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412a 부산강의 : [시편]37(22편)-천국 요소
(강의:이근호 목사)
다윗의 시, 영장으로 아얠렛샤할에 맞춘 노래
1.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하여 돕지 아니하옵시며 내 신음하는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
2. 내 하나님이여 내가 낮에도 부르짖고 밤에도 잠잠치 아니하오나 응답지 아니하시나이다
3. 이스라엘의 찬송 중에 거하시는 주여 주는 거룩하시니이다
4. 우리 열조가 주께 의뢰하였고 의뢰하였으므로 저희를 건지셨나이다
5. 저희가 주께 부르짖어 구원을 얻고 주께 의뢰하여 수치를 당치 아니하였나이다
6.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훼방거리요 백성의 조롱거리니이다
7. 나를 보는 자는 다 비웃으며 입술을 비쭉이고 머리를 흔들며 말하되
8. 저가 여호와께 의탁하니 구원하실걸, 저를 기뻐하시니 건지실걸 하나이다
9. 오직 주께서 나를 모태에서 나오게 하시고 내 모친의 젖을 먹을 때에 의지하게 하셨나이다
10. 내가 날 때부터 주께 맡긴바 되었고 모태에서 나올 때부터 주는 내 하나님이 되셨사오니
11. 나를 멀리하지 마옵소서 환난이 가깝고 도울 자 없나이다
12. 많은 황소가 나를 에워싸며 바산의 힘센 소들이 나를 둘렀으며
13. 내게 그 입을 벌림이 찢고 부르짖는 사자 같으니이다
14. 나는 물같이 쏟아졌으며 내 모든 뼈는 어그러졌으며 내 마음은 촛밀 같아서 내 속에서 녹았으며
15. 내 힘이 말라 질그릇 조각 같고 내 혀가 잇틀에 붙었나이다 주께서 또 나를 사망의 진토에 두셨나이다
16. 개들이 나를 에워쌌으며 악한 무리가 나를 둘러 내 수족을 찔렀나이다
17. 내가 내 모든 뼈를 셀 수 있나이다 저희가 나를 주목하여 보고
18. 내 겉옷을 나누며 속옷을 제비뽑나이다
19. 여호와여 멀리하지 마옵소서 나의 힘이시여 속히 나를 도우소서
20. 내 영혼을 칼에서 건지시며 내 유일한 것을 개의 세력에서 구하소서
21. 나를 사자 입에서 구하소서 주께서 내게 응락하시고 들소 뿔에서 구원하셨나이다
22. 내가 주의 이름을 형제에게 선포하고 회중에서 주를 찬송하리이다
23.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너희여 그를 찬송할지어다 야곱의 모든 자손이여 그에게 영광을 돌릴지어다 너희 이스라엘 모든 자손이여 그를 경외할지어다
24. 그는 곤고한 자의 곤고를 멸시하거나 싫어하지 아니하시며 그 얼굴을 저에게서 숨기지 아니하시고 부르짖을 때에 들으셨도다
25. 대회 중에 나의 찬송은 주께로서 온 것이니 주를 경외하는 자 앞에서 나의 서원을 갚으리이다
26. 겸손한 자는 먹고 배부를 것이며 여호와를 찾는 자는 그를 찬송 할 것이라 너희 마음은 영원히 살지어다
27. 땅의 모든 끝이 여호와를 기억하고 돌아오며 열방의 모든 족속이 주의 앞에 경배하리니
28. 나라는 여호와의 것이요 여호와는 열방의 주재심이로다
29. 세상의 모든 풍비한 자가 먹고 경배할 것이요 진토에 내려가는 자 곧 자기 영혼을 살리지 못할 자도 다 그 앞에 절하리로다
30. 후손이 그를 봉사할 것이요 대대에 주를 전할 것이며
31. 와서 그 공의를 장차 날 백성에게 전함이여 주께서 이를 행하셨다 할 것이로다
시작하겠습니다.
시편 22편 26절에서 31절까지입니다. “겸손한 자는 먹고 배부를 것이며 여호와를 찾는 자는 그를 찬송할 것이라 너희 마음은 영원히 살찌어다” 이렇게 돼있는데 여기에 여호와를 찾는 자부터 먼저 규정돼야지요. 찾는 자가 23절에 보면 야곱의 모든 자손으로 돼있어요. 여호와를 찾는 자가 이방민족이 되지 못하고 야곱의 모든 자손, 이걸 이스라엘이라고 하지요. 이스라엘에게 국한된 해당되는 이유가, 여호와 하나님이 이들을 친히 만드셨다 이 말이죠.
만드셨다는 말을 이렇게 보면 쉽지요. 뭐냐 하면 이걸(야곱의 모든 자손) 지워버리는 거예요. 그럼 여기는 뭐가 있느냐? ‘없음’이죠. 이스라엘이 만들기 전에는 없지요. 그러면 여기 누가 있습니까? 여호와 하나님이 있지요. ‘있음’이죠. 있음에서 없는 자리에 이스라엘을 만든 겁니다. 야곱의 모든 자손을 만든 거예요.
그렇다면 이스라엘은 여기에 점선으로 표시하면 돼요. 이스라엘은 뭐라 했습니까? 여호와를 찾는 자지요. 여호와를 찾는 자는 여호와가 계심으로서 만들어진 거죠. 이스라엘을 점선으로 하는 이유가 기존에 모든 종족들이 있겠죠. 종족 또는 혈족 또는 혈육 또는 민족, 이게 다 어디서 내려왔느냐 하면 아담에서 내려온 거예요. 아담에서 내려온 모든 사람은 이스라엘 속에 들어올 수 있겠습니까? 없습니다. 왜냐하면 여호와 때문에 없는 데서 만들어졌기 때문에 모든 관계는 여기서 관계들이 다 끊어져요.
그래서 이 부분의 결론 내리면 이렇게 돼요. 이 세상에 여호와를 찾는 자는 없다 정도가 아니고요. 있을 수 없다가 맞아요. 이게 뭐냐? 아까 시편 22편 23절에, “야곱의 모든 자손이여” 그러니까 있을 수 없는 거예요. 여기서 슬슬 어렵기 시작합니다. 있을 수 없다는 말은 아담으로 태어난 모든 인간의 아이디어 속에 누가 없다? 여호와가 없다는 말입니다.
여호와가 있으면 인간 쪽에서 자기가 예상해서 여호와를 찾으면 되는데 아담으로 태어난 모든 인간의 아이디어 속에는 여호와가 없습니다. 그 이유가 뭐냐? 이스라엘은 여호와가 등장해서 없는 데서 만들었기 때문에 이것은 기존의 종족이나 혈족이나 모든 것은 여기서 차단되지요. 그런데 기존에 있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자기를 인간으로 보지요.
그러면 이스라엘을 그들이 보기에 뭐로 보입니까? 인간으로 보인단 말이죠. 인간 대 인간에서는 서로 너나 나나 똑같다는 이런 생각이 들겠지요. 그래서 인간들 속에 뭐가 나오느냐 하면 신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믿지요. 그들은 하나님을 믿는단 말이죠. 그러면 이 하나님을 믿고 이스라엘은 여호와를 믿으니까 그 하나님과 여호와가 같은 하나님이라고 오해할 소지가 많은 겁니다.
인간으로 태어나서 신을 믿는 것은 마땅한 도리다. 인간으로 태어나서 하나님을 믿는 것은 당연한 도리라 하는 것은, 인간이 신을 믿으면 인간에서 시작했기 때문에 신을 믿는 것을 경유해서 자기에게로 옵니다. 이걸 자기를 위하여 신을 믿는 것, 이것을 세상나라에서는 다 인정이 돼요. “너, 하나님 아는구나.” 그런데 이스라엘에서는 이걸 우상이라고 하는 겁니다.
출애굽기 20장에서, 이런 게 어려운데, 나 그 다음에 뭡니까? 나 외에 모든 신이에요. 다수의 신, 나 외에 모든 신을 믿지 말라. 더욱 더 어려운 이야기가, 그러면 이스라엘과 하나님을 섬기면 되지 않겠느냐, 이렇게 되겠지요. 너희들은 다른 신 믿고 우리는 여호와 섬기겠다. 이러면 되겠지요. 하나님은 그렇게 아시는 게 아니고 믿지 말아야 될 모든 신이 있는 그 자리에 뭘 집어넣느냐 하면 여호와 믿는 이스라엘을 집어넣어요.
그렇게 되면 여기서 나오는 결론은 뭐냐 하면 여호와 하나님은 모든 신들 속에서 비로소 존재성을 드러낸다. 모든 신들 속에 들어오지 않는 여호와는 여호와가 아닙니다. 모든 신들 속에서 뭘 하느냐? 모든 신들 속에서 차별화를 요구하신다. 이겁니다. 출애굽기 20장에 나오는 십계명을 이렇게 바꾸면 안 된다는 사례를 들겠습니다.
“너는 신을 믿으라. 그 신이 너를 구원할 것이다.” 신이란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이죠. 하나님을 믿어라 또는 하나님을 섬겨라. 하나님이 너를 구원할 것이다. 이게 하나님의 계명입니까, 계명 아닙니까? 계명 아니죠. 여기서 우리가 정신 바짝 차려야 하는 겁니다. 모든 인간들은 하나님을 인정해요.
로마서 1장에 나오는 말씀처럼 하나님을 아는데 그 하나님을 아는 사람들 속에 여호와께서 오셔서 하시는 말씀이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 신과 신 차이를 네가 분별할 줄 아는 눈을 가지라 이 말입니다. 인간들이 아는 하나님은 어떤 개념이냐 하면 궁극적인 절대적 일인자거든요. 일인자를 어려운 말로 일자라 하는데 최고의 존재, 그것도 유일무이한 2가 될 수 없고 오직 최종적으로 하나가 되는 그것을 이방사람들은 뭐라고 합니까? 하나님이라고 하는 거예요. 최고의 하나님. 참 여기까지 따라오시니 감사합니다.
이방사람이 하나님 섬길 때 앞에 붙는 것들이 굉장히 많아요. 한번 적어볼까요? 전지전능한 하나님, 무소부재하신 하나님, 모든 것을 채워주시는 하나님, 전지전능이니까 모든 것이 가능한 하나님, 전지니까 모든 아니고 모든 게 가능한 하나님. 무소부재, 어디에나 계시나 없는 데 없이 다 계시는 하나님, 모든 것을 채워주고 모든 어려움을 해결해주는 그 하나님.
이 하나님을 불교에서는 세 번째 부처, 미륵보살이라고 하는 거예요. 불교에 보면 이런 게 붙어있어요. 절에 가는 사람이나 교회 가는 사람이나 똑같아요. 모든 걸 신적인 거예요. 인간은 나보다 월등한 존재를 믿는 것은 타고난 거예요. 본능적으로 타고난 거예요. 그래서 그게 절인지 뭔지 안 그러면 제일 값싼 휴대폰 간판이 붙든지, 파리바게트 붙든지 간에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고 그 안에서 그들은 무슨 일을 하느냐는 겁니다.
나약한 인간이 이런 것, 절대적이고 능력 많으신 하나님께 점점 더 나아가는 것, 접근이라 하지요. 많이 나아가고 갈수록 더 선해지고 갈수록 더 거룩해지고 하는 이런 시도, 모든 인간의 본성입니다.
여기 3층이에요, 4층이에요? 이 3층에 가정집을 만들었다고 합시다. 그 집에 네 식구라 합시다. 네 식구가 잠을 자고 식사하면서 뭘 추구하고 기대하겠습니까? 이 가정이 신의 행복으로 가득한 가정이 되게 하옵소서. 이게 바로 인간들이 섬기는 하나님, 그게 가정이 되었든 회사가 되었든.
여기 만약에 회사라 합시다. 회사라 한다면 회사 대표된 사람이 직원들에게 지금보다 더 크고 능력 많고 확장되고 성장하는 그런 회사가 되도록 다 같이 기도합시다. 기도란 말을 빼더라도 그렇게 노력하자는 말을 할 수 있겠지요. 그게 가정이라면 행복하고. 만약에 그게 교회라면 어떻게 돼요? 교회는 많이 들어봤잖아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 무소부재하신 하나님, 어린아이부터 주일학교부터 대통령까지 남북통일 해주시고 이런 것을 해결해주셔서 더욱 더 이 교회가 크게 해달라는 그런 것 하는 것, 그게 바로 이방신이에요. 모든 인간의 이방신입니다. 뭐가 빠진 거예요? 이게 이방신과 여호와와의 차이점은 마태복음 16장 24절에 잘 나와 있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그 다음에 나오는 단어, 자기의 뭐를 지고? 자기 십자가거든요. 십자가가 장례관이거든요. 십자가는 관이라니까. 내가 이미 하나님에 의해서 죽었기 때문에 죽은 나에게 내가 들어갈 수 있는 요소는 아무것도 없고 이제는 죽었다가 사신 것은 누구 소관이에요? 여호와, 주님의 소관입니다, 라는 이것,
이것은 바로 인간이 살아서 살아 있는 하나님을 만나고자 했던 모든 시도가 계속 순간순간 자꾸 끊어지는 거예요. 그래서 마태복음 16장 24절에서 자기를 부인할 때 자기 안에 뭐가 들어있겠어요? 자기 가정, 자기 사업체, 자기 남은 인생, 자기 국가, 자기가 갖고 있는 교단, 교회가 다 포함되겠지요. 자기의 육신의 건강도 포함되겠지요. 이것을 어떻게 하란 말입니까? 이것을 부정하라. 살맛 안 나지요.
십자가란 말은, 네가 살맛을 내겠다는 것은 아직도 자기 주제를 모른다는 뜻이에요. 사는 재미로 살겠다면 너는 네 분수를 모르고 있다는 거예요. 이러한 결론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여기가 무엇이 삽입되었느냐 하면 많은 다수 가운데서, 오늘 강의에서 제일 중요한 지점에 첫 번째 도착했습니다.
많은 다수 가운데서 다수란 말 알지요. 그렇고 그런 많은 사람들 가운데서 누가 여기에 개입했어요. 그렇고 그런 많은 사람들 가운데서, 빨간 걸로 쓰겠어요. 전부 다 빨간 사람들이에요. 빨간 분 등장했습니다. 이분의 체험, 이분의 세상 살기, 세상 겪기. 이분이 갔던 길이 뭐냐 하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이분과 하나님이 어떻게 연결되느냐 하면 아버지와 아들 관계입니다.
그럼 까만 이 사람들의 신은 뭐냐? 허구지요. 허상이고 미륵보살이에요. 그래서 이 신은 까맣잖아요. 이 신의 특징은 뭐냐? 색깔을 까맣게 칠해주는 거예요. 그런데 예수님을 빨갛잖아요. 아버지는 어떤 색깔이냐? 붉은 색깔. 이 세상에 투영된 색깔이 다른 것처럼 예수님과 관련된 하나님이 빨갛고 검은 게 있단 말이죠. 그런데 결국은 뭐냐 하면 빨간 하나님, 예수님과 통하는 아버지 하나님, 이걸 빨간 걸로 쓸게요. 이걸 언약이라 합니다.
언약으로 연결된 하나님은 계시고, 이건 뭐라고 했습니까? 허구지요. 이건 허상이란 말이죠. 애초에 없었어요. 없는데 신이 있는 이유가, 인간이 자기에게 투사를 한 거예요. 하늘에다 자기의 마음을 내 소원을 거기다 담아서 신에, 또는 미륵보살에 투영을 한 겁니다.
시편 22편 29절 봅시다. “세상의 모든 풍비한 자가 먹고 경배할 것이요 진토에 내려가는 자 곧 자기 영혼을 살리지 못할 자도 다 그 앞에 절하리로다” 진토에 내려가는 자, 그 다음에 “자기 영혼을 살리지 못할 자” 까만 거죠. 자기 영혼을 살리지 못할 자도 그 다음에 어떻게 된다? 예수님의 하나님 앞에 절할 것이다. 이게 요한복음 5장에 나오지요. 결국 너희들은 주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이렇게 되면 분류가 됩니다. 뭐로 분류되느냐 하면 지옥과 천국으로 분류가 됩니다. 그러면 우리가 궁금한 게 뭐냐 하면 자, 하나님은 안 보입니다. 안 보이고 이 땅에서 많은 사람들 다수가 있단 말이죠. 그럼 여기 천국 가는 사람 따로 있고 지옥 가는 사람 따로 있다면 우리가 궁금한 것은 어떤 사람이 천국 가고 어떤 사람이 지옥 가는지 이게 제일 궁금한 거예요.
사실은 그게 궁금하면 안 되는데 우리는 이상하게 궁금해요. 정답은 천국의 요소가 나오면 천국 가고 지옥의 요소가 나오면 지옥 가는 겁니다. 그러면 천국의 요소가 뭐냐 하면 예수님이 겪었던 그 체험, 언약적 체험, 예수님이 이 세상을 대하면서 경험했던 언약적 체험이 나오게 되면 그 사람은 성령 받은 사람으로서 천국 요소가 되고 예수님의 체험이 안 나온다면 그 사람은 지옥 가는 겁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체험이란 것은 어디서 나오는 거냐?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하신 일이 언약을 이루기 위해서였습니다. 언약을 다 이뤘을 때 그것을 크게 쓰겠습니다. ‘사건’이라 하는 겁니다. 사건이란 이 말이 어렵거든요. 어렵지만 반대말로 설명하면 쉬워요. 사건 <-> 존재, 반대말이 존재입니다. 내가 여기 있음.
내가 있음이니까 인간들이 생각하는 있음의 반대말은 뭐가 되겠어요? 없음이 되겠어요. 그러나 주님의 사건의 반대말은 뭐냐 하면 죄인 되는 거예요. 이 사건은 예수님이 부활되기 때문에 의인 되는 거예요. 이 세상은 내가 있느냐, 없느냐가 중요한 거예요. 내가 있는 것을 산다고 이야기하고 없는 것을 죽는 것으로 이야기해요. 인간에게 제일 중요한 것은 내가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이렇게 되잖아요.
그러나 예수님 오셔서 알려준 것은 천국에서 네가 죄인이냐, 아니면 의인이냐? 이게 제일 중요한 문제입니다. 사도 바울이 그렇게 고생해도 겁 없이 떳떳하고 주눅 들지 않고 살았던 이유가 본인이 예수 안에서 의인 됐기 때문에 그래요. 구약성경에 이스라엘 사람들이 굉장히 자기 하나님한테 벌을 많이 받지요.
벌을 받을 때마다 선지자가 와서 책망을 하는데 그 책망하는 근거가 뭐냐? 너는 죄를 지었기 때문에 저주받아서 당해도 싸다고 이야기하거든요. 그러면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죄가 된다, 의가 된다는 그 판단기준이 뭘까요? 이스라엘에게만 주어진 겁니다. 그게 뭐냐 하면 율법이에요. 그래서 로마서 3장에 보면 율법에 의해서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마스크 쓰고 입을 막고 모든 사람으로 하나님의 저주 아래 있게 하는 거예요.
저주 아래 있다는 말을 이렇게 이해하면 쉽습니다. 저주에서 내가 태어났다. 새삼스럽게 죄를 지어서 저주받는 게 아니고 출생지 자체가 저주에요. 출생지 자체가 내가 쭉 죄를 안 지었는데 결정적으로 밥 먹고 살려니까 죄를 지었다. 이게 아니라 처음부터 우리는 출발 자체가 죄라는 긴 가래떡 있지요. 가래떡처럼 죄가 뽑혀 나온 거예요. 가래떡 자체가 죄가 되는 겁니다. 죄에서 태어난 거예요. 시편 51편 5절인가 나오지요.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모친의 죄에서 태어난 거예요.
그래서 죄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내 힘으로 죄에서 벗어난다, 못 벗어난다? 못 벗어나는 거예요. 여기서 응용문제, 심화질문은 뭐냐 하면 예수 믿음으로써 내가 죄에서 벗어나느냐 하는 그 문제입니다. 내 힘으로 죄에서 못 벗어난다면 예수 믿음으로 죄에서 벗어납니까, 못 벗어납니까? 못 벗어나는 거예요.
그래서 복음은 인간을 철저하게 일관되게 자기 부정을 쭉 가게 하는 겁니다. 자기 부정에서 자기 긍정으로 넘어서는 그런 이야기는 성경에선 없습니다. 끝까지 가는 거예요. 이유가 뭐냐 하면 네가 아담 안에 있기 때문에. 아담 안이라 하는 것은 아담 안을 지금은 과학시대니까 과학적으로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아담 안은 여기서 일찌감치 죽었던 아담의 복제판이란 뜻이거든요. 그럼 아담 안에 뭐가 들어 있느냐? 과학적으로 이야기하면 DNA 들어있어요. 디옥시리보핵산deoxyribonucleic acid. 인간의 유전자 안에는 아빠 50%, 엄마 50% 해서 이게 아들로 갑니다. 아빠엄마와 아들딸 자식들 사이에는 50%씩 나눠가지고요. 형제들 사이에도 50%고요. 손자로 가면 팔분의 일, 12.5%로 내려가요.
그렇지만 혈육적으로 아무리 내려가도 DNA는 계속 복제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과학에서 뭘 발견했느냐 하면 인간은 DNA를 지니고 있다, 라는 것을 발견한 게 아니고 DNA가 인간을 복제한다. 이걸 발견한 겁니다. 1953년에. 만약에 어떤 여인이 임신을 했는데 DNA 조사를 해보니까 선천적으로 장애가 있다고 하면 의사가 태아의 DNA를 조작해버리면 아주 멀쩡하게 태어나는 그것을 2030년 쯤 되면 그게 보편화된다는 거예요.
왜냐하면 인간은 없거든요. DNA의 발현체에요. 쉽게 말해서 발현체란 뭔 뜻이냐 하면 전구가 있다면 필라멘트 있지요. 이게 DNA라면 눈에 보이는 전구 알이 인간입니다. 인간이 태어나기 전부터 이미 결정된 거예요. 그래서 앞으로 선볼 때 그 집안의 DNA를 조사해야 돼요. 건강, 그리고 아이큐 얼마인지 성격은 어떻게 되는지 그걸 DNA 지도로 조사할 수 있어요. 괜히 머리 나쁜 애한테 공부하라고 해도 소용없어요. 과외비용만 많이 나갈 뿐이에요.
같은 환경 속에서도 어떤 사람은 코로나 견디고 어떤 사람은 유행되자마자 걸리는 사람들, 그건 DNA가 약해서 그래요. 그러니까 국가에서 어떻게 하느냐? 평균을 내죠. 평균이란 것은 없는 거예요. 인간은 개개인이 있지 평균이란 게 없어요. 인간은 개개인이 있을 뿐이에요. 개개인의 집단화될 뿐이지 인간은 개인에서 떠난 적이 없습니다. 부부가 있잖아요. 부부란 것은 없어요. 개인과 개인이 만난 거예요. 일종에 동업형식으로. 넌 돈 벌어. 난 아이 키울게. 이렇게 만난 게 부부에요. 없다고요, 없어요.
교회가 있잖아요. 교회에 목사 있다면 사람들은 오백 명 되는 교회 목사 좋겠다고 하지만 그 목사는 골칫거리에요. 그래서 뭘 하느냐 하면 오백 명 중에서 내 편을 만드는 거예요. 이게 알짜배기에요. 아쉬울 때 돈 푸는 사람들이에요. 오백 명 소용없어요. 자기 팬클럽이 중요하다니까. 방탄소년단처럼.
자기한테 미친 사람이 중요하지 교회라는 것은 아무짝도 필요 없어요. 귀찮기만 해. 교회에서 누가 귀찮습니까? 아프고 돈 없는 인간들, 돈 안 되는 청년들 다 귀찮아요. 공작이 안 된다니까. 내 편 되는 내 사람으로 유인이 안 되니까요. 그러니까 큰 교회 간다고 목사가 좋은 게 아닙니다. 골칫거리에요. 그저 몇 명 안 되도 한 결 같이 소박하게, 얼마나 소박해.
중요하니까 다시 할게요. 인간은 개인에게서 벗어난 적이 없습니다. 그 사람의 정신을 지배하려는 어떠한 시도도 실패로 끝납니다. 인간은 절대로 인간의 정신을 타인이 지배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굴복하는 건 뭐냐? 서로 이용하기에요. 서로 힘들을 이용하는 겁니다. 바로 이러한 집단을 뭐냐 하면 바로 이방민족이라 하는 거예요.
성경에는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어떠한 현상도 이미 성경이 다 포함하고 있어요. 다 함유하고 있습니다. 이방민족의 신은 거기에 최고 우두머리가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왕이에요. 빈털터리 왕은 소용없습니다. 왕은 권력을 갖고 있는데 이 권력은 무엇을 보장하는 권력이냐 하면 생존을 보장하는 권력이에요.
아까 공부했습니다. 다시 해봅시다. 인간에게 중요한 것은 의와 죄를 중요하게 여기지 않고 무엇이 중요하냐 하면 사느냐, 죽느냐 이게 중요하거든요. 그럼 이들에게 이방민족에게 신은 뭐냐? 나를 계속 살려주는 신일 때 믿을 용의가 돼있어요. 교회 한 십 년, 이십 년 다녔는데 아무 수입이 안 늘어난다? 그럼 신을 바꿔야지요. 신을 바꾸든지 교회를 바꾸든지 해야지요. 왜? 교회 나올 때부터 신을 믿을 때부터 이미 목적은 확정되었어요. 내가 개인에 대해서 못 벗어나니까.
중요한 것은 내가 중요해요. 나를 계속 살려주는 신이면 믿겠다는 거예요. 그냥 밥이나 먹여주는 신이면 교회 안 나와도 되지요. 이왕 먹는 것, 그 다음에 이 사회에서 대우받고 승진하고 출세하고, 그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권력을 모을 수 있는 신이라면 자기에겐 살아 있는 하나님이에요. 진짜 살아 있는, 찐찐찐이라 하지요. 진짜 살아 있는 하나님. 왜? 나의 안정성을 보장해주니까.
그래서 이방민족에, 창세기 4장에 나와요. 가인의 후예들. 이방민족에서는 너희들이 생존에 필요한 것 누가 많이 갖고 있느냐? 왕이 많이 갖고 있으니까 나에게 굴복하라. 그걸 사회의 서열화. 사회가 쫙 순서 돼있어요. 학교에서 일이삼 등 하지요. 사회에 나가도 삼성그룹부터 대기업부터 해서 중소기업, 하청기업까지 서열화 돼있어요.
당신은 누구냐, 라고 할 때 당신은 누구냐고 물으면, 나는 무엇이다, 나는 ▭다, 할 때 네모 안에 무엇이 들어가겠어요? 나는 믿음이 좋아요. 이딴 것 아무짝 소용없어요. 교회 안 다니는 남편이 교회 다니는 아내에게 묻습니다. “너는 뭐냐?” “나는 신앙이 좋아요.” 이러면 교회 안 다니는 사람은 짜증내요. “나는 요리 잘해.” "Good." “살림 잘해.” "Good." “애 서울대학 보냈어.” “잘했어. 계속 교회 다녀.” “이게 다 주님의 은덕이야.” “그건 듣기 싫고, 주님의 은덕이고 뭐고 수단 방법을 다 동원해서라도 내가 원하는 힘, 권력을 나한테 보여 봐. 당신 교회 다니는 것 방해 안 할게.”
이걸 다이아그램을 그리면 이렇게 돼요. 남편이 동그라미라면 남편은 항상 아내를 자기 것으로 이용하지요. 왜? 자기에게 필요하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이걸 세상에선 배필자라 해요. 일방적이죠. 자기한테 필요한 사람. 그런데 아내가 갑자기 치매 걸렸다, 아프다. 이건 어떻게 해서든 떼어내야 돼. 가위로 떼어내야 돼요. 돈만 나가. 연금 다 나가. 큰일 났어, 이제.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동그라미가 동일하다는 거예요. 이게 아내라면 남편은 이렇게 되는 거예요. 내가 교회 가는데 헌금하고 내 인생 즐기는데 당신은 돈 벌어다오. 그런데 퇴직을 했어. 이제 돈이 안 나와. 어떻게 대충해야 돼요. 모든 인간은 이런데서 못 떠난다 말이죠.
그러면 이 그림을 이렇게 봅시다. 아내, 남편 말고 나를 집어넣으면 여기에 누가 등장하겠어요? 바로 예수님이 등장하고, 하나님 등장하고 이렇게 되겠지요. 교인들 등장하고. 예수님이 하나님이 나에게 뭘 해주느냐에 따라서 나도 뭔가 드릴 용의가 돼있습니다. 이게 뭐냐 하면 바로 인간이 말하는 자기 긍정이라 하는 겁니다.
아까 자기 긍정은 무엇의 반대말이라 했습니까? 자기 부정이죠. 주님은 자기를 부정하는데 끝까지 인간은 자기를 긍정하면서 예수님과 하나님을 이용하려고 하는 거예요. 그런데 여기서 더 못돼먹은 짓을 교회에서 하고 있어요. 뭐 하느냐 하면 자기 긍정하기 위해서 뭘 집어넣느냐? 여기다가 자기 부인하는 자기를 집어넣습니다.
어때요? 얄밉지 않습니까. 자기 긍정을 궁극적으로 노리면서, 그러니까 자기 잘 되기란 본성의 범주에서 벗어나지 않으면서 그걸 따내기 위해서 극단적인, 바알과 아세라 선지가가 하는 짓이에요. 극단적인 자기학대에요. 교회 헌금하고 전도한다고 돌아다니고. 이게 극단적인 자기학대에요. 성경공부 참석하고, 성경 다 읽고 쓰고, 새벽기도 나오고, 40일 금식하고.
왜 이런 짓합니까? 믿음이 없어서 그래요. 믿음이 없으니까 믿음의 티를 내기 위해서는 내가 할 수 있는 역량은 다 동원하는 거예요. 늘 얼굴이 어두워요. 믿음이 없으면 안 믿으면 될 거 아니에요. 그런데 교회에서 행함으로 구원받지 못하고 믿음으로 구원받는다고 하니까 믿음을 가져야 구원된다니까 겨자씨만한 믿음 없으면 안 된다 하니까 억지 춘향 식으로 믿음을 계속 만들어내려고 하니까 아주 목사님 뭘 할까요? 만날 뭘 할까요, 뭘 하면 구원받을까, 이런 식이라.
강의 처음부터 새로 하겠어요. 이스라엘, 언약 나라는 없습니다. 이런 나라는 없어요. 마치 예수님께서 하늘에서 내려오셔야 되지 지상에 있는 어떤 영웅이 착한 사람이 메시아로 변한 적은 없어요. 공부를 많이 해서 메시아 된 게 아닙니다. 그런 건 큰 바위 얼굴, 소설에나 나오는 이야기죠.
어떤 마을이 젊은 사람이 있는데 큰 바위 얼굴에 와서 우리 마을을 부흥시켜 달라 하니까 세월 지나도 안 나오는 거예요. 큰 바위 얼굴 닮은 사람. 나중에 보니까 그걸 고대하는 희망을 갖는 본인이 얼굴 모습이 늙어서 백발이 되니까 마을 뒤편의 큰 바위 얼굴 닮았다고, 당신 바로 메시아다, 라는 그런 유명한 호손이 쓴 단편소설이 있어요.
종교를 농락하는 거죠. 종교라는 것은 메시아가 있는 게 아니고 네가 마음먹기에 달렸지 실제로 예수님이 부활하고 그런 것 없다. 그걸 문학가들이 조롱하는 겁니다. 그런데 아까 이야기한 것처럼 조롱과 모욕당함, 그리고 협박이 없는데 이 체험이 성령에 실렸어요. 우리 아담 속에 있는 사람에게 찾아오는 일이 발생됩니다. 이건 사건이죠.
아담에 속했다는 말은 아까 강의 수십 분 동안 했는데 이걸 뭐라 했습니까? 인간은 개인에서 벗어난 적이 없다. 인간은 고집이 있어요. 모든 것이 내가 도움이 돼야 돼요. 내게 유익이 돼야 돼요. 내가 도움이 되는 걸 선이라 하고 나한테 손해되는 것을 악이라 하는 겁니다. 선악이거든요. 인간은 이 고집에서 못 벗어나요.
예수님이 당했던 조롱과 모욕과 협박, 위협이 성령에 실려서 우리에게 와버렸습니다. 성령세례라 하지요. 잘 들어보세요. 외부에서 왔기 때문에 이 인간이 뭘 했습니까, 뭘 노력했습니까, 시도했습니까? 안 했지요. 인간이 시도하는 것은 내가 절대적 내가 되는 것 외는 아무것도 할 줄 아는 게 없어요. 지금보다 더 뛰어난 나, 멋있는 나, 내가 나를 숭배할 만한 대상이 되는 나, 내가 나를 보고 뿅 갈만한 그러한 나가 내 생애에 유일한 낙이고 희망이고 보람이다. 그런 속 안에 갇혀있어요.
내가 나를 부정한다거나 내가 나를 멸시하는 그런 일은 없습니다. 어린아이라도 그런 일은 없습니다. 어린아이들 보세요. 지밖에 몰라요. 세뱃돈 주는데 형과 차이나 보세요. 난리 납니다. 특히 집안에 동서들 사이에 아버지 유산문제 때문에 난리나지요. 집 한 채씩 다 줬으면 만족해야 될 텐데, 큰 애는 남아. 둘째, 셋째는 집에 가고 형은 남았는데, “저기 있는 땅, 부동산은 네 것 해라. 쉿 아무 소리 말고.” 만약에 알려지게 되면 난리 나는 거예요.
인간은 타인이 갖고 있던 그걸 하나의 모델로 삼아서 어쨌든 그걸 따라붙어야 속이 뻥하고 뚫리는 존재에요. 인간은 자기밖에 모르는 인간입니다. 아까 인간은 신을 믿지요. 신이란 나의 투영으로서 내가 나한테 도움이 되는 조건을 부여한 신, 절대적인 신, 전능하신 어떻고 하는 신, 이미 있는 여기에 주님의 모욕과 조롱이 찾아와서 들이닥치는 거예요. 들이닥칠 때 이것은 본인이 시도하거나 예상하거나 목표로 잡았거나 교회에서 기도하면서 기도내용에 포함 되지 않는 내용이에요.
시편 22편 23절 다시 보겠습니다.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너희여 그를 찬송할찌어다” 말이 모순되지요. 두려워하는데 뭐라고요? 두려워해놓고 이걸 찬송이라 하지요. 이런 경우가 어떤 경우냐 하면 예상 밖에 있는 내 머리에서 도저히 기대하지 않는 사건들이 왔을 때 절로 감사와 찬양과 고마움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거기 야곱의 모든 자손이 있죠. 이게 중요한 거예요. 제가 말씀드릴 것은 이거에요. 야곱의 모든 자손이라 할 때 여기에 누가 포함되느냐 하면, 야곱의 모든 자손을 점점으로 합시다. 이제 빨간 걸로 누가 등장하느냐? 점 하나. 이 점이 누구냐 하면 바로 요셉입니다. 자, 요셉의 일대기가 나와요.
요셉이 아버지와 잘 살다가 애굽으로 갈 때에 점잖게 갔습니까, 아주 대우받으면 갔어요, 어떻게 됐어요? 요셉이 애굽 가고 싶어서 수학여행 가고 싶어서 갔어요? 누가 내보냈습니까? 여기 있는 점점, 검은 점에 있는 형제들이 요셉을 내보냈어요. 그러면 형제들을 생존의 세계라면 요셉은 여기서 밀려서 조롱받아서 밀려나기 때문에 이건 뭐냐 하면 주님의 세계, 다시 말해서 예측 불가한 세계, 예상 못한 세계, 이걸 성경에서는 꿈의 세계.
시편 104편에선 꿈의 세계를 바로 말씀의 세계라고 돼있어요. 그 대목을 보고 가겠습니다. 시편 105편 18절에서 19절을 누가 읽어보세요. “그 발이 착고에 상하며 그 몸이 쇠사슬에 매였으니 곧 여호와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라 그 말씀이 저를 단련하였도다“ 여호와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지요. 제가 성경공부하면서 성경책 찾는 걸 굉장히 싫어해요. 왜냐하면 듣는 사람이 귀찮거든요. 꼭 필요한 것만 하기 때문에 양해해주시기 바랍니다. 한 군데 더 찾아보겠습니다.
로마서 9장 11절에 보면,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존재하지 않았어요)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이게 리브가에서 이른 말씀이거든요. 예언이거든요. 하나님의 언약이거든요.
이 언약은 무엇과 관련 없다 하느냐? 에서의 행위, 야곱의 행위와 관련 없이 그냥 말씀이 말씀되기 위해서 에서는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겨야 했었고 야곱은 거짓말해서라도 장자를 빼앗아야 하는 이거는 어쩔 수 없어요. 그래서 16절에,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이렇게 돼있지요.
그러니까 이건 뭐냐 하면 밑에 인간들을 깔아놓고 위에서 말씀 안에 어떤 인물이 있고 그 인물중심으로 말씀이 다 집중해서 그 인물이 날아다니면서 그 말씀을 다 이룬 거예요. 이루고 그걸 투하, 히로시마에 원자폭탄 투하하듯이 자기 택한 백성은 정조준해서 성령으로 투하해버리면 성령 받은 택한 백성은 갑자기 하늘에서 날벼락 뒤집어쓰는 거예요. 물벼락 뒤집어쓰듯이 이게 웬 일이야?
또 물벼락 썼다 해서 물벼락 쓰지도 않았으면서도 조작하려하지 말고요. 물벼락을 진짜 쓴 사람의 특징이 뭐냐 하면 구별점이 뭐냐 하면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이걸 아는 거예요. 나는 개뿔도 아니다. 천당 가고자 하는 나도, 무슨 착한 일해서 주님께 영광 돌리려는 나도 실은 아무것도 아니다. 야곱이 거짓말했잖아요. 그것도 착한 거예요.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요셉이야기 계속하겠습니다. 요셉이 점이에요. 점이고 요셉이 어디 안에 들어 있느냐 하면 꿈 안에 들어 있습니다. 꿈은 시편 105편 18, 19절 말씀처럼 말씀이 응해서 요셉으로 간 거예요. 그럼 여기에 까만 걸로 요셉의 형들의 역할이 뭡니까? 이게 제가 첫째 시간에 이야기하고 싶은 거예요.
요셉의 형제들 역할이 뭐예요, 뭐하면 돼요? 이것 중요한 건데, 정말. 그렇지요, 그렇지요, 그렇지요. 핍박만 하면 돼요. 성도는 어떻게 사는가? 주님을 매일같이 핍박만 하는 게 성도의 삶입니다. 왜? 개인은 절대로 개인에게서 벗어난 적이 없기 때문에. 기도를 하던 헌금을 하던 다 노림수가 있어요. 목적이 있다고요. 내 자식 잘 되고 우리 가정 행복하고 다 노림수가 있어요. 그걸 그대로 쭉 가라 이 말이죠.
그렇게 가게 되면 둘 중에 하나죠. 지옥으로 빠질 사람이 있고, 가면서 이게 내 본모습이구나. 교회 가서 인간 갱신프로그램 해서 새로운 인간 만들고 그게 다 마귀의 시험이잖아요. 그게 나라고 누가 장난질친 거잖아요. 그럴 필요가 없는 거예요. 그 관계를 믿음이라 합니다. 결과적으로 믿음이에요.
믿음을 시작하는 게 아니고 다 행함이 축적된 것, 행함을 축적해놓고 나중에 동그라미 치죠. 그게 바로 예수님과 관련돼있다는 의미에서 주님의 믿음, 주님께서 체험 있잖아요. 제자들에게 밉상 받는 또는 세상 사람들에게 미움 받는 그 예수님의 체험이 아버지와의 관계에요. 소망이고 사랑이고.
10분 쉽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