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강의

다윗과 짐승들a

아빠와 함께 2021. 3. 10. 10:39

20210308a 부산강의 : [시편]36(22편)-다윗과 짐승들
(강의:이근호 목사)


시편 22편 16절부터 보겠습니다. “개들이 나를 에워쌌으며 악한 무리가 나를 둘러 내 수족을 찔렀나이다 내가 내 모든 뼈를 셀 수 있나이다 저희가 나를 주목하여 보고 내 겉옷을 나누며 속옷을 제비 뽑나이다 여호와여 멀리하지 마옵소서 나의 힘이시여 속히 나를 도우소서 내 영혼을 칼에서 건지시며 내 유일한 것을 개의 세력에서 구하소서 나를 사자 입에서 구하소서 주께서 내게 응락하시고 들소 뿔에서 구원하셨나이다”

여기 22편에 나오는 단어들 적어보겠습니다. 12절에 바산의 소, 그 다음에 사자, 그 다음에 16절에 개, 그 다음에 역시 20절에 개, 21절에 사자, 이러한 짐승들이 나오지요. 특징들이 공통점이 이들이 힘을 당해낼 수가 없다.

특히 바산이라 하는 것은 이스라엘 지리가 있다면 갈릴리, 사해, 요단강 흐르고 있고, 이쪽이 서쪽이고 동쪽이 요르단 있는데 이쪽에 바산이란 곳이 있어요. 길르앗, 모압, 암몬, 그리고 에돔 이걸 요단강 동쪽 편이라 하고 동쪽 편에 산이 있어요. 동쪽 산지에 바산이라는 약간 비탈진 평야 있는데 거기에 소들이 많이 있는 모양이죠.

소, 사자, 개, 사자, 감당할 수 없는 대상들이 다 인간들이었던 거예요. 사람들을 개라고 소라고 사자라고 이야기하고 그걸 공격하는 나를 힘으로 압제하는 인간들로 본다는 것은 다윗 속에 있는 인간관계에 대해서 재정리를 할 필요가 있다. 인간으로 보이냐? 인간이 아니고 이게 짐승이고 그것도 힘센 짐승이다. 인간관계를 힘센 짐승의 관계로 전부 다 전환시켜라, 재정립해버리란 말이죠. 네가 사람으로 여겼다면 사람으로 간주하지 마.

그러니까 다윗이라는 자기 본성을 그동안 엮였던 많은 인간관계들이 있잖아요. 그 인간관계를 뭐로 보느냐 하면 이제부터 나를 괴롭히는 짐승들로 관계를 재정립하라 이 말입니다. 여기는 조카도 있을 수 있고 이모도 아버지 있고 자식 있고 모든 여러 가지 관계들, 심지어 여기에 내연관계까지 있더라도 이걸 사람으로 보지 말고 이걸 짐승으로 봐버리면 어떤 효과가 있냐 하면 이들로부터 엮여진 모든 윤리와 도덕관계는 일거에 철수할 수 있어요. 제거할 수 있어요. 타인의 눈을 제거할 수 있다고요.

그동안 사람들이 주눅 들고 살아가는 이유는 나도 인간인 것처럼 그들도 인간이라고 여겼기 때문에 그런 인생을 힘들게 살은 겁니다. 인간으로 주고받고 하는 게 인간관계인데 받을 땐 좋았는데 받은 건 줘야 된다는 게 힘든 거거든요. 안 주면 내 체면이 또 문제가 되고. 난 참 인간도 아니야. 받아놓고 입 다물고 있다는 것은 사람이 아니야, 라고 할 때 본인이 나는 사람이다, 라는 이 괄호, 나는 사람이라 할 때 이 사람 안에 이미 다른 인간들이 여기에 나를 괴롭히기 위해서 투입된 관계 속에서 사람이란 거죠.

사람과 사람이 엮여진 그 만나는 장소 때문에 나는 사람이라고 한 겁니다. 그냥 거울보고 사람이라고 하지 않아요. 내가 아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나는 그 중에 하나다, 이 말이거든요. 그런데 그들이 짐승이라면 어떻게 돼요? 이 관계를 청산해야지요. 손자 키우는 게 짐승 키우는 것과 똑같아요. 짐승 하나 더 키우게 됐어요. 이게 관계 재정립입니다.

그런데 다윗이 그렇게 청산할 수 있는 어떤 권한이 있는가, 라고 했을 때 여기 하나님의 말씀이 개입되지요. 성경 볼 때 기본으로 봐야 될 것이 나옵니다. 다윗이란 인물이 있을 때 이 인물이 자기 나름대로 다른 사람과 좋은 관계를 이뤄서 나는 인간이고 싶다, 사람이고 싶다, 인간다운 인간이고 싶다. 이렇게 되면 불신자가 되지요. 왜? 하나님과 관계가 없기 때문에.

그러면 하나님이 여기에 다윗에게 인물이 주어졌다는 말은 마치, 여러분 한 번 물어봅시다. 지진을 내가 소유하는 겁니까, 안 그러면 지진에 휘말리는 거예요? 휘말리지요. 내가 콩닥콩닥해서 지진 유발자 아니잖아요. 지진 일어나면 거기에 나도 어쩔 수 없이 같이 흔들리게 돼있듯이 말씀의 진동이 오게 되면 내가 인간이고 싶다는 이런 소박한 꿈도 같이 다 깨져버리죠.

말씀이 다윗 인물을 분해한다고 볼 수 있어요. 하나님의 말씀이 인간을 분해해버리면 다윗은 말씀세계, 율법세계, 계시세계 속에 휘둘리게 됩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우리가 공식 하나 만듭시다. 말씀은 인물을 통해서 진동한다.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면 그 신약 요한복음 1장에 나오는 원칙이 구약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말씀은 인물을 통해서 나타난다, 진동한다.

진동한다는 말을 하는 것은 새로운 질서를 펼친다. 이건 다윗 본인의 질서가 아니에요. 내가 그러고 싶은 게 아니에요. 그냥 말씀에 휘둘리다보니까 주변이 달리 보이는 겁니다. 전에는 나를 위해 살다보니까 나한테 저 사람이 이익일까, 손해일까 해서 계속 내가 관계 맺을 사람, 관계를 정리할 사람 이렇게 구분했는데 말씀이 딱 오니까 내가 그럴 권한이 없어요. 저 사람은 배척하고 저 사람은 받아들이고 하는 권한이 나한테는 없어지는 겁니다. 그리고 본인 자체도 본인이 원하는 새로운 절서에 합류가 되지요.

이제부터 좀 어렵습니다. 집중하란 이야기죠. 그게 뭐냐 하면 여러분 둘 중에 어느 게 맞는지 보세요. 나는 죄 짓는 것을 그만두겠다. 두 번째, 나는 나의 죄를 고백하겠다. 어느 것이 하나님의 질서에 부합되는 겁니까? 나는 죄 짓는 것을 그만두겠다. 이게 하나님께 영광이 되겠어요, 아니면 나는 나의 죄를 고백하겠다. 이게 영광이 되겠습니까?

1번 같이 나는 죄 짓는 것을 그만두면 나의 인간관계, 나의 나다움, 나의 인물다움은 그냥 유지됩니다. 그러면 이건 말씀의 질서에 장애물이 돼요. 왜냐하면 하나님도 잘났지만 나도 잘난 존재가 돼요. 하나의 왕관은 두 왕이 쓸 수가 없어요. 하나의 왕관은 두 왕 중에 하나의 왕만 써야 됩니다.

그런데 인간이 자꾸 자기 죄 짓는 것을 그만두겠다는 것은 노림수가 있거든요. 뭐 어쩌겠다고? 죄를 안 짓겠다면 어쩌겠다는 겁니까? 나는 나로 즐거워하겠다는 뜻이거든요. 따라서 나는 나를 위해서 살겠다는 뜻입니다. 나를 위해서 산다는 그 안에 믿음, 소망, 사랑 뭘 집어넣고 하나님을 집어넣어도 나를 위한 하나님, 나를 위한 예수, 나를 천당 보내는 나를 위한 사랑.

이 모든 것은 결국 궁극적으로 뭐냐? 나는 죄 짓는 것을 그만두겠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나를 책망하려면 책망하세요. 책망할 게 별 것 없지요. 하나님이 날 인정해줘야 되지요. 이런 식이에요. 이렇게 되면 여기 악마적 나는 누구의 걸림돌이냐 하면 하나님이 하는 일에 걸림돌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 나는 나의 죄를 고백하겠다는 말은, 나는 이미 죄가 돼버렸지요(나=죄). 이건 뭐냐 하면 하나님의 걸림돌이 해소된 거예요. 다시 말해서 난 하나님과 경쟁하지 않겠습니다. 내 인생을 놓고 이 인생을 내 것이라고 우기지 않겠습니다. 지나간 인생은 내가 공들여서 이뤄놓은 그러한 연대기가 아닙니다, 라고 고백하는 거예요. 그리고 앞으로도 그렇습니다.

나는 내 죄를 고백하겠다는 말은 모든 율법의 목적은 1번이 아니고 나는 죄 안 짓는 것, 그만두는 걸 목적이 아니고 2번을 목표로 하고 있다는 것을 본인이 인정한 거예요. 1번, 나는 죄 짓는 걸 그만두겠다고 하면 나의 적들은 뭐냐 하면 나를 죄 짓게 하는 것이 나의 적이 되지요. 그런데 2번, 나는 죄 지은 것을 인정하고 고백하겠다고 한다면 2번의 적들은 바로 1번이 2번의 적이 되는 거예요.

나는 죄 안 짓는다. 이게 나는 죄를 고백하는 사람 앞에서 적이 돼버리는 겁니다. 이렇게 해서 인류는 두 종류로 나눠지게 됐습니다. 이게 뭐냐? 하나님은 인물중심으로 일하신다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이렇게 다윗이나 아브라함이나 성경에 나오는 모든 인물중심으로 하는 이유는 제대로 된 인물중심을 하나님께서 따로 챙겨놓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2번 같은 경우에 나는 죄 지은 것을 고백하겠다는 것은 이미 나는 나에 대해서 포기했다가 됩니다. 나를 포기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의 적이 됩니다. 그러면 포기하는데 어떻게 포기하는지 그런 예가 율법에 나와 있어요. 왜 다윗을 중심한 주변인물들이 개가 되고 사자가 되고 소가 되고 다윗을 힘들게 하고 어렵게 해야 되는지는 이제 율법을 하나 보면서 우리가 그 내막을 알 수 있습니다.

신명기 25장 9절에 보면 인간 신체의 분비물 중에 하나가 등장합니다. “그 형제의 아내가 장로들 앞에서 그에게 나아가서 그의 발에서 신을 벗기고 그 얼굴에 침을 뱉으며(여기에 ‘탁’자를 집어넣으면......) 이르기를 그 형제의 집 세우기를 즐겨 아니하는 자에게는 이같이 할 것이라 할 것이며 이스라엘 중에서 그의 이름을 신 벗기운 자의 집이라 칭할 것이니라” 사람 얼굴에다 침을 뱉고 신발을 벗긴다는 것은 너는 이 자리에 설 자격 없다는 그런 뜻이거든요. 저주받아야 마땅하다는 뜻이다. 도대체 이 사람이 무슨 죄를 지었는가?

여기 신명기 25장 5절에 보면, “형제가 동거하는데 그 중 하나가 죽고 아들이 없거든 그 죽은 자의 아내는 나가서 타인에게 시집가지 말 것이요 그 남편의 형제가 그에게로 들어가서 그를 취하여 아내를 삼아 그의 남편의 형제 된 의무를 그에게 다 행할 것이요 그 여인의 낳은 첫 아들로 그 죽은 형제의 후사를 잇게 하여 그 이름을 이스라엘 중에서 끊어지지 않게 할 것이니라” 이렇게 돼있어요.

이스라엘이란 이름은 특이한 민족이에요. 특이한 민족이기 때문에 다른 민족은 인간들 육체의 관계로서 계속 자식 낳으면 그걸로 민족이 되고 집안이 되는 반면에 이스라엘 민족은 거기에 하나님의 율법이 중추신경으로 가서 그 자손이 이어져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어떤 남자가 결혼해서 아들이 없다, 할 때는 하나님께서 중추신경의 단면을 끊어보는 겁니다. 단면에 뭐가 있는지를.

이게 오늘 강의에 첫 번째 나오는 제일 어려운 건데 단면에 뭐가 나오느냐 하면 공백이 나와요. 제가 어릴 때 국민학교 때 길거리에서 어른들이 쓸데없는 짓하는 걸 봤어요. 엿장수 가니까 엿으로 내기하자. 엿 사서 뚝 분질러서 훅훅 부는 거예요. 왜 그 짓하지요? 나 지금 생각해도 이해가 안 돼요. 딱딱한 엿을 분질러서 구멍이 큰 쪽이 엿 값을 물어주는 내기. 내기 못해서 환장을 했어요. 그것도 구멍 크게 한다고 훅 분다고요.

중추신경, 천국과 이어지는 천국에서 내려오는 율법이죠. 율법에 의한 어떤 인물 또는 인물 군(집단) 형성에 관계된 중추신경에는 중간에 뭐가 있냐 하면 공백이 필수적이다. 비어있는 거예요. 바깥에는 혈육이죠. 혈육이라서 기존에 이방민족과 차이점이 안 보입니다. 왜? 둘 다 아버지, 어머니 결혼해서 자식 낳으니까 그 자식이 그 자식이고 사람 결혼해서 애 낳는 게 당연하지 그게 뭐 이상하냐 하지만 안에는 반드시 그냥 자식이면 안 되고 공백을 둘러 싼 혈육이어야 돼요.

공백이란 말은 뭐냐 하면 율법이거든요. 율법이 왜 공백, 빈자리가 되느냐 하면 인간의 율법으로서 불가능하기 때문에. 지키는 것이 불가능해요. 왜 불가능하냐 하면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것은 죄를 안 짓는 게 아니고 죄를 지었다고 고백하는 거예요. 율법 지키는 데 내가 손을 뗐다는 거예요.

그 손 뗐음을 공백 주위에 감아버린단 말이죠. 안은 비워놓고. 안은 누가 채울 거예요. 장차 율법대로 오신 분이 채울 거예요. 그 빈자리가 나보다 더 소중해요. 나는 그냥 시다바리, 그 빈자리를 보호하는 시다바리인 동시에 그 빈자리를 볼 수 있는 안목을 가진 새로운 피조물이 이스라엘이 되는 거예요. 율법 지킴은 불가능한 겁니다.

그런데 이야기가 뭐라고 하느냐 하면 혈육 안의 빈자리를 율법으로 채우는데 아까 보셨잖아요. 신명기 25장 5절, 6절에 뭐냐 하면 형제가 동거하는데 옛날에는 형제가 동거했어요. 아버지 재산을 맏이에게 다 줬기 때문에 농사짓는 집안에서 땅을 맏이에게 주면 둘째, 셋째는 혼인을 하던 독립이 안 돼요. 농사지을 때 많은 일꾼이 필요하기 때문에 아버지로부터 대대로 주어지는 가업이거든요. 가업을 효율적으로 지키기 위해서 형 혼자로는 안 되고 여러 형제들이 달려들어 농사를 지어야 겨우 농사가 되는 농경시대 이야기입니다.

형이 결혼을 해서 형수와 사이에 아들이 없이 형이 그만 죽었어요. 그러면 땅 이름은 맏이 이름으로 가는 거예요. 땅을 둘째 이름으로 갈 수 없어요. 셋째 이름으로 안 됩니다. 둘째, 셋째는 그냥 형이 망하던 안 망하던 같이 빌어먹어야 돼요. 그래서 그렇게 맏이 쟁탈전을 야곱과 에서가 죽으라고 싸우잖아요. 에서는 이미 내가 맏이니까 변동사항 없다고 여기고 야곱의 믿음은 아마 바뀔 수 있을 걸, 하고 기어이 달려들어서 아버지의 유산을 몽땅 다 차지해서 자기가 맏이 노릇을, 재산 가지면 최고지요.

그래서 지금도 늙으신 부모님들이 유산을 줄 때 제대로 유산 안 주게 되면 추석이나 명절에 아버지가 죽든 형이 죽든 동생이 죽든 죽는 수가 생겨요. 현대자본주의에서 ‘나’라는 개념은 무슨 개념이냐 하면 내 돈 개념이에요. 돈이 없으면 ‘나’가 없는 거예요. 왜냐하면 인간은 하나님을 알긴 하지만 믿을 수가 없어요.

그것을 제가 어제 오후에 했지만 이미 인간에게는 믿음이 있어요. 내 걸 믿는 거예요. 내 걸 믿기 때문에 하나님께 치고 들어올 자기가 없어요. 내 것 키워주는 하나님 같으면 내가 같이 상대할 용의가 돼있다는 그게 믿음이에요. 내 것 건드리면 신자든 오십 년 교회 다니든 육십 년 교회 다니든 목사, 장로 필요 없어요. 내 것 건드리면 용서가 안 됩니다. 내 자식 건드리면 용서가 안 되잖아요.

은별이가, “엄마 나 조졌어. 자수할까?” 엄마가, “걱정하지 마. 내가 지켜줄게.” <펜트하우스> 이야기입니다. 걱정하지 마. 염려하지 마. 드레스 다 불태워주고. 때려죽였던 트로피는 모르겠지만 내가 지켜줄게. 걱정하지 마. 그게 인간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종교는 내 것 지키는 거예요. 내 혈육 지키는 것이고 내 돈 지키는 거예요. 그걸 하나님, 예수 동원해서 아무리 감추려 해도 이게 나중에 다 파토납니다.

이게 믿음, 소망, 사랑 다 소용없어요. 헌신, 기도, 철야 다 소용없어요. 이거에요. 그것 지키기 위해서 사람들은 말씀을 지킬 수 있다고 나온 거예요. 왜? 말씀을 지키게 되면 실제 정작 내가 지키려고 한 내 것은 지킬 수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1번입니다. 그런데 만약에 나는 말씀 지킬 수 없기 때문에 저주받아도 쌉니다. 이 말은 내 것 다 가져가세요. 이런 뜻이란 말이죠. 그러니까 여러분 자신의 신앙에 속아 넘어가지 마세요. 우리 자신의 신앙에 현혹되지 마세요.

우리는 신앙이 없어야 돼요. 왜? 공백이 돼야 되니까. 공백 안에 장차올 예수 그리스도의 신앙이 있어줘야 되지 내 신앙이 가운데 차지해버리면 영원한 저주입니다. 죄를 즐거이 감사히 고백한다는 것은, 내 중앙지점에 주님이 들어왔다는 거예요. 내가 더 이상 나를 안 기대고 안 믿어도 상관없는 그러한 존재가 되었다는 그 기쁨이에요.

문제는 율법이, 형수가 애기가 없을 때에 둘째 동생이 형수와 결혼을 해야 된다는 겁니다. 여러분도 어릴 때 형수와 한 집에 산 사람은 알겠지만 형수란 존재와 결혼하고 싶습니까? ‘형수=잔소리꾼’이에요. 형수를 시동생을 원수로 취급합니다. 시동생한테 아무리 잘해줘도 이건 본전밖에 안 되고 시동생을 형수를 보면서 내가 결혼한다면 절대로 저런 여자와 결혼 안 한다고 다짐을 하게 만드는 동기가 돼요.

첫째는 늙은 거예요. 남자에게 늙음은 용서가 안 됩니다. 아무리 돈 많아도 늙은 여자는 싫어요. 늙었다는 것이 첫째, 형수와 결혼할 수 없는 장애요소고요. 둘째, 늙었다. 셋째, 늙었다. 다른 말로 하면 첫째, 못 생겼다. 둘째, 못 생겼다. 세 번째, 못 생겼다. 예쁠 가능성 전혀 없다.

그래서 형수와 결혼하라는 율법은, 물론 동생이 죽으면 또 결혼 안 한 형이 처제와 결혼하는 그것도 포함되지만 그런 것은 대부분 없으니까 형수와 결혼할 때 이것은 인간의 기본적인 본성을 율법은 건드립니다. 그래서 결혼하기 싫은 거예요. 우리가 오난이라는 사람, 유다의 둘째 아들이죠. 그 오난의 심정을 우리는 동감하고 이해해야 됩니다. 하나님께 저주받아 죽었잖아요.

저주받아 죽었을 때 그걸 보면서 나도 오난 같으면 저주받을 일이 있더라도 결혼 안 한다. 왜냐하면 형수와 젊은 여자와 결혼하게 되면 하지요. 1+1이니까 하는데 그게 아니고 형수와 해버리면 이제는 아무리 자기 때에 맞는 여자, 딱 네 살 아래 정도 고분고분 할 수 있는 나이, 너무 철딱서니 없어도 안 되고 통계상 그 정도 네 살 정도의 그 희망은 끝났습니다. 무슨 팔자가 형 팔자에 내가 종속된다는 게 얼마나 기분 나쁜 이야기에요.

그래서 율법은 우리로 하여금 어쩔 수 없이 거부할 수밖에 없는 요소가 있습니다. 왜 사람이 율법에 대해서, 율법 보기 전에는 율법 지켜서 복 받아야지, 율법 지키면 복을 준다는데 그 경품권이 얼마나 대단한데 꼭 지켜서 복 따내야지, 라고 하면서 막상 율법적인 환경이 지진이 몰려오게 되면 내 것 지키려고 후딱 돌아서버려요. 곁눈질 안 할 수 없습니다. 율법 지킬 때 내 것은 어떻게 될까? 완전히 사달 나네. 그럼 내가 미쳤다고 지켜? 저주받는 한이 있더라도 이걸 못 놓지요. 부자청년처럼 근심하면서 갈 수밖에 없어요. 원치 않는 거예요.

그래서 형수와 결혼하기 싫어하는 사람을 이스라엘에서 퇴출시켜버려라. 그냥 퇴출시키지 말고 너는 저주받았다고 징표를 남기면서 퇴출시키는 것, 우선 신발을 벗기게 해요. 너는 이 땅에 살 권한 없어. 그 다음에 침을 탁 뱉어버립니다. 하나님의 원수다 이 말이죠. 네가 원수의 표본이란 거죠.

율법에 신명기 25장 9절에 그러한 벌칙조항이 있다는 말은, 어떤 특징이 인간이 아니라 모든 인간은 율법을 대할 때 위반하고 싶은 속성이 강하게 자극을 받아 활동을 개시하게 된다 이 말입니다. 로마서 7장에 나오지요. 율법이 오기 전까진 점잖았는데 율법이 오고 난 뒤에는 변명조로 지키려고 했는데 잘 안 되네요. 율법을 지켜야 되는데 하나님 쪽을 지키지 않고 본성상 내 것부터 챙기는 본능, 본성 어느 누구도 예외가 없는 겁니다. 따라서 율법을 준 것은 자력으로 인간의 힘으로 율법세계에 들어올 수가 있다, 없다? 없는 겁니다.

율법 내의 해석은 이렇게 하면 돼요. 동어반복, 같은 말을 계속해서 돌려막기 하는 것, 반복시키는 이것이 율법해석입니다. 그 한 예를 요한일서 2장 19절 보겠습니다. “저희가 우리에게서 나갔으나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하였나니 만일 우리에게 속하였더면 우리와 함께 거하였으려니와 저희가 나간 것은 다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함을 나타내려 함이니라”

이 안에 새로운 내용이 추가됩니까, 추가 안 됩니까? 전혀 추가된 게 없지요. 그들이 왜 우리에게 속하지 않았느냐? 그들이 왜 나갔느냐? 우리에게 속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갔다. 그들은 왜 속하지 않았는가? 우리에게 나간 것으로 알 수 있다. 이게 무슨 말이에요? 미장원 옆에 애견센터 있다. 애견센터 어디 있습니까? 미장원 옆에. 미장원은 애견센터 옆에. 이게 뭐예요?

이것은 모든 인간의 해석에 있어서는 내 것을 중심으로 해서 해석하는 것을 율법이 거부하기 때문에 그래요. 그 따위로 해석하지 마라. 너의 판단을 기준으로 해서 해석하지 마라. 왜? 너라는 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공백이기 때문에 없기 때문에. 그래서 율법의 모든 내용은 내가 지키려고 하는 사람에게는 절대로 허용하지 않는 내용들이에요.

이 말은 네 중심자리 내놓으란 뜻이에요. 현재 네가 율법을 못 지키는 것은 성의가 없어서가 아니라 결심이 약해서가 아니라 공백의 자리, 빈자리를 네가 차지하고 있으니까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 겁니다. 이건 하나님만이 지킬 수 있는 것을 도대체 네가 배후에 누구 사주를 받고 이건 내가 지킬 수 있다고 우기는 그것, 그렇게 되니까 율법을 지키나 뭘 지키나 이거는 그것 지켜서 내 것 더 확장시키고 내 것 더 키우겠다는 그런 욕심만 나온다는 겁니다.

그러면 율법은 왜 그렇게 인간을 못 살게 굴고 닦달내고 밀어붙이는가? 바로 자비는 죄에서 나오기 때문에 그래요. 율법의 완성은 사랑과 자비거든요. 자비의 속성은 어떠냐 하면 그냥 주는 거예요. 대가 없이 그냥 주는 거예요. 그럼 이 말은 애초부터 대가가 없는 게 아니고 대가는 타인 어떤 미지의 인물이 대가를 치렀다는 겁니다.

그럼 여기에 하나님의 자비를 받는 사람은 나 구원받았다는 게 성립이 안 돼요. 공백으로 인하여 구원받았다면 이 공백 된 자리를 차지하신 그분을 소개하고 증거 하는 기능으로서 자비를 베푼 겁니다. 사랑을 베푼 거예요. 이것이 바로 천국입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을 생각할 때 이러한 율법의 공백기능을 모르고 오해해서 예수님 나오고 천사 나오고 하나님 나오니까 사람들은 주님이여 내 곁에 있어주세요, 하는데 이 말이 성경에선 용납이 안 돼요. 여기 나가 들어가잖아요. 주님 안에 꽂혀야지 내 곁에 있으면 안 됩니다. 내 곁에 있어줘~ 한 발짝 떨어지면 한 발짝 헤어지는, 그런 비슷한 노래 있어요. 내 곁에 있어달라는 거예요. 내 곁에 있는 것은 강아지만 있으면 돼요. 고양이나 강아지.

다윗이란 인물은 안에 하나님의 말씀이 새로운 질서로 작용한다. 그 순간 다윗의 주변이 뭘 보냐 하면 죄의 세력으로 바뀝니다. 만약에 다윗이 말씀의 인물이 아니고 1번, 다윗이 말씀을 지키려고 하게 되면 주변 인물은 죄로 전환되지 않아요. 죄로 바뀐 게 아니고 고만고만한 너나 나나 똑같은 인간, 같은 인간으로 간주되지 짐승으로 변하지 않습니다. 다윗 주변이 짐승으로 변했다는 말은, 다윗 안에 다윗을 기준으로 하지 않는 분이 있다는 뜻이에요. 다윗이 있지만 자기가 주인공이 아니란 말이죠.

다윗에게 작열하는 말씀의 완성은 결국은 다윗 주변에 있는 모든 것을 사람 취급 못 받는 짐승으로 간주하는 그걸 목표로 해서 쭉 다윗으로 하나님께서 다루시는 겁니다. 움직이는 말씀 자체로. 어제도 이야기했지만 요나가 니느웨 가서 말씀 전할 때 사람들에게 촉구하고 사람들을 애타해서 어떻게 구원시키려고 애를 썼습니까, 아니면 그냥 질러버렸어요? 그걸 세 자로 ‘모질다’ 참 모질게 전했어요. 믿지 마. 누가 손핸데. 배짱도 이런 배짱이 없다니까요. 아쉬운 것 하나도 없어요.

그러니까 요나에서 우리가 배울 게 뭐냐 하면 요나는 말씀을 전하면서 말씀에 대해서 회개할 자는 아무도 없음을 명백히 한 마음으로 전했어요. 이런 자세가 정말 얼마나 좋은 자세입니까. 아무도 없을 것이다. 이 말씀을 믿을 위인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 자세로 전했어요. 이 말은 뭐냐 하면 전하는 게 내 뜻이 아니다. 내가 뭐 얻을 게 있어서 노릴 게 있어서 전하는 게 아니다. 나도 어쩔 수 없어. 주시니까 전할 뿐이지 믿든 안 믿든 내 책임 아니야. 그러한 자유성, 그런 여유, 이것은 자기를 포기한 사람에게 해당되지요.

그 다음에 그래서 신명기 25장 9절에서 형수와 결혼할 수 없는 자들의 발생을 하나님께서 미리 알고 그런 자에 대한 처벌마저도 율법 안에 들어있습니다. 다시 한 번 이야기합니다만 율법을 준 것은 이걸 지키라고 준 게 아니고 지키지 못했음을 자백하라고 준 겁니다. 그 다음에 더 진도 나가봅시다.

그러면 자비가 죄에서 나온다. 죄에서 나올 때 자비는 빈자리, 공백, 그 공백의 자리는 전에 내가 또는 내 것이 있는 자리가 비어있을 때 거기에 자비가 담깁니다. 이 자비와 사랑을 못 받을 사람과의 차이 나는 삶을 보여줍니다. 이미 성경을 지키면 사랑을 받는 게 아니고 율법을 못 지킨 것을 계기로 해서 자비를 받은 사람이 구원을 받는다면 이 사람, 구원받은 사람 주위에서 어떤 사람이 포진돼 있느냐 하면 여전히 율법 지켜서 구원받고자 하는 사람들로 차별화 되면서 확연하게 등장하겠지요. 사람을 볼 때.

사람을 볼 때 그런 식으로 본다는 것은 내 중심이 아니고 나한테 이익이냐, 손해냐, 자기중심이 아니고 말씀중심, 말씀 완성중심으로 세상을 다시 보는 눈이 열리는 겁니다. 동시에 자기 자신을 그렇게 볼 수 있고. 지금까지 여러분들의 어느 정도 이해됐는데 이 공백에 대해서 좀 더 진도 나가겠습니다.

그러면 이걸 이론상 알았습니다. 나한테 빈자리가 오는구나. 나는 죄를 고백하면 되고 그러면 내가 있던 자리를 비어놓으면 되고 빈자리에 주님께서 사랑으로 자비를 채워주면 나는 예수님의 사랑의 대상자로 함께 있는 자로 구원받는다, 라는 것은 이론으로 지식으로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만약에 지식이 실제로 이뤄진다면 이 공백이 그냥 우리는 빈자리라 했잖아요. 빈자리 아니고 누군가가 올 때 이런 지식을 갖고 있는 사람은, 당신이 당신이옵니까?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겠어요, 아니면 유령으로 나타나겠습니까? 바로 이게 유령으로 나타난다는 겁니다. 그게 마태복음에 보면 나와요.

누가복음 6장 5절에도 나오고 마태복음에도 나오는데 마태복음 14장 25절에, “밤 사경에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서 제자들에게 오시니 제자들이 그 바다 위로 걸어오심을 보고 놀라” 그 다음에 뭐라고 돼있어요? 유령인가? 유령이라고 본 거예요. 그냥 막연하게 아무 공포심이 없는 빈자리, 빈자리는 공포심이 없어요. 그냥 비어있으니까.

그런데 그 빈자리가 빈자리로 내가 유지한다고 되는데 정작 나타나신 분이 빈자리가 아니고 유령으로 나타나실 때 그럼 뭐가 부정되느냐 하면 이런 이론상, 나 이렇게 구원받았다는 이 자체가 상대를 못 알아보는 순간 이 자체가 허망하게 돼버려요. 이런 준비조차도 구원받는데 소용없는 것이 돼버립니다. 이것은 인간이 구원받기 위해서 사전준비, 예비단계가 전혀 필요 없다는 거예요.

그 유령이 하시는 결과로서 우리가 이런 상태에 놓이게 되는 거지 결과물로 놓여야지 이렇게 딱 아귀 맞춰놓고 프레임 딱 맞춰놓고 구원해주는 법은 없습니다. 그것이 바로 다윗의 한계인 동시에 오늘날 우리의 한계고 그리고 아브라함의 한계고. 아브라함이 복을 받았지만 정작 자기의 빈자리를 찾아오는 주인공에 대해서는 아브라함과 사라 둘 다 농담으로 여겼습니다. 왜냐하면 나한테 자식이 있어야 된다는 생각은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아예 없었습니다.

이 말은 인간이 아무리 복음적 프레임을 짜도 그건 어디까지나 내가 납득이 되는 한계 내에서 짰기 때문에 인간은 그 한계 너머로 갈 수 없는 거예요. 부산 사람이니 잘 알겠지요. 연안. 연안이란 육지의 끝이에요. 성도는 연안으로 몰리는 겁니다. 내가 아는 데까지 계속 가요. 내가 공부를 하면 공부해서 아는 만큼 연안은 점점 더 늘어나겠지요. 길어지겠지요.

하지만 기껏 가봐야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그 경계선까지 갑니다. 내가 아는 모든 것의 끝자락까지 가요. 그리고 그 옆에는 뭐냐? 이거는 무서운 바다지요. 경계선. 인간은 물에서 바다에서 살 수 없잖아요. 바다 속에 들어갈 수 없잖아요. 다윗은 자기가 아는 경계선까지 늘 몰립니다. 그게 휘몰리게 돼있어요. 데려가게 돼있어요.

연안부두 말고 내륙 쪽에 있을 때는 주님 오면 영접해야지 그렇게 자신만만했던 다윗도 막상 하나님께서 다윗을 그 경계선까지 가니까 온갖 두려움과 걱정과 염려가 쉴 틈이 없어요. 계속 일어나는 겁니다. 하나님, 제 하나님 맞잖아요. 그게 오늘 하고 있는 시편 22편의 내용이에요. 시편 22편 10절에 보면, “내가 날 때부터 주께 맡긴바 되었고” 계속해서 하나님과 저와 아는 사이고 끊어지지 않는 관계인 것을 제가 고백하나이다, 하면서 계속 이야기하는 게 뭐냐 하면 21절에, “나를 사자 입에서 구하소서 주께서 내게 응락하시고 들소 뿔에서 구원하셨나이다”

이유도 모른 채 저 인간들이 짐승으로 돌변해서 나를 죽이려고 달려드는데 거기에 대한 자기의 대처 능력이란 것은 결국은 자기 힘으론 이길 수 없지요. 왜냐하면 들소기 때문에 그리고 사자기 때문에 그리고 이성을 잃어버린 개기 때문에. 인간의 선을 넘어선 인간도 아니에요. 개기 때문에 이건 뭔가 나를 먹잇감으로 노리고 맹목적으로 계속 달려드는 거예요.

자기가 쫓기다, 쫓기다 계속 쫓기는 쪽으로 어디까지 쫓기느냐 하면 자기의 모든 기대나 예상한 것, 모든 것을 포기할 연안까지 해변까지 죽음 직전까지 몰리게 되는 겁니다. 다윗이 그때 나온 시에요. 시편 22편 1절 보겠습니다.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버렸다는 것은 자기가 아는 한계 내에 이건 완전 버린 것이다. 버림받았다는 것은 이런 상태가 버림받은 거라, 라고 자기가 완전 확신하고 있는 겁니다. 나는 버림받았어. 희망 없어. 내가 하나님께 도와달라는 그 외에는 어떤 도움도 손에 쥐는 게 아무 것도 없어. 그렇게 되지요.

아까 처음에 뭐라 했습니까? 다윗은 인물은 안에 말씀이 들어있지요. 말씀이 들어있는 다윗으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짐승들로 휘몰리게 하고 쫓기게 하는 이유가, 말씀의 세계에서 이 땅에 펼치는 것은 바로 다윗의 체험을 통해서 알려주고자 하는 것은 뭐냐? 죽음의 의미입니다.

죽음에 두 종류가 있어요. 첫째는 숨 끊어지는 죽음. 숨 끊어지는 죽음은 아무런 우리에게 무서움이 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숨 좀 안 쉬면되지. 그러면 끝나는 문제에요. 숨 안 쉬면되지 그게 뭐가 무서워요. 두 번째는 뭐냐 하면 내 것을 기어이 다 버리는 데서 오는 죽음, 내 것을 일거에 상실시키는 데서 오는 그 아픔과 그 두려움, 이게 죽음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십자가 달릴 때 기도할 때 뭐라 했습니까? 아버지여 내 뜻대로 마옵시고. 그 순간에 제자들은 지 뜻대로 잘 자고 있었지요. 예수님도 연안까지 마지막 해변, 육지의 끝까지 간 거예요. 여기서부터는 자기가 자기의 모든 것에 손을 떼야 되는 겁니다.

이것까지 주께서 몰아넣는 이유는 뭐냐 하면 이 세상 전체가 하나님의 율법 앞에서 죽음의 세계란 것을 인간은 기어이 자기에서 손을 떼야 될 그러한 존재인 것을 다윗을 통해서 예수님을 통해서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이렇게 알려주십니다. 손을 떼라. 그게 죽음 상태에요. 그러니까 자기 것 많고 풍요하고 잘 나갔어도 그게 죽음 상태에요.


10분 쉬었다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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