헛되고 헛되다
2006년 4월 16일 설교 본문: 전도서 1:1-2
(전 1:1) 『다윗의 아들 예루살렘 왕 전도자의 말씀이라』
(전 1:2) 『전도자가 가로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구약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입니다. 다른 신을 섬기면 여호와 하나님께서 가만두지 않겠다는 겁니다. 따라서 명칭상 여호와 말고 다른 호칭을 갖고 있는 신을 배격하기만 하면 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 것입니다. 그런데 전도서나 잠언에 보면 ‘지혜’를 따로 알아야 한다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여호와 하나님만을 선택하는 것으로 뭔가 부족하고 지혜를 가지고 채워야 한다는 말이 됩니다. 과연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으로 구원이 되지 못하고 거기에다 잠언이나 전도서에서 나오는 지혜를 따로 챙겨야 구원되는 겁니까? 아니면 아예 여호와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을 포기해버리고 그냥 지혜만 탐구해서 실천에 옮기면 구원될까요?
바로 이런 구원관은 잘못된 것입니다. 왜냐하면 여호와 하나님 자체가 인간에게 어떤 조건을 요구하고 그 요건이 구비했을 때 구원하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이미 자신의 숙제로서 자신이 구원할 자를 먼저 찾아오셔서 인도하시면서 이런 태도를 나타내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마치 이방종교를 신봉한 아브라함에게 일방적으로 찾아오셔서 그냥 일방적으로 약속의 땅으로 데려가시는 하나님이 바로 참 하나님이십니다.
그렇게 데려가시면서 자신이 어떤 하나님이심을 차츰 드러내시는 겁니다. 이사야 45:8절에 보면, 하나님은 ‘숨어계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렇다면 사람들이 그 하나님을 부를 때 어떤 내용물을 가지고 부르든지 간에 그 내용은 어디까지나 인간의 욕망이 담기게 마련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계속 ‘숨어계셔야 될 내용’을 담고 있어야 하기에 인간이 아무리 찾아내고자 해도 찾을 수가 없는 상태로 계셔야 합니다.
그렇다면 지혜란 무엇입니까? 이미 자기 백성을 구원하기로 작정하신 하나님께서, ‘여호와’란 이름을 어떤 내용으로 채워지는지를 알려주는 방식입니다. 즉 “인간들아 너희들이 알고 있는 내용으로 이 여호와 하나님의 실체를 채울 생각을 말아라”라는 겁니다. 이런 취지를 간단하게 말해서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다’라는 말입니다.
여기에 끝에 보면, ‘모든 것’이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이것은 처음부터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서 헛되지 않을 것이 나올 가능성을 전혀 없음을 확실하게 결정짓고 나서십니다. 즉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알려주시는 ‘여호와 하나님’에 합당한 내용은, 절대로 인간 쪽에서 제공될 선한 것이 일체 가미되지 않는 방향으로 알려진다는 겁니다.
달리 말해서, ‘마냥 헛되지 만은 않고 뭔가 의미있는 것이 간혹 나올 수 있다’라는 생각은 애초에 먹지 말아라는 겁니다. 행여 그런 생각이 든다면 이는 참 하나님에게서 나온 생각이 아니라 인간들이 자신의 욕망에서 나온 그 무엇에 불과하다는 겁니다. 왜 이토록 하나님께서 인간의 생각을 전면 차단시키려 하는 겁니까?
그것은 인간의 욕망이라는 것이 그냥 가만 있는 것이 아니라 저지가 불가능할 정도로 제멋대로 튀어나오는 속성을 보여준다는 겁니다. 성경에서 허무란, 자기 분을 삭이지 못해서 나온 나름대로의 마음 정리를 뜻합니다. 인간에게 있는 욕망은 때마다 충족되기를 요청하는 성격을 지니게 됩니다. 즉 욕망은 그냥 생겨난 욕망으로 있는 것이 아니라 채워달라고 아우성치는 욕망입니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봐서 이 욕망은 다 채워지지를 못합니다. 이럴 때 사람들은 분통을 삼키면서 “그래 헛되고 헛된거야”라고 자기 마음 정리에 나섭니다.
이것이 바로 비복음적이고 비성경적인 허무주의입니다. 허무주의란 옛날부터 인간 사회에 유행되어왔습니다. 욕망이 있는 곳이면 반드시 허무도 따라오게 되어 있습니다. 욕망이 없다면 허무도 없는 겁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허무’라고 했을 때는 우상에 대해서 평가할 때입니다. 사람들이 우상을 섬길 때, 여전히 신으로 간주하기 때문에 무슨 효력을 기대하게 됩니다.
신에게 효력을 기대한다는 것은 그 인간의 ‘자기 긍정’을 기반으로해서 일어나는 마음현상입니다. 즉 자신이 신에게 뭔가를 기대해도 좋을 만큼 자기는 당당하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렇게 기대했건만 신이 원활하게 안들어주면 여기서 허무가 발생하는 겁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우상이 허무한 것이 아니라 신에게 ‘자기 긍정’을 바탕으로해서 요구하고 싶어하는 그 인간 자체가 허무한 것입니다.
바로 전도서는 세상에 대한 허무가 아니라 세상에 대해서, 그리고 신에 대해서 뭔가 기대를 걸고 희망을 거는 그 인간 자체가 허무하다고 보는 겁니다. 마태복음 16장에 보면, 예수님과 제자들 사이에 세상과 예수님을 보는 다른 견해가 있음이 드러납니다. 십자가가 빠져 있는 그런 마음상태에서 평소에 하나님과 그 분의 메시야를 생각해 왔었습니다.
21절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 앞에서 말씀하시기를, “이 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 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가르치시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소리를 듣고 제자들과 베드로가 가만 있지 않고 들고 나섭니다.
쉽게 말해서, 자기네들이 엄연히 살아있는 이상 그런 수모가 주님에게 닥치는 것을 그냥 방치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겁니다. 이것은 곧 예수님이 체포되는 것이 베드로 자신에게 허무가 될 수 밖에 없을 일이라는 점에서 예수님과 다른 방식의 생각을 하고 왔다는 것이 들통난 것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과 함께 하는 그 순간부터 자신이 허무해지는 것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세상 사람에게 체포되어 모든 일들이 공중분해 되어버리는 것을 참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런 베드로를 보고서 “사단아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라고 했습니다. 사단이란 바로 그 깊은 허무 속에서 어쨌거나 희망을 발견하려는 시도를 말합니다. 희망이란 과거와는 다른 새로움이 뭔가 있을 것이라는 겁니다. 그 새로움이야 말로 자신을 구원해 줄 수 있는 지혜라고 믿고 싶은 겁니다.
그런데 전도서에서 보면, 새로운 지혜라는 것은 이 인간 사회에서는 없다는 겁니다. 그 이유는, 세상에서 주어지는 그 어떤 것도 이 세상이 새로운 피조물로 채워지는 것에 보탬이 되지를 못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환란가운데 있어야 비로소 소망을 발견하게끔 되어있습니다.
하나님은 의도적으로 인간들 세계를 허무하게 만들고야 맙니다. 그래야 진정한 새로운 세계가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8:19-21에 보면, “피조물의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나는 것이니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케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주님만이 헛되지 않는 세상으로 통하는 길을 아십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스스로 헛되지 않다라고 여기는 것 자체가 말씀에 어긋나는 사고방식인 것을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