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숙경

율법의 관

아빠와 함께 2020. 7. 10. 10:39

title : The Coffin of The Law 율법의 관
preacher : pastor Lee Geunho
text : Philippians 3:4-6
date : July 5, 2020

4.though I myself have reasons for such confidence. If anyone else thinks he has reasons to put confidence in the flesh, I have more: 5.circumcised on the eighth day, of the people of Israel, of the tribe of Benjamin, a Hebrew of Hebrews; in regard to the law, a Pharisee; 6.as for zeal, persecuting the church; as for legalistic righteousness, faultless.


SUMMARY

While loyal to God, the Jews were not thinking about what Jesus had done. It is the apostle Paul's cry that if someone mentions God except for what Jesus has done, it will immediately lead to "church persecution." 하나님에 대해서 충성을 하면서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하신 일에 대해서는 생각하고 있지 않았다. 누군가가 예수님이 해내신 일을 제외하고 하나님을 거론한다면 이것은 곧바로 ‘교회 핍박’으로 이어지게 되어 있다고 하는 것이 사도 바울의 외침이다.

Those who attack the church that God has emerged are those who believe in their physical achievements. This means that believing in Jesus' achievements and trusting one's own flesh can never be combined. 하나님께서 등장시킨 교회를 공격하는 세력은 곧 자신의 육신적 성과를 믿는 자들이다. 이는 곧 예수님의 성과를 믿는 것과 자신의 육체를 신뢰하는 것은 결코 병행 될 수 없다는 말이다.

For those who do not accept Jesus' achievements, their pride is still alive. These are not those who see themselves in front of Jesus, but those who see their achievements in the performance of others. These are those who live in fear, always considering how their achievements to highlight themselves will look in the eyes of others. 예수님의 성과를 받아들이지 아니하는 자들에게는 자신의 자존심이 그대로 살아 있다. 이런 자들은 예수님 앞에서 자신을 비춰보는 자들이 아니라 타인의 성과에다 자신의 성과를 비춰보는 자들이다. 이런 자들은 자신을 부각시키는데 필요한 자신의 성과가 타인들의 눈에 어떻게 보일까를 늘 고려하면서 전전긍긍하며 살아가는 자들이다.

On the other hand, those who accept the results of Jesus are willing to accept that they must suffer the same suffering and humiliation that Jesus suffered on the cross. This is another achievement of Jesus, who suffered from the many hardships and humiliation from creatures in order to do Heavenly Father's will. 반면에 예수님의 성과를 받아들인 자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겪으신 그 고초와 수치를 자신들도 동일하게 겪어야 할 것으로 기꺼이 받아들인다. 이것은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행하기 위해 피조물인 인간들로부터 그 숱한 수모와 고초를 겪으신 예수님이 성취하신 또 하나의 성과이기도 하다.

One of these works of Jesus is the apostle Paul. His life before and after meeting Jesus was so different. Before meeting Jesus, his top priority was to raise his self-esteem. According to his confession, the church persecution he carried out was a natural step for a man of such a view of life. 이 같은 예수님의 성과물 중의 한 사람이 사도 바울이다. 예수님을 만나기 전과 만난 후의 그의 생애는 너무도 달랐다. 예수님 만나기 전의 그에게 있어서 최우선적인 관심사는 자신의 자긍심을 높이는 일이었다. 그의 고백에 따르면 그가 행한 교회핍박은 그와 같은 인생관을 지닌 자의 자연스런 행보였다.

He was the one who knew better than anyone how the various rules of circumcision and law work in raising his self-esteem. He confesses that things like his past deeds are the acts of flesh that can come out when he doesn't know exactly what Jesus is like. 그는 할례와 법률의 여러 가지 규칙이 어떻게 자신의 자존심을 높이는 데 작용하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자신의 과거 행적과 같은 것들이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정확히 모를 때 나올 수 있는 육체적 행위라고 고백한다. 그는 자신의 자긍심을 높이는데 있어서 할례 및 율법의 여러 규정들이 어떤 식으로 작용하는지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자신의 과거 행적과 같은 것들이 바로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제대로 알지 못할 때 나올 수 있는 육신의 행위라고 고백한다.

To sum up his past, confessed by the apostle Paul, it was a struggle to gain the recognition that he was a righteous man by observing the law. Not only does the irresistible unknown fear constantly drive man to act as law-abiding, but the blessing promised to those who obey the law is like a gift certificate, driving man who desires to go heaven and be blessed through observing the law. 사도 바울이 고백한 자신의 과거사를 한마디로 요약하면 그것은 율법을 지킴으로써 자신이 의로운 자라고 하는 인정을 얻어내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불가항력적인 미지의 두려움이 끊임없이 인간을 율법준수 행위로 몰아갈 뿐만 아니라 율법을 준행하는 자에게 약속된 복은 마치 상품권과 같아서 복을 받기를 바라고 천국을 욕망하는 인간을 율법준수 행위로 몰아간다.

Such a world persecuted Jesus. It is the pride of a man who depended on it that observe the law. They understand the law as a means to strengthen their status. Apostle Paul was the child of this law in the past. Man cannot refuse to be tempted to acquire good fortune by law observance. Man is addicted to law-abiding behavior by the devil. 이런 세상이 예수님을 핍박했다. 곧 율법준수는 거기에 의존하는 인간이 내놓을 수 있는 자랑거리였다. 이들은 율법을 자기의 위상을 견고하게 만들어 줄 수단으로 이해한다. 사도바울은 과거에 이러한 율법의 자식이었다. 인간은 율법준수로 말미암은 복의 획득에 대한 유혹을 거부하지 못한다. 인간은 악마에 의하여 율법준수 행위에 중독되어 있다.

The apostle Paul is willing to speak while looking back on his past because he has already lost himself through encountering Jesus. In other words, the "ego" he lost is the "ego" born under the law, and the "ego" he obtained is the "ego(life)" created by the gospel. Paul the Apostle shows throughout his life both why man should be sent to hell and why man is given the eternal life. 사도 바울이 기꺼이 자기 과거사를 회고하듯 말할 수 있는 것은 그는 주님을 만나서 그러한 자기 자신을 이미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즉 그가 잃어버린 ‘나’는 율법에서 아래서 태어난 ‘나’이고, 그가 얻은 ‘나(생명)’는 복음으로 인해 생겨난 ‘나’이다. 사도 바울은 그의 생애를 통해 인간이 지옥으로 보내지는 이유와 인간이 (영)생을 얻게 되는 이유 이 둘 다를 보여준다.

All the saints, as well as the apostles Paul, are those who share Jesus' past through "their lost flesh." It is the history of Jesus, who was persecuted, rejected, humiliated, and finally killed because of man's zeal for the law. The human tenacity to be blessed by clinging on to the law, which is too much for man to bear, persecutes the Lord’s church today, as Paul did in the past. The persecution is not only a persecution coming from outside the church, but also an internal persecution that takes place within the flesh of the saint. 사도 바울뿐 아니라 모든 성도는 이미 ‘잃어버린 그들의 육’을 통해 예수님의 과거를 공유하는 자들이다. 그것은 율법에 대한 열심 때문에 인간에게서 핍박받으시고 거절당하시고 수모를 받으시며 마침내 죽임을 당하신 예수님의 과거사이다. 인간이 감당하기에는 너무도 버거운 율법에 대해 그것을 기어코 지켜서 복을 받겠다는 인간의 집념이 과거의 바울이 그랬던 것처럼 오늘날에도 주님의 교회를 핍박한다. 그 핍박은 교회의 외부에서 오는 핍박일 뿐 아니라 성도의 육신 안에서 일어나는 내부적 핍박이기도 하다.

It is worth noting the case of King Hezekiah in Chapter 38 of Isaiah. King Hezekiah begs God to spare him when he is about to die of disease. Then God says he will extend his life for another 15 years, and as a guarantee, God makes the shadow of the sundial go back 10 degrees. This sign is also an indication of what kind of life Hezekiah will have during his extended 15-year period. That meant his life was going back to the past. 여기서 이사야 35장에 나오는 히스기야왕의 사례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히스기야왕은 자신이 질병으로 죽게 될 즈음에 하나님께 살려달라고 간청을 한다. 그 때 하나님께서 그의 수명을 15년 더 연장해주겠다고 말씀하시는데 이에 대한 보장으로 하나님은 해시계의 그림자가 10도 뒤로 물러가게 하신다. 이 표적은 히스기야가 연장 받은 15년이라는 기간 동안 그가 어떤 삶을 살게 될 것인지를 암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즉 그것은 그의 삶이 과거로 회귀한다는 의미였다.

During that time he made a stark exposure to what the content and character of his life were before it happened. In other words, his past was consistently a life of self-pride in accordance with the law, and it was a life worthy of being cursed. After all, all he did during the fifteen years he had gained by God was to give Judas a reason to be taken prisoner to Babylon, a reason to be cursed. 그는 그 기간 동안 그 일이 있기 이전까지의 그의 삶의 내용과 성격이 과연 어떤 것이었음을 적나라하게 노출시켰다. 즉 그의 과거는 일관되게 율법에 의거한 자기자랑의 삶이었으며, 그것은 저주받아 마땅한 삶이었다. 결국 하나님께 덤으로 얻은 15년 동안에 그가 한 일이란 유다가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야만 하는 이유, 즉 저주받아 마땅한 이유를 제공한 것이 전부였다.

The life in this world granted to the saints is the same as the extended life of 15 years given to King Hezekiah. Those who have already been saved through the gospel show why life under the law during its life should be cursed. This is why the apostle Paul confesses his past. 성도에게 허락된 이 세상에서의 삶도 히스기야왕에게 주어진 연장된 15년의 삶과 마찬가지이다. 이미 복음 안에서 구원받은 자들은 자신의 생애동안 율법에 의거하여 사는 삶이 왜 저주를 받아야 하는지 그 이유를 보여주는 삶이다. 이것이 바로 사도 바울이 자신의 과거사를 고백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In the wine Jesus provided to the master of the banquet at the wedding feast of Cana, no trace of it was originally water was visible to people. This tells us that humans are not those who can see something from the invisible, but those who can only see what they see and want to believe what they see. With such human attributes it becomes clear that our old selves never come up with the kind of faith God wants. Man is just an impossible being before God. 예수님이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연회장에게 제공한 포도주에서는 그것이 본래 물이었다는 그 어떤 자취도 사람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았다. 이것은 인간은 보이지 않는 것에서 무언가를 보볼 수 있는 자들이 아니며 단지 보이는 것만 볼 수 있고, 보이는 것만 믿고자하는 자들이라는 사실을 말해준다. 이와 같은 인간의 속성으로 인해 우리의 옛사람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그런 종류의 믿음을 결코 내놓지 못한다는 것이 분명해진다.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그저 불가능한 존재일 따름이다.

Jesus draws attention of the saints to the prophet(the Baptist John)of the wilderness(Matthew 11:8-9). The prophets are those who receive bitter curses in their bodies, and they are those who live by the word of God without their own possession. These are those who have already escaped the jungle of the law by being killed by the law, knowing human limitations and their own impossibility. Above all, they are those who know that before they were formed, and before any of their actions, there was the Word that made them what they are today. 예수님은 성도의 시선을 광야의 선지자(세례 요한)에게 주목시키신다(마11:8-9). 선지자들은 따가운 저주를 한 몸에 받는 자들이며 그들은 자신의 소유가 없이 하나님의 말씀으로만 사는 자들이다. 이들은 인간의 한계와 자신의 불가능함을 아는 가운데, 이미 율법에 의해 죽임을 당함으로써 율법의 밀림에서 벗어난 자들이다. 무엇보다도 그들은 자신들이 형성되기 전에, 그리고 여하한의 그들의 행위가 나오기 전에 지금의 그들을 그들 되게 한 말씀이 먼저 있었음을 아는 자들이다.

Like an outlaw in any cowboy movie who appears before his enemies with a coffin indicating that he is already dead, the saints are prophets who carry around their own deaths and appear in the world. The Holy Spirit takes out Jesus' cross from the death of the saints, just as the outlaw in the cowboy movie takes out a machine gun from his coffin to kill his enemy. In other words, it is the work of the Holy Spirit to revive repeatedly the cross of Jesus who killed me within us. 자신은 이미 죽었음을 알리는 관을 끌고 자신의 원수들 앞에 등장하는 서부극의 한 무법자처럼, 성도들은 자신들의 죽음을 지고 세상에 등장하는 선지지자들이다. 서부극의 그 무법자가 자기 관 속에서 원수를 죽일 기관총을 꺼내들듯이 성령은 성도의 죽음 속에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꺼내신다. 즉 나를 죽이신 예수님의 십자가를 우리 안에서 반복적으로 되살려내는 것이 성령의 일인 것이다.

 

이근호  

“사도가 되기 전의 사울은 할례와 율법이 어떻게 자신의 자존심을 높이는 데 작용하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사도는 자신의 ‘과거’를 말하는 사람이다. “나는 나를 포기하지 못한 자입니다. 그래서 저는 하나님을 믿는다는 그 믿음으로 예수님을 핍박했습니다. 내 믿음이 예수님을 핍박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습니다.”

이러한 고백에 같이 동참하는 자들이 성령 받은 성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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