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강의

다윗과 짐승들b

아빠와 함께 2021. 3. 10. 10:41

20210308b 부산강의 : [시편]36(22편)-다윗과 짐승들
(강의:이근호 목사)


두 번째 하겠습니다.

첫째 시간 마지막에 유령 이야기했는데 유령이란 단순히 유령과 인간의 비교를 말하는 게 아닙니다. 유령이라 하는 것은 인간이 그동안 쌓아놨던 모든 문명, 그 토대 자체가 유령을 영접할 수 없는 조건이라는 이유 때문에 무너뜨리는 기능이 있어요. 유령이. 인간세계에 속하지 않는 거예요. 인간세계에 속한다, 이걸 인간들은 뭐로 보느냐 하면 이걸 현실로 본 거에요.

그런데 여기에 현실에 속하지 않는 유령이 등장해버리면 인간들이 둘러 친 현실의 테두리가 붕괴되는 겁니다. 유령을 영접할 수 없다는 이유 때문에. 열어놓은 게 아니잖아요. 인간이 열어놓은 게 아니에요. 인간 자체가 닫아놓았단 말이죠. 폐쇄구조, 닫아놔야 인간이 나라는 것이 성립이 됩니다. 이런 게 어려운 거예요. 나라는 것이 성립되려면 나 자체가 절대적인 나를 위해서는 내가 아는 그 안 쪽이 나를 위한 현실이 되는 겁니다. 알든 모르든 이야기 나갑니다.

나라는 것은 어떻게 구성되느냐 하면 내가 아는 것들과 교류하면서 이게 나란 안에 내용물이 차곡차곡 비축이 되고 쌓아지는 거예요. 그래서 아주 아이큐가 낮은 사람들은 나가 없어요. 그러나 사람은 똑똑하고 알면 알수록 나는 더욱 더 당구공처럼 응축이 되는 겁니다. 나 이 정도 아는데 날 무시하지 마라. 너 어느 대학 나왔어? 나 이 정도 공부했어.

이게 자기가 안다는 이 세상 우주 끝까지 안드로메다까지 아니까 안드로메다가 있는 이상은 날 무시하지 말라 이 말입니다. 이 현실이란 그냥 있는 게 아니고 나를 지탱하는 조건 하에 있는 거예요. 그래서 일곱 살 먹은 현실과 아홉 살 먹은 현실이 다 달라요. 그런데 그 안에는 이걸 자충, 자기 충족이라 하거든요. 일곱 살 먹은 애가 세상을 원망하지 않는 이유는 자기가 갖고 노는 게임 안에서 나는 충분한 나답기 때문에 살맛이 나는 겁니다.

이모 집에 애를 맡겨놨더니만 이모가 무당이다. 아이 아프니까 귀신 들렸다고 팼는데 너무 패서 애가 죽어버렸어요. 그런데 이모 집에 맡긴 그 애 엄마도 동의했단 말이죠. 이 말은 맡긴 그 세계는 뭐냐 하면 나를 부정할 수 없는 그 현실의 전부를 나라고 하는 겁니다. 이 동네에선 아프면 귀신 들린 거예요. 그게 자기 아는 것의 전부란 말이죠.

내가 진실에 대해서 아는데 아는 나를 어떻게 무슨 수로 부정합니까? 모르면 부정이 되는데 알만큼 안다 이 말이죠. 사실은 알만큼 아는 게 아니고 내가 아는 만큼 따로 뽑아서 그걸 나라고 규정했기 때문에 나란 안에서는 나는 모르는 게 없어요.

베드로가 유령이라고 외친 것은 지금 자기들이 알고 있는 현실에 속하지 않는 존재로 다가올 때 유령에 대해서는 무지 상태가 된다면 내가 알던 아는 현실이 여기서 재조정돼야 됩니다. 유령마저 받아들일 수 있는 새로운 유령의 자리를 마련해줄 만한 인식의 변화, 해석의 변화가 주어져야 되거든요.

그런데 유령을 받아들이면 주인공이 내가 아니에요. 하나의 왕관을 두 왕이 쓸 수 없다고 했지요. 나를 포기해야 되는데 인간은 나를 포기하고, 이런 게 정말 어렵다. 나를 포기하고 유령의 자리를 마련해드리자. 그러면 유령까지 포함한 아 자리를 누구 자리가 됩니까? 유령의 자리가 안 되고 새로 발전된 나의 자리가 되기 때문에 결코 인간은 자기를 부인할 수 없어요. 이게 미치는 거예요. 아무리 예수님께서 자기를 부인하라 했지만 정작 나는 부인할 수 없는 겁니다. 할 수가 없어요.

할 수 없다면 대책은 뭐냐? 성경은 내 쪽에서 끝까지 가봐야 돼요. 연안부두~ 하여튼 연안까지 끝까지 가야 돼요. 끝까지 가게 되면 거기서 우리가 무엇을 당연시해야 되느냐 하면 내가 아는 모든 현실, 나와 관련된 현실은 무너진 정도가 아니라 심판대상이란 것을 발견해야 돼요. 심판받아야 돼요. 누구로부터? 유령으로부터. 유령으로 오신 분으로부터 내가 심판의 대상이 되는 겁니다. 이게 바로 신약에서는 십자가 사건으로 알지요.

십자가에 강도 있었잖아요. 한쪽 강도는 강도질해서 십자가에 달린 것에 대해서 아직도 자기한테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예수 당신이 나를 십자가에서 나오게 해준다면 당신을 믿을 용의가 있다고 해서 주도권을 자기가 쥐고 자기에게 미련을 갖고 있어요. 그런데 구원받은 강도는 뭡니까? 아낌없이 주님 세계에 자기를 일부로 포함시켜버린 겁니다.

심판이란 뭐냐 하면 유령이 가져오는 이 세계 앞에서 나는 당연히 심판의 대상이고 제거의 대상이고 망해야 할 대상이기 때문에 유령의 새로운 체제로 나를 품어 달라, 나를 품어주소서. 주님이 하시고자 하는 일이 이제 나를 강간해주소서, 덮쳐주소서. 나의 반항기와 나의 저항을 개 무시하고 아예 나를 덮쳐버리소서.

이걸 제는 점잖게 이야기해서 탕수육 위에 붓는 소스라고 했지만. 돼지고기 튀김조각에 소스 붓듯이 아예 주님의 복음의 소스를 부어주소서. 왜? 소스는 이질적이고 외부적이고. 그 소스 앞에는 내 것이라곤 요만큼도 없다는 것이 감사의 조건이 되는 겁니다. 성령의 일은 항상 어떤 일이 있더라도 감사와 고마움이 있으면 성령의 일이고, 아무리 착하고 좋은 일이라도 불평이 있으면 그건 어디까지나 나와 관련된 일, 내가 포기 못한 일이 돼버려요.

내 곁에 있어줘. 나를 떠나지 말라고 간절히 노래하는 가사에 보면 너는 내게 참 좋은 사람이었잖아, 라는 가사가 나와요. 지금은 떠나버렸다는 거예요. 다시 내 곁에 돌아오게 되면 전처럼 좋은 사람이라고 칭해줄게. 빨리 돌아오라. 지금 나를 떠나버리면 너는 더 이상 좋은 사람 아니고 나쁜 사람 되니까 그게 내가 싫다는 거예요. 한 때 사랑했던 사람이 나쁜 사람으로 불리는 것은 내가 원치 않는다, 이런 이야기한다 말이죠.

그러니까 모든 기준이 나가 있는 이상은 이거는 끝까지 어느 누구도 나를 덮치는 것을 내가 용납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럼 여기서 궁금한 것은 유령이 와서 나를 덮쳐서 나를 심판한다면 심판 이후, 심판된 상태가 어떤 상태냐, 어떤 상태에 돌입되느냐? 이것이 두 번째 시간에 생각할 문제입니다. 그게 궁금한 거예요. 그게 어디 나오느냐? 시편 22편 25절에 나옵니다.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대회 중에 나의 찬송은 주께로서 온 것이니” 여기 대회가 나오지요. 큰 집회, 집단.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시편은 예언이니까 다윗을 통해서 말씀이 과거, 현재, 미래 다 드러나거든요. 다윗이 어떤 이야기하는 그 자체가 하나님이 앞으로 어떤 일을 하실지 다윗의 입을 통해서 나오는 거예요. 조금 전까지는 짐승에게 쫓기고 있습니다. 다윗은,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절망 가운데 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22절 이후부터는 완전히 분위기가 반전이 되고 바뀌게 됩니다. 22절에 보면 갑자기 찬송이 나옵니다. “내가 주의 이름을 형제에게 선포하고 회중에서 주를 찬송하리이다” 갑자기 찬송이 나오고 기쁨이 나오지요.

제가 언제 강의할 땐가 그런 이야기했는데 시편은 어떻게 됐는가? 시편의 내용은 각 편, 각 단락, 단락 또는 한 장, 한 장마다 대체적으로 하나님 찬송이 먼저 나와요. 감사합니다, 해놓고 중간에 뭐가 나오느냐 하면 절망이 나옵니다. 절망이에요. 끝에는 다시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송하고 영광을 돌린다고 나와요. 하나님을 찬송한다 해놓고 절망하고 하나님께 찬송이 나와요.

시작은 나는 하나님을 안다가 됩니다. ‘안다’의 주체가 누구냐 하면 하나님이 아니고 내가 하나님을 얼추 안다가 돼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말씀대로 그 성도를 현실 속에 밀어붙이지요. 밀어붙이면 난데없는 내가 해명할 수 없는 사태들이 일어나기 시작하는 거예요.

왜냐하면 내가 알고 있는 교류하는 세계가 아니고 말씀이 세계로 전환되기 때문에 말씀의 세계는 내가 아는 세계를 넘어서잖아요. 나는 그냥 내가 아는 연안까지니까 내가 모르는 그 바깥의 일을 내가 아는 것 더하기 모르는 걸 추가하는 게 아니고 내가 모르는 것이 안다고 여기는 것까지 전부 다 침몰시키는 거예요. 물이 넘치듯이 완전히 덮어서 나로 하여금 심판해버리는 겁니다.

그러면 여기에 절망하는 것은 뭐냐? 쉽게 말해서 버티기에 들어간다, 발악하는 거예요. 몸부림치는 겁니다. 뭘 지키기 위한 몸부림? 그전에 내 것, 내가 아는 것 그래서 얻어지는 나, 나의 나다움을 지키기 위해서 애를 쓰고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하는 거예요.

그런데 그것을 중간에 집어넣고 마지막에 어떻게 끝납니까? 드디어 주님이 이겼어. 나는 지고. 나는 주님 앞에 탕수육처럼 소스에 완전히 덮여버렸어요. 나를 던져버렸습니다. 주의 원대로 하옵소서, 라고 하면서 여기 나는 없어지고 뭐가 바뀌느냐? 여기서 나가 우리로 바뀝니다. 이게 대회고 회중들이에요.

그러면 내가 없어지는 그것은 우리라는 것을 새롭게 조성하는 새로운 나에 해당되는 사람이 회중들 각자의 나의 자리에 전부 다 그것을 나의 자리를 심판해버리는 겁니다. 그 나, 나를 대신하는 나, 여기 나는 다윗이죠. 다윗이란 이름이죠. 그 이름을 대신하는 이름이 뭐냐 하면 아까 22절에 나오듯이 내가, 거기 무슨 이름 나와요? 주의 이름 나오지요.

주의 이름에 대한 이야기는 아무리 해도 어려워요. 이제부터 주의 이름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제가 아까 이야기했지요. 주의 이름은 내 이름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주의 이름으로 내가 불리는 거예요. 적어보겠습니다. 주의 이름으로 불린다. 이게 지우개잖아요. 이 지우개 정말 마음에 들어요. 이 지우개 이름을 누가 불러주는가? 지우개 만든 사람, 인간이 불렀지 지우개가 만든 건 아니잖아요.

그런데 인간들의 문제는 인간들이 자기 이름을 본인이 지었다는 겁니다. 지 아버지 지었지 왜 본인이 지었다고 하느냐, 이렇게 생각하시는데 아버지는 인간 아닙니까. 인간들 이름을 인간들이 짓는 거예요. 광주강의인가 기억이 안 나는데, 인간은 태어나면서 홀로 태어난다. 이런 야기한 적 있습니다.

부모가 나를 만들어줘도 이 갓난아기가 크면서는 부모 의존적이에요. 좀 크다보면 본인이 본인을 만들어가요. 엄마 아닌 나, 아빠 아닌 나, 동생 아닌 나, 형 아닌 나, 나는 내 안에서 자체적으로 만들어갑니다. 언제까지? 죽을 때까지. 여러분 연세 많은 노인들 보세요. 평생 그 고집, 대다한 고집이죠. 갈수록 점점 나가 돼가요. 융통성이란 손톱만큼도 없는 나, 자기의 절대성을 향하여 가고 있습니다.

그게 왜 그러냐 하면 나가 나의 이름에 농락당하기 때문에 그래요. 인간은 원래 홀로 태어나기 때문에 처음에 갓난아기 때는 남이 키워주죠. 이름을 누가 불러줍니까? 부모가 지어주고 불러주지요. 그 다음부터는 부모가 불러주는 이름이 내 자아가 생기면 나를 위한 이름으로 전환이 돼버려요. 그 이름은 무조건 내 것이에요. 부모가 불러줘도 내가 책임질 내 이름이 되는 겁니다. 당신 누굽니까? 예를 들면 쉬울 거예요.

어떤 가게에서 물건 살 때 여러분들 혹시 성이 홍 씨 있습니까? 없지요. 마음 놓고 이야기합니다. 홍 씨 성을 가진 분이 상인이나 장사하는 사람이, “홍 사장님 어서 오세요.” 가정주부라도 별로 기분 안 나쁘지요. 그런데 “홍 시다바리 어서 오세요.” 실제 이 사람 직업이 시다바리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분 되게 나쁘지요.

이미 내가 나를 보는 관점에서 남이 나를 불러주길 원하고 있어요. 이것은 나의 이름에 대해서는 그 가치에 대해서는 어느 누구에게도 훼손되지 않기 위해서 사투를 벌이는 있습니다. 평생을 내 이름 지키는 데 내 이름이 나를 대신하는 이름 지키기 위해서 평생을 소비하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가 주의 이름을 부른다는 말은 내 이름이 멀쩡하게 있는데 주의 이름으로 불리는 거예요. 주님이 나를 볼 때 내 이름이 있는데 야곱아, 아브라함아 있는데 주의 이름으로 불러주는 거예요. 그러면 이미 이건 내 이름을 포기하란 이야기입니다. 네가 지킬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거예요. 남이 시다바리로 불러주든 사자로 불러주는 이 자체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겁니다. 너는 누구의 아내다. 이건 의미 없는 거예요. 너는 누구의 남편이다. 이것도 의미 없어요.

나는 누구의 아내가 돼버리면 나는 그 누구와 경쟁관계에 속합니다. 누구의 아내로 살 것인가, 나로 살 것인가? 완전히 페미니즘 이론으로 빠지지요. 그게 아니고 주의 이름으로 있기 때문에 네가 결혼을 하던 주의 이름, 이혼을 해도 주의 이름, 애가 있어도 없어도 주의 이름, 모든 것이 이미 네가 생각한 너의 명예와 칭찬, 너의 자존감 모든 것은 탈락했습니다.

심판받고 탈락했고 나의 나 됨은 그 자체가 어떤 지경에 있든 간에 주의 이름에 합당하고 주의 영광을 돌리는데 하자가 없도록 만들어주신 거예요. 그게 주의 이름을 부르는 거예요. 예수님이 자기 이름을 부른 거예요. 우리 보고 내 이름 있는데 내 이름 제쳐버리고 네가 나라고 불러주는 겁니다. 이 세상에서 나의 대표자가 너라는 거예요.

물론 너란 개인을 말하는 게 아니고 회중을 말하고 집단, 이스라엘을 이야기하지만 야곱이란 이름이 있었잖아요.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이스라엘이란 이름 안 줬지요. 야곱이란 이름을 붙이고 그 다음에 이스라엘로 바뀌잖아요. 그러면 기존 이름이 있고 그 다음에 그 이스라엘 이름을 위해서는 누구와 다퉈야 하느냐 하면 진짜 하나님이 원하는 구원받은 자의 주의 이름과 다투는 관계에 있고 결합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일깨워주는 그 과정이 꼭 필요한 거예요. 나는 내 이름으로 살아서는 안 된다는 것을 꼭 집어넣어야 돼요.

이스라엘 이름 속에는 반드시 뭐가 있느냐 하면 나는 야곱이란 이름은 깨졌다. 깨졌기 때문에 야곱은 지팡이 잡고 평생 절룩거리면 살아간 겁니다. 환도뼈가 날아갔으니까. 결국 야곱을 통해서 놀라운 사실은, 이름=새로운 현실. 단순히 이름만 바뀌는 게 아니고 현실 자체가 이 이름을 위하여 현실이 자기 조정에 들어서는 거예요. 자기 변동에 들어가고 자기 변화에 나서게 되는 겁니다. 곧 내가 현실이 아니고 내 이름이 현실이에요. 주의 이름이 현실이에요. 내 이름이 현실이고 주의 이름으로 바꾸는 과정 자체가 성경에서 말하는 언약의 현실입니다.

이렇게 되게 되면 성경해석은 인간의 저주받은 이름, 더러운 이름, 아담이기 때문에 흙으로 돌아가야 될 그 이름 그걸 취소시키는 것이 주의 작업이죠. 택한 백성에게. 흙이기 흙으로 돌아가라. 하지만 이제는 네가 다른 이름, 아담의 이름이 아니고 마지막 주의 이름으로 불러질 때 예수님이 지니고 있는 이미 확보된 부활의 찬란한 영광, 그 몸을 네가 입을 것이다.

아담 이름으로 불리어졌기 때문에 아담 이름이 주는 압박감에서 어떤 인간도 거기서 벗어날 수 없어요. 아담 이름 자체가 저주받은 이름인데 따라서 인생은 고생하는 게 마땅해요. 사는 게 왜 힘듭니까? 사는 게 힘들기 때문에 교회도 안 나오잖아요. 아이 본다고. 교회 나오고 싶고 하고 싶은데 미치겠어, 정말. 내 마음대로 안 돼요.

그런데 미치려면 충분하게 미쳐야 돼요. 어설프게 미치지 말고. 세상에 미쳤다 하지 말고 내 자체가 죽음의 일부인 거예요. 내가 죽음의 일부기 때문에 죽어야 되는 겁니다. 내 하루는 전체 역사 일부에요. 이 말을 바꿔 말하면 나의 삶의 일부는 곧 죽음의 일부로서 죽음이 이 땅에 진짜 세상이라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겁니다. 하루는 전체와 같고 그 전체는 죽음의 전체고 나는 죽음의 전체의 일부로 살아가는 겁니다.

따라서 야곱이란 폐기된 이름을 버리지 마시고 꼭 챙겨야 돼요. 야곱이란 이름을 챙겨줘야 그 야곱과 대비되는 주님으로부터 부여받은 진짜 내 이름, 주의 이름이 그 안에서 부각이 되고 표현이 되는 돼요. 나타나요. 저주받을 내 이름을 잊어버리면 주의 이름도 같이 상실되고 마는 겁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저주한 것, 그건 베드로가 꼭 그렇게 해야 돼요. 왜? 베드로는 그냥 시몬이니까. 하지만 시몬이란 이름이 베드로로 바뀌지요. 베드로란 이름은 자기 이름이 아니지요. 주의 이름이죠. 교회 기초는 시몬이 아니고 베드로가 되는 겁니다. 주님 자신이 교회라는 회중의 기초가 되는 겁니다.

따라서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산다는 말은 뭔 뜻이냐 하면 내 이름을 알고 살아가는 거예요. 저주받은 이름을 버리지 않고 그게 바로 내가 전의 내 모습이었다는 것을 항상 잊지 않고 살아가는 것이 성도의 모습이에요. 저주받아 마땅하다는 겁니다. 죽어도 마땅하다는 거예요. 아니 이 세상에 죽음을 증거하는 용도로 주께서 하루하루를 죽음의 일부로 계속 지연시키는 겁니다.

많은 사람들이 저한테 묻지요. “목사님, 예수 믿는데 왜 이리 아픕니까?” 그게 주의 이름으로 불리기 때문에 아픈 거예요. 왜냐? 아픈 것이 죄 때문에 아프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이 주님의 자비가 있는 사람이고 안에 공백이 있는 사람이에요. 그 공백이 주님의 이름으로 채워진 사람 입에서 껍데기, 공백을 둘러싼 껍데기는 왜 주인 자리를 차지하지 못하고 껍데기로 밀려야 되는가, 그걸 감사함으로 고백하는 거예요. 뭘 해도 저주스럽고 뭘 해도 이게 무의미한 거예요.

그래서 뭘 하세요. 뭘 해도 되고 안 할 수 있는 없습니다. 내가 뭘 해도 의미 없기 때문에 뭐든지 할 수 있는 거예요.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걸 할 수 있어요. 왜? 의미 없기 때문입니다. 그걸 윤리적 도덕으로 평가할 수 없기 때문에. 평가대상이 안 돼요. 주의 이름을 잉태하는 자리, 그 자리를 갖고 있기 때문이에요.

주의 이름은 핍박당한 주의 이름이거든요. 핍박당한 주의 이름 아닙니까. 시편 22편에서 앞에 뭐라고 돼있습니까?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했지요. 그 버리는 작업에 누굴 동원했습니까? 인간들 짐승이죠. 짐승들에 의해서 버림받은 자가 그 다음에 드디어 23절부터 찬양으로 바뀝니다. 다윗을 당하지만 주의 이름은, 다윗 이름 안에서 주의 이름이 피어나니까 당하는 절차마저도 필연적이에요. 반드시 그렇게 당해야 되는 겁니다.

그런데 이런 일이 자기뿐만 아니고 나란 이름이 날아가 버리면, 적어볼게요. 나란 이름을 누가 공격하느냐? 주의 이름, 완전한 개인, 최종적인 개인 또는 자아, 나가 나를 핍박을 해버리면 나는 여기서 허물어지겠지요. 핍박하는 방법은 언약의 적들, 하나님의 적들로 압력을 가합니다. 그러면 나는 이게 하나님의 의도적인 조치인 줄 모르고 누굴 지킵니까? 절대적으로 나를 지키려고 발악을 하지요.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그런데 이 나가 주의 이름으로 대체해버리면 그 다음부터 주의 이름으로 하지요. 주의 이름으로 파생돼있는 이 집단의 회중들인데 무리들, 집단, 대회인데 이 사람들 특징은 한 결 같이 공통점이 있어요. 같은 탕수육 소스를 갖고 있습니다. 이게 뭐냐 하면 전부 다 주의 이름을 부르면서 감사의 찬양을 한다는 거죠. “고맙습니다, 주님. 내 힘으로 할 수 없는 일을 해내는 분을 찬양합니다.” 그렇게 되겠지요.

그렇다면 진도 나갑시다. 이렇게 회중 대회란 자체가 누구 솜씨냐 하면 주의 이름이 찾아온 주의 솜씨잖아요. 그러면 그 바깥에 있는 사람은 어떻게 되겠어요? 주의 이름 바깥에 있는 사람들은. 그대로 자아들이 있겠지요. 자기 아담의 이름을 고집하지요. 거기에 대해서 주의 이름이 어떻게 대처하겠습니까?

다윗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있을 때 그 주변은 짐승들이죠. 짐승들이니까 그들은 무슨 증거를 남기느냐 하면 하나님의 말씀의 인물을 핍박했다는 가해자적인 증거를 분명히 핍박받은 다윗을 통해서 버림받은 다윗을 통해서 증거가 확보된 거예요. 따라서 주의 이름으로 그들에게 저주와 심판을 내려도 그들은 할 말이 없겠지요.

요한계시록 두 군데 찾아보겠습니다. 14장 20절요. 요한계시록 보기 전에 시편 61편 4절 먼저 봅시다. “내가 영원히 주의 장막에 거하며 내가 주의 날개 밑에 피하리이다” 아멘, 여기서 내가 영원히 주의 장막에 피하지요. 주의 장막 다윗 지 혼자 사는 집입니까? 아니면 회중들, 이스라엘, 야곱의 새 이름 이스라엘이 있는 거죠.

그러면 야곱이 이스라엘 된 체험이 공동 체험이 되겠지요. 야곱이 이스라엘 될 때 하나님 만나서 완전히 깨졌잖아요. 그와 동일한 공동 체험을 가진 자의 집단, 그게 바로 주의 이름이 있고 주의 장막 안에 옹기종기 같이 모여 있는 거예요. 이거는 새로운 공간입니다. 새롭게 마련한 자리에요. 주의 이름의 공간, 지배받는 것.

여기서 다시 말씀드립니다만 우리가 이 땅에 사는 것은 내 이름으로 사는 것이 아니고 주의 이름으로 불리기 때문에 이제는 내가 뭘 했다, 안 했다 이것을 내가 평가할 수 있는 어떤 권한이 이미 나에게서는 없어요, 떠나버렸어요. 주께서 그렇게 하게 하신 겁니다. 예수 믿고 난 뒤의 평가만 그런 게 아니고 예수 믿기 전부터 태어나기 전부터 이미 주님께서 그렇게 하셨어요.

시편 22편 9절에 보면, “오직 주께서 나를 모태에서 나오게 하시고” 이미 주님을 모태에서 나오게 하신 소급해서 태어날 때부터 주께서 자기 이름을 위해서 태어나게 하신 거예요. 우리는 몰랐지요. 모르고 내 이름을 고수하기 위해서 내 이름의 명예와 가치를 체면을 지키기 위해서 우리는 나를 위한 투쟁을 해왔던 겁니다.

그런데 난데없이 세상 살아가면서 더 이상 지킬 수 없는 억압이 되는 압박이 가해지는 그러한 사태 속에 우리가 휘말리고 만 거예요. 그게 율법의 세계, 말씀의 세계, 첫째 시간에 이야기했듯이 율법이 오게 되니까 우리가 원치 않는 일을 해야 돼요. 너, 형수와 결혼해라. 이건 말이 안 되거든요. 이건 내가 있음에 내가 하기 싫은 거예요. 나라고 구성된 요소에는 형수와 결혼하는 게 일체 없습니다.

왜냐? 나는 지키고 싶은 게 따로 있고 나의 순수함과 순결함과 잘남을 지키신 분은 따로 있기 때문에 율법이 요구하는 것을 우리는 충족시킬 수 없어요. 저주받는 한이 있더라도 그 짓은 못합니다. 내가 지키는 내 청춘이 늙은 여자와 결혼하려고 내 청춘을 지켜온 게 아니니까. 우리의 본성입니다.

그런데 그 압박이 더욱 심해져요. 심해져서 우리가 어디까지 몰렸습니까? 이 현실이란 세계 끝 지점까지 몰리는 거예요. 현실과 현실 너머의 세계 그 경계선까지 몰리게 된 거예요. 여기서 나온 유명한 노래, 여기까지가 끝인가 보오. 끝이라 했는데 또 끝이 있어. 그럼 또 여기까지가 끝인가 보오. 그 끝의 끝은 바로 십자가입니다.

끝 지점에 서있는 인간의 자세, 태도는 이 한 마디로 충분합니다. 이건 제가 다음 주일 설교 준비하고 있는데 설교제목이 <철학과 복음>이에요. 예상하기는 설교시간에 철학으로 가득 찰 겁니다. 철학과 복음이니까 철학을 알아야 복음을 알지요. 인간의 철학의 끝은 뭐냐? 광주강의에서 제가 적었어요.

인간은 관찰(보는 것), 인간이 보고 싶은 것은 보는 것을 보고 싶다. 인간은 보고 있는 나를 보고 싶은 겁니다. 인간의 끝은 자아입니다. 나로부터 시작해서 나로 말미암아 나로 가는 이게 인간의 철학의 끝이에요. 특별히 여러분에게 말해줍니다. 인간의 끝은 나로부터 시작해서 나로 마감이 돼요.

엄마와 아빠 사이좋고 아빠는 점잖고 복음은 모르지만 유교적이고 얼마나 인간처럼 살려고 백날 아버지는 점잖고 인자하고 품성이 곱고 참 배려심도 있고 그랬던 아버지, 같이 살면서 집에 창문 하나 갈아 넣자 하니까 싸웠어요. 왜냐하면 내 돈 내 거다. 인간이 아무리 점잖고 훌륭해도 돈 문제, 내 돈 내 마음대로 쓰는데 네가 왜? 이것 한 마디로 진리입니다.

이 세상의 진리는 뭐냐? 이 돈은 내 돈이라는 것. 좋은 것 바른 소리할 때는 적어놓으세요. 이 돈은 내 돈이다. 부부사이고 자식이고 뭐고 필요 없어요. 이걸로 게임오버. 이 돈은 내 돈이다. 나는 죽어도 내 이름을 위해서 이 돈은 사회에 기여하겠다. 이게 무슨 미친 소리입니까? 죽으면 곱게 죽지. 죽고 난 뒤에 뭘 기여하고. 자식들은 미칠 지경이에요.

아버지를 보는 게 아니잖아요. 나한테 돌아올 돈으로 아버질 본단 말이죠. 그 돈을 아버지로 환원해버리면 남한테 주잖아요. 그럼 나는? 그동안 아버지 아프다고 요양병원 수고한 나는 보상비를 못 탔잖아요. 아무 것도 한 짓도 없는 사회가 왜 보상을 받아야 돼요. 내가 받아야 되지. 이거는 정의로움에 어긋나는 거예요. 인간의 정의, 인간의 사랑이라는 것은 내 중심이에요. 더 노골적으로 내 돈을 지켜주면 정의고 내 돈 날아가 버리면 이거는 악마고 사탄이고 그런 거예요. 내 돈 빼앗아 가면.

인간의 해안가, 그리고 연안 그것은 바로 결국 나의 가치보다 더 정확하게 내 이름의 가치에요. 나는 죽어도 내 이름을 위해서 자살할 용의가 돼있는 게 인간입니다. 자살까지 할 정도로 자기 몸, 육신을 내 이름의 제단에 바치는 거예요. 내 이름을 욕되게 하지 마라, 이런 것. 계백 장군은 전쟁에 나갈 때 뭐 했습니까? 혼자 갑옷 입고 나가면 될 것 아닙니까. 가만있는 마누라는 왜 죽입니까? 우울증 걸려서 지 애 던지고 지 아빠 던지고 왜 그런 짓합니까?

애가 아니고 내 이름에 속한 나만의 영역이라는 거예요. 인간 못 고칩니다. 타고난 거고요. 마귀 들린 인간의 모습은 고칠 수가 없어요. 인간은 자기 이름을 심판 못합니다. 내가 손댈 수 없는 내 이름을 말씀을 통해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너 율법 지키나? 못 지킵니다. 그러니까 저주받아 마땅하나? 오케이. 오케이 했으니까 말씀으로 율법으로 우리를 심판해주니 이렇게 고마울 데가 어디 있습니까?

내가 손 못 대는 나를 말씀이 와서 죽여주는 거예요. 이건 뭐 사도 바울 편지 속에 다 들어있어요. 전부 다. 먹는 것 입는 걸로 족한 줄 알라. 이게 어떻게 지켜집니까? 지켜질 수가 없지요. 세상에 먹는 것, 입는 것으로 족한 사람이 어디 있어요. 어디 기계도 아니고. 기계야 기름 쳐주는 걸로 만족해라. 기계 같으면 동의 되는데 기름만 있으면 잘 돌아가니까요.

어제 오후 설교에 인간은 인간 두뇌 안에 저항체가 있어요. 신이고 뭐고 내 허락 받아야 된다는 이상한 저항체가 동식물에는 없는데 인간에게만 있어요. 이게 하나님의 형상 자리에 악마가 들어왔기 때문에 악마가 자꾸 날 앞장세워서 절대자 노릇하고 있는 거예요. 악마 자기의 요구사항을 우리를 앞장세워서 우리한테 계속해서 앵벌이 시키는 겁니다. 악마 자기 소원이에요. 신에게 꿀리지 마라. 그런데 언제부터 우리도 나란 존재는 신에게 꿀리기 싫어하는 존재, 이렇게 되고 말았어요.

그게 여러분들이 세계명작문학 보세요. 내용이 한결 같아요. 신에게 지지 않는 인간이 되었다. 이게 세계문학전집이고 노벨문학상 내용이에요. 노벨문학상을 그것 때문에 상 줘요. 이 땅에서 상 받는 자체가 이상해. 꼭 신에게 대들어야 상을 줘요. 신을 짓밟지 않으면 상을 안 주는 세상이에요, 이 세상이. 주님 무슨 상 받았어요? 사도 바울이 무슨 상 받았어요? 이 세상이 주는 상은 못 받았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 열두 제자도 다 마찬가지에요.

요한계시록 14장 19절에 보게 되면 제단에서부터 심판이 주어지는데 요한계시록 14장을 보기 전에 11장 19절에 위상구조를 보세요. “이에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성전이 열리니 성전 안에 하나님의 언약궤가 보이며 또 번개와 음성들과 뇌성과 지진과 큰 우박이 있더라”

성전이 하늘에 있지요. 성전 안에 언약궤가 보이지요. 밑으로 뭐가 떨어집니까? 번개와 음성들과 뇌성과 지진과 큰 우박이 방향이 어느 쪽에서 어느 쪽으로 떨어지지요? 위, 위가 어디죠? 하나님의 성전이 완성이 되게 되면 아래쪽은 오직 파괴와 심판과 파괴밖에 없어요.

대만에 춘절이 되게 되면 사람들의 복이 오라고 대문짝에 한자를 쓰는데 ‘福’자를 써요. 복 자를 쓰고 난 뒤에 복 자를 거꾸로 붙여놔요. 바르게 쓰고 거꾸로 붙인다고. 왜 그렇게 하느냐고 리포터가 물어보니까 하늘에서 복이 떨어지라고 복 자 방향을 땅에서 그렇게 해놨어요.

하나님의 성전이 이미 완성이 됐기 때문에 다른 것은 필요치 않은 겁니다. 없어져야 마땅한 거예요. 그리고 난 뒤에 아까 우리가 보고자 한 14장 17절에 보게 되면, 또 다른 천사가 어디서 나옵니까? 성전에서 나오지요. 성전에서 뭘 들고 나옵니까? 칼 들고 나오지요. 낫 들고 나오는 겁니다. 낫은 조지는 겁니다. 불을 다스리는 천사가 제단으로부터 나오지요.

“또 불을 다스리는 다른 천사가 제단으로부터 나와 이한 낫 가진 자를 향하여 큰 음성으로 불러 가로되 네 이한 낫을 휘둘러 땅의 포도송이를 거두라 그 포도가 익었느니라 하더라”(18절) 포도 안에 뭐가 들어있는가? 저주받을 내용이 들어있는 거예요. 왜냐? 성전은 주의 이름으로 회중이니까.

아까 시편 22편에서 성전에 있는 사람의 공통점이 성전에 있는 사람은 누구 이름을 부른다? 주의 이름을 부르지요. 그럼 주의 이름 외에는 어떻게 돼야 돼요? 제거대상이 심판대상이 되겠지요. 왜? 각자 자기 이름을 갖고 있으니까. 그래서 주의 이름을 부르지 않는 자는 뭘 받는다? 저주를 받는다.

주의 이름 외에 다른 이름으로 구원받을 자가 없다는 말은, 저주를 받게 돼있어요. 주의 이름이 없다는 이유 때문에 사람 취급을 못 받고 짐승 취급 받는 겁니다. 그 사람 인간성 좋고 말조심하고. 그런 것 믿지 마세요. 주의 이름, 다시 말해서 주님이 나에게 찾아와서 나를 박살냈다는 그 이름, 내 이름의 자존심과 명예와 그걸 완전히 뭉개버렸던 그 이름, 나의 이름을 대체한 그 이름이 없는 사람은 저주대상입니다.

아까 첫째 시간에 이야기한 것처럼 새로운 관계에 돌입해야 돼요. 주의 이름에 의해서 재정렬 된 관계로 있어야 되지 그냥 자식이라고 부모라고 남편이라고 그냥 육적으로 좋은 게 좋은 그렇게 해서 지탱할 수 있는 명분도 우리한텐 없습니다. 주께서 주의 이름 증거 하라고 맺은 남편이고 아내에요. 생긴 자식이고 교우들이고 그래요. 주의 이름 때문에.

따라서 내가 내 주장을 내세울 하등에 이유가 나한텐 없습니다. 누가 빵 주면 받아 챙기면 되지 이것 줄 때 뭘 원하느냐? 그것 따지지 마. 골치 아픕니다. 주님께서 주의 이름 증거 하라고 저주받을 인간, 아까 했지요. 내 이름 버리지 말라고요. 망가진 내 이름 버리지 마세요. 걸뱅이도 그런 걸뱅이가 없어요. 주는 대로 먹고 살 때까지 살고 걸뱅이 노릇하면 돼요. 걸뱅이는 거지의 다른 말. 거지노릇하면 다하면 되는 겁니다. 우리가.

심판은 내가 하는 게 아니에요. 심판받는 건 주께 달렸다고 했습니다. 로마서에 보면 나오지요. 심판은 주께 있으니 네가 심판하지 말라. 우린 심판할 권한이 없습니다. 주께서 철저하게 낫을 휘둘러서 그냥 땅에 좋게 가만히 하는 게 아니라 휘둘러버려요.

“천사가 낫을 땅에 휘둘러 땅의 포도를 거두어 하나님의 진노의 큰 포도주 틀에 던지매”(19절) 이게 밟고 누르게 되면 그 피가 튀지요. 송이마다 다 터져버리면, “성 밖에서 그 틀이 밟히니 틀에서 피가 나서 말굴레까지 닿았고 일천 육백 스다디온에 퍼졌더라”(20절)

전체 사방을 숫자로 표시하거든요. 동서남북이니까. 동서남북 끝까지 연안부두 나올 때까지 인간의 한계 끝까지 나는 나로 말미암아 나의 의미로서 충족되는 현실 그것만 아는 끝까지 저주의 의미로 다 채워버려요. 그때 인간들은 말하기를, “누구에요, 누가 나를 함부로 밟았습니까?” “나다. 뭐 문제 있어? 너희들이 핍박한 나 예수가 너희들을 죽인다.” 그것이 요한계시록에 심판하는 근거입니다. 주의 이름으로 성전 이뤘지요. 이제 나머지는 주의 이름의 저주만 주어질 뿐이에요.

그 다음에 요한계시록 18장 24절, “선지자들과 성도들과 및 땅 위에서 죽임을 당한 모든 자의 피가 이 성중에서 보였느니라” 주의 이름으로 먼저 이 땅에서 우리가 피 좀 봐야 됩니다. 왜? 주의 이름이기 때문에 주의 이름이 가신 그 길을 우리가 답습을 할 수밖에 없어요. 그래서 세상 돌아가는 게 내 원대로 안 돼요. 난 한 달 수입 이백만원만 있으면 좋겠는데 한 달 수입이 주식 던져놨는데 주식 올라서 삼천만원이 막 들어와요. 내 뜻대로 안 되는 겁니다. 매사가 내 뜻대로 안 돼요.

이 말은 뭐냐? 내가 저주를 기대해도 저주는 안 오고요 내가 복을 기대해도 복이 안 와요. 이 말을 한 마디로 말해서 내 예상대로 되어지는 것은 주의 일이 아니고 저주받을 일이다. 이게 주께서 인정하지 않는 주께서 무의미하게 보는 일은 다 내가 예상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나는 내 저주받은 이름을 버리지 않았기 때문에. 나의 이름을 버리지 않아야 내 이름의 명예를 위해서 내가 확보한 현실의 범위가 살아가면서 계속 넓혀지고 그 연안 자리에서 내가 늘 깨지고 이게 되풀이 되고 반복되는 거죠.

여러분들이 그네를 탑니다. 최고점 올라갔다 최저점 내려가지요. 최고점 올라가도 나고 내려가도 그 나고. 나는 그네에 묶인 이상 어떤 변동이 없습니다. 나는 내 이름의 명예와 체면과 위신을 위해서 비록 내가 최저점 곧 자살이죠. 자살해도 역시 나는 저주고 나는 모든 걸 잊어버려도 역시 나. 주님께서 끝까지 나의 이름을 놓지 않고 나의 이름을 쥐고 주의 이름을 나의 이름에서 끄집어내는 작업을 멈추지 않습니다. 끝까지.

그래야 한 때 말씀 은혜 받으면 안 되고 매일같이 말씀이 주도권을 줘야 되고 탕수육 소스가 작용돼야 돼요. 못난 나를 덮쳐줘야 돼요. 따라서 못난 나를 못난 나로 계속 어쩔 수 없이 목숨 붙어 있을 때까지 못난 나로 살아가야 됩니다. 조금 건드려도 화내고 조금 일 있어도 벌벌 떨고 이게 있어줘야 시편의 중간부분이 생성되는 거예요. 내가 아는 하나님은 가짜였던 거예요.

그게 이런 하나님이 옴으로써 시편 끝에 있는 하나님, 진짜 하나님, 진짜 감사가 되는 하나님, 앞쪽의 하나님은 감사해야 내가 벌 안 받는다고 내가 조작해낸 가짜 하나님부터 시작해서 진짜 하나님으로 순환돼야 돼요. 무한루프, 계속해서 반복되는 겁니다. 매일매일. 그래서 아직까지 죽음이 세계에서 죽음이 어디서 오며 왜 나는 죽음의 아픔에 같이 겪게 하는가? 주께서 그 길을 가셨잖아요. 주님께서 주의 이름이 가셨다고요.

이미 우리의 생명은 하늘에 있고요 이제 있는 것은 주님이 어떤 분인지 우릴 통해서 나타내고자 하는 것, 그것이 다윗의 운명이고 오늘날 우리의 운명입니다. 개인은 없고 집단밖에 없는 그것이 바로 오늘날 이스라엘이죠.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시편을 통해서 주께서 하는 작업에 우리가 말려든 것에 대해서 얼마나 놀라운 예상 못할 축복인 것을 깨닫게 해주시고 날마다 우리가 예상하는 것과 예사하지 못한 것 사이에서 오직 감사만 나오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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