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말씀만이 현실인 것을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논리적인 신학체계로 설명을 한다고 해서 하나님의 말씀이 현실이 되지 않는다. 또 복음적인 성경해석으로 인해서 정말 속이 다 시원하고 뻥 뚫린다고 하는 감탄과 그 앎이 주어졌다고 해서 하나님의 말씀이 현실이 되지 않는다. 그리고 그 어떠한 자기 고백도 하나님의 말씀이 현실이 되지 않는다. 그렇게 말씀은 주눅 들어서 인간의 움직임에 끌려가면서 현실로 나타나지 않았다. 그렇게 말씀은 인간의 감정의 기복대로 오르락내리락 하듯이 현실로 나타나지 않았다. 그렇게 말씀은 인간의 언어로 귓가에 속삭이면서 현실로 나타나지 않았다.
말씀은 보이지도 않았고 나타남도 없었다. 그저 보이는 것은 밤의 외로움을 달래주는 불빛처럼 새빨간 네온사인의 십자가만이 깜빡깜빡 거렸다. 건물 맨 꼭대기에 세운 십자가가 있는 곳이 교회라는 하나의 표식으로 나타났다. 이 세상 수많은 사람들은 안다. 건물에 십자가가 꽂히면 그곳이 곧 교회가 되고 그곳을 들락날락거리면 곧 교인이 된다는 것을. 그리고 천국을 갈 수 있는 마지막 탑승구가 된다는 것을. 마치 그것은 천국과 지옥을 가르는 경계에 서서 철옹성처럼 무너지지 않을 것처럼 버티고 있지만, 훅 불면 먼지가 되어 날아가 버리고 말, 십자가도 교회도 교인도 다 무용지물일 뿐이다. 말씀이란 단지 꾸미기 위한 장식물에 불과하면서도 외형을 그럴듯하게 보이기 위해서는 말씀을 거들먹거려야만 한다. 그래야 고상한 교인소리를 들을 수 있다. 그래야 성령이 충만한 성도라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 말씀은 어차피 보이지도 않고 나타나지도 않을 테니까. 가죽성경에 박힌 까만 글자가 말씀이라고 착각하는 착각 속에 갇혀 있을 테니까. 문자에 얽매여 평생을 수갑 차고 다니는 무거움을 자랑삼아 떠벌일 테니까. 그러니 뭐, 누가 알랴? 속이는 데 일가견이 있는, 배후에 있는 악마의 지시의 손길에 홀딱 빠지고 눈이 멀어서, 서로를 못 알아보면 그만일 뿐이다. 속임 외에 나타남이 없으니, 나타남의 모든 것은 속임의 증상이고 징후고 결과다.
마지막 날 아침에 일어나니 가야산 자락은 안개로 뒤덮여 있었다. 안개로 인한 단절이 가져다 주는 거기에는 너도 없었고 나도 없었다. 하늘과 땅의 경계의 모호함만이 내가 왜 여기 살아서 숨을 쉬고 있는지를 더욱 궁지로 몰아넣을 뿐이다. 꿈을 꾸듯 서로를 알아본다는 것은 운명이라고 했다. 수없이 많은 스치고 지나가는 만남은 한 만남을 돋보이게 하기 위한 역할을 했다. 그 역할을 통해서 한 만남이 되는, 남녀의 만남이라는 결혼을 운명처럼 받아들였다. 하지만 그것이 운명이 아님을 깨닫는 시간은 오래 걸리지 않는다. 서로의 욕망을 채우기 위한 하나의 변명이었고 몸짓에 불과한 것이었다는 것을 서로가 눈치 챘을 때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깊은 상처를 품고 살아가야만 한다. 내 안에서 피어오르는 욕구의 결핍을 채우기 위해서 둘러봤던 주위엔, 내 욕구를 만족시켜줄 손길보다는 결국 참아야만 한다는 욕망의 억압이 거미줄처럼 쳐있었다. 욕망은 욕구를 추스르기에 바빴다. 그때에 거미줄을 헤치고 운명처럼 나타난 타인이 있었다. 그에게 내 욕구를 억지로 꿰맞춰 요구하듯, 보상심리로 해치운 것이 결혼이었다. 결혼은 욕심이었고 죄였다. 그래서 결혼을 통해서 태어난 자식마저 죄가 잉태한 것이고 결국 결혼은 죄를 키우다가 사망에 이르게 하는 지름길이라 참 빨리도 달려간다.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을 뻔하였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가룟 유다를 향해서 독백처럼 하신 말씀이 아니라 오늘을 살아가는 모든 자들에게 절절하게 주시는 말씀이다. 태어남 자체가 죽음의 탯줄을 달고서 바깥으로 나왔고, 생명을 위한 탯줄을 자른다 하여도 죽음을 유발하는 요소인 모친의 죄는 잘려나가지 않는다. 결혼은 가족 만들기, 혈통 잇기를 위한 울타리다. 그 울타리를 넘어섰다가는 총 맞아 죽는다.
살기 위해 믿었던 하나님은 배신을 때리셨다. 뒤통수를 치셨다. 이 세상에서도 보상받고 살다가 죽으면 천국이나 가야지, 라는 그 믿음은 참 어이없게도 악마의 믿음이었다. “인간은 죄인이고 죄인 대신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셨습니다. 그러니 예수 믿고 천국가세요.”라는 길거리의 외침이 공허하다. 밑도 끝도 없다. 예수 믿고 천국가라니! 예수를 믿기에는 자신만만이지만 십자가를 믿기에는 역부족이다. 한계다. 인간은 죽음보다도 삶을 더 중시하고, 죽지 않기 위해 믿어야 하는 예수였기에 십자가를 남몰래 조용히 치운다. 십자가 뒤에 부활이 기다리고 있는데, 십자가에 머물 필요가 없는 것이다. 십자가는 부활을 가져다 준 하나의 징검다리 역할을 하기에 약간의 미안함으로라도 믿어주면 그만이다. 그러나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다리는 곧게 쭉 뻗은 다리가 아니라 옆으로 튀어나온 십자가로 된 다리였다. 그냥 건너가기 좋게 일자로 된 다리였으면 좋으련만, 하필 십자가로 되어 있어서 뭔가를 해야만 한다. 그래도 좋다. 땅에서 살다가 하늘로 건너가게 하는 도구가 된다면, 그게 어떤 것이든 상관없이 붙잡고 놓지 않겠다는 참담한 심정이 된다. 그 심정을 부수기 위해서 하나님은 죽이시는 하나님으로 나타나셨다. 하늘과 땅을 잇는 십자가를 그 사이의 낭떠러지에 버리셨다. 그 누구도, 그 어떤 것도, 그 무엇도 건너 갈 수 없도록 만드신 하나님의 조치셨다. 십자가! 십자가가 없다면 천국은 없는 것이다. 이 세상이라는 감옥에 갇혀서 올망졸망하게, 고만고만하게 얽히고설키어, 내 팔 내가 흔든다는 식으로 ‘자기를 위하여’ 살아가는 것 외에는 다른 구원은 없다.
그렇다면 성경에 나오는 룻이란 여인은 이 세상의 기준으로 볼 때면 효부로서 단지 역사적인 인물로 분류할 수밖에 없겠다. 룻뿐만이 아니라 성경에 나오는 인물들은 하나같이 역사 속에 고정된 인물로 짱박아놓을 수밖에 없겠다. 그러니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현대사회에는, 밥 먹고 살아가는 이 현실에는 아무 쓸데도 없고 가치도 없다. 눈에 보이는 세상, 사람들, 그 속에 속한 나, 이게 전부다. 성경은 책꽂이에 꽂혀 먼지만 쌓이고 있지, 너무 바빠서 먼지조차도 털어낼 틈도 없다. 주님은 “브라보!”라고 외치실 것만 같다. 왜냐하면 인간이 성경을 보고 성경대로 살고자 하는 그 행위에 진절머리가 날 지경이시지 않을까? “그러니 너희들은 가만히 있어! 내가 움직일 테니까.” 말씀이 움직이기 시작한다. 룻은 말씀이 밤하늘에 그려놓은 오로라가 되어 춤을 추기 시작한다. 하나님은 율법을 주신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회수하신다. 율법 있음이 오히려 이스라엘을 이스라엘답지 못하게 만들었다. 율법이 겨냥한 죄, 그리고 율법이 값없이 주시는 은혜성, 율법 안에서 그것을 발견함보다도 율법이 있다는 것으로 자기의 소유를 삼아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해석하고, 율법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자기 백성의 안정성이나 도모하면서 제사제도의 형식에만 머물렀을 뿐이다. 보수적인 것은 끝까지 보수적이지, 새로운 개입으로 말미암은 새로움이 없다. 그러나 죄 없는 자를 죄인으로 만들어 버리고 또 그 죄를 사함 받게 하기 위해 도피성을 만든 율법의 새로움이 여섯 지파에 분출되고 있었다(수20장, ①납달리-갈릴리 게데스 ②에브라임-세겜 ③유다-기럇아르바 곧 헤브론 ④르우벤-베셀 ⑤갓-길르앗라못 ⑥므낫세-바산골란). 이스라엘에 율법 있음이라고 하기에는 참 미안할 따름이지만, 율법에 관심도 없이 제사만 주구장창 드렸을 뿐이니까. 오늘날로 말하면 말씀을 외워서 자기 의를 삼는 꼴처럼. 어쨌든 한없이 뿜어져 나오는 고의적인 죄를 무마하기 위해서 제사제도라는 율법을 잘 지켜야만 했다.
율법 있음에서 율법을 회수하심으로 율법 없음이 되고 율법 없음은 율법의 완성인 십자가사랑이 된다. 율법 없음이라는 것은 율법 있음으로 인해 인간이 하나님의 법을 잘 지키면 복을 받고 못 지키면 저주를 받는다는 그 요소를 빼버리고, 이스라엘의 율법 지킴과 못 지킴과 상관없이 율법이 스스로 일해서 복과 저주를 생산하시겠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율법이라는 제사제도의 중심에 있었던 이스라엘에게 왕을 주심으로 왕 중심으로 율법을 갱신하시겠다는 것이다. 율법에서 한 인물을 나오게 하시겠다는 취지다. 율법이 인물로 나온다니! 영화 중에 그런 영화도 있다. 어떤 책을 펼치면 거기에 있는 내용이 우르르 쏟아져 나와 현실세계에 나타나는 그런 공상영화도. 인간의 상상력은 거기까지다.
룻기의 시대는 사사시대다. “그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각각 그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삿21:25) 왕이 없으므로 각자의 소견대로 행했던 한 집안을 들어서 하나님의 율법은 일을 시작한다. 하나님이 나의 왕이라는 이름을 가진 엘리멜렉이라는 집안은 흉년으로 인하여 율법이 있는 약속의 땅을 버리고 율법이 없는 이방인의 땅, 모압으로 내려간다. 같은 땅이라고 해서 다 같은 땅이 아니다. 인간들 보기에는 환경을 따라서 이 땅에서 저 땅으로 옮겨가 잘 먹고 잘 살면 그만이지만, 하나님께서는 환경을 조성하셔서 이 땅과 저 땅의 경계를 가르신다. 율법이 있는 약속의 땅과 율법이 없는 비-약속의 땅, 축복과 저주의 땅으로 말이다. 살다보면 매일이 경계로 나타난다. 주님이냐 나냐의 경계, 율법이냐 생존이냐의 경계, 언약백성이냐 비-언약백성이냐의 경계... 내가 그어놓은 경계는 매일같이 움직이지만 주님의 경계는 창세전 언약으로 말미암아 변치 않는다.
어디서 살든 뭐가 중요한가? 내가 사는 그곳이 곧 주님이 계신 곳이고, 내가 가는 그 길이 곧 주님이 가신 길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에게 약속한 땅이라는 것 때문에 원래 살던 원주민을 무차별적으로 쫓아내신다. 열 족속(겐, 그니스, 갓몬, 헷, 브리스, 르바, 아모리, 가나안, 기르가스, 여부스)은 아무 연고도 모른 채 쫓겨난다. 그리고 열두지파(므낫세 반, 갓, 르우벤, 잇사갈, 아셀, 납달리, 스불론, 므낫세 반, 에브라임, 단, 베냐민, 유다, 시므온)가 그 땅을 차지한다. 하지만 말이야, 하나님의 백성아! 뭐, 그렇게 한다고 해서 좋아할 것이 없다. 특혜 받았다고 잘난 척 할 것이 없다. 거기에 정착시킨 하나님의 백성인 너희 이스라엘도 그 땅의 풍속을 좇고 생존을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잊어버린다면 그 땅이 그들을 토해낼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기업은 땅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애굽 땅 종 되었던 곳에서 불러냄을 당한, 그 요소를 품고 살아가는 하나님의 백성이 기업이 됨을 명백히 하는 것이다. 유월절 어린양의 희생의 피가 문설주에 발라져 있음을 보고 죽음의 천사는 넘어갔다. 그때 이미 죽은 자가 되었다. 어린양이 대신 죽었다는 것은 그 집안은 이미 죽은 집안이고 어린양의 희생으로 말미암아 산 집안이 되었다는, 그 요소가 어디에 가든지 간에 뿜어져 나와야만 한다.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이 초과적이다. 초과적인 욕심과 초과적인 희생자의 출현, 그리고 초과적인 발작과 초과적인 사랑이 짝을 이루어 함께 거한다.
초과적인 것에서 파생된 나의 나는 늘 정당성을 항변한다. 억울함을 토로한다. 어쩔 수 없었다는 변명으로 일관한다. “먹어야만 살 수 있도록 인간을 만드셔놓고 왜 흉년을 주시고 장마를 주시고 가뭄과 태풍으로 휩쓸어버리시어 기근에 허덕이게 하시는지 말입니다. 그러니 율법을 버리고 살 길을 찾아 나서는 것은 정당하지 않겠습니까? 어차피 이 세상에 태어났으면 뭔가를 해야 하지 않습니까? 그것이 율법과 상관없는 것이라 할지라도 말입니다.”라고. 언제든지 나는 환경이 나를 위협할 때면 그 환경을 넘어설 수 있는 권한이 나에게 있다는 나의 정당성으로 돌변할 준비가 되어 있다. 언제든지 나는 주님이 건드리면 주님을 떠나겠다는 나의 변심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다. 나는 그 어떤 잘못이 없다는 것이 모든 행함의 모토가 된다. 나에게 무슨 잘못이 있어? 나에게 이런 환경을 주신 하나님이 잘못되었고, 조용하게 안정되게 살고자 하는 나를 하나님이 건드렸고, 남이 나를 못살게 굴었지, 나는 아무런 벌 받을 만한 나쁜 짓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 내 소견이고 내 옳음이다. 나는 늘 정당하다. 이 정당성에서 못 벗어난다. 틈이 생기지 않고서는.
내가 하면 로맨스가 되고 남이 하면 불륜이 된다는, 세상에서 떠도는 이 말이 어쩌면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는 인간의 악마적인 속성을 얼마나 잘 대변해주고 있는지 모른다. 누구나 다 자기만은 로맨스이고 싶다. 나만 신이고 싶은 이 자기정당성으로 말미암아 피 흘림이 없이는 사함을 얻지 못하는 증거로서 갈보리 산 위에 십자가를 서게 했다. 십자가로 인하여 나의 태어남 자체는 불상사요 파멸이라는 것을 알든 모르든 그것만이 현실임을 소리치신다. 자신의 태어남을 불행한 사태로 인지가 가능한 자는 이 세상에 단 한 명도 없다. 나 여기 살아있음에 행복이라는 사실에만 눈이 벌개가지고 나 외에는 다른 신이 없다. 누구를 우상시 할 이유가 없다. 나는 나의 우상이 된다. 모든 걸 다 끌어 모아서 내가 신이 되는 일에 일조하게 한다. 가정에서는 힘 있는 아버지를, 교회에서는 하나님 아버지를 왜 추구하는가? 내 욕망의 수단으로서 돈을 채워주고 또 채워주고 아주 풍족하게 채워달라는 것이다. 돈은 이 욕망에서 저 욕망으로 갈아 탈 수 있게 하는 데 있어서 넉넉함을 가져다주는 도구로 작용한다. 돈만 많으면 내가 신으로서 행세하는데 아무런 불편함이 없다. 돈이 최고다.
나오미는 기쁨의 여자로 떠났지만 슬픔의 여자 마라가 되어 돌아온다. 만약에 나오미에게 댓글이 달린다면, 남편 죽고 둘 있는 자식마저도 죽고 쫄딱 망한 여자는 이 세상에 살 가치도 없으니 자살하라고 악플이 달릴 게 뻔하다. 너나 나나 할 것 없이 모두 다 나오미라는 사실을 모른다. 세상에는 남편도 죽고 자식도 죽고 병들어서 아무 일도 하지 못하는 체로 죽는 날만 기다리면서 사는 자들도 있다. 형편으로 따지자면 나오미 보다 더한 고통 속에서 있는 자들이다. 그럼에도 왜 나오미가 되지 못하는가? 은혜 받은 자만이 나오미가 된다. 은혜 받은 자만이. 모든 환경이 주님의 개입을 알아차리지 못한다면 그 어떤 환경에 있어도 나오미가 되지 못한다. 인간의 근본적인 문제는 환경이 문제가 아니라 율법과의 마주침이 없어서 문제다. 찾아와 주신 분이 없어서 문제다. 혼자 살아서 문제다. 기쁨이 슬픔으로 변하는 과정이 없이는 떠남은 있어도 다시 돌아옴은 없다. 나오미가 룻을 이용해서 자기 집안 살리고 자기 먹고 살기 위해서 한 행동들을 욕하지 말아야 한다. 나오미는 나다. 모압 땅에서 가나안 땅으로 다시 돌아왔어도 여전히 내가 돌아온 것이다. 불교에서 교회로 옮겨도 여전히 나라는 우상이고 부처에서 하나님을 찾아도 여전히 나라는 우상이다. 환경은 강퍅한 속성을 더욱 강퍅하게 옥 죌 뿐이지, 새로운 속성으로 변화시키지 못한다. 환경이 아닌 율법의 개입이 주어져야 한다. 나오미를 돌아오게 한 이유는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고 있던 사사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진정한 율법의 효력을 싣고 달리는 열차로 사용하기 위해서였다.
십년 전 오늘, 나오미의 남편 엘리멜렉이 죽고 두 아들 말룐과 기룐은 모압 여자와 결혼하였지만 둘 다 죽었다. 하나님은 나의 왕이라고 거창하게 이름 지었던 엘리멜렉도 죽고, 보잘 것 없다고 이름 지은 말룐도 죽고, 소멸한다고 이름 지은 기룐도 죽었다. 여자들만 살았다. 나오미, 오르바, 룻이었다. 이제 각기 제 갈 길로 가면 그만이었다. 근데 왜? 룻이라는 이 여자는 패가망신한 시어머니 나오미를 따르고자 나선 것일까?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룻의 이 고백이 과연 정상적일까? 이방여자로서 이 고백은 불가능성이고 비정상적이고 초과적일 수밖에 없다. 언제 어디서 누구에게 코로나19에 감염되었는지 모르는 깜깜이 증상자처럼, 룻의 감염경로를 어디서 찾을 수 있단 말인가? 할리스 커피점에서 코로나에 감염된 확진자가 나왔다. 감염경로를 알 수 없는 일명 깜깜이 감염이다. 방역본부는 당황했다. 그런데 연결고리가 풀렸다. 역학조사를 통해서 홍천 캠핑장에서 감염된 증상자가 할리스 커피점에 머물렀던 것이라는 것을 밝혀낸 것이다. 연결고리로 되어져있는 이 세상에, 하나님은 분명하게 계획적인 연결고리를 가지고서 일을 벌이신다. 이처럼 룻의 연결고리는 다말에게서 풀렸다. 시공간을 뛰어넘어 다말에게 하신 일을 룻에게 재현하신 것이다.
그렇다면 룻에게 다말을 소환하는 하나님의 의도성은 무엇인가? 엘과 오난과 셀라는 정상적으로 태어났지만 하나님은 유다의 가정에 일을 벌이기로 작정하신다. 장자 엘이 결혼을 한 후에 자식이 없이 죽게 만드신다. 이유는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기 때문이다. 단지 그 이유였을까? 창세기 38장은 난데없는 막장드라마 같은 분위를 연출하기에 당혹스럽다. 도대체 엘은 여호와의 목전에 무슨 악을 행하였기에 갑작스레 죽여 버리셨을까? 마치 하나님의 일을 위해서 그는 악을 행해야만 하는 역할이었으리라는 것으로 덮어씌우기 해도 용납이 될 것만 같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에게 주신 시형제 결혼법이라는 율법을 시행하기 위해서 벌어진 율법으로 말미암아서라는 것을 앞장세운다면 말이다. 율법은 망함과 새로움을 갱신한다. 죽음과 생명을 재편한다. 율법으로 살해당한 무연고적자아를 출몰시키기 위함이다. 자식이 없이 남편이 죽으면 대를 이어 동생이 형수와 결혼해서 자식을 낳아야만 한다는 시형제 혼인법이라는 이 율법은 차남 오난도 죽게 했다. 여지없이 율법보다 나를 챙겼기 때문이다. 율법보다 나를 챙김이 당연하지 않는가? 이 당연함, 당연하다 하니까 죽는 것이다. 율법은 봐주지 않는다. 율법은 일괄 다 저주를 선포한다. 율법에 저촉되는 모든 것, 그게 악이다.
자식 둘을 잃은 유다는 오히려 다말을 공격한다. 재수 없는 이방여자로 인하여 집안이 망했다고 낙인찍고 나중에는 방탕한 여자로까지 오인한다. 어린 셀라의 장성함을 핑계로 시간을 벌지만, 그 후에도 오랫동안 유다는 율법을 시행할 마음이 없었다. 내 율법보다 내 자식이 먼저고 율법보다 내 집안이 먼저다. 그러나 다말은 알았다. 율법이 먼저고, 율법이 살길이고, 율법으로 말미암아서만이 무너진 집안을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을. 창녀로 변장하여 시아버지와의 동침한다. 어쩌면 한 번의 동침으로 임신이 되었다는 것이야말로 기막힌 우연이다. ‘우연히’, 그것만이 주님의 일이다. 며느리 다말이 임신한 사실을 알게 된 시아버지 유다는 불태워죽이라고 명령한다. 그러기 전에 유다에게 우연히 날아든 의문점 하나! “뱃속에 들어있는 아이의 아버지는 도대체 누구냐? 뭐, 알기라도 하자.” 다말은 약조물로 받아놓은 도장과 끈과 지팡이를 내놓았다. 유다는 더 이상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 “니가 옳도다!” 율법은 옳음을 끝내 인정하게 하고 경쟁적이고 대립적인 관계에서 항시 승자가 된다. 막힌 것에 구멍을 뚫고 단단한 것을 깨부순다. 그리고 제켜버린다. 다말에게서 먼저 나와야 할 자식은 세라인데, 세라를 제치고 터치고서 베레스가 먼저 나온다. 이처럼 모든 게 대립적이고 경쟁적이다.
사랑은 채우는 것이 아니라 빈자리다. 사랑은 빈자리를 사랑하는 것이다. 공백, 빈자리, 이것이 무엇을 말해주는지 그렇게 들었어도 몰랐다. 지금도 모르긴 마찬가지지만 이상하게도 빈자리가 되어야 고엘, 후견인이 되시는 주님이 계시고, 사랑의 실체로서 친히 빈자리가 되셨다는 것이 꿈틀대기 시작한다. 일이 잘 풀리고 이만하면 먹고살만하고 풍족하지는 않아도 여유는 있는 이 삶이야말로 주님이 후견인으로 계시기 때문이라고, 주님이 값없이 베푼 사랑 때문이라고 아부를 하는데, 정말 착각도 이만저만의 착각이 아님이 들통 난다. 인간은 절대로 살만하면 쳐다보지 않는다. 돌아보지 않는다. 의지하지 않는다. 후견인 되시는 주님을 말이다. 사람은 마음만 먹으면 안 되는 것이 없이 다 할 수 있다고 자부한다. 예수 믿기, 예수 소망하기, 예수 사랑하기, 다 마음먹기에 달려있다고 한다. 소유성이다. 악마가 괜히 악마겠는가? 십자가가 괜히 십자가겠는가? 태어나서부터 채움이 미덕이라 가르침 받았고,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본성적이라 익숙하지만, 비움은 새로운 개입이 없이는 불가능하기에 낯설다.
각자 살아온 인생대로 자기 스토리로 채워진 맥락과 맥락의 만남에는 틈이 생긴다. 맥락이 같아서 틈이 없는 만남은 존재하지 않는다. 주님이 죽으셨다. 이 틈을 유발하기 위해서. 인간에겐 이 틈을 메울 길이 없다. 그런데도 하나님 믿고 예수님 믿고 성령님 믿어서 틈이 생긴 족족이 메워서 천국에 가고자 하는데, 천국은 고정되지 않는다. 오히려 계속해서 틈이 생기면 생길수록 틈 자체가 천국이 된다. 빈틈, 빈자리, 주님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생긴 흔적이기 때문이다. 룻은 아무 염려도 없다. 그저 이삭줍기에 나서서 시어머니를 살리고자 한다. 단지 하나 시어머니 나오미에겐 율법이 있기에, 시어머니와 자기 사이에는 율법이 만들어낸 틈이 있음을 발견하게 한 것이다. 율법이 없는 이방여인으로서 자기는 마땅히 저주받아야 할 존재였다는 것을.
그런데도 생기발랄함은 율법이 있는 땅으로 와서 이방여인이 먹을 것을 공급받게 되었다는 것은, 예외적인 존재인데도 불구하고 오로지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었다는 것 때문이다. 그러니 룻 자기에게는 아무런 소유 자체가 없다. 보아스도 마찬가지다. 엘리멜렉의 친족 중 유력한 자이지만 그 유력함을 소유로 생각하지 않았다. 룻을 향한 기업 무를 자로 밖에는. 그것도 1순위가 아니라는 것도. 보아스 자신에게 룻과의 우연한 만남은 사건이었음을 안다. 욕망의 대상체가 아니라는 것을. 여기서 나오미만이 율법을 이용하고 있지만, 근데 실상은 율법이 나오미를 이용하고 있는 것이다. 룻, 보아스, 나오미를 율법이 다루어간다. 그렇게 틈을 만들어내는 십자가 반복성이 작렬한다. 말씀이 친히 다루시고, 주님만 쳐다볼 수밖에 없는, 고아와 과부와 같은 심정으로 만들어낸다. 율법의 완성인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그 심정으로.
율법에 기업을 무른다는 것은 밭뙈기만 다시 사주는 것이 아니라 그 집안의 대를 잇기까지 해야 된다는 것이다. 모든 권리를 포기하는 것이다. 나오미는 보아스에게 율법을 들이대어 룻과 혼인하게 하려고 하지만, 보아스도 만만치 않게 율법으로 되받아친다. 나오미는 본인이 관찰자가 되어서 일을 했고, 보아스 같으면 우리 집안을 살릴 것이라 해석했고, 보아스를 선택했다. 하지만 보아스는 룻이라는 여자를 고정해놓고서 관찰당하는 자가 되었고, 해석당하는 자가 되었고, 선택당하는 자가 되었다. 보아스가 룻하고 결혼해서 나오미의 뜻대로 된 것 같지만, 보아스는 룻하고 결혼한 게 아니라 율법하고 결혼을 한 것으로 냉정하게 선을 긋는다.
룻기를 읽으면서 보아스를 그려본다. 물론 룻이 예뻤겠지만, 보아스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남자라는 사실이다. 율법의 남자니까. 보아스가 이방여자 룻이 이삭을 줍는 모습을 신경 쓴다든지, 시어머니가 시키는 대로 보아스에게 다가갔을 때 거절하면서도 마음 상하지 않게 함께 눕기 위해서 가져온 천에다가 곡물을 가득 담아주는 모습이라든지, 호감을 가지고 있지만 순서가 먼저가 아니기 때문이라든지... 이 세상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결혼스토리다. 이게 지금 남녀사이에 통할 법이란 말인가? 말이 안 된다. 보아스와 룻, 남자와 여자가 만나면 욕망이 불타올라 결혼하면 그만인데, 여기서 율법이 등장하고 남녀의 쾌락이 아닌, 결혼은 시원을, 근원을 찾아가는 것이라고 하고, 율법이라는 긴 튜브를 통해 당도한 곳이 창세기 2장의 아담과 하와의 첫 번째 혼인, 하나님이 창조하신 혼인과 접촉점을 가지는 것이 결혼이라고 하니, 이미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하고 탐스럽기도 한 그 열매, 선악과를 따먹고 결혼한 이상에는 결혼은 미친 짓이 되어 발작하고, 결혼했어도 채워지지 않는 끝없는 욕망으로 우울함을 감출 길이 없다. 그래서 내가 관찰하고 내가 해석하고 내가 선택한 결혼은 음란이 된다. 이미 음란한 데서 태어났으니 율법 앞에 모든 것이 죄라는 것을 까발림 당할 뿐이다. 어차피 결혼했다는 것은 죄인이 되지 않고서는 견뎌낼 재간이 없으니까. 율법은 아무것도 남겨두지 않는다. 결혼이라는 쾌락마저 다 내려놓게 해서 인간은 그 어떤 것도 즐길 수 있는 것이 단 하나도 없다는 쪽으로 내몬다. 죽으라는 것이다. 죽으라는 것.
부모는 자식을 먹이고 키우고 입혀서, 자식은 부모 때문에 살게 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자식이 부모를 살린다. 부모를 구원한다. 부모는 자식이 웬수라고 하지만 부모를 터치할 수 있는 것은 자식밖에는 없다. 아! 자식! 그것도 내 자식이다. 자식하면 부모는 그냥 눈물이 나온다. 맘 놓고 죽을 수도 없다. 맘 편히 아프지도 못한다. 마음속으로 울고 또 우는 것 외에는 달리 해줄 게 없다. 자식이라는 그 이름 앞에 부모는 산산이 부서진다. 그래서 자식은 부모의 근본적인 죄를 고발한다. 음란한 결혼이라 지적질 한다. 결국 부모는 결혼이 율법과 접촉점이 없었다는 것을 고백하게 만든다. 십자가를 믿었던 것이 아니라 자식을 믿었던 것이 수치스럽게 드러난다. 자식만 아니면 그럴듯하게 보이고 자존심 세우며 살 수 있을 텐데, 자식은 부모의 고개를 뻣뻣하게 들지 못하고 주눅 들게 만들고 부끄럽게 만든다. 결코 자랑할 수 없도록 만든다. 호적에서 파내도 자식이라는 관계는 끊어지지 않는다. 가족이라는 이름, 잘 살든 못 살든 육으로 맺어진 가족 간의 결핍은 채울 수가 없다. 퍼줘도, 퍼줘도 아쉽다. 그래서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같은 가족이라는 이 혈통적이고 육적인 관계를 끊을 수 있는 방법은 그 어디에도 없다는 것에 모든 인간의 내면에는 절망이 들어있는 것이다. 그러나 참, 감사하게도 모든 것에는 끝이 있다는 것이다. 끝이. 주님이 다 사라지게 하신다. 인간의 혈통이라서. 육이라서.
새로운 나오미는 아들을 낳은 적이 없다. 그렇다면 없는 자식이다. 그런데 성경에는 나오미가 아들을 낳았다고 한다(룻4:17). 이새의 아버지, 다윗의 증조할아버지 오벳이다. 율법은 스스로 재편해서 없는 아빠, 없는 엄마, 없는 자식을 만들어낸다. 보아스도 룻도 오벳도 율법에서 나온 인물들이다. 혈통을 잇기 위해서 결혼한 육적인 관계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시아버지 유다와 며느리 다말을 통해서 베레스가 태어나고, 그리고 다윗과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통해서 솔로몬이 태어난다. 율법은 이제 종착역을 내달린다. 제사장 중심으로 모였던 이스라엘이 이제 왕 중심으로 모이기 위한 율법 갱신은, 오벳이 태어남으로 말미암아 기정사실화되고 있는 것이다. “오벳은 이새를 낳았고 이새는 다윗을 낳았더라”(룻4:22) 율법은 남자를 죽였고 여자를 살렸다. 엘리멜렉, 말론, 기룐, 엘, 오난, 우리아.. 죽음이라는 희생이 따른다. 육적인 혈통이 아닌 영적인 혈통으로, 있음이 아닌 없음으로 후손이 이어져야, 그래야만 예수님은 여자의 후손으로 오신다. 마리아가 남자 없이 임신했다는 것은 그 무엇으로도 증명할 수 없다. 이 땅에는 없는, 없음의 후손, 여자의 후손으로 오셨음을, 성령 받은 자만이 고백할 수 있다.
다윗은 왕이 되었다. 왕이 되어 그가 한 일은 간음과 살인이다. 간음해서 낳은 아이는 바로 죽지 않고 시름시름 앓다가 죽었다. 살아있을 때는 금식하고 슬피 울었지만 죽었을 때는 밥을 먹고 생기발랄해졌다. 밧세바도 내치지 않았다. 밧세바를 옆에 두고 자신의 죄를 매일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다윗은 내가 한 게 아니라 모친의 죄 중에 출생하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더 나아가서 우리아의 희생으로, 아이의 희생으로 즐거워하게 해달라고 한다. 주께서는 제사를 원치 않고 상한 심령을 원한다고 한다. 뻔뻔함의 극치다. 왕의 이 요소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다 똑같이 적용이 되는 것이다. 상한 심령이 없이는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다. 이제 영원한 왕으로 오신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기까지 낮아지신 예수님만을 쳐다보며 의지하고 살아가는 것이 상한심령이다. 빈틈, 빈자리, 빈칸으로 우리를 만드신다. 그럴 때 우리는 천국을 누린다. 그 안에 주님이 살아계시기에. 주님의 이름만 살아있음에. 율법이 꺾은 뼈는 예수님의 뼈다. 짐승의 뼈를, 우리의 뼈를 제아무리 꺾어봤자 율법이 이긴다. 율법은 주님만 있음이 되게 하기 위해서 우리를 없음이 되게 하신다. 율법과 경쟁해봤자 어차피 지는 인생이다. 내 인생 아니라고 그렇게 수없이 말해줘도 대들겠지만, 대들어봤자다. 살면 살수록 율법은 쏘아댄다. 그렇더라도 더 이상 쫄지 않는다. 이미 죽은 자에겐 남아있는 나날이 너무 재미없으니까, 율법의 배려라 생각된다. 수련회가 끝난지 딱 2주가 되었다. 어떻게 하루하루가 흘러갔는지 모르겠다. 오늘도 율법은 손 떼면 편할 텐데 손 떼지 못함을 지적질 한다. "못난 죄인입니다."
베레스의 세계는 이러하니라 베레스는 헤스론을 낳았고 헤스론은 람을 낳았고 람은 암미나답을 낳았고 암미나답은 나손을 낳았고 나손은 살몬을 낳았고 살몬은 보아스를 낳았고 보아스는 오벳을 낳았고 오벳은 이새를 낳았고 이새는 다윗을 낳았더라(룻4:18-22)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시니라(마1:16)
말씀이 현실이 되었다. 나는 나라는 것에서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는 요지부동의 자리를 움직이시고, 내 인생은 내가 책임지지 아무도 책임져 주지 않는다는 식으로 살았던 강화유리 같은 마음을 다 깨부순다. 말씀이 현실이 되는 것은 말씀 스스로가 움직이기 때문이다. 율법이 만들어낸 인물들은 단 하나의 인물을 위한 과정이었다. 현실은 예수님의 세계다.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히11:3)
룻기를 마치면서 룻 안에 실루엣처럼 예수님이 나타난다.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우리가 보는 것은 전부 다 실루엣이다. 2자 관계 밖에는 볼 수가 없다. 그러나 성령의 나타남의 능력은 3자 관계를 보게 하신다. 나와 세상이 전부가 아니라 실루엣이 현실이 되어 오신 예수님과 함께 있다. 바람 불면 치마가 흔들릴 때, 치마에 그려진 꽃들이 함께 움직인다. 그렇다고 치마폭에 그려진 꽃들이 두려워하겠는가? 주님 안에서 우리도 움직인다. 그러나 사랑엔 두려움이 없다. “고맙소!”
이근호 “하나님은 인간이 성경을 보고 성경대로 살고자 하는 그 행위에 진절머리가 날 지경이시지 않을까?”
제의와 왕과의 접합부분을 나오미가 하는 것이 아니라 친족인 보아스와 이방여인인 룻이 한다. 즉 시형제결혼법이라는 율법완성은 율법 없음쪽과 만나서 성사되는 것이다. 그래서 생긴 것이 ‘왕의 자리’다.
따라서 예수님을 왕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그 사이에 공백이 있다. 인간이 건널 수 없는 공백이다. ‘없음’이 매개가 되어야 한다. ‘세상에 찾을 수 없는 없음’이 차라리 실제적이고 실질적인 ‘있음’이다.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다”(히 11:3) 이것을 알게 된 것이 ‘선물로서의 믿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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