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208a 부산강의 : [시편]35(22편)-형상싸움
(강의:이근호 목사)
시편 22편 5절부터 보겠습니다. “저희가 주께 부르짖어 구원을 얻고 주께 의뢰하여 수치를 당치 아니하였나이다” 여기 구원이란 말이 나오는데 구원이란 말을 하는 것은, 그림을 하나 그릴게요. 화산이 있습니다. 화산에서 마그마가 분출하지요. 마그마가 폭발해서 흘러넘치는 겁니다. 마그마가 산 정상에서 밑으로 타고 내려오겠지요.
시편 22편에서 다윗이 말하기를 1절에 보면,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분출되는 지점이 왕입니다. 다윗은 왕이거든요. 기름 부은 자. 왕은 일반인이 될 수 없습니다. 일반인은 불가능한 지점 또는 위치 이게 왕이에요. 그런데 왕의 입에서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나왔지요.
그러면 여기서 왕과 이스라엘 가운데서 유일하게 하나님과 통하고 있는 위치가 왕의 위치인 것을 여러분이 아시면 됩니다. 그러면 왕의 위치에서 제대로 하나님의 뜻이 나오겠지요. 그게 뭐냐 하면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왕을 버린 거예요. 왕을 통해서 버림을 받았다 할 때 왕이 실제로 몸을 갖고 눈에 보입니다. 오늘 이것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눈에 보이지 않는데 하나님과 통하고 있는 왕의 신체는 눈에 보이지요. 그런데 왕의 신체, 다윗이 누구한테 쫓기느냐 하면 사울 왕, 전임 왕에게 쫓기고 있는 겁니다. 목숨을 위협받고 있지요. 그러면 사울 탓을 해야 되는데 이상하게 다윗은 사울에 대해서 별다른 감정이 없어요. 사울을 만나서 죽을 수 있는 것은 아비새라는 부하는 당장 죽이라고 하지만 다윗은 두 번씩이나 살려주지요. 결정적 기회임에도 살려줍니다.
다윗은 살려주는 것을 통해서 일반인들이 생각할 때 불가능한 지점과 위치가 단순히 왕의 신체가 일반인의 신체가 달라서가 아니라 생각하는 관점이 불가능한 관점을 왕이 갖고 있어요. 자기를 해치면 원수를 갚아야 될 텐데 뭐라고 이야기하느냐 하면 이걸 하나님이 나를 버렸다는 거예요. 이게 일반인들은 불가능한 거예요. 일반인들은 자아를 사수하거든요. 자기 자신을 사수하는 것이 급선무란 말이죠.
잘 알다시피 세상 사람들 불신자와 신자의 차이점이 있다면, 신자는 다른 말로 성도지요. 성도의 관심사는 뭐냐 하면 예수님에게 있어요. 예수님이 누구신가? 다른 말로 하면 진리가 무엇인가, 여기에 관심을 두는 반면에 불신자, 일반인들은 관심이 어디 있느냐 하면 나한테 관심 있잖아요. “하나님이여, 나를 지켜주옵소서.” 이렇게 되는 거예요. 이게 불신자에요. 관심사가 어딥니까? 나한테 있는 거예요.
이 말은 내가 곧 진리가 되고 주님은 최종 관심사가 아닌 거예요. 그러면 성도가 되어서 예수님에게 진리에 관심을 두려면 무슨 장벽을 돌파해야 됩니까? 나에게 모든 것을 몰입하고 나에게 모든 것을 올인하는 그 두꺼운 장벽을 통과하기 아니하면 예수님에게 관심 둘 수가 없어요. 내가 여기 중앙에 버티고 있는 한 예수님은 하나의 시다바리, 나의 종이 되는 거죠.
일반인, 불신자 입장에서 왜 본인 놔두고 엉뚱한 예수님한테 관심 있어? 오히려 의아해하는 겁니다. 교회 간다 하면 바쁜데 교회 왜 가냐 이러죠. 네 일 바쁜데 교회 왜 가냐 이러죠. 코로나 때문에 교회 못 오겠습니다. 코로나 걸릴까봐 교회 못 오겠습니다, 할 때 벌써 관심사가 어디 있습니까? 자기 안전에 있고 자기 안위에 있지요.
그러나 성도는 자기 안전과 자기 안위는 없고 예수님에게 진리의 하나님에게 관심이 있는 겁니다. 사람들은 선지자나 신약에 나오는 성도들이 예수님에게 관심 있으니까 자기도 자기한테 관심 두면서 플러스 예수님한테 관심 두려고 시도해보는데 이게 안 돼요. 왜 안 되느냐 하면 백날 해봐야 나를 지키기 위한 지식 확보밖에 안 된다니까. 나를 영원히 모시기 위한 그러한 노림수 또는 꼼수, 장난질 또는 오락 그것 밖에 안 되는 겁니다.
그래서 자기 살림하고 시아버지까지 섬기려 하니까 짐이 배나 힘든 거예요. 무지무지 힘든 거예요. 신앙생활이 엄청나게 힘든 겁니다. 그래서 신자들의 삶을 생각할 때 너 참 고생이 심하겠다, 마음고생 참 힘들겠다, 하지만 사실은 예수님께 관심두면 자유입니다. 왜? 나한테 관심 안 둬도 되기 때문에 진정한 자유지요. 네가 이 자유의 맛을 알아, 할 정도로 주님한테 관심 있으면 자연적으로 나한테 관심이 없지요.
코로나가 오든 변종이 오든 그것 나와 아무 상관없는 거예요. 주님한테 꽂힌 사람이 코로나가 왜 거기에 걸림돌이 될 이유가 없지요. 자기 것도 챙기고 저것도 챙기고 다 챙기려고 하니까 바빠. 생각한 것이 바쁘고 항상 선택해야 돼. 이걸 선택할까, 저걸 선택할까? 아빠가 좋아, 엄마가 좋아. 맨 날 중국집 가면 자장면 먹을까, 짬뽕 먹을까. 맨 날 바쁜데 자기란 덩치를 해소를 못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진리가 무엇이냐? 다윗 왕에게 진리는 뭐냐 하면 나를 버리는 것, 이게 진리입니다. 하나님께 버림받은 자가 이스라엘의 왕이 된다는 사실,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반드시 그 체험을 해야 되지요. 그 체험을 하게 되면 다윗은 사울 왕을 통해서 뭘 체험하느냐 하면 자기 자아의 죽음을 말로만 아니라 실제적으로 체험을 하게 됩니다. 수련회 때 했거든요. 쫓겨서 열여섯 군데 돌아다녀요. 자기 죽음이에요.
그러니까 전에 낮 설교에서 그런 이야기했거든요. 성도는 숨 끊어지기 전에 자기 죽음을 목격한다고. 어제 오후설교 같은 경우에는 분명히 내가 죽었다는데 왜 나는 죽었다는 체험을 못 느끼고 있지? 그것은 우리가 하루하루 살아가는 삶이 있잖아요. 우리의 생애, 일상이 바로 죽음이라는 사실, 우리 일상이 내가 살아 있는 것이 아니고 내 몸 신체 안에서 죽음이 살아 있다는 걸 늘 느껴야 되는 거예요. 맛있는 걸 먹으면서 이걸 죽음으로 받아들여야 돼요,
제가 어느 강의에서 그런 이야기했잖아요. 외국에 유학 가는 것은 살려고 가면 안 되고 내가 죽는 이유를 찾기 위해서 유학 가야 된다고. 결혼도 마찬가지고. 모든 것이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를 확인하기 위해서 성도는 이 땅에 태어난 겁니다. 이렇게 열심히 살아도 버림받는 거구나. 자아가 내가 버림받아야 돼요. 그 역할이 무슨 역할이냐? 바로 성도의 자리에요. 이거는 일반인들은 불가능한 자리입니다.
그래서 다윗 왕에게 마그마가 덮쳐서 죽게 되면 이 죽음이 확장되는 이걸 가지고 바로 하나님이 생각하는 이스라엘이 되는 겁니다. 이 이스라엘은 교회가 되고 이 왕은 예수님이 되고 하나님과 다윗과 이스라엘의 관계가 그대로 신약에 오게 되면, 그것이 하나님과 예수님과 교회의 관계로 완성이 되는 겁니다.
우리가 구약을 하기 때문에 이러한 공식을 만들어볼 수 있거든요. 성경이라는 것은 신약과 구약으로 돼있다. 맞지요. 그러면 여기 구약이라 하는 것은 구약적이고 신약적 요소를 다 갖고 있어요. 구약임에도 불구하고 신약적 요소가 있고 구약이니까 구약적 요소가 있겠지요. 구약적이라 하는 것은 이방적 요소와 이스라엘적 요소를 다 갖고 있어요. 신약적 요소라 하는 것은 바로 지상적 요소와 초월적 요소를 다 갖고 있습니다. 이러면 다 나왔지요.
그래서 신약은 뭐냐? 천상과 지상, ‘적’的이란 것이 떨어집니다. ‘적’이라 하는 것은 내다보지만 천상, 지상은 이미 확정된 거니까 실제니까 이게 떨어져요. 그럼 다시 보겠습니다. 성경은 구약과 신약으로 돼있다. 구약 다음에 신약이 오니까. 맞지요. 이게 오늘 설교에서 중요한데 구약은 구약적 요소와 신약적 요소가 있다는 말은, 구약이니까 구약적 요소가 있는 건 마땅하고 신약적 요소라 하는 것은 신약의 그림자라고 할 수 있어요.
그림자라고 이야기할 때 여러분들의 그림자만 생각하지 말고 몸체와 끊어지지 않는다, 이어져있다는 이 이어짐이 중요해요. 히브리서에 나오는 구약은 하나님의 그림자라 할 때 이어져있다는 이게 강조점이에요. 구약과 신약이 끊어져있는 게 아니고 이어져있는 거예요.
신약적 요소가 뭐냐? 여기 나오지요. 초월적이고 지상적 요소를 어디에 품고 있느냐 하면 다윗 왕에게 포함돼있습니다. 이렇게 이어져있어야 시편 22편에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가 마태복음 27장에 나오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외쳤던 것과 이어져있는 거예요. 그래야 언약은 망하지 않는다. 언약은 끊어지지 않는다. 언약은 연속적이라는 말이 성립이 되는 겁니다. 진리는 한결 같다는 거예요.
이걸 에베소서 3장이나 골로새서 1장에서 비밀이라고 하는 거예요. 어제 낮 설교하면서 비밀을 박태환 수영선수가 스타트하고 잠수하지요. 한 25미터 정도 가게 되면 선수 어디 갔지? 선수 없어졌어요. 물속에 가는 거예요. 구약 쪽이죠. 구약 쪽에 신약의 요소가 있는 거예요. 드디어 구약 끝나고 여기 있지 하고 돌고래처럼 수면 위로 뛰어올라오잖아요. 이어져있는 겁니다.
그런데 자아는 어떤 특징이 있느냐? 자아는 내가 죽으면 그걸로 끝이에요. 끊어져있습니다. 그래서 끊어져있는 자아를 진리의 세계와 연결되려면 자아가 살면 안 되고 끊어지게 된 이것을 구약적이든 신약적이든 이방적이든 이스라엘적이든 언약 쪽에 연결을 시켜줘야 돼요. 우리는 지금 구약을 보기 때문에 구약의 무엇과 연결시키느냐? 구약으로 끝나면 안 되고 신약 쪽으로 연결시켜줘야 이 자아는 끝이 아니고 연결된다 이 말이죠. 자아, 나는 연결이 되거든요.
연결될 때 나는 어떻게 나로 연결되는 게 뭐로 바뀌느냐 하면, 오늘 제일 어려운 대목입니다. 나는 형상으로 바뀌어요. 내가 나로 가면 안 돼요. 형상으로 바뀐다고.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나를 만든 적이 없어요. 창세기 1장 26절에 보면,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했지요. 여기에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어진 거예요. 내가 보기에는 내가 만들어졌지만 내가 만든 입장은, 내가 생각하는 나기 때문에 이것은 인정받을 수 없습니다.
아직 여러분들이 정신 차리고 있으니까 어려운 것 해버려야 돼요. 무슨 이야기냐 하면 이게 상당히 어려운 건데 인간의 마음, 내가 이 마음을 볼 때 이 마음은 스크린, 막 역할을 해요. 영화관의 막 역할을 해서 인간은 기껏 볼 수 있는 게 자기의 마음까지만 알아요. 그런데 이 마음이 뭐냐 하면 내가 만든 나르시시즘이거든요. 나르시시즘 알지요. 자기한테 도취되는 것. 내가 나한테 도취되어서 설치한 스크린이 마음이라는 겁니다.
마음을 호수, 또는 마음을 표현한 제일 유명한 것이 뭐냐? 거울, 동양철학에 나오는 거울. 유교에서 마음을 거울로 봅니다. 불교도 마찬가지고요. 네 마음에 티끌이 있으면 수시로 물티슈로 닦아야 네 마음을 안정되게 할 수 있다. 유교에서 이야기하죠. 그 유교시대와 같은 시대에 서양에서는 이 주장, 마음의 티끌을 닦아낼 때 늘 깨끗하게 자기 마음을 간수할 수 있고 행복을 이룰 수 있다는 이걸 스토아철학, 비슷한 게 에피쿠로스철학.
사도행전 17장에서 사도 바울이 이 사람들과 싸운다고요. 마음이 중요하대, 마음이. 사도 바울은 관심사가 예수 그리스도여야 된다. 저거들은 인간의 내 마음이니까 내 마음에 관심을 둬야 된다. 인간이 신을 믿는 것은 내 마음의 평정과 행복을 얻기 위해서 신을 믿어야 된다. 신을 믿는데 그것은 내 마음의 평정을 가져오기 위해서 세상을 설명해야 되거든요. 하나로 구축해야 돼요. 세상이 자꾸 변화가 되잖아요. 그러면 내 마음도 흔들리면 내가 손해란 말이죠.
그래서 하나를, 신께서 지배한다. 신의 주권사상인데 이슬람교의 알라신도 마찬가지고. 신이 모든 걸 관장하시고 모든 것이 신의 뜻대로 된다 할 때 결국 그러한 생각을 마음에 담아두는 그 의도가 뭘까요? 누구 좋으라고 하는 겁니까? 내 마음의 평정을 찾는 거예요. 애가 아프다, 코로나가 온다, 돈이 없다. 이 모든 복잡하고 혼란스러운 것, 이걸 형용사로 우리말에 이렇게 잘 표현돼있어요.
잔망스럽다. 잔망스럽다는 뜻이 뭘까요? 촐랑댄다는 말이죠. 잔망스럽다, 표면에 늘 요동이 친다. 내 마음의 표면이 늘 요동을 치는 거예요. 맨 날 문제 있으면 전화하고 계속 요동을 치는 거예요. 마치 드럼에 물 뿌려놓고 난타 공연하는 것 같아요. 다다닥 치면 물방울 튀니까 그 물방울 튀는 대로 세세하게 신경을 다 쓰는 겁니다. 내가 튀면 안 돼, 마음이 안정돼야 돼. 자아, 마음. 마음, 자아.
내가 조작한 허위가 마음이다. 잘못된 마음이 아니라 마음 자체가 허위에요. 스크린이거든요. 여러분들 <링>이라는 괴기스런 일본영화에 보면 티비 화면이 스크린, 이차원 평면이잖아요. 평면이 삼차원 돼버렸어요. 여자가 머리 풀고 거기서 기어 나온다고요.
지금 다윗은 내가, 라고 하지만 다윗은 나에서 뭐로 옮겨가는 중이냐 하면 형상으로 옮겨가요. 나는 형상으로 옮겨갈 때 뭘 뚫고 지나가느냐 하면 내가 쳐놓은 스크린이라는 가상스크린을 그냥 뚫어버리고 하나님께서 여기다가 사울 왕을 보내서 뚫어버리는 거예요. 그냥 도를 닦는 게 아니라 득도하는 게 아니에요. 지리산 들어가서 나는 온화하다, 나는 온화하다. 평정하다. 나는 세상 모든 걸 가졌다. 이러다가 아이가 돌멩이 던져서, “아저씨, 미안해요.” 그럼 “혹뿔 나서 미안하다.” 이게 말이 안 되잖아요.
절이고 성당에 가고 교회 가고 전부 다 마음의 스크린을 뚫어버리는 돈입니다. 주의 영광이고 복음이고 뭐 어떻게 해도 내 마음을 돈이 와서 찢어버린다니까요. 엄마 이혼하고 딸 둘과 사는데 살기가 너무 힘들어요. 그런데 셋이 하나님 말씀 생각하고 복음 생각하고 이렇게 사는데 어느 날 세 명이 투신자살했다? 말씀이 그렇게 만들었습니까, 복음이 그렇게 만들었습니까? 무엇이 그리 만들었어요? 돈이죠. 돈보다 더 실제적인 게 없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 마음은 돈이라는 협박을 겨우 견디기 위해서 가상적으로 내가 조작해낸 게 마음이기 때문에. 나는 누구와 이야기하느냐? 내 마음과 이야기해요. 이게 얼마나 허상입니까. 세상은 돈으로 움직이는데, 돈으로 움직인다는 말은 단백질로 움직이고 탄수화물, 지방질로 움직이고 어떤 곡식을 먹어야 배부르다. 이런 걸로 움직이거든요. 그런데 돈 없으니까 그냥 굶으면서 행복하다, 나는 복음을 안다. 이것으로 견디는 거예요. 이게 얼마나 어리석고 가증한 겁니까.
그래서 인간의 자아는 거짓을 통해서 발견하는 거예요. 나라는 것은 거짓을 통해서. 왜냐하면 내 마음은 나르시시즘이거든. 나의 진실함과 의로움과 정당함과 옳음과 훌륭함을 그래도 반영해주는 스크린이, 나는 영사기고 반영이 내 마음이란 말이죠. 마음과 나는 한 편이에요. 어떤 경우라도 마음은 섭섭하지 않고 나는 마음을 지키고 있는 거예요. 이 세상에 유일한 진실이 있다면 내 마음입니다. 그런데 그 진실에 반대해서 거짓이 마음을 뚫어버린 거예요.
그럴 때 내가 꿈을 꾸고 있었구나. 내가 착각에 있었고. 나르시시즘이란 자기 세계에 갇혀 사는 걸 말합니다. 자기 세계에 갇혀있으면 복음을 안다? 그것은 사람한테 안 들켜도 주님한테 다 들킵니다. 나의 세계에 살면서 주님을 사랑합니다. 결국 그 말은 뭐냐 하면 자기 마음 스크린에다가 “나는 주님을 사랑합니다.”를 적어놓은 거예요. 종이 쪼가리인데 아무것도, 내가 투사한 허상이거든요.
그래서 포이에르바하가 이걸 이야기한 거예요. 신이라 하는 것은 내 마음을 투사한 것이다. 내가 투사한 것이 신이다. 성경에도 나오지요. “저희가 하나님을 알되” 그게 뭡니까? 우상이잖아요. 하나님 자체가 우상이에요. 내가 내 마음에다가 이 세상의 변화가 너무 무서우니까 그걸 하나로 정답은 뭐냐? 신이 모든 걸 통치한다고 내 마음에다 적어놓은 거예요. 나와 내 마음이 일치되는 거예요.
자아는 실체가 없어요. 자아가 어디 있어요. 신체가 있지. 내 몸이 있지 자아는 없는 거예요. 없는 자아가 마음이란 것을 해서 맨 날 속닥속닥 불면증에 걸렸는지 밤새도록 자기와 이야기하는 거예요. 자기에서 나온 결론은 뭡니까? 신이 보기에 나는 정당하다, 나는 뭐든지 정당하다, 옳다. 그 이야기만 속닥속닥 주고받는 거예요.
그런데 사울 왕이 와서 다윗을 죽이려고 쫓아다니니까 다윗은 이 자체가 박살나는 거예요. 갑자기 하나님이 내 마음에 있는 하나님이 아니고 엉뚱한 하나님이 나를 죽음으로 몰아넣는 거예요. 내가 구상하지 않은 하나님. 다윗이 자길 죽이라고 사울 왕을 부추겼습니까? 아니지요. 내 계획에 없던 거잖아요. 계획에 없는데 죽이려고 쫓아다니는 거예요. 열여섯 번이나 쫓겨 다니면서.
그것은 내가 알고 있는 하나님 말고 내가 모르고 있는 하나님, 진실한 내 마음 입장에서는 어떤 하나님이에요? 거짓된 하나님이죠. 거짓된 하나님이 찾아오니까 누가 거짓돼요? 내가 거짓돼요. 버려도 마찬가지입니다. 버려도 마땅한 겁니다. 그렇다면 십자가는 결국 뭐냐? 누가 거짓되냐의 판정이에요. 내가 믿는 하나님이 거짓이야, 아니면 하나님이 거짓이냔 말이죠. 내가 믿는 하나님이 거짓이냐, 진짜 하나님이 거짓이냐, 어느 것이 거짓이냐? 누가 거짓이냐?
이 문제를 하기 위해서는 창세기 1장으로 다시 돌아가야 됩니다. 하나님의 형상이라 할 때 형상이 뭐냐 하면 우리의 신체에요. 시편 22편 봅시다. 6절을 누가 읽어보세요.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훼방거리요 백성의 조롱거리니이다 나를 보는 자는 다 비웃으며 입술을 비쭉이고” 10절에 보면, “내가 날 때부터 주께 맡긴바 되었고” 12절에, “많은 황소가 나를 에워싸며 바산의 힘센 소들이 나를 둘렀으며 내게 그 입을 벌림이 찢고 부르짖는 사자 같으니이다” 그 다음에 14절에, “나는 물 같이 쏟아졌으며 내 모든 뼈는 어그러졌으며” 그 다음에 16절, “개들이 나를 에워쌌으며 악한 무리가 나를 둘러 내 수족을 찔렀나이다 내가 내 모든 뼈를 셀 수 있나이다” 18절에, “ 내 겉옷을 나누며 속옷을 제비 뽑나이다”
이게 다 무슨 이야기냐 하면, 바로 신체에 관한 이야기에요. 주님은 우리의 신체를 주목한다고. 자아를 주목하는 게 아니고. 신체를 공격한다고요. 왜? 신체가 하나님 자기 것이니까. 신체가 하나님 것인데 우리가 사탄의 유혹을 받아서 선악과 따먹고 난 뒤에는 선악에 기조한 선악에 근거한 새로운 뭘 만들어냈습니까? 자아를 만들어낸 거예요. 그 자아가 누구와 늘 상대하느냐 하면 바로 자기 마음과 상대해요.
나르시시즘이니까 자기 마음과 상대해서 선악에 기초해서 뭐로 봅니까? 악 쪽에 붙이지 않고 선한 쪽에 붙이는 거예요. 이 자체가 하나님 보시기에 거짓이 되는 거예요. 어느 인간이 자아의 거짓에서 스스로의 힘으로 빠져나올 수 있습니까? 못 빠져나오지요. 사울 왕이 동원돼야 되고 적들이 쫓아와야 되고.
특히 여기 “개들이 나를 에워쌌으며 악한 무리가 나를 둘러 내 수족을 찔렀나이다”(16절) 내 손과 발이 찔렸다 할 때 아까 구약적 요소 중에서 위에는 이방민족이 있었고 밑에는 뭡니까? 이스라엘이 있었죠. 이스라엘을 통해서 이방민족 이스라엘과 진짜 이스라엘을 갈라내는 거예요. 이 진짜 이스라엘은 연속돼요. 신약으로 연속돼야 되니까.
갈라낼 때 지금 다윗을 누구 공격합니까? 사울 왕이 공격하지요. 사울 왕은 자기는 누구의 왕이라고 봅니까? 이스라엘 왕이죠. 이스라엘은 누굴 쳐요? 진짜 이스라엘을 공격하는 거예요. 구약을 통해서 이렇게 이스라엘이라고 하나가 되면 그들은 이 이스라엘이 전부인 줄 알지요. 전부가 아니고 나눠져야 돼요. 두 노선으로 두 구원으로. 버려져야 되는 거예요.
가짜 이스라엘, 이방민족적인 이스라엘은 뭐냐 하면 자아중심이죠. 자아중심의 대표자가 사울 왕입니다. 분명히 하나님께서 왕 달라 할 때 언질을 줬어요. 너희들이 하나님을 버리고 눈에 보이는 사람을 왕으로 달라고 이야기할 때 이 세상의 인간 왕이 왕답게 되려면 부가되는 여러 가지 조건에 대해서 언급을 했습니다.
이걸 굳이 안 하고 싶지만 해야 되겠지요. 왕의 제도를 알게 하라. 사무엘상 8장 10절에 보면, 왕이 되게 되면 너희 자식을 자기 마음대로 부릴 것이고, 백성들로 하여금 자기 밭을 갈게 하고, 백성들로 하여금 자기 집에 요리하게 만들고, 그들의 십일조를 다 가져가고, 너희 노비와 소년과 나귀들을 취하여 자기 일을 시킬 것이고.
자기 일, 자기 일, 자기 일 지금 뭡니까? 너희들이 찾고 있는 인간의 왕이라는 것은 인간의 요소 중에 집대성됐기 때문에 인간의 요소가 나밖에 몰라요. 이미 마귀로부터 선악과를 ...... 나밖에 모르는 요소 중에서 하나를 끄집어내보세요. 그게 어떤 왕이에요? 자기밖에 모르는 왕이 되는 거예요.
그럼 하나님이 그걸 왕이 아니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하나님의 왕 됨과 지상에 인간의 왕 됨이 이미 여기서 갈라지고 있는 거예요. 차이 나는 겁니다. 이스라엘 장로들이 우리도 왕이 있어야 된다고 할 때 이것은 너희들이 하나님의 왕 됨을 버림이라 한 뜻이에요. 우리가 언제 버렸습니까? 또 이렇게 나올 것 아닙니까.
그래서 등장한 왕이 바로 다윗이고 다윗이 뭐라고 합니까? 하나님이여,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하나님의 왕 됨은 나는 왕이다, 으르릉. 범이 내려오듯이 그렇게 왕 되는 게 아니고 인간 세계 속에서 신체적으로 학대를 받는 그러한 체험을 통해서 그분이 바로 하나님의 왕 되심이에요. 이게 구약적 요소 속에 신약적 요소가 따로 있지요.
신약적 요소에서 위에는 초월적이고 하나는 지상적이죠. 신약적 요소에 다윗이 들어가 있기 때문에 다윗은 사울 왕을 죽일 기회가 두 번 있었지만 죽이지 않고 누구한테 하소연합니까?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하고 초월적 하나님에게 호소하는 겁니다. 이게 마그마처럼 터져 나오는 거예요. 마그마가 터져서 후지 산 밑으로 내려오지요. 내려와서 마그마가 펴져버리면 그게 오늘날 교회고 오늘날 성도에요.
성도의 관심사는 자기가 있는 게 아니고 예수님이 누구신가, 예수님에 관심이 있어요. 자기한테는 생각할 필요도 없습니다. 발라버렸으니까. 마그마가 와서 발라버렸다고.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발라버렸어요. 중국집에 가서 다른 사람 보기에 자장면 곱빼기를 맛있게 먹지만, “아저씨, 자장면 곱빼기 그렇게 맛있어요? 그렇게 맛있게 먹고 뭐하시렵니까?” “죽으려고요.” 맛있게 먹는 것도 죽음의 체험이에요.
이걸 먹음으로써 내가 자아가 얼마나 내 자아를 흡족하게 하는지를 이미 구원받은 상태에서 자기 죽음을 체험하는 거예요. “아아 자장면 한 그릇에 천국의 생활보다 더 기뻐하는 내가 죽어 마땅하구나.” 모든 걸 그렇게 느끼게 만들어요. 이 자장면, 짬뽕이 뭐라고요. 짬뽕 맛있다 해도 하루 세 끼 먹어보세요. 못 먹습니다.
관건은 사실은 제일 어려운 대목에서 관건을 주저하게 되는데 왜냐하면 형상과 실체의 구분 때문에 주저하게 돼요. 아까 제가 언급했습니다. 형상이란 뭐다? 형상=신체. 신체가 실체가 아니고 형상에 속하는 거예요.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는 아버지한테 고난 받는다.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그것이 고난이 아니고 실제로 유대지도자가 예수 그리스도를 체포해서 실제로 수족을 찔러야 돼요. 그리고 실제로 가위바위보 해서 예수님 입었던 옷마저 빼앗기는 수모를 당해야 되는 겁니다.
요한복음 19장 23절에, “군병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그의 옷을 취하여 네 깃에 나눠 각각 한 깃씩 얻고 속옷도 취하니 이 속옷은 호지 아니하고 위에서부터 통으로 짠 것이라 군병들이 서로 말하되 이것을 찢지 말고 누가 얻나 제비 뽑자 하니 이는 성경에 저희가 내 옷을 나누고 내 옷을 제비 뽑나이다 한 것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
이게 바로 신약이에요. 신약적이 아니고 신약에서는 천상과 지상이에요. 지상 자체가 천상의 그림자가 되는 거예요. 그림자라 하는 것은 따로 있다는 것이 아니고 이어져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라 했지요. 유일한 지상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체입니다. 공부 많이 한다고 이 세상에서 아는 게 아니고 십자가에서 예수님의 몸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가? 그걸 알아야 지상의 상태와 상황을 제대로 파악한 사람이에요.
말을 정리해보면, 이 땅에 있으면서 예수님께 일어난 일에 관심 두는 사람이 천상과 이어져있는 유일한 사람이란 말입니다. 나에게 관심 두는 게 아니고. 나는 허풍선이라니까요. 나는 매일같이 착각의 연속이에요. 맨 날 나와 이야기하고 의논하고. 오늘 교회 갈까 말까, 맨 날 나하고 의논해. 왜 나한테 의논해? 내가 가게 되면 누가 욕을 할 거고, 욕하면 난 듣기 싫고. 듣기 싫은 주체가 내 신체가 아니고 자아가 듣기 싫은 거예요.
이 어리석은 인간들이 신체가 따로 자아가 따로 창조된 걸 몰라요. 자아는 악마로부터 만들어졌거든요. 신체는 누가 만들었어요? 하나님이 만들었지요.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이 자아가 누가 만들었는지 모르고 그냥 하나 있다고 보는 겁니다. 예를 들게 되면 조선시대 때 왕에게 대들면 왕에게 반역하면 죽여 버리잖아요. 제일 무서운 왕 체제기 때문에.
그런데 죽여야 될 반역자가 병으로 늙어죽었다면 어떻게 됩니까? 그 자자손손에 치욕을 주기 위해서 무덤을 파헤쳐서 시체를 난도질해서 말에 실어서 하나는 전라도로 하나는 경상도로 다시는 합쳐지지 못하도록 이미 죽었는데 그렇게 잔혹한 처벌을 추가적으로 또 하지요. 그러면 죽었던 반역자가 몸이 아픕니까, 자아가 아파요? “아이고, 같이 있었으면 좋았을 걸. 경상도로 전라도로 흩어져서 아프구나.” 아픕니까?
그냥 살아 있는 인간들의 느낌적인 느낌이죠. 왠지 이상하게 자기 마음의 분노를 두둔하기 위해서 내 마음이 화남을 내가 응원하기 위해서 잔인한 복수를 함으로써 내 마음이 시원하기 위해서 죽은 자의 묘를 파헤치는 겁니다. 바보가 바보를, 이 세상에 바보들끼리 모인 거예요.
형상 말 자체에 속아 넘어가요. 형상이란 것은 모호한 게 아니고 우리 신체가 형상이에요. 자아라 하는 것은 악마가 만든 거예요. 마음이나 자아라는 게 마귀가 만든 거라고요. 물론 하나님이 그걸 충분히 이용은 하지만. 영혼도 마찬가지 혼도 마찬가지고 마귀가 만든 거예요. 중요한 건 신체에요.
당신은 어떻게 그런 주장을 할 수 있는가? 그리스도 예수님의 신체가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최후의 정당함이 거기에 있어요. 예수님의 형상은 예수님의 신체다. 끝. 그리고 그 신체를 다른 신체가 악마의 신체가 예수님의 수족을 찌르고 옷을 빼앗고 개 같이 달려들고 그리고 6절에 보면,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훼방거리요”
마그마에서 터져 나온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를 말로 하는 게 아니라 실제로 버림받고 사울 왕에게 쫓기고 있습니다. 생생해요. 이건 영화도 드라마도 아니에요. 실제 이야기에요. 제가 이스라엘에 가서 다윗이 쫓겼던 그 바위까지 올라갔어요. 막게다인가 있어요. 바위까지 유적지로 돼있거든요. 실제로 쫓겨 가는 거예요.
그러니까 다윗 말고 부하들 입장에서는 다윗을 도대체 이해 못하는 거예요. “임금님 실제 맞잖아요. 그럼 사울 왕이 실제로 공격하면 사울 왕이 잠자고 있을 때 죽이면 되잖아요. 실제로 죽이면 더 이상 쫓기지 않는 게 되잖아요. 그런데 왜 안 죽이십니까?” 오히려 부하들이 다윗의 행동을 납득을 이해를 못하는 거예요.
왜냐하면 다윗은 바로 신약적이기 때문에 초월적, 초월이 있어요. 초월적의 반대말이 지상적이에요. 사울 왕뿐만 아니고 다윗의 신하들까지 지상적이고 다윗은 초월적이 되는 겁니다. 초월적이니까 부하들 보기에 다윗의 행동이 납득이 안 되니까 그들 입장에서 그들의 자아, 마음의 입장에서는 뭐냐? 다윗의 행동이 거짓으로 보이는 거예요.
그 다음에 그러면 내가 어떻게 거짓이라는 걸 아는가? 거짓을 아는 방법은 간단합니다. 뭐로 아느냐? 질문이 들어와서 알아요. 울산강의에도 그런 이야기했지만 성경 모든 말씀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최종적으로 yes냐, no냐를 유도하기 위한 환경을 조성하기 위해 질문을 던집니다.
아담에게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묻지요. 내가 내 마음에 물으면 안 되고 주님이 나한테 물어야 되는 거예요. 어린 사무엘에게 하나님께서 뭐라고 합니까? “사무엘아, 사무엘아” 부르지요. 이 목소리는 엘리 제사장 목소리기 때문에 어린 사무엘은 아주 순진하게 엘리한테 갔습니다. 내가 너를 부르지 않았다. 내가 너에게 질문하지 않았다.
그럼 누가 불렀는가? 하나님께서 부르셨다. 어린 사무엘이기 때문에 자기가 자기 마음을 부르고 그런 것 없어요. 그는 누가 부르면 그냥 조르르 쫓아가는 거예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찾아오는 거예요. 성령께서. “사울아, 사울아 어찌하여 네가 나를 핍박하느냐?” 그 질문은 yes와 no를 유도하거든요. 그 질문에 유도당하면서 질문자가 진실이고 질문당한 내가 졸지에 거짓으로 드러나는 환경이 사건이 일어나는 겁니다. 그게 십자가 사건의 반복이에요.
제가 언제 핍박했습니까? 네 날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는 것이 핍박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질문자는 누구여야만 하는 겁니까? 나의 신체의 주인만 질문할 수 있지 질문당한 나한테 질문하면 안 돼요. 내가 나한테 질문하는 것은 자아가 내 마음에 대해서 다그치는 것밖에 안 돼요. 악마가 만든 자아가 나를 심문하는 겁니다. 고문하는 거예요. 너, 왜 그따위로 살았느냐고. 자아한테는 그런 권리도 없으면서 자꾸 내 인생은 내가 관리해야 되고 내가 지켜야 되고 내 의로움과 정당함은 내가 간수해야 된다는, 아무런 근거도 없는데 악마는 자꾸 독촉하는 겁니다.
예수님도 동일하게 당했어요. 광야에서.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야. 아들이면 아들답게 처신을 하라고. 이왕 기도하는 건 좋지만 기도에 힘이 필요하기 때문에 금식했으니까 배고프잖아. 그러니까 네가 아들답게 되려면 근본적으로 뭐가 필요합니까? 돌이 떡이 되어 먹으란 말이죠. 대외적으로 아들답게 되려면 말씀을 이뤄야 되고. 말씀 시편 91편에 보니까 뛰어내려라. 그러면 쪼르르 천사가 와서 지상 35센티미터 근방에서 받쳐서 큰일 날 뻔 했습니다, 하고 이런 놀라운 일들이 말씀대로 이뤄져야 된다는 거예요.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먼저 사람은 떡으로 사는 게 아니고 말씀으로 산다고 하니까 악마가, “굿 아이디어,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천사가 와서 받드신다는 데 실제로 한 번 뛰어내려 보세요.” 하니까 예수님께서 네가 실시하는 실험의 측정은 나한테 통하지 않는다. 너 납득되도록 내가 왜 시험을 해야 되는데. 다시 말해서 내가 납득되도록 하는 시험을 내가 나한테 가하면 안 된다 이 말입니다. 나한테 실시하면 안 돼요.
나는 진실하다. 선악을 아는 이 지식 자체가, 나는 진실이라고 확증이 된 상태에서 덩어리로 나온 게 나거든요. 자아란 말이죠. 선과 악을 알았으니까 선과 악을 아는 자체는 참으로 진실 되다. 누구한테 진실 되지요? 악마한테 진실 되지요. 주님한테 진실 된 게 아닌데. 이것 알면 안 된다 하는데 마귀는 알아야 된다는 거예요. 알아야 네가 자아가 생긴다는 거예요. 그 자아는 절대자아로 네가 뭐가 됩니까? 네가 신으로 살 수 있다는 거예요. 신이 되면 최고가 되지요.
최고 되는 방법은 뭐냐? 따먹지 말라는 선악과 따먹어서 신이 된다. 그러면 너는 어떤 경우라도 진실하다. 진실한 내가 나에게 재촉하고 독촉하고 심문하는 거예요. 내가 말씀대로 사는지를 내가 누굴 시험한다? 내가 나를 시험하고 있는 거예요.
그걸 제가 어제 낮 설교에서 놀이동산에 가서 침팬지 공연하고 있는 키 작은 부모가 아이 들고 있는 대목 이야기했지요. 자기 아이 엉덩이만 쳐다보고 있는 거예요. 이 말은 뭐냐 하면 나는 지금 십자가를 알고 있는 나를 쳐다보고 있는 거예요. 복음을 알고 있는 나를 쳐다보고 있는. 자식은 자아니까. 자아를 끄집어내어 절대화시켜 보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성령이 오니까 자아가 있는 자리에서 십자가로 침팬지가 있으면 얼마나 기겁하겠어요. 그러니까 이게 내 안에 십자가 있었던 거예요. 내 형상은 없고 주님의 형상만 인정하는 거예요. 내 형상 인정 안 해요. 왜? 악마의 형상이기 때문에 인정하지 않습니다. 나를 하나의 도박자금으로 걸고 나를 판돈으로 삼아서 내가 어떤 승부를 보지 마세요. 이거는 악마의 도박입니다.
10분 쉽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