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모데.디도.빌레몬

2011여름 8강

아빠와 함께 2021. 5. 24. 18:27

2011 여름수련회 8강

 

디모데전서 5장을 보겠습니다.

1절 이하에 “늙은이를 꾸짖지 말고 권하되 아비에게 하듯 하며 젊은이를 형제에게 하듯 하고 늙은 여자를 어미에게 하듯 하며 젊은 여자를 일절 깨끗함으로 자매에게 하듯 하라. 참 과부인 과부를 경대하라.”

 

이렇게 하면 뭘 얻는다는 말입니까? ‘교회가 은혜롭다. 교회가 부흥된다.’ 이런 것을 위함입니까?

 

종말에 인간들이 할 수 있는 오류, 소위 지도자가 범할 수 있는 오류에 대한 지적입니다. 지도자로써 말씀을 가르친다고 늙은 사람을 꾸짖고, 젊은 사람을 함부로 대하고 이런 것이 있을 수 있단 말이지요. 이것은 디모데 개인을 포함해서 이 계시를 받는 모든 사람들에게 다 적용되는 거예요.

 

그래서 이것은 이상적인 교회나 이상적인 공동체를 이루겠다는 그런 의미는 아니고, 주님께서 살아계실 때 어떤 자세와 마음가짐으로 사셨는가를 교회에서 나타내고 보여주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해서 종말을 모르는 일반 사회에서 이러한 가족윤리나 사회윤리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 그들과 어떤 차이점이 있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지요.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어떻게 선을 베풀 수 있는가? 이 문제에 대해서 동양철학에서는 개인문제로 봐요. ‘나쁜 사람은 악을 행하고 착한 사람은 선을 행한다.’라고 보통 생각하는데, 여기서 좀 더 깊이 들어가서 ‘나쁜 사람과 선한 사람이 있는 것이 아니고, 한 사람의 마음속에 선한 마음도 있고 악한 마음도 있다.’고 합니다. 세석이라는 사람이 이런 주장을 했어요.

 

여기에 대해 맹자는 ‘선한 마음, 악한 마음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물고를 선한 방향으로 틀면 선하게 되고, 나쁜 방향으로 틀면 악한 결과를 낳는다.’는 거예요. ‘타인에게 어떻게 선을 베푸느냐 하는 문제에서 개인의 성향과 자질을 어떻게 갖추면 선이 나오겠는가? 사회적으로 선한 사회가 되는가?’ 그것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선한 쪽으로 물고를 틀려면 결국은 개인 문제가 아니고 환경문제가 됩니다. 환경에 따라 사람들은 얼마든지 선할 수도 있고, 나쁜 환경에 빠지면 나쁜 짓을 할 수밖에 없다는 거예요. 그래서 이 교육을 맹자의 모친이 실천했지요. 좋은 학군을 위해 강남으로 이사하는 것은 옛날 맹자 엄마가 한 일입니다. 시장 근처에서, 무덤 근처에서, 서당 근처로.

 

아이들은 자기가 본대로 행동한다는 거지요. 그래서 선한 것을 보여주면 선하게 되고, 악한 것을 보여주면 악하게 되는 것이지 인간 자체에서 선과 악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여기에 반대해서 순자라는 사람은 이런 주장을 합니다. 사람은 날 때부터 악해서(이것을 ‘성악설’이라 함. 맹자는 ‘성선설’을 주장) 채찍질 하고, 가르치면 된다는 것입니다. 많이 채찍질하면 좋은 사람이 되고, 방치하면 악한 사람이 된다는 겁니다.

 

이런 철학자들이 이웃에게 선을 베풀려는 이유가 뭡니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예수님을 사랑해서? 아니에요. 그러면 뭐냐? 현재 자기가 소속되어 있는 공동체를 평화롭고 살기 좋은 환경으로 만들어서 자신이 행복하게 살려는 이기주의적 발상에서 나온 겁니다.

 

불교 쪽에서는 인간의 마음이 행동을 결정한다고 봅니다. 이 말이 맞습니까? 아니에요. 인간의 마음은 자기 소유가 아니에요. 그런데 불교에서는 ‘내 마음은 내가 마음먹기에 따라 다르다.’라고 합니다. 그것 때문에 나중에 동양철학에서 굉장히 큰 논쟁이 벌어집니다. 사람에게서 나오는 충동이 우선인지, 아니면 이성이 우선인지? 보통의 철학자들은 ‘정신 바짝 차리면 바르게 할 수 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어느 정도 해야 정신 바짝 차리는 것입니까? 어떤 사람이 가스관 타고 올라갈 때 정신 바짝 차리면 도둑질 할 수 있습니다. 컨닝할 때에 정신 바짝 차리면 감독관 눈을 피해서 컨닝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두 가지 학설이 있어요. ‘정신 차리면 된다.’는 것이 맹자 쪽입니다. 맹자는 인간이 선하기 때문에 열심히 하면 착한 일도 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반대편에 선 사람은, ‘인간에게는 칠정(희, 노, 애, 구, 애, 오, 욕)이 있고, 욕망이 있는데 그 욕망은 정신 바짝 차려서 다스려야 된다.’ 정신을 안 차려서 나온 것이 충동과 감정 이런 것인데, 이것을 나쁜 것으로 봅니다.

 

충동이 다 나쁜 것입니까? 선심을 쓸 때 이 마음이 나쁘다고 볼 수 있습니까? 뭔가 구제하고 싶은데 이것저것 따질 때 문제가 더 크잖아요.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주님 주신 마음으로 그냥 내면 되는데, 부부가 서로 얼마를 낼 것인가로 고민하다가 결국은 둘 다 죽었어요.

 

그래서 불교에서는 어떻게 보는가 하면, 신수라는 사람은 ‘보리수같은 이 마음을 갈고 닦으면 그 갈고 닦는 행위만으로도 남에게 선한 향기를 낼 수 있다.’ 라고 합니다. 여기에 대해서 혜능이라는 사람은 ‘닦을 마음이 없는데 뭘 닦는단 말인가?’ 라고 했어요. 마음이 없어야 되는데 나에게 마음이 있다고 여기는 자체가 더러워진 것으로 보지요.

 

원효라는 사람은 ‘인간으로써 어떻게 하면 선을 행할 수 있을까?’ 이것을 고민했어요. 동양의 도 닦는 사람들이 인간적인 면에서 굉장히 순수해요. ‘내 일신이 어떻게 하면 편할까?’ 하는 것은 짐승같은 생각이라고 여겨요. 처음에는 짐승 같아도 도를 닦으면 ‘어떻게 하면 남을 위해 살까?’ 이렇게 되고, 이것이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윤리가 되는 겁니다.

 

바리새인들이 뭘 이야기했습니까? ‘네 원수를 사랑하라.’ 예수님도 이런 말씀을 하셨지만 바리새인도 이런 말을 했어요. 그래서 예수님은 “너희 의가 바리새인과 같지 아니하면 천국에 못 간다.”고 하셨지요. 이 말은 바리새인을 물 먹이는 말씀입니다. “기껏 생각한 것이 그 정도야?” 이런 말이지요. 바리새인의 행동에 대해 “수고했어!” 라고 하시고는, “너희들은 지옥 간다.” 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죽도록 일하고 지옥으로 간 사람의 대표로 바리새인을 거론하신 겁니다.

 

바리새인이 지옥 간다면 바리새인의 삶을 존경하면서 따라가기 위해 애쓰는 사람들은 줄줄이 다 지옥으로 가겠지요.

 

그러니까 성경 말씀에서 제가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받은 사랑만이 사랑을 알아보고 그것만이 주께서 원하는 성도의 삶입니다. 그 사랑 앞에서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죄밖에 나올 것이 없다고 고백하는 그 사랑이 진정한 교회로써 그리스도만 바라보게 합니다.

 

어쨌든 원효라는 사람은 그 당시에는 ‘어떻게 선을 베풀까?’ 고민하다가, 깨달음을 위해서 중국으로 유학을 떠납니다. 길을 가는 도중에 밤에 지치고 목이 말라서 길에서 바가지에 담긴 물을 마셨습니다. 예전에는 물맛이 그렇게 좋은 줄 몰랐습니다. 그런데 아침에 눈을 떠보니 해골바가지에 담긴 빗물을 지난밤에 마신 거예요.

 

낮이었다면 그 물을 마셨겠습니까? 못 마셨겠지요. 결국 나에게서 나오는 선입관이 세상을 잘 못 판단하게 만드는 원인이 되었다는 겁니다. 물 한 그릇 먹고 놀라운 것을 깨달았지요. 그래서 유학 가는 길을 중단하고 돌아왔습니다. 유학이 문제가 아니고 내 마음의 번뇌가 문제인 것을 깨달았기에.

 

번뇌가 있으면 고통이 온다고 불교에서 주장하잖아요. 그래서 어떻게 하면 고통을 제거할 수 있을까? 다른 사람을 도와준다는 것은 고통 중에 있는 자들에게 말 몇 마디 던지고 그들의 고통을 해소해 주는 거예요. 이것이 그들의 포교입니다.

 

마음의 번뇌가 외부에서 오는 것이 아니고 내 마음에 이미 번뇌가 있으니까 내 마음의 번뇌를 지우면 그것이 해탈이니 굳이 당나라까지 유학 갈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지요.

 

원효와 같이 당나라 유학을 떠난 사람이 있었어요. 의상이란 분인데 이분은 해골바가지로 물을 안 마셨기에 그냥 유학을 갔습니다. 이 사람은 유학을 가서 화엄경을 깨달았습니다. ‘내가 해탈하는 그것조차도 전체 중에 일부에 불과하다.’ 전체가 중요하지 개인이 중요하지 않다는 거지요.

 

원효와 의상 둘 중 어느 것이 더 바른 진리입니까? 소위 이러한 인간이 내놓을 수 있는 모든 해탈, 그들이 말하는 선이 무엇입니까? 내가 소속되어 있는 이 자연 질서를 안정되고 평온하게 만들 수 있도록 자체적으로 지혜를 끄집어내는 것이 바로 동양철학이죠. 그렇다면 이 동양철학을 오늘날 교회에서는 어떻게 써먹겠습니까? 교회를 폐쇄적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여러분들이 다니는 교회가 평화롭기를 원하고 부흥되기를 원하지요? 교회가 날 위해 무엇을 해줄까를 기대하지 말고, 내가 교회를 위해 뭘 할까를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라는 동양철학 사상이 그대로 디모데전,후서를 가지고 동원되지요.

 

구체적으로 어떻게 동원되는지 봅시다. “늙은이를 꾸짖지 말고” 이것이 아니고, “교회 다니는 늙은이를 꾸짖지 말고” 이렇게 되겠지요. 왜? 그래야 내가 다니는 교회는 평화로운 교회가 되니까. 설교 참 쉽지요? 그래서 디모데전,후서를 ‘목회 서신’이라고 이름을 붙였습니다.

 

‘목회 서신’은 없습니다. 전부 주님의 심판과 구원에 관한 이야기, 주 예수님이 행하신 이야기입니다. 주님께서 늙은이에게 어떻게 다가가겠어요? 그 사람의 나이를 보는 것이 아니고, 세상이 사람들을 대하는 그 구조에 물들지 않기를 바랍니다. 세상에서는 조직 구조지요. 조직이 우선이고 구성원들은 조직보다 뒤로 밀립니다.

 

늙은이든 젊은이든 간에 그들이 복음을 알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감사와 사랑이죠. 주님 뜻은 ‘늙은이들은 대접 받아라.’ 이것이 아니고, 진정한 늙은 분들은 사랑이 뭐고, 감사가 뭐며, 희생이 뭔지를 아는 거지요. 그렇다면 젊은 분들은 그분들의 그 사랑과 희생을 어디에 초점 맞춰야 됩니까? 현재 지금 내가 소속되어 있는 곳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고, 이런 구조가 예수 그리스도의 주신 사랑을 만끽할 수 있는 기회를 그들은 서로 갖게 된다는 말이지요. 이것을 하나님의 ‘은사’라고 하는 겁니다.

 

디모데후서에 1장 6절에 보면 “네 속에 있는 하나님의 은사를 다시 불일듯하게 하기 위하여” 라는 말씀이 나와요. 그러면 은사의 마지막은 뭐가 나옵니까? 고린도전서 13장에 나오지요. “믿음 소망 사랑 그 중에 제 일은 사랑이라.” 그러니까 이 말은 뭐든지 사랑에서 흘러나와서 사랑으로 다시 되돌아가야 된다는 말이지요.

 

그러면 ‘사랑’이 무엇인가? 사랑은 자기 자신을 비우는 거예요. 어떻게 보면 동양철학 같기도 하고, 불교 같기도 하지요. 그런데 이 사랑의 출처를 내가 방해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사랑은 온유하고, 사랑은 무례히 행치 아니하고,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고--’ 이 사랑 안에서 우리 모두가 하나 된다는 겁니다.

 

그 사랑이 경과하는 그 절차 모든 과정에서 사랑은 어떻게 흘러가는가? 이것을 좀 설명하겠습니다. 이것을 설명하면 우리는 비로소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에 나오는 예수님의 모든 행적에 대해서 그 비밀을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모든 행적을 보면 사랑이 흘러가는 골을 만들어요. 사랑 받을 자격이 없는 자에게 사랑을 주고, 사랑 받을 자격이 있다고 하는 사람들에게는 영구적으로 피해버림으로 주님의 사랑의 가치를 우리에게 부각시키는 겁니다.

 

예를 들면, 어떤 과부가 너무 억울한 일이 있어서 재판관을 찾아가서 간청합니다. 그런데 재판관은 귀찮아하면서 과부를 돌려보냅니다. 그런데 계속 찾아와서 간정하니까 재판관이 그 간청을 들어주지요. 그리고 하시는 말씀이 “마지막 때에 믿음을 보겠느냐(눅18:8)”는 말씀이 나옵니다.

 

여기서의 초점은 간청하는 과부가 아닙니다. 재판관에게 초점을 맞춰야 됩니다. ‘불의한 재판관도 간청하니까 들어주는데 이 마지막 때에 우리 주님이 우리의 간청을 어찌 들어주지 않겠는가?’ 이런 뜻입니다.

 

그러면 간청한다는 것은 뭡니까? 재판관이 불쌍한 과부를 챙기는 이유가 ‘네까짓 것 때문에 내가 더 이상 귀찮을 수 없다.’는 투지요. 그러면 주님 되시는 재판관이 불쌍한 우리를 도와준다는 말은, 높은 자리에 계신 주님이 낮아짐으로 같은 눈높이에서 그 간청을 들을 정도로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사랑한다는 그런 내용이에요. 모든 예수님 말씀이 다 그렇습니다. 열심히 기도하면 응답하신다는 내용이 아닙니다.

 

모든 것이 주님 사랑으로만 됩니다. 사랑이 없으면 저주밖에 주어질 것이 없습니다. “나에게는 아무것도 나올 것이 없습니다. 헌금을 하든 기도를 하든 내가 주님께 받칠 것은 없습니다. 죄짓는 이 몸 뿐입니다.”라는 모습일 때 그것이 사랑을 가장 잘 보여줄 수 있는, 주님 사랑과 매치가 되는 하나의 대상자가 됩니다.

 

그렇다고 해서 일부러 연기를 해서 초췌한 척하고 그럴 필요는 없습니다. 주님이 세리, 창기, 거지 나사로 등을 예로 들어서 현재 너희들이 평소에 추구하는 그 본질과 전혀 다른 쪽에 주님의 사랑이 임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겁니다.

 

또 다른 예를 들면, 제자들끼리 싸움이 벌어졌어요. 우리 중 누가 높은 자인가 하는 것 때문에. 그 때 주님이 어린 아이를 한 명 데려왔어요. 그러면 그 아이는 구원 받습니까? 그게 아니고, ‘누구든지 이 어린아이 같이 되지 아니하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하셨지요.

 

어린이는 스스로 자기의 것을 챙길 수 없는 자입니다. 자기 것이 없으니까 사랑을 잘 표현할 수 있는 대상으로 적당한 거예요. 제자라는 자리가 주님 따라다니면서 주님 사랑을 받고 그 사랑을 증거하는 것인데 이들은 서로 자기의 받은 사랑이 더 크다고 경쟁하고 있어요.

 

어린아이같이 되라는 말은 자기의 것이 아무것도 없어야 천국에 합당하다는 것이지요. 그러면 제자들은 천국 못 갔습니까? 아니지요. 십자가의 영이 임하면 어린아이가 못되는 나를 사랑으로 어린아이 되게 만드시는 그 솜씨를 사랑의 은사로 주십니다. 사랑의 은사를 받으려고 하지 마시고 주신 사랑이나 받으세요. 이 십자가의 사랑을 받은 자는 이미 자기 유익을 구치 아니하고 그런 겁니다.

 

다음에 6절을 봅시다.

“일락을 좋아하는 이는 살았으나 죽었느니라.” 쾌락을 좋아하는 사람은 살았으나 죽었다고 하지요. 그러면 이것을 1절과 결합시켜 봅시다. 일락을 좋아하는 늙은이는 죽었습니까, 살았습니까? 죽었지요. 그런데 ‘일락을 좋아하는 늙은이를 꾸짖지 말라.’ 이 말은 가만히 놔두란 말입니까?

 

이 성경 말씀을 질서 잡기 위한 법 조항으로 삼지 말고 주님의 취지는 항상 ‘디모데야, 제발 좀 마음을 낮춰라.’는 것인데, 마음을 낮추고 이야기하게 되면 그 사람에게 사랑을 맛볼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는 거예요. 물론 그 사랑을 받고 구원 받을지 여부는 장담할 수 없지만, 어쨌든 사랑으로 다가설 수 있는 하나의 기회가 되는 겁니다. 그리고 누구든지 성령의 은사를 받으면 마음을 낮출 수가 있습니다.

 

8절에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아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가 예수 믿으면 구원 받습니까? 자기 친족을 돌보지 아니하면 예수 믿어도 지옥 갑니까? 만약 디모데에게 이런 질문을 했다면, 디모데는 “사랑의 은사를 받았습니까?” 라고 되물을 거예요. 사랑의 은사를 받으면 지금은 안 돌봐도 다음에는 돌볼 수도 있어요.

 

돌본다는 것이 매월 생활비 얼마를 주는 것이 돌보는 겁니까? 아니면 월 몇 번 찾아가야 합니까? 지금 시골에 계신 부모님을 1년에 2회 찾아가는 사람들도 많아요.

 

만약 이 말씀을 교회 앞에 붙여놓으면 예수 백날 믿어도 소용없어요. 친족을 돌보지 않으면 지옥가요. 그러니까 이 성경 말씀을 사랑이라는 바탕으로 보아야 한다고 지금까지 계속 이야기하고 있는 겁니다. 성령의 은사가 여러분에게 오게 되면 그것을 우리가 마음대로 빼도 박도 못합니다.

 

나는 매주 부모님 찾아가고, 자주 용돈을 드린다면 그것이 가족을 돌보는 것입니까? 십자가는 어떤 행위로 규정된 것이 아니고 그 마음이 예수님 앞에서 우리는 어떤 완벽한 행동을 해도 그것이 완벽한 행동이 될 수 없습니다. 주님 앞에서 어떤 행동을 해도 그것이 아름다움이 될 수가 없어요. 우리의 행동은 그것이 어떤 것이 되었건 십자가 앞에서 죄가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깨닫고 마음을 낮춰야 합니다.

 

이런 마음 낮춤을 통해 가족을 돌볼 수밖에 없는 입장이 되면 사랑으로 돌볼 수밖에 없지요. 이것이 믿음의 모습입니다.

 

그 다음 14절을 봅시다.

“젊은이는 시집가서 아이를 낳고 집을 다스리고” 여기에서 젊은이는 젊은 과부를 말합니다.

“대적에게 훼방할 기회를 조금도 주지 말기를 원하노라.”

 

11절에 “젊은 과부는 거절하라. 이는 정욕으로 그리스도를 배반할 때에 시집가고자 함이니” 시집 갈래, 천국 갈래? 둘 중 하나를 택하라는 거예요. 시집가는 것이 지옥 가는 겁니까? 시집가면 믿음을 배반한 거예요?

 

여기서 말하는 것은, 종말의 삶에 있어서 은사가 없는 사람들은 교회 오더라도 노림수를 가지고 딴 데 정신 팔려서 오는 거예요. 이런 사람은 결국 자기의 본 자리 사단에게로 돌아가요. 그것이 젊은 여자의 경우는 이렇고, 늙은 사람은 이렇고 그것이 각각 다르지만, 교회를 그렇게 사람의 쾌락이나 욕망을 충족시켜주는 그런 장소로 생각한다면 다시 생각해 보라는 식으로 말씀하신 겁니다.

 

교회는 그리스도 안이에요. 이것은 함부로 들어올 수도 나갈 수도 없어요. 그런데 역사적 존재로서의 교회는 들어왔다 나갔다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진정한 교회는 역사적 존재와 묵시적 존재가 만나는 지점, 십자가의 사랑이 피어나는 곳이죠. 이것이 새언약입니다. 새언약은 우리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효과를 드러내게 하는데, 그것을 위해 우리는 죄인으로 드러날 수밖에 없도록 인도하십니다.

 

그렇다면 여기 이 말씀을 보고, “아, 우리가 얼마든지 이런 죄를 지을 가능성이 있구나!”라고 그 말씀을 받아들이면 또 다시 우리는 십자가의 사랑을 증거하는 계기로 말씀을 활용할 수 있는 겁니다. 그래서 특정 인간을 지옥 간다, 천국 간다고 하지 마시고 우리도 늘 그런 마음이 될 수밖에 없는데 성령께서 날마다 우리 속에 박혀서 이 말씀을 되새기게 하는 거예요.

 

‘교회를 너무 세상적인 즐거움을 주는 단체로 생각해서는 안 되겠구나.’ 하는 것을 이 말씀을 통해 다시 한 번 교훈을 얻게 되는 겁니다.

 

그 다음 18절 봅시다.

“곡식을 밟아 떠는 소의 입에 망을 씌우지 말라.” 이것이 고린도전서 9장에도 나와요. 고린도전서에서는 전도자에게 생활비를 제공하라는 말씀이지만, 여기서는 19절이 주가 돼요. “장로에 대한 송사는 두 세 증인이 없으면 받지 말 것이요.”

 

왜 장로한테는 두 세 증인이 있어야 됩니까? 장로는 당시 말씀을 선포하는 사람이에요. 이런 사람에게는 모함 같은 것이 올 수가 있어요. 그래서 확실한 증인이 있어서 누가 봐도 납득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지요. 그리고 납득이 되더라도 함부로 그렇다고 결정해서도 안 돼요. 왜냐하면, 지도자 위치에 있는 사람들은 라이벌로 여기고 미워하는 사람들이 많아요. 그것은 그 지도자의 자리가 시기 나서 그럴 수도 있고, 지도자의 말로 상처받아 그럴 경우도 있어요. 그래서 지도자는 미움의 대상이 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앞에 선 사람은 여러 가지 눈총을 받는 입장이어서 본의 아니게 오해를 받고 감정적으로 모함을 당하는 경우가 많이 있어요. 이럴 경우에는 여러 사람을 증인으로 세워서 정말로 그러한가, 고소한 사람의 말이 맞는가를 잘 들어보고 판단을 내리는 것이 옳아요.

 

어느 누구도 사람들에게 변명할 수 있는 자격자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변명하나 마다 십자가 앞에서 죄인인 것을 온 천하가 다 아는 거예요. 십자가 앞에서 죄인인데 그것을 변명한다고 죄인에서 좀 더 나은 의인이 되는 것은 아니잖아요. 다만 말씀을 전하는 사람은 그 사람의 인격과 품위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그 사람이 전하는 말씀이 중요하기 때문에 말씀의 신뢰도가 그런 모함으로 가로막힐 수가 있어요. 그러면 그것은 사단의 역사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에 대한 불신 때문에 말씀을 의심하고 듣는 분위기가 되면 그 의심이 말씀 자체를 가로막는 것이 됩니다. 어떤 인간도 변명의 여지가 없어요. 고발자가 말한 것이 사실이냐, 아니냐와 상관없이 죄인이에요. 그래서 변명한다고 해서 착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 고발자가 고발한 것보다 더 많은 죄가 있어요.

 

보통 고발자가 지도자를 고발하는 이유는 지도자의 잘못을 지적하는 것에 초점이 있는 것보다 전도자의 말이 자기 마음에 안 들고, 자기에게 상처를 준 것 때문에 미워서 고발하는 경우가 많아요.

 

이제 6장을 봅시다.

1절에 “무릇 멍에 아래 있는 종들은 자기 상전들을 범사에 마땅히 공경할 자로 알지니 이는 하나님의 이름과 교훈으로 훼방을 받지 않게 하려 함이라.” 이 본문도 어려워요.

 

돈 주고, 돈 받는 관계라면 공경하지 말래도 공경합니다. 왜? 잘리면 밥 먹고 살기 힘들기 때문에. 따라서 아랫사람이 상전을 공경하지 않는 경우는 돈 문제보다도 영적 상태나 세상적인 실력이나 윤리, 도덕적으로 자기보다 못하다고 무시할 경우에 해당됩니다.

 

그렇다면 아랫사람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하나님, 저 사람은 인간적으로 나보다 못한 사람인데 왜 나의 상관이 되어 있고 나는 그의 아래에 있어야 됩니까?”라고 하나님께 대들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런데 반대로 아래에서 서러움을 받는 입장이 되면 그런 오만과 자만을 낮출 수가 있어요.

 

억울한 곳에 갈 때 비로소 남이 나를 칭찬할 때 고마운 줄 알지, 마땅히 자기는 칭찬 받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칭찬 안 해주면 그 사람이 미워지는 수가 있습니다. 늘 마음을 낮춰서 아래쪽이다 생각하고 누가 칭찬해 주면 ‘감사합니다.’ 생각해야 되지, ‘나는 이만큼 수고하고 애섰기 때문에 마땅히 칭찬 받아야 돼.’ 이렇게 나온다면 그 사람은 자기 상전의 단점만 보이고 항상 지적하고 시비를 걸 사람입니다.

 

아예 회사 다니는 재미를 상전 공격하는 재미로 사는 사람도 있어요. 자기보다 못한 자가 자기 상전이 된 것에 대한 불만과 시기, 그로인한 스트레스를 해소하기 위해 늘 불평하고 욕하고. 이것은 진급 못한 자신을 동정하고 있는 겁니다.

 

높은 자리, 낮은 자리라는 이런 세속적인 것에서 구원 받으려면 예수님처럼 낮은 자리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입으면 그 자리가 얼마나 복된 자리인 줄 깨닫게 됩니다.

 

2절에 보면 “그 상전을 형제라고 경히 여기지 말고 더 잘 섬기게 하라. 이는 유익을 받는 자들이 믿는 자요 사랑을 받는 자임이니라.”

 

사랑을 늘 하나님께 받고 있는 자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형제라고 경히 여긴다는 말이 무슨 뜻일까요? 형제라고 해서 경히 여기지는 안잖아요. 오히려 반갑고 고맙고 더 조심스럽지요. 결국 형제라고 경히 여긴다는 것은 인간성 자체가 문제가 있는 겁니다. 같은 교회 성도니까 친한 것은 좋은데, 직장에 가면 상관이면 상관답게 대우해야 되는데 자기 동료처럼 대하면 안 되지요. 그것은 직책에 대한 모독이기 때문에 교회에서나 직장에서나 존중해 줘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 다음 4절을 봅시다.

“변론과 언쟁을 좋아하는 자니 이로써 투기와 분쟁과 훼방과 악한 생각이 나며”

 

항상 글을 쓸 때 내용이 있어야 돼요. 성질 내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어요. 글의 내용이 있으면 그 내용이 귀해서 좀 성질 나는 글이라도 그것은 남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이 말은, 그 사람을 공격하기 위함이 아니라 ‘이것이 내가 알고 있는 진린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라는 식으로 봉사하는 입장에서 글을 쓰고, 이야기 할 때도 그렇게 해야 합니다.

 

그 대목에 대해서 잘 모를 때,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그리스 로마 신화에 대해서 말한다면, 소년 시절부터 철공소에서 일만 한 사람은 그리스 로마 신화에 대해 잘 모릅니다. 그 때는 상대가 말하는 것을 가만히 들으면 돼요. 그런데 “그리스 로마 신화에 대해 안다고 해서 네가 나보다 더 낫다고 생각 하냐? 그래 너 잘났다.” 이렇게 나오면 아무 내용이 없는 거예요.

 

교회에서 어떤 집사님이 “이 옷 짠다고 고생 좀 했습니다.”라고 하면, 뜨개질 하는 절차나 방법에 관해서 이야기하면 되는데, “그래, 너 잘났다.” 이렇게 나오면 아무 내용이 없잖아요. 이렇게 되면 쓸데없는 논쟁만 일어난다는 겁니다.

 

5절에는 “마음이 부패하여지고 진리를 잃어버려 경건을 이익의 재료로 생각하는 자들의 다툼이 일어나느니라.”

 

내용은 없고 자기만 살아 있으니까 다툼이 일어나는 겁니다.

 

7절에 보면 “우리가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얼마나 낮아져야 됩니까? 있는 것 다 버릴까요? 버리지 마세요. “이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것이구나. 죄 밖에 나올 것 없는 나에게도 주께서 복음 전하라고 이런 것들을 주셨구나.” 라고 하면서 자족하고 감사하는 마음. 그것이 우리 속에 계신 성령께서 주신 마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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