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아니었다. 나는. 내가 살아온 날들을 전면 부정해버리는 이 말씀에 천만다행이라는 큰 한숨을 내뱉는다. 모든 것에 내가 있기를 바라고 중심에 서기를 바랐다. 그러나 모든 일에 나는 아니었다. 나는.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고 만날 때가 있고 헤어질 때가 있고 사랑할 때가 있고 미워할 때가 있을 때, 나는 아니었다. 나는. 그 모든 순간, 그 모든 때, 그 모든 타이밍에 주님만이 홀로 계셨다. 주님만이 주인공이셨다. 늘 내가 주인공이 되고 싶어서 안달이었는데, 인간을 주인공으로 내세우는 막장드라마의 타이밍은 어쩜 그렇게도 기가 막히게 잘 맞아떨어지는지. 그런데 그 타이밍이야말로 인간의, 인간을 위한, 인간에 의한 가짜 타이밍이었다. 주님의, 주님을 위한, 주님에 의한 것이어야 진짜 타이밍이라는 것을, 두 타이밍으로 말미암아 난장판이 되고 엉망진창이 될 때야 알게 된다.
그래서 모든 것이 타이밍이라고 할 때, 에스더에서 보여준 그 타이밍 앞에 우리가 내세울 것은 하나도 없다. 주님의 타이밍은 우리의 사적인 복수심과 욕심을 이루기 위한 타이밍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맨날 계획하고 무조건 기대하고 무조건 원하고 무조건 성사되어야만 한다는 이 공리적인 심지에 불을 붙여줄 타이밍을 조작하기에 그렇다. 우리는 하만과 세레스 편에 서야 된다. 하만과 세레스의 타이밍에 맞춰야 한다. 그래서 조작된 타이밍과 우연히 일어난 타이밍 사이에 피 터지는 싸움이 일어나야 한다. 그래야만 보이지 않던 주님의 본심과 악마의 본심이 들통 나는 것이다.
시냇물이 졸졸졸 아무 데로나 그냥 흐르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시냇물은 골을 따라 흘렀다. 보이지 않는 골을 따라 시냇물이 흐르다 보면 어느새 다다른 곳이 있다. 천국이다. 겨울수련회를 보내면 여름수련회가 온다. 그 사이에 끼인 지역강의들, 그리고 수요일, 주일... 이 모든 것들이 반복적이지만, 이미 시간의 종결 속에서 이루어지는 반복이기에 반복이지만 반복이 아닌 것이다. 어차피 기후변화로 봄가을이 희미해졌기에 봄가을을 지나쳐 달릴 때, 계절의 시간 속에서 뿜어내고 주어지는 변화는 only, 오직 단 하나의 주체만을 위한 것으로 점철되어 진다. 그렇게 겨울이 종착역이 아니듯 여름 또한 종착역이 아니다. 오로지 주님의 십자가만이 종착역이다.
만남은 헤어짐을 전제로 한다는 것을, 태어남은 죽음을 전제로 한다는 것을 이 세상도 안다. 알지만, 알지만 모른다. 무엇을 위한 변화인지를 알 수가 없다. 하나하나 떠나보낼 때 내가 떠나보내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때가 떠나보내는 것이다. 어차피 너도 떠나야할 인생임을 알라고. 어쨌든 나는 타이밍도, 때도 만들어내지 못한다. “나는 아니었어! 내가 하는 게 아니었어! 주님이 하셨어!” 이 홀가분함을 어찌 말로 표현할 수 있으랴! 이 고백이야말로 기적이다. “감사합니다.”라는 것으로는 다 표현할 수 없지만 감사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수련회 참석하는 것도, 수련회에 참석 안 하는 것도, 수련회에 참석 못하게 하는 것도, 모든 것이 주님의 타이밍이었다.
죄는 반복되는 것이 아니라 채굴된다. 같은 죄를 반복하는 것이 아니었다. 주님은 탄광에서 석탄 캐내듯이 우리 안에서, 우리의 환경에서, 우리의 상황 속에서 무한히도 죄를 캐낸다. 매일같이 새로운 죄가 캐냄 당하고 주님의 용서하심은 그 모든 것을 덮는다. 그 사랑의 깊이와 넓이와 높이와 길이가 어떠함을 아는 일에 있어서 영원부터 영원까지다. 언약을 위한 나라, 언약을 위한 인간, 언약을 위한 땅, 언약을 위하여 이 세계는 끝까지 악마의 속셈을, 그리고 우리는 그 속셈 안에서 놀아나는 죄인임을 유지시켜줘야 한다. 악마와 한통속이 되었다는 것을 온 몸과 마음을 다하여 보여주어야 한다. 주님은 이 일을 시키심에 있어서 중도포기하지 않으신다.
“지옥 왕 미노스가 미로를 만든 명장 다이달로스와 그 아들을 외딴 크레타섬에 가두었다. 다이달로스는 탈출하기 위해 묘안을 짜냈다. 새의 깃털을 모아 밀랍으로 붙여서 날개를 만들어 달고 하늘로 날아 탈출하는 것이다. 아버지는 아들 이카루스에게 너무 높이 날지 말라고 충고했다. 태양에 가까워지면 밀랍이 녹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날개가 너무 잘 만들어져서 탈출하는데 멋지게 성공하지만 비행에 취한 이카루스는 너무 높이 날아서 해에 가까이 가는 바람에 밀랍이 녹으면서 추락해 죽고 만다.”
다른 화가들은 이카루스의 비행이나 추락을 그릴 때, 날개를 달고 하늘을 날고 하늘에서 추락하는 장면을 직접 그렸지만 벨기에 화가 브뢰헬은 이카루스도 다이달로스도 직접 그리지 않고 추락한 뒤의 모습만을 그려서 더욱 그 이야기를 드라마틱하게 만들고 있다. 추락하는지를, 추락했는지를 모르게 그린 그림이다. 추락하고 있어도 추락하는 줄 모르게 만든 것이 지옥의 묘미다. 지옥을 지옥답게 만들기 위한 하나님의 작전을 악마는 배신 때리지 않고 열심히 일하고 있는 것이다. 지옥의 날개를 달고 지옥으로 추락하고 있어도 그 자체를 모른다는 것이 살맛나는 이 세상이고, 이 세상에서 사는 지구인들이다. 추락하는 것에는 분명 날개가 있었다.
인간은 추락해야 마땅하다. 그런데 그 추락 속에서 덜컹하고 추락을 받쳐주는 성전이 등장한다. 인간추락의 날개, 역사가 끌고 온 성전은 예루살렘성전이었다. 모든 민족 위에 독특한 민족으로 나타난 이스라엘민족의 정체성은 성전 있고 없고의 차별화에 있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그 성전을 소유해버림으로 말미암아 멸망당해야만 하는 근거를 마련했다. 성전은 소유대상이 아니었다. 성전이 세워졌던 약속의 땅도 소유대상이 아니었다. 유대인이라는 민족성도 소유대상이 아니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뜻과 인간의 뜻이 합치될 수 없음을 보여주는 증거로 이스라엘을 멸망시킨다. 멸망시키고 툭툭 손 터시는 것이 아니라 이방나라를 통해서 일하신다. 결국 이스라엘이나 이방나라나 하등 다를 게 없다는 것을 드러내는 표징으로서 예루살렘 성전을 불태워버리고 재건된 헤롯성전도 역사가 흘러 ‘때’로 변할 때 십자가로 완전히 끝장을 낸다. 성전역사에 종지부를 찍는다.
하나님의 뜻과 인간의 뜻이 일치될 수 없기에 택해놓고 멸망시킨다는 것은, 아니 이건 정말로 어불성설이고 얼토당토않다. 뭔가 잘못되었다. ‘뜻’이 뭔지 뜻 자체를 모르는데? ‘하나님의 뜻’, ‘인간의 뜻’ 이 사이의 갭은 다이달로스의 미로고 추락이다. 이미 내가 여기 존재한다는 것부터 시작하고 있으니까, 그 사이는 아무리 해도 해도 메워질 수 없는 허무의 강이었고 가도 가도 건너갈 수 없는 절망의 다리었다. 피조물이 창조주에 대한 반발심으로, 미움으로 가득 차오르도록 개시된 하나님의 뜻은 인간의 뜻대로 에덴동산을 거닐게 했다. 동산 중앙에 생명나무와 선악과나무를 턱하니 심어놓고서 동산에 있는 나무의 실과는 임의로 먹되 동산 중앙에 있는 실과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고 하신다. 왜요? 하나님의 뜻이다. 왜 하나님의 뜻과 인간의 뜻이 합치될 수 없는지, 처음부터 그랬다. 처음부터. 땅의 창조목적은 성전을 땅 중심부에 세우기 위함이었으니까. 인간의 뜻은 건물이라는 성전에 있고 하나님의 뜻은 건물이 아닌 진짜 성전 되시는 주님이 땅의 중심에 계심을 나타내시기 위함이었으니까. 또 그것은, 이스라엘을 택하시고 성전을 짓게 하신 것은 성전 없는, 신전이 있는 이방나라와는 차원이 다른 예외 민족을 내세워 오로지 힘만을 원하는 남성성의 세계에 원래부터 힘이 없어야만 하는 여성성의 속성이 면면히 흐르는 언약백성을 위해서 일하셨다는 것을 인식시키기 위함이었으니까.
하나님의 뜻대로 악마의 유혹을 받은 인간은 땅을 몸을 위한 터전으로 삼았다. 땅의 유구한 역사에 사람은 나타났다 사라지고 또 나타났다 사라진다. 땅과 결부된 사람이 곧 국가라는 존속을 만들어 내고, 누가 주지 않았어도 힘 센 자가 권세자가 되고, 누가 시키지 않았어도 약한 자는 그 권세 앞에 종속되고 예속되어서 살 수밖에 없다. 내 몸밖엔 생각할 수 없는 인간에게는 그저 밥이나 먹여주고 재워주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는, 악마적인 근성이 심겨져있으니까. 법의 예외자인 최고 통치자 앞에서, 그게 대통령이든 왕이든 민주주의든 전제군주주의든 상관이 없다. 파헤쳐보면 폭력을 법으로 위장해버리고 거기서 예외자로 법을 명령하지만 그 법에 저촉되지 않은 초법자인 일자一者앞에 다수는 굴복해서 살 뿐이다. 내 안에서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복수심을 채워줄 수만 있다면, 복수를 대신 행사해줄 수만 있다면 충실한 개가 되어도 마다하지 않는다.
추락해도 상관없는데, 추락을 멈추지 않고 내버려두어도 괜찮은데, 주님은 땅에 있는 보이는 성전 말고(성전형 성전), 눈에 보이지도 않고 형체도 없고 땅을 딛지 않고 날아다니는 성전(비-성전형 성전)을 만들기 위해서 추락을 막으셨다. 만드시는 방법은 안정된 생활을 흔들어버리는 혼돈과 우연이었다. 혼돈과 우연으로 때가 채워질 때, 다 저주하고 다 침 뱉고 다 죽이는데 동조하고, 다 악마의 본성을 유감없이 발휘하고자 하는 일에 가담되도록 더욱 더 혼돈으로 몰고 가셨다. 그렇게 예수님은 십자가 죽으심으로 예수님 자신이 성전의 실체됨을 완성하시는 것이다. 이 일에 악마는 성전의 기초가 되어야 한다. 불신자의 세계가 조력자가 되어야 한다. 그래야 성전형 성전으로 말미암아 성전의 실체가 죽고, 성전의 실체가 죽음으로 말미암아 비-성전형 성전이 생겨나는 것이다. 악마나 이스라엘이나 이방나라나 모두가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장본인들인 것이다.
여자는 무엇으로 사는가? 욕망으로 산다. 그 욕망은 흔들리는 갈대와 같다. 무조건 흔들리고, 흔들리고, 흔들리는 마음을 억누르지 못하고 흔들려야만 속이 풀리는 여자의 마음은 남자도 모르고, 여자도 모르고, 자신도 모른다. 주님만 아신다. 그래서 여자를 사용한 작업을 수행하심으로, 자만심으로 똘똘 뭉친 건방지기 짝이 없는 남자의 세계를 꺾어버리신다. 가라하면 가고 오라하면 와야 될 왕의 명령에 첫 번째 왕비 와스디는 “나 안가!”라고 대든다. 이제 그녀에게 마땅히 돌아올 것은 폭력뿐이다. 내침 당함뿐이다. 이 일이 계획적으로 일어난 일이었겠는가? 빈자리를 만들고, 공백으로 되돌리기 위해 구멍을 내는 주님의 타이밍의 배치였다. 에스더는 그 자리에 들어가는 것이다.
그러니 에스더의 예쁨이, 아하수에로 왕이 나라의 절반을 주겠다고 할 정도로 에스더의 심히 사랑스러움이 객관적이 아니라 주관적일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에스더가 한 것이 있다면 죽으면 죽으리라고 벌벌 떨면서 왕의 믿음을 시험하고 측정하는 일과 금식을 한 것밖에는 없지만, 이렇게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이 제비 뽑혀 죽었다가 그 제비 뽑힘으로 다시 살아나는 기쁨의 축제를 열도록 하신,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주님을 위한 빈자리의 여자였다. 공백의 여자였다. 구멍 난 여자였다. 할 말 없는 여자였다. 더 이상 나를 위해서 살지 못하는, 예수님의 죽음을 미리 앞서 보여준 여자였다. 한낱 유대인인 여자가 미모 때문에 바사나라의 왕후가 되어 자기 민족을 구한다는 에스더이야기로 전락하고 말 것이지만, 성령은 에스더를 미리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을 보여주는 여성성으로 만드셨다. 그래서 에스더는 여전사로 전투를 하는 것이 아니다. 용사 잔 다르크처럼 조국 프랑스를 구하기 위해 신의 계시가 주어진 것이 아니었다. 남성성의 세계에 초를 치는 일만 하는 여성성의 주님의 세계에 소속되어 있는 것이다.
바사나라에 포로 잡혀간 유대인들은 말 그대로 이주민에 불과하다. 그래서 바사나라에는 유대인이 없다. 바사인으로서 살고 있는 것이다. 유대인 에스더가 왕비가 되었을 때, 사촌 오빠 모르드개는 에스더에게 굳이 유대인이라고 이야기할 필요가 없다고 한다. 그것은 바사나라의 법을 개무시 하겠다는 것이다. 너희가 살아가는 이 닫힌 현실에 말려들지 않겠다는 뜻이다. 모르드개나 에스더는 바사나라에서 이미 빠져나간 자들로 부름 받았다. 주님은 일단 에스더를 빈자리에 앉히는 왕비가 되게 한다. 그 후에 주님은 언약을 위해서 움직이기 시작한다.
이제 주님은 본격적으로 움직인다. 따라서 악마도 본격적으로 움직인다. 주님의 움직임은 모르드개를 통해서 나타나고 악마의 움직임은 하만을 통해서 나타난다. 아하수에로 왕은 하만의 지위를 높여 모든 대신들 위에 두니, 왕의 모든 신복들이 하만에게 꿇고 절을 한다. 그런데 모르드개는 꿇지도 않고 절도 하지 않는다. 그리고 유대인이라고까지 까발린다. 왕의 신복들은 이 일을 하만에게 고한다. 하만은 심히 노하여 모르드개만 죽는 것은 경하다 해서 모르드개 민족 유다인을 다 진멸하라고 명을 내린다. 그날을 제비뽑았는데, 곧 12월이 된다. 하만은 아하수에로 왕에게 왕의 법을 지키지 아니하는 다른 민족의 법이 달라도 너무 달라 왕에게 무익하니 진멸하는 조서를 내려달라고 한다. 왕은 반지를 빼서 하만에게 끼워준다. 그날이, 그때가 도래했다. 12월 13일에 왕의 이름으로 유다인 남녀노소를 죽이고 도륙하고 진멸하고 재산을 탈취하라고 조서를 쓴 후 왕의 반지로 인을 쳤다. 안정과 혼돈의 싸움으로 달빛은 핏빛으로 변한다. “왕과 하만은 먹고 마시되 수산성은 어지럽더라”(에3:15)
모르드개는 이 일을 알고 옷을 찢고 굵은 베를 입으며 성중에 나가서 대성통곡한다. 모르드개는 에스더를 희생물로서, 아하수에로 왕만이 예외자인데 또 다른 예외자로서 등장시킨다. 에스더의 등장은 현실이라고 여기는 전부를 가상현실로 노출시키는 것이다. 이미 빠져나갔기에 아는 것이다. 하만의 신은, 존재하는 신이고 신의 대행자로서 인간에게 권력을 주는 신이다. 모르드개의 신은, 신은 존재하지 않으나 나타나는 신이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이 대칭성이다. 주 안과 주 밖, 언약과 비-언약, 아담계열과 새 아담계열, 이 대칭성으로 촘촘한 그물망은 짜여 지고 얽히고설킬수록 구멍은 더 많아진다. 구멍 난 육체는 요구를 하고 요구는 만족스럽지 않으니까 욕망이 생긴다. 그 욕망은 다 채워질 수 없어서 참을 수밖에 없다. 참고 살자니 그 빈틈에 환상이 떠오른다. 그 환상은 허무가 되고 허무는 숨 막히는 세계가 된다. 곧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다.
지금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인 이 현실이 아무리 가상현실이라고 해도 어떤 맞닥뜨림이 없이는 달리 볼 수 있는 안목이 열리지 않는다. 악마와의 만남이 성사되지 않으면, 사람은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요 말씀으로 산다는 것을 몸소 앞서서 보여주신 예수님을 만날 길은 없다. 40일을 금식한 후에 예수님이 만난 악마와의 만남이 재현되지 않는 이상에는 거울에 비친 움직이는 내 모습, 보고 듣고 말하는 이 현실만이 전부인 것이다. 거울을 깨고 거울 속으로 들어갈 방법은 없다. 깰 수는 있다. 들어갈 수는 없다. 막혀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점차 신의 세계로 가까이 갈 수 있다고 믿는다. 이 하만의 세계는 가무한의 세계일뿐이다. 아무리 헤아리고 헤아려도, 셈하고 셈해도 결국은 다시 숫자로 끝난다. 유한에서 무한으로 가는 것 같지만, 유한에서 시작해서 유한으로 끝나는 가짜 무한인 것이다. 무한이 아니면서도 무한으로 행세했던 하만은 유대인마저도 자기 손아귀의 세력에 등록된 자들로 보았다. 다른 곳에 등록된 자들인 것을 몰랐다.
그런데 유한으로는 근접할 수 없는 단절되어 있는 실무한의 세계, 진짜 무한이신 주님의 헤아림은 아무리 숫자가 많아도 하나의 단일집단, 금식의 집단이 된다. 개인구원이 아니라 집단구원이다. 언약의 최종성, 십자가 복음은 옛 아담의 계열인지 새 아담 예수그리스도의 계열인지, 이 두 가지로 밖에는 나타나지 않는다. 바사나라에 포로 잡힌 유대인과 죽음 속에서 생겨나는 새로운 유대인이다. 공중권세 잡은 악마의 세력에서 빠져나올 수 없는 인간들은 어차피 어디 가서 사나 육에 불과하다. 자기역사를 쓰는 자기만이 생생하게 살아있는 것이다. 그러니 에스더를 통해서 예수그리스도를 만날 수 없는 이유는 살아있는 내가 자기만의 역사적 인식을 계속해서 고집하기 때문이다. 역사는 끝났는데 역사가 안 끝났다고 우긴다. 만약에 성령으로 말미암아 십자가 지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자가 있다면 자기 역사는 끝나고 십자가 반복 속에서 소용돌이 치고 있는 자다.
이 세상은 십자가라는 블랙홀에 다 빨려 들어간다. 블랙홀이 주변에 있는 모든 것들을 당기는 힘으로 인해서 그냥 그 속으로 떠밀려서 빨려 들어가는 것이다. 떠밀려갈 때 주위를 돌아보면서 정신을 차리고 떠밀려가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쓸 겨를이 없다. 속수무책이다. 그 누가 치매에 걸리고 싶어서 치매에 걸리겠는가? 수련회에서 같은 방을 쓴 분들과 치매이야기를 많이 나눴다. 치매의 공포는, 오전에 아들과 함께 차를 타고 가다가 오후에 아들에게 저 아저씨는 누구냐고 물어보는 것에 있다. 공포는 말하면서 들이닥치지 않는다. 순식간에 들이닥치기에 말 그대로 공포다. 어찌 보면 치매는 한 순간에 날아오는, 한방에 훅하고 치고 들어오는 성령의 바람과도 같다. 지금껏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았는지 다 잊어버린다. 그리고 새로운 기억으로 되살아난다. 알지 못했던 말을 하게 된다. 알지도 못했던 관계가 맺어진다. 이렇게 생각하니 치매는 무서운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치매 걸려서 예수님을 모른다 해도 상관없지 않다고 하지 않았던가?
이 세상의 주인공은 예수님이시니 엑스트라는 치매에 걸려도 상관없다. 치매 걸린 역을 맡아서 연기하면 그만인 것을. 이 유한적인 세계에 무한의 세계가 예외적인 주체로 등장하셨다는 것만으로도 이미 치매에 걸린 공포 이상으로 찾아온 것이다. 그럼에도 주님이 이 세상을 방문하셨다는 것에는, 오셔서 죄인들의 손아귀로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사실에는 두렵고 떨림이 없다. 죽을까봐서, 늙어서 치매에 걸릴까봐서 두렵고 떨리는 내 몸만이 현실이다. 더 이상은 아예 기대할 것이 없이 차라리 주님은 주님 고유권한으로 인 맞을 자들을 셈하고 헤아려 버리신다. 더 이상 두렵고 떨림으로 살아가지 않고, 법의 정죄로 인해 무차별적인 폭력에 시달리지 않는, 사랑의 관계에 진입 시기키 위해서다. 예외적인 주체로 오신 주님에게 인 매김 당한 자들은 주님에게로 몰리게 되어 있다. 인침 받았다는 셈을 당하고 헤아림을 당한 자들의 모임, 그리스도의 몸이다. 율법이 침범할 수 없는 사랑으로 완성되었다. “그러므로 율법은 사랑의 완성이니라”(롬13:10)
악이 관영해야 한다. 악이. 악이 무르익어야 한다. 악이. 하만과 세레스의 아이디어, 모르드개를 달아야 될 나무가 완공되어야 한다. 아하수에로 왕이 궁중일기를 읽어서 모르드개가 역적들로부터 왕을 구했다는 사실을 알고 신하를 부를 때 마침 하만이 거기에 있어야만 한다. 그래서 왕이 자기를 총애해서 백성들에게 높임을 받게 하려고 한다는 오해를 해야만 한다. 에스더는 희생물로 등장하여 잔치를 배설해야만 한다. 악이 날개 치며 훨훨 날아오를 때까지 에스더는 그 어떤 말도 꺼내지 말고 설치지 말고 나대지 말아야 한다. 법에 저촉 받지 않는 예외자 아하수에로 왕이, 예외자인 자신의 머리 꼭대기 위에 다른 예외자가 여자일 줄을 몰라야만 한다. 그래야만 사랑스러워 미칠 수가 있다. 하지만 사랑에 미쳤다 할지라도 하만이 꾸민 모든 일을 알게 되었을 때 왕의 욕심은 둘 다를 놓치기 싫어서 타협할지 모른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직격탄을 날려야 한다. 하만이 왕후 에스더에게 살려달라고 애걸복걸하는 그 모습이 강간의 모습으로 비쳐져야만 한다. 주님의 타이밍은 억울함을 만들어내니, 주님의 타이밍에 놀아나는 악마나 악마의 종들은 그저 억울하고 억울함뿐이다. 억울한 자들이 모인 곳, 지옥이다.
참으로 낯선 신, 낯선 하나님이시다. 하지도 않은 일을 했다고 덤터기 씌운다. 강간하지도 않았는데 강간했다고 덤터기 씌운다. 어디 집을 떠나서 여행도 다녀본 적도 없고 그저 농사나 짓고 감자나 캐고 성실하게 일하고 법 없이도 착하게 살아왔는데 지옥가라고 한다. 인간적으로 볼 때는 천국가야 마땅한데 지옥가라고 한다. 지옥과 천국을 보내는 신을 평가할 수 있는 대상으로 여긴다는 것은 하만의 신이다. 하만의 기준에서 나온 신이다. 나의 정당성과 옳음을 인정해주는 신이다. 그러나 모르드개의 하나님은 낯선 신이다. 유대인을 다 진멸하라고 하는 위기에 처하게 하는 신이다. 인간의 어떤 것도 인정해주지 않는 신이다. 하물며 사랑하는 자기 아들을 죽여 버리기까지 하신다. 또 그 아들은 아버지의 뜻대로 맥없이 죽어버린다. 도저히 믿으래야 믿을 수 없다. 이미 선악체계에 갇힌 인간에게 이런 폭력적인 하나님은 매치되지 않는다. 믿을 수 없는 하나님이다. 그래서 복음이라고 하는 것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알기는 알아도 알지 못하는 것이다. 오직 성령 받은 사람 외에는.
아하수에로 왕의 반지였던 것이 하만에게 끼워졌다. 그 하만의 반지가 이제 모르드개에게 끼워진다. 우발적이고 돌출이고 돌발적인 상황이다. 모르드개가 반지를 원하지 않았다. 하나님은 하만의 신으로 하나가 되기 위해 정의를 외치는 이 세상을 이렇게 깨부수기 위해서 세상이 알지 못하는 낯선 방식으로 일하시는 것이다. 하만의 신에 의해서 제비 뽑힌 날, 부림의 날이 하만의 제삿날이 되었다. 유대인을 죽이기 위한 날이 유대인의 축제의 날이 되었다. 죽었는데 다시 살게 된 반전인생이 되었다. 에스더도 부르지 않은 법 앞으로 죽은 몸으로 나아갔고, 그리고 이미 죽은 몸이요, 이미 죽은 왕비다. 왜냐하면 진짜 하나님만이 예외자로서 예외의 법이 늘 적용이 되니까. 죽음을 통과하지 않고서는 절대로 천국백성이 될 수 없다. 주님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이미 나는 죽은 자가 되는, 그 사랑을 원하지 않았는데 그 사랑이 왔다. 선물이다.
에스더는 예쁜 여자에서 독한 여자가 되었고 독한 여자에서 잔인한 여자가 되었다. 하만과 하만의 가족들을 나무에 매달고 말았으니. 그리고 유대인의 대적자들을 죽이고, 죽이고 또 죽인다. 죽였지만 재산에는 손을 대지 않았다. 죽일 때에 복수심으로 죽인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자기들이 죽어야 될 대신에 죽는 것임을 알았다. 죽는 자나 죽이는 자나 다 같이 절망할 수밖에 없었다. 절망의 심정으로 죽이는 것이다. 유대인들은 복수할 기회조차 없을 줄 알고 절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진즉에 힘없이 무능하게 죽을 수밖에 없었는데 이렇게 살게 된 것은 하나님의 도우심의 덕분이라고 부림절을 지킨다. 근데 아이러니하게도 이 부림절을 지키는 그들에 의해서 예수님은 살해당했다. 왜 그랬을까? 혼돈을 안정으로 바꾸고 싶은 악마의 욕망을 물려받았으니, 내 자식과 내 가정과 내 혈육과 내 피땀눈물이 섞인 내 돈과 내 마음에서 나오는 말이 곧 법이고 최고고 전부기 때문이다. 이것만이 현실이다. 이것을 누가 가상현실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오직 희생물 되신 예수님만이 가상현실이라고 말할 수 있다. 악마는 뿔 달리고 연두색 얼굴을 가진 괴물이 아니다. 비-언약적이고 비-복음적인 모든 것이 악마적이다. 그래서 악마나 인간이 다 같이 한통속이 될 때 평안하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기적처럼 십자가 앞에서 절망하는 자이기에, 무능한 자이기에 늘 감사로 고백하는 자가 나올 때 이 세상의 평안은 깨진다.
모든 것이 타이밍이었고 타이밍이었다. 악마도 타이밍이었고 주님도 타이밍이었다. 하지만 주님은 악마의 타이밍을 주님의 타이밍으로 피벗pivot시키는 승리의 타이밍으로 만드셨다. 주님이 창조하신 시간은 방향성을 가지고 흘렀다. 성전재건에 힘쓴 에스라 느헤미야의 뒤에 에스더를 그 자리에 배치해놓으셨다. 건물인 성전은 헐어버리라고 지어져야만 했기에. 포로 된 자들이 귀환하여 성전을 지었다 한들, 약속의 땅으로 돌아가지 않은 상태에서도 이미 죽음사건을 경험하게 되었다면 공간은 무방한 것이다. 훗날 화려하게 건물로 지어진 성전에서는 활개 치는 것은 악마의 하수인들이었다. 성전 안에서 지켜지는 모든 절기에는 희생이 아닌 권력의 손길이 판을 쳤다. 성전이라는 공간을 붙잡고 욕망을 채우고자 여전히 공간의 유효성을 주장하는 것이다. 정작 다윗언약의 완성으로 성전이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성전의 실체되시는 예수님의 죽으심이었는데. 그러니 에스더 시대에 이미 죽음을 맛보았다면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만에 일으키리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그냥 무모하게 내뱉은 말씀이 아니었음을 알았겠지마는, 성령이 오지 않고서는 감당할 수 없는 말씀이었을 뿐이다.
주님은 질서정연하게 일하지 않으셨다. 혼돈으로 일하셨다. 법에 의해서 다스려지고 유지되는 왕 체제의 질서를 사랑이라는 무질서로 피벗pivot시키기 위해 전체인 왕 앞에 부분인 왕비를 새로운 전체로 등장시킨다. 이처럼 보이는 이 세상이라는 전체에 부분이신 주님이 일개 사람으로 오셔서 전체를 장악해버린다. 유한 안에 무한이 들어와 버린다. 이제 언약의 완성에 방해하는 모든 것들은 작살이 난다. 언약을 개입시켜 원초적인 악의 본색을 드러내기 위한 시동을 걸었다. 이 세상에 잠복되어 있는 악마의 실재성이 슬금슬금 기어 나오기 시작했다. 악이 없으면 언약이 출현되지 않는다. 악은 반드시 처벌되어야 마땅하다는 것이 있어줘야 언약 본연의 본질이 생겨나는 것이다. 그 바탕에 이스라엘이 있었다.
바사나라에서 일개 소수민족으로 이주민에 불과했던 유대인의 승리로 말미암아 주기가 발생된다. 주기성이. 반복되는 것을 주기성이라 한다. 과거현재미래로 흘러가는 시간이라는 지평 위에 공중에 드론으로 띄운 것이다. 이 세상의 모든 시간은 이 주기적인 드론 띄운, 절기라는 주기 안에서 시작이 되고 끝이 되는 것이다. 이스라엘 내부에서 주기적으로 발생되는 절기는 주님이 악을 척결하고 악에 대해 기어이 승리했다는 축제다. 드론처럼 띄워진 이 주기를 다시 펼쳐버리면 인류역사가 된다.
사건은 타이밍이라고 했다. 사건이 주기성을 만들고 고정적인 한 점이 된다. 고정적인 한 점, 최종사건이다. 한 점에 모든 것이 다 담긴다. 이 점 안에서는 모든 것이 동시성이다. 동일하게 일어난 일이다. 그것이 바로 천국이다. 십자가로 승리했다. 다 이루었다. 구약에 있던 모든 주기적인 축제일은 십자가 안에서 종결, 다 끝난 것이다. 모든 것이 한 사건, 십자가 사건으로 마감되었기 때문이다. 보편적인 주기성에는 안식일이 있다. 안식일은 언약의 완성이다. 인자가 안식일의 주인이니까. 이스라엘의 운명은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었지만 그러나 이 주기성, 반복된 절기가 십자가로 마감되었다. 여전히 안식일의 주기성을 찾는 그것이 십자가 원수가 되고 대적이 되는 것이다.
지난 날, ‘죽으면 죽으리라’는 에스더의 고백을 인용하면서 금식했다. 마귀를 이기려고 밥을 굶었다. 정말 어이가 없다. 피벗pivot시켜주신 사랑이 없었다면 말 그대로 죽으면 죽으리라가 되었을 것이다. 그런 교인도 있었다. 예수님 따라서 40일 금식하고서는 하나님은 없다고 죽었다 한다. 진짜 금식은 이미 우리는 이 세상의 권세에 눌려서 죽었다는 의미로서의 금식이다. 매일이 금식으로 다가온다. 하나님의 뜻은 죽으라는 것이다. 우리가 죽어도 말씀은 생생하게 살아서 달린다. 우리가 죽어도 생기는 것이 있다.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라는 것이 생긴다. 바사나라에 있었던 에스더나 모르드개나 유대인들에게는 부림절이 생겼다. 우연히 제비 뽑혀 천국 갈 자는 천국으로 가고 지옥 갈 자는 지옥으로 간다.
절기는 시간의 방향성을 갖는다. 그 절기 안에는 악을 악대로 들추어내고, 인간의 힘으로는 악을 이기지 못하고 말씀의 타이밍으로 악을 이기시는 하나님의 조치하심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유월절, 부림절, 안식일... 모든 절기는 주기성으로 모아지고 그 주기성은 십자가사건에 합류되는 것이다. 반복되었던 절기, 절기의 주기성은 십자가로 종결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공간은 포기하고 시간으로 승부를 거셨다. 하나님은 자기의 아들을 오른편의 자리에 앉히기 위한 시간의 본래의 의미를 행사하시는 것이다. 아침이 되고 저녁이 되는, 봄여름가을겨울로 변화하는 시간은, 측정하고 관찰하는 주님의 시간이었다. 언약완성을 위해서, 주님을 위해서 창조한 시간이었다. 이제 그 시간은 십자가로 종결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인간은 자기 몸을 위해서 시간을 사용한다. 그 시간은 좀먹은 시간이다. 아무리 오래 살아도, 아무리 빨리 죽어도 이미 죽은 자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이미 죽은 자에게는 시간은 사건이 된다. 우리 안에 있는 성령이 중요하고 십자가만이 중요하다. 복이다. 모든 것은 다 사소하다.
추락, 예외, 이미 탈출, 헤아림, 희생물, 악마 속으로, 타이밍, 낯선 신, 시간의 종결로 에스더의 수련회 강의는 마쳐졌다. 겨울수련회는 끝났는데... 여운에 사로잡혔다. 밥을 먹어도 먹는 것 같지 않고, 일을 해도 일을 한 것 같지 않고, 내가 무엇을 하는지 모르겠다. 그냥 내몰아가는 대로 내몰린다는 것만 체감할 뿐이다. 나열된 제목을 연결해본다. 에스더 속에 그리스도가 살아서 움직인다. 우리는 “막살고” 주님은 “타이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