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이나 먹고 살면 되는 줄 알았다. 그런 줄 알았다. 그래서 그렇게 살았다. 이게 뭐가 어때서? 라고 정당성을 내세울 때, 성경은 이게 지옥 갈 저주받은 증거라는 것이다. 나는 나를 사랑하는 꿈에서 마냥 깨고 싶지 않은데, 그냥 푹 빠져있고 싶은데, 주님은 꿈 깨라고 무참히 짓밟아버리고 멸시해버리신다. 땅이라는 것만 바라보며 수평적인 일상생활에 몰두하는 그것만이 내 세상, 각자의 개별적인 세상에서는 카운트하는 나, 나만 의미가 있지, 나 외에는 다른 신이 없다.
그런데 엄연히 하늘이 있었다. 단지 인간은 하늘을 잊고 살아갔을 뿐이다. 인간에게 땅만 바라보며 살다가 고개를 들어 하늘을 쳐다볼 수 있는 수직적인 요소가 발생될 때는 하늘에서 돌덩이만한 우박이 내리고 우르르르 꽝꽝 천둥이 소리 지르고 번쩍번쩍 번개가 치고 하염없이 두드리는 빗줄기가 쏟아지고 떡가루 같은 눈이 이리로 저리로 제멋대로 흩어질 때다. 그때 이 땅에 사는 인간들은 하늘을 쳐다본다. 그리곤 하는 말이 있다. “내가 이 땅에 발 딛고 살고 있는데, 내 하는 일에 방해되게 왜 하늘은 요동치고 난리람?”
그래도 인간은 환경에 적응하는 동물이라 금방 적응하면서 다시금 살 궁리에 들어간다. 잠시의 불편함정도야, 이 정도야 쯤이야 아무리 하늘에서 난리를 친다 해도 밥 먹고 살기 위해서는 참을 만하다. 선조가 그랬고 내가 그랬고 후손이 그럴 것이다. 유구한 역사가 그것을 증명해내주고 있지 않은가. 산천초목은, 함께 있었던 자들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도 나 혼자만은 유일하게 살아남아 있어야 한다. 하늘마저도 땅으로 끌어내려 수평적인 요소로 만들어버리는 것이 인간이다.
이 모든 것을 묵살시켜버리기 위해서, 터진 입을 꿰매버리기 위해서 하늘에서 오신 분이 계시다. 하나님의 아들이 인자로서 오셨다. 그분의 오심은 잠시 요동치는 하늘의 현상이 아니다. 그 불편함을 적응하면서 무수한 세월을 살아가고 있는 자신들을 대견하게 여기며 쌓아가는 업적이나 공로를 치켜세워주는 메시야가 아니다. 땅은 땅이었을 뿐이다. 하늘도 하늘이었을 뿐이다. 선악이 지배하는 있음은 저주의 대상일 뿐이기에 땅도 하늘도 다 새롭게 재창조되어야 하고, 재편성되어야 한다. 있음은 없음이 되고 없음은 있음이 되게 하시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언약을 세우신다. 하나님끼리 맺으신 언약, 영원한 언약이다.
아무리 인간들이 분주하고 바쁘고 할 일이 많다고 해도 하나님보다 많을까? 땅에 있는 인간들과 상관없이 이제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만의 할 일이 많으시다. 언약만이 살아있음을 나타내시기 위해서 땅에서 밥이나 먹고 숨 쉬고 살아있다고 하나 실상은 죽어있는 인간들을 사용하신다. 하나님끼리 맺으신 영원한 언약을 숨긴 채, 영원한 언약이 완성되기 전까지는 가짜를 진짜처럼 믿게 하시고 진짜를 가짜처럼 믿게 하신다. 진실이라고 믿는 것이 거짓이 되고 거짓이라고 믿는 것이 진실이 되게 하신다. 그렇게 언약의 변천과정의 민낯은 그 언약의 당사자인 예수님마저도 이 땅에 구원자로 오셨다가 구원대상이 되셨다가 구원자가 되게 하셨다.
먼저는 아브라함이라는 한 인물을 택하신다. 택하신 후에, 하나님께서는 네 혈육이 있는 본토를 떠나서 내가 지시하는 땅으로 가라 하신다. 그리고 네게서 나올 후사를 주시고 그 후사를 통해서 하늘에 있는 별처럼 바닷가의 모래처럼 후손이 많아질 것이고 너에게 축복하는 자를 축복하고 너를 저주하는 자를 저주하겠다는 언약을 세우신다. 이제 아브라함이 가는 곳마다 반드시 아브라함을 시기하고 미워하는 자들이 나타날 것이고 반드시 아브라함에게 순종하는 자들이 나타날 것이다. 아브라함 본인이 잘나서가 아니라 아브라함을 갖고 노시는 하나님 자신을 위해서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 야곱의 열두 아들에게서 나올 것은 다 나오게 하신다. 죄를 의되게 하시고 의를 죄되게 하시고 싸그리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신다. 왜 그렇게 하시는가? 절대기준은 피에 있다. 가는 곳마다 제단을 쌓고 제사를 드린다. 더군다나 아브라함은 짐승을 잡아 흘려진 피를 대신해서 가장 사랑스러운 독자 이삭을 제물로까지 바쳐야만 했다. 그렇게 아브라함은 자식으로 인하여 산자가 되고 자식은 죽은 자가 되어서, 존재하지만 없는 자식이 되는 것이다. 이 일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죽이려고 할 때 멈추라고 했던 그 소리를 내지 아니하시고, 그 소리가 나오려고 하는 입술을 깨물고 진짜 죽여 버리시고자 하시는 언약된 한 인물을 바라보게 하시는 것이다.
허망과 망상에 붕 떠서 발을 딛고 있는 곳이 하늘인지 땅인지 모르겠다. 전에 내 기준으로 구분했던 세상. 하나님을 모르고 교회를 다니지 않는 자들이 살아가는 곳을 거룩하지 않은 세상이라고 했다. 그리고 하나님을 부르고 알고 교회를 다니며 교회에 소속되어 있는 곳을 거룩한 하나님나라라고 했다. 교회 다니면 하나님 백성이요 교회에 다니지 않으면 세상 사람들이라고 구분하며, 주일성수하지 않고 결혼식에 참석한다든지 친구를 만난다든지 놀러간다든지, 자격증 시험을 본다든지 하면 세상에 빠져서 시험 든 것이라 했다. 벌을 내리실 것이라는 무서움과 공포에 떨어야 했다. 주일을 잘 지키면 모든 일이 잘 될 것이고 기분도 좋고 알 수 없는 공포와 무서움으로부터 지켜줄 것이라고 했다. 헌금을 하면 한만큼 30배, 60배, 100배로 갚아주신다 했다. 하나님의 복을 받기 위해서는 믿고 행해야 된다고 했다. 이제 복음을 들을 만큼 들었다고 자부하며, 하나님을 믿을 만큼 믿었다고 자만하며, 그러한 유치하고 무식한 발상에서부터 벗어났다고 여겼지만, 무식한 종교에서 탈출했다고 여겼지만, 여전히 내 안에는 세상을 사랑하고 좋아할 수밖에 없는 우상의 본질이, 무식한 종교의 발상이 내재되어 있다. 얼마나 찰떡궁합인지 내 안의 우상성은 곧 나다. 나를 믿는 것이지,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다. 십자가를 믿는 것이 아니다. 복음을 들은 것이 아니다. 복음을 아는 것도 아니다. 단지 생존에 미쳐서 사는 이 세상이나 그것을 구분한 나나 똑같이 저주받아 마땅한 한통속이라는 것이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발견되어지는 것이다.
하나님이 붙이시는 전쟁에는 인간의 힘으로 싸울 필요가 없다. 무기로 전략으로 힘으로 싸워서 이기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친히 싸운다는 것을 보여주는 엑스트라 역할만 잘 하면 된다. 큰 여리고성을 빼앗고 이겼다고 좋아했던 이스라엘은 아주 작은 성에 불과했던 아이성에서는 패배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붙여주시는 전쟁이라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자기들의 힘으로 무너뜨릴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여리고성을 이겼으니까 아이성은 밥이라 생각했다. 이방민족은 하나님의 적이지 이스라엘의 적이 아니다. 22,000명을 다 돌려보내고 300명으로 135,000명의 미디안 적군을 물리쳤던 기드온의 전쟁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미디안 군사들에게는 활, 창, 병거, 칼.. 무기들이 있었다. 기드온과 300명의 용사들에게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들이 믿었던 하나님마저 무기가 없었다. 하나님의 소리, 이미 승리했다는 나팔을 불어서, 그 나팔 소리에 놀라서 자기들끼리 무기를 사용해서 죽고 죽이는 이 상황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 것인가? 이스라엘의 모든 전쟁은 여호와의 이름으로 싸우시는 전쟁, 붙이시는 전쟁으로 대적을 진멸하고, 진멸하고, 진멸해야 한다. 왜? 할례도 없고, 율법도 없고, 언약궤도 없고, 언약도 없는 개 같은 이방민족은 싹 다 저주받아 마땅하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을 대적함이 아니요, 하나님을 대적하는 악마의 하수인으로서 나라가 있고 민족이 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민족에게는 있지만 이방민족에게는 없는 것이 있다. 제사는, 이방민족들도 자기 신들에게 제사 드린다. 율법은, 이방민족에게는 자기 신들이 내린 지침서가 있다. 언약궤는, 이방민족에게도 쌓아올려서 만든, 금송아지나 여러 신상들이 있다.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그들에게는 없는 것으로 포함될 수 있는 것은 언약궤다. 언약궤와 그들의 신상과 다른 점은 그들의 신상은 움직이지 않고 고정되어 있지만 언약궤는 움직이며 유동적이라는 것이다. 여호와의 이름으로 언약궤가 가는 곳마다 다 파괴하고 휩쓸어버린다. 언약궤를 앞장세우고 이스라엘은 요단강을 건넜다. 언약궤가 없는 곳은 저주요, 언약궤가 있는 곳은 복이다. 그러나 그들에게 진짜로 없는 것은 언약이다. 신의 찾아오심이다. 언약을 하기 위해서 인간을 찾아오시는 신, 그들에게는 찾아오심이라는 것은 일체 없다. 찾아가고, 또 찾아가고, 맨날 찾아가고 찾아갈 뿐이다. 인간이 자기를 위하여 만든 신이다. 인간의 생각을 집어넣고 그 뜻대로 해달라고 비는, 나를 위하여 만든 신은 곧 나를 투영한 신이다. 그래서 어떤 일의 결과나 사건을 해석할 길이 없다. 변화를 설명하지 못한다. 그냥 물 흘러가듯이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원인과 결과나 따져서 수긍할 뿐이다. 내가 이렇게 했으니까 이렇게 되었겠지. 내가 그렇게 안 했으면 그렇게 안 되었겠지. 달리 다른 방도가 없는 인간의 한계에 갇혀서, 죽을 때까지 거기서 못 빠져나온다는 것이 또 다른 한계다.
그렇다고 가만히 있을 인간들이 아니다. 노랑은 빨강이 되고 싶고, 빨강은 파랑이 되고 싶다. 그 되고 싶은 욕망이 저주인줄 모른다. 그냥 노랑일 때 그것이 복인 줄 모른다. 왕자표 크레파스라는 이름을 달고 상자에 담겨진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할 줄 모른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보건대 망했다. 멸망한 이스라엘이라고 역사는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망할 이스라엘을 왜 택하셨을까? 언약은 과학적 근거로, 수학적 형식으로 풀어서 인간들이 예상했던 정답, 근사치 값을 구해낼 수 없다는 것이다. 이스라엘로 하여금 살아있는 언약은 어떤 변화를 거쳐서, 변천과정을 거쳐서 언약의 노선, 족보를 통해서 실제로 뚜벅뚜벅 걸어 나오는 언약의 주인공을 맞이하도록, 실상은 죽이도록 유도한 것을, 택함 받은 이스라엘은 그 일에 장본인으로 택함 받았다는 사실을 모른다.
여호수아가 약속의 땅을 다 정복하고 차지한 땅을 제비뽑기를 해서 분배한다. 제비 뽑혀졌다는 것은 우리의 운명은 내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예언대로 이미 정해져있다는 것이다. 분깃이 없는 레위지파는 흩어져서 각 지파에게 속해야 한다. 각 지파에 48성읍을 제비뽑아 레위지파를 나눠두고, 그것도 모자라서 살인을 저지른 살인자를 보호하기 위해서 6성읍의 도피성을 둔다. 율법에 의하면 살인한 자는 반드시 죽어야 하지만, 죽이지 않아도 되는 일이 벌어진다. 제사장이 함께 있기 때문이다. 열두 색깔의 크레파스 전체를 떠받들고 있는 레위지파가 없이는 하나님의 약속된 땅은, 약속의 땅이 아니라 평범하게 토착민들이 살고 있는 땅을 뺏고 들어간 생존의 땅일 뿐이다. 레위지파가 잘 거주하고 있느냐 없느냐로 인해 분배받은 지파들의 그 땅의 존속여부가 결정되는 것이다. 결국엔 레위지파도 생존 때문에 방황하다가 레위지파의 첩 강간으로 열두 토막 살인사건이 일어나고, 베냐민지파가 없어질 위기에 처하게 되는 일까지 벌어지게 되는 것을 보더라도, 땅을 차지한 지파들은 레위지파로 인해 얻은 땅이라는 것을 잊고 살았음을 알게 된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을 뿐이다.
비록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하신 약속으로, 아브라함에게 많은 자손을 주시고, 아브라함에게 속한 모든 자들에게는 할례를 행하게 했고 나중에는 모세를 지도자로 해서 애굽에서 문설주에 피를 바르고 나온 히브리인들이 이스라엘 민족으로 발생되었지만, 그리고 이스라엘 민족에게 모세를 통해서 율법을 주셨지만, 하나님은 유월절의 정신, 율법의 정신이 사라진 이스라엘민족을 이방민족으로 똑같이 여기시는 것이다. 단지 이스라엘을 택하신 것은 언약만이 살아있음을 증거 하기 위한 목적으로,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을 특별대우하사 할례를 행하게 하고 율법을 주시고 하나님이 함께 있다는 증표로 언약궤가 그들을 이끌고 언약으로 그들을 이끄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좋은 땅, 먹고 살기 위해서 차지해야만 하는 땅, 생존이나 생계에만 목숨 걸고, 땅을 분배받고 뿔뿔이 흩어져서 열두 지파라는 집단성을 유지하지 못하고 개별성으로 돌아선다면 땅이 그들을 저주하고 토해 내버릴 것이라는 예언이 이루어질 것이다. 실제로 여호수아가 죽고 얼마 못가서 사사시대에는 약속의 땅이 이방민족의 침략으로 치즈 구멍 난 것처럼 뻥뻥 다 뚫려서 이스라엘 땅인지 이방민족의 땅인지 분간 할 수조차 없게 되었고, 왕이 없어서 그렇게 되었다는 그들에게 왕을 주셨지만, 그 땅은 아예 남과 북으로 갈라지고 포로 되어 잡혀가고 황폐화되었다. 결국 북이스라엘은 B.C.722년 멸망했고 남유다는 B.C.586년에 멸망했다.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이 땅을 차지하기 위해서 전쟁할 때 기브온이라는 히위족속은 진멸의 대상이었다. 그런데 기브온 족속은 거짓말을 하고 속여서 자기들은 이스라엘의 적이 아니라고 한다. 그 땅 민족이 아니라 먼 곳에서 온 자들이라고 속여서 진멸의 위기에서 벗어나고자 여호수아나 그 외 족장들에게 자기들을 살려둘 것을 맹세하라고 한다. 여호수아는 여호와께 묻지 않고 그들을 살려둘 것을 맹세한다. 나중에는 기브온 민족이 히위족속이라는 사실이 폭로되었다. 그들과 함께했던 아모리 족속 외 다섯 족속 왕이 자신들을 배반하고 이스라엘민족에게 돌아선 기브온 족속을 치러왔기 때문이다. 그들을 받아준 여호수아는 그들의 생명은 이제 우리 쪽에 있기 때문에 그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싸운다. 언약을 위해서 여호수아의 기도를 들어주심으로 여기에 태양이 동원되고 달까지 동원된다. 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민족에게 이질적인 요소를 등장시켜서 그들을 위해서까지 싸우시는가? 기브온 족속은 오직 살기 위해서 이스라엘을 속이면서까지 위장항복한 사람이다. 살고보자는 이 기브온 족속의 심성, 심보, 속성이 이스라엘민족에게 그대로 있다는 것을, 하나님만을 잘 섬기고 있다는 이스라엘만의 고유한 속성을 폭로시키는 것이다. 이질적인 것을 삽입시키고 주입시킴으로 숨어있던, 숨겨놓았던 내면의 반응을 끄집어내는 것으로 사용하셨다. 결코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잘 믿었던 것이 아니다. 겉멋만 왕창 들어서 있었다. 이스라엘 그들도 이 기브온처럼, 이방민족처럼 제거대상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전쟁에서 승리하고 얻은 전리품만 바치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본인들도 전리품이 되어야 한다. 그렇게 되지 않고 승리를 자기 것으로 돌려서 전리품을 탈취한다면 아간처럼 돌로 침을 받고 불태워진 후에 돌무더기가 될 것이다. 아간이 달리 아간이 아니라 아간이기에 아간이다. 다 아간이기에.
열두 지파로 이루어진 이스라엘민족은 서서히 마감의 때를 걷기 시작한다. 요셉지파를 지도자로 했던 시대, 모세도 죽고 여호수아도 죽는다. 조용했던 유다지파가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면서 언약의 흐름은 더 세게 요동친다. 처음 가나안 땅 정복을 앞두고 정탐했던 열두 명의 정탐꾼들 중에서 오직 여분네의 아들 갈렙만 여호와께 순종했다. 그 갈렙과 여호수아만 그 땅에 들어갈 것이고 그때의 이스라엘 백성들 다 죽고 이스라엘 자손들이 들어가게 된다. 그 갈렙이 유다지파였다. 제일 먼저 헤브론이 있는 땅을 분배받게 된다. 헤브론은 아브라함의 가족묘지가 있는 막벨라 굴이 있는 곳이다. 에브라임과 므낫세는 요셉의 손자들이다. 에브라임 지파였던 여호수아는 에브라임 지파가 있는 땅, 세겜 땅에 애굽에서 가지고 온 요셉의 뼈를 묻는다. 요셉과 유다지파가 투톱으로 쌍벽을 이루었지만 언약의 흐름은 유다지파로 향하고 있었다. 유다지파에서 다윗 왕이 나온다. 그런데 다윗의 족보를 보니 족보가 없다. 기생라합과 모압여인 룻이 끼어있기 때문이다.
여호수아가 죽으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당부하고 유언하는 것이 다른 신들, 이방민족의 신들을 섬기지 말라는 것이었다. 이스라엘 백성은 절대로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라고 대답했지만, 이미 처음부터 이스라엘은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자들이었다. 여호수아는 자기는 죽지만 여기서 끝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 약속의 땅을 다 정복했다고 해서, 그 땅에 산다고 해서 끝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아브라함에게 한 복의 실체는 땅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언약 안에 있는 것이라는 것을 말이다. 율법은 언약의 보조적인 위치에 있었다. 율법이 있어야 저주를 생산해내고 복을 생산해낸다. 때가 되매 언약은 율법을 종결시키고 언약 완성자인 예수님에게로 만물을 통일시켜버리셨다. 언약만이 살아있다. 그것만 살아있다면 다 죽은 것이다. 죽어줘야 실타래 풀리듯 이스라엘 역사가 풀린다. 너나 나나 똑같은 땅에서 살면서 나는 왜 저주고 너는 왜 복인가? 또 나는 왜 복이고 너는 왜 저주인가? 모른다. 설명할 길이 없다. 주님이 주님을 위해서 하신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축복산 그리심산에 있으나 저주산 에발산에 있으나 상관이 없다. 하늘과 땅의 연결고리로 언약만 살아있음을.
기생라합이나 룻이나 이방여인이다. 그들은 기브온 족속처럼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여호와의 이름에 간담이 녹았기 때문에 자기를 위한 이방신을 버렸다. 그들에게는 율법이 없다. 율법이 없음에도, 율법이 없는 이방여인을 통해서 왕이 나왔다는 것은 율법이 인격으로 구체화되는 것이다. 그래서 다윗은 왕이지만 제사장으로서 아라우나 타작마당에서 제사를 드린 것이다. 유다지파지만 초월적인 유다지파로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르는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다. 언약의 완성으로 오신 분, 예수님이 찾아오셨다. 모든 것을 재규정하신다. 눈에 보이는 것은 나 아닌 남이고, 계속해서 달라고 하고 받아 챙겨야만 하는 성신의 시대는 끝났다. 같은 차원에서는 변화를 설명하지 못하는 차이가 지고 차이가 나는 현장, 성령의 시대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땅이 좋다. 그 땅에서 안정을 취하고 계획을 세우고 가정을 꾸린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복의 실체는 약속의 땅이 아니라 예수님이셨다. 아브라함의 믿음도 흔들려 비언약의 자손 이스마엘을 낳았지만,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던 아브라함의 믿음은 주님의 믿음이었다.
율법 없는 이방인이나 율법이 있으나 율법을 지킬 수 없는 이스라엘 백성이나 전부 다 저주받은 자 되게 하고 은혜입지 못하게 하고 진멸의 대상이었을 뿐이다. “그들로 저주받은 자 되게 하여 은혜를 입지 못하게 하시고 진멸하려 하심이었더라”(수11:20) 살려고 하는 자들에게 살지 말라고 하신다. 가려고 하는 자들에게 오지 말라고 하신다. “언약의 피”때문이다. 주사위는 던져졌다. 예언까지 했지만 저주받은 발람처럼 죽을 것인가? 아니면 살 구멍을 만들어놓고 그 구멍으로 들어가서 죽을 것인가? 밥 안 먹어도 된다. 사람이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요 말씀으로 산다고 하셨다. 내 삶 따로 챙기면서 지시받는 주님의 지배가 아니라 내 삶이 아예 없는 주님의 소유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땅은 있었다. 그러나 없는 땅이다.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하나님의 미리 정하신 언약을 사백 삼십 년 후에 생긴 율법이 없이 하지 못하여 그 약속을 헛되게 하지 못하리라”(갈3:17)
주님은 나를 보아도 나는 주님을 모릅니다.
주님은 나를 알아도 나는 주님을 기억을 못합니다.
사랑이 지나가면.....,
댓글-이근호
“하늘마저도 땅으로 끌어내려 수평적인 요소로 만들어버리는 것이 인간이다. ”
“결코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잘 믿었던 것이 아니다. 겉멋만 왕창 들어서 있었다.”
인간은 진리조차 오락으로 취급한다. 그것은 이미 누구(악마)의 손을 넘어갔기 때문이다. 따라서 주님은 성도로 하여금 충분히 이 오락(교회생활)을 목격하게 하시고 경험케 하신다. 그리고 도저히 납득될 수 없는 말씀을 하신다. “죽어도 산다. 나를 위해 이제 죽을 준비됐지?”
세상쪽에서 강력하게 대항한다. “거짓말이다. 믿지 말라!”
주님은 말씀하신다. “그래 거짓말이다. 하지만 이 세상 안에서 유일하게 믿을 수 있는 것은 이 거짓말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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