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itle : Life Like A Dog 개 같은 인생
preacher : pastor Lee Geunho
text : Philippians 3:1-3
date : June 28, 2020
1.Finally, my brothers, rejoice in the Lord! It is no trouble for me to write the same things to you again, and it is a safeguard for you. 2.Watch out for those dogs, those men who do evil, those mutilators of the flesh. 3.For it is we who are the circumcision, we who worship by the Spirit of God, who glory in Christ Jesus, and who put no confidence in the flesh--
SUMMARY
In today's text, the apostle Paul asks the saints at Philippi to "rejoice." He makes this recommendation because they have good reason to do so. It is because they have a phenomenon that cannot be made by human power. Because they are those who fall under John 1:12-13. : "Yet to all who received him, to those who believed in his name, he gave the right to become children of God-- children born not of natural descent, nor of human decision or a husband's will, but born of God."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빌립보에 있는 성도들에게 “기뻐하라”고 당부한다. 사도가 이런 권면을 하는 것은 그들에게는 그럴만한 이유가 충분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들에게는 인간의 힘으로는 만들어 낼 수 없는 현상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즉 그들은 요한복음 1:12-13절에 해당하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To say, "You have gained such a status that your own efforts cannot achieve" presupposes that people cannot give up their efforts to try to be saved constantly. Such self-help attempts by humans are done in a way that brings out transcendent things through repetitive experiences. Those who do this have the belief that repeated acts that seem noble, pious, and holy will gain spiritual grace.‘자신의 노력으로써는 획득 할 수 없는 그러한 신분을 얻게 되었다’고 하는 것에는 사람들은 자기노력을 포기하지 못하고 끊임없이 자기 구원을 시도한다는 라는 사실이 전제되어있다. 인간의 이 같은 자기구원시도는 반복적인 경험을 통해서 초월적인 것을 끄집어내는 방식으로 행해진다. 이런 일을 행하는 자들은 고상하고 경건하고 거룩해 보이는 행위들을 반복해서 하다보면 영적인 은혜를 얻을 수 있다는 믿음을 갖고 있다.
But by actually colliding with the wickedness of man, rejected and killed by man, and going back to the world of transcendence, Jesus made it clear that man could not enter the world of transcendence through man’s repeated hard work and that man remains disconnected from the world of transcendence. 그러나 실제로 초월 세계에서 오신 예수님이 인간의 사악함과 충돌하시고 거부당하시고 죽임을 당하시고 다시 초월 세계로 돌아가심으로써 예수님은 인간의 반복적인 수고로운 행위를 통해서는 초월세계에 진입할 수 없다는 것과 그 초월세계와의 단절됨을 분명히 하셨다.
Therefore, in today's text, Paul's exhortation to "rejoice in the Lord" is to show the derivative results of the Holy Spirit's actions, not to demand human acts belonging to man. In order to show the nature of the gospel, the apostle Paul explains the gospel in a way that shows the non-gospel behavior against the gospel, rather than directly explaining what the gospel is. 그러므로 오늘 본문에서 바울 사도가 말한 ‘주 안에서 기뻐하라’고 하는 권면은 성령의 행하심으로 말미암아 발생되는 파생적인 결과를 보여주라고 하는 것이지 인간에게 속한 인간의 행위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이와 같은 복음의 성격을 보여주기 위해 사도바울은 복음이 무엇인지를 직접적으로 설명하기 보다는 복음의 배경이 되는 비복음적 행태를 보여주는 방식으로 복음을 설명하고 있다.
The example is those mutilators of the flesh, which the apostle is paying attention to in today's text. They are a group that says that circumcision, which is outward in the flesh is an essential factor for salvation, and that anyone who has been circumcised has already been saved by it, and these are strolling false teachers who seduce those who listen to what their itching ears want to hear. 그 실례가 오늘 본문에서 사도가 주목하고 있는 ‘손할례당’이다. ‘손할례당’은 ‘할례언약 준수’가 구원의 필수조건임을 말하면서 누구든지 할례를 받았다면 그것으로 이미 구원받았다고 말하는 집단으로서 이들은 귀가 가려워서 자기가 원하는 것을 듣기를 원하는 자들을 미혹하는 떠돌이 거짓 스승들이다.
The apostle harshly accuses them of spreading lies that make people "trust the flesh." They deceive those who long to be saved so that they cannot continually give up the value of human work. The apostle regards the teachings of these men as evils that directly obstruct God's truth and the gospel. 사도는 이들이 사람들로 하여금 ‘육체를 신뢰하게 만드는’ 거짓을 유포한다고 신랄하게 비난한다. 이들은 인간의 행함의 가치를 지속적으로 포기하지 못하도록 구원받기를 갈망하는 자들을 미혹한다. 사도는 이런 자들의 가르침에 대해 하나님의 진리와 복음을 정면으로 훼방하는 행악으로 간주한다.
All the so-called 'exercising the ability' that humans perform are from the body. Such a struggle for salvation in human beings' own ways, such as law observance or moral life, is a kind of self-rescue plan for humans to defend themselves from unknown fears. But individually, the pursuit of righteous acts that can be possessed does not free them from the unknown fears that press them down, but rather enhances them. The apostle Paul defines those mutilators of the flesh as dogs because the things they conduct to protect their values by themselves resemble the attributes of a "dog wandering the streets without its owner." 인간이 행하는 모든 소위 ‘실력발휘’라고 하는 짓거리는 육체에서 나온 것들이다. 율법준수 혹은 도덕적인 삶과 같은 인간들 나름대로의 이 같은 구원받기 위한 분투는 근원을 알 수 없는 공포로부터 자신을 방어하려는 인간들의 일종의 자구책이다. 하지만 개별적으로 ‘소유 가능한 의로운 행위’에 대한 추구는 그들을 내리누르는 미지의 공포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공포를 증강시킨다. 사도 바울이 손할례당을 개라고 규정하는 것은 그들이 스스로의 힘으로 자신의 가치를 지키고자 행하는 짓거리들이 ‘주인 없이 거리를 떠도는 개’의 속성을 닮았기 때문이다.
On the other hand, the apostle Paul introduces the general situation of human beings in his other epistles : “Man is held prisoners by the law and locked up(Gal. 3:23), and when Gentiles, who do not have the law, do by nature things required by the law, they are a law for themselves, even though they do not have the law(Rom. 2:14-15), also, all who are willing to live on by observing the law are under the curse, and all who do not continue to do all that is written in the book of the law are under the curse(Gal. 3:10).” 한편 인간 일반이 처한 보편적인 형편에 대해 바울 사도는 그의 다른 서신에서 다음과 같이 소개한다. : “인간은 율법 아래 매인바 되고 갇혀있으며(갈3:23), 율법 없는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 때는 이 사람은 율법이 없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며(롬2:14-15) 또한 율법을 지키는 것에 의존하여 살려고 하는 자들은 누구나 다 저주아래 있으며 율법책에 기록된 모든 것을 계속하여 행하지 않는 사람은 다 저주 아래에 있다(갈3:10).”
By this, it turned out that the law was not given to save those who wanted to live on the basis of the law-abiding act, but rather to curse and kill the law-abiding people. The law is spiritual, but man is of flesh, sold into bondage to sin(Rom.7:14) So Therefore, humans never have the ability to follow such a spiritual law. Moreover, the law does not end the price of the sin of failing to keep it as a punishment of death, but leaves a curse to be received after death. 이것으로 볼 때, 율법은 율법준수행위에 근거하여 살려고 하는 사람들을 살리기 위해 주어진 법이 아니라 오히려 율법준수자들을 저주하고 죽이기 위해서 주어진 법이라는 것이 드러났다. 율법은 신령하지만 인간은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려있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간에게는 그처럼 신령한 법을 결코 준행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롬7:14). 더욱이 율법은 그것을 지키지 못한 죄에 대한 대가를 죽음이라는 형벌로써 끝내는 것이 아니라 죽음 후에 받을 저주를 남겨둔다.
The problem, however, is that knowing this fact does not escape the law-abiding act. This is because the irresistible fear inside human beings is constantly driving humans into law-abiding acts. 그러나 문제는 이 사실을 아는 그것이 율법준수라는 행위에서 벗어나게 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는 불가항력적인 인간 내부의 두려움이 끊임없이 인간을 율법준수 행위로 몰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In spite of human circumstances, if one teaches that superficial circumcision in the flesh saves the one who gets circumcised, he is against the gospel, and this is a sin blaspheming against the Holy Spirit. However, the gospel reveals the true meaning of the gospel by disclosing the evilness of this falseness. 인간이 처한 형편이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누군가가 육체에 행하는 표면적인 할례가 인간을 구원한다고 가르친다면 그는 복음을 대적하는 것이며 이것은 성령을 훼방하는 죄를 짓는 것이다. 그런데 복음은 바로 이런 거짓 복음의 악함을 드러내면서 복음의 그 참된 의미를 밝힌다.
After all, this is what the gospel says. : There is no way for man to escape the curse of the law by himself. Man is thoroughly helpless, incompetent, and impossible with the law. Man is nothing and nothing but the dead, at any moment, in any situation, in any matter. Therefore, the one who completes the circumcision covenant is separate from the existing human. 결국, 복음이 말하는 바는 이것이다. : 인간에게는 자력으로 율법의 저주에서 벗어날 길은 도무지 없다. 인간은 율법을 상대로 철저하게 무력하고 무능하며 불가능하다. 인간은 그 어떤 순간에도, 그 어떤 상황에서도, 그 어떤 사안에 대해서도, 아무것도 아닌 존재이며 죽은 자들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할례언약의 완성자가 따로 계신다.
“In him you were also circumcised, in the putting off of the sinful nature, not with a circumcision done by the hands of men but with the circumcision done by Christ, having been buried with him in baptism and raised with him through your faith in the power of God, who raised him from the dead(Col.2:11-12).” “또 그 안에서 너희가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으니 곧 육적 몸을 벗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할례니라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한 바 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골2:11-12)”
Therefore, the completion of the circumcision covenant in the Lord's people is when they are buried with Jesus who has already fulfilled the covenant(Rom.6:4). Then the Holy Spirit informs them about the status of the saints in the cross, which is that those who have already died with Christ do not have to be obliged to obey God's law for their individual salvation. The scars left by the death of the cross by Jesus make any righteousness that his people want to own individually useless. 그러므로 주님의 백성에게서 할례언약이 완성되는 것은 그 언약을 이미 성취하신 예수님과 더불어 그들이 장사될 때이다(롬6:4). 그럴 때, 성령님은 십자가 안에 있는 성도의 신분에 대해서 그들에게 알려주시는데 그것은 이미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자들은 자신들의 개별적인 구원을 위하여 하나님의 법을 지킬 의무를 질 필요가 없다고 하는 것이다. 예수님이 십자가 죽음으로써 남긴 상처자국은 자기 백성들이 개별적으로 소유하고자 하는 그 어떤 의로움도 쓸모없는 것으로 만들어 버린다.
There is nothing that a saint can possess but the scar of the cross left by Jesus. The scar is revealed by the Holy Spirit in a way that the dog-like attempt to overcome the unknown fear inside him with ethical and moral achievements achieved by his own efforts is becoming excrement day by day and escaping from them. For the saints, this is a pleasure. It is the relationship connected to the Lord that is the basis for this phenomenon. 성도가 소유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이 예수님이 남기신 십자가의 흉터 외에는 없다. 그 흉터는 자기 노력으로 성취한 윤리적, 도덕적 성과를 가지고 자신 내부의 미지의 공포를 극복하려는 그 개 같은 시도가 날마다 배설물이 되어 자신들에게서 빠져나가고 있음을 성령에 의해 통보받는 방식으로 드러난다. 성도들에게는 이것이 즐거운 일이 된다. 이런 현상의 근거가 되는 것이 주님과 연결된 관계성이다.
On the other hand, this is what the Lord will say to those who are willing to come to the Lord with their righteousness earned through their own labor, while their relationship with the Lord is cut off : “Many will say to me on that day, 'Lord, Lord, did we not prophesy in your name, and in your name drive out demons and perform many miracles?' Then I will tell them plainly, 'I never knew you. Away from me, you evildoers!'(Mat. 7:22-23)” 한편, 주님과의 관계는 단절된 채로, 자기의 수고로 획득한 자기 의를 들고서 주님께 나아오겠다는 자들에 대해 주님께서 하실 말씀은 이것이다.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 7:22-23)”
In the past, the apostle Paul were no different from those mutilators of the flesh, who put confidence in the flesh. But now he confesses that such a attribute like a dog wandering the streets is excreted as feces from him. This is his capacity for pleasure. The saints no longer have to defend their fears with their own goodness. Because they were buried with Jesus Christ through baptism into death. Therefore they only boast of Christ Jesus and put no confidence in the flesh. 바울 사도 역시 과거에 손할례당과 조금도 다를 바 없이 자기육체를 신뢰하는 자였다. 하지만 이제 그에게서는 떠돌이 개 같은 그러한 속성이 배설물이 되어 빠져나오고 있음을 고백한다. 이것이 그에게는 기쁨을 발생시키는 능력이다. 성도는 자기에게 찾아오는 공포에 대해서 더 이상 자기의 선함으로 방어에 나설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미 예수님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예수님과 함께 자신을 장례치루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리스도 예수만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않는다.
-이근호
할례 언약은 '죽은 자와의 결별'이다. 이는 곧 '옛 나'와 '새로운 나'의 결별이다. '새로운 나'는 예수님처럼 이 세상에 뿜어내는 지옥의 세력 속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그 세력에서 벗어남을 늘 확인한다. 할례(=세례), 곧 결별의 효과다.