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이면 피었다가 저녁이면 지고 마는 나팔꽃보다 짧은 사랑이었다(임주리의 립스틱 짙게 바르고). 그렇게 의미를 두었던 시공간이 멀어져간다. 의미를 두고자함은 아니었는데, 잠재된 욕망은 의미를 두게 했다. 그 무엇으로도 깰 수 없는 나의 의미, 너의 의미, 우리의 의미. 평생 다 깬다 해도 깰 수 없겠지만, 바람엔 시간의 요소가 들어있지 않다. 순간이다. 시간이 없다면 공간도 사라진다. 거기에 있던 의미도 잊혀 진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성령은 바람이라 하셨다. 성령은 바람처럼 오셨다가 바람처럼 가신다. 머물지 않는다. 반복이다. 반복이라 해서 동질이 아니다. 반복은 늘 새로움으로 몰려온다. 똑같은 일이 주어져도 그 느낌은 늘 다 다르다. 겉은 후패해져가지만 속은 날로 새로웠던 것일까? 만남은 그렇게 새로웠다. 너도 죄인, 나도 죄인 우리 모두는 죄인이다. 주님은 죄인들의 만남 속에 함몰된 새로움의 의미를 말씀의 몽둥이로 패기 시작하신다. 그것마저도 붙잡고 놓기를 싫어하는 우리네 본성을 가만히 두고는 못 보겠다는 것이다. 그 타작마당에서 타작기계가 움직인다. 쉴 새 없이 기계는 돌아가고 기계 안으로 빨려 들어가면 모든 것이 훑어져 나온다. 보인다. 뭐가? 이 땅에서는 찾을 수 없는 예수님의 몽타주가.. 고운 모양도 없다. 풍채도 없다.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도 없다. 얼마나 보기 싫었으면 얼굴을 돌렸다. 정작 그분은 우리의 죄를 뒤집어쓰고 계셨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53:5-6)
찾을 수 없다면 구원은 없다. 범죄자를 찾아서 상금 타고자 하듯이 구원을 찾아 나선 것이 애초에 잘못이다. 그것은 오히려 범죄자를 찾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그 범죄자에게 잡혀 죽기 위해 길을 나섰던 것이나 다름없는 꼴이 되었다. 더 아이러니한 것은 그 범죄자는 누명을 썼다는 것이다. 그것도 범죄자를 찾아 나선 우리의 죄로 인한 누명이었다. 그래서 진짜 범인을 색출하기 위한 프로젝트가 시행된다. 그 프로젝트를 실행하기 위해서 하늘에서 지상으로 특공대장이 투입된다. 아! 그러나 놀랍게도 어벤져스가 아니었다. 한 아기였다. 그것도 처녀가 낳았다. 이게 통해? 통하지 않으면 죽이는 것이다. 세상은 영웅을 원한다. 비상식적이고 비논리적이고 비합리적이고 비과학적이고 비이성적인 이 말씀이 영웅을 원하는 악마적인 속성에 무참히 짓밟힌다. 개무시 해도 될 만한 것이었다. 애걔! 아무것도 아닌 것이 어따 대고 들이대? 아무것도 아닌 것은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대우해줘야 한다. 짱돌은 그냥 있는 것이 아니다. 저마다의 가슴속에 품고 있는 짱돌들, 한풀이할라치면 이것이 최고다. 흥건히 피가 땅에 젖는다. 의로운 피로 인해 땅이 호소한다. 그 호소가 받아들여져서 한 아기가 한 아들로서 완성을 다하기까지, 그 죽음과 다시 살아남의 서막이 이제 열린다. 단지 하나님이 하나님의 언약을 위해서 동원된 하나님을 위해서다. 그리고 그 안에 포함된 주님의 백성에게 구원이 선물로 바꾸어지는 사랑이 기적처럼 베풀어진다. 텀이다. 우리 스스로가 마련할 수 없는 허물의 자리, 상함의 자리, 징계를 받는 자리, 채찍에 맞는 자리다. 우리는 제 길로 가는 것이 주특기이니까. 오로지 예수,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분의 공로로 주어진 자리일 뿐이다.
한 아기가 하늘에서 지상으로 내려오면, 하늘의 일이 땅에 펼쳐지는 과정이 된다. 왜 인간을 배제시키고 다 제거해버리고 오직 하나님과 하나님과의 일만 남는지를 보여주시는 것이다. 셉나도 엘리아김도 아니었다(사22장, 36장). 단단한 못인 줄 알았는데 삭은 못이 되었다. 이 둘의 역할을 감당했던 히스기야도 아니었다. 하나님은 앗수르 군대 185,000명을 죽어나가게 한 후에, 인간은 아니라는 사실을 공고히 하는 것이다(사36-37장). 하나님이 이사야에게 하셨던 약속,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라는 약속만이 하늘이 땅으로 내려온 것이다. 히스기야가 병들어 죽게 되어 눈물로 기도했다. 들어주셨다. 왜? 아직까지도 더 나와야 될 육신의 죄가 있어서. 그 죄는 인간이 아는 그러한 죄가 아니다. 하나님이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신 그것에 참여케 하시는 것이다. 성령은 우리를 죄로 말미암아 죽었고 다시 살아나신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에 지정된 자리를 찾아주신다.
“이리와 어린양과 함께 거하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찐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아이에게 끌리며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 뗀 어린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사11:6-8)
이 평온함이 과연 인간들이 꿈꾸는 낙원, 파라다이스일까? 이것이 영원히 지속된다고 한다면, 여기에 담긴 무료함을 감당할 수 없을 것이다. 주부들이 청소 다해놓고 거실에서 한 잔의 차를 마시며 평온함을 즐기다가도 이내 지루해서 견딜 수 없어 한다. 전화 돌려서 수다를 떨어야만 된다. 인간이 견딜 수 없는 것은 무료함이고 권태다. 동물원은 한번 다녀오면 그만이지 거기서 영원히 살려고 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니 이곳이 천국이니 들어가서 살라고 한다면 누가 들어가겠는가? 그러니 천국은 아무나 갈 수 있는 곳이 아닌 것이다. 끝없이 욕망의 쾌락을 걸치고 있는 인간들에게는 저 천국은 무료할 뿐이다. 그래서 땅의 인간은 ‘함께’의 의미를 모른다. 너는 너, 나는 나다. 그러다 너와 내가 만나서 함께의 의미가 발생되지만 여전히 너는 너, 나는 나일뿐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사야에게 거룩한 산에서 해됨도 없고 상함도 없는 여호와의 지식이 충만함이라고 하셨다. 천국은 여호와의 지식의 충만함이다.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는다는 약속이 언약완성의 충만함으로 이루어져 영원토록 함께 할 것이다. 여기에 인간은 없다.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는다는 것은 인간배제다. 혈통의 끊어짐이다. 인간 왕은 영원한 왕이 왜 아닌가를 보여주기 위해 세웠을 뿐이다. 역사는 묵시의 마당이다. 이새가 다윗을 낳고 다윗은 솔로몬을 낳고 솔로몬은 르호보암을 낳고 르호보암은 아비얌을 낳고 아비얌은 아사를 낳고 아사는 여호사밧을 낳고... 낳고, 낳고, 낳고, 이 낳고는 인간 왕을 지속시킴과 동시에 단절시키기 위한 과정으로서 주신 것이다. 다윗의 혈통으로 오신 마지막 왕은 처녀가 잉태하여 낳은 아들이어야 한다. 그리고 다윗의 아들은 성전이 되었다. 시온이 되었다. 갈수록, 갈수록 가면 갈수록 기묘하다. 어떻게 혈통이 성전이 되고 시온이 되는가? 어떻게 아들이 성전을 낳고 시온을 낳게 되었는가? 자기백성과 함께하는 시스템이다. 출발점이다. 모든 출발점은 예수님이 되시는 것이다. 예수님이 계셨고 예수님이 오셨다.
처녀가 잉태하녀 낳은 아들은 이사야에다가 뿌려놓은 말씀을 회수하려 오셨다. 언약의 완성이다. 낚시꾼은 흔들리는 낚싯대를 보고 알아차린다. 물고기가 낚시 바늘에 걸린 먹이를 문 것을 말이다. 릴을 감는다. 딸려오는 것은 말씀이다. 하나하나 군데군데 뿌려진 언약이 끌려올라온다. 하나님이 창조 때에 계획한 이미지들이 다 살아나는 것이다. ①창조이미지(창1장, 사45:7) ②낙원이미지(창2장, 사51:3) ③악마이미지(창3장, 사24:21 27:1) ④노아이미지(창6장, 사54:21) ⑤아브라함이미지(창12장, 사51:2) ⑥민수기이미지(사41:15) ⑦할례이미지(사37:30) ⑧소돔과 고모라이미지(사13:19) 결단코 하나님은 언약을 포기한 적이 없었다. 인간의 역사라는 외곽에 조명을 설치하고 역사에 스크린을 비춘다. 그 스크린에 자막이 박힌다. 이사야서다. 역사의 원천, 뿌리를 찾기 위해서 다 뜯겨져나가야 한다. 뜯겨져나가면 역사 속에 숨어있었던 짐승들이 다 드러난다. 역사 속에 집어넣은 뿌려진 말씀들이 회수되는데 역사는 말려들었을 뿐이다.
폭염에 짜증난다. 살아있는 미꾸라지에 소금뿌리면 미꾸라지들은 미쳐서 날뛴다. 살아있는 인간에게 폭염을 치면 인간은 미꾸라지가 된다. 당해낼 재간이 없다. 죽을 지경이 되어도 인간은 다시 자기에게 의미를 둔다. 자기정당성에서 한걸음도 벗어나지 못한다. 살고보자는 것으로 마감된다. 폭염은 견디지만 폭망은 내 사전에는 추호도 없다. 역사 속에서 교훈을 찾아 과거사를 속죄하고 반성하면서 하늘의 혜택을 빌어보지만 더 이상의 기적은 일어나지 않는다. 정통개혁주의 신학에는 기적이 그쳤다. 가능성이 없다. 한때는 선지자들을 통해서 기적을 베풀어 이스라엘을 이끌고 가셨지만, 가능성이 있었지만, 혜택을 입었지만 그때뿐이다. 아무리 그랬어도 과거에 불과한 것이 된다. 기적은 과거로 사라지고 다시 자기 일에 열중하는 것이 인간의 한계다. 그 끝은 죽음이다. 자기 일에 열중하며 사는 것의 끝이 죽음이라면 인간은 죽음의 존재인 것이다.
주님은 이제 인간을 상대하지 않는다. 인간은 왜 배제될 수밖에 없는가, 배제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선지자들을 통해서 문서로 확정하기로 하셨다. 고발장을 접수하기로 하셨다. 그래서 하나님은 계획한 일을 하나님 스스로 홀로 이루시기 위해서 자신이 개입하신다. 인간은 역시 하나님의 언약을 이룰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이 이미 확정된 문서에 박혀있다. 지금까지 기적은 이스라엘을 예쁘게 봐줘서 상대해준 혜택이지만, 업그레이드 된 기적은 하나님 홀로 이스라엘을 이끄는데 얼마나 성공적인 것인가를 뽐내는 것이다. 예상치 못한다. 하나님 혼자만 알고 있는 것이다. 이 기적을 문서는 두고두고 확인할 수 있게 해준다. 그 기적은 이제는 인간을 피해서 가는 기적이다. 왜? 우리는 이미 발바닥에서 머리까지 성한 곳이 없는 행악의 종자라는 것이 다 까발려졌기 때문이다. 구원도, 천국도 우리를 피해서 간다.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 하셨도다(사1:3)
이 말씀을 가지고 부끄럽지만 많이 회개(?)라는 것을 했었다. 그러나 그때는 몰랐다. 회개할 것이 아니라 알지 못하는 어쩔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알면 안 된다는 것을... 주님의 마음은 떠났다. 이게 기쁜 소식이다. 주님의 언약은, 약속은 주님이 이루겠다는데! 우리가 어떻게 알겠는가? 죄인이라는 것을 어떻게..., 수평이 아니라 수직이어야 한다. 땅이 아니라 하늘이어야만 한다. 하늘이 땅에 펼쳐져야만 한다.
그러나 참, 애석하게도 하늘과 땅의 연결점은 없었다. 하늘과 땅의 연결점이 없다면 나와 하나님 사이에도 연결점이 없다. 빈자리다. 그 빈자리에 누가 대신 들어가는가? 나를 제키고 누가? 내가 구원받지 않으면 누가 구원을 받는다는 말인가? 하나님이 나와 연결점을 두지 않겠다는 선언은 그동안 내 수고와 내 애씀을 내 순수함의 발로에 찬물을 끼얹어 모욕감을 주겠다는 의도다. 가만히 당하고만 있을 위인이 아니다. 끊었다는 것에 대해서 속에서는 용광로처럼 반발이 끓어오른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대신하여 말씀을 전하는 선지자들을 핍박하기 시작한다. 그들은 무슨 죄가 있어서 고난을 받아야만 하는가? 거기까지는 모르겠다. 단지 내가 아프니까, 내가 상처받기 싫으니까, 악쓰고 대드는 것이고 그것은 고스란히 대신 말씀을 전하는 자에게 치명상을 입힌다.
모든 것을 내 것으로 끌어당겨서 절대화시키는 것이 이 세상에서 살아갈 맛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환경은 뒷받침해주지 않는다. 땅은 인간보다 세고 땅보다 바다는 세다.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에게 굴복하며 사는 것이 인간의 한계다. 한계, 한계, 인간은 한계에 갇혀있다. 모든 것이 보이는 나부터 시작하여 보이는 나로 끝난다. 하지만 한계를 넘어서 땅 없이 사는 백성들을 만드신 분이 계신다. 그분은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버림받은 예수님이시다. 인간이 어떤 것도 보태거나 기여하지 않았어도 갇힌 한계에서 해방시켜주신 분이시다. 시간 밖을 벗어나지 못하고 공간 밖을 벗어나지 못한 인간의 한계. 시간도 벗어나게 하셨다. 안식일의 반복은 희년으로의 자유에 정점을 찍는다. 공간도 벗어나게 하셨다. 땅의 시온은 하늘의 시온을 본거지로 한다. 하늘에 감추어진 생명이기에 땅에서는 죽은 자로 나타나게 되어 있다.
“시온은 공평으로 구속이 되고 그 귀정한 자는 의로 구속이 되리라”(사1:27)
이것이 그냥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의로 구속하기 위해서 의로운 피를 흘려야만 했다. 이 세상은 상식이다. 상식적인 것만이 통한다. 아기는 남녀를 통해서 출생하는 것이 상식이다. 역사다. 그러나 역사를 비역사 되게 하고 상식을 허무로 돌리는 일이 발생되었다. 끝났다. 종결이다.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라”는 말씀으로 말이다. 숨 가쁘게 살아가는 현실에는 예술, 정치경제, 종교, 과학이라는 분야에서 최고가 되고자 하는 꿈이 들어있다. 그 꿈을 이루는 과정에 미흡한 나를 최고되게 도와줄 1을 제조한다. 우상이다. 초월적인 신이 내 일만 잘 되게 해주신다면.. 늘 플러스시킨다(1+x). 그러나 주님은 모든 것을 완성하시기 위해서 버림받으셨다.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주님은 늘 마이너스다(1-x).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예수님이 아니다. 우리가 부르는 예수님은 예수님이 아니다. 십자가가 없는 그 예수님은, 십자가가 있더라도 그 예수님이 나를 위한 예수님이라면 예수님이 아니다. 땅이 없는 교회는 교회가 아니라는 역사가, 땅이 없는 교회가 교회라는 비-역사를 인정할 수 없는 법이다.
시온의 의를 드러내기 위해서 죄를 만들어내신다. 거기에 동원된 자들이 바로 이스라엘을 치기 위하여 내려오는 몽둥이 역할, 앗수르고 바벨론이다. 이방의 침략에 왕은 속수무책이다. 그동안 이스라엘 왕들은 하나님만이 이스라엘의 왕이심을 잊고 자기들이 이 나라의 왕이라고 여겼다. 하나님께서 왕을 세운 이유를 결국 왕된 자신들이 몰랐던 것이다. 왕은 최종적인 진짜 왕이 나타나기까지 가짜 왕의 모습을 다 보여줘야 한다.
역사가 영(적)이다. 이 뜻은 보이는 것으로 보이지 않는 것을 설명한다는 것이다. 밥 먹고 사는 것이 인간에겐 어쩔 수 없고 정당성을 요구할 수 있다고 여기지만 그것은 말씀에 위배된다. 사람은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는 것이다.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은 역사에 속하지만 분명한 것은 영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이사야의 배경은 앗수르나 바벨론에 억눌림 당하고 갇혀있는 그 상태에 있었지만 말씀은 잘 돌아가고 있다는 증거가 된다. 신약에 예수님이 오셔서 귀신을 쫓아냄으로 모든 인간은 귀신들린 자라는 것을 드러내신다.
이사야의 반전은 바벨론에 포로 잡혀 갔다가 바벨론에서 돌아온 남은 자가 지옥 간다는 것이다. 그동안 남은 자에 대한 좋은 생각을 확 깬다. 남은 자가 좋은 게 아니었다. 그 남은 자에 속하고 싶었던 생각이 얼마나 악마적인 것이었는지를... 아, 인간은 왜 그렇게 구질구질하게 구원에 구걸하고 천국을 껄떡거리는지... 단 한 번도 자기를 소경이라 생각지 않는다. 그저 본다고 한다. 보니까, 보는 나는 잘난 것이다. 구원받을만한 것이다. 이 남은 자가 역사에서 영적으로 건너뛰지 못하고 다시 역사주의로 돌아갔다. 70년 포로생활로 우리는 할 만큼 다했으니까, 벌 받을 만큼 받았으니까, 나쁜 그릇도 좋은 그릇도 만든 토기장이 책임이듯 하나님 책임이라는 것이다.
모든 사람은 정신병자다. 정신병은 내가 온전치 못한 것에 대해서 심히 힘들어하는 증상이다. 온전치 못하는 것이 불편하고 참을 수 없다. 한순간도 쉬지 않고 온전함을 위하여, 모자람이 있다는 것을 참을 수가 없다. 완벽에, 완벽에 완벽을 위해서 미흡함을 채우지 못해서 환장한 사람들이다. 말로 표현하지 못해서 걸린 병. 인간은 말을 가지고 정통으로 표현할 수 있는 재주가 없다. 왜? 귀신들렸기 때문에. 들뢰즈는 “단어가 인간을 죽인다.”라고 했다. 내 중심으로 말하니까. 저쪽은 개무시하고 나만 돋보이면 되기 때문이다. “사랑한다.”라는 이 동사는 자기변명으로 사용하는 것을 다 알지 않는가?
그래서 자기 마음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물질로 대체할 수밖에 없다. 동사는 사건인데 사건은 표현될 수가 없다. 그래서 사라져가는 사건을 동결시킨다는 것은 반칙이다. 사라져가는 사건을 무슨 수로... 인간은 언어의 늪에 빠졌다. 자기도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른다. 단지 단어의, 언어의 위력에 호소한다. 날아다니는 언어를 끌어 모아 자기 세계관을 삼았다. 신화다. 나 좀 알아달라고...우리의 일은 계속해서 역사만 쌓고(+x), 주님의 일은 역사에서 추방된다(-x). 이사야와 정신병의 관계는 말과 말씀의 차이에 있다. 인간은 말로 시작해서 말로 가서 말로 끝난다. 이사야의 말씀은 말씀으로 시작해서 말씀으로 가서 말씀으로 끝난다. 말에 의해서 말씀은 핍박당한다. 말이라는 역사를 말씀의 영으로 교체할 방법이 없기에...,
우상만 남았다. 나를 건드리지 않는 신만. 도대체 어쩌란 말인가? 우리보고 탓하지 말라 하신다. 이사야 6장 5절이 있다. 이사야가 속해 있는 역사 속에 하나님이 영적으로 침투하셨다. 사건이다.
“그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말뿐인 자다. 말발만 세다. 말발로 이기려 한다. 나는 망하는 자이기에 말만 앞장세웠고, 앞으로도 수정될 수 없는 노선으로 계속 갈 수밖에 없는 나는 망한 자다. 이것이 나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주님이 이렇게 관찰하고 계심이 나온 것이다. 감사하다. 지금 이 순간!
우상섬기는 재주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그래서 역사에는 진전이 없다. 반복이다. 모든 역사는 되풀이한다. 해 아래 새것이 없나니... 갇혀있다. 망한 자에게는 후회도 없고 실수도 없다. 갇혀있으니까 망하는 것이다. 아담 때문에 갇혀있다. 율법이 주어진 것은 죄 아래 가두어두기 위함이었다. 왜 그렇게 천국에 못 들어오게 하시는 것일까? 다른 방식으로 집어넣게 하시려는 것이다. 우리는 망하는 자였지만 주님께서는 그 망하는 자로 인식시키는 그 과정까지 포함하신다. 그게 바로 일관된 율법의 작용이다.
졸지에 주님이 찾아와서 이사야를 망하게 한다. 왜? 안 망했다고 우기고 있는 자기백성들에게 보내기 위해서다. 내가 망했다는 것은 망한 세상에서만이 알 수가 있다. 다 망했다. 단지 차이는 망한 자라는 것을 알고 가느냐 모르고 가느냐의 차이다. 가만히 있어도 몸이 알아서 망함으로 질주한다. 주님의 비밀을 누가 알리요. 인간의 몸을 주의 일의 재료로 사용하신다는 것을... 이사야는 3년 동안 벗은 몸 벗은 말로 행하였다(사20:3). 십자가 믿게 된 것으로 끝이 아니라 십자가의 길을 가게 하신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빌4:13),”라는 것은 “내게 주어진 모든 것이 주의 은혜입니다.”라는 말이다. 성도는 평생 동안 망한 자라는 것을 표현해야 된다. 돈 좋아하는 육신을 자아가 숨길 수 없다. 내가 말릴 수 없다. 육신이 좋아하는 것으로 가는 것을 말릴 수가 없다. 50억 생기는 이런 망함? 경험이나 해봤으면!
그러나 순간 눈을 뜨게 하시면 “달리다굼! 소녀야 일어나라!” 이게 끝이고 마지막이다.
하나님과 함께 살래? 우리끼리 살래? 이질적인 것과 동질적인 것이다. 우리끼리 살고 싶은 동질성, 다 빼고 한통속이라는 것만 확인할 수 있다면 좋겠다. 너는 나를 인정해주고 나는 너를 인정해주고 우리가 되고 싶다. 그런데 히스기야 시대에 앗수르 군대 185,000명을 하나의 시체로 간주해서 다 죽였다. 수억의 인구가 있어도 하나라는 시체, 동질성에서 못 벗어난다. 죽음이 있고 천국이 있고 지옥이 있다. 골라서 가라고 한다면 다 천국에 갈 것이다. 그러나 갈 수 없다. 천국이 어떤 곳인지 모르니까. 인간끼리 살 수 있는 곳이 아니기 때문이다. 인간끼리의 동질성과 하나님과의 이질성의 간격을 어떻게 메울 수가 있는가? 없다. 한계다. 그래서 천국은 그 한계를 극복하는 것이 천국이다. 하나님은 인간끼리 살 수밖에 없는 그런 몸, 그런 성질로 출생한 인간을 영원히 살 수 있는 백성 만들기에 나선다.
어떻게? 새로운 출생지를 만드신다. ‘임마누엘’이다.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계신다.’ 이것은 공격용이요, 심판용이다. 하나님과 함께 있기 싫어하는 너희는 각오하라는 것이다. 필히 전쟁이 벌어진다. 왜냐하면 하나님과 이스라엘은 원래부터 언약 안에 함께 있었던 자리였다.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이제 말씀 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조성하신 자가 이제 말씀 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사43:1)
그러나 이스라엘이 하나님 없이 우리끼리 잘 살아보자는 이방민족의 우상을 섬겼기 때문에, 원래 자리를 벗어났기에 하나님은 공격을 하시는 것이다. 앗수르나 바벨론을 믿었던 인간끼리 살았던 정, 세상친화적인 동질성을 어떻게 배신할 수 있는가? 이 세상에서 주님과 함께 한다는 것이 너무 이질적인 것이다. 이 세상은 동질적인 우리끼리니까. 천국은 가고 싶어도 천국 가는 과정은 밟고 싶지 않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 우리끼리 잘 먹고 잘 살다가 죽어서 가는 나라쯤 생각하는 것이다.
그런데 주님의 방식은 정말 희한하다. 주님의 새로운 백성, 영적인 이스라엘은 이 바벨론이라는 여기 이 틀에 있어야 이게 발생된다는 것이다. 바벨론은 거푸집(주물틀)노릇을 해야 된다. 그래야 영적인 내막이 밝혀진다. 새로운 이스라엘을 끄집어내기 위해서 바벨론은 역할을 해야 된다(사14:12). 몽둥이 역할을 아주 멋지게 해야 된다. 앗수르에서 바벨론으로 바벨론에서 페르시아-바사로(사45:1). 바벨론 최후의 왕 벨사살 왕은 고레스에 의해서 무너진다. 벨사살 왕은 말씀으로 무너졌다.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단5:25-28). 바벨론 술사들이 이것을 해석하지 못한 이유는, 왕이나 신하나 함께 잘 살아야 한다는 동질성 때문에 감히 망했다고 할 수가 없었다. 함께 망하게 되니까.
바사나라 첫 번째 왕, 고레스를 메시야라고 했다. 메시야는 어떤 분인가? 이렇게 역사 속에서 메시야적인 요소들이 있었다. 하나님과 인간과 더불어 사는 시스템을 이 땅에 가지고 온 분이 메시야다. 인간끼리 사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과 인간이 같이 사는 시스템이다. 그래서 고레스에 인수인계한 바벨론 제국은 거푸집인 것이다. 바벨론이 망한 이유는 높은 곳에 있다고 자부했기 때문이다. 돈과 권력, 높으니까 높다고 한 것이다. 훅 떨어진 바벨론을 믿었고 앗수르를 믿었던 이스라엘은 뭐가 되는가? 이것은 하나님이 버리시는 가짜가 되는 것이다. 그러면 가짜에게서 돌아온 남은 자, 이 남은 자는 뭐가 되는가? 가짜다. 역시 인간은 남은 자도 별 볼 일 없다. 개인은 없다. 운명공동체이다. 전 지구적이다. 하나의 나라다. 자본과 자본의 동질성, 큰 성 바벨론이다. 세상은 말씀에 의해서 무너진다. 하나님께서 역사를 바꾸는 기준은 임마누엘이다. 나랑 함께 있고 싶어? 아니면 너희끼리 살래?
생존방식으로만 살았던 이스라엘에게 무엇이 빠졌는가? 율법이 무엇을 노리고 주어졌는가를, 율법을 주신 것을 전혀 감 잡을 수 없었다. 시온에 율법을 싸매서 두게 되면 시온은 거치는 돌이 되고 넘어지는 돌이 된다(사8:16-18) (사28:16). 모든 것이 와서 다 부서지는, 그 안에 율법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율법에 부딪혀봐야 율법 앞에서 어떤 인간도 선하지 못함을 안다. 근데 이스라엘은 율법을 지키겠다고 나섰다가 망한 것이다. 다른 나라와 정치적인 관계에만 급급했지 율법에 관심도 없었다. 율법은 선하다. 그것은 율법 앞에서 어떤 인간도 선하지 못함을 들추어내는 율법이다. 그래서 test가 가능한 돌이다. 너희들은 이 정도밖에 안 된다는 것을.. 내가 얼마나 개판인가를.. 이것이 하나님과 함께 사는 기준점이 되는 것이다.
노아홍수 이후에 무지개는 자연의 기호다. 시그널이다. 자연마저 언약중심으로 돌아가고 있다. 율법, 언약을 놓쳐버리면 그냥 자연으로 끝난다. 자연은 눈에 보이는 최후의 기준이다. 자연은 율법에 종속되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요구하는 것을 자연이 맞춰주지 못한다. 무지개마저도 하나님의 손에 있다면 우리도 자연에 복종해야 한다. 그러나 참새나 들풀도 키워주는 대로 사는데, 우리는 감사는 없고 악만 남았다.
율법은 쫓아내는 기능을 한다. 그런데 율법이 완성되면 여기서 새로운 자식들이 쏟아져 나온다. 율법의 완성을 탁 건드려보면 하나님의 백성들이 와르르 쏟아져 나온다. 이것은 기존의 동질성이 아닌 새로운 동질성이다. 율법의 완성은 시온의 완성이다. 여기에서 백성들이 나오는데 기존의 백성들과는 완전히 차이 나게 분리된다. 주님의 나를 잉태하고 만들었다는 것과 육에서 나온 것과의 차이다. 그런데 실제로 하나님께서 만드실 때는 육의 핍박에서 나온다. 그게 바로 이새의 싹이다. 잘린 그루터기에서 연하디 짝이 없는 가늘가늘한 싹이 나온 것이다. 다윗이 나오는 그것을 하나님은 시온성에서 재현하겠다는 것이다.
시온에서 새롭게 출생된 사람들은 혼자 독자적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들 머리 위에 하나님의 신이 임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신은 언약완성에만 치중해서 일하시는 신이다. 하나님의 언약완성이 천국이라면 천국에서 사는 것은 가봐야 아는 것이 아니고, 이 땅에 미리 왔던 언약이라는 test를 통과해야 하는데, 그 통과여부는 하나님의 신이 임한 자에 한해서다. 성령을 받았기에 육신의 한계를 안다. 성령을 받았기에 죄에 빠지는 것이다. 이 죄는 율법이 와서 자극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죄의 몸이다. 관리대상이 안 된다. 계속 죄가 생산되는 몸이다. 죄의 몸인 것을 안다는 것은 성령이 왔다는 것이다. 그럼 이 몸은 성령이 관리하는 것이다. 그런데 전에는 죄의 몸이었는데 이제는 내가 알아서 착실하게 살 수 있다고 하는 자들이 있다. 정통개혁주의자들이다.
기존의 왕은 모든 전체를 통합하는 자리에 있다. 예외의 자리에. 그래서 왕은 법에 얽매이지 않는다. 모든 법은 왕 자신을 위해서다. 시기키위해서다. 아무도 해석하지 못했던 느브갓네살의 꿈을 다니엘이 해석했을 때, 느브갓네살 왕은 다니엘 밑에 와있게 된다. 근데 이것을 예외라고 하지 않는다. 이걸 비-전체라고 한다. 예외는 너는 해당사항이 없으니까 빠지라는 것이고, 비-전체라는 말은 전체로 하여금 이거는 전체가 아니라고 할 수 있는 요건을 전체 안에 집어넣는 것을 말한다. 전체가 결코 전체가 아님을 까발리기 위해서 밖에 나가 있는 것이 아니고 전체 안에 들어있는 것이다. 들어있을 때 조용하게 들어있기 때문에 전체 모두는 모두로 여긴다. 그런데 여기에 갑자기 풀 수 없는 난제가 들어와 버리면 모든 사람들이 혼절할 정도로 까발려져버리고, 비-전체는 예외(왕)마저도 날아가 버리게 한다. 왕은 전체를 망하게 하기 위해서 세워진 것이었다는 것이 들통 난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전체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라는 비-전체로 다 부정해버린다. 비-전체는 전체에 잠복되어 있는 것이다. 전체에서 어떤 한계가 등장할 때 비-전체가 드러난다. 인간의 전체는 전체가 아니다. 전체에서 비-전체로 인해 새로운 전체가 나올 때, 전체+전체라는 두 덩어리가 생기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전체를 위해서 기존의 전체는 부정당해야 된다. 목수였던 예수님만이 인간의 죄를 규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처녀가 잉태한 아들, 남성과 엮이지 않는 여성이 있다. 그래서 인간의 전체는 다 남자다. 여자라고 지칭된 여자는 껍질만 여자지 실상 내용은 남자다. 아담의 흐름을 부정하기 위해서 전체에 비전체로 오셨다. ‘처녀’는 계시 안에서 선지자에서 나온 것이다. 그럼 선지자와 대결구조에 있는 것은 왕이다. 왕은 현실체계의 대표자, 전체적이다. 선지자는 비-전체에 속한다.
십자가만 자랑한다는 말... 사기다. 인간은 사기꾼이다. 처녀에게서 태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냥 사기꾼으로 살면 된다. 사기꾼 기질대로 살아도 주님은 속아 넘어가지 않을 테니까. 십자가 영, 성령은 말 차원을 부정해버리고 말씀차원에서 일하신다는 것을! 자연 자체가 하나님의 시그널이다. 신호다. 무지개도, 별도, 달도, 해도, 참새도, 들풀도 다 그렇다. 자연을 만드신 이에게 감사하라! 새 노래로 주님께 감사하라!
“말일에 여호와의 전의 산이 모든 산꼭대기에 굳게 설 것이요 모든 작은 산 위에 뛰어나리니 만방이 그리고 모여들 것이라”(사2:2)
“말하는 자의 소리여 가로되 외치라 대답하되 내가 무엇이라 외치리이이까 가로되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 같으니 물은 마르고 꽃은 시듦은 여호와의 기운이 그 위에 붊이라 이 백성은 실로 풀이로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영히 서리라 하라”(사40:6-8)
이사야서속에서 예수그리스도를 만나게 해주신 주님께, 그리고 이근호 목사님께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