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모데.디도.빌레몬

2011여름 4강

아빠와 함께 2021. 5. 24. 18:21

디모데전후서 제 4강

역사라는 것은 죽이는 것이고 묵시만 살립니다. 십자가를 하나님께서 묵시와 역사가 만나는 유일한 지점으로 보는 겁니다. 역사가 십자가와 만날 때는 그냥 만나지 못하고 십자가의 예수님의 죽으심을 증명하는 속성을 가지고 여기에 배치되어 있던 모든 것들이 다 어디로 쏠리느냐하면 십자가에 예수님을 죽게 만드는데 필요한 재료, 자원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원수들의 모든 일들이 하나님을 죽이는 거예요. 예수님은 하나님이잖아요. 하나님은 죽어버린 하나님을 이 땅에 제시하는 겁니다. 하나님이 죽어버리면 사람은 내가 살기 위해서 나보다 더 잘 살아있는 하나님을 믿는 것이 현재 죽을까 염려되는 나를 살려낼 수 있다고 여기는 거예요.

‘나는 살아 있다. 그런데 지금 아슬아슬하다. 그런데 확실하게 살아 있는 분은 누구지? 그렇지, 하나님이구나. 그러면 살아있는 하나님은 안 죽으니까 죽지 않는 하나님이 죽어가는 나를 살려내는 유일한 대안이다.’ 그렇게 해서 신을 믿거든요. 왜, 신은 칼로 긋거나 총으로 쏴도 안 죽으니까. 그런데 허약하게 사람 손에 의해서 재판받아 죽어버린 하나님은 아무도 묻지 않는 겁니다.

그것이 어리석은 십자가에 담긴 비밀입니다. 어떻게 죽은 분이, 본인도 죽어가면서 어떻게 다른 사람을 살릴 수가 있습니까? 이것 때문에 십자가는 그냥 한 개가 아니라 두 개의 보조 십자가를 장치로 해서 그 보조십자가 위에서 십자가를 알리도록 했습니다. 이 보조 십자가는 두 사람의 강도인데요, 그때 강도가 세 사람이 잡혔으면 큰일 날 뻔 했지요.

두 사람의 강도는 어디서 흘러온 강도인가, 이 세상에 밥 먹고 살려고 애썼던 두 사람의 강도를 배치했습니다. 이것은 역사에 관한거지요. 역사 속에서 살려고 애쓴……, (다시 해야 된다고요? 예, 다시! *영상작업 때문에)


십자가는 역사와 묵시의 만남인데 모든 것을 죽이는 것이 역사고 그것을 살려내는 것은 묵시가 되는 겁니다. 이 역사의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을 죽이는 재료가 되고 그 일에 소모가 되는 원료가 되지요. 모든 배치와 배열들이 예수님을 죽이는데 동원되게 되어 있습니다. 다 그렇게 되어 있어요. 땅도 하늘도 그 모든 것이 다 예수님을 죽이는 쪽으로 배치가 되어 있는데 이 십자가에서 보여준 하나님은 사는 하나님이 아니고 죽은 하나님을 이야기합니다.


죽은 하나님을 이야기해버리면, 역사 속에 있는 사람들은 그야말로 마귀에 속해서 죽기가 무서워서 안 죽으려고 ‘죽으면 안 돼, 죽으면 안 돼, 살아야 돼.’ 하지요. 남이 사는 것은 소용없어요. 나의 것이기에, ‘나의 것은 영원무궁해야 돼. 옆 사람은 죽으나 사나 나와 상관없고 내가 살아야 돼.’라는 것은 인간이고 ‘나는 죽어야 된다.’는 것은 하나님이고.


하나님과 인간의 차이점에서 살아야 되겠다는 그 인간이 죽은 하나님을 하등 믿을 이유가 없어요. 그걸 보여주기 위해서 예수님 십자가 밑에 작은 새끼 십자가 두 개를 해놓고 인간의 모든 역사의 모델로서 두 사람이 등장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동안 자기들이 역사 속에서 살아온 그 버릇, 행세가 있어요. 그게 뭐냐, ‘나를 살려주면 그 사람을 믿겠다.’ 이런 식으로 나가는 거예요. 예수님 옆의 강도가 그렇게 이야기했지요?


그런데 지금 그 예수님께서 죽어가면서도 자꾸 자기가 구원자라고 우기는 거예요. ‘나를 믿으라. 내가 구원자다.’ 그런데 본인은 죽어가고 있으면서도 구원자라고 하니까 구원자라면 구원받을 수 있고 납득이 될 수 있는 뭔가가 제시되어야 하는데 무조건 자기를 구원자라고 하니까 뭘 가지고, 어떻게? 물론 본인이 살아있고 죽은 척을 하면서 갑자기 천사를 불러내면 ‘아, 천사를 보니 그렇구나.’ 할 수 있는데 본인이 지금 같이 죽어가고 있어요.


같이 죽어가고 있는데 구원자라고 하니까 납득이 안 되고 역시 그 나머지 한쪽 강도도 납득이 안돼요. 둘 다 처음에 예수님을 다 부정했습니다. 다 같이 한 짝이 되어서 예수님을 조롱했어요. ‘우리는 강도로서 겸손한 면이라도 있는데 저 인간은 죄를 지어놓고는 스스로 구원자라고 하니 저런 말도 안 되는 황소고집은 대체 튀어나온 거야?’ 했는데 무슨 영문인지 한쪽의 강도가 ‘오늘밤에 낙원에 가게 해 달라. 당신은 낙원에서 오신 분이다.’라는 것을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죽은 하나님이 살려낸다.’ 이 공식이 성립되지요. 죽은 하나님만이 살려낸다는 것. 죽은 하나님이 살려내기 때문에 ‘산다’는 이 개념은 역사 속에서 우리가 꾸준히 학습되어왔고 배워온 그 사는 것 하고는 다른 ‘산다’가 되는 거예요. 같은 종류의 개념이 아닙니다. 우리가 사는 식으로 산다면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걸림돌이 될 수밖에 없어요.


그런데 예수님이 사셨던 그것이 생명이라면, 그것이 생명나무고 그것이 생명이라면 우리는 졸지에 평소에 살려고 한 그 모든 것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게 한 죄의 형태임을 수용할 수가 있습니다. 이것은 자진해서 일어날 수는 없는 현상입니다. 그야말로 십자가의 영, 예수님의 성령이 임해야 비로소 그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만약에 사람의 힘으로 알았으면 절대로 이분을 절대로 십자가에 못 박지 않았을 것’이라고 고린도전서 2장에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지금 이런 이야기를 사도바울이 이 터어키, 아시아와 마케도니아등지의 가는 곳마다 다 전했다는 말이지요. 빌립보, 데살로니가, 뵈뢰아, 아테네, 고린도, 에베소……, 이 고린도와 에베소가 2차전도와 3차 전도에서 양 축이 돼요.


여기 갔다, 또 여기로 갔다, 사도바울은 되게 바빠요. 에베소에 갔는데 고린도에 말썽이 있으니까 그리로 갔다가 다시 저쪽에 말썽이 생기면 그쪽으로 갔다가 에베소, 고린도, 고린도 에베소, 왔다갔다 왔다 갔다 하면서 사람을 살리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전부 죽여 버리는 거예요. ‘죽은 인간이 왜 그리 말이 많나?’ 그 말입니다.


미꾸라지 잡아서 소금 끼얹어 놓으면 가만있잖아요. 그런데 소금기가 없어지면 또 살아서 바둥바둥 대잖아요. 그러면 소금 또 끼얹어버려요. ‘이래도 안 죽어? 좀 죽어줘.’ 그 말입니다. 내가 살려고 한 그 것이 너의 구원을 방해하고 훼방하는 마귀의 최후의 무기, ‘너 그러면 죽는데?’ 라는 그것인데 소금을 쳐서 제발 ‘죽어도 마땅합니다.’라는 쪽으로 계속 나가라는 말이지요.


그 전도를 한 거예요. 그런데 그 당시 유대인의 회당에서는 뭡니까? 우리는 선택받았기 때문에 율법을 지키면 죽는다, 산다? ‘살 수 있습니다! 하면 됩니다!’ 이것이 유대인의 종교적 의미였습니다. ‘나는 율법 지키면 살 수 있습니다.’ 요즘 말로 하면 ‘십자가 믿고 부활 지키면 살 수 있습니다.’라는 그 이야기를 한 거예요. 십자가 믿고 산다는 것 자체가 성립이 안돼요.


사도바울 같으면 이렇게 이야기가 됩니다. ‘십자가는 나를 죽이고 이제 내가 사는 것은 십자가로 끝났고 이제부터 사는 것은 내 안에서’…… 누가 산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가 사시는 것이다.’ 이렇게 이야기해야 된다는 말이지요. 성경 그대로 이야기하는데도 시비 거는데 어떻게 하라는 말입니까? 그러면 성경을 제가 지어낼까요?


갈라디아서 2장 20절의 말씀 그대로잖아요. 사도바울이 복음을 전하면서 계속해서 율법을 동원시킬 수밖에 없는 겁니다. 왜 그런가, 성령께서 그것을 시켰고 성령께서는 왜 그것을 시키는가? 성령께서는 예수님의 십자가지기까지의……, 이 십자가너머는 창세전의 세계니까 십자가 이쪽의 땅의 나라는 창세후의 세계, 이 땅에서 일어났던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기까지의 그 행적, 기적만이 아니고 모든 말씀과 그 행적의 모든 것을 그대로 사도바울의 1차, 2차, 3차 전도여행에 다 적용시킵니다.


예수님이 율법의 잘못된 해석에 대해서 공격하듯이 사도바울도 율법에 대해서 잘못된 해석을 공격 할 수밖에 없고 오늘날 우리들도 현재 말씀, 율법에 대한 잘못된 해석에 대해서 공격할 수밖에 없는 겁니다. 좋게 지낼 문제가 아닙니다. 좋게 지내버리면 서로 다 살기 때문에 서로 다 죽어요. 서로 죽여줘야 그것이 살아요. 서로 못났으니까 우리가 다 십자가 바라봅시다, 그것으로 끝나버려야 합니다.


‘다 죽이는 십자가 바라봅시다.’ 하면 ‘너만 십자가 바라보나?’라고 나의 것이 또 튀어나오지요. 여기서 사도바울이 갈라디아서나 에베소서나 고린도, 데살로니가 이런 데로 보낸 편지 속에 담겨 있는 그 복음은 어떤 의미에서 그 복음을 전했는가? 그것은 바로 ‘율법은 필이 무엇을 요구하는가, 행함을 요구한다.’ 이것은 문제없어요.


율법은 행함을 요구하는데 율법이 행함을 요구할 때, 행함은 인간에게 요구하고 율법은 선한 것이므로 하나님 쪽에서 주어집니다. 주어지게 되면 하나님 쪽에서 주어진 율법과 그 율법을 행했다는 인간 사이에서 뭐가 깨어지느냐하면 ‘이것이 바로 경건치 않은 것이고 죄인 되고 하나님의 원수가 된다.’는 식으로 율법은 까발리는 거예요.


그러면 이 틈 사이에 뭐가 주어지느냐하면 ‘경건치 않은 자, 죄인 된 자, 하나님의 원수 된 자를 위해서 예수님께서 피를 흘렸다.’고 이야기를 해버립니다. 그렇다면 역사 속에서 부활이란 뭐냐 하면, 반복되는 것이 부활이에요. 이것은 지난시간에 했지요? 무엇의 반복? 십자가가 반복되는 것, 여러분 속에 십자가가 반복될 때 그것은 여러분의 뜻이 아니고 성령께서 여러분을 그렇게 인도하고 있습니다. 왜 십자가가 반복해서 주어지느냐하면, 25살 때 지은 죄에 대해서 25살 때 십자가 피로 용서를 받았는데 사람이 살아야 되니 26살 때도 어떤 행함이 나올 것이잖아요. 그런데 죄 된 행함이라는 것이 없어요.


죄 된 행함이라는 것이 없고 행함이 바로 죄가 되는 겁니다. 죄악 된 행함이라는 것이 없어요. 모든 행함은 죄로 등장시키도록 율법이 무엇으로 바뀝니까, 말씀이 계속 일을 해 대는 겁니다. 모든 성경말씀은 그 배치가 십자가를 향하여 다 질주하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사도바울이 로마서에서 ‘입으로 네가 십자가와 부활을 시인하면 구원을 얻는다.’고 되어 있잖아요.


그것을 22살 때로 봅시다. 그러면 23살 때는 고백 안 해도 됩니까? 23살 때는 23살 되어서 일어나는 행함이 또 있을 것이고 그 행함이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는 뭐가 되느냐, 경건치 않은 자, 죄인 된 자, 하나님의 원수 된 자가 또 등장하는 겁니다. 또 등장하게 되면 하나님의 말씀과 그 틈 사이에서 이것을 의가 되게 한 십자가 피를 또 바라보게 만들어요.


그러면 그 사람은 자기의 경건치 않음을 위하여 예수님이 돌아가셨다는 이 십자가를 다시 한 번 보게 됩니다. 그러면 그 십자가가 어떤 십자가냐 하면 살리는 십자가가 돼요. 죽이는 말씀이 곧 살려주는 말씀이 되는 겁니다. 살려주는 말씀으로 살았다, 하는 그 인간을 24살 때 또 죽여 버려요. 또 살려내고 25살 때 또 죽여 버리고 또 살려내고, 그래서 89세 어느 날 돌아가실 때까지 계속 그렇게 합니다.


89세, 92세, 그것이 부활 속에 있는 사람이고 성령 안에 있는 거예요. 로마서 14장 17절에서 ‘하늘나라는 의와 평화, 화평이다.’ 합니다. 그 화평은 십자가로 말미암아 주어지지 내가 말씀 지켰다는 것으로 화평이 오지를 않습니다. 그 지켰다는 그것이 또 다른 말씀에 의해서 죄로 지적되게 되면 화평이 다 깨져버려요.


자기는 분명히 말씀대로 살았다고 여겼는데 어느 대목을 딱 보니까 ‘먹는 것과 입는 것으로 족한 줄로 알라.’ 합니다. ‘간식이 없다고 삐졌는데 이것도 죄겠구나. 전에는 간식이 풍성했었는데, 그 때는 어떤 분이 수고를 많이 해서 감자니 옥수수가 너무 많아서 다 처치를 못할 정도였는데 이제는 휭 하니 하나도 없구나.’


주최 측은 뭐하나, 하는데 여러분들이 다 주최 측이에요. 역사라는 것은 다 죽어요. 그런데 여기에 묵시가 개입했다는 것이 우리를 살려내는 겁니다. 그러니 묵시와 역사의 만남은 하나밖에 없어요. 그것은 부활이 아니고 십자가입니다. 그것은 어디에 따르는가, 구약의 제사법에 따라요. 피! 그 피는 부활에서 생겨나는 것이 아니고 십자가에서 피가 주어집니다.


아들의 피로 말미암아 모든 것을 다 이루었다는 겁니다. 구약의 제사 같은 경우에는 반복하잖아요. 지난번에 한 것 다시 해 봅시다. 유월절에 어린양이 있을 때 여기서 히브리인들이 죽을 뻔 했지요. 죽을 뻔 했다가 어린양의 피로 장자가 살아났습니다. 그러면 죽은 어린양이 어디에 살아 있겠는가, 이 어린양의 가치가 어디에 있겠는가?


시내 산 제사법에 의해서 어린양의 매일같이 죽어요. 이 사람들이 옛날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고 우리를 위해서 죽었던 그분의 세계로 이끌려 가는 겁니다. 그것이 약속의 땅으로 가는 거예요. 약속의 땅으로 가는데 그 사람들은 살던 버릇이 땅위에서 살던 그 버릇이기 때문에 땅만 있으면 살 줄 알았습니다. 땅만 있으면 우리 힘으로 개간하면 되니까.


‘땅만 주면 살겠습니다.’ 그러나 약속이 광야에서 하는 말은 ‘그것은 사는 것이 아니야.’ 산다는 의미를 새롭게 부여하겠다는 거예요. 사람은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고 사람은 말씀으로 산다는 것을 신명기 8장에서 이야기하기 위해서 만나를 준겁니다. 만나를 준 것은 ‘네가 이렇게 원망했었다.’ 하는 겁니다. 만나를 뜯어보면 ‘원망1, 원망2, 원망3……’ 전부 다 들어 있어요.


원망했고 불평했기 때문에 주어지는 그 양식이거든요. 오늘날 그 양식이 말씀이라면 그 말씀 안에는 뭐가 들어 있습니까? 우리의 원망, 불평, 원망, 불평, 하나님에 대한 대듦, 이런 것들이 포함된 말씀이기에 말씀해석은 반드시 이 땅에 살던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왜 우리를 불편하게 하고 힘들게 합니까?’라는 원망이 그 안에 담겨 있는 채로 말씀이 해석되어져야 하는 겁니다.


그러니 교회 목사님들이 설교하실 때 ‘여러분이 교회오시는 목적이 여러분이 살려고 한다면 그것은 여러분들이 하나님을 또 죽이는 일입니다.’라는 식으로 설교를 해야 된다 그 말이지요. ‘여러분은 살기 위해서 교회 왔지만 여러분은 살기 이전에 이미 왜 죽는가의 그 이유를 알고서 교회 왔었어야 됩니다.’ 그 말입니다.


‘우리가 왜 시들시들 죽어가고 있습니까? 그 이유가 정당합니까, 정당하지 못한 겁니까? 어떤 점에서 하나님 앞에서 내가 힘들게 살아가는 것이 합당한 조치가 되는 겁니까?’ 그 이유를 알기 위해서 교회 나와야 된다는 말이지요. 아무도 안 나오지요. 여행사 찾아가는 이유는 놀러가기 위함인데 ‘귀신 나오는 곳을 소개해 드릴까요?’ 하면 그 여행사가 장사가 되겠어요?


인간의 가치를 높이는 상품을 개발해야 고객들이 만족할 것이 아닙니까? 고객이 왕이니까. 성경에서는 고객의 왕은 마귀라는 거예요. 그 점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래서 십자가복음 전하는 것도 인간의 힘이 아닌 것처럼 그것을 알아먹는 것도 인간의 힘이 아니에요. 이것은 성령의 힘이 아니면 못 알아먹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많은 목회자들이 이렇게 이야기들을 해요. 그런 사람들을 찾게 되면 장사가 안 된다는 거예요. 그런 사람은 몇 명 되지가 않는다는 거예요. 문제는 나의 것을 그릇으로 따로 만들어놓고 여기에 몇 명 채우는가, 하는데 이 그릇자체가 주께서 인정하지 않는 그릇입니다. 거기에 몇 명 채우는가,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어요.


그리고 다섯 명을 채웠다고 봅시다. 다섯 명 채웠다고 하니 녹매교회 비슷한데, 이 교인들이 언제 갈지, 언제 청매로 갈지, 언제 이사 갈지 모르잖아요. 이게 누구겁니까? 주님의 것이라는 말이지요. 나의 것이라는 것이 성립이 안 된다는 것을 왔다갔다, 왔다 갔다 하게 하시면서 이것을 깨닫게 하시는 축복을 주시는 겁니다.


이 축복이 축복에 해당될지 그것은 모르겠습니다만 왔다가 또 갔다가 또 때려치우고 왔다가, 이런 것을 통해서 주께서는 나의 것이라는 것이 하늘나라에서 전혀 쓸데없고 방해가 된다는 것을 깨닫게 하는 겁니다. 이것은 교회뿐만 아니고 가정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식도 이렇고 이런 스케줄대로 가 줘야 내 자식이라고 여기겠는데 왔다 갔다, 왔다 갔다, 경계선을 막 넘어 다니니 정신이 하나도 없어요. 어지러워요, 너무 왔다 갔다 해서.


가정이 나의 가정이 아닙니다. 성경 말씀대로 ‘누구든지 처나 자식이나 아비나 어미나 전토나 다 버리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하는 그 말씀이 자기는 자식 번듯하게 잘 키워내면 그것은 죄가 아닌 줄 알았는데 마태복음 27장의 그 말씀을 대보면 ‘아, 이것도 죄구나.’ 하게 되지요.


어떤 사람은 자기 아버지 죽었을 때 운 것이 죄 아닌 줄 알았는데 마태복음 7장에 보면 자기 아버지 죽어서 장례 치른다고 신경 쓴 그것도 죄구나, 그러니 하나님께서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벌이고 있는 모든 행함은 이 행함의 원리, 이 애굽 같은 행함에서 벗어날 수가 없음을 분명하게 굳히기에 들어갑니다. 유도에서 상대선수에게 굳히기에 들어가듯이.


꼼짝 못하고 우리는 그 동안 세상에서 했던 그 행세를 그대로 되풀이해야 됩니다. 주님께서는 같이 따라붙어서 살리고, 살리고, 살리고, 살리고, 살리고, 살리고, 살리고……, 계속 꼭 노라조 같아요. 살리고 살리고 살리고 살리고 ……, 계속, 계속 살리는 거예요. 계속 살려주는 거예요. 계속! 그래서 이것은 ‘쪄 빠따(저 바다)에 누워.’처럼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을 늘 공급받고 있는 겁니다.


‘네가 지난여름날에 한 짓을 나는 알고 있다.’ 그거거든요. 네가 무슨 짓을 했는지를 다 아니까 그것을 잘했다고 가지고 나오지 마라. 중요한 것은 너를 용서했던 그 그리스도의 역사와 묵시의 만남의 초점, 그 피가 있으면 구약의 모세 언약대로 피가 있으면 사함을 받는 거예요. 주님께서는 자기가 용서하는 그 자체를 만끽하고 싶은 겁니다.


따라서 거기서는 탕자가 필요하고 죄인이 필요한 거예요. 그러니까 그 역할을 우리가 해줘야 되는데 탕자 안 되려고 하고 죄인 안 되려고 하면 그것은 남의 자식이지요. 그러면 우리가 죄인이고 탕자라 하는 관점은 뭐냐, 지상의 관점이 아닙니다. 십자가 안에 있는 하늘나라 관점에서 볼 때 탕자고 죄이기 때문에 지상에서 같은 인간들끼리 죄라고 하는 그 의미, 그 뉘앙스는 믿지 마세요.


‘네가 죄인이다.’ 해도 거기에 기죽지 마세요. 주님의 십자가에서 보기에 우리는 죄인이지 다른 사람이 지적하게 되면 그것은 죄라고 볼 수가 없는 겁니다. ‘너나 잘하세요.’ 해야 되지요. 제가 주일 오전에 그 이야기를 했지요. 사람이 부러운 것이 있으면 반드시 그 사람을 두려워하게 되어 있어요. <위대한 탄생>이라는 프로그램에 보면 멘토라는 것이 있잖아요.


그 사람의 멘토는 무슨 멘토냐 하면 노래 잘부를수 있게 해주는 멘토에요. 그런데 노래 잘 부르고 싶은 마음이 없는 사람한테는 그 사람은 전혀 멘토가 아닙니다. ‘아저씨, 제가 노래 잘 부를 수 있게 해 드릴까요?’ ‘저리가소. 내가 노래 잘 불러서 뭐할 것인데? 저리 가소.’ 전혀 그 사람에게는 카리스마가 먹히지 않겠지요.


카리스마가 먹힌다는 것은 내가 갖고 싶은 것을 저쪽이 갖고 있고 내가 부러워하는 것을 저쪽이 갖고 있으니까 저 사람 것을 갖기 위해서는 내가 저 사람 앞에 고개를 숙이면 언젠가는 저 사람 것이 내 것으로 되겠다고 보는 겁니다. 그러면 그 사람이 부러운 동시에 ‘내게 없는 것을 왜 저 사람은 갖고 있지? 아마 하나님의 특수한 능력과 특수한 어떤 끼가 있는 모양이다.’


그러면 그때부터는 기가 죽고 그 다음부터 무서워지는 거예요. ‘그런 식으로 하려거든 여기 나오지 마세요.’ 하면 ‘아이고, 안됩니다.’ 눈물 막 흘리고 ‘합격!’ 하면 또 좋아서 울면서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하이고! 그게 뭔데! 그게 뭐라고, 노래방에 가서 한곡 뽑으면 확 풀리는 것을 가지고, 조수미한테 가서 물어보면 그것도 노래인지, 그것은 노래도 아니죠, 뭐.


그것이 뭐라고 매여서 인생을 거기에 걸고 울고불고 ‘감사합니다!’ 하면서 좋아하고 떨어졌다고 욕을 하고 삐지고. 분명히 그 사람은 뭔가 자기가 노리는바가 있는데 그것이 성취가 안 되니까 화풀이를 해 대는 거예요. 그게 바로 예수님을 죽게 만든 겁니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만났을 때 자기들이 얼마나 착하고 의롭다는 것을 자랑하고 싶어서 예수님을 멘토로 삼았는데 예수님께서는 너 같은 제자들을 삼은 적이 없거든요.


예수님이 제자로 삼은 사람들은 전부 다 고기 잡는 사람들, 죄인인 사람들, 나중에 세 번씩이나 부인하는 사람들, 그리고 자신을 팔아먹을 사람들, 그런 사람들의 멘토로 등장했지 훌륭한 사람들은 아니라는 말이지요. 주께서 세리와 창기, 이런 사람들은 용서하시고 바리새인들은 하늘나라 못 가게 만들고.


그러니까 이것은 뭐냐 하면,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근원적인 것, 우리가 기대하는 것, ‘주께서 나한테 이렇게 해주시면 좋겠습니다.’ 하는 그 건의사항마저 물리쳐 버립니다. ‘너는 아직도 너 자신이 누군지를 몰라. 모르기 때문에 이것은 부족한데 이것은 괜찮다는 식으로 스스로 부족한 것과 괜찮은 것을 골라내겠다는 그 성질머리를 버려야 돼.’


누가복음 18장의 세리처럼 차라리 몽땅 ‘주여, 저는 죄인입니다.’ 이렇게 하라는 말이지요. ‘십일조 했습니다, 금식 했습니다, 구제했습니다, 봉사했습니다.’ 그 따위 소리를 하지 말고 그저 성전에 나왔으면 고개도 못 들 때 주께서 ‘네가 의인이다.’ 주님께서 멘토로서, 스승으로서 이야기하는 것은 제자들에게 뭘 요구하는 것이 아니고 ‘가만 있거라. 내가 다 해줄게.’입니다.


시편 몇 편인지 이런 대목이 있어서 한 10년 전에 은혜를 받은 게 있어요. ‘너무 높은 곳에 마음 두지 말고 진짜 성도라면 젖 뗀 아이가 어미 품에서 잠자고 있는 것처럼, 듬직한 어미의 품에 안겨서 잠잘 수 있는 그것이 하나님이 원하는 성도다.’ 하는 대목이 나와요.


시편 131편

여호와여 내 마음이 교만치 아니하고

내 눈이 높지 아니하오며

내가 큰 일과 미치지 못할 기이한 일을 힘쓰지 아니하나이다

실로 내가 내 심령으로 젖 뗀 아이가그 어미품에 있음같게 하였나니

내 중심이 젖 뗀 아이같도다

이스라엘아 지금부터 영원까지 여호와를 바랄찌어다


죽기 전에 해야 될 스무 가지 중에서 마지막이 뭐냐 하면 사랑하는 사람 품에서 죽는 거예요. 김 선아가 그렇게 이야기해요. 사랑하는 사람의 품에서 죽는 것, 그렇게 되려면 사랑하는 사람을 본인이 선택할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찾아와야 되는데 그 찾아오는 방법이 너무 과격해요. 꼭 김○○ 집사님 같아요. 너무 과격해.


원래 디모데전서에 보면 사람 이름이 여럿 나옵니다. 알렉산더랄지 이런 이름들이 등장해요. 다시 이야기할게요. 사도바울은 여호와 증인 같다고 했지요. 남 영업하는데 가서 ‘여러분, 율법은 여러분의 가치를 높이는 용도가 아니고 율법은 왜 예수님이 죽을 수밖에 없었는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율법이 주어진 것입니다.’ 라는 이야기를 가는 곳마다 하니까 율법에 매여 있던 그 사람들이 그냥 두지 않고 달려들지요.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말씀이라 하는 것은 여러분의 구원욕구를 들어주는 것이 말씀이 아니고 그 말씀이 여러분으로 하여금 구원받을 자격도 안 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주어진 겁니다. 그냥 집에 가 계시면 구원될지 안 될지는 성령이 찾아가야 되는 것이지 백날 교회 와봐야 소용없습니다.’ 이렇게 할 때 그들이 격분하지 않을수가 없지요.


어떻게 격분합니까? 이렇게 합니다. ‘내가 완벽하다고 주장하지는 않았다. 내 과거를 돌아보면 나쁜 것이 많다. 하지만 전적으로 나쁜 것이 아니다. 왜, 예수 믿는 것, 복음 전하는 것은 나쁜 것이 아니잖아.’ 이렇게 나옵니다. 기가 막히고 코가 막혀요. 다른 것은 나쁜 것인 줄 알지만 예수 믿고 복음 전하고 성령의 은사를 받아서 감사함으로 헌금하는 것은 죄가 아니라는 거예요. 앞에 성령이 붙고 은혜가 붙었으니까 그것이 죄가 아니라는 거지요.


어디서 문제가 되었는지를 한번 적어볼게요. 간단합니다. 한번 적어볼게요. 성령의 은혜를 받고 교회 감사헌금 한 것은 죄가 아니니 뭐가 되겠어요? 하나님의 의가 된다는 거지요. 그렇다면 그렇게 주장하는 그 사람의 자리가 어디에 놓여 있겠습니까? 이 안에 들어 있겠습니까, 바깥에 나가 있겠습니까? 바깥에 나가 있는 거예요.


나의 것이 있는데 나의 것을 성령이 와서 안 건드린다는 거예요. 성령께서 헌금 들고 와서 ‘얘야, 내 대신 교회에 내라.’ ‘감사합니다. 대신 저의 가치는 안 건드리지요?’ ‘안 건드리지. 너는 착하니까 안 건드리지. 내면서 그것은 성령의 은혜로 감동해서 냈다고 해라.’ ‘예’ 그러면 자기 자신을 건드리지 않고 하는 거예요.


그러면 진짜 성령의 은혜를 받게 되면 어떻게 되느냐, 성령의 은혜를 받게 되면, 성령의 은혜라 하는 것은 묵시세계 아닙니까? 묵시세계는 뭘 앞장세운다고 했습니까? 뭘 앞장세우지요, 반드시? 십자가를 앞장세우지요. 온 땅을 뭐로 바꾼다? 죽음의 도탄의 세계로 바꿔버리지요. ‘화로다 망하게 되었구나. 내가 망할 백성중의 한 사람’이라고 누가 이야기 했어요?


이사야가 이야기했어요. 이사야 6장의 이야기 아닙니까? 그러면 성령이 와서 십자가를 앞장세우게 되면 내가 앞으로 전도를 하든지 헌금을 하든지 어떤 행동을 하든지 이것이 뭐가 된다? 이것이 죄가 된다는 것을 보여주지요. 죄가 되게 되면 나는 뭐가 됩니까? 나는 뭘 해도 죄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고백하지요. 뭘 해도, 그 ‘뭘 해도’ 중의 하나가 헌금이 되는 거예요.


그렇다면 이런 사람은 이 노선이 관찰자의 노선에 있는 것이 아니고 어디로 갑니까? 이 안에 들어와 버려요. 이 안에 들어와 버리면 돈을 내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 앞에 뭘 내는 겁니까? 하나님께 ‘돈 받으세요.’ 가 아니라 ‘죄 많은 저를 받아주시옵소서.’ 해서 본인이 헌금이라. 어떤 헌금? 착한 헌금? 아니에요. ‘이 죄인을 받으시옵소서. 지금 헌금 내는 이 순간 벼락이 쳐서 나는 죽는다고 할지라도 저는 스데반 집사처럼 주 안에서 죽으니까 너무 감사합니다.’라는 말을 하게 돼요.


그러면 이런 모습을 보고 제 삼자가 뭐라고 합니까? ‘야, 저분은 성령의 은혜를 받아서 헌금한다.’ 하겠지요. 제 삼자가 그렇게 하는데 본인이 그런 이야기를 하면 어떻게 돼요? 본인이 제 삼자입니까? 논리가 안 어려운데 어렵다는 얼굴들을 하고 계십니다. 이것이 어렵습니까? 본인은 돈을 바친 것이 아니고 이 죄인을 받아 달라는 식으로 자기 몸을 드렸는데 다른 사람이 보면서 ‘야, 저분이 저렇게 헌금하네. 참 은혜롭다.’라고 제 삼자가 이야기할 수 있어요.


제 삼자가 뭘 봅니까? 그 사람을 칭찬하는 것이 아니라 누굴 칭찬해요? 그 사람을 저렇게 죄인으로 몰락시킨 누구를 칭찬하고 있습니까? 성령, 주님의 십자가의 묵시적 살아 있음을 감사하지요. ‘세상에, 없는 사람이 헌금을 하는데 20원을 헌금해요. 동전 두 렙돈을 헌금했다고!’ 다른 사람이 감격하는 거예요.


목사가 나서서 이야기를 합니다. ‘여러분, 어느 혼자 사는 분이 20원을 헌금했는데 자기전 재산을 다 바쳤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아멘, 감사합니다. 부자가 헌금 많이 한 것보다 훨씬 낫다.’ 이렇고 있는데 정작 본인은 뭐라고 합니까? ‘저 어때요, 헌금 괜찮게 했지요? 제가 성령의 은혜를 받아서 했어요. 이번 헌금 잘 나왔지요?’ 이런 소리를 본인은 합니까, 안합니까?


본인이 그런 소리를 할 수가 없는 거예요. 그런데 왜 이걸 왜 보호해줍니까? 본인이 죄인인데. 보호받는 본인이 짜증나요. 자기는 죄를 느끼고 있는데 다른 사람이 훌륭하다고 해버리면 본인이 짜증난다고요. ‘내가 주의 복음을 잘못 전했나? 내가 헌금을 잘못했는가? 내가 사람들로 하여금 오해케 하였나? 나는 헌금을 한 것이 아니고 내 죄를 고백했을 뿐인데 다른 사람은 헌금을 했다고 하니 내가 헌금을 잘못했는지 아니면 저 사람들이 문제일까?’ 하고 오히려 의아해한다는 말이지요.


그래서 ‘헌금하세요.’라는 설교를 목사가 하게 하면 안돼요. ‘헌금하세요.’라는 설교를 목사가 하면 안돼요. 이 문제를 조금 더 나가봅시다. 예를 들어서 아굴라와 부리스길라, 이 부부는 이탈리아에서 천막장사를 하던 사람인데 로마 황제가 유대인들은 다 나가라는 영을 내리니까 쫓겨나서 마케도니아로 와서 사도바울을 만나서 천막 치는 일에 동업을 했어요.


그래서 같이 고린도로 갔다가 바울이 ‘당신이 내가 없을 때 책임을 지고 이곳을 맡으라.’ 해서 에베소에서 복음을 전했던 사람입니다. 이 사람이 사도바울이 어려울 때 많이 도와준 사람이라는 말이지요. 그러면 성경을 봅시다. ‘아굴라와 부리스길라가 내가 어려울 때 많이 도와줬다.’고 하는 이것이 성경에 나오는 본문입니다.


이걸 쉽게 하면 뭐가 됩니까? ‘감사헌금하세요.’ 라는 말과 똑같은 것이거든요. ‘내가 어려울 때 헌금으로 도와줬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복음에 필요할 때 감사헌금을 하세요.’라고 성경에 나온다는 말이지요. 그렇게 성경에 나오기 때문에 어떤 목사가 ‘여러분도 복음에 필요할 때 헌금을 하세요.’라고 하면 그 설교가 맞느냐, 맞는 성경해석이냐 그 말입니다.


성경에 있는데. 간단한 문제 아닙니까? ‘성경에 행하라는 것이 있어서 행하라고 했는데 그것이 뭐가 잘못인가?’ 같은 이야기라니까요. ‘이렇게 아굴라와 브리스길라가 사도바울을 도와줬기 때문에 여러분도 나를 도와줘야 됩니다.’라고 성경에 나오는 글자 그대로 설교한 그것이 맞느냐, 틀리느냐 그 말입니다. 물어봅시다.


제가 원칙이 뭐라고 했습니까? 성경말씀에 대해서 두 가지 해석을 다 보라고 했지요. 하나는 육으로, 문자로 보는 해석이 있고 또 하나는 뭡니까? 묵시로 보는 해석이 있잖아요. 묵시로 보면 어떤 행동을 해도 뭐다? 다 죄가 된다고 분명히 언급했지요. 했지만 30분도 안 지나서 다 잊어버렸어요. 성경대로 하는 그 설교가 죄입니까, 죄가 아닙니까? 그게 죄지요.


왜냐하면 성경 모든 말씀 안에 십자가가 들어있고 십자가는 드러난 역사적 해석과 숨어 있는 묵시적 해석의 양쪽을 다 보여준 사건이 십자가사건이고 그 십자가사건이 성령을 통해서 어떻게 한다? 되풀이하는 그것이 부활의 능력으로 가능하잖아요. 그러면 어떤 목사가 이 성경이 그대로 하라고 한다고 해서 그대로 했다, 라고 하면서 그것이 뭐가 잘못되었느냐, 라고 했다.


성경문자를 그냥 읽어줄 것 같으면 설교라는 것이 필요가 없습니다. 아나운서나 발음이 좋은 사람을 골라서 이 성경을 읽게 하고 그냥 내려가게 하면 돼요. 천주교에서는 그렇게 하는데도 있어요. 성경 읽고 아무소리 하지 말고 그냥 내려가요. 왜, 성령에게 맡긴다고. 그것은 올바른 것이 아닙니다. 그럴 것 같으면 성당 갈 필요도 없어요. 집에다 베들레헴이라는 성경프로그램 있잖아요, 그것 설치하고 집에서 그거나 보면 돼요.


성당에 뭐 하러 갑니까? 떡은 왜 주는 거예요? 왜 가운입고 앞에서 설치고 난리합니까? 그럴 필요도 없어요. 오늘날 성령이 임한 사람은 하나의 사도가 되고 부활의 증인으로서, 십자가 증인으로서 활동케 하는 겁니다. 왜냐하면 이 지상이 바로 마지막 죽음의 땅이니까. 그 땅에서 사도바울이 이렇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반드시 십자가의 능력을 증거하기 위해서 이렇게 하는 거예요.


그러면 ‘아굴라와 브리스길라가 바울을 도와줬다.’는 이 본문을 설교할 때는 반드시 뭘 집어넣어야 됩니까? 십자가의 뜻을 집어넣어서 설교를 풀어내줘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설교하는 본인이 십자가복음에 의해서 이 본문을 평소에도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일하는 자에게 망을 씌우지 말라.’ 하는 대목이 나오지요.


그 말은 무슨 뜻입니까? 복음 전하는 사람을 위하여 복음 전하는데 필요한 물자를 대주라는 말이지요. 일하는데 망을 씌워서 일하지 못하게 하는 일 없도록, 곧 망 값 내라는 말인데 그 이야기를 설명하면서 그것이 육적인 해석에서, 곧 살기 위해서 이것을 어떤 식으로 이해하는가를 이야기해주고 이미 십자가지신 예수님께서 이 본문을 해석할 때는 어떤 요소가 가미되면서 이 본문이 해석되는가, 둘 다를 설명을 해줘야 됩니다.


설명을 해줘야 그 말씀으로 역사에 속한 사람과 묵시에 속한 사람이 분류될 수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냥 성경 읽기는 성경외우기에 불과해요. 성경외우기는 여호와의 증인이나 선교단체에서 많이 하고 있어요. 하지만 외운다는 것은 습관이고 그냥 반복에 불과합니다. 야구선수가 장마가 져서 경기가 여러 번 취소되다 보면 타격감이 떨어져요. 그런데 계속 할 때는 타격감이 살아납니다.


특히 이 대호선수, 장마기간에 슬럼프에 빠져서 홈런 21개에 멈췄다가 어제 두 개 때려서 23개 되었는데 사람이 자기 몸에 습관을 들인다는 것은 자기 몸의 가치를 높인다는 겁니다. ‘나 이만한 재주 있어.’ 그거잖아요. 그러면 그 재주가 하늘나라에 합당한 겁니까? 성경 구절 많이 외우는 그 재주가 하늘나라에 합당한 재주에요?


성경구절을 외우고 뭘 안다는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내가 성경구절가지고 어떤 식으로 이용하는지를 고발하는 차원에서 우리에게 계속해서 살아 있는 말씀으로 묵시적 말씀으로 다가와야 돼요. 성경말씀 외워서 선교에 써먹겠다는 그 발상자체, 이것도 어디에 포함된다? 모든 죄악 된 행함에 포함되는 이유를 내가 외우는 성경말씀 속에서 찾아낼 수 있어야 된다 그 말입니다.


그래야 자기부인이 돼요. 설교하는 것도 죄가 되고 전도하는 것도 죄가 되고 이 모든 것도 죄가 되고 집안에 그냥 있어도 죄가 되고 전부 다 죄가 되는데 그냥 죄라고 하지 말고 죄 된 이유를 아는 그 바늘귀에 무슨 실이 있느냐하면, 바로 우리를 구원해내는 실, 묵시적 생명의 실이 그 뒤에 있거든요.


‘교회 안 나가도 구원받는다면서?’ 그것은 아니지요. 왜, 막산다고 해서 그것을 구원됩니까? 그것을 크게 쓰고 싶었어요. 십자가마을에 ‘막 살아서 구원 안 된다.’고 크게 쓰고 싶었어요. 막살아도 구원 안 되는 것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것은 막 살아도 구원과 아무 관계가 없는 거예요. 중요한 것은 끝에 달린 실입니다. 그 실이 십자가에서 나온 실이라 그 말이지요. 실 잘라버리고 바늘만 쥐고 ‘난 막 안사니까 구원 받았다.’ 그런식으로 하면 안된다 그 말이지요.


반드시 끈이 있어야 돼요. 하늘나라에서 달린 끈이 있어야 된다 그 말이지요. 그 끈은 이 땅에서 무슨 짓을 해도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일 수밖에 없는, 피를 흘리게 할 수 밖에 없는 강도와 같은 유의 죄에 불과한 겁니다. 그 이유가 뭐냐, 이 땅에서의 우리의 아이디어는 하나밖에 없어요. ‘어떻게 하면 나를 살릴 수 있고 어떻게 하면 죽어서도 좋은 천국에 갈 수 있는가?’ 그런 아이디어만 쏟아내는 것이 이 땅에서의 모든 종교생활입니다.


그런데 그 자체가 십자가에서 막혀버렸다니까요. 다 막혀버리고 살고 안 살고는 누구 소관이다? 우리 오른편에 있는 누구소관입니까? 주님 소관입니다. 그것 때문에 오른편에 있었어요. 안 그러면 오른편에 있지도 않아요. 오른편이라 하는 것은 하나님의 원수가 뭔지를 발견하는 자리입니다. 우리는 원수 속에 있으면 원수가 뭔지 몰라요.


오른편에 계신분이 원수인줄 알고 ‘너는 죄악으로 달려가도 예수님의 피로 말미암아 구원받는다.’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십자가 피로 내 죄 용서받았다고 고백하면, 입으로 시인하면 뭘 얻으리라? 네가 구원을 얻으리라. 로마서 10장 10절의 말씀입니다. 그렇게 선교단체에서 수백 번 외웠던 그 말씀, 자장밥 하나 먹기 전에 외웠던 그 말씀.


‘성경말씀에 하라고 해서 그대로 하라고 했는데 그것이 뭐가 나쁘냐.’ 이렇게 나와요. 이것은 실을 끊어버린 거예요. 평소의 그 버릇, 나는 뭐해서 밥 먹고 살까, 하는 그 버릇이 그만 불쑥 튀어나와 버린 거예요. 1차 2차 3차 전도를 통해서……, 여기에 터어키가 있잖아요. 여기 이 드로아에서 뭘 받았습니까?


환상을 받았지요. 다시 이야기합니다만 이 대목에서 하나님이 너무 심하다 싶었어요. 환상까지 줄 것 같으면 좀 안 아프게 하고 편하게도 하고 선교하는데 힘들지 않도록 해주면 되는데 환상은 줘놓고 가보면 고생이 기다리고, 그래서 고생을 직사하게 해요. 아예 처음 다메섹에서 주님 만난 뒤에 아나니아를 통해서 ‘이 사람은 복음을 위해서 숱한 고난을 받아야 돼.’ 라는 것이 시나리오였어요.


시나리오에 보면 (웃으면서 이야기한다) ‘가지마세요.’ 하듯이 이 사람은 많은 환난을 받아야 된다, 라는 이 시나리오가 창세전에 이미 작정 다 되어 있어요. 그 시나리오에 맞춰서 사도바울을 태어나게 했고 살도록 하신 겁니다. 그것을 사도바울이 이해하게 되지요. 이해하기 때문에 사도바울의 소원은 뭐였습니까? 빨리 이 땅에서의 생을 끝장내는 겁니다.


시나리오가 어디까지 이어지는지는 모르겠는데 ‘빨리 끝장내고 나도 좀 쉬자. 주와 함께 거하는 것이 소원이다. 하지만 너희들 남아 있는 사람들 때문에 주께서 나에게 일을 시킨다.’고 이야기합니다. 1차, 2차, 3차로 전도하고 난 뒤에 로마로 가서 복음전하고 잘 했어요.


인기 좋았는데 5년 동안 투옥되고 그 다음부터는 투옥되고 투옥되면서 옥중서신이라 해서 빌레몬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에베소서를 쓰고 그 다음에 데살로니가전후서를 쓰고 그 다음에 죽기 전에 디모데전후서를 쓰고 목이 잘려서 죽었다는 거예요. 그래서 이 땅의 입장에서 보면 참 안된 사람이지요. 평소에 결혼 한 번 한 적이 있습니까, 애가 하나 있습니까, 자기 교회가 하나 있습니까?


천막기술 배워서 고린도천막협동조합회장을 지내본 적이 있습니까? 세상 적으로 그야말로 쓰레기도 이런 쓰레기가 없습니다. 그런데 본인이 그것을 자인해요. ‘나는 어디를 가도 쓰레기로서 이동하고 있다.’고 하는 거예요. 그런데 이것을 절대로 여러분들은 흉내 내면 안돼요. 애들은 가라! 이것을 흉내 내면 안돼요. 절대 안 됩니다.


젊을 때 선교한다고 돌아다니면 안돼요. 큰일 납니다. 괜히 헛바람입니다. 신바람은 황수관이지만 이것은 헛바람인거예요. 선교한다는 이런 일에 말려들면 안돼요. ‘그러면 목사님, 나의 시나리오는 뭡니까?’ 즐겁게 들으시기 바랍니다. 본인 시나리오는 전도서에 나옵니다. ‘더 착하지도 말고 악하지도 말고 책도 많이 짓는 것도 피곤하고 책 읽어도 소용없고 포도주 마시면서 아내와 함께 실컷 즐겨라.’ 그것이 딩동댕!


왜냐하면 ‘이빨 날라 가기 전에 귀가 안 들리기 전에 눈에 녹내장 와서 희미하게 되기 전에 실컷 즐겨라. 왜, 어차피 인생은 헛것이니까!’ 인생은 헛것 아닙니까. ‘헛되고 헛되니까 네 원대로 살아라.’ 그것을 네 자로 하면 ‘막 사세요.’ 또 나오네, 또 나와. 즐겁게 막 사세요. 어차피 인생은 이래 사나 저래 사나 죄니까.


또 이 대목만 잘라요. 십분 쉬기 전에 했던 이 마지막 대목 ‘막사세요.’라고 한 이것만 잘라서 ……. 항상 주님의 말씀자체가 우리의 행함에 어떤 의미를 두지 않는 이유는 바로 십자가 때문입니다. 십자가로 이미 규정된 거예요. 무슨 짓을 하든, 테레사 수녀 아니라 별별 것이 되어도 이미 그 자체로 죄에요. 이미 결정되었기 때문에. 구원은 예수님의 피로 구원받는 겁니다. 점심 먹고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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