렸다고 해서 네가 구원의, 복음의 내용으로, 믿음의 내용으로 네 행동이 들어간다 안 들어간다. 안 들어가는 거예요. 수천 명 전도했다는 것이 계시 속에 들어가면 되요 안 돼요 안 되는 거예요. 계시는 영원토록 예수님의 피지 사도바울의 피도 아니고 아볼로의 피도 아니고 게바의 피도 아니고 우리들의 피도 아닙니다. 왜 우리가 죄인이기 때문에.


이 죄인 때문에 말썽이 많아요.

주의 종이 되었으면 의를 행하는데 의의 종인데 왜 자꾸 죄인이라 하느냐 시비 걸고 나오는데 그 의라는 것은 세상에서 우리가 알고 있던 죄의 반대말이 의가 아니고 우리의 전부를 십자가 앞에서 죄인 되게 하는 능력 자체를 의라고 하는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다시 우리가 수련회 마치고 말씀 지켜서 구원받고자 그런 시도 한다면 우리도 역시 행함주의자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본성상 늘 그러한 행함 주의로 자기 잘남과 자기 우수함을 주님 앞에 과시하고 싶은 욕망을 평생토록 지울 수가 없습니다. 그때마다 십자가의 피를 다시 보여서 보고 믿는 것이 아니고 보지 않고 믿도록 성령께서 말씀자체를 십자가를 통해 심어 놓았다는 사실을 다 시 한번 감사할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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