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아

목사에게 필요한 평

아빠와 함께 2020. 9. 24. 13:07

목사들의 죄는 자기 자신만은 바르게 설교하고 있다고 하는 자기 방어벽이 쳐져있다는 사실이다. 성령을 받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설교하면서도 성령을 받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설교하는 그것이 죄라는 사실을 터치하지 못하고 있다.



“성령이 오지 않으면요? 저는 어떻게 하죠?”라는 질문이, 그것을 듣는 교인들이 열 명이면 열 명 다에게서 필히 나온다는 것은 기정사실이다. 인간은 성령 받고 싶고, 구원받고 싶고, 죄 씻음 받고 싶은, 자기긍정이 무한대로 나온다. 긍정하고, 긍정하고 또 긍정하고 긍정하는 무한 긍정의 힘, 그것만이 원초적인 본능이다. 성령 받아서 천국가고 싶고 구원받고 싶은 그 욕망이, 의욕이 죄라는 것을 과감하게 목사는 자기 자신에게 그리고 교인들에게 설교해야 한다. 근데 참으로 여지없이 목사 열 명이면 열 명 다에게 물어보면 반드시 이렇게 나온다는 사실이다.



복음적 설교를 하니까 딴 소리하지 말라는 것이다.

십자가를 전하니까 듣고 은혜 받으면 된다는 것이다.

감사하고 고맙게 고백하면 끝이라는 것이다.

성경구절을 들이대며 철저함의 철저함을 더하였으니 말해 무엇 하랴?

그러나 목사들의 그 설교에는 자신을 쳐서 도리어 십자가에 복종케 하는 자기부정이 녹아져 있음을 찾아보기 힘들다.



“성령 받아야 구원받습니다.”

목사는 설교를 여기서 끝내지 말고 반드시 집어넣어야 한다.

“성령 받아야 구원받습니다. 이게 죄입니다.”라는 것을.

여기에서 충돌되어 발생되는 것은 예수님의 피다.



자아긍정이 자아부정으로 변화되는 것은 피가 아니면 안 된다. 성령이 아니면 안 되고, 성령이 아니면 구원받지 못하고, 성령이 아니면 죄 용서를 누리지 못하고, 성령이 아니면 천국갈 수 없다는 것은 맞는 설교다. 성경 그대로의 설교다. 그런데 인간이 이것을 고분고분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 수 있느냐는 것이 문제고 관건이다. 이것을 건드리고 쑤시고 들통나게 해야 한다.



인간은 죄인이 아니라 의인이다. 자기 구원을 위해서라면 피도 만들어내는 괴물이다. 성령도 기기괴괴성형수로 만들어내는 자기에게 미친 자들이다. 그러니 성령이니 구원이니 천국이니 죄 용서니 하는 이 모든 것들은 떡밥이다. 자기를 천상천하유아독존으로 더 견고하게 만들기 위한 떡밥인 셈이다. 예수님 살이 찢기고, 십자가에 매달리고, 물과 피를 다 쏟고, 죽으심이라고 하는 그것은 절대로 인간세상은 받아들일 수 없다. 예수님만이 아버지의 뜻대로 온전히 순종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인간들은 예수님을 믿는다. 성령도 받는다. 천국도 간다. 이것은 마치 좋은 것이라면 물불 안 가리고 다 먹고, 좋은 것이라면 염치불구하고 체면 차리지 않고 다 갖고, 좋은 것이라면 무슨 술수를 써서라도 내 것으로 만들어야만 직성이 풀리는 그 터질 것 같은 마음처럼, 벌떡대고 벌렁거리는 심장처럼 믿는 것이다. 그럼에도 그 열정을 순수라 부른다. 복음을 사모하는 순수한 마음, 복음을 듣는 순수한 귀, 복음을 말하는 순수한 입, 복음에 미친 순수한 자태, 이 순수가 예수님을 죽였다. 자기는 여전히 살 가치가 있고 살만하기에 순수했던 것이다. 거울 앞에 서있는 자기를 절대로 포기할 수 없기에 순수했던 것이다.




“말씀만 하옵소서. 종이 듣겠나이다.” 다 백부장이다. 다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성령 받으라면 받을 것이고 십자가 믿으라면 믿을 것이고 예수 믿고 구원 받으라면 받을 테니, 제발 명령만 내려 달라는 것이다. 100미터 달리기 출발선에 서서 요이땅!! 하는 총소리만 들리기만 한다면 폭풍의 질주를 해서라도 1등하겠다는 그 각오와 다짐과 맹세를, 일명 신앙생활에 필요한 조건요소인 믿음소망사랑에 접목시키는 게 인간이다. 실상 인간이 아니다. 흙으로 돌려보냄이 없이는 좀비다. 어릴 때 찰흙으로 모양을 만들다가 마음대로 안 되면 한데 다 뭉쳐서 원래 볼품없는 흙덩이로 원상 복귀했었던 것처럼, 제 3의 손이 나타나 그냥 가차없이 뭉개버릴, 뭉개질 흙인데도 불구하고 흙으로 보지 않는다. 살아 꿈틀거리고 나대니 인간이겠지. 하지만 인간은 오직 한 분 예수님이시다. 흙이면서 인간이라고 우기지만, 어쨌든 흙을 재료로 사용하셔서 귀한 것을 담는 보배로운 귀한 그릇으로, 천한 것을 담는 질그릇으로 만들 권한이 예수님에게만 있으신 것이다.



내가 원하면 원하는 대로 될 수 있다는 그것이 죄라는 것을 성령이 오지 않으면 모른다. 그것은 성령이 오지 않으면 죄라는 것을 모른다. 성령이 오기를 바라는 것 자체가 죄다. 성령은 누구 좋아라고 와야 하지? 성령은 나 좋아라고 와야 한다. 그것도 나에게 와야 한다. 다른 사람에게 가면 안 된다. 대적과 불신과 반발과 대항하는 심보를 가지고 성령을 받겠다고 설친다. 성령이 오면 내 안에서 튕겨져 나간다는 사실을 알 리가 없다. 아이러니하게도 성령이 온 적이 없으니까. 죽을 때까지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예수님에 대한 살해의지. 죽을 때까지 보글보글 거리며 터졌다가 다시 생겼다가 하는 예수님에 대한 거품감정.



저주받아 마땅하지 않는가? 말로만이 아니라 저주받아야만 마땅한 것이 새록새록 나오니까.

그렇다면 이것을 안다고 해서 성령 받은 것인가? 아니, 십자가 안에, 예수 안에, 그리고 성령 안에 있을 뿐이다.



자기 정당성, 자기 방어벽, 여기에서 한 걸음도 물러설 수 없다는 절망만 맛보게 한다면, 그 설교는 성경대로 사흘 만에 죽으시고 살아나신 예수님과의 만남을 주선하는 소리로 변화되어 울려 퍼질 것이다.



예수님은 죄인을 부르러 왔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다. 목사가 허구한 날, 매주 마다 죄인을 불러봤자 어느 누구 하나 뒤돌아보지 않는다. 죄인이라는 감을 잡지 못하고 있는데, 이름이 ‘나 죄인’이 아니라 ‘나 의인’인데, 불러도 대답이 없는 이름이다. 예수님이 불러야 한다. 목사가 예수님을 대신할 수 없다. 대신 죽으신 분은 예수님이지 목사가 아니다. 만약에 뒤돌아본 자가 있다면 아마도 그건 단 것을 입에 물게 해줬을 것이다. 그런데 어쩌다 독약을 입에 넣어줬는데 뒤돌아본 자가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주님의 부르심의 기적이다. 독약극처방전이 아니면 성령의 설교가 아니다. 해석불가한 목사의 자기방어체제에 그칠 뿐이다. 그 어떤 변명도 통하지 않는다. 논쟁의 여지가 없다. 사랑받아 본적이 없는, 사랑으로 하지 않는 설교는 울리는 꽹과리 소리에 지나지 않는다. 주님의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는다.

 

이근호   

목사는 변명한다. “이 정도라도 설교 해주는 나에게 고마운 줄 아시유. 그렇게 답답하면 네가 하든지…” 누구나 주님으로부터 깨어지는 바로 그 순간이 주님이 직접 그 사람에게 복 주는 순간이고 직접 설교하는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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